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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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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백정미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20주년에 부쳐 "본 재판정은 이 판결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 제도하에 희생당한 여성들을 기리려고 한다. 본 재판정은 살아남아 산산이 부서진 삶을 재건하고 공포와 수치를 이기고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생존자들의 강건함과 위엄을 인지한다.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여성들은 이름 없는 영웅이다." - 2001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 최종판결문 중에서 이 글은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이름 없는 영웅들, 그들은 바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의 식민지 또는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아시아 각국에서 시작된 피해자의 증언과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인권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나도록 가해국인 일본 정부는 해결을 위한 조치를 하지 않고 있었다. 2020년 올해는 '피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이라는 슬로건으로 2000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초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를 중심으로 한 논란이 불거진 시점에서, 20년 전 아시아 모두의 시민운동이 되었던 2000년 여성법정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늘의 별이 된 피해자들, 지금도 여성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피해생존자들, 이들과 연대하며 폭력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전 세계에서 노력하는 지지그룹들의 변함없는 전진을 위해 2000년 여성법정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시간 2000년 12월 2000년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학순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활동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였다. 동시에 세계 각국에서 내전과 전쟁으로 인한 폭력과 국가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이 국제적 문제로 등장해 ‘위안부’ 문제와 함께 주목을 받았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세기의 어두운 과거와 직면하고 새로운 21세기를 열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특별한 시간으로 다가온 2000년, 아시아 각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 지원단체들은 2000년 여성법정을 기획하고 준비했다. 2000년 여성법정의 목적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우선 전 세계인의 분노를 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피해생존자들의 소망은 정당하고 그 소망에 응답할 의무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고와 르완다에서 전범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 책임의 시효가 국제법적으로 이미 지났다 하더라도 민간법정을 통한 책임자처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립하고자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민간법정의 형식을 차용한 세계시민을 향한 피해자들의 외침이고 운동이요, 세계언론을 향한 메시지였다. 2000년 여성법정은 비록 법적 강제력이 없는 민간법정이었지만, 인권 법정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첫째, 세계의 어느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피해국은 증거를 통해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둘째 그에 따른 가해자들의 형사책임을 묻는 형사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셋째 이를 판단하는 판사단은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법학자와 연구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2000년 여성법정의 내용과 형식 모두 실제 법정에 맞게 만들어가야 했다. 이런 결의를 바탕으로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했다. 사진2.2000년 여성법정 공식 로고(출처 왐(WAM) 유튜브 화면 캡처).PNG 한국과 아시아 시민 모두의 운동 2000년 여성법정은 가해국인 일본, 피해국인 한국,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의 피해생존자와 시민단체들, 그리고 미국, 영국, 코스타리카 등 9개국 국제자문위원들이 실행위원회가 되어 주최하고, 피해생존자 64명과 한국 참가자 200여 명을 포함해 1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민간법정이었다. 1998년부터 3년간 준비하면서 공동대표 단체인 한국의 정대협과 일본의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필리핀 아센트(ASCENT)가 중심이 되어 1998년부터 3년간 법정 개최를 준비하면서 9개 법정참가국의 국제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각국 검사단을 포함해 국제검사단을 구성했다. 여기에 참여한 핵심인력만 40여 명이 넘었다. 국제실행위원회와 검사단에 더해 유고 전범재판과 르완다 전범재판에서 활동해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판사단과 고문단, 전문가 증인단까지 배치된 매머드급 구성이었다. 실무자들은 법정 개최에 앞서 서울과 도쿄, 마닐라, 타이페이, 뉴욕 등을 순회하면서 8차에 걸친 국제실행위원회, 3차에 걸친 국제검사단 회의, 국제법률자문단 회의, 판사단 회의 등을 열었다. 정대협이 사무국을 맡은 한국위원회는 50여 명 규모로 조직되어 2년 동안 11차례의 모임을 열었고, 2000년 여성법정의 크고 작은 안건들을 처리하는 최고결정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정대협의 실무인력은 총괄책임자인 필자와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스태프 3명이 전부였다. 일에 비해 부족한 인력을 감당하기 위해 공동대표와 실행위원, 연구자들로 구성된 한국 검사단은 각자 맡은 일을 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헌신적으로 일했던 실행위원들과 전문가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충실히 임무를 다했다. 자원활동가들 역시 큰 힘이 되었는데, 특히 기독교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모인 자원활동가들이 2000년 여성법정의 재정 마련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 동시통역, 문화제 진행, 영상 및 사진 촬영 등 전문적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6개 지역에서의 문화제와 전국 11개 대학들과의 대학생 모의법정 개최, 전국적으로 200여 명에 달하는 참가단 모집 등으로 인해 1인 10역을 맡아 업무를 진행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부족한 재정이나 부족한 인력을 탓하지 않고, 남의 일이라고 미루지 않으며 2000년 여성법정을 완수하기 위해 한마음이 되었다. 죽더라도 2000년 여성법정은 끝내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모두에게 부담은 매우 컸고, 모두가 일종의 사명감으로 뭉쳐있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2000년 여성법정은 한국과 아시아 시민 모두의 운동이 되었다. 만 3년 동안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만만치도 순탄치도 않았다. 공동대표 단체들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문가들을 모으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일반 시민을 결집시키며, 법정을 홍보하고, 법정 개최에 필요한 재정을 만드는 일을 했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의 활동가들은 그 책임감이 커서 모든 과정을 한 발자국 앞서서 세심하게 살피고, 다른 나라들이 따라올 수 있는 인적이고 물적인 기반을 만들어야 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라는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유엔 인권위원회 등 국제기구 활동을 하면서 세계적인 흐름을 파악해두고, 세계 각지의 전문가들과 선이 닿아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침묵을 깬 이름 없는 영웅, 아시아 피해생존자들의 연대 2000년 12월 7일 도쿄의 겨울은 스산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바로 옆에 위치한 구단회관 대회의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천여 명의 사람들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모여들었다. 법정 개최 하루 전날 도착한 한국 대표단 일행 중 ‘위안부’ 피해생존자 21명도 각자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한복을 정성스레 갖춰입고 행사장에 입장했다. 남과 북, 중국과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등에서 피해생존자들 6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흥분 반, 긴장 반으로 자리한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하자, 무대의 조명이 켜지면서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들의 인사말이 있었다. 뒤를 이어 2000년 여성법정의 로고를 새긴 깃발이 단상에 올라왔다. 태양과 꽃과 촛불과 눈이 그려져 있는 네 가지의 상징물은 2000년 여성법정의 목적을 잘 보여주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희망 하나로 버텨온 10년의 시간, 여성 인권을 위해 매진해온 전 세계의 여성을 상징하는 꽃, 2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아시아 각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꺼뜨리지 않은 촛불, 역사의 정의를 밝히고자 또렷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눈. 네 가지 상징이 어우러진 2000년 여성법정 깃발이 퇴장하자 단상의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지고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의 사진이 하나 둘 등장했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서 흰색 한복을 입은 강혜숙 교수의 살풀이 춤이 시작되었다. 해방 후 50년이 넘도록 침묵을 강요당한 채 사라져간 피해자들이 자신의 영정 사진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 같았다. 사진 사이를 돌며 추는 춤은 돌아가신 분들의 원혼을 불러모으는 치유의 춤사위였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후 현장에 있던 피해생존자들은 제각기 꽃을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 먼저 가신 분들의 사진 앞에서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길게 이어졌다. 64여 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시간이 지난 50여 년의 세월만큼이야 길었겠는가? 개막식이 끝나자 4박 5일 동안 남과 북, 중국과 필리핀, 대만과 말레이시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기소가 이어졌고, 35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증언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은 경우는 영상으로 증언을 대신했지만, 대부분은 직접 법정에 참석하여 증언했다. 중국 기소 당시 피해생존자 량리화는 증언을 하다 당시 고통이 되살아났는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치더니 쓰러졌다. 장내가 술렁거렸고 앰뷸런스가 출동해 생존자를 들것에 싣고 나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2000년 12월 12일 판결은 약식 판결로 대신되었고, 1년 후인 2001년 12월 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판결이 이루어졌다. 가브리엘 맥도날드 판사 등 4명의 판사단이 250페이지에 걸친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판사단은 판결에서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하는 강간과 성노예에 관한 죄를 적용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고 강간을 당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면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비롯해 기소된 8인 모두에게 유죄를 인정했다. 히로히토 유죄 판결!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피해생존자들은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면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판사단은 최종판결에 참석한 각국 피해생존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면서 앞으로 나오게 하고 판결문을 안겨주었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비록 법적으로 책임자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판사단에 의한 책임자처벌 판결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서린 한을 조금이라도 녹게 하는 시간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에 참석한 피해생존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른 피해자들을 보고 피해자들만의 공감대로 교류하면서 서로 진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참여한 지지그룹들로부터 진심어린 환대를 받으면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진정한 형제애와 자매애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오늘, 이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16명이 생존해있다. 이분들의 나이는 90대가 넘었다. 법정 이후 20년 동안 피해자 가운데 스스로 인권운동가로 자리매김한 분들이 계실 정도로 피해당사자의 운동이 발전하였다. 평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으로 귀감이 된 고 김복동 할머니와 90이 넘은 연세에도 일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로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이제 더는 피해자로 남아있지 않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발로 뛰는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찾은 것이다. 이렇게 피해자들은 한 발자국씩 앞을 향해 나가고 있다. 누군가의 지원을 받는 피해자로 남아있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여성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앞장서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 공동기소와 최종판결 2000년 여성법정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국가에 의한 법적 강제력에서 오지 않았다. 국제검사단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원하는 세계시민의 요구에 의해서 법정의 권위가 부여된다고 말했다. 판사단과 국제검사단은 각국 검사단에게 엄격하게 자료와 증거를 요청했다. 이들은 이미 유고전범재판 등에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 여성법정이 역사적인 법정이 되기를 기대했다. 한국위원회는 2000년 여성법정의 성격을 인권 법정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아시아에 맞는 법정의 형식을 고민하는 동시에, 역사적인 법정이 될 2000년 여성법정에서 남북 공동검사단을 구성하여 공동으로 기소할 것을 북에 제안했다. 남과 북이 직접 소통할 창구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일본에서 소통을 맡아서 양쪽을 오가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은 정대협이, 북한은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사무국 역할을 했는데, 북한은 국제실행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3년 동안 남과 북의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가해국 일본 정부와 일본군을 기소하기 위한 공동기소문을 작성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인 남과 북은 2000년 여성법정 기소장 낭독의 첫 번째 순서를 담당했다. 피해자 증언도 남북의 균형을 고려해서 북은 박영심 할머니, 남은 김복동 할머니가 나섰다. 남북검사단은 박영심 할머니가 고향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남경과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로 끌려갔던 경로를 추적해나갔다. 1944년 전쟁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은 ‘위안부’ 피해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한국 측 증인으로는 김복동 할머니 등이 나서면서 일본군의 이동 경로와 피해자들의 이동 경로를 맞춰나갔고, 국제법에 의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추궁했다. 남북공동기소장의 내용은 강제연행 과정, 위안소 내에서의 범죄, 해방 후 범죄 등의 순서로 진행되면서 마지막에 법률 적용에 대한 논고로 마무리되었다. 남북 공동검사단은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목을 들어 히로히토 천황과 도죠 히데끼 등 8인을 기소하였다. 남북검사단은 공동기소를 위해 2000년 여성법정 개막 3일 전 도쿄에서 만났다. 그동안 준비해왔던 기소 내용을 맞춰보고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는데, 남과 북이 기본적으로 접근 방향이 달라 서로 난감해했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과연 공동기소가 가능할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어진 기소 시간 3시간에 맞춰 발표 내용과 역할을 분담했다. 북은 북일수교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강조한 반면, 한국은 피해자 증거에 근거해 기소 내용과 형식을 강조하였다. 남북 공동기소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남북이 하나가 된 가장 강력한 연대였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강제동원 문제, 일본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에 관한 한 남북은 적극적으로 협력해왔고 상호 방문을 하기도 했다. 2000년 여성법정이 1993년 남측의 여성들이 북을 방문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계승하여 여성 중심의 통일운동이 이루어진 셈이다. 남북 공동기소는 민중의 힘으로, 50여 년 동안 지연되었던 정의를 남북이 함께 앞당기는 기회가 되었다. 그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민간차원의 활동도 함께 위축되어 예전과 같은 연대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 기억할 사람들, 마쓰이 야요리와 윤정옥 2000년 여성법정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윤정옥 선생과 마쓰이 야요리 선생이 아니었다면 단연코 성사될 수 없었던 법정이었다. 마쓰이 선생은 필자가 1998년 4월 유엔 인권위원회 참석차 신혜수 선생과 스위스에 가 있을 때,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그해 4월에 열리는 아시아연대회의에서 2000년 여성법정 개최를 제안하겠다고 했다. 그는 긴 머리에 언제나 어깨에 가죽으로 된 큰 서류 가방을 메고 다녔고, 그 가방에는 움직이는 사무실처럼 온갖 서류가 가득 차 있었다. 마쓰이 선생은 열정이 넘치는 여성운동가이며 저널리스트이며 연구자였다. 그는 아사히 신문사 기자로 재직 중일 때 우연히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위안부’ 문제를 일본 시민사회에 소개했고, 여성폭력문제를 다루는 바우넷 재팬을 설립하기도 했다. 마쓰이 선생의 문제 인식은 언제나 선명했다. 일본인인 자신이 ‘위안부’ 문제에 전념하는 이유는 가해국 일본이 제대로 역사를 직면해야만 보편적인 일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일본인으로서 전쟁범죄에 관해 히로히토 천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일본 도쿄 한복판, 야스쿠니 신사 옆에 있는 구단회관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초청하여 천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자신을 내어놓는 파격적이고 위험한 일이었다. 마쓰이 선생이 일본 우익으로부터 받을 테러의 위협은 법정 당시 구단회관을 둘러싼 고성과 차량시위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실제로 2000년 여성법정 이후 마쓰이 선생은 일본 내에서 매국노 1호로 찍혔고 우익들이 직장과 집으로 찾아와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두려움에 용기로 맞선 마쓰이 선생은 안타깝게도 2000년 여성법정을 마무리하고 200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가 암에 걸린 이유가 2000년 여성법정에 쏟아부은 열정이 그의 육체를 태웠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가 이별 여행을 떠나기 전,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자매애를 쌓은 김윤옥 대표가 정대협을 대표하여 도쿄로 찾아가 공로패를 전달했다. 이때 마쓰이 선생은 그 어느 상패보다 정대협에서 받은 공로패가 값지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그가 진정 고마워했던 것은 부끄러운 자신의 조국 일본 정부를 향한 싸움에 끝까지 함께한 정대협의 자매애였다. 나는 지금도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마쓰이 선생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인다. 일본에 마쓰이 선생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윤정옥 선생이 있었다. 윤정옥 선생은 ‘위안부’ 문제를 한국 사회에 처음 알린 장본인이었다. 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윤정옥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또래 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본인도 학교에서 정신대로 자원하라는 강요를 받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했다고 한다. 그 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조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88년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위안부’ 관련 답사 보고를 하였고 1990년 정대협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윤정옥 선생은 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책임감으로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2000년 여성법정을 추동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정옥 선생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따른 사죄와 배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당시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2000년 여성법정 이후 베트남전에서 발생한 여성 폭력으로 이어져갔다. 시간과 열정,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모두 불태운 선배들이 없었다면 이 일을 상상할 수나 있었겠는가? 참 고맙고 감사하다.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이름 없는 영웅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참여가 없었다면 이 운동은 지금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열정과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1세대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이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국내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재능을 기부한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없었더라면 이 운동은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2000년 여성법정은 씨줄과 날줄이 촘촘하게 얽히듯 피해자들과 운동가들, 전문가들과 지지그룹들, 그리고 시민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법정 운동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는 문제 해결을 바라는 피해자들의 소망이 정당하며, 다시는 이 같은 피해가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세계적인 공감이 있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사진3.일본 천황에 대한 유죄판결과, 위안부 제도에 대해 일본의 국가 책임이 있다는 판결 후 단상에 올라가 기뻐하는 각국의 '위안부'피해자들(사진제공 바우락).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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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NHK의 프로그램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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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ETV2001시리즈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2001년 1월에 방송된 NHK 방송 ETV2001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는 21세기를 맞이해 20세기에 일어난 전쟁과 무력 분쟁을 '인도(人道)에 반한 죄'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하고 전쟁이 없는 미래를 구축하는 방법을 고찰하는 내용의 4회 시리즈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이 시리즈의 데스크를 담당했다. 당시 NHK의 자회사인 NHK 엔터프라이즈(이하 NEP)에서 아시아 각국의 활동가와 시민단체들이 주최하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하여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2개의 제안이 나왔다. 한편 NHK 유럽 총 지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Vichy) 정부 하에서 발생한 전쟁 범죄와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 포로 학살 실태,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생한 아파르트헤이트 범죄를 취재하자는 2개의 방송 제안을 보내왔다. NEP와 NHK 유럽 총 지국으로부터 받은 제안을 결합해 4편짜리 시리즈를 만들 수 있겠다는 나가타 총괄 프로듀서(이하 CP)의 아이디어로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가 기획되었다. 그 중 개찬(改竄,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일부러 고침)이 이루어진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제2회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다. 이 편은 정치인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NHK 임원들에 의해 무참하게 내용이 조작되고 말았다. 이에 우리의 취재에 협력했던 2000년 여성법정 주최 단체 중 하나인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일본 여성 네트워크)이 NHK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재판으로 이어졌다. 1회차와 4회차 방송은 NHK 유럽 총 지국이 취재하고 NHK 본사의 스태프가 제작하였으며 2회차와 3회차는 NEP를 통해 방송 제작 회사 '다큐멘터리 재팬(이하 DJ)'에 제작을 재위탁했다. 따라서 실제로 개찬된 제2회를 취재 및 촬영하고 편집한 것은 DJ였다. 제2회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jpeg NHK 본사가 작업을 맡게 되다 2000년 12월에 도쿄 구단(九段)회관에서 열린 여성법정에서는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을 했다. 이는 법정이라는 형태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을 명백히 밝히는 것으로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방송은 이러한 현장을 DJ가 취재 및 촬영하고, 편집한 VTR 영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면서 게스트들이 여성법정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으로 기획되었다. 여성법정이 열리자 NHK와 일본의 민영 방송들이 뉴스로 법정 소식을 보도하였고, 해외의 미디어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때 일본의 우익 단체가 NHK 뉴스에 "NHK가 왜 저런 편향된 시도를 뉴스로 내보내느냐"면서 항의했다. 그 때문인지 NHK의 요시오카 교양 프로그램 부장은 이 방송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일반적으로 NEP를 통해 재위탁하여 제작한 방송을 NHK 본사의 부장이 도중에 검토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 방송에서는 요시오카 부장이 2001년 1월 19일 DJ에 직접 가서 시사회를 열었다. 요시오카 부장은 "방송과 법정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며 편집 수정을 요구했다. 요시오카 부장은 방송 후 우익 단체로부터 비판받을 것을 우려해 'NHK는 여성법정과 거리를 유지하며 객관적으로 방송했다'고 반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 '여성법정과의 거리두기'를 위해 스튜디오 촬영을 일부 추가하거나 역사적인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 영상을 사용하여 러셀 법정을 소개하는 VTR을 제작하는 등 여러 가지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요시오카 부장은 24일의 2회차 시사회에서도 "법정과의 거리감이 지난 번과 다를 바 없이 너무 가깝다"며 OK 사인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NHK 본사가 DJ로부터 촬영물을 받아, 직접 편집 작업을 하게 되었다. 난리가 난 정치인들 NHK의 예산안이 가타야마 총무 대신에게 제출된 2001년 1월 25일,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라는 자민당 의원 연맹의 나카가와 쇼이치 회장이 해외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다. NHK 국회 담당 직원들이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예산안 설명회를 시작하자 일부러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우익 단체 관계자가 의원 연맹 소속의 국회의원을 찾아가 "NHK가 이런 프로그램을 방송하려고 하고 있다"며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방송을 언급했다. 그 결과, 의원 연맹인들 사이에서 "NHK가 편향된 프로그램을 방송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난리가 났다. 당시 NHK에서 국회를 담당했던 노지마 국장이 말하길, 담당 직원이 당시 의원 연맹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후루야 케이지 의원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 소속 의원들이 작년 12월에 열린 '2000년 여성법정'을 화제로 삼고 있다", "NHK가 이 법정을 방송에서 특집으로 구상 중에 있다는 말도 들리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예산 설명 때 반드시 화제가 될 것이니 제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이후 재판에 제출한 '진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국회의원의 말에 따라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를 담당하는 국장이 방송 시사회에 참여하다 1월 26일에 NHK 방송 총 국장, 방송 제작 국장 등이 모여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특집 방송의 편집 방침을 확인하는 시사회를 진행했다. 국회 담당인 노지마 국장도 여기에 참석하였다. 참고로 국회를 담당하는 종합 기획실과 방송을 담당하는 방송 총국(보도국 및 방송 제작국)은 완전히 다른 조직이다. 노지마 국장은 보도국의 정치부 기자 출신이긴 하지만, 국회 담당 부서 소속이므로 원래는 방송 현장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노지마 국장은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이가》가) 정치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어 어떠한 프로그램인지 파악하고 싶다"며 시사회에 참여했다. 또한 "방송 도중에 우쓰미 아이코라는 연구자가 법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으니 법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연구자의 인터뷰를 삽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방송 편집에 관여했다. 이때 요시오카 부장은 "이러한 방송의 설정이 불공평하고 부당한 것은 아니다. 빨간 색을 쓰니까 검은 색도 쓰자는 식의 밸런스를 맞추는 방법은 아마추어 같은 설정이라서 싫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노지마 국장은 "이런 미묘한 문제는 반대 측 입장도 나와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협의 끝에 법정에 비판적인 주장을 펼치던 니혼(日本)대학 소속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인터뷰를 추가로 촬영하게 되었다. 이 시사회를 통해 협의한 편집 방침에 방송 총 국장, 방송 제작 국장, 그리고 노지마 담당 국장이 모두 합의했다. 교양 담당 부장이 OK 사인을 하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와의 인터뷰 촬영, 스튜디오 장면 추가 수록 등의 작업을 하고 있던 1월 27일, 우익 단체인 유신 정당 심뿌(維新政党・新風) 회원들이 항의하기 위해 NHK에 찾아왔다. 그들은 "어째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방송하느냐!"면서 방송 중지를 요구했다. 도쿄 시부야에 있는 NHK 방송 센터 정문 현관(동쪽 입구)에서 시청자 센터 담당자가 "객관적인 프로그램을 방송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대응에 나섰다. 이때 6대의 선전차에 올라탄 우익 단체 회원들이 서쪽 현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안내데스크에서 나가타 CP에게 전화를 걸어 "나가타는 지금 당장 내려오라"고 요구했다. 나가타 CP가 이를 거부하자 전투복을 입은 30명 정도의 우익단체 관계자가 방송 센터 내부에 난입했다. 하지만 NHK 방송 센터는 요새처럼 거대한 건물이어서 외부 출입자들은 교양 프로그램부로 가는 길을 알 수 없다. 우익 단체 관계자들은 1층 식당 근처까지 들어왔지만,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에 NHK 경비원들이 달려와 그들을 진압했다. 그들은 "지금부터 나가타의 집에 갈 것이다"라며 협박조의 막말을 내뱉고는 돌아갔다. 나가타 CP는 자택 근처의 경찰에 전화를 걸어 가족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1월 27일과 28일 이틀동안 작업을 계속해, 28일 밤에 44분 분량의 프로그램 편집본이 완성되었고 요시오카 부장의 OK 사인을 받았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베타캠이라는 카메라로 촬영해온 테이프를 직접 편집기로 편집한 후 그대로 방송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국이 제작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은 우선 타임 코드가 들어간 베타 테이프로 가편집하고, 그 데이터를 읽은 후 ECS(에디트 컨트롤 시스템)으로 영상 기술 스태프가 방송용 D3 테이프를 만든다. 이러한 작업이 29일 아침부터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ECS가 끝나면 기본적으로 편집 내용은 수정이 불가능하며, 테이프를 이용해서 더빙 작업(내레이션, 더빙, 음악, 효과음 등을 삽입하는 작업)이나 영상 자막을 삽입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이때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ECS 작업을 1월 29일에 하고 방송 당일인 1월 30일에 더빙과 자막 삽입 작업을 동시 병행하는 매우 타이트한 스케줄로 작업이 진행됐다. 아베 관방부장관과의 면회 1월 29일 저녁, 후반 편집 작업을 하던 중 이토 프로그램 제작 국장에게 호출되어 국장실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국장실에 들어가자 이토 국장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쓰오 방송 총 국장과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이 외근에서 돌아오니 그 때 시사회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시사회를 시작했다. 내가 내레이션을 읽고 나가타 CP가 자막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던 중 마쓰오 국장과 노지마 국장이 돌아와 "다시 처음부터 보자."며 시사회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 시사회는 요시오카 부장의 OK 사인을 받은 44분 분량의 완성본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시사회가 단순히 프로그램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초췌한 얼굴로 방에 들어오는 마쓰오 국장의 모습을 보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시사회가 끝나자 노지마 국장이 돌연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내용이야!"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 노지마 국장과 마쓰오 국장은 시사회 직전에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副)장관과 면담을 했다. 아베 관방부장관은 관방장관에 취임할 때까지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NHK가 공표한 자료에는 이때 마쓰오 국장이 아베 관방부장관에게 '일부에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 본 프로그램이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해 매일 밤 4연속 시리즈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이에 대해 아베 관방부장관은 '위안부' 문제의 어려움이나 역사 인식 문제와 외교 간의 관련성 등에 대한 지론을 말한 다음 이러한 문제를 공영방송인 NHK에서 다룬다면 공평하고 공정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마쓰오 국장은 아베 관방부장관의 지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의견을 말하지 않은 채 다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으니 실제 프로그램을 봐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베 관방부장관은 이때의 면담에 대해 추후 본인의 홈페이지에 "이 모의재판의 방청을 희망하는 자는 '법정의 취지에 찬성한다'라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관계자들로부터 NHK가 주최자 측의 의도대로 (2000년 여성법정을) 보도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들어와 사실관계를 듣게 되었다. 그 결과, (2000년 여성법정에는) 재판관 역할과 검사 역할은 있어도 변호사 역할은 마련되지 않는 등 명백히 편향된 내용임을 알게 되어 나는 NHK가 특히 지켜야 하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도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2001년 1월 29일 시사회 때 요시오카 부장의 대본에 써있던 후루야 아베 아라이라는 메모.jpeg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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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박옥선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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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1980년대, 재일한국인들의 지문 날인 거부 운동과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 등으로 인해 한일관계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일본은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점차 우경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를 부정하려는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를 노골화 하였다. 이에 국내에서는 일본에 대항하는 민족정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는 가요 '독도는 우리 땅'의 대유행과 함께 독립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과거사 논의도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90년 1월 4일~24일, 한겨레 신문에 윤정옥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가 4회에 걸쳐 연재되면서 한국 사회는 점차 '위안부'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故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많은 피해자가 증언과 피해 신고에 나서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민간은 물론이고 정부 차원의 여러 지원책이 시행되었고, 대부분 힘겨웠던 피해자들의 삶은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국내에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들의 상황은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해외 거주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알았다 하더라도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자 등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국내에서 고조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에 비해 해외 거주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94년부터 해외 거주 피해자들에 대한 실태 조사가 시작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수십 명의 피해자가 밝혀지게 되었고, 이 중에는 박옥선 할머니도 있었다. 박옥선 할머니는 192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큰오빠가 보증을 잘못 서 집이 빚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버지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어지게 되었다. 1941년 할머니가 18살이었던 해 할머니는 중국에 있는 방직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따라나섰다가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해방 직후 '위안소'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지만 '위안부' 피해를 당했다는 자괴감에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후 피난 도중 흑룡강성 목릉 근방에 있는 마을에 들렀다가 홀아비를 만나 혼인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2001년도에 할머니와 같은 마을에 살던 조선족 동포가 한국에 시집을 오게 됐다. 이때 이 동포가 자신이 살던 마을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제보를 하게 되면서 박옥선 할머니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할머니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할머니는 얼마 후 한 방송국의 도움으로 한국에 있는 남동생과 조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가족을 찾은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6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할머니는 서울의 동생 집과 조카 집을 오가며 생활하다 2002년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박옥선 할머니는 온화하고 배려심이 많다. 평소에는 아주 점잖은 편이지만 노래를 너무 좋아하셔서 음악만 나오면 빼는 법 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시곤 한다. 한번은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자기소개 대신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박옥선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박옥선이는 노래도 못하면서, 아무 데서나 노래를 해! 밥 먹는 데서도 하고…."라면서 가끔 박옥선 할머니에게 쏠리는 관심을 못마땅해하신다. 이에 반해 속리산 할머니는 "옛날에 이 형님(박옥선)이 노래를 잘한다고 사람들이 찾아와 노래를 해달라고 아주 사정을 했어. 참 잘했어!"라면서 박옥선 할머니의 노래 실력을 인정해주신다. 두 분의 말이 상반되지만 속리산 할머니의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 왜냐하면 박옥선 할머니는 2014년 KBS 특집방송에 출연해 아리랑을 무반주로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든 이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박옥선의 방 박옥선 할머니의 방 전경 한편 박옥선 할머니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 사이에서 아주 깔끔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이는 할머니의 청결한 성격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할머니의 성격은 할머니의 방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복도를 기준으로 오른쪽 두 번째 방이다. 할머니의 방을 기준으로 오른쪽 방은 일전에 소개한 속리산 할머니 방이고 건너편 방은 2017년 돌아가신 故 김군자 할머니의 방이다. 할머니의 방은 한마디로 깔끔 그 자체이다.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셨지만, 워낙 깔끔한 성격 탓에 불필요한 물건이나 중복되는 물건이 거의 없다. 4평 남짓한 할머니의 방에는 오른편부터 장롱 2개와 4단으로 된 플라스틱 수납장이 있었고 방 끝에는 역시 후원받은 돌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번은 할머니의 옷을 챙기기 위해 이 장롱을 열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안의 옷들과 소품들이 계절별로 오와 열을 정확히 맞추고 있어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정리정돈이 훌륭해서 놀란 것도 있지만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가 이렇게 정리정돈을 잘 할 수 있으셨다는 게 더 놀라웠다. 또 돌침대 위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창틀에는 할머니의 손주들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의 왼편에는 직사각형의 큰 액자가 세로로 걸려있었고 그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모자이크처럼 붙여져 있었다. 사실 이렇게 큰 액자 안에 여러 사진을 붙여놓는 이 방식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공통된 양식이다. 근래에 나눔의 집에 오신 할머니들을 제외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했던 할머니들은 모두 이와 같은 양식의 액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이유가 궁금해 나름대로 알아보았지만 아직 그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액자 왼편에는 전신거울이 벽에 걸려있었고 또 그 왼쪽으로 나무로 된 3단 수납장이 있었다. 수납장 위에는 전화기와 TV 그리고 TV 리모컨이 있긴 했지만, 방에서 TV를 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다. 박옥선의 전신거울과 보행기 박옥선의 방 02 거울과 보행기 (1).jpg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보통 방보다는 거실에 많이 앉아 계셨다. 내 생각에 할머니가 사람들을 워낙 좋아하시다 보니 혼자 있는 것보다 여럿이 있는 걸 선호해서 그러시는 거 같았다. 가끔 강일출 할머니가 소란을 피우시거나 화를 내시면 할머니는 조용히 보행기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이럴 경우 보통 침대 앞까지 보행기를 끌고 가 앉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할머니는 좀 다르셨다. 할머니의 물건은 항상 지정된 자리가 정해져 있다. 이 중 보행기의 자리는 전신거울이 있는 벽이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방에 들어갈 때는 전신거울 앞에 보행기를 두고 침대까지는 보행기 없이 걸어가신다. 가끔 할머니를 따라 들어가 "할머니 여기서 TV 볼까?"하고 리모컨을 가져와 TV를 틀었던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이내 다시 리모컨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으셨다. 또 방 이곳저곳을 주시하다가 지정된 자리를 이탈한 물건이나 각도가 틀어진 물건들이 보이면 기어이 다시 제 위치로 정돈하시고 돌아오신다. 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위안소'에서의 피해가 할머니의 이런 성격을 만들었다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피해가 없어도 깔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많기 때문에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속리산 할머니는 박옥선 할머니의 방을 보면 "참 이 형님은 방 청소도 깨끗하게 잘하고, 살림도 잘하고 다 잘 해!"라며 박옥선 할머니를 자주 치켜세워 주셨다. 박옥선의 파손된 장롱과 파란 보관상자 박옥선의 방 03 파손된 장롱과 보관상자 (1).jpg 하지만 이 같이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던 방도 2019년 초 건강 악화로 인해 할머니가 침상 생활을 하시게 되자 주인 없는 방처럼 되었다. 여기에 증축공사 사태까지 더해지면서 할머니의 방에 남아있던 물건조차 모두 망가지게 되었다. 「이옥선 할머니의 방」편에서 언급하였지만, 당시 나눔의 집 운영진들은 생활관을 증축한다는 명분으로 할머니의 방을 무단으로 치우고 장마철에 할머니의 물건들을 야외 주차장에 쌓아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린 장맛비에 이 물건들은 모두 훼손되었는데,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박옥선 할머니의 물건들이다. 특히 나무 수납장은 아예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다. 이옥선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의 경우 아직 인지가 또렷하신 편이고 또 방에 대한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 훼손된 방을 복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박옥선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어 방에 대한 기억을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또 이상하게 다른 할머니에 비해 할머니의 방에 대한 자료는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여기에 물건들마저 훼손되어 아직 박옥선 할머니의 방만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2020년 할머니의 방 훼손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공익제보와 코로나 19로 인해 몇 달간 나눔의 집에서는 더 이상 증언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나눔의 집이 생겨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이로 인해 할머니들에게도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할머니들에게서 '위안부', '위안소', '사죄와 배상' 등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에 "바람 쐬러 가자",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속리산에 가야 한다.", "왜 저 할머니 말은 다 들어주고 내 말은 안 들어 주냐?"는 등의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변화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주 큰 충격이었다. 이 같은 변화를 보면서 왜 할머니들이 피해자화 되었는지 그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점은 할머니는 어제(과거)와 내일(미래)보다 오늘(지금)을 위해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아마 과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옥선 할머니를 포함한 나눔의 집 할머니들 또한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이 과거를 붙잡고 계신 이유도 현재를 위해서다. 만약 할머니들이 과거를 붙잡지 않고도 현재와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걸 아셨다면, 또 그래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있었다면 과연 할머니들은 인생의 마지막 한 꼭지를 나눔의 집에서 보내셨을까? 박옥선 할머니의 방을 제외한 이옥선 할머니, 속리산 할머니, 故 김군자 할머니,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모두 복원되었다. 그리고 멀지 않아 박옥선 할머니의 방도 복원될 것이다. 할머니들의 방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평범한 방이다. 하지만 그 방 주인들의 삶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평범한 방. 나는 이 방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할머니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 그 시각이 할머니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할머니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하고자 한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 아래 사진은 2018년 10월 중 촬영한 박옥선 할머니의 방이다. 방 복원에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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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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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전시 성폭력을 처벌하지 않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를 세상에 알리고, 이 제도에 대해 일본군 상부층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으며,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민중 법정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은 아시아 전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일본은 군의 위안소 설치에 관해 국내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금지했고, 일본군이 패전 당시 '위안부' 제도, 위안소 설치 및 운영과 관련된 자료를 소각했기 때문에 그 실태는 계속 은폐되어 왔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몇몇 증거가 제출되었지만, BC급 전범 재판에서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 여성들의 피해는 다뤄지지 않았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일본 정부와 군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가 드러나고 일본 정부의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1991년 8월 14일,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가 공개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각국의 피해 여성이 잇따라 증언을 하였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제소한 10건 중 8건에 대해 사실이 인정되었지만, 국가무답책(国家無答責) 법리나 제소 기간, 양국 간 평화조약 등으로 인해 이미 해결되었다는 판결이 내려져 원고의 청구는 모두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많은 증언과 자료가 모였고 '위안부' 제도가 성노예 제도이며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전쟁 범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聖戦)'으로 포장하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도리어 '위안부' 문제를 다시금 은폐·봉쇄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교육'과 '언론보도'에 개입해 국민의 의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역사수정주의자와 우익 단체는 '위안부' 지원 활동을 반대하는 로비와 공격을 계속하고 피해자에 대한 비방과 함께 거짓 정보를 지속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암살자'들에게 분연히 맞서기 시작한 사람들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며 전시 성폭력의 근절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호소해온 일본과 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고 대다수가 고령이 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남은 수명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다가 결국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위안부' 피해자 지원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짚어가면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이케다 에리코(사진 제공 이케다 에리코).jpeg NHK PD로서 다루었던 '위안부' 문제 나는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NHK에서 37년간 PD로서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베트남 반전운동과 일본의 전공투(全學共鬪會議, 1968~1969년에 걸쳐 일본의 각 대학에서 학부와 당파를 뛰어넘어 결성된 연합체-옮긴이)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미디어가 권력을 가진 이들의 관점에서 시민과 학생, 여성들의 운동을 보도하고 있다는 데 의문과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미디어를 내부에서부터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NHK에 입사해 전쟁, 여성, 인권을 주제로 여러 편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같은 전쟁을 다룬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미군의 오키나와 대공습이나 원폭 피해, 전쟁 이후 중국에 잔류한 고아들의 문제 등 일본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제작할 때는 취재 활동이 고달픈 것 외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나 주민 학살 등 일본의 가해 사실에 초점을 맞췄을 때는 방송이 되기까지 많은 방해에 부딪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을 때였다. 나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NHK에서 1991년 6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ETV 2001 시리즈》를 비롯해 8편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방송을 제작했다. 하지만 우익의 반대가 커지면서 1997년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프로그램의 기획은 전부 무산되었다. 결국 '위안부' 문제는 '난징대학살',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과 함께 NHK에서는 암묵적인 '3대 금기' 아이템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NHK의 PD로서 방송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한편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위안부' 피해자와 전 일본 군인들의 증언 등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시민단체 '비디오 학교'를 조직했고, 중국 산시성(山西省) 출신 성폭력 피해자의 재판을 지원하는 단체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여성 선배 저널리스트로서 존경해 왔던 전 아사히신문 기자이자 여성 인권 활동가 마쓰이 야요리 씨로부터 2000년 여성법정의 주최 단체인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활동에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1998년부터는 2000년 여성법정의 국제 실행 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제안부터 실현까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제기한 재판에서 연이어 패소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가해국인 일본의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마쓰이 야요리 씨가 여성들이 모여 민중법정을 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아이디어는 일본 여성들, 각국의 피해자와 이들을 지원하는 이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법정은 2000년 12월에 개최되었지만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국제 실행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국제 실행 위원회에서는 수석 검사와 판사단을 선출하는 한편 '법정 헌장'의 초안도 마련했다. 또한 각국 검사단은 기소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실행 위원회는 각국의 기소장 작성을 위한 조사와 영상 기록, 번역 등의 작업을 진행했고 일본군 관련 자료 수집과 전문가 증인 선정에 나섰다. 동영상 기록 팀의 일원이었던 나는 법정에 증거로 제출할 증언 영상을 제작하거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를 찾는 등 NHK에서의 근무 시간 이외의 대부분을 2000년 여성법정 준비에 바쳤다. 법정 실행 위원들은 끼니도 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혼신을 다해 2년 반 동안 법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직장생활과 2000년 여성법정 활동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일에 동시에 매달리면서 쌓인 과로 탓일까, 나는 법정 개정을 2개월 앞두고 지주막하 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바로 병가를 썼고 다행히도 3개월 후에는 후유증 없이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병가 기간 중 시작된 2000년 여성법정에 비디오 학교의 멤버로 참가하여 12월 8일~10일의 본 법정과 12일의 예비 판결을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2000년 12월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8일에 본 법정이 개정했다. 8개국의 '위안부' 피해자 64명을 비롯해 세계 30개국에서 연일 1,000여 명의 방청객이 모여들었다. 증언대에서 몸소 겪은 처참한 피해를 증언한 각국의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얼마나 여성의 존엄을 짓밟고 인생 자체를 파괴했는지에 대해 호소했다. 피해자 64명의 증언은 한결같이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또한 직접 법정에 나와 자신이 전장에서 강간을 저지른 사실과 위안소에 드나들었던 사실을 증언한 두 명의 전 일본군 병사에게는 방청석으로부터 감사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여성법정에서는 각국의 검사단이 제출한 기소장과 방대한 양의 증거 자료, 전문가 증인에 의한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의 책임론 등을 토대로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책임자 10명이 기소되었다. 그리고 2000년 12월 12일 '히로히토 천황 유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제도로 인해 가해진 피해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는 판결 개요가 내려졌을 때 법정 전체가 큰 감동에 휩싸였다. 피해 여성들은 "정의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았다"면서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법정 개최 준비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실행위원회 멤버들도 '세계사에 남을 역사적인 순간이다'라는 벅찬 감격과 자랑스러움이 가슴 가득히 차올라 법정을 준비하며 쌓인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2000년 여성법정 언론보도에 정치권이 개입하다 2000년 여성법정의 성공적 마무리 이후 우리는 법정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언론보도라는 문제에 맞닥뜨렸다.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하러 온 해외 미디어는 95개사로, 취재 신청자 수는 200여 명에 달했고 법정 소식은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일본 내에서도 48개 언론사에서 105명의 기자가 취재차 왔으나 대부분의 기사 논조가 소극적이었고 법정 소식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요미우리 신문은 법정 소식을 단 한 줄도 싣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히로히토 천황 유죄' 판결을 주요 기사로 다룬 곳은 아사히 신문과 홋카이도 신문 2개사뿐이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2000년 여성법정을 무참하게 날조해 보도한 'NHK 프로그램 개찬(改竄,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일부러 고침) 사건'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단계에서부터 취재해 왔던 NHK의 프로그램 《ETV 2001》에서 2001년 1월 30일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통해 여성법정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 방송에서는 법정 기소장의 내용도, 판결문의 내용도 전하지 않았을뿐더러 법정에 선 피해자들의 증언은 극히 일부만 소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취한 이 방송은 '지리멸렬'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바우넷 재팬과 마쓰이 야요리 대표는 바로 NHK에 항의하며 질문지를 보냈지만,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NHK와 관련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나도 이 소송의 원고로 합류했었다. NHK를 상대로 한 소송의 도쿄 고등법원 제2심의 결심 전인 2005년 1월, NHK 소속직원의 내부고발이 있었다. 2000년 여성법정 당시《ETV 2001》 프로그램의 데스크였던 나가이 사토루가 방송 직전에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장관 등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 날조되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나가이 사토루의 내부고발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몰고 왔다. 도쿄 고등법원은 결심 기일을 늦췄고 NHK 관계자에 대한 증인 심문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정치권이 방송에 개입한 실태가 차례차례 까발려졌다. 2007년에 도쿄 고등법원은 피고 NHK가 정치인의 의도를 헤아려 방송을 조작했다며 원고에게 200만 엔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2008년, 대법원은 방송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원고 패소라는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NHK는 지금까지도 정치권의 방송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검증 프로그램도 제작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NHK 프로그램 개찬 사건'의 전말이다.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사실과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묻으려는 정치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의 압력에 굴복한 미디어의 민낯이 세상에 드러난, 일본 패전 이후의 방송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다. 자율 규제와 자숙, '촌탁(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으로,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한다'는 뜻의 일본어 표현, 편집자 주) 문화'가 만연한 작금의 일본 미디어의 쇠락을 암시하는 불길한 조짐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와 언론뿐 아니라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사람들도 공포에 떨게 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날조된 가짜 프로그램에 의해 2000년 여성법정이 부당하게 낮은 평가를 받거나 오해를 받을 우려도 있었다. 나는 《ETV2001》방송을 본 후 2000년 여성법정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을 한시라도 빨리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병가를 마치고 막 복귀한 직후였기 때문에 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고된 업무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방을 빌리고, 편집기를 구입하여 비디오 학교의 동료들과 합숙하며 2000년 여성법정을 알리는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들어갔다. 2개월 후 《침묵의 역사를 찢고 –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6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완성했고 2000년 여성법정 보고 집회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판도 제작해 국내외 시청자를 늘려왔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계몽 활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도쿄에서 여성법정이 개최된 이듬해인 2001년 12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2시간에 걸쳐 낭독된 최종 판결문에는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지도자 10명에 대한 유죄와 일본 정부의 국가 책임이 명기되었다. 이 판결문은 곧바로 일본 정부와 궁내청으로 전달되었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NHK와 미디어의 지금을 생각하는 모임'에서는, 도쿄 시부야에 있는 NHK방송센터 현관 앞에서 NHK에 대한 비판과 항의를 계속하고 있다.jpeg 전시 성폭력 근절을 향한 투쟁과 평화의 실현 2000년 여성법정이 국제 사회와 국제법에 끼친 영향은 컸고,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나 국제형사재판소(ICC)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2000년 여성법정 이후 전시 성폭력 책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민중 법정의 시도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2010년 3월에는 과테말라와 미얀마에서 민중 법정이 열렸고, 구 유고슬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도 지속적으로 가해자 처벌 방안을 모색했다. 콩고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치료하고 지원해 온 의사 드니 무퀘게, 이라크에서 IS의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당시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나디아 무라드가 201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실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책임자 처벌의 움직임이 전세계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2000년 여성법정은 세계 각국에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와 가해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고 이를 공개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이라는 새로운 바람 역시 불러일으켰다. "망각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저항이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민중의 무기다". 이러한 말처럼 전시 성폭력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시 성폭력 피해와 가해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세워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하 WAM)'은 그 같은 성과 중 하나였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하는 동안 실행위원회 구성원들은 "언젠가 일본에 '위안부'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라는 의견을 모았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자료관 개설은 '꿈 같은 이야기'였으나, 엄청난 속도로 여성법정 이후 5년 만인 2005년에 WAM을 개관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법정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마쓰이 야요리 씨 덕분이었다. 마쓰이 씨는 2002년 여름에 담관암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의 전 재산과 소장 자료를 '위안부' 자료관을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해 12월에 별세했다. 마쓰이 씨의 유지를 받아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자료관 건설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각지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을 시찰하면서 어떠한 박물관을 만들 것인지 의논하고, 자금을 모으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나는 건설 위원장을 맡아 또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WAM은 2000년 여성법정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위안부' 제도 관련 자료를 수집, 공개, 보존하는 장소로서 2005년 8월에 도쿄에 개관했다. 그리고 매년 아시아 국가별로 개최하는 '위안부' 특별전을 거듭하면서 아시아 전역에 걸친 피해자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 일본군 측의 공문서,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 등을 대부분 수집할 수 있었다. 약 5년 전부터는 아카이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방대한 양의 자료를 정리하고 추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WAM과 같은 '위안부' 자료관은 한국 각지와 필리핀, 중국, 대만에 잇따라 세워지고 있다. 2016년 11월 7일 왐(WAM)을 방문한 이용수가 왐 사무국 직원과 운영위원들, 미국 CWJC('위안부'정의연대) 멤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 이케다 에리코).jpeg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2000년 여성법정으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위안부' 피해생존자도, 가해 증언을 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도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피해자가 원하는 사실의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 개인에 대한 배상 등을 실현하도록 요구하고, 동시에 이러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기록과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할 책무가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인과 미디어의 발언은 엄중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또한 장기간 집권한 아베 정권 하에서 '위안부' 문제가 한일의 내셔널리즘이 대립하는 정치 문제로 다뤄진 것도 큰 문제이다.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피해자들을 강제로 연행했는지 여부에만 초점을 두거나, 폭언과 거짓 정보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자체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민족, 여성, 계급에 대한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일본 사회의 실상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선 몇 세기동안 성매매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패전 이후 공창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성매매 산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남성들의 성매매가 빈번히 발생하는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다. '위안부'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의식과 성행동을 돌아보지 않은 일본 남성과 그러한 남성들을 허용해온 일본 여성들 속에서 지속된 일본의 성 풍토 자체도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에게 던져진 과제는 크고 무겁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미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지 반 세기가 지나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사망하였고, 그 유지를 이은 다음 세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와 연대하면서 '기억의 암살자'들의 공격에 대항하고 '위안부'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위안부'를 부정하는 '기억의 암살자'들과의 투쟁은 곧, 전쟁으로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파시즘 정권과 그에 동조하는 매스미디어와의 투쟁이기도 하다. 세계의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평화를 실현하고, 전시 성폭력의 근절을 위해 노력하는 지속적인 투쟁이 오늘날의 일본을 변화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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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NHK의 프로그램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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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의 변경 지시 아베 관방부장관과의 면담이 있고 난 뒤 시사회에 참여한 노지마 국장이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내용이야!"라고 발언한 것이었다. 그 후 요시오카 부장과 마쓰오, 이토, 노지마 국장이 협의에 들어갔다. 나가타 CP는 국장실 앞에 마련된 소파에서 대기하고 나는 후반 작업을 하러 돌아갔다. 협의 중 노지마 국장이 몇 명의 정치인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의 주장에 관해 설명한 내용을 요시오카 부장의 대본에 '아베, 아라이, 후루야'라고 흘려 적혀 있던 메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요시오카 부장이 "도저히 못 해 먹겠으니 그렇게 말할 거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성을 내고 말았다. 요시오카 부장이 '못 해 먹겠다!'며 성을 해버리니 노지마 담당 국장이 변경 내용을 직접 나가타 CP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NHK도 발뺌할 수 없는 사실로 이는 추후 '방송 윤리 및 프로그램 향상 기구(Broadcasting Ethics & Program Improvement Organization, 이하 BPO)'에서도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국회 담당 국장이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바꾸라'며 직접 현장의 프로듀서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시 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의 책임에 대해선 애매하게 처리하라',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인터뷰 분량을 늘려라', '법정에 대한 반대 의견을 더 늘려라', '판결 부분은 코멘트 처리하라' 등이었다. 이때 노지마 국장은 나가타 CP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에 대해 "비즈니스 때문에 '위안부'를 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겠어?"라고 질문했다. 나가타 CP가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며 항변하자 노지마 국장은 "어차피 망가뜨릴 거라면 확실하게 망가뜨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러한 변경 지시에 따라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 편은 최초 기획의도와 달리 무참하게 변질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회상해 보면, 이 개편 지시를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들은 기진맥진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기본적으로 방송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프로그램을 방송에 내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말도 안 되게 변질된 프로그램으로 바뀌고 말겠지만 2000년 여성법정이,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들과 가해 병사들의 증언이 방송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자위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방송 당일, 3분 커트를 지시 방송 당일인 1월 30일, 아침부터 내레이션과 더빙 작업 등이 있었다. 더빙 작업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요시오카 부장이 마쓰오 방송 총 국장의 전화 호출을 받았다. '또 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불안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던 와중에 요시오카 부장이 전화로 나가타 CP에게 "지금부터 하는 말을 메모해라.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을 커트해라."라고 지령을 내렸다. 그 내용은 중국의 완아이화 씨의 증언, 동티모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그리고 가해 병사(전 일본군 병사) 증언 등 3분을 커트하라는 지시였다. 우리가 전날의 부당한 편집 변경 지시를 받아들였던 이유는 여전히 프로그램 속에 '위안부' 피해자들과 가해 병사들의 증언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송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 이 귀중한 증언들마저 없애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지시에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때 나는 나가타 CP에게 두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위안부' 피해자들과 가해 병사들의 증언을 커트한다면 프로그램 본연의 취지를 잃게 된다', 둘째, '그런 일을 한다면 NHK가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나가타 CP에게 "마쓰오 방송 총 국장님에게 지시를 거둬 달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런 내용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요."라고 부탁했다. 나가타 CP는 "맞아, 뭔가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어."라고 대답하며 방송 총 국장실로 향했다. 나는 동시에 일본방송노동조합의 방송 계열 위원장을 맡고 있던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한 상황이니 조합에서도 방송 총 국장에게 생각을 바꾸어 달라고 힘 좀 써줘!"라고 부탁했다. 그 후 스튜디오로 돌아온 요시오카 부장에게 "이런 짓을 하면 세상을 향해 '프로그램이 조작되었다'고 공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요. 큰 문제가 될 거예요, 절대로 안 됩니다."고 말했다. 요시오카 부장은 "나도 알아, 하지만 마쓰오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먹히지 않았다고. '더이상 너희들과 논의할 사항이 아니야'라며 대화하기를 거부했어."라고 답했다. 그 후 나가타 CP도 돌아와 "마쓰오 국장님과 얘기해 봤는데 안 될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나가타 CP에게서 그 때 방송 총 국장실에서 있었던 일화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국장실에는 마쓰오, 이토, 노지마 국장이 있었다. 나가타 CP는 "어째서 가장 중요한 '위안부' 증언과 가해 병사의 증언을 이제 와서 커트하라는 겁니까, 제발 부탁이니 재고해 주십시오. 이대로 진행하면 NHK가 큰일을 당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마쓰오 국장은 "그렇게는 안 돼. 내가 프로그램과 뉴스 책임자야. 내가 책임지면 되잖아.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은 방송에 내보낼 수 없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나가타 CP가 그래도 물고 늘어지자 노지마 국장이 "네가 정말 열심히 하고 성실한 것은 잘 알았어. 하지만 이미 모두 결정된 사항이야."라며 조용히, 그리고 더 이상의 대꾸는 받지 않겠다는 듯한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고 한다. 편집권과 내부적 자유 마쓰오 방송 총 국장이 프로그램 내용의 변경 지시를 업무 명령으로 내릴 수 있었던 근거는 '편집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NHK는 '편집권은 회장에게 있지만, 그 편집권을 방송 총 국장과 나누어 가진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권한은 또다시 프로그램 제작 국장과 보도 국장, 각 부의 부장과 현장의 총괄 프로듀서가 나누어 가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질적으로 미군의 점령 하에 있던 당시 일본신문협회가 '편집권은 경영자에게 있다'고 선언한 이래 일본에서는 그 견해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경영과 편집의 분리'나 '경영에 의한 영향은 당연히 있지만, 구체적인 편집권은 현장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주류이다. NHK는 방송 총 국장을 방송 책임자로 두지만, 실제 여러 프로그램의 최종 결정권은 현장의 총괄 프로듀서가 가지고 있다. 총괄 프로듀서가 OK 사인을 하면 방송으로 내보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내가 편집권을 가지고 있으니 나의 업무 지시에 따르라"는 방송 총 국장의 발언은 현장에서 보기에 얼토당토 않은 소리였지만, '경영자와 방송 총 국장이 편집권을 나누어 가진다'는 NHK의 입장 때문에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다. 노동조합으로부터도 '정보가 없어서 아직 사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바로 움직일 수 없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이때 내부적 자유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지 않는, 양심에 반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행태를 수용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이때 나에게는 데스크로서 '작업을 거부하여 방송에 내보내지 않는다'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우리가 작업을 거부한다면 미완성인 프로그램은 방송에 내보낼 수 없으므로 방송에 펑크가 난다.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는 4회로 편성된 시리즈 프로그램인데, 만약 내가 2회차 편집 작업을 거부한다면 예정된 방송 시각에 전혀 관련없는 방송이 재방송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 분명히 나는 방송 현장에서 쫓겨나 어딘가로 좌천될 것이 분명했다. 대본 등에 문제가 없는지 미리 검토하는 고사실이나 자료실, 방송문화 연구소 등 NHK에는 좌천 후보지가 매우 많다. 실제로 나는 나중에 연구소로 좌천을 당하게 된다. 다만 문제는 내가 좌천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최종 단계에서 프로그램 제작을 함께한 3명의 디렉터에게도 악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프로그램에 관여한 모든 스태프에게도 영향이 갈 수 있었고, 이러한 점들을 결정에 고려해야만 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사건의 이면에 정치인들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때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상부의 3분 커트 지시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프로그램을 방송의 예비 테이프를 제작하는 ECS 작업으로 3분간의 영상을 커트했다. 사실 더빙 작업과 음향 처리가 끝난 프로그램을 커트하면 음성은 더이상 손을 댈 수 없다. 영상은 커트로 인해 잘려 나가니 알 수 없지만, 소리는 도중에 자를 경우 정리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연결되는 부분과의 음이 맞지 않아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송 퀄리티를 생각할 때 완성된 프로그램의 영상을 커트하는 것은 맞지 않지만, 결국 43분 분량으로 완성된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 편을 억지로 40분 분량으로 편집하여 방송했다. 통상 44분인 프로그램을 그날만 40분으로 방송하는 것은 방송사고이며, 이는 '이 프로그램은 조작되었습니다'라고 외부에 공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결과, 프로그램 제작에 협력해 주었던 2000년 여성법정의 주최 단체 중 하나인 바우넷 재팬이 NHK와 NEP, DJ에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2015년 1월 14일 아침뉴스에서 NHK는 아베 관방부장관과의 면담에 의한 프로그램 내용 변경은 없었다라고 보도했다.jpeg 내부 고발의 경위 게다가 스튜디오에 출연한 여성 연구자가 '방송과 인권 등 권리에 관한 위원회(Broadcast and Human Rights/Other Related Rights Committee, 이하 BRC)'에 "중요 코멘트 부분이 전부 삭제된 데다가 맥락 없이 편집되어 연구자로서의 신뢰성을 훼손당했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BRC는 '(NHK는) 민원인의 인격권에 대해 배려를 하지 않아 방송 윤리를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결정을 내렸다. 2004년 3월에는 도쿄 지방 법원에서 바우넷 재팬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DJ에게만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NHK 관계자(요시오카 부장, 나가타 CP 외)는 모두 침묵하였고, 정치인에 의한 압력 문제는 재판의 쟁점이 되지 않았다. 원고인 바우넷 재팬도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해 추궁할 수 없던 가운데 1심의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나는 방송 현장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고 있었지만, 노지마 국장과 마쓰오 국장이 시사회 직전에 어떤 정치인과 면담을 하고 어떠한 대화를 나눴는지에 관해 당시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 언젠가는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가 책임을 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교에서 중국 근현대사, 중일관계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역사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이 이렇게 끔찍한 상황에 직면했는데도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 직후 이러한 속마음을 숨기고 NHK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사실은 점점 명확해졌지만, 그 사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는 여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또한 내가 참여했었던 NHK 스페셜 대형 프로젝트(《사대 문명 (四大文明) 》, 《일본인 머나먼 여행(日本人はるかな旅)》, 《문명의 길(文明の道)》 등)의 업무를 매듭짓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좀처럼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 없었다. 그리고 재판은 10년 정도 이어질 거라고 들었기 때문에 재판의 최종 단계에서 내가 경험한 사실과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증언하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2004년 말, 도쿄 고등 법원 재판에서 곧 결심 공판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대법원은 문서로만 심의를 하므로 내가 증언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공익 제보자 보호법이라는 법률이 통과되어 NHK에도 준법감시 추진실에 내부 제보 창구가 마련되었다. 나는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2004년 12월 NHK 내부 제보 창구에 이 문제를 고발했다. 나의 내부 고발 사실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자 도쿄 고등 법원의 결심이 연기됐고 나를 비롯한 나가타, 노지마, 마쓰오, 이토가 도쿄 고등법원에서 증언하게 되었다. 2001년 1월 19일 NHK 저녁 뉴스1.jpeg 2001년 1월 19일 NHK 저녁 뉴스2.jpeg 조직 방어에 분주한 NHK 내가 내부 고발한 사실이 미디어에서 크게 다뤄지자, NHK는 조직 방어를 위해 아베 관방부장관과 나카가와 의원 등의 정치인들을 지키려고 했다. NHK는 이를 위해 뉴스를 이용했다. NHK 뉴스는 오랜 전통과 경험을 거쳐 어떠한 사실도 객관적으로 보도한다는 방침을 확립해 왔다. 예를 들어 NHK에 관한 뉴스라 하더라도 "~한 내용을 NHK가 발표했습니다."라든지, "NHK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하는 것이 NHK 뉴스의 화법이다. 2005년 1월 19일 NHK는 내가 내부 고발한 내용에 대해 준법감시 추진실이 조사했다며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내용을 보도한 그날 밤의 NHK 뉴스는 평소의 화법과 달랐다. 내가 주장한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NHK의 준법감시 추진실이 조사한 결과 그러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담당 데스크의 주장은 허위 주장입니다."라고 보도됐다. 객관적 보도라는 방침을 위해 'NHK가 이렇게 발표했습니다.'라는 화법을 써야 하는데도, '담당 데스크의 주장은 허위였다'고 보도한 것이다. 어떤 미디어 연구자는 이 보도에 대해 'NHK 뉴스가 사망한 날'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NHK 임원들은 조직 방어를 위해 아베 관방부장관과 나카가와 의원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보도국에 이러한 뉴스를 발신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그런 뉴스가 나오고 말았는지 제대로 검증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 당시 NHK 뉴스는 "NHK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사실이 아닌 것을 NHK의 일개 CP가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것이 되는군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마쓰오 국장이 "그러한 사실이 아닌 내용을 발설한 저널리스트는 내가 용납할 수 없다."고 발언한 내용까지 내보냈다. NHK의 CP라는 말단 관리직에 지나지 않는 내게 NHK가 뉴스를 사용하여 공격하고 명예를 훼손한 것이다. 그때 내가 BPO에 '말도 안 되는 뉴스가 방송되어 나의 인격권이 침해당했다'는 민원을 제기했더라면 재판과는 별개의 싸움이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방송 문화 연구소로 인사이동 내부 고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방송 현장에서 계속 일을 했다. 하지만 이듬해 관리직 정기 인사이동에서 방송 문화 연구소로 이동이 결정되었다. 에비사와씨가 사임한 후 회장이 된 하시모토라는 기술직 출신의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나의 인사이동에 대해 "나가이는 중국 전문가이니 중국 미디어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연구소로 이동시켰습니다. 적재적소의 인사이동입니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때 방송 문화 연구소에는 외신부 기자 출신의 중국 미디어 전문가가 이미 있었다. 나는 보복성 인사이동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내게 있어 연구소는 좋아하는 조사와 연구를 할 수 있는 괜찮은 좌천지였고, 이곳에서 2년 정도를 보냈다. 하지만 국차장급 위치에 있으면서 도쿄 고등 법원에서 진실을 말한 나가타 씨에 대한 보복성 인사이동은 가혹했다. NHK에서 국차장급이라 하면 국장이나 이사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으며 퇴직 후에는 NHK 관련 회사의 임원 자리가 보장되는 주요 간부로, '조직 방어를 첫 번째 행동 지침으로 삼아야 하며 재판에서 절대로 조직에 불리한 사실을 증언해서는 안 된다'라는 불문율이 있다. 하지만, 나가타 씨는 도쿄 고등 법원에서 진실을 증언했다. NHK 임원진이 보기에 '국차장급이나 되는 사람이 법원에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나가타 씨는 NHK 자료실로 좌천되었다. NHK에는 좌천 후보지가 여러 곳 있다. 자료실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계시는 직원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위성편집장을 맡고 있던 나가타 씨에게 자료실은 혹독한 곳이었다. 하지만 나가타 씨와 나는 "예견했던 결말이니 서로 힘내자"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연구소로 이동한 후 교양 프로그램부 선배가 연구소의 새로운 소장으로 취임하고, 직전까지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편성 관계자가 차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차장은 솔직한 성격의 인물로 "나가이 씨, 미안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문제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어줘."라는 말을 했다. NHK 임원진은 동료 간의 정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나를 제어하려고 했고 이는 나에게 매우 슬픈 일이었으나 나 역시 각오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내부 고발이 나 나름의 책임을 지는 방법이었지만, 프로그램 조작을 허용한 결과 2000년 여성법정에서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들과 주최한 NPO 분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이것은 되돌릴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는 사실이다. 도쿄 고등 법원의 결정과 BPO의 결정 2007년 1월, 도쿄 고등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국회의원의 발언을) 필요 이상으로 무겁게 받아들였고, 그 의도를 헤아려 가능한 한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시사회에 참여하였으며 그 결과 원하는 형태로 만들고자 본 건의 프로그램에 대해 직접 지시하고 수정을 반복해 편집 수정이 이루어진 점이 인정된다."며 NHK 등에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미나미 도시후미 재판장은 NHK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했다. "NHK는 헌법을 통해 존중받고 보장된 편집의 권한을 남용 또는 일탈하여 변경을 꾀하였으며 자주성, 독립성을 내용으로 하는 편집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2008년 6월의 대법원 판결에서는 사실관계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다루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방송하는지는) 방송 사업자의 자립적 판단에 맡겨져 있다', '(취재 협력자의) 기대와 신뢰는 원칙적으로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NHK의 편집의 자유가 우위에 있다고 인정했다. 대법원은 그 시대의 권력에 빌붙는 판결만 내리는 경향이 있으며 당시에는 재판원 제도 도입을 앞두고 NHK에 여러 가지로 협력을 받아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따라서 애초에 대법원은 NHK에 유리한 판결을 내릴 것으로 예측했었다. 재판이 끝나고 이 사건에 대해 BPO가 심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4월, BPO의 방송 윤리 검증 위원회가 결정을 내렸다. "프로그램 방송 전에 있었던 NHK의 프로그램 제작 부문의 간부 관리직과 정부 고위 관직 및 여당의 유력 정치인 간의 면담과 이를 전후로 한 편집 수정 지시 및 국회 담당 국장이 제작 현장 책임자에게 편집 수정을 지시한 점과 같은 일련의 행동은 공영방송인 NHK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주성 및 자립성을 위협하고 NHK에 기대와 신뢰를 보내는 시청자들에게 중대한 의심을 품게 만드는 행위였다고 판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 BPO는 NHK에 ① 방송 및 제작 부문과 국회 대책 부문의 분리, ② 내부적 자유에 대한 논의 ③ 시청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BPO의 요구 중 가장 중요한 점은 'NHK가 프로그램 조작 사건을 스스로 검증하여 시청자에게 공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NHK는 지금까지도 이 요구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NHK 프로그램 개찬 사건과 그 이후 NHK의 대응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NHK에 대한 시청자의 신뢰와 기대를 배신하는 사건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