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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돌이킬 수 없는 변신과 점거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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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 운동과 평화의 소녀상 “운동에 참여하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않는다.”[1] 2011년 12월 14일 1000회 수요시위에서 제막된 평화의 소녀상이 올해로 열 돌을 맞이한다. 1000회 수요시위 이후 1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전국적으로 다양한 장소에 만들어졌다. KBS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소녀상 지도[2]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세운 전국의 평화의 소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백서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일본군‘위안부’ 역사관도 없는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은 그간 피해자와 시민활동가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왔다. 대구의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경우, 개관을 위해 시 정부에 지원과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도움을 받지 못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역사관까지는 건립할 수 없더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자 하는 열망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열망들이 모인 곳이 아마도 소녀상 지도 속의 장소들일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기 위해 뜻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기금을 모으고, 시민들이 모이기 쉬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찾고, 소녀상을 설치하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설치 당시에는 소녀상 설치를 위해 몸싸움을 불사한 활동가들이 있었다. 1000회 수요시위를 기념하며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이미 세워지기 이전부터 일본의 반대가 있었고,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파기된 지금도 소녀상 지킴이들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소녀상 설치를 위해 몸싸움을 불사했던 활동가들과 소녀상 지킴이들이 지킨 것은 단순히 사람 모양을 한 동상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평화의 소녀상이 만들어내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요시위가 열리기 이전의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20년간 수요시위 때 일주일에 한 번 피해생존자, 활동가, 시민들이 모였다 해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일본군‘위안부’를 기리고 기억하는 평화의 소녀상(혹은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 거리를 점거하고 목소리를 냈던 운동을 영구히 지속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수요일이 아닌 날에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도 반드시 소녀상을 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매우 불편해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아,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 장소구나’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떠올릴 것이다. 이제 수요시위는 ‘일본대사관 앞’이라기보다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서 이루어진다. 수요일 12시에 잠깐 점거당하고 금방 일상의 거리로 돌아가곤 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2길 22라는 장소는 평화의 소녀상이 점거하게 되었다. 전국에 만들어진 평화의 소녀상이 단지 설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행동의 장소가 된다는 점에서 시민들이 주도했던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아큐파이 운동이기도 하다. 식민주의와 언아큐파이(unoccupy) 아큐파이(occupy)는 ‘점령(占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점령기를 생각하면 ‘아큐파이’라는 단어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의 많은 지식인이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얘기해 왔지만, 이와 별개로 식민주의와 ‘식민지 책임’을 인식하는 문제 제기는 드물었다. 이러한 역사 속 일제강점기가 한반도가 점령(occupy)당했던 기억이라면 평화의 소녀상은 이러한 식민주의와 점령에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전국을 넘어 해외의 시민들까지 동참해온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아큐파이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식민주의와 점령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에 대한 요구 역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큐파이(occupy)는 동시에 언아큐파이(unocuupy, 점거해제, 해방)여야 한다는 아큐파이 운동의 역설적 과제[3]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일련의 활동이다. 김세진 씨의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보리, 2018)를 보면 많은 지역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어 낸 일에 한번 놀라게 되고, 평화비를 설치할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았던 노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식민지 시기 경찰서가 있었던 담양 중앙공원에 세워진 소녀상, 1919년 3․1운동의 만세 현장에 세워진 양평의 소녀상, 일본군 주둔지 - 미군 주둔지를 거쳐 시민에게 돌아온 인천의 부평공원에 세워진 소녀상, 식민지시기 강제노동의 현장이었던 광명동굴에 세워진 소녀상 등은 일제강점기 식민주의를 환기하고 역사의 망각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장소들은 일제강점기(occupy)와 식민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아큐파이’(unoccupy)로서 평화의 소녀상을 대면하게 한다. 한편, 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되돌아보게 한다. 가부장제와 가족주의,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로 구성된 교육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을 전제로 키워진 ‘나’의 삶이라는 것은 그 같은 시스템에 점령당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제 속에서 딸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을 받아들여 온 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식민주의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의문이 없었던 나는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유지되는데 기여해온 것과 다름없다. 평화의 소녀상이 이런 나에 대해 다시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면, 어쩌면 내 마음과 머릿속까지 언아큐파이(해방)하는 존재, 나를 구성해 온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평화의 소녀상과 해방된 관객의 정치적 자각과 활동이 지금까지 우리를 구성해 왔던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거역[4]하고 부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해방된 관객과 네트워킹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했던 어효은 씨의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는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의 삶을 살았다.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일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계가 없는 개인적인 시간으로서의 ‘일상’일 것이다. 어효은 씨는 일상으로 돌아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를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묻는다. 그러나 어효은 씨가 돌아갔다고 하는 그 ‘일상’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하기 전의 그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운동의 성과는 정권을 교체하고 바뀐 정권이 합의를 검토하고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에 있지 않다. 운동의 성과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변신[5]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전국에 만들었던/만들고 있는 사람들, 평화의 소녀상에서 함께 했던 세월호 유가족들, 일본 오키나와의 헤노코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기지촌 여성 운동 활동가들, 반전 평화 운동가들이 연대하고, 발언을 듣기 위해 귀를 열고, 문제 제기에 입을 열었다. 이처럼 다양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몸은 그 이전의 몸과 같은 몸이라고 할 수 없다. 구글 검색창에서 ‘소녀상’과 ‘평화비’를 검색해 보면, 이제 적어도 검색된 첫 페이지에는 모두 ‘평화의 소녀상’ 혹은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기사와 페이지가 나온다. 검색 엔진에서조차 평화비나 소녀상이라는 단어는 일본군‘위안부’와 따로 생각할 수 없게 된 단어가 된 것이다. 반세기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말할 수조차 없었던 사회를 구성하는 언어의 질서와 문법(에피스테메)이 이제 겨우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검색 엔진이 가장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운동의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운동한다는 사실,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6] 웹진 <결>에서 인터뷰한 김세진 씨는 각 지역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간에는 네트워크가 없었고,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어 자신이 우연히 네트워킹하는 역할을 맡게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를 보고 가까운 평화비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집회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김세진 씨가 한 일은 단지 ‘소녀상 그림을 그리다’가 아니라, 평화비를 만드는 움직임과 마주하고, 이어주는 일이었다. 한반도에 나비로 표시된 ‘소녀상 지도’를 보면,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위해 활동해 온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위안소 지도’[7]가 떠오른다. 아시아태평양 각지, 일본의 군인이 점령하는 곳마다 만들었던 ‘위안소’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그 ‘위안소’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역사가 기록되는 소녀상(평화비) 지도가 드러내는 것이 단지 ‘지도’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급박하게 진행되는 운동은 사실 변화를 위해 지루하고 긴 시간을 투쟁하는 일이다. 이른바 1987년 이후의 ‘민주화’에 젠더와 인종이 삭제되어 있었음을 꾸준히 문제 제기한 결과 이를 확인하고 감각하는 2019년과 2020년. 평화의 소녀상에서 또 어떤 의제들이 논의될까. 우리는 또 어떻게 바뀌어 갈까. 각주 ^ 고병권, 『점거, 새로운 거버먼트』, 그린비출판사, 2012, 221쪽. ^ KBS데이터저널리즘팀은 2017년 이후 전국 소녀상 지도를 제작하고, 이후 매년 새롭게 세워지는 소녀상을 지도에 업데이트하고 있다. ^ 고병권, 앞의 책, 231쪽. ^ Vicki Sung-yeon Kwon, “The Sonyŏsang Phenomenon: Nationalism and Feminism Surrounding the "Comfort Women" Statue,” Korean Studies 43 (2019): 28. ^ 고병권, 앞의 책, 113쪽. ^ 고병권, 앞의 책, 113쪽. ^ https://wam-peace.org/ianjo/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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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속리산(이옥선)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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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이옥선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 <나눔의 집>에는 이름과 나이가 같은 두 명의 이옥선 할머니가 있다. 외부에서는 '부산 출신 이옥선 할머니'와 '대구 출신 이옥선 할머니'로 불리지만 <나눔의 집>에서는 '이옥선 할머니'(부산)와 '속리산 할머니'(대구)로 불린다. 속리산이 보은에 있는 까닭에 가끔 직원들이 보은 할머니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할머니는 바로 "왜 내가 보은 할머니야! 속리산 할머니지!"라며 역정을 내신다. 대구가 고향이신 할머니가 이처럼 속리산에 애착을 보이시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할머니는 16살에 만주로 끌려가 18살에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일본 패전 직후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방치한 채 부대를 떠나자 갈 곳이 없던 할머니는 위안소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던 중국 할머니들이 위안소로 찾아와 "여기 있으면 큰일 난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라면서 당시 위안소에 있던 이옥선 할머니와 다른 피해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거기에서 4일 정도를 머물렀는데 "그때 그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줘서 참 잘 먹었어." "그 할마시(할머니)들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라며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신다. 그렇게 이름 모를 중국 할머니 집에서 4일간 머무르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조선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조선 큰 애기(처녀)들 나오라"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떠나 신의주로 올 수 있었다. 신의주에 도착한 할머니는 거기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내가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귀환 이후에 당연히 기뻐하는 가족들 또는 일가친척의 이야기가 등장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귀환 이후에 관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굉장히 의외였다 대구에 도착한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매일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로 인해 곤욕을 치렀다. 할머니가 고향에 돌아온 후, 매일 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할머니의 아버지에게 "네 딸은 살아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왜 안 오느냐?", "이 집은 조상 묘를 잘 써서 딸이 살아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는다." 등등의 탄식을 쏟아 냈다고 한다. 마을의 또래 여성들이 모두 끌려갔는데 살아 돌아온 건 할머니뿐이니 동네 사람들의 탄식도 이해는 가지만, 결국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할머니는 부모님 몰래 홀로 고향을 떠났다. 그렇게 무작정 집을 나온 할머니는 영동·옥천을 지나 속리산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서 만난 한 스님의 도움으로 법주사 근처에 거처를 얻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릴 적 국악을 배워 장구와 소리를 아주 잘하시는데, 그것을 알게 된 스님이 속리산에 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소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할머니는 그때부터 속리산을 찾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소리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속리산에 정착하신 할머니는 그 뒤로 70여 년을 속리산과 함께하였다. 이러한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속리산에 대한 할머니의 애착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속리산 이옥선의 방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방 전경(일러스트: 백정미) 평생 속리산에서 사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2018년 가을, 무릎 수술 이후에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나눔의 집>에 오시게 되었다. 그전에도 <나눔의 집>과 왕래가 있었지만 이렇게 거주를 목적으로 오신 것은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오시기 얼마 전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던 故하점연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운영진은 나에게 그 방을 정리해 할머니께 드리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 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입사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던 내 말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故하점연 할머니가 사용하시던 방은 속리산 할머니의 방이 되었다. 이 방은 <나눔의 집> 거실을 지나 복도 오른쪽 첫 번째에 있는데, 크기와 구조는 맞은편 이옥선 할머니의 방과 같다. 속리산 할머니는 갑자기 입주하게 된 데다 후원금으로 할머니들의 개인물품을 구매하지 않는 <나눔의 집>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세간살이라고 할 것이 거의 없다. 방에는 돌침대와 2단 서랍장, TV, 냉장고가 전부인데, 이마저도 모두 故하점연 할머니가 쓰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국민들이 보내온 응원의 메시지와 그림, 편지, 꽃 등이 늘어나면서 할머니의 방도 점차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속리산 이옥선의 냉장고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냉장고(일러스트: 백정미) 할머니의 방은 문을 기준으로 가장 먼 쪽에 창문이 있고 그 아래 돌침대가 놓여있다. 그리고 그 침대 오른편(다리방향)에는 2단 서랍장이 있고, 그 위에 TV가 있다. 또 그 서랍장 맞은편으로 오래된 행거가, 행거 위쪽에는 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냉장고는 할머니의 방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건강에 관심이 많고 누가 좋다고 하는 건 꼭 드셔야 하는 성미이다. 그리고 음식을 저장하는 습관이 있어 냉장고는 항상 갖가지 음식들로 가득 차 있다. 가끔 냉장고 안의 음식이 썩거나 곰팡이가 필 때가 있는데 할머니는 그런 음식들도 잘 버리지 못하게 해 할머니의 냉장고 안은 항상 다채로운 풍경을 간직한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번은 간병인 선생님이 할머니 몰래 냉장고를 정리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 이후 할머니는 만나는 직원마다 붙잡고 멀쩡한 것들을 버렸다며 1주일 넘게 하소연하시기도 했다. 또 할머니는 항상 박카스를 대량으로 구매해 냉장고에 꽉 채워두시고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꺼내주신다. 직원들은 가끔 목이 마르거나 피곤할 때 할머니에게 찾아가 박카스를 한 병씩 얻어 마시곤 한다. 박카스가 떨어지면 퇴촌면까지 나가 몇 박스씩 사와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제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나눔의 집> 공식 사랑방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방(일러스트: 백정미) 속리산 할머니의 방에는 이옥선 할머니 방처럼 추억이 깃든 물건도 사진도 없지만, 그래도 이 방은 <나눔의 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방이다. 비단 박카스 때문만은 아니다. 속리산 할머니는 유머가 있거나 남을 재미있게 하는 특기를 가지신 분은 아니지만 의도치 않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재주가 관상 봐주기와 직원들 짝지어주기다. 먼저 할머니는 보는 사람마다 남녀노소 지위 여하에 상관없이 관상을 봐주시는데, 요청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도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학생이든 얼굴을 한번 훑어보시고는 "귀가 큰 게 오래 살겠다." "코가 오똑한 것이 돈을 많이 벌겠다." 등등의 덕담을 아낌없이 해주신다. 가끔 관상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말씀하실 때도 있는데 아직 겉으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또 항상 결혼하지 않은 직원들을 서로 짝을 지어주려고 하시는데 서로 애인이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단 할머니 눈에 들면 <나눔의 집> 안에서는 커플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진짜 커플이 탄생한 예도 있다. 속리산 할머니의 방에는 볼만한 세간살이도, 이옥선 할머니의 방처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나타내거나 인권운동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그 어떠한 물건도 없지만 나는 <나눔의 집>의 방 중에 이 방을 가장 좋아한다. 이 방에는 피해자가 아닌 이옥선으로 살았던 속리산 할머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0년 2월 갑자기 할머니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방을 떠나 집중치료실에서 생활하시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할머니의 방은 주인 없는 빈방이 되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방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방들은 모두 속리산 할머니의 방처럼 정해진 과정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할머니든 <나눔의 집>에 오게 되면 방이 생기고, 그 방은 할머니의 역사와 추억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 방의 생명은 할머니의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만 이어진다. 할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할머니가 병원이나 집중치료실에 가게 되거나 혹 별세라도 하시게 되면 아무리 많은 추억과 그와 관련된 물품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방은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방이 된다. 항상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속리산 할머니의 방도 결국 할머니가 방을 비우게 되면서 지금은 업무 이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방이 되었다. 이전에는 새로운 할머니로 인해 기존 방이 정리되고 새 주인이 생겨 다시 활기를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 <나눔의 집>에 새로 들어올 할머니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이제 이 방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록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항상 주장하지만, 할머니들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예전에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또 그것을 남들이 알고 있다고 해서 평생을 피해자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넘어 그 이면에 있는 할머니들의 일상과 삶에 관해 관심을 가질 날이 올 것이다. 이에 나는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진 평범한 할머니들의 방을 그대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이 방과 방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개성과 의미를 통해 피해 이후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조명해 보고 싶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 2020년 8월 11일, 속리산 이옥선의 방이 복원되었다. (아래 사진 참조) * 2020년 8월 20일, 복원된 방에서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나눔의 집 직원들이 겉절이를 만들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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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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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혼, 그리고 오키나와 "할머니의 집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고국(故國)에 대해서 할머니는 그리 기쁜 추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이라고 고국보다 나은 추억이 있을까. 나는 또 문득 전후(戰後)에 유령이 되어 떠돌았다는 소문의 '하루에'를 떠올렸고 그의 유골을 고국의 '망향의 동산'에서라도 쉬게 해줄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 1981년 9월3일자 한국일보, 끌려간 사람들 <8> 韓‧日歴史(한‧일 역사)의 彼岸(피안)을 캐는 現地調査(현지조사) - 寃魂(원혼)되어 떠돈다는 挺身隊(정신대)유골 「望郷(망향)의 동산」에 묻어 줄 수 있을지… 윤정옥은 최초의 '위안부' 연구자이다. 위 기사에서 윤정옥이 말하는 할머니는 전후에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 오키나와에 남은 배봉기이다. 배봉기는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 오키나와에서 존재가 확인된 '위안부'피해자였다. 1975년 당시 일본에서 배봉기의 이야기는 실명이 아닌 A씨로 보도되었다. 배봉기는 왜 A라는 이니셜로 자신의 과거를 말해야 했을까?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지상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27년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미국의 통치 하에 있던 오키나와는 1972년이 되어서야 일본 행정구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오키나와에서는 전쟁 때 강제로 끌려왔다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어려운 삶을 이어왔던 조선인 여성 한 명이 불법체류자로 추방된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바로 배봉기의 이야기였다. 배봉기는 불법체류자로 추방되는 것을 피하고자 익명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배봉기를 위한 청원 활동과 신분 보증 등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배봉기는 예외적으로 체류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1980년, 윤정옥은 일본의 입국관리소가 '위안부'였던 여성 A씨에게 특별히 체류허가서를 내주었다는 기사가 실린 1975년 10월 22일자 석간 『류큐신보』를 손에 쥐고 오키나와에 방문했다. 당시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활동을 해온 재일조선인 김수섭, 김현옥이 배봉기를 보살피고 있었다. 당시는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이어간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조총련의 도움을 받는 일본의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간 윤정옥은 정부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정부의 감시를 받았던 경험 때문일까. 윤정옥은 1990년에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 이하 정대협)를 운영할 때, 정부가 주는 보조금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기관을 운영하며 재정적 어려움을 감수하였다. 한편, 일본 사회는 오키나와에서 들려온 배봉기의 이야기를 일본 사회 내의 첫 번째 '위안부' 증언으로 여론화하지 못한 채 김학순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정옥은 배봉기 등을 취재한 기록을 정리해 1990년 한겨레 신문에 4차례에 걸쳐 글을 연재했다. 이를 통해 배봉기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배봉기처럼 오키나와에 끌려와 본명을 찾지 못한 채 죽어간 '하루에' 같은 여성들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이후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을 위한 증언 조사의 시작과 함께 추모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위안부' 문제 가시화 초기에 한국 국회가 주목한 것은 생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하리라. 1991년 10월 24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록에서 처음으로 '위안부'(당시에는 정신대라고 호칭함) 문제가 <정신대문제대책에 관한 청원의견지시의 건>이라는 문건으로 공식 등장했다. 독립기념관에 정신대 희생자위령비를 건립하는 안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애국선열의 시비나 어록에 한하여 건립부지를 허가해 왔던 독립기념관은, 정신대 위령비 건립에 대해서는 부지의 포화 상태를 이유로 불허했다. 이에 대해 문화공보위원회는 추후 일제강점기 희생자 비석을 세울 때 정신대 문제가 포함되어야 된다는 청원의견을 의결했다. 이것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 국회의 첫 번째 기록이다. 죽은 자와 산 자, 진상규명과 추모 공간, 연구와 운동 등 모든 것이 맞물리며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어떻게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첫 번째 '위안부'로 기억하지 못했던 배봉기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75년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의 '복귀 불안'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전쟁 책임의 문제로 배봉기를 기억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전하려 했는가를 기록하고자 한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다 윤정옥이 1981년 한국일보 기사를 통해 배봉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지 10년이 지난 1991년에야 한국 사회는 첫 번째 증언자를 만났다.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피해사실을 증언한 김학순이다. 배봉기는 김학순의 증언이 있던 그해 10월에 숨을 거두었다. 두 피해 여성은 서로 만날 수 없었으나, 정대협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안부도 주고받았다. 배봉기는 긴 삶의 여정 끝에 자신과 같은 체험을 증언으로 승화시킨 용기있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1991년 12월, 김학순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첫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일본 내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법적 배상과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김학순의 등장이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은 획기적인 지도를 발표한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20주년을 되돌아보는 심포지엄에서 오키나와전 당시 오키나와에 설치된 121개의 '위안소'[1] 위치를 표기한 지도를 발표한 것이다. 그림1. 오키나와에 설치된 121개의 ‘위안소’ 위치를 표기한 지도.jpeg 이들이 김학순의 증언 후 불과 1년여 만에 121개의 '위안소'(현재146개소)위치를 지도[2]에 표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을 다룬 증언집들이 일본 본토로 복귀한다는 정치적 '불안감'이 증폭된 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발간되어왔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현사 제9권 오키나와전 기록1』(1971년),『오키나와 현사 제10권 오키나와 전 기록2』 등은 주민의 관점에서 오키나와전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들 속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1992년에 이은 후속 조사에 의해1994년에는 약 130곳의 '위안소'가 지도에 표기되었다. 또 다카자토 스즈요, 고가 노리코, 홍윤신 등이 이어간 증언 조사와 연구를 통해 2020년 현재에는 총 146곳의 '위안소'가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왜 지도였을까? 1992년 당시 지도 작성 및 증언 조사의 중심 멤버였던 가카즈 가츠코는 김학순의 증언 직후 숨을 거둔 배봉기에 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억이 이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배봉기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오키나와 여성들을 움직였다는 것이다.[3] 한국과 일본 내 '위안부' 문제 운동 전개 방식이 피해 당사자의 증언을 동력으로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키나와 여성들은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를 목격한 주변부의 기억들을 운동의 중심에 두었다. 그들은 여전히 오키나와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를, 제2의 배봉기들의 삶이 침해받을 가능성을 염려했다. 좁은 섬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평온한 삶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이 이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피해 목격자의 증언을 찾고, 폭력의 장소였던 '위안소'를 전쟁책임의 소재로 표기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이어졌다. 지도 위의 점들은 전쟁책임의 소재를 목격한 표식이기도 했다. 그 표식 안에 전쟁 당시 침묵했던 자신들의 가해성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녹아 있다. 1992년 이후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본제국에 의한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조선인에 관해서는 가해자라는 문제의식을 구체화했다. 오키나와 '위안소' 지도는 '위안부'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기억의 공간화'로 이뤄낸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 속의 기억을 그림과 향토사로 그려내는 사람들 그렇다면 1992년 당시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이 '위안소' 지도를 그릴 수 있도록 한 오키나와 주민의 증언은 어떤 것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이 '위안부'나 '위안소'를 본 적이 있는지,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지만을 질문하고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목격 증언을 통해 자신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본 풍경,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배경이었던 마을과 학교, 산 등이 어떻게 일본군의 진지로 변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또 어떻게 총력전에 동원되어 어떤 폭력을 경험했는지를 증언했다. 그 가운데 '위안소'에 관해서도 설명하게 되었다. 이때 전혀 의도치 않은 지점에서 '위안소'의 위치를 특정한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오키나와 요미탄촌에서는 주민들에게 자신이 태어난 집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당시 함께 살던 사람들의 상황을 설명해 전쟁피해를 드러내도록 했다. 이 작업을 할 때 일본군이 집을 빼앗아 '위안소'로 삼아버려 살 곳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집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요미탄촌의 각 마을 전시 상황도 및 집 이름 등의 일람표(読谷山村の各字戦時概況図及び屋号等一覧表)』(요미탄촌사편찬위원회, 2002년)는 일본군이 비행장 근처의 마을이나 산악지대에 숙소를 짓고 주민들이 살고 있던 민가를 접수해 '위안소'를 설치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다수의 민가가 군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위안소'로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위안소'라는 공간이 주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하게 한다. 일본군에게 집을 빼앗긴 주민들은 자신들의 전쟁 체험을 증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전시하 감금 상태에 있었던 여성들의 삶도 증언하게 된 것이다. 그림으로 남아있는 '위안소'도 있다. 요미탄촌 기나 마을의 『기나 향토사(喜名誌)』의 편집위원 미야하라 료슈(1924년생)는 자신의 전쟁체험과 함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그 안에는 '위안소'로 사용된 '오키쿠'라는 빨간 기와집을 그린 그림[4]이 있다. 미야하라는 자신의 그림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특공병사(特攻兵)의 숙박소 기나 마에바루의 사탕수수밭 근처에는 요리점 풍의 빨간 기와집이 있었습니다. '오키쿠'라고 불린 이 집은 항공병의 숙소였습니다. 내일의 목숨이란 게 없는 항공병들이 부르는 구슬픈 군가가 매일 밤 흘러나왔습니다." 그림2. 미야하라 로슈가 그린 빨간 기와집 그림.jpg 미야하라가 그린 빨간 기와집 오키쿠는 마을에서 떨어진 밭 한가운데에 있었다. 민가의 목재까지 징발해 멋지게 지은 요리점 풍의 오키쿠는 미군의 표적이 됐고, 지은지 2개월 후인 1944년 10월 10일 미군의 나하 공습으로 흔적 없이 불에 타버렸다. 오키나와에서는 민가가 '위안소'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는데, 전쟁 중에 '위안소'로 사용된 시설과 성병 검사로 쓰인 병원 등은 미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미야하라의 그림은 이후 『요미탄 촌사 제5권(자료편4)─전시기록(상권)』(2002년)의 <여성들의 오키나와전 체험> 편에 요미탄촌 전체의 '위안소'와 함께 소개되었다. 오키나와전 생존자가 자신의 전쟁체험을 전쟁 후에 향토사(喜名誌, local history) 편집위원이 되어 기록으로 남겼고, 그것이 또 작은 마을이 속한 지역 단위의 오키나와전 상황을 보여주는 편찬 기록에 반영되었다. 이는 주민의 시점으로 오키나와전 전체 상황이 기술된 사례이다. 전후에 미군의 군사시설이 들어와 완전히 사라진 마을도 있다. 『고완마을 향토사 -오키나와전 미점령하의 잃어버린 부락의 복원 (小湾字誌─沖縄戦・米占領下で失われた集落の復元)』(1995년)은 현재 미군 군사시설의 설립으로 사라져 버린 고완이라는 마을의 전쟁 전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해 놓았다. 1989년 호세(法政)대학 오키나와 문화 연구소와 고완마을 향토사 조사위원회, 우라소에시 고완 마을 향토사 편집 위원회는 공동으로 대대적인 증언 조사를 시행했다. 증언을 통한 데이터 수집과 복원에 참여한 사람들만 1500명이었고, 800명 이상의 주민 증언에 의해 당시의 집, 마을 풍경, 성지, 공동시설, 담의 위치, 정원의 풍경 등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그림으로 복원되었다. 그 안에는 '위안소'에 관한 기억도 존재한다. 그림3. 그림으로 복원된 고완마을.jpeg 그림으로 복원된 고완마을[5]을 보면 해안가에 궁(宮)이라고 표시된 류큐 왕족의 아름다운 별장(빨간색 점선 원)이 있었고, 이 별장이 '위안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키나와의 전통문화와 관계된 장소가 군사시설의 하나인 '위안소'로 이용됨으로써 파괴된 것이다. 오나하(小那覇)라는 마을에서는 지도[6]에 일가족이 모두 사망한 집에 검은 점(●)을 그려 넣었다. 오나하 마을은 일본군이 설치한 비행장 옆에 있었는데, 이 마을의 검은 점이 표기된 집들 사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그림4. 위안소가 표기된 오나하 마을 지도.jpeg 오키나와 주민들의 '위안부'에 관한 기억은 '위안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자하 리츠코(1932년생)는 전쟁 고아였다. 그녀는 오키나와 북부에 설치된 미군의 민간인 포로수용소(수용지구)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와 함께 생활했다고 증언했다. 자하리츠코는 당시 미군이 '위안부'들만 따로 모아 민간인 수용소 안의 고아원에서 자신과 같은 전쟁고아들을 돌보게 했다고 한다.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있었고, 밤새 서럽게 울다 다음날이면 싸늘하게 죽어갔다. '위안부'들은 이 어린 주검들을 나무 상자에 담아 묻어 주었다고 한다. 수용소 안의 고아원이던 집에는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7]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이 빼앗겼던 일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군사폭력과 전쟁의 아픔으로 '위안소'와 '위안부'는 실체화되었다. 주민들은 총력전 하에서 군에게 노동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집도 '위안소'로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위안소'와 '위안부'들을 목격했고 그 폭력의 현장들을 자신의 체험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안소'와 '위안부'를 본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억은 현재 눈 앞에 보이는 군사기지와, 보이지 않는 과거의 군사기지라는 장소성을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 이 글에서의 위안소는 일본 군부, 군인과 군속, ‘위안부’, 오키나와 주민 등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겹쳐지고 지속되는 장소를 의미하기에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 출처 : 전국여성사연구회교류 모임 실행위원회, 『제5회전국여성사연구회 교류 모임 보고집 (第5回全国女性史研究会交流のつどい報告集)』, 보고집편집위원회 편, 1994년. ^ 2003년 10월 9일, 나하(那覇, 필자와의 인터뷰) ^ 출처 : 홍윤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인팍토 출판회, 2015년, 164쪽 ^ 출처 :『고완마을 향토사-오키나와전 미점령하의 잃어버린 부락의 복원 (小湾字誌─沖縄戦・米占領下で失われた集落の復元)』,호세대학 오키나와 문화연구소, 고완마을 향토사 조사위원회, 우라소에시 고완마을 향토사 편찬위원회, 1993년, 43쪽 ^ 출처 : 홍윤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인팍토 출판회, 2015년, 249쪽. ^ 2007년 10월 6일, 오키나와 나고시(名護市, 필자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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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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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수요시위 1000회를 맞아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앞선 2008년에 윤정옥이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 현지에 '위안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146곳 이상의 '위안소'가 존재한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를 목격하고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전해온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추모비로 '위안부'를 기억하는 사람들 오키나와에는 이시가키섬, 도카시키섬, 요미탄촌, 미야코섬에 각각 민간에서 세운 '위안부' 추모비가 있다. 오키나와에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사람들, 그 증언을 들은 활동가, 예술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추모비를 건립했다. 오키나와전 중에 이시가키섬의 많은 주민들이 말라리아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이시가키섬의 향토사 연구자 오타 시즈오는 이시가키섬의 오키나와전 실태를 수 년간 조사하며 주민들의 증언을 그림과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던 중 그는 기록만으로는 추모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와하라라는 지역에서 '바바하루'라는 가명으로 불린 '위안부'의 죽음이 그랬다. 전후 일본군은 이 섬을 찾아와 전우들의 유골을 수습해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바바하루로 불렸던 이는 인적이 드문 후미진 밭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오타 시즈오는 조사를 통해 바바하루가 죽었을 장소를 특정해 그 곳에 나무로 된 추모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다. 1998년에 '유혼의 비(留魂之碑)'라 명명된 이 추모비 앞에서는 매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이 때마다 민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 증언을 요구하는 불청객들이 있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현재 위령제는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다. 배봉기가 동원되어 '위안부'로 생활하기도 했던 도카시키 섬에는 1997년 한국의 영화감독 박수남이 주도하여 세운 '아리랑 비'가 있다. 박수남은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인 <아리랑의 노래: 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년)를 제작했다. 윤정옥의 취재기와 박수남의 영화 등을 통해 배봉기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기자들과 연구자들, 조사자들이 오키나와의 민가에 방문해 함부로 사진을 찍는 일이 늘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집단자결'[1]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한 이 섬은 방문객들에게 마냥 우호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주민들은 일상이 침범당하는 상황에 예민해졌고, 사생활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단기간 방문해 모든 것을 찍고 알아가려는 태도는 주민들의 일상을 위협하기 쉽다. 따라서 기자, 연구자, 조사자들로부터 자신의 삶의 내밀한 영역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경계심을 외부인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전시폭력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영역을 보호하려는 이중의 노력을 해왔다. 주민들의 경계의 눈초리는 배봉기를 비롯한 많은 '위안부'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림5. 도가시키 섬의 아리랑비(1997년 건립).jpg 한편 침묵을 강요당한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인‧군속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들은 해방 후 오키나와를 방문해 추모비를 직접 세웠다. 오키나와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결성한 '태평양동지회'는 1986년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오키나와 이야기』(2016년, 역사비평사)의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 교수와의 피해자 증언 모임을 통해 주민들과 교류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1999년, 경상북도 영양군에 '태평양 전쟁・오키나와전 조선반도 출신자 한의 비(이하 '한의 비)'가 세워졌다. 2006년에는 같은 추모비가 오키나와 요미탄에 세워졌다. 요미탄은 미군의 상륙 거점이었으며 오키나와전 중에 '집단자결'의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한의 비' 디자인은 오키나와의 조각가 긴조 미노루[2]가 맡았다. 요미탄의 '한의 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추도문이 새겨져 있다. 그림6. 요미탄의 한의 비(2006년 건립).jpg 별도의 제작자없이 주민들의 기억 만으로 추모비가 세워진 사례도 있다. 2008년 미야코섬에 세워진 '아리랑 비'와 '여성들에게'(한국어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라는 이름의 추모비이다. 우연히도 필자의 조사가 이 추모비들의 건립에 작은 계기를 만들었다. 끝으로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그림7. 미야코 섬의 아리랑비와 여성들에게(2008년 건립).jpg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억하는 미야코섬 사람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던 당시에 상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곳이 미야코섬이다. 오키나와전 당시 미야코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이에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적은 지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6년, 오키나와전 연구자로서 오키나와 나하에서 비행기로 30분 정도 떨어진 미야코섬에 처음 방문했다. 이 곳은 오키나와전 당시 3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주둔하여 섬 전체를 일본 항공시설로 만든 '항공기지의 섬'이기도 했다. 필자는 항공기지 주변 마을 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주민들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옛 일본군 비행장 활주로가 있던 노바루 부락의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바위 옆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농부를 만났다. "그 돌이 무엇인가요?" 그저 지나가듯 물었을 뿐이다. 슬리퍼에 허름한 추리닝을 입은 농부는 바위 옆에서 자라나고 있던 작은 꽃들에게 물을 주며 대답했다. "이 곳은 조선인 여성들이 빨래하러 가다 잠깐 쉬던 곳이라오." 그 농부의 이름은 요나하 히로토시였다. 기적과도 같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아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며 질문한 내게, 자신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야코섬에서 가장 큰 '위안소'가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소년시절 섬에서 나는 고추를 따다가 조선인 여성들에게 몰래 가져다주곤 했다는 추억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기지도, '위안소'도, 아무것도 없는 넓은 허허벌판에 커다란 현무암을 놓아 그녀들을 추모하고 있노라 했다. 예전에는 현무암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여성들이 잠깐씩 쉬다가 '위안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요나하 히로토시는 이 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필자는 그가 허허벌판에 노인 혼자서는 운반하기 힘들었을 커다란 돌을 가져다 놓고 홀로 '위안부'들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는 왜 그토록 이 장소를 기억하고 싶어했을까? 필자는 이 조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나하에서 생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키나와 평화투어를 하고 있던 윤정옥을 만났고 요나하 히로토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윤정옥이 생존하는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를 가장 처음 조사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윤정옥은 오키나와 방문 초기에 도카시키섬에서 유령이 되어 떠돈다는 '위안부', 하루에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했다. 하루에가 떠올라서였을까? 윤정옥 역시 미야코섬에 추모비가 건립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한편, 필자의 미야코섬 현지 조사는 의도치 않게 지역 내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필자의 조사 현장을 본 미야코 시의원 한 명이 시의회에서 '종군위안부' 지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이 '종군위안부'는 피해자도 꺼려하는 용어라며 반대했다. 가열되는 논쟁 속에서 사회를 보던 당시 시장이 "우리집 옆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라는 말을 하였고, 여당 의원들은 중립을 지켜야 되는 시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종군위안부' 지도 제작 논의 사실 자체가 시의회 회의록에서 삭제됐다. 이 소식을 들은 미야코섬 여성운동가들은 시의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조사자인 필자를 초청해 강의를 열었다. 초청 강의에는 그동안 필자에게 증언을 해 준 많은 주민이 모였다. 필자의 간단한 조사 내용 발표가 끝난 뒤 여성운동가들이 미야코섬 시의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참가한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손을 들고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랑을 부른 뒤 울먹이듯 말했다. "이 노래는 그때 그 여성들이 부르던 거에요. 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 하죠? " 아리랑에 대한 응답처럼 '위안부'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사쿠다 겐토쿠(1927년생) 씨는 필자가 미야코섬을 방문할 때 마다 옛 '위안소' 터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곤 했다.[3] 사와다 도요조(1939년생)씨는 본인을 군국주의 소년이었다고 소개하곤 했는데, 우물에 빨래하러 가는 여성들에게 돌을 던진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4] 그밖에도 다 떨어진 여성들의 옷을 꿰매어 준 사연, 몰래 여성들에게 차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나눠준 사연 등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후 윤정옥, 나카하라 미치코, 다카자토 스즈요를 대표로 하는 '오키나와, 한국, 일본, 미야코섬 '위안부' 문제 공동조사단'이 꾸려졌고, 멤버가 확대된 만큼 증언 수집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공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130여 곳의 '위안소' 가운데 17곳이 미야코섬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미야코섬에는 물이 귀하여 조선인 '위안부'와 현지 주민이 함께 우물을 사용했고, 우물을 매개로 주민, 특히 여성 주민들과 '위안부'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초기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마치 아이돌인양 일본군이 주최하는 행사에 불러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공동조사단은 위의 증언들을 모아 '위안부'를 본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최초의 증언집을 편찬했다.[5] 미야코섬 공동조사단의 활동 소식은 오키나와 본섬에까지 알려져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가 요나하 히로토시를 만나고 2년이 지난 2008년, 허허벌판에 놓인 현무암은 '아리랑비'가 되었다. 요나하가 가져다 놓은 그 모습 그대로,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기억의 돌인 아리랑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바람이 새겨졌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이 근처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츠가 우물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잠시 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비참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비를 후세에 전하고 싶다 - 추모비, 아리랑비 요나하 히로토시 아리랑비 뒤에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세운 세 개의 추모비가 아리랑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이 비석들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점령지 및 식민지 피해자들이 사용한 11개 지역의 언어[6]와 베트남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비석에 베트남어의 비문을 추가한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가한 가해성 역시 함께 기억해야 된다는 윤정옥의 바람이기도 했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력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염원합니다. - 추모비, 여성들에게 미야코섬에서는 매년 9월 주민들이 주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이 추모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행사이다. 이 소중한 기억의 공간에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가 부른 아리랑 노래를 기억하는 주민들과, 그들의 증언을 들은 한국, 일본, 오키나와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어우러져 아리랑을 부른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비문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로, 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염원으로 미야코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센삐'와 '압파라기' 여성 사이에서 필자는 오키나와의 '위안소' 조사를 12년간 진행하며 많은 증언을 들었고 많은 '위안소'를 보았다. 때로는 주민들이 그려주는 그림이나 기억에 의지해 '위안소' 위치를 점으로 찍어 나타낸 '위안소' 지도로, 때로는 '위안소'로 사용된 건물과 장소에서 과거 '위안소'로 쓰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이 본 '위안부'에 관한 기억들과 만났다. 군인들은 '위안부'를 '조센삐'(삐는 여성의 성기를 낮잡아 부르는 속어로, 일본군이 '위안부'를 부를 때 '위안부'의 출신지역에 삐를 붙여 '~삐'라고 부르기도 했다 -편집자 주)라고 불렀다. 그 어감 그대로 오키나와 주민들이 '위안부'를 차별적 언어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 하에서 '위안부'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버려졌는지를 기억하기에 오키나와 주민 그 누구도 이 여성들이 일본군과 '동지'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야코섬 사람들은 '위안부'들을 '압파라기'(아름다운 여성)라 부르기도 했다. 군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피부가 하얀 조선의 여성들은, 태양볕에 검게 그을린 섬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 여성들에게는 우물까지 빨래하러 가는 길에 잠시동안 자유가 허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야코섬 주민 누구도 이 여성들이 자유 의지로 이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3만 명 이상의 군인이 주둔한 고립된 섬은 철조망 없는 수용소였으며, 이 섬에서의 짧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언을 통해 말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민들의 증언과 진중일지 등의 일본군 군사자료를 분석해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2015년, 인팍토 출판회)를 펴낸 바 있다. 일본군'위안부'와 '집단자결' 피해자 모두 전시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일본군을 따르거나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다. '종군위안부'나 '집단자결'이라는 말은 피해자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적 설명이 필요한 불완전한 용어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구조적인 폭력을 가시화하여 대항언어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그 자체가 운동과 연동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위안부 당사자가 아닌 '위안부'를 목격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운동과 연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김학순의 증언과 소송은 한국은 물론 일본의 여성과 시민운동을 결집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일본의 법적 배상과 공적 책임을 묻고 한국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운동이 일본 내에서 전개되었다. 그 정점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오키나와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 펼쳐졌다.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운동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목격자 증언의 공간화'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배봉기를 첫 '위안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배봉기들의 이야기를 공간의 기억으로 남겨 놓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증언에는 그 어떤 법적 효력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투박한 지도 안의 점들로, 그림으로, 때로는 돌과 나무로, 자신의 집, 마당, 마을에서 자행된 가해의 역사로 기록되었고, 오키나와 주민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역사의 가해성 안에 위치짓는 역할을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긴 세월 배봉기를 기억하고, 조선인 여성들을 기록하고 추모해 온 오키나와 주민들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는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이 아름다운 타자들은 굳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머문 공간을 기억하며, 혹시 섬 내부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의 삶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민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기억의 공간화는 위안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함께 '본 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켜야만 드러나는, 주변화된 기억을 가시화하는 #with you 방식의 운동인 것이다. 이런 듣기 방식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러한 듣기 방식으로 증언대 위의 모습으로 피해자의 이미지를 고착화하거나,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오랜 시간 운동 및 연구를 해 왔던 이들을 손쉽게 재단하고 비판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타자입니까?" 라고. 각주 ^ 일본군 사령부는 패전이 임박하자 집단자결이라는 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했고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요된 집단자결로 목숨을 잃었다. 집단자결은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전시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없는 용어이므로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 제작자인 긴조 미노루는 <표현의 부자유전>을 둘러싼 일본 내의 ‘위안부’ 논의 탄압에 항의하며 2019년에 '아리랑의 시 – 군위안부 상'이라는 목조 추모상을 완성하기도 했다. ^ 2007년 5월 11일, 지모리(地盛) 위안소 옛터, 2008년 1월 12일 지모리(地盛)의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2008년 1월 12일, 미야코 하나키리(花切)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12개의 언어로 새긴 여성들에게 (戦場の宮古島と「慰安所」―12の言葉が刻む「女たちへ」)』홍윤신 편, 난요문고, 2009년 ^ 한반도, 일본, 중국‧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괌, 티모르, 미얀마,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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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독일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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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 2020년 7월 11일 토요일에 최윤정 건축사와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이하 괴테대학교) 베스트엔드 캠퍼스 사회학관 로비에서 전시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보러 갔다. 최 건축사가 말했다. "로비가 크니까, 소녀상이 작아 보이네." "그러게.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 보여. 귀엽지?" 한미합동훈련도 쉬게 하는 코로나19의 위력은 독일에서도 유효하다. 모든 것이 천천히 가는 세상, 평소라면 매일 수천 명이 오가는 괴테대학교 사회학관에서 소녀상은 쉼표를 즐기는 중이다. 이 글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녀상 건립이 공론화된 2016년부터 지금, 여기 이 쉼표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1_괴테대학교 사회학관 로비에서 전시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jpg 2016년 8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수원 사람들이 기증하려던 '평화의 소녀상' 2016년 8월 12일,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수원에서 온 메일이었다. 수원 시민이 참여한 '독일 평화의 소녀상 수원시민 건립추진위원회(이하 '수원추진위')'에서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려고 하니 독일 현지에서도 협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공관의 방해 공작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2016년 9월 말에 프라이부르크 시장이 '평화의 소녀상' 건립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당시 연락을 주고받던 수원추진위 이주현 집행위원장과 통화하던 중 나는 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우리한테 보내세요." 일반 공관의 무례함으로 인해 독일 땅에서 발생한 표현의 자유 침해를 기정사실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원에서는 당시 수원추진위를 해체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고 나서 독일 전역 동포사회 단체와 개인들에게 연락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모임을 10년 가량 지속한 단체 관계자들에게도 연락했다. 수원에서 추진한 일은 '물건너 갔다'고 보는 시각이 있어 여러 시간 전화 통화를 하며 설득했다. 메일을 통해 독일 내 건립추진위 조직을 호소했더니 독일 전역에서 20여 명이 모여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독일 건립추진위원회(이하 '독일추진위')'가 구성되었다. 몇 달이 지나면서 참여자는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2016년 10월 초 수원추진위 대표단이 독일에 와서 독일추진위와 협약식을 맺었다. 수원추진위는 소녀상을 보내주고 독일추진위는 소녀상을 건립할 장소를 찾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때 마침 독일 루르 지역에서 재독 한인교회협의회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원추진위 대표단과 함께 한인 교회협의회 총회장에 가서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 계획을 소개했다. 누군가 내게 질문했다. "추진위는 누구를 대상으로 합니까?" "재독 동포 사회 4만 명 모두가 추진위라 생각합니다."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놓는다는 취지였다. 2017년 3월 8일[1]에 '안점순 할머니와 함께하는 봄나들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바이에른주 레겐스부르크시 인근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이 열렸다. 수원과 프랑크푸르트에서 각각 40여 명, 그 외 레겐스부르크, 루르 지역, 베를린 등에서 40여 명이 참석해 모두 120여 명이 모였다. 2_ 2017년 3월 8일 독일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서 촬영한 안점순 할머니와 소녀상.jpg 2017년 3월, 독일 비젠트,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 비문없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 다음 날, 현지 관계자에게 연락이 왔다. 독일의 일본 대사관에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녀상 철거 문제가 불거지자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의 비르트 이사장은 타협안으로 소녀상은 그대로 두고 대신 소녀상의 비문을 철거할 것을 제안했다. 비르트 이사장 역시 프라이부르크 시장과 마찬가지로 일본 대사관의 방해를 겪어보니 견디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독일추진위 일각에서는 비문 수정을 일본 측에 부탁해보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고 비문 수정에 관한 의견을 개별적으로 교환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던 중 공원에 서 있는 소녀상에서 이미 비문이 철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확인해본 결과, 건립식 당일에 비문을 부착하지 못했고 건립식 이후 부착하기로 한 비문이 부착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공원에서는 비문을 철거하고 소녀상을 유지할 것이며 이 일이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일본공관원과 나눈 이야기를 담아 사무국장인 내게 메일로 보내왔다. 이에 대해 나는 "비문이 없는 소녀상은 상상할 수 없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이 메일로 인해 사무국장 업무 중단 요청과 사퇴 요구를 받는 등 빗발치는 항의에 직면했다. 하지만 철거 타협안을 용인할 경우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기게 되므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고, 10월에 공원이 겨울 휴장기에 들어갈 때까지 다른 장소가 나오면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쪽에서는 한번 세운 것이고 "고마운" 공원주를 배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소녀상을 옮기는 것에 반대했다. 전자의 경우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본 정부의 역사수정주의적 공격을 독일 내에서 이슈화하는 계기로 삼아 일본이 내세운 한일 프레임에서 벗어나 바이체크 전 대통령이 이야기한 기억문화의 맥락으로 사안을 보자고 했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역사의식을 독일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일본과 독일이 동맹국이므로 독일에서는 많이 힘들 것"이라는 관점이 작용했다. 소녀상 건립이라는 결과물을 환영한다는 점에서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건립을 추진하는 목적과 철학이 다른 데서 기인한 의견 차이였다고 하겠다. 결국, 독일추진위 일각에서 주도하여 2017년 5월 19일 회의가 소집되었고 독일추진위 추용남 대표는 비문이 없는 상태 그대로 평화의 소녀상을 그 공원에 두겠다고 하며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간 전체 일정과 업무를 조직하고 추진해 온 사무국과 실무팀 5인은 그러한 결정을 존중하되 동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사실상 4월 중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던 사무국장과 함께 사무국 사퇴를 선언하며 '비문 있는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한국인이라 하여 모두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 일은 '한국인'이란 틀이 어디까지 유효한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평화의 소녀상' 비문 문구를 둘러싼 논쟁-2차 세계대전이냐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냐 '평화의 소녀상' 비문 문구를 둘러싼 시비는 일본 정부가 소녀상 건립을 방해할 때 단골로 써먹는 메뉴 중 하나다. 역사 부정을 위해서다. 하지만 독일추진위 내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피해 시기와 그것의 표현 방식을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본래 수원에서 보내준 '평화의 소녀상'에서 제공한 비문 원본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이를 내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정다니엘 목사가 교열을 보고 10월 초 수원추진위 관계자들과도 검토하고 수원에 보내려고 할 때 지연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코리아협의회 대표가 전화를 걸어와서 '2차 세계대전'이 아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세 시간의 전화 끝에 그렇다면 최종 교열자인 정다니엘 목사와 연락해서 '2차 세계대전'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고치기만 하고 수원추진위 측에 서둘러 문구 수정 요청을 해달라고했다. 그러나 당시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수정본을 바로 넘기지 않고 비문 전체를 수정해서 2017년 1월에 최종 수정본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2016년 11월 수원에서 소녀상을 보낼 때는 소녀상에 비문을 부착할 수 없었다. 2017년 2월 중순, 소녀상 건립 장소 공원주와 중재자인 레겐스부르크 원불교 교당 관계자를 만났을 때 나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비문을 제시하였으나 교당 관계자는 내 서류철에서 삐져나온 10월 버전('2차 세계대전'이 들어 있는 수원 버전)을 보고 이 텍스트를 선택하게 됐다. 2016년 10월에 결정한 버전으로 비문 내용을 확정하고 작가들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문구가 새겨진 비문은 작가들이 건립식을 앞두고 독일에 입국할 때 직접 들고 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비문은 건립식 당시 좌대에 얹어져 있었을 뿐, 부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일에 접착제를 사용하여 비문을 좌대에 부착하려 했으나 전날 쏟아진 폭우로 소녀상이 젖어 있어 비문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비가 오지 않아 비문을 붙였더라면, '평화의 소녀상'에서 비문만 철거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늦어진 비문 제작과 건립식 전날의 폭우라는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표현을 양보했는데 본의 아니게 '2차 세계대전'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비문을 선택하게 된 셈이다. 내가 '아시아태평양 전쟁'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우선한 것은 무엇보다도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인들에게 전달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프랑크푸르트 전시를 준비하면서 교수님들을 만날 때도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교수님들도 전시 오프닝 때 "유럽의 안경을 벗고 이 문제를 바라보자"라고 하였다. 이 문제는 독일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비문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며, 지난 몇 년간 논의가 이어져 왔다. 미국 단체인 ''위안부'행동(CARE, 전 가주한미포럼)'에서 나온 캘리포니아 고등학교 교사용 '위안부' 교재에서는 "1930년대 초반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 2019년에 프랑크푸르트 전시를 계기로 풍경세계문화협회가 발간한 책자에서는 최초의 위안소가 1932년에 상하이에 생겼다는 점을 고려하여 '1937-1945'를 '1932-1945'로 수정했다. 최근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발간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2018, 황금알)에 첫 위안소가 1931년 11월에 세워졌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앞으로는 '1931-1945'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을 통해 윤명숙 박사의 고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윤 박사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학자들의 경우 1931년에서 1945년까지의 기간을 '15년 전쟁'이라 부른다고 한다. 2017년 8월, 독일 본, 여성박물관 두 번째 기회 그리고 익명의 편지들 독일의 첫 '평화의 소녀상'이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 세워진 후, 독일 본에 있는 '여성박물관' 마리안느 피첸 관장에게 소녀상 이야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2017년 8월, '여성박물관'으로부터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로 하였다는 편지를 받았다. 새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업무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활동 자금도 조성해야 했다. 공익협회 신설에만 6개월이 소요되었다. 2018년 4월 28일, '풍경세계문화협회'라는 이름으로 공익협회 법원 등록까지 마치고 우리의 프로젝트를 외부에 공개했다. 한국의 케이티브이(KTV, 국민방송)와 연합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한국에도 전했다. 이날은 필리핀 마닐라 해안도로에 4개월가량 서 있던 '필리핀 위안부'상이 철거(2018년 4월 27일)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독일 뒤셀도르프 일본 총영사관 공관원들이 '여성박물관'에 방문했다. 소녀상 건립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본 시의 문화국 관계자도 소녀상 건립 문제와 관련하여 의견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박물관'에 소녀상을 세우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수많은 익명 메일 폭탄이 쏟아졌다. 그때 본 여성박물관에 온 메일과 그 후 다른 파트너 단체에 제기된 일본 공관 측 주장들을 모아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인들이 말하는 '위안부' 역사는 일본을 폄하하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라는 주장 ② '위안부'는 '공창'이었으며 월급도 많이 받았다는 주장 ③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음에도 한국은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는 주장 ④ 소녀상으로 인해 독일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본인이 인종차별을 받고 피해를 볼 것이라는 주장 ⑤ 소녀상 건립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북한과 연관이 있거나 돈을 목적으로 한다는 주장 ⑥ 소녀상 건립 활동을 사람들은 한국 국가와 한통속으로 일한다는 주장 ⑦ 성폭력 문제는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데, "왜 하필 '위안부'"에 집중하냐는 문제 제기 ⑧ 소녀상 옆에 일본의 핵 피해자 동상을 함께 세우자는 제안 수많은 익명의 메일 내용 중 단순한 역사 왜곡과 한국인 험담 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두 나라만의 문제로 국한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만의 문제로만 환원하려는 것은 독일과 같은 제3국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전쟁 성범죄가 많은데, 왜 하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냐는 도발도 눈에 띈다. 이 문제 제기는 "왜 오래된 이야기를 가지고 그러느냐","왜 하필 일본에 관한 이야기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런 질문들에는 "왜 안 돼?"라는 반문만이 효력이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두 번째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2018년 8월에서 10월로 미뤄졌다가 결국 무산되었다. '여성박물관' 관장이자 아티스트이기도 한 마리안느 피첸은 독일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고, 메일 폭탄을 비롯해 불확실한 위기감 조성에도 소신을 갖고 대응했다. 하지만 당시 박물관이 처해 있던 상황은 마리안느 피첸 관장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훗날 우연히 알게 된 바에 따르면, 2018년 봄에서 여름까지 일본 측은 베를린 외교가에서 '여성박물관'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한일전'으로 부각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또한, 일본과 독일 본 시 사이의 투자 문제가 걸려있어 '여성박물관' 측도 외교적으로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본 시의 '여성박물관' 기억에는 경계가 없다 독일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 활동을 하는 내게 어떤 독일인 친구가 물었다. "왜 독일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니?" "왜 안 돼?" 되물었다. "왜 넌 아시아 라면은 먹으면서 아시아 역사는 싫어?" "오... 라면과 역사를 어떻게 비교하니?" '여성박물관'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반대하는 수많은 익명 메일 속 내용과 같이 비본질적인 질문은 본질을 훼손하는 효과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라는 개별성을 희석시키면서 구체적인 역사적 논쟁을 자연스레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독일에는 한국이 개발도상국일 당시에 한국의 민주화에 연대한 친한파 독일인들이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독일에서 충분히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친한파 독일인들의 친절함을 넘어서는 국제 연대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비록,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수는 없게 되었지만,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된 전시는 계획대로 진행하였다. 슬로건은 '기억에는 경계가 없다'로 정해져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문제가 아니며, '위안부'라는 사안 자체가 국제적인 문제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세계 곳곳에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사진을 수집하여 달력으로 제작했다. 독일어, 영어, 한국어 세 언어로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한 이 달력은 2017년 9월부터 제작을 시작하여 10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의외로 달력에 사용할 만한 사진들이 많았다. 5~6명이 분담하고 사진의 저작권을 확보했는데, 배경과 목표를 설명하자 많은 분들이 흔쾌히 높은 해상도의 사진을 보내주시고 사진 이용을 허락해주셨다. '위안부'행동의 김현정 대표는 직접 찍은 많은 사진을 보내주었고, 일본 나고야의 이두희 선생은 오키나와의 아리랑비를 찍은 사진을 비롯해 소중한 자료들을 구해주었다. 이렇게 수집한 사진들은 전문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달력으로 탄생했다. 경계가 없는 시간과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 요일 역시 없앴다. 1,000부를 발행하여 후원인들과 관심 있는 분들, 그리고 기관에 배포하였다. 14.95유로로 가격을 책정하고 판매하여 소녀상 건립과 행사 진행에 필요한 최소 경비를 확보하는 데에 보태기도 하였다. 달력에 들어간 사진을 포함하여 세계 곳곳의 기림비 사진 30점을 모아 2018년 8월 4일부터 8월 30일까지 본 '여성박물관'에서 <전쟁과 분쟁지역 여성에 대한 폭력>이란 이름의 전시를 개최하였다. 전시장 내부의 큰 벽에는 필리핀 레이테(leyte) 지역의 피해자 르데디오스 펠리아스 할머니가 겪은 전쟁 이야기를 23편의 그림일기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을 독일어 번역과 함께 걸었다. 사진전 외에 2018년 8월 18일에 열린 국제심포지엄 <'위안부'-끝나지 않는 이야기>에서도 마리안느 피첸 관장과 함께할 수 있었다.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과 '위안부'행동의 김현정 대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의 교육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저널리스트 그리셀다 몰레만스는 유럽인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첫 소녀상 건립 당시 수원추진위의 집행위원장이었던 이주현 목사는 비문 철거 문제를 언급하였고, 이두희 선생은 일본에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림비에 대해 설명했다.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독일에서 자주 환기되는 '역사 성찰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정신을 우리 활동의 기조로 삼을 수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가장 큰 의의는 한일 양국 간의 문제에서 벗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그 자체를 주제로 심화한 것이었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각주 ^ 본래 2016년 12월 10일에 임시 건립할 예정이었으나 11월, 베를린 인근에 영구 건립지가 날 수 있다고 해서 임시 건립 계획이 취소되었고 다음 해인 2017년 3월 8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미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