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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이옥선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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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19년 10월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를 실은 바 있다.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적 활동이 아닌 퇴근 후의 사적 일상을 드러낸 이 인터뷰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표현해주었다. 누구에게든 피해로만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결이 존재하며, 그 같은 결들을 받아들이고 각 존재의 고유성을 이해할 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 높아질 것이라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에 웹진 <결>은 2020년 4월부터 누군가의 생애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방'이라는 공간의 가구, 물건, 사진을 통해 <나눔의 집>에 사는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살펴보는 연재를 기획했다. 그 사이 <나눔의 집> 운영을 둘러싼 문제가 공론화되었고, 할머니들의 방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아직까지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이 연재를 통해 그 자체로 보존해야 할 역사적 공간인 할머니들의 '방'을 기록으로 남기고 웹진 <결>의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나눔의 집과 할머니의 방들 1991년 우리 사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여러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복지와 생활 터전을 제공하기 위해 1992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문을 연 <나눔의 집>도 있었다. 이후 종로구 혜화동을 거쳐 1995년 경기도 광주시에 정착한 <나눔의 집>은 지금까지 정부에 신고된 240명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30여 명의 할머니에게 생활 터전을 제공하였으며, 2020년 8월 현재에도 5명의 할머니가 생활하고 있다. 그동안 <나눔의 집>에서 생활한 할머니들은 수많은 활동을 통해 일제의 비인륜성을 고발하였으며 증언, 그림 등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나눔의 집>은 할머니들이 남긴 수많은 흔적과 유품 그리고 그에 관한 기억들로 채워졌다. 또한 이 같은 할머니들의 활동들로 인해 <나눔의 집>은 단순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생활 터전을 넘어 일본 패전 후 전쟁 피해자의 생활과 심리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사회의 인식과 시선, 우리의 역할 등에 다양한 시사점을 주는 공간이 되었다. <나눔의 집> 어디든지 할머니들의 흔적과 역사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바로 할머니들의 방이다. 할머니들의 방에는 피해자로서의 삶과 개인의 삶, 그리고 할머니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등이 할머니들의 물건과 소품, 사진 등을 통해 잘 나타나있다. 지금까지 <나눔의 집>에서 많은 할머니가 생활하셨지만, 현재 남아있는 방은 총 다섯 할머니의 방이다. 이중 고(故) 김군자 할머니의 방을 제외하면 모두 현재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니들의 방이다. 하지만 2019년 여름, 할머니의 방 자체가 '위안부' 문제의 중요한 역사적 일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나눔의 집> 이사진과 운영진의 관리 소홀로 인해 할머니들의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이 기본적인 포장도 되지 않은 채 비오는 날 외부에 방치되어 장맛비를 맞았다. 이로 인해 일부 물품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고, 방을 치우기 전 사진조차 남지 않아 할머니들의 방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나눔의 집> 직원들 사이에서 할머니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공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공분은 할머니들의 방을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귀결되었다. 직원들은 먼저 할머니들의 물건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나눔의 집>이 소장한 사진을 포함하여 신문, 방송, SNS 등에 나온 할머니들의 방 이미지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치워진 물건들을 할머니 별로 정리하고 훼손된 물건 중 복구가 가능한 것들을 먼저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 나갔다. 이로 인해 할머니들의 방은 점차 예전 모습을 찾아갔다. 이 글은 복원된 할머니들의 방과 그 방에 깃들어 있는 할머니 한 분 한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옥선의 방 가장 먼저 복원된 방은 이옥선 할머니의 방이었다. 이옥선 할머니는 해방 후 중국 연변에서 생활하시다 2000년이 돼서야 귀국하여 <나눔의 집>에 오시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에선 이미 사망신고가 되어있어 할머니는 1년이 넘는 시간을 국적회복과 피해자등록을 위해 보내야 했다. 뛰어난 총기와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할머니는 2004년 고(故) 김순덕 할머니가 별세한 이후, <나눔의 집>을 대표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참석 및 증언 활동을 도맡아 해오고 있다. 20년 넘게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계신 할머니는 거실에서 TV를 보실 때에도 자기 방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누가 들어가는지를 확인하실 정도로 자기 방에 대한 애착이 강하시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생활관에서 가장 앞쪽에 위치한, 직사각형 구조의 4평 남짓한 방이다. 방 끝에는 창문이 있고 그 아래 침대가 놓여있다. 침대 위 다리 방면으로 서랍장이 하나 올려져 있는데, 돌침대라 가능한 일이지만 침대 위에 서랍장이 올려져 있는 것이 좀 특이하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낡은 책장이 하나 있는데, 책장에는 천주교 관련 서적과 역사책이 대부분이다. 이옥선의 낡은 책장 부산이 고향이신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학교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10살 때부터 학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쓰기도 하고 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부러워 오빠가 다니는 학교 담장 밖에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2019년 할머니와 함께 부산에 있는 할머니의 고향 마을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다른 것들은 잘 기억을 못하셨지만, 오빠가 다녔던 학교와 그 학교로 가는 길 그리고 어릴 적 학교에 대한 설움은 선명히 기억하셨다. 가끔 직원이나 방문객이 할머니 방에 있는 책장을 보고 “할머니, 책이 많네요?”라고 물으면 할머니는 항상 “저 책장에 있는 책을 내가 다 읽었다고 하면 믿겠어?”라는 말과 함께 공부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해방 후에도 할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연변에서 생활하셨다. 어느 날 마을의 한 청년이 재미있는 책이 있다며 할머니에게 읽어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할머니가 책을 볼 수 없다고 하자, 그 청년은 할머니에게 야학을 소개해 줬다. 그렇게 야학과 인연을 맺은 할머니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 나가 한글을 배웠다. 할머니는 이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함박웃음과 함께 “내 거기서 받침(한글)을 뗐어!”라고 말씀하신다. 야학에 다닌 이후 책 읽는 재미에 빠져 밤마다 책을 빌려 읽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으신다. 한 번은 할머니가 너무 똑똑해 동네 사람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때 “호미 대학 농업학과를 나왔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할머니에게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어보면 똑같이 대답하신다. 그리고 가끔씩 책장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위안소에 끌려간 이야기를 꺼내실 때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공부 욕심이 많아 무엇이든 배우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으로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매일 우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역 앞 우동집에 양딸로 가면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그 집의 양딸로 가게 되었는데, 현실은 온갖 허드렛일과 술 시중이었다. 이에 할머니는 그 집에서 여러 번 도망치고 잡히기를 반복하였고, 결국 우동집 주인에 의해 울산에 있는 한 여관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울산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여관집 주인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웅장한' 남자 2명에게 잡혀 중국 연길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책장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자신은 위안소가 아니라 학교에 가고 싶었다는 말이라는 것을. 이옥선의 작은 TV와 서랍장 책장 오른편에는 3단으로 된 수납장이 있는데, 그 위에는 조그만 TV와 젊은 시절 할머니의 사진이 놓여있다. 할머니는 요즘 이 TV로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 <에움길>을 보는 재미에 푹 빠지셨다. 할머니는 매일 가장 먼저 마주친 직원에게 영화를 틀어 달라 하시고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큰 미동도 없이 집중해서 관람하신다. 가끔 할머니에게 “할머니 지겹지 않아? 다른 거 볼까?”라고 물으면 “저기에 내 역사가 있어!”라고 대답하시며 다시 영화에 집중하신다. 최근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도 즐겨 보시는데, 극 중 싸움을 잘하는 스님이 나오면 항상 “저 스님이 깡패보다 더 쎄”라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또 그 스님이 싸우는 장면이 나오면 식사시간이라도 그 장면은 다 보셔야 식사를 하신다. 침대와 책장, 그리고 수납장을 지나면 2단으로 된 낮은 서랍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손자의 초상화와 아주 오래된 매실주가 올려져 있다. 직원들이 가끔 할머니에게 그 매실주를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면 언제든지 마시라고 하시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아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은 양으로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침대, 책장, 수납장의 맞은편에는 5단 서랍장과 옷장 두 개가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냉장고가 있다. 냉장고 안에는 캔으로 된 초코우유와 아이스크림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 이 중 초코우유는 매달 한 번씩 오는 방송인 김구라 씨가 사 오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이스초코, 아이스크림, 탄산음료를 무척 좋아하시는데, 처음 아이스초코를 드셨을 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냐며 놀라셨다고 한다. 직원들은 할머니가 기분이 조금 안 좋아 보이거나 답답해하는 것 같으면 아이스크림, 아이스초코, 탄산음료 중 하나를 먹으러 나가자고 제안한다. 십중팔구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신다. 그리고는 주문한 음료를 다 드시고 나면 “다 먹었다.”라고 하시거나 “이거 먹으면 속이 뻥 뚫려” 또는 “내가 이거 때문에 나오는 거야.”라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이옥선의 사진들 할머니의 방에는 벽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진과 액자들이 걸려있다. 20년 넘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활동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할머니의 방에 있는 사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천주교와 관련된 사진, 두 번째는 가족과 관련된 사진, 마지막은 일상사진이다. 인권활동가로서의 사진도 없지는 않으나 몇 장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관련된 사진들이다. 할머니는 가끔 방에 걸려있는 사진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시는데, 키가 닿지 않는 곳은 효자손을 이용해서 설명해주시곤 한다. 그중 할머니와 가장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사진들은 모두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사진들이다. 먼저 머리맡 침대 위에는 오래된 묵주 2개가 걸려있고 그 아래 작은 선반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성모 마리아, 김대건 신부 등 천주교와 관련된 사진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또 침대 위 벽면에는 할머니와 신부님이 찍은 사진과 예수님의 초상화 등이 걸려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할머니가 중국에서 생활하실 때 성당에 가고 싶어 하셨는데, 자신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수녀님들이 할머니를 찾아와 누구든 성당에 올 수 있다며 할머니를 설득하였고, 그때부터 할머니는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마다 성당에 다니고 계신다. 천주교와 성당에 관련된 사진 맞은편에는 손자들 사진이 자리 잡고 있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각별하여 방 곳곳에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나 손자들의 사진이 있다. 사실 할머니는 어렸을 적 '위안부' 피해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셨다. 할머니 말로는 '위안소'에 있을 때 606주사를 맞고 수은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몸이 망가졌다고 한다. 해방 후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중국에서 애 딸린 홀아비를 만나 가족을 꾸리셨다. 딱 한번 할머니에게 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는 "내가 '위안부' 간판을 이마에 써 붙이고 부모 형제 얼굴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대답하셨다. 어쨌든 이때 키운 아들의 자식들이 할머니의 손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과 며느리 모두 장애가 있어 손자들은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자랐다. 현재 가끔 큰 손자가 사고치는 것만 빼면, 다들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방에 대해 “내 방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 다 내가 고르고 내가 산 거야. 내 방에는 없는 게 없어. 그래서 다른 방에 뭐 빌리러 갈 필요가 없어, 다들 내 방에 빌리러 오지.”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자기 방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떠난 뒤 본인의 방이 없어질까 걱정을 많이 하신다. 특히 요즘에는 “내가 죽어도 내 방은 군자 방(고 김군자 할머니 방)처럼 그대로 둬라.”라고 자주 말씀하신다. 이옥선 할머니의 방은 여느 할머니의 방과 다름없는 평범한 방이다. 동시에 특별한 방이기도 하다. 이 방에는 그동안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 사회는 할머니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기억했는지도 잘 나타나 있다. 누군가에게 할머니의 방은 그냥 평범한 방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할머니를 이옥선이 아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만 보았기 때문에 이 방의 가치는 아직 평가 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방이 그대로 남아 일본군'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피해자 개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기록물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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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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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영화 <김복동> 영화 <김복동>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 평화활동가로 살다 세상을 떠난 김복동이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기 위해 27년을 싸워온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2019년 8월 8일, 전국 극장에서 동시 개봉했다.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은 일본발 경제 제재로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역사 부정을 손 놓고 바라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한일관계가 극한인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로 살다 세상을 떠난 김복동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한 것이다. 영화 <김복동>은 여러 TV 프로그램에 소개됐고, 뉴스에서도 깊이 있게 보도되었다. 관객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영화'라는 후기가 주를 이뤘다. 그렇게 영화 <김복동>은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8만 9천여 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극장 상영을 제외한 공동체 상영만으로도 일만여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찾았고, 국외 상영도 이루어졌다. 2019년 11월, 벨기에 한국문화원에서 주최한 제7회 한국영화제에 <김복동>이 초청 상영됐다. 벨기에 관객들은 영화 <김복동>은 전쟁의 피해자가 자신의 잃어버린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다룬 영화라며 깊이 공감해 주었다. 2020년 5월에는 의미 있는 독립영화들을 선정해 상을 수여하는 들꽃영화상에서 '심사위원특별언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 김규리 씨는 "<김복동>이야말로 들꽃영화상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렇게 영화 <김복동>은 들꽃 같은 삶을 살다 떠난 김복동의 삶과 닮은 행보를 걸어왔다. 무지(無知) 사실 나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만 해도 김복동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특별한 지식도, 별다른 생각도, 해결의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우리 역사의 억울한 피해자', '안타까운 과거의 희생자' 정도로만 피해자들을 이해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었을 때도 '한미일 삼국의 동맹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굴욕적 카드'라는 각종 언론의 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용을 잘 모르니 잘된 합의인지, 잘못된 합의인지 판단도 불가능했다. 그러다 피해자들이 '수용 불가'라는 입장을 내놓은 후에야 잘못된 합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합의에서 배제된 피해자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그 합의가 피해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시위 현장에서 합의를 반대하는 피해자들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김복동이든 길원옥이든 이순덕이든 과거의 나에게 피해자들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할머니'였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2018년 10월 맑은 가을 어느 날, 내게 김복동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볼 수 있겠냐는 제안이 왔다. 시작 김복동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은 김복동이 말기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과 남은 생이 3개월이라는 것뿐이었다. 김복동은 자신의 삶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서글픔을 내비쳤고 주변에서 김복동의 생애를 되짚는 추모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나와 김복동의 인연이 시작됐다. 촛불이 꺼져가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김복동의 삶을 어떻게 표현할지 선뜻 생각나지 않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27년을 살아온 김복동의 삶이 궁금했다. 특히 나는 김복동이 죽기 직전 삶에서 반드시 되찾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작업을 통해 그 순간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한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전 대표를 만나 논의하며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했다. 김복동이 기록된 모든 자료를 요청해 받았고, 그와 동시에 기획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의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지, 어떻게 그릴 것인지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김복동의 흔적들을 통해 그의 생애를 살폈다. 1992년, 처음 자신을 피해자로 신고한 때부터 김복동의 활동 기록을 확보했다. 2011년 '희망승합차' 선물을 계기로 김복동과 수년째 가족처럼 생활한 미디어몽구를 통해서도 김복동의 기록을 확보해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뉴스타파 데이터 팀 김강민 기자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사건 위주로 정리해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김숨 작가가 쓴 김복동의 자전적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읽고, 김복동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조금씩이지만 김복동의 세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인사 작업을 먼저 시작했지만, 김복동을 직접 만나 인사해야 했다. 그러나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김복동의 몸 깊숙이 자리 잡은 암 때문이었다. '평화의 우리집'을 방문해도 김복동은 늘 2층 방에 누워 진통제를 먹고, 링거를 꽂은 채 암과 싸우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을 골라 다시 약속을 잡아보자는 '평화의 우리집' 손영미 소장의 말에 다시 약속을 잡았지만, '병세가 악화돼 새벽에 응급실행'이라는 문자로 약속은 또 무산됐다. 그렇게 병원을 찾아도 김복동은 누워만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다음에 다시'라는 말로 또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한동안 나는 김복동에게 내가 누구인지 소개할 수 없었다. 그러던 2018년 11월 말, 김복동을 만나게 됐다. 그날 김복동은 재일조선학교에 재산 5천만 원을 기부하는 행사를 열었다. 행사라고 해봐야 활동가들과 미디어몽구, 내가 참석자의 전부였다. 방 안에는 김복동과 함께 오랜 시간 함께해 온 활동가들이 김복동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김복동은 스웨터를 걸치고, 다리 위에는 이불을 덮은 채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빗어져 정돈되어 있었다. 그렇게 김복동은 고요히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낯설었다. 나는 김복동의 방문 바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알 수 없는 죄스러움이 김복동의 공간에 들어가려는 나를 막았다. 지난 세월, 김복동을 비롯한 피해자들을 너무 모르고 살아온 게 죄송해서였을까. 당사자를 앞에 두니 모르는데 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더 부끄러웠다. 행사가 끝나고 김복동에게 전 재산을 재일조선학교에 기부한 마음이 어떤지 물었다. 여전히 방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채였다. 김복동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만점이지"라고 말했다. '만점?'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로 "왜요?" 물었다. 김복동은 조금 생각하고,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이 하잘것없는 나를 이렇게 받들어줘서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는데 모두들 이렇게 모여 있으니 고맙지"라고 김복동은 대답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짚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김복동과 활동가들의 끈끈함, 희생,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다만, 확실하게 알 것 같은 것도 있었다. 김복동이 오늘 한 말들이 김복동의 유언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문득, 오늘이 지나고 나면 더는 김복동은 앉아서 말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유언 같은 말을 마친 김복동은 힘이 든 듯 이내 자리에 누웠다. 조금 힘들더라도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질문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기어이 다시 누운 김복동에게 물었다. 김복동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잠시 가만히 생각한 후, 곧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보고 있으면 그냥 눈물이 나는 학생들의 모습. 실제 김복동은 2018년 6월, 장학금 전달식에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보고 갑작스레 눈물을 흘렸다. 나는 김복동의 대답이 의미하는 것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이 혹시 김복동이 찾고 싶은 순간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김복동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흔적 2019년 1월, 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2018년 6월 '김복동 장학금'을 받은 교토조선중고급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학교는 교토 외곽의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낡고 초라해 보이는 학교에서 교복으로 한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010년 이후, 일본 정부는 고교 무상교육 정책에서 유일하게 재일조선학교만 제외했다.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은 조선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모든 학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김복동이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김복동의 도움으로 학생들은 걱정 없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학생들을 인터뷰하기 전, 생사를 넘나들며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김복동의 현재 상태를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말의 이유를 찾고자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눈앞에 있는 학생들은 열여섯, 열일곱의 앳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문이 막혔고, 눈물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슬픈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혼자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인데 눈물이 났다. 한참을 기운이 쏙 빠지도록 울었다. 그때 김복동의 말, '그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했던 것 같다. 김복동은 눈앞의 학생들을 바라보며 전쟁터로 끌려가던 열여섯 김복동,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일본에서 차별을 받으며 사는 조선인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김복동을 마주한 것이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저절로 그때 김복동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김복동 다큐멘터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이 아닌, 마음으로 영화 <김복동>을 대했다. 그렇게 일본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김복동이 있는 병실을 찾았다. 이제는 진통제가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는 김복동에게 학생들이 전한 편지를 전달해주며 또 울었다. 눈이 아프게 울었다. 며칠 후, 김복동은 세상을 떠났다. 발자취 겨울에 김복동이 세상을 떠나고, 곧 귀룽나무가 잎을 틔우며 봄이 왔음을 알렸다. 산수유나무, 생강나무, 매화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고 진달래꽃이 온 산을 분홍빛으로 뒤덮었다. 그렇게 생명이 움트기 시작할 때 김복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바다가 보고 싶다던 김복동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부산 다대포를 찾아 김복동의 바다를 느꼈고, 그곳에 여전히 살고 있는 김복동의 동생도 만났다. 다대포 바다 앞에서 김복동과 함께 장사를 했다는 여든다섯의 횟집 사장을 만났고, 통도사 백련암에 김복동이 내세를 위해 세웠다는 석등을 찾았다. 김복동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김복동에 관해 물었고, 김복동의 활동 너머에 숨겨진 마음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김복동이 그렇게 싫어했던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기습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을 만나, 경찰에 잡혀갈 걸 알면서도 시위를 강행한 이유를 물었다. '평화의 우리집' 2층 김복동의 방을 찾아 김복동이 떠난 김복동의 방을 바라봤고, 김복동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집 안팎도 살폈다. 김복동의 흔적은 곳곳에 있었다. 김복동과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한 바다는 부산의 다대포 앞바다다. 다대포는 낙동강 하구에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있다. 직접 찾은 다대포 바다는 바람이 강렬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거센 바람이었다. 바람은 바다 저 멀리 지평선 부근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는데, 한참을 달려온 바람은 다대포 해안에서 모래와 만나 모래바람이 되었다. 거센 모래바람은 아팠다. 김복동이 보고 싶다던 바다는 고요한 바다가 아닌, 모래바람이 온몸을 때리는 아픈 바다였다. 이 다대포 바다에서 김복동은 수십 년의 삶을 견디고 버텨야 했다. 아픈 바다의 바람을 맞으며 김복동은 자신의 아픔을 잊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김복동은 힘든 시간이 몰려오면 늘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한 걸까. 어쩌면 다대포의 이 거센 모래바람이 그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래사장에 켜켜이 쌓인 모래의 물결은 그렇게 쌓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기적처럼 살아 돌아와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 김복동에게 “언니 나이는 23살이야”라고 알려준 사람은 김복동보다 세 살 아래인 동생이었다. 동생은 김복동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아들, 조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동생은 2010년 김복동이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함께 활동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 "힘든 데 뭐하러 가느냐, 가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했다. 동생은 정대협을 단체가 아닌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자꾸 “정대협 씨”라고 말했다. 동생은 그래도 정대협 씨가 마지막까지 장례를 잘 치러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정대협은 사람이 아니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동생은 정대협 씨를 따라나선 김복동이 자신에게 한 말을 우리에게 전해줬다. "앞으로 이 땅에 나와 같은 피해자가 없어야 하기에 가는 거다"라는 김복동의 마지막 말이다. 그날 이후 김복동과 동생은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고, 동생은 김복동의 죽음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았다. 몸이 불편해 장례식장을 찾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취재진이 내려와서 이렇게 이야기라도 하니 고맙다고 말했다. 동생은 마지막으로 김복동이 다음 생애에는 좋은 부모 만나 전쟁터에 안 끌려가고, 결혼해 아이도 낳으며 평범하게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복동은 생애 자신이 겪은 고통의 원인이 전생 때문이라고 믿었다. 전생의 업보가 내세에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김복동은 1998년 통도사 백련암에 석등을 하나 세웠다. 생전 김복동의 방에는 이 석등이 찍힌 빛바랜 사진이 놓여 있었다. 다른 사진도 아닌 석등 사진을 왜 이렇게 소중히 간직했을까. 그 사진 속 김복동의 석등을 직접 찾아가 확인했다. 불교 신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긴 석등을 세우는 이유는 지난 업보를 지우고,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밝혀주는 의미라고 백련암의 큰스님이 말했다. 김복동이 1998년 이곳에서 석등을 세우던 때의 일을 큰스님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석등 지대석을 가린 잔디를 손으로 살짝 걷어내자 한자로 '丙寅生 金福童(병인생 김복동)'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벽녘, 김복동의 석등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김복동처럼 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음 김복동과 인간적인 교류가 없던 나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와 그 속에 남겨진 김복동의 흔적을 통해 김복동의 이야기들을 찾아갔다. 김복동이 걸어온 길을 살피며 누구보다 김복동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애썼다. 또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김복동의 활동과 의미를 짚어 나갔다. 나는 그렇게 김복동이 탄 배의 행적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살폈다. 김복동이 없는 김복동의 영화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영화 <김복동>을 본 관객들은 김복동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김복동의 책임감, 사명감, 의무감을 보며 관객들은 '당사자가 저렇게 노력할 때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나'하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김복동,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되어주시겠습니까'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삶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저 피해자 중의 한 명이 아닌, 또렷한 이름을 지닌 주체로 '김복동'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목도 '김복동'으로 결정했다. 이름 지금도 나는 영화 <김복동>을 떠올리면, 전국 방방곡곡을 기차로 버스로 구석구석 누비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물들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중력을 거스르며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영화 <김복동>에 보인 관심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관객들에게 늘 "영화 <김복동>은 관객 여러분의 마음속에 김복동이라는 이름이 기억되고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평생을 들꽃처럼, 들풀처럼 살다 떠난 김복동의 이름이 영원할 수 있도록 김복동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영화를 본 관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김복동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서. 다시 8월 영화 <김복동>이 개봉하고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처음 영화 제작을 시작했을 때, 김복동이 누군지도 제대로 몰랐던 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저 김복동의 발자취를 짚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욱 구체적인 기획을 하게 되고, 김복동을 만나고, 알게 되고, 김복동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이성보다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다. 마음을 다해 제작하는 것의 의미를 나는 제작을 진행하는 동안 알게 되었다. 김복동이 그랬던 것처럼 몸이 부서지더라도 끝까지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명감, 그것 하나로 임했다. 그렇게 일 년이 넘도록 영화 <김복동>에 몰입해 있었다. 2020년이 되어 이제 슬슬 김복동의 삶에서 빠져나오려는 때, 김복동이 '돈벌이에 끌려다닌 불쌍한 노인네'라는 말을 접했다. 그 누가 김복동의 마음과 행동을 함부로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을까. 그 말과 글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요동치고 몸서리가 쳐졌다. 김복동이 떠나자, 김복동을 지우려는 사람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북적였다. 이름을 지우고, 흔적을 지우며, 의미를 없애버리려는 듯 보였다. 그들이 그럴수록 나는 김복동을 떠올렸다. 삶의 마지막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외치며, "아베는 나한테 졌다"고 말하던 김복동을 떠올렸다. 2019년 1월 28일, 김복동이 세상을 떠난 후 숨을 거둔 김복동의 손을 잡았다. 심장은 멈추었지만 김복동의 손에는 여전히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날 나는 세상을 떠난 김복동의 손을 잡고 그의 얼굴 가까이에서 나지막이 얘기했다. "할머니, 편히 쉬세요. 영화 잘 만들게요. 할머니 이름, 많은 사람이 기억하게 할게요." 나는 지금 김복동의 이름을 지우는 자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 서 있다. 그때마다 다짐하듯, 죽었지만 살아있던 김복동에게 한 약속을 꺼내 본다. 그리고 감히 말한다. 너희들이 그 이름을 지우려 할수록, 김복동의 이름은 들꽃이 되어 세상 곳곳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높이 더 멀리 솟아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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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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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늘 꼿꼿했던 그녀의 등을 기억합니다 류광옥 (법무법인 가로수 변호사, 웹진 결 편집위원) 이 글을 쓰기 위해 우선 떠오르는 것들을 낙서처럼 적어 봤습니다. 수요시위, 재일조선학교,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나비기금……. 상당히 많은 단어가 떠올라 메모지가 금세 채워졌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메모에 적힌 단어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메모지에 '등'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메모지에 빼곡히 적혀 있는 다른 단어들과는 달리 왜 '등'이라는 단어를 적었는지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을 본 많은 사람이 울었을 겁니다. 조금 울거나 영화 내내 울거나.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울 수 있는 만큼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에서 제게 가장 마음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그녀의 '등'이었습니다. 아흔을 넘긴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곧게 뻗은 그녀의 등과 목, 그녀는 자세에서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을 때조차도 그녀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세우고 꼿꼿이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의 등에 유독 눈길이 갔던 이유는 저의 어머니 때문이기도 합니다. 10년 전 수술을 받은 곳이 덧나면서 얼마 동안 누워계신 후 다시 일어난 어머니의 등은 완만하게 굽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등 펴셔요", "바로 앉으려고 해 보셔요" 계속 재촉하게 됩니다. 제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면, 지금 그녀가 제 옆에 있다면, 저는 그녀에게 등을 펴라는 재촉은 하지 못하겠지요. 불필요한 말일뿐만 아니라, 아마 오히려 그녀가 제게 "등 좀 펴라" 핀잔을 줄 것 같습니다. 단상 아래의 김복동 윤지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자료팀장) 나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하 박물관) 자료실에서 자료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박물관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산하 기관이다. 올해 서른 살이 된 정대협은 기존의 활동을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로 물려주고, 역사를 기억・기록하는 기능은 박물관에 남겨두었다. 대다수 사람은 정대협, 정의연, 박물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이 역사를 잘 알고, 누구보다 피해자와 가깝고, 어느 기관보다도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나는 이곳에서 일한 지 3년이 되었고, 할머니들과 만나는 날은 생신이나 어버이날, 시위 당일 정도이다. 또한 할머니와 관련된 직접적인 정보는 개인정보로 보호되어 공공기관에서 관리되고 있고, 그간의 연구조사 사업 역시 각각의 연구소와 사업을 발주한 정부 기관에서 관장한다. 글을 쓰면서 가장 고민스러운 점은 내가 과연 한 단체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면모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이다. 내부자로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보 수준을 제공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글을 기회로 내 기억 속의 단상 아래 내려온 김복동을 부분적으로나마 되짚어보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딱 두 개다. 보이지 않거나, 항상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할머니가 생활하시던 서울시 마포구 쉼터 지하엔 박물관에서 옮겨다 놓은 이러저러한 자료들이 있었고, 그걸 정리하느라 일주일에도 몇 번씩을 오갔었다. 자료정리를 도와주었던 학생들에겐 할머니들과의 만남이 귀한 시간이 될 거란 생각에 가능하면 오가며 인사드릴 기회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2층에서 생활하시던 김복동 할머니는 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쉼터에서 일상 행사를 열 땐 활동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었다. 공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일 땐 언제나 보이지 않는 단상 위에 계신듯한 느낌이랄까? 대다수 피해자 할머니들에겐 외부에 노출되는 단시간의 모습과 그 밖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의 시간이 공존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김복동의 일상의 시간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노령과 병환 중임에도 스스로 공식활동으로 일정을 빼곡히 채우셨고, 늘 단상 위의 시간을 준비하고 계셨다. 살아내는 모든 시간이 오롯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도 사람도 다른 것엔 곁을 잘 내어주지 않으셨는데, 할머니의 온도가 차갑게 느껴졌던 분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임종 한 해 전에 진행된 할머니의 인터뷰에 기반한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김숨, 현대문학, 2018)가 쓰이기까지도 수많은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우리 곁에 있었지만, 지금도 그때도 그녀를 만나는 건 단상 위에서이다. 보이지 않을 땐 뭔가 다른 모습이 있을 거란 생각, 혹은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 것이라는 생각, 의심할 필요도 추앙할 필요도 없다. 그저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간혹 수십 년을 사귀어온 친구,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저 친구가 저런 면이 있었어? 하며 놀란다. 우린 할머니의 삶을 모두 알지 못한다. 할머니가 증언해온 어린 시절 단편적인 이야기와 67세가 넘어 인권운동가로 성장하기까지의 활동 몇몇을 알 뿐이다. 할머니의 20대는? 30대는? 그리고 40대, 50대는? 지금 서 있는 곳을 바꾸어야만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달처럼, 우리 세대가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가며 피해자를 바라보아야만, 그들의 온전한 삶과 역사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쨍하고 해 뜰 날 백시진(정의기억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2014년 1월 8일 평화로에선 수요시위 22돌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수요시위 버전 <해 뜰 날>이 울려 퍼졌다. 김복동 할머니의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온다”는 발언에서 착안한 순서였다. 할머니께서 주문처럼 자주 말씀하셨던 이 말은 희망의 표식이면서도 본인의 운동 원칙이었다. 밤이 지나면 동이 트듯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도 언젠가 해 뜰 날이 올 테니 좌절하지 말고 문제 해결만 바라보고 향해 간다는 원칙 말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굳은 의지는 시공간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15년 7월 김복동 할머니는 미국 시카고 소녀상 건립사업 관련 캠페인 중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활동가 라스미아 오데와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라스미아는 성폭력 및 고문 피해자로 1980년대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한 피해를 증언하였다. 김복동 할머니와 라스미아가 만났을 당시 라스미아는 미국 연방정부의 공격으로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에게 연대의 메시지와 함께 나비기금을 전달하였고 이 일화는 SNS를 통해 알려졌다. 어찌 보면 짧은 만남이었겠지만 적어도 나의 활동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지표가 되었다. 나는 올해 2월 팔레스타인에 다녀왔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연대하기 위해 그리고 김복동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였다. 나는 현지 활동가들에게 김복동 할머니와 라스미아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도 전시 여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제국주의·식민주의·군국주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해 뜰 날이 올 테니 희망을 잡고 살아가자는 김복동 할머니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김복동의 연대에 감사를 표하면서 팔레스타인에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실제 다양한 강연회를 기획하고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중 지역 청년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많이 알려야겠다며 대학 강연을 계획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강연 행사는 코로나19로 취소되었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할머니의 메시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내게 김복동 할머니는 약간 어려운 사람이었다. 항상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고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 김복동 할머니가 내 마음에 이렇게 크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김복동이 남긴 희망과 의지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 몇 달간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나도 할머니의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해 뜰 날은 돌아온다고. 지금이 어떤 상황이어도. 아무리 막막하더라도. 미국에서 만난 김복동 김현정 (배상과교육을위한위안부행동 대표) 2012년은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일명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지 5주년 되는 해였다. 당시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시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기초작업을 다지고 있던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CARE, 당시 가주한미포럼)'은 글렌데일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시회, '위안부의 날' 선포식, 캘리포니아주립대(칼스테이트 LA)강연회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하원 결의안 121(HR 121)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미국에 오신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대표를 로스앤젤레스에서 맞게 되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이미 만 86세의 고령임에도 자세는 꼿꼿하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며 쉬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담배 한 개비의 여유를 즐기면서 거침없는 화법으로 일본과 아베를 향해서는 직격탄을 날리는 분이셨다. 우리 활동가들을 향해서는 걸쭉한 농담을 건네시는 멋진 활동가이셨다. 당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할머니 일행을 챙기느라 바쁘게 뛰던 나를 며칠 관찰하시던 할머니가 “솔밭이 다 닳겠네” 하시는 바람에 다 같이 어찌나 웃었는지. 대중강연을 하실 때는 늘, “나이는 87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입니다”로 시작하셔서 당신이 겪으신 고초와 끌려다니신 수많은 국가, 장소들을 일일이 또렷하게 열거하셨다. 관중들은 그 고통의 깊이에 깊은 한숨을 쉬었고, 카랑카랑 또렷하게 증언하시는 할머니의 총기에 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미국의 주요 TV 방송국인 Fox News에서 카메라맨을 보내 뉴욕의 기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실 때는 할머니의 말씀에 감동한 기자가 눈물을 흘렸고, 이는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뉴스 보도로 이어져 화제를 모았다. 이후 한국을 찾아 수요시위에서 인사를 드렸을 때는 이미 할머니의 눈이 많이 나빠지신 상태셨다. 멀리서나마 건강을 기원했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1월 세상을 떠나셔서 미국에서도 로스앤젤레스 시의회,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등에서 추모의 시간을 가지고 글렌데일 소녀상과 샌프란시스코 동상 앞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할머니의 활동가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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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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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활동가 선배 김복동 김복동을 기억하는 페미니스트 A 대학생 때 처음 참가한 수요시위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만났다. 그날은 설 연휴였는데 연휴라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었고, 빌딩 숲 사이로 칼바람이 부는 평화로는 유독 추웠다. 으레 집회라고 하면 소리를 지르고, 무언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무서운 분위기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던 나에게 수요시위는 그 편견을 깨뜨려주었다. 할머니의 단호함, 그리고 우리의 요구사항이 분명한 건 맞지만 험악하지도 않고 무서운 분위기도 아니었다. 여성폭력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처음 인지한 나에게 오히려 수요시위는 '힐링'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학생들이 힘써 달라는 말씀 한마디에, 그때부터 나는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까이서 만난 김복동 할머니는 훨씬 더 단단하고 올곧으며 또 따뜻한 분이셨다. "그 험한 데에서도 살아서 돌아왔는데 그깟 암은 이겨낼 수 있다"라고 하시며 수술하고 닷새 만에 1인시위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침부터 비가 엄청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외교부 앞으로 출발했는데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도로는 주차장이고, 시작 시각은 가까워져 오고 나는 혼자 초조해져서 안절부절. 겨우 도착하여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당신의 몸만 한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이어나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물에 젖고 힘들어 불평하던 나의 마음을 반성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당신이 더 아프고 힘드실 텐데도 활동가에게 고생했다는 말씀 한 번 잊으신 적 없고, 가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도 챙겨서 쥐여 주시던 할머니. 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는 한동안 멍했다.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존경하고 사랑했기에, 김복동 할머니를 향한 마음의 크기가 많이 컸었나 보다. 추모 현수막을 제작하고 명단을 취합하고 장례식장을 지키고, 감히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들을 일처럼 해내면서도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할머니가 다시 수요시위 현장에 나오셔서 일본대사관을 향해 크게 소리치실 것 같은데. 나도 이렇게 힘든데 할머니를 사랑하는 가족과도 같았던 다른 활동가들의 마음은 어떨까 걱정도 되었다. 사시사철 틀어놓으시던 모기향, 뜨끈뜨끈했던 방바닥, 늘 손에 꼭 쥐고 계시던 10원. 이런 사소한 것으로부터 문득 할머니가 떠오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할머니는 떠나셨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잘 살아내고 있을까? 나 또한 잘 살아내고 있는 걸까? 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잊지 않고 살아야지. 끝까지 기억해야지. 누구보다 단단하게 살아낸 활동가 선배, 김복동 선생님을. 우리를 걱정하던 커다란 영혼 김목인 (뮤지션) 작년 초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했다. 음악 작업을 준비하면서 그즈음 돌아가신 김복동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파란만장한 삶의 행로를 노래로 담는 것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노래 한 곡으로 요약하기에 그 삶의 무게가 커서였지 싶다. 다시 선생님을 떠올린 것은 동네에서 모르는 할머니 한 분을 뵈었던 어느 날이었다. 옆 동네에 왔다가 길을 잃으신 분이었는데, 딸이 모시러 올 때까지 내 옆에 꼿꼿이 서 계시던 모습에 김복동 선생님이 겹쳐졌다. 할머님은 내게 "바쁜데 이래도 되오?"라고 물으셨고, 나는 얼마 후 그 할머니에 대한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인물을 포갠다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김복동 선생님의 커다란 삶의 궤적은 요약도 은유도 어울리지 않는 듯했고, 나는 결국 가사 어디에도 '김복동'이 나오지 않는 어느 할머니에 대한 곡을 제출했다. 그 개운치 않던 마음은 다큐멘터리 <김복동>을 보며 조금 해소되었던 것 같다. 김복동 선생님의 생전 모습들을 보며 나는 그날 모르는 할머니께 왜 선생님이 겹쳐졌는지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일본 정부를 꾸짖는 용감한 영혼은 한편으로 항상 우리를 걱정하는 할머니였다. 선생님은 항상 젊은이들을 걱정하고 계셨다. 집회에서 고생하는 젊은이들, 경찰에 연행되는 젊은이들, 재일조선인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역사의 영향을 받을 미래의 젊은이들. 아마도 선생님의 모습이 굉장한 힘을 지녔던 것은 가장 고통받은 이로써 우리를 걱정하는 커다란 영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지금도, 다음 생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80세에 석등 하나를 남기고 부산을 떠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하다. 선생님이 이후에 보여주신 삶은 타의에 의해 피해자가 된 한 인간이 자의로 존엄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사죄는커녕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대를 멀찍이 넘어서는 위대한 본보기였다. 끝까지 싸워달라는 할머니의 유언처럼 박미순 (사회복지사, 웹진 결 독자 참여) 내가 기억하는 김복동 할머니는 국제 사회에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증언하신 분이다. 당시 상처로 가득한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공개된 자리에서 힘든 이야기를 반복하셨을 할머니의 시간을 생각하니, 내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드셨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할머니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만 했지만, 그로 인해 국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일본이 감추고 있던, 감추고 싶은 과거를 알게 되었다.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등등 할머니를 기억하는 수식어는 너무나 많다. 정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신 분, 하지만 끝나지 않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싸워달라" 는 할머니의 유언처럼 말이다. 세계의 많은 이들이 기억할 그 이름, 김복동 할머니의 웃는 얼굴과 그분의 인권 활동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기억될 것이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도 김세진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작가) 나는 김복동 할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수요시위에서 먼발치에서 바라보거나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이 전부다. 그런 나에게 김복동 할머니는 항상 곱게 빗어 넘긴 백발, 고령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시고 시원시원한 말씀을 내뱉는 분으로 가슴 속에 남아 있다. 9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기백으로 단상에 서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발언을 하시는 모습이 마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처럼 느껴졌다. "사죄하라", "천억을 준다 한들 진정한 사과가 없는데 받겠느냐"(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김복동 할머니가 한 말) "미친 개 같은 소리 하지 마라"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위한 1인 시위 때 김복동 할머니의 한 말) 텍스트로만 접한다면 분노가 가득 찬 외침이라 느낄 수 있으나, 실제 할머니의 음성에는 분노보다는 마치 동네 악동을 야단치는 할머니 같은 인자함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에 적개심을 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당시의 끔찍한 전쟁범죄 피해 당사자의 분노는 어떻겠는가. 감히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는 분노가 아닌 평화와 희망을 바라보며, 자애와 자비의 자세로서 가해국인 일본을 향해 손을 내밀며 그 자리에 계셨다.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산다." 이런 말씀을 해오시던 할머니를 보며 우리는 소녀상을 세워 평화를 외치고, 그들을 용서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그들에게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 전쟁에서 벌인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우리와 함께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지. 김복동 할머니, 그리고 많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과 보여주신 자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고 미래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어도 함께 숨 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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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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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위안부’ 피해를 밝히는 증언자라는 사실을 넘어, 인권과 평화를 위한 거침없는 행보로 많은 이들은 그를 인권활동가, 평화활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김복동의 목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그가 뿌린 평화의 씨앗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8월 14일 기림의 날을 맞이하여 웹진 <결>은 김복동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겪었던 피해 사실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 이후 인권·평화 활동의 궤적을 살펴 김복동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주목했다. 김복동의 곁에서 함께 싸웠던 활동가부터 그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일반 시민까지, 그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총 다섯 개의 콘텐츠로 구성된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는 김복동을 향한 우리의 기억이다.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군인들에게 끌려 다닐 때 나는 나를 찾지 않았어...... (중략) 나 없이 살았어, 나 없이...... 눈을 떴더니 내가 예순두 살이었어. 까만 원피스에 까만 구두를 신고 집에 돌아왔을 때가 스물두 살이었는데... 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위안부’ 김복동 증언집/김숨 소설), 현대문학, 2018, 135페이지 나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 2012년 3월 8일(세계여성의날),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장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 평화활동가로 불렸던 김복동의 이야기이다.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스물두 살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김복동은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낯선 곳에서 일본군들에게 끔찍하고 참혹한 일들을 겪으며 당시의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때의 경험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순두 살에 ‘나’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신고하기까지 김복동은 그 긴 세월 동안 자기 자신을 애써 외면하고 또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눈떠보니 예순두 살, 그때서야 자신의 삶을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한 김복동은 2019년 1월 28일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30여 년간 치열하게 과거의 삶과 마주하며 자신을 찾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던 자신의 경험을 국내외에서 담담히 전하며 폭력에 짓밟히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을 같이 하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계속했다. 아시아 곳곳에서 겪은 8년간의 위안소 생활 김복동은 1926년 5월 1일 경남 양산에서 딸만 여섯인 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1941년 김복동은 양산 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세상이 흉흉하니 집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마을마다 나이 찬 여자 아이들을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김복동의 세 언니는 이미 서둘러 결혼을 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열다섯 살인 김복동은 어려서 괜찮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사람과 함께 김복동의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딸을 데이신타이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데이신타이가 뭐냐고 묻는 김복동의 어머니에게 그들은 군복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며 3년만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김복동은 끌려갔다.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부산으로 가서 이미 도착해 있는 20명 정도의 여성들과 함께 화물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그 후 대만,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다. 대만에서는 고향으로 편지를 쓰라고 해서 일본군이 불러주는 대로 적었는데, 김복동의 어머니는 그 편지를 받아보고 딸이 대만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일본군은 1939년 중국 광둥을 점령하고 위안소를 설치했다. 광둥은 일본군과 ‘위안부’가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거점이 된 곳이다. 김복동 일행은 광둥에 도착하자마자 군인 트럭을 타고 위생병원 같은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일본 군의관은 옷을 강제로 벗기고 성병 검사를 했다. 그 검사가 끝난 후부터 끔찍한 위안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홍콩으로 옮겨 석 달쯤 머물렀고 그 후 싱가포르로 이동했다. 싱가포르에서는 가끔씩 산속 깊은 곳의 군부대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위안부’ 10명쯤이 함께 갔는데 군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다. 싱가포르에서 몇 달 머문 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이동했다. 김복동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잊지 않으려고 수마트라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김복동 일행은 어쩌다 쉬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모여 앉아 울기만 했다. 일본이 이겨야 전쟁이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본이 이기기를 빌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지 않았고, 보름쯤 지나자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와서 김복동 일행을 태우고 떠났다. 김복동 일행이 간 곳은 남방군 제10육군병원이었다. 그곳에서 김복동 일행은 간호 훈련을 받았다. 호박에다 주사 놓는 연습을 하기도 하고 병원 청소도 했다. 제16군 사령부 직할부대 제4과 남방반이 작성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김복동은 1945년 8월 31일 용인(庸人)으로 이름이 실려있다. 김복동이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수마트라 소재의 위안소에 있다가 해방을 맞은 후 남방군 제10육군병원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김복동은 갑자기 군인이 오지 않게 된 지 보름쯤 지난 후 제10육군병원으로 이동했다고 정확히 기억했다. 제10육군병원에 있던 어느 날 이종사촌 형부라는 사람이 김복동을 찾아왔다. 군속인 형부에게 김복동의 어머니가 대만에서 딸을 꼭 찾아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군 수용소에 있던 김복동의 형부는 조선인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제10육군병원까지 왔다고 했다. 형부의 도움으로 병원에 있던 김복동은 다른 조선인 여자 300명과 함께 영국군 수용소로 거처를 옮겼다. 수용소에는 중국인, 서양인 등 1,000여 명이 있었다. 1946년 김복동은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사촌오빠와 사촌언니 그리고 어머니가 김복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물두 살이 되는 해에 돌아왔으니 8년 만이었다. 형부는 김복동이 ‘위안부’였던 것을 안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호부 생활을 했다고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셔서 김복동은 어쩔 수 없이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통곡을 하셨지만, 재취 자리라도 가야 부모로서 마음이 놓인다며 딸에게 결혼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김복동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바람과 경제적인 문제로 끝이 났다. 아이도 없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 후 김복동은 혼자 살았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이웃도 돕고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며 생활했다. 과거의 ‘나’를 단절시킨 채 현실만 바라보며 살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신고 전 동생에게 의논하니 동생은 조카들도 있는데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의 혼외 섹슈얼리티 경험, 그것도 일본 군인들에게 당한 성적 유린의 경험은 가족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치였을 것이다. 김복동의 가족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초반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이 그랬다. 그런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은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공론화되기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김복동은 며칠을 고민하다 1992년 1월 17일에 피해 신고 전화를 했다. 그때부터 김복동은 가족들과 멀어져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신과 온전히 마주하며,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많은 세계 시민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김복동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어 그때부터 김복동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더해갔고,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김복동은 1992년 제1차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증언했다. 그리고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하여 증언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스위스, 영국,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일본 대만 등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했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서 영상으로 증언하기도 했다. 법정이 열린 첫날인 12월 8일, 김복동의 사례는 ‘‘위안부’의 연행과 이송’과 관련하여 책임자 안도리키치(安藤利吉, 1944년 당시 대만총독)의 책임을 묻는 심리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김복동의 활동도 중간에 잠시 쉼이 있었다. 건강 때문이었다. 젊을 때 워낙 심하게 혹사당해서인지 김복동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김복동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몸을 돌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2009년 수술했던 눈의 증상이 재발하여 다시 서울 마포구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 머물며 2010년 재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인권과 평화를 위한 김복동의 행보는 계속되었다. 수요시위에 참여해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를 호소하는 것은 물론, 고령의 몸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국제 활동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 촉구와 전시 성폭력 피해의 재발 방지에 대한 국제여론을 이끌어 냈다. 김복동을 포함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콩고와 우간다 등 세계 무력분쟁지역의 성폭력 생존자들을 비롯한 세계 성폭력 피해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더 강한 목소리로 더 넓게 확산시켰다. 초국적 연대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한가운데 김복동이 있었다. 2012년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이 기금으로 매년 콩고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분쟁지역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했다. 2013년부터는 영역을 넓혀 베트남의 전시피해자와 그 자녀들에게도 기금을 전달했다. 김복동은 본인이 어린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느라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전쟁·무력 분쟁지역의 아이들은 자신처럼 살지 말고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김복동의 활동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공감과 존경을 받았다. 2015년에는 국제언론단체에 의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단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을 김복동과 함께 선정했다. 우리 정부도 평화와 인권을 위한 김복동의 노력을 인정해 2015년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2017년 11월 25일, 이날은 세계여성폭력철폐로 김복동은 정의기억재단과 100만 시민이 함께 드리는 ‘여성인권상’을 수상했다. 이때 받은 상금을 씨앗 기금으로 하여 ‘김복동 평화상’을 제정해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전시 성폭력 철폐를 위해 활동하는 국내외활동가들과 단체를 지원한다. 이 상의 1회 수상자는 우간다 내전의 성폭력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아칸 실비아가 선정됐다. 김복동의 관심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2011년 3월 일본 동북지역 대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을 제안하고 1호로 기부했다. 2017년에 재일조선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김복동 장학금을 전달했고, 그의 마지막 유지 중 하나 또한 재일조선학교 지원을 계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암 투병의 와중에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인권과 평화를 전하던 김복동. 마지막까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며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하며 2018년 9월에는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위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암 투병 끝에 2019년 1월 28일, 93세로 생을 마감하며 영면에 들어갔다. 김복동의 목소리와 행보는 전 세계 시민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기꺼이 기억의 통로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찾고자 힘들게 내디딘 그의 발걸음은 큰 울림이 되어 우리 사회의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확장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