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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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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가 기억하는 김복동은 인권활동가이자 투쟁가였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담담하게 증언을 하고 일본을 향해 거침없이 반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는 당당한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내려오면 그에게도 여느 사람처럼 일상이 찾아온다. 김복동은 담배를 즐겨 피우고, 종종 유쾌한 농담을 즐겼다. 실명된 왼쪽 눈을 선글라스로 가리면서도, 사진에 찍힐 땐 밝게 웃는 사람이었다.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를 준비하면서 ‘위안부’ 문제 활동가, 연구자에 국한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김복동에 관한 글을 받았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저마다의 시각으로 바라본 김복동의 이야기를 모으고 싶었다.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모은 글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전시 성범죄를 이 땅에서 뿌리 뽑기 위해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김복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복동은 많은 사람에게 인권활동가, 평화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단상에서 내려온 일상 속의 김복동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때마침 나눔의 집 내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연구원 마리오 씨(본명 야지마 츠카사, 失嶋 宰)로부터 김복동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던 당시 찍은 일상 사진들을 받았다. 사진이 찍힌 정확한 일시와 당시의 상황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김복동이 <나눔의 집>에 기거하던 시절에 찍힌 이 사진들을 통해 단상 아래로 내려온 김복동의 일상을 웹진 결의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이번 포토스토리를 기획했다. Credit 사진 제공 : 나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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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교실에서 만난 일본군'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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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만난 일본군 '위안부' - '위안부' 수업의 성찰적 진화 일본군'위안부' 문제(이하 '위안부' 문제)는 역사 교사들이 남달리 생각하는 수업 주제 중 하나다. 전쟁 범죄를 통해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사례라는 점은 '이 역사적 진실을 아이들과 꼭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역사 교사들이 가지는 일종의 책무감이다. '위안부' 문제가 단지 참혹하고 비극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아이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피해자들이 용기 있게 증언에 나섰고 보편적 인권을 위해 싸우는 감동적인 과정이 있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재,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위안부' 문제는 국가교육과정에 공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특별 수업의 형태로 교육이 이뤄진 과거와 달리 지금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만 해도 필수 과목인 『한국사』와 선택 과목인 『동아시아사』를 통해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를 배운다. 교과 활동을 넘어 동아리 활동이나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다양하게 교육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국가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자체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교육이 충실하게 이행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 교육을 둘러싼 성찰과, 그를 통한 교육의 진화에 있다. 역사 교사들과 교육 연구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과 함께 나눌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해왔다. 이는 오늘날 다양한 방식으로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도 '역사화'의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종의 당사자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그 '역사화'에 나름의 실천을 담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현장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위안부' 교육을 둘러싼 고민 지점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교육 현장에서 성찰한 지점을 '감수성', '삶과 만난 실천', '보편과 인권의 이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소개하려고 한다. 감수성 :수업에서 고통을 전시하기만 할 수는 없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상을 도저히 끝까지 보기 힘들었어요. 속이 울렁거리고 힘드네요. 이전에 봤던 '위안부' 영화도 다 못 보고 나오고 말았어요” -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공개 수업을 다 보지 못하고 뛰쳐나간 필자의 동료 교사 진실은 그 자체로 실천의 도구가 되고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는 공론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에서 역사적 진실이 확인되었고 '할머니'들의 실천을 통해 진실이 역사화 되었다.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같은 시민단체의 활동가와 학계에서 성실하게 채록해온 당사자들의 구술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역사 텍스트다. 이를 기반으로 한 영화 등의 영상 텍스트도 최근에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애써, 일본 정부가 힘써 외면하던 진실을 가르치고 나누는 것 자체는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많은 역사 교사들은 자칫하면 '위안부' 문제 수업이 그들의 고통을 전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한다. “'위안부' 문제와 같이 끔찍한 사안은 초등학생이나 저학년을 대상으로 다룰만한 주제가 아니”라며 방어적으로 수업하는 경우도 많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제작된 6학년 사회 교과서(국정)에서는 피해자들에 대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고 서술하여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1]. 논란에 대해 당시 교육부는 '어린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서술을 할 순 없다'고 응수했다. 역사적 사건 서술에 대한 최소한의 구체성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최근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많이 제작되어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거나 수업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한' 폭력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심지어 그 묘사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 이는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성찰적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수업 자료로도 부적절하다. 앞서 제시한 나의 동료 교사의 거부감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단순한 피해 전시에서 더 나아간 수업은 어떻게 가능할까? 일제강점기 이후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실천과 행위를 충실히 역사화하고 수업에 반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 이후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이어졌고,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정의기억연대)'과 같은 시민단체와 학계가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연대했다. 이 문제가 한국 사회를 넘어 세계적인 보편의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역사 교사들은 1990년대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싸워온 역사를 수업에서 다루려고 노력한다. 역사 교과서에 짤막하고 피상적으로 서술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마냥 전시하지 않았다. 이를 직면하고 나아가 용기를 내어 실천하는 삶을 택했다. 놀라운 실천이었던 수요시위, 베트남 전쟁 피해자와의 연대, '나비기금' 등도 충분히 역사 수업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할머니들을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부정적 경험만을 수업에서 다룰 필요는 없다. 이는 할머니들이 거대한 역사적 폭력에 수동적으로 당한 존재로 여겨지게 할뿐더러 그들의 비극을 단지 자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든다.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루기 위해 오늘도 많은 역사 교사들이 자신의 수업을 개편해나가고 있다. 삶과 만난 실천 : '위안부'를 주제로 '역사하기' 민주시민교육[2]은 최근 교육 현장에서 주목받는 화두 중 하나다. 민주시민교육의 강조와 더불어 학교 현장에서는 비교과 활동을 통해 사회 문제를 실천적인 교육으로 다뤄보고자 하는 교사와 학생들의 시도가 이어졌다. 초기 단계부터 지금까지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 '인권동아리'나 '역사실천동아리' 등이다. 시민사회, 사회 이슈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동아리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동아리들은 수요시위에 함께 참여하고 학내에 소녀상을 세우거나 관련 기념품을 판매하여 단체에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초창기만 해도 학생들을 데리고 '시위'에 나가거나 민감한(?) 이슈와 관련해 직접 실천하는 동아리 활동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활동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수요시위나 문화 공연도 많다. 역사 교사와 학생들의 의지와 실천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매우 실천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학생들을 아픈 역사와 직접 만나게 하고 나아가 스스로 역사적 주체로 서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프로젝트 수업, 학생자치 프로그램, 동아리 등으로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의 원형으로는 최종순(전 누원초 교사, 퇴직)의 수업[3]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해당 교사는 90년대 후반부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교실로 초대하고 그들의 증언을 학생들이 직접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업을 해왔다. 사회 이슈 자체를 모두 '민감한 것'으로 치부했던 당시 분위기에서 이러한 시도는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러한 수업 방식은 학생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 개개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교실에서의 강렬한 경험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나아가 다양한 교과와 융합하여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마중물이 되어 오늘날 실천적인 '위안부' 문제 수업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초임 시절 첫 제자들과 함께 방학 때 서울로 올라와 수요시위에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 한 학생의 대표 연대 발언 장면은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퍽 인상 깊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고등학교에서 스스로 역사 동아리를 조직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했다. 나아가 지금은 대학에 진학해 역사 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통해 '역사하기'를 체험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 흐뭇한 일이다. '경기도교육청 꿈의 학교'인 의정부 평화나비학교의 사례[4]는 이러한 실천형 '위안부' 문제 교육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 대학생, 학부모, 중·고등학생 100여 명으로 구성된 '평화나비학교'는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을 2년여간 이어왔다. 피해자 할머니를 모시고 증언을 듣는 자리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관련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였으며, 의정부 시내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진행해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2015.11.07. 건립). 이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함께 공부하고, 실천 방안을 고민하며, 활동을 조직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각 학교의 학생자치회와 연계하여 작은 소녀상을 세우는 사업도 전국적으로 성행했다[5]. 학생자치회 학생들이 직접 캠페인을 벌여 기금을 모금하고 학교 내 공간에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여 공공역사를 체험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역사를 삶의 문제로 가져오는 실천적 배움이 어떤 교육적 효용이 있는지 몸소 보여준 사례다. 보편과 인권의 이름 -보편지향의 '위안부' 문제 수업을 향하여 학생 K : 와, 일본놈들. 우리도 나중에 일본 여자들한테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학생 B : (피식 웃으며)'야동' 보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일동 웃음) - '위안부' 문제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의 대화(2018) 특성화고에 근무하던 시절, '위안부' 문제 수업을 마치고 나가면서 들은 대화다. 스치는 대화였지만 찰나의 순간에 느낀 충격을 잊지 못한다. 대화를 들으면서 '내 수업은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 경력이 많지 않던 시절, 진실을 알린다는 명목하에 할머니들의 고통을 전시하기만 한 수업의 처참한 결과였다. 학생들이 소속된 '남초 집단'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던 걸까? 당시 나의 수업 내용과 디자인에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선, '위안부'라는 소재가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젠더 이슈라는 점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증오라는 감정이 곧잘 남에게 전이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교실에서 교사의 분노는 학생들에게 쉽게 전파된다. 그 분노의 진원지는 어떤 것이었나. 민족과 국가라는 시각에서만 수치심과 분노를 드러냈던 것이 잘못이었다. '위안부 교육'은 보편적 인권에 입각해 젠더적 접근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다층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교육적 효과와 함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2017년 1월, 일본 삿포로를 방문하여 일교조(일본 교직원노동조합)의 교사들과 만났다. 동아시아 평화교육과 관련된 수업 사례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에서 '히라이 아스코' 선생님의 수업 사례를 들었다. 히라이 선생님의 발표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가슴 깊이 남았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상품화 문제일 뿐 아니라 남성의 인권도 침해하는 문제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해요.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국가에서) 남자라는 존재는 국가가 보낸 빨간 봉투(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무조건 전쟁터로 가야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여성과 동침시켜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 아닌가요? 그것 자체가 남성이란 존재에 대한 비하이며 인권침해에요. '위안부' 문제는 여성만이 분노할 문제가 아닌 거죠. - 히라이 아스코(삿포로 마코마니아 중학교 교사) 히라이 아스코 선생님은 '위안부' 문제가 단지 여성 인권에만 국한된 주제가 아니라 남성들 역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라는 점을 짚었다. 아이들과도 그 점에 관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편인권의 문제로 확장해서 접근하여 큰 교육적 영감을 남긴 사례였다. 아무리 좋은 수업과 교육적 실천이라도 계속 고민의 수준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을 잃고 낡은 것이 되고 만다. '위안부' 문제 수업의 생명력도 마찬가지다. 그 생명력은 성찰에서 나온다. '위안부' 문제 수업의 정신을 살려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성찰적으로 수업한 사례들도 있다. 맹수용(경기 의정부고) 선생님의 수업 사례[6]가 대표적인 경우다. 냉전과 전쟁에 대한 세계사 수업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당시 지역 사회의 이슈였던 기지촌 여성 문제를 연계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관리와 통제 하에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기지촌 여성에 대한 고민은 강제동원의 고통에 시달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연계하여 인권 감수성을 벼를 수 있는 사안이다. '기지촌 여성'을 국가폭력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여성의 존엄과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했다는 것에서 맹 선생님의 수업은 또 다른 '위안부' 문제 수업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이 원해서 했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요?'라고 무심하게 말을 던졌던 일부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이 일본 극우의 논리를 대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성찰하고 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국가폭력과 여성 인권 그리고 개인의 삶이 역사 수업을 통해 교차한 순간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는 전시 여성 성폭력의 문제,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입니다.” 2018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은 대통령의 발언이다. 역사 교사들의 '위안부' 문제 수업이 한일 갈등과 반일주의의 좁은 폭에 갇힌다면 할머니들의 실천을 제대로 학생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 교사들은 스스로의 수업에 물음을 던지며 '위안부' 문제 수업을 고민하고 있다. 보편적 인권을 아이들과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 수업을 위해서. '용감한 할머니들'의 삶을 이어가기 위하여 '용감한 할머니 이야기'. 전국역사교사모임이 3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한 역사 수업 책에서 김선옥(현 호치민한국국제학교 교감, 역사교사)이 '위안부' 문제 수업 관련 원고[7]를 쓰며 붙인 제목이다. 여기에서 어떤 의지 같은 것을 느꼈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민족 서사에 가두거나 여성의 순결주의와 같은 헛된 관념의 포로로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용감한 할머니'라는 호명은 그들 자신과 연대자들의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하겠다는 생각일 테다. '윤회'라는 것이 물리적 신체의 재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업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이어지는 개념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는 많은 사람의 삶에 '윤회' 되기에 충분하다. 그 길에 역사 수업이 공헌할 바는 없을까. '정의연' 논란으로 많은 이들이 참담함을 느낀다. 해당 논란 자체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 논란이 확대되고 오인되는 과정에 고통을 느꼈던 사람, '위안부' 문제가 역사화되는 치열한 과정을 알기에 더욱 상처받은 사람 등…. 많은 역사 교사들은 “아이들을 수요시위에 마음 편히 데려갈 수 없게 될까?”, “할머니들과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오욕과 상처를 받게 될까” 우려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역사 교사들은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한 당사자로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역할을 자임할 것이다. 주체적 의식 속에 만들어가는 '위안부' 문제 수업을 기대해보자. 더불어 이러한 수업을 통해 동료 시민으로 성장할 아이들을 함께 떠올려보자. 각주 ^ 2015년 당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져 격론이 일어났던 때다. 공교롭게도 2016년 초등 6학년 사회교과서(사회 6-1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 자체가 제외되어 크게 논란이 되었다. 교육부는 '초등 학생의 발달수준을 고려해 위안부라는 표현을 뺐다'고 해명했다. 2018년 초등 6학년 사회교과서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진과 설명이 다시 추가되었다. (남지원 기자, 「초등 사회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설명 되살아났다」, 경향신문, 2018) ^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다. 민주주의, 인권, 평등, 평화, 환경, 미디어 리터러시 등 다양한 주제가 민주시민교육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별 교육의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가치와 태도, 역량을 높이고 참여와 실천으로 확장하는 포괄적인 교육을 뜻한다. ^ 최종순, 「나는 아이들과 무엇을 했는가?」, <역사와 교육 18호>, 2019. ^ 우현주 외, 「평화나비학교: '평화나비학교'가 꿈꾸는 마을 학교」, <역사교육> 110호, 전국역사 교사모임. ^ 이화여고 학생 동아리 '주먹도끼'와 지도교사 성환철 교사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다. '작은 소녀상 건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2015년 졸속적으로 진행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학내에 가로30cm 세로 30cm 크기의 '평화의 소녀상'의 축소판 구조물을 건립하는 운동이다. 2017년 기준 전국 100곳 이상의 학교에 건립되어 화제를 모았다. ^ 맹수용, 「지역사를 활용한 세계사 수업-냉전과 미군기지, 그리고 기지촌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126호, 2019. ^ 김선옥, 「용감한 내 이웃 할머니의 이야기」, <역사교실:역사에서 배우고 삶으로 가르치는>, 비아북,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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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일본은 어떻게 하이난도(海南島)에 위안소를 세우고 ‘위안부’를 동원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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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하이난도(海南島)에 위안소를 세우고 '위안부'를 동원하였나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중요한 논쟁은 위안소 설치와 운영 및 '위안부' 동원에 일본 정부가 직접 관련되었는지와 강제성이 있었는지 여부이다. 일본 정부는 1992년 1월 12일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의 발표와 1993년 8월 4일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발표를 통해 군과 정부의 직접 관련성 및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우파들은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가 직접 위안소 설치를 명령한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일본 정부의 직접 관련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본군이나 정부가 '위안부' 동원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민간업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위안부'를 모집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수용한 아베 정부는 이전의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이하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는 일본군이 하이난도(海南島)를 점령한 이후 타이완총독부와 민간업자를 활용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는 데에 관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들 자료는 1939년 3월 17일부터 1943년 8월 5일 사이에 작성된 60여 종류 328페이지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관련 자료들은 타이완의 타이완성문헌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가운데 아래 자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 業務部長, 「海南島バラック建築ノ件」,1939.3.29. 파일번호 J_tw_002. ● 「海南島海軍慰安所ノ件」, 1939.4.4, 파일번호 J_tw_005.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 営業部調査課長, 「海南島慰安所営業資金貸付ノ件」, 1939.5.6. 파일번호 J_tw_014. ● 台拓事業課長, 「海南島建築事業ニ係ル件」, 1939.5.11, 파일번호 J_tw_016. ● 南支課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8.16, 파일번호 J_tw_032. ● 海口事務所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9.14, 파일번호 J_tw_034.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문서는 다음의 2가지 측면에서 '위안부'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1939년 이후 일본군의 전선이 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 태평양 등 남방으로 확대되면서 대륙의 위안소 설치 운영 방식을 섬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이 이들 지역에 어떻게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는 점이다. 둘째, 이 문서들은 일본군, 일본의 정부 기관, 국책회사, 민간업자가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내용을 제공한다. 다른 지역으로 군부대가 이동하면 군인들의 수요를 대체할 수 있는 민간인들이 거의 없는 섬 지역에서는 위안소 운영의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런 곳에서 민간업자들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민간의 위안소 업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경제행위가 아니라 군의 위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위안부' 관련 문서는 남방에서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국가 기관과 민간인 업자들이 긴밀한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인 것이다. 1. 복대공사(福大公司)의 '위안부' 모집 1938년 10월 일본군이 광둥(廣東)을 침공하자 광둥의 정세 악화를 염려한 중국은 하이난도 주둔군을 광둥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1939년 2월 일본군은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를 강화하고 하이난도에 군 작전기지를 설치해 남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방어력이 약해진 하이난도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하이난도를 점령하고 여기에 주둔하면서 하이난도에 위안소를 설립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타이완척식의 업무부장이 타이완총독부의 나가세 촉탁에게 보낸 1939년 3월 29일 자 문서이다.[1] 여기에는 "군 정보부장이 이 지역 해군 무관실을 통해 우리 회사에" "요리점 및 위안대 관계자 각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 건축 2동(건평 각 53평 반)"을 지어달라고 한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이 문서의 수·발신 관계를 역으로 읽으면 하이난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하이난도에 위안소 설치를 결정하고 그 구체적인 사항을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타이완척식에 의뢰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문서의 작성으로부터 약 1주일 정도가 지난 1939년 4월 4일 자 문서[2]에는 타이완총독부의 기하라 조사과장이 타이완척식의 다카야마 이사에게 "예기 10명, 예기 겸 창기 30명, 창기 50명을 공급"해달라고 의뢰한 내용이 있다. 타이완총독부의 이러한 요청에 따라 타이완척식은 기존의 예·창기업에 종사하고 있던 "가케츠(花月)와 다케노야(竹之家)란 업소를 통해" 우선 "예창기 10명을 파견하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 "3만 엔"까지 빌렸다. 동시에 타이완척식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업무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직접 "취급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으므로 우선 복대공사(福大公司)에 별도로 대부"하는 등 직접적인 관련성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처럼 타이완척식은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전달된 군의 '위안부' 공급 의뢰에 대해 우선 급한 대로 10명의 예·창기를 파견하였고, 이후 1939년 4월 6일에는 복대공사와 하이난도에서의 위안소 운영에 관한 정식계약을 체결하였다. 타이완척식 사장이 작성한 문서[3]에 의하면, 이후 복대공사는 타이완 각지에서 '위안부'를 모집하여 1939년 4월 18일 기륭(基隆)항을 출발하는 타이완척식 소유의 긴레이마루(金令丸) 선박을 통해 예기 4명, 작부 7명, 관계자 8명을 하이난도로 데리고 온다. 타이완척식과 복대공사 간 정식계약 체결일이 1939년 4월 6일임을 고려하면, 계약 후 12일 만에 사람을 모집하고 도항 절차를 모두 마친 후 여성과 관계자를 배에 태워 이동시킨 것이다. 복대공사가 계약체결 이후 발 빠르게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촉박한 시간이다. 이렇게 '신속한' 업무 진행이 가능했던 것은 '위안부'의 모집과 도항에 관한 사항은 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행정기관인 총독부를 통해 의뢰된 업무라 관련 기관이 긴밀하게 협조한 결과라 판단된다. 특히 기륭항을 통해 출발한 도항자 명부에는 1922년 11월 5일 생으로 1939년 당시 17세였던 우사미(宇佐美)라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는데[4], 이처럼 미성년자를 풍속업(매춘업)에 종사시키기 위해 도항시키는 것은 당시 일본의 국내법으로도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자를 모집하고, 승선자 명부에 이를 기록하여 도항할 수 있었던 것은 경찰과 외무성 등 관련 기관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어서 타이완척식의 사업과장이 총독부 임시 남지조사국 이사장에게 보낸 1939년 5월 9일 자 문서[5]를 보자. 이 문서는 "해군 무관실이 타이완총독부를 통해 조회한 건에 관하여 별지대로 수배를 마치"고 "산야(三亞)방면으로 향하는 특요원 10인 1조(5월 23일 긴레이마루 선박으로 출항예정)"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킬 예정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문서의 뒤쪽에 산야방면행 특요원 명부가 붙어있는데 이 명부에는 작부 8명과 관련자 6명 등 총 14명의 이름, 본적, 현주소, 출생일이 기록되어 있다. 작부 가운데에는 1916년 9월 17일생으로 당시 23세였던 경상북도 안동군 출신의 조선인도 있다.[6] 이처럼 복대공사는 여러 행정기관의 협조를 통해 '위안부'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담당하였다. 2. 해남건물공사(海南建物公司)의 위안소 건설 타이완척식은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 모집을 복대공사에 위임한 것과 동일하게 위안소 건설 업무 역시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여 위임한다. 이를 위해 하이난도에 필요한 건축사업을 진척시키기 위한 대책 회의가 1939년 4월 25일과 26일 양일간 타이완척식의 사장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 타이완척식에서는 사장, 구사카(日下) 이사, 오니시(大西) 과장이, 총독부에서는 나가세 촉탁이 참가하였다. 회의를 통해 "하이난도에서의 건축사업은 해남건물공사의 이름 하에 독립회사로 영업한다. 단 법률상의 의미로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우리 회사의 사업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사업경영의 편의상 회사를 독립시켜 해남건물공사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내용을 기록한 문서[7]에는 해남건물공사의 담당 업무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이미 다무라 구미(田村組)에 하청을 준 해군 위안대용 막사 및 해군조사대용 막사"는 "공사 완성 후 해군에서 대금을 받는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회의내용은 타이완척식의 도쿄지점장, 중국 광둥의 모리 참사, 하이커우(海口)에 있는 총독부 나가세 촉탁에게 보고되었다. 위안소 완공 이후 그 대금을 해군에서 받는다고 명시한 것으로 보아 위안소 건설업무의 원 발주처는 해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해군이 총독부를 통해 위안소 건설을 위촉하자 총독부는 이를 다시 타이완척식에 위촉했고, 위안소 건설을 위촉받은 타이완척식은 해남건물공사를 설립하여 이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이후 해남건물공사를 통한 위안소 건설은 예정대로 진척되었고 타이완척식은 이러한 상황을 원래 사업 의뢰 기관인 타이완총독부와 해군에 보고했다. 1939년 5월 11일자로 타이완척식의 오니시(大西) 사업과장이 타이완총독부 남지조사국과 해군 무관실로 보낸 문서[8]에는 완성된 건축물에 대한 상세 정보와 함께 "해군 위안소 총건평 291평(대소) 5동 준공예정 5월 20일"이라는 준공 계획이 담겨 있다. 이 내용은 앞에서 살펴본 1939년 3월 29일 자 위안소 건축 관련 문서에 적시된 '요리점 및 위안대 관계자 각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 건축 2동(건평 각 53평반)'과는 서로 다른 건물이라고 판단된다. 타이완척식에서 건축업무를 위임받은 해남건물공사는 다무라 구미에게 건축 실무를 담당하게 하여 위안소 건물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공사 진행 과정 중 회의를 통해 '공사 완성 후 해군에서 대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으나, 다무라 구미가 공사를 마친 후에도 공사대금은 지불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1939년 8월 16일자로 타이완척식의 남지과장이 총독부의 하이커우 사무소장 앞으로 공사대금 미지급문제와 관련된 회신을 요청하는 문서[9]를 보낸다. 여기에 대하여 하이커우 사무소장은 "해군위안소 건물의 하명은 기술자가 없어" "다무라 구미의 기술자에게 설계 및 그 외의 것을 시행한 것으로" "당시 군의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해군 위안소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타이완척식이 건설해주는(서비스의 의미)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10] 등과 같은 답변을 하면서 해군이 대금을 주지 않으므로 위안소 건물을 타이완척식 소유로 하여 대금을 변제할 수밖에 없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즉,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자료의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 건설과 운영 및 '위안부' 모집 업무를 타이완총독부에 의뢰하자 총독부는 이를 다시 타이완척식에게 의뢰했다. 타이완척식은 해남건물공사에게 위안소 건설업무를 담당시키고, 복대공사에게는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 업무를 맡겼다. 특히 타이완척식은 본인들이 '위안부' 모집과 관련된 업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회사인 복대공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각주 ^ 業務部長, 「海南島バラック建築ノ件」,1939.3.29. 파일번호 J_tw_002. ^ 「海南島海軍慰安所ノ件」, 1939.4.4, 파일번호 J_tw_005.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 台拓社長, 「海南島調査隊用並ニ軍用資材供給ノ件」, 1939.4.21, 파일번호 J_tw_010.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 台拓事業課長大西文一, 「人員並ニ物資輸送ノ件」, 1939.5.9, 파일번호 J_tw_015. ^ 営業部調査課長, 「海南島慰安所営業資金貸付ノ件」, 1939.5.6. 파일번호 J_tw_014. ^ 台拓事業課長, 「海南島建築事業ニ係ル件」, 1939.5.11, 파일번호 J_tw_016. ^ 南支課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8.16, 파일번호 J_tw_032. ^ 海口事務所長, 「建築事業進捗状況ニ関スル件」, 1939.9.14, 파일번호 J_tw_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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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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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과거사 청산과 화해에서 독일은 일본의 대립 모델로 여겨진다. '과거사 청산 모범국 독일'의 이미지를 완성한 계기는 2000년 독일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을 통한 외국인 강제노역 배상이었다. 그런데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독일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헤레로 전쟁'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나, 냉전의 기억이 나치의 기억을 대체한 장소들(가령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이 그렇다. 전시에 국가와 군대가 자행한 성 착취와 성범죄 역시 뒤늦게 공론화되었다. 그리고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치 정부가 '미풍양속' 보호와 성매매 근절을 명목으로 수용소에 격리한 여성들, 성병과 동성애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겠다며 독일 방위군이 직접 만들고 관리한 유곽에 동원된 점령지 여성들, 남성 수인(囚人,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수용소에 갇힌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죄수와는 구별되어 사용된다)들의 노동력 '제고'를 위해 친위대가 수용소 안에 설치해 운영한 매춘소에 동원된 여성 수인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 주둔했던 독일군의 성폭력 피해자들, 그리고 종전 후 동유럽과 독일에서 자행된 연합군(특히 소련군과 미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은폐된 성 착취의 역사가 드러나기까지 이 이야기들이 반세기 넘게 침묵 된 끝에 세상에 나온 과정 그 자체가 이 일이 사회적으로 다루어져 온 방식을 말해준다. 함부르크의 사회학자 크리스타 파울(Christa Paul)은 1989년 가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나치 정부 시절, 수용소에서 남성 수인을 위한 강제 성매매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수용소 수인들과 피해자를 찾아내 인터뷰하고 조사 결과를 『강제성매매(Zwangsprostitution)』(1994)라는 책으로 펴냈지만, 당시에는 대중적 관심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빈 대학 연구팀이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유곽을 재발견해 전시회 <나치 수용소의 성(性) 강제노역>(2005)으로 대중에 공개해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미 종전 직후부터 내내 드러나 있었다. 다만 보지 못했을 뿐이다. 부헨발트 수용소 생존자였던 정치학자 코곤(Eugen Kogon)은 수용소 폭력을 다룬 『친위대 국가』(Der SS-Staat)를 1946년에 출간했는데 여기에 '수용소 유곽(Bordell im KZ)'이라는 제목이 붙은 2쪽 반 분량의 독립된 절이 있다. 이 책은 나치 폭력 연구의 고전이 되어 수많은 연구자가 읽고 인용했지만, 이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없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1947)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독일인만 드나들 수 있는 사창가가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책은 1950년대 중반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이 부분을 눈여겨본 이는 없었다. 코곤의 서술에는 의도했든 아니든 성매매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담겨 있다. 그는 멀리서 본 매춘소 여성들의 얼굴에 난 부스럼 딱지를 성병의 흔적으로 단정하고 원래 난잡한 여자들이었을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매춘소 여성들 얼굴의 부스럼은 오랜 수용소 생활로 인한 영양실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코곤은 이들이 원래 여성 수인들로 6개월 후 석방을 대가로 매춘소에 자원했다고 언급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조프스키가 1993년 출간한 나치 연구서 『테러의 질서: 유대인 수용소』에서는 이들이 "매춘부(Hure)"라는 멸칭으로 언급된다. 이는 당시에나 수십 년 후나, 가해자나 증언자나 연구자 모두 인습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수용소 유곽은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수치 중의 수치'로 은폐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유곽 막사는 눈에 띄지 않게 지어졌고 관련 문서는 "기밀"로 관리되었다. 수감자들 사이에서 이곳은 시치미를 뚝 떼고 "모처(Sonderbau)"로 통했다. 종전 후에도 나치 과거사의 집단기억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유곽 막사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부터 철거되기 시작해 지금은 두 곳만 남아 있다. 최대 희생자이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유대인 집단에만 피해자 연구가 집중된 결과 주변부 희생자들(동성애자, 집시, 유전병자, 범죄자, 성매매 여성 등 사회 주변 집단)의 존재는 가려졌다. 수용소 시설을 기념관(Gedenkstätte)[1]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유곽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묻혔다. 가령 구동독의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에는 탐방객이 혹시 이에 관해 질문하거든 가능한 한 말을 아끼라는 안내 지침이 있었다. 이 일의 증인인 수용소 생존자 단체들 역시 유곽을 하찮게 치부하고 기억에서 배제했다. 기억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기 이 문제가 역사학의 관심사로 들어온 것은 1990년대 기억연구가 활성화되면서부터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 여성사와 구술사의 성장이 있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자극받은 여성사 연구자들은 성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만들고 나치 연구에 젠더 범주를 추가했다. 전쟁을 둘러싼 여성의 경험이 발굴되었고 성을 매개로 한 폭력과 "잊힌" 소수 집단 피해자가 조명되었다. 2000년대 중반에 비로소 독일 사회가 이 문제에 호응한 것은 조직적 강간이 전쟁 무기로 사용된 구(舊)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 내전의 참상이 알려지며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이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07년 9월, 성(性) 노역 여성 수인 동원이 시작된 라벤스브뤽 구(舊) 여자수용소에서 열린 여름 대학은 <20~21세기 전시 강제성매매>를 주제로 나치 수용소의 성 강제노역, 동아시아 일본군‘위안부’, 동유럽 전시 강간을 나란히 다뤘다. 수용소 매춘소에 관한 로베르트 좀머(Robert Sommer)의 박사학위 논문 「수용소 유곽(Das KZ-Bordell)」이 2009년 출간됨으로써 이 주제는 나치 역사의 한 장으로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다. 강제수용소 성(性) 노역 문제를 최초로 제대로 제기한 크리스타 파울은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혼란을 느꼈다고 썼다. 독일 역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장으로 구석구석 파헤쳐졌다고 믿은 나치의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금지하는 동시에 특수 목적 성매매의 포주 노릇을 수행한 나치의 이중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이 문제가 오래도록 침묵에 갇혀있었던 이유는 첫째, 성매매 여성에 대한 인습적 편견과 성적 폭력에 대한 낮은 사회적 감수성이 전후 시대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주변부 피해자들에게는 나치 피해자의 법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독은 정치범과 인종범죄 피해자만, 오스트리아는 정치범만을 인정했으며, 반파시즘 운동의 계승자를 자처한 동독 정부는 모든 책임 인정을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인종주의 성 정책의 결과인 나치 전시 성폭력은 유대인이 배제된 나치 범죄였다. 그 공론화를 위해 피해자 이미지를 일원화하는 홀로코스트 집단기억을 극복해야 했다. 겹쳐진 맥락에서 피해를 복원하는 일 지난 십여 년간 독일의 전시 성폭력 연구는 진전을 거듭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유럽에서 자행된 독일군의 성범죄를 넘어 마지막까지 터부시된 주제였던 연합군의 성폭력에까지 도달했다. 미리암 겝하르트의 『군인들이 왔을 때』(2015)는 성폭력의 가해자를 "붉은 군대" 뿐만 아니라 연합군 전체, 특히 미군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전시 성폭력 문제에서는 전범국과 연합국 모두 자유롭지 못하며, 이 때문에 역사적 정의 담론의 국가적 한계가 지적된다. 독일 여성들의 전시 성폭력 피해를 역사적으로 다루는 일은 정치적으로 까다롭다. 독일인의 피해를 말함으로써 나치 범죄를 상대화하고 독일을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로 전도시킬 수 있다는 주장,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독일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려는 이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들 때문에 이 문제가 최후까지 침묵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이제는 꺼낼 수 있는 이유는 꾸준한 과거사 정리 노력으로 독일 사회가 더 다양한 소수집단 희생자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치 국가와 군대의 성폭력 피해자를 인정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작업은 느리게 진전하고 있다. 이는 이제 공공역사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피해자의 복권에도 이바지했다. 그러나 피해 사실에 대한 인정과 배상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정과 배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제는 너무 늦어 상징적인 의미에 그친다. 그러나 강제노역 피해 배상 집행 완료 후 새롭게 밝혀진 과거사는 과거사 정리에는 종료가 없음을 독일 사회가 깨닫게 했다. 나치 시대의 역사 연구는 갱신되고 확장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중이다. 주변부 피해자 배제의 오랜 역사는 극복되고 있지만, 지각한 정의는 피해자 집단들에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 국민국가를 초월한 정의의 공평함과 담론의 공정성 요구는 타당하지만 여전히 미래지향적 목표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공론장의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각주 ^ 공공의 공간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목표로 역사적 장소의 맥락 정보를 제공하는 시설. 기념관이 위치하는 장소의 역사와 이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특별한 임무라는 점에서 박물관과 구분된다. 1945년 이래 독일에서 이 개념은 특히 나치 희생자를 기억하는 장소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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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송신도 이야기 - "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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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1992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위안부 110번 신고전화' 핫라인이 개설되었다. '위안부 110번' 실행위원회에서는 신고자로부터 들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이 담긴 조사카드를 사전에 준비했다. 그리고 신고 전화를 받을 때 그 내용을 조사카드에 기록했다. 이때 미야기현(宮城県) 오나가와(女川)에 살던 송신도의 정보도 들어왔지만, 실행위원회에서는 그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본인이 직접 제공한 정보가 아닌 데다가 정보제공자의 연락처도 확실하지 않아 송신도를 방문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와타 후미코는 배봉기의 증언을 오랜 시간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독단적으로 송신도를 방문했다. 송신도도 배봉기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싶어하고, 소송도 제기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신도와 '재일 '위안부'재판을 지지하는 모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도입부에, 가와타 후미코가 송신도의 집에 처음 방문하여 함께 나눈 대화가 위안소가 있었던 우창(武昌)을 따라 흐르는 '장강(長江)/양쯔강(揚子江)'의 화면과 오버랩 되어 나온다. 가와타 후미코가 고다츠에 앉아 찾아온 용건을 말했을 때, 송신도가 내뱉은 첫 마디는 "아, 잘 왔다"였다. 대전에서 태어나 16세 때 중국 우창(武昌)의 위안소로 끌려가 7년간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송신도는 가와타 후미코와의 이날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뛰어든다. 이 글은 송신도를 '위안부 110번 신고전화 실행위원회'와 연결시켜 준 가와타 후미코가 기억하는 송신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그래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살아왔어. 계속 속기만 했으니까 말이여. 하지만 재판을 하고, 또 내가 겪은 일을 터놓고 나니 조금 위안이 되었네. 나도 조금은 사람다워졌어. 완전히 때 빼고 유식한 할머니가 되었지." 1993년 4월 5일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이후 10년 동안 일본 내 유일한 원고로서 '위안부' 재판에서 투쟁해온 송신도 씨는 일본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패소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제소 이전과 패소 이후의 감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발언이었다. 송신도 씨는 긴 인생 속에서 삶의 격변을 두 번 체험했다.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을 때와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군 출신이었던 남자에게 청혼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다. 두 번의 격변은 모두 남에게 속아서 일어난 결과였다. 송신도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는 잘 속아" 라면서 몇 번이나 스스로 경계하듯 말했다. 그가 오랫동안 사람을 믿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은 이 두 번의 격변이 원인일 것이다. 결혼을 피해 고향에서 중국으로 송신도 씨는 16살 무렵 어머니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식을 치렀다. 피로연을 마치고 침실에서 11살 연상인 신랑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뒷간에 가는 척하며 속옷 차림으로 신혼집을 뛰쳐나와 논개구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밤길을 정신없이 달려 친정으로 도망쳤다. 친정집은 모두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몸에는 속옷만 걸치고 있어 추웠던 송신도 씨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불이 꺼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동생이 아궁이 속에서 잠든 송신도 씨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그 소리에 달려 나와 크게 화를 냈다. 그 당시에는 결혼 후 3년간은 친정에 올 수 없다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신도 씨는 이 집에는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정을 나왔다.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왔지만 붙잡히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친구 집에 머물면서 아기 돌보아주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중년의 여성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위한 일을 하면 결혼을 안 해도 혼자서 살 수 있어." 그 중년의 여성은 송신도 씨가 왜 친구 집에서 아기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지 자초지종을 들었을 것이다. '나라를 위한 일'이 어떤 일인지 그는 잘 알지 못했지만, '시집 안 가도 된다'는 말에 끌려 여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본 패전 이후 일어난 두 번째 격변 두 번째로 속은 것은 일본이 패전한 직후 중국 후베이성 셴닝(咸寧)의 위안소에 있었을 때다. 갑자기 일본군이 위안소를 찾지 않았고 그곳의 여주인과 송신도 씨를 비롯한 '위안부'들도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모른 채였다. 그 시기, 송신도 씨가 몇 개월 전까지 머문 웨저우(岳州) 위안소에 드나들던 일본군 하사관 '이다 가네사쿠(井田金作)'가 돌연 나타나 송신도 씨에게 청혼했다. 이다는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더 빨리 귀국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군에서 이탈한 뒤 부부 동반 귀국으로 위장하려고 송신도 씨를 이용한 것이다. 송신도 씨에게 이다는 위안소를 드나들던 수많은 군인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송신도 씨는 이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7년이나 되는 긴 세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본군 장병에게 성적 대상으로만 다뤄졌던 그는 자신은 결혼과는 인연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이때의 송신도 씨는 상대가 누가 됐든 누군가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이다는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둘은 그동안 송신도 씨가 모아온 돈을 쓰고 노숙을 하면서 배를 탈 수 있는 한커우(漢口)로 향했다. 한커우의 일본 조차지(租借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빌려 통치하는 영토)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양선[1]을 기다리는 일본인이 대거 몰려 있었다. 송신도 씨는 일본인들 사이에 섞여 거적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이다와 약 9개월간 지내게 되었다. 가진 돈은 점점 줄어들었다. 송신도 씨는 패전 이전부터 일본 조차지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의 집을 돌면서 주문을 받아 세탁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일이 없었던 이다는 몇 명과 공모해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의 집에 잠입하여 집주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아 공범들과 나누어 가졌다. 송신도 씨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양선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는 생후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은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아기만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다며 자신도 약을 먹고 아기에게도 약을 먹여 같이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성만 목숨을 잃고 아기는 살아남았다. 인양단 관계자가 갓난아기를 키울 사람을 구했지만 송신도 씨는 양육자로 나설 마음이 없었다. 송신도 씨는 위안소에 있을 때 사산도 하고 민간요법으로 낙태도 한 적이 있었다. 두 명의 아이를 무사히 낳긴 했지만 위안소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래서 자신의 아기도 건사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의 아기를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다는 송신도 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갓난아기를 무작정 떠맡았다. 자살한 여성의 짐보따리에는 저비권(儲備券, 1941년부터 중국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과 옷가지, 금시계, 금반지 등 고가의 귀중품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다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저비권은 이미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다는 여성이 갖고 있던 귀중품 중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었다. 드디어 인양선이 도착했다. 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구할 수 없었다. 배가 출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고 송신도 씨도 깊게 잠들었을 때 이다는 컴컴한 장강(長江) 속으로 갓난아기를 던져버렸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죄여." 비록 이다가 저지른 범죄였지만, 송신도 씨는 아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침통해 하며 중얼거렸다. 배가 하카타(博多)에 도착한 날, 이다는 한커우 관청에 신청하여 교부받은 송신도 씨와의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렸다. 한커우에서 하카타로 출발한 배 안에서 일본군 간부 출신의 일본인이 군대 내에서 혹사당했던 조선인들에게 둘러싸여 격렬한 항의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송신도 씨는 이러한 광경을 본 이다가 조선인 여성과의 혼인에 불안을 느껴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린 것이라고 여겼다. 이다는 임시 혼인 증명서를 찢어 버린 것으로 모자라 송신도 씨에게 자신이 일본 조차지에서 벌인 강도, 살인 범죄와 아기를 바다에 버린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일반인이 된 이후의 이러한 행위는 모두 범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쟁 중 침략군의 하사관이었던 이다의 주변에서는 살육도 약탈도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이다는 사이타마현 후카야(埼玉県深谷)의 본가로 송신도 씨를 잠시 데려갔지만, 결혼도 하려하지 않고 다시 오사카부 쓰루하시(大阪府鶴橋)로 끌고 가 "몸이라도 팔아라"라는 매정한 말을 남기곤 그대로 떠나버렸다. 송신도 씨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모모다니(桃谷) 장화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찻삯을 마련하고 선물을 준비해 이다의 본가를 찾아갔다. 이다의 모친과 그의 형이 "네가 데려온 여자인데 매정하게 굴지 말라"고 이다를 설득했지만, 이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송신도 씨는 쌀 한 되 오 합(약 2kg)과 간편복(원피스) 한 벌 분의 옷감을 받아든 채 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의 종착역인 우에노(上野) 역 안에는 부랑자들이 많았다. 우에노 역에 도착한 송신도 씨는 소변이 마려워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공중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한 남자가 흔쾌히 짐을 맡아 주겠다고 하여 그가 가르쳐 준 장소로 갔지만 화장실을 찾을 수 없었다. 짐을 맡긴 곳으로 돌아가니 짐과 함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짐 속에는 귀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 임시 혼인 증명서는 이다가 찢어버렸고 귀환 증명서도 우에노에서 분실하고 말았다. 이제 송신도 씨는 일본에 머물 길이 뚝 끊기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그는 마침 정차해 있던 열차에 올라탔고 한참을 흔들거리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송신도 씨는 목숨을 건졌지만, 유산하고 말았다. 이다의 아이였다. 열차에서 뛰어내린 송신도 씨를 도호쿠(東北) 본선 선로 근처 농가 사람이 구해주었다. 송신도 씨가 뛰어내린 곳은 이시코시(石越) 근처였다. 농가에 출입하던 암거래 쌀 장수 남성이 오나가와에서 함바집을 관리하는 조선인이 있으니 식모라도 해 볼 것을 권해 주었다. 송신도 씨는 밥은 못 하지만, 잡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함바집을 찾아갔다. 오나가와의 함바집을 찾아간 송신도 씨는 그곳에서 하재은 씨를 만났다. 송신도 씨는 이로리[2] 곁에서 그가 묻는 말에 모두 대답했다. 그는 송신도 씨의 더러워진 스웨터를 이로리 불 가까이에 가져가 쬐면서 "아니고 딱해라, 딱하기도 하지."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재은 씨가 송신도 씨의 얘기를 듣는 동안 불을 쬔 이들이 올 스웨터의 올 사이사이에서 기어 나와 이로리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송신도 씨는 하재은 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위안소 제도가 파괴한 것들 중국으로 가면 결혼을 피할 수 있다는 꾀임에 속아 중국으로 향한 송신도 씨는 1938년 늦가을에 우한(武漢) 작전으로 일본군이 막 점령한 직후의 우창 위안소로 끌려갔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 출입구에는 핏덩어리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뒤뜰에는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우창 위안소는 '세계관'이라 불렸다. 세계관은 원래 식당으로 쓰인 건물이었는데 목수나 미장이 출신인 군인들이 건물을 작은 방으로 나누어 위안소 용으로 개조했다. 곧 여성들이 도착한다는 사실을 안 병사들은 위안소 개설 허가가 나기 전부터 세계관으로 모여들었다. 위안소에 도착하고 처음, 송신도 씨는 방으로 들어온 병사를 몸을 한껏 움츠리며 거절했다. 거절할 때마다 병사들과 위안소 관리인에게 두들겨 맞았다.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발각되어 관리인에게 맞고 발에 차이며 긴 머리채를 잡혀 휘둘렸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여기에 오는 데 든 비용을 지금 당장 전부 내놔!"라는 협박을 당했다. 설령 위안소에서 빠져나간다 한들 중국의 말도 글도 모를뿐더러 가진 돈도 없었다. 송신도 씨는 중국으로 향하기 직전 동생을 만나러 갔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들은 참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엔 고향은 너무나도 멀었고, 고향으로 돌아간들 몸을 의탁할 만한 곳도 없었다. 그 때문에 있을 곳이 여기 밖에 없다며 그는 점차 탈출을 포기하게 되었다. 우창에는 병참기지가 마련되어 있어 전선으로 향하는 부대는 병참기지에 들러 무기와 탄약, 식량을 보충하고 전선에서 돌아온 부대는 우창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창에 주둔해 있는 부대만이라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우창을 통과하는 부대가 오는 때면 송신도 씨의 방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병사는 하루에만 70여 명에 달했다. 송신도 씨는 위안소에서 생활하던 중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임신 7개월에 들어선 어느 날, 배가 이상하게 차가워졌다. 점점 고통이 강해지면서 가늘고 다 자라지 못한 한쪽 발이 바깥으로 나왔다. 한쪽 발은 나왔지만, 그 후로 진전이 없었다. 옆에 있던 주먹밥을 양 볼 안에 욱여넣고 온몸의 힘을 짜내어 몇 번이나 배에 힘을 주자 드디어 몸이 나오고 머리도 나왔다. 해삼 같은 형상의 사산아는 포도색을 띠고 있었다. 송신도 씨는 싸늘해진 주검을 안고 혼자서 위안소 뒷산 기슭으로 가 아이를 묻었다. 두 번째로 임신했을 때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한커우의 해군 위안소로 이동해 잡무를 맡게 되었다.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다. 하지만 위안소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아기는 한커우 교외에 사는 조선인 여성에게 보내지고 송신도 씨는 웨저우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웨저우는 낡은 동네로 위안소는 2~3곳 밖에 없었다. 웨저우는 전선과 가까운 곳이라 웨저우의 '위안부'들은 소탕전에 나서는 부대를 따라다녔다. '종군'은 경험이 많은 '위안부'만 가능했다. "철모를 쓰고, 각반을 두르고 전선으로 끌려나갔지. 사람이 겨우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을 파고 담요 하나 깔고 거기서 했어. 여름에는 괜찮지만, 겨울에는 눈이 내리니까. 추운 곳에서 30분이나 엉덩이를 까고 있으니 공알이 얼 것만 같았지. 죽기보다 괴로웠어." 군의 명령에 따라 장안(長安)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역시나 '위안' 용도로 판 구멍에서 병사를 상대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로 총탄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송신도 씨는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는데도 병사는 "지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며 떨어지지 않았다. 웨저우(岳州)에서 잉산(応山)으로 보내졌을 때는 송신도 씨가 있던 옆 위안소에서 일하던 도시코가 전염병에 걸려 혈변을 보았다며 알고 지내던 병사를 거절한 일이 있었다. 화가 난 병사는 밖에서 자고 있던 도시코에게 큰 돌덩이를 던졌다. 도시코는 병사가 던진 돌덩이에 배를 맞아 복막염으로 죽고 말았다. 위안소의 여자들이 도시코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했다. 나무를 몇 그루나 쌓아 그 위에 시신을 올리고 화력이 약해지면 나뭇가지를 던져 넣어가며 뼈를 주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태웠다. 도시코는 전라남도 출신이었지만, 유골은 근처 산에 매장했다. 그리고 송신도 씨가 웨저우에서 셴닝의 위안소로 옮겨진 지 수 개월이 지났을 때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다. 7년에 걸쳐 새겨진 깊은 상처들 송신도 씨의 몸에는 매우 많은 흉터가 있다. 목 부근에는 작은 콩알 정도 크기의 팬 곳이 있어 일본군이 입힌 상처인지 물었더니 막 태어났을 때 원하던 사내아이가 아니어서 어머니가 찌른 흔적이라고 했다. 신도라는 이름은 출산 전에 지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일 테다. 왼쪽 팔에는 세계관에서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며 새겨준 '가네코(金子)'라는 한자 문신이 있다. 송신도 씨는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나는 위안소에서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 문신을 새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왼쪽 옆구리에는 약 10cm 크기의 검상 자국이 있다. "1940년 즈음인가, 병사들이 미쳐 날뛰는 현장이었고, 일요일이었는데 정말 무서웠어. 또 칼을 빼 들고 설쳐 대는 거여. 군인들끼리 싸우는 놈들도 있었고 질투 때문에 칼을 빼든 놈도 있었어. 나는 이렇게까지 널 사랑하는데 안 해줄 거냐면서. 자기 손을 베고 내 여기(옆구리)를 베더라고. 상처가 크고 깊었는데 피는 별로 나오지 않았어. 붕대를 감고 신음하면서 울어도 병사들 상대는 계속해야만 했지." 손목에도 동반 자살을 강요당한 흔적이 있다. 허벅지 끝부분의 상처는……. "나한테 위로 올라가라고 하질 않나, 옆쪽이나 뒤에서 해대는데, 싫다 하면 칼을 가지고 있으니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누워서 떡 먹기잖여. 우창을 통과하는 부대가 오는 날이면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샅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지." 위안소에서 병사들과 있었던 일들을 말하는 게 더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송신도 씨는 이제 나에게 이런 얘기는 그만 시키라고 했다. 파괴와 살육을 되풀이하던 전장에서의 잔학행위를 '위안부'의 몸을 희롱하면서 달래고자 했던 상식을 벗어난 병사들의 행위에 대한 혐오감, 견딜 수 없는 원통함이 되살아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송신도 씨와 동거했던 하재은 씨는 주변인들로부터 일본인이었다면 관직을 맡던지 교사가 되었을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는 인물이었다. 송신도 씨는 하재은 씨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 이상으로, 낯선 일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때 구해주었던 은혜를 평생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왔다. 세간의 부부처럼 생활했지만, "아빠, 아빠"하고 여길 뿐 성적인 교류는 없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도쿄 지방 법원의 본인 심문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위안부'로 일해 온 사람이고, 역시 몸도 망가져 버렸으니 그럴 마음이 전혀 안 들지. …중략… 육체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안 하게 되었지. 남자만 봐도 저 자식, 뭐지 하는 생각부터 들 정도니까. 남자는 얼굴만 봐도 징그러워." 위안소에서 7년에 걸쳐 새겨진 깊은 상처였다. 이다의 아이를 포함해 송신도 씨는 일본 군인의 아이 다섯 명을 임신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의 손으로 키울 수 없었다. 일본군의 위안소 제도가 파괴한 것은 송신도 씨의 심신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네 거기는 양동이처럼 크다며." "하도 많이 해서 굳은살이 배겼던데." 처음 만났을 때 송신도 씨는 오나가와에서 살면서 이런 듣기 거북한 말로 야유당한다고 말했었다. 송신도 씨의 이웃에는 중국 전선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다. 이다처럼 선봉 부대에 소속된 사람도 있었다. 송신도 씨는 중국 위안소에 있었던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송신도 씨를 향한 이런 소름끼치는 야유는 그의 몸에 새겨진 전쟁 당시의 상흔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송신도 씨는 '사람 속마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전후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제소 후 송신도 씨는 자신의 재판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많은 지원자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된 후에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집과 세간살이가 모두 떠내려가 도쿄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해."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송신도 씨가 일본 정부, 일본군, 일본 사회로부터 받은 처절한 피해에 비하면 지원자 한 명 한 명의 힘은 너무나도 약소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귀하다. 송신도 씨는 2017년 12월 16일, 별세했다. 각주 ^ 여기에서 인양은 일본의 외지나 점령지 등에서 생활하던 일본인이 패전 이후 국가 정책에 따라 일본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식민지인의 귀환이나 강제성의 의미가 강한 송환과는 구별되어 사용된다. ^ 일본 농가 등에서 마룻바닥을 사각형으로 도려 파고 난방·취사용으로 불을 피우는 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