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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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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프롤로그 '국제법의 인민화'라는 흐름 민간 주도의 법정은 대부분 소멸시효나 면책규정 등으로 현실의 법정에서는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시도된다. 실정법에서는 권력에 의거하여 법의 효력을 가늠하지만, 실정법으로 해소 불가능한 앙금을 다루는 '인민법정'에서는 그 효력과 권위의 토대를 '인민(people)'의 층위에 두고 있다.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법적 실효성을 갖는 국제법정을 일본 정부의 협조 하에 개최하는 것이 더 이상 곤란해진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강구된 방법으로, 가해국 일본정부와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인민법정[1]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였던 크리스틴 친킨(Christine Chinkin)에 따르면,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이며, 국가가 정의를 보장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시민사회가 '개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민법정은 이러한 전제에 기반한다. 또한 인민법정은 형벌을 내리거나 보상을 명할 수는 없지만, 법적인 판결의 가치와 도덕적인 강제성에 의한 권고는 할 수 있다.[2] 따라서 인민법정의 권위는 인민에 의거하며, 법정의 판결과 그에 부수하는 권고의 집행 여부는 법정의 유래인 인민, 즉 '국경을 넘은 인민'의 힘에 달려 있다. 국제법이 국가 간의 약속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을 고집해 온 일본의 법원은 '국제법을 인민화'[3]하는 당시의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 사법부의 구태의연한 국가주의적 태도에 대항하는 국경을 초월한 인민들의 도전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선주민에 대한 경멸과 인종주의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과테말라 내전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의 내정간섭이었다. 1944년부터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와 아르벤스(Jacobo Arbenz Guzmán)와 같은 과테말라의 혁신적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19세기 이래로 계속되어온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수탈구조를 개선하고자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1951년에 당선된 아르벤스는 유나이티드 푸르트(United Fruits Company) 보유지를 비롯해 착취구조의 근원들을 다수 국유화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54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의 군사적 개입으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4] 결국 1960년에 미국과 결탁한 정부군과 무장 게릴라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특히 반공주의 독재자 리오스 몬트(José Efrain Rios Montt)는 1982년~1983년 사이에 게릴라와 전투를 치르면서 민간인을 강제로 포섭한 자경단(Patrulla de Autodefensa Civil, PAC)과 군대를 동원하여 선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1999년에 발표된 '역사적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CEH)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96년까지의 내전 기간 동안 과테말라에서는 약 5만 명의 실종자를 포함해 2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전쟁고아가 약 25만 명에 이르렀으며, 약 15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5] 과테말라에서 '여성인민법정'을 발의한 요란다 아기라르(Yolanda Aguilar)는 과테말라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자로서 2000년 여성법정 기간 중 넷째 날에 열린 국제 공청회 <현대 분쟁 하의 여성에 대한 범죄>에서 증언대에 섰던 인물이다. 요란다는 1960년대와 70년대 과테말라시티에서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니며 농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에 대해 일찍 눈을 떴고, 러시아 작가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여성 공장 노동자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75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군부 집권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어머니는 무장혁명조직 FAR(las Fuerzas Armadas Rebeldes)의 활동을 시작했고, 요란다도 13세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거나 화염병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5세 때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체포되어 구타와 윤간을 비롯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요란다는 그후 3개월 동안 시력을 잃었는데, 구타로 인한 염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머리와 몸이 아무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1980년에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을 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었고, 곧장 쿠바로 떠나 2년을 살았다. 성폭력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그는 1983년에 과테말라 북쪽의 접경지역 페탱(Petén)으로 가서 반군(反軍)과 함께 사회적 계층이나 계급이 없는 세계를 건설하려던 동료들과의 깊은 연대 속에서 5년을 머물렀다. 5년 뒤 다시 돌아온 과테말라에는 여전히 성폭력이 만연했다. 요란다는 강간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내전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수집을 위해 만든 조직인 레미(REMHI)[6]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 요란다는 무력분쟁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들의 이야기들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요란다는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았다."[7]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의 성폭력 피해와 생존 경험을 나누다 요란다는 REMHI 보고서를 번역하던 일본인 여성에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고,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 내전 시기에 겪었던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증언해 줄 것을 제안받았다. 2000년 여성법정 공청회에서 요란다는 청중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을 잔인함에 대해서 증언하는 대신 자신이 겪은 압도적인 폭력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서 본 힘을 이야기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 가장 끔찍한 혼란, 가장 깊은 위기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2015년의 인터뷰[8]에서 "나는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해 기꺼이 논의하려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했다. 그녀들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50년을 기다려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성폭력 피해자로부터 변혁의 주체로' 프로젝트 요란다는 2000년 여성법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금기시되어왔던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말하고 그러한 아픔을 공유하는 장(場)을 만들 것을 여러 여성 단체에 호소하였고, 2002년에 '전시성폭력 피해자에서 변혁의 주체로'(이하, '피해자에서 주체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각지에서 선주민들의 언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여성 프로모터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강간'과 '성노예'는 마야 선주민들의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는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야요리상 홈페이지[9]) 다음은 주요 증언들 중 하나이다. "'저놈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 군인들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즐길까' 라며 포로들을 데려왔습니다. 거기엔 남자도 여자도 병사도 있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았더니,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여자를 강간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던 거예요. 포로들은 굶주리고 잠도 못 잔 상태여서 휘청거렸는데, 그 상태에서 강간을 강요한 겁니다." (중요증언 027 가해자 1982년)[10] 내전 시기에 여성들은 공포와 폭력으로 가득 찬 일상을 살아야 했다. 살상을 눈 앞에서 목격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이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중에도 그녀들은 군인들에게 밥을 해서 나르고, 춤 추고, 강간당하고 행진을 강요당했다.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 12월 29일에 게릴라 세력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teca,)'과 정부군 사이에서 맺어진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처벌과 보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사법제도에 기반한 재판이 요청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과테말라에서는 평화협정 때 국가권력이 만든 「국민화해법」에 의해 내전 중 발생한 정치범죄에 대해서는 면책이 보장되어 있었고, 성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이유로 형사재판의 실현이 어려워지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에서는 2007년부터 국제사회에 피해의 실태를 호소하여 내전 중에 전투수단의 하나로서 성폭력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2010년에는 드디어 국가에 대해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를 목표로 하는 민간 주최의 법정을 개최하게 된다. 2010년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성폭력에 대한 면책을 해제하다 2010년 3월 4일부터 이틀간 과테말라시티대학에서 500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이하 '여성인민법정')이 개최되었다. 각국이 국제 인도법과 국제 인권법에 따라 무력 분쟁 기간과 그 이후의 불/비처벌을 종식할 것을 권고하고, 특히 여성과 여아가 성폭력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행된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전쟁 종식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에 주목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20'[11]이 통과된 지 2년 만이었다. 방청석에는 110명의 피해 여성들이 원고로서 앉아있었고, '명예판사'로는 과테말라에서 치안부대에 의해 구류된 여성들을 강간한 범죄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판결을 받아낸 마야족 여성 후아나 멘데스, 후지모리 정권하 페루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구라데스 카나레스, 우간다 전시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던 티디 아팀, 2000년 여성법정의 참가자였던 아라카와 시호코(荒川志保子)가 명예판사로 임명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모두 법률가가 아니라 성폭력에 맞서 싸운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12] 여성인민법정이 2000년 여성법정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원고들의 익명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증언자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상의 증언석에는 증언자의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가림막을 설치했다. 원고들 중에는 가족들 모르게 법정에 나온 이들도 있었고, 아직까지 가해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첫 날 증인들의 증언에 이어 둘째 날에는 9명의 전문가 증언이 있었는데, 원고가 익명이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들에 대한 증거 수집을 하지는 않았고, 내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폭력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명예판사들이 읽어 내려간 최종판결문에는 내전 시기 과테말라 형법 및 국제법에 의거할 때 중요한 위반행위가 자행되었음을 인정하고, 공무원 및 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행위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고 선고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최종판결은 면책과 그로 인한 불처벌이 계속됨으로 인해 성폭력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내전 시기 인권침해에 대한 면책 해제,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조약의 비준, 국가 및 관계기관의 정보공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실행, 재발방지를 위한 정책입안 등 정부에 대해 15개 항목을 권고하였다.[13] 2016년 전직 군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 세푸르 자르코 재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는 '침묵을 부수는 여성들' 프로젝트로 발전하였다. 이는 여성 변호사 조직인 세 단체, '과테말라 전국여성연합(UNAMG)', '사회심리행동과 공동체연구 그룹(ECAP)', '세계를 바꾸는 여성들(MTM)'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 과테말라 동부 세푸르 자르코(Sepur Zarco) 지역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여성 15명이 지역 여성 단체와 유엔(UN WOMEN)의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 최고 법원에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2회의 청문회를 거쳐 2016년 3월 2일, 드디어 법원은 강간, 살인, 노예로 인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전직 군인 2명을 기소하고, 여성 생존자들과 지역사회에 18개의 보상조치를 부여했다. 과테말라 국내 법원이 국내법과 국제 형사법을 이용하여 분쟁 중 성노예 혐의를 고려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14] 이들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1982년, 군에 의해 남편들이 '강제 실종'되고 집이 불태워진 후 수 년에 걸쳐 마을에 남아있던 군의 주둔지에서 성노예가 되었다. 주둔지는 1988년에 폐쇄되었고 피고는 당시 군인과 자경단원 등을 비롯한 직접적인 가해자와 명령을 내린 사령관이었다. 재판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군에 의한 반란 진압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싸움의 역사적인 성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하고 전시 성폭력의 정의를 확립한 것이었다. 법원은 국가가 마을과 그 주변 마을에 집단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조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과 농촌 지역 사회가 종종 부정당하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를 확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처음으로 지역에 고등학교와 보건 클리닉을 세우고, 살해당한 여성의 남편들에게 기념비를 만드는 것 또한 이 조치에 포함되었다.[15] 에필로그 다시, 불/비처벌의 문제와 식민지 책임을 묻다 그러나 세푸르 자르코 재판 이후로도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는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과테말라 정부는 법원이 명령한 집단 배상 조치의 대부분을 실행하지 않았다. 세푸르 자르코의 사례는 16세기부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던 과거의 범죄에서부터 최근의 인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몇 세기에 걸쳐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이에 맞서 싸워온 이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 또한 증명했다. 과테말라 내전에서는 20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는데, 피해자의 83%가 마야 족이었고, 기록된 626건의 학살 또한 대부분 마야 공동체에서 발생하였다. 과테말라 내전 시기 전시 성폭력은 억압받는 마야 선주민과 정부군 병사의 가해라는 구도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에 놓여 있다.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과테말라의 상황, 미국과 쿠데타 세력의 공모, 과테말라의 미사용 토지를 보유한 해외 기업의 문제,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 인종주의 등이 착종하는 지점을 살피며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2000년 여성법정과 이를 계승하여 10년 뒤에 열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은 미완의 과제로서 식민지 책임과 (식민)기업에 대한 책임, 그리고 불/비처벌의 문제를 공통으로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9년, 과테말라에서 10~14세 여성들의 임신이 큰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빈곤가정 출신인 동시에 성폭행 피해자였다. 폭력의 가해자가 가족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이 같은 성폭력은 선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오지인 탓에 통신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16] 이러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선주민 소녀들 사이에서 생겨난 호신술 열풍이다. 2015년 이후 태권도 등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호신술이 선주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과테말라 태권도 대회의 우승자 미리암 쿠쿨 샘(17)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학교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힘이 더 세다며 항상 우리를 괴롭혔어요. 이제 남자들의 괴롭힘은 두렵지 않아요. 태권도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알게 해줬어요."[17] 10대 선주민 여성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COVID-19 기간 중에 더욱 악화되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컴퓨터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은 교육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증가하는 가정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학대자와 계속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지만 이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적이다. 그 결과 10대 임신과 모자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부족한 농촌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이에 10대 여성들은 스스로의 문화 활동을 이끄는 Las Niñas Lideran(Girls Lead) 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살율을 줄이고, 교육 접근성을 높이며 의료 서비스를 늘릴 것, 폭력 생존자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18] 우리가 이들의 홈페이지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슬로건은 이렇다.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가 매일 우리의 행동에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과테말라의 여성들은 지금도 일상화된 성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시도들의 한가운데에 함께 서 있다. 재판에서 승소했으나 배상받지 못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했던 노력을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에 비유해서 말한다. "우리는 옥수수 씨를 뿌렸어요. 우리가 먹을 순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 씨를 말이죠." 각주 ^ 한때 금칙어였던 '인민(people)'은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인민' 대신 한국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지배 주체인 국가 없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이 단어는 어쩌면 무시무시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인민' 개념은 다시 사유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을 사실상 선거를 통한 주권의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14년, pp.185~189). 이렇듯 '인민'을 제한적으로 파악하는 '국민' 혹은 '시민' 개념은 필연적으로 비국민, 난민 등의 '배제된 존재들'을 양산하고, '민중'은 한국에서 있었던 특정한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상기시키기에 people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 즉 국가가 셈하는 인민과는 '다른 인민'을 산출하여 그 자체로 또 다른 공동체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people의 번역어로 '인민'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People's Tribunal 또한 '인민법정'이라 부르기로 한다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년, pp.300~301. ^ 한일 양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한일협정을 근거로 줄곧 법적 판단을 미루어 왔는데, 거꾸로 그런 종류의 국제법이나 국가 간 조약 등을 피고 혹은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인민화된 국제법'이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인민화된 국제법에 상응하는 새로운 법정 혹은 새로운 법적 형식의 발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심아정, 「'권력 없는 정의'를 실현하는 장소로서의 '인민법정'-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사례를 중심으로」『일본연구』 제30집, 고려대일본연구소, 2018년, 48쪽 ^ 노용석, 「20만 명 숨진 과테말라 내전, 과거사 청산의 기록들」, 『오마이뉴스』 (기사입력일: 2018년 3월24일, 기사검색일: 2020년 11월14일). ^ 박구병, 「과테말라의 내전 종식 이후: 평화협정 이행의 험로」, 『Asian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vol.31, No4, 2018년, 21쪽. ^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 일명 역사적 기억의 회복 프로젝트. 1998년 4월 26일, REMHI 프로젝트의 최종 보고서를 공개한 지 이틀 만에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후안 제라디 주교는 집 밖에서 암살되었다. REMHI는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 기간 동안 저질러진 잔혹행위를 기록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가 이끌었던 전례 없는 시도로, 대교구는 1995 년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요란다의 생애는 주로 아래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2015년 2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Katia Orantes가 진행한 비디오 인터뷰. Stephen O'Brien이 수집한 구두증언에 대해서는 Stories from Guatemala(Oral testimony illuminating historical and social conditions)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https://www.wfphr.org/yayori/award/y_2009.html(기사검색일 2020/11/02).야요리상은 전쟁과 성차별이 없는 21세기를 위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활동가, 저널리스트, 아티스트를 선정해 수여하는 여성인권활동장려상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개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쓰이 야요리를 기념하여 이름 붙였다. 2004년부터 10년간 '야요리상'과 '야요리저널리스트상'을 수여해왔으며 2014년에 종료되었다. ^ 관련 증언들은 마쓰이 야요리상 홈페이지의 '야요리상' 수상 기념 스피치 투어 자료집(2009년 12월)을 참고할 것. http://www.jca.apc.org/recom/sonrisa/200911yayori-siryo.pdf (기사검색일: 2020/11/02). ^ UN SCR 1820의 원문은 유엔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un.org/ruleoflaw/blog/document/security-council-resolution-1820-2008-on-women-and-peace-and-security/ ^ 柴田修子 「戦時性暴力の被害者から変革の主体へ⎯中米グアテマラにおける民衆法廷の仕組み」 『立命館元号文化研究(23巻)2号』, 2011年, pp.75-76. ^ 최종판결문은 과테말라 인권위원회(GHRC)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ghrc-usa.org/Resources/2010/tribunal_de_conciencia.htm#pronunciamiento ^ 「2012年11月14日 「沈黙を破ってーーグアテマラ戦時下性暴力スピーキングツアー2012」 アナ・アリシア・ラミセス・ポップさん」 , 同志社大学 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研究科, 「女性・戦争・人権」学会 홈페이지 https://www.war-women-rights.com (기사검색일:2020/11/02). ^ Sepur Zarco case: The Guatemalan women who rose for justice in a war-torn nation: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18/10/feature-sepur-zarco-case (기사입력일:2018/10/19, 기사검색일: 2020/11/02). ^ 손영식, 「여기는 남미: 과테말라 10~14살 임신 급증, 대부분 성폭행 피해자」, 『서울신문』(기사입력일: 2019/03/06, 기사검색일: 2020/11/03) ^ 변선구, 「과테말라 원주민 소녀들의 태권도 발차기, “성폭력 두렵지 않아요”」, 『중앙일보』(기사입력일: 2019/11/29, 기사검색일: 2020/11/03) ^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20/11/i-am-generation-equality-ixchel-lu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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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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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2015년 11월 12~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인도에 반한 범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이 열렸다. 2015년은 적게는 5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희생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인도네시아 집단학살 범죄의 가해자는 인도네시아 군대, 그리고 군대에서 지도하고 훈련시킨 여러 민병대였고, 피해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하 PKI) 당원이나 관련 민중 단체였다. 이들 민중 단체는 농부, 노동자, 여성, 예술가,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의 열성적 지지자, 대부분이 중국인 진보단체인 시민협의회(Baperki)[1] 회원이었던 화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65년부터 PKI 당원(으로 간주된 자)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벌어지면서 수십만 명이 수감되거나 인도네시아 부루(Buru) 섬을 비롯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수감자 대부분은 고문을 당했고, 특히 여성(과 일부 남성)은 성폭력에도 노출되었다. 집, 사무실, 학교, 개인 재산은 모두 수탈되었다. 집단 학살이라는 반인도적 범죄가 시작되고 채 2년이 되지 않아 수하르토 장군은 수카르노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1968년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사건은 1965년 9월 30일, 중간 계급 군인들이 고위급 장군 6명(과 실수로 중위 한 명)을 납치해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9‧30운동', 혹은 '9‧30쿠데타'라 불리는 사건이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들 6명의 장군을 납치해 수카르노 대통령 앞에 데려가자는 것이 '9‧30 쿠데타'의 초기 계획이었다. 당시 PKI 의장도 장군들을 납치하는 작전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을 살해할 생각은 아니었다.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산당 간부와 일반 당원들은 이 작전을 알지 못했다. 의장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살해되어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곧 습격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듣고도 상관에게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수하르토 장군의 역할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이러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의 가해자 중 어느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축출되고 1998년까지 이어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 정권 하에서는 PKI가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며 비난하며 집단 학살의 피해자를 국가의 배신자로 묘사하는 공격적인 선전이 벌어졌다. 당시 활동했던 공산당원들과 후손들은 여전히 그러한 낙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가족은 직업을 잃었고, 아이들은 대학 입학을 거부당했다. 수천 명의 공무원과 군인이 수카르노를 지지했다는 의혹을 받고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연금을 받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1998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가 끝나자 집단학살 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Komnas HAM)'는 2012년 보고서에서 당시 자행된 잔혹한 행위를 반인도적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요약문과 함께 공개된 이 획기적인 보고서는 학살 목격자와 생존자 349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제출받은 법무장관실에서는 절차상의 이유를 근거로 보고서를 돌려보냈고, 지금까지 법무장관은 집단학살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 역시도 2012년에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감독의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이 개봉되고 나서야 이 비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개봉 뒤인 2013년 3월, 인권 활동가, 언론인, 연구자 등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헤이그에 있는 우리 집에 모였다. 오펜하이머 감독, Komnas HAM 위원 한 명, 저명한 여성이자 인권 변호사인 누르샤바니 까챠숭까나(Nursyahbani Katjasungkana)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이하 2000년 여성법정)에서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검사장을 맡기도 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2000년 여성법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참석자들은 국제민중법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대량학살 사건에 관한 국가적·국제적 수준의 침묵을 끝내고,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을 돕고 재발도 방지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과 활동가들이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을 조직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가 1965년 10월부터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를 국가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피해자와 그 가족의 목소리가 억압당하거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는 누르샤바니 총괄 조정관, 그리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네덜란드 헤이그 각각에 사무국을 둔 수평적 조직을 운영했다. 헤이그의 사무국은 재판 심리를 준비했다. 법정 준비를 위해 조직위원회(OC) 위원들이 이끄는 여러 팀도 만들어졌다. 누르샤바니도 자카르타 팀을 이끌며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힘썼다. 인권 운동가나 피해자 단체와 함께 세미나와 워크숍을 열었고 인도네시아 검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며 판사들에게 참여를 부탁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정기적으로 헤이그에서 우리 업무를 감독하기도 했다. 2014년 3월, ‘국제민중법정재단’(Foundation International People's Tribunal)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법정 주최 비용을 충당할 기금을 간신히 모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많은 기금 지원 기관에서는 이 문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국제 사법 재판의 도시로 알려진 헤이그에서 민중법정을 여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50년의 침묵을 깨다 우리는 ‘50년의 침묵을 깨다’(breaking 50 years of silence)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법정을 개최한 2015년은 집단학살과 PKI의 붕괴뿐 아니라 수카르노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진 '1965년 사태'가 있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판사단 최종 보고서(Final Report of the Panel of Judges)는 2016년 7월에 발표되었고, 2017년에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로 공개되었다. 세계의 연구자와 활동가 40명이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최종 보고서의 결론은 여전히 내용 열람이 금지된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의 분석과 일치한다. 특히 최종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다음의 4가지이다. 첫째, 판사단은 망명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고 판단했다. 망명자들 중에는 1965년 9월 당시 해외에 있다가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지 못한 공산당원들과 학생, 외교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판사단은 보고서에서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반인도적 행위와 별개로 상당한 규모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국가적 공격의 한 부분에 해당하며, 박해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반인도적 범죄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명시되어 있지 않고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판결로 논의가 시작된다면 좋을 것이다. 둘째, 살인 조장 선동에 관해 다루었다. 특히 “공산주의자 여성들이 '루방 부아야(Lubang Buaya)'라는 들판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면서 장군들을 거세하고 죽였다”는 허위 선전을 군대가 만들고 퍼뜨렸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판사단은 “루방 부아야에서 포로들에게 벌어졌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완전한 거짓이다. 수하르토 장군 휘하의 군 간부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고 …(중략)… PKI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 선전전은 이들에 대한 박해와 억류, 살해를 정당화했다. 또한 앞서 기술한 성폭력과 일체의 반인도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30년 이상 계속된 이 선전은 생존자의 시민권을 부정하고 박해가 지속되는 데 기여했다. 폭력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허위 선전을 퍼뜨리는 것은 폭력을 행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범죄를 준비하는 행위는 범죄 자체와 별개로 논할 수 없다. 선전은 학살을 포함한 반인도적 행위를 조장했으며, 광범위한 폭력의 시작이자 일부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셋째, 검사는 다른 국가, 특히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도 공모 혐의를 제기했다.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이들 세 국가에도 법정에 출석해 변론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에 응한 국가는 없었다. 판사단은 공모의 정도는 다르지만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가 모두 반인도적 범죄에 연루되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기소장에 따르면 특히 미국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대량 학살과 기타 범죄 행위를 자행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도네시아 군대의 반인도적 범죄 공모 혐의를 정당화할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민중법정은 집단학살의 발생 여부를 다루었다. 검사가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연구 보고서에서는 학살 혐의를 뒷받침하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집단학살 혐의가 기소장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집단학살 범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h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집단, 즉 “국가적, 민족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 집단”에 속하지 않는 집단에게 ‘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데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가 포함된다면, 극도로 민감한 문제를 다룸에 따라 이미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검사들의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민중법정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법정은 진실을 담는 아카이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정치계에서 지배적이었던 '가해자들의 아카이브'는 '피해자들의 아카이브'로 대체되거나 보완될 수 있었다. 세상은 생존자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비록 가해자에게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고 어떠한 보상이나 배상도 뒤따르지 않았지만, 법정을 통해 피해자와 그 가족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집단학살과 여타 반인도적 범죄를 둘러싼 침묵을 깨고 그러한 범죄는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 법정은 무엇보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각주 ^ 인도네시아 시민협의회(Badan Permusyawaratan Kewarganegaraan Indones, Baperki). 영어 명칭은 Consultative Body of Indonesian Citizenship으로 1954년 설립되었고, 이후 1965년 수카르노가 수하르토에게 실권을 이양한 후 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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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2018년 4월 21~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이는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을 롤모델로 하여 가해국의 수도에서 가해국의 책임을 물은 민간법정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최소한 80여 개가 넘는 마을에서 9,0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평화법정은 그중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퐁니·퐁넛 마을 및 하미 마을 사건을 대상으로 각 마을의 생존자 2명을 ‘원고’로,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여 민간인학살 사실과 책임을 다루었다. 두 사건 모두 1968년에 일어났기에, 시민평화법정이 열린 2018년은 학살 50주기가 되는 해였다. 시민평화법정 개최를 위해 수십 개의 시민단체와 995명의 개인이 준비위원으로 모였으며, 행사 양일 동안 시민들은 300여 석의 방청석을 연이어 가득 채웠고, 국내외 취재진들이 몰려들어 행사 내용이 보도, 중계되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된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는 이틀에 걸친 심리 끝에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에게 공식적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주문.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배상 기준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공식 사과하라.” ‘시민법정’의 문제제기 시민평화법정은 실제가 아닌 민간법정이기에 이 법정의 판결에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시민평화법정과 법정의 판결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한국 사회에 다시금 공론화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여성법정을 모델로 삼았다.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라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판결을 내렸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국제적 연대 확대에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의 노력은 매우 컸다. 2018년 시민평화법정은 일본의 시민사회가 18년 전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수행했던 역할을 모델로 삼고, 나아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이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어떤 문제의식으로 이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라면, 더더욱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있어서 가해국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 ‘책임’을 환기하는 과정으로 ‘시민법정’이 기획된 것이다. 시민법정은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라는 전제에 기반한다. 국가가 정의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시민사회가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침묵을 고수해 왔다.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32만 5000여 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미국의 파병 요구에 따른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 파병은 한국군의 ‘첫 해외파병’으로, 전쟁기념관과 같은 박물관에서 대대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학살 문제는 수십 년간 잊혀져 있었다. 한국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1999년에 와서였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며 한국 시민사회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현지 생존자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소수 참전군인들의 양심적 증언까지 더해졌지만, 국방부를 비롯한 한국 정부 기구는 ‘민간인학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불행한 전쟁’, 노무현 대통령은 ‘마음의 빚’ 정도로 언급했을 뿐이다. 이처럼 정부가 그 책임을 부인하는 가운데 2018년, 시민사회에 기반한 법정이 열린 것이다. 한편 베트남전쟁에 대한 문제 제기는 2000년 여성법정의 모델이었던 ‘러셀 법정’[1]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러셀 법정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제안으로 베트남전쟁의 침략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1966년 열렸다. 러셀 법정은 베트남전쟁 중 발생한 미국의 범죄를 폭로하고, 한국을 미국의 공범국가라고 판결했다.[2]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국가의 법정에서 다뤄지지 않는 문제를 민간의 영역으로 가져와 판결하는 시민법정의 문제의식이 국경과 시대를 넘어 서로를 참조하며 이어졌다고 하겠다. 생존자의 증언, 말하기와 듣기 2000년 여성법정의 증언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필리핀의 토마사 살리노그(Tomasa Salinog)는 “정의를 요구한 지금까지 10년 간의 어려운 싸움 끝에 여성국제전범재판이 (우리가) 계속 바라왔던 정의를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에게 귀 기울이고, 진실을 추구해온 우리에게 존엄을 회복시켜준 재판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3] 이처럼 시민법정은 피해 이후 오랜 세월을 살아낸 생존의 역사를 듣는 자리였으며, 침묵을 깨고 명예와 인권 회복을 요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의미를 지닌다.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사회가 여기에 답한다는 점에서 2018년 시민평화법정 역시 2000년 여성법정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시민평화법정의 토대가 된 것은 퐁니·퐁넛마을의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과 하미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의 말하기, 즉 학살생존자의 증언이었다. 우연히도 두 명 모두 이름이 응우옌티탄이었다. 두 명의 응우옌티탄은 이틀간 총 13시간에 달했던 변론 시간 중 휴정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재판이 한국어로 진행돼 통역을 통해서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원고들은 한국 변호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굳게 자리를 지켰다.[4]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그 당당함을 ‘살아남은 자의 소임’이라고 표현했다. 법정 전날, 그녀는 한국 국회를 방문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로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43년이 되었고 우리 두 사람이 학살을 겪은 지도 5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내일 우리는 법정에 섭니다. 한국의 친구들이 준비한 시민평화법정에 증인으로 나섭니다. 무섭고 떨리고 두렵습니다. 법정에 선다는 두려움에 한국에 오기 전부터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사실 이 자리도 많이 떨립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용기를 내는 이유는 50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의 가족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지난날 있었던 어둡고 고통스럽고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을 세상에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5]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밝혔듯 시민평화법정에 서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의 경우 시민평화법정을 향한 여정은 생애 첫 해외방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겪은 가족의 죽음,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가해국의 수도에 가서 수백 명 앞에서 증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에 무력한 ‘피해자다운’ 피해자가 아니라, 반세기를 살아낸 강인한 생존자들이었다. 두 생존자는 서로를 용기로 북돋았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희생된 가족들의 영혼을 대신해서, 가족을 잃은 이웃들을 대표해서 증언한다고 했다. 원고들이 증언을 마칠 때마다 법정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마침내 재판부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 퐁니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의 승소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몸이 떨릴 만큼 좋습니다. 진실을 말하러 왔고, 최선을 다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는 판결까지 받았습니다. 마을에 돌아가 제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겠습니다.” 응우옌티탄의 빛나는 미소에서 나타났듯이, 시민평화법정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듣지 않으려 했던 증언을 의미있게 듣고 응답하며 그 책임을 인정한 자리였다. 재판부가 선고한 약식 판결문에는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제3조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고,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공식선언을 할 것,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발생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 발생 여부에 관해 진상조사를 실시할 것, 전쟁기념관을 포함해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전쟁 참전을 홍보하고 있는 모든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에 진상조사 결과를 전시할 것’이 권고되었다.[6] 또한 재판부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왔음에도 용기를 내어 멀리 한국까지 와서 진실을 증언해준 두 원고들에게 존경과 연대의 인사를 전했다. 피고 대한민국과 ‘우리’의 책임 2018년 시민평화법정의 또 다른 의미는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는 점이다. 학살의 책임을 질 주체는 누구이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피고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서 ‘나’,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시민평화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장소’임과 동시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이고자 했다. 시민평화법정이 형사재판이 아닌 국가책임을 묻는 민사재판의 형식을 차용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방아쇠를 당긴 군인들과 그 명령을 내린 지휘권자를 처벌하는 형사법정은 국가범죄의 책임을 일부 군인에게만 한정시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형사법상 ‘유죄’를 선고하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닫히게 된다. 시민평화법정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피고로 상정함으로써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책임 역시 이야기될 수 있기를 바랐다.[7] 원고들의 대리인 역시 최후 진술에서 ‘원고들의 청구는 피고 대한민국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라고 함으로써 그 같은 바람을 드러냈다. 시민평화법정은 실제 재판과 동일한 수준으로 입증 수준을 맞추려 했기에 증거 확보가 중요했고, 그 과정에서 퐁니·퐁넛 사건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사병의 영상 증언을 확보했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참전군인과 접촉하고,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 속에서 참전군인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또한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 재판 전날 법정의 일부이면서도 법정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학술행사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 베트남전쟁에 연루된 ‘우리’>가 열리기도 했다. 여기서는 법정의 언어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어떤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어떻게 역사에 책임을 지고 기억할 것인가, 어떤 공동체를 현실에서 만들어나갈 것인가와 같은 고민을 나누었다. 법정, 그 이후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문제가 잊혀져 가는 상황을 문제 삼고 이를 다시 공론화시키려 한 시민평화법정 이후, 학살 생존자들의 진상조사 요구와 실제 법정 투쟁이 현재 진행중이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한국의 공무원들도 우리 생존자들에게 찾아와 ‘사과를 원하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들은 사과를 원한다’라는 것을 이 청원서를 통해서 분명히 알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60세가 넘은 고령으로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는 청원처럼,[8] 이들의 요구는 한국과 베트남 양 국가 간의 문제, 외교의 문제를 넘어, 당사자들의 인권에 대한 존엄의 선언이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의 연대로도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초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처음 알려졌을 당시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은 앞장서 학살에 대해 사과하고 한베 평화 활동에 기금을 후원했다. 2015년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나눔의 집’이었다. 당시 이옥선은 “먼 데서 찾아와줘서 고맙다. 다른 나라에도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있는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굳게 마음먹고 살자. 우린 아직도 전쟁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9] 2018년 시민평화법정 당시 김복동은 “내 아픔이 깊은 만큼 베트남 피해자분들의 아픔이 하루속히 회복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 저도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이지만, 한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제 사죄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10] 이렇게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들은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투쟁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대자로서 서로를 지지해 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국적을 넘어 어떤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있다. 각주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564쪽 ^ ‘Russell Tribunal’,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Russell_Tribunal (확인일 2020. 11. 3.)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위의 책. 568쪽. ^ 임재성, 「눈부셨던 응우옌티탄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시민법정이 남긴 것들」, 『문학3 2, 2018. http://munhak3.com/detail.php?number=1273 ^ ‘퐁니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국회 기자회견 성명서’, 2018년 4월 19일. 출처 : 한베평화재단 홈페이지 http://www.kovietpeace.org/?m=bbs&bid=board01&p=18&uid=5369 베트남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응우옌티탄의 말을 베트남어에서 한국어로의 통역을 거쳐 비로소 들을 수 있다. ^ ‘2018. 4. 22. 선고된 약식 판결문’.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블로그.https://blog.naver.com/tribunal4peace/221262364287 ^ 「피고 대한민국에 '망각금지'를 선고하다」, 『프레시안』, 2018년 5월 10일.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96157?no=196157#0DKU ^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학살 피해자들의 청원서’(2019.4.4.),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블로그. https://blog.naver.com/tribunal4peace/221505240819 ^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전쟁 사라질 때까지 함께 싸워요」, 『한겨레』 2015년 4월 5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5543.html ^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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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 강일출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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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해방, 또 다른 피해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항일인사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이 종로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의 기쁨과 환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만세’ 소리로 가득 찼으며, 해외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도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아시아 각지로 끌려갔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이 같은 해방의 기쁨과 환희가 전달되지 못했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 이후, 일본군은 본국으로의 회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이들의 안중에 없었다. 일본군은 피해자들에게 해방이 된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고 자신들만 귀국길에 올랐다. 이에 낯선 타국에 방치된 피해자들은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앞날을 대비해야 했다. 피해자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도보나 기차 등을 통해 스스로 귀국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연합군에게 발견되어 귀국선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만, 필리핀 등 상대적으로 멀리 끌려간 피해자들은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을 위해 중국관내로 모여드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도 해방 이후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에 남아있는 피해자가 상당하였다. 귀국을 포기한 피해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귀국을 포기하였는지 그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이옥선 할머니(부산)는 “내가 이마에 ‘위안부’ 간판 써 붙이고 어떻게 부모형제 얼굴을 보느냐?”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피해자와 돌아가지 않으려는 피해자들이 중국 관내에 많아지기 시작하자 중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무녀’, ‘기녀’, ‘풍기문란’ 등의 이유를 들어 강제송환을 추진하였다. 이에 강제송환을 피하려는 피해자들은 중국 국적의 남성과 결혼해 거류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강일출 할머니는 강일출 할머니도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체류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할머니는 192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열 두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로 생활을 이어나가셨는데, 땅과 논·밭 등이 많아 사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어린 여성들을 차출한다는 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이었던 할머니의 전(前) 형부가 할머니의 언니가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한 일에 앙심을 품고 할머니를 밀고하였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1944년, 17살이 되던 해 중국 흑룡강성의 한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할머니는 얼마 뒤 장티푸스에 걸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우 물만 마시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군은 할머니가 군인들에게 장티푸스를 옮길까봐 할머니를 산으로 끌고 가 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할머니는 당시 일본군이었던 조선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죽음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피한 할머니는 해방 직후 조선족 남자를 만나 혼인하고 길림성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남편마저 6.25전쟁에서 사망하자, 할머니는 시댁을 떠났다. 시댁에서 나온 할머니는 중국군의 간호사로 입대하였으며, 전역 후에는 길림시의 한 병원에서 30여 년간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1991년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국내의 시민단체들은 해외거주 피해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 시민단체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낸 적이 있었는데, 강일출 할머니는 그 광고를 보고 직접 시민단체에 연락을 하셨다 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5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국내로 돌아온 할머니는 잠시 친척집에서 생활하시다 2000년 3월에 나눔의 집에 입소하셨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 강일출 할머니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신다. 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역사문제와 나눔의 집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 2016년에는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이 모티브가 되어 ‘귀향’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인해 강일출 할머니는 유명한 할머니가 되었지만, 정작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이 유명해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끔 영화 얘기를 하면서 ‘귀향’의 주인공이 할머니라고 설명하면 금방 잊어버리긴 하시지만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또 새로운 사람을 보면 증언을 해야 한다는 기억이 남아있어서인지 낯선 사람들에게 항상 “역사문제를 똑바로 알아야 해!”, “일본놈들이 우리나라 불바다로 만들었잖아!”, “다신 그런 나라가 오면 안 돼!” 등의 이야기를 반복하신다. 또한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질투와 샘이 대단하신데, 직원이나 방문객이 다른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거나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척 화를 내신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강일출 할머니가 계신 것을 모르고 이옥선 할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강일출 할머니가 아는 모든 욕을 들어야 했다. 오래전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던 할머니들은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내성이 생기셨는지 할머니의 어떠한 시비에도 반응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이 모습이 참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그러나 최근에 나눔의 집에 오신 속리산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텃세를 견디다 못해 몇 번 크게 싸우기도 하셨다. 다툼 이후 강일출 할머니는 계속해서 속리산 할머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속리산 할머니가 갑자기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칭찬을 하셨다. “강일출이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아, 자식들도 다 있으니 얼마나 좋아. 부러워” 이 말을 들은 강일출 할머니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시고 “아이고~ 언니야~ 고마워~” 라고 말해 주위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박장대소 한 일이 있었다. 이날 이후 지금까지 직원들은 두 할머니가 다투시면 강일출 할머니에게 “할머니, 속리산 할머니가 할머니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대”라며 귓속말을 한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서로 친하지 않으시다. 오히려 서로에게 무관심하시거나 다투는 일이 더 많다. 심지어 강일출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처럼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할머니들도 계신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사이도 좋지 않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시는데 왜 할머니들은 굳이 이렇게 함께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 강일출 할머니 방의 각양각색의 장롱들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방에서 거의 생활을 하지 않으신다. 할머니는 주무실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잘 계시지 않는다. 항상 거실에 나와 TV를 보시거나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신다. 따라서 할머니의 활동무대는 주로 나눔의 집 거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소품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복도 끝 제일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방들도 많은데 굳이 왜 가장 안쪽 방을 쓰시는지는 잘 알지 못하였는데, 얼마 전에 2009년 지금의 생활관이 완공될 때 고(故) 김군자 할머니와 고(故) 배춘희 할머니 그리고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먼저 방을 ‘찜’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안쪽 방을 고르신 이유는 그 방이 다른 방에 비해 조금 더 넓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앞서 소개했던 다른 할머니들의 방보다 조금 더 큰 편이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사각형 구조로, 다른 할머니들의 방과 마찬가지로 방 맨 끝 창문 아래 돌침대가 놓여져 있다. 침대 다리 방향 왼편으로 장롱 2개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장롱 맞은편에는 화장대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랍장, TV, 냉장고, 또 다른 장롱이 차례대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 할머니의 방을 보았을 때 색깔과 모양이 전부 다른 장롱 3개가 한 방에 있는 것이 좀 의아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이옥선 할머니가 “강일출이는 죽은 할머니 사진도 못 걸게 해! 무섭다고, 근데 자기 방에는 먼저 간 할머니 물건들을 다 갖다 놨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제서야 그 각양각색의 장롱들이 돌아가신 할머니들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못마땅해하고 질투하시지만 직원들에게는 참 친절하신 편이다. 또 사람들을 좋아해 직원들이나 방문객들을 보시면 본인 옆에 앉으라며, 옆자리를 툭툭 치신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으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떠날까 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붙잡아 놓으신다. 가끔 할머니가 거실에 없으면 방으로 찾아가곤 했는데,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내가 금방이라도 방에서 나갈까 봐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그 이야기는 보통 어릴 적 할머니 고향집에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것과 할머니가 막내라 부모님이 많이 아껴주었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의 집이 부자라 손님들에게 항상 식사를 대접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시려나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대신 머리 뒤에 흉터를 자주 보여주시는데 어떨 때는 일본군에게 맞았다고 하시고, 어떨 때는 포탄에 맞아 생긴 흉터라고 하시고 또 어떨 때는 어릴 적 감나무에서 떨어져 난 상처라고 하신다. 할머니 증언집에 일본군에게 맞은 상처라고 쓰여 있지만 굳이 할머니의 기억을 바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2019년 나눔의 집은 더이상 신규 입소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할머니를 더 모시겠다며 증축공사를 강행해 정원을 20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할머니의 물건들은 외부에 방치돼 장맛비를 맞았다. 이 중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은 다른 할머니들의 물건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덕분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빨리 복원되었지만 그 사이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의 방을 완전히 잊어버리셨다. 장맛비를 맞고 훼손된 가구들 일본군‘위안부’운동과 할머니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공론화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고 해외 거주 피해자들이 국내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시민단체와 정부 그리고 할머니들의 노력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아직까지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부인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일제가 저지른 중대한 전쟁범죄이자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들은 노구를 이끌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피해 사실을 알렸으며, 일본과의 소송도 불사했다. 또한 매주 수요일에는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일본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할머니들의 희생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일제의 반인륜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라는 굴레를 넘어 우리사회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서 가져야 할 역할에 대해서만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을 뿐, 피해자가 아닌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삶을 살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피해자의 삶보다 누군가의 어머니와 할머니, 또 누군가의 친구 그리고 누군가의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 살아왔다. 지난 30년간 피해자로서 최선을 다한 할머니에 대한 우리사회의 보답은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겪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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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1) - 마르디옘, 스하나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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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위안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능욕을 당했을 때고, 두 번째는 위안소에서 있었던 치욕스러운 과거를 당신에게 이야기한 오늘입니다. 내가 쓴 『인도네시아의 ‘위안부’』(아카시 서점, 1997)라는 책의 머리말에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피해자와 대화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할 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너무 긴장해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진심을 다해 답했다. “당신이 위안부가 된 것은 결코 당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에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녀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란 말을 들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렇게 말해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며 말하고는 돌아갔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전쟁 지역과 점령지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위안소 이외에서도 다양한 성폭력을 자행했다. 인도네시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 초반부터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한 네덜란드와의 전투에서 단기간에 승전한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군정을 펼친 것은 1942년 3월부터이다. 마쓰우라 타카노리(松浦敬紀, 일본의 교육자-역자)가 엮은 『영원한 해군』(문화방송개발센터, 1978)에 수록된 「23살에 3천 명의 총지휘관」에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총리(임기 1982년~1987년)가 주계 장교(군의 행정·회계를 담당하는 장교)로서 인도네시아에 부임하여 위안소를 설치한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3살에 3천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를 맡았다. 머지않아 원주민 여성을 덮치는 자와 노름에 빠지는 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나는 고심하여 위안소를 설치해준 적도 있다.”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와 운영을 감독한 것은 주계부(회계부)다. 1993년 4월 인도네시아에서는 사회부 장관이 ‘일본 군정 하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 실태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법률 상담 등의 지원 활동을 하는 법률구조단(LBH, Lembaga Bantuan Hukum)은 이 성명을 환영하며 1993년 9월까지 피해자 등록 작업을 실시하였고 17,245명의 ‘로무샤(강제 징용 노동자)’와 420명의 일본군‘위안부’를 포함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자 등록을 마쳤다. 이 중 특히 열정적으로 나선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등록된 일본군성폭력 피해자는 약 300명에 달했다. 1995년 8월, 헤이호(Heiho, 兵補) 협회에서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받았고 22,234명의 피해자가 등록되었다. 헤이호 협회는 일본 정부가 지급하지 않은 임금 청구를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회원은 전(前) 헤이호와 그 유족까지 7만 2천명이며 인도네시아 각지에 134개 지부를 두고 있다. 나는 법률구조단과 헤이호 협회가 조사를 진행한 직후인 1995년~1996년에 두 조직의 도움을 받아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마르디옘 씨 이야기 마르디옘 씨는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사실을 신고해 등록된 사람이고, 이후 반자르마신 교외의 뜰라왕(Telawang) 위안소에 함께 연행되었던 여성들을 설득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마르디옘 씨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도 그가 10살 때 타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 번은 음악단 공연에 출연한 적도 있다. 일본군이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반자르마신을 침공한 직후인 1942년 2월에서 5월까지 반자르마신의 초대 시장을 지낸 쇼겐지 칸고(正源寺寛吾)가 인솔하는 무리가 욕야카르타 인근에서 48명의 어린 여성을 모집했다. 당시 막 13살이 된 마르디옘도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가수인 렌지 씨로부터 ‘보르네오에 가서 함께 연기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수라바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그녀는 다른 소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수라바야에서 2주간 기다렸다가 이틀 동안 배를 타고 이동한 끝에 반자르마신에 도착했다. 함께 출발한 48명 중 절반은 극장이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머지 24명은 뜰라왕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높은 담장이 둘러진 요자형(凹字型) 건물의 번호가 매겨진 작은 방에 한 명씩 들여보냈으며 각자에겐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마르디옘의 방은 11번째 방이었고 그녀의 일본식 이름은 모모예였다. 마르디옘이 끌려간 곳은 일본군의 규정에 따라 일본인 치카다(チカダ)가 인도네시아인 남성을 고용하여 운영하는 위안소였다. 그녀는 위안소에 들어간 첫날부터 6명의 병사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날의 선혈과 얼얼한 아픔, 몸에 빠끔히 뚫린 구멍은 언제까지고 잊히지 않았다.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몸과 마음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군인의 ‘위안’을 강요당한 것이다. 끌려간 여성들은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는 군인을, 그 이후부터 밤 12시까지는 군속 대우 관리나 전화국 직원 등을 상대했고 위안소 이용 요금은 군인은 1시간에 2엔 50전, 군속은 3엔 50전, 숙박은 12엔 50전이었다. 이용 접수를 받는 벽에는 방 번호와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은 패가 일렬로 걸려 있었고 이용자는 그것을 보며 자신이 이용할 방을 지정했다. 요금과 맞바꾼 표와 위생 콘돔을 건네받은 이용자가 방에 들어가면 여성들은 이용자로부터 표를 받았다. 여성들은 하루가 끝나면 표의 장수를 위안소 관리인에게 확인받았다. 하지만 마르디옘은 치카다로부터 보수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에 식사는 2번이었고 첫 반년 정도는 제대로 된 식사가 주어졌지만, 점점 부실해졌으며 양도 적어졌다.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자주 때렸다. 오후 5시가 되면 위안소의 이용자가 군인에서 사복 이용자로 바뀐다. 마르디옘은 식사도 하고 목욕도 하고 싶었지만, 손님이 불렀다. 바로 가지 못하면 치카다에게 얻어맞았다. 토요일에는 군의관이 찾아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했고 매일 아침 8시에는 위생병이 검사를 했다. 정오부터 밤 12시까지 몸을 혹사당하고 뒷정리를 한 후에 취침한다. 이용객의 숙박이 있을 때는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마르디옘은 간혹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검사에 지각하는 날에도 치카다에게 구타를 당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이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24명 중 5명이 병에 걸려 위안소를 나가게 되었다. 마르디옘이 14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말랐던 마르디옘의 몸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치카다가 눈치채고 검진을 받게 했다. 임신 5개월이었다. 낙태약을 일주일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어 중절 수술을 받게 되었다. 약도 수술 기구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인 여성 의사가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태아를 긁어 떼어냈다. 머리꼭지까지 달하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수술로 떼어낸 태아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남자 아이였다. 마르디옘 씨는 그 아이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의사에게 간절히 부탁해 마루디야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땅에 묻었다. 수술 이후 마르디옘 씨에게는 3개월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습으로 인하여 병원에서 위안소로 돌아왔다. 치카다는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마르디옘 씨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때리고, 차고, 의식이 없어질 때까지 폭력을 가했다. 이는 ‘위안부’는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른 여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제재였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자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방으로 불러 몸을 만지고 강간했다. 그날부터 모모예로써의 임무가 재개되었다. “11번 방 모모예였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계속해서 그때의 끔찍했던 일들이 쳇바퀴처럼 맴돌아요.” 독실한 이슬람교 신도인 마르디옘 씨는 ‘기억의 쳇바퀴’를 ‘악마의 윤회’라고도 표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4살 때 마취 없이 인공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던 고통 이상으로 내 아이를 죽이고 만 죄의 무거움에 몸이 떨리고 가슴이 아파요.” 그런 마르디옘 씨가 남편의 유족 연금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수급자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일본의 매춘부!” 욕설을 퍼부은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마르디옘 씨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일 것이다. 스하나 씨 이야기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한 후 일본군은 반둥 치마히에 있던 광대한 규모의 네덜란드 군 기지를 사용했다. 치마히 심팡 거리에는 ‘8개의 집’이라고 불리는 장교용 주택이 있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때의 고급 양식 주택 8채 전부를 위안소로 사용했다. 15살이었던 스하나 씨는 그 중 4번째 집에 일 년 반 동안 갇혔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은 자바섬이다. 일본군은 자바섬에 남방군의 총 병참 기지를 두고 인적, 물적 자원의 보급 기지로 삼았다. 반둥에는 제16군의 야전 보급을 위한 보급 창고가 있었고 이곳에서 남방군 전체 군수품의 조달, 제조, 보급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남방군 야전 조병창(造兵廠, 무기, 병기를 만드는 곳-편집자 주)도 있었는데 남방군 전역에서 쓰이는 병기를 수리 및 제조했다. 치마히의 화물 창고는 군수품과 병기를 남방군 전역으로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스하나 씨의 부모님은 치마히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노천 상인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시장에 나가고 집 앞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일본 병사 몇 명이 스하나 씨의 팔을 잡아채더니 억지로 자동차에 태웠다. 병사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이들이 자신을 죽일까봐 불안했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곳은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심팡 거리의 번듯한 건물이었다. 스하나 씨가 들어간 방에는 이미 어린 여성들이 많이 끌려와 있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여성이 요리사, 두 명의 남성이 그 밖의 잡무를 맡았고 매주 토요일에 군인이 와서 이 세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헌병도 순찰하러 왔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위안소에는 방이 세 개 있었고 각 방에는 침대가 3개씩 놓여있었다. 중국인들이 호명하면 여성들은 그 방에 들어가야 했다. 커튼조차도 치지 않은 3개의 침대에서 어린 여성들은 일본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 스하나 씨는 다른 이들이 자신과 똑같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끝까지 병사들에게 저항했다. 그때마다 매를 맞았다. 스하나 씨는 어느 날 세 명의 장교에게 교대로 호출되어 마중을 나온 차를 타고 장교 숙소로 향했다. 위안소에서 머무르던 스하나 씨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벗어나 강을 따라 있는 가리담 거리에 있던 네덜란드 군 장교용 주택으로 옮겨졌다. ‘8개의 집’과 비교하면 한 채당 대지 면적은 좁았지만, 주택 수는 훨씬 많았다. 그 곳에는 콘돔도 절대 쓰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는 이케다라는 장교가 있었다. 그는 스하나 씨가 주저하면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때렸다. 이케다가 스하나 씨의 자궁에 상처를 입힌 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 출혈도 시작되었다. 비정상적인 양의 출혈이 있었는데도 잠깐 쉴 뿐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쓸모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 중국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출혈이 있은 뒤로부터 꽤 많은 시일이 지난 후였다. 일 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스하나 씨가 살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스하나 씨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그녀의 숙모가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는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소문을 듣고 스하나 씨를 찾으러 일본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헌병대에도 갔다. 아버지가 군인에게 간절하게 애원하는 모습을 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상인 몇 명이 목격했다. 몇 번이나 내팽개쳐져도 아버지는 군인에게 매달렸다. 군인은 군용 칼집에서 칼을 꺼내 도망치려는 아버지의 등을 베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버지는 “딸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며 땅 위로 쓰러졌다. 아버지의 시신은 근처 사람들이 집까지 옮겨 주었다. 어머니는 외동딸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데다가 남편까지 일본군에게 살해당하는 감당치 못할 큰 충격으로 몸져누웠고 결국 극도로 쇠약해져 병으로 죽고 말았다. 부모님의 죽음, 특히 자신을 찾으러 온 아버지가 ‘8개의 집’ 근처에서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스하나 씨는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자궁 출혈이 계속 이어졌다. 숙모가 차마 감당하지 못하자 숙부가 스하나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상처가 곪아 개복 수술로 자궁을 적출했다. 수술비는 부모님이 남긴 집을 팔아 마련했다. 정신착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됐으나 정신질환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 자궁에 고름이 생겨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스하나 씨는 말했다. 스하나 씨와 같은 위안소에 있었던 에미 씨, 에마 씨, 오모 씨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네 명 모두 일본군이 철수한 후 줄곧 독신으로 생활해 왔다. 결혼 이야기가 있다가도 ‘일본의 여자’였다는 낙인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혼담은 깨졌다. 에미 씨의 경우에는 일본이 패전했을 때 위안소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니 집은 불타버리고 없었다고 한다.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협박을 당해 에미 씨는 강제로 위안소로 끌려간 건데 ‘일본의 여자’가 되었다며 일본에 협력한 집안으로 내몰려 반일파 인도네시아인들이 불태운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