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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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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배삼엽 1925년 조선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남. 1937년 13세에 중국 내몽고 바오터우(包头)로 3~4년간 동원됨. “한국에서 살 곳도 없고, 늙어서 돈을 어디다 쓰갔어. 귀찮아.” 중국 우한(武汉)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의경을 만난 후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야간 휘처잉워(딱딱한 침대 기차)를 타고 10시간 만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새벽 뿌연 안개에 싸인 역에서 배삼엽이 사는 톈단(天坛) 호텔까지 택시를 탔다. 2001년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면서 전화번호만 받아 두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위치를 설명해 주었더니, 그는 양딸을 마중 보낸다 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만날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중 예전에 보았던 톈단 호텔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 다다랐을 때는 그의 딸이 나를 먼저 알아보았다. 첫 만남이었지만, 나의 옷차림과 큰 가방을 끄는 행색으로 나를 알아본 듯했다. 딸을 따라 회이퉁(골목길)에 들어서니 저 멀리 지팡이를 한 배삼엽이 눈에 들어왔다. 밤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길을 찾아 헤매느라 나의 모습이 초췌해 보였는지, 그는 먼저 나를 조선족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냉면 두 그릇과 만두를 시켰다. 한 그릇이면 족하다고 했지만, 남자라면 이 정도는 먹어야 한다며 주문을 했다. 피해자를 만나면서 항상 어떡하면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처음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대면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지금은 피해자들과 같이 밥을 먹고, 며칠을 지내다 보면 마음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우리말 중에는 ‘식구’라는 말이 있듯이 혈연 관계인 가족만큼 한솥밥 먹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래서인지 피해자가 주는 것들을 사양 않고 다 먹다 보면, 그것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는 듯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5층짜리 아파트 복도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안쪽에 자리한 그의 집까지는 벽을 더듬으며 들어섰다. 20㎡ 넓이의 거실 겸 침실로 쓰는 방안에는 침대, 소파, TV 등이 2년 전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의 머리카락은 더 허예졌고, 등은 더 구부정해져 오랜 시간 바로 앉아 있기 힘들어 보였다. 1985년도부터 앓아온 백내장은 더 방치하면 실명까지 갈 수 있다 하여 수술 날짜를 잡았으나, 내가 온다는 소식에 며칠 늦추었다고 하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중국의 의료비가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그가 젊었을 때 일하던 박스를 만드는 공작소에서 수술비 상당 부분을 부담해주기로 해 천만다행이었다. “‘아! 이거 속았구나’ 가슴이 철렁했어….” 배삼엽이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하동이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3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이 무렵 계급장이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만주에 가면 여러 일 중 골라서 할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여자들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는 엄마를 잃은 슬픔에 모집책을 따라 나설 결심을 했다. 여기에 오빠의 설득도 한몫했다. 오빠는 모집책에게 4년간 일 하는 조건으로 선금 400원을 받고 그를 중국으로 보냈다. 부산에서 경성까지 기차로, 인천에서 톈진(天津)까지 배로, 톈진에서 내몽고 바오터우(包头)까지 갔다. 역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아사히칸(朝日)’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유곽에서 화려한 화장과 기모노 차림의 여자들을 보자마자 ‘아! 이거 속았구나’ 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2층 5번 방에 배정받은 배삼엽은 그곳에서 게이코(ゲイコ)로 통했고 군인들은 ‘조쎈삐(朝鮮屄)’라 불렀다. 그가 어리고 처녀라는 이유로 위안소 주인과 일본군 장교 사이에는 하룻밤에 군표 100원이라는 거금이 오갔다. 피해자는 ‘일주일 동안 거기서 피가 나고 칼로 베는 듯 아파서 걷지도 못했다’라고 증언했다. 유곽 형태의 위안소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는지 여자 두 명이 아편을 먹고 자살할 정도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3년이 될 즈음 그는 밥 한 술만 먹어도 피를 토하는 병에 걸렸다. 군의관은 여기서는 병명을 알 수 없고, 고칠 수도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위안소 주인 또한 차비를 주며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미련 없는 조선을 등지고 다시 중국으로 배삼엽은 부산에 도착해 이모의 집에서 한약 3첩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고서야 병이 나았다. 이모는 조카 귀남(배삼엽의 아명)이가 돈을 벌러 싱가포르에 갔다고 말하는 순간 그곳에 무엇을 하러 갔는지 눈치챘지만, 배삽엽은 차마 이모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할 수 없었다.[1] 조선에 머무는 동안 친척 집을 오가며 지냈지만, 부모님도 안 계시고 친척에게 신세 지기 싫어 그는 홀로 중국으로 향했다.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소로는 가지 않고 톈진에서 미군을 상대로 춤을 추고 돈을 받는 클럽에서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해방을 맞으면서 베이징으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 타국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고달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을 먹기도 하고 수면제 200알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을 여러 번 기도하기도 했다. 배삼엽은 친자식이 없어 36살 때 조선족 여아를 입양해 키웠다. 딸은 같은 아파트 3층에 살면서 그를 보살피고 있었지만, 사위가 마카오에 일자리를 구해 1년의 대부분을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는 베이징에 살면서도 조선말을 잊지 않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절 유행하던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을 부엌일 할 때마다 혼자 흥얼거리며 눈물 흘린 세월이 반이라 했다. 1999년까지만 해도 그는 북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국적을 중국으로 바꾸고 한 달간 고향 방문을 하며 조카를 만나며 다녔다. 그는 한국에서 ‘위안부’피해자로 등록을 하려 했지만, 이미 호적에 사망신고가 되어 있고, 1년 이상 걸리는 국적 회복과정이 쉽지 않아 그냥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국적 회복의 기회가 있었지만, 더는 조선에 미련이 없다며 포기했다. 2011년에 돌아가셨지만, 2014년 그의 딸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그가 살던 집으로 찾아갔다. 문이 잠겨 있었고 창 사이로 방안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 앞을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한 청년이 아는 체를 했다. 아파트 앞 노상에서 자전거를 수리하는 이였는데, 몇 년이 지났음에도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를 통해 피해자가 베이징 근교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여나 마카오에서 사업을 하는 딸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부를 묻고 연락을 부탁한다는 편지를 문틈으로 남기고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다. [사진 설명] 중국 위안소에서의 삶, 그리고 남겨진 이후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 배삼엽은 1960년대 중국 혁명가 저우언라이(周恩来)를 본 후 직장을 구하는 등 그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을 방에 걸어 두었고 그에게는 그것이 사진 이상의 의지와 힘이 되었다. [사진 설명] 그가 유일하게 연락했던 조선인은 차로 30-40분 걸리는 곳에 사는 피해자 이귀녀이다. 서로 몸이 불편해 오가며 만날 수 없어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생전, 그의 전화 번호마저 기억에 없고 눈마저 보이지 않아 그전만큼 연락이 수월하지 않았다. 각주 ^ 가족들은 귀남이 싱가포르로 동원됐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만주와 인도네시아로 동원됐다. 기사 게재일: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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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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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천안 독립기념관(제2 전시관-겨레의 시련관) → 국립 망향의 동산(추모비-장미묘역-망향의집-무연고합장묘역) → 천안 평화의 소녀상(신부공원) #천안 독립기념관 천안(天安)은 하늘아래 편안한 곳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3.1만세운동의 함성과 유관순열사의 고향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많은 곳 중 하나이다. 아우내 장터의 뜨거운 함성과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독립기념관으로 향한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역사를 잊지 않고 진실을 지키려는 국민들의 모금과 역사자료 기증 운동의 결과로 1987년 8월 15일 개관됐다. 그 뒤로 해마다 8.15광복절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들어서면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고 날카롭게 솟아있는 겨레의 탑이 우리를 마주한다. 겨레의 탑을 지나면 독립기념관의 대표 건물로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만든 동양 최대의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겨레의 집 뒤편으로는 총 6개의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관의 테마는 ‘우리 민족의 뿌리’로 출발해 ‘민족의 시련’과 ‘겨레의 함성’, ‘독립운동’, ‘일제에 맞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제2전시관 ‘겨레의 시련’관에서는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일본군‘위안부’강제동원의 아픔이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나신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님과 북이 고향인 김화선 님의 증언이 담긴 영상을 볼 수 있다. 일본의 강제동원을 당당하게 밝히는 그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밖에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역사적 자료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파렴치함에 주먹을 쥐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전시관을 나선다. #국립 망향의 동산 망향(望鄕)…. 고국을 그리워하다. 푸르른 가을 하늘아래 펼쳐진 초록의 잔디와 많은 묘역들은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한다. 저 작은 돌 아래 잠들어 있는 망자들의 수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과 눈물을 푸른 하늘은 알고 있을까. 망향의 동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난 후 망국의 서러움과 갖은 고난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숨진 재일동포들의 안식을 위해 1976년 10월 2일 조성되었다. 이후 해외동포 가운데 조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만 적당한 묘역을 구하기 어려운 분들의 경우 이곳에 모셔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위안부’피해자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해외 여러 곳을 거치며 고통을 당하셨기에 본인과 가족들이 원할 경우 이곳에 모셔지고 있다. 사실 부끄럽게도 천안 토박이인 나도 이곳 망향의 동산에 ‘위안부’피해자들이 잠들어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이 되었음에도 아직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을 기억하고자 천안시민들과 함께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을 하며 망향의 동산에 잠들어 계신 할머니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장미묘역에 잠들어 계신 고(故) 김학순 님의 묘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올해는 김학순 님이 “내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다”라고 첫 공개증언을 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위안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에 ‘희생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그 ‘존재’를 증명하며 세상을 깨운 용기 있는 증언을 하신 김학순 님.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증언을 한 지 30년이나 지났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하셨던 진정한 사과와 명예회복은 여전히 이뤄지고 있지 않음에 가슴이 아파온다. 안타깝게도 연세가 많고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점점 이곳에 오고 계신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꿋꿋하게 일본의 사과를 외치며 전 재산을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나비기금에 기부하고,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장학기금재단을 마련한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님도 2019년 2월 1일 이곳에 잠드셨다. 1000번째 수요시위에서 “이 늙은이들 다 죽기 전에 하루 빨리 사죄하라! 알겠는가. 일본대사여.”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 치셨던 모습이 생생한데, 이제 말없이 이곳에 잠들어 계신다. 안타깝게도 김복동 님 별세 이후 몇 분의 피해자가 영면에 드셨다. 진실을 알리고 진정한 사과를 듣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치열하게 사셨던 그들이 떠나고 남은 빈 자리는 이제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이곳 망향의 동산의 장미묘역과 납골당인 망향의 집에는 56명의 ‘위안부’피해자들이 잠들어 계신다. 누군가의 묘비에는 노란 나비가 붙어있지만, 그렇지 않은 묘비가 더 많다. 고인의 가족들이 ‘위안부’피해자인 것을 밝히기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이,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곳에는 김학순 님과 김복동 님 이외에도 그들의 벗들이 주변에 많이 잠들어 계신다. 망향의 동산에 안장된 ‘위안부’피해자의 특별묘역을 추진하여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고인 가족들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여 묘역을 별도로 만드는 것은 추진되지 않았고 2015년 8월에 ‘위안부’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추모비의 명칭은 ‘안식의 집’이며 ‘영혼의 눈-시간의 벽-연대의 벽-승화의 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쪽 바닥에는 피해자의 글귀가 적힌 돌이 있다. 안식의 집의 의미를 살펴보면 영혼의 눈은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기억하는 우리들의 시선, 그리고 그들이 흘렸던 눈물을 상징한다. 시간의 벽은 피해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오랜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표현했다. 연대의 벽은 피해자로 침묵하던 할머니들이 인권운동가로 연대하며 활동했던 시기를 상징한다. 승화의 벽은 추모비가 연이어 선 형상으로, 피해 할머니들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눠 두려움과 고통, 좌절, 고된 삶, 용기와 활약,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모습 등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모습처럼 고인들은 편안하게 웃으며 하늘을 날고 계실까. 그 답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무연고합장묘역 망향의 동산 가장 위쪽 언덕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연고합장묘역이 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때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희생되었던 분들을 위한 묘역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기에 유골만을 추려서 합장한 묘역이다. 오른쪽에는 뜻 있는 일본인들이 세운, 고보댐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의 죽음에 사죄하는 비가 있다. 고보댐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은 약 4000명에 달한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마저 유린당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공사장에 매장되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그들의 죽음 또한 우리 역사의 비극의 한 장면이며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이들이다.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부정하고 있으며 역사 지우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그들의 역사왜곡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사실을 잘 알려주는 것이 2017년 3월에 있었던 사죄비 무단훼손사건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연행의 책임자였던 요시다 세이지(吉田 清治)가 자신들의 범죄를 참회하고 반성하며 희생자들을 위해 1983년12월 사죄비를 세웠다. 사죄비에는 ‘귀하들께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 시 징용과 강제연행으로 강제노동의 굴욕과 고난에 가족과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나는 징용과 강제연행을 실행 지휘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인도적 그 행위와 정신을 깊이 반성하여 이곳에 사죄하는 바입니다. 늙은 이 몸이 숨진 다음도 귀하들의 영혼 앞에서 두 손 모아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요시다의 장남은 부친의 증언이 위증이라며 일본의 극우인사를 통해 사죄비를 위령비로 교체하도록 시켰다. 다행히 수사기관을 통해 범인이 잡혔고, 사죄비는 복구되었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은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경각심이 필요하다. #천안 평화의 소녀상 “우리에게는 아직 진정한 해방이 오지 않았습니다.” ‘위안부’피해자들의 가슴 맺힌 절규를 기억하고 함께 행동하고자 2017년 8월 천안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많은 시민들과 학생, 기업들의 모금으로 천안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됐다. 소녀상은 빈 의자와 앉아있는 소녀, 함께 해주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으로 구성돼 있다. 시민들이 언제든 편하게 보며 기억할 수 있도록 소녀상은 천안의 가장 번화한 거리의 작은 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바람처럼 시민들은 계절에 따라 늘 소녀상과 함께 하고 있다. 비가 오면 우비를 씌워 주고, 겨울이 되면 망토와 모자와 덧신을 입혀준다. 어느 날에는 사탕과 초콜릿을, 어느 날에는 곰 인형을 소녀상 옆에 놓아준다. 참 고마운 마음들이다. 그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잠들어 있는 그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날을 기원하며 소녀상은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기사 게재일: 2021.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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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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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听不东 (팅부동)[1], 왜 같은 말을 자꾸 물어” 백넙데기 1922년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태어남. 1939년 18세에 중국 난징, 우한으로 6년간 동원되었다가 중국에 남겨짐. 중국의 옌볜(延边)에서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만났지만, 내륙 깊숙한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汉)까지 위안소가 설치되고 피해자가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에야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양쯔강(长江)을 따라 난징(南京)을 거쳐 3일 넘게 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군은 중국 내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국민당의 수도이자 교통의 사통팔달인 우한을 점령하려 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과 5개월이 넘도록 ‘우한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서야 우한을 차지했다. 이후 이곳에는 대규모의 일본 해군과 육군 본부가 주둔했고, 군을 위한 위안소도 도시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양쯔강 가까운 지칭리(积庆里)의 한 골목에는 20개의 위안소가 생겨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300여 명의 일본/조선 여자가 있었다. 그 골목은 도시개발 속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어 그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고, 시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보존하고 있다. 이곳을 처음 찾은 2001년에는 3명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13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었다. 우한 시내에서 피해자 하상숙과 김의경을 만나고, 또 다른 피해자 백넙데기를 만나기 위해 하상숙을 따라 택시를 타고 시 외곽으로 갔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시간을 달려 황피(黄陂)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시장통으로 보이는 골목길에는 상가 문이 닫혀 있고, 그 가운데 백넙데기의 집이 있었다. 그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미리 연락을 받은 그의 아들 내외가 먼저 반겨주었다. 언뜻 작은 식당을 하는 듯 보였고, 피해자가 사는 2층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왔어요.” 그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지 마는지 경계하는 눈웃음으로 들어오라는 손짓만 할 뿐이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우한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교류가 없어 간단한 조선말조차 잊은 지 오래인 듯 보였다. 하상숙을 통해 중국어로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 조차도 황피 특유의 사투리가 심해 의사소통이 녹록하지 않았다. “할머니 어디서 태어났어요?”라고 묻는 말에 그는 짧게 “세평리”라고만 답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지도에서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세평마을을 찾을 수 있었고, 호적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남편은 술집으로, 술집은 위안부로 팔아 넘겨 백넙데기는 소작농 집에서 6남매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2]로 갔다. 혼례는 치르지 않았지만 남편과는 부부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를 술집에 팔았고, 거기에서 또다시 중국으로 팔려 왔다. 어려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인지 엄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120원에 팔려 갔다. 그 돈은 누가 어떻게 가져 갔는지 그는 몰랐다. 처음 도착한 베이징에서는 반점에서 두 달 동안 밥과 빨래를 했다. 그리고 20여 명의 여자들과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있다가 군부대를 따라 우한으로 왔다. 위안소 주인은 장교로 퇴역한 일본인 2명이었다. 우한에서 좀 더 시골로 들어가 군부대가 있는 곳을 옮겨 다니며 군인을 상대했다. 하루는 일본군을 받지 않으려 하자 주인이 들어와 왼쪽 검지를 칼로 잘라버렸다. 잘린 손가락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자 그는 본능적으로 다른 손으로 재빠르게 가렸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위안소에서의 생활에 관해 묻자 “팅부동, 왜 자꾸 같은 말을 물어”라며 화를 냈다. 피해자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도망가는 일본군이 알려줘서 알았다. 백넙데기와 다른 여자들은 남아 있는 돈을 모아 배를 타고 양쯔강을 따라 한커우(汉口)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에는 그곳에 남아 살 수밖에 없었고, 피붙이 하나 없이 여자 혼자 사는 것이 어려워 지금 있는 곳에서 남편을 만나 살았다. 중국도 북한도 아닌 무국적으로 살아남기 나이, 생년 등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옆에 있던 며느리는 신분증이 따로 없다며, 낡고 작은 수첩을 들고 왔다. 겉면에는 외국인 거류증이라고 쓰여 있었고, 안쪽에는 그의 사진과 5년마다 공안의 확인 도장이 찍힌 내용만이 있었다. 이름도 백넙데기가 아닌 이잉란(易英兰)이라는 중국식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50여 년의 세월 동안 시골 마을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요원했다. 일본, 한국, 북한, 중국 등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얘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백넙데기는 한국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하상숙을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머물 곳도 없고 가족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을 벗어나려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동안 “쌰오 이쌰오(笑一笑)” 웃어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쓴 웃음만이 파인더에 들어오는 것이 그동안 그가 겪은 역경을 보는 듯했다. 2018년 경남지역 역사 동아리 고등학생들과 역사 투어를 위해 난징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컸던 위안소를 전시관으로 개조한 난징리지샹구위안소전시관(南京利济巷慰安所旧址陈列馆昨开馆)을 찾았다. 그곳에는 위안소 제도의 역사와 함께 피해자 개개인의 방이 마련돼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잉란의 이름으로 된 백넙데기의 방[3]이었다. 다른 피해자에 비해 사진이나 유품은 적었지만, 이렇게나마 그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웠다.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으로나마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에 그 방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사진설명] 점심시간이 되자 그는 만두를 담은 작은 그릇과 나무젓가락을 내밀며 얼른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은 여느 시골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이 친근해 보였다. [사진설명] 작은 서랍장에 담긴 그의 옷가지와 물건이 그가 가진 전부이다. 무엇 하나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남루해보이지만, 그는 하나하나 다 소중히 여겼다. 각주 ^ “못 알아듣겠다”는 뜻의 중국어 ^ 훗날 며느리로 삼기 위해 데려다 기르는 여자아이 ^ 피해자의 이름으로 된 방에는 위안소를 묘사한 방도 있고, 피해자의 유품을 모아놓은 방도 있다. 기사 게재일: 20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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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평화는 집단의 노력이다”!?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를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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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is a group effort”. 20여 년 전, 헤이그 NGO 국제평화회의장 한구석에 걸려있던 현수막에서 이 말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분단이라는 군사적 긴장 관계 속에서, 협정이 체결되면 평화가 ‘정착’된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을까. 평화란 법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던 나에게 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평화가 어떤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의 노력”이라니! 말문이 트이는 것 같은 쾌감과 함께 새로운 난제에 맞닥뜨린 듯한 마음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집단적 노력이라는 사회적 과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는 여성가족부의 후원하에 오는 10월 13-14일 양일간 일정으로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이하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컨퍼런스는 집단의 노력으로서의 평화는 결국 여성을 비롯한 타자들의 인권과 맞닿아있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사법 정의의 문제, 전쟁의 성별성(gender)과 평화교육, 기억이라는 정치의 문제를 심도 있게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과거를 아는 것과 과거에 대해 해석하는 현재라는 맥락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현재의 지표라는 점에 주목하는 논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이슈가 논의될 때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의 한 가지가 배상과 사죄, 그리고 명예 회복이라는 말이다. 여성학자 김정란은 성폭력 상황에서 “명예롭지 않은 유일한 당사자는 가해자”라는 점을 상기하며, 성폭력을 “여성의 명예 실추와 연관시키는 사고방식”의 “후진성”을 역설한다. “성차별적 사고는 상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수치심을 피해자에게 떠넘김으로써 가해자 처벌의 기회를 축소할 위험”마저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명예 ‘상실’을 전제함으로써 이미 그들이 담보하고 있는 존엄과 명예를 오히려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한다. 일상에서 숨을 쉬듯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게 간주 되어 온 인식이 얼마나 반여성적인 폭력일 수 있는지 제기하는 그의 시선은 시사적이다(김정란, 경향신문 2020년 6월 24일, 기고,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 사전에는 명예(名譽)란, “자기의 도덕적, 인격적 존엄에 대한 자각 및 타인의 그것에 대한 승인과 존경”이라고 나와있다. 이름 명(名), 기릴 예(譽)라는 한자의 조합, 누군가의 이름을 기린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누가 누구의 이름을,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리는가. 강물이 흐르면 강기슭의 형상이 변화하는 것처럼 사람의 이름을 기리는 명예라는 가치 또한 시대 인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명예는 고정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명예의 회복과 미회복의 경계를 결정짓는 것은 타인과 ‘나’와의 관계, 즉 사회의 의식이다.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는 칼럼의 제목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논의의 틀 자체, 즉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당위로서 여겨지는 성차별적 전제를 문제 삼고 있다. 컨퍼런스 기조 발제를 맡은 크리스틴 친킨은 “젠더 정의는 성인지적 차원에 대한 관심을 요구할 뿐 아니라 성과 인종, 식민주의와 계급 문제에 기반한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를 시정하려고 노력한다”고 논한다.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와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차별과 억압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화 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가시화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겨우 그 실상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중심으로, 피해자가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문제, 혹은 상처라는 흔적을 ‘어떻게’ 다룰 것 인가라는 질문은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접근법을 집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컨퍼런스 3부에서 토론을 맡은 도미야마 이치로는, 경험이란 공유해야 할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의 시작”이라 역설한다. 이러한 관계성, 사회성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을 통해서 억압이라는 기존의 상황은 다른 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명예는 선험적으로 회복 혹은 미회복이라는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하여 비로소 그 윤곽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1990년 한겨레신문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연재를 통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윤정옥은 “종전이 되고 나서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우리들이 잊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 죽은 셈”이 되었다고 언급하며, 그들을 “잊었”던 우리 사회의 유기(遺棄)의 시간에 대한 내성적 논의를 촉발시켰다(오키나와타임스, 1992년 3월 4일). 2011년 한국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방치한 것은 피해자의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하는 “위헌 행위”라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늦게나마 우리가 “잊었”던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을 법의 언어로 명시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정의와 평화의 물결을 잇다>라는 컨퍼런스 주제는 이러한 겹겹의 쟁점을 다각적인 고찰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보호의 대상으로서 ‘꽃’과 ‘할머니’라는 표상, 혹은 강제냐 자발이냐를 다투는 이분법적 논의는 고통의 체험을 딛고, 혹은 그 고통과 더불어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온 이들을 존중하는 논의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문제가 다루어지는 형식과 위상을 재고한다면, 평시와 전시가 연동하는 의례로서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배상’과 ‘사죄’로만 환원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인 ‘위안부’ 이슈는 외교 관계를 통해 ‘해결’되어야할 사안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숙의(熟議) 과정을 통해 “집단의 노력”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진행형의 과제이다. 여성문제다, 민족문제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라는 점을 어떤 방식으로 논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직하자.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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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경험과 “상황적 지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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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험에 소유격을 붙여 ‘00의 증언’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폭력성을 느낀다. 생각과 감정을 포함하여 움직임이나 행위에 관한 영역을 경험이라고 한다면, 마치 몸에 옷을 걸치는 것처럼 경험이 어떠한 말을 걸치는가라는 점은 지극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처음부터 ‘00의’라는 주어 아래 두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질문하게 된다. ‘00의 증언’이라는 설정은, 모든 움직임과 행위를 00이라는 주어의 것으로 총괄하라는 일종의 명령이다. 동시에 그것은 위의 질문을 배제하고, 움직임과 행위에 촉발되어 시작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닐까. 금기된 사랑을 둘러싸고 안티고네의 죄를 인정하게 하려는 신문(訊問) 장면에 대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행위자가 그 행위와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행위와 행위자의 연결됨을 언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논했다. 그는 이 주장에서 어떠한 말을 말로서 승인할 것인가, 어떠한 말을 사전에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서가 발동하는 점을 분석한다.[1] 또한 발화를 사전에 배제하는 질서는 법과 이성애주의적인 친족 구조의 공범 결과다. 그러나 증언대에 선 안티고네는 이 주장을 끝까지 거절한다. 거부하며 신문에 노출되는 이 경험은 “지금에라도 누군가에게 달라붙을 것만 같다”.[2] 그리고 경험에 자신의 소유격을 붙이는 것을 거절한 채, 안티고네는 산 채로 매장된다. 증언에 관한 폭력이 여기서는 생매장인 것이다. 버틀러가 지적하는 주장에는, 굳이 자신이 그 행위를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장이 이미 질서를 갖는 이상, 그 비약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사태는 시작과 동시에 먼저 심판에 의해 정지당하게 된다. 생매장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죄인인가 아니면 구제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 아니다. 증언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의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경험으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의 모습에 대한 고찰이다. 주장에 있어서 주어는 사전에 준비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이나 행위에는 사전에 준비된 주어가 달라붙어 주장되고, ‘00의 경험’으로 말해진다. ‘나’는 이 주어에 이미 선취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주장이 ‘나’를 덮치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된다.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흑인의 삶의 체험”을 통해 이러한 주장에 저항하며 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3]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단지 ‘나’라는 주어의 회복만은 아니다.모든 움직임이 “검둥이”라는 주장 속에서 말해진다. 파농은 이 문제를 “삼인칭 인식”이라고 말한다. 행위가 전부 삼인칭의 소유격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이 삼인칭은 변화가 없는 속성으로 자연화되어 있다. 또한 이 자연화하는 인식에는 때때로 과학이 이용된다. 그리고 이 자연은 ‘나’의 신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신체는 자연화에 저항하며 “나 자신을 사물로 삼는다”.[4] 이 점이 바로 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경험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경험으로서 산란하는 것이다. 나만의 일도 아니며 또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초점적 확장은 과정으로서 계속되어야만 한다. 파농은 책 마지막 부분에 “아아 나의 신체여, 언제까지나 나를 질문하는 인간이게 하소서”라는 기원으로 이러한 접속을 도모해나간다. ‘나’는 처음부터 이 지점에서 선언되는 것이며, 경험은 단수형이든 복수형이든 간에 주어의 소유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러붙게 되며,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산란과 복수화를 짊어지면서 새로운 관계를 갱신해 나아가는 힘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검둥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끝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또한 복수로 만들어 주어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서는 주장이 계속된다. 경험에 있어 논점은 소유격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러한 힘이다. 즉, 공통 항목이 만들어내는 우리가 아니라, 공통 항목으로는 총괄할 수 없는 곤란함을 끌어안는 우리가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30여 년 전 다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우리’를 향한 출발점을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통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해러웨이가 분투했던 과학 혹은 객관성이라는 것은 경험을 둘러싼 주장을 짊어진 지식이며, 삼인칭 인식이며, 자연화하는 사고이다. 그리고 자연화로부터 어떻게 몸을 떼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러웨이를 “상황”이라는 장소로 향하게 한다. 이 지점에 해러웨이는 말, 즉 지식을 재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파농과는 전혀 다른 문체지만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 역시, 언어적 주장에 저항하면서 시작의 장을 찾아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해러웨이가 향한 장소는 제한된 세계이며, 그 성격은 “부분적”이다. 이곳에서 “부분적 광경” 혹은 “제한된 목소리”에 기반한 말이 생겨난다. 몸에 옷을 걸치듯 경험에 걸쳐지는 것은 이러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대 일부’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말하는 전체 속의 부분이 아니다. 집합적 범주가 아니라 움직임이자 운동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부분성은, 자기 완결적인 부분성이 아니라, 상황에 놓인 지식이 가능하게 되는 각 각의 결합 혹은 뜻하지 않은 시작을 위한 부분성이다”.[5] 개개의 장소는 시작의 장이며 동적인 모습 안에 있다. 주장에 저항한다는 것은 복수의 범주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태를 확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경험이 말을 걸칠 때, 요점은 말의 일반적 유형이 아니라, 말과 함께 생성하는 어떤 상황과 시작, 그것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관계성에 있다. 이러한 일들이 기존의 상황과 관계성과의 경합 안에서 발생하는 이상, 말은 유형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다. 말은 말로서 승인되지 않은 말을 포함하여 개개의 관계성 안에서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말의 모습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시작의 일단(一端)을 짊어지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경험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며, 해설의 대상도 아니다. 경험이 움직임이자 상황 혹은 관계성의 생성이라는 의미는, 그것을 말로 하려는 ‘나’ 자신이 그 움직임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의 일단을 감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황적 지식”을 함께 확보하려고 하는 태도, 즉 앎이다.[6]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번역 : 정유진(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각주 ^ ジュディス・バトラー『アンティゴネーの主張』竹村和子訳、青土社、2002年、25頁。 ^ 1)과 동일、25頁。 ^ フランツ・ファノン『黒い皮膚・白い仮面』海老坂武・加藤晴久訳、みすず書房、1970年。 ^ 3)과 동일、79頁。 ^ ダナ・ハラウェイ『猿と女とサイボーグ(新装版)』高橋さきの訳、青土社、2017年、377頁。 ^ 역자 주, 도미야마 이치로/심정명 역 <시작의 앎 –프란츠 파농의 임상->,(문학과지성사, 2020) 서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