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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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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구술사는 약자로서의 소수자가 권력이 된 주류 역사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보편을 점거한 주체의 관점으로 쓰이는 역사에 균열을 내고 주변화된 잔여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의 이면을 그리는 동시에 불완전한 역사의 빈틈을 메운다. 그러나 몇몇 개인의 이야기에서 역사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의미를 도출해 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표성의 부재와 재현의 불완전성이 장벽처럼 가로막혀 있는 탓이다.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가 개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근거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착각하고 합리화하는 존재인 인간이 기억하는 불완전한 이야기가 어떻게 사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까.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 이론』(정세경 옮김, 두번째테제, 2021)은 개인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생활사 이론이 가지는 보편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질적 조사에서 그려지는 디테일이란 ‘리얼리티의 복수성’을 부르짖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들의 기억이나 경험, 이야기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무엇이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구술자로서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존재하며 천천히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이러한 몇 겹으로 포개어진 ‘사실’을 최후의 독자에게 건네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디테일이라는 것은 실재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하다.” -기시 마사히코, 『망고와 수류탄』, 29~30쪽. 실재에 도달하게 만드는 생활사 이론은 ‘선택’이 아니라 ‘증식’의 세계관을 지향한다. 모순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구술은 모순을 정돈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설을 최대한 늘려 나감으로써 인간이 구술하는 상황에 대한 상상력의 경계, 혹은 진실의 경계를 넓혀 나가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인간과 시대에 대한 전면적 이해는 “그 상황의 가혹함을 축소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이해’” 위에서 가까스로 가능해진다. 우리는 구술사 혹은 생활사가 전해 주는 “인생 이야기”의 무게를 통해 그들이 살았던 역사의 실재에 도달한다. 전쟁이 끝나고 76년이 지났다. 전후를 기준으로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전쟁의 상처가 몸에 새겨진 이들과 함께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전쟁을 체험했고, 무엇보다 전쟁의 피해를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 있으며, 이들의 증언은 전쟁의 성격에 대한 진실을 한층 실재적으로 구성한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표현처럼 우리는 ‘증언의 시대’를 살아 온 것이다. 서경식의 증언은 이야기를 통한 증언이며, 무엇보다 증언하는 주체와 전달자, 그리고 증언이 도달하는 사람을 ‘연결’하는 증언이다. 일본군‘위안부’ 송신도 님의 증언을 이야기로 전달하기 위해 서경식은 자신의 어머니를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이 탄생했다.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이때 서경식이 대상화와 소비의 문제를 깊게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와의 대담을 묶은 책 『책임에 대하여』(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한승동 옮김, 돌베개, 2019)에서 그는 다시 한번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방식이 야기할 수 있는 한계 지점에 대한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위안부 출신 송신도 씨와 같은 해에 태어난 어머니를 ‘자료’로 제공한다는 것은, 내가 어머니를 소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식과 늘 대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인데,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내 어머니가 송신도 씨의 운명을 좇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일이 ‘위안부’가 이른바 추상적 언설의 대상이 아니라 살이 붙고 피가 통하는 존재임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시 마사히코와 서경식의 말에서 공통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류 역사에 균열을 내는 증언의 말하기에서 중요한 것이 ‘추상적’인 것과 구분되는 ‘실재’적 감각이라는 점이다. 추상적 언설의 역사에서 구체적 감각의 역사로 전환되는 사이, ‘증언의 시대’가 있다. 2016년에 출간된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현대문학)은 증언의 시대가 맞은 새로운 전환점을 ‘호명’한 소설이다. 『한 명』은 그때까지 자신도 ‘위안부’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채 살아온 어느 화자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증언자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상상된 마지막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증언의 시대가 도달한 어느 지점을 상상한다. 증언의 시대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이 소설은 ‘저문 증언의 시대’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일몰의 시간을 빌려 증언의 시대가 서 있는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증식의 세계관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시간을 목전에 두고 그리는 증식의 세계관이 어떤 의미를 형성하고, 또 문학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실재적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마흔일곱 명에 아홉 명을 더하면…… 가게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계산할 때에는 그럭저럭 돌아가는 덧셈과 뺄셈이 그녀는 잘 안 된다.” -김숨, 『한 명』 부분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계산할 때에는 문제없이 돌아가는 연산이 ‘위안부’의 수를 헤아릴 때에는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정량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산의 법칙으로 바라보면 이들의 세계에는 마이너스만 존재하는 필패의 세계에 가깝다. 증언하는 자들의 존재가 소멸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증언의 시대는 저물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줄어들기만 하는 세계에서 증언의 힘이란 한계가 분명한 일시적 진실에 불과한 것이다. 사라지고 말 진실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한계 시간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상상력이 무엇일까. 김숨에게 증언이 증식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때의 증식은 한 세대에서만 일어나는 옆으로의 증식이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아래로의 증식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마지막 증언자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은 경험자이지만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그를 만나러 올 사람은 체험자가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증인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까. 눈물이 나고 기가 막히고 감감해서…….” 김학순 여사는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중략)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가 238명이라고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한 명밖에 안 남았을까 싶어,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귀에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벽에 덩그러니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테두리가 둥글고 검은 바늘시계다. 시간이 없다…….” -김숨, 『한 명』 부분 부재의 증거가 증거의 부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이 순간에도 적용된다. 증언의 시대가 ‘실재적 감각’을 통해 기존의 역사에 균열을 냈다면 실재하는 증언자가 사라지고 없을 저문 증언의 시대는 실재를 대체하는 다른 감각의 출현이 필요하다. 증언자가 없다고 해서 증언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김숨의 소설이야말로 그 자체로 포스트 증언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생존자의 목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 명』에 등장한 ‘위안부’의 증언은 ‘증언록’이 아니다. 그렇다고 ‘구성’된 이야기 속에 증언록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기록을 배치한 이 소설을 ‘픽션’이라고만 부를 수도 없다. 증언록과 픽션 사이에 위치한 『한 명』을 편의상 ‘증언소설’이라 부른다면, 이때 이 증언소설은 증언할 수 있는 피해자이자 생존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다. 문학은 한 사람의 기억을 한 시대의 기억으로, 한 시대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추상화할 수 있다. 이때의 추상화는 증언의 시대 이전의 추상화와 전혀 다르다. 전자의 욕망이 하나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라면 후자의 욕망은 복수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한 명』을 다 읽었을 때 기분이 생각난다. 경기 종료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에 아직 체력이 바닥나지 않은 교체 선수가 가벼운 몸짓으로 그라운드를 향해 뛰어오는 걸 보는 것 같았다. 벤치에는 더 많은 선수들이 앉아 있고, 따라서 연장전으로 가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상황. 선수에서 다른 선수로 이어지는 사이 증언의 현장성과 일관성은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증언이 생존자들의 증언이 지닌 가치를 반감시킨다고는 볼 수 없다. 가혹함을 축소하는 역사에 반해 가혹함의 가능성을 증식함으로써 그들이 거기 있었다는 존재감을 부여하는 ‘이야기’들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은유와 상징의 힘으로 거듭 태어나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살아 있는 현재적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소설이 고전이 된다. 『한 명』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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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폭력’의 본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은유 - 『용맹호』 권윤덕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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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신간 『용맹호』(사계절, 2021)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쟁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전쟁에는 온갖 폭력과 잔인함, 묵인과 공조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전군인의 몸에 그대로 남는다. 전쟁이 끝난 후 살생보다 생명에 가치를 두는 일상을 살아야 할 때, 그 간극에서 참전군인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의 말을 통해 그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본다. 권 작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꽃할머니』(사계절, 2010)부터 『나무 도장』(평화를품은책, 2016), 『씩스틴』(평화를품은책, 2019), 그리고 최근의 『용맹호』까지 여러 작품을 통해 전쟁과 폭력, 가해와 피해에 대한 관점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용맹호』는 『꽃할머니』를 마무리한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두 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를 주목할 만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전쟁과 여성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가해를 함께 다뤄야 『꽃할머니』도 끝맺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10년 후 『용맹호』로 비로소 이야기의 매듭을 지었다. 그사이에 출간한 『나무 도장』과 『씩스틴』에서는 각각 제주 4.3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 근현대사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했다. 그림책을 통해 한국 역사 속의 ‘폭력’을 지적해온 작가가 앞으로 남겨둔 이야기는 무엇일까. 우리의 아픈 역사를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시각으로 써 내려온 권윤덕 작가를 만나 함께 나눈 대화를 전한다. Q. 『용맹호』 출간 이후 어떤 나날을 보내고 계시나요? 강연도 나가고,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도 갖고 있어요. 『꽃할머니』를 끝내고 난 뒤 베트남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0년이 넘어서야 책이 나왔네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성해낸 걸 자축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웃음). Q. 『꽃할머니』 작업 이후 베트남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꽃할머니』 작업을 하면서 일본군‘위안부’의 아픔에 공감했던 일본 및 세계 여성들의 활동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법정 자료를 읽으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전 당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돌아보게 됐고, 가해국 국민으로서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결과, 다음 책에서는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 이야기를 해야 『꽃할머니』가 완성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Q. 『꽃할머니』와 『용맹호』 사이에 그림책 『나무 도장』과 『씩스틴』을 출간하셨어요. 그 이야기들은 어떻게 다루게 된 건가요. 『나무 도장』에서는 처음으로 (권력의) 수행자이자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어요. 가해자이긴 하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어느 정도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사람이죠. 누구한테나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거든요. 『씩스틴』에서는 계엄군이 주인공이지만 그 외형을 ‘총’으로 표현했어요. ‘씩스틴’은 마지막에 광장에 남아 생명을 살리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두 책의 출간 과정을 거치면서 가해자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성격은 다르지만 ‘용맹호’라는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Q. 그렇다면 ‘용맹호’가 호랑이로 묘사된 것도 그러한 맥락과 관련이 있을까요? 『꽃할머니』에서는 실제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다큐멘터리처럼 진실하게 다가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아쉬움이 있었죠. 그래서 『씩스틴』에서는 실제 인물 대신 총을 주인공으로 했어요. 『용맹호』도 마찬가지예요. 주인공을 참전군인인 사람으로 설정하면 그 배경과 상황에 현실적 제약이 많아요. 그러나 호랑이로 설정하면 이야기의 폭이 훨씬 넓어지죠. 가슴이나 귀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도 사람에게 적용했다면 어색했을 거예요. Q. ‘용맹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 있었다면요. 용맹호 씨는 자신의 과거를 몸의 고통으로 직시해 갑니다. 그는 폭력의 구조 속에서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이고, 그 죄업이 자기 몸에 그대로 나타나죠. 그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착한 참전군인’이 되어서는 안 됐어요. 만약 그렇게 묘사한다면 “가해자도 피해자다”라는 식으로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로서의 가해 행위, 그 잔혹함을 있었던 그대로 드러내야 가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고, 따라서 용맹호 씨는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어야 했어요. 그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어요. 몸에 신체가 덧붙여지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1]의 피해자 사진을 보고 나서였어요.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학살 후 퇴각한 곳을 미국군이 들어가서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거든요. 그중에 ‘가슴이 잘린 채 살아있는 여자’라고 설명을 달아놓은 사진이 있어요. 가슴이 잘린 끔찍한 고통을 직접 그릴 수는 없었기에 반대로 가슴이 생겨난 것으로 풀어냈죠.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Q. 성폭력 장면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으셨다고요. 처음엔 성폭력 장면을 추상적으로 그렸어요.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 사진을 보면 여성이 쓰러져 있는 곳이 논이에요. 그래서 벼가 눕혀져 있고, ‘논라’[2]가 떨어져 있고, 슬리퍼가 나뒹구는 장면으로 그렸죠. 그런데 그 장면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보니 성폭력을 표현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더라고요. 의미가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상황을 설정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베트남 활동가 레호앙응언 님과 구수정 선생님(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에게 자문을 구했어요. 소개해 주신 한겨레신문 기사(할머니의 어떤 기억, 2015.04.24.)도 읽었고요.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이 실린 기사였죠. 놀라운 건 당시 막사에서 성폭행을 당한 분들이 많다는 거였어요. 팜티언이라는 분의 증언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할머니는 꾸이년의 고보이 평야에서 체포되어 뚜이프억현 프억선의 한국군 기지로 끌려갔다. 기지에는 일렬로 나란히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참호 속에 한국군이 1인씩 들어가 있었는데, 그 속에 끌고 온 여성들을 집어넣었다. (출처: 한겨레, 할머니의 어떤 기억, 2015.04.24.)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꽃할머니』에 썼던 내용과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전쟁 상황에서 여성이 겪는 피해의 구조가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걸 알았죠. 막사를 사건 배경으로 그릴까도 생각해봤지만, 베트남전에서는 마을 수색을 나간 군인들이 여성들을 숲이나 뒷집으로 끌고 가 성폭행하는 상황이 훨씬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기사 내용 중 레티히에우 할머니의 사례를 참고했어요. 그의 증언에 한국군이 성폭행 후 옷을 벗겨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미지가 강렬하게 그려졌죠. 뭉텅뭉텅 잘려 나간 검은색 옷으로 당시 상황을 표현했어요. Q. 『용맹호』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심각하고 무거운 반면 그림과 색감이 참 아름다워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꽃할머니』 작업 초반에는 무섭고 끔찍한 그림들로 스케치를 했었는데 심달연 할머니에게 못 보여주겠더라고요. 그때 내가 누구를 위해 이 책을 만들고 있는 건지 다시 한번 돌아봤어요. 심달연 할머니가 이 책을 보고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고, 당신이 살아온 삶이 소중하다는 걸 느낄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꽃으로 대신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직접적인 폭력을 그리는 대신 은유와 비유, 상징을 빌어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 거예요. 아픈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꽃할머니』 때 알게 됐어요. 이후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됐고요. 특히 『용맹호』에서는 베트남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을 대비시켜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Q. 혹시 베트남 독자들과의 만남도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베트남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 피해자분들이 한국에 오시면 책을 보여드리고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베트남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 학교에 다니는 베트남 출신 어린이는 이 책을 어떻게 볼까 궁금해요. 베트남에 번역 출간될 수 있기를 바라고요. 또 참전군인 중에는 자신의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의 얘기도 듣고 싶어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Q. 가해자를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일인 만큼 사회적으로 다양한 논의가 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아정 독립연구가가 ‘가해자성’에 대해 쓴 글이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했던, 혹은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 잘못들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인정하려 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자기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의 토대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해자성’의 핵심”[3]이라고 했죠. 우리 사회가 용맹호 씨를 용서할 수 없더라도 그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회가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어서 몰아내면 용맹호 씨는 폭력을 만들어 낸 단단한 구조 속에 숨어버리고, 끝내 잘못을 시인하기 어려워질 거예요.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를 인정하고 참회할 기회를 줄 수 있는 시민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용맹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시민들이 쓰러진 용맹호 씨를 위해 달려오고 119를 불러주잖아요. 그 장면을 통해 이제 시민사회가 나서서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Q. 『용맹호』는 폭력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용맹호’가 어떤 가해를 저질렀고 또 그로 인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폭력의 재현에 있어 작가님이 생각하는 적절한 방식은 무엇인지요. 저는 폭력을 재현해놓은 걸 보면 누군가 모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폭력 장면에서 가학적인 면을 즐기거나 본인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까 봐 폭력을 그대로 그릴 수 없더라고요. 더욱이 어린이가 보는 그림책에서는 더 조심하게 됩니다. 그럼 폭력을 그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폭력을 이야기할까, 매번 어려워요. 그래서 상징과 은유의 방법을 빌어와 이야기합니다. 현상과 함께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함께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꽃할머니』, 『나무 도장』, 『씩스틴』, 『용맹호』 등 한국 근현대사 속 ‘폭력’을 이야기하는 그림책 작업을 계속해오고 계세요. 이를 통해 근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지, 또 작가님이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폭력의 구조에 관심이 많아요. 그것은 오랜 기간 공고하게 유지되어온 것이기 때문에 잘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피해자의 증언은 폭력의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지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전시 성폭력 속에서 여성 인권의 문제를 보게 합니다. 아직 많은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은 어린이의 시선도 폭력의 단단한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요. 평화로운 사회, 즉 누구든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폭력의 구조부터 점차 허물어 가야 해요. Q. 예비 독자분들이 『용맹호』를 보고 어떤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용맹호 씨는 자신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몸의 변화를 통해 고통스럽게 겪어갑니다. 독자가 그것에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든지 가해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될 수 있거든요.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심지를 잃지 않으면 좋겠어요. 용맹호 씨는 피해를 품은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어요.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은 ‘전쟁과 여성’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서 일본군‘위안부’와 함께 이야기될 필요가 있고요. 또 베트남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우리의 잘못을 물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아시아의 평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앞으로 그림책을 통해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으신지요. 『용맹호』를 끝내고 나서 아픈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고 재미있는 걸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 아픈 이야기는 바로 세월호 이야기인데요. 큰 틀에서 구성은 짜놨지만 세세한 증언을 모두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 당분간 멈췄어요. 그림을 그릴 때 피해자의 고통에 몰입하다 보니 『꽃할머니』나 『용맹호』 작업 중에 몸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조금 쉬어가야 하나 보다 싶어요. 『꽃할머니』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5년 정도를 해왔으니 변화를 줄 때도 되었고요.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벼워지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용맹호』에서 자연을 그릴 때 많이 위로가 됐는데, 앞으로 자연과 생명을 노래하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Q. 작가님에게 그림은 또 다른 ‘언어’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림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하얀 화판 앞에 앉아서 선을 하나 그으면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떤 상황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감정이 끌어올려지기도 하죠. 그게 선으로 색으로 여백으로, 제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과 함께 화면에 그려져요. 그리고 한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찾아가죠.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기도 하지만 즐거움 또한 있어요. 다른 어떤 일보다 재미있고 평생 하고 싶은 일이죠.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권윤덕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장소: 권윤덕 작가 자택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각주 ^ (편집자 주) 1968년 2월 12일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의 주민 70여 명(69~79명 추정)을 학살했다는 의혹의 사건 ^ (편집자 주) nón lá. 야자나무 잎사귀로 만든 원뿔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 ^ 심아정,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참전군인A와 ‘함께 말한다’는 것」,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년,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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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발전주의와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 -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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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여성은 생명을 낳고(give), 남성은 생명을 파괴한다(take)… 이제까지 백인 남성은 유색인 남성을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으로 대상화해왔다. 이것이 문명의 원동력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이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의 요지는 간단하다. 지구(자연)와 당대 자본주의(인간 활동)는 공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인 저자 사이토 고헤이는 그간 환경운동의 대표적 구호였던, 지구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SDGs(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아편”이라고 말한다. 텀블러 쓰기 같은 일상의 운동 역시, “멸종에 이르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95쪽)고 비판한다. 나는 “sustainable”이 “지속 가능한”이란 표현으로 번역된 것 자체가 그간 한국 사회의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유지 가능한”. 이 표현이 적절하다. 실상은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유지 가능한 발전”이었다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일찍 제기되었을지도 모른다. 지속은 없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자본주의와 지구는 동반자가 아니다. 현재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지구 파괴를 막을 수 없다. 저자는 경제 성장 신화를 버리고 규모 축소(scale down)와 속도 둔화(slow down), 감속주의(減速主義)를 주장한다. 이 책의 주장이 처음은 아니다. 서두에 인용한 보부아르의 말대로, 성차별과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공생 관계에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반자본주의 투쟁부터 영성 페미니즘까지 다양하지만 1970년대부터 에코 페미니스트들과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대상화 없이는 작동할 수 없음을 이론화해왔다. 이에 반해 저자의 방법론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양극화에 저항한 페미니스트들도 동참했던- “Read Marx, again(마르크스를 다시 읽자)” 운동의 생태주의적 버전이다(그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두번째테제, 2020)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본론』으로 ‘돌아가’ 대안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성장(脫成長) 개념을 도출해내고, 이른바 3.5% 이론을 제시한다. “전체 인구 중 3.5%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심으로 저항하면 반드시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회운동론이다. 독일의 녹색당도 인구의 5%가 녹색당에 가입하면 완전히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해왔고, 그들은 지금 ‘현실 정치’에 진출했다. 그간 탈식민 여성주의나 오리엔탈리즘에 저항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약점을 역사주의로 보았다. 즉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직선상의 단일한 시간 개념에 따른 시기 순서의 ‘하나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원과 선두를 상정한 이러한 시간 개념은 발전주의의 원동력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진보(progress)라고 여겨졌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이 진보 개념은 절차적 민주화와 발전주의를 동시에 의미했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는 구호는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한국의 진보 세력이 발전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다. 한편 발터 베냐민, 요하네스 파비앙,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 역사철학자들이나 캐롤 길리건, 사라 러딕 같은 보살핌 이론가들은 ‘수레바퀴’의 지속 불가능성과 그 방향의 반(反)민중성을 제기해왔다. 하지만 자본가들과 그들에게 주체적으로 종속된 우리의 일상은 결국 지구 파괴 및 팬데믹(pandemic·세계보건기구(WHO)가 선포하는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으로,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과 직면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플랫폼 자본주의는 기존의 노동, 생산, 소비 등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면서 우리의 현실을 두 가지 문제로 압축했다. 실업과 기후위기가 그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지금 우리의 생존 조건을 압도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념에 따르면, ‘한계 없는 자본주의, 절대적(absolute) 자본주의’다. 이 글에서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 꼼꼼히 보고된 지구 멸망의 리포트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불편한 진실’을 운운할 때가 아니라 ‘진실’을 공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류가 이제껏(1800년대~) 사용한 화석 연료 중 절반은 1989년 냉전 체제 이후에 소모되었다(38쪽). 겨우 30여 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최상위 부자 26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과 같다(231쪽). 코로나로 인한 재난 편승형 자본주의로 2020년 봄 미국의 초부유층의 자산은 687조원 늘었다(252쪽). 전문가들은 지구 멸망 시기를 30년 내외로 보고 있다. 문제는 지구 멸망 자체가 아니다. 동시 멸망이 아니라 선차적 멸망이 문제다. 이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발전한(우주여행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난 2년간 경험했듯이, 인구의 99%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의미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는 『人新世の「資本論」』. 인신세(人新世)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에 해당한다. 인류세는 인간의 경제 활동이 지구의 지질 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책의 주장과 의미는 분명하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책이고 내용도 어렵지 않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의 의미를 묻고 싶다. 기후 위기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에 더 관심이 있다. 마침 이 책을 읽을 무렵 1991년부터 발행해왔던 『녹색평론』이 1년간 휴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사이토 고헤이의 작업은 한국과 일본의 지식 생태계의 상징적 차이는 아닐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사회화하기 어려운 이슈, 그렇기 때문에 왜곡되고 부차적으로 다루어지기 쉬운 의제는 생태주의라고 생각한다. 생태주의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환경(環境)이라는 글자 자체가 인간을 둘러싼 ‘배경’인가, 아니면 인간도 그 ‘배경의 일부’인가를 생각케 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태주의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인간의 이중적 조건에 대한 근본적 사유이다. 생태주의 ‘우산 아래’ 평화, 반전, 군사주의 비판, 여성주의가 논의되어야 한다. 오늘 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K 컨텐츠’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 현대사 전반을 지배한 식민주의 콤플렉스 ‘덕분이다’. 피식민 지배 경험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선진국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추격 발전주의는 해방 이후 후기 식민주의, 한국식 근대화의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앞서간’ 서구의 역사의 대기실로 상정했다. 경제 성장 외의 과제는 “나중에 해결할, 혹은 잘 살게 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라고 여겨졌다. ‘여성 문제’를 비롯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까지도 여성은 시민이 아니라 출산력 등 국가 자원의 일부로서 동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대중화로 이러한 남성 문화가 설득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역시 기후 위기의 당사자가 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당장 대통령 선거 이슈에서 환경과 노동 정책은 없고 일부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마치 미래를 좌우할 듯한 이 사회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주의적 발전주의, 개인의 능력과 출세가 공동체의 목적이 되어 기후 위기는 논의조차 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건설 자본은 폭력주식회사, 부동산 문제, 재벌의 금융업이 연결되어 있고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는 추종 불허의 자살 1위국이다. 발전주의와 젠더는 오래된 논의 주제다. 발전주의는 앞서 말한 대로, 성 중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성의 산물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근대의 남성성이 서구처럼 국내/가정(domestic)에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외세에 대한 공포/대항/억압/의존/우월 등 자기 타자화의 산물일 때, 이를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의 비유인 강자와 약자의 젠더화를 적용하여, 강자인 외세는 ‘남성’이고 약자 혹은 피해자인 우리(남성)는 ‘여성’이라는 피해의식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로컬에서의 실천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적을 누구로 상정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미래 지향의 추격 발전주의로는 탈성장을 상상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좌파, 진보 남성’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남성 문화가 환경 이슈를 기준으로 ‘이념적으로’ 분열되어야 한다. 남성들 간의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차이가 드러날 때, 즉 기후를 주제로 남성들 간의 계급투쟁이 일어나야 한다. 이때 당대 성차별이 ‘젊은 세대의 젠더 갈등’으로 위장된 현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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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공창이라는 말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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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국가와 공창제 ‘위안부’와 공창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처럼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견해 및 지식에 따라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지는 말도 드물 것이다. 일본에는 ‘위안부’제도와 공창제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나누어 보려는 견해가 있다. 즉 시기가 전시냐 평시냐, 적용된 법이 전시법이냐 시민법이냐, 규칙에 폐창규정이 있었나 없었나 등이다. 그러나 과연 식민지 조선에서 이런 이분법이 유효했을까. 식민지 조선은 평시에 시민법을 보장했을까? 조선인 창기는 폐창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을까? 우선 식민지 시기의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이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총독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며, 3∙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경찰력은 증강되고 동화정책은 강화됐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창제를 ‘일제가 이 땅에 남긴 해독’으로, 즉 일제 식민지지배의 상징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폐지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에 심어 놓은 공창제는 과연 무엇일까. 이는 정해진 성매매 구역 내에서 업자나 여성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철저하게 한 것이었다. 그 이전, 즉 에도막부[1] 시대에도 유곽이나 그와 비슷한 장소에서 성매매는 다양하게 존재하였으나 공권력을 동원하여 성병 검사를 조직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유곽에 있던 여성들은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전차금에 얽매여 성노예 상태와 같았다. 서구에서는 이런 여성들을 흑인 노예에 빗대어 ‘백노예’라고 했으나 일본 폐창운동가들은 백노예를 추업부(醜業婦)[2]라고 번역했다. 공창제는 국가가 병사나 빈민 노동자를 다스리기 위해 근대에 재편성한 것으로, 특히 군대의 병사를 겨냥한 제도였다. 일본은 유럽과 달리 자본주의보다 군사주의가 앞선 후진 제국주의였기에 근대 군대를 저렴하게 유지하기 위해 공창제를 필요로 했다. 또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방 유력자들은 앞다투어 군대를 유치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에 고용된 프랑스 법학자 보아소나드(Boissonade)는 국가가 성을 관리하는 주체라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 결과 공창제를 관리하는 것이 지방 관공청이나 (민간)업자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다. 일본은 근대 초기 북해도를 개척하는 데 많은 죄수를 동원했고, 이를 위한 회유책으로 공창제가 이용되었다. 이때 성매매 업자와 창기에게 징수한 세액은 지방세의 80%에 달했다는 놀라운 보고가 남아 있다. 북해도에서 봤듯이 일본이 부국강병(富国強兵)의 나라가 되기 위해 공창제란 국가 성관리책이 큰 역할을 했는데 조선을 침략하는 데도 공창제는 교묘하게 활용된 것이다. 도쿄의 유명 유곽이 부산에 상륙하다 『부산고지도』(부산광역시, 2008)를 보면 1881년에는 이미 부산 거류지에 9채의 기루(妓楼∙성매매를 할 수 있는 요리집)가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나카고메루(中米楼)의 옥호가 용두산 산마루에 보인다. 나카고메루는 도쿄 요시와라(대표적인 유곽 지대)에서 어느 정도 이름 난 성매매 업소인데 왜 가까운 규슈지방이 아니라 머나먼 도쿄에서 부산까지 가는 모험을 하게 되었을까? 구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는 북해도 개척사 장관으로서 많은 병사를 관리해왔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전권변리대신(全権弁理大臣)으로 조선에 파견된 사람이며 조선 침략을 주장한 강경파이다. 구로다는 단골 손님으로 나카고메에 자주 출입했고, 나카고메 주인과 구로다 사이에는 조선에 관한 정보나 청탁이 오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 주인 아카구라 도키치(赤倉藤吉)는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서 여성 10명을 데리고 조선에 건너갔다. 일본 성매매업자가 낯선 부산에 상륙하기까지 일본 정부와의 은밀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며, 결코 개인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조선행이라는 모험을 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1876년 개항 후, 부산과 원산에서 일본인 거류지가 설치됐고, 1881년에 일본 영사관은 「예창기영업규칙」을 만들어 거류지에 있는 일본여성에게 세금 징수와 성병 검사를 하게 했다. 전쟁과 점령, 그리고 특별이란 수식어로 감추어진 공창제 그런데 1883년에 인천 개항 때엔 사정이 달랐다. 부산, 원산과 달리 외국인 거류지에 구미열강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일본이 거류지에서 성매매를 공공연하게 인정한다는 것이 서구열강에 알려지면 근대 문명국가로서의 체면을 구기게 될뿐더러 장차 서구와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데도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 정부는 인천에선 성매매를 금지하게 했다.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변경에 인천 영사관에서는 맹반대를 했다. 그 이유는 관리하에 성병 검사를 해야 밀매춘(몰래 성매매하는 것)을 방지하고 성병 전염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사관과 일본 외무성과의 논쟁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 타협안으로 예기 영업을 1892년에 인천, 1894년에 부산, 1895년에 서울에서 허가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청일전쟁, 또 하나의 조일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은 동학농민봉기를 구실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던 것이며, 이에 저항하는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제노사이드’[3]였다. 일본인이 그린 전쟁홍보 그림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약탈, 성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은 조선 여성들은 양쪽 나라 병사들에게 피해를 입었다. 제1군 사령관을 맡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가 남긴 문서(일본군 병사(軍夫)가 민간인 가옥 방화, 재산 약탈, 성폭력을 저질른 것을 인정하고 경고함)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입지가 호전되리라 기대했고, 청일전쟁 전후 조선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증가했다. 그들을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 예기영업 허가였다. 청일전쟁은 따지고 보면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으려고 일어난 전쟁이니 러일전쟁 발발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막으려던 영국은 1902년에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적극 일본을 지원했다. 이래서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싼 제국주의전쟁을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러일전쟁 전후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 숫자는 더 늘었으며 그에 따라 성매매도 활발해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특별요리점, 특별예기란 신조어로 교묘하게 감추어진 공창제가 등장한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놓고 공창제를 실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위의 광고에는 공창제를 나타내는 대좌부(貸座敷)[4]란 말이 쓰여 있다. 이것은 1902년에 가즈키 겐타로(香月源太郎)가 낸 『한국안내』에 실린 광고인데, 조선여성이 접대하는 유곽의 실체를 요리점으로 눈가림했던 것이다. 광고로 부산에서는 이 무렵에 이미 일본 성매매업자들이 조선여성을 싼 값으로 착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 성폭력과 성병문제[5] 러일전쟁 때의 『전역통계戦役統計』 「육군군인의 형법 기타 일반법령위반처분 죄명내역」의 「강간∙미수(未遂)∙방조(幇助)」와 「기타 신체에 대한 죄」를 보면 검찰처분은 50건, 군법회의 처단은 31건으로 되어있다. 이런 숫자 뒤에 더 많은 성범죄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한국주차부대(韓国駐箚部隊)도 화류병(성병) 단속에 관한 지시를 러일전쟁 때 내리고 있다. 즉 「병원(兵員)의 단속을 엄격하게 안 하면 화류병 병독이 군대 안에 퍼지게 되고, 병력의 감소와 소모를 가져올 우려가 적지 않아서 각 간부들은 한층 단속을 강화하여 화류병 환자의 증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안동현(중국 단동)에 시찰하러 간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만주군 총참모장)는 군대가 유곽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축소 명령을 내렸다는 일본 외무성 경찰사의 기록이 있다. 이미지 출처: 『남만주의 상업(南満洲ニ於ケル商業)』 (킨코도서적(金港堂書籍), 1907) 고다마가 축소하라던 안동현 유곽은 일본 병참사령부가 1904년 연말에 개설한 유곽인데 이 때에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던 시기다. 사령부는 경찰상, 위생상 단속을 하는데 효율적이며 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병에 걸린 여성은 군대가 마련한 진료소에서 바로 입원시켜서 치료를 받게 했다. 위안소를 발명한 일본 군대 군의관 후지타 츠구아키(藤田嗣章)의 회고록[6]을 보면 「철령(鉄嶺)의 병참부는 시험적으로 지역을 정하여 헌병의 단속, 감시하에서 사창(私娼)을 공인하고 매일 오전에 군의관이 성병검사를 실시했다. 합격한 여자들에게는 건강증을 발급하고 싼 값으로 병사에게 접객(接客)할 수 있게 했다. 나무 울타리가 둘러싸인 시설 입구에 헌병이 지키고 출입하는 인원을 한 사람씩 점검했다. 여성의 방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제한돼 있었다. 병사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은 마치 극장 앞의 관객을 보는 것과 같았다. 군의관들이 고안한 이 시설은 성교만 하니 시간 낭비도 없었다. 경찰 감독 하에서 여자들이 건강증을 휴대하는 방법도 간이하면서 안전하므로 (전쟁 시의) 시세에 맞는 제도였다」고 군의관은 ’위안소 개설’을 회상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사진과 같이 회상기 내용은 위안소 앞에 몰려드는 병사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군의관들은 이 경험을 30년 후에 일어난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되살렸다. 같은 회상기에 나카무라 로쿠야(中村緑野)[7]는 법고문(法庫門)[8]에서의 경험을 후지타처럼 기록하고 있다. 「군정서(軍政署)는 드디어 임시매소부제(臨時売笑婦制)를 허가하게 되어서 상인을 시켜서 비교적 신원이 확실한 만주의 작부를 데리고 와서 유흥을 개업하게 했다. (중략) 막상 이것이 공개되니 여성의 인원수에 한계가 있어서 많은 병졸의 수요에 응하기 어려웠다. 특히 한꺼번에 몰려드는 병사를 정리하기 위해 먼저 그 지역의 건물 내부에 벽으로 막은 여러 방을 나누어 방방마다 따로 출입하게 만들었다. (중략) 여러 부대에 홍보하고 일정을 정하여 인원을 제한, 유흥비는 계급마다 차이를 둔 티켓으로 지불하게 했다. 막상 개업을 하니 무장하지 않은 병사들이 연일 밀려와서 성황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은 가소롭다고 할까 전장터가 아니면 차마 못 볼 이상한 것이었다.」 유흥시설을 만든 건 군의관 자신인데 이 문장에서는 몰려드는 병사에 대한 경멸이 느껴진다. 여기서 위안소라는 명칭은 쓰지 않았으나 1930년대 이후에 일본군이 개설한 위안소의 원형을 찾을 수가 있다. 그러나 군의관에 따라 사창이라 하기도 하고 매소부라고도 했으나 아래 그림은 공창이라고 했다. 이 그림은 일본인 우키요에(浮世絵) 화가가 군인이 찍은 사진을 모사해서 『풍속화보風俗画報』에 게재한 것인데 처마 밑에 「법고문의 공창」이라는 글이 보인다. 위안소 시설로 쓰인 건물은 관제묘(関帝廟), 즉 중국인들에게는 민간신앙의 장소이다. 이런 데서 중국 여성이 일본 병사를 성접대하게 한 광경을 중국인들은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러일전쟁에 동원된 어느 병사가 봉천(奉天)에서 자기 고향에 보낸 편지 속에 「(이런 시설에)들어가는데 상등은 3엔, 중등은 2엔, 하등은 1엔인데 우리 같은 계급은 들어가고 싶어도 받는 수당이 적어서 못 들어간다」[9]는 구절이 있다. 일본군은 위안소 개설의 이유를 병사의 성폭력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오히려 위안소 개설이 성폭력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이 종결된 후 이런 시설에 모집된 여성들은 어떻게 됐을까? 위안소는 전후 점령지에 들어온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업소가 되고, 여성들의 상대는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바뀌었다. 즉 위안소가 성매매를 확대시킨 셈이다. 군의관들은 같은 여성을 가리켜 사창, 매소부(매춘부), 공창이라고 불렀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황에 맞게 또 다른 명칭으로, 그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을 것이다. 나가며 일본은 제국주의의 초석을 형성하기 위해 군사주의를 내세워 조선과 만주를 침략했으며 병사를 다스리고 회유하기 위해 근대 공창제를 북해도와 조선, 만주에서 활용했다. 그러나 공창제의 주체가 일본제국이란 것이 드러나보이지 않도록 제도와 여성들의 명칭을 수시로 바꾸고 나중에는 업자나 여성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글을 아는 일본여성들마저 끊임없이 바뀌는 명칭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위안부’ 제도가 1930년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창설되고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역사는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 만주, 중국의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군국주의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군대가 점령한 후 군정서(軍政署)에서 민정서(民政署)로 바뀌고 위안소는 일반 유흥소나 성매매업소로 남게 된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전쟁, 그리고 위안소가 그 주변의 다양한 성매매를 낳은 모태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일본제국은 매춘(買春), 즉, 성을 산 것이 아니라 매춘(売春), 즉, 성을 판 것이다. 각주 ^ (편집자 주)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 다이쇼군에 올라 에도에 개설한 중앙 집권적 무가 정권 ^ (편집자 주) 더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 ^ (편집자 주) Genocide. 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 ^ 1872년 예창기해방령 공포 이후 업자는 장소(座敷=다타미 방)만 빌려주는 형식으로 성매매제도의 책임을 창기에게 떠넘겼다. ^ 차경애, 「러일전쟁 당시의 전쟁견문록을 통해서 본 전쟁지역 민중의 삶」, 『中國近現代史硏究』제48집, 2010년. ^ 「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 陸軍軍医団編, 『日露戦役戦陣余話』 ^ 「병참근무의 추억(兵站勤務の思ひ出)」( 陸軍軍医団 編,『日露戦役戦陣余話』, 陸軍軍医団、1934年)/ 육군군의단편 / 일러전역전진여화 / 육군군의단 ^ (편집자 주) 만주의 철령 북서쪽에 있는 도시 ^ 大江志乃夫『兵士たちの日露戦争―500通の軍事郵便から』/ 오오에시오노 / 병사들의 일러전쟁 - 500통의 군사우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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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죄책감을 넘어선 응답의 윤리 – 영화 〈언노운 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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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노운 걸>(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17) 드라마 / 벨기에, 프랑스 / 아델 에넬 출연 / 106분 얼굴을 마주하기 얼굴을 마주하고 응답한다는 것은 무얼까? 너무 당연해 어떤 의도로 물어보는지 의아할 수 있는 이 질문은 ‘비대면’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지금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실시간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를 마주할 때, 앱을 이용해 배달을 시킬 때, 매장에서 키오스크로 무언가를 주문할 때, 소셜 미디어에서 직접 대면해본 적은 없지만 그의 타임라인을 구독해 온라인 정체성은 알고 있는 이가 ‘힘들다’고 슬쩍 흘릴 때, 현관문의 모니터나 CCTV로 누군가의 얼굴을 대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마주하고 응답하는가? 모니터의 얼굴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현대사회는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더 즉각적이고 상시적으로 만나고 연결되어 있지만 ‘응답’은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의 ‘응답’은 도나 해러웨이[1]가 ‘책임(responsibility)’은 곧 ‘응답가능성(response-ability)’이라고 했을 때의 의미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만나는 방식이 다양하고 복잡해질수록 응답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외면할 방법도 많아진다. 그럴 때 복잡한 여러 과정의 단계에서 놓치게 되는 것은 목소리가 작거나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나 약자일 가능성이 많다. 죄책감의 통증과 죽음의 공모 현대 유럽 사회에서 소외되고 주변화된 인물의 뒤를, 흔들리는 핸드헬드[2] 카메라로 바싹 붙어 쫓아왔던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서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전작들이 하층민이거나 사회적 약자였던 것과 달리 <언노운 걸>의 주인공 제니(아델 에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엘리트 의사이고 여러모로 흠 잡을 데 없는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는 의사로서 직업적 전문성을 인정받아 좋은 경력이 될 연구소에 채용되어 곧 이직할 예정이고, 병환으로 은퇴한 노의사를 대신해 임시로 3개월 일한 동네 병원에선 그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에 노래를 지어 불러주는 어린 환자가 있을 정도로 환자들에게 헌신적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벨기에는 주치의 제도를 갖고 있다. 제니는 동네 병원의 주치의로서 주로 소소한 병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들, 노환이나 당뇨병에 따른 합병증으로 병원까지 오는 것도 힘든 사람들, 노동현장에서 다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살뜰히 돌보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제니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게 된다. 병원 진료 시간이 끝난 늦은 저녁 벨소리가 울리지만 제니는 문을 열어주려는 인턴 줄리앙(올리비에 보노)을 제지하고 환자를 거부한다. 그리고 다음 날 벨을 눌렀던 이가 아프리카계 십대 소녀였으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경찰에게 듣고 알게 된다. 병원 CCTV에 찍힌 소녀의 얼굴을 대면한 제니의 죄책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한순간의 무관심과 고집스러운 냉담으로 소녀의 죽음에 동조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제니는 뒤늦게라도 그녀의 벨소리에 응답하기로 선택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소녀의 이름을 밝혀내고 가족을 찾아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고자 한다. 그러나 제니는 동네 사람들과 경찰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자신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제니는 소녀의 이름을 찾아가고 죽음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의 역할을 자처하는 동시에 의사로서 죄책감에 기인한 통증을 진단한다. 소녀가 죽은 날 그가 자기 아버지와 있던 것을 목격한 소년 브라이언(루카 미넬라)은 지속적으로 복통과 구토를 느낀다. 제니는 브라이언을 진단하던 중 죽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맥박이 급격하게 빨라지는 것을 보고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소녀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브라이언의 아버지(제레미 레니에)는 요추통증이 극심해지자 한밤중에 제니를 부른다. 소녀의 언니는 제니의 탐문에도 동생에게 성매매를 강요한 남자친구가 두려워 모른 척하다 나중에 죄책감을 호소하며 제니에게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다. 그밖에 소녀에게 돈을 주고 자기 아버지와 섹스를 하게 한 캠핑카 주인, 십대 소녀의 성을 산 노인, 범죄를 숨기려 탐문을 그만두라고 위협하는 동네 범죄조직, 마약수사 때문에 소녀의 죽음에 무관심한 경찰들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 제니의 탐문을 방해한다. 소녀의 죽음도 그렇지만, 소녀가 죽은 후 그녀의 이름을 밝히는 데도 촘촘한 방해가 있다. 여기서 죄책감과 무관심은 더 이상 개인적 심리나 상태가 아니다. 소녀의 죽음과 그녀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데에는 공동체와 시스템의 공모가 있다. 빈곤과 범죄가 만연한 사회에서 성매매를 하는 남자들과 그들의 비밀을 지켜준 소년, 10대 소녀를 인신매매하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범죄자들, 피해자 여성의 죽음에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경찰들 그리고 한순간의 냉담함으로 환자를 거부한 의사 제니까지. 소녀의 죽음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상황은 하나의 원인에 있지 않다. 그들의 ‘한순간’, 그들 각자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모여서 소녀의 죽음을 야기하고 그녀를 익명의 상태로 만든다. 제니는 소녀가 그저 부조리와 미스터리로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해 흩어져 있는 냉담하고 폭력적인 순간들을 엮어내 ‘펠리시 콤바’라는 소녀의 이름과 서사를 찾아준다. “죽어도 끝난 게 아니다”: 응답의 윤리 소녀를 위협해 추락하게 만든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제니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어차피 소녀의 죽음을 되돌릴 수도 없고 자신만 모든 것을 잃을 거라며 진실을 묻어버리자고 한다. 그러나 제니는 “죽어도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괴로운” 거라며 소녀가 “지금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다”고 답한다. 제니는 뒤늦게라도 그녀의 벨소리에 응답하기를 ‘선택’하고 ‘실천’한다. 제니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사적이고 심리적인 죄책감을 넘어서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 그 어느 벨소리 하나 놓치지 않을 거라는 단호한 의지를 담아서. 제니는 전도유망한 연구소를 포기하고 수가도 높지 않고 일만 많은 동네 병원에 남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아예 거처를 병원으로 옮겨 한밤중에도 벨소리가 울리면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들을 진찰할 뿐 아니라 죄책감에 못 이겨 털어놓는 고백을 끈질기게 듣는다. 내실에도 모니터를 설치해 모든 방에서 현관문 밖을 볼 수 있게 한다. 병원 현관문 벨소리뿐 아니라 다른 환자를 진료하거나 탐문을 나설 때도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그는 모두 응답하려 한다. 제니는 병원 문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앞서 판단하지 않고 모두에게 문을 열어 놓기로 한다. 그의 이런 선택과 의지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내었음에도 외면 받는 또 다른 소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자신의 사적인 일상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제니의 희생적 헌신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적 선택이 과연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도움의 모든 목소리를 듣겠다고 나선 제니가 오만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각자 영역에서의 영향과 책임감은 무시해왔던 관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한순간의 무책임한 외면과 판단이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 아닌가? 개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에 응답하고 끝내 무엇이라도 해보려 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구원인 것처럼 영화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제니와 줄리앙의 관계를 통해 유능함과 전문성은 응답하는 능력과 별개라는 사실을 피력한다. 효율적으로 응답하려던 제니의 선택은 소녀의 벨소리를 무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턴인 줄리앙은 달랐다. 대기실에 있던 환자의 경련에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패닉이 된 줄리앙은 의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다. 제니는 유능한 의사가 되기 위해선 환자의 고통 앞에서도 침착함과 냉담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충고한다. 줄리앙은 그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버린다. 미안한 마음에 그의 고향까지 찾아간 제니에게 줄리앙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겪었기에 자신과 같은 이들을 돕고자 의사가 되려 했지만 타자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패닉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감정적인’ 줄리앙은 경련에는 대응할 수 없었지만 소녀의 벨소리에는 응답하려 했다. 제니는 줄리앙의 ‘취약함’이 문제라고 보며 그를 교육시키고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효율성과 유능함은 때때로 도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든다. 타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한 번밖에 울리지 않은 소녀의 벨소리처럼 선명하지 않을 수 있으며 효율적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기 위해선 ‘취약함’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각주 ^ (편집자 주)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 비평가. 저서로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등이 있다. ^ (편집자 주) handheld. 카메라 혹은 조명 장치 등을 손으로 드는 것. 특히 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지 않고 들거나 어깨에 메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