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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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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생 박필근. 그에게는 ‘정겨움’이 묻어난다. 텃밭을 가꾸고 화투를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활동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는 순간에도 그의 주변에는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을 준비하며 박필근의 다양한 일상 풍경을 모아보았다. 경북 포항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와 연이 깊은 포항여성회로부터 사진을 제공받아 그 삶을 들여다봤다. 삶의 고단함을 버텨낸 온화하고도 강인한 얼굴과 단단한 손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 박필근. 모쪼록 그의 건강한 웃음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남은 생에 따사로운 햇볕과 선선한 바람이 늘 함께 하기를.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포항여성회에서 할머니 생신잔치를 열어드렸다. 포항여성회 활동가들과 동네 주민들 10여 명이 할머니 댁에 모였다. 할머니는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계신다. 포항여성회 송애경 전 회장은 ‘모처럼 장구가락에 신명 났던 할머니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던 날’로 기억하고 있다. 2015년 포항 평화의 소녀상 설치와 함께 제막식이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포항평화나비 청소년 지킴이단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할머니. 소녀상의 손을 쥐고 있는 할머니의 작은 손에 눈길이 간다. 할머니에게 유모차는 필수다. 유모차를 끌고 마실도 다니고, 경로당에서 친구를 만나 이야기도 나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의 친구들도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나시거나 요양원으로 가셔서 “만날 사람이 없다”며 많이 아쉬워하신다. 할머니 예전 사셨던 흙집 평상 위로 요강도 보이고, 볕에 곱게 말린 대추도 널려있다. 이렇게 부엌 문 앞엔 할머니의 알뜰함이 곳곳에 묻어 있다. 할머니는 60년 된 흙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가난하게 사셨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이었지만 할머니에겐 더없이 고마운 곳이었다. 2019년 할머니에게 새집이 생긴 날, 할머니 댁을 찾은 손님들이 흙집에 모여있다. 아쉽게 이 집은 2021년에 헐렸고 그 자리는 할머니의 텃밭이 되어 토마토와 고구마가 잘 자라고 있다. 포항평화나비 청소년지킴이단과 함께 소박한 생신잔치를 한 날, 포항평화나비 티셔츠를 입고 학생들을 그윽하게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따뜻하다. 찾아오는 이가 없어도 늘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할머니.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못할 때가 많아 타지에 있는 아들의 걱정을 사기도 하신다. 오늘도 할머니는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여름 볕에 잘 자란 옥수수가 가지런히 널려있는 모습이 정겹다. 할머니는 심심할 때, 밤에 잠이 안 올 때 혼자 화투를 치신다. 간혹 손님들이 와서 화투패를 나누어 칠 때면 더없이 좋아하신다. 사진 속 오늘은 새 신발도 생기고, 화투를 같이 쳐줄 이도 있는 날이니 할머니의 표정이 밝을 수밖에! 할머니 얼굴에 언제나 이만큼의 밝음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마당 한 켠, 아들이 만들어준 비닐하우스에는 쑥갓과 열무, 상추가 한가득이다. 여름 내내 도랑물 주고 정성껏 키운 상추는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녹아내릴 정도로 연하디 연하다. 이 귀한 것을 먼 길 온 손님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시는 할머니. “더 가져가소, 가가 농갈라 묵으세이~”(더 가져가세요. 가서 나눠들 드세요.) 결국 무성했던 상추밭은 초토화가 되지만 더 줄 것이 없는지를 찾는 할머니의 손은 바쁘기만 하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부지런한 손 덕으로 먹고살았다는 박필근 할머니. “할매요! 할매 손이 보통 손이 아이시더~~ 할매 손 한번만 찍어 보시더!” “아이고 손은 말라꼬~” 하시면서 보기 좋게 손을 펼쳐 놓으셨다. 할머니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손,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손. 할머니의 이 위대한 손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할머니 댁을 다녀오는 길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배웅이 함께 한다. 떠나는 이들의 차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잘 가세이~ 또 오세이~”라고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신다. 할머니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늘 뭉클하다. 사진제공: 포항여성회 편집: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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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 『할머니, 우리 할머니』 한성원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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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머리칼에 붉은 얼굴의 노년 여성들. 어딘가 낯설면서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알록달록하면서도 강렬한 색깔의 그림들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성원 작가는 그림책 『할머니, 우리 할머니』(소동, 2020)를 통해 기존에는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을 표현해냈다. 책을 예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는 그는 “예뻐서라도 책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었다”며 “그렇게 갖게 된 관심이 ‘위안부’에 대해 정교하게 정리된 책이나 자료로 옮겨 가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제목에도 작가의 염원이 담겼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위안부’피해자가 나와 다르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임을 이야기한다. “할머니들의 모습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아픈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이웃, 가족, 또는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내 주길 바라요.” 인터뷰 내내 한 작가는 ‘기억’을 강조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림’은 기억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작가의 손끝에선 색색깔의 여성들이 탄생했다. 그 화려한 외면 속에는 따뜻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강인하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할머니들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 더 많은 분들이 우리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광고나 영상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공연 작업도 하고,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전에는 주로 의뢰를 받아 작업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이번 책이 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첫 번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할머니, 우리 할머니』 책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분들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에 2019년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생업으로 바빠 미뤄뒀는데 더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죠. 숙제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하다 보니 더 많은 이들에게 공유하는 게 좋겠다 싶어 네이버 창작 프로젝트에 지원했고, 덜컥 당선되어 할머니 이야기를 3개월간 매주 연재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1년 넘게 정기연재를 했죠. 그 결과물들을 모아 책이 나올 수 있었어요. Q. 숙제를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전부터 ‘위안부’문제를 그림으로 풀어야겠다고 다짐하셨던 건가요? 대학 졸업 때 작품 주제를 고민하다가 선택한 게 한국 근현대사였어요. 1920년대 후반에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그 시대를 그리게 됐고 그것이 시작이 됐죠. 주변에서 의뢰받아 작업할 때도 공교롭게 ‘위안부’문제와 계속 마주쳤어요. 그러면서 할머니들에 대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보게 됐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였죠. 그러다 보니 작업으로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책 작업을 하면서 겪은 변화가 있을까요? 또는 배운 점이 있다면요? 대상에 잘 다가가는 법을 배웠어요.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한 후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그를 온전히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대상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충분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란 걸 새삼 깨닫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기반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몸소 겪으며 깨달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Q.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 책을 출간하셨는데, 펀딩을 거친 이유가 있나요? 감사하게도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펀딩 도서로 선정을 해주셨어요. 저희도 한 번 더 홍보를 할 수 있는 기회라 놓치지 않았죠. 이밖에도 경기도 우수출판콘텐츠, 번역지원 사업, 멀티미디어전자책 제작지원 사업 등에도 선정돼 진행 및 준비 중에 있어요. 이번 작업에 참 많은 분이 함께해주셨어요. 출판사, 편집자, 동료 작가, 활동가분들을 통해 많은 걸 배웠고 함께하는 작업의 의미를 알게 됐습니다. Q. 아주 강렬한 색깔로 할머니들을 그리셨어요. 이러한 표현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할머니를 예쁘게 그리고 싶었어요. 첫 출발이 김복동 할머니의 옆모습이었죠. 곱고 단아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그렸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까 그런 모습으로 담을 수 없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저도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니 너무 슬퍼졌고요. 그래서 이렇게는 이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기 연재를 하는 첫 번째 날 빨간 얼굴로 확 바꿨어요. 그 표현법이 할머니들의 강인하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에도 적합하다고 생각했고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죠. 그래서 이후로도 그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Q. 책에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통해 그분들의 목소리가 담기게 됐고, 또 그분들을 담기 위해 어떤 취재 과정을 거치셨는지요. 활동가분들이나 다른 작가 분들에 비해 제가 깊이 있게 접근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위안부’ 문제를 접해온 기간을 생각하면 제법 오래된 것 같아요. 대학 졸업전 때 근현대사를 그리며 아픈 역사를 바라보게 됐고, 그 뒤에는 TV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많은 자료들을 보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접한 것들이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현재 할머니들은 많이 연로하셔서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기억’을 위한 작업을 한다는 이유로 할머니들께 어려운 요청을 드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부 기록을 비롯해 30년간 활동해 오신 분들의 기록, 정의기억연대, 수요시위, 이외에 많은 책들을 통해 배우고 공부하며 기록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드는 데 동행해준 분들과 함께 내용을 구성했어요. 2차 피해가 되지 않을 내용을 선별해 담았지요. 물론 저의 노력이나 공부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피해자분들을 기억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할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한 입문서로 여겨주시면 좋겠어요. Q. 그간 많은 자료를 찾아보셨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도움이 됐던 자료가 있나요. 도움을 받은 자료가 정말 많아요. 하나를 꼽기가 참 어렵지만 『25년간의 수요일』(윤미향, 사이행성)을 자주 언급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고 할머니들께서 어떻게 살아내고 또 노력해왔는지 알게 됐어요. 또 할머니들의 인권 회복 운동이 왜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고요. 이외에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안세홍, 서해문집),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김세진, 보리) 등과 같은 책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Q. 책은 크게 1부 ‘증언’, 2부 ‘기억’, 3부 ‘동행’으로 구성돼있죠. 그 안의 소제목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리하셨나요. 이 책이 그래픽노블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텍스트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소제목을 통해 할머니들의 스토리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Q. 2부 ‘기억’-‘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편에는 뉴욕 타임스퀘어에 여행 간 할머니를 상상하며 그리신 그림이 나옵니다. 배경으로 왜 뉴욕을 택하셨는지 궁금해요. 그 그림은 제가 뉴욕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작업한 거예요. 실제로 타임스퀘어에 가보니 굉장히 멋있더라고요. 이런 세계적인 관광지에 할머니들이 여행을 오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렇게 많은 전광판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내보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뉴욕에 간 우리 할머니’ 그림은 여러 가지로 제 마음과 기록의 방향성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작업이라 책 표지로도 사용하게 됐습니다. Q. 할머니를 기록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하셨죠. 연출 방식이나 글쓰기에 있어 특히 조심스럽게 생각한 지점이 있었나요. ‘우리 어머니라면 이런 모습은 싫어하지 않았을까?’ ‘나라면 이런 건 싫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보는 게 기준이 된 것 같아요. 이 책은 상처를 겪고 굳건히 살아낸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이에요. 너무 큰 상처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2차, 3차 상처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상처에 집중하기보다는 할머니들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Q. 책 작업을 하며 무언가를 ‘깨닫게’ 된 순간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안산의 광덕고등학교 동아리 ‘웹툰그리기반’ 학생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작업을 소개하면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하게 됐죠. 근데 어느 날 학생들로부터 메시지가 온 거예요. “선생님, 우리가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전자파 차단 스티커를 제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가능하다고 했죠. 학교에 갔더니 다른 동아리 학생들까지 와있어 교실이 꽉 찼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설명을 했고, 그 후에는 아이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스티커를 제작했습니다. 완성본을 급식실 앞에 붙여놓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투표도 진행하더라고요. 득표수가 가장 많은 걸로 스티커를 제작해 축제 기간에 무료 배포도 했고요. 아이들은 슬퍼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어떤 주저함도 없었어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 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은연중에 배웠어요. 그래서 ‘위안부’운동이 왜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지를 또 한 번 깨닫게 됐습니다. Q.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작가님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시나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학생들이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실제로 행동에 나섰듯이 말이에요. 어느 커뮤니티에서 제 작업을 보고 ‘할머니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따님이셨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걸 보고 찡했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라요. Q. ‘위안부’라는 용어에 대한 고민도 책에 녹여내 주셨어요. 이에 대한 논의를 끌어내고 또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좋은 답을 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답인 것 같아요. 세상의 많은 일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한 번에 끝나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피해자 입장을 고려한 적합한 용어를 찾는 게 가능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용어를 사용했을 거예요. 근데 그러지 못했기에 아픈 역사를 배우고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해요.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배려와 관심은 삶을 보다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림은 예술 그 자체이기도 하고 때론 기록으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작가님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감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까요. 작가는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대상에 대해 느낀 바를 표현하는 사람이고, 그림은 고맙게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잘 그리는 것보다 뭘 그려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의 생각과 시선이 담겨야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이게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Q. 이어가는 작업으로 할머니들과 30여 년을 함께해온 활동가분들에 대해 그려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향 또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나갈 계획이신가요. 활동가분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고 각자의 삶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의 실제 삶과 시민들의 인식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살펴보고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책 작업을 하는 2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위안부’문제와 관련해서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활동해온 분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겠어요. 저로서는 짐작도 못 할 세월이죠.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그 존재와 활동의 의미를 재조명해보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한성원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8월 2일 월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3-22 1층 테르 프로미즈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사 게재일: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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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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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전화벨이 울린다. 회의 중이라 통화가 어렵다. 길게 울리던 전화벨이 잠시 조용해진다. 그리고 다시 울리기를 반복한다.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는다. “회장댁인교? 심심어가 전화 했니더. 마카 잘 있능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박필근 할머니의 목소리. “할맹교? 밥은 잡샀능교? 예에 우리는 잘 있니더! 할매는 어디 아픈 데 없능교?” 할머니와 나만의 비밀병기, 경상도 사람들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할머니와 한참 통화를 하다 보면 정겨운 사투리가 전화기 너머 자유롭게 유영한다. 올해 연세가 94세이신 우리 할머니. 박필근 할머니. 한 달에 한 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지만, 그마저도 바쁘면 몇 달 만에 찾아뵙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늘 회장댁 회장댁 하면서 기다리신다. 할머니와의 인연은 여성회 회장을 맡게 된 2018년부터 시작됐다. 두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찾아뵙다가, 할머니 연세도 있으시니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고 생필품을 사다 드리며 안부 인사를 드리고 있다. 할머니 댁을 찾을 때 준비하는 생필품 중엔 꼭 들어가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만약 이를 빼먹거나 잘못 사 가는 날엔 할머니의 서운함이 가득한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밤에 잘 못 주무시고 눈물이 자꾸 나 슬플 때마다 드시는 우황청심환과 붙이는 파스 작은 것은 꼭 사야 한다. 큰 것으로 잘못 사 갔다가 어찌나 서운해 하시던지. 그 다음부터는 붙이는 파스 작은 것, 요구르트와 율무차, 홍삼 사탕과 라면, 국수, 소고기 국거리 등을 꼭 챙긴다. 그중에서도 절대 빠지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쌀과 찹쌀이다. 쌀은 20kg, 찹쌀은 10kg을 한 달에 한 번씩 꼭 사다 드린다. 혼자 사시고 많이 드시지도 않는데 쌀이나 찹쌀을 저만큼 드시나? 싶겠지만 그건 절대 타협이 불가능한 물품이다. 어느 날 아드님으로부터 “어무이가 하도 배를 곯아가 흰쌀에 원한이 졌는기라요. 그래가 저래 쌀을 받아 놓골랑은 새 쌀 안 드시고 묵은쌀을 또 안 드시능교?”라는 말씀을 듣고 박필근 할머니에게 쌀은 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할머니 댁에 갈 땐 쌀을 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이 쌀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었다. “요새도요, 흰쌀밥만 보믄, 우리 아~들이(자식들이) ‘어매요, 우리는 은제 흰쌀밥 한번 먹어 보능교?’라는 말이 귀에 생생하니더”라며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눈물을 훔치시곤 한다. 결혼 후에 남편 죽고, 어린 딸 다섯을 다 잃고 할머니 말에 따르면 겨우 둘이 붙들었다는 아들, 딸과 지독하게도 가난하게 사신 할머니. 배급받은 밀가루는 한 되 딱 맞춰 야속하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죽을 쒀 건더기 있는 밀가루 죽은 아들, 딸에게 나눠주고 할머니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빈 그릇에 조금 남아있는 밀가루 죽에 맹물 넣어 그걸로 배를 채웠다고 하셨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지나가는 말로 “아이고 그때부터 배급받았는데, 아직도 배급 받니더”라며 평상을 훔치며 무심히 하셨던 그 말씀이 가끔 그림처럼 떠오르곤 한다. 그때 할머니의 표정, 할머니의 한숨, 할머니의 기분 같은 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 같아 할머니의 가난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가슴에 닿았던 것 같다. 처음에 할머니 구술생애사와 판소리 ‘박필근뎐’을 준비하기로 했던 이유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존재했던 할머니의 역사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물론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이야기를 구술하는 과정에서 할머니에게 ‘위안부’로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도 연구자인 나도 힘들었다. 구술생애사를 시작한 후 할머니에게서 위안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기 쉽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다물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모르니더. 기억 안 나니더”라고 말씀을 하시면 그날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한참을 서먹서먹하게 있다가 다시 1시간 넘는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그 당시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도움을 주셨던 분이 바로 아드님이시다. 대구에 거주하시지만, 일요일마다 할머니 댁에 내려와 어머니의 필요를 살피는 효자시다. 처음 아드님을 만났을 때 도와드리겠다고 흔쾌히 허락하시면서 “‘위안부’로 끌려간 게 엄마 잘못이 아닌데 일본에서도 저렇게 망언을 하고 있고, 이제는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시면서 당신에게도 쉽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아드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할머니에게 질문하면 그나마 할머니께서 짧게나마 이야기를 전해주셔서 어렵게나마 구술생애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아드님이신 남명식 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할머니는 지금도 고향 마을인 포항시 죽장면에 혼자 살고 계신다. 죽장면은 포항 시내에서도 1시간 이상 떨어진 산골 마을이지만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산 좋고 물 좋은 포항시 죽장면 월평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9남매 중에 여덟째로 태어났다. 귀한 막내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살았으며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찰떡만 묵았니더” “집에 머슴도 둘이나 있었니더”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당시에 찰떡을 먹고 머슴이 두 명이나 있었다는 게 유복함의 상징으로 충분한 것 같다. 지금도 죽장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많지 않은데 80~90년 전 상황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산골 오지 마을에서 16살 때까지 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박필근 할머니. 어느 날 부모님이 조 밭을 매러 간 사이 둑담(돌담의 방언) 밑에 앉아 있는데 일본 순사가 탄 트럭이 와서 할머니를 일본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며 태워 갔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트럭은 경주 안강까지 갔고, 할머니는 거기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부산에서 다시 일본 가는 배를 타고 할머니는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집에서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위안소라는 공간으로 끌려가 운명이 뒤바뀌었다. 지금도 이 억울한 상황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위안부’피해자를 향한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국내 일부 학자들의 망언과 왜곡을 할머니가 뉴스를 통해 보고 계신다는 점이다. 어느 날 무심히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안 그래도 뉴스에서 그라데요. ‘위안부’가 자기가 원해가 갔다꼬? 아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라소”라고 말씀하셨을 때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제발 할머니 살아 계실 때 일본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위안부’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제발 말이다. 또 한 가지, 할머니가 뉴스를 보고 계시니 지금부터는 ‘위안부’에 대한 망언과 왜곡을 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고다. 제발 말이다. 할머니는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지만, 그 지옥 같은 ‘위안소’를 당신의 힘으로 탈출한 용감한 분이시다. “여기서 죽으나, 나가 죽으나 매한가지”라며 고향 땅에서 당신을 기다리실 어매를 만나기 위해 죽을 각오로 탈출을 시도했고, 첫 번째 탈출에선 일본 군인에게 잡혀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아직도 할머니 다리에 그대로 움푹 패 남아있다. 한 번씩 할머니는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라며 깊은 상처가 남은 다리를 내 앞에 두시고, 나는 뼈밖에 없는 앙상한 다리를 아무 소리 없이 주물러 드린다. “할매요. 다리가 마이 아픈교?” 죽을 각오로 탈출한 위안소, 그리고 두 번째 탈출에서 기적처럼 만난 일본에 온 한국인 부부 은인들. 할머니는 그분들 덕분에 부산까지 오실 수 있었다. 배표뿐만 아니라 새 옷에 새 신발까지 사주며 탈출시켜주신 그 부부에게 할머니가 가진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으니 “그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셨을 텐데, 살아생전 그 은혜를 못 갚았다”며 많이 아쉬워하신다. 할머니를 다시 살게 하신 고마우신 분들, 참 고맙습니다. 기적처럼 다시 밟은 한국, 그리고 부산에서 보름을 걸어 도착한 고향 마을. 당신을 기다렸던 어머니는 병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며, 어머니의 죽음이 모두 다 당신 탓이라며 한탄하시는 모습이 참 슬프기도 하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에게도 어머니는 늘 그리운 분이시구나 싶었다. “우리 어매, 우리 어매”를 부르는 할머니 모습에선 열여섯 소녀 필근이 지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할머니는 19살에 결혼을 하셨지만 결혼 후에 남편도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 다섯도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잃고 겨우 셋째 딸과 일곱째인 막내아들이 살았는데 참 찢어지게도 가난했다고 한다. 봄에는 산에서 나물 캐고 여름, 가을에는 남의 집 농사일을 했는데, 배고픈 막내아들을 열 살 딸이 업고 와 젖 먹이고 다시 돌려보내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겨울에는 땔감에 쓸 나무를 하러 산에 가셨다고 하는데,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내가 안 간 산이 없고, 안 다닌 곳이 없니더. 안 해본 일이 없니더. 장에 한번 못 가보고 그래 그래 살았니더”라며 지독한 가난은 할머니의 한숨이 되어 메아리치곤 한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의 손 빌리지 않고 그렇게 사셨던 우리 할머니. 지금도 할머니 댁에 가보면 모든 것이 알뜰하고 정갈하게 정돈돼 있다. 마당 한편에 근사한 정원도 마련돼 있고, 도랑물을 끌어와 비닐하우스에 물을 주며 채소도 키우시고, 잘 키운 상추나 보드라운 열무는 다 뜯어서 우리 손에 쥐어 주신다. 더 줄 게 없는지 살피시는 정이 많은 우리 할머니. 올해는 흙집 허문 자리에 토마토와 고구마 농사를 지으시던데 다음에 가면 맛있는 고구마 삶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터이다.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우리가 출발하기 전부터 기다리신다고 한다. 평상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언제쯤 오는가 기다리실 할머니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시게 하려고 출발 전화를 좀 늦게 드리기도 한다. 그렇게 극적인 상봉을 한 후에 헤어질 때면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와 우리를 길게 길게 배웅하신다. “가세이~~~ 또 오세이~~~~” 잘 가고 또 오라는 할머니의 목소리엔 금세 물기가 가득 고이곤 한다. 한참을 손을 흔들고 계신 할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오랫동안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친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서 할머니들을 뵈면 다 우리 할매 같아 좋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박필근 할머니는 우리 친할머니를 참 많이도 닮으셨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친근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가끔 눈물 훔치며 신세 한탄을 하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긴급 처방을 내린다. “할매요. 와 멋지니데이!!”라고 화제 전환을 하며 ‘할머니 최고’라고 말하면 눈물을 흘리시다가도 금세 어깨가 으쓱해지시는 우리 할머니 박필근 할머니! 회장댁 회장댁 하며 나를 찾아주신 그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그동안 참 감사했다. 무엇보다 박필근 할머니께서 계속 건강하셔서 할머니 좋아하시는 쌀하고 파스, 우황청심환, 홍삼사탕 많이 사서 굽이굽이 죽장 골짜기를 넘어 우리를 기다리실 할머니 댁을 오랫동안 찾아가고 싶다. “할매요!! 우리 왔니데이~~~!!” 2021년 8월 기림일을 앞둔 새벽 회장댁 드림 기사 게재일: 20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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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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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통영 인권평화길 투어 추천코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정의비(남망산조각공원 입구) ⇒ 강구안(거북선, 판옥선) ⇒ 충렬사 방향으로 이동(충렬로) ⇒ 서피랑 99계단 ⇒ 야마호텔 옛터(현재 도로로 정비) ⇒ 서포루(360도 통영항 전경) 남쪽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통영. 통영은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수산자원, 여기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천혜의 자연경관이 더해져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동네 갯가에만 나가면 바지락, 굴, 파래, 톳, 청각, 미역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캐 와서 요리해 먹기만 하면 되었고, 집이 아닌 곳에서 대충 잠을 자도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곳이었기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타지역의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통영을 찾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윤이상, 전혁림, 박경리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통영은 예향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설치되었던 삼도수군통제영(현재의 해군본부)과 부속 12공방은 통영의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유·무형 유산을 남겼다. 나전칠기, 소목장, 대발, 갓 등 수많은 무형문화재와 함께 독특한 음식문화까지 더해진 문화예술자원의 보고로 통영은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예향의 도시 통영에도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알려졌다. 그것은 바로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였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위안부’피해 최초 공개 증언으로 나라 안팎은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고, 뒤를 이어 터져 나온 또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나도 피해자다”라는 목소리는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에 불을 지폈다. 1991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신고전화가 설치되고 이듬해부터는 전국 읍면동사무소에 정신대 피해 신고전화가 설치되면서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피해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신고가 줄을 이었다. 신고자들은 정부의 심사에서 인정되어야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공식 등록될 수 있었다. 신고 이후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정신대연구소(1990년 설립)는 전국을 돌며 이들의 구술을 채록하였고, 그 과정에서 통영을 방문한 연구원을 통해 통영에도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들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언론에 보도되고 신고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동네방네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간 후, 통영지역 피해생존자들이 가족이나 친지, 주변 지인 등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신고하기 시작한 때가 1993~1995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정부가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신고하지 않은 피해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연구원을 통해 알게 된 통영지역 등록피해자는 6명이었다. 이는 등록 당시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중일전쟁 이후인 1938~1939년 사이 동원됐다. 통영지역 피해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일찍 동원되어 6~7년간 장기간에 걸쳐 피해를 입은 ‘위안부’피해자들로 연령대가 전국 최고령이라는 점이다. 1918년생 맏언니부터 1924년생 막내까지, 이들 모두 고무공장 등 좋은 공장에 취직된다거나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상해, 대련,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등지의 일본군 위안소로 동원됐다. 통영지역에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이 많은 관계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구술채록을 위해 통영을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할머니들의 증언을 접하게 되었고, 이들 모두가 당시 해상교통 중심지였던 통영 강구안에서 배에 태워져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원의 출발지, 통영 강구안 통영 강구안 일대는 통영 관광의 중심지로 거북선과 판옥선 4대가 있어 관광객들이 필수코스로 들르는 장소이다. 강구안은 삼도수군통제영 당시 수군들의 배들이 정박해있던 천혜의 군사 요새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수탈에 대항하여 통영 최초의 항일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는 세병관과 충렬사, 동피랑, 서피랑, 남망산공원, 중앙시장 등이 있어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로 많이 알려져있는 곳이다.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앞바다는 일제강점기 당시 세계 3대 어장으로 유명하여,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개항해 뱃길이 발달해 있었으며 합방 이후에는 상선과 무역선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항구였다. 또한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어족 자원은 일본인들이 일찍이 대거 통영으로 들어와 거류민 부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 거류민이 있는 곳엔 언제나 공창 형태의 유곽이 형성됐는데, 통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곽이 들어섬에 따라 여성을 공급하는 소개소가 생겨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전선을 확대해감에 따라 수많은 일본 군인들이 전쟁터로 동원됐다. 오랜 전쟁을 수행해온 일본 군인들은 부대에서 자행되는 폭력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그로 인한 불안과 불만은 난징대학살과 난징강간이라는 잔인한 폭력으로 귀결되었다. 군대에 만연했던 성병은 군의 사기를 더욱 떨어트렸으며, 일본군의 중국 현지 민간여성 강간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은 군위안소를 설치하여 ‘위안부’를 모집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다. 1938년 일제의 전시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전쟁 수행을 위한 대대적인 인적 동원이 시작되었고, 통영도 모든 시스템이 전시 동원 체제로 편입된다. 일본 거류민을 따라 생겨났던 소개소도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면서 위안소에 여성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통영지역이 경남지역에서 피해자가 많은 지역 중 한 곳이 된 이유는 바로 이런 구조적인 결합과 해상교통의 발달로 ‘위안부’ 집결지였던 부산으로의 동원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통영, 거제 지역에서 모아온 여성들을 강구안에 있는 여관에 가둬놓고 목표치가 채워지면 배에 모두 태워 최종 집결지인 부산으로 수송해갔다. 통영 강구안은 통영, 거제 등 인근지역에서 동원해온 여성들의 1차 집결지였다. 강구안은 당시 대부분 15~16세의 어린 소녀들이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호강시켜주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배를 타고 갔던 장소였다. 그들이 천지도 모르는 낯선 땅 중국, 대만,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등지의 위안소로 갈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도착할 곳이 공장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소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10대에 끌려가 해방 이후 20대가 되어서야 겨우 배를 타고 또 타고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게 아름다운 고향 통영의 강구안은 가슴에 맺힌 한 많은 장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남망산공원에 자리한 정의비 강구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앞에 얕은 남망산이 보인다. 통영시민문화회관과 통영조각공원이 있는 남망산공원은 도심 시민휴식공원으로 통영시민의 삶이 깃든 곳이며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전망이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강구안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남망산공원 입구가 나오는데,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면 제일 먼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명예와 인권을 위한 정의비다.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정의비는 2013년 4월 6일 민간이 주체가 되어 세운 기림비다. 아픔이 서린 통영 강구안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정의비는 할머니들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2002년 설립, 이하 시민모임)이 2012년 하반기부터 통영지역일본군‘위안부’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통영시민, 학생, 경남도민 등 시민 모금에 통영시의 건립비 보조금, 부지제공, 경상남도의 건립비 보조금 지원이 보태져 세워졌다. 정의비는 포천석으로 된 석상으로 두 팔을 벌린 채 반추상적인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전신상으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중에는 10대 소녀를 비롯해 20대 여성도 있었기에 피해 여성 모두를 상징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정의와 당당함을 나타내고,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바라며 무언의 미소로 평화의 손짓을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지구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범죄의 피해 여성들을 감싸 안으며 전쟁과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뜻도 담고 있다. 전신상 아래에는 원형 기단석이 놓여있고, 기단석 표면에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강제 동원과 피해실태를 나타내는 공문서와 사진, 그림 작품들이 시대순으로 새겨져 있다. 기단석 정면 중앙에는 비문을 새겨 정의비의 건립 취지와 의미를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데크에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를 설명해놓은 설명판이 있어 피해역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시민모임은 매년 4월 7일 정의비 건립일과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에 기념식과 추모제, 세계연대집회를 정의비 앞에서 개최해오고 있으며, 정의비 위쪽에 있는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과 대전시실에서도 영화제와 다양한 전시를 매년 이어오고 있다. 서피랑 언덕에도 아픔이 정의비에서 다시 강구안 쪽으로 내려와 시내 중앙로를 따라 충렬대로(충렬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중간 즈음에 서피랑 언덕이 보인다.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반대쪽에 있는 서피랑은 꼭대기에 서포루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통영 전경이 360도로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로 정비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점차 늘고 있는 곳이다. 정비 이전 서피랑은 동피랑처럼 언덕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야마호텔’이라 불리는 집창촌이 있었다. 야마호텔은 산(山)의 일본 발음인 야마와 영어인 호텔이 조합된 단어로 집창촌의 이름이었으며 ‘야마골’이라고도 했다. 어린 시절 서피랑 언덕에 줄줄이 빨간불이 켜진 집이 무서웠고, 밤만 되면 귀신이 나올까 봐 그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야마호텔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해방 이후라고 전해진다. 당시 통영은 수산업이 매우 활발하던 때라 원양어선 등의 선원들이 주로 이용했고 일반 남성들도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야마호텔은 1990년대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비되었으나 낡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2013년부터 서피랑 마을만들기 사업이 추진되면서 해당 건물들이 철거돼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해방 후 돌아온 일본군‘위안부’피해 여성들은 대부분이 20대 나이였다. 차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돌았던 여성들,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으나 말도 못 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여성들, 부모와 자신을 원망하며 술로 담배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을 여성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자신의 머리를 대청마루에 찍으며 몸부림쳤던 여성, 살아내기도 죽기도 힘든 처지를 비관하며 자포자기 상태에서 요정으로, 선술집으로, 집창촌으로 향했던 여성들…. 그렇게 통영에서도 야마호텔로, 선술집으로, 요정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흘러 들어갔다. 식민지의 여성으로 태어나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어 멀리 이국땅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의 구타와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했다. 비단 ‘위안부’ 피해자만이 아니라 집창촌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폭력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스러져갔으리라. 서피랑을 찾을 때면 99계단 맨 위쪽에 야마호텔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라도 기억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폭력에 신음하며 스러져간 자리, 20대가 되어 돌아온 ‘위안부’ 피해자의 피맺힌 울음이 배여 있는 자리인 야마호텔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숨기고 묻어야 할 역사가 아니라 드러내어 알려야 할 곳이다. 여성 차별에 기반한 성폭력이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자행되지 않도록 젠더폭력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새기고 새겨야 할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아픔을 기리고 위로하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 서피랑을 내려오면서 통영지역 피해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다. 남자라면 치가 떨려 조카를 키우며 평생 홀로 사셨던 할머니,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남성들에 속아 힘겨운 삶을 사셨던 할머니, 아버지뻘 되는 남성에게 후처로 들어가 말 못 할 서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 할머니들…. 그들 바람은 오직 하나였다. ‘나 너무 억울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일본이 나를 속여서 위안소로 데려가 내 청춘을 이렇게 망가트려 놓았으니 책임져야지. 잘못했다고 해야지. 참말로 사죄해야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서피랑을 내려오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열네 분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몇 년 후 다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일본의 사죄를 받아낼 것인가. 어떻게 할머니들의 외침을 기억하며 이어갈 것인가. 바로 앞에 던져진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 단체소개 전시성폭력범죄인 일본군위안부제의 진실과 정의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여 피해여성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실현하고 나아가 성차별, 성폭력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시민사회를 만들고자 2002년 설립, 주로 경남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활동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치유사업 : 정서적 안정 및 심리치유 사업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인권명예회복사업: 범시민탄원엽서보내기운동, 평화인권문화제, 피해자 소송지원 사업, 국제공조사업 -교육사업: 온오프 대중강연 사업, 심포지엄, 청소년공모사업, 온오프 전시회, 다크투어 -기록사업: 경남지역 피해전수조사사업, 경남지역 피해자료 아카이브 구축사업, 경남지역 해결운동사 기록사업, 경남지역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사업 기사 게재일: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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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 - 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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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NOTE 1 박필근뎐 캄캄한 방 몸 하나 겨우 눕는 방 창문 하나 없이 비명소리 벽지가 된 방 나도 캄캄해져 벽 틈 사이로 들어오던 그 빛 고향하늘 달빛처럼 환한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보고 싶은 우리 엄마 2019년 5월. 포항 KBS라디오 이용일 PD님과 포항여성회 회장이자 KBS라디오 작가였던 김은주 님이 한터울 공간으로 찾아오셨다. 두 분은 포항여성회에서 펴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박필근 할머니의 삶을 국악으로 들려주고 싶어 했다. 구술생애사를 읽는 내내 판소리가 들렸다.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단원들에게 할머니와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할머니의 구술증언에 당시의 일본군 자료, 뉴스 기사, 증언 등을 보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뜻을 같이 한 포항의 젊은 국악인들이 박필근 할머니의 기억을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이 시작됐다. 나비야 살아서 날개를 꺾인 나비야 퍼덕거리고 날개를 치면 나비야, 방문 앞에 줄을 선 전쟁귀들 날개를 꺾는구나 나비야 날개를 꺾여 날지 못하는 슬픈 나비야 일본은 가장 추악한 짓을 저질러 놓고 그 추악한 짓이 인정되면 오점이 될까 봐 온갖 거짓말로 덮어왔다. 우리는 7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할머니들의 가슴에 박힌 대못을 뽑아드리지 못했다. 가족들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많은 할머니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이런 짓을 당했다’ 겨우 말하게 한 일이 못내 부끄럽다. 그런 우리에게 ‘박필근이라는 거울’을 함께 들여다보자고 이 판소리를 창작한다. 일본으로 하여금 추한 역사를 속죄하게 하고 우리도 상처를 일찍 보듬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늦은 일기쓰기,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은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라는 선언이다. 창작의도를 정리하고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와 다른 할머니들의 활동과 증언들을 찾아보며 다들 많이 울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할머니의 절망이, 고통이 느껴져 작창을 하던 소리꾼의 소리도 자주 끊어졌다. ‘고통을 덜어내는 힘’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는 힘’을 내야 하는 공연이라 모두들 힘겨워했다. 기존의 판소리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듯 ‘박필근뎐’도 단원들의 ‘더늠’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박필근’이 될 더 많은 예술가들이 마음을 보탤 것이다. #NOTE 2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에 함께한 대학생 소리꾼 김채은은 “진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포항에 살아계시는 할머니 이야기라니 믿기지 않아요”라며 처음 접한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 “에이, 나쁜 놈들!”을 연발했다. 어느 날 자신이 맡은 어린 박필근 역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자료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김금숙 작가의 책 『풀』을 건네주었다.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나 “이런 역사를 여태까지 몰랐다는 게 부끄럽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폭력적일 수 있느냐”고 했다. 그 후, 연습 때 소리가 달라진 걸 느꼈다. 우리가 ‘박필근뎐’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바랐던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할머니와 같은 ’위안부‘피해자들을 자신의 할머니처럼 가깝게 느끼며 공감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박필근뎐’ 공연을 마친 다음 해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공모했다. ‘젊은 포항의 소리꾼에게 포항의 이야기가 담긴 대본을 주고 작창과 소리 지도를 해줄 스승을 만나게 하고, 소리꾼으로 하여금 판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원리를 체득하게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자신만의 판소리를 수련하여 지역을 넘어서는 큰 소리꾼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든다’는 컨셉으로 지원해 선정되었다.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이자 국악방송TV <국악아니?>의 진행자이기도 한 김봉영 선생님이 연출과 작창 및 연기 지도를 맡아주기로 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김봉영 연출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작품을 만드는 일은 비슷하고, 삶의 매 순간의 선택이 곧 창작이며, 축적된 선택들은 인생이라는 작품이 된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일은 삶의 갈등을 줄여가는 일일 것이다. 소리꾼의 내면적 성장이 주가 되고 작품은 그냥 그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정했다. 판소리를 창작하는 전 과정을 공유하는 것도 큰 자산이 되도록 대본, 기획, 제작에 소리꾼, 고수 등 모든 스탭이 함께하는 ‘공동창작’ 제안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주제, 스토리, 노래 가사, 작창의 방법과 연기지도까지 모두 공유하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사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는 회의 후 가진 술자리에서 번뜩 튀어나왔다. ‘먹고사니즘’,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으로 이어지는 가사는 취기 오른 이들의 ‘알코올 더늠’이다. 진로, 진로 진로라니 술 이름 한번 고약하다.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 취업률 바닥인데 진로, 진로. 꿈도 없는데 진로라니. 술 술 넘어가는 게 술이라던데 그놈 참 안 넘어가는구나. 아무리 쳐다봐도 못난 년 너도 한잔. 지질이 운도 없는 년 너도 한잔. 한잔 두잔 석잔 주거니 받거니 진로가 금방 거덜 났네. 텅 비어버린 진로. 빈병 같은 청춘. 한라산 같은 꿈. 진로, 진로 진로라니! 그놈 이름 참 고약하다. 그래도 처음처럼 보다 났네. 노력해서 최종면접까지 왔는데, 다시 처음처럼 이라니! 지긋 지긋한 먹고사니즘. 열심히 살아도 신용불량.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 언제쯤 좋은 데이? 이술 저술 다 마시고 고르고 골라 참소주 그마저 짠소주. 쥐포처럼 잘근 잘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망할 놈의 세상이야. ‘악의 평범성’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일어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연습하다가 “저 밖에 있는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지낼까”라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 다들 한없이 작아지던 경험도 가사가 되었다. 배고파서 먹을 거 찾는 게 잘못이냐? 아파트, 대형마트 지어 사람만 잘 사는 세상 만들었으니 삶터를 뺏긴 동물들이 배고픈 건 당연지사. 음식물 쓰레기로 연명하고 물도 구하기 어려운 도심 아픈 몸으로 고작 3-4년을 산다. (중략) 눈빛이 싫다고 돌 던지는 사람은 놔두고 돌 맞아 다리 저는 놈을 보고 절름발이라 놀리면 동물들 입장에선 얼마나 아프겠느냐.(중략) 상처를 주는 것이 나쁜 일이지 상처를 받는 게 나쁜 게 아니다!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뿐 아니라 여러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던 중에 말년에 치매로 아기 인형을 자식이라고 애지중지하셨다는 이수단 할머니의 사진 앞에서 모두가 말을 잃었다. 친구들과 나물 캐던 ‘수단이’에서 일본 군인들이 부르던 ‘히도미’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중국인 ‘리평원’으로 생을 마치신 이수단 할머니의 삶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감히 상상하며 가사로 만들기도 했다. 이 못난 늙은이도 이름 세 개로 험한 시대를 살았는데 한 개 이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예쁜 다미가 못 살까 그냥 돈 몇 푼 벌어주는 직업은 꿈이 아니다 꿈을 잃지 말거라 꿈마저 잃으면 죽은 사람이야 그렇게 만들어진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낯선 할머니와 만난 소녀 ‘다미’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다름에 대한 폭력성’을 성찰하고 다양한 생명들이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은 작품이 되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지만 지금도 여성들과 사회적 약자, 동식물들, 심지어 지구마저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확인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길고양이들에게 하는 것을 보라.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너무나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 전쟁’을 겪었기에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신 할머니들.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려면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의 폭력을 줄이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가 길고양이를 아끼는 ‘위안부’ 할머니와 소리꾼을 꿈꾸는 한 소녀의 만남을 통해 생명을 가진 어떤 것에도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며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살자는 노래.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코로나로 힘든 이웃들을 위한 응원가이기도 하다.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 소개 대본: 김은주 / 연출: 김도연 / 소리: 곽미정, 김채은 2019년 경북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신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를 바탕으로 포항 KBS 라디오에서 ‘판소리 다큐멘터리 박필근뎐’이 제작됐고 이를 기반으로 2020년에는 포항여성회에서 지역의 예술가들과 손을 잡고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을 비대면 영상으로 제작했다. 2021년에는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민간단체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포항에서 판소리에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한 공연으로 중앙아트홀에서 공연 예정이다. <솔직히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소개 대본: 이원만 / 연출: 김봉영 / 소리: 김채은 2020년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문화예술지원사업 중 공공프로젝트 글로컬아티스트 육성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쇼케이스로 발표했다.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피해자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할머니와 소녀의 만남을 통해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 다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 공감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창작판소리로 표현한 작품이다. 기사 게재일: 2021.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