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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미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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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 씨에게 전화가 걸려오다 1991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 위안소 및 ‘위안부’에 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네 개의 시민 단체가 실행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안부 110번’을 운영했다. 필자 또한 ‘종군위안부문제를생각하는모임’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사흘 동안 점심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위안부 110번 조사 카드’는 현재 100여 장 남아 있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한 장 한 장 작성한 A4크기의 카드다. 카드에는 정보 제공자의 이름과 주소, 보고 들은 때와 장소, 소속 부대(당시 직업), 위안소의 형태, ‘위안부’의 연령과 민족, 기명(妓名), 모습, 에피소드, 군의 관리(현지에서의 강간 등), 재판(기타), 접수일 등을 적는 칸이 있다. 정보 제공자 대부분은 일본군 장병 출신이었지만, ‘위안부’ 당사자의 정보 또한 두 건이 접수됐다. 한 건은 “한 번 찾아와 주세요”라는 말을 남긴, 미야기현(宮城県)에 사는 송신도(宋神道) 씨의 정보다. 3월 말에 필자는 송 씨를 찾아갔고, 약 1년여 후인 1992년 4월 5일, 송 씨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다른 한 건은 도쿄에 거주하는 당사자 다미(가명) 씨가 직접 보내온 정보다. 필자는 우연히 다미 씨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언론에는 한국 사람 얘기만 나오던데, 국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실까 해서요.” 다미 씨는 제보 이유를 먼저 밝혔다. 그의 조사 카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다른) ‘위안부’보다 과거 일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후 필자는 다미 씨가 운영하는 가게로 찾아갔다. 마침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통화할 때의 느낌과는 달리, 민첩하게 뒷정리를 하는 모습이 발랄해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마주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서글픈 일이에요. 몸이라도 고달프면 정신없이 지나가 버리겠지만… 옛 기억이 유령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거든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점포 세 곳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던 다미 씨를 위협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 그리고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어린시절의 기억 부모님은 다미 씨가 여섯 살, 남동생이 네 살 때 이혼했다. 아버지는 투기꾼이라고 해야 할까, 일확천금을 꿈꾸며 일정한 직업도 없이, 다미 씨와 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가끔씩만 집에 왔다. 할머니는 곧 돌아가셨고, 다미 씨와 동생은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돈을 벌면 게이샤의 전차금을 갚아주고 집에 들였다며 떠들어댔고, 경기가 안 좋을 때면 집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어요. 엄마라고 부르라는 사람이 두세 명 있었는데 다 싫었어요. 분 냄새가 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돈도 보내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월사금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월사금 얘길 꺼내면 허리가 굽은 증조할머니는 사촌집에 돈을 빌리러 가셨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했고, 아이도 두세 명 더 낳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증조할머니는 이따금 나와 동생 편에 쌀을 들려 보내주곤 했다. 가난한 나날이었지만 별 탈 없이 지냈다. “할머니와 살았던 5년이 가장 행복했어요. 저는 손주가 아니에요. 증손주죠.” 다미 씨는 소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농가에 애보개로 들어갔다.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어디로 보낸 거야!” 라며 증조할머니를 두들겨 패고, 농가로부터 받은 전차금을 쌀로 돌려주고 다미 씨를 데려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증조할머니에게 다미 씨와 동생을 떠맡긴 자기 책임은 나 몰라라 하고, 술을 마시면서 큰소리를 쳤다.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애보개 따위로 보내? 오기로라도 내가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에 보내겠어!” 다미 씨는 오차노미즈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오차노미즈는 전후에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이 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말한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다미 씨는 또래 아이들을 만나는 게 싫었다. 밖에서 애를 보고 있을 때 소풍 가는 동급생의 행렬을 본 적이 있었다. 다미 씨는 아기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몸을 숨겼다.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면 일 년 늦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모리(大森)에 있는 게이샤 집에 연계(年季) 양녀로 맡겨졌다. 아이를 고용주의 호적에 올렸다가 계약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호적으로 되돌리는 고용 형태였다. 자식이 없었던 주인 부부는 다미 씨를 귀여워했다. 샤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의 한 종류)을 배우기도 하고, 게이샤가 오비(帯, 기모노의 허리 부분을 감싸는 띠)를 매는 것을 돕거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 있을 때는 행복했어요. 몸을 파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예를 파는 사람도 있었어요. 유녀(女郎,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와는 달라요.” 유곽에서도, 샤미센, 고우타(小唄, 에도시대 속요), 춤 같은 기예를 갖춘 게이샤가 접객을 하는 화류계에서도, 처음 손님을 받는 것을 ‘미즈아게(水揚げ)’라 불렀다. “열네 살 때 미즈아게를 했어요. 열네 살이라구요.” 바로 그 무렵, 아버지가 제재업을 시작한다면서 후나바시(船橋)의 업자와 함께 나타났다. 다미 씨는 열네 살이었다. 업자는 아버지와 함께 제재업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후나바시에 있는 다이키치로(大吉楼)라는 유곽 주인의 조카였다. 아버지는 이미 다미 씨를 다이키치로의 몸종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고, 전차금뿐만 아니라 거액의 사업자금도 빌렸다. “게이샤 집에서는 내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빚차금의 저당으로 잡혔어요. (게이샤 집보다) 유녀(女郎)가 훨씬 더 돈이 되잖아요.” 다이키치로는 격식 있는 가게였다. 다른 가게에서는 긴 속옷 차림으로 가게 앞에서 호객행위를 시켰지만, 다이키치로에서는 가부키(歌舞伎) 등에서 연기하는 요시와라(吉原)[1]의 오이란(花魁, 유곽에서 일하는 유녀들 중 계급이 높은 이를 일컫는 말)처럼 머리를 커다랗게 묶고, 오비를 앞에서 매고 겉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몸종끼리 싸움이 붙어서 다미 씨가 괴롭힘을 당하자 여주인이, “오이란이 될 아이와 싸우면 못 써” 라고 나무랐다. 오이란이 되기 전에 계약 기간이 끝나는, 전차금이 적은 몸종도 있었을 것이다. 게이샤 집에서 다이키치로로 옮겨간 후, 어머니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을 한 상태였다. “여름에 찾아갔을 때 엄마가 저더러 ‘누구?’ 하는 거예요.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비참했어요.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어떻게 자기 자식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싶어서. 열 살에서 열네 살쯤 되면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지나 봐요.” 젖먹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는 다미 씨에게 말했다. “술 파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돼.” “술 파는 일을 하지 말라니. 이미 유곽에 들어갔다고는 말을 못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곳에 딸을 팔고도 죄책감이 없었을까요? 자기가 놀러 다니는 곳이니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좋은 단골손님을 만나면 그만이라는 듯이.” 열여섯 살, 위안소로 보내졌다 1944년 가을, 다이키치로는 군의 요청으로 지바(千葉)현 모바라(茂原)에 위안소를 개설했다. 모바라에 해군 항공기지가 완공된 것은 1943년이다. 통상 해군의 항공기지는 해당 기지를 전용하는 항공대가 있지만, 모바라항공대가 신설되지 않아 기존 항공대가 기지를 사용하고, 제로센전투기와 함재폭격기 약 80기 그리고 4,000여 명의 장병이 배치되었다. 기지 근처에 일곱 채의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다이키치로 쪽으로 네 채, 건너편에 세 채. 도쿄의 스사키(洲崎)유곽에서 가게를 접고 온 업자들이 많았다. 다이키치로는 모바라 위안소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열여섯 살이 된 다미 씨는 모바라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다른 위안소에도 또래의 소녀들이 각각 예닐곱 명씩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제 첫 경험이 위안소의 주인이었어요. 강간당한 거죠. 다들 그랬던 것 같아요.” 모바라에 오기 전에 성경험이 없었던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 주인에게 강간을 당했다. 다른 소녀들도 그랬던 것 같다. 다이키치로의 주인은 후나바시에 남았고, 주인의 조카가 모바라의 다이키치로를 관리했다. 위안소 이용자는 물론 일반 장병이 많았다. 특공병도 때때로 위안소에 왔다. 특공병에게 출격 명령은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졌다. “죽기 전에 놀러 왔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었죠. 제 또래였어요. 내일 출격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위안소의 소녀들은 출격 명령을 받은 특공병에게 깨끗한 무명천에 손가락을 베어 일장기를 그려서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선물했다. “○○씨, 즐거웠어요”라는 편지를 놓고 가는 특공병, 모바라를 떠나는 날짜를 알려주는 특공병도 있었다. 그 시각에 밖에 나가 보니, 전투기에서 흰 머플러를 흔들며 위안소 상공을 여러 번 선회하고 사라졌다. 기쿠치(菊池) 하사관은 위안소의 소녀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술에 취해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왔고, 아무 방이나 함부로 문을 열어 민간인을 발견하면 내쫓곤 했다. “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음을 예감하고 발악한 거구나 생각했어요.” 어느 날, 위안소에서 다미 씨를 몰래 데리고 나와 자신의 숙소인 민가에 데려간 특공병이 있었다. 짚신 두 켤레를 방 앞에 가지런히 놓아 방에 있는 것처럼 꾸미고, 살며시 신발을 들고 창문으로 나왔다. 기찻길을 따라 손을 잡고 달려 특공병의 숙소인 민가로 향했다. “평범한 여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숙소로 쓰는 민가의 아주머니는, 땋은 머리의 다미씨를 보고, “오야마(유녀의 총칭)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여섯 채에서는 그런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다이키치로에서는 다미 씨의 행동을 주인의 조카가 눈치 채고도 매상이 제일 높아서 눈감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가 다른 여섯 채에 비해 관리가 엄하지 않다고 느꼈다.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같은 처지인 건너편 위안소의 소녀와 친해져 그쪽에 놀러갔을 때 깜짝 놀랐다. 다이키치로는 욕실과 별도로 손님을 상대한 뒤에 씻는 곳이 있었는데, 건너편 위안소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욕실의 남은 물로 씻는다는 말을 듣고 불결해서 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이키치로에서는 자신의 전차금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면 장부를 보여주었다. 싫은 손님은 피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었다. 그러나 좋은 손님만 가려 받아서는 빚이 줄지 않는다. 전황이 나빠지면서 전사(戰死) 소식이 위안소에도 전해졌다. 위안소에서는 날마다 늘어나는 영정에 소녀들이 향을 피웠다. “많이 죽었어요. 임시로 연인이 되었죠… 빼곡히 늘어선 사진에 향이라도 피우려고.” 모바라 상공에 연합군 전투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 비행기가 추락하는 게 다 보였어요. 그루먼(연합군 전투기)이 사람을 쫓아왔어요.” 위안소 요금이 저렴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일곱 채의 위안소에서는 높은 요금을 받을 수 있는 민간인도 몰래 들이고 있었다. 다미 씨의 손님이었던 민간인이 “이 전쟁은 질 거야. 푸른 눈의 군인이 이곳에도 많이 몰려올 거야”라고 예언했다. 아내와 별거 중이던 그 남자는 다미 씨의 전차금을 지불하고 다미 씨를 집으로 데려갔다.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 필사적으로 일했던 다미 씨의 전차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별거하던 아내가 다시 그 남자에게 돌아왔다.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2]이 끝난 뒤 군의 임무에서 벗어났는데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위안소에서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다. 계속 머무는 손님들의 속옷을 세탁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다미 씨는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패전 이후의 생활 다미 씨는 패전 직후, 라면가게와 이발소에서 잠깐 일했으나, 다시 고탄다(五反田)의 화류계로 들어갔다. “유녀는 두 번 다시 유곽으로 돌아가지 않지만, 게이샤는 화류계로 돌아간다고 해요.”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게이샤가 적었다. 화류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손님의 상당수는 전장에 파병되었고, 사치금지령도 발령되었으며, 전시에 요정과 게이샤 집도 개점 휴업에 가까운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게이샤를 키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다미 씨는 인기가 많았다. 화류계에서는 요정에서 예기를 데려갈 때 조합의 권번을 통해 연락을 하는데, 기다리다 못한 요정에서는 지배인이 직접 다미 씨를 데리러 왔다. 게이샤들은 대부분 게이샤 집에서 살았다. 신참 게이샤는 맨 처음에 ‘오히로메(お披露目)’라는 첫 선을 보인다. 이때 의상비 등으로 목돈이 필요하다. 다미 씨는 대다수의 게이샤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벌이를 게이샤와 게이샤 집이 반씩 나누는 것을 조건으로 게이샤 집에 들어갔다. 요정이 중개하는 투숙객의 주문에 응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파는 물건, 사는 물건이라는 태도가 있었죠. 그럴 때는 밤새 방을 나와 복도에 서 있었어요. 빨리 잠들어 줬으면 하면서요.” 다미 씨의 동생이 늑막염을 앓은 것은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값비싼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매일 맞았다. 어느 날 병원에 갔는데, 동생이 “오늘은 아직 주사를 안 맞았어”라고 했다. 그 날의 주사 값을 내기 전이었다. 다미 씨는 “주사 값이 하루 늦었다고 주사를 놔주지 않는다는 말인가요?”라고 의사에게 거친 어조로 물었다. 의료보호제도가 있다는 것을 그날 간호사가 알려 주어 처음 알게 되었다. 다미 씨는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 동생은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다미 씨는 규슈(九州)에서 부모가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집의 아들과 사귀게 되어 도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투병중인 동생을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규슈로 향했다. 필자에게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면서 다미 씨는 예복 차림의 수많은 참석자들을 보며 “죄다 저쪽 친척들뿐”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한동안 시댁에서 살았는데 ‘며느리’로서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도쿄로 돌아왔다. “돈 때문에 지옥을 경험해서 아끼고 또 아껴요. 저 보고 구두쇠 클럽 회장이래요.” “자기가 일해서 번 돈은 쓰는 게 아니야. 저축한 돈에서 나온 이자를 써야지”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악착같이 일해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 게 너무 슬퍼요.” 오랜 세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가게를 운영해 온 다미 씨는 그동안 많은 여성을 만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고객들도 있었다. 전쟁 후 게이샤로 있을 때, 우연히 모바라의 위안소에 함께 있던 친구를 만나, 줄곧 친하게 지내왔다. 다미 씨가 게이샤였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다. “모바라에서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그녀만 알아요.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어요.” 다미 씨는 위안소에서 있었을 때의 일을 그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아, 싫어 싫어. 몸서리 나”라며 이야기를 피했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상해지는 거야” “잊자, 잊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줘.” 친구는 자신이 번 돈이 “부모 형제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만족한다”고 말한다. 게이샤는 자기도 몸을 파는 경우가 있었음에도, 몸을 파는 일을 경멸했다. 화류계나 위안소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여성들뿐만 아니라, 위안소를 이용한 장병들, 유곽에서 놀던 남성들조차 성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능욕을 당하면 죽고 싶잖아요. 매일 강간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죽고 싶었어요. 정말 죽도록 힘들었어요, 하루하루가. 어린애가 힘든 일을, 그런 힘든 일을 겪었으니까요.” 다미 씨가 화류계에서 미즈아게를 하는 나이가 열네 살이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그도 화류계의 풍습에 따랐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모바라의 위안소에서 약 8개월을 지냈을 때 다미 씨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각주 ^ 편집자주) 일본 에도 시대 때 조성된 거대 유곽촌을 일컫는 말. 교토의 시마바라유곽(島原遊郭), 오사카의 신마치유곽(新町遊郭)과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으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지역으로 ‘유곽촌’의 대명사 혹은 번화가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 편집자주)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천황의 종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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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1. 이수단 이야기–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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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너희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갔니… 이제 나랑 같이 살자." 이수단 1922년 조선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태어남. 1940년 19세에 중국 아청(阿城), 스먼즈(石门子)로 5년간 동원되었다가 중국에 남겨짐. 나는 2001년부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군 부대가 주둔해 있던 중국의 옌볜(延辺), 우한(武汉),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찾으러 다녔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낯설고 척박한 타국의 땅에 남겨졌다. 70년의 세월에 조선말을 잊었고, 중국이나 북한 국적을 가지고 살거나, 무국적으로 살아가는 이도 있었다. 피해자 이수단을 처음 발견한 곳은 러시아가 접경해 있는 회이룽장(黒龍江)성 무단장(牡丹江)시 동닝(東寧)현 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일본 관동군이 러시아와 대치하기 위해 주둔해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은 피해 여성들을 버리고 자신들만 도망갔다. 피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평생 자신이 아픔을 겪었던 위안소 부근에 남겨졌다. 2001년 8월 이수단을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 지역에는, 스먼즈 위안소에서 같이 성노예 피해를 당했던 지돌이, 김순옥, 이광자가 인근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수단은 중국 위안소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만주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줄만 알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 앞잡이에게 속아 1940년 19살의 나이에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3명의 또래 여성과 하얼빈(哈尔滨) 부근 아청의 위안소로 갔다. 일본인 부부가 주인인 위안소에서 그는 히도미(ひどみ)라 불렸고, 조선말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동닝 스먼즈 수즈랑(鈴蘭)이라는 위안소로 갔다. 장소와 주인만 바뀌었을 뿐 일본군을 상대해야 하는 고통은 똑같았다. 오전에는 사병, 오후에는 계급이 있는 군인, 밤에는 장교가 와서 자고 갔다. 1주일에 한번 군의관의 성병 진료가 있었지만, 결국 그는 성병에 걸려 동닝 시내 큰 병원에서 열흘간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쓰인 치료비는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겹겹이 쌓여가는 고통 전쟁이 끝나고 이수단은 중국에서 홀로 살아남기 어려워 위안소 부근 따두촌(大肚川)마을의 한족 남자와 결혼을 했다. 과거의 상처 때문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남편의 모진 폭력으로 점점 살기는 어려워졌지만, 이혼만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마을에서 부녀회장으로 활동할 만큼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살아왔다. 1980년대 중반 남편이 죽을 무렵, 그는 나이가 들어 혼자 살 수 없어 경로원에 들어와 살았다. 그와의 첫 만남 이후에도 피해자들의 피폐해진 삶의 고통을 덜기 위해 겹겹프로젝트 회원들과 함께 의료, 복지 지원을 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을 기록하러 중국을 수시로 오갔다. 2014년에도 이수단을 만나기 위해 동닝으로 갔었다. 2년 전 그를 방문했을 때에는 두 번의 뇌 수술 등 병환으로 수척한 모습이어서 그때 만남이 마지막이 아닐지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는 2년만에 건강을 회복해 침대에 걸쳐 앉아 서로 마주했다. 칙칙했던 방 안 침대 주변으로는 아기 사진이 도배되어 있고, 그는 머리카락이 없는 아기 인형을 꼭 껴안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 저 알아 보시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다행히 나에 대한 기억은 가지고 있었다. 시선이 방안 곳곳으로 향했다. 이수단은 정신분열증이 심해져 사물에 집중하지 못했다. 첫날에는 나를 알아보았지만, 다음날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어제 다녀간 것조차 기억에 없었다. 중국인 리펑윈으로 잠들다 2016년 5월 어느 날 저녁 무렵 이수단에게 다녀온 지 두 달 반 만에 동북지역 피해자들을 보살펴 오던 엄관빈 선생으로부터 그의 부고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나는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집으로, 함께 겹겹프로젝트 활동을 하고 있는 황성찬은 중국 웨이하이(威海)의 집으로 가야 했지만, 그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지키고자 서울에서 옌지(延吉)로 가는 마지막 남은 비행기 표 두 장을 구했다. 다음날 해가 떨어진 후 도착한 동닝의 어둑한 장례식장에는 고 이수단의 빈소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앞에는 양아들이 그녀의 아기 인형을 안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션양(沈阳)에 있는 영사 3명이 먼저 도착해서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관 주변으로 이수단이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화환이 빼곡히 차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황교안 국무총리, 윤병세 외교부장관,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등 높은 사람들의 이름이 즐비했다. 그동안 이수단 곁에 있던 경로원장과 양아들, 시댁 식구들이 마지막 가는 자리를 지키기에 버거울 정도였다. 그는 1922년 조선인 ‘이수단’으로 태어나 일본 이름 ‘히도미’로 성노예 피해를 당하고, 2016년 5월 17일 오후 3시, 중국인 리펑윈(李凤云)으로 생을 마쳤다. 이수단_01.jpg [사진설명]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해 나이가 들수록 아이에 대한 애착이 커졌다. 그의 방은 아기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2014년 정월에 경로원장이 선물한 인형을 받아 든 그의 첫마디는 ‘너의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갔니? 이제 나랑 같이 살자’였다. 이수단_02.jpg [사진설명] 그는 동족, 동향 사람이 왔지만, 자신의 아픔을 조선어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과거 위안소에서의 아픔보다 더 힘들어 했다. 중국인들과 섞여 사는 사이 우리말은 잊었지만, 아리랑을 부르고 한국에서 가져간 신문에 쓰인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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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주전장’을 줌인하다 - 영화 〈주전장〉 미키 데자키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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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주전장’은 어디일까. 최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내용을 논문에 실어 논란을 일으킨 하버드 교수 사건만 보더라도 주된 싸움터 중 하나가 미국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Miki Dezaki) 감독의 다큐멘터리 <주전장>(2019)이 갖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미국, 일본 등 3개국을 가로지르며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세밀하고 촘촘하게 담아낸 이 영화는 현재 각국에서 ‘위안부’ 이슈가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특히 감독은 일본 우익세력의 목소리를 전면에 담아냄으로써 과거보다 더욱 복잡하고 교묘해진 ‘부정론자’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전쟁 범죄와 제국주의적 침략을 부정하는 것일까. 그들을 넘어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여성 인권에 대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논의가 개진되어야 할까. 이를 묻고 답하기 위해 김은경 한성대 상상력교양대학 교수가 인터뷰어로 나서 미키 데자키 감독과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대화를 전한다. Q. <결>의 독자들을 위해 감독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영화 <주전장>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미키 데자키입니다. 인터뷰를 요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Q. 영화의 제작 동기와 기획 의도를 알고 싶습니다. <주전장>을 통해 관객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나요? 저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태국에서 불교 승려로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면과 외면의 평화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지요.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에는 학문적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한국과 일본이 계속 갈등을 겪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적이 많았는데요. 두 나라의 정부와 국민들을 화합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문제 중 하나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볼 때, 갈등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다양한 맥락과 정보를 담은 영화를 제작한다면, 한국과 일본 국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서로의 관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양국간의 화해, 정의,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 다큐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객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제가 영화를 통해 특별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인지 인식하고, 이들이 자국의 언론을 통해 전달받는 많은 정보들이 서로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부추기는 식으로 필터링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다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면, 한국과 일본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봤을 때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의 성노예 제도였음이 상당히 분명하며, 일본 정부가 이러한 역사를 삭제하려는 행위는 ‘위안부’ 제도 피해자들에게 부당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Q. 내레이션을 통해 감독님의 시각과 목소리를 노출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본계 미국인 남성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처음에는 제가 직접 내레이션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연구조사와 인터뷰를 하며 복잡한 과정을 겪은 끝에 최종 편집 작업을 하면서, 관객들도 나와 같은 여정을 경험한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이 다큐를 위해 연구조사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제가 느꼈던 힘들고 복잡했던 감정들을 관객들도 경험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지요.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 이유는 이러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있어서 제3자인 동시에, 그런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는 관객들에게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본에서 10년 넘게 거주한 경험이 있고 부모님도 일본 분들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미묘한 뉘앙스를 비일본계 미국인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본인들은 제가 일본의 미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이 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을 존경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Q. 왜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위안부’ 피해를 부정할까요? 저도 그 점이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일본 정부와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제적인 평판을 떨어뜨리면서까지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여서 그러한 역사관을 전파하고 있거든요. 제가 볼 때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다른 아시아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보수우익 집단을 형성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려고 하던 사람들처럼, 다시 한번 국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국민 집단을 만들려는 것이지요. 이것은 자민당과 일본회의(日本会議)가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재군비를 추진하려는 야욕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일본이 다른 국가들보다 우월하고 순수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만들어 냄으로써, 더 많은 일본인들이 군대를 지지하고 입대를 마다하지 않게끔 유도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들이 자신의 국가가 과거에 무력을 남용하고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게 되면, 그 국민들에게 군대를 지지해 달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Q. 미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일본 정부나 사회단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미국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 단체 일부가 일본 역사수정주의자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들의 리더들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심포지엄을 열고 기금 모금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 영화에도 출연했던 일본회의 도쿄 본부장인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서 한 일본계 미국인 단체가 제기했던 ‘평화의 소녀상’ 철거 소송을 위해 백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힘썼습니다. LA 일본 영사관도 그 소녀상을 철거할 것을 전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이런 사회단체들과 직접 접촉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일본 정부 역시 동일한 명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위 일본계 미국인 단체가 제기한 글렌데일 소녀상 철거 소송에 대해 ‘법정 조언자 의견서(amicus brief)’와 같은 지지 서한을 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소녀상을 철거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민 1세대(즉,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세대) 일본계 미국인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민 2,3,4세대 일본계 미국인들은 차별당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더 잘 알기 때문에 ‘위안부’ 운동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Q. 이른바 ‘램지어 사태’로 미국의 역사수정주의 학자들이 새로 주목 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들이 주로 어떤 활동과 발언을 해왔는지 알고 싶습니다. 램지어 교수 사건은 미국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인 권위를 이용해 연구의 질이 떨어지는 논문을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함으로써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시각을 뒷받침하는 행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행히도 많은 학자들이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반박을 했고, 이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램지어 교수를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 학자들이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관을 확산시키기 위해 관련 책을 쓰고 대담을 하며 일본의 인터뷰에 응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이 제 영화에도 나왔던 켄트 길버트(Kent Gilbert) 변호사입니다. 그는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관을 지지하는 유명한 책들을 발간한 바 있고, 극우 TV 프로그램에 정기적인 기고를 하고 있습니다. 또 몇몇 미국 학자들이 이와 동일한 행보를 보이면서 일본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현상이 빠른 시일 내에 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본 보수우익들이 자신의 역사관을 백인 미국인들에게 검증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신)냉전체제와 동북아 안보논리를 내세운 미국의 ‘보이지 않는’ 역할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주전장’인 미국은 이 문제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시나요? 영화 후반부에 보면, 우리가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정치적 상황에 대처하면서 현 상황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꽤 큰 역할을 했다는 제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미국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한국을 위한 진정한 화해와 정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과거사 문제에 대한 화해를 두고 한국과 일본을 밀어붙인 게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미국인으로서 이 내용을 제 영화에 꼭 넣고 싶었습니다. 즉, 미국인들에게 한일 ‘위안부’ 문제는 우리와 동떨어진 일이 아니고, 미국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통감해야 하며, 문제 해결과정에 참여하고 정의를 위한 운동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미국 일각에서는 과거 미국 내 소수인종들에 행해졌던 차별행위들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국의 역사가 얼마나 편파적으로 기록됐는지 살펴보고 있지요. 저는 이 영화를 계기로 미국도 다른 나라들에 행했던 부정적인 행위들을 살펴보고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Q. 글렌데일의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초국적 기억 형성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계 미국인 단체들과 일본 영사관이 이 소녀상에 대해 너무 심한 반대를 하는 바람에 여러 미디어의 조명을 받게 됐기 때문이지만요. 일본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고 있기 때문에 ‘평화의 소녀상’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전세계가 이 중요한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일본에 일깨워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일본이 이 역사를 지우려고 할수록, 이 소녀상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입니다. Q. 다큐 제작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다큐를 제작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만, 편집과정에서 삭제된 한 독일 사학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문서로 기록된 것들을 가장 강력한 역사적 근거 자료라 여기고 구술 증언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역사로 기록된 문서들은 특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남긴 자료라는 것입니다. 만약 문서 기록에만 의존해서 역사를 쓴다면, 정부 엘리트 시각에서 본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구술 증언은 보통 글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일본은 과거 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의 문서들을 태워버리고 일본인들이 알기를 바라는 문서만 남겨두었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쓸 때에는 문서기록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Q. <주전장> 개봉 후 영화에 출연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그들은 이 영화를 보고 굉장히 화가 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들은 제 다큐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기사를 쓰고, 동영상을 제작하고,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격을 꼽자면, 제가 단순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속였기 때문에 이 다큐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면서 저를 고소한 것인데요. 이들은 저와 인터뷰를 할 때 자료이용 공개 허가서(release form)에 모두 서명을 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소송이 공적 참여를 방해하기 위한 전략적 소송(SLAPP: 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 즉 겁을 줘서 상대방을 침묵하게 만들려는 소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송은 사회 전반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예술가, 활동가 등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나중에 소송당할 것이 두려워 권력을 가진 단체나 사람들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SLAPP소송이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저해한다고 인정되면, 그러한 소송을 제기한 개인이나 조직에 벌금형을 내리는 SLAPP 금지법이 있습니다. Q. <주전장>에 대한 각국 관객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독일 관객이 이 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독일이 과거에 전쟁 범죄를 저지른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독일 관객들은 일본인들이 자국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과거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굉장히 놀라워했습니다. 미국 관객들도 이 이슈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는데요. 미국인들은 특히 여성의 인권 측면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미투 운동’이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경험을 ‘미투 운동’ 참여 여성들의 경험과 연결해서 동질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많은 젊은 여성분들이 저에게 ‘이 문제가 단순히 두 나라 간의 싸움이 아니라 인권과 여성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지지하는 일본인 학자들과 활동가들을 보고 이를 깨달았다고 했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본 청년들이 제 영화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줬을 땐 희망을 볼 수 있었기에 정말 특별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본의 많은 젊은 이들이 자신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리고 일본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몰랐는데, 이 다큐에 나온 내용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정부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이 과거 문제에 분노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국인들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 일본 미디어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수정주의적 관점만 보도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됐다고 하는 일본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배웠고, 자신이 예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현재 젠더 불평등을 포함한 글로벌 인권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위안부’ 역사는 글로벌 인권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한국인들이 물건이나 화물처럼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당했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가 여성에게 국한됐으며, 남성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위안부’ 역사는 여성의 권리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사회적인 수치심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침묵을 강요당하고 자신의 피해 경험을 숨겨야만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더라도, ‘위안부’ 역사는 여성의 권리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성들은 지금도 역사를 삭제하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다시 한번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Q. 차기작 계획이 있으면 간략히 소개해주세요. 현재 차기작을 위해 리서치를 하는 중이지만, 구체적인 주제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간의 또 다른 정치적 이슈를 다루게 될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와 제 영화를 지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소송에 대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낼 때가 있는데, 많은 한국 분들이 보내주신 따뜻한 메시지들이 저에게 정말로 많은 힘이 됩니다. 언젠가 코로나 팬데믹이 잠잠해지면 한국에 가서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싶습니다. 부디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인터뷰어: 김은경 한성대 상상력교양대학 교수 인터뷰이: 미키 데자키 감독 인터뷰 도움: ㈜시네마달 일시: 2021.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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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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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1994년 1월 12일[1] 박필근 생존자를 만났을 때, 필자는 예순일곱 살로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열여섯 살 당시 입은 피해가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남사시러바[2]’라며 고개를 숙이고 울먹울먹 하는 모습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포항여성회가 2019년에 진행한 「박필근 할머니와 가족 구술생애사」(이하 「구술」로 표기)에서도 “그 말 모하니더(못한다)”, “넘사시럽니더” 하며 인터뷰가 중단되는 상황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고 한다[3]. 이 글에서는 위안소로 동원되는 상황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죽장에 박필근 할머니, 고향이 월평리이고 ... 띠는 용띠고, 노망 안 했니더” 2019년 위와 같이 당신을 소개했던 박필근은 1928년생으로 2021년 현재 아흔네 살이다. 1994년 당시 조사에서는 경북 영일군이었는데 1995년 포항시로 통합되었다. 60여년 흙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다 2019년부터 새로 지은 집에서 지내고 있다(경북도민일보 2019. 4.22). 많은 아픔과 역경을 겪었는데 남은 생은 건강하고 평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죽장면 월평리[4]에서 9남매의 여덟째로 막내딸이었다.” “아버지가 땅을 좀 가지고 농사를 지었지만 비료도 없고 해서, 만날 천날 요런 감자를 쌔가리 감자 요만큼 한 거 삶아가 저 콩이파리 저걸 우리가 뜯어 고마 채반을 넣고 쩌가...” “엄마 젊지, 머슴 둘이 있지. 내가 무슨 일 했노? 떡을 해도 나는 맨날 찰떡만 먹고, 얼매나 잘 살았는지 이 동네에서 젤 잘 샀았니더.” “농사 많이 짓지. 아들네 주고 학교 보낸다고”(「구술」) 어린 시절에는 잘 살았고 막내로 귀여움 많이 받았는데 감자와 콩이파리 먹던 이야기는 40년대 이후 공출[5]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빠들과 남동생은 학교에 보냈고 특히 남동생은 육군사관학교까지 나왔다.(2019. 6.30 녹취문) “시집을 보내면 신랑이 있이먼 거기 안 뽑혀 가고” “어디 가가 피 빼고 우얀동 죽인다 캐네 다 치아불고요(결혼시키고)[6]. 뭐 열시 살 먹은 애, 열니 살 먹은 애, 열다섯 살 먹은 애 다 치아불고” “시집을 보내면 신랑이 있이먼 거기 안 뽑혀 가고” 하여 언니들 네 명은 다 결혼했다. “학교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몬(못) 하고. 그저 엄마 졑에만(곁에만) 있고, 그때는 밭에도 안 나가 봤니더. 차도 한번 못 타 봤고요.” 일제강점기에 이렇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여성들이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1938년 3월 경부터 조선 남부에서 여성들을 군에 봉사하게 할 목적으로 전쟁터로 동원한다는 ‘유언비어’가 발생하여 전역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7] 『매일신보』도 「조혼하지 말자! 여자는 징용치 않는다」(1944. 5.16)고 보도할 정도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였던 고 이효재 교수도 “나는 일제의 처녀공출 위협을 직접 겪었”다(『동아일보』1997. 2.12)고 했다. “집에 있다가 차가 와가 얹어가 가뿌랬지” “내 열여섯 살에 “무신(무슨) 영장 같은 게 이런 게 왔다 카** 종이쪼가리 이래가, 글을 알아야 보지? 열여섯 살이라도 내가 학교 앞에도 못 가봤는데 막냉이다 보니 열여섯 살에 뭘 아는겨? 이래가 뭐 안 가마(가면), 엄마 아부지를 끌고 간다 카대. 무슨 모집인지 처자(妻子) 모집한다 캤지. 일곱명인가 죽장면에서 (갔다) (지금) 다 죽어버렸다 카대. 떠날 때 치마저고리에 머리를 땋고 긴 머리로 (갔다).” “어매 아부지 밭에 갔다가 (혼자) 집에 있다가 차가 와가 얹어가 가뿌랬지(가버렸지) 뭐”.(「구술」) “일본사람이 와서 어디 가서 하룻밤을 재웠다. “일본말 하니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았지 뭐” “기차를 어디가 탔는동 (모른다) 그거를 집인 줄 알고 드갔드만 그게 차가 가드라 칸 게. 방인 줄 알고 타고 보니 가더라.(배였음)” (같이 탄) 사람이 많았다. “내가 배로 타고 뱃멀미를 앓아가 뱃멀미...”(「구술」) 일본인 남자 서너명이 여자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것도 한, 한 태에 다 안 가디더. 또 이래 가다가 또 어데 가고 또 저거는 또 몇 십명 또 빠치(배치) 노내고(놓고) 또, 또” 이런 막내를 보낸 부모들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박필근은 “우리 어매 매일 저녁 울고, 그 나 때문에 일찍 돌아간 기다”라고 한탄했다. 열여섯 살이었다고 하니 1943년경으로 추정된다. 94년 조사에서는 차에 타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구술」에는 일본 순사가 탄 트럭이 왔다고 하고, 6.16 녹취록에서는 아들이 들은 것에 의하면 “열여섯에 붙들려 가가....방직공장 취직해준다 하믄서 데리고 갔다 하대”. 박필근뿐 아니라 1942년 일본으로 간 김봉이(가명)의 경우도 일본 모집 공장이라고 쓰인 영장 통지서가 나왔다고 한다.[8] 그런데 여성들은 영장이 나오는 국민징용령[9]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성노무 동원을 위해 1944년 8월 23일 공포·시행된 여자정신근로령(『매일신보』 1944. 8.26, 8.28. 참조)에 의해서도 영서(令書)가 나올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동원하지 않았다. 1944년 4월경부터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관의 알선지도’에 의해 2년 기한으로 항공기제작공장, 기계제작공장 등지로 동원되었다.[10]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 전 교수의 의견을 참고하면 여기서의 영장은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안부’ 동원에 관여한 행정기관에서 공장에 간다는 명목으로 임의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11] 조선에서는 경찰이 ‘군위안부’를 직접 징모하거나 인솔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경찰은 도항에 필요한 신분증명서를 발급하였고 징모에 협력하였다.[12] 당시에 관부연락선[13]을 타려면 경찰서에서 발급한 도항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그 지키고 있는 거 일본 말로 ‘게비(경비)’ 들이라 카대요. “일본인동 뭐 북해도인동 뭐 일본이지.” 담이 높은 공장으로 들어갔다. 기숙사가 있어서 몇 명이서 한방을 썼다. 처음에 베 짜는 공장을 보여줬다. 기숙사에 가두어 놓고 앉아있었다. “지키고 있는 거 많~엤지요. 그 지키고 있는 거 일본 말로 ‘게비(경비)’ 들이라 카대요.” 같이 있던 애들이 “(도망) 가면 마 죽인다 카더이다.” 거기서 파란 군복[14]을 줘서 입고 머리를 단발로 잘렸다. 이름표도 달렸다. “모자도 ‘센토보시(전투모)’ 일본놈들 쓰는 거 쓰고예”(「구술」) “저거가 일본말 하니 내 아는교, 내 조선말 하니 저거가 아는교?” 나중에 뭐 엄마는 ‘오까상’이고 아부지는 ‘오또상’이고 할머니** ‘오바상(할머니)’이고, ‘오지상(할아버지)’이고 이런 간단한 일본말을 일본 남자가 가르쳐줬다. 새벽에 종 흔들어가(흔들어서) 일본남자가 깨웠다. 그는 군복[15]을 입고 어깨에 뻘건 게 있었던 것 같다. 기숙사에 있던 식당에서 ‘하시(젓가락)’를 가지고 밥 한 숟가락 먹고 ‘덴고(점호)’를 하고 훈련을 시키주고. “체조 하고 뭐 이러니까네, 체조를 할 줄 알아야 하지요?” ‘유미유까바[우미유까바 바다로 가면] 야마유까바(산으로 가면)’[16] 군가를 불렀다. “훈련(하면서)도 맞고 얼렁 안 가면 얼렁 안 간다고 짝대기 집고 그냥 때리는 거”, ”못 하면 차고 때리고“ “며칠에 한번씩 군인동 일본 사람인동 우리를 끄집고 가가요, 희한한 짓도 다 하고요.” 컴컴하고 창고도 같고 학교도 같은 데 같은 방에 있던 8명의 여자들이 교대로 너이(4명)밤에 불려나갔다. 바닥에 뭐가 깔려있었다. 창고가 컴컴해서 “그 안에 일본놈인동, 군인동, 한국놈인동 모르죠”. 거기서 말을 안 들으면 방망이로 아무 데나 때렸다. 일이 끝나면 기숙사로 다시 데려다 줬다. 창고에 갔다 오면 “개구리같이 퍼져가 일어서지도 몬하고 말로 다 몬한다.” 한 일년쯤[17] 있다가 “그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요. 마 여기 있어도 죽으, 그래 난 죽는교. 우리 엄마나 한 번 더 보고 *자고 그래 나갔지요. 이래 변소 가니까 구녕 요만한~ 게 어여어여 가지고 고 구녕을 내가 가, 밤중에 깄지요(기었지요). 십리를 깄다 카먼 알지요. 같은 방에 있던 여자 서이 나왔니더[18]” “그캐 춥기는 춥고 물에 빠져가 경운기 불 때니깐 가니까네 누꼬하니 내 왔다 하니 나도 한국 있다 여 오니 거 가만 있으라 카이. 닷새 있었니더. 전단지 옷 다 갈아입히고 닷새 있다 부산서 열닷새 만에 여기”(「구술」). 「구술」에 의하면 탈출에 성공한 것이 두 번째였고 첫 번째 탈출시도는 실패하여 구타를 당해 다리에 ‘험태(상처)’가 생겼다고 한다. 집에 와서 곧 해방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945년 2월경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필근은 기차로 부산으로 이동한 후 관부연락선을 탄 것으로 추정되고 귀국할 때도 재일동포가 연락선을 태워줬다고 한다[19]. 동원된 장소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20]가 있는 야마구치현 부근이 아닐까 추정한다. 당시의 충격으로 창고에서의 세세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해 “누가 다녀갔는지 몰랐다”고 하여 노무자를 상대한 ‘기업위안부’[21]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들에게 “첨에 가면은 그 그 일본 군인들이 ‘나래비(줄서기)’를 선다 카드라”(「구술」) 하는 것으로 보아 군위안소로 판단했다. 박필근 생존자처럼 공장에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낮에 ‘덴꼬(점호)’를 하고 군가를 부르며 체조 훈련을 한 점에서는 여자근로정신대와 비슷하고 밤에 창고 같은 건물로 이동해서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경우는 처음이다. 1942년경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동원된 H의 경우도 처음에 6개월은 공장에서 일하다 나중에는 요일을 정해 부대 근처로 가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는데, 생활하는 데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22] 여성들을 공장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고 교대로 위안소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대개 위안소에서 생활하면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에 비하여 사는 곳과 위안소가 분리된 점도 다른 점이다. 일본의 경우 오키나와를 제외하고는 군위안소가 많지 않기에 일본 내의 군위안소에서 피해를 입은 이번 사례는 귀중하다.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공개증언 이후 일본정부는 고노담화(1993. 8.4)[23] 등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과했다. 그 후 2007년 아베 내각에서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했다는 문건[24]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체를 부정하며 2015 한일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국가범죄와 전쟁범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소는 군 시설이며 국가(군·정부)에 의해 성립되었다.[25] 고향으로 돌아왔어도 조그마한 동네라 수군수군 흉보는 마을사람들, “남캉같이(남들같이) 이 세상 못 살아보고” 아들, 딸과 살기 위해 부지런히 품을 팔아야 했던 박필근의 귀국 후 고난도 “그 말도 다 몬합니더”. 관련 자료를 보면 경상도 출신 여성들이 위안소에 많이 있었다는데 2021년 현재 경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존자는 박필근뿐이다. 포항여성회에서 정기적으로 방문할 때마다 쌀을 사달라고 요청하시면서 새 쌀은 쌓아두고 묵은 쌀을 드신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저러실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 한 번 아들과 딸 그리고 포항여성회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하게 생활하시기를 기원한다. “일본놈 사과도 받고 싶고 배상도 받고 싶은” 박필근 생존자의 바람이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성폭력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일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각주 ^ 면담에는 박필근과 딸, 관련 공무원 3명, 안연선(한국정신대연구소)이 함께 했는데 진행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필자가 포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여 추가 면담을 하지 못했다. ^ 남사스럽다: 남에게 놀림과 비웃음을 받을 듯하다. ^ 다만 아들에게는 수시로 일본은 독종이라는 등 욕도 하고 당시 동원과정, 탈출과정 등에 대해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와 녹취록 자료를 제공해주신 포항여성회(금박은주회장)에 감사드린다. ^ 1934년 4월 1일 죽남면과 죽북면을 죽장면으로 합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월평리는 갈뫼봉(438m) 서편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청송군(靑松郡)과 경계를 이루는 꼭두방재(415m)에 이르기까지 밖골, 안골, 우마동, 살마골, 꼭두방과 같은 작은 자연부락이 산재(散在)하고 있다. 1914년 소월, 고평, 현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평리(月坪里)라 하였다.(포항시 죽장면 홈페이지 참조) ^ 일제는 1939년<미곡배급통제법>을 제정하여 미곡의 시장 유통을 금지하고 농민의 자가 소비분 대부분까지도 헐값으로 강제 공출시켰으며, 그 대신 만주 등지에서 들여오는 콩이나 피 등의 동물용 사료를 배급하였다. 그 뒤 미곡 공출실적이 저조하자 1943년<식량관리법>을 제정하여 맥류·면화·마류(麻類)·고사리 등에 이르기까지 40여 종에 대하여 공출제도를 확대하고, 강제 공출을 이행시키기 위하여 무력까지 사용하는 등, 전시군량 확보를 위하여 온갖 강압적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총생산량 중 공출량의 비율은 1942미곡년도에 45.2%, 43년에는 55.8%, 44년에는 63.9%로 증가하였다.(『한국사 – 근대 – 민족운동의 전개』 1942-1945의 총독정책 참조) ^ 윤수만(충남 보은 46)은 1943년 8월 23일 고목인송의 집에서 동인의 내연의 처 신재룡 외 1명에게, “최근 광업자는 여공으로 모집된 처녀를 돌려보내지 않는다. 때로는 피를 뽑고 귀택시키기 때문에 그 처녀는 귀택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한다”는 말을 해서 1943년 11월 27일 벌금 100원 판결을 받았다.(공훈전자사료관) ^ 藤永壯, 「戰時期朝鮮における『慰安婦』動員の『流言』『造言』をめぐって」, 松田利彦ほか編, 『地域社會から見る帝國日本と植民地-朝鮮·臺灣·滿洲』, 思文閣出版, 2015 참조(1938년 3월말에 경상남도 밀양, 양산 지역에서는, 16~20세의 처녀 및 16~30세의 과부를 강제로 끌어모아 전쟁터로 보내고 “낮에는 밥짓기나 빨래 등의 노역을 시키고 야간에는 군인과의 성적관계를 시켰다”라고 말한 세 명이 육군 형법으로 4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2004), 여성과 인권, 270쪽 ^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노동력 동원을 목적으로 국가총동원법 제4조[징용] 규정에 따라 1939년 7월 8일 제정 공포해 실시한 인력통제법령[칙령 451호]이다. 「국민징용령」은 일본 정부가 「국민징용령」 및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등록한 자 중에서 선정하여 징용 영장을 발령·교부하여 송출하는 방식이다.(세계한민족문화대전) ^ 『‘조선여자근로정신대’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2008),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138쪽. 관의 알선지도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각 기업이 동원할 노동자 수를 서로 조정하고, 조선총독부 기구가 동원과정(모집, 전형, 송출)에 적극 개입하는 형태이다(22쪽). ^ 일제 강제동원을 연구해온 모리야 요시히코 전 교수에 의하면 “관알선 단계에서도 징용영장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건 정식 영장이 아니라 지역 군이나 면에서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 ‘영장 나왔으니까 너는 가야 한다’는 식으로 써먹은 것이죠”(김호경·권기석·우성규,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2010), 돌베개, 61쪽) 참조. ^ 윤명숙,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2015), 이학사, 536쪽. ^ ‘부관’(釜關)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의 뒷글자(關, 관)를 딴 것이다. 일본에서는 종종 어순을 바꾼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또는 관부항로(關釜航路)라고 부른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지방·몽고 등지로 진출하기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였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에 의하여 처음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 연락선은 일본의 한국 침략의 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일본인들의 수탈에 농토를 잃고 북해도 탄광으로 가기 위하여 관부연락선에 몸을 맡겨야 하였다. 최초로 취항한 연락선은 이키마루(壹岐丸, 1,680톤)라는 배로 11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 뒤 3,000톤급의 쇼케이마루(昌慶丸)·도쿠주마루(德壽丸)·쇼토쿠마루(昌德丸) 등이 운항되었다. 1935년부터는 북중국·만주·몽고 등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여객과 화물의 격증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예인 7,000톤급의 대형 여객선 공고마루(金剛丸)·고안마루(興安丸) 등을 운항하였으며 시간도 7시간 반으로 단축하였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징발하고, 전선과 일본 본토를 운항하는 데 투입되었으나, 미군에 의하여 격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5년 3월부터 사실상 관부연락선은 두절되었으며, 그 뒤 광복이 된 뒤에도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연락선이 오가지 못하였다.(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공장에서 입는 작업복으로 추정된다. ^ 국민복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제하 일본 군부의 강요로 입었던 국방색의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복식. ^ 1939년에 나온 일본군가. 海行かば (바다로 가면) 海行かば水漬く屍 / 山行かば草むす屍 / 大君の邊にこそ死なめ / 顧みはせじ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 / 산에 가면 풀이 돋은 시체 / 천황의 곁에서 죽어도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 「구술」에서 박필근은 “몇 달 안 있었니더”라고 하고 아들은 일본어 욕을 잘 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2~3년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94년 딸의 증언에 의하면 딸이 결혼한 후 같이 도망나온 피해자 중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곧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 포항MBC 2020. 8.14 인터뷰 영상 ^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있는 도시. 1943년 12월말 야마구치현에 132,526명의 한국인들이 살았다(재외동포사총서 10 『일본한인의 역사』(상)(2009),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 기업의 생산성을 위해 동원·착취되었던 상황을 강조하여 ‘기업위안부’로 부르기로 한다. 정진성, 『일본군성노예제』(2004), 서울대학교 출판부, 341쪽. 기업위안소는 주로 일본 홋카이도와 규슈의 탄광에 설치되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2』(2018), 푸른역사 참조 ^ H의 구술. 『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2013), 대일항쟁조사위원회, 236~273쪽 참조 ^ https://www.awf.or.jp/k6/statement-02.html “위안소는 당시 군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운영되었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하였으나 그 경우도 감언이나 강압적인 방법 등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또한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조선의 경우 1941년 ‘관동군특별대연습’을 계기로 관동군이 2만명의 위안부를 모집해 주도록 조선총독부에 요청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 모집에는 부도군읍면의 행정계통과 경찰의 적극적·조직적 개입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실제로 모집된 것은 3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종문, 「위안소와 일본군·일본군의 가해체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2001), 풀빛, 93쪽. 그런데 패전 후 조선총독부가 문서를 대대적으로 소각했고,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조선총독부 자료에 노무, 외사, 경무 관련해서 1944과 1945년 자료가 하나도 없는 실정이 이를 증명한다. ^ 2005년 나가이 카즈는 <야전주보규정개정>(1937.9.29.) 사료를 통해 위안소 자체가 ‘군대에 속해 있는 군시설’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군관헌의 개입은 당연한 사실이므로, 강제연행에 군관헌의 직간접 개입의 유무 논란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永井和, 「陸軍慰安所の創設と慰安婦募集に關る一考察」,『二十世紀硏究』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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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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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남산예장공원[이회영 기념관, 기억6전시관] → 남산인권숲 →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 통감관저 터 표석, 거꾸로 세운 동상] → 국치길[통감관저 터 → 조선총독부 터 → 노기신사 터 → 경성신사터·일제갑오역기념비 → 한양공원 기념 비석 → ‘삼순이 계단’] →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기억의 터 남산 자락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로 가는 길목에는 ‘남산예장공원’이 있다. 공원은 세종호텔 건너편으로 남산 1호 터널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 사이, 서울소방재난본부 아래쪽에 있는데 오랜 공사 끝에 2021년 6월 개장했다. 공원은 두 개 층으로 나뉜다. 들머리를 따라 친환경 버스 환승센터를 지나면 공원 아래층엔 ‘예장마당’과 ‘이회영 기념관’이 있다. 전 재산을 들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평생 조국 독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과 여섯 형제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공원의 윗부분은 푸른 소나무 숲, 명동~남산을 보행으로 연결하는 진입광장, 샛자락 쉼터 등을 두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꾸며졌다. 하지만 여기서 더 눈에 띄는 것은 빨간색 우체통 모양의 ‘기억6전시관’이다. 전시관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공간으로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 고문실을 재현해 두었다. 기억6전시관 앞에는 재생사업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 총독부 관사의 기초 일부분을 그대로 보존한 유구터를 비롯해 철거 당시의 콘크리트 잔해와 부서진 기둥을 활용한 벤치 등이 놓여 있다. 예장공원의 ‘남산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을 지나면 서울소방재난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까지 이어지는 ‘남산인권숲’으로 들어선다. 이 일대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자리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도 여기에 있다. 바닥에 그려진 노란 나비가 기억의 터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기억의 터 오른쪽에는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있다. 기억의 터 소개와 조성 과정, 작품 해설, 함께 만든 이들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올해 나이 92세 이름은 김.복.동, 피해자입니다”로 시작되는 ‘위안부’피해자 김복동 님의 인터뷰는 이곳을 찾은 사람의 마음을 다잡게 한다. 기억의 터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두 가지 주제가 함께 하는 곳이다. 식민지 침탈의 중심이었던 ‘통감관저 터(총독관저 터)’와 그 피해를 가장 심하게 당한 ‘위안부’를 위한 장소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 사이에 ‘통감관저 터 표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만든 임옥상 작가는 “포위하되 포용하고 꾸짖되 용서하는 모성으로 세상을 보듬는” 의미의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기억의 터는 직선의 통감관저 터 표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을 부드러운 곡선의 대지와 조형물로 감싸고 있다. 대지의 눈은 등 뒤에 야트막한 둔덕을 얹은 반달 모양 벽으로 둘려 있다. 이 벽은 ‘통곡의 벽이자 화해와 치유의 벽’이다. 벽의 맨 위에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다음 “이렇게 끌려갔다”, “너무 험한 악몽이다”, “해방 후 귀국·귀향”, “반세기의 침묵을 깨다”, “수요시위”, “소녀상”, “나비기금”, “인권평화운동” 순서로 피해자들과 관계자들의 증언이 새겨져 있다. 한 줄 한 줄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간다. 눈으로 볼 때와 달리 소리를 내었을 때 점차 피해자들의 절절한 아픔과 절망과 눈물이 배어든다. 무엇보다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첫 증언자 김학순 님의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살려준 것은 이 문제를 위해 싸우라는 뜻이라 생각한다”라는 증언이다. 이용수 님은 “나는 여기 저와 함께 있는 이 여성들 때문에 이렇게 과거의 아픔을 이기고 여러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습니다”라고, 길원옥 님은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해요…… 다시는 이런 전쟁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라고 하셨다. 원망과 아픔에 온몸과 마음이 찔려 아물기 힘들 상처를 끌어안고서 증언하고, 당당하게 싸우고, 다른 이들을 위해 평화를 요구한다. 적당히 세상과 불의에 타협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감히 엄두도 못 낼 용기에 먹먹해진다. ‘위안부’피해자들은 다만 ‘잊혀지는 것이 두렵다’고 했지만, 그들이 말한 것은 ‘잊지 말고’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위해 함께 힘을 내야’ 한다는 다그침이리라. 이런 사연들 왼쪽에는 기억의 터를 조성하는 의미로 피해자 247명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오른쪽에는 피해자 김순덕 님의 ‘끌려감’이란 그림이 있다. 무궁화 가득 핀 한반도에 서 있는 한 여성의 팔목을 바다 건너 끌어당기는 손. 동그랗게 뜬 여성의 눈에서 당황스러움과 무서워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가 그대로 전해진다. 벽을 마주하고 서서 내용을 읽다가 문득 발밑을 보면 까맣고 둥근 동그라미 위에 내가 서 있고, 이 동그라미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지켜보는 대지의 눈이다. 대지의 눈에서 돌길을 따라 세상의 배꼽으로 간다. 세상의 배꼽은 부드러운 언덕으로 둥글게 감싸져 있다. 언덕에는 여름에 빨갛게 꽃피는 백일홍나무와 아직은 감이 두세 개만 열리는 어린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배꼽’ 안으로 통하는 작은 길은 양쪽으로 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에 보름달같이 둥글고 큰 돌이 있고, 그 주변에 80여 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둥근 돌에 앉으면 언덕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아 포근하고 호젓한 기분으로 숲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둥글고 큰 돌은 배꼽을 뜻한다. 어머니와 아기의 생명을 잇는 배꼽처럼 피해자들과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돌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글귀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적혀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을 그린 윤석남 작가의 작품도 새겨져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될 것”이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손을 맞잡고” 나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둥근 돌에 앉아 몸에 힘주어 돌을 흔들어본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돌이 흔들흔들 묵직하게 흔들린다. 돌의 흔들림과 그 위에 앉은 우리의 흔들림이 함께 물결처럼 언덕을 넘어 저 바깥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기억과 공감의 물결이다. 배꼽 돌 옆에 여기저기 놓인 돌들은 전국 곳곳에서 가져온 돌로, 고향을 떠나온 피해자분들의 마음이라고 한다. 돌들을 가로지르는 길 끝에는 기억의 터를 만드는 과정에 함께해준 분들의 이름을 새긴 명패가 있다. 기억의 터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우리 민족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함께 품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가슴 아픈 고난을 상징하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식민지 역사의 극복이고 미래를 향한 다짐이 될 것이다. 다시 세상의 배꼽을 되돌아 나오면 대지의 눈 사이에 두 가지 조형물이 있다. 서울 유스호스텔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통감관저 터 표석이 놓여 있다. 기억의 터는 2017년 8월 29일에, 이 표석은 2010년 8월 29일에 세워진 것이다. 기억의 터가 있기 이전에 이곳은 통감관저 터였다. 대한제국 시기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됐는데, 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다. 그리고 일본공사관이었던 이곳은 통감관저로, 1910년부터 1939년까지는 총독관저로 사용됐고 이후에는 시정기념관으로 이용됐다. 1960년대 남산 자락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서고 1996년 이후에야 남산이 시민들에게 다시 공개됐을 때엔, 통감관저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게 됐다. 기록들과 당시 사진에서의 400년 넘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의 동상 좌대 판석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통감관저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 국치 100주년을 기념해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을 세우게 됐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이 통감관저에서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8월 29일 순종과 일왕의 조서가 정식으로 공포되면서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됐다. 바로 ‘경술국치’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현장이기에 여기에 표석을 세웠다. 울퉁불퉁한 대리석으로 된 거꾸로 세운 동상은 표석을 마주하고 있다. 이것은 하야시 곤스케라는 일본 외교관 동상을 받치는 받침석이었다. 하야시 곤스케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공사(公使)였다. 그는 일제의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서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 한일협약, 을사조약을 맺게 한 장본인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발휘한 외교관이었기에 남작 작위를 주고 1934년에는 아직 살아 있음에도 동상을 만들어 이곳(당시는 총독관저)에 세워주었다. 사진을 보면 거의 실물 크기 동상으로 좌대 판석까지 합치면 4m 이상은 될 것 같다. 이 동상도 해방 이후 어떻게 파괴됐는지 알 수 없지만 2006년 이곳에서 발견된 좌대 판석 3개를 활용하여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여기에 다시 세웠다. 하지만 곱게 세우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리고 뒤집어서 치욕스럽게 세웠다. 원래는 울퉁불퉁한 면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상 뒤쪽으로 돌아가면 “男爵林林権助君像(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이란 글씨가 거꾸로 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읽기 위해 허리를 꺾을 필요는 없다. 발아래 반짝이는 까만 돌에 글씨가 비쳐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국치길 서울시는 2018년 통감관저 터를 시작으로 하는 ‘국치길’을 조성했다. 국치길은 우리가 걷고자 하는 ‘기억의 길’이기도 하다. 국치길은 통감관저 터에서 시작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간다. 첫 번째 만나는 곳이 ‘조선총독부 터’(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이다. 버스 정류장 옆에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투탄의거(1921년)’를 기념하는 안내판도 함께 있었으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재건축이 진행되면서 잠시 치워졌다. 조선총독부 터에서 다시 ‘소파로 길’을 따라 약 400m 남짓 올라가면 리라아트고등학교가 있고, 학교 안 남산원에는 ‘노기신사 터’가 있다. 노기신사는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여기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신으로 삼아 1934년 세워졌다. 리라아트고등학교 옆 숭의여자대학교는 ‘경성신사 터’였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이 세워지기 전까지 총독부가 제의를 관장했던 최고의 신사였다. 또 한편에는 일제의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사자를 추모하는 ‘일제갑오역기념비’도 있다. 숭의여자대학교를 나와 남산케이블카를 100여m 지나면 남산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한양공원’의 기념 비석이 있다. 이제 길의 거의 끝에 왔다. 이른바 ‘삼순이 계단’이라는 계단이 남산을 향해 쭉 뻗어 있다.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하며 오르기도 했고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들이 아름다운 입맞춤을 했던 이 계단은 누가 언제 왜 만들었을까? 남산은 산 위에서 한양 시내가 모두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백성들은 함부로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또 국가 제사 시설인 국사당이 있던 신성한 산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국사당을 인왕산 아래로 쫓아버리고 한양 성곽도 무너뜨리면서 1925년 조선신궁을 지어 일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왕(메이지천황)의 신위를 안치했다. 조선신궁은 우리 민족에 대한 정신적, 종교적 수탈의 장소였다. 삼순이 계단은 바로 조선신궁으로 참배하러 가는 계단이었다. #기림비 계단을 다 오르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돌아 서울을 한 번 내려다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그러고 나서야 몸을 돌려 남산공원을 둘러본다. 계단 끝 느티나무 한쪽에는 서울시교육청 교육정보연구원, 한쪽에는 ‘서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비’가 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몇십 년 전 기억으로 식물원과 분수대를 찾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는 ‘조선신궁 배전 터’와 ‘분수대 터’,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복원되어 있고, 공원 끝에는 남산도서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입은 한국, 중국, 필리핀 등 미국 내 13개국 커뮤니티가 연합해 일본의 압박과 방해를 이겨내고, 2017년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 광장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그리고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김진덕·정경식재단 등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와 같은 모양으로 서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비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것을 2019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여기에 세웠다. 왜 남산에 세웠을까?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교육청, 정의기억연대는 시민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좀 더 가까이 접하고 기억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시민들이 많이 찾는 일상적 공간이자 일제 침탈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인 이곳에 평화와 인권의 상징물인 기림비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는 높은 단 위에 서 있는 세 여성을 김학순 님이 올려다보는 모습이다. 반면, 서울의 기림비는 김학순 님과 세 여성 모두 평지에 나란히 서 있고 세 여성 사이에 한 사람이 더 들어가 함께 손잡을 수 있도록 자리가 비워져 있다. 누구든지, 몇 사람이든지 손을 이어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림비 옆에 있는 다섯 개의 앉음돌은 김학순 님이 태어난 중국 지린성, 돌아와 살았던 평양, ‘위안부’ 피해를 당했던 베이징, 도망친 후 살았던 상하이, 해방 후 돌아온 서울, 이렇게 다섯 장소와 거쳐 온 시간을 의미한다. 기림비는 김학순 님이 서로 손을 굳게 맞잡고 서 있는 한국·중국·필리핀의 세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김학순 님은 자갈밭에, 여성들은 맨발로 거친 흙 위에 서 있지만, 굳은 의지로 가득 찬 눈동자와 꽉 다문 입, 당당하게 편 가슴, 서로 깍지 낀 손은 아주 단단해 보인다. “여성 강인함의 기둥”이라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의 제목이나 “정의를 위한 연대”라는 서울 기림비의 제목은 기림비가 지닌 의미를 그대로 전해준다. 전쟁 중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와 성폭력, 인신매매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멈추게 하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과 연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의 터에서 시작한 기억의 길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침략 현장이었던 국치길과 함께하는 기억의 길은 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를 되새기는 길이며, 기억이 왜곡되지 않고 정의와 인권과 평화를 향한 길을 잃지 않도록 되새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