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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2) - 위다닌시, 드리스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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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다닌시 씨 이야기 자바섬 서부의 수카부미는 네덜란드식민지시대 때부터 유명한 고급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수카부미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와룽키야라 마을에 살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의 집에서 도보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네덜란드인이 살았던 낡은 집이 있었다. 와룽키야라 마을로 온 일본군은 그 집을 군영으로 삼았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을 매우 무서워했다. 멀리서 일본군의 모습이 보이면 샛길로 피했다. 샛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길에서 스쳐 지나갈 때는 고개숙여 인사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얽히게 되면 성가신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 군정 하에서 조직된 도나리구미(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최말단의 지역조직) 등에게 스파이 용의자 등으로 밀고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이 마을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일본군이 군영으로 삼은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에서 어린 여성들이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무 농원에서 일하던 부모님이 집을 비워 저녁에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위다닌시 씨는 대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 일본군 몇 명이 찾아와 있었다. “간호부로 일하지 않을래?” 어눌한 인도네시아어로 한 군인이 말했다. 당시 위다닌시 씨는 15살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사 일을 돕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돈을 벌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본 군인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그 제안은 거절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위다닌시 씨는 무서워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몇 명의 일본군에게 둘러싸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트럭이 세워진 곳까지 걸어갔다. 눈이 가려진 채로 끌려간 곳은 네덜란드인이 살던 낡은 건물이었다. 위다닌시 씨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죽 장화를 신은 군인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강간했다. 그 군인은 위다닌시 씨가 집에서 끌려왔을 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자였다. 그의 이름이 다나베(タナベ)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다나베의 뒤를 이어 위다닌시 씨를 강간했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다닌시 씨가 묵은 방은 하얀 회반죽 벽에 아래쪽은 목재로 마감한 세련된 방이었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6명의 어린 여성들만 있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그 낡은 건물을 찾아오는 일본군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성병 검사는 일주일에 한 번, 식사는 당번병이 가져왔다. 위다닌시 씨는 거기에 온 병사가 요금을 지불하는 모습은 본 적도 없고 직접 금전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들은 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계속해서 강간을 당했다. 병사들이 방에 들어오면 위다닌시 씨는 “꺼져”라고 욕을 했다. 그때마다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맞았다. 병사에게 저항하여 식사를 받지 못한 날이 이어졌다. 칼을 빼 들고 “찔러 죽여버린다”고 위협하는 병사도 있었다. 목덜미에 군용 칼끝을 갖다 대고 폭력적인 체위를 강요하는 군인도 있었다. 자주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살해당할 수 있다는 공포 이상으로 강간을 당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4개월 후 일본군 부대가 보고르로 이동하면서 이 여성들도 보고르로 연행되었다. 보고르에서 일본군은 이전에 네덜란드군이 쓰던 시설에 주둔했고, 군 부대 규모는 와룽키야라 마을보다 훨씬 컸다. 근처의 위안소에 와룽키야라 마을에서 온 위다닌시 씨 일행이 포함되어 ‘위안부’의 숫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일 년 후 20명 중 4명이 반둥으로 이동되었다. 위다닌시 씨도 반둥으로 이동되어 반둥의 위안소에서 또다시 일 년을 보냈다. 와룽키야라 마을에 있던 부대와는 보고르, 반둥에서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부대의 병사는 식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이 패전하면서 위다닌시 씨는 위안소의 생활로부터 해방되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자신의 몸이 저주스러웠다. 위다닌시 씨는 당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차마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혼한 언니가 반둥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기에 언니네 가게까지 7㎞를 걸어가 그곳에서 일하며 지냈다.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다. 인도네시아군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국가로서 나아가기 시작한 때다. 위다닌시 씨는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부모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부모님은 자취를 감춘 딸이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딸 찾는 건 포기해. 찾으려고 하면 죽여버린다.” 부모님은 일본군에게 협박을 받았던 것이다. 딸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 머릿속에 떠오르는 딸의 불운,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본군에게 위협을 당했고 비탄이라는 감각조차 잃은 채 피폐해져 갔다. 아버지는 어디에도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를 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딸에게 퍼부었다. 일본군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아버지는 딸의 불운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위다닌시 씨가 일본군에게서 받은 피해는 일본군의 잔학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우울해하는 나날이 늘어갔고 건강이 나빠져 일 년 후 돌아가셨다. 위다닌시 씨는 그 후 반둥 출신의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18년 전에 죽었다. 남편에게는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굴욕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기억을 봉인하고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누워있을 때면 봉인해 두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봇물 터지듯 선명하게 밀려들어 왔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불쾌한 감정, 혐오심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라 아픈 몸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드리스 씨 이야기 드리스 스만포 씨의 아버지는 네덜란드군의 하사관이었다. 드리스 씨는 네덜란드 학교에 다니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드리스 씨가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집 정원 앞에서 말에 올라탄 일본인 군인이 드리스 씨를 가만히 주시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딸을 데려가겠다”라고 부모님에게 통보했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부모님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직감한 드리스 씨는 군인을 따라갔다. 수카부미 부눈 거리에 있는 커다란 집에 도착한 드리스 씨는 자신을 끌고 온 가나가와(カナガワ)중위로부터 자신의 아내 역할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드리스 씨와 같이 장교 등이 혼자서만 끼고 살던 여성들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친타’라고 불렀다. 가나가와 중위는 드리스 씨가 다른 일본 병사들 근처에는 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으며 외출을 금지했다. 가나가와 중위 곁에는 시중을 드는 당번병인 마치다(マチダ)가 있었다. 가나가와는 평일에는 업무로 집을 비웠고 마치다만 집에 남아 드리스 씨를 감시했다. 드리스 씨는 어머니가 보고싶었지만 마치다의 감시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이 부모님의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끌려올 것이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 날 드리스 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안 가나가와 중위는 점차 발길을 끊었다. 당시 드리스 씨는 임신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태내의 생명을 지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젊을 때의 중절은 나중에 몸에 안 좋다며 드리스 씨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신 4개월 무렵이 되자 가나가와 중위는 전혀 집에 오지 않았기에 드리스 씨는 마치다에게 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1945년 7월 17일,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출산했다. 남자 아이였다. 처음 신생아의 얼굴을 봤을 때를 회상하며 드리스 씨는, “슬펐어요.” 이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아들, 에디 씨가 10살이 되었을 때 드리스 씨는 아이가 있는 남성과 결혼했다. 에디 씨는 새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도 예뻐해 준다고 느꼈다. 드리스 씨와 남편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내가 드리스 씨와 인터뷰를 했을 때 이미 드리스 씨의 남편은 돌아가셨고, 드리스 씨는 남편이 데려온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보다 그 아들이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 씨는 가나가와 중위가 혹시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드리스 씨는 굳은 표정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랜 세월 가나가와 중위와 얽힌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지역, 점령지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성폭력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①군이 통솔하여 설치한 위안소, ②소수의 장병과 소부대가 멋대로 만든 ‘강간소’(강간소는 중국에서 사용한 용어로서 이 원고에서는 위다닌시 씨가 처음 끌려갔던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이 해당된다), ③친타와 같이 한 명의 군인(장교)에게 속한 여성의 사례, ④주둔지 근처의 민가로 침입 후 여성을 납치하여 성폭행하는 경우, ⑤군사 작전 때 한 명 또는 여러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 ⑥항일 세력에 대한 보복으로서의 성폭력, ⑦집단 학살 때의 성폭력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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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마코 씨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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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빨간 기와집』이라고 답한다. 『빨간 기와집』은 조선에서 오키나와 도카시키(渡嘉敷)섬의 위안소로 연행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에 남겨진 배봉기 씨의 반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봉기 씨를 처음 찾아간 것은 1977년 12월 5일, 6살 때부터 남동생과 둘이서 살았던 기억에서부터 시작되는 배봉기 씨의 처절한 인생사를 약 6년간 잔뜩 움츠러든 마음으로 취재했다. 그동안 배봉기 씨를 만나러 오키나와에 갈 때마다 다마코 씨도 찾아갔었다. 다마코 씨에게는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같은 일본인이라고 의식해서일까. 아니면 나보다35살 위였지만 다마코 씨의 타고난 성격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일까. 다마코 씨는 언제나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하루는 소매를 휘둘러 팔에 감더니 나한테 “고모쿠메시(五目飯, 생선이나 채소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지은 밥-역자) 만들어 줘”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때 다마코 씨가 소매를 휘두르던 몸짓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다마코 씨가 남자들에게 성을 팔 때 반복했던 몸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마코 씨의 이야기는 필자의 저서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 (1993년, 치쿠마쇼보(筑摩書房), 한국어 번역본 없음)에 수록된 「사이판에서 귀환한 다마코 씨」에 실려 있다. 글 속의 다마코 씨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위안부’가 되었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것처럼 처참한 전시와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낸 여성이다. 1908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다마코 씨 다마코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땡땡이’를 쳤다고 한다. 국어와 수신(修身, 2차 대전 당시 학과목 중의 하나로 지금의 도덕에 해당함 -역자)은 재미있었지만, 산수를 못 해서 학교를 땡땡이치고 산에서 놀곤 했다고 한다. 다마코 씨에게는 여동생과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여윈 다마코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일하던 방적 공장에서 누에고치에 섞여 있는 이물질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다마코 씨는 17~18살 즈음이 되던 무렵에는 군항에 있던 요코스카의 유곽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바라키 현의 항공기지에 있었던 마을, 나가이 가후(永井荷風)의 소설『보쿠토키탄(墨東綺譚)』에 나오는 다마노이 (玉の井), 가메이도(亀戸) 등의 유곽을 전전하다가 마리아나 제도에 속한 티니안 섬으로 건너갔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령이었던 마리아나, 파라오, 카로린, 마셜 등 괌을 제외한 섬들은 일본의 통치령이 되었다. 티니안 섬은 마리아나 제도 중 면적이 약 98㎢의 작은 섬이다. 1930년, 국책회사인 남양흥발(南洋興発, 난요코하쓰)주식회사의 제당 공장이 티니안 섬에 설립되었다. 당시 티니안 섬의 일본인 인구 약 16,000명 중 약 90%가 남양흥발 관계자였다. 1942년에는 남양군도(南洋群島)에 거주하는 일본인 전체 수는 약 72,000명으로 늘어났고 그 중 약 46,000명이 남양흥발의 관계자였으며 오키나와현 출신자가 특히 많았다. 1944년, ‘남양흥발은 마리아나 지구에서 전력 증강과 병참 식료품 확보를 위해 회사의 모든 기능을 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군민협정이 체결되었다. 다마코 씨는 티니안 섬에 도착한 후 오키나와현 출신의 우치마(內間) 씨가 경영하는 유곽인 ‘마쓰시마로(松島楼)’에 고용되었다. 오사카에서 온 노부코(ノブ子)도 다마코 씨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둘이 마쓰시마로에 고용된 사실은 다마코 씨 말에 의하면 『아사히신문』과 『요로즈신문』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전 난요코하쓰 티니안 제당소의 직원인 아베 오키스케(阿部興資) 씨로부터 제공받아 필자의 저서 38, 39쪽에 실린 티니안 지도에는 『난요아사히(南洋朝日)』, 『신코일보사(振興日報社)』, 『라디오신문사』가 게재되었다. 『요로즈신문』은 이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다마코씨가 갔던 다른 섬의 신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 지도에서 마쓰시마로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기루(창기를 두고 영업하는 집), 바, 소바집, 스시집 등의 이름이 적힌 티니안 동쪽 끝 환락가의 다이요(太陽)거리를 따라 늘어선 ‘다마시로(玉城) 온천’ ‘바 구로네코(黒猫)’ 사이에 마쓰시마로가 있다. 이 환락가에는 오키나와 출신이 많았다. 딱 한 곳, 조선 출신의 업자가 운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센카로(鮮花楼)’가 마쓰시마로 근처에 있었다. 마쓰시마로에는 다마코 씨와 노부코가 고용되기 이전부터 일하던 5명의 여성이 있었다. 5명의 여성 중 이미 빚을 청산한 모모코(モモコ)와 도시코(トシコ)는 신입인 두 사람에게 손님들이 몰리는 것을 질투하여 텃세를 부렸다. 17, 18살부터 유곽에서 생활한 다마코 씨는 텃세가 아니꼽다고 느꼈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모모코와 도시코를 피해 식사를 나중에 하려고 했던 어느 날, “같이 못 먹겠으면 계속 먹지 말지 그래?” 이런 말이 다마코 씨에게 날아왔다. “빚이 없다고 잘난 척하지 마. 네가 돈 냈어? 주인이 돈 내고 우리를 고용한 건데 왜 네가 난리야?” 다마코 씨가 응수했다. 노부코는 유곽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연장자들 간의 기 싸움을 보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다마코 씨는 이 일이 있은 후 근처의 과자 가게가 알선업도 겸한다는 말을 듣고 마쓰시마로를 나와 버렸다. 노부코도 다마코 씨에게 의지했었기에 노부코도 함께 데리고 나왔다. 과자 가게에서 다마코 씨와 함께 생활하던 노부코가 자취를 감춘 것은 새로운 업주가 운영하는 기루로 옮기기 전날이었다. “여자가 바다에 빠졌어.” 이런 얘기가 과자 가게에도 들려왔다. 바다에 빠진 노부코는 마침 해변에 있던 뱃사람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다마코 씨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빚은 걱정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도록 해.” 그렇게 격려했다. 하지만 이틀 후, 노부코는 죽고 말았다. 다마코는 과자 가게를 나와 다시 마쓰시마로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쓰시마로에서 기존에 일하던 여성들과 신입이 손님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티니안은 작은 섬이어서 손님 수 자체가 적었던 것이다. 다마코가 티니안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손님들이 ‘본토에서 온 여자’라면서 신기해했지만, 점차 다마코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다. 다마코는 손님이 적은 티니안에서는 빚을 청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트럭섬’(추크 제도, Chuuk Islands)의 ‘미하라시’라는 가게로 둥지를 옮겼다. 티니안에서 트럭섬으로, 다시 라바울의 위안소로 당시 트럭섬에 살던 일본인은 3,665명이고 그중 3,215명이 오키나와 출신이었고 이중 1,989명이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오키나와 현사(県史) 7이민』(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 1974년)수록 「남방 각 지역에 있는 오키나와 현민의 수산 관계 통계」). “트럭섬은 말이야, 군인은 안 와. 가쓰오부시를 만드는 공장 인부, 경찰, 오키나와 사람들이 많았지.” 다마코 씨가 위안소에 가게 된 것은 트럭섬에서 티니안의 마쓰시마로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경찰이 지명했기 때문이다. “이건 위문이라서,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지명을 받아서 가는 거니까. 경찰이 6개월 일하고 오라고 하더라고.” 동업자들은 다마코 씨 일행을 만세삼창으로 배웅했다. 배에는 티니안과 사이판의 각 기루에서 모집된 약 50명의 여성이 타고 있었다. 마쓰시마로에서 지명을 받은 다른 3명의 여성과 업주도 함께 배에 올랐다. 티니안의 마쓰시마로는 여자 지배인이 맡게 되었다. 여성이 적은 기루는 비교적 여성이 많은 기루와 융통하여 여성의 전차금을 청산하고 데려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배에 탄 후 병사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했고 선원도, 선장조차도 “배가 가는 곳으로 가겠지.”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군의 명령으로 행선지를 비밀에 부치고 있던 것이다. “라바울은 정말 끔찍했지. 죽던지, 살던지,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 배에서도 절대 내릴 수 없었어. 탕타탕, 타탕 하니까 짐도 내릴 수 없었어. 총알에 맞을 것 같아서.” 그곳이 라바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공습이 끝난 후 간신히 배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거리에서 커다란 상점을 발견해 피난했을 때였다. 상점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양초를 찾아 불을 밝힌 후 거적을 깔고 모기장과 모포를 끄집어내어 잠자리를 만들었다. 식사는 군에서 지급한 소금으로 만든 주먹밥이 전부였다. 일본군이 라바울을 점령한 것은 1942년 1월이다. 2월에는 이미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가장 많을 때는 육군과 해군을 모두 합쳐 17만 명의 병사가 주둔하였고 육군과 해군의 위안소가 총 40곳이나 있었으며 약 2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장교용 요정도 네 곳이나 있었다. 50명의 여성은 육군, 해군, 장교용 등 몇 군데의 위안소에 배치되었다. 다마코 씨가 배치된 곳은 육군의 위안소였다. “장교만 드나드는 클럽 같은 곳은 상급 여자들만 보냈어. 하지만 그런 곳에 가면 빚은 못 갚아. 돈을 못 버는걸. 장교 수가 적거든. 우리는 평범한 병사들을 상대했었는데 아침 9시경부터 배급을 받는 것처럼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그래서 밥 먹을 시간도 없으니까 주방 직원이 주먹밥을 만들어서 갖다 주고 우린 각자 방에서 먹었어. 배는 고프니까 주먹밥을 3개 4개씩 두고 반찬도 덮밥 안에 잔뜩 넣어 달라고 부탁했지. 병사가 문을 두들기잖아? 뭐 괜찮아. 밥 먹는 와중에도 상관 않고 문을 열었어. 매일 한가할 틈도 없었는 걸, 끝나는 건 5시고 밤이 되면 쉴 수 있긴 했지. 피곤하진 않았어. 100명, 200명 별것 아냐. 응, 진짜라니까. 잔뜩 굶주린 병사들인걸, 금방 끝 나.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데. 하겠다고 맘 먹으면 금방이야. 끝나고 나면 바로 내쫓는데도 말이지, 내쫓으면 바로 그 다음 차례야. 한 사람한테만 붙어있으면 돈이 안 되는걸.” 민간 기루에서는 대금의 배분이 업주가 6할, 여성이 4할로 계산되었지만, 위안소에서는 5할 대 5할씩 배분되었다. 하지만, 막대한 전차금을 떠안고 있는 여성들은 받은 돈을 모두 전차금을 갚는 데 썼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병사들이 따로 쥐여준 팁뿐이었다. 기모노와 화장품, 침구 등을 구입하는 각종 경비도 모두 빚으로 계산되었다. 다마코 씨가 배치된 위안소의 요금은 장교가 2엔 50전, 하사관은 1엔 50전, 일반 병사는 1엔이었다. 이용료에 따라 계산대에서 구입하는 패는 적색, 황색, 흰색으로 나뉘었다. “난 윗사람은 별로 안 좋아해. 변덕스러워서 싫어. 막무가내에 말도 많더라고. 난 일반 병사가 좋아.” 병사들은 휴일만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용 시간도 5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하사관은 하루 간격이었고 장교는 날짜와 시간에 제한이 없었다. 병사들이 쉬는 휴일에는 위안소 앞에 하얀 패를 가진 병사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패를 샀는데 5시가 되어도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 허탕치는 병사들도 있었다. 라바울의 위안소 생활을 마친 다마코 씨는 티니안의 마쓰시마로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괌의 장교용 클럽으로 끌려갔다. 괌에서 장교를 상대한 것은 2개월에 불과했다. 요금이 비싸도 숫자가 적은 장교를 상대해서는 큰돈을 벌 수 없었기에 3번째로 마쓰시마로에 돌아갔다가 사이판으로 건너갔다. 남양군도 중에서도 사이판은 일찌감치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도 많아 1942년에는 거주하는 일본인의 인구수가 44,867명에 달했다. 가장 번화한 가라판 시에는 남곽, 북곽이라고 불리는 유곽이 있었다. 1933년에 작성된 ‘사이판 섬 가라판 시내지도 부록 유명상점 안내’에는 회사, 무역회사, 신문사, 상점 등 136곳이 게재되어 있다. 그 중 15곳이 ‘여관 겸 요리’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그 대부분이 일반적인 여관이 아니고 창기를 두고 있었다. 창기를 두지 않는 여관은 ‘일식여관, 창기 없음, 일반 여관’과 같이 기루가 아님을 명시했다. 사이판에서는 일본군이 주둔하면 유곽 기루에 군 전용이라는 패가 걸리고 해당 기루는 군이 관리했다. 다마코 씨가 일하게 된 메이세이로(明星楼)의 업주인 우치마(內間)는 티니안의 마쓰시마로 업주와 형제였다. 하지만 고용한 여성들이 금방 그만두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부부간 말다툼이 끊이질 않아 우치마는 결국 이혼했다. 우치마는 팔라우에 가서 세 명의 여성을 고용하였고 다마코 씨가 있던 티니안에도 들렀다. 우치마는 빚도 없고 젊지도 않은 다마코 씨를 고용하기를 꺼렸다. 빚이 없는 여성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당한 여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마코 씨와 또 한 명의 여성을 데리고 사이판으로 돌아갔다. 요코하마 출신인 다마코 씨를 제외한 여성들은 모두 오키나와 출신이었다. 메이세이로에서 이전부터 하녀로 일하던 기누코(キヌコ)도 오키나와 출신이었다. 다마코 씨는 민간 기루보다 위안소가 더 낫다고 여겼다. 기루는 현관에 여성들의 기명을 적은 패를 벌이가 높은 순으로 걸었다. 다마코 씨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항상 벌이를 두고 경쟁하고 벌이 순으로 패가 걸리는 것이 싫었다. 위안소에서도 출입구에 명패가 걸려 있었지만, 벌이가 높은 순은 아니었다. 게다가 위안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안고 있던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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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마코 씨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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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공습을 겪다 사이판에 공습이 시작된 것은 1944년 6월 11일이다. 이날, 일본군의 항공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항공모함 15척을 포함한 775척의 미군 함정이 마리아나 제도를 둘러쌌다. 일본군은 13일에 함포 사격을 받았고, 15일부터는 미해병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사이판에는 43,682명의 일본 육·해군이 있었으나, 압도적인 미국의 공격에 패퇴를 거듭했다. 중부 태평양 함대 사령 장관인 나구모 추이치(南雲忠一) 중장을 비롯한 군 참모들은 7월 6일에 자결하였고 이후 조직적인 저항은 종식되었다. 당시 일본군 전사자는 41,244명에 달했다. 1943년 시점에서 사이판의 민간인 거주자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되며 피란민은 극히 일부였다. 1944년의 인구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몰자는 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다마코 씨는 하녀인 기누코, 어린 게이샤와 함께 메이세이루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랐다. 다마코 씨는 망설임 끝에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산속으로 도망쳐 헤맸다. 섬을 쪼갤듯이 작렬하는 포탄 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총탄 소리에 덜덜 떨며 우왕좌왕했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연 수로 안에 있었다. 사이판에는 천연 수로가 무척이나 많았다. 저녁이 되고 공습이 잦아들자 전사자의 시신을 옮기고 있는 일본군들이 나타났다. 수로 앞에서 그 작업을 보고 있는데 낯익은 병사가 다마코 씨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지내는 거야?” “여기 수로 안에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니 병사가 커다란 깡통에 밥과 고기를 넣어서 다마코 씨에게 가져다주었다. “수로에서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했지. 모두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데 아 정말, 돼지와 다를 바 없었어. 배를 채우긴 했지만, 더러워서 울컥했다니까.” 미군이 상륙하고 날이 갈수록 식량도 물도 떨어져 벼랑 끝에 내몰린 민간인들은 집단 자결을 하거나 뛰어내려 자살하고 또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사이판 북단 곶의 절벽에서 민간인이 차례차례 몸을 던지고 있다는 정보는 다마코 씨의 귀에도 들어왔다. “공습이 무서웠지. 미국도 무서웠고. 수로 밖에서는 자꾸 나오라고 하고. 밖에서는 총탄 소리가 ‘탕, 탕’ 들리니까 이제 죽겠구나 싶었어.” 다마코 씨와 다른 민간인들은 모래밭에 말뚝을 박고 천막을 친 임시수용소에 연행되었다. 조금 상황이 진정되자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군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다마코 씨는 세탁장에 가도록 지시를 받았으나, 이틀 만에 못 하겠다면서 제초작업으로 바꿔달라고 노무 담당에게 부탁했다.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세탁장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더니 제초작업반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제초 작업반에 들어가니 미군병사들이 젊은 여성들을 졸졸 따라다녀 용변도 볼 수 없었다. 손 씻는 세면대 앞에는 미군병에 의한 성폭력, 폭행을 방지하기 위한 MP(Ⅿiritary Police, 헌병의 약칭)들이 서 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성들은 서로를 둘러싸 가림막을 만들고 그 안에서 용변을 보았다. 미군병사들의 요청을 받은 작업반장이 여성들을 관리했다. 수용소 안에는 은밀한 루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미군병사들은 여성들이 갖고 싶어 할 만한 물품을 대가로 주었고 영어가 통하는 작업반장은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미군병과 여성들을 알선해 리베이트를 받았다. 공습 전에는 평범한 주부였어도 극심한 전쟁의 화를 입고 가족을 잃자 넋이 나간 상태에서 미군병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캠프의 반장을 맡던 여성이 다마코 씨를 불렀다. 아이를 캠프에서 돌볼 것이라고 했다. 부모를 여읜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다마코 씨는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캠프에서 돌본다고 하니 뭐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반장을 따라나섰다. 유아부터 중학생 정도까지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반장은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되면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판단해 독신자였던 다마코 씨에게 아이들을 떠맡기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다마코 씨는 남자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큰 아이들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여자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한번 둘러본 후에 다시 한번 한 명 한 명 보고 7살짜리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해 묻자 모른다고 했다. 미군으로부터 받아 낸 과자를 들고 돌아오니 아이는 오랜 기간 단 것이라곤 구경도 못했던지 엄청 좋아했다. 다음 날, 군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물이 길어져 있었다. 작은 빈 깡통으로 몇 번이나 길어온 물이었다. 아직 7살인데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토로 돌아가는 배가 오면 아줌마랑 같이 갈래? 너 오키나와 출신이지. 그냥 사이판에 남을래?” 그 아이는 다마코 씨를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취사장은 캠프 내에 묵고 있는 사람들의 인원수와 이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뿔뿔이 헤어진 가족을 찾으러 모두가 취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마코 씨와 지내던 아이의 아버지도 어느 날 취사장으로 아이를 찾으러 왔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작업을 마치고 나면 다마코 씨는 자주 그 아이와 아버지가 있는 캠프로 찾아갔다. “당신, 홀몸이라면 내 도지가 되지 않을래?” '도지'는 오키나와의 방언으로 아내를 의미한다.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아이를 아끼니 나를 배려해 주었던 거겠지.” 본래 다마코 씨는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후 오키나와 출신 남성의 교제 요청을 받아 함께 살 것을 약속하고 오키나와로 향하는 인양선에 올랐다. 남양흥발의 소작농으로 사이판에 와 있던 농부였다. 배는 인누미 수용소에 도착했다. 미사토손(현 오키나와 시) 남서쪽 언덕에 있는 미군 캠프 부지에 1946년 8월부터 1년간 인누미 수용소라고 불리는, 해외 인양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마코 씨는 그곳에 들어갔다. 식사는 미군이 지급해주었으나, 수용시설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오두막집이었다. 이후 다마코 씨는 몇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했다. 오키나와도 전쟁의 화를 크게 입어 집 다운 집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대부분 불탔기 때문이다. 다마코 씨는 사이판에서 함께 돌아온 농부의 고향으로 갔다. ‘오키나와 교쿠사이(沖縄玉砕)[1]’ 소식을 사이판에서 들은 농부는 가족이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내도 아이도 살아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다마코 씨는 좁은 오두막집에서 농부의 아내 그리고 그의 자식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이야, 나는 그 남자랑 매일같이 싸웠어. 매일, 매일. 주변 사람들 보기 창피했지. ‘다마코, 또 싸워?’라고 묻는데, 싸우는 게 아냐. 이 자식이 날 쫓아낸대. 죽여버릴 거니까 꺼지래. 내가 어디로 가? 집도 절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나 보고.” 결국, 다마코 씨는 그 오두막을 나왔다. “오키나와 사람한테 버림받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말이야. 참 가여웠지. 거지같은 차림으로 이곳저곳 걸었는걸. 그래서 또 장사를 하게 되었어. 미국 장사. 아빠(사이판에서 함께 온 농부)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어. 목을 매고 말이야. 제 성질을 못 이겼을 거야. 나랑 헤어지고 나서 엄마(부인)랑 싸웠겠지. 목매달아서 죽었어.” 다마코 씨는 미사토손 노보리 강(登川)에 있는 농가에 방을 빌렸다. 군 작업의 반장을 맡고 있던 통역사가 미군을 다마코 씨 곁으로 데려왔다. 보수는 통역사와 반으로 나눴다. 세들어 살던 농가의 아이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 배웠는지 미군을 데려왔다. 미군은 마을 아이에게 “여자 있어? 잠 잘 여자 있어?”라며 앞장 세운 것이다. 다마코 씨는 당분간 그 농가에 머물다가 그 곳을 떠났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일'을 그 집안 사람들이 꺼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 곳도 없이 미군이나 오키나와 남자들에게 몸을 맡기면서 매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어느 날,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남자를 만났고 물을 떠서 남자에게 마시게 했다 그 남자의 아내는 전쟁으로 사망했고 아이가 한 명 남아 있었다. 편안하게 잠들 수조차 없는 간이 시설이 빼곡한 곳을 전전하는 생활에 지쳐 있던 다마코 씨는 “나 좀 데려가 주지 않을래요?”하고 그 남자에게 부탁했다. 남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자의 8살짜리 딸이 다마코 씨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토에서 온 여자라서 싫다고 면전에다 말하며 사사건건 반항했다. 다마코 씨는 계모라서 아이를 괴롭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아이를 혼내고 싶어도 혼낼 수 없었다. 큰맘먹고 남자에게 이야기하면 남자는 화를 내며 아이를 심하게 꾸짖었다. 아무리 꾸짖는다고 해도 아이가 다마코 씨를 따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애한테 뭐라 하지 마요, 아저씨. 내가 나가면 되니까.” 집을 떠날 각오로 그렇게 말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남자는 함께 술을 자주 마셨던 이시카와(가명) 집으로 다마코 씨를 데려갔다. “본토 여자가 왔는데, 나는 괜찮은데 아이가 싫어해서.”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47년 상반기 즈음부터였다. 나하가 모두 불타버린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인해 이시카와가 운영하던 정육점이 불타 이시카와 부부는 길가에 내몰린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이시카와는 심신질환에 빠진 아내와 헤어져 혼자서 오두막에서 살면서 자그만 밭을 일구며 비칠비칠 불안한 걸음으로 마을에 물건을 팔러 다니고 있었다.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된 후에도 세면기를 들고 마을로 나가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할 때가 있었다. 이시카와가 병으로 쓰러져 수입이 끊기기에 이르렀을 때다. 여전히 불탄 흔적이 남은 마을에 호텔 같은 건 없었고 성병 예방과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는 샅을 씻는 세면기는 필수품이었다. 세면기를 품에 안은 다마코 씨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야유했다. “조선 년, 조선 년, 조선 년은 삼등 국민.” 이시카와와 살았던 지역의 사람들은 다마코 씨를 ‘본토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어른들은 다마코 씨를 '조선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듣게 된 아이들도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다마코 씨의 ‘위안부’ 경험이 알려져 조선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이시카와는 1962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혼자서 살게 된 다마코 씨는 이웃과의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고향인 요코하마로 돌아갈 생각으로 수십 년 만에 본가에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본토의 유곽을 전전했던 전쟁 이전의 생활. 지명되어 유곽에서 위안소로 향했던 전시 중의 삶. 생활이 빈궁하여 세면기를 끌어안고 미군을 상대로 ‘몸장사’를 하러 마을로 나간 적도 있던 전쟁 이후의 삶. 이러한 다마코 씨의 전쟁 이전, 전시 중, 전쟁 이후의 삶을 한 사람의 일본 여성이 걸어온 발자취로서 필자는 청취했다. ‘조선년’이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각주 ^ ‘교쿠사이(玉砕)’는 옥과 같이 아름답게 부서져 내리는 모양으로, 전력으로 싸워 명예와 충절을 지키며 떳떳하게 죽는다는 뜻이다. 1944년 일본군 대본영은 본토 수호의 명목으로 오키나와에 주둔한 제32군에 ‘옥쇄’를 명령했다. 이후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오키나와 도민을 총동원하여 희생시켰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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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할머니들의 첫 ‘미술 선생’을 만나다 - 『못다 핀 꽃』 이경신 화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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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때로 예술로 피어오른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응어리를 그림으로 쏟아낸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다. 미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분노와 슬픔, 고통과 회한은 흰 도화지 위에 선과 색으로써 표출됐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은 이경신 화가의 책 『못다 핀 꽃』(휴머니스트, 2018)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생존자들의 첫 ‘미술 선생’으로, 1993년부터 5년간 진행한 그림 수업의 뒷이야기를 20여 년이 지난 후 세상에 풀어놓았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나온 그는 졸업 후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다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한글 선생님을 구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곳으로 향한다. 강한 이끌림으로 할머니들을 찾았지만 막상 대면하니 말을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웠던 이경신 작가는 결국 가장 자신 있는 도구를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림으로 소통하기. ‘미술 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은 역시 쉽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그림 수업에 할머니들은 힘들어했고, 하얀 스케치북을 마음대로 ‘망치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래도 수업은 계속됐다. 그리고 변화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타났다. 할머니들은 그림을 통해 상처를 마주하고 스스로를 치유했으며 성장해나갔다. “대학시절, 그림을 그리며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할머니들을 만났죠.” 할머니들과의 시간은 20대 시절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던 작가에게 짙은 무늬를 남겼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인간의 존엄과 용기의 아름다움은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못다 핀 꽃』으로 늦게나마 수업의 마침표를 찍은 저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끌리듯, 만남 Q. 할머니들과의 만남 말고도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많았을 텐데 특히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나요? 김학순 할머니 때문이죠. 대학 4학년인 1991년 8월 15일에 국내에서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기사가 신문에 났어요. 김 할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50년 동안 가둬둔 비밀이 있을 줄이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었죠. 하지만 이후 할머니들 이야기는 잊은 채 졸업을 했고, 20대 청춘이 다들 그렇듯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실존적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들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김학순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매우 강하게 끌렸죠. 그 시절 제가 여성으로 살아가며 사회에서 겪은 자잘한 부당함들과 연결되면서 할머니들을 만나 뵙고 싶었어요. Q. 어떤 끌림이 있었군요. 네. 그리고 할머니들이 계신 곳이 저희 학교와 같은 동네였어요. 아마 지역이 달랐으면 조금은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Q. 할머니들과의 미술 수업이 20년 전이에요. 그때 당시를 회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기록을 더 많이 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도 그림 덕분에 수업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어요. 그림 안에는 이야기가 들어있거든요. 그때 오간 대화,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들이 그림을 보고 다 떠올랐어요. Q. 그림의 힘이네요. 네. 사진과 자료를 찾아보면서 좀 더 정교하게 정리를 하긴 했지만, 그림이 없었으면 기억을 못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Q. 수업을 하며 참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 있어요. <빼앗긴 순정>에 대한 이야기예요. 할머니는 (성폭력 피해) 당시 너무 어렸고 생리도 하지 않을 때라 남녀 관계를 아예 몰랐어요. 가족도 할머니와 본인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줄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처음에 성폭력을 당했을 때 ‘내가 죽는구나’ 싶었다고 해요. 성폭행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죠. 할머니는 원래 근로정신대로 공장에 있다 도망치던 중 붙잡혀서 위안소로 끌려갔기 때문에 소속이 불분명했어요. 그러다 보니 위안소 여성들로부터도 소외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철저히 혼자였던 거죠. 피해 이후 충격으로 실어증 상태가 이어졌고, 그게 굳어져 50년 동안 평생 말이 없으셨어요. 저를 처음 만났을 때도 할머니는 어둡고 눈빛이 날카롭고 예민하셨어요. 꼭 필요한 말만 하셨죠. Q.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처음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위로는 엄두도 못 냈죠.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저에겐 너무 힘들고 무겁게 다가왔어요. 상처를 가진 분들의 수업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도 몰랐죠. 그림을 그리면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겠다 싶어 미술 수업을 시작했고, 그게 미술 치료가 된 거예요. 초기에는 미술 치료에 관심도 없었고 할 줄도 몰랐어요. 아마도 할머니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들 때문에 미술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상처를 가진 할머니들에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는데, 우연히 미술잡지에서 미술 치료 기사를 발견했죠. 눈이 번쩍 뜨였어요. 내가 찾고 있던 게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림을 통한 치유, 그리고 감동의 순간 Q. 『못다 핀 꽃』에는 통한의 역사를 겪어낸 당사자들의 구술과 치유 과정이 기록돼 있어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이유죠. 할머니들 그림은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그림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는 저만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게 된 과정을 세상에 알리고 마침표를 찍는 게 미술 수업의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졌고, 여전히 잘못을 덮으려고만 하는 일본정부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나서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미술 수업의 마무리를 결심하며 책을 내게 됐죠. 피해자들이 평생 어떤 고통에 시달렸는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내야 했는지 기록해놓은 이 책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가장 아픈 역사적 증거가 되기를 바라요. Q. 책 작업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어떠한 삶이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 중 하나인 할머니들이 그림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어요.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변화한 과정들을 보며 제가 느꼈던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죠. 할머니들이 자신의 상처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싸워냈던 용기와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되찾으려 했던 노력들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그 아름다운 분투기를 보고 독자분들도 인간의 자생적인 힘을 믿으면 좋겠어요. Q. 20년 전이면 미술 치료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던 때잖아요. 어떤 점이 힘들고 또 보람됐나요. 할머니들의 상처를 그림으로 이끌어야 할 때가 가장 어려웠어요. 미술 치료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너무 어리기도 했고요. 할머니들의 마음이 다칠까봐 쉽게 도전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죠. 미술 치료라고는 했지만 이게 결국 공동 작업이에요. 저는 살짝 던지기만 했거든요. 근데 할머니들이 그걸 받아서 미술 치료 첫 날부터 너무 잘 해주셨어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셨죠. 그걸 보고 정말 기뻤어요. 길을 헤매다가 지름길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Q.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작가님과 할머니들 간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선생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셨어요. 그림에 한해서는 어미 오리와 아기 오리 같은 관계였죠(웃음). Q. 할머니들과의 수업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수업이 있다면요? 결정적인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요. 미술 수업의 기초인 데생 단계를 지나 자신의 마음을 끄집어내는 심상 표현 수업을 할 때였어요. 이용수 할머니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셨죠. <복잡한 세상살이>를 시작으로 의미 있는 그림들이 나왔어요. 소녀가 붉은 악귀에 잡혀 있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을 봤을 때도 충격이었고, 본격적으로 상처를 드러낸 <빼앗긴 순정>을 보여주실 땐 소름이 돋았어요. 그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은 김순덕 할머니가 쏟아낸 <못다 핀 꽃>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대표적인 그림이 됐어요. 그리고 이용녀 할머니의 <끌려가는 조선처녀>까지…. 할머니들이 저에게 그림들을 보여주실 때마다 감동과 보람을 느꼈어요. Q. 할머니들이 그런 그림을 그리실 거라곤 예상하지 못하셨겠죠. 전혀 못 했어요. 운이 좋게도 할머니들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 점점 발전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심상 표현 수업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상처를 표현할 때는 붓을 스케치북에 쿡쿡쿡 찍으셨어요. 가 닿을 수 없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청춘은 무지개로 표현하셨죠. 그다음부터 할머니들은 ‘상처’하면 무조건 붓을 스케치북에 쿡쿡 찍는 거예요. 유행이 된 거죠. 무지개도 그렇고요. Q. 『못다 핀 꽃』에는 할머니들의 그림뿐만 아니라 수업에 참여하던 할머니들의 모습을 재현해낸 작가님의 삽화가 함께 실렸어요. 삽화는 제가 할머니들께 받은 믿음과 사랑을 그림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작업이었어요. 미술 수업을 책으로 엮으면서 할머니들과 저의 우정을 공동 작업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제가 할머니들께 드리는 ‘헌화’라고 할까요?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과 <책임자를 처벌하라>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가 나오는데 두 그림을 합해서 나무들 사이에 소녀와 할머니를 세우고 상처로 고통 받았던 강덕경 할머니의 일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끌려감>에는 수많은 여성들과 군인들을 함께 넣음으로써 이것이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인권 유린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때 그 곳에서>는 김순덕 할머니가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 ‘나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고 그린 첫 번째 그림이에요. 처음으로 당하던 날 줄 서 있던 일본군을 그리셨는데 꼭 어린애 같아 보이거든요. 아이러니죠. 끔찍한 상황을 할머니의 선으로 나타내면 우화처럼 변해요. 그 간극이 문제를 객관화시켜서 보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Q. 할머니들에게는 미술 수업이 낯설었던 만큼 작가님 의도대로 수업을 진행하지 못한 적도 많았을 텐데,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미술 수업이 전시를 위한 것이었다거나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시작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조급함이나 목표가 없었어요. 그래서 즐길 수 있었죠.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들이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이용한 건, 제가 그림 그리는 재주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웃음). 그런데 할머니들이 떠나신 후에도 그림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그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Q. 할머니들과의 수업이 작가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겠죠. 할머니들을 통해 배우게 된 점이 있다면요? 제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들은 주로 누워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셨어요. 농담이긴 하지만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셨는데, 그러던 분들이 그림을 배우면서 당신들도 모르는 사이 달라지셨어요. 서서히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셨던 것 같아요. 창작의 기쁨과 자아실현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생명력을 회복하게 되셨다고 생각해요. 폐암으로 쓰러지셨던 강덕경 할머니가 마지막 병상에서 저에게 남긴 말씀이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어요. “이제 막 재미있게 살려는데… 미술 선생, 내가 2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나이 어린 선생인 저에게 할머니 제자가 생을 마감하며 남긴 가장 큰 선물이에요. 기억해야 할 이름과 이야기들 Q. 『못다 핀 꽃』이 올해 5월 일본에서 출간됐어요. 일본에 처음 할머니들을 모시고 갔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일본에도 참 좋은 분들이 많다는 걸 알았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분들을 만나고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봤어요. 일본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사실, 일본 내에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도 알게 됐죠. 그리고 이 일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일본 독자들이 할머니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요. 전쟁의 폭력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삶이었지만, 다시 한 번 가슴을 뛰게 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요. Q.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14명밖에 남지 않은 현재, 지금의 독자들에게 『못다 핀 꽃』이 어떻게 읽히길 바라나요. 할머니들을 상처 있는 분들로만 생각하거나 ‘위안부’ 문제를 지나간 옛이야기로 여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근데 그러지 말고, 한 개인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분들에게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인생을 걸고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그 순간부터 현재까지 당차게 삶을 살아낸 할머니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해요. 할머니들은 상처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셨어요. 할머니들의 마음에 항상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못다 핀 꽃』 일본어판 출판을 계기로 일본 독자들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만남이 두 나라의 얽힌 매듭을 푸는 단초로 발전해 나가길 바랍니다. 만약 제게도 역할이 주어진다면 기쁘게 동참하려 해요.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이경신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6월 9일 수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로컬스티치 서교2호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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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일제강점기로의 시간 여행, 상상해본 적 있나요? - 『푸른 늑대의 파수꾼』 김은진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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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청소년 문학, 판타지. 김은진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푸른 늑대의 파수꾼』은 이처럼 주목할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위안부’ 문제를 말하면서도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 요소를 이용해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보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주인공 수인을 통해 그 시절 여학생들이 가졌던 열정과 포부를 보여주며 당시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조선의 명가수가 꿈인 소녀,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노랫가락을 맛깔나게 뽑아 앙코르 요청을 끌어내는 소녀, 뒷간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소녀. 그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덧입혀져 왔던 고정관념이 한풀 벗겨지는 순간이다. 제9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출간된 이 책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 수인은 흑백 영화 같은 일제강점기 경성 거리를 거닐고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는, 한마디로 컬러풀하기 그지없는 소녀다. ‘위안부’ 할머니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생기발랄한, 현재의 10대보다 더 10대다운 소녀로 제시한 점은 앞으로 나올 청소년 소설이 어떻게 역사와 그 속의 인간을 살려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일 낮,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로 한층 몰입감을 더했던 그날의 대화를 전한다. Q. 웹진 <결>의 독자분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단편동화 「애꾸눈 칠칠이 아저씨의 초상」으로 등단했고,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출판사 편집자, 무대 연출 회사 PD로 일했어요. 우먼센스, 쎄씨, 여성중앙, 쉬즈, 라벨르 등 여성 잡지 프리랜서 기자와 MBC가이드, 금호건설 등 사보 필자로 글을 썼고 기업 사사(社史) 집필도 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좇기 시작한 때가 2010년이라고요. 처음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안에 물음표가 쌓이고 쌓여서였던 것 같아요. 90년대 중반에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를 본 적이 있어요. 분명 슬프고 감동적인데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남는 거예요. 이게 뭘까 싶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7년에 미국 LA에서 5학년 한인 여학생이 수업 거부를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내용을 들여다보니, 학교에서 역사 보조교재로 사용하는 『요코 이야기』(일본계 미국인 작가의 소설) 때문이었어요. 부모님에게 들었던 역사적 사실과 책 내용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 책에는 일본이 패망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 남성들이 일본 소녀들을 성폭행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거든요.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동아시아 국가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이요. 프랑스에서 여성 교수가 일본 우익재단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는 한겨레 기사도 제게 궁금증을 남겼어요. 전쟁 범죄 사실을 왜곡하는 사사카와재단(笹川財團)이 관련된 학술대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며 50여 명의 교수들이 성명을 냈는데, 일본재단이 당시 여성 박사 한 명을 표적 삼아 거액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건 거예요. 비슷한 맥락의 기사들을 접하며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인식하게 됐어요. 전쟁 피해국의 시민으로서 어떻게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2010년에 취재를 시작했죠. Q. 책은 비교적 밝은 톤을 유지해요. 그러한 성격을 취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초고를 쓸 때 ‘왜 굳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해?’라는 반응이 꽤 있었어요. 일제강점기는 고통스럽고 뒤돌아보기 싫은 시기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는 거죠. 근데 역사를 외면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쓰긴 써야 할 텐데 ‘어떻게’ 써야 할까가 고민이었죠. 그래서 장르를 통해 읽는 재미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Q.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요? 창작 초기에 동화와 청소년 문학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죠. 그 재미와 감동, 예술성을 저도 구현해보고 싶었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소설로 풀어내면서 힘들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을 재구성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피해자분들의 증언집도 여러 권 봤는데 상상이 잘 안 되더라고요. 좀 헤매다 옛날 동아일보 기사를 보게 됐고, 1920년부터 1940년 폐간 전까지의 기사들을 일일이 타이핑하면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당시의 언어, 풍물, 공간들이 조금씩 그려지더라고요. 그 시대의 소녀들에 대한 기사도 꽤 있어서 참고가 많이 됐어요. 수인이가 수예로 상 타는 내용이 책에 나오잖아요. 실제로 그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있던 이야기예요. ‘오엽주 미용실’, ‘시간 기념일’, ‘양조장 탈취 사건’도 기사에서 발견했고요. 그렇게 1년 이상 밤낮으로 기사를 봤어요. 나중엔 그 시대를 살아본 착각이 일 정도였는데, 그런 기분이 들고 나서야 글이 써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책의 배경이 되는 곳들을 혼자서 탐색하기도 했어요. 집필 전부터 여러 지역으로 답사 다니는 걸 좋아했고, 그중에는 경기대 건축과 안창모 교수님이 진행하는 서울 답사 프로그램도 있었어요. 거기서 들은 풍월을 기반 삼아 서울역부터 남대문, 시청, 광화문, 경복궁, 서촌, 인왕산까지 많이도 걸어 다녔네요. [1] Q.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되 문학적 재미를 함께 고려해야 했잖아요.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한 게 있나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자료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라는 범죄의 토대가 되는 그 시기에 동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앎’을 단단한 기반으로 삼은 뒤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가수를 꿈꾸는 당찬 여학생으로 묘사된 주인공 ‘현수인’ 캐릭터는 길원옥 할머니를 모티브 삼아 만드셨다고요. 평양 출신이고 기생학교에 다니셨던 게 모티브가 됐어요. 2010년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전화를 드렸더니 충정로 쉼터에 있는 할머니를 연결해주셨어요. 대화를 나누다 할머니가 ‘가막소에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에피소드가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평양 출신에 이런저런 이유로 경성으로 오게 되는 소녀’라는 큰 설정을 잡을 수 있었죠. 당시 기생학교는 노래 잘하고 흥 많고 진취적인 소녀들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재능 있는 엔터테이너가 되는 거죠.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기생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생겼잖아요.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길게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소설을 통해 기생에 대한 편견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또 증언집을 보면 할머니들 중에 ‘동네에서 노래 한 자락 했다’는 분들이 꽤 계세요. 발랄하고 흥 많고 똑똑한 캐릭터를 통해 피해자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과 요즘 청소년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수인’이 시간 여행을 함으로써 직접 운명을 바꾸는 이야기도 좋았을 텐데, 시간 여행의 주체를 중학생 ‘햇귀’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중요한 건 ‘현재’의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이기 때문이에요. 일본군 강제 위안부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는데, 이게 결국 폭력이잖아요. 그러다 청소년 폭력이 눈에 들어왔죠. 1990년대 중반, 서초구에서 고등학교 남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 아버지를 인터뷰해 기사를 썼고, 너무 마음이 아픈 동시에 제게 어떤 물음표가 남았던 기억이 나요. 시간이 흘러 2011년 대구 중학생 자살 소식을 듣고 생각했어요. 왜 학생들의 자살은 끊이지 않고 청소년 폭력은 더 심해지는 걸까. 혹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든 일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역할을 문학으로써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 땅의 청소년들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책에 녹이고 싶었어요. Q. 덕분에 수인의 미래는 바뀌지만 하루코가 비극을 맞아요. 안타까운 결말입니다. 하루코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를 벗어나 알을 깨고 나간 거예요. 죽음을 택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죠. 자신이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하루코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돌이켜보게 만들고 싶었어요.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무고한 이가 치르게 된 희생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세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룬 문학작품은 그리 많지 않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고통스럽고 또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어떤 경계선을 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학교에 강연을 나갈 때면 학생들에게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문학을 여러분 중 누군가 써주길 바란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곤 해요. Q. 국내에선 ‘청소년 문학’ 하면 ‘학생들이 읽는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현재 청소년 소설의 위상과 역할은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세요? 청소년 소설을 검색해보면 학부모들이 감상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청소년 문학이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는 평도 있고요. 청소년 문학의 재미를 아는 분들이 늘어나면 저변이 확대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단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림책, 동화책 하면 어린이만 보는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글을 안다면 모든 연령이 읽을 수 있잖아요.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에 붙어 있는 연령도 독서 시작 연령을 말하는 것이지, 끝 연령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Q. 일본군‘위안부’ 하면 국가적으로 얽힌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길 바라시는지요. 국제사회에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감정싸움인 것처럼 비춰질 때가 많은데, 이건 명백히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행한 범죄에 관한 이야기예요. 처벌받지 않은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건 국제사회 시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을 항상 기억하면 좋겠어요. Q. 현재 진행 또는 계획 중인 작업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려요.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어요. 또 하나는 장르물인데, 단편으로 썼던 걸 장편으로 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자료조사를 하며 쓰다 보니 시간이 걸리고 있는데, 이른 시일 내에 소식 전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김은진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6월 17일 목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403-13 카페 콜린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각주 ^ 본문 중 ‘일본군 강제 위안부’라고 표기된 부분은, 일본군‘위안부’를 지창하는 작가 개인의 고유한 표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