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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독일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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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독일 함부르크, 도로테 죌레 하우스 함부르크에서 시작한 게릴라 소녀상 전시 본 시의 '여성박물관'에 세우기로 한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 국외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미국 글렌데일시의 소녀상에 이어 미국의 두 번째 소녀상 건립을 위해 '위안부'행동이 한국 국외에서 최초로 미국 글렌데일시에 소녀상을 건립한 후 두 번째 소녀상 건립을 위해 수입한 것을 다시 독일로 보내온 것이었다. 하지만 소녀상이 미국에서 독일로 향하던 중 '여성박물관' 소녀상 건립이 무산되어 '평화의 소녀상'은 본으로 가지 못하고 잠시 함부르크에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이를 활용해 함부르크에서 소녀상의 게릴라 전시를 진행했다. 첫 게릴라 전시는 2018년 8월 14일부터 9월 30일까지 함부르크 '도로테 죌레 하우스'에서 열렸다. 6주간의 전시 동안 함부르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두 번이나 전시 중단을 요구했지만, 이레네 팝스트 전시 책임자는 소신에 따라 전시를 중단하지 않았다. 함부르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피해가 염려된다며 전시 중단을 요청하였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 한 달 반 동안 독일 개신교 북독일 노회 회관인 '도로테 죌레 하우스'에 오가는 직원과 방문객들이 게릴라 전시 중인 소녀상을 만났다. 관람객들은 그냥 보기에는 아시아의 귀여운 어린 여성처럼 보이는 소녀상의 배경을 알고 난 후 충격을 받았고, '강제매춘'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소녀상 옆의 의자에 앉기가 두렵다고 했다. 어떤 관람자는 유년 시절 겪은 성추행에 대한 기억을 평생 품고 사는 여성들이 연상된다고 했다. 독일에서도 미성년자 추행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이다. 일본 공관 측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 전시회, 심포지엄은 개최할 수 있어도 '평화의 소녀상' 건립만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예술은 역사 공간과 관람자 개인의 경험이 만나는 자리다. 이런 교육 효과 때문에 소녀상의 건립과 전시를 그렇게 막는 걸까? 독일 함부르크 전시로 시작한 게릴라 전시는 한 장소에 소녀상을 영구히 건립한 것 못지않은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독일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진 지 30년이 되었고 2007년에 유럽연합에서 결의문이 통과되었지만, 좀 더 널리 알려지기 위해선 이런 방법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상만사 새옹지마의 경험이 이렇게 쌓이기 시작하였다. 2019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 '하우스 암 돔'의 평화 함부르크에서 이어질 뻔한 2차 전시가 무산된 듯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프랑크푸르트로 가져올 계획을 세웠다. 2019년 2월에는 프랑크푸르트 본회퍼 교회 목사를 만나 50주년 기념 예배를 기해 6개월 정도 전시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교회를 함께 쓰는 한인교회 어른들 덕분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라인마인한인교회 이한나씨가 라인마인한인교회도 9월에 50주년을 맞이한다며 전시 의사를 밝혀 3월 22일 자 교회 운영위원회에 기획서를 제출하였다. 이로 인해 6개월 허가가 났다는 본회퍼 교회 전시 일정은 3개월만 하기로 합의를 보고 라인마인한인교회 운영위원회 결정을 기다렸다. 그런데 5월이 되자 이 두 교회 모두에서 전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본회퍼 교회의 경우 교회를 소개해 준 파트너 한인교회 목사님이 일부 교인들의 반대로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되어 취소가 되었고, 라인마인한인교회 관계자는 풍경세계문화협회는 완전히 뒤로 빠지고 소녀상만 제공하라는 요구가 있어 운영위원회에서 협의했으나,결론적으로 전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라인마인한인교회에서는 시간이 흐른 뒤인 2020년 3월 8일, 정의기억연대가 보낸 소녀상을 교회 정원에 영구 건립했다. 이 당시는 아직 일본의 방해 가능성이 긴장감을 자아내던 시절인지라 3개월씩 전시를 나누어서 하려던 임시전시가 모두 무산되었지만 교회 전시에서 일본의 방해가 있으면 지원해 주시기로 한 분이라든가, 한인교회 전시 다음에 전시를 추진하기로 한 곳에서 직접 전시 주체가 되어갔다. 우선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의 설립자이자 관장인 요하임 발렌틴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거기 '하우스 암 돔' 로비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할 수 있을까요?" 발렌틴 관장으로부터 바로 답장이 왔다. "기간은 언제?" 혹시나 하고 드린 메일에 이렇게 신속하게 회신이 올 줄은 몰랐던 터라 숨이 멎는 듯 반가웠다. '하우스 암 돔'은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들리는 바르톨로메오 대성당 바로 맞은 편에 있다. 교구 관계자들을 포함하여 5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코로나19 로 휴관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매일 수백 명이 오가는 장소였다. 프랑크푸르트의 문화 1번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는 다문화 소통 문제, 독일 과거사 문제, 이민자 문화를 주제로 토론, 워크숍, 낭송회와 같은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곳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대림절 기간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소녀상만사 새옹지마였다. 2_프랑크푸르트 첫 전시 오프닝 개회사를 하는 요아힘 발렌틴 관장.jpg 2019년 10월 28일, 전시가 시작되었다. '평화의 소녀상'이 대림절 기간과 성탄절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게다가 '하우스 암 돔'은 독일인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는 구 시가(Altstadt)에 붙어 있었다. 오프닝 행사에서 요아힘 발렌틴 관장은 인류 역사 이래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약한 이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피해받은 점을 환기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피해 입은 이들에 대해 "전시를 통해 연대를 선언"한다고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 극우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키 데자키 감독의 영화 <주전장>(2019) 반대 캠페인 후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 전시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나데시코 액션'이란 곳에서 전시를 공격한다는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2017)을 제작한 박수남 감독의 딸인 박마의 선생이 알려 주어서 알게 되었다. <침묵>도 일본에서 상영할 때 격렬한 반대 시위의 대상이 되는 영화였다. 이런 구조를 몰랐다면 더 불안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하우스 암 돔'에서의 소녀상 전시는 절대 막아야 한다는 소녀상 반대자들의 게시글들이 '나데시코 액션' 웹사이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눔의 집'을 방문한 슈뢰더 전 총리와 2016년 프라이부르크 시장에게 보낸 편지, '하우스 암 돔' 관장에게 보낸 편지 내용도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었다. 이 같은 공격에도 '하우스 암 돔' 측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우스 암 돔'에서의 소녀상 전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2019년 2월 19일부터는 괴테대학교에서의 전시도 연이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런 방해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느라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응원과 연대를 담은 편지들도 있었다. 일본의 국제미술제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 예술전에서 '표현의 부자유전'이 금지되었을 때 재개촉구 운동을 한 나고야 시민단체에서 우리의 활동에 연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3_2019년 8월에서 10월까지 진행된 나고야의 뜨거운 여름은 오마이뉴스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다.jpeg 후일담에 따르면, '하우스 암 돔'이 겪은 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던 것 같다. '하우스 암 돔'은 라칭거 교황(편집자 주: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를 상영할 때에도 상당한 공격을 받았지만 '평화의 소녀상' 전시로 인한 반발은 지금까지 '하우스 암 돔'이 겪은 공격 중 가장 심한 경우였다고 한다. "오, 그 소녀상 반대 사이트('나데시코 액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까 '하우스 암 돔'이 얼마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중요한 곳인지 광고가 많이 됐던데요? 일본에서도 유명해졌어요." 내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유명해졌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관장의 소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아힘 발렌틴 관장도 웃으며 "당케"(편집자 주: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독일어)라고 말했다. 발렌틴 관장은 이후 괴테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전시 오프닝을 진행할 때도 연대 발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결국 연대의 문제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프랑크푸르트 '평화의 소녀상'의 첫 '숙소 주인'이라고 표현한 발렌틴 관장은 괴테대학교 전시 오프닝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제 맘에 와 닿았습니다.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여기에 와서 (소녀상의 소녀 옆에) 앉아 볼 수 있습니다. 의자에 앉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공감해보고 또 동일시해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여기 있는 비문을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발렌틴 관장의 소신 있으면서도 조용한 대응은 '평화의 소녀상'이 프랑크푸르트에 잘 도착했다는 믿음을 주었다. 2020년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 괴테대학교에서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소녀상 전시가 진행 중인 괴테대학교는 과거 '이게파르벤(IG Faren)'이라는 화학회사의 본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착취한 회사로 나치 독일의 1호 정경유착 사례이다. 괴테대학교가 이곳으로 캠퍼스를 이동한다고 할 때 특히 사회학과 학생들이 대거 반발했다. 수치스러운 장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오늘날 이 새로운 캠퍼스 곳곳에는 나치 독일 당시 이게파르벤 회사의 나치 부역에 관한 기록과 역사 성찰에 관한 동판, 희생자의 초상, 희생자들의 이력이 시청각으로 설치된 추모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소녀상 전시가 진행 중인 사회학관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화두를 제시한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기리는 아도르노 플라츠라는 기념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사회학관 내 도서관 맞은편 큰 벽에는 '평화의 소녀상' 외에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에서 제작한 위안소 분포 지도와 필리핀 레이테 지역 피해자 르메디오스 펠리아스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일기 등을 전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천천히 가는 세상인지라 전시 일정도 2021년 1월 26일까지로 연장되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일반인들에게는 전시가 개방되지 않지만, 괴테대학교 베스트앤드 캠퍼스를 산책하면서 PEG(심리학, 교육학, 사회학) 건물 정면 유리를 통해 소녀상을 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거주자라면 대학 도서관 열람증을 발급받아 해당 전시물들을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다. 괴테대학교 총학생회장 키라 베닝아는 전시 오프닝 개회사에서 2차 세계대전 75주년을 맞아 동맹국 일본의 전범행위도 비판철학에 바탕하여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괴테대학교 총학생회는 학내에서 나치 부역자 이름이 붙은 공간의 이름을 바꾸거나 아우슈비츠 의사 요제프 멩겔레[1]의 박사학위를 취소하는 등 역사 성찰 활동에 활발하게 기여하고 있다. 4_아도르노 기림관.jpeg 5_괴테대학교 전시 오프닝 장면.jpeg 6_괴테대학교 사회학관 내 소녀상 외 전시물들.jpeg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국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독일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소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동맹국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일본 전쟁 범죄 문제를 생산성 있게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프리츠 바우어 연구소[2] 부소장인 토비아스 프라이 뮐러 박사는 괴테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전시 오프닝 연대 연설에서 80년대에 있었던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소개했다. '타자의 범죄'를 논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에 관한 논쟁이었는데, 이는 "비교는 동일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또, 프라이뮐러 박사는 '평화의 소녀상'처럼 예술 작품을 매개로 역사를 알리는 활동의 효과도 언급하였다. 나치교육학연구소의 공동창립자인 벤야민 오트마이어 교수는 유럽의 안경을 벗고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볼 것을 촉구하며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사람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기미가요' 제창 거부 등 국가주의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불이익을 당하는 교사들을 언급하며 국제연대의 의미를 제시했다. 침략자로서의 근현대사를 지닌 독일의 지성이 소신을 갖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글에 소개된 활동은 소녀상 건립을 방해하는 일본 공관의 무례함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부침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둘러싼 활동은 소신 있는 학자들의 연대로까지 발전했다. 소녀상만사 새옹지마라 하겠다. 각주 ^ 나치 친위대(SS) 장교이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의사. ^ 연구소 이름 프리츠 바우어는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 나치전범 재판을 이끌어낸 프랑크푸르트 검사장 이름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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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1부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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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시리즈는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2권까지 포함하여 총 7권이 발간되었다. 이외에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저, 김정성 옮김, 아름다운 사람들, 2005)와 같이 한 사람의 생애사를 중심으로 출간된 증언집도 있지만,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중에서도 제1권이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한국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다. 이 중에서 2019년 기준, 증언집에 실라자 않았더라도 공개 증언이 확인되는 피해자는 총 183명이다[1]. 183명의 증언 중에 1993년 2월 초판이 발간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19명의 증언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김학순을 필두로 김순덕, 황금주, 이용수, 문옥주, 강덕경 등의 증언이 실려있는데, 이 이름들은 이제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책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더 많았고, 책에는 이름이 가명으로 실려있던 피해자가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앞장선 경우도 있다. 꽤 오래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증언 내용에 집중하느라 본문과 함께 실린 피해자들의 옆모습 사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새삼스레 옆모습 사진이 주는 쓸쓸함이 가슴에 사무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된 1990년대 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집중된 한국 사회의 관심사는 진상규명이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의 "생생한 체험담은 …(중략)…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밝힘으로써 새로운 문서자료의 발굴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책 해설내용처럼, 당시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이들의 생애사로 접근하기 보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집>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증언집의 단점을 보완하여 피해자 각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편집된 것이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 일본군'위안부'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여성과인권, 2004)이다. 단점이 있음에도 굳이, 지금 증언집 1권을 추천하는 이유는 조국이 해방된 지 50여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한 김학순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서 90년대의 우리 사회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했는지, 또 피해자들이 절박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보았으면 해서이다. 각자 원점에서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30여 년의 세월이 피해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2. 일본군 군대위안부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이규태 옮김, 도서출판 소화, 1998.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일본군 군대위안부』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이규태 옮김, 도서출판 소화, 1998)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우리 사회에 수많은 긍정적 파장을 일으켰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김학순이 1991년 12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고 일본에 오기 직전 NHK와 진행한 인터뷰를 듣고 감동하여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요시미 요시아키는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징모에 직접 관여한 사실을 보여주는 공문서를 발굴한 연구자이다. 요시미 요시아키가 발굴한 자료 6점은 아사히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보도 다음 날인 1992년 1월 12일, 일본 정부(총리 미야자와 키이치(宮澤喜一))는 군이 "관여"했음을 공식 인정하는 가토담화를 발표했다. 1995년 4월에 초판이 발간된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 앞서 1992년에 『종군위안부 자료집(従軍慰安婦資料集)』이 먼저 발간되었다. 자료집에는 해제에 갈음하여 「종군위안부와 일본국가」라는 글이 들어 있다. 내용은 총 10장 구성으로 1장 군위안소의 개설, 2장 종군'위안부'의 징집과 도항, 3장 육군 중앙의 군기 유지‧성병 대책, 4장 중국의 '위안부'‧위안소, 5장 필리핀의 '위안부'‧위안소, 6장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위안부'‧위안소, 7장 인도네시아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8장 버마(현 미얀마)의 '위안부'‧위안소, 9장 남서태평양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10장 일본의 '위안부'‧위안소로 되어 있다. 글은 자료의 구성에 맞추어 이에 대한 해설을 겸하고 있다. 다만 『종군위안부 자료집』의 글이 일반 대중이 읽기에 쉽지 않은 전문서라면, 『종군위안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책 중 처음으로 출간된 대중서라고 할 수 있다. 『종군위안부 자료집』과 『종군위안부』의 집필 사이에는 3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종군위안부』에는 자료집에서 다루지 못한 그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책이지만 1995년 8월에 출간된 『공동연구 일본군위안부(共同研究 日本軍慰安婦)』(오오쓰키 서점(大月書店))는 요시미를 비롯한 7명의 저자가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 '위안부 부회'에서 1년 정도 세미나를 한 결과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이때의 연구 결과가 『종군위안부』에 반영되어 있다. 『종군위안부』는 한국에서는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 이규태 번역)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출판되었다. 일본군 위안소‧'위안부' 문제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지는 입문 단계에서 읽으면 좋은 기초 서적이다. 3. 일본군 성노예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 정진성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추천 편집위원 : 김소라(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일본군 성노예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 (정진성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알려진 시기는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 착취된 지 50여 년이나 흐른 뒤인 1980년대 후반이었다. 여성운동의 성장으로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귀와,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생겨난 가운데 많은 피해자, 활동가, 연구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말해왔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고, 활동가들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이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며, 연구자들이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발굴‧해석하며 일본 정부에 대응하고자 노력했기에 우리 사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운동의 역사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04년 출간 후 12년만인 2016년 개정판으로 출판된 『일본군 성노예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은 이 같은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좋은 입문서다. 이 책은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동원한 과정과 사회 구조적 배경, 피해자 증언, '위안부'를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들의 의미 등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내외 시민사회가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소개한다. 특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UN 인권소위원회 위원과 UN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위안부' 문제의 연구와 해결에 참여해온 저자의 경험 속에서 1980년대부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르는 '위안부' 운동이 폭넓게 다루어진다. 한국에서 시작되어 북한, 재외 동포, 일본, 아시아 피해국의 시민과 사회단체가 함께하며 형성된 국제연대, 이 과정에서 여성 인권과 평화구축의 문제로 확장된 의제는 '위안부' 운동의 역사가 단순하지 않으며, 사회운동이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실상을 파악하는 것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갖는 의미를 질문하고, '위안부' 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4. 성노예와 병사만들기 안연선 지음, 삼인, 2003. 추천 편집위원 : 김선미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교육홍보팀장) 『성노예와 병사만들기』 (안연선 지음, 삼인, 2003) 『성노예와 병사만들기』는 중일전쟁기부터 태평양전쟁 기간까지의 위안소 제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여성학자인 저자 안연선은 이 책을 통해 위안소 제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만난 13명의 '위안부'피해자와 일반 사병, 장교, 군의관 등 옛 일본군 출신 생존자들의 구술을 통해 국가 차원, 젠더와 섹슈얼리티 차원에서 나타난 식민주의 권력의 맥락에서 '위안부' 제도를 명료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식민주의와 가부장제라는 특정한 맥락 아래에서 가해 남성인 일본군 병사와 피해 여성인 '위안부'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강요되었는지, 일본의 식민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가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재생산하였는지, 식민지 국가권력과 전쟁 폭력에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위안부' 제도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재)생산하는데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사유한다면 '위안부' 문제와 위안소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위의 책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이 연기됨에 따라 현재는 자료센터를 이용하실 수 없으며, 향후 자료센터를 개관하는대로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이브814 바로가기 각주 ^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2019년 6월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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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2부 - 웹진 〈결〉 편집위원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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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윤명숙 지음, 최정원 옮김, 이학사, 2015. 추천 편집위원 : 류광옥(법무법인 가로수 변호사) 2015년 출간된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위안소 제도를 입안한 일본군의 매뉴얼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위안소를 운영하고 감독한 기록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입안하게 된 이유,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거나 운영에 관여한 실태, 그리고 위안소로 '위안부'를 이송하는데 관여한 사항 등을 집요하게 실증해낸다. 이 책의 진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 2부에서는 일본군이 입안하고 운영한 위안소에 동원된 조선인 군'위안부'에 관해 다루고 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조선인 군'위안부'를 만든 식민지 시기 조선의 경제‧사회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은 전쟁 책임이다. 그러나 이 위안소에 조선인 군'위안부'가 징집된 이유는 조선이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 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식민지 책임이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구별은 명확하다. 그러나 식민지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까다로워진다. 하지만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시기 조선의 상황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욱 선명하게 그리고 무겁게 실감하게 되었다. 조선인'위안부' 희생자를 만든 것은 전쟁이라는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무거운 돌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여사의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피해자의 증언이 주는 충격은 대단하다. 피해자의 증언은 우리의 감정을 쉽게 움직인다. 그러나 피해자의 증언이 말에 그치지 않고 피해의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이 지나칠 정도로 견지하고 있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는 증언이 감정으로 휘발되지 않고 피해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증언에 무거운 추를 달아주고 있다. 6. 빨간 기와집 가와타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 추천 편집위원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이 책은 일본의 논픽션 작가 가와타 후미코가 오키나와에서 살고 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을 다년간 취재하고 그녀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다. 그 피해 여성은 바로 1975년에 최초로 일본군'위안부'임을 증언한 배봉기이다. 배봉기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막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된 오키나와 전투에 '위안부'로 동원되어 도카시키 섬에서 일본군의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다. 이 책의 제목인 '빨간 기와집'은 주민들과의 소통이 통제된 섬마을 어귀의 '위안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봉기가 머물던 빨간 기와집은 미군의 집중공격에 노출되어 6명의 동료 중 3명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고 2명은 가까스로 탈출한다. 남겨진 봉기와 또 한 명의 조선인 여성은 전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키나와를 방랑한다. 이 책은 식민지 시대에 충남 신례원에서 머슴의 자식이라는 박복한 운명을 타고난 봉기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국에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오키나와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 그녀와 함께 오키나와의 섬으로 끌려왔던 여자들이 그 후의 운명을 찾아가는 이야기, 한국행을 거부하는 봉기를 대신해서 한국을 찾은 가와타 후미코가 봉기의 언니 봉선을 만나는 이야기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가와타를 통해 각자의 소식을 전해 들은 봉기와 봉선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차라리 (소식을) 안 듣는 게 나았다고 하는 장면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들의 이산과 방랑은 고국이 짊어진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의 무참함을 빈곤 계급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 '위안부'가 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던 여자들의 숙명이었을 것이라고 가와타는 말한다. 7.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후지메 유키 지음, 김경자, 윤경원 옮김, 삼인, 2004. 추천 편집위원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이 책은 근대국가 일본이 민족과 계급을 교직(交織)하여 성과 생식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근대국가의 (여)성관리 양상을 비교사 속에 두고 논하고 있어, 공창제나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일본 사회의 특수성 안에 가두지 않는 현명함도 잃지 않고 있다. 근대 이후 성의 역사를 국가(민족), 젠더, 계급을 교차시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8.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니시노 루미코, 오노자와 아카네 지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논형, 2021. 추천 편집위원 : 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매춘부였으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전(前) 일본인'위안부'는 정조 이데올로기의 낙인이 찍힌 채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일본인'위안부'도 피해자임이 인정되었지만, 그 후 수차례 제출된 「전시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에는 피해 보상의 대상에서 일본인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라는 틀에서 아시아의 피해에 관심을 두는 역사 인식의 획기적인 전환의 이면에, 일본인'위안부' 문제는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배제되어 왔다는 문제가 버티고 있다. 애초에 전전(戰前)의 일본 사회에서 창기, 예기, 작부 등은 인신매매로 팔려와 대부분 폐업의 자유도 없이 매춘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었다. 인신매매는 당시의 국제조약이나 일본 형법에서도 금지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내버려 뒀을 뿐 아니라, 전시 '위안부' 모집에 이러한 관습을 이용한 것이다. 공창제에 대의명분을 제공했던 정조 이데올로기에서 전제된 여성차별과 계급차별은 강간 방지를 위해서 '위안소'가 필요했다는 주장과 같은 정당화 구조를 가진다. 거기에 민족차별까지 얽혀 여성들 사이의 분리를 조장한다. 이제 여성들의 피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 계급차별과 민족차별을 가능하게 했던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면서 각각의 차별을 견인하고 강화하는지를 보아야 할 때다. 이는 식민지적 차이를 지우려는 시도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본인'위안부' 모집과정을 공창제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당시 '위안부' 징집으로 일본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 자기 집이 위안소로 사용된 이들과 '위안부' 모집업자를 인터뷰한 내용, 일본인'위안부'의 전후의 삶, 그리고 일본군 위안소와 전후 점령군을 대상으로 한 위안 시설의 연속성을 선명하게 밝혀낸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가 무엇인지, 지금-여기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의 관련 속에서 다시금 정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9.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 김귀옥 지음, 선인, 2019. 추천 편집위원 : 여순주(한국정신대연구소 전 연구원) 이 책의 저자인 김귀옥 교수는 지난 2002년 공식 발표한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2019년 단행본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로 펴냈다. 1996년 처음 속초에서 월남인 김씨를 인터뷰하다 한국군 위안대 문제를 알게 된 때로부터 23년 만이다. 저자는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군'위안부'와 미군'위안부'의 궤적과 함께 연결해서 쓰고 있다. 한국 언론 속의 군'위안부'의 의미를 고찰해서 '위안부'는 외국군을 포함한 군인을 상대하는 여성으로 사용해온 것으로 정리했다(103쪽). 저자의 발표 후 한국군'위안부' 문제의 문서증거인 한국 육군이 펴낸 『후방전사』는 국회도서관에서 이용 불가로 분류되어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학계 반응도 사실은 인정하지만 뭔가 불편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119쪽). 진보학계의 거목인 리영희 교수조차 1988년에 낸 회고록에서 관련 사실을 기록했지만, 저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회고록 이상의 이야기가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 실망감이 얼마나 컸을까? 저자는 한국군'위안부'를 만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엇갈림의 연속이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한국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주로 인민군 부역자와 포로, 북한 출신들로 보인다. 또 김희오 회고록에 의하면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왔다. 북파공작원 최 씨는 1951년 5월경 원산에서 여성 4명을 끌고 왔다. 그중 한 명은 미 전투기의 공습으로 죽고, 남은 3명이 '위안부'로 넘겨졌다. 3명 중 한 명인 문 씨는 이아무 하사관에게 겁탈당한 후 아이를 낳고 살았다고 한다. 양도에서도 성진 부근의 여성 2명을 납치해와서 성노리개로 만들었다(123~124쪽). 저자는 문 씨와 전화통화를 몇 번 하면서 '위안부'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나 문씨는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언짢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저자는 2004년경 소문으로 한국전쟁 때부터 '위안부'였고 50~60년대 기지촌 생활도 했던 할머니를 만났지만 "고통에 찬 얼굴을 본 순간 어떤 사람에게 신뢰도 없는 상태에서 고통에 찬 인생담을 듣고 싶다고 말하는 게 너무 염치가 없어서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57쪽)."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 제도는 전시 정부인 육군본부에 의해 기획 및 설치되고 관리·운영되어 초법적으로 존재했다"(145쪽). 군이 직영한 군인 전용 '위안소'였다(144쪽). 한국군 위안소는 군이 직영한 형태였으므로 한국군의 책임은 일본군보다 더 무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 운영에는 많은 군인이 관련되어 있다. 이 제도를 기획하고 만든 장석윤 휼병감, 북파공작원 등 피해 여성들의 동원에 관여한 군인들, 『후방전사』를 작성한 군인, 여기에 실린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를 위해 기초 자료를 만든 군인들은 물론이고 주 2회 성병 검사를 수행한 군의관들도 있었다. 제일 다수를 점하는 것은 통계표에 1952년 한 해에만 20만 4천 회가 넘는 것으로 기록된 피위안자들, 즉 한국 군인들이다. 식민주의, 전쟁,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후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0. 기억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휴머니스트, 2019. 추천 편집위원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공식적 기록과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에 대해 기억은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재현이라는 비공식적 지위를 부여받아 왔다. 증언의 시대가 열린 지 30년이 지난 현재도 우리는 '부정의 실증주의'라 할 수 있는 부정론의 국제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산다. 이 현실에 대해 저자는 기억과 증언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그 현실적 함의와 비판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폴란드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임지현은 그동안 유럽의 지성사를 경유하고 한국의 민족주의나 파시즘을 둘러싼 내적 성찰의 지평을 열어왔다. 자신을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로 정체화하는 그의 관심은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출발하여 아시아에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분단국가 한국의 민주화운동, 나아가 20세기에 전 세계가 겪었던 국가폭력과 제노사이드로까지 확장된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다루는 고통의 폭은 근대 문명이 인간에 가한 폭력이 얼마나 전 지구적으로 얽혀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기억의 회색지대를 묻는 아슬아슬하고도 첨예한 문제의식은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인 기억과 증언을 둘러싼 혼란을 생각하는 데도 매우 시사적이다. 특정 역사적 사건에 관한 관심만이 아니라 이 책은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와 공범자, 경계와 기억, 양심과 죄책감 등의 중첩되는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역사와 기억을 마주하는 윤리의 차원을 환기시킨다. * 위의 책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이 연기됨에 따라 현재는 자료센터를 이용하실 수 없으며, 향후 자료센터를 개관하는대로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이브814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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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배봉기 이야기 -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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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타 후미코는 2014년 한국어로 번역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에서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배봉기 씨의 증언을 생생하게,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낸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배봉기 씨뿐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과 일본군 장병들의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오키나와 게라마 군도의 미군 비행기 공습이 있었던 당시 배봉기 씨와 '위안부'들이 겪었던 상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내가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장가 중 마비키(間引き, 원래 뜻은 '솎아내기'로 이 글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생활고 때문에 죽이던 에도시대의 영아 살해 풍습을 뜻한다)를 노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마비키 자장가는 예를 들자면 이런 노래다. 만약 이 아이가 계집아이라면 거적에 싸고 줄로 묶어 눈앞 작은 시내에 휙 풍덩풍덩 밑에서는 물고기가 쪼아먹고 위에서는 새가 쪼아먹고 이 자장가에서 마비키의 대상은 여아다. 이런 가사의 자장가도 있다. 계집아이면 잉께버려라 사내아이면 거둬들여라 여기서 '잉께버려라'란 '뭉개라'는 뜻의 사투리로 살해를 의미한다. 근대 초기에는 일본 인구의 80%가 농민이었다. 농민의 대다수는 소작농이었고, 이들은 수확한 작물의 34%를 토지세(地租)로 납부하고 지주에게도 34%의 소작료를 내야 했다. 당시엔 농업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확물의 양이 적었다. 소작농들은 가뜩이나 적은 양의 작물밖에 수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수확한 작물들의 대부분을 토지세와 소작료로 지불하고 빈궁 속에 허덕이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생활고로 인해 갓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끊는 풍습이 생겼고, 영아 살해 풍습을 노래한 자장가도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은 가까스로 살해를 면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집의 애보개로 보내졌다. 조금 더 성장하면 공장에서 일하거나 주인집에 기거하는 가정부로 일해야 했으며, 심지어 부모가 전차금을 받고 게이샤로 보내거나 유곽에 들여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마비키 자장가와 딸을 파는 에도 시대의 풍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1977년 가을, 친구가 아래와 같은 부제가 붙은 신문 기사를 보여주었다. 전쟁 중, 오키나와에 동원된 한국 여성 30년 만에 '자유'를 손에 불행한 과거를 고려해 - 법무성, 특별 재류를 허가(교도통신 발신, 1975년 10월 22일 자) 이 기사에서 말하는 '불행한 과거'란 위안소로 동원된 것을 의미했다. 이 기사에는 여성의 뒷모습 사진도 함께 실렸다. 나는 기사를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국가가 여성의 인생을 엄청나게 훼손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진 속 여성은 그 당사자이고……. 위 기사의 당사자인 배봉기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12월이었다. 내가 배봉기 씨의 반생애와, 배봉기 씨와 함께 오키나와 게라마 군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의 발자취를 좇은 책 『빨간 기와집』을 출판한 것은 1987년 2월이다. 배봉기 씨를 처음 만나고 약 10년 후에 세상에 나온 책인데 배봉기 씨의 반생애를 고스란히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들여도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중간발표를 한다는 심정으로 발간했다. 아직도 중간발표 상태 그대로이지만, 누군가 내게 대표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도 이 책을 꼽는다. 배봉기 씨를 비롯한 조선인 여성이 각각 7명씩 배치된 위안소가 있던 오키나와의 도카시키(渡嘉敷), 자마미(座間味), 아카·게루마(阿嘉・慶留間)섬은 오키나와 전투의 참담함을 상징하는 미군 비행기 공습이 발생한 섬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6월 23일 우시지마 사령관과 조 이사무 참모장이 자결하였고 오키나와 수비군 제32군의 전투태세가 해제되었다. 이후 미국 군정의 통치 아래에서 타 지자체들과는 다른 역사를 걸은 오키나와에서는 연구자와 각 지자체 등에 의해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나 역시도 오키나와에 있는 지인과 연구자들의 도움으로 배봉기 씨와 직접 접한 주민들, 그리고 전(前) 일본군 장병들의 수많은 증언을 들었다. 또한 도카시키섬에 주둔했던 해상 정진 제3전투부대의 진중일지(陣中日誌) 등 배봉기 씨를 포함한 4명의 '위안부'가 이 전투부대 취사반에 소속되었을 당시 전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입수하였다.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 씨의 인생 전체를 다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주민들과 전 장병들의 증언과 자료를 배봉기 씨의 증언과 대조하며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 도착한 이후의 상황, 특히 전시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다. 게라마 군도 상륙과 동시에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군 일본군이 게라마 군도에 상륙한 것은 1944년 9월 9일이다. 해상 정진 기지 제1대대와 제2대대가 자마미섬에 주둔했고, 제3대대는 도카시키섬에 주둔했다. 그 뒤를 이어 해상 정진 제1~3전투부대가 게라마 군도에 도착했다. 기지 대대는 기지 구축과 수비 임무를 맡았고 전투부대는 125㎏의 폭뢰 2기를 실은 상륙용 주정으로 목표 함선에 다가가 폭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돌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특공작전을 수행했던 전투 대원은 '지원자'란 명목의 20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특공 선박은 전투부대에 각각 100척씩 배치되었다. 도카시키섬에서 위안소로 정해진 곳은 군항과 가까이 자리잡은 나칸다카리 일가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와집이었다. 이 집을 위안소로 빼앗긴 나칸다카리 일가는 어업조합의 빈방으로 거쳐를 옮겼다. 축사의 가축들이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칸다카리 일가의 장녀인 하쓰코 씨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축들의 먹이를 주러 위안소에 드나들었고, 매월 1일과 15일에는 조상 신을 모시는 제단에 향을 피우러 위안소에 들렀다. 하쓰코 씨는 그럴 때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위안소의 조선인 여성과 얘기를 나눴다. 위안소의 옆집은 군용 매점에 해당하는 주보(酒保)로 바뀌었고 그 집의 안주인인 신자토 요시에 씨가 주보 일을 맡았다. 병사들은 주보보다는 위안소에 가기 전 들르는 대합실로 신자토 씨의 집을 사용했다. 군은 도카시키 섬의 일반 주민들이 위안소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도카시키 마을의 여자청년단은 임원 회의에서 위안소 설치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성매매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도카시키섬에 위안소가 설치된다면 풍기가 문란해지고 여자 청년이 병사들에게 '위안부'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 주된 이유였다. 고하구라 요코 여자청년단장 등이 위안소 설치에 반대하기 위해 제3전투부대장인 아카마쓰 가지를 찾아갔다.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은 "전투부대 구성원은 대부분 20세 미만의 지원병인데, 위안소는 나이가 많은 소집병으로 구성된 기지대 부대용으로 설치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당시 위안소는 군의 회계를 담당하는 주계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노우에 도시카즈 주계부 하사에게도 강하게 항의했다. 스즈키 쓰네요시 해상 정진 기지 제3대대장은 마을 사무소에 근무했던 고하구라 요코 여자청년단장을 찾아가 위안소 설치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군은 주요 주둔지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있으며 현지 여성의 몸을 군인들로부터 지키는 것도 위안소 설치 목적 중 하나라고 말이다. 이를 들은 고하구라 요코 단장은 더는 위안소 설치 반대 운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도카시키섬의 위안소에 배치된 7명의 조선인 여성에게는 각자 창녀나 기녀들이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30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배봉기 씨는 아키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24살의 기쿠마루, 하루코와 가즈코는 23살, 스즈란은 20살, 아이코와 밋짱은 16살로 가장 어렸다. 위안소가 개설되었을 무렵, 주보 일을 맡았던 요시에 씨는 눈이 새빨개지도록 울어서 퉁퉁 부어오른 아이코와 밋짱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고 한다. 4개의 방이 있었던 나칸다카리 일가의 집은 6실의 위안소로 개조되었고 축사 일부도 위안소 용으로 개축되었다. 축사 옆 방을 배정받은 기쿠마루는 하쓰코 씨가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러 오면 종일 "산양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라고 투덜댔다. 기쿠마루는 이 곳에 오기 전 중국에서 하루에 수십 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했다며 타고난 듯 굵은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해 주변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급하게 마무리해야 할 특공 기지 구축 작업을 마친 휴일에는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위안소를 찾아왔다. 병사들은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각반을 풀어 놓았다. 그러면 배봉기 씨는 바로 그것을 다시 감아 놓았다. 병사가 방을 나설 때 빨리 각반을 두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군인이 방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지면 기다리던 다음 병사가 벽을 치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중순, 게라마 해상 정진 기지 제1~3대대가 독립 대대로 개편되어 기지 부대는 일부만 남고 모두 오키나와 본섬으로 이동하였다. 대신 조선인 징용병이 도카시키섬에 들어왔다. 이후 위안소는 한산해졌다. 1945년 3월 23일 아침, 공격이 시작되다 1945년 3월 23일 아침, 공습경보가 울렸다. 하루코가 "언니, 빨리 피해야 돼!"라고 재촉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하루코는 네 살배기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도카시키의 위안소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을 낀 건너편 산 너머로부터 집채만 한 크기의 미군기가 나타나더니 위안소 위를 뒤덮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나(배봉기)는 기쿠마루, 스즈란, 가즈코와 함께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하루코와 아이코, 밋짱은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욕실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사방에 검은 연기와 먼지가 자욱하게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고, 천장이 삐걱거리면서 물건들이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위안소 건물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기쿠마루가 욕실을 나왔다. 나도 기쿠마루를 뒤따라 나가다 출입구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정신없이 강기슭 쪽으로 달려 가시가 무성한 판다누스(Pandanus boninensis, 일본령 오가사와라제도가 원산지인 열대식물) 수풀 속으로 숨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미군기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고 지면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총탄이 귓가의 공기를 갈랐다. '이번에는 맞겠다, 이번엔 정말 맞겠다.' 나는 두려움에 계속해서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미군기가 위안소로부터 멀어진 사이에 우리 일행은 강 건너편의 방공호로 도망쳤다. 강을 건널 때 "우리도 데려가!"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위안소 앞에 허벅지가 피투성이가 된 밋짱과 아이코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을 뒤덮는 공포에 손발이 덜덜 떨려 부상당한 두 사람까지 데리고 올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그때 하루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부엌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잠시 공습이 뜸해진 틈을 타 오키나와 본섬에서 상관의 작전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게라마 군도에 온 스즈키 대장은 당번병을 데리고 위안소로 달려갔다. 위안소에는 중상을 입은 하루코만 남겨져 있었다. 미군기는 파도처럼 공습을 계속해왔다. 당번병이 중상을 입은 하루코를 업고 강을 건너려고 할 때 하루코는 기관총에 맞아 즉사했다. 하루코를 업고 있던 당번병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날 밤 배봉기 씨 일행은 긴급 의무실로 대체된 국민학교에 도착했고, 거기서 밋짱과 아이코를 다시 만났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밋짱과 아이코가 아프다고 울자 "죽은 사람도 있는데 울고 있을 때냐"라며 옆에 있던 스즈키 대장이 화를 냈다. 배봉기 씨가 말했다. "하루코는 스즈키 대장의 여자였으니까." 미군 공습 이후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은 지도에만 의지해 도카시키섬에서 가장 깊은 산골인 234고지에 복곽진지(複郭陣地), 즉 최후 저항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진지 구축을 위해 게라마 해협 근처 진지에서 234고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3월 27일 오전 2시였다. 비가 많이 오던 밤이었다. 파출소 순경이 주민들은 어떻게 할지를 물으니 아카마쓰 대장은 복곽진지 예정지 뒷쪽 계곡으로 피난할 것을 지시했다. 온나 강가에 방공호를 파고 오두막을 지어 몸을 피했던 주민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걸으며 234고지로 향했다. 다음 날인 28일에는 복곽기지 구축이 시작된 곳에서 산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계곡에서 330명의 주민이 자결했다. 한 가족은 방위 대원으로부터 받은 수류탄을 둘러싸고 자결했고, 어떤 사람은 낫으로 목을 베었으며 어떤 사람은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가족을 때려죽였다. 남자가 있는 가족 중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하쓰코 씨의 부모님과 여동생도 그 골짜기에서 목숨을 끊었다. 아비규환 속의 골짜기에 박격포가 떨어졌고 하쓰코 씨는 중상을 입은 채 며칠 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도카시키 마을은 징병율이 3년동안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어업 종사자들이 많아 마을 주민들의 체격이 좋았기 때문이다. 막사가 지어질 때까지 장병들은 국민학교나 민가에 머물렀다. 중국에서 귀환한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이 남자는 전차로 치어 죽이고 여자는 강간한 후 목을 졸랐다는 등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여러 잔학 행위를 주민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27일에 도카시키 섬에 상륙한 미군은 이미 234고지 근처의 A고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A고지는 주민들이 피란 중인 골짜기 근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하쓰코 씨는 먼저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미군들에게 몸을 더럽힐 바엔 죽겠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고 한다. 그 후에도 '집단 자결'이라 불리는 참극이 자마미와 게루마, 그리고 그 외 오키나와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곳이 도카시키였다. 내가 도카시키로 갔을 때 배봉기 씨에게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주었더니 배봉기 씨는 "그럼 만나러 가 볼까"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약 30년 만에 상봉한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는 배봉기 씨의 손을 잡고 감격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 전쟁통에서 용케도 살아남았구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봉기 씨는 두 사람의 환대에 조금 주저하는 듯 보였다. 하쓰코 씨와 요시에 씨는 복잡한 심경으로 7명의 조선인 여성들을 대했고 그 모습을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일본어도 오키나와 사투리도 서툴렀던 배봉기 씨에게는 두 사람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하쓰코 씨는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방들이 부정을 탔다는 생각에 무녀에게 액막이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마당에 사당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일까. 배봉기 씨는 사당 앞에서 합장했다. 공습이 끝난 후 234고지에서의 생활 게라마 상공을 선회하던 미군기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1945년 3월 24일 저녁, 배봉기 씨는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안소 상황을 보러 갔다. 완전히 불에 탄 위안소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불에 탄 옆집 근처에 화재의 잔해로 상반신이 뒤덮인 하루코의 시신이 있었다. 며칠 후 제3전투부대의 지넨 초보쿠 부관과 하루코를 평소 예뻐했던 하사관이 234고지에서 내려와 부패한 하루코의 시신을 시신이 있던 자리에 묻어주었다. 요시에 씨는 가족이나 친척들이 찾아왔을 때 알 수 있도록 마당에 묻혀 있던 뼈를 유골 단지에 담아두었다가 도카시키 마을의 전사자와 전몰자의 영을 기리는 시라타마 위령탑이 세워졌을 때 합사했다고 배봉기 씨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감사하네요." 숙소에서 배봉기 씨는 감동한 듯이 말하면서도 "하지만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배봉기 씨와 함께 조선에서 징집되어 부산을 떠난 61명 여성들의 행선지는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이 게라마 제도를 공습할 때 배봉기 씨 일행은 군으로부터 지급받은 모포 한장으로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총탄과 호우를 견뎠다. 공습이 잦아든 3월 말, 일행은 인기척이 끊긴 촌락 구석에서 오두막을 발견했다. 마을 사람이 공습에 대비해 지어놓은 피란용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에 남아있던 식량을 다 먹고 먹을 것이 떨어지자 위안소에서 요금 정산을 맡고 있던 가네코가 군과 의논을 한다며 234고지로 향했다. 배봉기 씨와 기쿠마루, 가즈코, 스즈란도 가네코를 따라 234고지로 향했고, 이들은 제3전투부대 취사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관공서 병사 주임이었던 도야마 마준 씨도 합세해 총 다섯 명이 234고지 골짜기로 향했다. 도야마 씨가 제3전투부대의 취사장 터를 가리켰다. 그곳은 계곡물이 1m 정도 정체되는 곳으로 계곡의 폭도 둔덕도 넓었다. 맑은 계곡물이 그 곳에서만 푸른 빛을 띠어 깊이가 꽤 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둔덕 옆에는 찰흙으로 만든 취사반 아궁이가 있었다. 거기서 배봉기 씨 일행은 건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멀건 잡탕죽을 매일 만들었다. 게라마 공습 첫날 제3전투부대의 식량고가 불에 타 비축되어 있던 6개월분의 식량 중 2개월 분량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사장 옆에는 짐승들이 골짜기에서 산 쪽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가진 것이라곤 빈약한 무기밖에 없던 제3전투부대의 작전은 어둠을 틈타 미군을 향해 돌격하는 것뿐이었다. 돌격할 때는 짐승들이 다니는 취사장 옆길을 이용했다. 배봉기 씨는 돌격에서 끔찍한 상처를 입고 귀환한 병사들을 자주 보았다. 돌아오지 못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우리가 234고지를 다시 찾았을 때 배봉기 씨는 그 당시 짐승들이 다니던 길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고 오랫동안 손을 모아 기도했다. 역사적인 가해와 피해를 큰 틀에서 말한다면 배봉기 씨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피해를 매우 가혹하게 받아들이며 도카시키에까지 왔다. 이러한 배봉기 씨가 234고지를 다시 찾아가 가해자인 일본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 하쓰코 씨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330명이 '집단자결'한 도카시키의 골짜기로 향했다. 하쓰코 씨가 속삭였다. "마지막 분향이 끝나야 사자의 영혼이 승천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죽은 분들은 승천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고 해요." 죽음의 공포보다 괴로웠던 굶주림 제3전투부대 취사반에 들어간 배봉기 씨 일행은 각 부대에 배급을 마치고 냄비 바닥에 남아 있는 건더기가 많은 잡탕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배 곯는 것은 총탄에 맞는 것 이상으로 괴로워요." 당시를 회상하던 배봉기 씨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배봉기 씨는 도카시키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루는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이 목욕을 한다기에 징용병들이 드럼통에 계곡물을 길어서 채우고 배봉기 씨가 불을 지폈다. 폭음이 들린 순간, 천막을 관통한 기관총탄이 드럼통에 탕탕 구멍을 뚫었고 뜨거운 물이 튀어 올랐다. "빨리, 도망가!" 이노우에 하사가 소리쳤다. "도망이고 뭐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 없었어." 눈앞의 커다란 나무가 폭탄에 맞아 갈라진 일도 있었고 박격포의 파편이 등 뒤로 날아온 적도 있었다. 배봉기 씨는 게라마가 공습을 당할 때도, 234고지에서도 찰나의 우연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보다도 굶주림이 더 참기 힘들었다고 배봉기 씨는 말했다. 제3전투부대의 진중일지에는 1945년 7월부터 영양실조로 사망한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잇따랐다. 영양실조로 사망한 병사의 기록은 패전 때까지 12명에 달했다. 전사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보다도 많은 숫자다. 이러한 굶주림 때문이었을까. 1945년 6월 말, 소네 기요시 일등병은 약 20명의 조선인 징용병을 이끌고 미군에 투항했다. 이때 두 명의 '위안부'도 함께였다. 배봉기 씨는 소네 일등병이 미군에 투항한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기쿠마루와 스즈란이 없었다고 했다. 소네 일등병은 게라마 상공을 날던 특공기가 미군의 공격에 격추되어 떨어질 때마다 "아아, 오늘도 젊은이가 개죽음을 당했어."라고 우울해하며 이 전쟁에서 일본은 패배할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는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에 투항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서 살아남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밀고 당할 우려가 있었기에 일본군에게 함께 투항하자고 하기에는 위험했다. 그는 투항을 하기 직전에 조선인 징용병들의 수장에게 말을 걸었다. 짧은 고민 끝에 투항을 결의한 징용병들이 소네 일등병에 동참했다. 당시 기쿠마루와 스즈란은 이들과 같은 참호에서 잠을 잤었다. 배봉기 씨와 가즈코가 잠을 자던 참호까지는 징용병 수장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수용소를 나와 오키나와를 정처없이 떠돌다 계속해서 제3전투부대에 머무르던 배봉기 씨와 가즈코는 1945년 8월 26일, 마을 국민학교 교정에서 시행된 미군과 제3전투부대 사이의 무장해제식에 참여했다. 배봉기 씨와 가즈코는 그 후 제3전투부대와 함께 오키나와 본섬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곧바로 오키나와 본섬의 이시카와 민간인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시카와 수용소에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전쟁 이전부터 오키나와에 체류하며 미군의 작업반장을 맡고 있던 조선인 마쓰야마가 가즈코에게 드나들더니 결국 가즈코는 먼저 수용소를 나가게 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이 세운 기획주택이나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판자 조각, 천막 등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 머물게 되면서 수용소가 한산해진 무렵, 배봉기 씨는 수용소를 나왔다. "처음에는 어디에 가도 마음이 불편했지. 여기에서 하룻밤, 저기서 사흘 밤, 길어봐야 일주일. "부엌일을 시켜달라."라고 부탁하면 아직 젊으니 '부엌일은 됐으니 접대나 하라'는 거야. 온종일 걷다 보니 손님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나는 졸면서 꿈까지 꾸고.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또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져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온다고 거짓말하고 나왔지. 온종일 걷다 보면 날이 저무는데, 깜깜해져도 잘 곳이 없으니 또 술집으로 갈 수밖에. 당시에는 작업화를 신고 있었어. 일본군의 작업화. 그걸 손에 들고 일부러 맨발로 걸었지. 낯선 나라에 와서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말도 안 통하고, 가진 돈도 없고. 자포자기 심정이었지. 인간이 그리 되더라고." 배봉기 씨는 몇 안 되는 옷가지를 챙긴 보자기 하나만 달랑 머리에 이고 일 년 동안 계속해서 걸었다고 한다. 배봉기 씨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어두워져서 또다시 술집에 들어갈 바에야 같은 곳에 머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불안해서 그래, 불안해서 그랬다고!" 배봉기 씨가 일 년간 계속해서 정처 없이 걸었던 곳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가장 큰 전쟁의 화를 입어 잿더미가 된 중부부터 남부 지역이었다. 사람이 낯선 타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가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맨몸으로 살 수 있을까. 일 년이나 맨발로 드넓은 오키나와 땅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이야기는 배봉기 씨가 여러 번 경험했던 극한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프게 와 닿은 극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배봉기 씨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배봉기 씨는 "아, 젠장! 나고는 어떤 곳이지? 나고에나 가봐야겠다."라고 하며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이후 배봉기 씨는 나고, 고자(현 오키나와 시), 아케나, 가데나 등을 거쳐 떠돌이 생활을 수 년째 지속하다 난조시에 정착했고, 필자는 난조시에 정착한 배봉기를 1977년 12월에 처음 만났다. 이때 시작된 배봉기 씨와의 만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기 시작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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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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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the Trial of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in 2000, 이하 2000년 여성법정)이 2000년 12월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2000년 12월 12일까지, 6일에 걸쳐 일본 도쿄 구단회관에서 개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판사단은 2000년 12월 8일~10일 사흘간 이루어진 심리를 바탕으로 2000년 12월 12일,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인정하고,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예비판결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년 뒤인 2001년 12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아시아 피해국들이 공동 기소한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일본 정부에 진실 규명과 사죄, 피해자에 대한 배상 등을 권고한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2000년 여성법정이 민간법정이었기에 이 판결은 법적 강제력을 가지지는 않지만, 국제연대를 통해 시민의 힘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법정에 올리고, 여성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전시 하에서 발생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단죄할 필요성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적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아카이브 814'에서는 2000년 여성법정과 관련하여 국제검사단의 공동기소장을 비롯해 남북한, 중국, 필리핀, 대만,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기소장, 예비판결과 최종판결 요약문, 본 법정의 요약 녹취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웹진 <결>에서는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을 맞아, '아카이브814'에 등록된 2000년 여성법정 관련 기록물을 법정이 진행된 시간순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2000년 여성법정 첫째 날 2000년 12월 8일 (금),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개정인사(국제실행위원회) - 개정 선언(맥도날드 수석 판사) - 모두 진술(패트리샤 샐러즈 수석 검사) - 법정참고인(아미카스 큐리에), 진술(이마무라 쓰구오 변호사) - 남북한 공동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일본군의 구조(하야시 히로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로, 강간과 집단 강간죄에 기반하여 기소한다. 노예제는 누군가를 소유, 운송하거나 성적, 정신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1945년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해도 노예제는 여전히 범죄로 성립한다. 다양한 증거를 볼 때 아시아 지역에 위안소는 일상화되어 있었고, 장군들의 역할 중 하나가 점령지인 한국, 대만 등지로부터 여성을 모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 여성들을 정신적인 죽음으로 몰아갔고 결국 고립시켰다. 이러한 고문과 조직 체계에 입각하여 성노예제를 행했던 당시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피고로 고발한다. 일본 헌장은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수십 년간 일본이 '위안부'문제를 알고 있으면서 방관하고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는 것은 일본 헌장의 위법이다. - 패트리샤 샐러즈 수석 검사 기소 요지 중. (녹취록 발췌) 2000년 여성법정의 첫째 날인 12월 8일에는 법정의 개회 선언, 패트리샤 샐러즈(Patricia Viseur-Sellers) 수석검사의 모두 진술, 변호인 측의 변론, 남북한 공동검사단의 기소와 발언이 이어졌다. 패트리샤 샐러즈(Patricia Viseur-Sellers) 수석검사와 검사단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해 마쓰이 이와네, 하타 슌로쿠, 데라우치 히사이치,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조 히데키, 우메즈 요시지로, 고바야시 세조, 안도 리키치, 야마시타 도모유키를 기소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관계 서류를 공개할 것,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 사후 배상 및 보상할 것 등을 요구했다. 남북한 공동검사단 역시 역사적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근거로 히로히토 천황 등을 인도에 반한 범죄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위안소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사실, 국제법 위반 사실, 이에 대한 피고의 형사 책임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제시하였다. 남북한공동기소단의 증언자로 김복동(비디오 증언), 김군자, 박영심(비디오 증언), 하상숙, 김영숙, 문필기, 김복동, 안법순, 최갑순(비디오 증언), 유순옥(비디오 증언), 정옥순(비디오 증언)이 참여했다. 2000년 여성법정 첫째 날의 모습과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녹취록 요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검사단의 논고와 남북한 공동기소장 전문은 전쟁 당시 일본의 영토 확장 정책, 피고인들의 지위, 개인별 피의 사실, 피고인에 적용 가능한 법 등을 전체적으로 고찰하고 있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8일)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검사단 논고 관련 기록물 3.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남북한 공동기소장 2000년 여성법정 둘째 날 2000년 12월 9일 (토),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전문가 증언 : 천황제도(야마다 아키라) - 중국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필리핀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위안부' 제도(요시미 요시아키) - 대만 검사단 기소 및 심리 전쟁 중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잔학행위를 전 히로히토 천황이 알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외무대신인 히로타 고키, 이시 이타로와 측근 도쿠가와 요시히도가 알고 있었으며, 시종이었던 도쿠가와 요시히도가 알고 있었으므로 히로히토 천황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일본군 고관들의 잔학행위 속에 강간이 포함되어 있다. (...)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 공의 일기에 동생 미카사 공이 육군의 잔학행위에 너무 놀라 천황에게 말했다고 쓰여 있다. 또한 성노예제에 대하여 천황의 측근인 육군, 해군대신, 참모총장 등 군부 최고 간부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히로히토 천황의 신임을 받아 임명된 사람으로써 비밀사항에 관한 말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 야마다 아키라의 전문가 증언 중 (녹취록 발췌) 법정 둘째 날인 12월 9일에는 천황의 책임에 관해 야마다 아키라 메이지대 교수가 전문가 증언을 했고, 이어 중국 검사단, 필리핀 검사단, 대만 검사단의 기소장 제출과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를 대표하여 완아이화, 위안주린, 양민쩐이 증언자로 참여했다. 중국 검사단은 기소장에서 일본군에 의한 중국 점령 과정, 중국 내 위안소의 설치 과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설치되었던 위안소에 관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필리핀 검사단은 전쟁 중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를 저지른 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과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홈마 마사하루 등 6명을 고발하였다. 기소장에서는 피해자들의 증언, '대동아 국제 전쟁 법정(IMTFE)'과 미군의 태평양 전쟁 범죄 사무실의 자료 등을 토대로 일본군의 필리핀 침략과 점령 사실,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과정, 동원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처우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대만 검사단은 일본의 대만 점령과 식민 지배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동원한 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해 1936년~1945년 사이에 대만 총독을 지냈던 고바야시 세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를 인도에 반한 범죄로 고발하였다. 대만 검사단은 기소장에서 일본의 대만 점령,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대만 여성 등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대우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했으며,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쟁 중 발생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식민지배 상황에서 발생한 것임을 명확히 했다. 중국, 필리핀, 대만의 기소인들 또한 공통적으로 일본 정부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동시에 피해자들에게 보상함으로써 국가 책임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9일)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중국 기소장 관련 기록물 3.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필리핀 기소장 관련 기록물 4.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대만 기소장 2000년 여성법정 셋째 날 2000년 12월 10일 (일),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말레이시아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네덜란드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인도네시아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트라우마(레파 무라제노비스치) - 일본 검사단 : 전후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가와구치 가즈코) - 전문가 증언 : 국가책임(프리츠 칼스호벤) - 동티모르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일본 검사단 기소 및 심리 - 전문가 증언 : 일본군'위안부'(후지메 유키) - 일본군 병사 증언 : 전(前) 일본군인 가네코 야스지, 스즈키 요시오 - 참고인 진술 : 스즈키 이소미 변호사, 아이타니 쿠니오 변호사 - 최종논고 며칠 동안 여성법정 재판을 열었다. 이 재판정에서 용기를 보여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감동은 컸다. 1933년 일본 정부가 문서로 성노예제에 대한 언급을 했다. 가해자의 증언에서도 강간행위가 처벌 대상이 아니었으며 군 당국에 의해서 장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헤이그 조약을 위반한 사항이다.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국가 책임이다. 여러 전문가의 의견대로 군 차원의 성노예제 운영 계획이 기본협정 때문에 소멸할 수 없다. 개개인 피해자는 청구권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계속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사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사 여러분의 정당한 판결이 필요하다. - 우스티나 돌고풀 국제검사의 최종논고 발언 중 (녹취록 발췌) 본 법정 셋째 날인 12월 10일 오전에는 말레이시아 검사단, 네덜란드 검사단, 인도네시아 검사단의 기소 및 심리와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말레이시아 검사단은 말레이시아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책임을 물어 일본 천황, 일본 정부, 육군 의장 데라우치 히사이치, 야마시타 도모유키, 이타가키 세시로 등 일본군 간부들, 전쟁 당시 싱가포르 시장과 10개 지역의 지사들, 마담 차우 추이와 남편 아용 등과 위안소 관계자들을 고발하였다. 네덜란드 검사단은 성노예화와 고문, 그리고 학대에 의한 고문을 저지른 혐의로 전쟁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던 일본군 사령관을 기소하였다. 인도네시아 검사단은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동원하는 등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해 일본 정부 및 군부의 지도자 9명을 고발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생존자와 희생자의 후손에게 배상금과 보상금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 역시 명시하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한 증언자로 얀 러바현(네덜란드), 이브 수하나(인도네시아), 마르디엠(인도네시아)이 참석하였다. 12월 10일 오후에는 트라우마에 대한 전문가 증언,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관한 전문가 증언, 일본의 국가책임에 관한 전문가 증언, 동티모르 검사단의 심리, 전(前) 일본군 병사의 증언, 최종논고 등이 이루어졌다. 동티모르 검사단은 동티모르 여성을 일본군'위안부'로 강제동원하고, 이들을 감금한 가운데 성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저지른 책임을 물어 일본 정부를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로 고발하였다. 동티모르 검사단의 증언자로 마르타(비디오 증언)와 에스메랄다가 참여했다. 동티모르 검사단과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전문가 증언 뒤에는 전 일본 군인인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의 가해자 증언이 이어졌다. 이들은 당시 일본 군인으로서 군인을 위한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언했다. 이들의 자세한 증언 내용은 아래 녹취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검사단이 최종논고를 하였다. 우스티나 돌고풀 국제검사는 "재판정에서 용기를 보여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 대한 감동을 이야기하면서 일본 정부에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판사단의 정당한 판결이 필요함을 피력했다. 위안소 시스템과 피고인들의 범죄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검사단의 공동기소장은 대만,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등 피해국의 기소장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10일-1)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10일-2) 관련 기록물 3.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말레이시아 기소장 관련 기록물 4.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네덜란드 기소장 관련 기록물 5.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인도네시아 기소장 관련 기록물 6.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동티모르 기소장 관련 기록물 7.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검사단 공동기소장 2000년 여성법정 넷째 날 2000년 12월 11일 (월), 일본 도쿄 구단회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현대 무력 분쟁 하에서 발생한 여성 대상 성폭력에 관한 국제공청회 2000년 12월 11일에는 "현대 무력 분쟁 하에서 발생한 여성 대상 성폭력"을 주제로 국제공청회가 개최되었다. 국제공청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현재성을 부각하고 전 세계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2000년 여성법정 초기 기획단계부터 논의되었으며, 그 결과 분쟁 하에서의 여성 인권과 관련된 문제들이 함께 논의되었다. 본 국제공청회에서는 베트남 전쟁, 버마의 군부독재, 과테말라, 르완다, 동티모르의 무력분쟁과 같은 상황에서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이 증언하였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분쟁 하 여성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 요약(2000년 12월 11일) 2000년 여성법정 다섯째 날, 예비 판결의 날 2000년 12월 12일(일), 일본 도쿄 일본청년관 프로그램 진행 순서 - 국제실행위원회와 국제검사단의 요구 - 예비 판결 법정은 제출된 증거에 기초하여 검사단이 피고인 천황 히로히토에 대해 입증한 것을 인정하며, 천황 히로히토는 공통기소장 중 인도에 반한 죄의 소인(訴因)1과 소인2인 강간과 성노예제에 대한 책임으로 유죄로 인정한다. 또한 인도에 반한 죄의 소인3의 강간에 대해서도 유죄이다. 나아가서 판사는 일본 정부가 '법정헌장' 제4조에 기초하여 '위안소' 제도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국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판정한다. - 2000년 여성법정 도쿄판결문 39항 법정 마지막 날인 12월 12일에 예비 판결이 발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로 구(舊) 유고 국제형사재판소의 수석판사이기도 했던 가브리엘 커크 맥도날드(Gabrelle Kirk McDonald), 아르헨티나의 형사법 판사이자 당시 국제여성법률가협회 회장이었던 카르멘 마리아 알히바이(Carmen Maria Argibay), 여성 국제법학자인 크리스틴 친킨(Cristine Chinkin)과 케냐의 인권변호사 윌리 무퉁가(Willy Mutunga)가 참여하였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단은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 등을 명확히 인정하고,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국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녹취록(2000년 12월 12일) 관련 기록물 2.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판결요약문, 2000년 도쿄 2000년 여성법정 최종판결 2001년 12월 4일(화), 네덜란드 헤이그 뤼켄트 단스 극장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저질러진 범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저질러진 범죄 중 가장 알려지지 않고 보상받지 못한 범죄로 남아있다. 지금까지 희생자들을 위한 박물관도, 알려지지 않은 '위안부' 여성들을 위한 무덤도,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도, 일본군 성노예와 심각한 성범죄와 잔혹행위에 대한 판결도 없었다. 따라서 본 재판정은 이 판결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 제도하에 희생당한 여성들을 기리려고 한다. 판사단은 고생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산산이 부서진 삶을 재건하고, 공포와 수치를 이겨 내고 세계를 향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생존자들의 강건함과 위엄을 인지한다.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많은 여성들은 이름없는 영웅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진 이름은, 고통받은 여성들이 아니었다. 고작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들을 기소한 남성이었다. 이 판결문은 증언대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최소한 4일간은 잘못된 일을 단두대에 올리고 진실을 왕좌에 앉힌 생존자들의 이름을 병기하는 것이다. - 2001년 헤이그 판결 1094항 2000년 여성법정의 최종판결은 1년 뒤인 2001년 12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뤼켄트 단스(Lucent Dans)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최종판결에서는 2000년 12월 12일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유죄와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선고했던 예비 판결에 뒤이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성노예적 성격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또한 일본 정부 역시 국가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 역시 명시하고,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운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고, 박물관과 도서관의 설립을 통해 피해자와 생존자를 인정하며,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 등을 권고했다. 관련 기록물 1.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구두판결 요약문, 2001년 헤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