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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아니,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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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의 축사를 이용수 선생님께 부탁드리고자 대구로 향했다. 가능하다면 선생님의 근황을 듣고 컨퍼런스에 기대하시는 바를 간략히 들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짧은 지면에 풀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 마디로 뵙고 난 소감을 전해야 한다면 나는 이 방문기의 제목을 '기뻤어요'나 ‘아니, 기뻤어요’라고 정하고 싶다. 선생님께 들은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기도 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기처럼 투명하고 선선히 하시던 말씀 “아니, 기뻤어요.” 9월 15일, 대구 서문로 대구 중앙로역에 내려 몇 걸음만 떼면 바로 저만치에 야트막한 2층 건물이 보인다. 한창 솟아오르고 있는 콘크리트 빌딩 숲 속에 소롯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목조 건물. ‘희움’ 희움. 나도 모르게 ‘기쁨이 움트는 곳’이라고 읽는다. 한 번 시작된 오독(誤讀)은 반복된다. 본래 뜻은 ‘희망을 꽃피움’이라는 희움을 나는 자꾸 ‘기쁠 희’에 ‘움틀 움’ 혹은 ‘움막 움’이라고 멋대로 기억하곤 한다. 희움에 들어서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궁글리고 있을 때 간사님께서 초록 라벨이 붙은 디카페인 음료를 내어주신다. 안녕 라일락 아직 선생님은 오지 않으셨다. 기다리는 틈을 타 전시관 안뜰로 향한다. 초록 잎을 무성히 내민 라일락 나무가 그늘 한 켠을 내어 준다. 안녕. 라일락님. 3.1 운동 직후인 1920년대부터 100여 년을 이 곳에 있었다는 이 나무 하나만을 보려고 여기 오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움 주변은 온통 역사의 현장이어서 거리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희움 정문 앞 마당엔 3.1운동 당시 행진 경로 표식이 박혀 있다. 열 걸음 안되는 대각선 맞은편에는 1930년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투입된 식산은행 건물이 그대로 남아 대구 근대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키 큰 라일락이 지켜본 그간의 이야기만으로도 이 곳에 온 보람은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을 즈음 택시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연보라 하얀 갖신과 연보라색 한복으로 단장하신 이용수 선생님이 지팡이에 의지해 들어오셨다. 라일락 빛깔이 곱게 잘 어울리신다.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시작을 축하합니다.” 카메라가 켜지고, 쨍한 조명 앞에서 원고 없이 긴 문장을 한 호흡에 말해내기란 방송인들도 어려운 법이다. “먼 데 있는 저희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국제(사회) 여러분들께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또박 또박, 틀림없이 이어지는 말들에 감탄할 때쯤, ‘흐-읍’ 선생님은 얕게 숨을 고르시고는 돌연 “조선 때, 식민지 때, 무법 때...”로 돌아가신다. 당신이 끌려간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국제 사회 여러분들께’, ‘피해자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나니 그 이야기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아마도 지난 30년 가까이 카메라가 켜지고 나면 어김없이 돌아온 질문들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이명 “양손을 묶고 (그들이) 전기를 한 번 돌린 때 제가 크-게 엄마라고 한 번 불런 거이 기억이 납니다. 그랬는데 지금 머리에서 귀에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소리가 납니다. 머리에서 나는지 귀에서 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머리와 귀를 울리는 이명은 당신 스스로의 비명. 울부짖음. 매일 그렇게 엄마, 엄마 부르짖고 계시는구나. 내가 어떻게 하마 “추우나 더우나 아이들이 줄로 서가 있어요. 안아 돌라고. 내가 안아줍니다. 쪼맨한 사람들이 와서 울어요. 너거가 무슨 죄가 있노. 너거를 와 울리노.” “이 생각을 하면은 내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 문제를 해결할게 차라리 내가 죽으라카믄 죽겠어요.” “내가 어떻게 하마 이걸 해결을 할까 생각할 적에 무식한 내가, 배우지도 못한 내가 돌지도 않고 열심히 해보자 해서 지금까지 왔어요.” 한 번 말을 시작하시면 2시간 가까이 끊김이 없으시다. 간간히 ‘허-억’ 하고 가쁘고 벅찬 숨을 몰아쉬고는 이내 이야기를 이어 가신다.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끊지 못하는 나는 선생님의 기분이 나아지게 할 질문이 무엇일지 궁리할 뿐이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정연하게 말을 이어가고 계셨다. 이런 피해는 외국에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선생님,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였나요?“ 100여 년의 시공간을 오가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시다. 질문이 적절치 않았던 걸까? 잠시 머뭇거리시는 선생님께 함께 간 동료가 고쳐 질문을 드린다. “가장 기분 좋으셨을 때요. 선생님.” 원투원 “원투원.” 이내 흐트러졌던 페이스를 바로 잡으신 선생님의 첫마디는 ‘121’이었다. “제일 좋아서 많이 울었을 때가 마이클 혼다 의원(등이) 워싱턴에서 121 결의안 통과했을 때요.” “의장님이 잘 걷지도 못하시는데, 자기 사무실에 저를 앉혀 놓고 여자 비서가 (돕고).. 근 한 달로 미국 국회에서 살았습니다. 이 분들이 땀을 뻑뻑 흘리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의장님이 이 결의안 통과시키면 뭘 사줄라캅니까 물어요. 김치하고 불고기 사 달라 합디다.” “의사봉을 딱딱딱 세 번 치고 이용수 할 때(결의안이 통과될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너무 놀라고 좋아서요. 춤도 췄어요.” 툭툭 탁! 선생님의 발은 저절로 리듬을 타고 어깨가 들썩였다. 미 하원 121호 결의안 통과 순간의 기쁨이 춤사위 속에 일렁인다. 보조개가 어여쁘시구나. “모두 감사한 분들 덕분이지요.” “처음에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잖습니까?” “형님 아우님들(한테) 가마(=가면) 내가 해결하고 왔다 해야지요.”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북한… 고맙고 그리운 사람들이 오가는 인터뷰 속에서 선생님의 기분이 한결 나아지신 듯했다. 이제 카메라를 꺼도 될 것 같다. 더 하실 말씀은 없는지 묻고, 이 여정들 속에서 혹시 힘들지는 않으셨는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껏 울고 난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답하셨다. “아니, 기뻤어요.” 여성과 교육 카메라와 조명이 철수하자 선생님은 마알간 얼굴로, 얼른 희움보다 큰 장소에 교육관을 짓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 희움은 지붕에 비가 샌다고 일러주신다. “비 오마 여기 물이 차가지고 (이 사람이) 밤새도록 퍼냅니다.” 곁에 서 있던 서혁수 희움 대표가 머쓱해하며 부러 아무일 아닌 듯 “뭘 밤새도록 퍼내요” 라고 얼버무린다. 그런 티키타카의 경쾌함과 애달픔이 공존하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지 몰라 나도 일단은 짐짓 웃어 본다. “여가 확장이 돼야지. 빨리 교육관을 지어야지. 역사를 아르켜야지.” 모든 피해생존자 선생님들이 배움과 교육에 대한 열망이 남다르셨지만 이용수 선생님은 자신과 미래세대 교육에 대한 염원이 그 천 배는 넘을 것이라고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당신 스스로가 70세에 경북대 대학원에서 2년간 철학을 공부하셨고 대구 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제가 법학을 할라켔어요. 변호사가 되어가지고 당당하니 변론하고 싶다 했을 적에 그 소리를 어디 가서 했냐 하면 2007년 도 7월... 워싱턴에서 원투원 결의안 하러 6월 28일날 갔어요. 제가 증언을 이래 하고 나니까 의장이 말을 잘한다꼬 변호사하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그래라도(=그렇지 않아도) 내가 법할 공부를 할라켔는데 어려워서 못했습니다 카이 뒤에서 우리 동포들이 막 박수를 치며 웃었어요.” “이 역사관 저는 이거보다 넓혀가지고 교육관을 짓겠습니다. 지어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올바른 ‘위안부’ 역사, 세계가 다 알고 또한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이 ‘위안부’ 역사를 해결해서 저 할머니들한테 가서 제가 해결하고 왔다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말 속에서 나는 ‘여성과 교육’, ‘여성과 정치’, ‘여성과 경제’ 등 무수한 버전의 ‘여성과 OO’을 본다. 그래서. 당신의 ‘기뻤어요’라는 한 마디를 바톤 삼아 내 손에 담아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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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묻기에서 듣기로 /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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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 이 글은 2019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소영현 선생님의 글에 대한 토론문 [피해자-되기 주체-서사의 곤경과 재현의 문제]를 바탕으로 수정 및 개고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학이 증언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은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문학이 증언이 되어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할까. 문학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말해질 수 없는가이다. 나는 몇 년 동안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의 여성인권 문제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취재하고 있는데, 당사자들은 모두 인터뷰를 연구목적으로 이용하는 걸 거부했다. 인터뷰 내용은 드라마나 소설과 같은 픽션으로 만드는 것만 가능했고 그것 역시 사전에 충분히 익명처리가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각서를 썼다. 성과 관련된 폭력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가 좀처럼 되기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가 이렇게 나서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성폭력 범죄의 별칭은 한때 ‘피해자 없는 범죄’였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다르다. 당사자의 증언은 증언집과 인터뷰, 국제법정에서의 발언 등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말해지지 않은 게 아니라 들려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두 번째 전제는 이미 말해진 이야기를 다시 문학을 통해서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가장 게으른 답변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싶었어요” 같은 대중성을 핑계 대는 것일 것이고, 가장 무책임한 답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폭력의 재현 불/가능성을 고민하며 답을 끊임없이 미루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증언문학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자기만의 답이 있어야 한다.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이 찾은 답은 무엇이었을까. 김숨의 소설 『한 명』과 ‘위안부’ 증언문학의 위치 김숨의 소설 『한 명』은 생존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 남은 날이라는 시점을 가장 중요한 서사 장치로 가져와 구체적 기억과 대화들을 ‘위안부’ 증언집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다. 왜 이런 장치가 필요했을까. 작가는 독자가 이 소설을 단지 허구로 생각할까봐 각주를 넣었고 상상력을 더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허윤은 이런 태도는 실화에 기반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진정성을 내세움으로써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둘러싼 쟁점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 한국문학에서 태평양전쟁에서 귀환한 학병들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소위 ‘학병 서사’를 만들어낸 것과는 달리, ‘위안부’ 문제는 증언 이후 30여 년 동안 서사적 내용과 형식을 모두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고 그 빈자리를 증언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유의 형식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증언문학이라고 해서 실화라는 점에 기대어 폭력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증언문학으로 알려진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레비, 돌베개, 2007)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당사자로서의 자기 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고, 이런 점이 이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문학적 성취일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해방시켰는지는 의문이다. 스스로 목숨을 거둔 프리모 레비나 빅터 프랭클 등을 보면 트라우마화된 경험을 계속 활성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정신건강의 위기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은 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실화 여부에 대한 강박적 증명에 답하지 않으면서도 규범화된 서사의 결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참조할만한 작품은 역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 2015)이다. 이 작품은 증언문학이 아니라 ‘목소리 소설’이라고도 불리는데, 작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의 경험이 어디에도 제대로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해 이 적극적인 망각은 여자의 몸으로 전쟁에 참전한 경험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자장 속에서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를 보면 증언문학의 형식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증언될 수 없는 혹은 증언되어도 기억될 수 없는,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 가능하게 하도록 규범화된 서사에 대해 증언문학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단일한 서사규범과 타자화의 문제 소영현[2]은 실제 증언을 소설 속으로 가져오는 것은 ‘진정성’의 알리바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증언자이자 기록자의 위치를 드러내는 ‘사회적 맥락화 작업’의 일부라고 분석한다. 김숨의 소설은 증언이라는 발화행위가 주는 대체불가능성을 환기하고, 개별 피해서사의 반복이 아니라 증언에 나서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자를 구심으로 삼아 복수의 기억을 소환하며, 일부 생존자들에게 집중된 방식이라는 오해를 넘어 현재의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문제와 연동된다는 것이다. 허윤과 소영현 모두가 공히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서사규범이 지나치게 단일하다는 데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담론이 교착된 이유는 우리 사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가 “식민지에 사는 미성년의 조선 소녀들이 일본 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갔다”는 단일한 서사규범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의 문화적 재현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은 사실상 <귀향>(조정래, 2016)부터였다. 영화 <귀향>은 피해 재현의 윤리에 대한 저간의 진척된 고민들을 뒤로 한 채, “이것이 (증언을 통해 확보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 기대어 위안소를 부감 숏으로 찍고 성폭력 피해 장면을 성애적인 앵글로 찍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IP TV로 출시된 <귀향>이 사용자의 검색에 따라 실시간 자동완성 검색어가 만들어지는 환경에서 (성폭력을 조금 거친 에로물의 성애적 재현 장면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위해 만들어져, 개봉되지 않고 IP TV로 유통되는 19금 영화로 목록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 ‘성폭력 영화’라는 장르로 분류되었던 바를 비추어보면, 이러한 비판은 조금도 과도하지 않다. 다시 강조하자면 문학이 증언이 되려면 그것이 사실에 기반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오히려 당사자의 말하기를 다시 착취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이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껏 말해졌던 이야기가 왜 들리지 않았는지, 한국에서 ‘위안부’에 대한 재현이 어떤 서사규범으로 통용되어 왔는지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피해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증거로서의 증언이 아니라, 증언 서사의 ‘문학적’인 전회일 것이다. 나도 피해자요 ⓒ백정미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과연 김숨의 『한 명』을 통해 몇몇 피해자의 경험에 한정되어있는 기존의 ‘위안부’ 서사규범이 증언집과 공식기록에서 채취한 300여개의 각주를 통해 단수에서 복수로 바뀌는 맥락이 구성되었을까. 316개의 숫자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떤 증언을 왜 선택했느냐에 있다. 이 각주가 피해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피해사실의 진정성을 증명하게 하는 용도에 집중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증언 문학이 생존자의 증언에 기대어 ‘위안부’의 피해서사에만 집중한다면, 그리고 그 몸에서 일어난 흘러내리는 몸의 기억을 묘사하는 데에만 몰두해 있다면, 공감을 위해 순도 높은 피해자성을 요청하는 상상적 동일시에 기반한 (타자 배제적) 재현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 과거가 아니라 보다 현재적인 차원의 사회적 맥락을 구성해내는 점에 재현이 가진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증언 문학은 사회적인 맥락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그에 의존하는 형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위안부’ 증언을 재현할 때는 반드시 말할 수 없었음이라는 사회적 맥락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말해왔음, 반복해서 말했지만 들을 수 없었다는 맥락의 역사가 재현되어야 한다. 김숨의 소설 『한 명』이 가진 문학적인 성취는 당사자의 증언으로 채워진 각주 316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등록되지 못하고 아직 말하지 못한 당사자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상상력으로 시작했다는 데 있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기존 ‘위안부’ 운동은 당사자의 소멸이라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단 한 명이 남았을 때라는 가정 자체가 이 소설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사회적 맥락이다. 한 명이 남은 것이 아니다. “나도 피해자요..”라는 물결에 들어갈 수 없었을지언정, 당사자의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투운동’의 핵심은 나도 피해자라는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도’라는 ‘위드 유’의 응답에 있었다. 이 운동에서 피해자는 ‘당한’ 존재가 아니라, 미투를 ‘하는’ 능동태의 존재로 주체성의 형식이 변했다.[3] 나‘도’라는 조사에 붙여진 스타카토가 이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피해자를 타자화시키거나 문제를 개별화시키지 않으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규범은 어떠했는가. 원래 처음부터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는 점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었다. 김학순이 “내가 피해자요”라고 말하고, 그 뒤로 이어진 “나도 피해자요”의 연쇄가 있었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각각의 경험들이 따로 또 같이 귀에 ‘들려지는 순간’이 있었다. 미투운동은 서로의 경험에 대해 묻지 않는 대신에 자신의 경험을 종으로 횡으로 이어간다. 그리하여 미투운동이 드러낸 사회적 맥락은,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시간성과 공간성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위안부’ 서사규범은 국가주의적 대결과 국제법적 접근을 통해 부인주의자들의 선동에 맞서기 위해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데 집중되어왔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증언의 반복을 통한 사실의 증명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된 경험을 끌어안고 생존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서사적 상상력 그 자체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위안부’ 서사규범의 사회적 맥락은 재구성될 수 있다. 각주 ^ 허윤,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정성의 곤경– 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 , 『여성과 역사』 29호, 2018. ^ 소영현,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 『구보학보』 22호, 2019. ^ 권김현영, “4장. 미투운동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능동태의 페미니즘이 해낸 윤리적 정치적 전환”,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휴머니스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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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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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1] 박차순 1922년 전라도에서 태어남. 1942년 18세에 후난성, 난징, 우한에 4년간 동원됨.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피해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추운 겨울을 잘 지내고 있는지,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살을 에는 듯한 환경에서 한 해를 넘기는 것이 그들에겐 남들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1년부터 중국 회이룽장성(黒龍江省) 오지에서 내륙 깊숙한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 생존자들을 만나 왔다. 사진가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삶을 기록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박차순을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12월이다. 그는 우한에서 차로 두 시간을 더 들어간 샤오간(孝感)시 외곽에 살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길을 찾지 못해 그의 양딸과 여러 번의 전화 통화를 하고서야 겨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추운 날씨를 피하고자 두꺼운 외투와 털모자를 쓴 채, 가늘게 들어오는 햇볕에 왜소한 몸을 더 움츠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말로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무기력한 눈인사로 답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지역 특유의 사투리 때문에 베이징(北京)어는 물론이고, 우한 말로도 통하지 않아 그의 양딸을 통해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중국에서의 오랜 생활은 그에게서 고향에 대한 기억과 조선말을 빼앗아버렸다. 기억나는 조선말이 무어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 한국 지명뿐이었다. 뒤섞인 가사로 간간이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 아리랑만이 그에게 유일한 고향이었다. 인생의 얄궂음이 이런 건가 그의 어릴 적 기억은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는 것이 전부였고, 이후로 더는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엄마의 곁을 떠나 전주 부근의 외할머니와 백부(둘 이상의 아버지의 형 가운데 맏이가 되는 형)의 손을 오가며 키워졌다. 사춘기의 나이에는 식당과 술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고, 적은 임금 탓에 주인에게 빚을 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경성의 매춘굴에 팔려 갔고, 거기서 다시 중국의 위안소로 팔려 가게 되었다. 18살에 중국 후난성(湖南省), 난징(南京)을 거쳐 우한의 우창(武昌)으로 갔다. 그가 간 위안소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장제스(蔣介石) 동상이 보이는 곳이었다.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린 채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평상시에는 계급이 비교적 높은 군인이, 일요일에는 일반 병사 20여 명이 몰려왔다. 일본인 관리자가 모든 물품을 배급하고, 외출도 같이 해야만 할 정도로 생활이 엄격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서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을 일본 조계지[2]로 집결시켰다. 자신들의 앞날을 알 수 없는 여성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다시 잡혀와 일본군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무서웠고,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위안부’ 생활을 부끄럽게 생각해 결국은 남기로 했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도망쳐 나와 샤오간 시골 마을에 살게 되었다. 당시 우한 지역의 피해자들은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현지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박차순은 도망을 도와준 사람과 결혼을 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위안부’ 시절의 아픔이었을까,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갓난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그리고 1970년쯤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겹겹이 쌓여가는 힘 그가 사는 방은 창고를 개조해 햇빛 한줄기 들지 않아 습하고 냉기 가득한 시멘트의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방안에는 난방 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한 켠에 놓인 침대 위에 겨울 이불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따듯한 물주머니를 어루만지는 손등에 깊게 패인 주름, 도드라지게 노출된 핏줄과 검버섯이 그동안 그가 겪었을 고난을 말해주고 있었다. 겹겹프로젝트[3] 활동을 하면서 피해자를 위해 써달라는 후원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전달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돈을 직접 만지기 어려웠고, 후원금은 엄한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그들의 생활환경과 건강을 챙기는 일을 하기로 했다. 2013년 11월,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박차순의 집을 수리하고자 25명의 시민과 68명의 후원인이 나섰다. 그가 따듯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겹겹 회원들은 전기장판, 양모 이불, 겨울 생활용품 그리고 단열을 위한 건축자재를 비행기로, 버스로, 기차로 샤오간까지 손수 운반했다. 그의 방안으로 들어오는 냉기와 습도를 차단해 단열효과를 높이고,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벽은 이중으로 단열을 하고, 천장은 10cm 두께의 샌드위치 패널로 마무리했다. 온종일 공사를 지켜보며 초조해하던 그는 초저녁 잠을 청하다 공사가 걱정되는지 늦은 밤 깨어 방으로 왔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과 공사, 달라진 방의 모습과 새로운 가구로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모습이 그저 순진하게만 보였다. 같이 간 회원 한 명이 그에게 “무엇이 제일 갖고 싶어요?”라고 묻자 그는 더듬거리며 “엄마!” 그리고 “갖…고…싶…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고향의 기억은 없었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2017년 11월 박차순의 양딸에게 그의 안부를 묻던 중 그가 한 달 넘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에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회원 네 명과 함께 방문했다. 겹겹 회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 며칠 만에 한복을 만들고, 그가 기억할만한 고향 음식인 수수부꾸미, 주박[4]울외[5]장아찌, 단술 등을 만들어 그에게 전해달라며 한 보따리 보내왔다. 박차순은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우리를 반가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라며 내년에는 자신이 없으니 오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이듬해 1월 18일 그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장례식에 갈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사진 설명] 겹겹 회원들이 외벽의 곰팡이를 제거하고 흰 페인트로 칠하고, 따듯한 겨울나기를 위해 창고를 개조해 만든 방 전체를 단열하고 도배로 마무리했다. 그동안 박차순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처음으로 발 마사지를 받고 외식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 설명] 박차순이 어릴 적 살았던 전주에서 채취한 흙을 전해주고, 틀니 제작을 위해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지속된 허리통증과 심한 복통을 호소해 급히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병원에서는 적절한 치료가 없었지만, 박차순은 나흘 만에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퇴원을 했다. 각주 ^ 박차순이 “(나는) 내년에는 죽고 없다”는 뜻으로 한 말. ^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 ‘겹겹 프로젝트’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기록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140여 피해자를 만나 기록과 지원을 하는 활동으로, 안세홍 작가가 그 대표를 맡고 있다. (겹겹 프로젝트 홈페이지(https://juju-project.net/)에서 부분 인용) ^ 술지게미(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 ^ 참외과에 속하는 덩굴식물 기사 게재일: 20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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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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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침묵을 통과해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요컨대 깊게 내쉬는 한숨 소리, 참다못해 터져 나온 기침 소리, 고통을 억누르는 신음 소리 등, 미처 ‘말’이 되지 못했거나 혹은 말이 되기 전 ‘음성(音聲)’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소리가 그렇다. 그 밖에도 주변을 살피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눈동자라든가,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거나 손톱을 깨무는 등의 사소한 몸짓(행위) 역시 침묵 속에서만 발현되어 ‘소리’로 인식되거나 포착될 수 있다. 이 소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 주위에 ‘말’로서 산재해 있었으나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체계 및 언어생활 내에서 ‘말’의 범주로 승인되지 못했기에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소음’이나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로 치부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리는 소리를 단순히 어떤 소음에 지나지 않은 소리로 여기고 말 것인지, 아니면 말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그러한 존재의 가시화 여부와도 긴밀히 연관된다. 의미를 얻지 못한 말이 없어지고, 축소되어야 하는 소음으로 전락해 그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처럼, 자신의 말을 ‘말’로서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응당 가져야 할 존재 의미와 자신의 자리조차도 쉬이 확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로 긴 시간, 문학은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언어’를 다루는 최전선으로 그 가치를 단단히 다져왔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언어’라고 분류, 사용하고 있는 구조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체계가 가지는 적절성 및 영향에 대해 정밀한 검토나 성찰 없이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해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나마 시의 언어가 기존의 언어체계를 지키지 않거나 무화하는 방식으로 언어의 기능을 의심하고, 언어 바깥의 영역을 탐구/실험하는 등의 시도를 지속해오긴 했으나, 소설은 언제나 기존 언어의 기능을 강화하고 특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90년대 이후, 그리고 근래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기점으로 형성되었던 근대 (언어)체제의 산물이자 재현물로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문제점을 지적, 비판하는 비평적 흐름도 바로 이런 소설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에 사용되는 ‘언어’가 소수 집단을 배제하거나 소외시켰을 뿐 아니라 이들을 특정한 도식을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해 왔다면, 그간 우리가 향유해 왔던 소설과 소설 속 인물들은 얼마큼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구조 아래 우리는 소설에서 과연 도덕과 윤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소설의 가치가 보존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질문과 답변이 교차하는 가운데 재현물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재현 문제 역시 논외는 아니었다. 2015-2016년, 한국에서는 <제국의 위안부> 사태 및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증폭했다. 같은 시기 문화·예술 분야에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위안부’ 문제를 다룬 창작물(재현물)의 수가 급증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힘을 빈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작품 수 증가와 더불어 서사 내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겨났던 때이기도 하다. 과거 1990년대를 전후로 하여 발표된 작품에서 ‘위안부’ 피해자는 대개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한편, 2015년을 기점으로 하여 최근 발표된 작품의 경우, 대부분 실제 피해자의 증언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소녀, 혹은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여성 연대를 강조하는 서사화 방식이 특징적이다. 여성 신체를 성애화하는 과거 경향에 반해 피해자, 그리고 여성 간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현대의 흐름은 분명 얼마간 호전된 지점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소녀나 할머니의 모습으로 전형화된 ‘피해자 상(像)’을 반복적으로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마냥 이상적인 방식이라 낙관할 수 없다. 이는 반드시 ‘언어체계’를 경유하여야만 그 의미가 구성, 유통될 수 있는 ‘재현’이라는 방식 자체가 지닌 한계이자 문제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서 ‘재현’이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배제(누락)하거나 왜곡하고 어떤 ‘전형’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면 ‘더 나은 방식’의 재현만이 있을 뿐 실상 답을 특정할 수 없는 문제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2016년 장편소설 『한 명』(현대문학)을 시작으로 최근작 『듣기 시간』(문학실험실, 2021)에 이르기까지 김숨이 실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펴내는 동안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문제의식은, 그간 근대 언어체계에 의해 비가시화되었던 역사적 존재를 어떻게 서사 양식 안으로 들여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사유할 지점을 만들어준다. 『한 명』은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재현물이 급증하던 시기 발표된 작품 중 하나로, 실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참고, 인용한 것이 특징이다. 역사적 사건과 실화를 참고하거나 실제 증인의 증언 혹은 목소리를 인용한 사례가 『한 명』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김숨의 작품 속에서 각주 기호와 고딕체를 통해 강조된 인용의 흔적은 증언이 실제, 진짜임을 강조함으로써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숨이 실제 증언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이유는 작가의 말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소설적 상상력이 피해자들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까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상을 입힐까봐 조심”스러웠으며 실상 “그 증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 말했다. 즉 그는 애초 『한 명』을 집필할 때부터 증언(구술)을 소설이라는 언어체계 양식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정 정도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재현과 언어의 한계를 직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언어와 재현의 서사가 가지는 한계점 외에도 증언을 소재로 하는 재현물이 극복해야 할 또 다른 곤경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폭력의 경험과 기억을 모두 언어화하여 진술할 수 없다는 증언 불가능성의 문제다. 이는 죽음에 가까운 폭력을 경험한 생존자/피해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김숨은 작가로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말’에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전달할 수 없다는 이중적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 명』 출간 2년 후, 2018년에 동시 발표된 두 편의 증언소설집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는 김숨의 그러한 고민과 극복을 위한 실천이 잘 드러나 있는 텍스트다. 단순한 증언 기록집이 아니라 고(故) 김복동 님과 길원옥 님을 직접 만나 뵙고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여기에서 김숨은 ‘어떻게 쓰느냐’가 아닌 ‘무엇을 들을 것이냐’로 관점을 전환하여 재현의 문제에 접근한다. 두 분과 대화하는 동안 오갔던 말들을 포함해서 ‘침묵’까지도 ‘말’로 간주하여 텍스트로 들여옴으로써 차마 언어로 발화될 수 없었지만 신체에 선명하게 새겨진 상흔과 고통의 기억을 듣고자 한 것이다. 『한 명』을 지나 두 편의 증언소설집을 펴내기까지 고민의 과정과 경로는 최근작 『듣기 시간』(문학실험실, 2021)에서 더 자세히 드러난다. 구술 증언 채록자인 ‘윤주’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 증언을 책으로 엮는 프로젝트의 연구자로 참여하며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을 그린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가장 최근에 발표된 소설이지만 실상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를 작업하는 시기의 자신의 경험을 자전적으로 풀어 쓴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김숨은 스스로를 ‘작가’가 아닌 ‘인터뷰어’ 즉 ‘청자’의 입장에 두고 두 분의 말씀을 옮겨 적는 게 아니라 청해 ‘듣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애초 불가능한 작업이었”(『듣기 시간』, 문학실험실, 2021, 30쪽)을지 모를 받아쓰기를 포기하고 온몸으로 발화하고 있는 그의 말을 신체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는 해독할 수 없었던 그녀의 “눈의 말”(19쪽)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마침내 침묵까지도 대화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써 “받아쓰는 이의 문자 언어”(30쪽)가 아닌 “말하는 이의 문자 언어”(30쪽)가 증언으로 기록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23분이 넘게 이어지는 긴 침묵 속에서 비록 말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표정, 몸짓, 한숨, 눈빛, 얼굴빛, 시선, 눈동자의 떨림, 망설임, 눈물”(9쪽, 10쪽)이 내는 소리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아픔을 얼마간 전해 받을 수 있다.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님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김학순 님을 시작으로 이어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그대로 은폐되었을지 모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 폭력과 전시 성폭력 문제를 의제화함으로써 국경과 인종의 경계를 허무는 초국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년 성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괄시할 뿐 아니라, 이들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2021년 올해에만 국가에 정식으로 등록된 ‘위안부’ 생존자 중 세 분이 세상을 떠나, 이제 남은 생존자의 수가 열세 명이 되었다. 소설, 『한 명』의 가상적 배경으로 제시되었던, 생존자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더 이상 ‘가정’이 아니게 되었으며, 이제는 한 명 ‘이후’를 각오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즉 이들의 ‘말’을 잊지 않고 기록하는 일과 더불어 이 말들을 앞으로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를 모색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물론 많은 논의가 필요한 일일 테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너’와 ‘나’라는 구획된 경계를 넘어 여럿이자 하나로 연결된 사례를 경험/목격한 바가 있다.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용기를 얻고 ‘나도 피해자’라는 말을 하게 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사례가 그러하고, 근래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일어난 다양한 연대의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의 목소리와 존재를 지지대 삼아 이어질 수 있었던 ‘이어 말하기/쓰기’는 마지막 한 명의 생존자 이후를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이들의 목소리와 말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여럿인 동시에 하나로 연결된 몸과 몸을 넘나드는 공통 감각을 통해 우리의 신체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말해지지 않았거나, 말해질 수 없었던 ‘소리’들 까지 빠짐없이 들을 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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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지구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 영화 〈나는 부정한다〉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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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부정한다>(믹 잭슨, 2017) 드라마 / 미국, 영국 / 레이첼 와이즈 출연 / 110분 ‘지구는 둥글다’, ‘엘비스는 죽었다’를 어떻게 증명할까? 영화 <나는 부정한다>(믹 잭슨, 2016)는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엘비스는 살아있다는 것처럼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싸운 기록이다. 우리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만큼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영화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역사학자 사이의 명예훼손 재판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윤리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1994년 미국의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는 히틀러 연구자인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다. 립스타트가 자신의 책 <홀로코스트 부정하기>(Denying the Holocaust, Penguin Books, 1993)에서 데이빗 어빙을 역사 부정주의자라고 칭하며 그의 명예를 훼손했고, 이후로 여러 출판사에서 책의 출판을 거절당하는 등 생계를 곤란하게 했다는 이유다. 어빙이 사실 입증의 책임이 피고에게 있는 영국에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립스타트는 이제 법정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부정주의자들의 말하기 <나는 부정한다>에 등장하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의 주장은 익숙하다. 그는 생존자들의 기억이나 사료 등에서 작은 오류를 찾아, ‘이게 틀린 걸 보니 저 사람이 증언한 것은 다 틀렸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사소한 왜곡을 통해서 전체 그림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부정론자들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통해서 이미 만난 바 있다. 그들은 ‘정신대’라는 용어를 문제 삼고, “군표나 돈을 받았으니 성매매다. 국가는 책임이 없다”와 같은 주장을 한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표적>(니시지마 신지, 2021)은 일본군‘위안부’의 생존을 일본에 최초로 보도한 전(前) 아사히 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의 법정 소송을 통해 부정론자들과의 재판을 기록한다. 일본의 ‘위안부’ 부정론자를 대표하는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는 우에무라의 기사가 ‘사실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사쿠라이는 우에무라의 기사에 실린 김학순 님의 증언을 거론하며 ‘정신대’는 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위안부’가 아닌데, ‘정신대’라고 하고 있다면서 증언의 신빙성을 훼손시키려 한다. 심지어 일본군‘위안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범죄이기 때문에 일본이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의 꼬투리 잡기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일본군‘위안부’나 유대인 학살을 지시했다는 문서를 제시하라는 요구다. <나는 부정한다>의 첫 장면도 여기서 출발한다. 어빙은 대학에서 열리는 립스타트의 북토크에 찾아와,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의 학살을 명령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1000달러를 주겠다며 돈다발을 흔든다. 청중은 수군거리고 경비원은 그에게 나가라고 요구한다.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사실이 아니라는 방식의 문제 제기는 마치 홀로코스트 부정도 하나의 역사 해석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스스로를 공식 역사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재야 학자로 포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식 역사는 주류의 시선만을 반영하여 새롭고 급진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독학으로 공부한 비주류의 이야기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아카데미의 학자들도 모르는 것이 있다, 혹은 평범한 사람이 더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방식의 수사학은 꽤 성공을 거둔다. 지금도 유튜브를 비롯한 1인 미디어 채널에서는 역사 부정론자들의 포스팅이 이어진다. 마치 새롭고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해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탈진실(post truth)’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이때 포스트는 진실이 퇴색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불편한 진실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진실에 도전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1] 홀로코스트나 일본군‘위안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대안적 진실’을 선택한다. <나는 부정한다>에서 데이빗 어빙은 히틀러에 대한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부정한다. 홀로코스트가 없었던 것이 된다면, 히틀러가 비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역사를 긍정해야 한다는 ‘애국적’ 사고가 ‘위안부’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데 이른다. 생존자들의 말하기 부분을 확대해서 사실을 호도하는 부정론자들의 방식은 생존자의 증언을 둘러싸고 첨예해진다. 홀로코스트와 일본군‘위안부’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빠르고 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와 <허스토리>(민규동, 2018)는 일본군‘위안부’의 증언을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설정한다.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나문희)은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증언을 하며 일본 관료들에게 호통을 치고, <허스토리>의 서귀순(문숙)은 법정에서 자신이 평생 숨겨왔던 비밀을 꺼내놓는다. 그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론장에 밝히는 증언 장면은 재판의 승패를 좌우하며, 피해생존자의 압도적인 현현을 재현한다. 그러나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재판정에 세우지 않는다. 생존자들이 직접 증언하겠다며 찾아왔음에도, 립스타트가 자신의 변호사에게 그들의 증언을 여러 차례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지 않겠다는 것일까? 립스타트 재판의 변호사 줄리어스(앤드류 스캇)는 생존자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그 때문에 재판장에서 어빙에게 공격당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작은 실수에도 역사부정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1945년 이후 이 증언으로 돈을 얼마나 벌었습니까?”라는 식의 공격이 법정에서 심문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줄리어스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자의 존재가 증언의 선제 조건임을 보여준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피해 당사자의 증언을 생존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배제할 수 있다. 이것이 청자의 윤리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사상사를 연구하는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郎)는 증언을 듣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전 배제(foreclosure)’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자연스레 말해지지 않는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자가 있어야만, 그 이야기들은 발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폭력적 상황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말을 포함해 ‘우리’의 언어 영역 자체가 ‘사전 배제’를 추인하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위험성을 슬그머니 용인하면서 어떤 사람들의 삶을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2] 생존자들을 재판정에 세우지 않겠다는 변호단의 결정은 ‘듣지 않을’ 청자에게 증언자들의 삶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는 순간, 재판을 받는 것은 어빙이 아니라 생존자들이 된다. 지금 일본의 역사부정론자들이 일본군‘위안부’ 증언자들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운동의 전면에 소녀상과 나란히 선 ‘우리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대변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얼마만큼 가서 닿았을까? 소녀상을 세우고, 김학순, 김복동 등의 이름을 꼽을 수 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가 한 명만 남은 상황을 가정하며 쓴 소설이다. 여기에는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들이 사라지면, 기억도 함께 사라질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가 사라진 이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부정주의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증언은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많은 증언이 고통의 기억을 계속 되살려왔던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제대로, 충분히 듣고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누구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나는 부정한다>의 초반부에서 립스타트는 줄곧 강력하게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립스타트에게 홀로코스트는 의견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그런데 재판을 거치며 립스타트는 보다 적극적으로 역사부정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TED 강연에서 그는 홀로코스트 부정주의자들이 거짓말을 ‘의견’으로 만들기 위해 글을 쓰고, 학술지를 만들고, 책을 출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사실과 거짓말을 섞어 대중을 호도하는 상황에 대항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고 청중을 설득한다.[3] 이는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응과 연결된다. 영화에서 변호단 신참의 애인은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되지 않냐고 이야기한다. 홀로코스트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목소리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들은 것은 무엇일까? 제대로 듣기부터 시작해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때다. 각주 ^ 『포스트트루스-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 리 매킨타이어 지음, 김재경 옮김, 두리반, 2019. ^ 도미야마 이치로, 「증언 ‘이후’」, 『전쟁, 여성, 폭력: 일본군 ‘위안부’를 트랜스내셔널하게 기억하기』, CGSI EPUB, 2019, 54~55쪽. ^ 데보라 립스타트, 홀로코스트 부정이라는 거짓말의 이면, TEDXSkoll, 2017(https://www.ted.com/talks/deborah_lipstadt_behind_the_lies_of_holocaust_denial?language=ko 2021.11.5. 검색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