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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2 - ‘세렌디피티 인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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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투텐? 원투원! “아. 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렛 그랜마 리 카운트 텐.” “할머니, 하나부터 열까지 세보시래요.” “하나, 둘, 셋…” 10월 25일 아침. 이용수 선생님 댁 거실은 마이크 테스트가 한창이다. 영국 다큐멘터리 취재진이 선생님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했다. 카메라, 마이크 기술 테스트. 연출자와 카메라맨이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틈에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민 선생님은 뒤에 있는 프로듀서의 팔을 톡톡 두드린다. “<아이 캔 스피크> 봤어요?” “노.. 이즈 잇 다큐멘터리?” 느닷없는 선생님의 말 걸기에 선생님 허리에 마이크를 채우던 프로듀서가 관심을 보인다. “노, 잇츠 무비.” 통역사가 선생님 대신 답한다. 미 하원에서 ‘위안부’문제 관련 결의안(HR121)을 통과시킨 이야기가 담긴 이용수 님에 관한 영화라고. “와우~! 한 번 봐야겠어요.” 프로듀서의 대답을 받아낸다. 탁월한 방송 코디네이터의 감각. 원투텐? 하나부터 열까지 갈 것도 없이 ‘원투원’으로 치고 나오신다. 당신을 취재하러 왔다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아닌가. 엄한 곳으로 에둘러 가기 전에 당신이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를 콕 짚으신다. 어떤 코디네이터도 능가하는 감각적인, 진격의 코디네이트.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수야 선생님은 본인의 침실 문을 스윽 열어 주신다. 화사한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침대 머리맡에 펼쳐진 병풍 속에는 서예를 즐기고, 한가로이 나물을 캐고, 바람결에 연을 날리는 어린 수야(용수의 ‘수’. 어린 시절 가족들이 부르던 아명)가 있다. “하도 원통해서 내가 처녀 적에 이랬다고 이걸 맞췄어.” 프로듀서는 연 날리는 모습이 제일 좋다고 했다. 다들 그림에 넋을 놓고 있는 와중에 선생님은 방의 형광등을 탁! 켜신다. ‘조명빨’도 놓치지 않는 방송 전문가의 면모. 비비안나 다음엔 화장대 거울에 달린 십자가 목걸이로 이동하신다. 이 묵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현직 교황 프란시스의 선물이다. 교황님께 직접 선물을 받은 사람이 지구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 진귀함에 모두가 놀랄 즈음, 십자가에 입 맞추시고 고개를 들어 “비비안나” 세례명 투척. “오, 뷰티풀.” 프로듀서의 감탄사는 어쩌면 예견된 수순일 뿐. 이것이 끝인 줄 알면 쑤야 선생님을 띄엄띄엄 안 것이다. 초록색 파우치 안에 고이 접힌 하얀 미사포를 살포시 꺼내신다. 카메라도 없이 속출하는 방송‘분량’들. 프로듀서는 이 모든 것을 나중에 다시 촬영해도 괜찮겠냐고 여쭙는다. “찍어야지. 기도하는 것도 찍어야지.” 그러라고 준비해 두신 것 아니겠는가. 단박에 촬영 하이라이트와 ‘분량’까지 코디네이트 완료! 곱은 거 이번엔 야외촬영이다. 촬영진을 태운 승합차는 시내 한복집 앞에 멈춰 섰다. ‘금오실크’. 선생님이 자주 가시는 한복집이다. 댁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코리안 드레스 뷰티풀-”을 외치는 또 한 명의 진격의 캐릭터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용수 선생님과 한복집 사장님은 방송을 위한 촬영 스케치에는 간단히 임하셨다. “곱은 거(=고운 것) 함 입히볼까?” “응.”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영국서 온 프로듀서에게 대뜸 한복을 입어보라고 종용하신다. “노노노노. 쿄오와 다분 이소가시이까라.” 일본어를 잘하는 영국 여성 프로듀서는 당황하여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오늘은 바쁘다고 완곡하지만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소가시꾸 나이. 다이조부.” 흔들림 없는 ‘그랜마 리‘의 단호한 “다이조부”(=괜찮다)로 게임 오버. 한사코 겉옷만 걸쳐보겠다던 프로듀서는 ’치마저고리‘부터 입어야 된다는 그랜마 리의 성화에 결국 탈의실로 끌려간다. “빨리 나오세요~~!” “아니야. 천천히~~!” 탈의실 앞에서 목을 빼고 조르는 그랜마 리와 ‘천천히~’를 외치는 사장님의 우당탕탕 주문들은 통역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촥! 촥!” 양쪽으로 커튼이 걷히고 프로듀서가 나타났다. “와~ 이뻐 이뻐…!” 가게 안은 물개박수와 탄성으로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진분홍 치마와 은박이 수놓인 흰 저고리, 화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한복이 프로듀서와 썩 잘 어울린다. 자신들의 연출작에 뿌듯해진 두 총괄 연출가들은 “사진 좀 찍어두자”며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으시다. 오마이갓 다음 행운의(?) 코리안 드레스 모델은 카메라맨. 순순히 무장해제를 선언했다. 타국에서의 촬영 첫 날. 취재진의 긴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두 연출가 앞에서 카메라맨은 온 몸을 두른 우주복 같은 촬영 장비를 하나씩 해체하는 중이다. 남자 한복은 처음 보는 것이라 기대된다며 프로듀서도 이 ‘장꾸’(장난꾸러기) 대열에 합류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생각만해도 우섭다 “하이고 우섭다. 생각만 해도 우섭다.” 카메라맨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선생님은 연신 “재밌다”를 연발하신다. 카메라맨이 키가 큰데 과연 옷이 맞을지 궁금하다고 프로듀서도 거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이윽고 바지저고리에 도포까지 성장(盛裝)을 한 카메라맨이 등장했다. “모자! 머리 머리, 빨리 빨리.” 패션의 완성은 갓이다. 사장님의 주문에 직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갓과 옷 여밈 장신구들을 챙겨 내온다. “까르륵 꺄르륵” “어메이징~”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질 듯한 명랑한 소용돌이. “우째 그게 또 맞는 게 있노.” 다들 반신반의했던 의혹은 걷히고, 키 큰 카메라맨에게 맞춤한 듯 딱 떨어지는 핏. 갓을 쓴 그의 모습이 어엿하다. “양반, 양반” 어느 틈에 그의 옆에 선 선생님은 양반의 복장이라며 기념 촬영 중간 중간에 적절한 해설을 더하신다. 메즈라시이 프로듀서가 방금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메즈라시이…” “에-엔니” 선생님은 사진을 가리키며 ‘드문, 희귀한(메즈라시이)’ ‘영원한(에엔니)’이라고 반복하신다. “아. 소우데스네. 포레버-” 프로듀서가 화답한다. 번갯불에 회오리바람 같은 ‘뷰티풀 코리안 드레스’ 런웨이는 성공적이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 두 연출가의 피날레 촬영이 이어진다. 앙드레김 패션쇼의 마지막 포즈, 이마가 닿을 듯 말듯 우아한 이 몸짓의 메시지는 아마도 ‘이 순간 주인공은 나야 나’. 트렌드세터 다음 행선지는 고즈넉한 한옥 마을에 자리 잡은 힙 플레이스, 카페 아눅이다. 단골 쑤(야)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출타 중이던 사장님이 돌아오셨다. 갓 구운 베이커리를 손수 내오신다. 선생님은 이 집의 양송이 크림 스프를 특히 좋아하신다. 오늘도 사장님은 선생님을 위해 양송이 크림 스프를 각별히 포장해 내어 주신다. 사장님은 처음엔 이용수 선생님이 ‘의외로’ 이곳을 자주 찾아주셔서 놀랐다고 한다. 트렌드세터(Trendsetter)에게 늘 따라 붙는 수식어 중 하나가 ‘의외’이다. 선생님은 이 곳에서 힙스터들과 어울리며 요즘 감성을 즐기신다. 오늘의 화제는 단연 카페 아눅 바리스타님의 타투였다. 왼쪽 팔뚝 전체에 커피나무를 새겨 넣은 바리스타님의 문신을 본 일행들은 ‘대단하다’며 몰려들었다. 조선 사람이기도 한 쑤야 선생님은 ‘좋다’ ‘신기하다’는 말 대신 연신 바리스타님의 팔뚝을 쓰담 쓰담 하신다. 2021년 대한민국을 사는 조선 힙스터의 유연한 리액션. 셀러브리티 인 대구 “그랜마 리 이즈 셀러브리티 인 대구.” (리 할머니는 대구의 셀럽이구나.) 선생님을 뵌 지 반나절도 안 되어 프로듀서가 질문인 듯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다. 셀럽의 필수코스는 포토타임이다. 카페 앞에서 사진 촬영 요청을 수락하신 선생님은 시크하게 엄지와 검지를 포개 스몰하트를 날려주신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메라맨이 슬그머니 자기 손가락을 겹쳐 본다. 그의 심장도 추출 성공. 한 주먹도 필요 없고, 손가락 두 개로 심장을 꺼내 흔들며 깔깔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문득 ‘대구의 힘’이 떠올랐다. ‘喜움’ 일본인들의 ‘혼마찌‘[1]였던 종로 한 복판에 희움이 살아 있는 것도, 그 희움에서 고(故) 김순악 선생님이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고 하셨던 것도, 이용수 선생님이 오늘 마실을 다니시며 골백번 “재밌어”를 연발하시는 것도 다 깊은 내력이 있음을 알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끌려간 출발점인 고향을 다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구의 생존자들은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 땅에서 웃고 떠들고 잠을 청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희움 역사관’ 등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곳에는 희움을 ‘喜움’이라 부르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응달진 날에도 뜻밖의 기쁨을 동력으로 삼는 일, 형태가 없었던 즐거움을 두 손으로 주조하는 일,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쥐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흔쾌히 ‘예’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주 ^ (편집자 주) 本町. 일본인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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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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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됨’의 문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말은 이제 어지간히 분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여성혐오 세력, 안티페미니스트 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고,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이를 제재하기는커녕 혐오 세력의 눈치만 보는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말은 재천명되어야 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이 글을 통해 ‘미투’(MeToo·성폭력 고발 운동) 시대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는 의미를 점검하고자 한다. 여성인권(women’s human rights)이라는 가치가 국제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근래의 일이다. 국제사회는 냉전 체제의 종식 이후 사회권과 자유권으로 이원화되어 체제 경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인권을 보편적 이념으로 제시하고자 했고, 이때 인종, 민족, 종교 등의 이슈와 함께 여성인권이라는 범주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는 1993년 비엔나에서 열린 제2차 유엔세계인권회의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세계여성회의에서 ‘여성인권’이 구체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여성인권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은 아마도 “여권은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일 것이다.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당시 미국의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인권은 여권이고 여권은 인권이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는 전시 성폭력, 지참금 살인, 여아살해 등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의 사례를 예로 들어 ‘여성으로서의 권리’가 보편적 인권과 별도로 논의될 수 없음을 설파하였다. ‘인권=여성인권’임에도 여성인권이라는 동어반복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됨’ 그 자체로 경험하게 되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폭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성매매, 아내구타가 대표적이다. 성폭력, 성매매, 아내구타는 여성 개인에 대한 폭력을 넘어 여성 집단을 예속화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 여성과 여성 억압적 제도 사이에는 여성 스스로가 동의하는 모양새를 취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문화적, 절차적 개입이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성됨’은 성역할 규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극단에 전시 ‘위안소’ 제도가 있다. 그러므로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문제로 사유한다는 것은 (‘남성됨’과 극단으로 상반되는) ‘여성됨’에 대한 구조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을 견지한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증언이 있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1년이다. 이러한 증언은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정치적 수준의 민주화가 달성되는 과정에서 여성운동 단체가 성장하고 활동이 가시화되었던 시대적 배경 속에 자리한다. 특히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 사건이 교도소 내 단식투쟁을 동반한 피해자의 적극적인 공론화를 통해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성폭력에 대한 민중의 비판적 문제의식이 만들어질 수 있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쳐서야 “남편도 자식도 모두 죽고 없는 지금 눌러온 한을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다”는 김학순의 바람이 실현될 수 있었다.[1] 냉전 종식 이후에야 국제사회에서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될 수 있었듯이, 한국에서도 1990년대가 되어서야 김학순의 증언이 청취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었다. 과거 여러 지면을 통해 드러난 김학순 이전의 ‘위안부’ 피해자가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김학순의 증언을 ‘최초’로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혜인은 이를 두고 “당시 한국 사회는 이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2] 어쩌면 당시 청취자들은 이들의 호소를 인식할 만한 인권의 프레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학순의 증언은 ‘여성됨’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여성인권이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청취된 최초의 피해 증언이었다.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여성인권이라는 국제사회적 프레임 역시 제3세계를 비롯한 전 세계 여성 개인들의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폭력’을 청취하면서 만들어졌다. 동시대라는 지평에 놓여있긴 해도 엄밀히 따지면 시기적으로 김학순의 증언은 비엔나 인권회의를 앞선다. 특히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르완다와 보스니아의 내전 당시 발생한 전시 강간, 무력 분쟁에서의 성폭력 피해 문제가 주요한 관심사로 대두되었다.[3] 그밖에 1세계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글로벌 페미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도전을 통해 여성인권의 보편성은 끝없이 의심되고 도전받으며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 인권의 보편성과 상대성이라는 쟁점, 인권의 담지자로서의 여성 개인과 집단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여성인권이라는 쟁점은 이처럼 서로를 견인하며 종합되었다. 자유권, 사회권 외의 연대권으로 분류되곤 하는 3세대 인권이라는 말이 대표하듯이 인권 패러다임은 항상 진화 중이다. 그렇다면 여성인권 이슈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서 서로를 어떤 방향으로 견인해야 할까? 2. 여성해방의 문제 일찍이 “서구의 시선 아래” 제3세계 여성들의 현실을 단일한 방식으로 분석하곤 하는 유럽중심 여성주의를 비판했던 찬드라 모한티는 전 세계 여성들이 반자본주의 실천에 개입해야 한다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4] 많은 전문가들 역시 “인권이 전문적 권리체계로만 치달으면 거시적 사회변동과 분리된 미시적 개입 테크닉으로 왜소화”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5] 진화의 과정 중에 있는 여성인권의 문제의식 역시 협소한 권리 증진의 실험실과 재판장을 넘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과 연동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이 쓴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꿈지모 옮김, 동연, 2013)라는 책에 함께 생각해볼 만한 일화가 등장한다. 이 책의 부제는 “힐러리에게 암소를”이다. 베이징 여성회의 몇 달 전 힐러리는 그라민 은행의 여성 전용 소액대출(microcredit) 사업을 통한 여성들의 자립 성공 사례를 확인하고자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다. 방글라데시의 농촌마을에서 여성들과 회견을 가진 힐러리는 농촌여성들로부터 “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암소가 없다고 답한 힐러리에게 여성들은 “불쌍한 힐러리! 그녀는 소도 없고, 자신의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라며 동정했다고 한다.[6] 이러한 사례는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단순히 원조 대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정에 적극 참여하며 자급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훈훈한 일화다. 하지만 암소를 소유한 방글라데시 여성과 암소가 없는 힐러리라는 대결은 어쩐지 범박하다. 각각 사회권과 자유권을 상징하는 듯한 모양새이다. 우리는 이 경제체제가 둘을 대결시키고 취하는 이득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높은 이자 수익을 통해 달성한 그라민 은행의 성공은 누구로부터의 수익이며 어디로 재투자 되었는가? 채무자 여성의 수를 늘리는 발전 전략이 왜 가난한 여성들의 해방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힐러리가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언급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사례들은 여성 억압적 문화에서만 기인한 문제인가? 결국 힐러리와 방글라데시 여성의 대결은 자유권과 자유권의 경합에 머물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에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 온 사연을 듣고서 자신의 과거도 털어놓게 되었다.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중략)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7]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고 했을 때 이 장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명의 식민 지배의 피해자는 왜 가난한 여성 노인의 형상으로 등장한 것일까? 폭력의 제도화와 여성 배제의 경로 문제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명예대표를 지낸 이효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정대협 활동 초기 생존자 지원 활동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했다.[8] 위로행사, 생존자 복지활동,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생활대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의 활동들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무시하고 배제했던 이들을 경제적으로 보살피는 활동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지급받았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경제 성장이 촉진되었으나, 국제사회적 여성인권에 대한 명분도 제기되지 않았던 시기 이 돈이 ‘위안부’ 피해자를 대상으로 지급될 리 만무하다. 이후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닌,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후 복지비용 명목으로 ‘위안부’ 피해자에게 생계비와 임대주택 입주권이 지급되고 의료혜택이 주어졌다. 이러한 이슈는 여성인권의 시각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김학순의 증언은 경제 발전과정과 사회 구성에서 배제된 경로와 위치성을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들의 불인정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통해 현시한다. 우리는 성폭력 ‘사건’ 이후, 혹은 ‘미투’ 이후 피해자에 대한 따돌림, 해고, 승진 누락, 좌천의 많은 사례를 목격했다. 법정에서의 승리가 여성들의 사회적 승리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누가 피해를 증언하며 피해자가 되길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간 여성인권 개념을 통해 피억압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국내, 국제사회에 자신의 피해를 드러낼 수 있었다면, 이제 여성인권 개념을 통한 사회적 재편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인권 의 가치를 고려한 배상 문제는 사회의 재분배 전략과 함께 가야 한다. 피해자의 말을 청취하고자 하는 여성주의의 윤리는 현재 우리가 도달한 성장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인지하고 배제된 자들 중심의 사회적 재편을 모색하는 정치학의 같은 말일지 모른다. 각주 ^ 조현욱, “나는 정신대” 처음 밝힌 김학순할머니, 중앙일보, 1991.8.15. ^ 한혜인, 우리가 잊은 할머니들...국내 첫 커밍아웃 이남님, 타이에서 가족 찾은 노수복, 한겨레, 2015.8.7. ^ 베티 리어든,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황미요조 옮김, 나무연필, 2020, 223쪽. ^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경계없는 페미니즘』, 문현아 옮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5. ^ 조효제, 비엔나 인권체제 25년, 한겨레, 2018.6.5. ^ 마리아 미즈, 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꿈지모 옮김, 동연출판사, 2013. ^ 이희자, 김학순을 추억하다 1: 김학순 할머니와 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https://kyeol.kr/ko/node/179 ^ 이효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 『한국 여성인권운동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9, 218-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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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통해 본 영화 〈침묵〉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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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수남 감독이 제작하고 있는 장편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가편집본을 보며 박 감독님과 감독님의 따님이자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박마의 씨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전작인 <침묵>(박수남, 2017)의 한국 쪽 제작에 도움을 드렸던 인연으로 나는 감독님의 신작에도 함께 하게 되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 감독이 일생 찍어왔던, 하지만 긴 시간 깡통 속에 갇혀 있던 과거의 필름 촬영본들이 복원되어 주 재료가 되는 영화이다. 이는 근현대 동아시아의 식민지배와 전쟁, ‘군함도’의 현장 촬영 등을 포함한 조선인 강제징용 및 원폭 피해자 분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반성과 사과는커녕 극단적으로 우경화 되어가고 있는 일본 사회에 일갈하는 이야기이다. 박수남 감독이 평생을 바쳐 이야기하고자 했던 조선인 피해의 역사가, 묻혀 있던 소중한 자료들을 통해 보여지고 들려질 것이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많은 부분 전작 <침묵>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영화 <침묵>을 내외적으로 확장하는 자료들과 내러티브, 그리고 박수남 감독의 삶의 역사가 담겨질 예정이다. <침묵> 제작 당시 박수남 감독과 여러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있다. 박 감독님은 자신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많은 부분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거나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박수남 감독의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남북한 그리고 일본 모두는 국가로서 자격 없음, 피해 당사자인 재일조선인과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만이 말할 권리와 외칠 권리와 배상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을 하는 듯했다. 그 이유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이었고 내가 조금의 반론을 할라치면 ‘그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북한과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은 물론, 남한사회 시민단체들에 대한 실망이 컸고, 특히나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의 배신과 변절에 상처가 많았다.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함께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박수남 감독의 글과 영화를 꾸준히 응원하고 지지해온, 이제는 노년이 된 소수의 일본 시민운동가들뿐인 것 같았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하며 소수자로서 살아왔을 박수남 감독은 코마츠카와 사건(재일조선인 문제)[1]을 통해 민족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평생 강제징용 조선인, 원폭피해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오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찾아냈고 이 문제들의 해결이 인생의 큰 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박수남 감독은 영화 속에서 민족 개념을 앞세워 이 피해의 역사를 드러내는 데에 집중했고 그런 그의 태도가 다소 경직된 이야기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널리즘 다큐(탐사보도/고발다큐)에 기반한 박수남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침묵>에서 주요 사건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 내에서의 활동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고 다른 영화적 장치 없이 등장인물의 인터뷰와 내레이션으로 그 의미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익숙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상 문제로 가졌던 긴 공백기를 끝내고 다시 영화운동에 나서는 박수남 감독에게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해 보였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분들을 ‘언니’라 부르며 가족처럼 지냈던 그이기에 이전 영화들과 달리 감독 개인의 역사, 관계의 역사를 이야기로 만들어 영화 속에 넣어보자고 제안했다. 잠시 생각하던 박 감독님은 ‘그렇게 합시다’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렇게 감독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이 생략되고 압축되어 영화 <침묵>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비국민으로 살아야만 하는 일본 땅에서 조국인 남북한은 박수남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는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본인을 둘러싼 모든 불의와 부당함과 차별과 부조리함에 맞서 싸워왔다.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박수남 감독, 조금의 틈에도 공격당하기 일쑤였던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다른 소수자들과 연결되어 함께 싸울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것이었다. 다른 소수자들의 삶을 동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의 운동이 아니라 어쩌면 집단의 저항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소수자 운동을 할 때 가장 주의할 점에 대해 ‘절대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누구든 100% 믿지 않기’ 등이라고 말했었다. 자신을 포함해 소수자들의 자기 극복의 목적과 이를 실천하는 과정이 다른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구조 속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 그리고 소수자들 각각의 차이와 그 정도를 이해하는 것, 이를 공감하고 존중하기 위해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더불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는 꿈꾸고 있었다. <침묵>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말하는 국가와 민족은 소위 남북한 땅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개념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분단 전 ‘조선’이라는 실체 없는 국가와 민족을 지칭함을 넘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서 그리고 존재 자체로서 국민국가의 신화에 균열을 주는 세계 인민으로서의 발화인 것이다. 정착했지만 정착할 수 없는 사람들, 부유하며 끝없이 불안한 마음들, 자신을 부정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이제 이들이 각자의 존재로 증명하는 역사 긍정에 주목하게 된다. 세상 모든 불의한 것들을 부정하고 그것들과 싸워나가는 박수남 감독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보게 된다. 편집 중인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한 장면,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박수남 감독이 일본의 ‘60대 맹인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입학식에서는 으레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불렀던 상황인 것 같다. 기미가요가 흘러나오자마자 보란 듯이 당당히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리는 박수남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부정한다는 것, 이미 체화된 언어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박수남 감독 특유의 시니컬함과 당당함 뒤에 잠깐이지만 고립되고 외로움 가득한 사람이 보였다. 어쩌면 그녀 전체 삶을 관통해왔을 불안함과 외로움 그리고 침묵의 시간들, 그 침묵의 시간을 형상화하고 재현하기 위해 펜 대신 카메라를 선택한 그녀, 이제는 건강이 허락지 않아 예전처럼 현장을 누비진 못하지만 과거의 필름 화면들을 들으면서(감독님은 시력 악화로 영상의 소리만으로 이미지를 파악하고 있다) 따님과 함께 치열하게 편집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강한 힘을 느낀다. 한 개인의 삶이 정치가 되고 우주가 되는 경험을 한다. 이 시간이 ‘침묵’을 넘어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전하기를 희망한다. 각주 ^ (편집자 주) 1958년 당시 18세였던 재일교포 이진우가 일본인 여학생 두 명을 살해한 사건. ‘이진우 사건’이라고도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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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그들의 싸움에서 우리의 ‘문제(question)’를 재발견하기: 학술 콜로키움 〈증언 이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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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없는 “정의의 집”과 진실 없는 역사 전쟁 지난 4월 28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학술 콜로키움 <증언 이후: 일본군'위안부' 피해 재현의 윤리와 폭력>을 개최하였다. 이번 콜로키움 말미에 발표자 중 한 명인 김수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대리 전장으로서의 한국 역사와 일본군‘위안부’”라는 말로 현재 일본군‘위안부’ 사회·인권·학술 운동이 맞닥뜨린 전쟁 같은 상황을 요약했다. 조금의 부족함도 지나침도 없는 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 그리고 국내외 정치와 국제 외교적 셈법의 격랑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두고 충돌할 때마다 그간 쌓아온 운동의 노력과 성취는 침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근래의 사건들로는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이른바 ‘정의연 사태’ 그리고 이번 콜로키움에서도 화두에 오른 ‘램지어 사태’에서 그 파장은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증언과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던 지난 30여 년의 경이로운 운동의 도정이 진상 규명과 사과, 화해 없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 막다른 길로 순식간에 뒤바뀌거나, 그녀들의 목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복화술에 의한 것인 양 그녀들의 운동 주체성과 진정성을 박탈하는 일들이 공공연히 벌어졌다. 이러한 형국 속에서 문득 60여 년 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날카롭게 스케치했던 정의 없는 “정의의 집(배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풍경이 떠올랐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서두에서 이른바 유대인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의 핵심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심판하기 위해 열린 예루살렘 재판이 ‘정의’를 다시 세운다는 명목하에 마치 한 편의 ‘쇼’처럼 수행되고 있는 양상을 꿰뚫어 보았다. 이 재판 이면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민족주의적(종족주의적) 이분법에 기초해 이제 막 건국된 이스라엘 국가의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시온주의적 욕망과 이 재판으로 인해 다시 거세어질지 모를 국제적인 반독일 정서에 대한 서독의 우려가 함께 요동치면서 정작 ‘정의’라는 본질이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유대인들의 분노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20세기 인류 역사의 전체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인간의 폭력성과 비이성적 광기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집합체인 아우슈비츠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아렌트의 교훈은 지금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맞닥뜨린 ‘진실 없는 역사 전쟁’, 그러니까 진실을 내세우지만 진실에는 관심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 역사 전쟁의 상황에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무용한 싸움으로부터 재발견이 요청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령 이번 콜로키움 라운드테이블에서 논의했던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모르고 있는가”와 같은 문제―를 설정하고 성찰함으로써 운동의 패러다임을 갱신해 나가는 쓸모 있는 지혜를 발휘할 때인 것이다. 콜로키움 1부 발표 중 「증언과 증언 ‘사이’를 청취하기: 증언의 사회적 의미 획득/부과 방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사를 다시 돌아보며 다양한 주체들의 초국적 연대가 갖는 역동성을 재발견하려 했던 하나의 시도, 2부 발표자 에밀리 정민 윤(Emily Jungmin Yoon)의 일본군‘위안부’ 증언에 대한 ‘찾은 시(found poem)’와 같은 또 하나의 시도 그리고 한국에서의 ‘위안부’ 전시가 부딪히는 비장소성과 고도의 정치적 대립을 동시에 넘어서기 위한 역사박물관의 도전적인 시도. 이런 시도들이 모이고 축적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싸움에서 우리의 문제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 ‘위안부’ 증언과 재현 근저의 ‘본질주의’ 문제 “일본군‘위안부’ 피해 재현의 윤리와 폭력”이라는 콜로키움의 주제가 시사하듯, 흔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험이라고 표현되곤 하는 ‘위안부’ 피해에 대한 재현은 종종 언어를 초과하거나 언어로는 유실되고 마는 경험을 언어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언어로 간명하게 재현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폭력적이지는 않은가 하는 등의 문제를 던진다. 이러한 문제의 근저에는 재현(representation)으로는 동일하게 재현전(re-present)할 수 없는 대상의 본질이 내재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에 법적 증거의 권위를 부여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그러한 본질주의가 작용한다. 이지은의 발표에서 언급되었던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삶과 경험이 ‘살아있는 증거’이자 ‘증거로서의 증언’으로 인식되는 경향은 ‘진상’ 규명이라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목적과 연관성을 지닌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 또는 ‘본질’은 그 경험의 주체인 당사자에 의해서 드러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달리 말하면, 재현이라는 2차 과정을 거치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이 일본군‘위안부’ 문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은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이른바 사회적인 시선의 2차 가해를 감수하는 커밍아웃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촉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에 대해서도 지적하는데, 이 딜레마 역시 ‘위안부’ 증언과 재현의 본질주의가 낳는 모순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질주의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이 ‘위안부’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일정하게 규정된 전형적인 피해자상(피해자의 표상: representation)과 일치하지 않을 시, 오히려 그 당사자의 존재와 증언이 부정되는 모순 또한 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지은의 논의는 당사자의 삶과 경험을 ‘살아있는 증거’로 인식할 때 피해자 생애 전체에 ‘위안부’로서의 삶의 진실성을 강요하는 폭력이 가해질 수 있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한편 「귀 기울인 응시를 위하여―현대사박물관에서 ‘위안부’ 문제 재현하기」는 ‘위안부’ 재현의 한 방식인 전시가 맞닥뜨리는 비장소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위안소 유적지가 남아있지 않은 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의 ‘위안부’ 전시는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동일한 장소 또는 바로 그 현장에 서 있는 체험’을 관람객에게 제공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박물관의 해법은 피해 생존자들이 스스로를 ‘살아있는 증거’로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 현장성의 부재를 그녀들의 육성과 육체성으로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김수진 학예연구관은 피해 생존자의 납판 초상과 증언하는 육성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하여 관람객이 그녀들의 존재와 이야기 그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재현 전략을 구사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육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재현은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실감이 마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인식에 앞서 주어지는 듯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토론자인 이나라는 피해 생존자의 “육체성과 현존성”을 경험하는 일이 피해 생존자들이 겪은 재난에 대한 역사 속 “침묵과 부재의 흔적을 지우는 일과 같지 않”다고 지적한다. ‘살아있는 증거’로서 피해 생존자들의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종종 램지어 사태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의 반격에 위태로워지는 현실은 현전에 대한 재현의 본질주의적 환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함을 역설한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 존재에 대한 진실의 문제는 단순하게 그 존재의 ‘본질’로 수렴되는 것도, 그것으로써 획득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알거니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남성중심주의의 역사와 정치·사회 제도, 권력 구조와 법체계가 복잡하게 얽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성에 대한 환상은 강력하여 다른 한편으로 영상 자료의 권위로써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증명하려는 경향으로 지속되고 있기도 하다. 3부 기조 발제 「공공 기억에서 시각적 자료 활용의 성별성」에서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조선인 ‘위안부’ 추정 여성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자료가 미디어를 통해 대중적으로 유통되면서 마치 그러한 영상 자료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사실 또는 진실을 판정하는 권위를 지닌 듯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는 경향을 짚는다. 여기에 비단 영상 매체의 기술이 담보하는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찰 국가’인 미국 정부가 보관한 자료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권위에 대한 신뢰가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쟁 ‘성범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발제자인 김한상이 지적했듯, 영상 매체를 통해 ‘위안부’의 성폭력 피해가 스펙터클로 소비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일본군‘위안부’ 증언과 재현의 본질주의에 내장된 윤리적인 문제가 쟁점화된다. 3부 기조 발제 이후 전체 토론에서 명확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존재론과 인식론의 근본 체계까지 검토해야 할 거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깔린 본질주의를 타파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론으로 아무런 구체적인 실천 방법도 이론적 해법도 없이 말하는 것은 이번 콜로키움의 결론도, 이 글의 주장도 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이 문제를 다양한 사안들 속에서 발견하며 인식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질주의적인 환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문제를 재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의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학술 연구와 운동의 방식은 ‘합의’나 ‘화해’처럼 명확한 매듭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매듭이 잘못 매듭지어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국을 맞이하지 않도록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끊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문제의 가닥을 고르고 얽힌 쟁점들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3. 증언을 연장하고 운동을 확장하는 일 “Why don’t you guys just get along? The guys: Japan and Korea. Meaning: move on” 이번 콜로키움에 참석했던 시인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A Cruelty Special to Our Species』의 권두 시편 ‘An Ordinary Misfortune’에 실린 어느 캐나다인 친구의 질문이다. 이 순진함을 가장한 폭력적인 질문의 구도,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마치 한일 양국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지나간 과거를 둘러싸고 반복되는 무의미한 싸움의 전장처럼 단순하고 납작하게 인식되는 구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포스트콜로니얼, 포스트모던, 트랜스내셔널 시대의 역사학, 사회학, 문학, 정치학 그리고 인권과 평화, 페미니즘 운동을 교차하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는 점은 그러한 노력을 더욱 강력하게 요청하는 요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납작하게 만드는 그들의 싸움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를 재발견하는 실천으로 증언의 연장과 운동의 확장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장과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정치·사회·문화적 실천은 결국 이번 콜로키움의 논의를 통해 그 문제성을 재확인한 재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광활한 침묵의 문학사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서사 아카이빙을 수행한 장수희의 작업이나 세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위안부’의 증언들을 ‘찾은 시’의 시적 발화로 재구성한 에밀리 정민 윤의 작업은, 난제로서의 일본군‘위안부’ 증언과 재현에 도전하는 시도이자, 앞으로 올 그러한 시도들에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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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당신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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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라는 말에는 따옴표가 붙어 있다. 국가적 성 동원을 미화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은폐하는 완곡어법에 유보의 뜻을 표명하기 위함이다. ‘위안부’의 초기 용례는 1938년 일본 경찰과 육군성 공식 문서에서 발견된다.[1] 그것은 전쟁이 사무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날마다 피해를 상상하지 않은 채 명명할 수 있도록”[2] 정화된 언어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를 위로하는 존재’라는 성역할 고정관념 안에서, 여성의 성을 군수물자로 보급한 일제 공권력과 전시 행정의 폭력성을 비가시화한다. 피해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생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여성운동이 만들어낸 “피해자의 치욕에서 가해자의 범죄로”의 성폭력 패러다임 변화 덕분이었다. 전통적으로 전시 강간은 상례로 묵인되면서 피해 여성의 수치로 여겨져 법적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연방 붕괴와 내전 당시 발생한 집단강간이 전시 성범죄 문제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시 강간을 우발적이고 개인적인 ‘사고’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수행된 전쟁 범죄로 파악하는 ‘성노예’ 금지 국제 사법 규정이 출현한 것이다.[3] 때맞춰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 실무그룹에서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가 1993년 8월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론화되었다.[4] 한국의 정대협과 일본 및 아시아의 시민단체들은 이후 유엔과 유럽 및 미국 의회, 민간법정들에서 전시 성폭력 및 성노예 프레임을 가지고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2020년 5월 25일, 이용수 님은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를 성노예로 지칭하는 것에 반감을 표시했다. “미국 사람 들으라고, 미국이 겁내라고” 하는 더러운 소리[5]라는 것이다.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강박적으로 유보의 뜻을 담아 따옴표 쳐진 위안부라는 기호에서, 따옴표를 뗀다면, 괄호 안에 우리는 어떤 이름을 적어야겠는가이다. 도대체 한국 사회는 지난 30년의, 아니 1945년부터 기산한다면 77년의 ‘위안부’ 역사로부터 무엇을 알게 된 것일까? 정부 등록 피해자 240명 가운데 살아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헤아리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치 형사소송에서 당사자가 사망하면 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피해자들이 사라지면 소멸된다고 여기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아가, ‘위안부’ 제도는 실증되고 인정한 ‘사실’인데, 왜 ‘위안부’는 ‘문제’로 남아 있을까. 여기에서 문제화,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정부 등록과 피해구술 채록은 역사학자뿐 아니라 여성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의 개입과 활동으로 시작되고 유지되었다. 그런데 항상 최종 진실의 판단을 ‘편협한 의미의 실증’에게 맡기려는 반복되는 시대착오적 습관은 태만하고 단순하다. 진상의 규명이 사실 그 자체가 말을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이해관계와 입장들로 구성된다면, 식민지배, 전쟁, 권위주의 국가폭력 과거사에 대한 증언이 특정 맥락에서 가지는 수행성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나치 범죄의 가장 절실한 증인은 절멸 수용소에서 죽은 동료들이라고 역설했다. 시대에 대한 완벽한 증인은 없다. ‘위안부’ 생존자들 또한 전시 성동원과 ‘죽음정치’의 궁극적 증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 몫까지 함께, 자신이 누구인지, 전쟁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커밍 아웃’했다. 그리고 이제 그 분들도 따옴표 쳐진 ‘위안부’라는 호칭을 가진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증언 이후의 삶보다는 과거의 피해에 생존자들을 정박시키는 ‘피해자’라는 이름 또한 ‘위안부’라는 따옴표 쳐진 기표의 질적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들이 겪은 사건의 폭력성은 되돌릴 길이 없다. 오카 마리는 “‘서발턴’이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담론적 폭력을 당하지 않고서는 표상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여된 이름”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을 묻는 일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부를 때 교섭되고 있는 것을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하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속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현재의 무력함을 극복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6] 그러므로 지금, ‘한 명’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부 등록 생존자 숫자를 세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240명과 20만 명 사이에서 ‘가라앉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가라앉고 있는 자들을 ‘구조(救助)’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생존자가 말하기를 통해 커밍 아웃을 했다면, 청자들은 그 증언을 통해 앎을 획득해 가는 비커밍 아웃할 책임이 있”[7]다고 한 도미야마 이치로의 논의를 상기하게 된다. 구조화된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말할 때, 그 앞에는 반드시 마주한 다른 얼굴들이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 그들에게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밝힐 차례다. 각주 ^ 박정애, “총동원체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의 착종 연구: 정신대의 역사적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59(2), 2020, 63쪽. ^ 제임스 도즈 지음, 변진경 옮김, 『악한 사람들: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다』 (파주: 오월의봄, 2020), 115쪽. ^ 크리스틴 친킨, “대한민국 법원으로 간 ‘위안부’ 생존자들, 마지막 도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자료집, 30-31쪽. ^ 세계일보 2014.8.29. https://www.segye.com/newsView/20140828004633 2022.6.10. 검색완료. ^ 연합뉴스 2020.5.25. https://www.yna.co.kr/view/AKR20200525115300053 2022.6.10. 검색완료. ^ 오카 마리 지음,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서울: 현암사, 2016), 28-29, 254쪽. ^ 권김현영, “침묵은 말이 되었지만 말은 의미가 되었을까?”, 『전쟁, 여성, 폭력: 일본군 ‘위안부’를 트랜스내셔널하게 기억하기』(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기억의 연대 e-시리즈, 2019), 70쪽에서 인용. 같은 곳에 실려 있는 도미야마 이치로, “증언 ‘이후’: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이미 타인의 일이 아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