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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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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영문웹진 KYEOL에 게재된 “Women’s Solidarity in Our Troubled Times of Gendered Violence and War“를 국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철학자 라다 이베코비치(Rada Iveković) 교수와 인류학자 백영경 교수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대담에서는 남성화된 전쟁과 여성화된 피해라는 기존 틀을 벗어난 토론이 이루어지리라 기대된다. 두 연구자들의 역사적 통찰과 연대를 향한 비전이 더해진다면, 전쟁의 젠더화와 특정 기억의 형성 과정 뒤에 있는 국가 통제, 민족주의, 가부장제의 삼위일체를 서서히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사회주의의 붕괴와 여성에 대한 역풍 백영경 역사적 맥락에서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가장 잘 알고 계실 유고슬라비아의 분할과 해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요.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사회주의가 해체되는 동안 일어났던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분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전쟁의 젠더화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도요. 라다 이베코비치 1989년 이후에 공공연히든 아니든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경험했던 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사회 재산과 공유 재산이 하룻밤 사이에 팔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대대적이고 급격하게 이루어진 이런 매각 사태를 주도한 세력은 지역의 조직폭력배, 정치인, 마피아들로, 이들은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새로이 자본주의를 이끌어갈 과두 지도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산업, 토지, 인력이 헐값에 이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들은 외국인 투자자와 협력자들과 함께 착취한 자원을 팔아넘겨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죠. 사회주의 몰락 직후에 구 사회주의 국가 주민들, 특히 구 소련 주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 기대 수명의 감소에 시달렸습니다. 약탈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주민들은 필요한 물건이나 시설을 확보할 수 없게 됩니다. 무법 상황이 펼쳐졌고, 유럽 내 탈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대규모로 갱스터리즘이 확산되었습니다. 인권은 설 자리를 잃었고, 여성 인권의 상황은 더 심각했죠. 1989년 직후 유고슬라비아에서처럼 전쟁이 발발하자 모두에게 최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특히 여성에게는 더 그러했습니다. 이 가운데 약탈과 법치주의의 전면적 파괴가 지속되었고, 이런 과정이 전쟁과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여성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항상 합의, 협상, 동맹,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양한 유형의 현 지배 체제, 남성 지배 체제 하에서 타협이 가능한 대상인 것이죠. 여성은 사회주의 시절에 보장받았던 인권을 오히려 탈사회주의 시대에 상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인권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파기된 상황이었어요. 더는 과거처럼 권리 보장을 근거로 국가에 지원을 요청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 시기에 재가부장제화(repatriarchalization) 흐름과 무관한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백영경 분단과 통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제 보편적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보편주의(universalism) 혹은 보편적 민주주의가 현재 맥락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다 이베코비치 제가 생각하는 보편주의는 인간 전체, 즉 우리 모두를 평등한 기반에서 포용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 자체가 전체를 의미하죠. 이 보편적인 전체는 수많은 특수성과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특수성들 가운데 지배적인 것이 보편주의가 되는 일이 정치적으로 자주 일어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원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특수성, 모든 차이, 모든 소수자, 모든 감수성이 가시성과 권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보편적 민주주의의 추상적 얼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보편적 전체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보편성을 옹호한다고도 표현하겠습니다. 그동안 사회 과학과 좌파 운동의 내러티브에서는 보편성이 기각되어 왔죠. 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보편주의자이기도 하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여성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러길 원하죠.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는 보편적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물론, 이상적인 설명이 그렇고 실제로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가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거나 해 왔던 예들을 통해 우리가 그 이상에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여성의 경우는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지만, 종속되는 쪽입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원하는 건 그 이상입니다. 또한 보편적 민주주의는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라서 실제로 적용 시에 민주주의를 담보할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기에 개념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우리는 의회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죠. 이상보다 현실은 항상 부족한 법입니다. 하지만 이상향과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추상적인 경향을 띠게 됩니다. 백영경 현대적 형태의 젠더 갈등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또한 현재 상태에서 민족주의를 규정하는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라다 이베코비치 민족주의가 항상 갈등의 원인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다른 이유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조차도 민족주의의 형태를 취하는데, 세계화에서의 전반적인 파편화(fragmentation) 현상 때문입니다. 세계화에는 두 층위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세계성(globality)의 층위, 즉 우리가 상호 연결된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파편화된 세계화라는 상황에서 폭력,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 더 현저화되고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성은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여성들이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의 반발과 마주했죠. 많은 나라에서 여성 살해와 여성 대량 살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성의 생명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이 말이죠. 이런 특징은 비교적 최근부터 생겨났지만, 예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죠. 그렇기는 해도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한편, 전쟁 중에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바로 대규모 강간입니다. 이 역시 예전부터 있어 온 일이죠. 한국의 '위안부'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위안부'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여성은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합니다. 이런 문제는 항상 존재해 왔지만, 최근에는 #MeToo 운동과 다른 페미니스트 운동, 학술 운동을 통해 더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죠. 이 모든 것이 미완의 이야기로, 세대를 거쳐 계속될 그런 일입니다. 요약하자면, 여성에 대한 반발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재건에 기본적으로 뒤따른 현상들이 재가부장제화, 군사화, 원시화, 그리고 폭력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들은 '여성 파업(women's strike)'의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개념은 노동 계급의 역사와 여성의 역사 모두에서 설득력을 얻습니다. 폭력의 규모가 커지면 동시에 여성의 저항이 일어납니다. 한 현상이 다른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폭력이 더 심각한 양상을 띨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생각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여성뿐 아니라 여성화된 개인과 신체, 또는 여성과 동일시되는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꼭 여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색인종, 장애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 이민자, 외국인, 사회 계급이나 신분 계급의 하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도 구성될 수 있죠. 모두가 미래를 위한 공동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여성만을 위해 싸울 수 없어요. 우리에게는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여성 평화 운동과 2015년 구 유고슬라비아 여성 법정 백영경 2015년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 여성 법정에 직접 참여했던 당신의 경험에 한국 청중들과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질 듯합니다. 앞서 언급하신 폭력과 저항의 동시적 진행이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에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페미니스트 세대입니다. 당시 저는 젊은 나이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고, 페미니스트 문학 연구를 위한 워킹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연구하고, 읽고, 쓰고, 출판하는 일을 했죠.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사회주의가 붕괴된 상황에서 경제적 이유로 발발했습니다. 연방 정부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도움을 청할 만한 최고 기관이 부재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지역 정체성(그리고 민족주의)에 몰입하는 결과가 빚어졌는데, 더는 연방 국가에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유고슬라비아는 연방 국가로 6개 공화국 중 5개 공화국의 국민들이 각기 다른 국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 국가들에서도 지역 정체성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민족성 중심주의(ethnicism)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민족성은 보통의 경우 국적보다는 하위의 구분이지만, 원리 면에서는 국적과 동일한 구분입니다. 이 모든 이데올로기(정체성주의, 민족성 중심주의, 민족주의)는 여성 혐오와 닿아 있습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와 관련해서 볼 수 있는데요. 그들은 가부장제 질서를 재도입하려 하고, 그럴 때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여성의 권리를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죠. 곧 여성들은 평화 유지를 위해 그룹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 운동으로서 시작된 움직임이었죠. 여성들은 새로운 국경을 넘나들며 그룹을 형성하고, 소통하고, 탈영병들과 협력 그룹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는 희생자였던 여성들, 즉 '위안부'와 같은 대량 강간의 희생자들, 혹은 전쟁 남자들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었다는 의미에서 '희생자'들이었던 여성들도 참여했습니다. 이 페미니스트 운동은 구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다양한 여성 그룹과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평화 캠페인으로 시작했고, 종전 후 오랜 뒤인 2015년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5년은 우리가 '구 유고슬라비아 및 승계국을 위한 여성 국제 법정(Women’s International Court for the Former Yugoslavia and Successor Countries; 이하 '여성 법정')을 열었던 해였습니다. 이는 전쟁 기간과 그 이후의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 페미니스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활동은 처음부터 여성의 사회적 재건을 위해 시작된 하나의 긴 과정으로서 중요성을 지녔죠. 그 의의는 여성은 물론 전반적인 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주체성의 재건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반적인 페미니스트 혁명을 의미했죠. 우리는 여성이 전시 및 전후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희생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 법정을 이보다 더 앞당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 간에 연대를 구축하려면 이 모든 선행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서로 다른 국적 하에서 남성들은 서로를 죽였지만, 여성들은 기꺼이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구조적 불평등으로서의 여성 문제 백영경 한국의 경우 과거 가부장적인 국가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표현들은 '위안부' 관련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전시 성폭력을 범죄로서 규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의 상황도 달라졌고, 이제는 여성의 고통을 수치와 불명예의 문제보다는 민권 침해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국가가 여성의 구원자이자 여성 인권의 궁극적인 보증자로 인식되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지하고 계시듯, 여성 시민의 몸은 아직도 국가나 민족의 영토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내러티브와 상상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조언이나 견해를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한국과 유고슬라비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유고슬라비아의 여성들은 전쟁 동안 국가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국적 공동체, 민족 공동체에 의해 '국가화(nationalized)'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역의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에 의해 국가화된 것입니다. 또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있었던 지역들의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여성 문제를 놓고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협력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여성을 서로 사고 팔거나 인신매매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들 공동체는 각각 가장 강력한 가부장제의 회복이라는 목표에서는 뜻을 같이 했습니다. 어떤 국가 당국도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혹은 '위안부' 문제의 제도화를 통해서 보여줬듯, 전시 강간을 타 국가와의 외교 관계나 대화의 대의나 무기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문제 자체가 국가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문제는 탈국가화되어야 하죠. 그렇게 될 때 여성은 국가의 문제를 넘어 여성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여성 문제와 젠더 질서는 사회와 국가 모두의 구조를 반영합니다. 사회와 경제 체제, 정치의 측면에서 이 문제들은 구조적이며 또한 근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우리는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고,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치렀던 대가는 2015년 여성 법정 당시 언론의 철저한 무시였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미 알고 있죠. 집권자들은 끈질길 정도로 이런 문제들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기를 거절합니다. 우리는 정론(政論)이나 여론, 혹은 정치적 여론의 측면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카이빙(기록 보관)의 측면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성 법정에 참여한 여성들은 생존해 있었고, 우리는 그 여성들과 또 다른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자료가 유엔에 제출되었고, 유엔은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잘 알고 계시듯, 1990년대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성폭력 및 강간과 관련한 두 주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바로 결의안 1820호와 1888호입니다. 결의안과 법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 대한 사회적 해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교육과 사회 사업이 필요하죠.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는 것은 국가만이 아닙니다. 사회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사회 모두 수직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서로에게 일조합니다. 여성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 협력자를 사회 내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정(認定)으로서의 정의 백영경 이러한 '위안부' 문제, 젠더화된 전시 폭력, 또 다른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정의의 문제로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의의 의미를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지요? 이 문제들에 대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또한 정의는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어떤 초국가적인 형태가 되어야 할까요, 혹은 보다 지역적인 형태를 취해야 할까요? 당신의 의견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정의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법이 존재합니다. 국제 재판소에서는 국제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아직도 삶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보스니아에서는 상당수의 여성이 민족주의 전쟁 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습니다. 죽은 남성들의 미망인과 어머니들은 그곳에 남았거나 다른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더는 그곳에서 살 수 없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정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돌려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NGO와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유족과 함께 인정(認定)을 위한 작업을 해나갈 수 있죠. 여기서 인정은 희생자로서의 지위와 상실에 대한 인정,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정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정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법정이나 재판소에서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들에게서 인정의 여론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여성 단체 중 '우먼인블랙(Women in Black)'이라는 이름으로 베오그라드에서 활동 중인 단체가 있습니다. 동료들과 놀라운 업적을 이뤄 온 스타샤 자요비치(Staša Zajović)가 설립했죠. 이 단체는 전쟁 기간 내내 활동했고, 현재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전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터뷰, 연구 자료, 거리 행동에서 빼놓지 않는 것은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리 행동에서 정기적인 행사는 단체 회원들이 검은 옷을 입고 베오그라드의 주요 광장에 서서 지역 민족주의자들을 고발하는 증언에 나서는 일입니다. 활동가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국내의 다른 지역과 타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일들을 증언합니다. 매우 용감한 행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민족주의자들의 공격과 폄하에 자주 노출되어 왔고, 주류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야말로 정의의 필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정이 무엇을 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활동을 통해 전범인 가해자들에게 그들이 응당 짊어져야 하지만 알고 싶어하지 않은 책임을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영경 이런 유형의 폭력 문제들이 법정으로 가면, 초점이 지나치게 '보상'에, 즉 한국적 맥락에서는 '금전적 보상'에 맞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정의 여론 형성을 가장 중요한 첫 단계로 강조해주신 점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매우 중요하지만 완료되지 않은 단계죠. 아직은 그렇다고 보여요. 그것이 이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는 이유이고, 여성 법정이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여성 단체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사안에 대해 활동하면서, 다른 새로운 사안들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 세대로 이 과업을 이어가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세대 교체가 진행 중이고 이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민자 문제도 다루어야 합니다.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은 유럽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로인 '발칸 루트(Balkans Route)'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가는 나라마다 좌절을 경험합니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결국 어떤 해결책도 없이 이들 나라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유럽 전역과 국경 지역에서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끔찍한 상황입니다. 이민자 여성들이 겪는 문제도 있습니다. 자녀를 둔 많은 수의 여성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강간, 인권 침해, 믿기 힘든 수준의 폭력과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합니다. 그렇기에 이 여성들에 대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고, 여성 단체들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를 돕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일은 돌봄 노동의 일부로 간주되죠. 우리는 전통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이 경우에는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전통도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은 현재 이민자로서 예외에 가깝습니다. 다른 지역 출신의 이민자에 비해 우크라이나인은 유럽연합에서 상대적으로 환대받는 대상입니다.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유럽 전역을 이동하고, 유럽연합 내에 발을 들이고, 숙박 시설은 물론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는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들은 또한 백인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민자들은 이와 같은 관심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우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럽 우월주의자들이 곧 우크라이나인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월주의자들은 곧 그들을 침입자로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아직까지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 전역의 여성 단체가 이들 이민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민족주의 백영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어떤 동기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계를 대상으로 착취의 기회를 확대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강력한 욕구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무엇이 러시아를 지금과 같은 국수주의(ultra-nationalist) 전쟁 범죄 기계로 변질시키고 있는지, 그 동기에 대한 관점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확실히 전쟁 기계라고 말할 수 있죠. 제 견해로는, 러시아의 경우 민족주의가 전 국민을 균질화하는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계화의 산물인 일반화된 민족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푸틴을 비롯해 유사한 전쟁을 치렀던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지를 얻으려 민족주의를 옹호합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우리는 이런 전략이 얼마나 빠르게 성공을 거두는지 목도했고, 충격을 받았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항상 TV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에는 탱크 한 대와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전 국민을 선동하고 국가적 문제라는 프레임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탱크 사진 한 장과 동영상 한 편, 그리고 지역 민족주의의 개념이 무엇이든간에, 이 모두에 한마디만 덧붙이면 충분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그들이 우리 국민에게,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한 짓입니다." 이런 식이었죠. 유고슬라비아 전쟁 초기에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푸틴은 손쉬운 전략인 민족주의를 통해 지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가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고 소련이나 그 영토를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재건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푸틴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에서 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무기한으로 지속될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런 일련의 계획은 민족주의의 측면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는 직접적으로 국제적이거나 초국가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영향은 전 세계적일 것입니다. 한편, 푸틴 개인의 문제도 확실히 부분적으로는 이런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고슬라비아에도 지나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혔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푸틴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 해결책은 없습니다. 푸틴에게는 뛰어난 수완이 있고, 현재로서는 러시아 국민 다수의 지지도 있으니 아마 오랫동안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유럽연합이 공약을 내놓고는 있지만, 이들 국가들이 개입을 원치 않는 까닭에 우크라이나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적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관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태에 개입할 것이고, 어느 정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역시 개입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전쟁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여성이 치르는 대가는 더 큽니다. 백영경 무척 복잡한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자주 가부장제를 독버섯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하룻밤 사이에 생겨나 그 자리에 있나 하면 갑자기 커버리죠.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이런 비슷한 점을 지적해 주신 것 같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만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형태의 민족주의는 다른 반대되는 형태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죠. 민족주의가 한 가지 형태만을 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적어도 둘 이상이거나 그보다 더 늘어나야 만족하죠. 전 세계적으로 이 민족주의야말로 우리 시대의 전쟁 기계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성에게는 이를 가능케 할 에너지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성은 민족주의적 편협함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국경을 넘어 협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에도, 이 전쟁에 개입된 국가의 여성들조차 국경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남성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지금 우크라이나인의 상황처럼, 남성은 전쟁에서 싸워야 하는 존재이기에 국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은 공격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죠. 이것이 여성이 부정적이고 불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누리는 이점입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오가면서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연대를 형성하며, 함께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운동(activism)을 통한 학습: 세대 간 여성의 연대 백영경 이베코비치 교수님께서는 오늘 다양한 생각과 지성뿐 아니라 인내와 용기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이 위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동료 여성 시민,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나 제안이 있으실까요? 라다 이베코비치 우선 백영경 교수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고, 그래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내가 해줄 만한 이야기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기꺼이 나누고 싶지만요. 그래도 꼽아 보자면, 내가 보기에 페미니즘이 한 가지 특별한 난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운동을 이어나가는 일입니다. 어떤 페미니스트 단체가 특정한 일을 해온 경우, 자신들을 대신할 사람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단체에 젊은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젊은 세대에서는 기꺼이 도전에 응하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젊은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표현할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이러한 어려움은 세대 교체, 아마도 세대 차이에서 연유하는 듯합니다. 또한 각 세대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의 차이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우리는 오늘날 젊은 여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거나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한국의 '4비(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이런 접근은 매우 독창적이기도 하고, 결혼을 비롯하여 그들이 원치 않는 이 구체적인 네 가지가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놀랍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세대에서 성취해야 하지만 성취할 수 없을 모든 일들에 대한 약속으로도 느껴집니다. 저는 인류 공통의 입장에서 나이 든 활동가와 젊은 활동가가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에게 배울 뿐 아니라, 기성 세대도 젊은 세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운동을 통한 학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운동을 통해 정치에 대해 배웁니다. 이는 우리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특징입니다. 우리는 운동을 통해 개인적인 정치적 경험을 얻어 정치에 대해 학습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두드러진 새로운 특징으로,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을 두고 함께 일할 협력자를 얻게 되면, 서로가 중시하는 사안과 관점을 경시하는 대신 존중하고, 힘을 합쳐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아니요, 당신들은 여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이것이 여성 운동과 액티비즘이 오늘날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결코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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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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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들어가며 1990년대 초기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이하 ‘’생략)재판이 일본에서 총 8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인 2건, 재일한국인 1건, 중국인 2건, 대만인 1건, 필리핀인 1건, 네덜란드 1건입니다. 관부재판의 특징은 피고 일본국의 수도 도쿄가 아니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재판소에 제소되었다는 점과 원고 10명 중 위안부 원고는 3명, 그 외는 여자근로정신대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1심 재판에서 위안부 원고가 승소하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재판이라는 점입니다. 부산 정대협(고 김문숙 회장)에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피해자 각각 두 분이 1992년 12월에 야마구치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회와 유엔에서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제소하였습니다. 후쿠오카에 피해자분들을 모시고 재판지원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회원 10여명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나누면서 환영회를 열었습니다. 원고의 한 분이셨던 박두리 님은 “일본인은 모두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는 거냐”고 말씀하시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지원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진행된 추가 제소에서는 위안부 원고 3명, 여자근로정신대 원고 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원고들이 관부(関釜) 페리 연락선을 타고 와서 재판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통칭 ‘관부재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원모임의 연회비 3,000엔과 후원금은, 원고들의 재판을 위한 연 4회 도항비, 체류비, 관부재판 뉴스레터 발행비용 등으로 썼습니다. 원고 분들은 우리 집과 교회에서 숙박하고 지원모임 회원들과의 식사 모임과 교류회를 통하여 점차 친분과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지원자들이 경애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원고들은 재판에서 일본국 대리인에게 피해를 호소하고 규탄하였습니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회복하시며, 재판을 이유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게 되었습니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판결이 나왔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가혹한 피해가 받아들여져 승소하였습니다. 일본정부에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명하는 획기적인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자근로정신대 원고는 “위안부 원고에 비해 피해가 가볍다”는 이유로 패소하였습니다. 그 후, 원고와 피고 모두 상급 법원에 항소하였습니다. 히로시마고등재판소의 재판관은 국가에 ‘위안부’ 이슈와 관련하여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줏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심은 2001년 3월에 패소하였으며, 2003년 3월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되었습니다. 여자근로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2021년 1월과 4월에 서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문의 “위안부 모집”항목에 “학교 등을 통해서 모집하는 방식”, “근로정신대 *** 동원 방식”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재판소에 제출한 역사 인식과 관련한 내용은 정대협(정의연)이 작성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수 님은 2020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정대협의 윤미향 님을 향한 기자회견을 열어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는 다르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용수 님은 관부재판,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재판 지원 모임에 여러 차례 참가하셨습니다. 당시 교류회에 참석한 근로정신대 원고 한 분이 “해방 후, 정신대인데 위안부라고 잘못 알려져서 부끄러웠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용수님은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 제도를 만든 일본정부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노하셔서 발언자가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용수 님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가운데 위안부라고 여겨져 가정폭력이나 이혼을 당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고생하며 산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셨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2020년 회견에서 이용수 님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정대협을 비판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초등학교 6학년 혹은 졸업 후 1~2년 정도가 되는 소녀들이 1944~45년에 걸쳐 담임 선생님에게 “너는 애국을 위해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해라, 일하면서 여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라고 권유받아 지원하였습니다. 도야마현 후지고시 공장에 1,060명, 나고야 미쯔비시 비행기 공장에 300명, 시즈오카현 도쿄아사이토 공장에 30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남성 노동자가 군대에 간 사이 빈 자리로 남아있던 선반공 등의 중노동을 감당하였습니다. 식사량도 적고,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밤에는 미군 공습에 위협당하는 가혹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속아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결국 야윈 얼굴로 부모 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사기와 강제 노동에 대해 사죄하라, 급료를 돌려달라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 재판에 임했습니다. <관부재판> 한국어판 출판 계기와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문제의식 2018년 한국에서 관부재판을 주제로 그린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2018)가 제작되었습니다. 지인이 보내준 DVD를 보고, 그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박OO님(익명)이 일터에서 위안부로 여겨졌고, 원고들이 재판 때 일본에 방문하면 돌멩이가 날아들었으며, 재판에 우익이 몰려들어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숙박했던 여관에서 차별받는 등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 일색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일본사회가 위안부 차별로 만연해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당시 일본사회는 외국인 전쟁피해자에게 호의적이었고, 60건 이상의 전후 보상재판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모임을 만들고, 변호사들은 무보수로 자원하여 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며 일본 사회를 향한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을 방치할 수 없어서 감독에게 항의문을 보냈더니 감독과 프로듀서가 후쿠오카를 방문하였습니다. 감독은 “여자근로 정신대에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증언집이 한국에서 출판되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세 분의 증언이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후지코시 공장실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상과 다른 내용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증언집에는 “공장이 공습으로 불에 타고 일이 없어지고, 회사로부터 아오모리현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30명 가량 보내졌다”는 내용도 있는데, 후지코시 공장에 공습피해는 없었고 패전을 맞을 때까지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다른 부분도 저희가 아는 내용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국한하여 생활 지원을 하는 점,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고통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자 감독은 당황하며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라는 자막을 영화의 첫 장면에 넣겠다고 답하고 돌아갔습니다.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일 감정을 그리는 영화가 잇달아 제작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관부재판 내용과 일본사회의 실상을 전달하고 싶어 『관부재판』 한국어판(2021, 도토리숲 출판)을 냈습니다. 저는 소녀상이 근로정신대의 소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의연한 모습의 소녀상은 13세부터 15세 때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의 분위기와 닮아있습니다. 위안부로 동원된 농촌의 가난한 소녀, 세 갈래로 머리를 땋은 그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역사인식의 공동연구를!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이 외에도 동원 과정, 피해자 수, 패전 당시의 처우 등에 관해서 일본과 한국 두 사회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국의 대립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악순환에 빠져 있습니다. 문제의 극복을 위하여 위안부 이슈 관련 역사 인식을 한일 시민들이 함께 다각적으로, 냉철하게 연구 검토하면서 공동의 인식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을 글]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지음, 고향옥 옮김, <관부재판: 소송과 한국의 원고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한 28년의 기록>(서울: 도토리숲, 2021) (책소개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1223391) ·<민족의 희생자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관부 재판의 기록(시모노세키)>,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07. ·김문숙 펴냄, <소녀와 할머니: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해 온 시간의 기억>,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18. ·허윤, “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35권 (2021). ·박정애, “총동원체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의 착종 연구: 정신대의 역사적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아시아여성연구> 59(2) (2020). 번역: 퍼플레이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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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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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1.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제작하기까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 인터뷰를 통해 안태근 전 법무부 국장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이후 한국 사회는 거대한 미투 운동의 시간으로 돌입했다.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2019) 제작을 위해 한창 촬영하던 과정에서 만난 출연자들도 이 미투 운동의 흐름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 역시 제주도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직장 내 성폭력 1심 무죄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를 촬영할 때 함께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미투 운동을 의심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집회에도 참여해 같이 소리를 질렀다. 2심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아침 일찍 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떨렸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재판정에 모여들었던 여성들의 목소리와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여러 현장의 열기를 다큐멘터리를 통해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렇게 생겨났다. <애프터 미투>(2021)는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와 여성들의 일상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다큐멘터리다. 세대가 다른 여성 감독들의 시선을 모으고 연대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됐다. 우선 박혜미, 남순아 PD와 함께 기획팀을 구성했다. 기획팀은 ‘미투 운동’이라고 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상징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서 도출된 사회적 과제들을 정리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목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 기획안은 언론에 주로 노출됐던 현장들과 이슈를 골자로 했다. 이후 박소현, 이솜이, 소람 감독이 연출로 합류하면서 기획안은 변경됐다. 당시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 성차별적 강간문화가 드러나면서 새로운 기술이 여성들을 더 착취하고 있는 구조를 목도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여성들이 어떤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지, 미투 운동에서 놓친 질문은 무엇인지가 우리 안에서 중요해졌다. 제작진으로 합류한 감독들도 각자가 접속하고 있는 현장, 혹은 접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장이 존재했다. 이에 제작진은 치열한 논의 끝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과 미투 운동에서 ‘잊혀진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수정된 기획안에서는 미투 운동 과정에서 비교적 덜 주목받고, 혹은 주변화되었으며, 논의 선상에조차 서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목소리들을 전면화했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는 <여고괴담>,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이후의 시간>, <그레이 섹스> 등 네 가지 에피소드로 완성됐다. 형식 자체로 목소리에 오롯이 집중하는 작품, 퍼포먼스와도 같은 증언에 집중하는 작품, 몸짓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그림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작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는 연출됐다. 각각의 이야기 속 인물과 공간은 구체적이고 미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현장을 그대로 담게 되었다. 2. <애프터 미투> 개별 작품의 문제의식 네 편의 작품은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됐지만 ‘출연자의 증언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가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여고괴담>은 스쿨 미투를 다루고 있다. 학교 공간 내에서 사라지지 않는 괴담과도 같은 가해자들의 재현, 동시에 이 괴담을 부숴버리기 위해 움직인 목소리들이 전면화되어 있다. 이 목소리는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흑백의 사진 속 학교 공간의 권위와 폭력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어린 시절과 결혼 생활에서의 폭력 경험을 40대에 이르러서야 말할 수 있었던 인물인 ‘행복’을 다루고 있다. 행복은 구체적인 피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폭력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했는지 성토한다. 그리고 피해로 인해 피폐해진 자신의 삶을 용서하기로 선포한다. <이후의 시간>은 문화예술계 내 피해자이면서 연대자였던 출연자가 커뮤니티의 자정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왔는지 그려낸다. 공동체 내엔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 연대자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을 듣고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보여준다. <그레이 섹스>는 동의와 비동의의 간극, 친밀한 관계 내 여성들의 의사소통과 협상 방식에 대한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보인다. ‘틴더’(데이팅 앱)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며 친밀함을 갈구하는 여성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연애 관계에서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게 만들어버리는 상황 등 가부장적 사회의 고착화된 관계 안에서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그레이 섹스>의 경우는 여전히 강고한 차별적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증언자를 보호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진 내부에서 가장 많이 토론했던 에피소드다. 이처럼 <애프터 미투>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투 운동 시기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례들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제작진은 일반 관객이 이 이야기들과 미투 운동을 연결 지을 수 있도록 ‘맥락’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은 전형적일수록 파급력이 있고, 지지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에 전형적이지 않은 증언일수록 피해를 의심받으며, 왜곡된 시선과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상황 때문에 전형적인 방식으로만 증언이 유통되고 기록된다면 다양한 피해자들이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증언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자들이 종종 갖게 되는 문제의식도 여기서 발생한다. 출연자의 증언을 전형적이지 않게 재현함과 동시에 출연자의 피해를 더 적극적으로 담론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제작진은 이러한 난관 앞에서 증언을 어떻게 맥락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민들에 대한 답과 결론을 내렸다기보다는 그 고민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 속에 이 다큐멘터리를 위치시키는 도전을 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여성들의 역사를 다시 되짚기로 한 것이다. 3. 증언을 들을 준비 미투 운동은 2017년 미국 할리우드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시초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생존자의 말하기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우리는 그 말하기의 시작을 어디로 잡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 논의의 결과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님의 증언이다. 여성들은 이전부터 성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피해를 증언해왔으며 그 길을 개척해왔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생존자말하기대회’도 그 연장선에 있다.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2000여 명이 넘는 여성들이 생존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왔다. 2017년부터는 ‘#OO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다양한 문화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피해자들이 존재했다. <애프터 미투>는 2018년의 폭발적이었던 미투 운동의 흐름 역시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던 토대 위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던지기로 했다. 사실 생존자들의 외침이 계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회가 듣지 않으려 했던 탓에 2018년 미투 운동의 폭발력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피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 피해가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피해가 위계화되고,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는 증언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회의 왜곡된 인식 때문에,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거나 사회적인 틀 자체를 깨야 하는 이중 굴레에 놓여 있다. 언론이 주목했던 여러 미투 사건 중에서도 피해자가 소위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난 사건은 ‘대중’에게 지지는커녕 공격을 받았다. 또한 ‘대중’은 가해자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전도유망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가해자라고 하면 피해자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입맛’에 맞는 피해에 주로 공감하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악마 같은 가해자만을 가해자로 인정한다. 사실 가해자의 전형도 존재한다. 가해자의 전형이 아닌 사람에 대해 말하지 않을수록, 가해자가 권력관계를 이용해 사람을 가려가면서 폭력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감춰진다. 증언을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장이 한국 사회에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익숙한 담론은 반일 감정을 자극하여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더 널리 퍼지게 했지만, 전형성의 외곽에 놓인 이야기들은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박문칠, 2022)에서 조명한 김순악 님의 사례처럼 전 생애에 걸친 여성의 피해가 사회적으로 이해되려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까. 4. 더 많은 증언이 펼쳐지기 위해 <애프터 미투> 속 출연자들도 그렇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단일하지 않다. 삶의 배경, 일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단일하지 않은 삶 위에 폭력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무지하다. 이미 있었던 목소리들도 사회의 무지로 인해 가려지고 만다. 증언은 공론장이 존재할 때 그 정치력을 펼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위계와 폭력의 경계를 흐리고, 우리의 몸을 뒤흔들고, 생각을 깨는 목소리가 펼쳐질 장이 더 절실해진다. 동시에 제작자는 증언을 기록하여 대중에게 공유할 때, 어떤 서사가 친숙하게 다가가는지 끊임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친숙함에 기대어 익숙한 방식으로 기록하면 자칫 피해자다움을 재생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증언 기록은 여전히 도전을 필요로 하는 일이며, 도전이 있어야 더 많은 목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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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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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지난 30여 년간 부산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김문숙 회장이 2021년 10월 별세했다. 고(故) 김문숙 회장은 1991년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부산정대협)의 회장을 맡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해 매진한 운동가이자 활동가이다. 일본이 ‘위안부’ 책임을 일부 인정한 관부재판을 이끌었던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2004년에 사재 1억 원을 들여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과 관부재판 과정, 이외에 그가 피해자들과 함께 진행한 운동 과정 등이 담긴 기록 1000여 점이 전시된 역사관은 후속 세대를 위한 여성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김문숙 회장의 부재 이후 그가 실천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계승과 역사관의 지속적인 운영 방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특히 역사관에 소장된 기록물의 목록과 DB가 없다는 점에서 소장 기록물 목록화 작업의 시급성이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1] 이에 김문숙 회장의 뜻을 계승해 2021년부터 역사관을 운영한 김주현 관장은 2022년 4월에 역사관 소장 기록물의 목록화 사업을 위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소장자료를 재평가하고, 김문숙 회장이 수집한 자료를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한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추진”한다는 것이 사업의 주요 취지이다.[2] 이로 인해 오랜 기간 부산에서 민간차원에서 독자적으로 전개한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개인이 수집한 자료가 정부 지원하에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보존 및 활용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뿐 아니라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을 주도한 김문숙의 삶과 생각, 또한 그를 통해 관찰된 피해생존자의 이야기도 공공 기록물로 공유될 예정이어서 향후 일본군‘위안부’ 운동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상황은 지난 30여 년간 진행되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틀과 방향성은 물론이고 운동의 담론 지형과 방법론에 대한 변화를 요구받는 실정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라는 뚜렷한 목표”에 운동의 역량이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틀과 방향성이 불가피하게 축소된 측면이 있다.[3] 이는 가해자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운동의 틀이 강화되면서 피해자들을 침묵시킨 한국 사회의 여성 억압적 구조를 바꿔나가는 데 운동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4] 다른 한편,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의 역할이 컸던 만큼 정대협의 경계 안팎을 오가며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이어진 시민운동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5]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동성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복수의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로 귀결된다.[6] 게다가 생존자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전시 성폭력에서 비롯된 여성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이어가고, 더 많은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미래 세대에게 널리 알리는 작업의 방향성과 방법론에 대한 성찰과 고민도 요구되고 있다. 김문숙 회장의 별세로 인해 야기된 부산정대협과 역사관의 변화 노력은 최근 새로운 전환의 시점에 직면해 있는 국내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몇 가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운동의 틀과 방향성,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김문숙 회장이 이끈 부산정대협은 정대협과 이름은 유사하지만, “정체성이나 이념적, 조직적 이력이나 지향”에 있어서 정대협과 동질적이지 않은 단체였다.[7] 부산정대협 연구를 진행한 문소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은 부산정대협의 정체성을 세 가지 특성으로 요약한다. 첫째, 부산의 지역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과제로 삼는다는 점, 둘째,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정대협과 공동대처를 지향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정대협과 이념적·조직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정대협은 1991년 정신대 신고 전화 설치, 1992년부터 약 10년간 관부재판 추진, 2004년 ‘민족과 여성 역사관’ 개관, 2016년 평화의 소녀상 건립 등 일본군‘위안부’ 관련 주요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사업들은 정대협이 제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7가지 요구사항에 포함된 활동들이다. 즉, 정대협의 ‘위안부문제 공동대처’라는 명분에는 부합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겹치지만 분리되어 차이성 내지 혼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소정의 설명이다.[8] 부산정대협의 활동이 정대협의 활동과 유사하지만, 다르거나 혼종적이었다는 점은 국내 ‘위안부’ 운동의 동질성을 드러내면서도 중앙과 지방, 정대협과 지방 시민사회 조직 간의 균열과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사하지만, 무엇이 또는 누가, 왜 부산정대협과 정대협 사이의 균열과 차이를 만들어냈는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균열과 차이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전국 또는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부산정대협과 김문숙 회장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 진행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는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생존자 없는 일본군‘위안부’ 시대에 이어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1990년 전후 시점부터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에게도 고령화는 진행되고 있다. 제1세대 운동가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증언을 채록하거나 일상에서 그들과 친밀한 소통을 해왔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과 삶의 궤적, 더불어 피해자의 내면과 가족·사회적 관계 등에 대해 특별한 이해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가이자 또한 피해자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라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들의 삶을 관통한 피해 고통과 생애 경험을 대신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피해자들과 함께 경험한 사적 시간과 생활 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적 고통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이 지속되는 조건을 살펴보며 역사적으로 맥락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9] 제1세대 운동가들은 “가부장적 차별 사회 속의 젠더 문제를 비롯해 계급, 민족,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냉전질서 등이 교차하는 현실”을 살아낸 주체들로서 포스트 식민시대에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피해자들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10] 따라서 피해자가 일생 동안 겪은 고통을 ‘역사’로 서술하는 작업에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들의 증언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김문숙 회장의 소장자료에는 본인이 직접 운영한 부산정대협과 여러 여성단체 관련 자료를 비롯해 피해자들의 삶과 관부재판 과정이 담긴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관점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살펴봤을 때, 관부재판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와 전문가들과의 연대 활동이 두드러진다. 실질적으로, 운동 초기 단계부터 김문숙 회장은 수차례 일본 방문과 일본 피해자 및 피해자 지원단체,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출판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그가 설립한 여성단체의 여성 성폭력 피해자 구제 및 보호 지원체계 구축 과정에 일본 여성단체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부산에서 진행된 초기 일본군‘위안부’ 지원 운동과 관부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 활동 및 그 이후의 이야기가 전시자료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지역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전시물이나 자료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기존 전시자료에는 재판을 위해 시모노세키에 배편으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부산이 위치한다는 점이나 일본군‘위안부’들의 삶의 공간이자 운동의 공간적 배경으로 부산이 등장한다. 하지만 부산 거주 피해자들의 생활 공간이나 개인적인 소장품, 유품 등의 전시를 통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조건이나 현실을 보여주는 전시자료는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들과의 상호교류를 보여줌으로써 부산의 피해자들이 누구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운동가로 변모했는지, 또는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때 부산 ‘아지매’이자 ‘할매’로서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부재하다. 앞서 기술했듯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공동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일상사와 생활사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진행 중인 김문숙 회장의 수집자료 정리 과정에서 부산 출신 피해자들의 일상사와 생활사를 보여주는 유용한 자료가 발견되기를 희망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조건, 사회적 관계 등에 초점을 맞춘 자료나 연구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지역에 일본군‘위안부’로 등록된 피해자 수가 가장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 지역에 초점을 맞춰서 일본군‘위안부’ 동원 체제나 동원 과정과 귀환, 귀환 후 생활에서 드러난 특성 등을 고찰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도 지적된 바 있다.[11] 지역과 지역성에 초점을 맞춘 자료와 연구 부족 문제는 현재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인 경상남도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와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목록화 및 기획 전시 사업을 계기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부산과 일본 시민사회 간의 연대 활동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와 연구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이는 획일화되고 전형적인 이야기 뒤에 숨겨진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숨겨진 역동성을 찾아내는 일이자,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각주 ^ 남영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기관의 기억재현과 기억의 확장: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사회 21』, 2017, pp.129-148. p.139.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여성인권을 위한 공공역사 기록물로 재탄생: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관리·보존을 위한 업무협약(MOU) 체결”, 보도자료, 2022.4.29.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 『조선인 군대 위안부(朝鮮人軍隊慰安婦)』(1992)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2(1993, 1997)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 42호, 2021, pp.61-96. p.65. ^ 이유미, “시론-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사회진보연대』 172호, 2020, p.-126. p.65. ^ 이지은, 2021, p.65. ^ 앞 저자, p.65. ^ 문소정,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사이성에 관한 연구: 부산정대협을 중심으로”, 『항도부산』, 2021, 제 41호, pp.471~499. p.483. ^ 앞 저자, p.481. ^ 신동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연구의 새로운 방향 모색: 식민지 시대의 피해자에서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 여성으로의 전환”, 2022, pp.5-9. p.7 ^ 앞 저자, p.9. ^ 강정숙,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 추진방안 도민 소통 포럼> 자료집, 2021, pp.16-22.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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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법과 사법(司法)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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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2년 8월 29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전문가포럼 라운드테이블의 기조발제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손해배상청구소송(이하 ‘위안부’ 소송으로 약칭함)의 현황 및 제기되는 법적 쟁점(특히 국내 법원이 담당한 ‘위안부’ 소송)을 개관하고 몇 개의 토론거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토론거리는 ① ‘위안부’ 소송의 효과는 무엇인가, ② ‘위안부’ 소송의 배경과 원인,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가로 집약할 수 있다. 토론거리는 글 속에 흡수하여 서술한다. 사회운동 전략으로서의 법동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지원 단체가 소송을 중요한 전술적 수단으로 삼은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세계적인 공감을 얻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였다. 그 시기는 법적 규칙들을 자원으로 삼고 소송을 통해 법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른바 법동원(legal mobilization)이 사회운동의 유력한 수단으로 대두한 시기이기도 했다. 탈냉전시대에 거대담론과 이념에 기초한 정당정치가 쇠퇴하고 법치의 중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법을 무기로, 법정을 싸움터로 삼아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들이 활성화되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위안부’ 소송은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소송을 통한 법동원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경성법(hard law)을 원용하는 전술이지만 ‘위안부’ 소송은 국내외 시민사회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의해 추동되었고, 점차 국제기구와 글로벌 시민사회의 발화를 통한 연성법(soft law)의 생산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소송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이어서 국가면제(state immunity)의 법리 때문에 국내 법원을 활용할 수 없음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소송의 실패와 국제적 관심 ‘위안부’ 소송이 시작된 것은 일본에서였다. 1945년부터 2019년 7월까지 일본 법원에 제기된 과거청산소송은 98건으로서, 그 중 한국인이 제기한 소송은 53건으로 절반을 넘고 있다.[1] 그 가운데 20건이 1990년대 전반기 5년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위안부’ 동원에 대한 사실인정, 사죄, 추모, 배상,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일본 정부의 책무를 제시, 요구하고 1990년 정대협을 발족한 이후 활발하게 규탄 활동을 전개한 때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증언으로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일본을 방문해 증언을 계속했다. 김학순 증언에 따른 일본 국회의 질의에 대해 1991년 8월 말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 야나이 슌지는 청구권협정이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이며 개인 청구권 그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발언했다.[2] 같은 해 12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첫 제소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한국인에 의해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위안부’ 소송은 1991년 12월부터 1993년 4월까지 제소된 3건에 불과하다.[3] 그러나 소송 건수는 ‘위안부’ 피해자의 숫자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한국인 피해자의 제소 후 1990년대에 걸쳐 필리핀, 중국, 대만인 ‘위안부’ 소송이 잇따랐다. 같은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해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유엔에서는 1996년 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 특별보고관 쿠마라스와미(Radihka Coomaraswamy)의 보고서와 1998년 맥두걸(Gay J. McDougal)의 보고서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에 대해 국제법 위반 사실과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개인들에게 배상하며,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역사적 사실을 교육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처벌할 것으로 요구했다.[4] 맥두걸 보고서는 일본이 피해자 개인에 대해 배상해야 하고, 일본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일본의 법정이나 관할권을 가지는 국가의 법정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조사하고 기소해야 하며, 일본은 배상과 범죄자 처벌의 진전에 대한 보고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격년 보고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 두 보고서는 공히 1965년 청구권협정이 위안부 피해자의 중대한 인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으로부터 일본을 면책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위안부’ 소송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 사건에서만 1심 법원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가능하게 하는 입법을 하지 않은 위법한 부작위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그것도 항소심에서 번복되었다. 모든 소송에서 법원은 전전(戰前) 일본 국가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국가무책임의 법리, 어차피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점, 또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문제라는 점을 들어 원고패소의 판결을 내렸다.[6] 이 모든 법리가 위의 두 보고서에서 제시한 판단 기준에 반하는 것이었다. 미국 법원에의 제소와 관할권 공방: 주권면제와 사법자제 맥두걸 보고서에서는 일본에서의 사법적 구제가 시원치 않을 경우 관할권을 인정하는 다른 나라의 법원에 제소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국제법이나 미국의 조약법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에 관할권을 부여하는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Alien Tort Claims Act)을 예로 들었다.[7] 바로 그런 견지에서 시도된 소송이 2000년 미합중국 DC관할 연방지방법원(US District Court for the District of Columbia)에 제소된 황금주 사건이었다. 이 소송은 황금주를 비롯한 6인의 한국인과 중국인, 필리핀인, 대만인을 포함하는 15인을 원고로 하지만 동종 사건의 피해자에게 승소 판결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는 집단소송(class action)이었다. 원고들은 배상과 사과, 문서 공개를 청구하는 한편 일본 정부의 행위가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과 강요된 성매매 및 강간 금지 규범에 반한다는 확인판결을 구했다.[8]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미합중국 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관할권을 가지느냐였고 그 골자는 국가면제(미국법에서는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의 법리에 따라 주권국가인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이 관할권을 가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면제가 배제되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였다. 원고들은 이 사건이 외국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이 규정하는 주권면제 예외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주권면제의 배제 근거로 ① 포츠담선언을 통해 주권면제를 포기했고, ② 국제적 강행규범(jus cogens)을 위반함으로써 주권면제를 묵시적으로 포기했으며, ③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미합중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지는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지방법원은 포츠담선언이 주권면제의 포기를 담고 있지 않고, 주권면제의 묵시적 포기는 포기의 의사가 드러나는 경우에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 국제적 강행규범의 위반으로부터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원고들의 주장으로부터 보아도 국가의 관여가 분명하여 상업적 행위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예비적 판단으로서 설사 주권면제를 배제한다고 해도 이 사안은 행정부가 판단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로서 법원의 관할권이 배제된다고 보아 소를 각하했다. 원고들의 항소를 수리한 DC관할 연방항소법원(US Court of Appeals for the DC Circuit)은 제1심 판결을 승인하면서도 다소 다른 근거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모든 종류의 사건에서 주권면제를 인정했다가 1952년에야 상업적 행위 등을 배제하는 제한적(restrictive) 주권면제로 이행하였는바, 그 이전 사건에 외국주권면제법을 적용하는 것은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면제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일본의 확립된 기대에 반하는 소급효를 가지게 되어 불공정하다는 것이었다. 1952년 이전에는 행위의 성격을 따지지 않았으므로 상업적 행위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제1심 법원의 판단과 차이가 있다. 아울러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연합국은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했는데 제3국 국민이 미합중국 법원에서 일본을 상대로 제소한 사건을 미합중국 법원이 수리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이유를 추가했다. 그런데 원고들의 상고허가(미국법상으로는 연방대법원에의 이송명령certiorari) 신청을 수리한 연방대법원은 항소법원 판결 중 외국주권면제법의 소급적용을 부정한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항소법원으로 환송했다. 이에 따라 항소법원은 주권면제 쟁점을 제쳐두고, 이 사건이 법원의 판결로 다루기 힘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임을 이유로 소를 각하했다. 샌프란시스코조약에 후속하는 한국, 중국, 대만과의 조약에 대한 해석을 수반하는 것이고, 한·일간의 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간의 해석이 다른 상황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법원이 다룰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쟁점이라는 것이다.[9] 국제규범에의 호소와 세계시민법정 황금주 소송이 시작된 같은 해에 전시성노예를 규탄하는 여러 나라의 시민단체가 준비한 「일본군 전시 성노예 국제여성법정」(Women’s International Tribunal on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이 열렸다.[10] 1998년 제정된 국제형사재판소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이 무력분쟁 하의 성폭력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보여준 국제규범의 동향에 힘입은 것이었고, 이 법정의 판결 녹취문 중 “법은 정부에 배타적으로 귀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라는 대목에서 보듯이 법다원성(legal pluralism)을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1994년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피해자와 시민단체 대표들의 일본 검찰에의 고소·고발도 당연히 무위로 돌아간 후 그러한 공식 법제와 대조되는 비공식적 시민사회의 법을 내세운 것이다. 한국 사법부를 통한 논의의 확대: 한일회담 문서 공개와 청구권협정상 분쟁해결 부작위 위헌 확인 일본과 미국에서 소송이 실패로 귀결된 후 결국 ‘위안부’ 운동을 위한 법동원의 장은 국내 사법부가 되었다. 이는 국제적·국내적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국가가 매개하여 권리 주장의 바탕을 이루는 조약 해석을 제시한 것에 힘입었다. 즉 2005년 노무현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공개에 따른 후속대책을 논의하는 민관공동위원회를 가동했고, 동 위원회는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여전히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민관공동위원회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해석이 갈리지만, 민관공동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커버되지 않았음은 분명히 했다.[11] 민관공동위원회라는 장을 열게 만든 수단 역시 소송이었다. 즉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1952-1965년 기간의 한일회담 회의록을 공개하라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외교통상부가 거부처분을 한 것에 대한 행정소송이 이끌어낸 결과였다.[12] 이듬해 64명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정부가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 절차에 나서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두 해 뒤 원폭피해자 역시 같은 취지의 청구를 했다. 2011년 헌재는 두 사건에 대해 국가의 부작위가 위헌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13] 1998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국가가 청구권협정에 관한 일본과의 의견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중재회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헌심판을 청구한 것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린 것과 비교해보면, 다소의 법리상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입장을 바꾼 것에 다름 아니었다.[14] 2015년 한일외교장관 합의와 2021년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 이러한 압박 속에 나온 것이 박근혜 정부의 2015년 12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외교장관 합의이다. 치유를 위한 재단의 설립과 일본 정부 예산으로부터 10억엔 정도의 출연,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인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 확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합의는 정치적 논란과 법적 성격에 대한 이견 속에 현재 그 운명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 합의가 조약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 비구속적 합의로서 법적 권리·의무를 창설하지 않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가 처분되지 않았다고 판정했다.[15]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압박받아 서두른 한일‘위안부’합의가 오히려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인한 정치·외교적 난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정치적·외교적 노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사법 - 헌법소원심판과 헌재 결정 - 에 의존하여 문제해결을 재촉한 결과 발생한 정치적 혼란이 다시 역으로 사법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동인을 생산해냈다. 이미 2012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고 그 판결에 대한 반론보다는 지지하는 여론이 더 강한 상태에 고무된 바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 지원단체는 그간 국가면제라는 제약을 의식하여 시도하지 않았던 국내 소송에 나서게 되었다. 2016년 일본국을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두 개의 소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된 것이다. 이 사건들에 대한 판결은 2021년 1월과 4월에 각각 선고되었다. 2018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상고심 판결이 내려지고 2019년 판결의 집행이 준비되자 일본과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국내 여론도 극심한 분열 상태에 빠져들면서 문재인 정부의 국정난맥과 함께 소송을 통한 법동원을 지지해온 민족주의적 대중정서가 약화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인이 청구한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재판부는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주권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반인도적 범죄행위라는 점에서 국가면제에 대한 예외에 해당한다고 보아 국내 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하면서 원고들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는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는 2차대전 말기 독일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노동에 혹사된 이탈리아인들이 독일을 상대로 이탈리아 법원에 제소한 소위 페리니(Ferrini) 사건에서 이탈리아 대법원이 주권적 행위라 해도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면제 배제를 결정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국제법 위반을 인정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및 그것을 반영하는 국내 입법이 위헌임을 선언했다는 점에 주목했다.[16] 반면 곽예남·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20인을 원고로 하는 사건에 대해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가 3개월 후에 내린 판결에서는 페리니 사건으로 촉발된 독일과 이탈리아의 분쟁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 행위를 국가면제로부터 배제하는 국제관습법이 형성되었다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했다. 아울러 국가면제가 인정되더라도 피해자들이 소송 외에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 행사로 볼 수 있는 2015.12.28. 한·일 합의에 의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대체적인 권리구제수단’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로 침해가 과도하다는 주장도 배척했다. 이 재판부가 한일‘위안부’합의의 실효성과 이를 통한 권리구제의 가능성을 상당히 인정하고 있음이 주목된다.[17] 위의 두 판결은 일본국이 항소하지 않음으로써 확정되었다. 이처럼 동일한 배경과 성격의 사건에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이 내려진 가운데 승소한 원고들의 집행을 개시하는 재산명시를 명하는 결정이 내려진 상태이다.[18]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의 집행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정부에 의한 채무인수 등 여러 대안이 논의되고 있으나 정부와 피해자들 사이에 협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고 일본의 태도 변화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충돌하는 ‘위안부’ 판결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율할지, 열린 마음의 토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법동원의 양가적 결과: 사회적 인정, 정치의 사법화, 의제의 축소 지금까지 ‘위안부’ 소송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일본에서의 소송은 모두 패소했다는 점에서는 실패라 할 수 있지만 “반세기 가까이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피해를, 일본의 재판소가 판결문이라고 하는 공적인 문서에서 그 피해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피해의 사실을 인정한 것도, 피해에 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 자체가 피해의 구제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19] 미국 법원에서의 소송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소송전이 본격화되자 1990년대 초반 다소나마 우호적인 면모를 보인 일본의 여론이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송이라는 수단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소송을 비롯한 여러 문제제기의 수단들이 동원되어 일본을 압박한 것이 방어심리를 자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아가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은 한일관계를 경색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원고승소의 ‘위안부’ 판결은 직접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부정하고 배상을 명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다. 정치적으로 비중이 있거나 민감한 사안을 정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법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경향이 탈냉전시대 세계 곳곳에서 목도된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과 ‘위안부’ 소송은 정치의 사법화의 좋은 예들을 제공했다. 정치의 사법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뜨거운 감자를 회피하려는 정치권의 소극적 자세도 그 중 하나이다. 정부는 피해자 및 시민사회와의 대화를 소홀히 하다가 소송과 판결에 따른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것이 미흡하다고 생각한 피해자와 지원단체들이 다시 소송전을 전개하고, 법원은 후속 조치를 정치권이 해결해줄 것으로 보고 권리 존중의 이상적인 판결을 한다. 즉 뜨거운 감자를 다시 정치권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법학자로서 한일간 과거청산을 위한 법적 투쟁을 지원해온 김창록은 ‘위안부’ 문제가 서 있는 지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법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곧 현재의 세계질서와 그 속에서의 동북아질서 및 한일관계의 법적 틀을 근원적으로 재점검하는 작업, 즉 ‘전후 국제질서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다.”[20] 소송이 이처럼 큰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임은 그만큼 소송이 정치와 외교에 큰 숙제를 안겨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송이 가진 그러한 정치적 무게는 개인의 피해 구제와 국가의 역사적·정치적 명분의 보호 사이에 긴장을 초래한다. 그러한 긴장은 일본군‘위안부’ 소송에서 아이러니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국에서 벌어진 황금주 소송과 국내 두 건의 소송 모두에서 위안소의 설치·운영 및 위안부 동원이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이 원고측에서 나왔다. 위안소가 “국가가 감독하는 유곽(brothel)”이며 병사들은 고정된 가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았다는 점을 강조할 정도였다. 사건이 대법원으로부터 항소법원에 환송되자 원고들은 상업적 행위임을 재삼 주장하면서 그 행위가 미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진다는 점을 판단하기 위해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환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하는 세계의 단체 - 한국 단체도 포함 - 를 대표해 아미커스(amicus curiae) 의견서를 제출한 전문가들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국가의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은 카라유키상을 모집하고 동원한 매춘업자들의 행동을 모방했기 때문에 성격에 있어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매춘업자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본의 주장 자체가 그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피력했다.[21] 2000년 국제여성법정에서 판사로 역할했고 국내에서 2016년 제기된 12인 원고 소송을 지원한 영국의 국제법학자 친킨(Christine Chinkin) 등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을 폈고, 그러한 의견은 원고측 주장의 일부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22] 두 판결 모두에서 그러한 주장을 배척했다. 위안부 동원을 상업적 행위로 취급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위험한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인신매매(trafficking)를 수반하는 매춘을 모두 동일하게 취급해 규탄하는 국제적 페미니즘의 논리와 외세에 유린된 과거사를 다루는 입장이 충돌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초기 소송에서 나타난 다양한 청구들 - 사실인정, 사죄, 배상, 교육 - 은 소송전이 여론을 환기하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2016년 소송에서는 청구가 금전적 배상으로 축소되어 있다. 이는 여론 동원 수단으로서 소송이 가지는 역할이 줄어드는 한편 민사소송제도가 허용하는 청구의 형태에 규정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배상 판결은 금전적 배상을 둘러싼 논란을 일으킴으로써 피해자 주장에 대한 여론의 공감을 약화시킨다. 각주 ^ 「한-일 ‘강대강’ 대결의 진원... 대법원 판결 핵심 정리」, 『오마이뉴스』, 2019.7.30. ^ 김창록, 「일본에서의 대일과거청산소송 - 한국인들에 의한 소송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제35호 (2007), 343-345면. ^ 같은 글의 부록에서 김창록은 2007년 2월까지의 한국인 제소 40건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 E/CN.4/1996/53/Add.1, 4 January 1996. ^ An Analysis of the Legal Liability of the Government of Japan for ‘Comfort Women Stations’ Establishe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E/CN.4/Sub.2/1998/13, 22 June 1998. ^ 김창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법적 검토 재고」, 『법제연구』 제39호 (2010), 79-108면; 오승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에 관한 연구 - 해외 법원의 판결을 중심으로」, 『법학논총』 제42권 제1호 (2018), 130-141면; 髙良沙哉, 「‘慰安婦’訴訟の意義と課題」, 『地域研究』 제13호 (2014), 133-152면. ^ 위의 맥두걸 보고서, para. 52. ^ 이 소송이 일본에서의 더딘 소송 진행과 비관적 전망에 따른 것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이 소송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제기된 3건의 위안부 소송 중 시간적으로 뒤에 제기된 1992년과 93년 소송의 제1심 판결이 각각 1998년과 99년에 선고되었을 뿐이었다. ^ Hwang Geum Joo et al. v. Japan, 172 F. Supp. 2d 52 (D.D.C. 2001); 332 F.3d 679 (D.C. Cir. 2003); 542 US. 901 (2004); 413 F.3d 45 (D.C. Cir. 2005). 환송심 판결은 한·일간 청구권협정의 해석 차이를 언급하면서 김창록의 의견서를 인용했다. 황금주 사건에 대한 해설로는 김창록, 앞의 글(2010), 91-93면; 오승진, 앞의 글, 141-145면. ^ 그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김창록,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맥락」, 『법과 사회』, 제66호 (2021), 205-244면. ^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개최 보도자료」, 2005.8.26. ^ 서울행정법원 2004.2.13. 선고 2002구합33943 판결. ^ 헌재 2011.8.30. 2006헌마788; 2011.8.30. 2008헌마648. ^ 헌재 2000.3.30. 98헌마206. ^ 헌재 2019.12.27. 2016헌마253.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1.8. 선고 2016가합505092 판결.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4.21. 선고 2016가합580239 판결.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6.9. 선고 2021카명391 결정. ^ 김창록, 앞의 글(2010), 100면. 중국인 ‘위안부’ 소송에서 최고재판소가 샌프란시스코조약의 틀 속에서 청구권이 포기되었다는 취지는 청구권이 실체적으로 소멸했다는 뜻이 아니고 재판상 소구할 권능만이 상실된 것이라는 해석도, 비록 청구를 배척하기 위한 또 하나의 논리이지만, 일본 사법부가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압력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 같은 글, 103면. ^ Brief of Amici Curiae Askin et al. in Support of Plaintiff-Appellants Hwang Geum Joo et al. and Reversal of the District Court’s Decision,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Circuit, No. 01-7169, August 28, 2002. ^ Christine Chinkin and Keina Yoshida, Opinion in the Case of Kwak Ye-Nam et al. v. Japan in the Seoul Central District Court, 7 October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