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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AI에 기반한 현전의 증언은 어떤 감각을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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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와 육성의 상이한 정동 ‘위안부’ 증언집 1권은 일본의 역사 은폐와 왜곡에 반발하여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증명하고 고발하기 위한 진상규명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2년간의 채록 작업 후 1993년도에 발간된 증언집 서두에는 ‘위안부’ 제도에 대한 해설이 약 15쪽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후에 ‘위안부’의 증언이 소개되는 배치는 실증적 증거로 ‘위안부’ 증언을 위치시켰음을 알 수 있다. 증언집 1권에서 첫 번째로 수록된 증언은 최초 ‘위안부’ 증언자인 고(故) 김학순의 증언이다. “컴컴하고 정신도 없어 그날은 대체 거기가 어딘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언니하고 나는 방에 들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더니 낮에 양아버지를 끌고 갔던 장교가 방에 들어와 나를 포장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떨어지는 것만도 무서워서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끌려 옆방에 가니 그 장교는 나를 끌어안으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안 벗으려고 하다가 옷이 다 찢겨져 버렸다. 결국 그 장교에게 내 처녀를 뺏겼다. (...) 날이 밝고 군인이 간 뒤 언니가 포장을 밀치며 내게 왔다. 둘은 한심하고 기막혀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1] 증언은 ‘위안부’ 사건의 잔혹한 경험과 증언자가 느낀 심정이 1인칭의 문어체로 기록되어 있다. 증언집은 ‘위안부’ 증언을 연대기적 순서로 재구성하고 사건의 사실적 차원을 명백히 드러낼 수 있도록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수록된 증언의 서사 속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위안부’ 사건이고 이들의 언어는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완결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1991년 공개 증언 당시 김학순의 육성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영상 속 그는 괴로운 기억을 회상하며 감정이 격양되고 말을 중단하며 온전한 설명에 실패한다. 이는 뒤죽박죽된 시간성과 행간의 감정을 제거하고 가필된 문자의 증언과는 대조된다. 무엇보다 강력한 정동으로 증언하는 고통에 청자를 연루시킨다. “그 울면서 안 당하려고 쫓아 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요 (몸을 기울여 달아나가는 그때의 자신과 붙잡는 일본군의 동작을 취한다) 붙잡고 안 놔줘요 이노무 새끼가, 일본노무 새끼가, 군인노무 새끼가(말이 빨라지고 어조가 격양됨).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그, 말도 못해요. 그 당한 얘기는 말도 못 해요. 가슴이 아파서 (목이 멘다) 말도 못한다고요.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한동안 흐느낀다.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당하고 있는 사람을 몰라요. 한국에서 이것을 몰라줘요. 일본에서는 더군다나 없대요, 모르니까! (거의 내지르는 목소리)”[2] 2. 현전의 증언이 자아내는 정동 오늘날 대부분의 증언은 ‘매개’되어 전달된다. 실제로 증언하는 현장에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뉴스의 토막 난 클립으로, 전문을 생략하고 특정 구절만 뽑아낸 기사에서, 운 좋게 기록 영상을 보는 기회가 아니면 우리는 쓰여진 기록으로 증언과 만난다. 따라서 증언 연구의 윤리적 성찰은 기술(Technology)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증언의 청취와 기록, 편집과 보관이라는 전 과정에서 증언의 의미가 굴절되거나 탈락되는 변형을 막기 위해 도구를 고민하고 기술을 검토해왔다. 녹음, 촬영 기술과 더불어 자료를 아카이빙하여 온/오프라인으로 일반인의 접근권을 향상시킬 수 있던 까닭도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오픈 소스가 증가하며 증언 아카이브의 저작권 문제나 2차 창작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활발한 논의가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청자와 증언을 어떻게 매개할 것이냐는 전략에 따라 기술은 실험적으로 활용된다. AI 기술은 ‘현전’의 정동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기술이다. 5.5만명에 달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을 인터뷰한 쇼아 재단(The USC Shoah Foundation)은 생존자의 증언을 촬영하고 데이터화하여 일반인과 상호 대화가 가능한 AI-증언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3] 프로젝트 책임자인 헤더 마이우(Heather Maio)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죽은 이후에도 후세대들이 그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증인인 생존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는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고 전제한다. 즉, 증언자가 자신의 앞에 ‘현전’해 있다고 느끼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다. ‘현전’의 중요성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지적한 바 있는 ‘음성 중심주의’에서 기원한다. 로고스 중심의 서양 철학에서는 ‘목소리’가 영혼과 본질적이고 즉각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로 쓰여진 ‘문자’보다 우월하게 여겨졌다. 음성 중심주의는 “존재 일반의 의미를 현전으로 간주”하며 결과적으로 무매개적 현전에 대한 관념적 우위를 고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4] 실제로 고해상도의 AI-증언자와 마주하는 느낌은 기이하고 놀랍다. 얼굴의 주름과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보여주며, 까다로운 질문에도 여유롭게 대답을 해낸다. 재생되는 영상과 들려오는 육성은 스크린 너머 마치 증언자와 실제 대화 중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로 인해 증언은 몇 겹의 매개를 거치고도 현전하는 감각으로 인식된다. 이는 지금-여기의 ‘나’가 시공의 간극을 초월해 당사자와 직접 만나게 되는, 생생하고 ‘진실’되게 역사의 기억을 나누어 가지는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만남이 자아내는 강력한 정동을 알기 때문에 쇼아 재단은 재단 내부에서 제기된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5] 여기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적극적인 동참 의지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재단은 각 증언자당 1주일을 할당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2,000개에 달하는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해 묻고 답변을 기록한다. AI가 발전함에 따라 질문과 답변 사이의 연결 관계는 더욱 정교화될 것이다. 재단이 데이터화할 수 있는 정보량 자체는 앞으로 변하지 않겠지만(더 추가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고령인 생존자 일부가 작고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화하는 AI의 본질상 기술이 구현해내는 상호작용은 더욱 매끄러워질 것이다. 예측하건대 향후 AI 기술은 역사적 증언에 국한되지 않고 한 개인의 삶을 기록하여 영구하게 보관하는 보편적 툴로 상용화될 것이다. 3. 현전의 기술은 무엇에 가담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진보가 역사 인식의 감각을 형성하는 데 있어 긍정적이기만 할까? 기술 그 자체의 윤리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통해 나와 타자,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분석하는 일일 테다. 나아가 기술이 새롭게 형성하거나 강화하는 감각의 특정 양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감각의 세대차는 급변하는 매체 환경에 의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가령 ‘터치 제스처와 햅틱 기술’은 기기-정보를 지각하는 감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웹상의 화면을 새로 고침 하기 위해 화면을 잡아당기는 터치 제스처는 카지노의 슬롯 머신에서 착안한 결과다. 손가락으로 화면/정보 양식을 확대하거나 축소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거나 페이지를 프레임 밖으로 휙 날리는 신체적 감각이 축적되면서 “데이터를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양식”이 형성된다.[6] 이처럼 특정 기술이 상용화되고 경험이 누적되면서 주조되는 감각과 그러한 감각에 연관되어 강화되는 인식틀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AI 기술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전시가 이루어졌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서강대학교의 영원한 증언팀이 주관하여 2018년부터 진행해 온 〈영원한 증언(Eternal Testimony)〉이 그것이다.[7]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AI는 사전 촬영된 증언을 기반으로 관람객과의 대화 기능을 탑재했다. 그러나 실상 대화라기보단 단편적인 문답에 가깝다. 관람객에게 제공되는 추천 질문지를 훑어보더라도 사전에 증언자와 이루어진 인터뷰 자체가 ‘위안부’ 경험에 편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정된 답변의 데이터로 기본 질문과 어긋나는 물음에는 엉뚱한 답이 나온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냐는 질문에 ‘위안부’ 때 종일 굶던 설움을 말하고, 편찮으신 곳은 없냐는 염려에는 위안소가 마을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회상을 한다. 아흔 세가 넘은 생존자의 말을 청하고 듣는 증언의 장에 그들의 ‘현재’는 없고 오로지 ‘위안부’였던 ‘과거’만 존재한다. 여기서 기술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 재현과 보다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고해상도의 스크린은 주름의 깊은 골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노환으로 떨리는 손끝의 움직임을 잡아낸다. 생생하고 정교한 피해 생존자의 형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붙잡아 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음성인식이 잘못 되거나 질문에 적절하지 못한 답이 제시될 때, 큐레이터는 ‘할머니의 귀가 어두워서’라는 수사를 쓴다. 여기서 ‘나이가 듦’은 기술에 유리한 형태로 전유되고 있다. 그간 페미니즘 운동의 투쟁은 피해자를 ‘피해자’ 정체성에 가두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증언에서 실체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전략은 본질론적 논의로 미끄러질 위험이 높다. 대중이 만나는 증언이 ‘위안부’ 과거를 입증하는 실증적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한 개인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보다 풍부한 언어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은 ‘피해 당사자’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가담해서는 안 된다. 후세대가 ‘증언’을 계승한다는 것은 ‘증언’의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는 복제가 아니라 그 ‘증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고통에 감응하며 증언이 함의하는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이어받아 재구성하는 데 있을 것이다. 〈영원한 증언〉에서 증언이 “영원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영원함’이 불변하는 증언자의 정체성과 증언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당사자에게 과도하게 부여되는 증언의 책임을 나누어 가지는, 수많은 타자들의 실천이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4. 계속될 증언의 시도를 위해 가상을 동원한 현전만이 청자를 증언에 연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2022년 개봉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는 현전의 환상이 걷어진 곳에서 다른 방식의 정동을 만들어낸다.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미투 운동가인 젊은 여성 세 명이 김순악의 증언을 낭독한다. 이들은 텍스트로 남아 있는 할머니의 증언을 읽으며 자신이 겪은 폭력과 고통의 경험을 ‘위안부’ 생존자의 과거와 연결 짓는다. 이 장면은 “각자의 ‘상상력과 창조적 몰두’를 통해 과거와의 연루를 상상하는 후속 세대의 포스트메모리 구축작업을 시각화”하며, ‘당사자성’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8]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제주 4·3에 대한 후세대의 기억과 애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9] 작품 속 피해 생존자 딸인 ‘인선’은 어머니가 죽은 후 어머니가 옷장 깊숙이 숨겨놓았던 사진과 편지, 스크랩한 기사와 전단지들을 발견한다. 남몰래 모아온 4·3 자료들 위로 힘주어 그은 밑줄이나 메모로 패인 흔적, 변색된 신문의 바스라지는 귀퉁이는 어머니 ‘양정심’의 침묵과 집념의 물화이기도 하다. ‘인선’은 엄마가 모은 자료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역사의 공백, 증언이 실패했던 지점 위로 새로운 진실을 드러내는 수행을 한다. 즉, ‘현존’이 아닌 ‘부재’에서 증언을 잇는 적극적인 실천을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증언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쓰여진 문자 속 공백이 육성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과거와 이어줄 수 있다. 분명 기술은 이 관계 맺음의 양상을 다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선행 질문은 ‘증언-궁극적으로 역사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이다. 실증의 언어, 현전의 언어, 피해 당사자의 언어로 증언을 묶어 둔다면 기술은 이 담론을 강화하는 데 그치게 될 것이다. 각주 ^ 한국정신대연구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강제로 끌려간 군 위안부들』, 한울, 1993, 37-44쪽. ^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김학순의 첫 공개 증언 중 일부. 김학순의 행동과 어조 변화, 울음 등 이 증언을 듣는 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소를 필자가 괄호 안에 옮겼다. KBS시사직격 유튜브, [85회full] ‘위안부’ 공개 증언 30주년 - 김학순, 다시 우리 앞에 서다 (재업로드) | #시사직격 KBS 210813 방송분 14:45~15:15 참고.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SjO4v7Ig8k) ^ ‘Artificial intelligence preserving our ability to converse with Holocaust survivors even after they die’, CBS NEWS, 2022.3.27 (마지막 접속일: 2022.7.21) (https://www.cbsnews.com/news/holocaust-stories-artificial-intelligence-60-minutes-2022-03-27/) ^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역, 동문선, 2004, 31쪽. ^ 재단 내부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죽음 이후에도 AI로 영원히 ’살아있게’ 만드는 시도에 윤리적 문제는 없는지 숙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또한 AI 제작이 홀로코스트 사건을 ’디즈니화(Disney-fy)’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존재했다. 위 기사 본문 참조. ^ 김성익 외 9인, 『연구자의 탄생』, 돌베개, 2022 중 윤보라, 「몸 없는 공간의 젠더를 연구하기 위해」, 148-154 참고. ^ 〈영원한 증언〉은 2021년 6개월간의 베타 전시를 마친 뒤 재정비하여 국내외에서 공식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필자는 2021년 10월 22일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베타 전시를 관람했다. ^ 김지언,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포스트메모리적 양상 분석 -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6, no.1 (2022): 271-304쪽 참고.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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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창원 사람들이 만든 2022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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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1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은 2022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일 기념행사를 추모제와 청소년 문화제로 진행했다. 기림일 추모제에 지역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8월 14일 경상남도에서 치르는 기념식이나 주말로 예정된 8.15통일행사와 일정이 겹치지 않는 날을 선택했다. 해마다 ‘위안부’ 기림일 행사는 창원 시민과 지역단체가 함께 기획하고 준비해 왔다. 지난 7월 기획회의에는 윤소영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님, 이병하 경남진보연합 상임대표님, 경남여성연대 실무자 등 여러 단체의 관계자들이 참석해주었다. 특히 5월에 김양주 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 처음 맞는 기림일이라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회의를 시작했다. 마창진시민모임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년보다 더 많은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기획회의 이후에도 온라인과 SNS 공간에서 세부적인 논의를 이어갔다. 회의 결과 올해는 청소년 문화제와 추모제를 병행한 기림일을 만들어 보자고 결정하였다. ‘위안부’ 기림일을 청소년과 함께하는 행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설득이 필요했다. 평소 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은 오늘날 ‘위안부’운동은 청소년 교육을 중심에 두고 진행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셨다. 기획회의 직전에 이에 대한 설명을 먼저 피력했다. 이미 이경희 대표님께서는 ‘위안부’운동과 청소년 교육이 왜 중요한지를 지난 6월 3~4일 <일본군‘위안부’역사교육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이하 국제포럼)을 개최하여 보여준 바 있다. 국제포럼은 일본군‘위안부’ 역사 왜곡과 부정이 심각해짐에 따라 학교 안의 역사교육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경남지역 교사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교사 및 ‘위안부’ 활동가들이 양국의 일본군‘위안부’ 교육의 수업사례를 교류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처럼 ‘위안부’운동을 청소년 교육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바람이 올해의 기림일 행사에서도 계속되었으면 했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문화제가 되려면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참여가 활발해야 하는데 이 또한 지역단체의 협조가 빛을 발했다. 경남지역역사교사모임에서‘청소년 문화제’ 참가자 모집 공문을 학교들로 발송하고 청소년 동아리를 대상으로 하는 홍보를 맡아 주었다. 그리고 각 시민단체는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기림일 청소년 문화제 참가자 모집 포스터를 공유해 주었다.최종적으로 진주여자고등학교의 밴드 동아리 2팀, 창녕 남지고등학교의 합창단, 창원지역 고등학교 연합팀으로 구성된 ‘유월청소년창작가요제’ 우수상 수상팀, 창원의 중학생 두 명이 만든 댄스팀, 거창연극고 학생의 1인극 공연 등의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그밖에 경희대학교 음대 학생의 기타 연주와 오스트리아 빈 음대 유학생의 바로크 리코더 연주가 초청공연으로 더해져 풍성한 청소년 문화제를 만들 수가 있었다. 8월 11일 기림일 추모제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걱정스러웠다. 제발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길 빌었다. 추모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비는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야외 행사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한정된 예산 때문에 의자와 천막을 넉넉하게 준비 못 한 것이 두고두고 안타깝다. 당일 아침, ‘위안부’피해자 할머니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이젤을 받으려고 일찍부터 행사장에 나와 있는데 전화가 왔다. 참석하기로 했던 창원시장의 불참 통보였다. 이어 경상남도교육감도 올 수 없고 국장이 대신 참석한다고 했다. 추모제를 준비하면서 지자체 단체장이 참석해주면 행사가 더 빛날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점을 반성한다. 이젤을 받아 두고 다시 사무실에 들러 최종 시나리오를 챙겨서 행사가 열릴 오동동문화광장으로 갔다. 음향과 조명 팀이 부산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추모제가 열릴 광장 옆에는 ‘인권자주평화다짐비’가 있다. 오동동문화광장을 기림일 행사장으로 선택한 이유다. 다짐비 옆에 문화광장이 조성돼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기림일 행사를 기해 시민들이 다짐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1부 추모제 사회를 맡았고 2부 청소년 문화제는 경남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강만호 단장님이 맡아주셨다. 그래도 진행 부담 때문에 행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칠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 자원봉사 부대를 이끌고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오민혜 선생님이 와주었다. 기림일 행사 준비를 위한 세부적인 논의는 지난 2020년에 결성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 수요행동> 텔레그램 방에서 주로 논의했다. 오민혜 선생님은 ‘수요행동’ 텔레그램 방에 올린 행사 당일 현장 진행요원 자원봉사자 요청에 응해주었다. 또 6월항쟁정신계승경남사업회 조수현 사무국장, 그리고 마창진시민모임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임진희씨 등이 일찍부터 와서 무대 아래에서 벌어지는 온갖 잡무를 맡아 주어 한결 든든했다. 청소년 문화제 공연을 위한 리허설이 시작됐다. 강만호 단장님께서 참가자 한 팀, 한 팀의 요구를 점검하면서 공연에 필요한 준비를 해 주셨다. 밴드 공연을 신청한 진주여고 팀은 행사 몇 시간 전에 보면대 5개를 요청했고, 노래를 준비한 팀은 인원수만큼의 스탠딩 마이크를 요구했다. 기타 연주자는 팔걸이가 없는 의자를 주문했다. 행사장에는 관객용 플라스틱 팔걸이의자뿐인데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하고 있으니 강만호 선생님께서 드럼 연주자의 의자를 빌리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음향 업체 사장님과 강만호 단장님이 청소년 출연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심지어 미리 MR을 준비하지 않은 팀도 있어 근처 PC방으로 뛰어가 다운로드하는 상황도 속출했다. 다음 리허설에서는 공동대표단이 ‘위안부’피해자의 영정을 모시고 들어오는 동선을 연습했다. 추모제에서 진혼의식은 대부분 ‘진혼무’로 시작했는데 올해는 영정을 엄숙하게 모시는 순서로 시작해 보았다. 경남여성단체연합, (사)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창원진보연합, 민주노총경남지역본부, 민주노총서비스연맹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경남지부, (사)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우리민족끼리통일의문을여는통일촌, 경남겨레하나, 마산겨레하나, 6월항쟁정신계승경남사업회 등 창원지역 각 단체의 대표님들이 한 분씩 영정을 모시고 식장으로 입장하는 형태의 진혼의식을 준비했다. 단체 대표들은 워낙 바쁜 분들이어서 섭외부터 난항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약속을 받고 추모제 1시간 전에 모여 동선을 맞추어 보기로 했다. 특히 영정 12위를 모시는 남녀 성비를 동등하게 하려고 신경 써서 조율하였다. 앞서 기획회의에서는 ‘위안부’ 운동과 수요시위를 향한 공격의 심각성을 알리고 여러 단체의 응원과 구호를 담은 현수막을 내걸어 기림일 분위기를 돋우자는 의견이 나왔다.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마창진시민모임과 함께 각 단체의 주장과 구호 50개를 담은 조각보 형태의 대형 펼침막이 만들어졌다. 펼침막을 무대배경으로 걸었더니 의도했던 장엄한 기림일 분위기가 연출됐다. 좌충우돌했던 리허설을 뒤로 하고 추모제와 청소년 문화제 본 행사가 이어졌다. ‘청소년이 기억하고 만드는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2022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일 행사는 가장 먼저 피해자 영정을 모셨다. 공동협력단체 대표들이 광장 끝에서 대형 위패를 앞세우고 무대를 향해 둥글게 광장을 감싸면서 입장하여 이젤 위에 영정을 올려두었다. 다음 순서로 시민들이 차례로 분향을 한 뒤 주최 단체 대표와 지역 인사의 추모사가 있었다. 추모사는 생존피해자가 없는 시대를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향한 다짐이 주를 이루었다. 평화를 향한 다짐은 청소년이 꾸민 문화제를 통해 분출됐다. 밴드 공연,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는 1인극, 리코더 연주, 합창, 창작곡 공연, 댄스 등을 선보인 문화제에서 청소년들의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이어가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기림일 행사 현장에서는 비옷, 간식 구입 등 발품 드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은 지역의 시민들이 내 일처럼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행사를 치를 때 날씨 등의 돌발 상황이 생기면 의견이 분분해져 주최 측의 혼을 쏙 빼놓는데, 이날은 궂은 날씨에도 지역 시민단체 일꾼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도와줘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창원 시민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뜻에서 기림일 행사에 참석하고 진행을 돕는 것으로 마음을 다해주었다. 일본군‘위안부’ 단체로서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기림일 행사를 지속하여 운영하는 이유이다. 청소년이 꾸민 기림일 공연은 함께 하신 분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몇몇 분은 ‘추모제’도 이렇게 멋진 문화행사로 꾸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며 감동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셨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눈부신 끼와 재능이 일본군‘위안부’ 기림의 다짐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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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김순악의 ‘이름’들을 부르다 - 영화 〈보드랍게〉 박문칠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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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2022)를 연출한 박문칠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을 겹겹이 들여다본다. 그의 삶은 후대의 여성들에 의해 목소리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되살아난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대루코, 요시코, 마츠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 씨. 살아생전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려왔던 김순악의 삶에는 우리가 몰랐던, 혹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여러 굴곡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보드랍게〉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를 기억하고 되새긴다. 더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지금의 문제로 이야기하기 위해 감독이 시도한 방법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앞으로의 더 나은 시도를 기대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늘 ‘나’를, 사회 문제를 이야기해오고 있는 박문칠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Q. 〈보드랍게〉 개봉 후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현재 차기작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대구의 이슬람 사원 건축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Q.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으로부터 영화 제작을 제안받았을 때 부담을 느끼셨다고요. 얼핏 상상해도 쉽지 않은 작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그럼에도 ‘해야겠다’고 결심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 부담을 느꼈던 건, 훌륭한 작품들이 이미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또 일본군‘위안부’는 많이 다뤄온 소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르게 접근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분의 삶에 깊이 있게 들어가 보는 작업을 하면 다른 이야기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죠. Q. 작업에 돌입하기 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증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살펴보셨겠지요. 그 과정 자체가 일종의 ‘배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 이후로 새롭게 배우거나 알게 된 점이 있으신지요.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를 하나의 이슈로만 바라보거나 피해자분들을 ‘위안부’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놓고 비슷하게만 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마다 살아오신 모습과 개성, 성격, 배경이 완전히 달랐어요. 각자의 고유한 성격과 삶이 있는데 ‘위안부’로만 바라봤던 게 죄송스러웠습니다. Q. 수많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접하셨을 텐데, 그중에서도 김순악 님의 삶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남아있는 자료나 사진, 영상을 보면 굉장히 시원시원하고 당찬 분이세요. 쭈그려 앉아 담배 태우시는 모습도 멋있고요.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김순악 님의 구술을 모아놓은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라는 평전이 있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이분을 주인공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위안소의 생활은 많이 들어왔는데,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5~60년의 삶이 참 가슴 아프고 미처 몰랐던 부분도 많았어요. 성매매, 기지촌도 그분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위안부’ 이후의 삶은 또 다른 전쟁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 등 총알이 오가던 여러 사건을 겪으셨고요. 기지촌이라는 공간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대가 있는 곳이었잖아요. 전쟁의 그림자에서 한 번도 제대로 벗어난 적이 없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피해자분들 또한 삶이 파란만장하지만 김순악 님은 항상 역사와 사회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으신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 지점을 조망해보고 싶었습니다. Q. 영화는 김순악 님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위안부’ 피해 이전과 이후의 삶을 모두 보여주는데, 피해자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 감독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해방 이후 피해자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만큼, 그 시기를 잘 드러내야겠다는 게 가장 큰 포인트였어요. ‘위안부’ 피해 경험이 과거의 일로 끝난 게 아니라 피해자의 삶의 행로를 결정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Q. 영화에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김순악 님과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활동가부터 일반 청년 여성까지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로 영화가 채워지지요. 이처럼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김순악 님의 삶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현재화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세대를 넘은 여성들의 이야기, 서사가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김순악 님의 책 제목이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인 것처럼 누구도 그 속을 100% 이해하거나 안다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공감하려는 시도, 노력, 연결점들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게 됐습니다. 영화 앞뒤에 김순악 님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이 있어요. 영화에 출연하신 모든 분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졌죠. 현재의 여성들이 과거의 여성, 돌아가신 김순악을 불러드리면서 그분이 살았던 여러 면들을 곱씹어보고, 되새기고, 기억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Q. 경상도 지역의 2-30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증언집을 낭독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들을 섭외하시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직접 접촉하기에는 조심스러웠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미투 운동을 하신 분들이라, 여러 단체를 통해 소개를 부탁드렸어요.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 얼굴도 드러내야 해서 섭외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세 분 모두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습니다. Q. 낭독 장면에 대해서는 관객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나뉜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여성이 만나고 연대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의견도 있고, 피해의 고유성이나 사회적 맥락을 생략하고 성폭력 피해자 정체성을 일원화하거나 트라우마를 가중시킨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고요. 감독님께서는 이 의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어떠한 의도로 이 장면을 연출하게 되셨는지 함께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현재와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아직도 ‘위안부’ 문제를 과거지사로 혹은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원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로 생각하는 거죠. 이 문제를 잊지 않고 계속 곱씹어볼 수 있으려면 현재적인 의미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다른 문제와 접목시키고, 대화를 시도해본 거죠. 물론 저도 성폭력 피해나 ‘위안부’ 피해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본군‘위안부’는 전시 성폭력 문제이고,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이기 때문에 특수한 성격이 있어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말씀에 동의해요. 연구를 하는 입장에선 피해의 고유성을 정확히 밝혀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이 문제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부 공통점이 있는 사안들 혹은 피해자들 간의 마주침을 기획한다면 새로운 대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새롭게 생각해볼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새롭게 시도해본 방식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낭독 과정에서 피해 여성분들도 위로받는 경험을 하셨다고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눠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분들이 영화에 단순히 내레이터나 낭독자로만 등장하지 않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분들에게도 책을 드리고, 김순악이라는 사람을 느껴보고 알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본인이 생각한 김순악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요. 간접적이지만 그분들이 만난 김순악, 자신이 해석한 김순악을 기반으로 낭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성폭력 피해생존자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만날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지요. 만남을 주선하긴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두렵고 떨렸는데 다행히 참여해주신 분들이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분들이 그전까지는 정신없이 지내셨거든요. 미투 운동 당시에는 기자회견 하고, 재판 참석하고, 시위하면서 바쁘게 지냈는데,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심신이 지쳐 번아웃을 겪으신 거예요. 그래서 미투 당시를 차분히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셨죠. 근데 마침 바로 다음 해에 영화에 출연하면서 본인들이 했던 활동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셨어요. 김순악이 하나의 거울이 된 셈이죠. 영화에 참여하길 잘했고, 위로를 얻었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활동가분들의 소감은 어땠나요? 많이들 고마워하셨어요. 김순악 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넘었거든요. 이 영화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신 것 같아요. 그것들을 저희에게 많이 들려주셨고요. 출연진 중에는 활동을 계속하시는 분도 있고 다른 일을 하시는 분도 있는데, 젊은 활동가였을 때 열정을 쏟아부었던 이 운동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에 대한 고마움을 많이 표하셨어요. Q. 김순악 님의 ‘몸’은 한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모두 통과해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그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 자칫 잘못하면 타자화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민하신 지점이 있다면요. 일반인이 한평생에 겪기 힘든 일들을 한꺼번에 압축적으로 경험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호기심 거리나 선정적인 요소로 소비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존중하며 다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부분이나 성매매 관련 상황을 다룰 때도 너무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려 했고요. 저희 영화가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러한 톤을 잡게 된 이유도 있습니다. Q. 애니메이션 또한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영화의 한 축으로 삼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애니메이터와의 작업 과정은 어떠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는 일부러 여러 가지의 레이어를 두려고 신경 썼어요. 증언집 낭독, 활동가 인터뷰, 압화 작품 등 여러 방식으로 김순악이라는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애니메이션을 추가하게 된 것이죠. 애니메이터인 이재임 작가님에게도 책을 먼저 드리고 김순악 님을 느껴보게 했어요. 이 영화에는 김순악에 대한 후대 여성들의 다양한 해석이 곳곳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죠. 누구는 목소리로, 누구는 그림으로, 누구는 음악으로 표현한 거예요. 한 영화 안에 n개의 김순악이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 톤은 너무 자극적이거나 사실적인 것은 피하려고 했어요. 김순악을 복제하기보다는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죠. 지금의 추상적이고 동글동글한 그림체가 좋아요. 왜냐하면 김순악이 겪었던 삶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 누구나 겪을 수 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이죠. 워낙 힘든 게 많았던 삶이니까 그림체만이라도 따뜻하고 보드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Q. 애니메이터 작가님은 처음에 작업 제안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애니메이터에게도 책을 보내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분도 김순악 님의 매력에 공감하고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함께 작업한 모든 분들이 제가 섭외했다기보다는 할머니가 본인의 삶을 통해 자석처럼 끌어들인 것 아닌가 싶어요. 김순악이라는 사람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지점이 있으니 다들 부담을 느끼면서도 수락해주신 것 아닐까요. Q. 영화 개봉 후 접하신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영화에 공감해주신 이야기들이 다 좋았어요. 그중에서도 인상 깊게 남은 게 있어요. 저희가 GV(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관객 질문을 오픈 채팅방에서 받았거든요. 보통 GV가 끝나면 대부분은 그 방을 나가세요. 그런데 관객 중 한 분이 GV 당일 심야에 메시지 하나를 올리신 거예요. 그날 GV에 영화 출연자 중 미투 당사자 한 분이 함께하셨는데, 그분이 해주신 이야기를 듣고 또 영화를 보며 느꼈던 소감을 말씀해주셨죠. 관객분이 겪은 성폭력 피해 사실과 영화 및 출연자를 통해 위로받은 지점, 감사한 마음을 함께 전해주셨어요. 그것을 보고 저도, 출연자분도 깜짝 놀랐죠. 영화가 하나의 씨앗이 되어 퍼져나가 누군가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과 계기를 마련해주었구나 싶었어요. 제가 생각지 못했던 영화의 기능과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됐죠. GV에 참석하셨던 출연자분도 그 메시지를 보고 함께하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한 명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꺼내놓는 데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거나 이를 소재로 창작하는 분들은 ‘늘 반성을 거듭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위안부’ 문제를 알고, 공부하고, 기록해나갈 의무가 있겠지요. 앞으로 ‘위안부’ 문제를 기반으로 계속해서 이야기해나갈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분의 삶을 제 방식대로 작업해보았는데, 앞으로는 더 많은 작업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를 정치·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힘을 쏟다 보니 당사자들의 삶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삶이 다르고, 또 이야기할 가치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분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업들을 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Q. 또 다른 제안을 받게 되면 작업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제가 갖고 있는 것을 최대한 풀어냈기에 더 이상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다만, 좋은 기회가 되거나 제게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작품을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순악 님과 좋은 만남을 했고, 또 다른 만남이 가능하다면 해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당장은 힘들 것 같아요. (웃음) Q. 작업하시면서 김순악 님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던 적은 없나요? ‘너무 애쓰셨다, 멋지게 사셨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Q. 그간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를, 사회 문제를 이야기해오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보드랍게〉가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김순악이라는 굉장히 매력적인 분을 아주 진하게 만난 것 같아요. 〈보드랍게〉는 그 진한 만남에 대한 나름의 선물,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Credit 인터뷰어/정리: 강푸름 인터뷰이: 박문칠 감독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2년 8월 26일 금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에무시네마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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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1): 증거로서의 증언과 행위로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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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의 증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시민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학계는 사료 발굴 등 학술적 실천으로 응답하였다. 피해생존자의 증언은 대중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로서 사회적 호소력과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증언은 듣는 이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자의적으로 편집‧해석되기도 했으며, 역사를 왜곡하고 피해생존자를 공격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특히 증언의 수집과 연구는 시민운동진영과 학계가 긴밀하게 협조하여 진전시킨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역사부정론의 공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양쪽의 인식의 간극은 크게 벌어졌다. 요컨대, 증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대중이 가장 잘 아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증언에 대한 학계의 고민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증언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초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증언을 수집하고 채록하는 것이었다. 이는 증언자가 고령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위안소 제도에 대한 사료와 연구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 기인했다. 실제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가 1993년에 처음 발간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의 해설은 “군위안부 문제의 주안점은 우선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하고 우선적인 과제는 피해자들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1] 이러한 기획 의도에 따라 1집에 수록된 증언은 징모 과정, 위안소 시스템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연대기 순으로 재구성되어 있으며, 문어체 형식으로 가필되어 있다. 더욱이 초기 운동은 법적 투쟁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증언은 ‘증거’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위안소의 실체를 밝히는 학계의 연구가 축적되고, 1990년대에 이르러 여성구술사에 대한 인식이 진전되면서 증언 연구는 증언의 ‘증거’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구술 행위’ 그 자체에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증언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독백이 아니다. 증언은 말하는 이가 듣는 이와의 관계 속에서 과거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재현하는 행위이며, 증언집은 조사자와 피해자의 상호 대화와 소통의 산물이다.[2] 한편, 증언의 구술성에 주목할 때, 증언자 특유의 말투뿐 아니라 표정, 손짓, 휴지(休止), 침묵 등 비언어적 요소 또한 증언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이를 문자 텍스트로 옮기기 위한 방법론 또한 중요한 증언 연구의 한 부분이 된다.[3] 2000년 이후 발간된 증언집은 증언자의 입말을 살리면서, 비언어적 요소의 의미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호들을 도입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집 4권의 “무수히 열리되 닫히지 않는 따옴표들의 행진”[4]이라든가 증언자 구술의 장단이나 강약까지 표현하려 한 증언집 6권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의 ‘일러두기’가 이러한 고민의 결과이다.[5] 증언을 ‘행위’로 인식하게 되면서, 증언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심리적‧인식적 변화에도 학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6] 증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발화 장소의 성격에 따라, 혹은 청중의 국적이나 성별, 나이에 따라 증언 행위가 달라지는 것은 증언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증언자의 주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공격에 의해 쉽게 가려지거나 왜곡되었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대중조차도 증언이 달라지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증거로서의 증언’이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증언자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탓이다. 흔히들 증언자를 ‘살아있는 증거’라고 하면서도, ‘살아있는’이라는 의미를 삭제한 채 ‘증거’로서만 인식하려 드는 것이다. 증언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주체적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증언 연구는 역사부정론자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또 증언 청취와 해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부단히 갱신되었다. 예컨대 전형적인 피해자상에 부합되는 증언만이 청취되고 과잉 대표되었다는 비판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 중 일부는 식민지적 차이를 삭제하고 일본 정부를 면책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7]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의 피해자성이 정조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입각하여 강조된 측면이 있음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증언을 통해 ‘할머니’라는 호명에 담을 수 없는 피해생존자의 다양한 주체성을 밝히거나, 피해가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읽어내는 연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8] 한편, 증언의 사실적 진실성은 증언의 불변성이나 일관성이 아니라, 역사학과의 상호보완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역사학계는 피해자의 증언을 실마리로 역사적 단서를 찾아내거나, 역사적 맥락과 실증 자료를 통해 증언의 공백을 보완하고 피해의 전체상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축적해 왔다.[9] 이러한 연구에서 증언은 피해생존자 당사자의 경험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증언으로 확장된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는 증언을 ‘사실 검증’이라는 편협한 잣대를 넘어 깊이 있게 청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최근에는 증언 연구의 범위를 확장하는 연구들이 제출되고 있다. 구술 증언 외에 ‘회고’, ‘수기’ 등의 양식으로 발표된 증언이나, 참전 군인의 회고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1991년 이전에 출판 상업주의에 의해 외설적으로 소비되었던 인터뷰 기사나, 새로 발굴된 피해생존자의 수기를 분석하여 당시 ‘위안부’ 증언이 재현되던 방식을 살핀 연구들을 예로 들 수 있다.[10] 참전 병사들의 전쟁회고록 속에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위안부’ 목격담을 선별하여, 자료적 가치를 밝히고 군인들의 ‘위안부’ 인식을 밝히는 연구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11]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30년 이상 지속되고, 증언이 축적됨에 따라 운동 초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면서 증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살피거나, 증언 수집과 채록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 수행되고 있다.[12] 더불어 지금까지 ‘위안부’ 운동과 이에 관한 연구가 정대협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 지역의 자생적 운동에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감지된다. 지역의 ‘위안부’ 운동 연구는 증언 자료를 더욱 풍부하게 확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주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한울, 1993, 15쪽. ^ 2000년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이 증언집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풀빛, 2001, 35~36쪽 참조. (이하 서명과 페이지만 표기) ^ 이선형,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방법론적 고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증언집 4권은 “이 따옴표는 증언 내용이 편집자의 말과 단어로 가필되지 않았고 증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구성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자 “증언자가 말하고 있음을, 지금 현재 독자에게 말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증언참여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기호”라고 밝히고 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35쪽.)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여성과 인권, 2004. <http://contents.nahf.or.kr/iswjViewer/item.do> ^ 황은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의식 변화 과정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심영희, 「침묵에서 증언으로: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귀국 이후의 삶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2000; 사카모토 치즈코, 「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정치학」,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이에 대한 비판은 김부자, 「피해증언과 역사수정주의적 페미니즘」, 『한국구술사학회 학술대회』, 2019 참조. ^ 대표적으로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한국인 “군 위안부”의 주체성 재현」, 『사회와역사』, 2001; 양현아, 「증언을 통해 본 한국인 ‘군위안부’ 들의 포스트식민 상흔(Trauma)」, 『한국여성학』, 2006. ^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2019. 2.25~3.20)은 서울시와 정진성 연구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전시로,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역사적 맥락 위에서 재구성하고, 발굴한 기록물을 통해 증언의 여백을 보완하여 대중에게 전달하였다. 그외 피해자 증언에 기반한 역사학계의 성과로 강영심, 「종전 후 중국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행적과 미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2007; 박정애, 「만주 지역의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조선인 ‘위안부」, 『아시아여성연구』, 2016 등 참조. ^ 이지은, 「민족국가 바깥에서 등장한 조선인 ‘위안부’와 귀향의 거부/실패」, 『사이(SAI)』, 2020; 배지연, 「비극적 모빌리티 서사와 증언의 문제」, 『한국비평문학회』, 2022. ^ 후루하시 아야, 『비판적으로 읽는 일본 군인 회고록 속 '위안부'』, 동북아역사재단, 2021.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 『역사학연구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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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2022년 제1차 웹진 〈결〉 및 뉴스레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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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웹진 <결>은 그동안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 더욱 의미있고 알찬 웹진으로 거듭나기 위해 8~9월에 걸쳐 제1차 독자만족도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참여해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소중한 의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