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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 전범 진술서를 읽으며 드는 단상(斷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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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중국 피해자와의 만남 자주 뜨거운 감자가 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중국인 피해자를 처음 접했던 것은 딩링이라는 중국 작가가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 소설은 중국문학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휴양을 위해 마을에 온 ‘나’가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중국공산당 스파이로 활동하다 병이 들어 돌아온 주인공 ‘전전’과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형태로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피해 여성 전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조차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전전의 고통을 이해는 못 하지만 공감한다. 때때로 피해자의 피해를 전유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듯이. 이 소설이 쓰인 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의 언어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다면 당시 전전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자리에서 사유하는 것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딩링이 전전을 그린 후 50여 년이 지나 현실 속 중국의 전전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강하게 울린 이에 허우둥어라는 피해자가 있다. 그는 마을 촌장이 일본군에게 제공한 여성이었다. 폭력이 행사되는 장에서조차 자신보다 약한 이를 위한 희생을 감내했다고 다른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의 폭력 희생자였다는 이유로 2차, 3차 피해를 겪어내야만 했던 여성이다. 허우둥어의 피해가 과연 ‘위안부’ 피해인가라는 논의가 전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연속선에서 본다면 그 차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전장이 된 중국으로 군대와 함께 조선과 일본의 일본군‘위안부’들이 끌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은 중국의 여성들을 강간하고, 강간센터(위안소)에서 지속적으로 폭력을 자행했다. 강간과 강간센터, 위안소 사이에는 실질적인 간극이 놓여있지만, 일본군이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을 ‘전투의 보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폭력의 연쇄 사슬 끝 실행자 일본군 전범 피해자 구술 자료가 말하는 폭력의 참상을 읽어 가다 보면 그 끔찍함으로 인해 가해자인 일본군에 생각이 미친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떻게 전쟁터로 왔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토록 잔인한 일이 가능했을까?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여 『악한 사람들(Evil Men)』(제임스 도즈 지음,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20)을 저술한 제임스 도즈는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인 동시에 평범하고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며 우리는 “자유롭고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역설은 전장에서 행해진 일본군의 폭력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 같다.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무엇으로 나와 우리의 외부에 둘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이 특정한 ‘환경’과 만나면 (남성) 누구나 일본군 전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이 불편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가해자 일본군을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에서 ‘난징의 강간’을 필두로 일본군의 강간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중국의 푸순과 타이위안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190명 중 842명의 자필진술서를 묶어 2015년과 2017년에 출간된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의 자필진술서 선편(中國欓案館藏 日本侵華戰犯筆供選編)』(이하 『선편』)이 있다. 이 자료집의 중문 요지를 분석한 이코 도시야에 따르면 위안소 관련 진술을 한 전범은 23명이다. 그 외 강간 관련 진술을 한 사람은 모두 591명이며, 강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자는 251명에 그친다. 전체 수록 전범 842명 중 65%가 강간 관련 진술을 한 것이다. 일본군의 압도적 다수가 범했거나 목격한 강간보다 ‘위안부’에 대한 폭력이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맥락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봄, 2018)에서 “전시에 강간 이야기는 이용 가치가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이상 여성의 말을 믿어주거나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을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주제로 간주할 정치적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강간은 적을 악마화하여 ‘전쟁에 뛰어들 감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것이 여성에 대한 강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피해자 여성의 자리에서 전장의 강간을 문제 삼는 일은 그다지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때로 그런 시도는 위험시되기도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자주 뜨거워진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되어 앞으로 나가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개조’와 ‘세뇌’ 사이에서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 『선편』에 실린 전범 자필 진술서는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000여 명의 전범들에게 행한 ‘학습’과 ‘인죄탄백(認罪坦白,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다)’ 운동 과정에서 작성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자필 진술서를 토대로 특별군사법정을 마련하여 1956년 전범재판을 진행했다. 랴오닝성 선양과 타이위안에서 열린 특별군사법정의 기소자는 45명이었다. 나머지는 즉각 석방되어 귀국했다. 운동 과정에서 나온 진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진술서 작성 과정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전후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의 전범들은 버젓이 살아남아 전후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 인물들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쇼와 일왕을 들 수 있고 지금도 일본의 천황제는 사회 구성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근저에서 묻지 않는 것이 일본 사회의 주요 흐름인데,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의 군사 법정에서 불기소된 자들은 곧바로, 기소된 자들도 형기를 다 마치지 않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전원 귀국했다. 귀국한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중귀련 멤버들은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일을 통하여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왔다.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이들과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그들이 중국에서 세뇌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중국 정부는 학습을 통한 사상 개조라고 말한다. ‘세뇌’와 ‘개조’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중귀련 증언자들은 전범관리소 수감 이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를 떠올리게 하여 인상적이다. 전범 관리소에서 레닌의 『제국주의론』,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 노로 에이타로의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등을 읽었다고 한다. 문맹의 전범에게 동료 수감자가 글자를 가르쳐주고, 어려운 책은 대학 출신 동료가 가르쳐주었다. 이에 대해 중귀련의 멤버 다카하시 데쓰로는 “우리는 전범이 되어서 처음 인간다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책을 읽고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나바 이사오는 중귀련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귀국 후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그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죽였는지 점점 더 알게 되었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했어요. 진짜 악마였다는 걸”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배우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번역, 한길사, 2006)에서 아이히만이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군 전범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군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상당히 컸고 그럴수록 잔인해졌다. 다케우치 유타카는 군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성병으로 인한 전력 상실을 막기 위해서 부임지마다 위안소 설치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단지 군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전범관리소에 들어온 이후에야 생각이 미쳤다고 말한다. 나카이 큐지는 1897년 생으로 메이지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쿄지방재판소 등에서 민·형사 사건 판사로 있다가 만주국의 진저우 등지 지방법원에서 재판관으로 있었다. 그는 만주국의 사법관료였기 때문에 죄목이 살인, 약탈, 학살, 강간 같은 ‘전쟁범죄’가 아니라 법관으로서의 직무 수행이었다. 그는 법관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법부 업무를 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전쟁과 식민지배(=괴뢰국)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데 그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카이는 만주국 법관으로서 했던 일들에 대해 자필 진술서에서 범죄행위로 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범죄라고 여겼을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의 행위는 타인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의 순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파급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우리가 행위를 선택하면서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안의 악화에 어느 정도의 브레이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위태롭다고 한 공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 세계의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중국의 사상개조가 ‘강력한 심리적 강압체계’였던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중압감으로 자살에 이른 전범도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 행위를 보다 확장된 관계 속에서 생각하도록 해 자신의 일들이 누군가에 대한 ‘범죄’였음을 인정시킨 운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이선이 필자가 편역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세창출판사)를 2022년 12월 중 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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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상처와 함께 열리는 새로운 정치 지평 -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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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27일 이틀에 걸쳐서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개최되었다.[1]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이 행사의 주제는 ‘전쟁, 식민주의와 여성폭력’으로, 러시아의 여성인권운동가 나스차 크라실니코바의 특별 기조연설 「우크라이나 전쟁과 여성폭력」으로 시작되었다. 나스차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여성 강간을 이야기하며, 전시 성폭력은 민간인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군사 기술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전쟁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인권운동가, 연구자,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전시 성폭력과 여성인권 침해에 대항하는 다양한 논의를 펼쳤다. 행사를 지켜보면서 일본군‘위안부’운동은 더 이상 한일관계에 국한된 민족주의적 의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는 전쟁의 가부장성을 비판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의 주제이자, 여전히 종식되지 않는 여성 성폭력 문제와 닿아있는 표상이었다. 이렇듯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흥미롭고 문제적인 기획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수치심으로부터 피해자를 해방시키기 개인적으로는 행사 이튿날에 이루어진 방글라데시의 여성작가 샤힌 아크타르와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전승희의 대담에 관심이 컸다. 샤힌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시기에 파킨스탄 군에 납치당해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의 수난과 성장을 탁월하게 그린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The Search)』의 작가로 초대되었다. 샤힌은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던 중, 사라예보 전쟁 아동 박물관(War Childhood Museum)에서 자신을 사로잡은, 전쟁 성폭력으로 태어난 어린이의 증언을 들려주었다. 샤힌의 목소리로 듣는 “내 전체 인생은 가해자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점철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수치심은 내 몫이 되었다”는 어린이의 발언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겪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사태임이 다시금 환기되었다. 자신을 짓밟은 이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랑으로 길러야 하는 여성과, 자기 존재를 부적절하다고 보는 이들 속에서 살아갈 피해자의 삶이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최근에 읽은 책 『여성의 수치심』(에리카 L. 존슨·퍼트리샤 모런 엮음, 손희정·김하현 옮김, 글항아리, 2022)이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들은 수치심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수치심이란 개인적인 경험이 되기 쉬운, 완전히 혼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수치스러운 생각, 행동, 감정에 대해 온전히 홀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결함 있고 부적절한 사람으로 느끼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데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간과되기 쉽다. 가령 성폭력이 성적 수치심을 강요함으로써 피해자의 입을 막는 과정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치심은 그 어떤 감정들보다 개인이 타인과 맺는 관계의 문제다. 일본군‘위안부’야말로 강요된 수치심의 폭력성을 증거하는 존재다. 일본군‘위안부’는 당사자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소문 속에서 떠돌던 흐릿한 존재였다. 피해자가 수치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침묵을 깨야 하지만, 수치를 드러내고 표현할수록 더 많은 치욕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증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비로소 어렵게 증언이 이루어졌지만,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피해자는 수치심의 폭력 속에 여전히 갇혀 있다. 연구자로서 학술 발표들이 다소 특별하게 다가왔는데, 그 이유는 전시 성폭력은 단지 학문적 주제가 아니라 연구자가 온몸으로 상처 입으며 사건의 당사자와 관계 맺고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여는 의미심장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혼자만의 굴욕 속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연구자, 활동가 그리고 양심적 시민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수치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려면 전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정동정치로서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수치심’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내밀한 테크놀로지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심문하는, 즉 가장 인간다운 자가 인간 혹은 인간성에 대한 이상의 불가능성과 마주할 때 느끼는 윤리 감정일 것이다. 1부 ‘폭력의 세계, 공존의 존재론’에서 이루어진 도미야마 이치로의 발표 「폭력, 이후」는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피해자의 증언을 나누어 갖는 일의 가치와 그 방안을 모색하게 해주는 글이었다. 도미야마는 증언이나 애도 논의에서 그간 자주 거론되었던 피해자가 “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피해 사건의 당사자들은 자주 “결코 폭력에 대한 기억을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폭력에 의한 경험이 당사자에게 남긴 트라우마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도미야마는 “말할 수 없다”는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존재하고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이나 제도가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자료집, 30쪽)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폭력은 폭력적 행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 이후 우리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비단 과거의 피해자에게만 연관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폭력에 노출된 모든 사람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다”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이 열린다. 이러한 발견은 현재에 대한 환상을 박살냄으로써 우리를 상처 입히는 파상적 경험이지만, 사건의 당사자와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쳐 온 것을 부끄러움과 함께 아는 것”(자료집, 36쪽)으로 표현된 상처입기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여는 정동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는 단지 오욕된 역사가 남긴 특수한 사건이 아니고, 현재에도 여전히 발생하는 젠더폭력의 한 양상임을 깨닫는 것은, 폭력 이후를 피해자와 사건 바깥의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 수 있다. 이번 행사와 연계된 온라인영화제에서 상영되고, 또 2부 ‘침묵과 몸짓: 증언의 영화적 번역’에서도 논의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2022)는 제국/식민의 기억 속에 갇혀 있던 일본군‘위안부’를 오늘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지평 속에서 재의미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김순악이 열여섯의 나이로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가 되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한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집창촌 포주로, 때로 식모를 전전해온 생애사를 이야기한다. 동시에 오늘날 미투 운동의 고발 주체들에게 김순악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김으로써 여성 성폭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일본군‘위안부’ - 전쟁과 폭력의 세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폴리스의 창설자 앞서도 말했듯이 이번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일본군‘위안부’는 한국의 성공한 시민사회 운동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글로벌한 참조점”(자료집, 4쪽)으로서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 운동을 열어가는 주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운동은 그간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필리핀, 중국 등 아시아 각 지역의 피해자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 아시아 페미니즘 운동으로서의 가능성마저 보여주었다.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운동은 그간 탈식민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그 역할을 다 했으므로, 이제는 여성혐오와 백래시로 나타나는 전 세계의 보수화 흐름에 맞서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어젠다로 도약해 갈 필요가 있다. 일본군‘위안부’가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의 맥락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4부 ‘(포스트)냉전과 ‘피해자다움’’에서 발표된 김현경의 「냉전과 일본군‘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이 포착한 장면은 지극히 문제적이다. 1914년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944년 오키나와의 ‘위안부’가 된 배봉기는 1975년 재류특별허가를 신청하기 위해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 및 남성에 의해 여성폭력을 응집한 하나의 육체”(자료집, 147)라고 할 수 있는 배봉기의 증언은 국가 간 틈바구니에서 유령화되었다. 전후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자리잡은 일본은 전쟁 범죄 책임을 부정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안착했고, 박정희 정권 역시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파트너를 자처하며 배봉기의 존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1991년 사망한 후에도 배봉기는 한동안 귀국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오키나와 민단과 조총련이 상이한 이념을 내세워 자신들이 배봉기의 삶과 경험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며 유골을 두고 소유권 분쟁을 벌인 것이다. 배봉기의 비극적 사례는 일본군‘위안부’가 더 이상 국경이나 문화에 갇히지 않는 트랜스내셔널한 전쟁 기억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민족의 수치를 환기시키는 표상이 아니라 사회진화론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기초해 온 남성 중심적인 근대문명 담론에 균열을 내는 주체여야 함을 보여준다. 이혜령의 「페허, 바다의 기억 – 일본군‘위안부’는 셀 수 있는가」는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 개념과 독일 작가 제발트의 논의를 빌어, 일본군‘위안부’를 “모든 전쟁의 중지와 폭력적 팽창을 추구하는 남근 중심적 세계질서의 파국”(자료집, 54쪽)을 요청하는 존재로 재위치화한다. 이혜령은 김학순에게 증언은 전쟁과 전장을 떠올리며 다시금 죽음의 공포에 노출되는 정동적 체험의 반복이었다고 일깨운다. 그리고 김학순이 본 폐허, 즉 죽음에 대한 당사자의 공포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심연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전에 없던 새로운 공동체 내지 폴리스의 창설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3부 ‘[라운드테이블] 지금-여기, 일본군‘위안부’운동’과 6부 ‘[아시아 청년포럼] 여성과 폭력, 아시아 청년의 눈으로 묻고 답하다’는, 국경을 넘어 전쟁과 성차별에 반대하는 새로운 폴리스 만들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단초다. 3부 도로테아 믈라데노바의 「평화의 소녀상과 ‘위안부’ 문제의 독일 현지화」는 독일에서 소녀상 설치를 위한 시민운동이 비교적 성공하게 된 이유를 소개하고 있는 흥미로운 글이다. 발표자에 의하면 소녀상 설치를 주도한 “‘위안부’ 워킹 그룹”은 “종족 간 연합을 통해 국경을 초월하는 탈국가적 또는 초국적 활동”(자료집, 109쪽)을 함으로써 보편주의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폭력을 은폐하는 메커니즘과 성폭력을 조장하는 구조를 폭로하고 독일인들이 성폭력에 대해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급진적 현지화’를 시도했다. 민족이나 국적이 상이한 구성원들은 종족 간 만행의 역사를 수치스러워하며, 페미니즘에서 역사의 실타래를 풀 자원을 발견하고자 했다. 성폭력을 아시아의 야만으로 치부하고 서구인에게 은밀한 우월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소녀상이 전유되지 않고, 현존하는 젠더 폭력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일본군‘위안부’를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의 세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폴리스의 창설자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1960-1970년대 군산, 송탄 등 미군 기지촌에서 “양공주”였던 김연자의 자기 서사인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삼인, 2005)를 읽고 있었던 탓인지 자주 일본군‘위안부’와 “양공주”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는 외국군 성매매 여성들이 겹쳐졌다. 김연자가 날마다 죽음을 꿈꾸던 절망의 땅이 바로 나의 고향이었고,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었던 탓일 듯하다. 오래전 고향에서 관광호텔과 버스터미널 사이에서 미군과 함께 있는 고3 짝꿍과 마주친 적이 있다. 저개발의 공간이 감추지 못한 옹색함과 무질서 속에서 미군과 한국 여성의 조합은 강렬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사라진 탓에 소식이 궁금한 친구였지만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 친구가 나를 외면하게 만든 것은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내가 느낀 것도 종류는 다르지만 약간의 수치심이었다. 이번 국제포럼은 역사 속 여성 피해자들이 강요된 수치심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의 조건이 무엇이며, 어떤 활동들이 필요한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일본군‘위안부’만이 아니라 “양공주”까지로 상상이 미치면, 식민과 냉전에 대한 여성주의 연구는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뗀 것처럼 보인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다행일까? 슬픔일까? 앞으로도 ‘여성인권과 평화’에 대해 이처럼 큰 질문을 던지는 뜻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각주 ^ 한국어, 영어, 일어로 제작된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자료집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발간자료 게시판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stop.or.kr/multicms/multiCmsUsrList.do?category=pd&srch_menu_nix=nFog4NJ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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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여성 해방이 곧 사회의 해방이다: 2022 이란 시위와 글로벌 연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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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in, Jiyan, Azadi(여성, 생명, 자유) “여성, 생명, 자유”. 2022년 9월 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란과 유럽, 캐나다, 미국 그리고 튀르키예(터키)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연대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이게 한 구호이다. 히잡 단속에 걸려 한 젊은 쿠르드(편집자 주: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서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계 여성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사건에 대해 수천, 수만 명의 이란인들이 분노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쿠르드어로 생명이라는 뜻의 지나(Jina)라는 이름을 가진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의 죽음은 이란뿐 아니라 튀르키예와 이라크의 쿠르드족,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튀르키예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2022년 이란 시위는 근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여성 인권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글로벌 연대 시위는 여성의 신체 자율권에 대한 저항을 넘어, 이란 인권과 자유를 위한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로벌 시위의 대표 슬로건이 된 “여성, 생명, 자유”라는 혁명적 구호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 보자. “진, 지얀, 아자디”라는 세 단어의 쿠르드어로 이뤄진 이 구호는 2006년 3월 8일 튀르키예의 세계 여성의 날 행진에서 처음으로 쓰여 대중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슬로건은 1980년대 튀르키예에 저항하는 무장 단체인 쿠르드 노동자당(PKK)이 이끄는 쿠르드 자유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 구호는 “여성이 자유롭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쿠르드 노동자당 공동창립자인 압둘라 오칼란(Abdullah Ocalan)의 글에서 따왔다.[1] 쿠르드 독립운동을 이끈 오칼란은 쿠르드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곧 자율적인 여성 투쟁과 연결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여성, 생명, 자유”라는 이 세 단어를 통해 식민주의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맞선 여성들의 공동 투쟁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번 시위 때마다 울려 퍼지는 “여성, 삶, 자유!”라는 이 마법의 구호는 ISIS(이슬람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이슬람 공화국이 설립된 직후, 히잡의 강제화와 여성들에 대한 샤리아법 적용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바 있다. 1981년 법제화된 이후 지난 40년 넘게 히잡 문제는 언제나 개혁적인 여성들과 이슬람 정권 사이의 ‘문화적 전쟁터’였다. 하지만 한 번도 히잡을 불에 태우거나,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연대하여 거리에서 히잡을 벗고 여성의 인권을 외친 적은 없었다. 물론 이번 시위는 단순히 히잡 강제 착용이나 단속에 대한 저항은 아니다. 그동안 억눌려온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총체적 문제가 이번 시위를 계기로 그야말로 폭발한 것이다. 2018년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이란 핵 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이란 경제는 심각한 침체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 물가는 40% 이상 올랐고, 청년 실업률은 2020년 최고 28%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폭력적인 유혈 진압 앞에서도 계속되는 이번 시위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를 묻는 나에게 이란의 40대 지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의식주가 달린 문제이다. 우리의 아들, 딸들을 더 이상 이 정권의 노예로 살게 할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오늘날 이란 시위의 원동력은 이미 1997년 하타미 정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란의 젊은 세대들은 늘 이란의 변혁과 개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특히 젊은 이란 여성들은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목소리를 잃지 않아 왔다. 2006년 시작된 이란 여성들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 2009년 녹색운동, 2014년부터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시작된 강제 히잡 착용법에 대한 해시태그 운동(#MyStealthyFreedom, #WhiteWednesday, #LetWomenGoToStadium 등)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여성들은 언제나 ‘용감한 사자들’이었다. 이란의 여성들과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을 향한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저항해 왔고,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그토록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2. 경계 없는 연대의 목소리: 튀르키예,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세계 2022년 9월 이란에서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가 가장 격렬히 끓어 올랐을 때, 인스타그램에는 “standwithwomenofiran_turkey”라는 페이지가 개설되었다. 이 페이지 소개 글에는 이란 여성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계정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해당 페이지를 통해 튀르키예의 여성들은 “나는_마흐사 아미니이다”라는 연대의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영상을 올렸다. 또한 “우리, 튀르키예의 영화를 만드는 여성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이란의 여성 및 사람들과의 연대를 선언하며 이란 여성들을 지지합니다”라는 영상물을 연속적으로 올리기도 하고, 성소수자 여성들 역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연대했다. 튀르키예, 레바논, 그리고 중동 각 지역의 쿠르드인들부터 미국 할리우드와 프랑스 배우들의 연대를 통해, 이 시위가 단순히 이란 무슬림 여성에 국한된 국내적 이슈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글로벌 연대의 흐름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보여준 연대 시위의 모습이었다. 2022년 9월 30일에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는, 총부리를 들이대는 남성들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이란 대사관 앞에서 이란 여성들에 대한 연대 구호를 외치는 용감한 아프간 여성들의 영상이 올라왔다. 이 장면은 2021년 8월 탈레반 정권의 등장으로 여권신장의 퇴보를 우려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지지하기 위해 이란의 온오프라인에서 일어났던 연대 운동을 떠올리게 했다. 2021년에는 이란의 여성들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위해 연대 시위를 벌였던 것처럼, 이슬람을 내세워 신체 자율권이 박탈당할 위험을 겪었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 역시 용감한 동조 시위에 나선 것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여성들에 대한 페미니즘 담론이 이슬람 여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반영하고, 무슬림 여성들에 관한 연구 속에 내재한 이슬람으로의 환원주의”를 문제 삼았던 모한티(2005: 51)[2]의 논의는 2022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각 이슬람권의 사안들과 무슬림 여성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이슬람 틀 안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있지 않은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을 비롯해 차별적인 상황에 놓인 이슬람권 여성에 대한 경계 없는 페미니즘적인 연대와 지지가 필요한 때다. 3. 이것은 시위가 아니다. 이미 혁명이다: 이란 여성 혁명 43년 만에 역사상 가장 큰 시민불복종 시위에 나선 이란 국민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것은 시위가 아니다, 이미 혁명이다.” 현대 이란 여성들을 비롯한 이란 민중의 자유와 변화에 대한 열망은 지금까지처럼 은밀하게 자유를 즐기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란 여성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아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거나, 자신의 색을 희석하는 전략을 사용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반격에 나서고 있으며 연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해시태그를 통한 온라인 운동은 이란 내 여성 인권과 강제 히잡 문제, 미투 운동뿐 아니라 남성들을 포함한 국내 인권 문제와 나아가 탈레반 정권의 등장으로 극명해진 여권과 인권의 퇴보를 우려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 운동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을 향한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저항하고 있으며, 사회적 혁명을 꿈꾸며 그토록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소셜 미디어는 이란 여성 운동의 새로운 장을 펼쳐낼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이란의 시민들과 다른 문화권의 무슬림 여성들이 보다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2022년 이란의 시위는 3달 가까이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2022년 10월 1일에는 151개국에서 이란인 디아스포라들을 비롯한 글로벌 연대 시위가 열렸으며, 2020년 이란에 의한 우크라이나항공 737여객기 격추 사고로 82명의 이란인들과 63명의 이란계 캐나다인들을 잃었던 토론토에서만 5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이란 내에서도 10월 8일을 기준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전국적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연일 발송되는 이란 내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면 처참할 정도이다. 11월 17일 기준 10~18세 이하의 청소년 43명을 비롯해 326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에 대한 가혹한 폭행과 발포는 계속되고 있다. 2022년 이란은 위태롭고, 시민들의 삶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40년 넘게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최대로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이란은 2017년 말부터 지금까지 이란 리알화 가치 하락과 경제난으로 인해 전통적인 이슬람 정부의 지지 세력인 시장 상인들과 노동자 계층, 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연이은 파업에 돌입하고 있다. 특히 ‘젊은 이란’을 이루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심각한 실업률과 인권 문제 등은 이란의 평화와 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고 있다. “시리아는 잊어라! ‘우리’부터 생각해!”,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우릴 위해 희생하리라!”는 새로운 정치구호들에서 알 수 있듯,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이스라엘에 맞서 무슬림 형제들을 구하겠다’는 포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2019년 11월에 유가 인상과 경제난 때문에 일어나 최악의 유혈사태를 부른 대규모 시위와 ‘여성의 죽음’으로 촉발된 현재의 시위까지 앞으로 이란의 정세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토록 원하고 기대하던 이란 핵 협상 역시 교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번 시위로 이란 신정 체제가 쉽게 무너지리라 예측하는 이는 없다. 시위가 지속될수록 소수민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발루치스탄이나 쿠르디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경 진압이 예상되며, 정부의 강도 높은 공포 정치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무력으로 시민들을 제압한다고 해서 결코 이슬람 정권이 원하는 ‘정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19년 11월과 2022년 시위에서 보여준 이슬람 정권의 잔혹한 탄압에 대한 반발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갑작스러운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미 이란의 역사는 혁명으로 그 과정을 증명한 바 있다. 현재 중고등학생, 대학생, 바자르 상인, 석유화학 노동자 등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시민들은 두려움 앞에서도 ‘자유’를 외친다. 보안군의 총부리와 강력 진압 앞에서도 “이란을 다시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싸울 것이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마음은 결코 이 시위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각주 ^ ‘Jin, Jîyan, Azadî’ in the words of their creators: Öcalan and Kurdish women – Medya News 2022년 7월 10일, Medya News. ^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저, 문현아 역, 『경계 없는 페미니즘: 이론의 탈식민화와 연대를 위한 실천』 도서출판 여이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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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국가 없는 애국자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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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 9월 29일 10시, 대법원 1호 법정에서 대법관이 판결문을 낭독했다. “원고 이○○ 외 95명, 피고 대한민국, 사건 2018다224408 손해배상(국), 상고와 부대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상고비용과 부대상고비용은 각자 부담한다.” 짧은 판결이 끝나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송 원고인 기지촌 여성들, 소송을 지원한 활동가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판결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너무나 순식간에 끝난 판결에 처음엔 나도 당황했지만, 곧 상고 기각이 2심을 확정한다는 의미임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재판 참여자들은 법정을 나서자마자 원고대리인 중 한 사람인 하주희 변호사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하주희 변호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큰 목소리로 승리를 자축했다. 그때야 비로소 안도와 환희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2014년 6월 25일 122명의 원고를 대리하여 변호인단이 소장을 접수한 지 8년 3개월 만에 결국 원고가 승소한 것이다. 2. 변호인단이 국가 배상 소송을 청구한 원인은 네 가지다. ①한국 정부는 성매매가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지촌을 조성하고 체계적으로 관리, 유지했다. ②정부는 기지촌을 ‘특정지역’으로 지정하고, 그 종사 여성을 ‘위안부’라고 부르면서 성매매에 대한 단속은 물론 관련 불법행위를 방치했다. ③정부는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성병을 관리했다. ④정부는 ‘애국교육’을 수시로 실시하고 ‘자치조직’을 관리하면서 미군 상대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했다. 2017년 1월 20일 내려진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유일하게 인정한 것은 ③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였다. 1963년 개정된 「전염병예방법」은 성병을 포함한 “제3종 전염병 환자 중 주무부령으로 정하는 자는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규정했지만(제29조 제2항), 격리수용 대상자를 명시한 보건사회부령, 곧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은 1977년 8월 19일에야 비로소 제정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격리수용은 법적 근거를 결여했다는 점에서 위법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 이전에 격리 수용된 경험이 있는 원고 57명에게만 손해배상액 500만원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이러한 판결에 불복하여 원고와 피고 모두 항소했고, 2018년 2월 8일 항소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2심 판결은 국가의 책임을 더욱 폭넓게 인정했다. 첫째, 2심 판결은 1심 판결이 일부 인정한 ③조직적‧폭력적 성병 관리의 범위를 확장했다. 재판부는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이 제정된 이후에도 “성병의심자에 불과한 위안부들을 곧바로 낙검자수용소 등에 격리수용한 경우”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의료 진단 없는 ‘성병의심자’의 강제 격리수용은 신체의 자유에 관한 헌법적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또한 ‘성병의심자’의 강제 격리수용 조치가 공무원의 인권 존중 의무에 위반되고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점에서도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둘째, 2심 판결은 1심에서 부정되었던 ①기지촌의 조성‧관리‧운영과 ④성매매 정당화‧조장에 대한 국가 책임 역시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원고들에게 외국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이를 통해 외국군의 사기 진작이나 외화 획득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기지촌의 운영, 관리 전반에 걸쳐 성매매의 조장‧정당화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인정했다. 또한 담당 공무원들이 애국 교육을 실시하고, 아파트 건립이나 노후 보장 등 거짓 약속을 통해 원고들을 기만함으로써,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②국가의 불법행위 단속 면제 및 방치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했고,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피고 측 주장 역시 배척했다. 이상의 판단에 근거하여 재판부는 ①, ③, ④가 모두 인정되는 원고 74인에게는 700만원을, ①, ④에 해당되는 나머지 원고 43인에게는 300만원을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그 후 약 4년 8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 8년 3개월 동안 최초 원고 중 24명이 타계했고, 연락이 닿지 않는 3명 역시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3.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 관리,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조장한 책임이 있음을 사법부가 최초로 인정하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용기와 헌신이 필요했다. 기지촌 여성 인권 운동 단체들이 소송을 주도했다. 두레방, 햇살사회복지회,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한소리회, 여성인권센터 쉬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그리고 경기여성연대가 결성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2014년 3월부터 원고들을 모집하고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현장단체인 새움터는 2014년 3월 기지촌 관련 정부 문서와 언론 보도를 수집한 『미군 위안부 역사』를 출간했고, 원고들의 증언을 수합했다. 또한 원고를 대리하여 법정에서 싸운 변호사들이 있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은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새움터의 요청으로 2012년부터 소송 법리를 구성하기 위해 관련 연구와 문헌을 검토했다. 변호인들은 2013년 3월 최초로 법리검토의견서를 작성하고, 20명이 넘는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들은 활동가들과 함께 원고 진술서를 작성하고, 547개에 이르는 광범위한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변호사들이 법리 구성에 활용한 연구와 법정에서 증언한 전문가들이 있었다.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이정주 옮김, 삼인, 2002/원본출판 1997)를 필두로 기지촌의 형성과 관리,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침해에 한국 정부가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들이 생산되었다. 그중 캐서린 문, 이나영, 박정미의 연구가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이나영과 박정미가 각각 1심과 2심에서 전문가로서 증언했다. 또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의정부 보건소의 의무사무관으로 일한 의사 문정주, 파주 기지촌을 촬영하고 성병 관리 공무원을 면접한 사진작가 조영애가 1심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송의 가장 큰 의의는 원고들, 곧 미군 ‘위안부’ 당사자들이 투쟁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만 명에 이르렀을 미군 ‘위안부’들을 대표하여 122명이 원고로 나섰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소송 역시 피해자들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직접 증언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원고의 진술서와 면접보고서는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법원은 사실관계 인정에 이 증거들을 인용했다. 또한 미군 ‘위안부’ 당사자 4명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렇듯 재판부는 여성들의 증언을 경청했고, 증언의 신빙성을 인정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고 중 한 사람은 2심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했다. 우리에게 국가는 없었습니다. 도망가고 싶어서 도움을 요청한 파출소는 다시 우리를 포주에게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보건소에서는 고통스럽고 치욕스럽던 성병검진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해야 했고 성병이 없음에도 토벌, 컨텍으로 보건소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며 감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파도 보건소에서는 주사 한 번 약 한 번 처방해 주지 않았습니다. (…) 안에서는 달러벌이 애국자로 밖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그런 삶을 살아 온 우리의 삶이 너무나 억울합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은 여성들이자 “국가 없는 애국자”라는 역설적 존재들이 마침내 국가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300~700만 원에 불과한 배상액은 원고들이 겪은 고통에 견주어 터무니없이 적다. 여성들이 국가에 의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여성들의 피해를 온전히 배상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또한 2020년 제정되었으나 유명무실한 「경기도 기지촌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판결은 국가가 미군 ‘위안부’들에게 자행한 불의 중 일부만 인정했을 뿐이다. 일례로 미군 ‘위안부’를 수용한 또 다른 시설인 부녀보호지도소나 직업보도시설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은 소송 청구 원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더 많은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국 사회가 그들의 경험에 공감하고 과거의 폭력과 불의를 성찰하여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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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전 세계적인 성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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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이하 코협)는 2020년 2월 베를린 미테구 ‘도시공간 예술 위원회’에 소녀상 설치를 신청하여 2020년 7월에 공식 허가를 받았다. 소녀상 설치의 주목적인 김학순 님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2020년 8월 14일에 제막을 하려고 했으나, 도로공사로 인해 6주 후인 2020년 9월 28일,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에서 공식적으로 제막식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제막 하루 뒤인 9월 29일,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현 후생노동상)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번 결정은 정부의 입장과 지금까지의 조치와 맞지 않아 대단히 유감스러운 결정이며 (일본) 정부로서는 계속 (독일의) 여러 관계자에게 접근해 일본 정부 입장을 설명하고 동상(소녀상)의 신속한 철거를 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독일 외에도 세계 각국에 소녀상이 설치될 경우 “지금까지 일본의 움직임에 따라 실제로 (소녀상 설치가) 수습된 사례도 있다”며 “계속 국제사회로부터 정당한 평가와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향후에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0월 1일 산케이 신문은 일본의 모테기 외무상이 파리에서 독일 하이코 마스 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되면, 베를린 소녀상 철거를 요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고위급 관리까지 동원하여 소녀상 철거를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전에는 일본 대사가 현지에서 관계자들과 암암리에 만나 철거를 요청해왔었다.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당황한 독일 외교부, 베를린시 정부는 미테구청장에게 압력을 가해 10월 7일 시급히 철거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공문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리아협의회는 미해결된 한일 갈등 문제에 독일을 끌어들여 한국의 편을 들도록 하는 난감한 상황을 일으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도 일본군과 같은 죄를 범했는데 일본만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 비문에 문제가 있고, 그 외에도 100개 국가 출신의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켜 평화로운 공존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7일 안에 소녀상을 철거하지 않으면 250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 함께 담겼다. 처음 철거 명령을 받았을 때는 부당함에 눈앞이 깜깜해지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소녀상을 세우기 위해 2년간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순식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소녀상을 설치한 지 꼭 10일 만이었다. 도시 공간에 조형물을 세우려면 건물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코협은 2018년도에 2층 사무실에서 1층으로 이사를 하고, 일본군‘위안부’ 박물관 설립을 계획했다. 박물관 설립을 위한 준비 과정의 일환으로 2019년 1월 사진전과 예술 작품 전시회를 열어 정치가들을 초청했다. 미테구 도시공간 예술위 실무자가 전시장을 방문하고 소녀상 설치를 위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우리는 1년간 정성 들여 신청서를 준비했다. 더하여, 지역 주민들과 연대해 소녀상 설치에 대한 공식 허가를 받게 되었다. 코협과 같은 작은 단체에게는 1.5톤에 달하는 동상을 한국에서 독일로 가져오는 과정도 큰 부담이었기에 철거 명령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철거 명령이 떨어진 순간 지인을 통해 행정 전문 변호사를 추천받아 철거 하루 전인 10월 13일 베를린 행정 재판소에 가처분 신청서를 아슬아슬하게 제출해 놓았다. 일단 재판에서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소녀상이 철거되지 못한다고 했다. 동시에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렸다. 수십 년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한일 관계에 눈이 밝은 타츠 신문사의 스벤 한센 동아시아 편집장에게 늦은 밤 직접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상황을 알렸다. 한센 편집장이 첫 번째로 한 말은, 독일은 지방자치가 강해 중앙에서 지시를 내려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몇 주간 수차례 통화하며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진보 일간지인 타츠에 소녀상 관련 기사가 첫 번째로 보도되었고, 덕분에 명확한 상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는 구의회 의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보도에 이어 베를리너 차이퉁, 타게스 슈피겔 등 다수의 베를린 지역 신문사뿐만 아니라, 쥐트 도이췌 차이퉁과 같은 독일 전역 언론사 및 방송사, 차후 파이낸셜 타임스 및 더 네이션과 같은 영어권 신문에서까지 독일 미테구 사태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줄지어 보도되었다. 철거 명령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 역시 막강했다. 베를린 미테 지역구의 녹색당, 사민당 그리고 좌파당에서 즉시 반발했다. 베를린 예술인 협회에서도 표현의 자유 침범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외에 저명인사, 교수, 학자, 일반인들 모두 미테구청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한 한인 유학생이 소녀상 철거 반대 온라인 캠페인을 올리자 삽시간에 9000개 이상의 서명이 모였으며, 코협도 공개 편지 서명을 시작해 3700개의 성명을 모았다. 10월 13일, 기자회견과 시위를 이틀 만에 준비했다. 한국, 독일, 일본 언론사가 몰려오고 낮 1시임에도 불구하고 300명 이상의 베를린 시민이 소녀상 앞에서 미테구청까지 가두 시위를 하였다. 집회 하루 전날 스테판 폰 다셀 미테구청장의 비서에게 성명서를 전달했다. 미테구청장은 시위 현장에 나타나 어차피 가처분 신청으로 소녀상 철거 명령이 보류되었으니,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일본 대사관과 코협의 관련자와 타협을 하겠다고 하여 철거 위기는 모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초 미테구청장은 철거 명령을 철회했고, 코협도 가처분 신청을 취하하여 재판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단체 ‘극우를 반대하는 할머니(오마스 게겐 레히츠)’가 구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 추운 겨울, 구의회 앞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촛불 집회를 열었다. 한인 교민들과 한인 음악가들은 자발적으로 소녀상 앞에서 연주하며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녀상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담긴, 전 세계에서 전달된 이메일은 마치 큰 파도와 같이 베를린 모아빗으로 몰려와 정치가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소녀상이 공공장소에 세워지는 만큼, 법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미테 지역구 의원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녹색당, 사민당, 좌파당, 진보당이 합심하여 지난 2년간 5회 이상 소녀상 영구 존치안을 과반수로 통과시켰다. 사실 도시공간 예술위에서는 1년 허가를 낸 후 주변 반응을 보고 1년, 2년 계속 연장하니 별 걱정 말라고 했다. 일본 정부의 압력과 미테구청장의 부당한 철거 명령이 소녀상 영구 존치에 오히려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역사는 우연일까 아니면 이미 정해진 곳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지난 2년 동안 소녀상 영구 존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미테구청장이었다. 그가 소녀상 건으로 일본 대사관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어 그쪽의 눈치를 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소녀상 영구 존치를 적극 반대했다. 그런데 다셀 구청장이 지난 9월 인사 비리로 갑자기 물러나게 됐다. 뒤이어 새롭게 선출된 여성 구청장인 레믈링어는 지난 11월 초 평화의 소녀상 존치 2년 연장을 발표했고, 이 기간 동안 소녀상이 공식 기념비가 되는 것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베를린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려는 야비함을 알렸고, 이어 영구 존치까지 이끌어냈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차세대 교육이 저절로 이뤄지게 된 것이다. 지난 2년간, 초기에는 거의 매일, 최근에는 2주일에 한 번꼴로 독일 고등학생부터 학사, 석사, 박사 과정 학생, 기자, 학자, 여성단체, 인권단체들까지 우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오고 있다. 베를린 소녀상에 행해진 부당한 사실이 알려진 뒤, 올 1월에는 독일 카셀 대학 총학생회장에게서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에 김서경, 김운성 작가 부부가 소녀상을 기증해주었다. 더하여, 독일 시민과 TBS 라디오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힘으로 운송비까지 모금되어 영구 존치에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은 “다시는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전 세계를 다니며 증언하시던 할머님들의 뜻 덕분이기에 더욱 큰 만족감과 기쁨을 느낀다. 한국 시민들의 모금으로 일본군‘위안부’ 박물관을 설립하고 현재 밤낮으로 청소년과 시민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뒤돌아보면,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단순히 반일, 또는 민족주의적인 산물이 아니라, 식민 지배와 가부장제하에서 가장 하위 주체인 소녀들과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탈식민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인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불타는 정의감으로 베를린까지 소녀상이 오게 되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자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한 사례로서 베를린의 많은 여성단체에 힘이 되고 있다. 베를린에서 30년 넘게 운동을 펼쳐온 독일, 한국, 일본 여성 단체들의 꾸준한 연대의 성과이기도 하다. 소녀상 영구 존치 과정에 큰 힘이 된 것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시작된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의 가치)’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독일 사회의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이 이뤄졌다. 동시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어, 베를린에서는 지난 3년간 반식민주의, 반인종차별, 반성차별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이처럼 거대한 역사적 변화의 물결 덕분에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의식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제 평화의 소녀상은 독일 사회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독일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독일의 필요에 의해 독일로 오게 된 파독 간호사, 광부와 같은 ‘인력’의 1세, 2세, 3세들이 독일 영토에서 펼치는 활동은 독일의 역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가? 독일로 이주해온 해외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식민 지배, 분단, 독재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독일까지 오게 되었고, 이때 그들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기억 또한 함께 가지고 왔다. 평화의 소녀상은 이제 여성 인권의 상징으로,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에서 수많은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평화를 전파하게 되었다. 아픈 자에 공감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평화이다. 베를린 주민들은 이제 평화의 소녀상을 향해 외친다.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의 소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