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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023년 제1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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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에 대한 독자분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진행합니다. 더 나은 웹진 운영을 위해 많은 분들의 말씀을 듣고자 하오니, 따뜻한 관심과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참여하신 분 중 개인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tall 1잔 기프티콘’을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설문조사 기간: 2023.6.14.(수) ~ 7.5.(수) ▶ 독자만족도 조사 참여하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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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가와타 후미코와 나의 접점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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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 논픽션 작가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씨(이하 가와타)가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대표작을 묻자 그는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1987년/가와타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를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하 전쟁, 전후, 전전 등에서 가리키는 전쟁은 모두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의미함) 때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끌려간 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에서 살아야 했던 고(故) 배봉기(향년 77세) 씨의 생애를 정성껏 취재해 쓴 장편이다. 가와타는 오랜 세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취재를 거듭하는 동시에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 공동대표나 아시아 각지의 위안소를 조사한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 센터’ 공동대표, ‘재일 ‘위안부’재판을 지지하는 모임’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강연회나 심포지엄이 아닌 가와타와 나의 접점은 두 번에 그친다. 첫 번째는 1997년경 내가 진행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 수업을 가와타가 취재해 이듬해 『수업 종군 ‘위안부’: 역사교육과 성교육으로서의 접근법』1에 실어준 것이다. 이 책 속에는 15명의 중·고교 교사들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수업 실천이 담겨 있다. 나의 실천은 〈평화학습과 성교육을 거듭하는 가운데〉라는 주제로 소개되어 있다. 나는 히로시마 교사로서 히로시마가 경험한 전쟁의 피해와 가해 측면을 객관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중시했다. 히로시마를 인류 최초 원폭 피해지로 삼아 전쟁의 참혹함과 핵무기의 무서움을 학생들이 인식하도록 하는 동시에 아시아 침략 거점이었던 군도 히로시마의 역사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사회과 수업으로 역사를 공부하는데 그 이외에도 홈룸 수업2 등을 통해 1학년은 일본과 코리아3의 역사를, 2학년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3학년은 현재의 민족차별 문제를 공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성교육은 학교 전체에서 행하는 강연회나 담임 교사들의 홈룸 수업으로 진행됐고, 나는 보건체육과 교사로서 보건수업에 임하며 인권이 바탕에 놓인 성교육을 했다.4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3학년 마지막 보건수업 때 언급했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그동안의 성교육 쌓기가 중요하다. 1학년 때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2차성징을, 2학년 때는 성교·임신·출산을, 3학년 때는 낙태·피임·성감염증·문화와 성 그리고 성폭력·성과 전쟁에 관해 가르쳤다. ‘위안부’ 수업에서는 주로 한국 피해자들이 그린 그림을 교재로 사용했다. 내가 할머니들과 교류하면서 접한 그림에 그들의 실화를 얹어 교재를 만들어 수업 때 이야기했다. 가와타가 편집한 책에는 “나는 수업 후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진실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런 점이 논픽션 작가 가와타의 눈에 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 번째 접점은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가와타와 내가 서로 다른 시기에 동일 인물을 인터뷰하며 생긴다. 나는 2004년쯤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마르디엠 씨를 만났다. 그는 날씬하고 자세가 좋은 사람이었다. 마르디엠 씨는 1942년 5월경 일본인들에게 속아 칼리만탄(보르네오)의 반젤머신(Banjarmasin) 교외 트라완(Telawang) 위안소로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치카타라는 위안소 관리인이 ‘위안부’들에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이야기다. 위안소에서 치카타의 폭력으로 여성이 죽었을 때 마르디엠 씨와 ‘위안부’ 피해자들은 항의의 뜻으로 친구의 시신을 일부러 치카타에게 보이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가와타는 나보다 더 먼저 1995년 가을에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의 조사단으로서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청취 조사를 실시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경부터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가 나오기 시작해, 일본의 변호사나 시민단체들의 조사로 이어지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커밍아웃이 증가해, 가와타 등이 조사한 시기에는 6500명을 넘었다.5 마르디엠 씨가 사는 욕야카르타의 LBH(법률부조협회)에는 약 420명의 ‘위안부’ 조서(본인의 등록에 의함)가 작성됐다. 그 무렵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개인에게 배상하는 대신 3억8000만엔(약 90억 루피아)을 양로원 건립비로 충당했다. 마르디엠 씨는 이런 방식을 거절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호소했다. 가와타는 마르디엠 씨가 말한 위안소에서의 ‘슬픈 두 가지 기억’-초경도 없던 13세의 몸으로 첫날 6명의 일본 병사들로부터 강간당했을 때의 출혈과 참을 수 없는 통증, 임신이 알려지자 마취 없이 낙태 수술을 받게 됐을 때의 격통과 아기에게 마리티야마라는 이름을 붙여 매장한 것-을 소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마르디엠 씨가 일상에서 겪은 일들도 듣게 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남편의 유족연금을 받으러 갔을 때 차례를 기다리던 수급자들이 마르디엠 씨를 가리키며 ‘일본 매춘부’라고 욕한 일이라든지, 일본 장교의 현지 처였던 여성이 낳은 아이는 ‘일본인의 아이’라며 주위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마르디엠 씨의 증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멸시와 냉대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말해준다. 가와타는 그저 보도하기 위해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다가가 그 마음을 대변하려고 했다. 공감하려는 자세가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마음을 열고 힘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가와타는 당사자의 인생과 그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부상시켜 갔다. 가와타는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치쿠마쇼보(筑摩書房), 1993, 한국어 번역본 없음)에서 재일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도 씨의 피해 경험과 전후의 보다 무거운 삶을 그려냄으로써 일본 사회의 성차별과 민족차별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싸우는 생존자들의 용기와 삶의 태도의 숭고함이 전해진다.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였던 배봉기 씨의 증언 기록에는 오키나와전에 휩쓸린 주민 ‘집단 자결’(집단 강제사)과 배봉기 씨가 본 돌격대의 모습도 소개된다. 웹진 〈결〉에 실린 “역사적인 가해와 피해를 큰 틀에서 말한다면 배봉기 씨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피해를 매우 가혹하게 받고 도카시키에까지 왔다. 이러한 배봉기 씨가 234고지를 다시 찾아가 가해자인 일본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가와타 후미코, 배봉기 이야기 -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2020.11.17)라는 글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또한 전쟁이라는 국가폭력 틀 속에 위치시켜 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90년대에 내가 실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수업에서 이러한 시각은 약했다. 여성 인권 문제로서 비인도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수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학생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이 수업을 가해자인 일본 병사들을 전쟁이라는 국가폭력 아래 놓인 존재로, 즉 구조적 관계 속에서 볼 필요성 또한 있다는 내용을 더해 바꿔 나갔다. 가와타의 작품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나에게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손자가 두 명 있다. 그래서 마르디엠 씨 일을 포함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려주고자 한다. 내가 재학 중인 성공회대의 친구가 배봉기 씨 연구로 4월에 가와타를 인터뷰할 계획이었다. 입원 중이었던 가와타는 “한국의 학생이 올 거니까 병원에서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들은 진실을 젊은 연구자에게 반드시 전하고 싶다는 가와타 후미코의 저널리스트로서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각주 1. 川田文子(편집), 『授業 「従軍慰安婦」-歴史教育と性教育からのアプローチ』, 教育資料出版社, 1998. 2. 민주적인 반을 만들기 위해 학급 담임 교사가 담당하는 수업. 3.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총칭으로 사용함. 4. 일본 중·고등학교에서는 보건체육과 교사가 보건수업도 한다. 중학교의 경우 연간 35시간이다. 5. 1995년 8월~1996년 11월 '전 병보 연락중앙협의회'(일본군 보조병으로 일한 인도네시아 병보들이 전시 중 강제로 공제 적금된 급료의 환불을 요구하는 단체)에 등록한 피해 여성 수는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19,573명. 일본 장교의 현지 처와 일본군으로부터 강간당한 피해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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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몸을 횡단하는 역사와 삶의 회고록: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들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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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오은정 X 사진: 김효연 1. 피폭의 횡단-신체성과 옹이 진 몸 김정순 씨는 1944년 규슈의 아키이케 탄광에 징용공으로 일하던 남편 주석문이 모범 광부로 선발되어 가족을 초청하면서 도일(度日)했다. 첫 아이 명순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945년 8월 9일, 김 씨가 나가사키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남짓.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사촌 동생이 쌀을 마련해 준다고 하여 나선 길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역을 나선 순간 하늘에서 번쩍 섬광이 비추었다. 어디선가 불덩이가 달려든 것 같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남편 주 씨가 아내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후였다. 나가사키에 신형 폭탄이 떨어져 수만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과 자녀를 찾기 위해 나가사키 구석구석의 수용소, 시체 더미, 병원 등을 헤맨 끝이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나 많았고, 중화상으로 부은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김 씨와 같이 일시 방문한 조선인들은 신원 파악조차 어려웠다. 대혼란 상황 속에서 드디어 마주한 부인의 왼쪽 눈에는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원폭 폭발 당시 튀어 나간 눈알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 이후로도 찾지 못했다. 등에 업혀 있던 아이는 다행히 큰 상처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처음 낳은 사내아이는 낳은 지 몇 분 만에 약간의 경련을 보이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 뼈도 없고 살도 아닌 물렁대기만 한 어린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흐느적대는 물체였다.”1 다음으로 낳은 사내아이는 다행히 죽지 않았지만 평생 빈혈을 달고 살았다. 만성 피로와 약한 체력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는 데 곤란을 겪어 일용직 노동을 전전했다. 셋째 사내아이는 보통의 아이보다 반골밖에 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는데 1·4 후퇴 때 열병을 앓다가 한 살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딸로는 둘째인 명자가 막내로 태어났다. 항상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72년 6월에 사망했다. 형편이 어려워 병원 검진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징용공 당시 탄광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평생 구부정하게 다니면서도 가족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던 남편이 시름시름 앓으며 여위어 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척추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한 달이 되지 않은 1972년 9월에 딸 명자의 뒤를 이었다. 피폭 당시에는 큰 상처가 없었던 것 같은 큰딸 명순은 10대 후반이 되면서 점점 빛을 보기 어려워했고,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다락방에서의 삶이 지속되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폭발 당시 노출되었던 방사선은 김정순 씨가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와서도, 자녀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그의 몸속에서 많은 것들을 변형시키고 있었다. 빈도 높은 유산과 사산, 기형아 출산, 빈혈, 갑상선암이나 혈액암을 비롯한 각종 암, 위장병, 만성 피로, 체력 저하는 방사선에 피폭된 이들이 흔히 경험하는 만발성 후유증의 일부다. 방사선에 노출된 인체의 각 세포 속 유전자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는데 그 정도에 따라 회복되는 시기도 증상도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일공동연구기관인 방사성영향연구소(RERF)의 연구에 따르면 백혈병, 유방암, 폐암, 위암, 결장암, 다발성골수종 등이 방사선량과의 상관관계가 인정되었다. 이외에도 고혈압, 척추질환, 백내장 등과 같은 질환이 대표적인 피폭 후장해에 속한다. 후장해는 평생 진행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신체를 횡단하는 방사선에의 노출 영향은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짧은 순간이나 그것이 폭발한 폭심지 부근의 장소에 머물렀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폭탄 폭발 이후 다양한 종류의 잔류방사선은 인체에 여러 세포의 재생산에 작용한다. 폭발 당시에 폭심지 근처 4~5km 정도 이내에 머무르며 원폭의 영향을 받은 사람 이외에도, 폭발 이후 2주 이내에 구호나 가족 수색 등을 위해 이 지역들에 들어간 사람들(입시피폭자), 원거리에 피난 온 피폭자들을 간호했던 사람들(구호피폭자), 그리고 피폭자의 몸속에 있었던 태아들(태아피폭자)의 몸에서도 방사선 노출은 중요한 작용을 한다. 남편 주 씨가 아내를 찾기 위해 나가사키 시내를 10여 일 동안 돌아다닐 때 엄청난 양의 잔류방사선에 노출되었고 그의 몸에도 방사성 물질이 쌓였다. 신체의 세포 조직에 한번 들어온 방사성 물질은 피폭자들의 몸을 횡단하고 장기 지속한다. 광산에서 추출되어 정제되고 폭발하여 투과하는 방사성 원소의 횡단-신체적 물질성은 피폭자의 몸속에서 “위태롭고, 우발적이며, 우연적이고, 불확실하며, 고분분투하는 역동적인 삶의 회고록”2을 써 내려갔다. 원폭 피해자의 자녀들이 모두 후유증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피폭자 2세들이 만성 피로나 체력 저하 등 면역계 증상을 경험한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신체를 횡단하는 방사성 원소는 피폭자의 몸에 원폭을 기록하고, 역사를 기억하게 하며, 삶의 옹이를 만들어냈다. 2. 민족/국가, 장애, 가족, 그리고 여성이라는 굴레 방사성 물질에 노출된 몸은 단지 하나의 생물학적 신체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크게는 20세기 초의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적인 아시아 확장과 전쟁 그리고 강제동원과 이주를 통해 삶을 개척해야 했던 피식민 조선인들의 신산한 삶을 기록하는 것이자, 인류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로서 핵 개발의 역사를 상호 연결한다. 또한, 이들의 몸을 횡단하는 방사성 물질은 이들의 몸속 세포만을 변형시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딸이자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을 요구받는 여성들의 삶을 굴절시켰다.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의 생애사의 많은 부분은 그들의 신체에 갊아 있는 민족과 국가, 원폭증 장애, 그리고 가족과 여성이라는 굴레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엄마, 엄마는 왜 유명해졌지? 그놈의 원자탄이라고? 원자탄을 맞은 사람이 한국에서 엄마 한 사람이야? 그게 어느 세월인데 이제 와서 엄마 혼자 유명해졌느냐 말이야?” 저는 압니다. 자식들의 눈 속에서 일고 있는 그 숱한 힐문(詰問),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면서 엄마 역시 거지꼴로 찌든 주제에 이름 석자는 무슨 이유로 떠벌여 가지고······. 그 혐오와 원망에 찬 항변을······저는 뼈아프게 압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이렇게 내친 걸음으로 입을 떼고 있는지 모릅니다.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182쪽. 손귀달의 「저는 罪人이 아닙니다」 중에서. 1930년 4월 22일, 일본 오사카시에서 태어난 손귀달 씨는 열세 살에 부모님을 따라 히로시마시로 이사를 갔다. 히로시마시립제2고등여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여섯 살 여름.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기울대로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학도 동원이 이어졌고, 손귀달 씨는 학교가 아닌 미쓰비시조선소 히로시마 공장으로 매일 출근해야 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원자폭탄 폭발과 함께 공장의 유리가 깨지며 날아든 파편에 이마에 큰 부상을 입었다. 피폭 당시 나이 47세로 히로시마 체신국에서 기술직원으로 일하던 손 씨의 아버지가 중상을 입어 3년 후 사망하였고, 히로시마시청 앞에서 전신선을 까는 작업을 하는 인부를 관리 감독하던 오빠 손진두도 왼쪽 허벅지에 큰 중상과 화상을 입었다. 해방 이후 고향인 경상남도 사천으로 돌아온 손 씨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그해 이른 봄 사천에서 순경을 하던 한 사내와 중매로 결혼을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없는 집안 형편에 밥숟가락이라도 하나 덜자는 심정으로 서두른 결혼 생활이 파탄 난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 2년 만에 첫 아이를 사산하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 손 씨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원폭의 후유증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손 씨의 남편은 원폭 피해자임을 숨기고 사기를 쳤다며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어 했다. 이 사실이 친정까지 알려지면서 오빠인 손진두 씨 또한 부인과 헤어지게 되었다. 손 씨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아들과 조카(손진두 씨의 아들)를 데리고 부산으로 홀로 나와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해방 이후 조선으로 귀환하여 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에게는 원폭으로 인한 각종 질환들을 치료할 길이 없었다. 원폭증의 장애를 안고 행상 일로 근근이 돈을 벌던 손 씨가 일본에서 원폭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1965년 한일회담 전후였다. 한국 원폭 피해자들 사이에서 구호협회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부산에서는 엄분연, 손귀달 등 여러 여성 원폭 피해자들이 전단지를 붙여가며 회원들을 모아 나갔다. 1968년 9월 손귀달 씨는 일본에서 원폭증 치료를 받기 위해 행상을 해서 번 돈 5만원(당시에 부산에서 전셋집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고 한다)을 내고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선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작은 통통배 수준으로 그 배에 의지해서 일본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원폭증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아니라 경찰서였다. 한국 원폭 피해자의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손귀달 씨의 밀항과 체포는 일본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손귀달 씨는 밀항 직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당시 일본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송환 조치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시민사회에 한국 원폭 피해자의 존재를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그의 오빠였던 손진두 씨는 손귀달 씨와는 달리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 속에서 계획에 따라 밀항과 체포 그리고 구금을 ‘재한 피폭자 구호’라는 일본 시민사회의 운동 차원으로 전환시켰다. 손진두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원폭피폭자건강수첩 발급 소송은 한국 원폭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재외피폭자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용된다. 손귀달 씨의 이야기는 1984년 당시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교수(예술철학박사)였던 한국인 홍가이(영문 이름 Kai Hong) 씨의 영어로 쓴 희곡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일본에 있다가 귀국한 한국 여성인 영주의 비극적 삶을 통해 전쟁의 책임과 반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 영주의 일본 밀항과 이 사건이 한일 양국에서 정치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거나 한일의 좌익계열 운동단체의 반정부 시위 구실이 되지 않도록 수습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현해탄아, 현해탄아 / 우리 영주가 세 번째로 현해탄을 건너는구나 이번엔 다정히 대하지 않을 테냐 / 현해탄아, 현해탄아 너를 건널 때마다 비극이 우릴 기다렸다 / 세 번째엔 우리 영주를 즐겁게 맞아 다오 현해탄아,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 현해탄아, 현해탄아 / 부당한 현해탄아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 넌 우리에게 빚이 있다 -희곡 〈I am a Hibakusha〉 중에서 밀입국과 강제송환 이후 손귀달 씨의 삶이 순탄치 않은 것은 자명했다. 그는 이후에도 마약 밀매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투옥되는가 하면, 후원을 받기 위해 원폭 피해자라는 상징을 앞세운다거나 일본의 좌파 운동가들과 연결된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손 씨는 “내친 걸음으로 입을 떼”었다. 3. 뚫고 나온 목소리, 공명하는 마음들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부산지부장 엄분연 등 회원 10명은 1일 오전 11시 대통령취임식에 참석하러온 일본 사토 에이사쿠 수상을 만나 피해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 생활대책, 자녀들의 교육대책 등을 세워달라는 호소문을 전달키위해 주한일본대사관으로 몰려갔다가 종로서로 연행됐다. (1971년 7월 2일, 동아일보) 여기 하나의 짧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에는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부산지부라는 이름으로 나오긴 했지만 사실 원폭협회의 주요 간부들이 참여하지 않은 이 요망서 전달 시도는 부산에 거주하던 여성 원폭 피해자 엄분연, 손귀달 등이 감행한 것이었다. 당시 나이 마흔 전후의 중년 여성 원폭 피해자들이 경호도 가장 삼엄했을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날을 잡아 광화문 한쪽에 자리 잡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중앙 간부진의 지원도 받지 않은 채 국빈으로 방문한 일본 수상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신문 지면을 통해 짧은 단신 기사로 기록을 남긴 위 사건은 일본 누노가와(布川徹郎) 감독의 다큐멘터리 『倭奴へ』(한글 제목: 왜놈에게)라는 53분짜리 영상 속에서 보다 생생하게 그려진다. 부산의 한 언덕배기 좁다란 골목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허름한 판잣집들과 헐벗은 달동네 아이들의 모습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의 일본 여성이 흡사 여행 가이드처럼 내레이션을 읊는 이 영상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사토 일본 수상에게 재한 원폭 피해자에 대한 원호를 바라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는 한국 여성 원폭 피해자들을 따라다닌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경찰차에 호송되어 종로서로 향하는 모습, 작은 사무실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전면에 걸어놓고 사무를 보고 있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 사무실의 모습도 비친다. 연구자가 이제는 할머니가 된 이 영상 속의 세 중년 여성을 만난 건 2008년과 2011년이었다. 그들은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자, “시위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잡혀간 것”이 아니라 시위는 당연히 못 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오히려 “잡혀가야 뉴스가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일본의 수상에게 한국 원폭 피해자의 현실을 알리고, 원폭증의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도 그들은 다른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미디어 재현에서 일반적으로 비치는 수동적이고 비참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만난 이들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당차고 힘센 어조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한국 원폭 피해자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 원폭 피해자의 존재는 잘 조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귀달의 일본 밀입국 사건이나 위의 광화문 시위처럼 한국의 여성 원폭 피해자들은 시기마다 목소리를 내왔다. 그리고 여기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반전반핵’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함께 원폭 피해자 운동을 해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은 주로 원폭 피해자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과 홍보 등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국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 활동이었다. 1974년 가을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의뢰와 협력으로 이뤄진 첫 번째 실태조사, 1977년 일본에서 열리는 반전반핵평화 국제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이뤄진 두 번째 조사, 그리고 1979년 ‘미국장로교여선교회’ 후원으로 진행된 조사까지 모두 세 번에 걸친 조사가 그것이다. 뒤의 두 차례 조사는 당시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투위가 수행하였다. 해직 기자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조사비를 지급함으로써 이들을 후원하는 일환이기도 했다. 그중 마지막 실태조사 결과는 10·26과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조사를 맡았던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자료를 압수당하는 등 출간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지부, 일본 히로시마시에 위치한 가와무라 병원, 재한피폭자를구원하는시민회(시민회), 재한피폭자문제시민회의 등 다양한 단체들도 한국 원폭 피해자의 권리를 요구하며 원폭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며 연대했다. 이러한 연대의 흐름이 1987년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23억불 보상청구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물론, 그 운동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이는 냉전이 해체된 국제 질서와 맞물려 민주화 이후의 한국에서 일본의 전후 미처리 문제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1990년대 일본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으로부터의 전후 보상 요구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화 이후 사할린 교포, 종군위안부, 전시노무자 그리고 일본군의 군인 및 군속 등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피해 배상 요구 재판을 시작하는 가운데, 한국 원폭 피해자들도 다양한 소송 운동에 나서며 이 역사적 흐름에 동참하였다. 각주 1.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68쪽. 김정순의 「다락 속의 목숨」 중에서. 2. 스테이시 앨러이모, 2018,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역, 그린비. 참고문헌 -박수복, 1975,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 창원사. -스테이시 앨러이모, 2018,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역, 그린비. -오은정, 2013, 『한국 원폭피해자의 일본 히바쿠샤 되기: 피폭자 범주의 경계 설정과 통제에서 과학·정치·관료제의 상호작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94, 『원폭피해자 돕기 및 반전반핵평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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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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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선생님께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어떻게 관여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이효재, 윤정옥 교수와의 만남은 어떠했나요? 1988년 9월에 한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다음 해 3월에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유학 전에 스즈키 유코(일본의 여성사 연구자) 선생님과 교류가 있었는데 제가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위안부’ 문제도 같이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한국에 갈 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윤정옥 선생님이 1987년경에 일본에 ‘위안부’ 조사를 위해 오셨는데, 그때 아사히신문의 마츠이 야요리 기자가 윤정옥 선생님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셨어요. 그 글을 통해 윤정옥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은 민주화운동으로 학교에서 퇴출된 후 일본에 잠깐 체류하신 적이 있었고 그때 우연히 뵐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효재 선생님을 지도 교수님으로 삼아 한국에 갔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이 1989년 10월 가족법 개정 운동 집회에 가자고 하셔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다 같이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윤정옥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제 소개를 하면서 “저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전화번호를 물어보셨고, 그 후 이화여대 식당에서 자주 만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다음 해 7월에 윤정옥 선생님이 ‘정신대연구반’을 만드셨을 때 저도 함께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여성학과 학생 4명이 모였어요. 윤정옥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모임을 가졌고, 그렇게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Q. 1988년 9월에 이화여자대학교로 유학을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오면서 여성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학부 전공은 무엇이었고 유학 결심과 전공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 초등학교는 민족학교, 중학교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학생 때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부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에는 국경이나 국적이 크게 관계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신문을 보다가 ‘여자는 만들어진다’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읽게 됐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때까지는 성 정체성도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머리를 길러본 적도 없고 치마보다는 바지가 좋았어요. 민족학교 다닐 때 고학년이 되니까 선생님이 ‘머리를 기르라’고 하시는 거예요. 기악합주부에서는 남학생만 지휘자가 될 수 있었어요. 오빠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데 저만 해야 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요. 그런데 기사를 보니까 이게 남녀차별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여성 문제에 눈을 떴고, 대학 입시 때는 이미 미술에 관심이 없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는 게 힘들었죠. 그래서 미대를 몇 군데 지원해 한 군데 합격했어요. 그렇지만 거의 학교에 가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 미대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일단 다니고 있는 대학을 졸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졸업 후 여자대학인 쓰다주쿠대학교에 학사 입학(3학년에 편입)을 했어요. 조선어를 제1외국어로 시험을 볼 수 있었고, 다행히 국제관계학과에 붙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게 됐어요. Q. 한국에 처음 오신 건 언제였나요? 1979년에 처음으로 오빠와 둘이서 아버지의 고향에 갔어요. 그때는 할머니와 친척분들을 뵈었고, 7개월 후인 1980년 2월에 혼자 다시 갔어요. 한국이 너무 궁금했거든요. 전국 일주를 하면서 마지막에 서울에 올라와 이화여대를 찾아갔어요. 그 근처 책방에서 이화여대에서 출판한 『여성학』(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과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효재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79)이라는 제목의 책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그것을 사서 나중에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당시 일본에도 여성학이 도입되었지요. 그러나 대학에는 여성학과 같은 곳은 없었고, 저는 한국 여성사와 현재 상황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Q. 한국에 1988~1998년까지 10년간 계셨는데, 석사를 마친 후 유학은 끝난 건가요? 석사를 마친 후에 연구생을 거쳐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96년경에 과정을 끝냈습니다. 또 94년 가을학기부터 동국대 일어일문과에 ‘외국인 초빙교수’로 취직해서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열심히 활동하던 때였기 때문에 한국에 계속 있고 싶었죠. Q.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는데 서울의 인상이 어땠는지요. 관련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 과거청산의 맥락에서 종종 놓쳐지는 것이 1990년대 글로벌한 탈냉전과 한반도에서 지속된 냉전 및 남북 체제경쟁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자극받은 북한은 19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지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일본 자이니치 사회에서 이러한 모순적 변화(탈냉전이 되었지만 냉전이 계속되는)를 혹시 느끼셨는지요. 사실은 더 일찍 한국에서 유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선언 전에는 사실상 가지 못했던 거지요(민족학교 출신인 것도 있고 해서 부모님이 말렸습니다). 그래서 88년에 서울에 갔을 때는 정말 기뻤어요. 올림픽 직전이라 활기도 엄청났고요. 자이니치 사회는 매우 복잡해요.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이니치의 경험이 다 달라요. 그런데 일본의 자이니치 조직은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이었어요. 또 당시 젊은 세대들은 이미 조총련이나 민단과 거리를 두었지요. 저의 경우는 80년대 초반에 자이니치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나그네’라는 젊은이들의 독서 모임에 가끔 나갔어요. 하지만 여기도 거의 남자들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1984년 쓰다주쿠대 학부를 졸업할 때쯤 ‘조선여성사독서회’라는 자이니치 여성 모임을 만들었어요. 주로 한국에서 구입한 여성 관련 서적을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중심이었지만 곧 다양해졌어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모인 것은 아무래도 한국어 책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자이니치 사회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어요. Q. 선생님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셔널리즘의 틈새’,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민국가 사이의 정체성을 ‘야마시타 영애’라는 이름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는 듯합니다. 야마시타 에이아이와 야마시타 영애, 그리고 최영애라는 세 개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민족학교 다닐 때는 최영애였고 일본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야마시타 에이아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어요. 그 뒤로 ‘나는 조선인(최영애)인가, 일본인(야마시타 에이아이, 영애=英愛의 일본어 독음)인가’ 고민을 했습니다. 1977년쯤 마츠이 야요리 씨 주최로 ‘아시아여성모임’이 생겼고, 대학 입학 후 우연히 그 모임을 알게 되어 나가게 됐습니다. 그 모임에서 어느 날 나의 아이덴티티와 이름에 관한 고민을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한 분이 “그럼 야마시타 영애라고 하면 어때요?”라고 하셨죠. 자이니치와 결혼한 분이셔서 그런지 감각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 발상이 너무 멋있고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야마시타 영애’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Q. 야마시타는 어머니의 성인가요? 맞아요. 저는 부모님이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혼인신고를 했을 때는 어머니와 저, 오빠 모두 아버지 국적으로 바꿀 수도 있었어요. 그랬으면 저도 최 씨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부모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이유는 모릅니다. 그래서 호적과 주민등록상에도 ‘야마시타 에이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권상의 영어 표기도 ‘EIAI’로 되어 있던 걸 1998년에 ‘YEONG-AE’로 바꿨어요. Q.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 방일 직전, 정신대 문제에 대한 여성계(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성단체연합, 서울지역 여자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연합성명서, 7월 윤정옥 교수와의 정신대연구반(훗날의 한국정신대연구소) 발족에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요.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님인 이영자 선생님이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강의를 오셨었어요.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너무 재밌었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 5월 초순쯤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식사하던 중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식민지 시대의 징용, 징병에 관해 말한다고 하는데 여성 문제인 정신대(‘위안부’의 의미로)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한다. 우리가 이것을 요구해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 말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때 거기 있던 친구들이 역할 분담을 하면서 활동을 하게 됐어요. Q.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합성명서까지 이어진 건가요? 그렇죠. 여성학과 친구들이 다방면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여성연합을 포함한 여성계의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로 이어졌어요. Q. 정신대연구반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그것이 나중에 한국정신대연구소로 이어지고, 정대협에서 일본 창구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일본 NGO와의 연락, 통번역을 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대협에는 언제 합류해서 어떤 형태로 근무하고 또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7월에 연구반이 생겼고, 8월경에 윤정옥 선생님에게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요. 일본의 6월 국회 회의록이었는데 “모토오카 쇼지 의원이 조선인‘위안부’에 대해 질문을 했고, 일본 정부는 ‘그것은 민간업자가 한 거다’”라는 식으로 대답한 내용이었어요. 윤정옥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죠. “이런 게 일본에서 왔는데 문제적이다, 일본 정부에 대해 공개서한을 쓰기로 했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한국어로 쓰시고 제가 일본어로 번역했습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의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회의에서도 검토했고요. 그리고 공개서한을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보내고 또 10월 말에 윤영애 총무님, 김혜원 선생님을 비롯해 세 분이 일본에 가서 직접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어요. 제가 통역을 맡았고요. 그런데도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바로 정대협을 만들게 되었어요.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으니 전담 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교회여성연합회가 중심이었어요. 공개서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답신은 계속 없었어요. 기한이 지나고 세 번 정도 독촉장을 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참 지나서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답을 하겠으니 대사관으로 나오라고. 그래서 정대협 대표들이 대사관에 가셨어요. 근데 그때 대사관 측의 반응이 너무 실망스럽고 인간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효재 선생님, 윤정옥 선생님, 윤영애 총무님 모두 화가 나셨죠. 그때 일본 측에서 제대로 대응하고 문제에 대해 깊게 논의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통역이나 번역 같은 잡일을 했습니다. 김학순 님이 일본 정부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신 직후부터 정신대 신고 전화가 폭발했는데 저도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신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벨이 울리면 긴장하며 수화기를 든 기억이 납니다. 자원활동가였던 셈이죠. 아무 직함 없이 그냥 실행위원회도 참석하고 그랬어요. 정대협 구성 단체인 정신대연구회 회원이기도 했고요. 92년인가, 이미경 선생님이 총무였을 때 정대협 조직을 개편하면서 국제협력 일본 담당이라는 역할이 생겼던 걸로 기억해요.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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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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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운동에 매진하면서 유학 전에 가졌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해소되었다가, 크게 두 가지 사건, 즉 첫째, 1993년 고노담화에 대한 정대협 성명서에서 드러난 일본인‘위안부’ 인식, 둘째, 정대협의 국민기금 반대 활동을 계기로 한국 사회 및 정대협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직면하셨다고 쓰셨어요. 어떤 일들이 있으셨는지요. 특히 1993년의 사건이 저에겐 큰 충격이었어요. 고노담화 발표 직후에 정대협이 낸 성명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어요. ‘위안부’는 당시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 국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서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 성노예였다.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라는 말이 가장 걸렸죠. 그리고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한 내용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지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로서는 일본인을 제외하면 한반도 출신자가 많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인 여성은 성노예적 성격의 강제종군위안부와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일본인 ‘위안부’는 당시 일본의 공창제 아래에서 ‘위안부’가 되었고, 돈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하였고, 계약이 끝나면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수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를 은근슬쩍 이 보고에 집어넣은 것은 강제종군위안부의 성격을 흐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 내용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공창제도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는데,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공창제도가 들어왔잖아요. 공창제 연구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전무했고, 일본에서는 많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공창제도가 있었기에 ‘위안부’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만큼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창제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구해 보면 공창제 하의 여성들이 얼마나 노예적인지 알 수 있어요. 그들이 자유의사를 갖고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남성적 시각인 거죠. 이것을 번역해 일본 단체에 보내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걱정됐죠. 그때는 여름방학으로 제가 일본에 있을 때였는데, 정대협에 연락해 그 부분을 빼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일본어판에서라도 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그 내용은 빠지게 됐습니다. Q. 국민기금이 나오면서 성금 분배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성, 피해자 다양성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들이 보였잖아요. 그때는 어떤 고민이 있으셨나요? 정대협이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건 그 때로선 당연했어요. 국민기금 정책으로 많은 일본 국민이 모금과 기부를 했고, 일본 정부가 갹출금을 내면서 애매한 모양새로 국민기금이 진행됐죠. 국민기금을 할머니들이 못 받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어요. 저는 할머니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대협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정대협 분위기도 그랬는데, 국민기금의 ‘더러운 돈’을 절대로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이 문제에 대해 윤정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선생님은 “가족 중에 당뇨병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분이 단 걸 먹고 싶다고 한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죠. 즉 이 운동을 ‘우리’ 모두의 투쟁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증언집 작업을 하며 개인적으로 친분이 쌓인 할머니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분들 중에는 정대협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저에게 전화를 해 오신 분들이 계셨어요. 윤정옥 선생님에게도 직접 전화가 갔으니 저보다 훨씬 많은 말을 들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은 신념이 있으셨죠.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셨고, 일본의 악랄한 행위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이 확고하셨던 거예요. 저처럼 외부에 기반을 둔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요. “너는 일본 사람이니까 우리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도 들었어요. 반은 맞는 말이죠. 그런데 납득이 안 가더라고요. 때마침 주디스 허먼의 책 『심적 외상과 회복』(한국어판 제목은 ‘트라우마’)이 1996년 12월에 일본어로 번역되어서 읽었는데 한국 활동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식민지 피해를 직접 겪었든, 2차적으로 겪었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그때까지 한국 사회든 정대협이든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피해로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여성의 피해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인지 접근하는 연구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연구했어야 했는데 저도 그럴 능력이 없었어요. Q. 한국에서의 10년간의 체류 이전과 이후, 선생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달라졌고 어떤 방향으로 진화했나요. 1993년의 그 일로 충격을 받고 나서 저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한국 사람과는 생각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됐죠. 정대협 사람들과 일심동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한국과 일본처럼 가부장적인 국가 아래서 나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그런 체제하에서 양자택일 식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것은 타자를 차별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을 국가에 소속시킬 필요가 없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자.’ 이것이 결론이었어요. Q. 일본군‘위안소’ 제도와 전시 성폭력, 성별화된 군사주의 비판 일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자격)에 초점이 맞추어진 논의 지형에서 이슈의 젠더화 양상을 절감합니다. 특히 다양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이 존재하는데, 해결 운동 과정에서 ‘순결한 민족의 피해자’상에 맞춰 일원화, 표준화된 경향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누락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남성중심적 성관념 비판, 여성 섹슈얼리티 및 노동의 착취와 비가시화 문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와 연동되어 오늘날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보편화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끝난 운동으로서) 생명력을 잃고 게토화, 고립되는 양상과도 관련되는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90년대에는 불가피한 지점이 있었죠.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운동이 크게 달라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수요시위의 ‘끝’에 대해서도 90년대에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수요시위는 일본에 항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 문제를 한국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에요. 수요시위를 해서 일본을 규탄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일본 정부는 달라지지 않아요. 더 많은 연구가 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부터 윤정옥 선생님은 정대협과 연구소가 합쳐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운동의 중심을 연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지요. 2000년 법정 직후에도 그런 논의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밖에서 보면서 아쉬웠습니다. Q. 1995년의 국민기금과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는 피해자들과 한일 활동가들을 분열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히 아쉬운, 일종의 실패한 기획으로 보입니다. 또한 1990년대와 2000년대 일본 법원을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는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일본에서의 의원입법운동(전시 성적강제 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안)이 사법정의를 넘어선 ‘포스트콜로니얼’ 입법정의의 시도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관부재판 1심에서 승소한 결과 국회의원들의 입법 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엔의 권고가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됐죠. 그래서 모토오카 쇼지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입법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피해자 지원단체가 수긍하지 않으면 입법안을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민기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국민기금은 협의나 설득이 되지 않은 채 강행한 것이었잖아요. 그런 경험을 앞서 했기 때문에 정대협에서 찬성하지 않으면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 입법안에서는 일본인‘위안부’를 제외했어요. 외국인 피해자들만 대상으로 한 거죠. 일단 이 법안을 제정한 후에 일본인‘위안부’도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하면 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입법 자체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Q.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가 가져온 논란과 운동단체장의 국회 입성과 피해자의 고발, ‘위안부’ 피해 부정론과 여성혐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 빠르게 기억이 휘발되고 담론 지형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과 1세대 운동가들의 작고 속에서 운동사의 정리 또한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2022년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의 증보판 부제를 ‘페미니즘의 과제’라고 하셨는데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위안부’ 문제를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게 됐습니다. 2020년 5월에 이용수 님의 문제 제기가 있었을 때 90년대 정대협 활동을 했던 한 사람으로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가부장적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 때리기 현상이 있었고 한국을 포함해서 글로벌하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이런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운동을 옹호하거나 자기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언설이 아니라 철저히 페미니즘적 시각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이 페미니즘적 시각과 열정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어떤 특성을 갖고 있었는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단계인지, 일본에서는 어떤 과제가 있는지 등을 써서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90년대에는 조금이나마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논의가 점점 사라졌죠. 제가 2008년에 쓴 책에서도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 2020년 전후로 활발해진 것 같고, 그러한 기조가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일본 사회 문제도 심각해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논의가 활발해지면 반드시 일본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함께 연구도 하고 토론도 하면 더 좋지요. Q.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리며, 향후 생각 중인 연구 방향이 있으신지 함께 여쭙니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와 연결 지어서 연구하고 있어요. 또 북한의 젠더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게 제 마지막 과제 같습니다. 민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어서인지 북한에 대해서는 뚜껑을 닫아버렸어요. 그 후 한국 사회나 여성문제에 대해서만 다뤘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북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한반도의 가부장제가 어떤 식으로 남북한에 남아있고 또 새로 형성됐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요. 일본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웃 나라인 북한에 대해서도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핵문제나 세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북한 드라마와 젠더를 연구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