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타 후미코와 나의 접점을 되돌아보다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

  • 게시일2023.06.19
  • 최종수정일2023.06.19

2023년 4월 2일 논픽션 작가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씨(이하 가와타)가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대표작을 묻자 그는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1987년/가와타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를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하 전쟁, 전후, 전전 등에서 가리키는 전쟁은 모두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의미함) 때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끌려간 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에서 살아야 했던 고(故) 배봉기(향년 77세) 씨의 생애를 정성껏 취재해 쓴 장편이다. 가와타는 오랜 세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취재를 거듭하는 동시에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 공동대표나 아시아 각지의 위안소를 조사한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 센터’ 공동대표, ‘재일 ‘위안부’재판을 지지하는 모임’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강연회나 심포지엄이 아닌 가와타와 나의 접점은 두 번에 그친다. 첫 번째는 1997년경 내가 진행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 수업을 가와타가 취재해 이듬해 『수업 종군 ‘위안부’: 역사교육과 성교육으로서의 접근법』1에 실어준 것이다. 이 책 속에는 15명의 중·고교 교사들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수업 실천이 담겨 있다. 나의 실천은 〈평화학습과 성교육을 거듭하는 가운데〉라는 주제로 소개되어 있다. 나는 히로시마 교사로서 히로시마가 경험한 전쟁의 피해와 가해 측면을 객관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중시했다. 히로시마를 인류 최초 원폭 피해지로 삼아 전쟁의 참혹함과 핵무기의 무서움을 학생들이 인식하도록 하는 동시에 아시아 침략 거점이었던 군도 히로시마의 역사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사회과 수업으로 역사를 공부하는데 그 이외에도 홈룸 수업2 등을 통해 1학년은 일본과 코리아3의 역사를, 2학년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3학년은 현재의 민족차별 문제를 공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성교육은 학교 전체에서 행하는 강연회나 담임 교사들의 홈룸 수업으로 진행됐고, 나는 보건체육과 교사로서 보건수업에 임하며 인권이 바탕에 놓인 성교육을 했다.일본군‘위안부’ 문제는 3학년 마지막 보건수업 때 언급했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그동안의 성교육 쌓기가 중요하다. 1학년 때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2차성징을, 2학년 때는 성교·임신·출산을, 3학년 때는 낙태·피임·성감염증·문화와 성 그리고 성폭력·성과 전쟁에 관해 가르쳤다. ‘위안부’ 수업에서는 주로 한국 피해자들이 그린 그림을 교재로 사용했다. 내가 할머니들과 교류하면서 접한 그림에 그들의 실화를 얹어 교재를 만들어 수업 때 이야기했다. 가와타가 편집한 책에는 “나는 수업 후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진실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런 점이 논픽션 작가 가와타의 눈에 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 번째 접점은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가와타와 내가 서로 다른 시기에 동일 인물을 인터뷰하며 생긴다. 나는 2004년쯤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마르디엠 씨를 만났다. 그는 날씬하고 자세가 좋은 사람이었다. 마르디엠 씨는 1942년 5월경 일본인들에게 속아 칼리만탄(보르네오)의 반젤머신(Banjarmasin) 교외 트라완(Telawang) 위안소로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치카타라는 위안소 관리인이 ‘위안부’들에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이야기다. 위안소에서 치카타의 폭력으로 여성이 죽었을 때 마르디엠 씨와 ‘위안부’ 피해자들은 항의의 뜻으로 친구의 시신을 일부러 치카타에게 보이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가와타는 나보다 더 먼저 1995년 가을에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의 조사단으로서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청취 조사를 실시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경부터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가 나오기 시작해, 일본의 변호사나 시민단체들의 조사로 이어지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커밍아웃이 증가해, 가와타 등이 조사한 시기에는 6500명을 넘었다.5  마르디엠 씨가 사는 욕야카르타의 LBH(법률부조협회)에는 약 420명의 ‘위안부’ 조서(본인의 등록에 의함)가 작성됐다.

따로 또 함께, 외롭지 않았던 연구자의 길 ⓒ백정미

 

그 무렵 ‘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개인에게 배상하는 대신 3억8000만엔(약 90억 루피아)을 양로원 건립비로 충당했다. 마르디엠 씨는 이런 방식을 거절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호소했다.

가와타는 마르디엠 씨가 말한 위안소에서의 ‘슬픈 두 가지 기억’-초경도 없던 13세의 몸으로 첫날 6명의 일본 병사들로부터 강간당했을 때의 출혈과 참을 수 없는 통증, 임신이 알려지자 마취 없이 낙태 수술을 받게 됐을 때의 격통과 아기에게 마리티야마라는 이름을 붙여 매장한 것-을 소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마르디엠 씨가 일상에서 겪은 일들도 듣게 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남편의 유족연금을 받으러 갔을 때 차례를 기다리던 수급자들이 마르디엠 씨를 가리키며 ‘일본 매춘부’라고 욕한 일이라든지, 일본 장교의 현지 처였던 여성이 낳은 아이는 ‘일본인의 아이’라며 주위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마르디엠 씨의 증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멸시와 냉대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말해준다.

가와타는 그저 보도하기 위해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다가가 그 마음을 대변하려고 했다. 공감하려는 자세가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마음을 열고 힘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가와타는 당사자의 인생과 그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부상시켜 갔다.

가와타는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치쿠마쇼보(筑摩書房), 1993, 한국어 번역본 없음)에서 재일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도 씨의 피해 경험과 전후의 보다 무거운 삶을 그려냄으로써 일본 사회의 성차별과 민족차별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싸우는 생존자들의 용기와 삶의 태도의 숭고함이 전해진다.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였던 배봉기 씨의 증언 기록에는 오키나와전에 휩쓸린 주민 ‘집단 자결’(집단 강제사)과 배봉기 씨가 본 돌격대의 모습도 소개된다. 웹진 〈결〉에 실린 “역사적인 가해와 피해를 큰 틀에서 말한다면 배봉기 씨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피해를 매우 가혹하게 받고 도카시키에까지 왔다. 이러한 배봉기 씨가 234고지를 다시 찾아가 가해자인 일본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가와타 후미코, 배봉기 이야기 - “그 전쟁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어.”, 2020.11.17)라는 글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또한 전쟁이라는 국가폭력 틀 속에 위치시켜 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90년대에 내가 실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수업에서 이러한 시각은 약했다. 여성 인권 문제로서 비인도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수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학생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이 수업을 가해자인 일본 병사들을 전쟁이라는 국가폭력 아래 놓인 존재로, 즉 구조적 관계 속에서 볼 필요성 또한 있다는 내용을 더해 바꿔 나갔다. 가와타의 작품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나에게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손자가 두 명 있다. 그래서 마르디엠 씨 일을 포함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려주고자 한다. 내가 재학 중인 성공회대의 친구가 배봉기 씨 연구로 4월에 가와타를 인터뷰할 계획이었다. 입원 중이었던 가와타는 “한국의 학생이 올 거니까 병원에서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들은 진실을 젊은 연구자에게 반드시 전하고 싶다는 가와타 후미코의 저널리스트로서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각주

1. 川田文子(편집), 『授業 「従軍慰安婦」-歴史教育と性教育からのアプローチ』, 教育資料出版社, 1998.
2. 민주적인 반을 만들기 위해 학급 담임 교사가 담당하는 수업.
3.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총칭으로 사용함.
4. 일본 중·고등학교에서는 보건체육과 교사가 보건수업도 한다. 중학교의 경우 연간 35시간이다.
5. 1995년 8월~1996년 11월 '전 병보 연락중앙협의회'(일본군 보조병으로 일한 인도네시아 병보들이 전시 중 강제로 공제 적금된 급료의 환불을 요구하는 단체)에 등록한 피해 여성 수는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19,573명. 일본 장교의 현지 처와 일본군으로부터 강간당한 피해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글쓴이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생(2023년 현재는 한국에서 논문을 쓰고 있음). 일본 히로시마현의 체육보건 교사였고, 시민으로서도 평화·인권활동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교류했다. 피해자들이 그린 그림 등을 교재로 만들고 일본군성노예제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에서 평화 운동 및 인권 교육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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