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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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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김성운 X 사진: 김효연 *이 에세이는 김성운 교수의 논문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논총』 56집, 2022, 91-116를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Ⅲ. 〈태양의 아이〉: 피해자성의 거부 〈어머니와 산다면〉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과정, 등장인물들의 부상과 상실을 통해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에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인이 입은 피해만을 강조하는 ‘피폭 내셔널리즘’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태양의 아이〉(2021)는 일본인들이 원폭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교토대학의 아라카쓰 분사쿠(荒勝文策) 연구실에서 원폭 연구를 진행했던 젊은 과학자들의 고뇌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 핵분열을 뜻하는 ‘fission’에서 따온 ‘F호 연구’로 알려진 이 비밀 프로젝트는 당시 해군 함정 본부가 1943년 5월 아라카와 연구실에 의뢰한 연구로, 전황이 급박해진 상황에서 일본 역시 미국처럼 원폭의 개발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1] 1938년 독일 핵물리학자들이 핵분열을 발견한 후 미국을 포함하여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국가는 미국과 일본을 포함, 모두 6개국이었다.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 역사학적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이것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일본이 전쟁 중 핵무기를 실제로 개발했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언론 매체가 기꺼이 다룰 만한 소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교토대학 아라카와 연구실의 ‘F호 연구’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이 도쿄대학 이화학 연구실의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의 이름을 딴 ‘니고(ニ号) 연구’이다. 1941년 6월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의 야스다 다케오(安田武雄) 중장은 당시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니시나에게 핵무기 연구를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니시나는 1943년 초에 정식 연구보고서를 육군 측에 제출했고, 육군은 이를 근거로 같은 해 5월 니시나 연구소에 핵무기 개발을 명한다. 전쟁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던 당시 총리 도죠 히데키(東条英機) 역시 이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걸었다. 1944년 봄 이후에는 이 계획이 정부의 연구 동원 회의에서 관민 공동의 국가 프로젝트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라늄이었다. 야스다에 의하면 원폭 1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우라늄을 확보하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을 다 뒤져도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한편 미국은 하루에도 수십 기의 원폭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의 우라늄을 확보했고 이러한 소식이 일본에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관계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전세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신형 무기’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44년 2월, 물리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이었던 다나카다테 아이키쓰(田中舘愛橘)는 “라듐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영국 함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폭탄”을 개발할 것을 군부에 촉구했다. 1940년 마이니치 신문이 우라늄-235를 ‘꿈의 동력원’으로 소개한 이후 원폭에 대한 지식은 대중들에게도 확산되었다. 1944년 7월 2일 아사히 신문은 ‘결전의 신병기’ 특집에서 “10~15그램만 있으면 대도시 1~2개 주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에 대해 소개했다. 같은 시기 대중잡지 『신청년(新青年)』에 실린 다테카와 겐(立川賢)의 소설 「샌프란시스코를 날려버리다」는 일본군이 ‘원자력 항공기’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원폭을 투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전시 핵무기 연구는 결국 미국의 그것을 따라잡지 못했고, 일본의 전쟁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에 의해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의 원폭조사단에 따르면 일본의 ‘니고 연구’는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의 1942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언론인 스기타 히로키(杉田弘毅)는 ‘니고 연구’에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라 최초의 핵 사용국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교토대학 아라카쓰 연구실의 젊은 과학자 이시무라 슈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라카쓰 연구실은 해군의 의뢰를 받아 핵분열을 이용한 ‘신형무기’ 제작 실험에 돌입한다. 우라늄-235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실험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지만 실험광 슈는 원자가 붕괴할 때 발생되는 청록색 빛깔에 이끌려 동료들과 실험을 지속해 나간다. 그러던 중 해군 파일럿에 지원했던 동생 히로유키가 일시 귀환한다. 동료들이 모두 가미카제 작전에 출격하는 상황에 자신만 빠질 수 없다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바다에 빠져 자살하려는 동생을 슈는 구해낸다. 이렇게 전쟁이 젊은이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슈를 비롯한 아라카쓰 연구팀은 히로시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원폭의 위력을 목도한 슈는 그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해온 과학적 진리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태양의 아이〉는 일본에서 원폭을 개발하는 과정을 미국과의 경쟁으로 묘사한다. 아라카쓰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하나오카: 원자핵 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살상 능력 면에서도 차원을 달리할 거예요. 오카노: 샌프란시스코라면 어림잡아 20만 명은 죽을 거야. 기도: 30만입니다. 제 계산으로는. 하나오카: 우리들이 여기에 가담해도 되는 것일까요? 기도: 지금 그런 걸 생각해도 의미는 없어. (중략) 기도: 우리가 하지 않으면 미국이 할 거야. 미국이 만들지 않으면 소련이 만들겠지. 먼저 원자핵 폭탄을 만드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해. 이렇게 일본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이나 소련과의 경쟁을 의미했다. 결국 미국에 의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시찰하고 오는 기차 안에서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일본은 원자핵 폭탄에 당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폭의) 개발 경쟁에서 졌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에요. 일본의 과학자는 패배했습니다!”라며 분개한다. 이렇게 히로시마를 폐허로 만든 원폭은 미국과 일본의 개발 경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단지 과학기술이 우수한 미국이 일본보다 먼저 개발에 성공했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태양의 아이〉는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원폭 개발 경쟁에서 일본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태양의 아이〉에서 나타나는 원폭의 ‘재역사화’ 역시 3.11 이후의 일본 사회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일본 사회는 핵에너지의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강화해왔고, 그것이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일본 정부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으로 일본 사회는 원자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점차 탈바꿈했고 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원전 시설 폭발 이후 수개월간 방사능 물질이 대기와 토양을 오염시켰고, 방사능 오염수는 바다를 타고 주변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인 일본이 결국 자국민은 물론 타 국민에게까지 방사능 오염의 피해를 입히는 가해국이 되었고,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이 〈태양의 아이〉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영화는 기존 원폭 영화의 ‘피폭 내셔널리즘’ 문법을 수정하고 있다. 원폭 투하의 역사적 맥락, 즉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과오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두 영화 모두 원폭의 경험을 일본으로 한정하며, 전시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의 원폭 투하를 초래한 태평양 전쟁이 사실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일부였다는 사실, 더 나아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으로 시작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아시아 이웃들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의 대략 10%가 재일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각주 ^ 杉田弘毅,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2005, 15-16.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에 관해서는 이 책을 참조함. 참고문헌 ·川口隆行, 2021,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강태웅, 2009,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서동주, 2014,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장정욱, 2011,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Kenzaburo, Oe, 2011,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2012,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木村朗子, 2016,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佐藤忠男, 2016, 「知らせることが、大切なこと」, 『キネマ旬報』 1718. ·杉田弘毅, 2005,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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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강간과 젠더 폭력은 TRC의 미완수 과업: 젠더 정의를 향해 계속되는 남아공의 여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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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와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헌법재판소 입구 바깥에 위치한 ‘민주주의의 불꽃(Flame of Democracy)’은 시민들에게 “억압과 불의로부터 자유로운 삶”에 대한 권리를 상기시키며 영원한 빛을 밝히고 있다. 2011년 남아공 전 대통령이자 전 세계적 아이콘인 넬슨 만델라에 의해 점화된 불꽃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에 맞선 남아공의 오랜 투쟁을 상징한다. 또한 남아공 내 성평등 증진을 위한 포괄적 기틀을 제공하는 1996년 진보 헌법을 기념하는 의미 역시 지닌다. 하지만 2023년, 쿨루마니 갈렐라(Khulumani Galela) 캠페인에 참여한 여성들은 이 불꽃 바로 옆에서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TRC)의 ‘미완수 과업’에 관심을 촉구하며 법원 앞 야외 취침을 강행했다. 이들이 관심을 끌고자 하는 ‘미완수 과업’에는 남아공에 만연한 성폭력과 젠더 기반 폭력이 포함된다. 남아공에서 “여성과 아동의 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끊임없는 전쟁”은 수많은 충격적 통계 수치들로 드러난다. 남아공 경찰청(SAPS)에 따르면 2023년 1월부터 3월까지 총 10,512명이 강간 피해를 신고했다. 이 수치는 성폭력 경험을 경찰에 신고한 사람들의 수로, 남아공 의학연구위원회(Medical Research Council)는 실제 성폭력 피해자 수는 9배가량 더 높을 것으로 본다. 남아공은 남편, 연인, 전 남편, 전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여성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그 수는 여느 국가의 5배에 달한다. ‘변화를 위한 여성(Women for Change)’의 2022년 통계에서는 남아공에서 총 3,843명의 여성이 살해당했으며, 8시간에 한 명 꼴로 발생하는 여성 사망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파트너에게 살해당한다. 현지 학자인 품라 쿠올라(Pumla Quola)는 자유를 향한 헌신으로 충만한 남아공이 “모든 안전 가능성을 위협하는” 젠더 기반 폭력의 “악몽”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심각한 수준의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수치스러운 일”로 규정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대통령은 남아공에 만연한 “여성과의 전쟁”을 코로나 바이러스에 비교하기도 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강간, 가정 폭력, 아동 살인이 증가했다는 통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남아공이 맞서야 할 두 번째 팬데믹”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남아공의 높은 성폭력 범죄 비율과 ‘강간 문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분석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남아공의 오랜 폭력의 역사, 지속적인 사회적·경제적 배제, 여성의 권리 획득에 대한 반발 등과 연관 지었다. 그러나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지적했듯, 남아공 사회에 자리 잡은 이러한 환경이 “성폭력을 정상화하거나 간과하는 지배적 사회 규범을 기반으로 번성하는”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남아공이 이러한 폭력을 다루는 데 실패해 왔음은 아파르트헤이트 붕괴 후 과거사 해결의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던 그 선구자적 지위에 비추어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1997년 7월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TRC 청문회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성평등위원회(Commission of Gender Equality) 초대 위원장인 덴지웨 음틴소(Thenjiwe Mtinso)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과제는 정의와 인권, 특히 젠더 정의와 젠더 인권 보호를 위한 지속적이고 일관된 투쟁입니다. 이미 대량학살 수준에 도달한 이 무섭도록 심각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을 해결해야 합니다.” 2023년인 현재에도 이러한 폭력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적 접근이 필요하다. 남아공에서의 젠더와 변화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두 인종, 젠더, 계급, 성적 지향, 문화 측면에서의 소외와 예속을 기반으로 한다. 이에 대응해, 1994년 수립된 새로운 민주정부는 남아공의 학대적인 과거를 뒷받침해 온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남아공의 새로운 사회 기틀을 이루는 1996년 헌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국가는 인종, 젠더, 성별, 임신, 혼인 여부, 민족 또는 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 지향, 나이, 장애, 종교, 양심, 신념, 문화, 언어, 출생 중 어느 하나 이상의 이유로 특정 개인을 직간접적으로 부당하게 차별해서는 아니 된다.” 헌법 외에도 1998년 제정되어 2022년 개정된 가정폭력, 성범죄 및 관련 문제법 등 젠더 기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법과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남아공의 성과 중 하나는 집권당인 아프리카국민회의(ANC)의 자체 할당제를 통한 공직에서의 여성 대표성 달성이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부 시절에는 국회의원 중 (백인) 여성 비율이 3%에 불과했지만, 1994년 첫 민주 선거 이후 여성 의원 수가 10배로 증가했다. 2009년에는 여성이 전체 의석 수의 44%를 차지하여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여성 의원 비율을 기록했다. 한편, 2000년 이후 높은 성폭력 발생률에 대응해 성폭력 생존자 지원 개선을 위한 ‘투투젤라 케어센터(Thuthuzela Care Centres)’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센터 중 일부는 의료 및 법률 서비스뿐 아니라 심리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원스톱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렇듯 젠더 권리 보장을 위한 새로운 기틀이 구축되는 가운데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폭력과 불평등이 급증하는 상황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젠더 감수성을 반영한 법률과 헌법적 기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은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다. 2022년 기준으로 남아공 여성의 41% 이상이 실직 상태이며, 아프리카 여성의 71%가 빈곤선 아래의 생활환경에 놓여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30%에 달하는 임금 격차를 경험하고 있다. 아만다 가우스(Amanda Gouws)가 지적했듯 경찰과 법원이 일관되게 법을 시행하고 집행하지 않는다면 법은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재원 부족, 부실 교육, 불충분한 감수성 교육도 현재 구축된 인프라의 가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품라 쿠올라는 “강간 생존자들은 1994년 이후의 사법 체계가 정의를 실현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꿈과 희망은 1994년 이후 몇 번이고 배신당해야 했다”라고 말한다. 헌법 질서가 위배되고 있다는 인식과 함께 분노가 확산되자, 2020년에 〈젠더 기반 폭력 및 여성 살해에 대한 국가 전략 계획(National Strategic Plan for Gender Based Violence and Femicide; NSP-GBVF)〉이 마련된다. ‘#완전한 중단(#TotalShutDown)’ 운동을 통한 이행 압박 아래, NSP는 젠더 기반 폭력의 방지와 가해자 처벌을 포함해 여러 영역에 대한 정부 개입을 약속한다. NSP는 용납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한 폭력에 대한 항의가 고조된 가운데 출범했다. 그러나 피나 코디상(Phinah Kodisang)이 지적했듯, 이 계획은 남아공의 권력자들이 “젠더 기반 폭력에 양분을 공급하는 가부장적 규범에 맞서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준비”를 갖추는 것을 포함, 여러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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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강간과 젠더 폭력은 TRC의 미완수 과업: 젠더 정의를 향해 계속되는 남아공의 여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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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와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일시적 행동주의 2019년 8월, 19세의 케이프타운대학교 학생 우이네네 므뤠티아나(Uyinene Mrwetyana)가 케이프타운에서 우체국 직원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영화미디어학과 1학년 학생이었던 우이네네(신, 진리를 의미)는 우체국에 소포를 찾으러 갔다가 잔혹하게 공격당하고 살해당했다. 코파노 라텔레(Kopano Ratele)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끔찍한 공격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 나라에서 우이네네의 살해 사건은 소수의 사건들만 가능했던 방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라고 언급했다. 수천 명의 여성이 거리로 나섰고 ‘#다음은 내 차례인가(#Am I Next)’ 캠페인이 시작됐다. 그러나 〈뉴요커(New Yorker)〉에서 지적했듯, 우이네네의 사건은 다음과 같은 주지의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켰을 뿐이다. “특히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신문 1면을 장식하고 나라 전체에 또 다른 (피해) 여성의 이름이 알려진다. 때로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때로는 누구의 이름을 왜 기리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략) 집회가 열리고 국가 애도의 날이 선포된다.” 그런 뒤에는 또 다른 여성이 강간과 살해를 당했다는 또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가 헤드라인에 오른다. 우이네네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는 2018년 ‘#완전한 중단(#TotalShutDown)’ 운동이 일어난 지 거의 1년 만의 일이었다. 2018년 당시 수천 명의 여성과 성소수자, 젠더다이내믹스(Gender DynamiX), 사르트지에바트만여성아동센터(Saartjie Baartman Centre for Women and Children)와 같은 단체가 대규모 행동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2017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후 불에 태워진 카라보 모코에나(Karabo Mokoena)와 2018년 5월 살해된 21세의 대학생 졸릴레 쿠말로(Zolile Khumalo)를 비롯한 여성 살해 피해자들을 추모하며 행진했다. 운동은 “폭력은 그만, 캠페인도 그만, 립서비스도 그만!(Enough Violence, Enough Campaigning, Enough Lip-service!)”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고, 시위대는 정부에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강도 높은 조치를 요구했다.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행진은 24가지 요구 사항을 의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성료됐다. #완전한중단국가위원회(#TotalShutDown National Committee)의 가오팔렐웨 팔라에칠레(Gaopalelwe Phalaetsile)는 “양해각서에 명시된 24가지 요구 사항은 여성과 성소수자가 홀대되었던 지난 24년간의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라고 밝혔다. 시위를 8월에 시작한 것은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남아공에서 8월은 1956년 약 2만 명의 여성이 아프리카 여성 통행권 도입에 반대하는 역사적인 행진을 개최한 ‘여성의 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여성들은 “여자에 대항하는 건 바위에 대항하는 것, 바위에 대항하면 깨지고 말리라!(When you strike the women, you strike a rock, you will be crushed!)”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후 해당 구호는 남아공에서 억압에 맞서는 여성의 용기와 힘을 상징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남아공에서는 다수의 여성 권리 옹호 운동이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운동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여성전국연합(Women's National Coalition)은 1991년 70개 이상 단체의 연합을 통해 평화 협정 협상에 여성의 입장이 포용되고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단체들의 목표는 계급, 인종, 이념의 측면에서 확연히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효과적인 평등을 위한 여성 헌장(Women’s Charter for Effective Equality)’을 마련함으로써 궁극적으로 1996년 제정된 성 감수성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 남아공의 체제 전환 이후에도 행동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왔으며, 손케젠더정의(Sonke Gender Justice) 및 여성학대에반대하는사람들(People Opposing Women Abuse; POWA)과 같은 다양한 비정부기구가 설립되었다. 최근에는 #남자는쓰레기다(#MenAreTrash), #완전한중단, #우먼포체인지(WomenForChange), #강간문화종식(#EndRapeCulture) 등 수많은 소셜 미디어 캠페인이 젠더 기반 폭력 관련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발적인 이슈 중심 행동’은 정부가 조치를 취하도록 지속적인 압력을 가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더 문제적인 사실은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과 비슷한 맥락에서, 폭력의 가해자나 조력자가 아닌 폭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서 행동주의와 변화를 위한 노력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남아공의 이행기 정의 운동 이행기 정의의 실천과 이론의 발전은 여러 면에서 남아공의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 폭력의 역사를 직시하고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대안적 조치에 남아공이 기울인 노력은 당시 세계에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승자의 정의’를 지양한 남아공의 국가 건설 과정을 이끈 것은 1995년 〈민주적 남아프리카를 위한 협약(Convention for a Democratic South Africa; CODESA)〉 합의를 기반으로 수립된 TRC였다. TRC 설립의 근거가 된 법은 동 위원회의 목표를 “과거의 갈등과 분열을 초월하는 이해의 정신으로 국민 통합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원회의 쉴라 마인체스(Sheila Meintjes)와 베스 골드블랫(Beth Goldblatt)은 위원회가 젠더 기반 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남아공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이해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떤 면에서는 남아공 TRC가 여성을 성공적으로 포용한 듯했다. 위원회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했고, 여성 문제만을 다루는 별도의 청문회가 세 차례나 열렸다. 그러나 많은 젠더 활동가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보다는 타인의 경험에 대해 진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21,000건의 진술 중 446건은 성적 학대로 분류되었고 강간은 140건에서만 명시적으로 언급됨)과 특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여성의 삶에 미친 구조적 영향이 간과되었다는 점을 들어 TRC를 비판했다. 또한 TRC는 강간을 현재 국제법에서 인정되는 고문과 박해의 한 형태로 인정하지 않고 중대한 가혹 행위(severe ill-treatment)로 분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최종 TRC 보고서에서 여성 문제가 한 장(chapter)에 걸쳐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남아공의 젠더적 특성은 피상적으로만 기록되었다. 당시 응용법률연구센터(Centre for Applied Legal Studies)가 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조사를 요하는 성폭행과 고문의 광범위한 증거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폭력 역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안드레아 두르바흐(Andrea Durbach)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향후 이행을 위한 지도를 그려나가는 주요 과정에 여성 성폭력 같은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를 다루는 중요한 지점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개발, 변화, 배상이 피해를 입은 개인의 존엄성 회복에 영향을 미치거나 폭력 경감과 예방에 기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물론 남아공 TRC는 심각한 인권 침해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의 구조적 영향을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이후 남아공에서 계속되고 있는 폭력, 특히 젠더 기반 폭력을 어떤 식으로든 용인하게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쉴라 마인체스를 비롯한 이들이 강조하듯, 남아공은 “과거에 여성에 대해 자행된 정치적 폭력이 현재의 폭력 수준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사회이다. 두르바흐는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고질적인 폭력과 그에 수반된 불처벌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도 여전히 높은 여성 성폭력을 설명하는 반복적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쿨루마니 갈렐라 캠페인(Khulumani Galela Campaign)에 따르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과 젠더 폭력은 아직 완수되지 않은 과업의 일부이고 우리는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결론 그렇다면 남아공은 과연 언제까지 세계에서 여성이 살기에 가장 위험한 나라 중 하나에 머무를까? 구조적 불평등과 젠더 기반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적 규범에 맞서지 않는 한 여성 권리 신장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이니셔티브는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하다. 아만다 가우스(Amanda Gouws)를 비롯한 옵저버들은 보다 적극적인 여성 운동과 헌신적인 “국가 조직 내 페미니스트 여성”이 필요함을 촉구한다. 1990년대 민주주의 이행기에 여성 평등에 앞장섰던 여성전국연합의 사례는 흔히 모범 사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행기에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여성들을 결집시켰던 단체의 강점이 결국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1994년 4월 선거 직후 일반인 여성 모임은 와해되었다. 피나 코디상(Phinah Kodisang)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향후 동원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코디상은 〈젠더 기반 폭력 및 여성 살해에 대한 국가 전략 계획(NSP-GBVF)〉과 관련해 “모든 남아공 국민에게는 현 상황과 같은 폭력과 강간을 없애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간과 여성 살해를 종식시키려는 집단적 의지는 물론 구조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1997년 당시 남아공 TRC를 향한 덴지웨 음틴소(Thenjiwe Mtintso)의 메시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젠더 불평등과 젠더 불공정은 인권 침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아공 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여 결집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결집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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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오늘날 일본의 성 착취와 여성혐오에 맞선 콜라보(Colabo)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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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와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8년 전, 아유미는 절망 끝에 콜라보(Colabo)에 전화를 걸었다. 아유미는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쫓겨나 할머니 집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삼촌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했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아동복지센터 직원에게 삼촌에게 당한 일을 털어놓았지만 직원은 아유미를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센터는 아유미가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부모의 말을 믿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아유미는 돈 한 푼 없이 도시를 배회했고, 성 착취의 쉬운 표적이 됐다. 도쿄의 밤 산업만이 소녀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친 아유미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친구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했지만, 그중 한 명에게 속아 학교 교사들을 위한 난교 파티에서 매춘을 해야 했다. “처음 유메노 씨와 통화할 때 너무 힘들어서 큰 소리로 울었어요.” 아유미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1] 아유미는 빈곤, 성적 착취, 노숙,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부재라는 깊은 심연 속에서 살아온 수많은 소녀들 중 한 명이다. 소녀들의 옷과 휴대용 통신 기기는 지난 수십 년간 변화를 거듭했지만, 곤경에 처한 소녀와 여성을 착취하는 성 산업은 변함없이 건재할 뿐 아니라 그 모집 방식이 더욱 교묘해지고 성 서비스는 더욱 다양해졌다. 성 착취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은 비단 업계 관계자와 소비자만은 아니다. 일본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방대한 공간과 자유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성 서비스는 고도로 상업화되었고, 소녀들의 가치를 성적 도구로 전락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소녀들의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기본적인 자기 존엄성마저 훼손되고 있다. 이것이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이다. 성폭력이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콜라보는 아유미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2011년에 설립된 콜라보는 성 착취와 성폭력,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소녀와 젊은 여성들을 위한 또래 조직으로 활동해 왔다. 2023년 2월, 필자는 웹진 〈결〉의 편집부로부터 콜라보에 관한 글을 기고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고 이에 흔쾌히 응했다. 콜라보에 대한 괴롭힘과 훼방이 날로 심해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콜라보와 설립자인 니토 유메노(Nitō Yumeno)에 대한 공격은 소름 끼치게도 ‘위안부’ 여성들을 지지하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최근 몇 년간의 반발을 떠올리게끔 했다. 필자는 먼 곳에 있는 콜라보의 작은 지지자이자 니토의 출판물을 읽는 독자에 불과하지만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여성혐오의 가공할 위력은 콜라보에 대한 추악한 부정주의와 왜곡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이 익숙한 데자뷔는 필자에게 잠 못 이룰 분노를 안겨 주었다. 콜라보의 사명은 단순명료하다. “우리는 모든 소녀들이 의식주를 누리고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회, 어려움에 놓인 소녀들이 착취당하거나 폭력에 노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2] 니토와 콜라보의 도움으로 삶을 회복한 소녀들을 포함한 콜라보의 직원들은 이러한 소녀들이 처한 상황에 귀 기울이고,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또한 변호사에게 법적 도움을 구하며, 산부인과에 동행하고, 소녀들을 대신해 시의 관료 및 학교 관리자와 협의에 나서기도 한다. 대다수 공공 프로젝트와 달리 콜라보의 돌봄 활동에는 정해진 종료 시점이 없으며, 측정 가능한 결과에만 의존해 성과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공공 쉼터나 관공서에서 일반적으로 준수하는 엄격한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입소문으로 콜라보를 찾아온 많은 소녀들은 그 신속한 대응에 놀라워한다. 콜라보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소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족 같은 분위기”나 “생존을 위한 팀” 등-를 제공하며, 무조건적이되 구속하지 않는 자매애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콜라보의 설립자인 니토는 이 소녀들의 큰언니이자 선구적 활동가이다. 그 역시 고교 시절 부모의 학대, 학교와의 단절, 성 착취, 자살 충동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경험이 있다. 니토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소녀들의 곤경을 더 큰 사회적 문제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 농업 교사 겸 난민 활동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변화의 촉매제가 되었던 또 다른 사건으로 니토는 필리핀 여행을 자주 언급한다. 여행 기간 니토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10대 매춘부들을 찾아다니는 일본 남성들을 목격했다. 그는 2011년 지진 이후 미야기현뿐만 아니라 도쿄도에서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지금의 콜라보로 이어졌다.[3] 니토는 공개 강연과 저작을 통해 성 산업에 동원된 소녀들의 암울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4] 그는 소녀들을 노리는 모집책들이 어떤 수법을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녀들의 증언을 통해 이들이 왜 이런 남성들을 믿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매니저는 매우 친절했고 제 말을 잘 들어주었어요.” “모집책이 (성 서비스를 제공할 여자를 보내 달라는) 다음 콜이 오기 전에 단체 대기실에서 쉴 수 있다고 했어요.” 콜라보는 이러한 모집책들이 그래 왔듯, 길거리에서 소녀들에게 말을 걸며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소녀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탄생한 야간 버스 카페는 음식, 옷, 생필품이 갖추어져 있고, 성 착취 대상을 노리는 남성들에게서 안전한 임시 피난처가 되어 준다. 소녀들은 이곳에서 콜라보의 직원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니토는 콜라보를 ‘또래’ 단체로 운영하기 위해 세부적인 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콜라보 직원들은 연대하려는 소녀들과 옷차림과 말투를 비슷하게 맞춘다. 보통 식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첫 상담에서 소녀들은 직원들이 “아동복지센터의 직원과는 매우 다르”다는 인상을 받는다. 니토의 유튜브 영상과 트위터 게시물에는 “きもい(징그럽다),” “うざい(짜증난다)” 등의 은어가 자주 사용되며, 이는 소녀들의 본능과 표현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콜라보의 직원들은 몰이해한 학교 교사들과 달리 소녀들의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조언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콜라보는 소녀들의 생일을 함께 축하하는데, 다수의 소녀들에게는 단지 태어났단 사실만으로 축하를 받는 일조차 처음 겪는 일이다. 니토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콜라보의 활동은 ‘소녀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들과 함께 하는 것’임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조차 ‘지원’의 한 방식으로 간주되는 현실이 답답하다.”[5] 이 소녀들에게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할머니들의 증언에 깊이 공감한다. 2016년, 소녀들은 일본군에게 착취당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들의 전시회인 ‘우리는 매매되었다(We Were Bought)’를 개최했다. 명품 가방을 원해서 중년 남성을 이용했다는 식의 흔히 퍼져있는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소녀들은 고통받고 있다. 소녀들은 전시회를 통해 노숙, 학대, 따돌림, 성폭력은 물론 경찰, 교사, 아동복지센터의 방관, 손목 자해[6]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출판물을 살펴보면 소녀들은 사회적 담론을 내면화한 결과 “살아남기 위해 즐기는 척해야 했다,” “SM 섹스 플레이의 여왕이 되는 걸 목표로 삼기도 했다” 등의 증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 ‘위안부’ 여성들과 콜라보 자매들이 보여준 용기는 소녀들이 이러한 덫에서 벗어나 학대와 성 착취라는 더 넓은 역사적 시각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니토 유메노는 소녀들의 대변자로서 트위터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녀들에게 스토커, 포주, 부모를 피할 수 있도록 소셜 미디어에 자신을 노출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한편, 소녀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로 결심한 니토는 온라인 여성혐오 공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니토가 주목한 문제 중 하나는 온천 휴양지 마을의 마케팅 전략이다.[7] 명백히 성적 대상화된 10대 초반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침대에서 깜짝 방문을 기다리고 있어요” 같은 노골적인 대사를 내뱉는 식이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일상적인 성 상품화에 대한 니토의 강력한 비판은 안타깝게도 이를 무해한 환상과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으로 여기는 이들의 분노를 샀다. “급진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받고 있다”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남성들 중 일부는 지난 수년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니토와 콜라보에 대한 스토킹과 협박을 일삼아 왔다. 2022년 여름, 전례 없는 규모의 사이버 괴롭힘이 시작됐다. 이러한 괴롭힘을 주도한 히마소라 아카네(Himasora Akane)[8]라는 트위터 계정 소유자는 콜라보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과 웹사이트에 게재된 사진 및 데이터를 심각하게 왜곡해 지속적으로 계정에 올렸다. 예를 들어, 콜라보는 소녀들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월 생활비를 계산하고 있는 사진을 올리고, 141,000엔에서 163,000엔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히마소라는 소녀들이 해당 금액을 사회 복지 보조금으로 수령해 왔다는 인상을 주도록 자료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보조금을 불법으로 취득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또한 콜라보의 전체 연례 보고서와 도쿄도 위탁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비교하면서, 보고서 형식이 달라 존재할 수밖에 없는 수치 차이를 공적 자금 남용의 증거로 지적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얼핏 보기에도 앞뒤가 맞지 않지만, 그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일종의 운동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콜라보 법률팀의 집계에 따르면, 히마소라 아카네는 2022년 7월 12일부터 11월 28일까지 불과 몇 개월간 콜라보를 공격할 목적으로 총 900건의 트윗(최소 17만 건 이상 리트윗)과 27건의 웹 포털(note.com) 게시물, 30건의 유튜브 동영상(조회수 1,198,181회)을 유포했다. 이 매체들을 통해 그는 콜라보가 소녀들의 사회 복지 보조금을 가로채고 열악한 환경에서 노예처럼 부리며 공짜 노동력으로 사용하고 있고, 세금을 도둑질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끊임없이 날조했다. 2022년 11월, 그는 도쿄도에 콜라보 프로젝트에 대한 감사를 요청했고, 그 결과 발표된 제3자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콜라보는 공적 자금을 횡령하기는커녕, 자체 자금까지 동원해 위탁 프로젝트를 완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감사 과정에서는 필수 제출 대상이 아니었던 추가 자료까지 검토되었지만, 히마소라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가 콜라보와 니토에게 저지른 짓은 명예훼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콜라보 법무팀[9]은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으로 콜라보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필요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끔찍한 결과는 트위터와 유튜브에서 여성혐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히마소라의 주장은 쉽사리 반박 가능할 정도로 허술했지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게시물을 열심히 퍼 나르며 ‘좋아요’와 감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타 케이코(Ōta Keiko) 변호사[10]는 말한다. “왜곡이 심할수록 관심과 ‘좋아요’를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유포됩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여성혐오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히마소라는 계정을 통해 “당신(니토)이 모에에(萌え絵: 어린 소녀를 성적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는 애니메이션 작화)를 태우는 짓을 중단하면 나도 멈추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괴롭힘이 온천 홍보 캐릭터에 대한 니토의 비판을 상대로 한 보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일련의 혐오 운동은 빠르게 확장되었고, 가담자들이 ‘페미니스트’로 간주하는 대상에 대한 반발을 실체화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콜라보의 실제 활동이 어떠했는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러한 운동은 날로 힘을 얻었다. 그 결과는 심각했다. 2023년 초, 선출직 관료를 포함한 다른 가해자들이 버스 카페에 모여들어 콜라보를 소리쳐 비방하면서 이를 촬영하기 시작했다.[11] 콜라보는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들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확보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2023년 3월, 도쿄도는 ‘안전’을 이유로 법적 보호가 보장된 장소에서조차 버스 카페 운영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도쿄도는 콜라보의 기존 프로젝트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콜라보가 겪어야 했던 이 모든 역경은 비극적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왜곡과 여성혐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와 지원자들을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돈벌이꾼으로 가스라이팅하는 패턴을 목도해 왔다. 우리는 눈앞에서 그런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나도록 방치했다. 하지만 콜라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성 자원봉사자들이 버스 카페에 모였고, 이들은 가해자들을 막아서는 보호벽이 되어 주었다.[12] 또한 도쿄도의 결정에 항의하고자 모인 여성들도 있었다. 니토 유메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4월에 다른 장소에서 버스 카페를 다시 열었다. 그는 말했다.[13] “버스 카페를 운영할 수 없었던 한 달 동안 임신한 소녀들에게서 많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한 달은 많은 소녀들에게 매우 길고 힘든 시간이었을 겁니다.” 콜라보는 현재 전적으로 시민들의 기부로 운영되고 있다. 기부 관련 정보는 공식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14] 니토의 주요 저서 목록 Nitō Yumeno, Nanmin kōkōsei: Zetsubō shakai o ikinuku ‘watashitachi’ no riaru(난민 고교생: 절망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Tokyo: Eiji shuppan, 2013. Nitō Yumeno, Joshi kōsei no urashakai: “Kankeisei no hinkon” ni ikiru shōjotachi(여고생들의 암흑세계: 인간관계의 빈곤 속에 사는 소녀들),Tokyo: Kōbunsha shinsho, 2014. Nitō Yumeno ed., Atarimae no nichijō o teniireru tameni: seisakushu shakai o ikiru watashitachi no tatakai(평범한 일상을 위해: 성 착취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투쟁), Tokyo: Kage shobō, 2023. 니토의 소셜 네트워크 계정 https://www.facebook.com/yumenyan https://twitter.com/colabo_yumeno 콜라보 공식 웹사이트 및 소셜 네트워크 계정 https://colabo-official.net/ https://www.facebook.com/colabo.official 각주 ^ Nitō Yumeno ed., Atarimae no nichijō o teniireru tameni: seisakushu shakai o ikiru watashitachi no tatakai(평범한 일상을 위해: 성 착취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투쟁), Tokyo: Kage shobō, 2023, 29-30. ^ https://colabo-official.net/projects-english/ ^ Nitō Yumeno, Nanmin kōkōsei: Zetsubō shakai o ikinuku ‘watashitachi’ no riaru(난민 고교생: 절망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 Tokyo: Eiji shuppan, 2013. ^ 고도화된 대규모 성 산업은 미성년 소녀들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표면적으로 ‘여고생(joshi kōsei)’을 공공연히 성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이러한 관행을 조장하며, 이를 ‘JK 비즈니스’로 명명한다. 따라서 이들은 소녀들에게 교복을 입고 ‘관광객’을 접대하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콜라보는 약 5,000명의 청소년이 이러한 ‘JK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독자 없이 노래방과 같이 고립된 공간에서 고객들은 ‘옵션’으로 성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더욱 명백한 성 산업에 발을 들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이들 중 다수의 소녀들과 이미 성인이 된 소녀들은 성 산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 Nitō Yumeno, Joshi kōsei no urashakai: “Kankeisei no hinkon” ni ikiru shōjotachi(여고생들의 암흑세계: 인간관계의 빈곤 속에 사는 소녀들),Tokyo: Kōbunsha shinsho, 2014. ^ Nitō ed., Atarimae, 6. ^ Nitō ed., Atarimae, 80-89. ^ https://twitter.com/colabo_yumeno/status/1460060377379602434?s=20 ^ https://twitter.com/himasoraakane ^ https://colabo-official.net/wp-content/uploads/2022/11/221129.pdf ^ https://colabo-official.net/wp-content/uploads/2023/01/cee5ab6bd71bcd6ccd475b2 ^ https://www.facebook.com/yumenyan/posts/pfbid029WTQHe2gJmHfcxDNVF5aJe6X5omapu8fz6a2dGyib6vJjThhrmQoP4ZwsQPbKf8Kl ^ https://www.kanaloco.jp/news/social/article-966619.html ^ https://www.jcp.or.jp/akahata/aik23/2023-04-21/2023042113_01_0.html#top ^ https://colabo-official.net/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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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가닿지 못한, 그러나 확보해야 할 전쟁 경험의 말‘들’: 베트남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 이후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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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의미를 소환하며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존자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0년 4월 21일이었다. 3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의 지난한 변론을 거쳐,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 7일,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의 ‘불법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재판부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전에 지났다는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2015년부터 현지답사와 공부 모임을 시작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의 몇몇 변호사들은 2017년에 관련 소송을 위한 TF를 꾸렸고, 그 과정에서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모델로 한, 가해국의 수도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민간법정이었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못해도, 가해국의 구성원들이 꾸린 법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이 ‘가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과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에는 퐁니와 하미 두 마을에서 ‘응우엔티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피해 생존자가 각각 증언대에 올랐다. 그 후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이 퐁니 마을 응우엔티탄의 원고 대리인단이 되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여느 운동들처럼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 또한 사법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적 차원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잘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운동을 안온한 자리로, 응원의 자리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민평화법정 활동의 연속체적 성격을 가지고 변호사, 활동가, 연구자, 평화단체가 모여 ‘베트남전쟁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를 꾸렸고, 지금까지도 정보공개 청구, 청원서 제출, 국가배상소송,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진정, 특별법 발의, 판결문 번역 그리고 각종 공론장 기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민네트워크는 대표도, 직인도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나 국가 간 관계와는 다른 층위에서 20여 년간 국경을 넘나들며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며 지속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번 1심 승소라는 판결을 확보하기까지, 대리인단의 변호사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정 ‘바깥’의 말들 법정 증언을 위해 피해 생존자 응우엔티탄과 목격자 응우엔쩌이 두 사람이 한국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진화위 위원장 면담을 비롯하여 여섯 시간 반이나 진행된 국가배상청구소송 증인 심문과 원고 심문, 국회 토론회, 80여 명이 모인 좌담회 등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응우엔티탄은 법정에서 한국 정부에 간곡한 ‘호소’가 아닌 당당한 ‘요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전쟁기념관에서 베트남전쟁 관련 전시 내용에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정이 큰 기쁨이자 숙원을 향해 나아가는 긍정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거리만큼의 ‘곁’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들어야 할 말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피해 생존자의 말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도 구별이 안 될 만큼 비슷하게 들린다. 그것은 던지는 질문과 만나는 방식이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고, 법정을 꾸리면서 사건 그 자체에 주로 집중해 왔기 때문에 들어야 할 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에서의 당사자 발언만큼은 이런 의미에서 새롭다. 피해자 증언과 법정 구성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참전군인 증언까지도 확보된 지금의 상황에서, 피해와 가해의 구도 사이에 고여 있을 수많은 말들은 제대로 길어 올려지지 않고 있다. 2018년 베트남시민법정 이후 2023년 실제의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론장을 기획하며 ‘말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그 ‘말’은 피해 생존자나 목격자의 말,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 변호사의 말, 활동가와 연구자의 말,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의 말,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들의 말, 온 존재를 다해 비명을 지르는 땅과 바다와 강과 숲 그리고 비인간 동물의 말의 자리였다. 피해자의 말을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들리게 하는 활동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한 더 첨예한 논쟁이 필요하고, 이것이 당사자성에 ‘갇히지 않는’ 혹은 당사자성을 ‘확장해 가는’ 운동이 되기 위한 고민 또한 더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운동이 피해 생존자의 경험이나 말만을 ‘앞세운’ 운동이 되지 않을 때, 피해 생존자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운동이 되지 않을 때, 다양한 말과 관계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려고 할 때, 비로소 지금-이곳의 우리가 그때-그곳을 겪어낸 존재들과 이어지는 운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난 ‘위안부’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증언이 되지 못한 말,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혹은 유족을 베트남 현지에서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같은 해 4월에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법률팀 변호사들과 함께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 확보를 위해 퐁니와 하미 두 마을을 방문하고, 사건 발생 장소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방문하기 전날, 다낭의 모처에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 하루 종일 증언을 들었는데, 먼 곳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낯선 이들을 익숙하지 않은 도심의 공간에서 마주하고, 50년도 더 지난 피해 당시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며 법정의 증언으로 ‘채택’될 수 있는 ‘효력’을 가진 말을 해야 하는 화자들의 부담과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피해 생존자들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무엇보다 화자가 위축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이는 청자의 긴장감마저 녹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얘기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라고 말하는 손주들이 떠들며 뛰어다녔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잘 차려진 밥상이 준비된 거실에 둘러앉아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육하원칙에 따라 질문을 하던 변호사 한 사람이 갑자기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법정에서는 쓸모없는 말이겠지만, 피해 생존자들은 비극을 겪고 난 후 비참한 시간만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은 폐허가 된 마을로 하나둘씩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 위에 다시 집을 짓고, 누군가는 남의집살이를 하고, 누군가는 국수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뒷마당에서 닭과 돼지를 키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증언을 할 때와 이후의 시간들을 ‘살아낸’ 이야기를 할 때, 화자들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재판을 위해 청자가 꼭 들어야 할 말들은 화자가 하고 싶은 말들과 겹치기도 하지만 충돌하기도 한다. 말들의 어긋남 속에서 법정 바깥으로 밀려난 경험들을 놓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피해 생존자에게 들은 말을 청자들에게 미처 전하기도 전에 통역사가 울어버린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도 화자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다가 함께 울어버린 순간, 피해 생존자가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노라며 곰방대를 쥔 손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당당하게 학살 이후의 삶을 말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감싸 안는 화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 현지에서 마주했던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청자들에게 ‘듣는다’는 행위를 고민케 했다. 또 하나의 학살지 하미 마을 이야기 – 진실을 회피하는 자는 누구인가 또다시 현지를 찾아가 피해 생존자들을 만난 것은 2023년 2월이었다. 퐁니 마을의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의 1심 승소 판결 소식이 베트남 사회에 전해진 직후였고, 하미 마을의 위령제가 열리는 때였다. 승소에 대한 커다란 기쁨 속에서도 또 다른 학살지 하미 마을의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화위에 제출한 진정은 조사 개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에,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는 피해 생존자들의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며 당사자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퐁니 마을과는 달리 법정에 제출할 증거 확보가 어려웠기에 실제 법정을 꾸리지 못하고 진화위 진정을 냈던 하미 학살. 그러나 하미 마을 사람들은 퐁니 마을의 승소 소식을 전해 듣고, 사법적 해결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평화법정, 청와대에 낸 청원, 실제 소송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피해 생존자들은 그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만’ 있지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겐 커다란 의미를 갖는 시도였고, 베트남 사회 내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게 된 계기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러 지면과 보도를 통해 퐁니의 응우엔티탄과 하미의 응우엔티탄으로 대표성이 각인된 피해 생존자 이외에도, 하미의 응우엔티본 등 새로운 화자들이 등장해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응우옌티본을 포함한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은 진화위에 하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진화위는 2023년 5월 25일, 하미 마을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절차를 시작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2라-12544).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까지 진화위가 조사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조사대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이니 조사조차 하지 않겠다는 진화위의 기괴한 의지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범죄를 방조하겠다는 이른바, ‘정의에 대한 태만’에 다름 아니다. 진정 신청인 중 한 명인 응우엔티탄은 진정을 접수하고도 일 년 넘게 ‘침묵’을 이어온 진화위에 보낸 서신에서 ‘조사할 용기’를 내 달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쟁 때 자행된 학살의 조사 개시는 ‘용기’까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이자 재판과 진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온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과 김남주(법무법인 도담)는 “진화위 관련 법률에는 외국인을 조사범위에서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인권침해가 일어난 지역이 ‘외국’이라거나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제하는 조항도 없다”며 “진화위가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유를 근거로 들어 부당하게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결국 피해 생존자들은 시민네트워크의 조력으로 지난 7월 19일,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서울행정법원 2023구합71872). 1심 승소 판결 이후, 판결문 번역과 ‘민’들의 공론장 1심 승소 판결이 난 이후에도 한동안 피해 당사자들은 한국어로 쓰인 판결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이 어떻게 인정되었는지, 재판부는 한국 정부에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 용기를 낸 증언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네트워크에서 판결문 번역을 위한 모금을 했고, 693명의 응답으로 번역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었다. 판결문은 베트남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피해 당사자들과 유족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 국제기구에 전달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1심 승소에 대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갈렸다. 승소 판결 열흘 후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것은 전혀 없다”며 “국방부는 거기(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언했고, 3월에 한국 정부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은 국가적 차원에서 말 그대로 대대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제출된 항소이유서는 자그마치 126쪽에 달한다.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유감’이나 ‘마음의 빚’과 같은 권력자들의 애매하고 비겁한 표현 이외에 한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다.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열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정부가 항소한 사실이 알려지자,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매우 유감”이라며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정부의 항소에 대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낸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승소 판결 이후, 시민네트워크의 기획으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라는 공론장이 열렸다. 홍보를 위해 처음에 만든 웹자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시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였다. 논의를 거쳐 최종안에서 ‘시민’을 ‘민’으로 수정했는데, 전쟁 자체가 국가주의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고, 국민으로 동원된 피해/가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민’으로 테두리 쳤을 때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을 더 이상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쟁을 경험한 존재들을 국가나 국경에 가두거나 인간으로만 범주화해서 논의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이 생겨났다. 사실, 누군가 겪은 피해 경험을 판결문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가해 경험 또한 그러하다. 법정에서 다뤄지는 ‘증언’만으로는 다 말해지지 못하는 경험들이 있다. ‘판결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판결의 법적 내용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의 언어 너머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공동의 언어를 벼려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떤 동시대적 고민이 필요한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응우엔티탄의 승소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에서의 가해 경험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며 공유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용기를 낸 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만이 아니다. 가해 집단에 속한 참전군인 R의 증언 너머,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병사들의 수많은 말과 마음들이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의 경험들도 있다. 41쪽의 승소 판결문을 함께 읽는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낯선 법의 언어 속으로 뛰어들어 여러 질문을 던지고, 법정 투쟁만이 아닌 방식의 담론과 운동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 가까스로 확보한 가해경험과 가해구조에 대한 논의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 자리나 위치의 효과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가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어, 회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거기에는 연루와 자신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책임을 진답시고 죽어버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지만,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회성의 결여를 뜻한다. ‘가해자’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는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1] 1심 승소 판결이 내려진 직후에, 방청하던 법정을 나오자마자 증인 심문에서 가해 목격담을 증언해 준 참전군인 R에게 소식을 전했다. 시민평화법정 때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만나 온 시간들이 떠올라,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홉 번의 변론기일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날은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했던 2021년 11월 16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최초로, 참전군인이, 가해 관련 증언을 한 것이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했던 바로 그 참전군인 R이다. R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고, 재판에 필요한 말을 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전쟁 경험이 온전히 말해지는 장(場)이 될 수 없었다. R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 때 증언을 하고 나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 그러나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이 전쟁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서 언어화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은 전우회에서 말하는 무용담과도, 법정에서의 증언과도, 보훈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하는 말과도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그것은 어쩌면 청자에게 ‘새로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장(場)을 요청하는 말들이 아닐까. 참전군인의 전쟁 경험을 듣는다는 것은 지금껏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온 ‘남성성’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병역과 군대에 대한 현재적인 문제들과 함께 논의될 수도 있다. 병사들의 증언은 어떤 청자들을 요청하고 있을까.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참전군인의 증언이 있던 날, 함께 재판을 방청했던 성미산학교 은결은 판결을 앞둔 시점에 열린 공론장 〈법정에서 못다한 이야기〉에서 “‘감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전쟁”을 말했다. 은결은 아카이브평화기억과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학생들이 1년간 해온 참전군인 구술작업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는 우선 ‘감정’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의 감정은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에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도 감정은 배제됩니다. 감정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특히 법정에서는 이 감정의 언어들이 삭제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참전군인들은 저에게 감정을 공유해주었습니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밤엔 코코아를 마시며 위안을 얻었다’ 같은 것들. (…) 전쟁과 관련한 감정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것조차도 저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은 원래 흔들리고 엉키며 복합적이니까요. 그렇기에 감정을 통해 재구성하는 전쟁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감정으로 구성하는 전쟁은 이익과 손해, 피해와 가해, 규정되는 것만을 판단의 근거, 기준으로 삼으며 구성하는 전쟁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고 훨씬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안전한 자는 없기에 우리는 전쟁의 영향을 받는 많은 이의 삶을 살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이 전쟁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승소 판결 자체는 너무나 소중한 결실이지만, 전쟁에서 휘둘러진 여러 층위의 폭력을 분석하려면 ‘참전’의 주체들을 전방과 후방의 군대뿐 아니라, 전쟁을 지탱하여 고통과 이윤을 동시에 양산했던 병참 기능을 한 기업이나 강제로 동원된 소수민족과 비인간존재들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더욱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외교’ 문제로만 다뤄져서도 안 된다. 한명 한명의 목숨, 애도받지 못한 죽음, 살아남은 자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법정으로 가져가지 못한 하미마을의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국군대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으로서의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이자,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빨갱이인지 양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4.3의 폭력, “베트공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베트남전쟁의 폭력, “폭도인지 시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5.18의 폭력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국민화’를 거절하는 마음 -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민간인 학살에 국한해서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젠더, 생태, 강제 이주, 공동체 소멸, 자살 병사, 장애의 양산, 재생산권, 참전군인, 남성성, 디아스포라, 소수민족과 비인간동물의 전쟁 동원, 에코사이드(생태학살), 파월노동자, 전범기업 등 조금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모닥불 같은 공론의 장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졌으면 한다. 특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을 언급할 때, ‘민간인’은 베트남 ‘국민’으로 한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놓쳐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미군에 의해 동원되었다가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학살당한 산악지대 소수 민족들의 죽음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에서는 애도 혹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동원한 주체와 학살한 주체 각각에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제껏 ‘비국민’의 학살 피해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었던가. ‘1심 승소’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국민’의 전쟁 경험과 학살피해였다. 전쟁이라는 극대화된 폭력, 가해 경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해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 아무리 피해를 말한들 들리지 않거나 남 얘기로 들린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자에게 화자의 말은 가닿을 길이 없다. 1심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국의 미디어와 여론이 피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만하고 무감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가해 병사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의 자리’와 ‘가해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각주 ^ 후지이 다케시가 2021년 4월 15일, 공론장 〈피해를 품은 가해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을 말하다〉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쓴 추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