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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 이금주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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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물으며 오랫동안 소송투쟁을 벌여왔다. 거듭되는 패배 속에서도 지난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길에 이금주라는 한 여성이 있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으로 광주천인소송 등 다양한 강제동원 관련 소송을 이끌었던 이금주. 그녀의 일생을 담은 책 『어디에도 없는 나라』[1]를 통해 역사의 정의를 위해 싸운 한 여성의 불굴의 삶을 들여다 본다. 명분과 신념이 확고해도 계속 지기만 할 때, 우리는 지친다.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분과 비탄의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멋있지만, 그 말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거듭되는 패배를 겪으면서 자포자기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정의와 원칙의 기준이 모호해질 때마다 명분을 지키며 끝까지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게 된다.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이하 이금주로 표기)의 평전을 읽으며 명분 있는 패배를 끝내 명분 있는 승리로 이끌어낸 한 여성의 투지에 큰 용기를 얻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금주가 69세부터 102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1920년에 태어나 2021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 이금주는 69세 되던 해인 1988년에 태평양전쟁희생자 전국유족회를 발족하고 광주유족회 회장을 맡게 된다. 1942년에 이금주의 남편은 일본 해군 군속으로 남태평양 타라와섬에 강제 동원되었고, 이듬해인 1943년에 사망했다. 해방 후 교사로 근무하며 성당에서 프란체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금주는 69세부터 운동가의 삶을 걸었다. 그는 마치 싸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라도 한 것처럼 유족회를 빈틈없이 운영했다. 교사 시절, 그리고 성당의 행정 업무를 맡아보던 시절부터 이금주는 “기록의 달인”이었다. 일기는 물론이고, 이사회 내용 및 지출명세서 등을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특히,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모두 받아 적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료들이 축적되자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93년에 1,273명의 원고가 일본 전범 기업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원고인단은 일본 사법부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다. 원고가 천 명이 넘는다고 해서 ‘광주천인소송’[2]으로 불렸다고 한다. 원고 수가 천 명이 넘는 만큼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다.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재판이 빨리 진행되지 않자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하지만 이금주의 태도는 완강했다. “우리 1,100명의 재판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올 2월 17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기까지 꼭 11개월 걸렸습니다. 그동안 무지에서 나오는 모략과 질투, 명예 훼손 등은 어처구니가 없고 구역질이 났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목적지만을 바로 보고 백절불굴의 의지와 강한 결심으로써 다른 지부에서 안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금주는 회원 가입 신청, 소장 작성, 위임장 작성, 소득증명 서류 작성 등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했고, 재판이 지연되는 상황을 회원들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1994년 3월에 첫 공판이 열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5년에 이금주는 또다시 회원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할 것입니다. ‘텔레비전 보니까 안 줄 것 같다’, ‘언제 끝날 것인가, 너무 지루하다’, ‘속았다. 포기하자’ 등등입니다. 우리 대답은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하자’는 것입니다. 줄 것 같으면 왜 우리가 싸울 것입니까? 이 재판이 지방재판소에서 끝나면 고등재판소로 가고, 고등재판소에서 끝나면 일본최고재판소까지 가서 투쟁한다고 하시오. 일본 변호단은 우리 1,100명이 인지대도 내지 않고 무료 재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싸우고 있는데, 우리 원고 피해자들이 재판 걸어놓고 물러서거나 포기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시키시오.” 이금주는 처음부터 이 싸움이 얼마나 험난할지 잘 알고 있었다.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한다”는 말 속에 이금주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어려운 싸움일수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 싸움은 한판 승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금주의 말은 옳았다. 도쿄지방재판소는 1998년에 광주천인소송을 기각했고, 1999년에는 BC급 포로감시원 소송[3]을 기각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금주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을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제기했고, 아사히(朝日)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며 일본 여론에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 사법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1999년에 일본 도쿄고등재판소는 광주천인소송 항소에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금주는 2000년에 일본최고재판소에 상고했지만, 광주천인소송 상고는 각하되었다. 연이은 패소에도 이금주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을 상대로 일곱 건의 소송을 치르며 열일곱 번 기각당했다. 긴 세월 이금주와 피해자들이 겪은 좌절과 패배의 고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금주는 소송을 처음 제기하면서 동지들에게 외쳤던 “계속 투쟁하자”는 그 말 한마디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운동가였다. 2012년 피해자들이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때도 피해자들을 도우며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목적지만을” 보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최종 승소 판결 소식을 들었을 때 이금주는 99세였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의 작가는 “열일곱 번 문을 두드려 열일곱 번 기각당하는 그 고단하고 외로운 싸움이 없었다면, 과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할 수 있었을까?”라는 말로 이금주의 투쟁을 승리의 역사로 기록했다. 더불어 이금주가 “온기 없는 냉방에서 새벽부터 온종일 붙잡고 씨름해 작성한 각종 기록물”의 가치를 역설했다. 광주유족회를 운영하며 이금주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직접 작성한 노트들과 발품을 팔아 모은 관련 자료들이 현재 보존 장소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평전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이금주가 남긴 역사적 자료들이 더 이상 외면당해서는 안 된다. 즉각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각주 ^ 송경자 지음, (사) 일제강제동원시민 모임 엮음, 선인, 2023 ^ 1992년 2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제 당시 노무자·군무원으로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과 근로정신대 및 징병 희생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대규모 집단소송. ^ 일제 말기 동남아시아에 강제 동원되어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전후 행해진 연합국 전범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그 전범 피해자와 유족들이 1995년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대신하여 전범으로 처벌받은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미지급한 임금의 지급 등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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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BTS 팬덤의 기억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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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원폭티셔츠’ 논란과 전개 지난 2018년 11월, 일본 방송국 TV 아사히(テレビ朝日)는 생방송 전날 밤 BTS의 출연을 갑작스레 취소했다. BTS의 멤버 지민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이미지와 해방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란히 실린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이례적인 출연 취소의 배후에는 재특회[1]를 중심으로 한 넷우익이 있었다. 이들은 급기야 BTS와 나치의 동질성까지 주장하며 BTS를 미국의 강성 유대인 단체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BTS 국내 팬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원폭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진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티셔츠 착용에 일본인의 원폭 피해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 방송의 취소 이유가 단지 티셔츠 때문이 아니라, 당시 한국 대법원에서 내려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해외 팬덤을 겨냥한) 설명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다. 일본 넷우익의 고발로 글로벌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개입하기 시작하자 BTS는 자칫 ‘반유대주의’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팬들은 일본 넷우익이 BTS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를 파헤치면서,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 자리에 놓고 침략 전쟁 주체로서의 과거를 외면해 온 일본의 태도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점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에 관한 정보들이 팬덤 내에서 활발하게 공유되고 교육되면서, 티셔츠 문제는 역사에 대한 기억 정치의 문제로 전환되어 갔다. 기억의 복원과 소통: 아시아 팬들의 전쟁 기억과 증언 팬덤 내 담론의 초점이 바뀌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에 의해 점령된 아시아 국가 출신 팬들은 가족으로부터 들어 온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증언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사이판을 비롯한 태평양 섬들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었다... 이곳에서 일본군이 저질렀던 가장 잔악한 짓은 미국이 이겼을 때 항복을 거부하고 사이판 사람들에게 미국인들이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식인할 것이라 거짓말을 했던 일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사이판 여성들 중에도 강제로 위안부에 끌려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X(구 트위터) “나는 필리핀인이고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배웠다. 여성뿐만 아니라 위안부 역할을 하는 게이들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년간 점령했지만 그 기간 동안 약 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X(구 트위터) BTS 팬덤이라는 초국적 공동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피해국이었던 아시아권 국가의 팬들이 집단적으로 증언에 나서게 된 상황은, 개인들이 기억을 언어화함으로써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공식 역사에서 도외시 되어 온 희생자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기억하도록 하는 실천적 효과를 낳았다. 기록으로 연대하는 기억정치의 장: 백서 프로젝트 기획사의 입장문 발표로 티셔츠 논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전 세계 5개 대륙의 20여 명의 BTS 팬들은 온라인 토론을 거쳐 원폭 티셔츠 사건에 대한 105페이지 분량의 백서를 작성했다.[2] 이 백서는 사건이 불거진 배경과 한일 간의 역사·정치적 맥락을 설명하고 그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나아가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논란에 대한 반응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층위의 한국, 일본, 그 밖의 글로벌 팬덤의 내부 반응을 보여주면서, 사건에 대한 국가별 언론 보도를 검증했다. BTS 팬덤에 의해 발간된 이 백서는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팬덤이 백서의 발간을 통해 국가 간 역사 기억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성과였다. 팬덤은 BTS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만 하지 않았으며, 글로벌 스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면서 이와 연루된 모든 주체들의 세계 시민으로서의 문화적 민감성을 되돌아볼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백서를 간행하면서 국가 간 역사 및 문화 교육의 불균형과 그 해소의 필요성이 지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예컨대 아시아인들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 반면, 서구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중에 벌인 잔학행위에 대해 무지했다. 이런 기억의 불균형을 해소할 때 상호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번 티셔츠 논란을 통해 팬들 사이에서 새롭게 인식되었다. 또한 티셔츠 논란에 대한 글로벌 미디어 보도를 분석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소득이었다. 팬덤의 역사 인식과 수행적 실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증언하고 백서를 발간하는 활동은 적극적인 역사 인식을 위한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팬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전쟁 피해에 대한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팬덤이 특히 충격을 받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목록을 서로 공유하고 이에 대한 감상평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국내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 대한 기부로 이어져, 약 300여 명의 해외 팬들이 ‘나눔의 집’에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위안부 이슈는 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등을 찾아보며 알게 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 됐다. 다큐를 보면서 한국 여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도 위안부 동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X(구 트위터) “나는 54세이고 이번 BTS를 향한 공격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충격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의 세계사 시간에도 일본이 전쟁 중 잔학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희생자들의 말은 이 세계에 ‘들려야’ 할 필요가 있다.”(X(구 트위터) 여성 신체에 대한 폭력을 밑거름 삼아 뻗어간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욕망은 젠더화된 폭력의 역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에게 자행된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진 BTS 팬덤에게 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팬들은 모든 여성이 잠재적으로 상품화되는 현대의 젠더 구조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며 해당 문제에 공감하였다. 오늘날, 팬덤 문화는 전지구화와 미디어 발전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팬덤의 참여문화적 성격은 문화산업의 판도를 좌우할 뿐 아니라 팬덤의 관심사를 둘러싸고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풀뿌리 담론의 활발한 생성으로 이어지곤 한다. BTS 원폭 티셔츠 논란은 팬덤 내에서 자칫 한일 양국 사이의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치환될 수 있었으나, 글로벌 여론의 압박으로 인한 위기감과 전쟁 중 여성폭력에 대한 공감대가 초국적 팬덤 내부에 형성됨으로써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팬덤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온라인에서 형성되는 초국적 취향 공동체가 기억 정치를 수행한 실천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저항의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각주 ^ 재특회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으로, 반외국인 정책, 특히 혐한 기조를 강력히 주장하는 단체이다. 초대회장인 사쿠라이 마코토는 대표적 넷우익 인사로 2016년 일본제일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 White Paper Project 혹은 백서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해당 문건은 영어와 한국어로 기술되었으며 다음의 URL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https://whitepaperproject.com/k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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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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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 콘텐츠가 업무나 연구 활동에 얼마나 유익한가요?” “웹진 〈결〉에 전하고 싶은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로 만들어진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를 소개합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습니다.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보내주신 의견을 참고하여 2024년에도 더 좋은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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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잊혀진 죽음과 기억의 젠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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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는 전쟁에 대한 여성의 피해 경험 자체와 더불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젠더 규범 속에서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랜 세월 묻혀있어야 했던 사실에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웹진 〈결〉은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노근리 사건을 통해 전쟁으로 희생되었으나 가시화되지 못한 여성들의 죽음을 살펴보며 기억의 젠더정치 문제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이었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한·미 정부에 의해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며 한국 사회에 알려졌고, 2004년 ‘노근리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되는 등 노근리 사건의 기억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0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감독 이상우)이 개봉하며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대중적으로도 조명받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비롯한 진상규명 등 노근리 사건에 관한 역사화는 젠더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 중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달한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기록과 역사화가 대부분 남성 피해생존자와 유족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와 같은 피해의 불균형과 그 맥락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위험 상황에 취약한 아이나 노인은 그렇다 치지만 왜 여성들의 희생이 많았던 것일까.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은 한 여성 피해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굴 안에 있으믄 다 죽는다. 남자들이라도 뒷산으로 (가서) 피하자고. 그래 가지고 아버지, 오빠들. 뒷산이 있잖아요? 옛날에는 흰옷을 입으면 밤에도 허옇게 보이잖아. 그러니까 옷을 벗고 뒷산으로 피해가지고.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오빠들은 거기서(노근리 다리) 그렇게 피해가지고 살았잖아.” 폭격으로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 남자들이 먼저 탈출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미군의 소개령에 의해 피난을 떠난 4일 동안 노근리 쌍굴다리 안에 갇혀 있던 남성들은 미군의 총격을 피해 이웃 마을인 도동리로 탈출했다. 부계 중심의 가족 질서 안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남성의 목숨과 안전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피난을 떠난 남성들도 적지 않다. 반면, 여성들은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어린 자녀와 늙은 시부모를 보살펴야 했다. 이것이 학살 현장에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사망한 여성들이 많았던 이유이다. 또 여성들은 쌍굴다리에서 도망을 치더라도 낯선 남성들에 의한 강간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홀로 피난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처럼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성별분업, 그리고 젠더 규범은 한국전쟁기 피난의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노근리 사건에서 여성, 특히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노인의 사망이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측면이 가시화되거나 논의되지 않은 것일까? 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노근리 사건 피해생존자들이 어머니의 사망으로 초래된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과 연관된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남은 가족을 위해 생계는 물론 가사노동과 돌봄 역할을 떠맡기도 했지만, 자녀들을 방치하거나 자녀, 특히 딸로부터 돌봄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혼의 딸들은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 오빠, 남동생 등 남성 가족구성원들의 식사와 빨래를 도맡아 하고 농사일을 도왔다. 반면 아들들은 학업을 지속하거나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얻었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가족의 위기를 재혼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재혼으로 다시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은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남성의 가장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행위였다. 이들과 결혼한 여성은 가사 및 돌봄 노동, 나아가 생계노동을 담당하며 사망한 여성의 성역할을 대체했고, 특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는 동안 노근리 사건으로 사망한 여성의 죽음은 잊혀갔다. 노근리 사건으로 재혼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안민혁(가명) 씨는 제삿날마다 집안이 시끄러웠다고 기억한다. 재혼한 어머니는 조부모와 삼촌 그리고 ‘큰어머니’의 제사를 함께 준비했는데, 아버지가 ‘왜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냐’며 큰어머니의 제삿밥을 내동댕이치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또 전영희(가명) 씨는 재혼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혼가정에서 태어난 배다른 동생들이 아버지의 무덤 옆에 노근리 사건에서 죽은 ‘전처’가 아닌 자신들의 친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망한 아내/어머니의 성역할이 딸에 의해, 혹은 남편/아버지와 재혼한 다른 여성에 의해 대리·대체되면서 그 존재는 점차 망각되었다. 그 결과 노근리 사건에서 사망한 여성,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애도될 수 없는 전쟁 피해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에 의한 어머니의 죽음은 피해생존자의 자녀들, 특히 딸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딸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긴다. 전쟁이 끝난 후 사망한 어머니의 성역할을 대신하며 자란 데다 결혼 후 자신이 어머니가 되면서 어릴 적 어머니의 부재를 더욱 큰 상실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이오사변 때문에 내 인생이 망친 거지, 한마디로. 내가 엄마하고 살았으면 공부도 하고 그랬을 텐데. 그게 한이 되지. 딴 게 한이 된 거 아니여. (…) 누가 엄마라고 부르면 그렇게 부럽더라고, 엄마. 엄마가 최고여. 아버지는 아무 소용도 없어. 어쨌든 남자는 헛일이야.”(정영희(가명)) 이런 모습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거나,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들의 삶을 별개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은 아들들의 경우와 대비된다. 성역할과 젠더 규범으로 인해 전쟁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성별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전쟁의 피해이자 가족 수난의 상징으로 여겨진 남성의 죽음과 달리, 가족의 돌봄을 책임져 온 여성의 죽음은 애도조차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서 여성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전후 어떻게 잊혀 갔는지 살펴보는 것은 전쟁 기억의 젠더정치를 밝히는 중요한 작업이다. 한국전쟁기 노근리 사건에 의한 여성의 죽음의 맥락과 망각의 과정이 문제시될 때, 남성-아들을 넘어 여성-딸 역시 노근리 사건의 역사화 과정에서 공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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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2차 ‘위안부 소송’ 판결, 국제인권법 ‘마그나카르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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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 이상희 변호사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는 2023년 11월 23일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유족 포함 원고 16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국의 불법성과 책임을 인정하면서 원고의 청구를 그대로 인용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소송단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을 맡았던 이상희 변호사를 만나 세기의 재판이 일군 성취와 고군분투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주문. 1심판결을 취소한다. 피고(일본국)는 원고에게 '청구금액(항소금액)'란 기재 각 돈 및 이에 대한 2023년 9월 21일부터 2023년 11월 23일까지는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023년 11월 23일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부장판사 구회근)가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유족 포함 원고 16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2016년 12월 28일 김복동, 이용수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11명과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의 승계 유족 10명, 총 21명이 1인당 2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한 1차 소송 이후 8년 만에, 1차 소송이 각하된 2021년 4월 21일로부터는 약 2년 7개월 뒤 대한민국 법원이 원고 측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기념비적' 선고였다. 이 소식은 항소심 소송 원고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기뻐하는 모습과 함께 주요 뉴스로 보도됐고,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등 소송 경과를 예의주시해 온 시민사회는 일제히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에 성심껏 귀 기울여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다한 판결'이라며 서울고등법원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민변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을 맡아 1, 2차 소송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를 만나 이번 판결의 국내외적 의미와 함께 역사적인 판결이 있기까지 소송인단이 '수명이 닳는 듯한' 느낌으로 헤쳐 온 크고작은 고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 그리고 온전한 시민권자로 인정받은 피해자들 서울고법 판결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고 온전한 시민권자라는 확인을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희 변호사의 일성은 판결문 초반부에 명시된 내용과 또렷하게 조응한다. 서울고법이 일본 육군의 물품판매 규정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 1937.9.29. 육달陸達)」과 「영외시설규정(1943.7.18.)」, 「전시복무제요(1938.5.)」 등의 기록을 채택, '일본국이 중일전쟁 내지 태평양 전쟁을 하면서 군인들의 사기 진작 및 민원 발생 저감 등을 목적으로 위안소를 설치·운영'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불법성과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은 또 개인별 '위안부' 동원 과정과 '위안부' 생활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면서 피해자들이 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이는 당시 일본국이 비준한 국제조약이나 국내 형법에도 위배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다음으로 1차 소송의 한계를 극복한 2차 소송의 가장 빛나는 성취, 곧 '국가면제'에 대한 판단이다. 생소한 법률 용어로 '주권면제'라는 용어로도 혼용되는 국가면제는 국제관습법으로, '국가 평등 원칙에 입각해 국제법상 국가에 인정되는 법적인 면책'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주권 국가의 국가기관이나 그의 행위는 타국의 재판관할권 적용에서 면제될 수 있다. 쉽게 풀어서 주권 국가는 타국의 국내 재판에서 강제로 피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인데, 이는 대소나 강약 같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개별 주권국을 중심으로 '대등하게' 국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는 법리이기도 하다. 인권 침해, 불법 행위는 '국가면제' 불가 쟁점은 그동안 국가면제가 보편적 인권 침해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명분으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제적으로 '무력 분쟁 중에 법정지국 영토 내에서 이뤄진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를 인정하고 있으며, 강행규범 위반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 침해 여부가 재판권 존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 1차 소송 재판부의 소극적이고 사대주의적인 판단이 닿아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2차 소송에서 서울고법은 전향적인 판단을 내렸다. '법정지국 영토에서 그 국민에게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그 행위가 주권적 행위인지 여부를 묻지 않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관습법이 현재 존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한 것이다. 서울고법은,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태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다수 국가가 국내법의 입법을 통해 영토 내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점, 이탈리아를 비롯해 최근 브라질 최고재판소, 우크라이나 대법원 등에서 가해국에 대해 국가면제의 적용을 부정하는 판결을 하는 점, 국가면제와 관련된 국제법 체계가 이미 개인의 재판청구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되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관련해 이 변호사의 설명은 변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도 국가면제를 극복한 몇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만큼 국가 중심의 국제법 질서, 국제관습법이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개인의 재판청구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을 드러낸 세기적 선언이고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개개인에게 부수적인 피해라는 건 있을 수 없잖아요. 국가는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하며 실현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피해를 입었는데 국가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법률상 구제절차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판결이 인권의 관점을 넓고 깊게 확장시키는 측면에서 조금 과장하면 국제관습법의 '마그나카르타'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입니다. 번역 또 번역, 거액의 자문료… 고비고비 과정은 험난했더라 당연히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한순간도 순조롭지 않았다. 불법행위를 객관적으로 밝히고 책임을 묻는 주장, 그에 따른 손해 규모를 입증하는 것 하나하나가 원고 측 일이었다. 재판을 위해 '피고' 일본정부에 소장을 전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공시 송달을 하면서 반복적인 기피와 거부 사실을 법원에 설득한 끝에 재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재판 때마다 보도자료도 발표했다. 기사를 통해서라도 일본 정부에 재판 소식이 전해질 수 있도록, 동시에 절차적으로도 발뺌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대응이었다. '국가면제'를 둘러싼 법리 공방은 더욱 지난하고 복잡했다. 영어 외 여러 언어로 된 해외 자료와 국제 판례를 발굴하고 번역하는 일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어요. 국제적인 인권법 전문가, 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수도 없이 보냈고요. 인권 보호의 폭을 넓히고 국가면제 예외를 지지하는 국제적인 변화를 재판부에 확인시키기 위해 국내 198명을 포함, 전 세계 법률가 410명이 참여한 '세계 법률가 선언'을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피해 할머니 살아계실 때 결론 나와야 한다! 당황스러운 기억도 있다. 거액의 자문료를 요구받았을 때였다. 국제적인 법률 전문성과 경륜을 가진 변호사였기에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했다가 거액의 자문료를 원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소심 법정에서 영상으로 지지 의견을 전해준 영국 버밍엄대 법학대학원 알렉산더 오라케라쉬빌리 교수를 비롯해 연대의 목소리를 내준 세계 법률가들이 그래서 더욱 고맙다. 가장 힘든 시기는 재판이 막바지로 향할 때였다.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며 준비 서면을 마련하는데 에너지도, 시간도 역부족이었다. 재판은 공전됐다. 그렇다고 변론 기일을 늦출 수도 없었다. 밤을 새고 다들 엄청 고생을 하는데도 재판 일정까지 서면이 나오기 힘들 것 같아 연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깊었어요. 그런데 고비 때마다 다른 걱정이 훨씬 앞서는 거예요. 원고 중에 살아계신 분이 이용수 할머니 한 분이잖아요. 행여 연기했다가 슬픈 소식이 들려오면 그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하나, 안 계신 상태에서 선고가 나면 어쩌나, 다들 부담이 어마어마했어요. 온몸이 떨릴 정도로 에너지를 쏟았던 터라 서면을 접수할 때마다 수명이 닳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를 넘어 '기승전-전쟁은 안된다'는 지구적 메시지를 호소해 온 인권활동가 할머니들 생전에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브라질 판결이 우리 항소심에 영향, 이는 다시 중국에 참고 한편으로 이 변호사는 세계 각국의 법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권의 역사를 진전시켜 가는 현장을 현재진행형으로 경험 중이기도 하다. 2013년 8월에 고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 12명이 일본정부에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는 소송에 대해 2021년 1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일본측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어요. 당시 전 세계에 이슈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판례가 이듬해인 2022년 브라질 최고재판소에 영향을 미쳐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으로 침몰한 선박에 탔던 피해자의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1, 2심에서 각하됐는데, 최고재판소에서 우리 판결을 근거로 뒤집는 결정을 내린 거예요. 우리 재판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라 자부심을 느꼈죠. 그런데 다시 브라질 최고재판소 판결이 저희 항소심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난 4월 21일에는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18명의 후손이 한국의 최근 판결을 참고해 산시성 고급인민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 인권 수준을 도약시키고 진일보한 국제관습법 관행을 만드는 사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일 정부에 가시적 이행 촉구하며 '강제집행'도 검토 다만 역사적인 판결에도 한·일 두 나라 정부의 반응은 냉랭하다. 우리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실 차원에서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를 양국 간 공식 합의로서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이고, 일본 정부 또한 항소하지 않고 기존 '무대응 원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29일 민변, 정의기억연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본군'위안부'연구회, 시민모임 독립 등 시민사회는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일본국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 승소 판결 의미와 과제'를 공유했다. 승소 판결 이후 호흡을 고르고 있는 이 변호사는 향후 계획에 대해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을 통해 일본 정부에 가시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한편 '강제집행' 절차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 전했다. 이번 소송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 또는 사기를 당해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피해 사건인 동시에 전시를 포함해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 폭력이나 인권 침해는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는 강력한 제도적 유산을 이끌어냈어요. 이는 결국 일본 사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 압력으로 연결되고 우리나라의 인권감수성 확장에도 기여하리라 믿습니다. ※ 일본국을 상대로 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 확인 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링크 :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인터뷰이: 이상희 글/정리: 손정미 인터뷰 일시: 2024년 4월 11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