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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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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모두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와 언제 어떻게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하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세요. 강대현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했어요. ‘위안부’ 할머니가 몇 분 생존해 계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이 문제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혜주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비즈니스커뮤니케이션, 디지털미디어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상식으로 통용되는 시대에 태어나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김희연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역사학, 문화인류학을 전공 중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역사 선생님이셨어요. 나눔의 집에 수요일마다 가서 활동하시는 걸 듣기도 했고요. 어렸을 때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등을 다룬 영화에 관심이 많아 그것들을 통해서도 접하게 됐습니다. 김도경 서강대 사회과학부에 재학 중입니다. 초등학생 때 『수요일의 눈물』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수요일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요일이잖아요. 책 제목을 기억할 정도로 내용이 인상적이었고, 그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게 됐습니다. 그 후로는 역사 수업이나 영화를 통해 우리가 기억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역사이자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심현희 덕성여대 사학과 학생으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수업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그 후 대학에 와서 학술적인 관점에서의 논의를 접하고 관련된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김민정 서울여대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어 어릴 때부터 나눔의 집에 관한 정보를 자주 접할 수 있었고, 학우들과 함께 전시관에 가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교육 자료를 통해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할 수 있었고요. 친숙하고도 늘 생각하게 되는 주제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관련 영화나 책을 보았거나, 강의를 들었다거나, 활동에 참가한 이력이 있다면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강대현 중일전쟁이나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 찾아보거나 여성 참정권, 미국 소수자 문제 등을 공부할 때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혜주 원래 ‘위안부’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고, 같은 여성이다 보니 민감하게 반응하며 늘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의 일로 느끼게 된 계기는 2016~17년도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은 후부터예요. 당시 고1이었는데 그 책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쟁과 여성’ 하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던 터라 친구들에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가보자고 제안했어요. 전시를 통해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것이 책의 내용과 결부되면서 더욱 깊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김민정 대학 입학 후 여성학 강의 시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이 문제를 보다 깊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여러 학계 논문들을 찾아보고, 다양한 의견을 가진 학우들과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됐어요. 김희연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여성은 역사 안에서 배제돼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접하고 난 뒤 여성 인권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마침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았죠. 남성의 이야기는 많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없다는 것을요. 심현희 개인적인 관심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억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생겼습니다. 관련 영화와 책을 통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맥락을 배우면서 이 문제의 심각성과 인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 역사 동아리 부장으로 활동하며 담당 선생님의 추천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교내 행사를 진행한 기억이 납니다. 교내 신문에 기사를 작성하고 뱃지, 스티커 등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활동을 했어요. 대학에 와서는 수요집회에 참석해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볼 수 있었고, 수많은 기관과 사학 전공 학생들이 피해자와 연대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김도경 역사 시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중 하나로만 간단하게 다루잖아요. 그런 부분이 아쉬웠고 더 조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접한 것이 저에겐 관심을 유지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Q. 전국 곳곳의 소녀상이나 남산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 마포의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대구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등에 직접 가본 적이 있나요?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요? 강대현 단순히 ‘소녀상’이라고 인지하는 데서 끝난 것 같아요. 일본군이 자행했던 잔인한 폭력에 대한 참담함을 느끼기는 했지만요. 김희연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내주신 수행평가로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 전시장 내에 있던 소녀상을 보고 울컥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혜주 앞에서도 말했듯, 고1 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갔어요. 피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전시장에서 보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제 나이보다 더 어렸을 때 피해를 입은 분도 계셨고요. 울컥해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1층에는 기획 전시로,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베트남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 또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참혹한 일이 많아서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관련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깊은 감동과 존경심을 느꼈어요. 희생자를 기리고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김민정 어릴 때부터 나눔의 집 앞에 설치된 소녀상을 자주 접할 수 있었어요.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독일 카셀대학교의 소녀상 철거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는데요,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소녀상이 사라졌고, 이후 학생들이 소녀상이 납치됐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소녀상을 되찾기 위한 활동을 하는 걸 보면서, 같은 전범국임에도 독일과 일본에서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또한 우리는 피해국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러한 정서적 공감을 일본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김도경 소녀상 설치 반대나 철거 운동에 관한 뉴스를 많이 접하다 보니, 소녀상이 설치돼있는 모습을 보면 ‘그곳에 잘 있어줘’라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Q. 이번 청년좌담의 참가자 여러분은 피해자의 증언을 직접 접하거나 배보상을 위한 법정 투쟁이 뉴스에 오르내리던 때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사회적 기념이 중요해지던 국면에 이슈를 접했을 것 같습니다.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 주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해시태그를 거는 일, 나비 팔찌 등 모금 굿즈를 사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혜주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아직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선 윤리적 욕망을 채워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강대현 코로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SNS나 해시태그 등을 통해 정보를 나누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것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본인이 직접 행동하는 것과 SNS를 통해 접하는 것에는 괴리가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희연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중요한 이슈를 놓치게 될 수도 있는데, SNS상에서 누군가의 글이 그것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글도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요. 저도 지인들에게 ‘위안부’ 관련 책이나 영화, 전시를 함께 보자고 제안하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들도 점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김민정 일반 시민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마련이나 소송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굿즈를 사거나 소녀상과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문제 해결에 동참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은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김도경 SNS를 활용하면 보다 쉽게 사회적 연대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론이 SNS 내의 움직임에 주목할 경우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경험을 인터넷상에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거나 간접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니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심현희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홍보나 참여 방법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출 수도 있고요. 따라서 말씀해주신 행위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고,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Q.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관련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피해 상황을 선정적으로 묘사한다거나 피해자들을 성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경우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비나 소녀상처럼 순결한 이미지로만 ‘위안부’를 소비하는 경향도 있는데요. 이렇게 이분법적인 관점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희연 피해자분들을 ‘피해자화’한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틀에 가둬놓고, 어린 나이에 순결을 빼앗겼으니 불쌍한 인생이라고 묘사하는 식의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요.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순결이 강조되다 보니, 피해를 당한 것이 그 사람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혜주 그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대한민국이 성범죄 피해자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피해자분들이 순결을 빼앗기는 불쌍한 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성녀 프레임’ 안에 놓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져요. 피해자는 늘 피해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식, 즉 피해자는 일상을 살아가서는 안 되고, 피해 안에서 계속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탄생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김민정 선정적인 장면을 통해 피해자분들을 그려내는 영화를 많이 접했어요. 제작자들은 그분들의 이야기에 오롯이 공감하지 못하고 제3자의 시선에서 평면적인 이미지만 취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존하는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소녀가 중년이 되고 노년 여성이 되었다는 사실도 쉽게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녀상에서도 볼 수 있듯 피해자를 소녀의 이미지, 무구한 피해자성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김도경 그런 이분법적인 시선은 영화나 소설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캐릭터화하기 위해 제작자로서 쉽게 취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에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면서 가해국의 권력이나 시대적 상황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분법적인 관점은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므로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듣고 성차별과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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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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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웹진 〈결〉 2차 독자만족도 조사에 참여해주세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상반기에 이어 웹진 〈결〉에 대한 독자분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2023년 하반기 독자만족도 조사를 진행합니다. 더 나은 웹진 운영을 위해 많은 분들의 말씀을 듣고자 하오니, 따뜻한 관심과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참여하신 분 중 개인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tall 1잔 기프티콘’을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설문조사 기간: 2023.10.18.(수) ~ 2023.11.1.(수) ▶ 독자만족도 조사 참여하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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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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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학술 콜로키움, 북토크, 전문가포럼을 견학한 소감이 어떠셨는지요. 심현희 학술 콜로키움과 전문가포럼에 참석했는데, 전문가분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보다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고 다양한 관점을 접하며 지식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혜주 〈벌새〉 북토크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학 입학 후 첫 전공 과제가 영화 〈벌새〉를 보고 리포트를 쓰는 것이었어요.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 북토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김보라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영화를 보던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를 현대 여성과 결부시켜 말씀해주신 것도 좋았고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가져야 할 자생력은 무엇인가, 무너지지 않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 감독님이 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김도경 학술 콜로키움을 온라인으로 들었는데 ‘위안부’ 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랐어요. 사회적 인식 자체가 연구의 주제가 되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역사의 일부 또는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콜로키움에 참여하면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김민정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막연히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술 콜로키움에 참석한 후,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면 피해 당사자들을 정치적으로 대상화하여 문제 해결 과정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정말 유익하고 큰 도움이 됐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50년도 더 된 오래된 일일 뿐이며 이제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성과 인권이라는 좀 더 넓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어떤 연관성(접점)이 있을까요? 이혜주 피해자분들이 인정할 만한 사과와 보상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를 용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건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성착취 문제를 보면 N번방 등의 디지털 성폭력을 예로 들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범죄의 핵심은 여성의 힘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성들을 노예화하는 방식인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피해자에게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이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대현 결국 하나의 통일된 의제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만큼은 초당적인 논의가 이뤄져야죠. 김희연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지금의 여성혐오 범죄와 개별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여성에 대한 범죄, 성착취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통용되는 확고한 상식이 필요합니다. 김민정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한 국가의 전쟁범죄를 잊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전쟁에서 자행됐던 여성에 대한 심각한 성적 학대와 집단 폭력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로 미래를 위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합의를 계속해서 도출해 나가야 하고, 제2의 ‘위안부’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국제법규와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과 인식 전환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김도경 현재도 수많은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고 여성혐오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성숙한 시각을 갖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합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과 성평등을 논하는 중요한 주제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거를 묻는다는 것은 인권과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공정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해결해야 합니다. Q. 현재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 범죄 이야기가 뉴스에 종종 나오기도 하는데요. 1960~7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 또한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국내에서도 주한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기지촌이 만들어졌고 여성들이 강제 성병 검사를 받거나 구타, 살해 등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이러한 이슈들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가진 특이성이나 차별성이 있을까요? 혹은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혜주 정부가 개입한 구조적 성범죄라는 것이 ‘위안부’ 문제가 지닌 특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피해자들의 삶과 인권이 파괴됐다는 점에 분노하기보다는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는 점에 분노하는 것 같아요. 그러한 점에서도 차별성을 갖는 것 같고요. 김민정 국가 자체가 가부장제 프레임과 남성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을 자산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일본에 민족의 자산을 빼앗기고 유린당했다는 점에서 분노하는 거죠.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관점 또한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자산을 이용해 이익을 창출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거죠.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일들은, 우리의 치부를 들춰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 공론장에 오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김도경 일본군‘위안부’는 일제강점기의 지배구조하에서 이뤄진 폭력이고, 공장 취업이나 국가,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속아서 간 분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도 특이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를 처음 알았을 땐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위안부’ 피해의 경우와 달리 한국이 가해국이 된 거잖아요. 우리가 가해를 저지른 역사적 과거도 동등한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와 다른 전쟁에서의 성폭력 문제는 각각의 맥락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고통과 인권 침해는 공통적으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쟁점이죠. 따라서 정확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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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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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정부 등록 피해자가 이제 아홉 분 생존해 계십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혜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한 사과와 보상, 미래에 대한 약속이 이뤄져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피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적 차원의 합의가 필요해요. 또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기본이자 중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희연 국가적인 대응이 미흡한 상황이잖아요.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한국 내에서 알아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한 것 같아요. 피해자분들이 돌아가시길 기다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해결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이 문제를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대현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죠. 지금 한일 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이라 어느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요. 생존자분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일부러 다루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민정 피해자분들이 생존해 계실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더 왕성하게 논의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우리 세대가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자분들과 대화하며 보다 가깝고 생생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있는데 저버리게 되는 거잖아요.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완전한 해결이란 없다는 인식이 먼저 합의되어야 합니다. 일본이 사과와 보상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의견 나눔의 장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도경 피해자가 인정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에게 남은 과제는 정치·외교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이끌어내는 것이에요. 개인으로서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하고요. 심현희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비롯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문제를 통해 여성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요. Q.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학 내에서 미투운동, 낙태죄 폐지 등 다양한 여성운동을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체감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앞으로 청년들이 계속해서 페미니즘과 ‘위안부’ 이슈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대학에서 어떤 배움의 장들이 마련되어야 할까요? 심현희 현대의 여성운동과 ‘위안부’ 문제는 성평등과 인권을 주제로 다루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대학에서는 관련 교육과 논의의 장을 제공해 학생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강대현 어느 순간부터 대학에서 사회 운동이나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요. 학생과 청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 더 많이 마련됐으면 합니다. 김도경 제가 아는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페미니즘이 금기시되고 일부는 부정적으로 보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대학에서 배움의 장이 많아져야 합니다. 김민정 논의가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페미니즘의 올바른 개념과 정의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강의가 확충되어야 합니다. 백래시 현상을 접할 때마다 암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과도기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사회적으로 진일보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버텨내려고 합니다. 이혜주 낙태죄 폐지 등 페미니즘 논의에 늘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 백래시로 인해 미국에서 낙태죄가 부활했고, 우리나라도 낙태죄 폐지 관련 법안이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잖아요. 페미니스트라면 우울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학교 여성학 강의에서 김현경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우울하고 불안한 이 시간이 절대적일 것 같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런 시간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만 결국 백래시 이전보다 나아졌습니다.” 덕분에 큰 용기를 얻었고, 대학에 여성학 수업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남성의 관점으로만 바라봤던 사안을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거든요. 모든 학문에 여성학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김희연 한 남자 교수가 학생을 추행해서 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서 공론화된 적이 있어요. 그 후 그 교수의 연구실에 비판의 메모지가 가득 붙었고요. 미투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작년부터 백래시가 심해졌다고 느끼는데 그래서 그런지 올해 초 학교 내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많이 생겼어요. 저도 새로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같이 책을 읽거나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나에게 00이다”라는 문장을 완성시킨다면 괄호 안에 어떤 단어를 넣으시겠어요? 이혜주 ‘붉은색’이라고 넣어보고 싶어요. 빨간색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운동이나 혁명에 흔히 사용되는 만큼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색이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때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그 문제가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김희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저의 ‘평생의 연구 과제’입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연대하고 싶어요. 역사학도로서 가져가야 할 큰 숙제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도경 ‘숙제’인 것 같아요. 때로는 하기 싫고 미루고 싶지만 숙제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잖아요. 이 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돼 좌절감도 들지만, 그럼에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대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심현희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사명’입니다. 역사적으로 희생된 피해자분들의 고통과 그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뤄지기를 바라며 연대하겠습니다. 강대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가진 본질과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객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민정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기억’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늘 기억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고, 인류사에도 중대하게 기억될, 특수하면서도 만연한 여성 대상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유린이 전 지구상에서 근절될 때까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잊혀서는 안 되며 계속해서 새롭게 정의되는 기억이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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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만 1085통의 엽서와 1만 589명의 시민, 그리고 감동의 오사카 활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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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589명과 2만 1085통. 두 달간 엽서쓰기 운동에 참여한 경남도민과 그들이 모아준 엽서의 숫자이다. 한일강제병합 100년, 광복 65주년이 되던 2010년 9월부터 11월까지 경남도민 엽서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국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의 엽서 쓰기 운동이었다. 이렇게 모은 엽서를 ‘위안부’ 피해자 세 분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직접 전달할 계획이었다. 두 달 동안 운동을 진행하며 엽서를 한 통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홍보하고 부탁하러 다녔다. 그런데 그때 겪었던 어려움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또 닥치기 시작했다. 바로 엽서의 수신인란에 일본 중의원 200~300여 명의 이름을 써넣는 일이었다. 2만여 통의 엽서를 일일이 가려내고,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골고루 배달되도록 수신인란에 각각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문제는 2만 1000여 통이라는 양이었다. 내용상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엽서들을 걸러내야 했는데, 지나친 분노와 혐오의 표현이 담겨 있거나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된 내용, 심지어 욕을 써놓은 엽서 등을 빼내고도 2만 1000여 장이나 되었다. 이 운동을 추진해 온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두 단체는 형편도 거의 똑같았다. 유급 실무자 한 명 없이 무급 대표 혼자서 회계를 비롯한 모든 실무를 해야 하고, 전화도 받고, 기자회견문도 쓰면서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93세, 89세, 81세의 고령의 피해자 할머니들을 일본에 모시고 갈 준비를 하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많은 양의 엽서를 일본까지 가지고 갈 인력도 필요하던 터라 고민 끝에 젊은 힘을 빌리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창원대학교 학생동아리연합회가 다행히 도움을 주겠다고 하여, 대학생 10여 명이 일주일 정도 수업이 끝난 뒤 모였다. 덕분에 엽서 분류와 일본 의원들의 이름을 써넣는(실은 그려 넣는) 작업을 출국 이틀 전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피해자 세 분을 모시고 출국 기자회견을 했다. 2만 1000여 통의 엽서와 경상남도 내 14개 지역의회의 일본군‘위안부’ 결의문, 이 결의를 촉구한 9000여 명의 서명부와 함께였다. 엽서를 보내 온 시민들의 대부분은 경상남도 내 청소년들이었고, 그 청소년들의 80%는 여학생이었다. 이 엽서를 쓴 청소년들은 이제 20대 후반에서 30대가 되었을 터이고, 13년이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문제 상황이 더 후퇴해버린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11월 25일,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을 모시고 청년 활동가 두 명, 피해자 지원활동가 한 명과 함께 두 단체의 대표는 도쿄의 중의원회관을 찾았다. 이날은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이기도 해서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2010’이 그 전해인 2009년부터 진행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1억 명 서명운동의 결과를 공유·보고하는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바로 그 대회장에 일본의 ‘위안부’ 운동 사회가 잘 모르는(실은 한국 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경남의 낯선 단체가 ‘위안부’피해자와 함께 참석한 것이다. 이 대회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과 경남의 두 단체까지 모두 4개 단체가 한국에서 참여했고, 일본 측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입법해결을 요구하는 120만인서명실행위원회,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2010, 전시성폭력문제연락협의회가 행사를 주최, 주관했다. 피해생존자는 경남의 세 분과 대구의 한 분(이수산), 서울의 한 분(길원옥), 일본의 한 분(송신도)까지 모두 6명이 참석했는데, 행사의 1부 순서에서 길원옥, 송신도, 이수산 세 분이 피해자 발언을 하셨다. 2부 행사는 일본 국회에 대한 서명 제출과 각 단체들의 활동 보고가 진행됐다. 정대협이 한국의 서명 활동을,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대구의 서명 활동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 경남의 활동을 보고했다. 이 활동 보고와 한일 각 단체의 서명부, 그리고 경남도민들의 탄원 엽서를 일본 관방장관에게 전달했다. 이는 통영의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복득 할머니와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의 송도자 대표가 맡았다. 이 행사 후에는 일본 중의원회관 정문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참여했는데, 맞은편의 일본 측 반대 집회의 큰 확성기 소리가 혹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피해자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 경남에서 모시고 간 세 분도 모두 일본어를 알아들으셨고, 그중 한 분은 청력을 거의 상실하셨지만 플래카드에 쓰인 글은 읽으셨을 텐데 차마 여쭈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인 11월 26일 오전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을 방문했는데, 할머니들께서 그곳 활동가들의 친절한 응대와 편안한 분위기에 말문이 열리기 시작하셨다. 한국 출발 이후 가장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아쉽게도 이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피해자를 모시고 가면서 어떻게 기록이나 촬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반성과 함께 후회막급이다. 이날 오후에는 오사카로 갔다. 간사이네트워크 소속 단체 활동가분들의 따뜻한 환대 덕분에 그동안 겪은 어려움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24일 송신도 할머니 생신 잔치에서도, 25일 도쿄 중의원회관에서의 국제서명제출행동 행사 및 집회에서도, 한국이나 일본의 행사 참가자들(국회의원, 단체 활동가 등)에게도 제대로 된 인사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할머니들을 향한 환대와 정성은 긴장하고 위축되어 계시던 할머니들의 기분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간사이네트워크 조직 차원에서는 논의 끝에 할머니들을 공식적으로 모시진 못했지만, 네트워크 소속의 몇 단체와 활동가들이 할머니들의 증언 행사를 정성껏 준비하고 맞이해 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하고 고마운 일이다. 마음을 다해 환영해주고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신경 써주는 모습들이 눈빛에서, 말씨에서, 움직임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되신 임정자 할머니와 김복득 할머니께서 증언하실 때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오사카 지역 활동가들의 표정은, 할머니의 아픔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음을 알게 했다. “(…) 일본 장교가 지 말 잘 안 듣는다고 이층에서 나를 집어던졌어요. 그때 가슴뼈를 다쳐서 아직도 이렇게 아파요”라는 임정자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흐느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들은 타성에 젖은 내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할머니들과 몇 년 동안 함께 다니며 서로 부대끼느라 피해자들의 그 깊은 고통과 아픔에 무던해진 내가 부끄러웠다. 짐작건대 오사카 증언회는 그동안 절대로 입을 열지 않던, 한 번씩 슬쩍 여쭈어볼라치면 얼굴을 돌려 버리던, “그런 말 묻지 마라” 하시던, 어떤 자리에서도 발표나 증언을 하시 않으시던 할머니의 마음을 열어놓은 게 분명했다. “나도 저래 할 수 있다고. 나도 써 논 것도 있고, 저래 할 수 있다고.” 이 말씀은 할머니를 오사카로 모시고 간 뒤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상처의 치유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고, 마땅히 사죄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속 깊이 박힌 상처와 수치, 낮은 자존감의 단단한 자물쇠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것이리라. 오사카에서의 일정은 우리 할머니들의 표정을 밝고 당당하게 해주었고, 이동하는 버스에서, 숙소에서 흥겨운 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게 했다. 성의를 다해 할머니들을 모셔주신 오사카의 방청자 선생님을 비롯한 활동가분들의 그 따뜻함은 아직도 가슴 깊숙이 생생히 남아 있다. 이 고마움을 다시 한번 전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2010년 두 달 동안 2만 1000여 통의 탄원 엽서를 보내주신 1만 589명의 경남 청소년들을 떠올린다.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청소년 시민들이 주인공들이고 희망이다. 13년이 지난 지금, 마치 일제강점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암울한 이 시대에, 아직도 유급 실무자 한 명도 둘 수 없는 지역 단체가 기댈 언덕은 바로 이런 청소년들이자 시민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앞으로 필요하면 2만 통이 아닌 20만 통도, 200만 통도 청소년들과 시민들은 만들어 낼 것이다. 덧. 사실 피해자들을 모시고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비용의 80%를 경남도에서 지원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경상남도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행사를 공식적으로 지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전해에 치른 지방선거에서 지역 시민단체들이 야권후보 단일화 운동을 전개하여 그동안 보수 일색이던 경남도정 역사상 처음으로 야권 후보가 경남도지사로 당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권 단일화 운동에 앞장섰던 시민단체에서 김두관 도지사에게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정책이 없어 소외되었던 경남도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과 위로의 자리를 요청하여 마련했고, 이 자리에서 경남도일본군위안부역사관건립도 제안하고, 피해자들의 일본 내 증언 활동 지원을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