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3년 에세이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를 보고
-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를 둘러보기 위해 5월의 따뜻한 햇살이 나무들을 비추는 아름다운 창원대학교를 방문했다. 작년 가을 준비가 한창일 때 방문하고 나서 두 번째임에도 그리워지는 장소다. 나는 남편인 도시오(俊雄)와 함께 ‘전후 책임을 묻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1992년 발족 준비부터 2013년 해산될 때까지 사무국을 담당했다. 이번에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를 준비하신 선생님들과 대학원생들, 박물관 분들을 만나 뵙고 싶었다. 2018년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감독)를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영화에 그려진 것은 증오로 가득 찬 일본 사회 속에서 고립된 채 싸우는 원고단의 모습이었고, 동원 과정이나 피해 실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고의로 혼동시켜 관부재판의 원고를 전원 ‘위안부’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었다(관부재판의 원고는 10명으로, 그중 3명이 전 ‘위안부’, 7명이 근로정신대다). 전후 줄곧 이러한 혼동으로 고통받으며 30년 가까이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한일 양국에 호소해온 근로정신대 분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지원자들과 원고 피해자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 존엄을 회복해 가며 성장해 나간 이 운동의 핵심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실망했다. 아울러 ‘위안부’ 원고가 승소한 1심 시모노세키(下関) 판결의 경우, 원고단과 변호인단의 호소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재판관들의 용기와 성의가 이 판결을 쓰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정신대 피해자들의 호소는 닿지 못했다. 이 기쁨의 실현과 실의의 낙차가 관부재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영화라고 명기하면서 이러한 관부재판의 특징과 의의를 왜곡해 알맹이를 쏙 빼 버린 이 영화가 한국의 다음 세대들에게 사실로 기억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때문에 더더욱 관부재판을 진지하게 다뤄준 이번 창원대학교 전시회가 기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문숙 이사장님이 남기신 방대한 자료를 앞에 두고 전시 방향성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을 들었던 만큼, 어떤 전시가 되어 있을지 몹시 기대되었다. 그리고 전시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심사숙고하고 논의한 흔적들이 곳곳의 짧은 코멘트에 드러나 있었다. 또한 원고 피해자들, 김문숙 이사장님, 우리가 등신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고, 어떠한 과장도 없다는 점에 감동받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강제노동 문제를 다루면서도 무겁지도 어둡지도 않았고, 그로 인해 무언가 느끼도록 강요하는 분위기도 없이, 조용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여 이 전시회를 실현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일제강점기 침략전쟁의 한국인 피해자들이 일본에 와서 재판을 벌인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일본인이 돕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별로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지원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잠재의식 속에는 우리가 아버지 세대의 범죄 피해자들을 만나 함께 투쟁함으로써 부모 세대의 가해 책임을 조금이나마 갚으려 하지 않았나 싶다. 김문숙 이사장님의 용기와 행동력 덕분에 그런 기적적인 만남이 가능했다. 관부재판을 지원하며 우리가 마음먹은 것은 원고인 피해자들을 일본 사회의 품 안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전후의 일본을 모른 채 50년가량 세월이 흐른 뒤 일본을 찾은 분들에게는 ‘일본’이 당연히 두렵게 느껴질 것이고, 그런 분들을 호텔에 묵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우리 집에 모시기로 했다. 동행인이었던 남편 도시오는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고, 나는 가능한 한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긴장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재판에서 함께 싸우며 희로애락을 같이 느끼는 시간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해방되어 가는 궤적을 목도하며 그들을 향한 경애심이 깊어진 것 같다. 그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창원 방문에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측으로부터 ‘어떤 운동을 하려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1990년대 일본과 비교해 현재 일본은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으로 변했고, 아베 정권을 계승한 현 정부와 일본 언론의 식민지 피해자들과 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싸늘한 시선 속에서, ‘해결’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 질문은 아주 뼈아픈 것이었다. 영화 〈허스토리〉 제작자에게 항의문을 쓰고, 항의문만으로는 모를 테니 관부재판에 관한 책을 쓰라는 조언을 얻어 『관부재판』(도토리숲, 2021. 일본어판 『関釜裁判がめざしたもの』)을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했으니, 그것으로 내 몫은 다했다고 여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새로운 ‘전전(戰前)’이라고도 불리는 현재, 세계 각지에 전쟁이 발발해 전쟁 피해자가 늘어나고 성폭력이 빈발하고 있다. 나라 위치를 바꿀 수도 없는 이웃인 일본과 한국 시민들은 정치적으로는 어렵더라도 시민 차원의 신뢰와 우호를 쌓으면서 평화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부재판 원고들의 일이나 그들과 함께 투쟁한 우리들을 잊지 않고, 잊히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그들이 준 선물이며 숙제다. 창원대학교에서 학생, 대학원생, 연구자, 시민운동가들로부터 날카로운 질문을 받으면서 관부재판을 축으로 한일 시민교류가 더 활발해질 것을 기대했다. 또한 이번에 일본에서 관부재판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신진 연구자와의 동행을 통해 한일 연구자간 교류도 한층 깊어질 것을 예감했다. 한일 시민에 의한 기억과 기록 네트워크 확대에 앞으로도 참여하고 싶다.
-
- 2023년 논평 ‘위안부’ 문제와 일본 국회 입법운동 (1)
-
1. 1993년 고노담화까지 필자가 오랫동안 인권옹호 활동의 지도자로서 존경하고 의지했던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전 참의원 부의장이 2017년 4월 10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모토오카 의원의 국회운동 제1단계는 1980년대 초반 국제인권법 정책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필자의 국제인권법 실천 활동과 더불어 이미 협력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역사1를 빼놓고는 모토오카 의원의 그 뒤 국회 활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모토오카 의원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계기로 시작되었다. 모토오카 의원은 1990년 6월 6일 참의원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을 대표해 질문에 나섰고, 조선인 강제연행문제를 자세히 따져 묻는 가운데 “강제연행 중에 종군위안부라는 형태로 연행됐다는 사실도 있습니다만,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2 그런데 답변에 나선 시미즈(清水)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은 “종군위안부라는 것에 대해서는 옛날 사람들 얘기 등도 종합해 들어보자면 역시 민간업자가 그런 분들을 군대와 함께 데리고 다녔다든가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이러한 실태에 대해 조사해서 결과를 내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며, 그것은 민간업자 문제이지 국가가 관여한 일이 아니므로 조사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모토오카 의원은 이 사태를 규명하지 않고 과연 일본과 한국의 신뢰 관계가 구축되겠느냐며 가이후(海部) 총리에게 일침을 가했다. 결국 ‘정부는 조속히 보고하겠다’는 가이후 총리의 답변을 얻어 조사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의 국회 질의 내용을 알게 된 한국 여성단체는 “일본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군대의 관여로 이뤄진 일이다”라며 격렬하게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강제로 ‘위안부’가 된 김학순 씨는 이대로는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며 1991년 8월 '위안부' 였던 과거를 스스로 밝히고, 명예 회복과 일본 정부의 보상을 요구하며 그 해 12월 법원에 제소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1992년 1월에는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 총리가 한국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모토오카 의원의 매서운 추궁에 내각외정심의실은 1993년 8월 4일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내각관방장관 담화가 발표되기에 이른다.3 고노 관방장관은 위안소 설치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점,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는데, 그 경우에도 감언이설이나 강압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나아가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던 점,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했다. 2. 격동기 모토오카 의원의 입법운동: 1994년부터 2000년 모토오카 의원은 사회당의 ‘위안부’ 문제 책임자로서 국회 보상을 통한 입법 해결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며 ‘국회 보상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국가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립하고, 국가를 대신해 국민 모금을 통한 보상금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기금정책을 추진했다. 국제법률가위원회(ICJ)4와 일본변호사연합회5도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조약 항변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다하도록 권고했다. 모토오카 의원은 국민기금을 진정한 사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지하며, 이를 기본적인 잘못이라 판단했다. 이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한 해결 행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피해자가 성의 있는 사죄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진해 나갈 새로운 법률안을 국회에서 심의하고, 이를 통과시키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모토오카 의원은 의원입법안으로 ‘전시 성적강제피해자 문제 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을 입안하고, 한국을 포함한 각국 피해자들로부터 만약 입법이 성사되면 사죄로서 환영하겠다는 뜻을 사전에 확인하는 절차를 세심하게 거쳤다.6 게다가 2000년 민주당(대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의 그림자 내각을 설득해 야당 공동 법안으로 연달아 제출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위안부’ 문제 해결이 촉진될 것이 분명했다. ‘모토오카 법안’이라고 불린 이 법안은 야당 공동으로 10차례에 걸쳐 국회에 상정되었다. 이는 일본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사죄를 위해 성실히 활동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역사에 남겼다. 이 법안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자민당과 공민당의 반대를 돌파하지 못해 법률로 통과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학순 씨는 모토오카 의원에게 직접 “모토오카 씨, 당신은 국회의원이잖아요. 일본의 국회의원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니 우리가 작심하고 재판에 호소한 겁니다”라고 울먹이며 호소했다. 2004년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도 ‘국제인권법 정책연구소’를 창설해 이 법안의 추진 등을 위해 계속 노력했고, ‘위안부’ 문제의 국가 책임에 의한 법적 해결에 집념을 불태우며 투쟁을 이어간 모토오카 의원의 원점은 김학순 씨의 호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유엔 권고를 무시한 일본 정부 필자는 모토오카 의원의 ‘위안부’ 문제 국회운동을 지원하고자 유엔에서의 운동과 법적 연구를 거듭했다. 시작은 1992년 2월 17일 유엔 NGO 국제교육개발(IED)을 대표해 유엔인권위원회(CHR)에서 “일본군‘위안부’는 성노예”라고 발언하고, 유엔에 일본과 피해자 간의 조정을 요청한 일이었다.7 이는 필자의 자발적인 활동으로8 한국 사람들에게 의뢰를 받아 시작한 게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4년 이후 계속해 온 유엔헌장에 규정된 인권 관련 절차를 활용하는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992년 2월 유엔인권위원회에서의 발언은 필자의 지금까지의 유엔 발언 가운데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유엔 활동의 단초가 되었다. 이후에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일본 국내 법원을 대체할 실효적 구제의 길을 열기 위해 유엔헌장상의 절차를 활용해 노력했다. 그러한 유엔 심의 과정에서 두 가지 실효적인 구제의 길9을 열 수 있었다. 1994년 필자는 유엔의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IFOR(International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국제우화회)를 대표하여 상설중재재판소(PCA)에 관한 절차 등에 관한 정보를 제출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국가와 피해자 개인 간의 국제분쟁 해결을 위해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를 이용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가 요구하는 경우 상설중재재판소를 통한 분쟁 해결에 동의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10 1995년 1월 24일의 일이었다. 피해자를 대리해 ‘위안부’ 문제를 국제중재재판을 통해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변호단에게 일본 정부는 정식으로 그 요구를 거부한다고 회답했다. 거부 이유에는 ‘조약으로 해결됐다’는 말뿐, 어떠한 합리적 내용도 없었다. 조약으로 해결이 됐는지의 여부도 중재재판으로 해결해야 할 법률문제이기 때문에 거부 사유가 되지 않는다. 이미 파탄이 난 ‘조약의 항변’을 구실로 삼아 유엔 권고의 실현을 저지한 것은 일본 정부였다. 1995년 8월 유엔인권소위원회가 ‘위안부’ 문제(기타 노예유사행위를 포함)로 처음으로 일본을 지목해서 일본 정부가 출범시킨 민간 기금 중심의 대책을 ‘미흡’하다고 비판하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행정심사기관’의 설치를 요구하고, 나아가 1994년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가 권고한 국제중재재판의 이용을 시사하며 해결 방식을 제안했다.11 ‘행정심사기관’ 설치를 요구한 유엔 권고를 실현하려면 입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정책 이후 일본의 ‘위안부’ 피해 지원운동은 분열되었고, 입법운동은 약화되어 버렸다.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로 구성된 3당 연립 무라야마(村山) 정권은 ‘국가보상은 불가능하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로 인해 무라야마 정권을 지지하던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연합계 노동조합은 입법해결 정책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연구를 통해 법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입법 해결은 조약 위반이고, 헌법에도 위배된다. 그러므로 입법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입법반대설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12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은 국가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운동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입법 해결을 목표로 하는 시민운동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96년 12월에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모임’(회장 쓰치야 고켄(土屋公献) 변호사, 부회장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스루가다이대학 교수, 사무국 연락담당 아리미쓰 겐(有光健))이 결성되었다. 각주 1. 本岡昭次=中大路為弘編著, 『世界がみつめる日本の人権 : これからは人権の時代です』, 新泉社, 1991. 참조. 2. 이 질문을 포함해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국회질문은 本岡昭次, 『「慰安婦」問題と私の国会審議』, 本岡昭次東京事務所, 2002. 참조. 3. 위안부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내각관방장관담화(1993년 8월 4일) 외무성HP에서 http://www.mofa.go.jp/mofaj/area/taisen/kono.html 2023년 6월 11일 열람. 4. 국제법률가위원회(ICJ) 조사단보고서 Dolgopol and Paranjape, “Comfort Women an unfinished ordeal: Report of a Mission”, ICJ, 1994, pp.1-205. 5. 日本弁護士連合会, 「「従軍慰安婦問題」に関する提言」, 同連合会編, 『問われる女性の人権』, こうち書房, 1996년, 97-134쪽. 6. 『国際人権法政策研究』 第3巻第4巻合併号(通算第4号) 2008년 게재 논문. 특히 本岡昭次 「「慰安婦」問題と私の国会追及13年」 및 戸塚悦朗 「市民が決める「慰安婦」問題の立法解決ーー戦時性的強制被害者問題解決促進法案の実現を求めてーー」를 참조. 7. 자유권규약위원회에 대한 개인통보권조약의 비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유엔인권 위원회에 일본과 관련된 중대한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스스로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1992년에는 그 문제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였다. 8. 木村幹, 「慰安婦問題の国際化の一側面:戸塚悦朗の回顧を中心に」, 国際協力研究29巻1号(2021.7), 111-147쪽 참조. 9. 이러한 해결을 위한 길을 유엔인권기관에 제안한 것은 국제법률가위원회(ICJ) 조사단보고서(Dolgopol and Paranjape, “Comfort Women an unfinished ordeal: Report of a Mission” ICJ, 1994, pp.1-205.)였지만, 자세한 설명은 戸塚悦朗 『普及版日本が知らない戦争責任』現代人文社, 2008년 등을 참고. 10. 앞의 책 『普及版』. 11. 앞의 책 『普及版』, 제5장, 141-148쪽. 12. 앞의 책 『普及版』 참조. ‘조약의 항변’이 파탄났다는 것은 ICJ 보고서, 일본변호사연합회 제언,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동 맥두걸 보고서 등으로 볼 때 분명하다. 필자의 연구는, 戸塚悦朗, 「国際法から見た日本軍性奴隷問題」, 『[岩波講座現代の法11]ジェンダーと法』 岩波書店, 1997년 8월, 313-337쪽. 최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관한 국제공동연구의 성과로 2022년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동아시아 냉전과 식민지·전쟁범죄의 청산』 (김영호 외 지음, 메디치미디어)이 출판되어 한겨레신문 올해의 책 10권에 선정되었다. [2022년 한겨레 ‘올해의 책’]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72853.html 2023년 5월 19일 열람. 같은 책 게재 도츠카 논문 참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아카이브814 컬렉션에서도 고노담화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archive814.or.kr/collection/collectionDetail.do?collectionId=29
-
- 2023년 논평 ‘위안부’ 문제와 일본 국회 입법운동 (2)
-
4. 입법해결운동의 어려움: 현실적인 두 개의 벽!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데 있어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피해자 측이 환영할 만한 법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필자는 입법 해결을 위한 개인적인 구상안1을 만들어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피해자 측에 설명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몇 번이고 회의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필자가 작성한 입법 구상안에 대한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둘째, 국회 내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조약의 항변’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조약의 항변’을 이유로 ‘입법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정부와 국회(보수파) 관계자들은 국가 보상을 위한 입법행위 자체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그러한 입법행위는 조약을 준수해야 할 국가공무원인 국회의원의 헌법상 의무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의원입법 노력 자체를 막으려 했다. 이 논리를 뚫고 참의원 법제국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하면 의원들이 법안을 제출해도 인쇄되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 두 개의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을 중심으로 국회의원들과 입법운동에 나선 필자와 다른 시민들은 5년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필자는 필자의 구상안이 한국 피해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한 채 1998년 2월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 직전에 당시 정대협 고문이었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왜 필자의 구상안이 환영받지 못하는지 이유를 작성해달라고 한 뒤, 그 의견서를 모토오카 의원과 참의원 법제국 책임자에게 전달했다. 참의원 법제국 직원들은 정대협의 의견서를 진지하게 읽은 뒤, 어떤 법안이 피해자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을지 성실하게 연구해 주었다. 거기서 생겨난 것이 바로 ‘사죄’를 목적으로 하는 모토오카 법안이었다. 1999년 9월 8일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은 노나카(野中) 관방장관에 대한 국회 질문에서 의원입법에 의한 보상 법안이 조약 위반도, 헌법 위반도 아니라는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2 그 결과 참의원 법제국으로부터 공식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전시 성적강제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통칭 ‘모토오카 법안’)의 입안에 성공했다. 이 법안에는 필자의 구상안에는 없었던 ‘사죄’라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이 법안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한 모토오카 의원은 직접 정대협 대표를 만나 설명했고, 환영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모토오카 쇼지 참의원 의원은 두 가지 어려운 장애물을 극복하고 입법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2000년 4월 10일 제147회 정기국회에서 모토오카 의원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법안이 민주당 법안으로 참의원에 제안된다. 2000년 10월 30일 제150회 임시국회에는 민주당, 공산당, 사민당이 각각 비슷한 법안을 동시 제안함에 따라 3당이 협의하여 법안이 단일화되었다. 2001년 3월 21일 제151회 국회에 3당 공동 제안 법안이 제출되었고, 이후 2008년 제169회 정기국회까지 10회에 걸쳐 야당 공동 제안 법안이 참의원에 계속해서 제출되었다.3 그러나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찬성하지 않아 입법에는 실패했다. 5. 회상: 왜 입법이 실현되지 못했는가? 2009년 9월 대망의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민주당 중심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 정권이 성립되었다. 하토야마 총리를 누가 설득할지가 과제였다. 필자에게는 아직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첫 방문 국가로 한국을 선택했을 정도로 한일 관계를 중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나 한국의 시민운동 모두 왜 일본 정부가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해서 입법 해결을 추진하도록 강력하게 압박하지 않았는가?’라는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필자가 그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요집회에서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집회는 세미나와 달리 입법 운동의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정대협 관계자에게 ‘연구에 더욱 힘써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세미나를 개최하지 않더라도 필자의 논문 등을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 정부와 국회에 ‘입법을 통한 해결’을 압박할 절호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한국 정부나 운동단체 모두 일본 정세에 대한 정확하고 적확한 정보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입법해결운동의 주축으로 활약하던 민주당의 여성 국회의원 오카자키 도미코(岡崎トミ子) 참의원 의원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정대협의 부탁으로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발언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오카자키 의원은 일본 국회에서 보수파 의원들로부터 “일본의 국회의원이면서 ‘반일’운동을 했다”는 부당한 공격을 받고 민주당 내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어 입법해결운동도 정체되고 말았다. 수요집회는 한국의 국내 운동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내 운동의 실효성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연구 활동에 힘을 쏟아 일본 정부와 국회를 압박해 ‘위안부’ 문제를 입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2000년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가 이끌던 민주당의 차기 내각을 모토오카 의원이 설득했을 때, ‘모토오카 법안’을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한 것은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 본인이었다. 2009년 하토야마 정권이 들어섰을 때, 모토오카 전 참의원 부의장(2004년 정계 은퇴)이 상경해 하토야마 총리를 만나 ‘모토오카 법안’을 민주당 내각의 정부 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히라노 히로부미(平野博文) 관방장관4이 사전에 ‘무슨 일로 총리를 만나려는 것이냐?’라며 자유로운 면담을 방해했다. 히라노 관방장관은 모토오카 의원에게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청하려는 게 아니냐? 모토오카 씨가 부탁하면 하토야마 총리는 아마 진행하자고 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위안부’ 문제 이야기를 꺼낼 요량이라면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때문에 모처럼 하토야마 총리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모토오카 전 참의원 부의장은 요청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필레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연락하여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을 방문하여 총리를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필레 씨는 곧바로 일본 정부에 방일 수용을 요청했지만 외무성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방일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 저항했다. 가까스로 방일 및 하토야마 총리와의 면담이 성사됐고, 총리는 심야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필레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면담은 2010년 5월에야 이루어졌다.5 얼마 지나지 않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사임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는 바람에 입법 해결의 절호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입법 해결을 가로막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차별이다. 필자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에서 젠더 문제를 연구했다. 그 결과 일본의 여성차별은 구조적이고 심각한 문제로, 쉽게 개선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문제임을 뼈저리게 느꼈다.6 일본의 남성 중심 사회야말로 ‘위안부’ 문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이다. 결국 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일본 국회가 자력으로 입법 해결을 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입법운동의 한계는 일본 국회에서 여성 의원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고, 열세라는 틀림없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각주 1.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입법 해결을 제언했지만, 그 법안은 작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개인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밖에 없었다. 戸塚悦朗, 「従軍「慰安婦」被害者個人賠償法案」, 戦後補償実現キャンペーン‘96, 『戦後補償法案を考える』, 1996년 4월 26일, 65-67쪽. 2. 本岡昭次,『「慰安婦」問題と私の国会審議』, 本岡昭次東京事務所(2002년), 115쪽. 3. 그 사이에도 정계개편이 이어지며 격동이 계속되었다. 모토오카 쇼지 의원은 2001년 8월부터 참의원 부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에, 오카자키 토미코 참의원 의원 등 야당 여성 의원들이 입법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다. 앞의 책 本岡 『私の国会審議』, 앞의 논문 戸塚 「市民が決める「慰安婦」問題の立法解決」. 4. 히라노 관방장관은 전 마쓰시타전기산업노조 출신으로 민주당 내 보수파였다. 민간 노조도 연합 차원에서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기부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은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입법 해결은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 戸塚悦朗, 「「パンドラの箱」をあけようーー菅政権は国連勧告を尊重して 希望に満ちた未来を拓くことができる)」, 季刊, 『中帰連』, 2010.11, 48号30-37쪽. 6. 戸塚悦朗, 『ILOとジェンダーー性差別のない社会へ』, 日本評論社, 2006.
-
- 2023년 인터뷰 ‘위민 인 블랙 런던’ 수 핀치 인터뷰 (1)
-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 - 에이드리언 리치 여성연대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해외 전시 성폭력 및 여성인권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글로벌 여성평화운동 단체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25주년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군의 여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1988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처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 군사주의와 폭력이 여성들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위민 인 블랙은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 소통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서울의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이 ‘위민 인 블랙 런던’의 수 핀치(Sue Finch)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 지금 만나 보시죠.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국제 여성운동 단체로서 ‘위민 인 블랙’의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중심이나 체계화된 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민 인 블랙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위민 인 블랙의 정체성이 기존 여성운동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성찰에서 출발했다면,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수 핀치 위민 인 블랙은 어떠한 조직이라기보다는 행동 방침입니다. 제가 위민 인 블랙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지만, 1988년 이래로 위민 인 블랙이 발전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다양한 국가에서 군사화된 가부장제에 내재된 폭력에 맞서 행동해 왔음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이러한 남성 폭력의 연속체(continuum)에 결연히 저항하도록 서로를 하나로 연결하는 주제들이 어떤 것인지도 명확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강간, 여성 살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착취가 만연해 있다. 젠더화된 억압과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여성주의적 행동(activism)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한편, 군사주의와 전쟁의 남성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본질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변화를 위해 이뤄지고 있는 현재 운동의 범위와 규모를 보다 널리 알림으로써 이러한 행동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 군비 지출(연간 2조 달러)도 증가 추세에 있다. 국가의 막대한 군사 예산은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쓰일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자원의 낭비다. 이러한 흐름에 항의하고, 더 많은 시민을 행동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보의 제공이 시급하다. 또 한 가지 시급한 것은 남성들이 폭력과 군사주의의 산물이 아닌 남성성의 형태를 채택하고 여성들이 이를 지지하는 것이다.[1] 활동가이자 작가인 신시아 콕번(Cynthia Cockburn)은 위민 인 블랙의 핵심 이론가 중 한 명으로, 2019년 별세 전까지 여성주의적 반군사주의에 관한 여러 저서를 집필하고, 앞서 제가 인용했던 위민 인 블랙의 역사 대부분을 기록했습니다. 위민 인 블랙은 폭력, 군사주의, 전쟁에 맞서 평화와 정의를 위해 5개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 웹사이트와 컨퍼런스, 그리고 이론, 영감, 행동의 공유를 통해 연결된 네트워크죠. 위민 인 블랙은 1988년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1987년 말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민중 봉기)로, 이스라엘 유대인 여성들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여성들, 그리고 점령 지구 내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연합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점령을 끝낼” 것을 탄원하며 점령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 것이었죠. 첫 번째 위민 인 블랙 집회가 열린 지 6개월 후, 평화 활동가들이 미국 전역에서 비슷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이탈리아 여성주의자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방문 중 위민 인 블랙과 만남을 가졌고, 이들은 귀국 후 로마, 페루자, 그 외 여러 도시에서 ‘도네 인 네로(Donne in Nero, 이탈리아어로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을 의미)’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 여성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건너가 베오그라드의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1990년대 보스니아 및 코소보 전쟁에 항의하는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Žene u Crnom protiv Rata, 세르비아어로 전쟁에 반대하는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 against War)을 의미)를 형성할 수 있도록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같은 시기 1992년 인도의 여성주의자 코린 쿠마르(Corinne Kumar)는 위민 인 블랙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길라 스비르스키(Gila Svirsky)와 만나 고향인 방갈로르에서 집회를 이어갔죠. 영국의 위민 인 블랙은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국제연맹(WILPH, 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and Freedom)과 그린햄 커먼 여성평화캠프(Greenham Common Women's Peace Camp)를 지원하고자 식량과 물품을 싣고 트럭을 운전한 여성들의 모임에서 발전했습니다.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에서 영감을 받아 스페인과 벨기에의 여성들 역시 위민 인 블랙 그룹을 형성했고, 전 세계 여성들의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확산하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서의 위민 인 블랙도 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스페인의 무헤레스 데 네그로(Mujeres de Negro, 스페인어로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을 의미)와 위민 인 블랙 벨기에는 이후 계속해서 위민 인 블랙 네트워크 내 국제 협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무헤레스 데 네그로가 콜롬비아를 방문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열정적으로 폭력과 전쟁에 반대해 온 여성운동의 본거지 중 하나인 콜롬비아에서 위민 인 블랙 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이후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로 위민 인 블랙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201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된 위민 인 블랙의 제17회 국제 컨퍼런스에는 16개국에서 100명이 넘는 여성이 참석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난민 여성에 대한 노예제, 식민지화, 무력 분쟁, 빈곤, 아파르트헤이트 등의 영향을 논의했습니다. 각각의 위민 인 블랙 그룹은 현지 상황 속에서 성장하면서 고유의 여성주의적 행동 접근법을 확립한 한편, 국제 컨퍼런스 및 웹사이트를 통해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한국에서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군사기지 문제가 지속적으로 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미군의 사드 배치 문제, 미군기지 이전 및 반환 문제 등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운동이 계속되는 중입니다. 관련하여 1980~90년대 영국에서 위민 인 블랙이 그린햄 커먼 미국 공군기지 미사일 배치 철수 운동을 벌이며 활약했고, 그 결과 미사일 배치를 막아냈다고 들었습니다. 반기지 운동으로서 ‘미사일 배치 저지’라는 실질적 성공을 거둔 해당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와 함께 이 활동이 위민 인 블랙에 어떤 경험과 의미를 남겼는지 청해 듣고 싶습니다. 수 핀치 그린햄 커먼 여성평화캠프는 위민 인 블랙의 주요한 전신(前身)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80년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 남부의 그린햄 커먼에 핵탄두 탑재 지상 발사형 미국 미사일 96기를 배치하기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습니다. 폐비행장에서 그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지구 생명을 위한 여성(Women for Life on Earth)’ 소속의 활동가 36명이 몇몇 남성 및 어린이들과 함께 웨일즈에서 그린햄까지 120마일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린햄에 도착한 후 여성들 중 일부가 정문과 울타리에 쇠사슬로 자신을 몸을 묶었고, 그린햄 커먼 여성평화캠프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성평화캠프는 국제 여성평화운동에 영감을 주었고 이는 위민 인 블랙의 기원으로 이어졌습니다. 반핵 시위와 초기 평화주의 운동의 전통을 토대로 성장한 그린햄 캠프는 핵무기 반대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점, 영국의 평화와 정치 활동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태도와 관행에 대한 여성주의적 저항을 제시했습니다. 캠프는 창의적 시위, 여성주의적 임파워먼트(empowerment), 비폭력에 대한 관점, 핵무기와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발전시키며 19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투옥되기도 했죠. 4년 만인 1987년에 미-소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이 체결되었고, 1991년에 이르러 그린햄에 배치된 순항 미사일도 철거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린햄 여성들이 위민 인 블랙이 되었습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유고 내전 당시에 위민 인 블랙 런던이 지원활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특히 전시 성폭력 피해와 관련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지원 및 행동이 전개되었는지요? 수 핀치 1992년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반대하는 몇몇 그린햄 여성들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의 반민족주의 여성 단체에 연락을 취해 그들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베오그라드의 위민 인 블랙, 즉 제네 우 크르놈은 여성 난민을 위한 인도주의적 원조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모든 분쟁 당사국의 실향민과 난민 여성,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가 네트워크를 위해 인도주의적 원조와 기타 지원을 모아 전달하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원 여성회’(WATFY, Women's Aid To Former Yugoslavia)가 조직되었습니다. 1992년 9월, 트럭 세 대를 몰고 류블랴나와 자그레브에 구호품을 전달한 아홉 명의 여성이 베오그라드에 당도했습니다. 이들은 제네 우 크르놈을 만나 위민 인 블랙 집회에 합류합니다. 시안 존스(Siân Jones, 현재 위민 인 블랙 웹사이트(www.womeninblack.org)의 국제 조직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제네 우 크르놈의 정치적 견해는 계시와도 같았죠. 가부장제, 전쟁, 군국주의, 여성 폭력의 연속적 성격이 이토록 명확하게 이해된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WATFY는 제네 우 크르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반전 침묵 집회와 검은 옷 집회라는 아이디어를 영국 전역의 네트워크로 전파했고, 이렇게 영국에서 위민 인 블랙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강간이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데 대한 새로운 정보 역시 네트워크에 공유되었습니다. 국제법상 이미 전쟁 범죄로 명문화된 전시 강간의 기소를 촉구하려는 포괄적 캠페인이 전쟁 범죄에 반대하는 여성들(Women against War Crimes)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연합 활동가들은 로비와 캠페인을 벌이면서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여성들과 함께 1993년 런던에서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비롯, 모든 전쟁의 당사자들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자행한 개인 및 집단 강간, 성노예화, 고문 행위에 대한 기소가 이뤄지도록 국제적 압력을 가하는 여성 활동가, 단체 및 변호사들의 국제 연합에 합류하게 됩니다. 국제법상 범죄로서의 강간에 대한 최초의 유죄 판결은 1997~1998년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이뤄졌습니다. 이후 설치된 재판소들도 일련의 기념비적인 소송들에서 강간이 고문의 한 형태이고, 강간과 성폭행이 집단학살 행위를 구성할 수 있으며, 노예제 또는 성노예화를 포함한 성폭력이 전쟁 범죄 및 반인도 범죄로 기소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각주 ^ Cynthia Cockburn, Introduction to Women in Black: Against Violence, for Justice, Merlin Press, 2023.
-
- 2023년 인터뷰 ‘위민 인 블랙 런던’ 수 핀치 인터뷰 (2)
-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 - 에이드리언 리치 여성연대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해외 전시 성폭력 및 여성인권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글로벌 여성평화운동 단체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25주년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군의 여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1988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처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 군사주의와 폭력이 여성들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위민 인 블랙은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 소통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서울의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이 ‘위민 인 블랙 런던’의 수 핀치(Sue Finch)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 지금 만나 보시죠.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신시아 콕번의 웹사이트를 살펴보던 중, 2004년 12월 온라인상에서 위민 인 블랙 시위에 남성을 참여시키는 사안을 두고 내부적으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위민 인 블랙에서는 생물학적 남성도 함께 참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젠더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위민 인 블랙 내부에 어떠한 고민과 실천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 핀치 위민 인 블랙은 개별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에서 전시 강간과 폭력에 이르기까지 양방향으로 전개되는 폭력 연속체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룹마다 지역 상황에 따라 이러한 폭력 연속체의 각기 다른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일부 위민 인 블랙 그룹에는 남성도 참여하고 있고, 여성으로만 구성된 그룹도 있습니다. 군사주의 및 전쟁 반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라는 여성들은 흔히 여성만으로 조직을 따로 구성하기를 택한다. 왜일까…?[1] 신시아 콕번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반군사주의 및 반전 여성주의는 그 정의상 다차원적이며, ‘몸의 정치’(body politics)뿐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주제를 그 범위로 삼고 있다. 먼저 자본주의,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와 식민지화, 계급 착취, 세계 시장 진출에 대한 비판은 군사주의와 전쟁의 원인과 동인으로 명백히 지목되고 있으므로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다음으로, 많은 경우에 전쟁은 국가 내 및 국가 간 민족주의와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이러한 여성주의는 인종/문화/종교/민족 역시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계급과 인종이라는 중요한 상호 관련 영역에서 젠더 관계의 작용을 인식하고 있고, 그 관계가 교차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전시에 부인되어 온 국제 인권과 여권은 물론 국제 정의의 발전을 옹호한다. 여성 활동가들이 유엔에서 보여 준 노력이 시사하듯 이러한 여성주의는 정치 체계에서 여성이 소외되고 과소대표되는 데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러한 여성주의는 통전적(holistic) 여성주의라 할 수 있다.[2]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유엔 등 여러 국제기구에서 만드는 여성 인권 국제규범들이 위민 인 블랙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역으로 위민 인 블랙이 여성 인권 국제 규범을 만드는 데 참여한 경험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WILPH(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국제연맹)는 유엔과의 관계에서 상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아시아에 속한 저희 입장에서는 여성 인권 국제규범들이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 가령 1세계가 규범을 만들고 3세계는 분석의 대상에 머무른다는 비판도 제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관한 위민 인 블랙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수 핀치 위민 인 블랙은 WILPF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 31일 ‘여성, 평화, 안보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325호’ 채택이란 결실을 맺기까지 WILPF의 여성주의적 목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의안 1325호는 유엔의 평화 및 안보 노력 전반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고 젠더 관점을 통합할 것을 모든 행위자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력 분쟁 상황에서 젠더 기반 폭력, 특히 강간 및 기타 형태의 성적 학대로부터 여성과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 조치를 취하도록 모든 분쟁 당사자들에게 촉구합니다. 하지만 유엔여성기구(UN Women)는 2015년 안보리 결의안 1325호에 대한 글로벌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이러한 약속이 아직 이행되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습니다. “세계는 결의안 1325호의 채택을 지지하면서도 군비 지출 감축, 무기 가용성 통제, 비폭력적 형태의 분쟁 해결 촉진, 평화 문화 조성이라는 여성운동의 핵심 요구 사항을 간과했다.” 위민 인 블랙은 여성이 평화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확신합니다. 여성은 전 세계 인구의 52%를 차지하지만 평화와 안보 문제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주목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여성의 참여가 상징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뤄질 때만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성들의 기여가 있어야 현장의 필요에 대한 전체적 그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유엔여성기구에 따르면 평화 협정 체결 과정에 여성이 참여할 경우 평화 협정이 최소 15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35% 증가합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1979년 인도에서 시작된 위민 인 블랙 비모차나(Women in Black Vimochana)의 마두 부샨(Madhu Bhushan)은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으로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여성으로서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더 광범위한 사회적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당신이 ‘Women in Black: A Women’s Peace Movement’에서 여성평화운동의 개념을 설명하며 이 말을 인용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말은 ‘여성이라는 젠더로서 반전운동에 참여한다’는 선언처럼 들리는데, 전시 성폭력처럼 전쟁 피해 일반에 비춰볼 때, 여성과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보다 특수한 형태의 폭력이 존재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이라는 젠더로서 반전운동에 참여한다’는 언술 속에 반전운동을 여성성으로 젠더링하는 인식이 투영되어 있지는 않은지 비판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요컨대 전쟁의 반대 항으로서 여성성이 강조되면서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되고, 그로 인해 여성에 대한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강조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수 핀치 남아시아의 여성주의 작가이자 활동가인 리타 만찬다(Rita Manchanda)는 ‘여성의 관점은 주변부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 오기 때문에 힘의 비대칭성을 수반하는 집단 간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더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3] 이것이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타고난 평화 조성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시아 콕번은 『반군사주의 - 평화 운동의 정치적, 젠더적 역학(Antimilitarism – Political and Gender Dynamics of Peace Movements)』(2012)에서 일본, 한국, 스페인, 우간다, 영국에서의 국제적인 반전·반군사주의 평화 운동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10년의 주기마다 인간의 폭력은 미디어와 무기의 발달에 힘입어 더 큰 도달력을 얻고, 우리의 정신, 관계,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힘도 더 많이 보유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존은 폭력이 정상적이고 불가피하다는 통념을 폐기하고, 폭력은 선택의 문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 낡은 통념을 대체하는 전 세계적이고 획기적인 운동을 머지않은 미래에 전개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덜 폭력적인 대안, 덜 폭력적인 생각, 말, 의도, 정책, 전략 및 행동이 거의 항상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 훨씬 덜 폭력적인 사회를 향해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위민 인 블랙의 각 그룹은 다양한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겪은 여성들에게는 젠더와 군사주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은 여성 개인에 대한 남성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행동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 산물인 젠더에 관한 것이란 점입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여성운동으로서 국제적 차원의 연대활동을 넓혀가다 보면 분쟁 지역의 특수한 맥락을 놓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가령,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민족, 젠더, 계급 등 여러 층위의 문제가 교차하는 복잡한 사안인데, 그중에서도 민족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운동에 있어서 민족이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상과 관련하여 초국적 여성연대의 실현을 지향하는 위민 인 블랙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수 핀치 계급 지배, 인종 우월주의, 여성 종속의 상황은 구조적 억압, 폭력의 위협, 공공연한 무력의 결합이 있었기에 그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이 요소들은 서로 교차되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지만 서로를 통해 형성되고 행사되기도 하면서 제도 그 자체로서 표현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가족, 교회, 기업, 군대, 국가 등이 그 예가 되겠지요. 무력 분쟁 속에서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간과 납치를 당하고, 특정 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해 대량학살의 대상이 되며, 약탈적 기업에 의한 수탈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가부장제, 인종 차별, 자본주의가 맞물려 군사주의와 전쟁을 일으키고 영속화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Cynthia Cockburn, Antimilitarism – Political and Gender Dynamics of Peace Movements, 2012.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한국의 경우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는 등 국제적 군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군이 해외 주둔지에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례가 보고된 바는 없습니다(외교관의 경우는 있었습니다). 군사화된 남성성/군사주의적 남성성 자체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내재해 있다는 시각이 있는데요, 한때 위민 인 블랙 런던에서 이상의 문제를 둘러싸고 이것을 부각할지 말지 서로 입장이 나뉘었던 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과테말라에서 ‘블루 헬멧’(Blue Helmet, 파란색 방탄모를 착용하는 유엔 평화유지군을 가리키는 말)에 의해 자행된 강간, 음핵 제거, 페미사이드에 대해서 활발한 연대 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엔 평화유지군이 전장에서 저지른 성폭력에 대해서는 위민 인 블랙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청해 들을 수 있을까요? 수 핀치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한 성폭력 문제는 2011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위민 인 블랙 국제회의에서 세르비아의 제네 우 크르놈 프로티브 라타 소속 여성들에 의해 제기되고 규탄되었고, 이어서 2015년 위민 인 블랙 국제회의와 함께 방갈로르에서 개최된 세계여성법정을 비롯하여 이후 회의들과 여성법정들에서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상영된 한 영상 증언에서는 11살 정도로 보이는 아프리카 소녀가 마을을 휩쓴 무장 남성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고 어머니가 살해당해야 했던 경험을 머뭇거리며 이야기합니다. 그런 후에 이 소녀는 응당 자신을 보호했어야 할 유엔군에게 다시 강간을 당했습니다. 내레이터는 이 파란 방탄모의 강간범들이 ‘평화 유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저지른 범죄로 인해 기소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불처벌’(impunity) 원칙을 지적하고, 법정의 모든 사람들은 이를 규탄했습니다. 각주 ^ CynthiaCockburn, From Where We Stand: War, Women’s Activism and Feminist Analysis, Zed Books, 2007. ^ Cynthia Cockburn, From Where We Stand: War, Women’s Activism and Feminist Analysis, Zed Books, 2007. ^ Manchanda et al., Women Making Peace: Strengthening Women’s Role in Peace Processes, South Asia Forum for Human Rights,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