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1부〉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이헌미

  • 게시일2023.07.03
  • 최종수정일2024.04.24

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지난 5월 16일, 야마시타 영애 교수(화면상 맨 왼쪽)를 온라인상에서 만났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Q. 선생님께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어떻게 관여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이효재, 윤정옥 교수와의 만남은 어떠했나요?

1988년 9월에 한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다음 해 3월에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유학 전에 스즈키 유코(일본의 여성사 연구자) 선생님과 교류가 있었는데 제가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위안부’ 문제도 같이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한국에 갈 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윤정옥 선생님이 1987년경에 일본에 ‘위안부’ 조사를 위해 오셨는데, 그때 아사히신문의 마츠이 야요리 기자가 윤정옥 선생님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셨어요. 그 글을 통해 윤정옥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은 민주화운동으로 학교에서 퇴출된 후 일본에 잠깐 체류하신 적이 있었고 그때 우연히 뵐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효재 선생님을 지도 교수님으로 삼아 한국에 갔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이 1989년 10월 가족법 개정 운동 집회에 가자고 하셔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다 같이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윤정옥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제 소개를 하면서 “저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전화번호를 물어보셨고, 그 후 이화여대 식당에서 자주 만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다음 해 7월에 윤정옥 선생님이 ‘정신대연구반’을 만드셨을 때 저도 함께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여성학과 학생 4명이 모였어요. 윤정옥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모임을 가졌고, 그렇게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10월 25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가족법개정 여성대회가 끝난 뒤 국회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필자 촬영) ⓒ야마시타 영애

1990~91년경 정신대연구반은 ‘위안부’ 경험자를 찾기 위해 지방답사를 했다. ⓒ야마시타 영애

 

Q. 1988년 9월에 이화여자대학교로 유학을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오면서 여성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학부 전공은 무엇이었고 유학 결심과 전공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 

초등학교는 민족학교, 중학교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학생 때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부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에는 국경이나 국적이 크게 관계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신문을 보다가 ‘여자는 만들어진다’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읽게 됐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때까지는 성 정체성도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머리를 길러본 적도 없고 치마보다는 바지가 좋았어요. 민족학교 다닐 때 고학년이 되니까 선생님이 ‘머리를 기르라’고 하시는 거예요. 기악합주부에서는 남학생만 지휘자가 될 수 있었어요. 오빠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데 저만 해야 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요. 그런데 기사를 보니까 이게 남녀차별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여성 문제에 눈을 떴고, 대학 입시 때는 이미 미술에 관심이 없는 상태였어요. 

민족학교 6학년 때 여학생 중 짧은 머리는 나뿐이었다. ⓒ야마시타 영애

 

하지만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는 게 힘들었죠. 그래서 미대를 몇 군데 지원해 한 군데 합격했어요. 그렇지만 거의 학교에 가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 미대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일단 다니고 있는 대학을 졸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졸업 후 여자대학인 쓰다주쿠대학교에 학사 입학(3학년에 편입)을 했어요. 조선어를 제1외국어로 시험을 볼 수 있었고, 다행히 국제관계학과에 붙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게 됐어요.

Q. 한국에 처음 오신 건 언제였나요? 

1979년에 처음으로 오빠와 둘이서 아버지의 고향에 갔어요. 그때는 할머니와 친척분들을 뵈었고, 7개월 후인 1980년 2월에 혼자 다시 갔어요. 한국이 너무 궁금했거든요. 전국 일주를 하면서 마지막에 서울에 올라와 이화여대를 찾아갔어요. 그 근처 책방에서 이화여대에서 출판한 『여성학』(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과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효재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79)이라는 제목의 책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그것을 사서 나중에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두 권과의 만남이 한국 유학으로 이어졌다. ⓒ야마시타 영애

 

당시 일본에도 여성학이 도입되었지요. 그러나 대학에는 여성학과 같은 곳은 없었고, 저는 한국 여성사와 현재 상황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Q. 한국에 1988~1998년까지 10년간 계셨는데, 석사를 마친 후 유학은 끝난 건가요? 

석사를 마친 후에 연구생을 거쳐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96년경에 과정을 끝냈습니다. 또 94년 가을학기부터 동국대 일어일문과에 ‘외국인 초빙교수’로 취직해서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열심히 활동하던 때였기 때문에 한국에 계속 있고 싶었죠. 

Q.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는데 서울의 인상이 어땠는지요. 관련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 과거청산의 맥락에서 종종 놓쳐지는 것이 1990년대 글로벌한 탈냉전과 한반도에서 지속된 냉전 및 남북 체제경쟁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자극받은 북한은 19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지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일본 자이니치 사회에서 이러한 모순적 변화(탈냉전이 되었지만 냉전이 계속되는)를 혹시 느끼셨는지요. 

사실은 더 일찍 한국에서 유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선언 전에는 사실상 가지 못했던 거지요(민족학교 출신인 것도 있고 해서 부모님이 말렸습니다). 그래서 88년에 서울에 갔을 때는 정말 기뻤어요. 올림픽 직전이라 활기도 엄청났고요. 

자이니치 사회는 매우 복잡해요.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이니치의 경험이 다 달라요. 그런데 일본의 자이니치 조직은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이었어요. 또 당시 젊은 세대들은 이미 조총련이나 민단과 거리를 두었지요. 저의 경우는 80년대 초반에 자이니치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나그네’라는 젊은이들의 독서 모임에 가끔 나갔어요. 하지만 여기도 거의 남자들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1984년 쓰다주쿠대 학부를 졸업할 때쯤 ‘조선여성사독서회’라는 자이니치 여성 모임을 만들었어요. 주로 한국에서 구입한 여성 관련 서적을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중심이었지만 곧 다양해졌어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모인 것은 아무래도 한국어 책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자이니치 사회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어요. 

자이니치 여성들과 만든 조선여성사독서회의 첫 통신 1면. 이 단체는 90년대 초 우리여성 네트워크로 탈바꿈했다. ⓒ야마시타 영애

 

Q. 선생님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셔널리즘의 틈새’,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민국가 사이의 정체성을 ‘야마시타 영애’라는 이름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는 듯합니다. 야마시타 에이아이와 야마시타 영애, 그리고 최영애라는 세 개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민족학교 다닐 때는 최영애였고 일본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야마시타 에이아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어요. 그 뒤로 ‘나는 조선인(최영애)인가, 일본인(야마시타 에이아이, 영애=英愛의 일본어 독음)인가’ 고민을 했습니다. 1977년쯤 마츠이 야요리 씨 주최로 ‘아시아여성모임’이 생겼고, 대학 입학 후 우연히 그 모임을 알게 되어 나가게 됐습니다. 그 모임에서 어느 날 나의 아이덴티티와 이름에 관한 고민을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한 분이 “그럼 야마시타 영애라고 하면 어때요?”라고 하셨죠. 자이니치와 결혼한 분이셔서 그런지 감각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 발상이 너무 멋있고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야마시타 영애’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Q. 야마시타는 어머니의 성인가요? 

맞아요. 저는 부모님이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혼인신고를 했을 때는 어머니와 저, 오빠 모두 아버지 국적으로 바꿀 수도 있었어요. 그랬으면 저도 최 씨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부모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이유는 모릅니다. 그래서 호적과 주민등록상에도 ‘야마시타 에이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권상의 영어 표기도 ‘EIAI’로 되어 있던 걸 1998년에 ‘YEONG-AE’로 바꿨어요. 

Q.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 방일 직전, 정신대 문제에 대한 여성계(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성단체연합, 서울지역 여자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연합성명서, 7월 윤정옥 교수와의 정신대연구반(훗날의 한국정신대연구소) 발족에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요.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님인 이영자 선생님이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강의를 오셨었어요.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너무 재밌었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 5월 초순쯤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식사하던 중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식민지 시대의 징용, 징병에 관해 말한다고 하는데 여성 문제인 정신대(‘위안부’의 의미로)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한다. 우리가 이것을 요구해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 말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때 거기 있던 친구들이 역할 분담을 하면서 활동을 하게 됐어요. 

Q.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합성명서까지 이어진 건가요?

그렇죠. 여성학과 친구들이 다방면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여성연합을 포함한 여성계의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로 이어졌어요.

Q. 정신대연구반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그것이 나중에 한국정신대연구소로 이어지고, 정대협에서 일본 창구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일본 NGO와의 연락, 통번역을 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대협에는 언제 합류해서 어떤 형태로 근무하고 또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7월에 연구반이 생겼고, 8월경에 윤정옥 선생님에게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요. 일본의 6월 국회 회의록이었는데 “모토오카 쇼지 의원이 조선인‘위안부’에 대해 질문을 했고, 일본 정부는 ‘그것은 민간업자가 한 거다’”라는 식으로 대답한 내용이었어요. 윤정옥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죠. “이런 게 일본에서 왔는데 문제적이다, 일본 정부에 대해 공개서한을 쓰기로 했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한국어로 쓰시고 제가 일본어로 번역했습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의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회의에서도 검토했고요. 

1990년 10월 17일,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에 대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야마시타 영애

 

그리고 공개서한을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보내고 또 10월 말에 윤영애 총무님, 김혜원 선생님을 비롯해 세 분이 일본에 가서 직접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어요. 제가 통역을 맡았고요. 그런데도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바로 정대협을 만들게 되었어요.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으니 전담 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교회여성연합회가 중심이었어요. 

1990년 10월 29일, 공개서한을 들고 일본 참의원 의원회관을 찾아갔다. 윤영애 선생님의 발언을 통역하는 모습 ⓒ야마시타 영애

 

공개서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답신은 계속 없었어요. 기한이 지나고 세 번 정도 독촉장을 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참 지나서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답을 하겠으니 대사관으로 나오라고. 그래서 정대협 대표들이 대사관에 가셨어요. 근데 그때 대사관 측의 반응이 너무 실망스럽고 인간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효재 선생님, 윤정옥 선생님, 윤영애 총무님 모두 화가 나셨죠. 그때 일본 측에서 제대로 대응하고 문제에 대해 깊게 논의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통역이나 번역 같은 잡일을 했습니다. 김학순 님이 일본 정부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신 직후부터 정신대 신고 전화가 폭발했는데 저도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신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벨이 울리면 긴장하며 수화기를 든 기억이 납니다. 자원활동가였던 셈이죠. 아무 직함 없이 그냥 실행위원회도 참석하고 그랬어요. 정대협 구성 단체인 정신대연구회 회원이기도 했고요. 92년인가, 이미경 선생님이 총무였을 때 정대협 조직을 개편하면서 국제협력 일본 담당이라는 역할이 생겼던 걸로 기억해요. 

1992년 봄 즈음 일본 기자가 취재를 하러 왔다. ⓒ야마시타 영애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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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이헌미 2023.07.03

글쓴이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분쿄대학교 문학부 교수. 저서로는 『여자들의 한류: 한국드라마를 읽는다』(이와나미신서, 2013),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한울, 2012), 『신판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문제와 페미니즘의 과제』(이와나미 현대문고, 2022)가 있다.

글쓴이 이헌미

국제정치학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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