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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1부〉 - 부딪치는 차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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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선생님들의 전공이 다양하고, 일본군‘위안부’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본인 소개를 비롯해 각자의 관심 분야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리며, 동시에 다양한 맥락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만나고 글로 풀어내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저는 현재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기획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셰어는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라는 개념을 주요하게 가져가고 있는데요, 현재의 불평등이나 부정의를 페미니스트로서 바라볼 때 성과 재생산을 둘러싼 힘의 작동 방식을 주의 깊게 살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위안부’ 이슈가 성과 재생산에 관한 한국 사회의 지형을 살피는 데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요. 인권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2017년에 법대 석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2014년에 미군 기지촌 여성분들이 국가 대상으로 진행한 손해배상 소송을 접하게 됐죠. 소송 과정에서 승소를 위해 피해자의 증언이나 구호가 정형화되는 면이 있잖아요. 그런 것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차에 친구에게 미군 기지촌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구술집을 펴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와 인류학 전공자, 영상 전공자 셋이서 팀을 이뤄 평택의 ‘이모들’을 만나는 구술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기획, 채록, 편집, 출간 전 과정이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인류학의 민족지 이론, 미학의 재현 이론, 페미니즘의 피해자 중심주의 등 여러 갈래의 흐름들이 작업의 기반이 되었는데요, 일본군‘위안부’ 증언 연구도 중요한 참고 지점이었습니다. 그때 제 지도교수님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 4권의 저자인 양현아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때로는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20년이 된 증언집의 의미를 어떤 부분에서 계승하고 어떻게 더욱 새롭게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미군 기지촌 여성 구술집을 출간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일본군‘위안부’ 이슈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1년 정도 일본군‘위안부’연구회의 간사로 지냈고, 석사 졸업 후 셰어에서 일하게 되고 나서도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에 참여하는 등 ‘위안부’ 이슈와의 느슨한 연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성용 저는 활동가와 연구자의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고, 비평이나 칼럼을 쓰는 일도 하고 있어요. 관심 분야는 청년, 노동, 젠더 등입니다. 박사논문의 문제의식은 ‘위안부’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동떨어져 있기도 한데요, ‘폭력은 어떻게 사회를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국가(폭력)이란 무엇이고 그게 이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 혹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심성들을 만들어냈는지 질문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제주 4‧3 사건 등 전쟁과 학살의 경험, 국가폭력에 대한 역사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 같아요. 지난번 오키나와로 필드워크를 갔다가 배봉기 할머니를 도왔던 김현옥, 김수섭 부부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위안부’ 문제를 조우하게 됐습니다. 일본에 계시는 이영채 선생님, 우쓰미 아이코 선생님 등 B·C급 조선인 전범을 연구하신 선생님들을 만나며 영향을 받았고요. 그러면서 식민주의 문제, ‘위안부’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위안부’ 관련해서는 정의연 사태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지난 정부의 일종의 ‘3대 사태’라고 하면 조국 사태, 정의연 사태, 박원순 사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정의연 사태는 당시 지형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있었죠. 조국 사태 이후 이른바 친조국과 반조국이 갈라진 상태에서 정의연 사태가 터진 후 진영 논리의 자장 안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미향 의원이 총선에 출마했을 때 좌파라는 사람들조차도 여성혐오적 뉘앙스로 ‘위안부 팔아서 국회의원 해먹는다’는 말을 했는데,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윤미향 의원, 정의연, ‘위안부’ 운동 등이 여전히 대상화된 ‘여성’으로서 재현되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요. 너무 많은 지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세세하게 뜯어서 얘기하지 않고 친/반으로만 이야기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컸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이재임 석사와 박사 모두 여성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박사과정 중이에요. 현재는 법과 사회가 폭력이나 범죄를 다루는 방식을 연구 관심사로 삼고 있습니다. 2017년에 학부 논문을 썼는데 당시 『제국의 위안부』가 학부 내내 이슈였어요. 역사를 전공하고 있었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시기였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를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는 결정을 자연스럽게 했어요. 『제국의 위안부』를 어떻게 비판할까 고민하면서 정영환 선생님의 책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논문을 읽고, 소녀상에 대한 글도 읽으면서 역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운동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막연한 책임감과 정의감을 갖게 됐고, ‘위안부’를 석사 연구 주제로 삼고 싶어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Q.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2020년의 ‘정의연 사태’ 등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일본군‘위안부’운동 관련 다양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또한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을 통해 여성운동과 일본군‘위안부’운동이 만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여러 이슈가 신진 연구자에게 시사하는 쟁점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이슈들을 결합하고 혹은 해체할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을 계기로 ‘위안부’ 운동이 여성운동과 만났다는 서술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에요. ‘위안부’ 운동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에도 여성운동이었어요. 2000년 법정의 이름도 여성국제법정이었고, 피해자들 또한 다른 나라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과 계속 연대해왔는데 이것을 페미니즘, 여성운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마치 민족주의 운동이기만 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위안부’ 운동은 나름대로 페미니즘 운동을 했다는 식으로 방어적인 대응을 하는 게 능사는 아니고, 지금은 내부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이 페미니즘 운동이었냐 아니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위안부’ 운동이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었고 앞으로는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고자 하는가를 돌아봐야 할 때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노선이 다변화됐고, 내부에 갈등도 많은 상황이잖아요. ‘생물학적 여성’의 안녕만을 도모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주장하면서 트랜스젠더 등 다른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흐름도 존재하고요. 이제 90년대의 프레이즈인 ‘민족에서 여성으로’ 이후 한 단계 더 나갈 필요가 있어요. ‘여성으로’가 무슨 뜻인지, 어떤 페미니즘이어야 하는지, 젠더를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 다른 억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거기서 ‘위안부’ 운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셰어에서 활동하면서 구체화되고 날카로워진 문제의식이기도 해요. 셰어는 이전부터 장애계와도 소통하면서 낙태죄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들이 구성원으로 있고, 낙태죄 폐지 운동을 거치면서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어요. 상호 교차성을 활동의 중심에 두고 있고, 낙태죄 폐지 운동을 여성 신체에 대한 자율성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던 인구 통제, 이를 위해 계속해서 이뤄졌던 재생산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만들려고 했던 단체입니다. 그때 주요했던 구호가 ‘낙태가 범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는 비정상인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이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 억압을 포괄적으로 함께 보고 있어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지금의 페미니즘 지형과 연결되고, 젠더화된 힘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진전시킬 수 있기를 바라요. 지금의 페미니즘 지형에선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소수자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서 담보될 때의 한계가 있거든요. 경찰, 군대, 감옥 역시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일조하고 있는데, 페미니즘 운동의 목표가 오로지 국가의 더 많은 개입을 촉구하는 것이어선 안 됩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역사가 30년이나 된 만큼 물론 어느 정도는 제도화되어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운동과 국가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급진적인 운동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성용 셰어에서 재생산과 관련하여 개념을 확장시켜 나간 게 놀랍습니다. ‘위안부’ 운동도 그러한 잠재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민족에서 여성으로’라는 구호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퍼져나갔고, 저도 그 자장 속에 있는 사람인데요. 이제는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 다른 이야기들을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성공회대 조경희 선생님이 쓴 글[1]을 보면 90년대 재일조선 여성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해갔는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어요. ‘여기’에서의 교차성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 전후 일본 사회에서 지속되는 식민주의 문제를 온몸으로 겪어온 집단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성이기도 하고, 한쪽만 이야기하는 운동이나 논의에 대해선 스스로 온전히 대변할 수 없었던 불편함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김학순 증언 이후 ‘위안부’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서게 됐는지 자각해갔다는 이야기였어요. 교차성이라는 게 ‘여기’의 맥락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한국 사회에서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의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겐 (페미니즘) 계보가 없다’고 했다가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바뀌어간 것을 기억하는데요. 지난 8월 한 달 정도 출장 목적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흑인운동 관련 전시와 서점을 방문하고 공연도 봤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폭동(riot)’의 역사를 계속해서 상기하더라고요. 역사와 계보를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과오를 되짚어가며 토론하고 있었어요. 운동에 참여했거나 관심 있게 지켜봤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집합 기억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었죠. 그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운동들은 그러한 노력을 얼마나 해왔나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제게 ‘우리에겐 계보가 없다’라는 말로부터 이어지는 고민인 것 같아요.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년 세대 여성들이 ‘위안부’ 운동을 조우했을 때 ‘최초의 미투 운동’이라는 수사를 사용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 맥락 속에서 계보를 찾고 역사를 구성해나가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투 운동이든 ‘위안부’ 운동이든 최초로 증언을 하게 될 때의 용기와, 증언이 부정되는 경험들,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해나가는 경험들이 다르면서도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과정들 속에서 과거를 통해 용기와 교훈, 위로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위안부’ 운동도 현재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만나면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며 상호 참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재임 요즘 ‘위안부’에 대한 석사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하기 위해 고민 중인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얼마나 여성운동으로 여기고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석사 논문을 쓸 때도 ‘위안부’ 운동이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역으로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제가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피해와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 페미니스트 운동이 놓여있는 지형이기도 하죠. ‘위안부’ 피해자를 둘러싼 담론들이 그 지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피해를 개인의 고통이자 불운한 사건으로 보고, 피해자에게 보호나 지원 등 인도주의적 조치를 해주면 끝이라는 문제적인 인식 말이에요. 이러한 지적이 페미니스트 연구자들,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에게 ‘위안부’ 운동을 내 문제라고 여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각주 ^ 조경희, 2020, 「포스트 식민 페미니즘의 (재)소환: 1990년대 재일여성들의 ‘위안부’ 운동과 정체성 정치」, 『문화과학』, 2020년 겨울호 (통권 제104호), 문화과학사.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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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2부〉 - 부딪치는 기억들: 채록·발굴·선택·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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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증언을 비롯한 사료들이 현재도 (재)해석/발굴되고 있는데요. 수집과 해석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무엇을 고민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은진 평택 기지촌 여성 구술집 작업을 할 때 의식적으로 ‘증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어요. 일부러 ‘구술사’라는 말도 쓰지 않고, ‘구술집’이라는 말로 책을 소개했어요. 여기에 실린 말들을 증거처럼 뭔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지 말고, 역사적 의미가 있어서 들을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였죠.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 4권(2000)의 전환이라고 한다면, 피해자들의 말을 어떤 정보값으로 다루기를 거부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인식체계 자체를 전복하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힘을 가짐으로써 그들의 말을 재위치시키고 전달하고자 한 작업물이었던 거죠. 기지촌 여성 구술집은 한 발 더 나아가, 사실과도 완전히 결별한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영미 지니 윤선: 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 폭력 피해자를 넘어서』(이경빈·이은진·전민주, 서해문집, 2020)에는 피해자들이 완전히 상반된 사실을 진술하는 것도 그대로 실었어요. 사실을 밝히는 건 피해자가 아니라 연구자의 몫이자 공통의 과제라고 생각했거든요. 피해자에게 부정확한 말도, 틀린 말도 할 수 있는 발화 공간을 허락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상황들과 당시의 대화 분위기 등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그리고 연구자의 위치와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듣고 말하는 행위의 정치적 의미를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했죠. 연구 윤리와 관련해서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는데요. 가령, 피해자가 중요한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된다고 가정해보죠. 사회가 승인해줄 법한 피해 서사와 맞지 않을 경우 그것을 공개했을 때 피해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겪을 수도 있겠죠.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그 발언에서 어디까지 가릴 것인가 고민하게 돼요. 듣는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는데 ‘듣는 태도는 결국 바꾸지 못할 거야. 그렇다면 피해자의 말을 어디까지 편집해야 하지?’라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거죠. 이 작업은 그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텨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언을 편집해서 없애버리는 대신, 독자가 스스로의 듣는 태도를 거듭 질문하게 하는 데에 집중했어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상황적인 요인도 있었어요. 이미 기지촌 여성들의 사법운동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에서 저희가 구술작업을 시작했거든요. 법정 싸움은 당시의 법령들, 여러 공문서가 오간 정황 등 문서 자료들을 활용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피해자는 직접 법정에서 증언할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저희의 구술집은 사법운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당사자 말하기를 둘러싼 고민을 전진시킬 수 있었어요. 이재임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 있을 때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이라는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총 4개 섹션으로 구성됐고, 그중 하나가 태평양 트럭섬에 다녀오신 이복순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할머니가 93년도에 정부에 신고할 때부터 “나는 도라쿠도에 다녀왔다”고 말씀하셨대요. ‘위안부’로 도라쿠도에 끌려갔었다고요. 그런데 그때는 도라쿠도를 지명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따뜻하고 바나나를 먹는 곳이었다니까 인도네시아였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연합군이 트럭섬을 점령했을 때 귀환을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 이들을 찍은 사진에서 이복순 할머니와 닮은 얼굴을 연구팀이 발견했죠. 그때는 이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 대구에 있는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이인순 관장님께 확인을 부탁드렸고, 이복순 할머니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있던 트럭섬 귀환선 승선 명부에서 히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죠. 할머니의 아버지 호적을 통해 이복순이라는 이름을 히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다는 것까지 알게 됐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도라쿠’가 트럭의 일본식 발음이었구나, 할머니는 트럭섬에 다녀왔다는 말을 계속하셨던 거구나 알게 됐어요. 그걸 알아내기까지는 아주 많은 자료의 교차가 필요했습니다. 전시 포스터를 보면 ‘기록’과 ‘기억’ 사이에 글자들이 부서지고 있어요. 기억과 기록이 교차되면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우리가 아직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는 시도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자료의 위계를 없애고 모든 자료를 함께 볼 때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증언이든 연합군 자료든 ‘생산 맥락’을 보는 것이 연구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최성용 증언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위치성에 대한 얘기예요. 예컨대 나이 든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가 훈련된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죠. 저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라 연구팀과 함께 어르신들을 인터뷰할 때면 뒤에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는데, 그 경험을 하며 위치성이란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이것은 생산 맥락에 대한 강조와도 연결되는 것이에요. 최근에 어떤 활동가분들을 인터뷰하면서 죄송했던 기억이 있어요. 더 좋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들의 이야기들을 더 두껍게 들어야 했는데 그분들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어 괴로웠습니다. 정동이나 침묵, 감각, 미묘한 기류 등으로 증언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일종의 맥락을 두텁게 읽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증언도 그렇지만 사료도 굉장히 구성적이잖아요. 예를 들어 포로심문보고서의 경우, 누가 포로심문을 하고 자료를 작성했느냐, 일본계 2세냐 혹은 조선인 광복군이냐 등 여러 상황에 따라 내용도 완전히 달라지고, 그렇게 생산된 자료가 어떻게 쓰이고 유통됐는지 등 맥락도 굉장히 다양하잖아요. 아주 구조적인 차원의 힘부터 개별 행위자들 수준의 목적과 욕망이 뒤얽히면서 사료라는 것이 만들어지죠. 공부하면서 이처럼 두터운 맥락들을 읽어낼 역량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시대적인 성격 전환과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안부’문제에 대한 세대교체는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지, 또 연구하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미래 세대’는 어느 분야에서든 비판하고 있는 용어예요. 문제를 현재의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청소년 등의 주체를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내포돼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신진 연구자들을 호명할 때도 사용되는데, 미래 세대를 초청하는 동시에 타자화한다고 생각해요. 최성용 연구보다는 운동 차원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한국의 진보적인 시민사회 운동의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거치면서 제도 속으로 포섭되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라는 게 제도화될 수밖에 없는데, 제도화된다는 건 일정한 기득권을 갖게 되는 것이죠. 마이너리티에서 특권을 가진 집단으로 위치가 변해가면서 ‘위안부’ 운동도 진영 담론의 논리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된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과 문제를 어떻게 진영 담론으로부터 구출해낼 것이냐, 혹은 재맥락화와 재의미화를 할 것이냐, 이것은 연구 차원뿐만 아니라 운동 차원과도 겹쳐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세대교체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청년 세대 등과 관련하여 민주노총 내에서 작년부터 연구를 하고 있어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받아들여 노조 집행부 자리의 일정 부분을 청년에게 내줬는데, 정작 의사결정 권한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세대 갈등이 작동하는 맥락들이 있었죠. 기성세대는 ‘요즘 청년 노동자 조합원들은 집회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온다. 이기적이다’라고 말하고, 청년세대는 ‘우리가 얘기를 하면 안 듣는다. 그러니까 안 나가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구도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보이고, ‘위안부’ 연구에서도 어느 정도 유사한 결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후속 세대가 등장해야 하는데 잘 나타나지 않고, 그렇게 되니 오기만 해도 고마워하며 소위 말해 ‘우쭈쭈’하게 되는 것이죠. 기존의 ‘위안부’ 연구 혹은 운동에 대해 비판했을 때 기성세대들이 어떤 태도를 보여줄까 싶고, 노동조합의 예시처럼 청년들이 튕겨 나가거나 없는 사람처럼 무시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는데요. 그러한 권력관계 지형 속에 이 문제도 놓여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은진 저는 엄밀히 말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에요. 논문도 낙태죄 관련으로 썼고, 스스로를 재생산정의 활동가로 정체화하기도 하고요. 이런 입장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의제와 다른 의제의 연결성 차원으로 세대 전환이나 교체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운동이나 의제도 일종의 생애 주기가 있으니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건 한계가 있겠죠. 하지만 여성, 인권 운동의 계보 속에서 다른 의제들과 연결되며 현재화되는 방식으로 현재성을 얻게 된다고 생각해요, 다만 일본군‘위안부’ 운동이나 문제가 게토화되면서 그런 방식의 현재성을 얻는 일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현재화하기 위한 몇 안 되는 시도들이 있지만, 그마저도 단선적인 상상에서 그치는 것 같아요. 가령 일본군‘위안부’에서 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성매매 여성으로 이어진다는 식으로요. 저는 좀 더 복잡한 연결망 속에 일본군‘위안부’ 이슈를 놓아보고 싶어요. 셰어에서 ‘몸이 선언이 될 때’라는 전시에 참여해 저도 함께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때 연표를 만들었어요. 임신중지 관련 사건이나 개념들을 비롯해 몸과 재생산에 대한 수많은 억압들을 연표로 정리하면서 장애인 등 시설화된 삶과 이것이 어떻게 교차되고 얽혀있는지 드러내고, 존재가 곧 범죄였던 트랜스젠더 등의 삶과도 연결했습니다. 그러면서 ‘위안부’ 이슈도 이런 연결망 위에 놓을 수 있지 않을까, 꼭 성매매와 연결되는 의제로만 상상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최성용 민주화 운동 서사를 볼 때 느끼는 불편함이 있어요. 정형화된 서사들을 보면 교과서나 박물관에 박제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내가 들어갈 틈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봐도 현재와 연결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고, 기존의 정형화된 서사는 담아낼 수 없는 개인 및 집단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있는데, 그런 것들은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과거사 운동이 제도화되고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이 사장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의 역사적 자원으로 삼고 새로운 질문이 나오게끔 하는 촉매제로 삼으려면 국가의 공식 기억과는 별개로 사회적 기억이 두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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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3부〉 - 다르게 선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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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인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평택 기지촌 여성 구술집 『영미 지니 윤선: 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 폭력 피해자를 넘어서』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기지촌 여성 구술집에 대한 감상으로 ‘재밌다’는 표현을 쓰기 어려울 텐데요, 그만큼 구술자와 채록자 여섯 분이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그 재미를 알려드리고 싶은데요, 작업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은진 저희가 구술집 작업을 하면서 일방적인 인터뷰보다는 대화 형식을 취했어요. 라포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구술자분들도 저희에게 궁금한 게 많으셨죠. 저희가 가면 이모들이 질문을 던졌고, 주 관심사 중 하나가 연애사였어요. 그래서 제 연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책 중반부 <데뷔>라는 영상 작업에도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자랑하는 것이 나오는데, 작업을 마치고 출판하는 사이에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게 됐지 뭐예요. 책에 들어간 저의 이야기를 정말 편집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출판물에 실리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지난 연애의 흑역사 정도가 아니잖아요. 본인의 근간을 흔들었던 문제에 대한 증언이고, 기록의 형태로 오랫동안 남게 되고, 그것이 보여질 사람들의 범위를 조정할 수도 없죠. 그런 것들을 어렴풋이나마 체감하게 됐던 것 같아요. Q. 『낙태죄의 의미 구성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고찰 - 포스트식민 한국 사회의 법제, 정책, 담론 검토』 논문 말미에 “그 시기를 지나온 여성들의 체험이 어떠했는지 이야기되지 않아 왔다”고 쓰셨는데, 이것은 앞서 언급한 ‘평택 기지촌 여성 구술집’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말하기와 그것을 듣고 기록하는 것에 대한 생각, 그리고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작업을 할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그동안 말해지지 못했던 목소리를 발굴해서 알린다는 자의식을 경계하는 편이에요. 아카데미나 사회운동의 담론 지형에서의 뒤틀림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데 기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하면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분들은 스스로 말하게 되지 않을까요? 목소리들이 더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작업해나가긴 할 테지만 그 형태를 구술작업에 국한할 생각은 없어요. 연구가 될 수도 있고, 법률 작업이 될 수도 있고, 예술과의 협업이 될 수도 있겠죠.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Q. 『‘정의연 사태’의 중층적 성격과 운동의 질문들』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탈역사적·탈정치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가진 한계를 짚어주셨습니다. 이것을 상징폭력과 지적 식민성으로 명명하면서 아시아 지평과 탈식민 사회 역사에 대한 인식 두께를 확보하자고 제안 주셨는데요. 특히나 신진 연구자일수록 말씀하신 지평과 인식을 확보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현실적 한계들을 건너왔던(건너는 중인) 경험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최성용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의 흑인운동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압과 차별, 혐오를 얘기하면서 인종주의 역사를 말해요. ‘위안부’ 문제도 당사자분들이 겪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또 우리가 대항하고 바꿔야 하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얘기해야 하죠. 그 역사는 가부장제, 식민주의, 계급 등 여러 가지가 착종되어 있는데, 민족주의적으로만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면 젠더를 지우게 되는 것처럼, 오늘날 역사 부정은 식민주의 역사를 지운다고 생각해요. 식민주의 청산론이 식민 경험 없는 민족의 근대화라는 본질주의적인 환상을 노정한다면, 그 반대편에 역사 정의에 대한 요구를 민족주의로 환원해 그것만 도려내면 평화로워진다는 또 다른 본질주의가 있는 것 같아요. 식민주의는 단순하게 청산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지반이자 지층이죠. 그렇다면 그 역사를 딛고서 무엇을 할 것인가, 식민주의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질문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일본의 사죄와 법적 보상, 천황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식민주의와 냉전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가 어떻게 은폐되고 굴절되어 왔는가에 대한 두터운 맥락을 인지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것’ 혹은 ‘진영 논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규정해버리면 ‘위안부’ 문제는 탈역사화되고 탈정치화된다고 생각해요. 탈역사화하려는 시도는 너무 쉽게 이 문제를 이른바 화해론으로만 덮어버리려는 것 같아요. 계속 시끄럽게 굴지 말고, 한일 관계도 어느 정도 타협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정의로운 것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이 가진 고유한 급진적 정치성을 표백시켜 ‘위험하지 않은 무언가’로 순치시키려는 것 아닌가, 그것이 역사 부정이 의도하는 바 아닌가 생각합니다. Q. 『‘20대 남성’ 담론을 질문한다』와 『청년이 말하는 청년세대론, 이번엔 다를까?』 등 청년에 대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계십니다. 단일하고 매끄럽게 범주화함으로써 작동하는 오류들에 대해 다각도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계신데,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호명 방식, 운동의 몰역사적 이해를 문제 삼으신 점이 연결될 듯합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도 청년이 종종 호명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납작한 호명을 탈피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까요? 최성용 일종의 진보적인 청년 학생에 대한 상, 이미지, 재현 등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4‧19혁명을 시작으로 90년대 중반까지 진보적인 학생운동이 전체 사회운동을 주도해왔다는 서사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운동에서도 진보적인 청년, 학생을 호명하며 그 이미지를 활용, 소비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페미니즘의 위대한 역설』을 쓴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조앤 월라치 스콧이 여성 범주를 다룬 방식이 청년 범주에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청년은 스스로가 아닌 외부에서 호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하면서 그 범주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평화나비 내에서 그런 분들을 많이 봤어요. 처음에는 청년 학생 이미지에 갇혀 있었지만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면서 자기 고민을 해나가고 서사를 변주시키며 고정된 상으로부터 멀리 나아갔죠. 청년에 대한 호명 방식과 담론을 깨뜨리기 위해선 개인의 다양한 서사가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해요. 동시에 그 개인들도 청년 범주를 대할 때 나에게 도움이 될 땐 취하기도 하고 혹은 부정하기도 하는 부단한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Q. 석사논문 『일본군‘위안부’피해와 피해자의 의미: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위헌소송을 중심으로』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문제화하는 방식을 다시 물으면서 이것을 페미니스트 이행기 정의 관점에서 풀어내셨습니다. 기존의 문제의식에서 미끄러지고 누락된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특히 위헌소송을 살펴보겠다고 결심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재임 ‘위안부’ 문제를 두고 굉장히 많은 싸움이 일어나잖아요. 그것은 일본 정부를 향하기도 하고, 한국 정부를 향하기도 하죠. 램지어처럼 학술적 연구라는 외피를 쓰고 운동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고요. 그런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보다는 분석적인 거리를 두고 각각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담론들의 모순이나 긴장을 발견하는 것이 논문의 취지였어요. 위헌소송에서 생산된 문서들을 봤던 이유는, 피청구인인 외교부 측과 청구인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운동 측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국익, 정치적 해결, 동북아 안보 등을 두고 싸우는 장이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 전시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 회복이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조치로 빠지게 되는 것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운동이 가진 여러 측면 중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건 그것이 여성평화운동으로서 한일 외교관계를 적극적 평화와 여성 인권을 중심으로 재구축해가려고 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운동의 피해자 정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잖아요. 운동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피해자로 만듦으로써 그들의 행위성을 빼앗고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해 피해 발화를 반복하게 만들었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이 있었는데요, 저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어요. 여느 페미니즘 운동이 그러했듯 남성중심적인 법체계와 섹슈얼리티 규범하에서 무엇이 피해(자)인지 정의하는 과정도 굉장히 지난한 투쟁이었단 말이죠. 운동이, 그리고 함께해 온 우리가 피해자들의 고통과 원한, 슬픔을 말하면서 의도했던 것은 이들을 피해자로 고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변혁해나가기 위한 것이었는데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위안부’ 운동을 페미니스트 이행기 정의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이미 선행 연구에서 많이 이야기된 지점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생활지원법안부터 헌법재판소 조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법 문서를 상세하게 분석하셨습니다. 이 자료들 사이에서 ‘피해’와 ‘피해자’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어떤 고민들이 있었을까요? 이재임 물론 법정에서의 싸움에는 그것이 갖는 한계가 있어요. 청구인은 개인이고 위헌소송은 피해자 개인의 권리 회복을 위해 제기됐던 것이니 개인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는 쉬운 비판을 할 수도 있는데, 어찌 됐든 법정의 언어들을 보며 읽으려고 했던 것은 두터운 맥락이에요. 전시 성노예제 담론, 국제 인권법 담론을 통해 피해자들이 구제와 배상의 주체인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부작위를 묻는 위헌소송이 열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요구에 따라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정부가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때 했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요. 그래서 그런 언어와 두터운 맥락들을 읽어내고 싶었어요. 그것이 작업의 최우선이었습니다. 논문에서 몇 가지 말씀드리면, 먼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냈던 청원서를 보면 스스로를 ‘우리’라는 표현으로 지칭하고 계세요. 김학순 님을 이어 나온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언의 집합성, 연속성을 읽었어요. 그리고 논문에 일본군‘위안부’지원법의 변화를 정리하며 표를 만든 게 있는데요, 초반에는 법 목적을 인도주의적인 보호, 지원 조치로 명시했던 것을 2000년대 이후에는 ‘피해자’의 명예 회복, 진상규명, 인권회복으로 명시했어요. 이처럼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읽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피해자의 고통과 부정의를 이야기하고 사회 공동체를 재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되묻고 싶습니다.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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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한반도 평화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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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맥락에서 평화를 ‘여성’이라는 열쇠 말로 읽어낼 때 크게 두 관점이 교차된다. 하나는 평화 구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를 강조하는 현실적 입장과 다른 하나는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평화적 상태는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며 여성주의적 평화 담론에 천착하려는 시각이다. 예컨대 한반도 평화와 여성의 ‘역할’을 질문할 경우에는 안보 의제나 평화 구축 과정이 남성 행위자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여성 참여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 도출하고자 한다. 반면에 여성주의적 평화를 강조할 경우에는 한반도의 반평화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가부장성과 위계 서열 등을 문제시하면서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평화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밝혀내는 것에 논의의 무게 중심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두 관점을 굳이 구분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여성의 참여와 여성주의적 평화 구성이라는 두 축이 단계적이 아닌 동시적으로 상호 연관성의 맥락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녹록하지 않은 한반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평화 구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 증진을 강조해 온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과연 여성주의적 평화를 탐색하는 데도 비등하게 역량을 모아 왔는지 성찰적으로 반성해보자는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두터운 담론과 토론이 부재한 까닭에 여성 참여를 넘어서는 여성 평화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져보자는 뜻이다. 먼저 두 입장의 차이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선 여성 참여를 강조하는 입장은 반평화 상태에서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는 여성이 평화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식민과 전쟁, 거기에 이어진 분단체제까지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인 한반도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을 역사화하고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와 구호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지하듯 2000년에 발표된 유엔 안보리의 ‘여성, 평화와 안보를 위한 결의안 1325호’가 이러한 시각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유엔 1325호 결의안은 예방, 보호, 참여, 구호와 재건 등 네 가지 핵심 영역 아래 전쟁이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여성 인권 침해는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평화 구축 및 재건의 모든 과정에서 성인지 주류화를 강조한다. 또한 평화와 안보 의제에서 여성의 참여를 강조하고,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향상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최근 결의안에서는 ‘전쟁’을 군사적 분쟁으로만 협소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나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극단주의와 테러리즘과 같은 ‘전쟁과 같은’ 상황으로 확장한다. 안보 문제는 이제는 국가 수준에서 발생하는 국가 간의 전쟁에서 지구적 수준의 위기와 일상의 폭력 등과 결합하여 더욱 복잡하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에 평화도 국가 중심의 전통 안보 영역 밖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문제에 적극 조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유엔 1325호 결의안과 이후 후속 결의안은 안보 문제의 영역이 복잡해지고 있음을 문제시하면서 여성이 마주하고 있는 다층적 현실을 성주류화를 통해 타개하여 평화에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국제적 조류에 따라 한국 여성계는 한반도 안보와 평화 의제에서 지속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요구해왔다. 남북 대화가 본격화되었던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남북 여성 사이의 대화가 이뤄졌으며 이를 통해 정전체제 내에서 남북 여성이 경험하는 불평등이나 가부장성을 문제시하고자 했다. 특히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다른 아시아 피해여성과 함께 북한 여성과의 대화와 연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남북 대화에서 여성의 참여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으며 전통 안보 혹은 경제교류협력이라는 패러다임에서 여성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다뤄져왔다. 이것의 이면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남한 당국자와 시민사회에서 여성 어젠다에 대한 시급성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나 통일의 문제를 국가 수준이나 민족 문제로 접근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끼어들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대화와 교류 상대인 북한 여성들의 경험과 위치가 남한 여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 여성들이 젠더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을 때 북한 여성들은 체제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이를 공감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북한 여성의 위치가 국가와 가정의 책임이라는 이중의 부담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상대적 자율성도 존재했던 까닭이다. 더 큰 문제는 북한 정권의 규율체계나 정치적 레토릭으로부터 독립적인 북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안타깝게도 여성 참여에 기반을 둔 한반도 평화 구축은 남북 모두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이후 남북 사이의 대화와 교류가 멈추게 되자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에 여성의 역할을 찾기란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일본군 성노예, 한국군 ‘위안부’, 그리고 미국군 ‘위안부’와 같은 전쟁 폭력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연대는 지속되었지만 한반도 정전체제 극복과 평화 안착을 위한 남북 여성 사이의 활발한 토론이나 실천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어젠다가 평화 담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여성 참여라는 목표는 평화를 위한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통일이나 평화 담론 지형에 여성주의적 접근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못했다. 국가 수준에서 논의되는 통일, 평화 담론에서 젠더 폭력이나 불평등의 문제가 제한적으로 다뤄져온 까닭에 여성의 위치에서 경험되는 평화의 다층성에 대한 논의도 진전되지 못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정전체제와 군사적 긴장이 지루하게 지속되면서 남한 여성들에게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남한 여성들은 가상 세계를 포함한 일상에서의 성폭력과 위협, 직장이나 학업에서의 성차별이나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성규범 등에 대해서는 반평화적인 문제로 감각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 중이며 이로 인해 여성들의 위치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는 충분히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군사 중심의 ‘안보’ 문제이며, 이에 여성주의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는 패배의식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한반도의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과 위협의 대부분은 정전체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성 중심적 문화와 권력은 정전체제라는 ‘불완전한 국가’를 빌미로 유지되고 있으며, 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권력도 국가 안보라는 틀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다시 말해 분단 문제 극복이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평화에 근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맥락에서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상과 문화의 폭력과 정전체제라는 구조가 결합되어 있는 한반도적 비평화 매커니즘을 밝혀냄으로써 평화의 상을 다층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실상 ‘전쟁이 지속되어 온’ 한반도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은 때로는 직접적인 성폭력과 성착취로 가시화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비가시적인 문화와 관습의 모습으로 여성들의 삶과 의식을 옥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는 단순히 두 국가 사이의 관계 개선 혹은 통일을 의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구축된 사회 전반의 폭력과 위계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 평화 만들기의 과정이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축이 바로 젠더인 것이다. 그만큼 여성주의적 평화란 분단과 일상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젠더 위계를 무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미시적 문제로 분단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동시에 분단이라는 국가 수준의 폭력을 일상과 연관 시켜 사고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남북한 여성들 사이의 유다른 경험을 아우르는 여성주의적 평화 담론도 필요하다. 지난 교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남북 여성들이 현재 위치한 세계는 상당히 다르지만 이들이 여성주의적 평화라는 더 큰 미래를 공유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만들어내는 진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진전될 수 있는 상태를 한반도 평화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위해 더욱 다양한 상상력들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핵과 미사일 같은 안보 영역에서의 평화도 어려운데 여성주의적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다소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단계적으로 평화에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조언도 덧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비전이 부재한 상황에서 현실적 수준에서의 평화 실천이나 평화 운동은 방향을 잃고 표류해왔던 것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남북 간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는 요즘, 모두들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한반도 평화 구축의 근본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현실적 참여와 운동에 분주해 잠시 뒤편으로 미뤄두었던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토론을 이제라도 시작했으면 한다. 앞이 보이지 않을수록 근본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말을 되새겨보도록 하자. 가장 멀어 보여 주저했던 방법이 목표로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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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나는 반성한다 - 피해자 되기, 피해자 되기를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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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청자였던 적이 없다. 미디어에 쏟아져 나오는 피해자의 말을 읽을 때 자주 화가 났다. 누구나 쉽게 미디어에 가해자를 고발하고 피해를 밝힐 수 있는 시대라지만, 피해자가 말을 할 수 있으려면 피해자의 말을 들어주는 청자, 응답하는 청자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성폭력 피해자의 글이나 피해자의 글에 달린 공감과 응원, 가해자를 향해 분노와 처벌을 요구하는 댓글을 읽을 때면 혼란스럽고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지곤 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2차 가해자,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한 명예 남성이라는 비난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정말 가해자의 처지에서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 정작 나는 피해자의 서사를 읽으면서 매번 내가 겪은 폭력의 경험을 고스란히 떠올리는데? 매일 되새기지 않는, 조금은 잊힌, 부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을 복기하게 한다고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한 가족, 상사, 동료를 고발하는 이들에게 화가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피해자의 용기를 주저 없이 지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은 감정과 억울한 심정이 얽혀 더 큰 혼란을 만들어냈다.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비판적 지성을 가장했다. 온라인 해시 태그 성폭력 고발과 미투가 이어지는 동안, 새롭게 등장하는 피해자의 글,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비난의 반응을 읽으면서 나는 전복적인 시대에 생겨날 수 있는 윤리적 누수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공동체에서 가해자를 골라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직면한 윤리적 질문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고 중요하지만 시시한 소리를 적지 않게 늘어놓았다. 고발당한 사람이 창작자일 때는 나의 전공과 지식을 동원해서 작품은 작가에게 속한 것이 아니므로 작가를 처벌하더라도 작품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내가 했던 말에는 담론적 근거가 있다. 내가 한 말은 파렴치하지 않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강박적으로 말했다. 미투의 열기 속에서 피해자를 위해 연대하기보다, 미투의 열기에 녹아내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나의 분노와 고통, 회피, 변명, 정당화의 패턴을 관찰하는 일에 매달렸다. 골몰하는 시간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피해자로서 피해자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이미 홀로 직면했던 피해를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발견하는 일은 무엇 때문에 나를 화나게 했을까? 피해자성에 대한 격렬한 부인이라는 말로 이 모든 혼란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여하튼 나는 내가 피해의 경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불안했기 때문에, 부인에 대해서도, 비겁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변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열심히 ‘격동의 역사에 휩쓸리고 마는, 예기치 않게 생겨나는 또 다른 피해자’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피해자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피해자성, 소수자성, 타자성을 지닌 사람들이 맺을 수 있는 연대를 곧바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적어도 SNS를 통해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 고백, 호소가 쏟아져 나오던 첫 번째 시기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강박적 자기변명에 매달리며 피해자에게 제대로 연대하지 못했던 일은 경솔하고 무책임한 일이었지만 그에 대한 자책을 드러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혼란이 묻어있는, ‘아직’ 피해를 스피크 아웃하지 않았거나, ‘영원히’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이미 ‘내면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피해자로서 ‘밖으로’ 말하기를 거부하는 피해자(가 아닌 자)의 목소리에 관하여 쓰고 싶었다. 피해를 스피크 아웃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피해자의 까다로운 변증법을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 피해자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처럼 듣는다는 것은, 나를 대리하여 발화하는 피해자를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에 관해 쓰고 싶었다. 이 역시 피해자로서 말하기의 고유한 모순과 고통이기 때문이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제이 로치, 2020)은 폭스 뉴스 회장을 성폭력 혐의로 고소한 폭스 뉴스 여성 아나운서의 2018년 스피크 아웃을 다룬 영화다. 그의 고소는 간판 아나운서를 포함, 피해를 겪은 동료들의 추가 고소를 끌어냈다. 간판 아나운서(그레천 칼슨)의 첫 번째 고소가 진행되는 사이, 과거 같은 상사의 성폭력을 경험한 또 다른 간판 아나운서(매긴 켈리)는 갈등한다. 매긴 켈리는 단지 피해를 부정하고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모는 타인의 수군거림과 괴롭힘에 대한 염려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다. 스타 아나운서인 그는 고발에 동참하게 될 때 피해자-약자라는 낙인을 얻게 될 것 역시 두려워한다. 다시 말하자면 피해자가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기 위해 다투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타인의 공격, 괴롭힘, 비방만이 아니다. 성폭력은 인격을 훼손하는 폭력이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일, 성폭력 피해자, 나아가 희생자임을 밝히는 일은 존엄의 훼손을 경험했다는 자기 인식, 약자의 위치에 처해있다는 자기 인식을 가질 때 가능하다. 역설적이게도 피해자는 존엄한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존엄의 훼손, 가해자, 상황, 사건, 폭력을 증언해야 한다. 훼손의 입증을 통해 훼손되지 않은 존엄성을 지닌 인간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피해자를 ‘짓밟힌 가녀린 꽃’이라 칭하는 동정의 여론은 피해자를 영원한 약자의 위치에 고정한다. 피해를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상처’로 표현하는 일은 피해자의 존엄을 상처 난 것으로 명명한다. 법의 법정과 공감의 법정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악몽’과 같은 표현을 통해 피해의 심각성과 영구성을 입증하고 강조하는 피해자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법정과 사회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법정과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는 바람직하고 타당한 주장이다. 그래서 피해의 과거, 현재, 미래, 영향과 극복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일의 곤란함이 더욱 커진다. 나치 장교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은 나치의 악마성에 대한 증거와 생존자의 증언이 쏟아졌던 재판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번역, 한길사, 2006)에서 폭로된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증언대에 선 증인의 용기를 치하하는 데 인색했다. 대신 아이히만을 납치해서 재판한 예루살렘 법정의 정당성, 나치 치하 유대인의 순응을 문제 삼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아이히만의 행적을 재검토하며 “악의 상투성”과 “무사유” 등의 표현으로 ‘최종 해결’ 실행자 중 한 사람인 아이히만의 책임을 상대화했던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런데 유대인 사회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격렬하게 비난했던 것은 책에 몇 번 등장하지 않는 “악의 상투성”이라는 문구 때문만은 아니다. 아렌트는 한편으로 아이히만 재판이 “피고에 대해 요구된 형량을 가늠하고 판결을 내리고 적절한 처벌을 내리는” 법의 주된 업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복수의 권리에 대한 요구 만족”을 위해 열렸다고 비판한다. 이때 아렌트는 법의 이름으로 동족 피해자의 고통을 고려하는 일, 공감하는 일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멀리한다. 다른 한편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이 공동체의 가치와 ‘정의’를 위한 재판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피해자의 고통을 다루는 재판으로 축소되면서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유례없는 나치 범죄의 성격을 제대로 다루는 것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은 일반적인 범죄를 다루는 재판과 같은 차원의 재판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돌아보는 일을 정의의 숙제로 삼지 않는다. 유대 사상가 숄렘은 아렌트가 “사려 깊은 방식으로” “유대인의 딸”로서 말하지 않았다고 적은 서한을 보낸다. 아렌트는 책을 펴낸 후 민족을 배반한 유대인, 독일인화된 유대인, 냉혹한 지식인, 감정적으로 가해자를 두둔한 여성으로 비난받았다. 독일인 사상가, 수용소를 경험한 유대인, 미국인 필자 한나 아렌트, 동족의 1/3이 몰살당한 역사적 재난의 가해자와 고통을 호소하는 법정 안팎의 동족 피해자 사이의 아렌트, 개인적이지 않은 것(impersonal)을 주제로 가장 친애하는 여성에 대한 책(<Rahel Varnhagen: The Life of a Jewess>)을 펴낸 아렌트, 연민(pity)과 연대를 구분하려고 애쓰던 아렌트, 아이히만의 법정 방청석에서 재판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카메라를 바라보던 아렌트, 피해를 소비하는 이스라엘의 국가주의와 미디어의 선정성을 목격하고 있는 정치철학자 아렌트가 느꼈을 곤란, 피해자와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아렌트를 상상해본다. 아렌트는 독일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고통과 훼손의 이미지 속에 유대인을 가두기를 거부하지 않았을까? 아렌트가 질문하지 않고 질문했던 바는 피해의 존엄성이 아니었을까? 고통의 겪음(피동)과 고통의 주장(능동), 훼손과 회복의 변증법을 생각하지 않고서 피해자가 된 피해자의 존엄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한꺼번에 약자, 훼손당한 자, 분노의 한가운데 있는 자,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을 거부하는 자, 용기 있는 자,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겪는 특별한 고난이다. 역설적으로 피해자는 한꺼번에 이 모든 존재일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 속에서 특별한 존엄을 갖는다. 유년기 친족 성폭행의 경험을 담은 소설 『근친상간』(L'Inceste, 1999)으로 명성을 얻은 크리스틴 앙고(Christine Angot)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논쟁적인 프랑스 중견작가다. 2017년 그는 한 심야 토크쇼에서 환경 정당 내 성폭력을 고발한 후 펴낸 에세이 『말하기 Parler』를 소개하러 나온 여성 정치인(산드린 루소, Sandrine Rousseau)에게 책의 서사와 주장이 빈곤하다고 지적하고, “여성을 희생자의 지위에 가두려 한다”는 독설을 퍼부어 대중의 격렬한 질타를 받았다. 정치인은 피해자의 스피크 아웃의 치유적 의미를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내놓을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펼쳤을 뿐이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프랑스에 성폭력 경험에 대한 말하기가 전무한 것에 대한 충격” 속에서 책을 썼다고 밝히며, 여성 일반이 (자기 경험을) 말할 수 있는 문화를 위한 교육과 응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작가는 자신이 겪은 강간을 말할 수 있는 이는 각 개인 자신뿐이라며, 여성 일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정치인을 힐난했다. 정치인은 “나는 내가 겪은 것을 썼다, 이것은 틀림없는 내 이야기다”라며 눈물을 터트리고, 방청객은 “나의 강간”을 내뱉으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는 작가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이후 점잖은 매체에는 두 명의 여성, 두 사람의 피해자, 두 가지의 고통, 두 가지 방식의 말하기를 언급하는 글이 실렸지만, 대중의 반응은 텔레비전 토크쇼 현장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해자의 말이 공적 공간에 비로소 쏟아져 나오는 미투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대중에게 작가는 피해자를 다시 공격하는 가해자와 다름없었다. 논쟁적 작가의 또 하나의 미디어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될지 모를 이 장면은 내게 깊은 충격을 안겨줬다. 해소될 수 없는 심리적 난폭함이 두 가지의 피해 경험과 자기 자신의 고통을 목격한 두 사람의 증인, 무대 위와 무대 뒤-작가는 야유가 쏟아지자 녹화 현장을 박차고 일어나 대기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의 두 울음, 그리고 피해자의 말을 듣는 청자, 연민하고, 분노하고, 비난하며 연대하는 청자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제3세계 여성의 진실을 대리 표상하려는 서구 페미니즘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비판하고, 글을 쓴다는 행위와 타자 표상의 밀접한 얽힘에 주목했던 오카 마리라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자기가 겪은 폭력의 경험을 표상할 수 있는 글쓰기의 특권을 가진 작가(크리스틴 앙고)가 자기의 고통을 스스로 발화한 피해자에게 표상의 이름으로-앙고는 피해 경험을 다소 상투적인 묘사와 연상 작업을 빌려 기록하는 루소의 글을 인용하며 “당신의 책에는 이야기가 있을 뿐 아무런 담론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폭력을 휘두른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서구 세계의 두 피해자의 관계를, 말을 빼앗긴 제3세계의 타자와 발화 권력을 지니고 있는 서구인의 관계에 비교할 수 있을까? 연민과 연대를 구분했던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경청했던 오카 마리, 타자의 증언을 듣는 일, 타자의 고통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는 일은 타자가 겪은 사건의 ‘정보’를 전달받는 일이 아니며, 타자의 사건에 대해 철저히 무력한 존재로서 사건을 나눠 갖는 일이라고 썼던 오카 마리, 공감의 말을 찾는 조건은 고통을 겪고 있는 타자와의 동일화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감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카 마리라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새롭게 불어오는 시대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만이 연대와 연민은 구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는 모두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인 것은 아닐까? 이 글에서 나는 피해자 되기에서 겪었던 복잡성과 혼란의 경험을 불러냈다. 의문문이 가득한 글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의 피해 경험 역시 모든 사람의 피해 경험과 ‘다르지 않게’, 나에게 ‘고유하다’. 우리는 선의와 악의를 가지고 타자의 경험을 해석한다. 제도의 언어를 동원하고 ‘모두’의 경험으로 상상하게 한다. 정말 다행스럽고 안타깝게도. 나는 아마도 근대적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표상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개인, 자신의 주장을 밝힐 지식과 언어를 배운 사람, 입은 피해를 다시 읽는 사람, 쓰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인식한다고 가정된 근대적 주체의 분열을 두려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웠고 질문을 멈추지 못했던 것인지, 그런데도 답을 구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함에 관하여 쓰는 것도 스피크 아웃의 역할일 테니까, 피해자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것일 테니까 나는 써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