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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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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제작한 <黎明之眼(여명의 눈동자)>(呂小龍, 2014)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일본군에 연행되어 ‘위안부’가 된 여성 기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영화이지만,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에 접근하는 방법에 주목해보자. 영화는 할머니가 된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역사관 전시를 둘러보다 쓰러지는 데서 시작한다. 그녀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비춘다. 그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객은 그녀가 왜 전시관에서 충격을 받았는지 납득하게 된다. 이때 영화가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그녀의 회고도 아니고, 역사관에 전시된 기록물도 아니다. 영화는 피해생존자의 ‘뇌’를 스캔함으로써 과거를 보여준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생존자는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게 되는데, 가족들은 그녀가 회고록을 쓰는 걸 꺼려 한다. 그녀는 역사의 증인이 되고자 가족을 떠나지만, 정신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에서는 과거를 드러내는 두 가지의 방법이 제시된다. 하나가 뇌를 스캔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언어로 과거를 진술한 회고록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회고록은 출간되지 못한다. 대신 영화는 플래시백 지점에서 뇌 스캔 데이터 영상과 과거의 장면을 직접 연결한다. 요컨대 관객들은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뇌를 ‘본’ 셈이다. 이러한 설정 탓에 영화 속 피해생존자는 다소 괴기스럽기까지 한 복잡한 기구를 머리에 쓰고 뇌 검사를 받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피해자의 뇌를 열어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의도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실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역사 왜곡의 문제가 제기된다. 결국 영화의 의도는 줄곧 공격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의 진술이 아니라, 피해자가 실제 경험한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 더 문제는 ‘사실 입증’의 강박이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차단해버린다는 점이다. ‘원본성’에 대한 강조는 당사자성을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실제로는 피해자의 주체성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나아가 증언자와 청취자의 상호 소통과 대화의 여지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증언을 상상하는 방식은 이것과 얼마나 거리가 있을까. 현재 일본군‘위안부’ 증언 문제는 곤경에 처해 있는 듯하다. 역사 왜곡과 증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령인 증언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위기감까지 겹친 것이다.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요원한데, ‘증언(자) 부재’의 시대는 임박하게 다가와 있다. 이는 피해생존자가 한 분이라도 더 계실 때 증언을 아카이빙 해야 한다는 다급함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피해생존자를 AI로 구현한 <영원한 증언>이라는 콘텐츠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노골적인 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생존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령화”[1]가 콘텐츠 개발을 촉발했다는 데서 오늘날 증언이 당면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이 연구가 기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한 증언>은 미리 추출된 질문지를 통해 시나리오를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청취자가 증언자의 형상을 한 AI에게 질문하여 ‘대화형 증언(Interactive Testimony)’을 청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콘텐츠 개발에서 특히 공들인 부분은 증언자의 ‘현존감(presence)’인 듯하다. 기획 의도에서 청취자가 지금 여기에서 피해생존자 당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실감이 전달될 때, ‘사실 효과’를 배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강하게 묻어난다. 물론 당사자의 증언은 존중되어 마땅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원본성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증언을 편협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원한 증언>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증언자의 현존감을 구현하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재현된 증언자에게서는 오직 ‘피해자’의 면모만이 부각되기 쉽다. 증언 연구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위안부’ 피해가 과거의 경험에 한정되지 않으며, 동시에 전 생애가 피해자성으로만 점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지털 증언에 관한 학술대회에서 한 토론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와의 ‘만남’이 피해사실에 대한 청취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2] 피해사실을 거듭 말하는 AI를 구현하겠다는 발상은 증언을 세련되게 ‘화석화’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로 왜소하게 구현된 증언자를 증언자의 전체적 면모라고 착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대화’라는 착시효과다. <영원한 증언>은 사전에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AI가 청취자와 대화를 하는 형태다. 따라서 “증언자의 데이터가 질문자의 질문 데이터와 매칭이 되지 않는, 이른바 비유효 질문들(Fallback-questions)이 발생”하는 경우가 문제가 되는데, 이때에는 “자연스럽게 이미 데이터베이스화해둔 일반적인 증언자의 발화내용으로 자동 매칭되는 방법을 구사”[3]하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물론 AI 기술은 발전 중에 있는 것이므로, 기술 진보에 따라 새로운 방법이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대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대화는 서로가 한 번씩 돌아가며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2000년 이후 학계는 증언이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간의 공동 작업이며, 생존자의 기억이란 그를 둘러싼 사회의 사고방식과 규범 속에서 다각도로 영향을 받는 와중에 생산되는 것[4]이라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곧, 증언이 증언자와 청취자 사이의 ‘대화’라고 할 때, 이때 대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로써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매체로 구현하고자 하는 증언이 청취자를 대화참여자, 다시 말해 ‘증언참여자’로 이끄는 ‘대화’로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증언(자) 부재’의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다른 한편 새로운 매체 기술에 힘입어 증언 아카이빙을 서두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증언자를 디지털 매체로 구현하여 영속하게 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그런데 ‘영원한 증언’은 이렇게밖에 달성될 수 없는 것일까. 증언집 4권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에 참여한 조사자들은 증언자의 ‘침묵’까지 들으려고 노력하면서 “점차 ‘증인’이 되어갔다”고 한다. 침묵을 듣는다는 것은 “왜 그때 증인이 침묵했었을까에 대한 면접자의 ‘이해’가 요청되는 차원의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이미 증인과 면접자의 상호 주관성이 만들어지고 표출”된다는 것이다. 증언이 조사자와 증언자의 공동 생산물이라면, 조사자가 “점차 ‘증인’이 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5] 이러한 사례를 참조하자면, ‘영원한 증언’은 증언자를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 그야말로 ‘오지 않은(未來)’ 증인을 초대함으로써도 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위안부’ 증언 연구는 사실성의 잣대로 증언을 검증하려는 실증주의와 모든 진실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상대주의적 진실관 양쪽 모두를 지양하면서, 법적 진실을 초과하는 증언의 진실을 탐구해 왔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증언에 접근한다고 해서 이러한 고민의 결과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간의 연구 성과를 되돌려 다시 시작하기엔, 우리에겐 정말 시간이 없다. 각주 ^ 김상용, 「AI기반 실감형 인터랙티브 콘텐츠, <영원한 증언>-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의 인터랙티브 콘텐츠 제작을 통해 본 ‘증언의 현재성(The present of testimony)’ 고찰」, 『디지털콘텐츠학회논문지』, 2021, 1816쪽. 이하 <영원한 증언> 콘텐츠에 관한 설명은 위의 논문을 참조한 것이다. ^ 이는 2022년 7월 29일 열렸던 <다차원의 증언을 만난다는 것> 학술워크숍의 토론자 후루하시 아야의 발언이다. 이외에도 학술워크숍에서는 중요한 논점이 제기되었기에 간략하게 밝혀 둔다. 임경화는 <영원한 증언>이 모델로 삼은 쇼아 재단의 ‘증언의 다차원성(Dimensions in Testimony)’ 프로젝트를 참조하면서, 증언 수집에 있어 ‘피해자’들 사이의 국경을 넘고 ‘피해자’와 ‘해방 주체’의 경계선을 넘으려는 다차원적 시도가 필요함을 지적하였고, 박소현은 증언을 전시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발표하면서 ‘위안부’ 할머니와의 대화가 무엇을 공론화하기 위한 것인지, 어떻게 ‘다른 목소리들’과 연대하며 증언을 ‘현재화’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더불어 역사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 희생자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할 뿐 아니라, 퇴역군인들의 증언 등을 통해 폭력 시스템을 밝힐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 장수희는 윤리적 목적을 내세우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외설적으로 소비했던 대중소설들을 제시하면서, 정의감만으로 증언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길 주문했다. 나아가 손쉽게 청취할 수 있는 증언이 ‘증언 서비스’로 가볍게 소비됨으로써 본래의 의도를 배반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학술워크숍에서 제출된 논점들은 앞으로 증언 아카이빙 방법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김상용, 앞의 글, 1819쪽. ^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 「증언과 역사쓰기-한국인 “군 위안부”의 주체성 재현」, 『사회와역사』, 2001.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신대연구회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한울, 200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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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다큐멘터리 〈코코순이〉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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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코코순이〉(2022)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미얀마(옛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가운데 한 명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를 심문해 기록으로 남긴 한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코코순이〉는 또 끝내 찾지 못한 나머지 19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기리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들 ‘위안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사실이 왜곡되고 조작됐는지, 또 그런 보고서가 어떻게 악용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당시 연합군 측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일본계 미군 병사들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들을 심문했고, 심문과 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던 미국 전쟁정보국(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OWI) 심리전팀은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코코순이〉는 그 보고서에 작성된 20명의 ‘위안부’ 명단 가운데 KOKO SUNYI로 기재돼있는 한 여성이 실제로 누구인지 찾아내고, 그 보고서가 무슨 이유로 엉터리로 작성되게 됐는지, 또 그 보고서 내용이 어떻게 일본 극우세력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됐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그해 4월 국사편찬위원회 내 한시적인 조직이었던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으로부터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8호와 49호, 그리고 관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저는 KBS 보도본부의 시사다큐 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에서 취재와 제작을 담당하는 기자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의 황병주 편사연구관, 김득중 편사연구관과 함께 3개월에 걸친 취재에 나섰고, 그해 8·15 광복절 특집 ‘위안부’ 2부작 ‘전쟁범죄’와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두 편을 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만도 ‘위안부’와 관련한 각종 증거 자료와 사료 등을 확인하기 위해 6개 나라를 방문하는 등 광범위한 취재를 진행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았고 편집 등 후반작업 과정에서도 많은 아쉬움이 남아있었습니다. 제작자들이 흔히 표현하는 ‘아이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특히 아쉬웠던 점은 그 당시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제적부를 통해 찾은 ‘박순이’라는 할머니가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기록돼있는 코코순이(KOKO SUNYI)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정도까지만 확인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극우단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텍사스 대디’라는 미국인을 직접 인터뷰하지 못했다는 점도 끝내 아쉬웠습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매춘부로 비하하는 일본 극우단체들과 텍사스 대디의 연관성을 정황 정도로만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8년 8월 15일과 21일 KBS 1TV를 통해 2부작 방송이 나간 뒤 제 나름대로 세웠던 계획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내용들을 확인하고 또 당시 진행했던 각종 인터뷰와 자료 등을 묶어 책으로 내는 것이었습니다. 현업에 치이면서 2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2020년 5월 우연히 지인을 통해 KBS미디어의 독립영화 제작 담당인 김형진 PD님을 소개받으면서 갑자기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으로 계획이 급선회했습니다. 〈시사기획 창〉을 통해 2부작으로 방송했던 내용을 다큐 영화로 재제작하기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제가 나름대로 마련한 전제 조건이 몇 개 있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와 코코순이의 연결고리가 직접 관련이 있는 당사자를 통해 확인돼야 하며, 텍사스 대디를 직접 인터뷰함으로써 일본 극우단체들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확인해야 재제작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코코순이를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 심문 관련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아쿠네 겐지로에 대한 추가 인터뷰가 꼭 성사되어야 했습니다. 90대 중반의 아쿠네 겐지로는 전쟁 당시 심문관으로 참전해 미얀마 미치나에서 코코순이를 비롯한 ‘위안부’ 20명을 목격하고 실제로 그들과 대화를 나눴던, 그리고 그 ‘위안부’들이 생포됐을 당시 함께 붙잡힌 평양 출신의 간호사 김 씨를 직접 심문하기도 했던, 이 다큐 영화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2020년 10월 본격적인 영화 제작이 시작됐지만, 곧바로 벽에 부딪혔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의 주변 인물을 찾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박순이 할머니 주변 인물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으로 기록된 1946년생의 한 남성이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영면에 드실 때 그 곁을 지켰고,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도 직접 했던 것으로 확인된 70대 남성으로, 이름은 박원학 씨였습니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저는 박원학이라는 인물은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스위스 적십자사의 문서보관소에서 20명의 조선인 여성들과 어린 아이 등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파키스탄의 카라치항에 대기하고 있다는 문서를 발굴한 바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이듬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남아시아에는 조선인이 매우 드물었고,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됐던 코코순이 등 20명의 ‘위안부’들이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의 비카너 수용소에 수용됐다는 연합군 측 보고서 내용까지 확인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라치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20명의 젊은 여성들이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붙잡혔던 바로 그 조선인 ‘위안부’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습니다. 저는 당시까지 확인된 모든 정황과 기록을 토대로 박원학 씨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던 어린이 가운데 한 명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박순이 할머니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은 경상북도 영천시 동부동사무소였습니다. 2008년 박순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사망신고서가 접수됐던 곳입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각종 정보가 있는 곳이었지만, 동사무소 관계자들은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사실관계 확인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또 2018년 취재 당시 제적부에서 박순이라는 존재를 함께 찾았던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민원과 관계자 역시 현업에서 떠난 상황이어서 협조가 불가능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노년에 살았던 함양 인근 노인정과 노인복지센터까지 일일이 뒤지면서 박원학 씨의 흔적을 찾는 지난한 작업이 계속되던 중 결정적인 단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함양읍 행정복지센터에서 촬영했던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살피던 중 센터 측 컴퓨터 화면이 찍힌 영상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취재진은 박원학 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박원학 씨의 친척과 지인 등을 통해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를 만나게 되면서 박원학 씨가 박 할머니의 사위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손자를 통해 박 할머니의 둘째 딸을 만나면서 코코순이와 박 할머니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모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의혹의 인물 텍사스 대디를 만나는 것은 박 할머니 가족들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인터뷰 섭외 과정부터 난항이었습니다. 텍사스 대디라는 인물은 매우 조심스럽게 선별적으로 외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는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겁니다. 이에 제작진은 미국 현지의 한 영상 제작업체 이름을 빌려 그 업체 이름으로 다시 인터뷰 요청을 시도했습니다. 인터뷰 내용도 미국 내 보수주의 유튜버들의 활동이라고 밝히는 이른바 ‘언더커버’ 전략을 썼습니다. 결국 텍사스 대디와의 인터뷰 도중에 ‘위안부’ 이슈에 대한 질문이 본래 목적이었음을 밝혔고, 잠깐 동안의 반발은 있었지만 텍사스 대디 역시 예정된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면서 큰 문제 없이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 사이에서 텍사스 대디라는 애칭으로 통했던 토니 모라노 씨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모두 틀린 내용을 왜 그렇게 집요하게 주장해왔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이 다큐 영화를 제작하면서 세 가지가 가장 아쉬웠습니다. 첫 번째로, 아쿠네 겐지로와의 추가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쿠네 겐지로는 2018년 첫 인터뷰 당시에도 여러 차례 인터뷰 장소를 바꾸고 시간도 변경하는 등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공영방송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을 하자 인터뷰 내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이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둘째 날 인터뷰 일정은 본인이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당시 아쿠네 겐지로는 ‘위안부’가 찍혀있는 사진에서 한 여성을 가리키면서 그 여성이 특히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제작진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쿠네는 ‘위안부’ 20명을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한 한 여성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심문 과정에서의 언어 문제, 의사소통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인터뷰가 잡혀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봤을 때 그 판단은 실수였습니다. 2021년 제주도와 미국 뉴저지에서 각각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와 둘째 딸을 만났을 때 비로소 아쿠네가 가리킨 여성이 코코순이 즉 박순이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아쿠네 겐지로를 다시 만나고 싶었고, 다시 만나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코코순이를 지목해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쿠네는 끝내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아쿠네와 코코순이의 스토리는 다시 어둠 속에 갇혔습니다. 두 번째는 중국 내몽골의 한 마을을 직접 취재하지 못한 점입니다. 해당 마을은 박순이 할머니가 60년 동안 살았던 조선인 집단 거주마을입니다. 박 할머니의 둘째 딸에 따르면 그 마을에는 또래 할머니들이 한평생 자매처럼 지냈다고 했는데 이름도 없이 모두 대구댁, 진주댁 등으로만 불렸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모두 어디에선가로부터 그 집단 거주마을로 이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도 제작진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직접 방문해 그 또래 친구 할머니들에 대한 취재도 같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본군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적혀있는 ‘위안부’ 20명의 주소를 보면 대구와 진주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진주 출신은 4명으로 기억합니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적부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으로 타겟을 정한 곳도 진주였습니다. 하지만 진주시청이 6·25 당시 폭격으로 화재가 발생하면서 제적부가 대부분 소실됐다는 얘기를 듣고 함양으로 선회한 바 있습니다. 중국 내몽골 현지 취재를 추진하던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대유행이던 때였고,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중국 입국 과정에서 무려 3주일의 격리,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2주일의 격리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여러 촬영 장비를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는 것도 당시로서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이 외국인들의 국내 취재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중국 현지 취재는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미얀마 미치나에 대한 재촬영 불발이었습니다. 제작진은 이미 2018년 ‘위안부’ 2부작 취재·제작 당시 미얀마 미치나에 있는 조선인 위안소를 최초로 발굴한 바 있었습니다만 〈코코순이〉 재제작을 위해서는 당시 취재의 허점을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부족한 영상에 대한 보충 촬영과 조선인 ‘위안부’를 목격한 현지 주민의 추가 인터뷰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돼 미얀마 대사관을 통해 정식 입국 절차를 밟았고, 그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미얀마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승인 소식을 기다리던 2021년 2월 1일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였습니다. 결국 미얀마 미치나의 위안소 관련 분량은 대폭 조정됐고, 애니메이션과 각종 하이라이트 효과, 문서 CG 등으로 모자라는 영상과 부족했던 설명을 대체하게 됐습니다. 〈코코순이〉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간단명료합니다. 70여 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역사 왜곡을 조금이라도 더 논리적으로 반박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대사의 비극을 아프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진은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모든 행적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중에 단 한 분, 코코순이로 기록돼있는, 경남 함양 출신의 박순이라는 분이 일제 강점기 경성지역에서 유흥업을 하던 일본인 위안소 업주의 농간에 속아 미얀마로 끌려갔다가 일본군과 함께 포로로 붙잡히고, 미군이 주도하는 심문을 거친 뒤 다시 미치나를 떠나 인도와 싱가포르를 거쳐서 중국 내몽골 지역의 한 외딴 마을에서 살다가 결국 2004년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고 4년 뒤 영면에 드셨다는 것만이 확인됐을 뿐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500개가 넘는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습니다. 일본 정부나 군부가 직접 운영한 위안소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한 위안소를 모두 합친 숫자입니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와 인도에까지 설치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그곳으로 끌려간 ‘위안부’ 숫자만도 많게는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곳을 거쳐 갔던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영화 제일 마지막에 국사편찬위원회 황병주 편사연구관의 인터뷰 내용을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당시에 동남아시아나 중국, 남태평양 등에 수백 개소의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게 확인이 되고 있죠. 거기에 끌려가신 ‘위안부’ 숫자도 많게는 20만 명까지 보는 분들도 있을 정도로 대단히 많은 분들이 끌려가서 고생하셨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이분들의 삶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 우리는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건지 귀국은 하신 건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인 거죠. 이분들의 삶을 한 분이라도 더 확인해서 널리 알려서 같이 공유하는 게 현재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중요한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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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그 삶에 대한 축복의 이야기 - 일인극 〈캐러멜〉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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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극 〈캐러멜〉은 2018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간 작품이다. 처음에는 2인극으로 시작해 그해 4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시민집회 ‘지금 일본군성노예문제를 마주한다 - 피해자의 목소리X아트(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성차별철폐부회 주최)’에서 첫 공연을 올렸다. 그 후 우리 극단은 이 작품을 일인극으로 재편하여 2019년부터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본격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했고, 일본 각 지방을 비롯해 한국에서는 서울·부산·광주·청주·제주도에서 공연해왔다. 현재 진행중인 일인극 〈캐러멜〉은 벌써 25번째를 맞는다. 이 작품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에서 살아남아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 동포 1세의 존엄을 그린 일인극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조한 픽션이지만, 할머니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관객들과 함께하는 ‘귀향’ 이야기로 삼고자 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는 가운데, 이 억울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짓밟힌 존엄에 어떻게 빛을 비출 수 있을지, 무엇에 희망을 갖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시 강제로 ‘위안부’가 된 조선 소녀들은 10만~2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그 가운데 정부에 등록하신 분은 고작 240명이라 한다. 피해자는 그 수를 여전히 헤아릴 수 없으며, 그중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숨죽여 살아온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남몰래 울고 계시던 분이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아프고 외롭고 억울하셨을까. 얼마나 고향으로 가고 싶으셨을까. 그분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을까. 그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질문들을 기반으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를 숨긴 채 세상 한 귀퉁이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갈등을 비롯해 할머니와 더불어 살아온 재일 동포들의 유머와 인정을 그려내고자 했다. 동네 사람들은 삶의 힘이 넘쳐났고, 할머니와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특히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조선학교 고등학생과 할머니의 만남에는 편견과 차별에 굴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다짐과 희망을 담았다. 그리고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의 구석 그늘에서 살아가시던 할머니를 세상 가운데에 두고 빛을 비춰드리고자 했다. 연극이라는 행위로 웃음과 눈물이 넘치는 무대에서 할머니들의 통한을 관객들과 함께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러한 고민 끝에 작품을 감히 희극으로 만들게 되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3학년인 강령미의 등굣길에는 김숙기 할머니와 홍옥순 할머니의 집이 있다. 두 할머니는 전쟁 때 캐러멜 하나에 속아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그 과거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옥순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령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자 옥순은 숨을 거둬버린다. 남은 숙기는 옥순이 타던 자전거를 상여 삼아 장례식을 치른다. 그 곁에서 령미가 할머니들을 도와준다. 숙기는 옥순의 마지막 길인 만큼 원하는 대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죽은 옥순이 어린 시절에 입었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선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 우리 그때처럼 웃으면서 선물을 갖고 돌아가자.” 살아서 가지 못했던 고향을 죽어서야 가게 되는 것이다. 배울 기회 한번 없이 애오라지 과거를 숨기며 악착같이 살아온 옥순은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 애써 외면해왔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잔혹한 고통에 시달리며 고독함을 견뎌온 할머니에게 삶의 존엄이란 무엇이었는지 곱씹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큰 테마다. 령미는 학교 선배에게 얻은 교복을 할머니들에게 드린다. 령미가 다니는 조선학교 교복이 마침 옥순과 숙기가 어린 시절에 입었던 치마저고리 옷차림과 비슷하게 보여서 그걸 입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령미가 옥순에게는 아주 눈부시게 비쳤던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옛날 조선에서는 여자가 자전거를 타면 상스럽다고 해서 남자들만 자전거를 탈 수 있었고, 할머니들도 그런 줄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가 묻은 오랜 관념을 깨고 싶었다. 매일같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는 맑은 령미의 모습을 보면서 힘겨운 삶을 버텨낸 두 할머니의 마음이 소녀처럼 신나게 뛰었다. 옥순이 비로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날 얼마나 시원했을까. 숙기가 상여로 삼은 옥순의 자전거에는 수많은 흰 꽃과 함께 ‘실버 드림’이라고 쓰인 깃발이 휘날렸다. 둘은 함께 큰 소리로 “우리는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친다. 령미는 그것이 할머니의 레볼루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도 따라가겠다고 외친다. 그 외침이 바로 무대에서 전하고자 하는 할머니의 삶에 대한 축복이다. 한국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관한 연극이 여러 작품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내 작품은 장례식을 치르며 인간의 존엄과 삶에 대한 축복을 곱씹게 한다. 피해자의 아픈 혼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들과 함께 위로하고 한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담았다. 매번 공연장에 모여주시는 많은 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나비를 날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면서 다음 세대에 바통을 이어 가고자 했다. 앞으로 언젠가, 어딘가에서 봐주실 분들이 함께 웃고 울면서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롭게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같이 풀어주셨으면 한다. 나는 그저 영혼들의 아픔과 기쁨을 안고 춤을 춘다. 극단 돌은 2004년에 창립해 일본 시가현을 거점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전국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은 거의 일인극이고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재일 동포의 100년 역사를 그린 〈자이니치 바이탈 체크〉가 있다. 이번에 〈캐러멜〉을 만들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연극 활동을 한 지 이제 거의 30년 가까이 되지만, 연극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는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제작 제안을 받았을 때 적당한 시기에 나에게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은 너무 어려도, 너무 늙어도 못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작품은 아주 어려운 작품이다. 그러나 그만큼 깨닫는 것도 많고 공부가 되는 것도 많았다. 순회공연을 진행하면서 문제가 생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작품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하기 전부터 언젠가 사람들은 나를 희극 배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희극 배우인 것이 참 좋았다. 아픔이나 슬픔을 무대에 올릴 때 그만큼 웃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극단 활동이 앞으로 계속 새로운 만남을 만들고, 서로를 편하게 만드는 맛있는 밥이 되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맛있게 밥 먹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위로가 된다며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웃으시는 듯하다. 나에게 들리는 말 “밥 먹었나.”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들이 자주 하시던 인사말이었다. 조국에서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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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누가 이미지를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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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도쿄에서 12월 8일에 열릴 ‘여성국제법정’을 앞두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병원 진료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한 적이 있었다. 수십여 명의 할머니들이 인천의 한 병원에서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산부인과, 내과, 외과, 정신과를 돌며 종합 진찰을 받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었는데, 영상이 모의법정에서 ‘증거물’로 채택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는데,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직접 듣게 될 증언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지 고민하며 영화패 후배들과 병원에 도착했다. 그전까지 피해자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증언이라는 것이 인스턴트 음식처럼 질문과 동시에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쯤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카오스가 펼쳐졌고 나는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병원에서 할머니들은 차례로 산부인과 진료 의자에 누워 의사들에게 몸을 맡긴 채 하복부나 생식기와 관련한 상처들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상처가 생긴 시기와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할머니들은 엉뚱한 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테면 “할머니 이건 ‘위안부’ 시절에 생긴 상처예요?”라고 의사가 물으면 갑자기 ‘나이 많은 영감에게 시집간 스토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식이었다. 남편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얼마나 자상했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도, 결국 할머니의 남편은 몸에 남겨진 상처와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 나중에 정신과로 옮겨 생애구술사를 받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몸속 상처들은 ‘위안부’ 시절 얻게 된 것이었지만, 해방 후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감(남편)이 자신을 받아주고 죽을 때까지 잘해줬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산부인과 의사가 몸속 상처에 대해 질문했을 때, 할머니는 그 상처가 생겼던 ‘위안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 상처와 관련해 가장 고마웠던 죽은 남편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날 현장은 이와 같은 구술자와 면담자 사이의 말과 말들이 날아다니는 경연장과 같았고, 나는 카메라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며 피해자의 몸을 열심히 촬영했지만 번번이 어떤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그날 유독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서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 계기나 하루에 몇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는지와 같은 중요한 질문에 긴 침묵을 유지하거나 단어 몇 개로 된 짧은 문장을 내뱉을 뿐이었다. 힘겹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중, 면담자가 해방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했을 때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만주의 한 유곽에 있었는데 어떤 일본 장교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자 그녀도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돈 대신 가지고 있던 비단 치마저고리 아홉 벌을 껴입고 출발했다. 부지런히 귀향 행렬을 따라 걸어갔고, 압록강을 만나자 ‘헤엄쳐’ 건넜으며, 다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걸어 내려오며 아홉 벌의 비단 저고리를 하나씩 팔아 노잣돈으로 썼다고 했다. 그때 나는 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별이 안 되는 이상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고,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이 반짝이며 열정적이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하지만 곧 해방 후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초반에 보여줬던 극히 침울하고 말수가 적은 상태로 돌아갔다. 모든 진료가 끝나고 할머니는 진료대기실로 돌아갔는데, 내 눈에는 유독 그 할머니만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다른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곳과는 떨어진 구석의 의자에 혼자 누워있었다. 혹시 불편한 곳이 없는지 이것저것 살펴드리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다른 할머니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귓속말로 “저 여자는 가짜예요. 우리랑 완전 다른 여자예요. 걸레라고 걸레”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면서 ‘저 할머니는 정부의 지원금을 타 먹으려는 가짜’라는 말을 반복했다. 순간 그분이 사용한 ‘걸레’라는 표현과 ‘가짜’라는 말에 깜짝 놀라 나의 몸도 경직되었다. 그제서야 ‘위안부’라는 경험은, 단지 어느 시공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재에 반복되고 있으며, 피해자 그룹 안에서조차 누가 ‘진짜’ 피해자인지를 두고 ‘구별 짓기’ 한다는 것 자체가 ‘위안부’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아홉 겹의 비단 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들을 기지촌 현장에서도 계속 만나게 되었고, 우리가 ‘증언’으로 부르는 말들이 어떠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이 선택되는지, 도대체 증언과 이미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대체로 그것이 생성된 장소를 떠나 외부로 퍼져나갈 때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수록 이야기는 계속해서 점점 더 좁은 문을 통과하며, 애초의 복잡성을 포함하던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특정한 부분만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버려지며, 또 남아있는 요소들이 재구성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체로 그 이야기를 최초로 ’만들거나’ ‘전달한’ 사람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어떤 원형을 남기고 끊임없이 변형, 대체되면서 ‘현재’적 시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 간다. 만약 어떤 이야기가 ‘현재’로 계속 소환되어 유통되지 못하면 그 이야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즉 ‘이야기할 거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거나, 기록이라는 형태로 아카이브 센터라는 ‘무덤’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진적 이미지와 영상들은 애초에 그것들이 생성된 장소(scene)와 관계를 갖지만, 결정적으로 ‘찍혀지는 순간에’ 의미가 생성된다. 그리고 애초에 그것을 촬영한 사람(대체로 찍혀진 이미지 속에는 보이지 않는다)의 어떤 ‘의도’가 부여되기는 하지만, 이미지의 도상적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는 원래의 의도와 별개로 계속해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수용, 선택, 변형의 과정을 거친다. 92년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살해당한 ‘윤금이’의 사진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에 의하면, ‘윤금이’가 살해당한 현장 사진의 공개는 공대위[1]에서 결정되었다. 공개 여부를 두고 찬반이 갈렸지만 “이 사건은 말로 설명해서는 공감할 수 없으며” 결국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데 사진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공개하자는 입장 안에서도 고인이 여자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어떤 성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킬까 봐” 우려했는데, 남성 운동가들에게 “여성의 벗은 몸, 살해당한 몸은 민족의 상처, 수치였기 때문”이라고 정희진은 적고 있다. ‘윤금이’ 사건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기지촌에서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윤금이’ 사건만큼 사회적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시에 윤금이 시신은 ‘사진’으로 우리가 본 것이지, 그 사진이 만들어진 장소(scene)에서 본 것은 아니라는 점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사진이 도상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벌거벗은 채 바닥에 누워 죽어있는 여성이며, 신체에 가해진 여러 흔적들은 그가 잔인한 폭력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높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미지가 가리키는 현실의 지표-이 여성은 누구인지, 왜 살해당했는지-에 대해 사진이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으므로 우리는 프레임 밖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진 속 여성은 ‘윤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시신 사진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의미’를 획득해 나갔다. 그녀는 불합리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때문에 미국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 태어난 불행한 여성이 되었고, 따라서 이 살인사건은 ‘우리 민족’의 문제가 되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히빠리’(편집자 주: 일본어로 ‘잡아당기다’라는 말. 호객행위를 뜻하기도 하며, 업소에 소속되지 않은 기지촌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꽃과 성판매를 하던 행위를 뜻하기도 함)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비천한 성매매 여성은 별안간 ‘순결한 우리 민족의 누이’가 되었다. 하지만 사진의 공개와 함께 만들어진 대중 캐치프레이즈들은 당시 ‘윤금이’를 민족의 일원으로 확장할지언정 ‘기지촌’이라는 장소를 제거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시민운동가와 여성 운동가들이 사건이 발생한 장소인 동두천에서 시위를 이어갔으며, 언론에서는 끊임없이 사진이 생산된 ‘장소’인 기지촌에 대한 심층 취재와 담론이 생산되었다. 비록 더 많은 시민들의 호응[2]을 받게 하기 위해 ‘순결한’ ‘누이’라는 상징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윤금이의 사진은 기지촌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금이’를 살해한 케네스 마클의 구속과 재판이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그녀의 시신 사진은 점차 그 사회적 역할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10여 년 만에 미선이·효순이 사건(2002)으로 다시 불특정 대중 앞으로 불려 나오게 된다. 이번에는 ‘미군 범죄’라는 키워드로 또다시 대중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992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사진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 즉 지시하는 대상과 그 의미의 관계가 좀 더 단순해지고 도구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진이 ‘기지촌’과 맺고 있던 장소적 지표 관계가 희미해졌다는 점이다. ‘윤금이’는 오직 끔찍한 감정을 유발하고, 따라서 미군에게 분노할 용도로 쓰였는데, 이 과정에서 ‘윤금이’는 ‘벗은 여성의 몸’이라는 도상적 기호, 즉 보편적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상징이 강화되었고 많은 여성들에게 성적 수치심과 불쾌감, 모욕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반미운동의 목적으로 ‘윤금이’ 사진을 시위에 사용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당시 우리가 알고 있던, 당사자들인 기지촌 여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이 이미지를 ‘폭력적’이라며 보기를 괴로워하는 기지촌의 젊은 활동가들에게 ‘이런 것도 못 보고 우리를 어떻게 이해해, 더한 것도 얼마나 많은데’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대신 기지촌 여성들은 ‘창녀’들이 미군에 의해 죽어 나갈 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시민들이 순결한 중학생들이 죽자 자신의 일처럼 마음 아파하며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고 ‘윤금이’ 사진은 당사자들의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반미운동을 위해 선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었다가 폭력적이라는 강한 비판을 받고 점차 시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윤금이’의 사진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윤금이’ 사진을 어떤 경우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목소리로 확장되었고, 점차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을 겪으며 ‘보지 않을 권리’까지 말해지고 있다. ‘윤금이’ 사진은 기지촌의 지표성을 점점 상실해 가는 방향으로 잔혹한 도상의 이미지, 즉 정치적 맥락이 지워진 포르노그라피적 이미지로 우리 앞에 다시 재의미화된 것이다. 기지촌에서 여전히 생존해 있는 여성들과 계속 영화를 만들어 가는 입장에서, 나는 ‘윤금이’ 사진의 도상적 재현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시하는 측과, 이에 대한 비판으로 ‘이미지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계속 누락되고 삭제되는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윤금이’ 이미지를 금지함으로써 사진에서 훼손된 시신이 가리키는 것, 시신을 촬영한 구도가 말해주고 있는 것, 시신이 누워 있던 방이 말해주는 것 등, 프레임 내부가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프레임 밖의 장소, 즉 도상이 지시하는 의미를 둘러싼 첨예한 정치적 문제들을 더이상 섬세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범죄의 도구이자 목적이 되었던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과 ‘윤금이’ 사진이 만들어진 역사성은 같지 않다. ‘윤금이’ 사진은 범죄의 도구나 목적이 아니라 범죄의 결과로 생겨난 이미지였으며, 그녀의 사진이 불쾌감과 수치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윤금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정들은 오직 우리가 무엇을 선정적이고 선정적이지 않다고 느끼는지 결정하는 사회적 담론의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윤리적이다’라는 말을 하기에는 무언가 덜컹거린다. ‘윤리적’인 이미지, 윤리적 재현이라는 말 또한 ‘선정적이다’라는 말과 유사하게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는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더 ‘윤리적’이 된다고 믿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미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1985)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사진기록을 단 한 컷도 사용하지 않고 증언만으로도 학살이라는 문제와 생존자에 대한 매우 성찰적인 미학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장 뤽 고다르가 벌인 유명한 ‘재현의 정치’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이미지에 대한 금지의 욕망 뒤에는 ‘재현 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학살의 고통을 유대인의 것으로 독점하고, 다른 문화권이나 민족의 학살과 비교하지 못하도록 위계를 두려는 욕망, 즉 고통의 독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은 9.11테러사건이나 이라크 전쟁 중 사망한 민간인과 미군의 시체가 미디어에 유통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시체 사진이나 가난한 국가의 재난으로 발생한 시체 사진은 미디어에서 자율적으로 유통시키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공의 기억에서 무엇을 누락시키고 건져 올릴지 결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락하는 행위야말로 권력의지이며, 우리에게 한정된 서사를 강요하는 폭력은 아닐까? 우리에게는 누락할 권리가 아니라 오직 해석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각주 ^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이후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된다. 공대위에는 약 50여 개의 시민단체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윤금이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는 데에는 1989년 조선대생 납치고문치사 사건인 이철규 사건 때 사진을 공개해 대중에게 큰 공분을 불러일으킨 경험이 작용했다. 정희진, <한국여성인권운동사>(한울, 2013), 342-343쪽 참조. ^ 정희진, 위의 책,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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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모순을 증언하기: 이름 없는 증인 카체트닉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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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프랭클린(Ruth Franklin)은 홀로코스트 문학을 다룬 저서 『천 개의 어둠 A Thousand Darknesses』에서 과거의 재난을 반복해서 다루고, 게다가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일의 윤리적 위험을 지적한다. 망자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적지 않은 독자, 관객, 청중,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홀로코스트의 직설적인 이미지를 읽고, 듣고, 보고 싶어 할까? 루스 프랭클린은 여기에는 어떤 열망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홀로코스트에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채널’에 대한 갈구 말이다. 폭력을 겪은 이들, 몸이 겪은 폭력을 고발하고 증언하는 이들의 외침은 같은 이유로 강력한 힘을 갖는다. 피해자, 희생자, 증인은 살아있다는 용기, 모습을 드러낸다는 용기, 입을 연다는 용기를 통해 존재의 존엄함을 증명한다. 이들이 “내 몸이 증거”, “내가 바로 증거”라고 외칠 때, 이 외침은 법정에서 사실을 입증하는 효과 이상의 효과를 생산한다. 증인이 여기, 우리 눈앞에 얼굴과 육신,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 재난을 몸으로 증언하는 증인을 통해 재난과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가령 홀로코스트의 ‘위대한 증인의 시대’를 열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이다. 하지만 수전 손택(Susan Sontag) 같은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타인의 경험’에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을 회의했다. 그의 관점 속에서 홀로코스트,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 내전, 제국주의 침략 등 재난의 희생자를 기록한 사진은 재난 그 자체에서 분리된 채 지구촌을 순회하며 의미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재현물이다. 그러니 그는 질문한다. 희생자를 찍은 사진을 보며 희생자에게 연민을 갖고, 재난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일은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인가? 그는 이런 사진들을 통해 재난과 피해자에게 ‘직접 연결’된다는 믿음을 곧장 갖는 이들을 틀림없이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는 재난 사진에 기만당하지 않는 일이다. 역사적 재난은 우리를 이처럼 딜레마 속에 빠트린다. 직설적 묘사, 극적인 이야기, 사진 이미지 또는 증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역사적 재난은 자신을 둘러싼 윤리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딜레마를 생산한다. 어느 날 나는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전쟁 범죄를 기리는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 아이히만 법정 증언대에서 흰색 양복을 입은 한 증인이 실신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증언대에서 웅얼거리며 증언을 이어나가다, 안절부절못하더니 갑자기 증언대 옆 바닥으로 쓰러졌다. 1961년 6월 7일 예루살렘 민중의 전당 법정에서 속개된 68차 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영상링크 이동: https://www.youtube.com/watch?v=m3-tXyYhd5U) 정신을 잃고 쓰러져 증언이 중단된 이는 수용소 생존자 예히엘 디누어(Yehiel Dinur, 1909-2001)였다. 아이히만 재판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국가폭력, 인종학살, 전쟁 범죄 같은 역사적 재난의 기록, 기억, 기념에서 “증인의 출현”을 개시하고, “위대한 증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기록된다. 1961년 겨울까지 이어진 아이히만 재판에서 수용소 생존자, 유대인 레지스탕스를 포함한 백여 명에 가까운 증인들이 4월부터 6월까지 증언대에 섰고 예히엘 디누어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예히엘 디누어라는 인물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필명은 이스라엘 국내외에 제법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46년부터 카체트닉(Ka-Tzetnik)이라는 이름으로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몇 권의 책을 펴낸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졌던 나치 유대인 절멸 계획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처음 불러일으킨 사건,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비로소 공적으로 발화된 사건, 생존자의 법정 증언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세계 37개국에 최초로 중계된 사건, “증인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사건, 존재로서 역사를 증언하는 생존자-피해자-증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 재판에서 증인 예히엘 디누어는 증언대에 선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신경 발작 치료를 받았고 다시는 증언대에 서지 않았다. 아이히만 재판은 이제 막 문을 연 대형 회관의 강당을 개조한 법정에서 열렸다. 생존자, 피해자, 가족, 시민, 언론인, 학자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다. 4월부터 두 달 가까이 증인들의 증언이 진행되는 동안 텔레비전은 법정 방탄유리 뒤 피고석에 앉아 있던 아이히만의 표정과 동작을 내내 클로즈업 화면 속에 담아냈다. 아이히만은 6월 20일, 75번째 공판에서야 변호사의 심문을 받게 되고 7월 20일부터 검사와 판사에게 수십 차례의 심문을 받게 된다. 재판에서 아이히만 못지않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검사 기드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아이히만 재판을 기록했던 한나 아렌트(H. Arendt)는 기드온 하우스너에게 방청객을 힐끗거리며 연극적 허세를 지닌 채 법정을 미디어 쇼 무대로 만들었다며 날 선 비난을 가했다-는 이날도 증인의 신분을 확인하며 증언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히엘 디누어입니다.” 검사는 디누어에게 가명으로 카체트닉을 선택한 까닭을 물었다. 카체트닉은 강제수용소를 뜻하는 독일어 Konzentrationslager를 줄여 부르던 KZ(카-체트)에서 비롯된 말로 수용소 수감자를 일컫는 은어다. 따라서 왜 수감자를 가명으로 선택했냐는 검사의 질문은 증인이 아우슈비츠 생존자 당사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자, 참혹한 수용소 경험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건네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증언대에 선 예히엘 디누어는 검사에게 자신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가 아니며, 카체트닉 역시 필명이 아니라고 답한다. 자신은 지구의 규칙이 작동하지 않았던 “아우슈비츠 행성의 연대기”를 적는 인물일 뿐이라고 밝힌다. 아우슈비츠 행성에 사는 이들은 모두 카체트닉과 숫자로 이루어진 이름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민족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후에도 세계가 깨어나지 않는 한” 카체트닉, 수감자를 이름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2년 동안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예히엘 디누어는 실제로 이후 평생 카체트닉, 또는 나치가 자신의 팔뚝에 새긴 수감자 번호 135633을 더한 카체트닉 135633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는 심지어 강제 수용소 경험 이전 이디시어(편집자 주: 중부 및 동부유럽 출신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썼던 자신의 시집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시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는 일에 수용소 이후의 여생을 바쳤지만 이름, 얼굴, 목소리를 드러내는 미디어 인터뷰는 한결같이 거절했다. 그는 평생 이름 없는 이름, 수감 번호 135633의 낙인과 수감자 아무개라는 이름으로만 아우슈비츠에 관해 썼다. 아이히만 재판의 증언대에서 이름과 얼굴을 드러냈던 일이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아이히만 재판 증언대에 서기를 희망했던 이들이 수만 명이었지만-신청자 중 백여 명이 실제로 증언하게 된다-, 이들 중 나치 치하 수용소 생존자는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수용소 생존 당사자 대부분은 당시 증언대에 서서 신분을 드러내거나 경험을 복기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예히엘 디누어도 증언대에 서기를 자처했던 인물은 아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수기와 소설을 펴낸 카체트닉이 증언대에 서기를 희망했던 이는 기드온 하우스너 검사다. 그런데 카체트닉의 저작들은 진정한 목격의 기록이라는 최근의 재평가에 이르기 전 오랫동안 수용소 포르노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카체트닉의 저작은 쇼아를 관음증적 소재로 다루는 비윤리적 저작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키취(편집자 주: 진품이 아닌 천박한 복제품, 모조품)와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수용소라는 한계 상황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어나갔던 엘리 비젤(Elie Wiesel), 프리모 레비(Primo Levi) 등의 걸작 수용소 증언 문학들과 달리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카체트닉의 자전적 수기 혹은 소설에는 나치의 고문, 수감자 사이의 폭력, 수용소 내 윤락 시설(Joy Division), ‘수용소 매춘부(Feld-Hure)’, 수감자 사이에서 벌어진 카니발리즘 등에 대한 묘사가 거칠고, 직설적이고 잔혹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쇼아 문학 연구에 따르면 전쟁 직후 이스라엘에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폭력, 섹스, 살인 등을 소재로 삼아 선정적 흥미를 자극하는 대중 소설이 적지 않게 유행했기에, 카체트닉의 소설도 그러한 대중 소설의 하나로 치부되곤 했다. 아이히만의 심문 기록을 소상히 기록했던 한나 아렌트도 증거와 증언을 다룬 장에서 카체트닉의 실신 사례를 잠깐 언급하는데, 카체트닉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아렌트는 “아우슈비츠의 매음굴, 동성애, ‘인간적 흥밋거리’에 대한 글”[1]을 써서 유명해진 인물로 카체트닉을 소개한다. 수용소 포르노로 비난받는 카체트닉의 글과 삶의 간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증인의 이름 없는 이름과 얼굴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증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평가받는 아이히만 재판정에서 일어난 예히엘 디누어-카체트닉의 실신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까? 당시 언론은 지옥을 경험한 피해자의 현재의 고통을 입증하는 사례로 예히엘 디누어의 실신을 다루었다. 이를테면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예히엘 디누어의 실신 후 68차 공판을 보도(1961년 6월 9일)하면서 “재판정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고 적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카체트닉의 본명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카체트닉의 본명은 바로 예히엘 디누어다. 증인은 눈을 감은 채 저음의 목소리로 강제수용 기간 동안 경험한 공포를 되짚어 나갔다. 증언이 한껏 고조된 탓에 증인은 이내 증언대에서 비틀거렸고, 이어서 실신에 이르렀다. 들것으로 그를 옮기는 동안 두 번째 증인인 조셉 클라인만(예루살렘 거주, 목수)이 이야기를 이어받았다.”[2] 그러나 카체트닉-예히엘 디누어가 증언대에서 수용소의 참상을 복기하다 실신했다는 보도문 속 묘사는 사실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 정신을 잃기 전 예히엘 디누어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의 독백은 수용소 공포에 관한 생생한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증언대에서 독백처럼 “아우슈비츠 행성”에 관해 읊조렸다. 예히엘 디누어의 읊조리는 증언은 사실 기술을 중시하는 법정 진술에도, 극적 증언의 효과를 보여주고자 했던 아이히만 법정에도 어울리지 않는 진술이었다. 그는 독백을 이어갔다. “저는 점성술에서 별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듯, 잿더미의 행성인 아우슈비츠가 우리 행성의 맞은편에서 우리 행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온전히 믿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히엘 디누어 독백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재판을 벗어난 독백을 제지하려는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상처를 받은 기색을 보이더니 정신을 잃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아렌트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몇 분 동안 독백을 이어나가던 예히엘 디누어는 실신 직전 수용소 가스실로 향하던 수감자들을 언급했다. “저는 그곳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뒤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봅니다. (증언대에서 일어서 증언대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앉는다) 저는 그들을 봤어요. [가스실로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선 그들을 보고 있어요.” 검사는 이 순간 “괜찮다면 다른 질문 몇 가지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판사는 디누어에게 검사의 질문을 들어달라며 플리즈(Please)를 연발한다. 디누어는 이 순간 쓰러진다. 그의 언어와 독백은 법정이 요청하고, 인정하고, 경청하는 해석, 낱말, 표현, 인과성, 증명의 방식에 어울리지 않았다. 크리스티앙 두메(Christian Doumet)는 『증인의 실신』이라는 저작에서 침묵에 대한 거부, 증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부닥친 “말하기의 불가능성” 속에서 예히엘 디누어가 “낱말들의 밤” 속으로 실신했다고 적었다.[3] 자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일 때, 아우슈비츠라는 사건, 극단적인 부조리와 복잡성을 가진 비극적 사건을 자명하게 설명하고, 증언하는 것이 가능할까? 희생자의 표정, 목소리, 시선을 증언할 수 있을까? 겹겹의 의미와 감정의 고유성을 전달할 수 있을까? 예누엘 디누어는 재판정을 지배하는 일반 규칙에 맞추어 가스실로 걸어 들어가던 이들의 시선과 얼굴을 표현할 방도를 알지 못했던 증인이다. 그리고 많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처럼 그 역시 아우슈비츠의 기억 속에서 고통받았다. 우울증이 심화되었던 1970년대에 그는 마약 복용을 통한 환각 치료를 시도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대면할 수 있었던 과거의 이미지, 죽음을 앞두고 있던 수용소 희생자를 포함한 수용소의 이미지를 저서 『지옥의 일출 Sunrise Over Hell』에 글로 다시 기록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카체트닉의 사례를 생존자가 과거의 ‘사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일 때 ‘이미지’를 대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는다. 말하자면 예히엘 디누어는 증인의 모순된 존재 방식을 증언하는 인물이다. 그는 한편으로 재난을 겪은 얼굴, 목소리, 눈빛의 현존성을 지닌 증인이다. 그의 신체, 존재, 고통의 경험은 우리를 역사적 재난에 접속하게 한다. 다른 한편 그는 몸, 존재, 고통의 경험을 통해 절박한 증언 불가능성을 증언한다. 그는 증언대에서 정신을 잃으며 몸의 감각을 중단시킨다. 그의 실신과 침묵은 우리 눈앞에서 우리, 그를 목격하는 증인이 된 우리에게 말하는 다른 언어가 된다. 그의 사례는 한편으로 공감을 장담하는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스스로 고통의 이미지와 그치지 않고 대면하려는 자이기도 했다. 증인이 우리에게 “내 몸이 증거”라고 외친다. 증인을 마주한 채 우리는 어떤 청자, 관객, 목격자가 되어야 할까? 증언의 사실성, 증언의 활력을 기대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연루되어야 할 것이다. 증인의 모순 속에 우리는 먼저 연루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파주: 한길사, 2006), 제14장 증거와 증언 참조. ^ 『르몽드』, 1961년 6월 9일. https://www.lemonde.fr/archives/article/1961/06/09/un-temoin-s-evanouit-en-rappelant-les-horreurs-du-camp-d-auschwitz_2281887_1819218.html ^ Christian Doumet, L'évanouissement du témoin (Paris: Arléa, 201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