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코코순이〉 제작기

이석재

  • 게시일2022.09.26
  • 최종수정일2022.11.25

영화 코코순이 스틸컷 ⓒ커넥트픽쳐스(주)

 

다큐멘터리 영화 〈코코순이〉(2022)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미얀마(옛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가운데 한 명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를 심문해 기록으로 남긴 한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코코순이〉는 또 끝내 찾지 못한 나머지 19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기리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들 ‘위안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사실이 왜곡되고 조작됐는지, 또 그런 보고서가 어떻게 악용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당시 연합군 측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일본계 미군 병사들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들을 심문했고, 심문과 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던 미국 전쟁정보국(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OWI) 심리전팀은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코코순이〉는 그 보고서에 작성된 20명의 ‘위안부’ 명단 가운데 KOKO SUNYI로 기재돼있는 한 여성이 실제로 누구인지 찾아내고, 그 보고서가 무슨 이유로 엉터리로 작성되게 됐는지, 또 그 보고서 내용이 어떻게 일본 극우세력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됐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그해 4월 국사편찬위원회 내 한시적인 조직이었던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으로부터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8호와 49호, 그리고 관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저는 KBS 보도본부의 시사다큐 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에서 취재와 제작을 담당하는 기자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의 황병주 편사연구관, 김득중 편사연구관과 함께 3개월에 걸친 취재에 나섰고, 그해 8·15 광복절 특집 ‘위안부’ 2부작 ‘전쟁범죄’와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두 편을 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만도 ‘위안부’와 관련한 각종 증거 자료와 사료 등을 확인하기 위해 6개 나라를 방문하는 등 광범위한 취재를 진행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았고 편집 등 후반작업 과정에서도 많은 아쉬움이 남아있었습니다. 제작자들이 흔히 표현하는 ‘아이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특히 아쉬웠던 점은 그 당시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제적부를 통해 찾은 ‘박순이’라는 할머니가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기록돼있는 코코순이(KOKO SUNYI)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정도까지만 확인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극우단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텍사스 대디’라는 미국인을 직접 인터뷰하지 못했다는 점도 끝내 아쉬웠습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매춘부로 비하하는 일본 극우단체들과 텍사스 대디의 연관성을 정황 정도로만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8년 8월 15일과 21일 KBS 1TV를 통해 2부작 방송이 나간 뒤 제 나름대로 세웠던 계획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내용들을 확인하고 또 당시 진행했던 각종 인터뷰와 자료 등을 묶어 책으로 내는 것이었습니다. 

현업에 치이면서 2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2020년 5월 우연히 지인을 통해 KBS미디어의 독립영화 제작 담당인 김형진 PD님을 소개받으면서 갑자기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으로 계획이 급선회했습니다.

〈시사기획 창〉을 통해 2부작으로 방송했던 내용을 다큐 영화로 재제작하기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제가 나름대로 마련한 전제 조건이 몇 개 있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와 코코순이의 연결고리가 직접 관련이 있는 당사자를 통해 확인돼야 하며, 텍사스 대디를 직접 인터뷰함으로써 일본 극우단체들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확인해야 재제작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영화 코코순이 스틸컷 ⓒ커넥트픽쳐스(주)

 

그리고 코코순이를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 심문 관련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아쿠네 겐지로에 대한 추가 인터뷰가 꼭 성사되어야 했습니다. 90대 중반의 아쿠네 겐지로는 전쟁 당시 심문관으로 참전해 미얀마 미치나에서 코코순이를 비롯한 ‘위안부’ 20명을 목격하고 실제로 그들과 대화를 나눴던, 그리고 그 ‘위안부’들이 생포됐을 당시 함께 붙잡힌 평양 출신의 간호사 김 씨를 직접 심문하기도 했던, 이 다큐 영화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2020년 10월 본격적인 영화 제작이 시작됐지만, 곧바로 벽에 부딪혔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의 주변 인물을 찾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박순이 할머니 주변 인물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으로 기록된 1946년생의 한 남성이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영면에 드실 때 그 곁을 지켰고,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도 직접 했던 것으로 확인된 70대 남성으로, 이름은 박원학 씨였습니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저는 박원학이라는 인물은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스위스 적십자사의 문서보관소에서 20명의 조선인 여성들과 어린 아이 등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파키스탄의 카라치항에 대기하고 있다는 문서를 발굴한 바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이듬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남아시아에는 조선인이 매우 드물었고,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됐던 코코순이 등 20명의 ‘위안부’들이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의 비카너 수용소에 수용됐다는 연합군 측 보고서 내용까지 확인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라치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20명의 젊은 여성들이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붙잡혔던 바로 그 조선인 ‘위안부’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습니다.

저는 당시까지 확인된 모든 정황과 기록을 토대로 박원학 씨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던 어린이 가운데 한 명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박순이 할머니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은 경상북도 영천시 동부동사무소였습니다. 2008년 박순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사망신고서가 접수됐던 곳입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각종 정보가 있는 곳이었지만, 동사무소 관계자들은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사실관계 확인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또 2018년 취재 당시 제적부에서 박순이라는 존재를 함께 찾았던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민원과 관계자 역시 현업에서 떠난 상황이어서 협조가 불가능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노년에 살았던 함양 인근 노인정과 노인복지센터까지 일일이 뒤지면서 박원학 씨의 흔적을 찾는 지난한 작업이 계속되던 중 결정적인 단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함양읍 행정복지센터에서 촬영했던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살피던 중 센터 측 컴퓨터 화면이 찍힌 영상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취재진은 박원학 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박원학 씨의 친척과 지인 등을 통해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를 만나게 되면서 박원학 씨가 박 할머니의 사위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손자를 통해 박 할머니의 둘째 딸을 만나면서 코코순이와 박 할머니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모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의혹의 인물 텍사스 대디를 만나는 것은 박 할머니 가족들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인터뷰 섭외 과정부터 난항이었습니다. 텍사스 대디라는 인물은 매우 조심스럽게 선별적으로 외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는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겁니다. 

이에 제작진은 미국 현지의 한 영상 제작업체 이름을 빌려 그 업체 이름으로 다시 인터뷰 요청을 시도했습니다. 인터뷰 내용도 미국 내 보수주의 유튜버들의 활동이라고 밝히는 이른바 ‘언더커버’ 전략을 썼습니다. 

결국 텍사스 대디와의 인터뷰 도중에 ‘위안부’ 이슈에 대한 질문이 본래 목적이었음을 밝혔고, 잠깐 동안의 반발은 있었지만 텍사스 대디 역시 예정된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면서 큰 문제 없이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 사이에서 텍사스 대디라는 애칭으로 통했던 토니 모라노 씨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모두 틀린 내용을 왜 그렇게 집요하게 주장해왔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이 다큐 영화를 제작하면서 세 가지가 가장 아쉬웠습니다.     

첫 번째로, 아쿠네 겐지로와의 추가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쿠네 겐지로는 2018년 첫 인터뷰 당시에도 여러 차례 인터뷰 장소를 바꾸고 시간도 변경하는 등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공영방송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을 하자 인터뷰 내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이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둘째 날 인터뷰 일정은 본인이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당시 아쿠네 겐지로는 ‘위안부’가 찍혀있는 사진에서 한 여성을 가리키면서 그 여성이 특히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제작진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쿠네는 ‘위안부’ 20명을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한 한 여성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심문 과정에서의 언어 문제, 의사소통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인터뷰가 잡혀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봤을 때 그 판단은 실수였습니다. 

2021년 제주도와 미국 뉴저지에서 각각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와 둘째 딸을 만났을 때 비로소 아쿠네가 가리킨 여성이 코코순이 즉 박순이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아쿠네 겐지로를 다시 만나고 싶었고, 다시 만나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코코순이를 지목해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쿠네는 끝내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아쿠네와 코코순이의 스토리는 다시 어둠 속에 갇혔습니다.

두 번째는 중국 내몽골의 한 마을을 직접 취재하지 못한 점입니다.
  
해당 마을은 박순이 할머니가 60년 동안 살았던 조선인 집단 거주마을입니다. 박 할머니의 둘째 딸에 따르면 그 마을에는 또래 할머니들이 한평생 자매처럼 지냈다고 했는데 이름도 없이 모두 대구댁, 진주댁 등으로만 불렸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모두 어디에선가로부터 그 집단 거주마을로 이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도 제작진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직접 방문해 그 또래 친구 할머니들에 대한 취재도 같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본군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적혀있는 ‘위안부’ 20명의 주소를 보면 대구와 진주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진주 출신은 4명으로 기억합니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적부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으로 타겟을 정한 곳도 진주였습니다. 하지만 진주시청이 6·25 당시 폭격으로 화재가 발생하면서 제적부가 대부분 소실됐다는 얘기를 듣고 함양으로 선회한 바 있습니다. 

중국 내몽골 현지 취재를 추진하던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대유행이던 때였고,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중국 입국 과정에서 무려 3주일의 격리,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2주일의 격리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여러 촬영 장비를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는 것도 당시로서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이 외국인들의 국내 취재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중국 현지 취재는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미얀마 미치나에 대한 재촬영 불발이었습니다.

제작진은 이미 2018년 ‘위안부’ 2부작 취재·제작 당시 미얀마 미치나에 있는 조선인 위안소를 최초로 발굴한 바 있었습니다만 〈코코순이〉 재제작을 위해서는 당시 취재의 허점을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부족한 영상에 대한 보충 촬영과 조선인 ‘위안부’를 목격한 현지 주민의 추가 인터뷰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돼 미얀마 대사관을 통해 정식 입국 절차를 밟았고, 그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미얀마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승인 소식을 기다리던 2021년 2월 1일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였습니다. 결국 미얀마 미치나의 위안소 관련 분량은 대폭 조정됐고, 애니메이션과 각종 하이라이트 효과, 문서 CG 등으로 모자라는 영상과 부족했던 설명을 대체하게 됐습니다.

〈코코순이〉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간단명료합니다.

70여 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역사 왜곡을 조금이라도 더 논리적으로 반박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대사의 비극을 아프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진은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모든 행적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중에 단 한 분, 코코순이로 기록돼있는, 경남 함양 출신의 박순이라는 분이 일제 강점기 경성지역에서 유흥업을 하던 일본인 위안소 업주의 농간에 속아 미얀마로 끌려갔다가 일본군과 함께 포로로 붙잡히고, 미군이 주도하는 심문을 거친 뒤 다시 미치나를 떠나 인도와 싱가포르를 거쳐서 중국 내몽골 지역의 한 외딴 마을에서 살다가 결국 2004년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고 4년 뒤 영면에 드셨다는 것만이 확인됐을 뿐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500개가 넘는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습니다. 일본 정부나 군부가 직접 운영한 위안소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한 위안소를 모두 합친 숫자입니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와 인도에까지 설치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그곳으로 끌려간 ‘위안부’ 숫자만도 많게는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곳을 거쳐 갔던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영화 코코순이 스틸컷 ⓒ커넥트픽쳐스(주)

 

제작진은 영화 제일 마지막에 국사편찬위원회 황병주 편사연구관의 인터뷰 내용을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당시에 동남아시아나 중국, 남태평양 등에 수백 개소의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게 확인이 되고 있죠. 거기에 끌려가신 ‘위안부’ 숫자도 많게는 20만 명까지 보는 분들도 있을 정도로 대단히 많은 분들이 끌려가서 고생하셨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이분들의 삶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 우리는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건지 귀국은 하신 건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인 거죠. 이분들의 삶을 한 분이라도 더 확인해서 널리 알려서 같이 공유하는 게 현재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중요한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글쓴이 이석재

〈코코순이〉 연출. 2000년 KBS 기자로 입사한 뒤 사회부, 기동취재부, 정치부, 탐사제작부, 탐사취재부 등을 거쳤으며, 시사제작부 〈시사기획 창〉에서는 20여 편의 시사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현재는 시사제작1부 〈시사멘터리 추적〉에서 책임프로듀서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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