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양미강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당시 한국위원회 총괄 실무책임자

  • 게시일2020.12.03
  • 최종수정일2022.11.28

일러스트 ©백정미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20주년에 부쳐

 

"본 재판정은 이 판결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 제도하에 희생당한 여성들을 기리려고 한다. 본 재판정은 살아남아 산산이 부서진 삶을 재건하고 공포와 수치를 이기고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생존자들의 강건함과 위엄을 인지한다.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여성들은 이름 없는 영웅이다."
- 2001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 최종판결문 중에서



이 글은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이름 없는 영웅들, 그들은 바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의 식민지 또는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아시아 각국에서 시작된 피해자의 증언과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인권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나도록 가해국인 일본 정부는 해결을 위한 조치를 하지 않고 있었다.

2020년 올해는 '피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이라는 슬로건으로 2000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초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를 중심으로 한 논란이 불거진 시점에서, 20년 전 아시아 모두의 시민운동이 되었던 2000년 여성법정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늘의 별이 된 피해자들, 지금도 여성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피해생존자들, 이들과 연대하며 폭력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전 세계에서 노력하는 지지그룹들의 변함없는 전진을 위해 2000년 여성법정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시간 2000년 12월


2000년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학순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활동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였다. 동시에 세계 각국에서 내전과 전쟁으로 인한 폭력과 국가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이 국제적 문제로 등장해 ‘위안부’ 문제와 함께 주목을 받았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세기의 어두운 과거와 직면하고 새로운 21세기를 열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특별한 시간으로 다가온 2000년, 아시아 각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 지원단체들은 2000년 여성법정을 기획하고 준비했다. 2000년 여성법정의 목적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우선 전 세계인의 분노를 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피해생존자들의 소망은 정당하고 그 소망에 응답할 의무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고와 르완다에서 전범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 책임의 시효가 국제법적으로 이미 지났다 하더라도 민간법정을 통한 책임자처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립하고자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민간법정의 형식을 차용한 세계시민을 향한 피해자들의 외침이고 운동이요, 세계언론을 향한 메시지였다. 

2000년 여성법정은 비록 법적 강제력이 없는 민간법정이었지만, 인권 법정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첫째, 세계의 어느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피해국은 증거를 통해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둘째 그에 따른 가해자들의 형사책임을 묻는 형사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셋째 이를 판단하는 판사단은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법학자와 연구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2000년 여성법정의 내용과 형식 모두 실제 법정에 맞게 만들어가야 했다. 이런 결의를 바탕으로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했다. 
 

2000년 여성법정 공식 로고 (출처: 왐(WAM) 유튜브 화면 캡처)



한국과 아시아 시민 모두의 운동


2000년 여성법정은 가해국인 일본, 피해국인 한국,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의 피해생존자와 시민단체들, 그리고 미국, 영국, 코스타리카 등 9개국 국제자문위원들이 실행위원회가 되어 주최하고, 피해생존자 64명과 한국 참가자 200여 명을 포함해 1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민간법정이었다. 1998년부터 3년간 준비하면서 공동대표 단체인 한국의 정대협과 일본의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필리핀 아센트(ASCENT)가 중심이 되어 1998년부터 3년간 법정 개최를 준비하면서 9개 법정참가국의 국제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각국 검사단을 포함해 국제검사단을 구성했다. 여기에 참여한 핵심인력만 40여 명이 넘었다. 국제실행위원회와 검사단에 더해 유고 전범재판과 르완다 전범재판에서 활동해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판사단과 고문단, 전문가 증인단까지 배치된 매머드급 구성이었다. 실무자들은 법정 개최에 앞서 서울과 도쿄, 마닐라, 타이페이, 뉴욕 등을 순회하면서 8차에 걸친 국제실행위원회, 3차에 걸친 국제검사단 회의, 국제법률자문단 회의, 판사단 회의 등을 열었다. 

정대협이 사무국을 맡은 한국위원회는 50여 명 규모로 조직되어 2년 동안 11차례의 모임을 열었고, 2000년 여성법정의 크고 작은 안건들을 처리하는 최고결정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정대협의 실무인력은 총괄책임자인 필자와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스태프 3명이 전부였다. 일에 비해 부족한 인력을 감당하기 위해 공동대표와 실행위원, 연구자들로 구성된 한국 검사단은 각자 맡은 일을 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헌신적으로 일했던 실행위원들과 전문가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충실히 임무를 다했다. 자원활동가들 역시 큰 힘이 되었는데, 특히 기독교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모인 자원활동가들이 2000년 여성법정의 재정 마련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 동시통역, 문화제 진행, 영상 및 사진 촬영 등 전문적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6개 지역에서의 문화제와 전국 11개 대학들과의 대학생 모의법정 개최, 전국적으로 200여 명에 달하는 참가단 모집 등으로 인해 1인 10역을 맡아 업무를 진행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부족한 재정이나 부족한 인력을 탓하지 않고, 남의 일이라고 미루지 않으며 2000년 여성법정을 완수하기 위해 한마음이 되었다. 죽더라도 2000년 여성법정은 끝내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모두에게 부담은 매우 컸고, 모두가 일종의 사명감으로 뭉쳐있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2000년 여성법정은 한국과 아시아 시민 모두의 운동이 되었다.

만 3년 동안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만만치도 순탄치도 않았다. 공동대표 단체들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문가들을 모으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일반 시민을 결집시키며, 법정을 홍보하고, 법정 개최에 필요한 재정을 만드는 일을 했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의 활동가들은 그 책임감이 커서 모든 과정을 한 발자국 앞서서 세심하게 살피고, 다른 나라들이 따라올 수 있는 인적이고 물적인 기반을 만들어야 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라는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유엔 인권위원회 등 국제기구 활동을 하면서 세계적인 흐름을 파악해두고, 세계 각지의 전문가들과 선이 닿아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침묵을 깬 이름 없는 영웅,
아시아 피해생존자들의 연대


2000년 12월 7일 도쿄의 겨울은 스산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바로 옆에 위치한 구단회관 대회의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천여 명의 사람들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모여들었다. 법정 개최 하루 전날 도착한 한국 대표단 일행 중 ‘위안부’ 피해생존자 21명도 각자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한복을 정성스레 갖춰입고 행사장에 입장했다. 남과 북, 중국과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등에서 피해생존자들 6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흥분 반, 긴장 반으로 자리한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하자, 무대의 조명이 켜지면서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들의 인사말이 있었다. 

뒤를 이어 2000년 여성법정의 로고를 새긴 깃발이 단상에 올라왔다. 태양과 꽃과 촛불과 눈이 그려져 있는 네 가지의 상징물은 2000년 여성법정의 목적을 잘 보여주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희망 하나로 버텨온 10년의 시간, 여성 인권을 위해 매진해온 전 세계의 여성을 상징하는 꽃, 2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아시아 각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꺼뜨리지 않은 촛불, 역사의 정의를 밝히고자 또렷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눈. 네 가지 상징이 어우러진 2000년 여성법정 깃발이 퇴장하자 단상의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지고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의 사진이 하나 둘 등장했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서 흰색 한복을 입은 강혜숙 교수의 살풀이 춤이 시작되었다. 해방 후 50년이 넘도록 침묵을 강요당한 채 사라져간 피해자들이 자신의 영정 사진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 같았다. 사진 사이를 돌며 추는 춤은 돌아가신 분들의 원혼을 불러모으는 치유의 춤사위였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후 현장에 있던 피해생존자들은 제각기 꽃을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 먼저 가신 분들의 사진 앞에서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길게 이어졌다. 64여 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시간이 지난 50여 년의 세월만큼이야 길었겠는가?

개막식이 끝나자 4박 5일 동안 남과 북, 중국과 필리핀, 대만과 말레이시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기소가 이어졌고, 35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증언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은 경우는 영상으로 증언을 대신했지만, 대부분은 직접 법정에 참석하여 증언했다. 중국 기소 당시 피해생존자 량리화는 증언을 하다 당시 고통이 되살아났는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치더니 쓰러졌다. 장내가 술렁거렸고 앰뷸런스가 출동해 생존자를 들것에 싣고 나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2000년 12월 12일 판결은 약식 판결로 대신되었고, 1년 후인 2001년 12월 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판결이 이루어졌다. 가브리엘 맥도날드 판사 등 4명의 판사단이 250페이지에 걸친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판사단은 판결에서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하는 강간과 성노예에 관한 죄를 적용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고 강간을 당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면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비롯해 기소된 8인 모두에게 유죄를 인정했다. 

히로히토 유죄 판결!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피해생존자들은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면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판사단은 최종판결에 참석한 각국 피해생존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면서 앞으로 나오게 하고 판결문을 안겨주었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비록 법적으로 책임자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판사단에 의한 책임자처벌 판결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서린 한을 조금이라도 녹게 하는 시간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에 참석한 피해생존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른 피해자들을 보고 피해자들만의 공감대로 교류하면서 서로 진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참여한 지지그룹들로부터 진심어린 환대를 받으면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진정한 형제애와 자매애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오늘, 이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16명이 생존해있다. 이분들의 나이는 90대가 넘었다. 법정 이후 20년 동안 피해자 가운데 스스로 인권운동가로 자리매김한 분들이 계실 정도로 피해당사자의 운동이 발전하였다. 평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으로 귀감이 된 고 김복동 할머니와 90이 넘은 연세에도 일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로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이제 더는 피해자로 남아있지 않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발로 뛰는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찾은 것이다. 이렇게 피해자들은 한 발자국씩 앞을 향해 나가고 있다. 누군가의 지원을 받는 피해자로 남아있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여성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앞장서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 공동기소와 최종판결


2000년 여성법정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국가에 의한 법적 강제력에서 오지 않았다. 국제검사단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원하는 세계시민의 요구에 의해서 법정의 권위가 부여된다고 말했다. 판사단과 국제검사단은 각국 검사단에게 엄격하게 자료와 증거를 요청했다. 이들은 이미 유고전범재판 등에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 여성법정이 역사적인 법정이 되기를 기대했다.

한국위원회는 2000년 여성법정의 성격을 인권 법정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아시아에 맞는 법정의 형식을 고민하는 동시에, 역사적인 법정이 될 2000년 여성법정에서 남북 공동검사단을 구성하여 공동으로 기소할 것을 북에 제안했다. 남과 북이 직접 소통할 창구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일본에서 소통을 맡아서 양쪽을 오가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은 정대협이, 북한은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사무국 역할을 했는데, 북한은 국제실행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3년 동안 남과 북의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가해국 일본 정부와 일본군을 기소하기 위한 공동기소문을 작성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인 남과 북은 2000년 여성법정 기소장 낭독의 첫 번째 순서를 담당했다. 피해자 증언도 남북의 균형을 고려해서 북은 박영심 할머니, 남은 김복동 할머니가 나섰다. 남북검사단은 박영심 할머니가 고향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남경과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로 끌려갔던 경로를 추적해나갔다. 1944년 전쟁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은 ‘위안부’ 피해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한국 측 증인으로는 김복동 할머니 등이 나서면서 일본군의 이동 경로와 피해자들의 이동 경로를 맞춰나갔고, 국제법에 의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추궁했다. 남북공동기소장의 내용은 강제연행 과정, 위안소 내에서의 범죄, 해방 후 범죄 등의 순서로 진행되면서 마지막에 법률 적용에 대한 논고로 마무리되었다. 남북 공동검사단은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목을 들어 히로히토 천황과 도죠 히데끼 등 8인을 기소하였다. 

남북검사단은 공동기소를 위해 2000년 여성법정 개막 3일 전 도쿄에서 만났다. 그동안 준비해왔던 기소 내용을 맞춰보고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는데, 남과 북이 기본적으로 접근 방향이 달라 서로 난감해했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과연 공동기소가 가능할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어진 기소 시간 3시간에 맞춰 발표 내용과 역할을 분담했다. 북은 북일수교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강조한 반면, 한국은 피해자 증거에 근거해 기소 내용과 형식을 강조하였다.

남북 공동기소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남북이 하나가 된 가장 강력한 연대였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강제동원 문제, 일본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에 관한 한 남북은 적극적으로 협력해왔고 상호 방문을 하기도 했다. 2000년 여성법정이 1993년 남측의 여성들이 북을 방문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계승하여 여성 중심의 통일운동이 이루어진 셈이다. 남북 공동기소는 민중의 힘으로, 50여 년 동안 지연되었던 정의를 남북이 함께 앞당기는 기회가 되었다. 그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민간차원의 활동도 함께 위축되어 예전과 같은 연대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

 


기억할 사람들,
마쓰이 야요리와 윤정옥


2000년 여성법정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윤정옥 선생과 마쓰이 야요리 선생이 아니었다면 단연코 성사될 수 없었던 법정이었다. 마쓰이 선생은 필자가 1998년 4월 유엔 인권위원회 참석차 신혜수 선생과 스위스에 가 있을 때,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그해 4월에 열리는 아시아연대회의에서 2000년 여성법정 개최를 제안하겠다고 했다. 그는 긴 머리에 언제나 어깨에 가죽으로 된 큰 서류 가방을 메고 다녔고, 그 가방에는 움직이는 사무실처럼 온갖 서류가 가득 차 있었다. 마쓰이 선생은 열정이 넘치는 여성운동가이며 저널리스트이며 연구자였다. 그는 아사히 신문사 기자로 재직 중일 때 우연히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위안부’ 문제를 일본 시민사회에 소개했고, 여성폭력문제를 다루는 바우넷 재팬을 설립하기도 했다. 마쓰이 선생의 문제 인식은 언제나 선명했다. 일본인인 자신이 ‘위안부’ 문제에 전념하는 이유는 가해국 일본이 제대로 역사를 직면해야만 보편적인 일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일본인으로서 전쟁범죄에 관해 히로히토 천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일본 도쿄 한복판, 야스쿠니 신사 옆에 있는 구단회관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초청하여 천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자신을 내어놓는 파격적이고 위험한 일이었다. 마쓰이 선생이 일본 우익으로부터 받을 테러의 위협은 법정 당시 구단회관을 둘러싼 고성과 차량시위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실제로 2000년 여성법정 이후 마쓰이 선생은 일본 내에서 매국노 1호로 찍혔고 우익들이 직장과 집으로 찾아와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두려움에 용기로 맞선 마쓰이 선생은 안타깝게도 2000년 여성법정을 마무리하고 200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가 암에 걸린 이유가 2000년 여성법정에 쏟아부은 열정이 그의 육체를 태웠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가 이별 여행을 떠나기 전,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자매애를 쌓은 김윤옥 대표가 정대협을 대표하여 도쿄로 찾아가 공로패를 전달했다. 이때 마쓰이 선생은 그 어느 상패보다 정대협에서 받은 공로패가 값지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그가 진정 고마워했던 것은 부끄러운 자신의 조국 일본 정부를 향한 싸움에 끝까지 함께한 정대협의 자매애였다. 나는 지금도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마쓰이 선생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인다. 

일본에 마쓰이 선생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윤정옥 선생이 있었다. 윤정옥 선생은 ‘위안부’ 문제를 한국 사회에 처음 알린 장본인이었다. 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윤정옥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또래 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본인도 학교에서 정신대로 자원하라는 강요를 받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했다고 한다. 그 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조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88년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위안부’ 관련 답사 보고를 하였고 1990년 정대협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윤정옥 선생은 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책임감으로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2000년 여성법정을 추동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정옥 선생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따른 사죄와 배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당시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2000년 여성법정 이후 베트남전에서 발생한 여성 폭력으로 이어져갔다. 시간과 열정,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모두 불태운 선배들이 없었다면 이 일을 상상할 수나 있었겠는가? 참 고맙고 감사하다.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이름 없는 영웅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참여가 없었다면 이 운동은 지금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열정과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1세대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이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국내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재능을 기부한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없었더라면 이 운동은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2000년 여성법정은 씨줄과 날줄이 촘촘하게 얽히듯 피해자들과 운동가들, 전문가들과 지지그룹들, 그리고 시민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법정 운동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는 문제 해결을 바라는 피해자들의 소망이 정당하며, 다시는 이 같은 피해가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세계적인 공감이 있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 천황에 대한 유죄판결과, ‘위안부’ 제도에 대해 일본의 국가 책임이 있다는 판결 후 단상에 올라가 기뻐하는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 (사진 제공:  VAWW RAC)

연결되는 글

  •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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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웹진 <결>에서는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을 맞아, '아카이브814'에 등록된 2000년 여성법정 관련 기록물을 법정이 진행된 시간순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웹진 <결> 편집팀 2020.12.03

  •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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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일본 방송사 NHK의 PD였던 이케다 에리코는 어떤 과정을 거쳐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의 명예 관장이 되었을까. 그 과정을 담은 글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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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한 NHK 방송 ETV2001《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의 제작부터 방영까지 겪었던 우여곡절을 당시 데스크를 담당했던 나가이 사토루의 글로 만나본다. 

    나가이 사토루(長井 暁) 2020.12.03

글쓴이 양미강

1997-2002년 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2000년 여성법정 한국위원회 총괄 실무책임자로 법정의 시작과 마무리를 담당했다. 그 후 역사대화를 위한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역사화해를 위한 역사NGO세계대회 운영위원장,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5년간 한‧중‧일 과거사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미투운동과 5.18 민주화운동과 성폭력 문제 등에 관심을 가져왔고, 최근 '위안부' 운동을 비롯한 한‧일 관계에 대한 활발한 발표를 통해 새로운 운동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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