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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경험과 “상황적 지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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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험에 소유격을 붙여 ‘00의 증언’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폭력성을 느낀다. 생각과 감정을 포함하여 움직임이나 행위에 관한 영역을 경험이라고 한다면, 마치 몸에 옷을 걸치는 것처럼 경험이 어떠한 말을 걸치는가라는 점은 지극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처음부터 ‘00의’라는 주어 아래 두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질문하게 된다. ‘00의 증언’이라는 설정은, 모든 움직임과 행위를 00이라는 주어의 것으로 총괄하라는 일종의 명령이다. 동시에 그것은 위의 질문을 배제하고, 움직임과 행위에 촉발되어 시작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닐까. 금기된 사랑을 둘러싸고 안티고네의 죄를 인정하게 하려는 신문(訊問) 장면에 대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행위자가 그 행위와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행위와 행위자의 연결됨을 언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논했다. 그는 이 주장에서 어떠한 말을 말로서 승인할 것인가, 어떠한 말을 사전에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서가 발동하는 점을 분석한다.[1] 또한 발화를 사전에 배제하는 질서는 법과 이성애주의적인 친족 구조의 공범 결과다. 그러나 증언대에 선 안티고네는 이 주장을 끝까지 거절한다. 거부하며 신문에 노출되는 이 경험은 “지금에라도 누군가에게 달라붙을 것만 같다”.[2] 그리고 경험에 자신의 소유격을 붙이는 것을 거절한 채, 안티고네는 산 채로 매장된다. 증언에 관한 폭력이 여기서는 생매장인 것이다. 버틀러가 지적하는 주장에는, 굳이 자신이 그 행위를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장이 이미 질서를 갖는 이상, 그 비약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사태는 시작과 동시에 먼저 심판에 의해 정지당하게 된다. 생매장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죄인인가 아니면 구제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 아니다. 증언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의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경험으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의 모습에 대한 고찰이다. 주장에 있어서 주어는 사전에 준비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이나 행위에는 사전에 준비된 주어가 달라붙어 주장되고, ‘00의 경험’으로 말해진다. ‘나’는 이 주어에 이미 선취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주장이 ‘나’를 덮치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된다.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흑인의 삶의 체험”을 통해 이러한 주장에 저항하며 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3]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단지 ‘나’라는 주어의 회복만은 아니다.모든 움직임이 “검둥이”라는 주장 속에서 말해진다. 파농은 이 문제를 “삼인칭 인식”이라고 말한다. 행위가 전부 삼인칭의 소유격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이 삼인칭은 변화가 없는 속성으로 자연화되어 있다. 또한 이 자연화하는 인식에는 때때로 과학이 이용된다. 그리고 이 자연은 ‘나’의 신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신체는 자연화에 저항하며 “나 자신을 사물로 삼는다”.[4] 이 점이 바로 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경험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경험으로서 산란하는 것이다. 나만의 일도 아니며 또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초점적 확장은 과정으로서 계속되어야만 한다. 파농은 책 마지막 부분에 “아아 나의 신체여, 언제까지나 나를 질문하는 인간이게 하소서”라는 기원으로 이러한 접속을 도모해나간다. ‘나’는 처음부터 이 지점에서 선언되는 것이며, 경험은 단수형이든 복수형이든 간에 주어의 소유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러붙게 되며,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산란과 복수화를 짊어지면서 새로운 관계를 갱신해 나아가는 힘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검둥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끝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또한 복수로 만들어 주어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서는 주장이 계속된다. 경험에 있어 논점은 소유격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러한 힘이다. 즉, 공통 항목이 만들어내는 우리가 아니라, 공통 항목으로는 총괄할 수 없는 곤란함을 끌어안는 우리가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30여 년 전 다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우리’를 향한 출발점을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통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해러웨이가 분투했던 과학 혹은 객관성이라는 것은 경험을 둘러싼 주장을 짊어진 지식이며, 삼인칭 인식이며, 자연화하는 사고이다. 그리고 자연화로부터 어떻게 몸을 떼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러웨이를 “상황”이라는 장소로 향하게 한다. 이 지점에 해러웨이는 말, 즉 지식을 재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파농과는 전혀 다른 문체지만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 역시, 언어적 주장에 저항하면서 시작의 장을 찾아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해러웨이가 향한 장소는 제한된 세계이며, 그 성격은 “부분적”이다. 이곳에서 “부분적 광경” 혹은 “제한된 목소리”에 기반한 말이 생겨난다. 몸에 옷을 걸치듯 경험에 걸쳐지는 것은 이러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대 일부’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말하는 전체 속의 부분이 아니다. 집합적 범주가 아니라 움직임이자 운동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부분성은, 자기 완결적인 부분성이 아니라, 상황에 놓인 지식이 가능하게 되는 각 각의 결합 혹은 뜻하지 않은 시작을 위한 부분성이다”.[5] 개개의 장소는 시작의 장이며 동적인 모습 안에 있다. 주장에 저항한다는 것은 복수의 범주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태를 확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경험이 말을 걸칠 때, 요점은 말의 일반적 유형이 아니라, 말과 함께 생성하는 어떤 상황과 시작, 그것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관계성에 있다. 이러한 일들이 기존의 상황과 관계성과의 경합 안에서 발생하는 이상, 말은 유형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다. 말은 말로서 승인되지 않은 말을 포함하여 개개의 관계성 안에서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말의 모습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시작의 일단(一端)을 짊어지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경험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며, 해설의 대상도 아니다. 경험이 움직임이자 상황 혹은 관계성의 생성이라는 의미는, 그것을 말로 하려는 ‘나’ 자신이 그 움직임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의 일단을 감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황적 지식”을 함께 확보하려고 하는 태도, 즉 앎이다.[6]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번역 : 정유진(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각주 ^ ジュディス・バトラー『アンティゴネーの主張』竹村和子訳、青土社、2002年、25頁。 ^ 1)과 동일、25頁。 ^ フランツ・ファノン『黒い皮膚・白い仮面』海老坂武・加藤晴久訳、みすず書房、1970年。 ^ 3)과 동일、79頁。 ^ ダナ・ハラウェイ『猿と女とサイボーグ(新装版)』高橋さきの訳、青土社、2017年、377頁。 ^ 역자 주, 도미야마 이치로/심정명 역 <시작의 앎 –프란츠 파농의 임상->,(문학과지성사, 2020) 서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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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침묵의 번역, 혹은 번역할 수 없음의 재현 – 영화 〈침묵〉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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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번역, 혹은 번역할 수 없음의 재현[1] <침묵>을 연출한 박수남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로, 1960년대 신문기자로 경력을 시작한 이후 글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강제징용 피해자, 원폭 피해자 등 남한, 북한, 일본 역사의 틈새에서 누락되었던 목소리들을 오랜 기간 기록해 왔다. 박수남 감독의 저술활동과 영화는 식민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군사주의, 전쟁, 차별, 빈곤 등에 의해 여러 ‘장소’에서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험과 기억은 물론 존재마저 부정당하던 이들과 함께하며, 민족, 젠더, 지역 경계를 가로지른다. 대표적으로 1963년에 출판된 저서 『죄와 죽음과 사랑과 罪と死と愛と』는 재일조선인 인권문제에 일본 사회의 관심을 모아 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교사형>(1968)에 영감을 주기도 했으며, 1986년 다큐멘터리 <또 하나의 히로시마 - 아리랑의 노래>[2]는 강제연행과 피폭, 전후보상 문제에서 목소리가 누락된 조선인 피폭자들의 삶을 담아내며, 당시 일본 반핵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내에서는 재일조선인 사회뿐 아니라 일본 소수자 인권 운동과 연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잘 알려진 중요한 인물로, 박수남 감독의 지지자, 후원자들은 그의 상영회나 강연 행사 등을 겨냥한 우익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막아내는 힘이 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한국 내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거나 ‘위안부’ 피해자 운동 내부에서 왜곡되어 알려져 있었지만[3], 다큐멘터리 <침묵>(2017)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자들과 ‘위안부’ 문제 연구자들 사이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2021년 9월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아시아 영상문화연구소는 박수남 감독의 영화작업과 운동을 기리는 국제포럼 <아카이브의 주소를 묻는다: 여성, 디아스포라, 필름메이킹>을 개최하였으며, 한국영상자료원은 최근 박수남 감독의 작품을 수집하고, 자료를 KMDB에 등록하였다. 1960년대부터 촬영해왔으나 현상을 하지 못해 묵고 있던 16mm 필름들이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일부 지원과 함께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침묵, 번역할 수 없는 것 <침묵>은 1990년대 중반 한일 양국의 그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고 피해자 모임을 만든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에서의 투쟁을 다루며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역사를 다층화하는 영화이다. 2016년 약 90분 분량의 가편집본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최초 상영[4]되었으며, 이후 2017년 영화제 상영본과는 다른 약 117분 분량의 재편집본으로 일본에서 개봉되었다.[5] 영화는 1994년 당시 ‘위안부’ 운동을 대표하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나 유족회에서 독립하여 피해자만으로 결성되었던 ‘위안부 피해자회’의 일본 방문 당시 활동을 중심으로, 박수남 감독이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 그리고 할머니들이 이른바 ‘국민기금’[6] 수령 이후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운동으로부터 박수남 감독이 배제된 사연, 그 후 20년이 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박수남 감독과 생존자 간의 우정을 담고 있다. 일본 내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자인 배봉기(오키나와 거주) 와의 만남과 배봉기 씨의 죽음을 사회 운동의 자산으로 삼으려고 했던 총련계[7]와 민단계[8]의 갈등, 피해자회 할머니들이 국민기금을 최종적으로 수령하는 것을 결정하기까지 국민기금 측과 격렬하게 논쟁하고 투쟁한 과정 역시 그려지는데, 모두 한국의 대표적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역사에서는 그다지 말해지지 않는 역사들이다. 그러나 박수남 감독은 이 ‘말해지지 않은’ 것을 폭로하거나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주장하기 위해 영화로 불러오지 않는다. 영화의 편집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기존 운동을 회고하는 방식에 조응하거나 혹은 반대로 카운터 내러티브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심인물이나 사건을 따라가는 편집 방식, 혹은 어떤 중심 문제의 연대기적 서술 방식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에 익숙한 관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영화의 내적 논리를 따라가기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초반 박수남 감독은 자신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던 중 운동의 모순에 직면한 후, 한일관계의 피해자이면서도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던 운동들인 강제징용 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영화 내에서 자막과 자신의 예전 사진을 통해 말한다. 즉,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뿐 아니라, 그와 연을 맺고 시간을 거쳐 온 감독 ‘나’ 자신과 그 위치성이 중요한 영화이다. 그러나 그 위치성은 한국인이라는 종족적 연대나 여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에 근거한 보편 연대와 같은 기준으로 매끄럽게 구획되는 것이 아니며, 영화와 감독 자신도 스스로 확신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일본 내, 한국 내 그리고 일본과 한국 사이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역사서술의 균열과 그 안에서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성과의 불-연속성 사이의 침묵과 삐걱거림이 이 영화 편집의 내적 논리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안민화[9]는 박수남 감독의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 등 초기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구술자 목소리 더빙 방식[10]이 더빙이라기보다 한일 간 교차하는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마이너리티들의 목소리에 대한 박수남 감독의 번역방식이라고 지적한다.[11] 박수남은 저술활동을 주로 하던 당시, 재일조선인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침묵을 비롯해 비언어적인 것들, 그리고 말 자체를 할 수 없어 하는 모습을 활자로는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영상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12] 박수남 감독의 초기 관심이 ‘번역하기’였다면 <침묵>에서의 박수남은 번역할 수 없는 것 혹은 번역할 수 없음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의 편집을 담당했던 문정현 감독은 2016년 이 영화가 재일조선인으로서 박수남 감독 자신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연대, 즉 소수자 간 연대에 대한 영화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해 박수남 감독은 “아니라요! 소수자는 또 다른 소수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구조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요! 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13] 내러티브를 구획하고자 하는 힘과 주인 없는 시선 이 영화가 최초 공개되었던 2016년의 편집판에서는 감독의 (예전 함께 투쟁했던 이옥선 님 댁을 방문하는) 여정으로, 감독 자신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위안부’ 피해자 운동사 자체라기보다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여러 운동에 관여했던 감독 자신이 중요한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볼 수 있는 최종 편집판의 시작과 끝에는 감독이 아니라 이옥선 님이 등장한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투쟁 영상도 (조금은 선정적인 방식으로 발언되고 편집된) 대중 행사에서의 증언 장면이 더 많이 추가되었다. 최초 편집본이 재일조선인 여성으로서, 재일조선인 운동을 비롯한 일본 내, 일본과 한국 (그리고 북한) 사이의 사회운동에서 좌충우돌하고 끊임없이 배제되어 온 박수남 감독의 영화라는 인장이 분명하다면, 최종 편집본은 그러한 흔적들이 남아있지만,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위안부’ 피해자 서사로 편집된 것이다. 이것은 최초 공개 편집본이 더 좋다거나 무엇이 더 옳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과정 자체가 소수자, 사회적 타자 인식의 한계범위에 대한,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화된 대상을 담는 다큐멘터리들이 취할 수 있는 접근법들의 한계지점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14] 이 다큐멘터리에서 최초로 증언한 것은 아니지만 <침묵>에서 문옥주 님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몸짓으로 듣는 양곤에서의 일본군 살해에 대한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더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충격은 할머니가 격렬한 저항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일본군의 살해 위협에 받아쳤다는 말이다. “그 칼은 천황폐하가 적을 죽이기 위해 주신 칼이지 그 칼로 같은 신민을 죽여도 되겠냐”. 천황에 대한 언급은 국민기금의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성적 서비스’라는 표현에 대해 항의할 때 이옥선 님에 의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옥선 님은 벌떡 일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고 나서, 일본 백성들보다 더 치켜주고 더 해준다고 우리를 끌고 가지 않았느냐고 항변한다. 이들의 발언은 (식민주의의 내화든 혹은 제국주의의 강압으로든 그 어떤 민족주의를 기반한 문제 틀로도) 이해하기 곤란하며, 민족주의와 탈식민주의 사이에서 무수한 미결정의 공간을 환기시킨다. 최종 편집본의 첫 쇼트는 이옥선 님이 등장하기 전 아무의 시선도 아닌, 도대체 누구의 시점인지 모르는 풍경이다. 주인 없는 시선, 그 미확정된 주체의 시선이 첫 쇼트로 등장하는 것이다. 인식범위 밖의 시선의 쇼트가 영화를 여는 것은 무척이나 징후적이다. 기사 게재일 : 2021.10.18. 각주 ^ 이 글은 202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쟁점포럼 “증언과 구술의 번역 - 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논의하기”에서 발표했던 필자의 글 「번역의 위치와 그 경계들」과 일부 아이디어가 겹친다. ^ 일본어 원제는 “もうひとつのヒロシマ - アリランのうた”. ^ 1996년 11월 5일에 방송되었던 MBC PD수첩 <열 여섯 살 분홍치마저고리>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접근해서 ‘민간기금’을 받도록 종용해 왔던 재일교포”, 문옥주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소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악의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침묵>(2017)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의 갈등, 정대협으로부터 정부에 요청된 박수남 감독 한국입국금지가 언급된다. ^ siwff.or.kr/kor/addon/00000002/history_film_view.asp?m_idx=102620&QueryYear=2016 (2021.10.08. 검색 완료) ^ 한국의 여성영화 플랫폼 퍼플레이(purplay.co.kr)에서 볼 수 있는 판본도 2017년 재편집본이며, 이 판본을 공식판본으로 하여 제작년도를 2017년으로 기록하는 박수남 감독 측을 따라 이 글에서도 작품의 연도는 2017년으로 표기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 최종 편집본을 2020년 재상영하였다. ^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중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에 속한 사람 ^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자치 단체인 거류민단(居留民團)에 관련된 계열 ^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메이지가쿠인대에서 영상예술학, 코넬대에서 동아시아학, 비교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미네소타대에서 동아시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아시아의 식민주의 및 냉전의 문화를 국가주의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문화 담론과 실천 등으로 모색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간의 비교연구를 해오고 있다. (출처: YES24 작가파일) ^ 재일조선인 1세(강제징용자나 피폭 피해자)들의 조선어 혹은 조선어가 섞인 ‘브로큰 일본어’ 위에 원본 목소리를 없애지 않고 감독 스스로의 목소리로 일본어를 녹음하는 방식 ^ Minhwa Ahn, “Archive and Minor Transnational Memory: Documentary of Zainichi Korean Women as Visualizing the Testimony, Space, Image”,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2021년 10월 1일. [아카이브의 주소를 묻는다: 여성, 디아스포라, 필름메이킹(Addressing Archives: Women, Diaspora and Filmmaking)] ^ “CINE TALK: Sunam Park”, 국제포럼 <아카이브의 주소를 묻는다: 여성, 디아스포라, 필름메이킹>,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2021년 9월 30일. ^ 문정현, 「침묵」, 2016. https://www.kmdb.or.kr/story/12/1050 (2021.10.15. 검색 완료) ^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 연작과 관련하여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사실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는 보지 않아도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종종 불만스럽게 언급한다. <낮은 목소리> 연작이 당시로서는 낯선 형태의 독립다큐멘터리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리고 감독에 따르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잘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젠더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기보다는 민족적인 문제, 즉 공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위안부 할머니’ 혹은 ‘정신대 할머니’로 불리는 전시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의 피해와 상처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수난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며, 그녀들의 기억은 공적인 영역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취사선택되거나 가공되어왔다. 졸저, 『영화와 운동 – 독립영화로 보는 한국사회』, 한국영상자료원, 2018, 11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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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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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박우득 朴又得 1919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남. 1935년 16세에 칭다오, 상하이에 10년간 동원됨. 중국 상하이(上海)에 피해자 박우득과 현병숙을 만나러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해 부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비용 절감을 위해서 직항을 포기하고 먼 길을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하이에 도착해 교민 잡지 ‘상하이 좋은 아침’을 만들며 피해자를 지원하던 김구정 씨가 마련해준 숙소로 이동을 했다. 그는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낯선 상하이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며 중국어가 능통한 유학생을 붙여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솟아오르는 상하이의 고층 건물은 암울한 전쟁의 흔적을 순식간에 거두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건물 사이에서 중일전쟁 이전부터 있어 온 위안소를 시내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조계지[1]의 상징인 와이탄(外滩)과 가까운 우장루(呉江路)의 50층이 넘는 빌딩 숲을 헤치고 좁은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깊이 들어설수록 고풍스러운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3층짜리 건물에는 세대 수만큼 10여 개가 넘는 벨이 빼곡히 차 있었다. 꼭대기 층의 벨을 여러 번 누르니 박우득의 딸이 내려와 굳게 닫혔던 철문을 열었다. 층층이 가파른 목조 계단을 오르고, 나무로 만든 문을 여니 단칸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침대 두 개, 장롱, 텔레비전이 세간살이의 전부인 듯했다. 방 가운데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그는 고개를 돌려2년 전보다 밝은 모습으로 나를 반기며,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불안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중풍을 앓아 오른쪽 팔다리를 못 썼고, 그동안 안면근육 경련이 심해져 2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가, 입원 치료를 받아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2001년 때만 해도 억지웃음을 지으실 뿐 삶의 활력이 없어 보였다. 지금도 항상 웃고 계신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중간 웃는 모습에 한결 여유가 느껴졌다. 그에게 고향 고성에 관해 물으니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한두 채씩 집이 있고 더 떨어져서 집이 있었다며 마을의 풍광을 이야기했다. 산촌에 살던 그는 중국 땅으로 가기 전까지 외출이라곤 면에서 이루어지는 장날에 가는 게 전부였을 만큼 문밖 출입을 거의 안 하고 살아왔다. 그의 집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조그만 논이기에 많은 노동이 필요치 않았고, 큰 오빠는 남의 배를 타며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하지만 험난한 바다 일에 일찍이 목숨을 잃었다. 친 어머니도 동생을 낳다 죽고 서모가 들어와 지냈으나, 그는 서모의 구박에 못 이겨 급기야 집을 나왔다. 위안소에서 해방 후 구락부로 이쯤 박우득은 어떤 조선 여자가 중국 상하이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1935년 16세에 10여 명의 여자들과 부산, 단둥(丹东)을 거쳐 배로 칭따오(青島)까지 갔다. 당시 칭따오는 일본군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군도 주둔해 있었다. 박우득은 위안소에서 여러 나라의 군인에게 혹사당했다. 때로는 성폭력을 거부하고, 도망치기를 반복하자 주인은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해 10개월 만에 상하이에 있는 러시아계 여자가 운영하는 마사지 가게에 그를 팔았다. 러시아 주인은 그를 ‘표요타’라 부르며 집안일과 심부름을 비롯해 군인까지 받게 하며 온갖 일을 시켰다. 해방되고 나서도 계속 상하이에 남아 구락부(俱樂部)[2]로 개조된 그 집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사지 일을 계속했다. 러시아 주인 여자가 떠난 이후에도 그는 그 집에 남아 계속해서 살아왔었다. 자신이 아픔을 겪었던 장소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의 가슴속에는 지울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만 왔다. 그와 이야기하는 사이 도시 재개발과 이주 담당 공무원이 다녀갔다. 공무원은 올해 말이나 내년쯤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의 집을 들어서는 길목과 주변의 건물들은 이미 헐리고 고층 건물이 세워지는 중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이곳마저 헐릴 계획이었다. 시골로 이주하면 딸과 손자 3대가 살기 때문에 방 3칸이 나오지만, 손자의 교육문제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의 병이 깊어지면 급하게 병원 갈 일에 걱정이 앞섰다. 방 수가 적더라도 시내 부근에 살았으면 하는 것이 그와 가족들의 바람이었다. “갈 수만 있다면 고향에 가고 싶어요.” 경남 고성이 고향인 박우득은 국적이 북한으로 되어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고향에 갈 수 있냐며 나에게 물었다. 고향의 가족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 모두 죽고 없었다. 그래도 그는 고향에 돌아가 마지막 길을 가는 것이 소원이라며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다시 만나길 약속하며 그의 집을 나섰다. 문 앞 계단까지 배웅을 나와 어둡고 가파른 계단 끝에서 조심히 내려가라며 끝까지 바라다보시는 모습에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가 살던 우장루는 개발이 지연되어 이사도 미뤄졌다. 2007년 박우득은 노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2017년 3월 중국에 남아 있는 위안소 기록을 위해 상하이에 다녀왔다. 그는 없지만, 혹시 주변에 그의 가족들 소식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 시간을 내어 발길을 그가 살던 곳으로 향했다. 큰 윤곽의 길만 남겨놓고 미로와 같던 골목길과 즐비하게 늘어섰던 러시아풍의 건물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그곳에는 수백 채의 집을 부수고 지은 대형 백화점이 들어섰다. 과거에 찍었던 사진으로 큰 건물을 비교하며 그가 살던 집의 위치를 찾았다. 그와 같이 살던 딸과 손자의 소식이 궁금하다. 심부전증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던 딸과 공부를 잘해 매번 1등을 한다며 갈 때마다 그가 자랑하던 손자를 더 이상 찾을 수도 없고, 그 이후 소식을 아는 사람들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박우득과 그의 가족들은 그저 사진으로 기억될 뿐이다. [사진 설명]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2003년 기준), 박우득은 위안소에 대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가슴속에 묻힌 울화가 치밀어올라 분노에 찼다. [사진 설명] 20년 넘게 앓아온 무릎 관절염과 중풍은 박우득을 3층 집에 가두었다. 오래되어 반 투명해진 창으로 높게 솟은 건물에서 반사된 빛이 건설 소음과 먼지와 함께 들어올 뿐, 바깥 풍경은 삭막하기만 했다. 각주 ^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 동호회(同好會) 또는 동아리, 클럽(club)의 일본식 표현. 구락부(俱樂部)는 공통의 관심사나 목표를 가지고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며, 이러한 모임에 사용하는 건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기사 게재일: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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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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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소설 『한 명』(김숨, 현대문학, 2016)은 대학로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극단 유목민이 김선영의 『애니깽』(한라출판사, 1990), 신경숙의 『리진』(문학동네, 2007)에 이어 <공연예술 중장기 창작지원사업> 레퍼토리로 선택한 세 번째 소설이다. 극단 유목민은 역사극의 비중이 현저하게 낮아진 연극계에서 역사연극을 시리즈화할 의도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역사 소재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검증된 소설문학을 연극적 미학과 형식을 갖춘 희곡으로 각색하여 공연하기로 했는데, 이는 일회성으로 그치는 행사성 공연이 아니라 극단의 장기적인 레퍼토리 사업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필자가 극단 대표인 손정우 연출로부터 프로젝트 참여 제안을 받은 것은 2020년 12월 20일, 세 번째 각색 작업이었고 작품은 미정인 상태였다. 그날부터 각색하기에 적합한 작품을 찾기 위해 연출과 상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대적 배경은 근대로 한정하고, 사건 중심의 작품으로 갈 것인가, 인물 중심의 작품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로 작품을 추천하고,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다양한 소재의 소설이 많았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독창적인 해석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독자로서 신선했고, 극작가로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다만 무대로 형상화하기에 마땅한 작품을 찾지 못해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3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공연 일정이 잡힌 상태에서 작품 선정을 못하고 있으니 불안감과 피로감으로 스트레스가 쌓여갈 때쯤 연출이 김숨 작가의 소설 『한 명』을 추천했다. 하지만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말에 읽는 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소재가 주는 충격이 너무 강력해서 겁이 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다양한 장르에서 다뤘기에 변별성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작가관이다. ‘위안부’ 문제를 필자는 작가가 아닌 같은 여성으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객관화할 자신이 없었다. 20여년이 넘는 극작 활동에도 이 소재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유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기획의도에 마땅한 작품을 찾아야 했기에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자인 ‘그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참혹한 실상이 눈앞에 그려질 만큼 생생하고 세밀한 묘사에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힘들었다. 답답했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장면에서는 저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목울대가 얼얼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가족을 생각하고 고향을 생각하는 소녀들을 대할 때는 처연해서 감정이 북받쳤다. 책을 펼쳤다 덮었다 반복하다 보니 3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을 다 읽는 데 3일이나 걸렸다. 객관화가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참혹하다’, ‘끔찍하다’, ‘잔혹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단어로도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지독하게 잔인한 괴물일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그 대상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왜 왜 왜… 질문만 되풀이했다. 김숨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증언록을 읽으면서 본인도 놀랐다고 했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도 했다. 필자 역시 그랬다. 소설 『한 명』을 읽고서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한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빙산의 일각만 보았을 뿐인데. 그만큼 소설의 내용은 필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어떤 소설적 상상도 넘어설 만큼 가공할 만한 역사적 사실. 그 사실을 오롯이 기억한 채 살아야만 했던 아흔세 살의 ‘그녀’가 들려주는 삶과 기억들. 필자는 여러 편의 고전과 소설을 각색했다. 희곡을 현대적으로 각색하기도 하고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원칙은 하나다. 원작에 충실할 것. ‘원작에 충실하지 않으려면 창작을 하면 되지 왜 각색을 해?’라는 생각으로 각색 작업을 할 때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무대 형상화가 될 수 있는 구성에 주안점을 두려고 한다. 그런데 소설 『한 명』은 증언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실재와 작가의 상상적 개입이 적절하게 어우러졌다고는 하나, 증언들이 너무 강해서 원작을 살리는데 주안점을 두다 보면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그럼 연극적 미학은 소멸될 것 같았다. 연출은 모티브만 가져와서 새로운 창작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면 굳이 왜 각색을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필자의 원칙대로 각색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아 고민이 깊어졌다. 끔찍하고 처절한 피해자들의 삶을 굳이 무대에서 보여줘야 할까. 아니, 어떻게든 만들어서 보여줄 수 있다 한들, 실제 피해자들이 겪은 그 어마어마한 고통과 참혹함이 재현 가능할까. 흉내만 냄으로써 대상화되진 되진 않을까. 관객은 이 무거운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선뜻 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작품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그러다 지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리모컨만 눌러댔다.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필자는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오락프로그램을 찾아본다. 채널을 돌리다 내전을 겪고 있는 중동 지역의 상황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소설 『한 명』의 상황이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한다. 다큐멘터리는 ‘위안부’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작품화할 이유를 찾았다. 문제는 차별화였다. 소설 『한 명』이 다른 ‘위안부’ 이야기와 다른 점이 뭘까. 같은 소재를 다룬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작품이 피해자들이 겪은 지옥살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한 명』은 지옥살이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을 또 하나의 플롯으로 구축하고 있었다. 『한 명』은 화자인 ‘그녀’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 20만 명의 삶을 들려주면서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그들이 겪어야 했던 지옥살이 못지않은 고통과 번뇌의 참혹한 삶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위안소에서 해방된 지 73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 어떤 경험이나 기억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물론 일시적이었을 테지만 그 자체로도 엄청난 고통이다. 하물며 폭력의 수위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위안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는 어떠하겠는가. ‘그녀’가 ‘위안부’로서 살아야 했던 7년은 온전한 정신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잔혹한 경험이었고, 지우려 발악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이었으며 그로 인해 73년 동안 잠들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험한 과거가 창피스러워서, 너무 부끄러워서 형제자매에게도 죽은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못한다. 게다가 혼자 살아서 돌아왔다는 죄책감까지 안고 살아간다. 어느 날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고 매체를 통해 고백을 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녀’의 숨바꼭질은 계속된다. 이전에는 누구의 잘못인지도 몰라서 항변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채 철저히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다시피 하며 살았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간다. 폭력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번 가해진 폭력은 피해자에게 평생의 올가미가 되기 때문이다. 소설 『한 명』을 각색하기로 결정하고도 방향성에 대해 연출과 계속 의견을 주고받았다. 여전히 잘못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피해자의 호소를 부각시켜 국제적인 문제화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피해 당사자, 즉 개인의 삶에 미치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집중할 것인지…. 고민 끝에, 험한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는 ‘그녀’의 기구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안기는지를 보여주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연극 <한 명>의 희곡은 필자 혼자서 완성할 수가 없었다. 연습을 시작하는 7월 이전까지 공연 대본화를 위해 손정우 연출과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수정보완 작업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이 달라 부딪힌 적도 있었다. 필자가 작품에서 빠지겠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연출은 집요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은 여성을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다. 김숨 작가는 소설 『한 명』을 통해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해서, 연극 <한 명>은 연출의 재창작에 가까운 각색 요구에도 불구하고 소설 『한 명』의 내용을 충실하게 살리려 했다. 작가가 ‘그녀’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극 <한 명>이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을 향한 폭력의 위험성, 횡포성, 공포성, 잔혹성을 대변할 수 있다고 본다. 바람이 있다면, 연극 <한 명>이 소설 『한 명』과 함께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향한 불씨가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잘못이 없다고 말하며 피해자들의 바람과 요구를 외면하는 가해자들이 ‘그녀’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함께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김숨 소설가 김숨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바느질하는 여자』(2015), 『한 명』(2016), 『흐르는 편지』(2018),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2018),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2018), 『듣기 시간』(2021), 소설집 『간과 쓸개』(2011), 『국수』(2020) 등이 있다. 기사 게재일: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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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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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성산 일출봉(제주 일출봉 해안 일제 동굴진지) - 성산 위안소 터 - 모슬포(알뜨르 비행장) - 섯알오름 - 백조일손지묘 #제주도와 나 대학교에 입학하던 2018년, 갓 20살이 되었던 나에게 제주는 ‘평화의 섬’ 이미지가 강했다. 휴양을 즐기러 오는 관광객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넓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볼 때마다 아름답고 새로웠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는 단순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평화나비’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제주평화나비 활동은 단순히 피해자를 돕는 단체가 아니었다. 제주평화나비 활동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넘어 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의 섬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제주에 어떤 역사적 아픔이 있는지, 현재는 또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역사 기행과 이번 답사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직접 보고 만난 제주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결7호 작전과 제주도 태평양 전쟁 말, 패망을 앞둔 일제는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결7호 작전을 준비했다. 그중 6개의 결전지는 일본 본토에 있었고, 마지막 최후 결전의 장은 제주도였다. 이에 일제는 제주도를 완벽한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하기 위해 제주 전역에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그리고 군사시설 건립에는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강제 징용돼 흙 운반 일을 하다가 도로꼬(궤도차)에 깔려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다.”[1] 이는 알뜨르 비행장 확장공사에 징용된 김웅길 씨의 증언이다. 그의 증언처럼 당시 강제로 동원된 주민들은 굶주리고 매질을 당하는 등 반인권적 취급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주민들의 희생으로 제주 곳곳에 각종 군사시설이 설치되었고, 아직도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전히 아름다운 해안가에, 그리고 각종 오름에 존재하는 일제 동굴기지들이 전쟁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만약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불바다가 됐을 수도 있는 평화의 섬, 제주도의 역사를 따라 가보려 한다. #성산일출봉 일제 동굴진지와 성산위안소 #과거 일제 강점기로 돌아가 보기 흔히 알려진 것처럼, 성산일출봉은 제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한 번쯤 방문할 만한 관광지이다. 나도 성산일출봉 위에 올라가 제주의 풍경을 감상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는 관광객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자리해 온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마주했다. ‘제주 일출봉 해안 일제 동굴진지’는 다른 동굴에 비해 접근이 쉬운 편이었으나, 일반 여행객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동굴로 통하는 길이 어딘지 한참을 둘러보다가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는 해안가를 통해 진지동굴에 가까이 가봤다. 멀리서 봐도 동굴의 모습이 대략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동굴진지에 관한 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성산일출봉 동굴진지는 연합군이 성산포 해안으로 상륙할 경우를 대비해 만든 자살특공부대 시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그 동굴 안에는 자살 폭파 공격을 위한 소형선박이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런 동굴이 성산일출봉 동쪽 해안절벽을 따라 무려 18개나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바닷가로 나가지 않는 이상 18개의 모든 동굴진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고, 내가 있던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굴은 겨우 3개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시 강제 동원된 주민들의 고된 노역과 전쟁에 대한 일제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성산일출봉 일제 동굴진지로부터 대략 2~3분을 걸어가면 성산위안소 터가 나온다. 2019년 제주평화나비에서 갔던 ‘성산리 일본군 위안소 공개 기자회견’ 이후 첫 방문이다. ‘제주에 위안소라니’라는 마음으로 간 기자회견장에서 오시종(성산리 주민) 님의 증언을 들으며 참 많은 감정이 스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시종 님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셨다. 자살 공격을 감행할 자폭 병기의 조종사였던 요카렌[2] 생도들이 주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것부터, 30년 뒤 위안소에서 목격했던 여성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가 제주어를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여성들이 하루에 2~6명 정도의 요카렌을 상대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까지 모두 말씀해주셨다. 성산위안소 터에 처음 갔을 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터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랐다. 심지어 공터는 주변 식당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장소가 알고 보니 성산위안소 터였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역사적 가치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가 숨겨져 있는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다. 하지만 그중 제주도 출신 피해자는 한 분도 안 계신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만 봐도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섬이라는 환경, 고립된 제주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오시종 님이 위안소에서 목격했다던 그 여성 또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긴 채 여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아직 제주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충분히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채 모슬포로 향했다.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백조일손지묘 #반복되는 역사 일제는 제주도 내에 동굴진지뿐만 아니라 비행장도 총 다섯 군데에 설치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정읍 모슬포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이다. ‘알뜨르’는 ‘마을 아래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의 제주어로, 알뜨르 비행장 근처에 가니 실제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는 관제탑과 지하벙커 등 전쟁의 잔해들이 남아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비행기 격납고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어진 모습과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풀로 위장한 모습, 그리고 격납고 내부에 전시된 전투기 모양의 작품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격납고 내부에 전시된 작품은 태평양 전쟁에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투기 ‘제로센’을 똑같이 형상화한 것인데, 방문객들의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리본들로 휘감겨 있었다. 마치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합쳐져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행기 격납고 입구에는 격납고에 대한 설명을 만화로 풀어놓은 표지판이 있는데, 그 표지판에는 격납고가 6.25 전쟁 당시 미군기지로 사용됐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모슬포 주민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격납고가 결국 전쟁에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군사기지화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섯알오름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섯알오름은 글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곳이다. 그만큼 섯알오름은 제주가 겪은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잘 머금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 직접 방문해보면 좋을 것 같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섯알오름에 도착했을 때, 일제가 탄약고로 사용했던 터이자,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및 제단이 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섯알오름은 일제가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구축한 제주도 내 최대의 탄약고였고, 탄약고 위 오름 정상에는 일제가 항공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면서 탄약고는 미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그 폭파 과정에서 큰 웅덩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곳은 훗날 6.25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 집단 학살 터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4.3사건으로 인해 ‘레드 아일랜드’로 찍힌 제주도 안에서 법적인 절차 없이 예비검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까지 모두 예비검속자로 끌려갔다. 그리고 1950년 8월 20일 새벽 4~5시경, 모슬포경찰서 관내에 예비검속된 252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새벽 트럭에 실려져 섯알오름으로 향하는 길, 그들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리고자 했고, 트럭 이동 중에 자신이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던졌다. 군인들에 의해 희생자들의 유품은 불태워졌지만, 당일 새벽 길 위에 흩어져있는 고무신을 보고 쫓아온 유족들에 의해 현장이 발견되었다.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군경은 6년이 지나도록 출입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시신 수습을 허가받았을 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유족들은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아 한 곳에 모셨다. 그리고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서른 두 자손이 한 날, 한 시에 죽어 하나의 뼈로 엉키어 하나의 자손으로 환생하시라’는 의미를 담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비석을 세웠다. 스산한 분위기의 ‘사계리 공동묘지’를 지나 희생자분들이 모셔져 있는 ‘백조일손지묘’로 가는 길, 6.25 전사자 충혼비가 보였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의도치 않게 또 만나게 되었다. 백조일손지묘에 도착해, 입구에 설치된 표지판의 설명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오래돼 보이는 표지판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시 나보다 어리거나 내 또래의 사람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됐다는 것이었다. 희생자 대부분의 나이가 10대에서 30대 사이였고, 유족의 대부분이 희생자의 부모였다. 4.3을 거치며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이 찍힌 제주도에서 6년 동안 자식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을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지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분노가 일었다. 5.16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묘비 조각이 전시된 것을 보고는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전쟁이, 국가 권력이 도대체 뭐길래 제주의 역사는 이토록 끊임없이 아파야만 했는지…. 애틋한 마음이 들면서 화가 났다. 알뜨르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된 모슬포 주민, 일제와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타국의 피해자들, 6.25 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집단학살 희생자와 제주 4.3 피해자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모두 공통점이 있다. 전쟁과 폭력 상황에서 약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하기 마련이다. #잊는다는 것의 결과 여기까지 제주에서의 다크투어 여정은 마무리된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제주도로 향하는 여행객들의 설레는 발걸음을 이어주는 제주공항은 사실 일제가 제주 내에 설치한 또 다른 비행장이자, 4.3 당시 최대의 학살 터인 정뜨르 비행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항이라는 특성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당시 많은 학살이 이뤄졌고, 희생자들의 시신은 바로 수습되지 못했다. 넓게 펼쳐진 활주로 밑, 4.3의 아픔이 묻혀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수십 년간 진행해온 수요시위에서 늘 재발 방지를 외쳐왔다. 다시는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군사기지화와 가부장제의 구조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전시 성폭력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반복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내전 중인 국가에서는 여전히 전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평화를 외치는 이유이자, 일제에 의한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를 후에 미군들이 사용한 것처럼. 일제 군사시설이 위치한 섯알오름이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 학살 터가 된 것처럼. 제주에서 국가에 의한 또 다른 군사기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강정해군기지). 그렇기에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모두가 평화를 위해 행동하고 함께 하는 미래를 그려본다. 각주 ^ "제주는 거대한 군함도였다" 도민 4만명 일제 군사요새 강제노역, 연합뉴스, 고성식, 2017.08.14. ^ よかれん(予科練).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의 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