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여행에세이]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통영 인권평화길 투어 추천코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정의비(남망산조각공원 입구) ⇒ 강구안(거북선, 판옥선) ⇒ 충렬사 방향으로 이동(충렬로) ⇒ 서피랑 99계단 ⇒ 야마호텔 옛터(현재 도로로 정비) ⇒ 서포루(360도 통영항 전경)  남쪽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통영. 통영은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수산자원, 여기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천혜의 자연경관이 더해져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동네 갯가에만 나가면 바지락, 굴, 파래, 톳, 청각, 미역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캐 와서 요리해 먹기만 하면 되었고, 집이 아닌 곳에서 대충 잠을 자도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곳이었기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타지역의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통영을 찾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윤이상, 전혁림, 박경리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통영은 예향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설치되었던 삼도수군통제영(현재의 해군본부)과 부속 12공방은 통영의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유·무형 유산을 남겼다. 나전칠기, 소목장, 대발, 갓 등 수많은 무형문화재와 함께 독특한 음식문화까지 더해진 문화예술자원의 보고로 통영은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예향의 도시 통영에도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알려졌다. 그것은 바로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였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위안부’피해 최초 공개 증언으로 나라 안팎은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고, 뒤를 이어 터져 나온 또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나도 피해자다”라는 목소리는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에 불을 지폈다. 1991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신고전화가 설치되고 이듬해부터는 전국 읍면동사무소에 정신대 피해 신고전화가 설치되면서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피해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신고가 줄을 이었다. 신고자들은 정부의 심사에서 인정되어야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공식 등록될 수 있었다. 신고 이후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정신대연구소(1990년 설립)는 전국을 돌며 이들의 구술을 채록하였고, 그 과정에서 통영을 방문한 연구원을 통해 통영에도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들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언론에 보도되고 신고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동네방네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간 후, 통영지역 피해생존자들이 가족이나 친지, 주변 지인 등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신고하기 시작한 때가 1993~1995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정부가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신고하지 않은 피해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연구원을 통해 알게 된 통영지역 등록피해자는 6명이었다. 이는 등록 당시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중일전쟁 이후인 1938~1939년 사이 동원됐다. 통영지역 피해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일찍 동원되어 6~7년간 장기간에 걸쳐 피해를 입은 ‘위안부’피해자들로 연령대가 전국 최고령이라는 점이다. 1918년생 맏언니부터 1924년생 막내까지, 이들 모두 고무공장 등 좋은 공장에 취직된다거나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상해, 대련,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등지의 일본군 위안소로 동원됐다.  통영지역에 등록된 피해생존자들이 많은 관계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구술채록을 위해 통영을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할머니들의 증언을 접하게 되었고, 이들 모두가 당시 해상교통 중심지였던 통영 강구안에서 배에 태워져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원의 출발지, 통영 강구안 통영 강구안 일대는 통영 관광의 중심지로 거북선과 판옥선 4대가 있어 관광객들이 필수코스로 들르는 장소이다. 강구안은 삼도수군통제영 당시 수군들의 배들이 정박해있던 천혜의 군사 요새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수탈에 대항하여 통영 최초의 항일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는 세병관과 충렬사, 동피랑, 서피랑, 남망산공원, 중앙시장 등이 있어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로 많이 알려져있는 곳이다.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앞바다는 일제강점기 당시 세계 3대 어장으로 유명하여,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개항해 뱃길이 발달해 있었으며 합방 이후에는 상선과 무역선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항구였다. 또한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어족 자원은 일본인들이 일찍이 대거 통영으로 들어와 거류민 부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 거류민이 있는 곳엔 언제나 공창 형태의 유곽이 형성됐는데, 통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곽이 들어섬에 따라 여성을 공급하는 소개소가 생겨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전선을 확대해감에 따라 수많은 일본 군인들이 전쟁터로 동원됐다. 오랜 전쟁을 수행해온 일본 군인들은 부대에서 자행되는 폭력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그로 인한 불안과 불만은 난징대학살과 난징강간이라는 잔인한 폭력으로 귀결되었다. 군대에 만연했던 성병은 군의 사기를 더욱 떨어트렸으며, 일본군의 중국 현지 민간여성 강간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은 군위안소를 설치하여 ‘위안부’를 모집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다.  1938년 일제의 전시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전쟁 수행을 위한 대대적인 인적 동원이 시작되었고, 통영도 모든 시스템이 전시 동원 체제로 편입된다. 일본 거류민을 따라 생겨났던 소개소도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면서 위안소에 여성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통영지역이 경남지역에서 피해자가 많은 지역 중 한 곳이 된 이유는 바로 이런 구조적인 결합과 해상교통의 발달로 ‘위안부’ 집결지였던 부산으로의 동원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통영, 거제 지역에서 모아온 여성들을 강구안에 있는 여관에 가둬놓고 목표치가 채워지면 배에 모두 태워 최종 집결지인 부산으로 수송해갔다. 통영 강구안은 통영, 거제 등 인근지역에서 동원해온 여성들의 1차 집결지였다.  강구안은 당시 대부분 15~16세의 어린 소녀들이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호강시켜주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배를 타고 갔던 장소였다. 그들이 천지도 모르는 낯선 땅 중국, 대만,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등지의 위안소로 갈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도착할 곳이 공장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소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10대에 끌려가 해방 이후 20대가 되어서야 겨우 배를 타고 또 타고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게 아름다운 고향 통영의 강구안은 가슴에 맺힌 한 많은 장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남망산공원에 자리한 정의비 강구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앞에 얕은 남망산이 보인다. 통영시민문화회관과 통영조각공원이 있는 남망산공원은 도심 시민휴식공원으로 통영시민의 삶이 깃든 곳이며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전망이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강구안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남망산공원 입구가 나오는데,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면 제일 먼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명예와 인권을 위한 정의비다.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정의비는 2013년 4월 6일 민간이 주체가 되어 세운 기림비다.  아픔이 서린 통영 강구안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정의비는 할머니들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2002년 설립, 이하 시민모임)이 2012년 하반기부터 통영지역일본군‘위안부’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통영시민, 학생, 경남도민 등 시민 모금에 통영시의 건립비 보조금, 부지제공, 경상남도의 건립비 보조금 지원이 보태져 세워졌다. 정의비는 포천석으로 된 석상으로 두 팔을 벌린 채 반추상적인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전신상으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중에는 10대 소녀를 비롯해 20대 여성도 있었기에 피해 여성 모두를 상징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정의와 당당함을 나타내고,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바라며 무언의 미소로 평화의 손짓을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지구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범죄의 피해 여성들을 감싸 안으며 전쟁과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뜻도 담고 있다.  전신상 아래에는 원형 기단석이 놓여있고, 기단석 표면에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강제 동원과 피해실태를 나타내는 공문서와 사진, 그림 작품들이 시대순으로 새겨져 있다. 기단석 정면 중앙에는 비문을 새겨 정의비의 건립 취지와 의미를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데크에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를 설명해놓은 설명판이 있어 피해역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시민모임은 매년 4월 7일 정의비 건립일과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에 기념식과 추모제, 세계연대집회를 정의비 앞에서 개최해오고 있으며, 정의비 위쪽에 있는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과 대전시실에서도 영화제와 다양한 전시를 매년 이어오고 있다.  서피랑 언덕에도 아픔이 정의비에서 다시 강구안 쪽으로 내려와 시내 중앙로를 따라 충렬대로(충렬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중간 즈음에 서피랑 언덕이 보인다.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반대쪽에 있는 서피랑은 꼭대기에 서포루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통영 전경이 360도로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로 정비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점차 늘고 있는 곳이다.  정비 이전 서피랑은 동피랑처럼 언덕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야마호텔’이라 불리는 집창촌이 있었다. 야마호텔은 산(山)의 일본 발음인 야마와 영어인 호텔이 조합된 단어로 집창촌의 이름이었으며 ‘야마골’이라고도 했다. 어린 시절 서피랑 언덕에 줄줄이 빨간불이 켜진 집이 무서웠고, 밤만 되면 귀신이 나올까 봐 그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야마호텔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해방 이후라고 전해진다. 당시 통영은 수산업이 매우 활발하던 때라 원양어선 등의 선원들이 주로 이용했고 일반 남성들도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야마호텔은 1990년대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비되었으나 낡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2013년부터 서피랑 마을만들기 사업이 추진되면서 해당 건물들이 철거돼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해방 후 돌아온 일본군‘위안부’피해 여성들은 대부분이 20대 나이였다. 차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돌았던 여성들,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으나 말도 못 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여성들, 부모와 자신을 원망하며 술로 담배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을 여성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자신의 머리를 대청마루에 찍으며 몸부림쳤던 여성, 살아내기도 죽기도 힘든 처지를 비관하며 자포자기 상태에서 요정으로, 선술집으로, 집창촌으로 향했던 여성들…. 그렇게 통영에서도 야마호텔로, 선술집으로, 요정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흘러 들어갔다. 식민지의 여성으로 태어나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어 멀리 이국땅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의 구타와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했다. 비단 ‘위안부’ 피해자만이 아니라 집창촌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폭력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스러져갔으리라.  서피랑을 찾을 때면 99계단 맨 위쪽에 야마호텔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라도 기억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폭력에 신음하며 스러져간 자리, 20대가 되어 돌아온 ‘위안부’ 피해자의 피맺힌 울음이 배여 있는 자리인 야마호텔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숨기고 묻어야 할 역사가 아니라 드러내어 알려야 할 곳이다. 여성 차별에 기반한 성폭력이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자행되지 않도록 젠더폭력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새기고 새겨야 할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아픔을 기리고 위로하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 서피랑을 내려오면서 통영지역 피해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다. 남자라면 치가 떨려 조카를 키우며 평생 홀로 사셨던 할머니,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남성들에 속아 힘겨운 삶을 사셨던 할머니, 아버지뻘 되는 남성에게 후처로 들어가 말 못 할 서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 할머니들….   그들 바람은 오직 하나였다. ‘나 너무 억울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일본이 나를 속여서 위안소로 데려가 내 청춘을 이렇게 망가트려 놓았으니 책임져야지. 잘못했다고 해야지. 참말로 사죄해야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서피랑을 내려오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열네 분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몇 년 후 다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일본의 사죄를 받아낼 것인가. 어떻게 할머니들의 외침을 기억하며 이어갈 것인가. 바로 앞에 던져진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  단체소개 전시성폭력범죄인 일본군위안부제의 진실과 정의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여 피해여성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실현하고 나아가 성차별, 성폭력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시민사회를 만들고자 2002년 설립, 주로 경남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활동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치유사업 : 정서적 안정 및 심리치유 사업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인권명예회복사업: 범시민탄원엽서보내기운동, 평화인권문화제, 피해자 소송지원 사업, 국제공조사업  -교육사업: 온오프 대중강연 사업, 심포지엄, 청소년공모사업, 온오프 전시회, 다크투어  -기록사업: 경남지역 피해전수조사사업, 경남지역 피해자료 아카이브 구축사업, 경남지역 해결운동사 기록사업, 경남지역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사업  기사 게재일: 2021.09.10. 

    송도자

  •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배삼엽 1925년 조선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남. 1937년 13세에 중국 내몽고 바오터우(包头)로 3~4년간 동원됨.  “한국에서 살 곳도 없고, 늙어서 돈을 어디다 쓰갔어. 귀찮아.” 중국 우한(武汉)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의경을 만난 후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야간 휘처잉워(딱딱한 침대 기차)를 타고 10시간 만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새벽 뿌연 안개에 싸인 역에서 배삼엽이 사는 톈단(天坛) 호텔까지 택시를 탔다. 2001년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면서 전화번호만 받아 두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위치를 설명해 주었더니, 그는 양딸을 마중 보낸다 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만날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중 예전에 보았던 톈단 호텔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 다다랐을 때는 그의 딸이 나를 먼저 알아보았다. 첫 만남이었지만, 나의 옷차림과 큰 가방을 끄는 행색으로 나를 알아본 듯했다.  딸을 따라 회이퉁(골목길)에 들어서니 저 멀리 지팡이를 한 배삼엽이 눈에 들어왔다. 밤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길을 찾아 헤매느라 나의 모습이 초췌해 보였는지, 그는 먼저 나를 조선족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냉면 두 그릇과 만두를 시켰다. 한 그릇이면 족하다고 했지만, 남자라면 이 정도는 먹어야 한다며 주문을 했다.  피해자를 만나면서 항상 어떡하면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처음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대면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지금은 피해자들과 같이 밥을 먹고, 며칠을 지내다 보면 마음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우리말 중에는 ‘식구’라는 말이 있듯이 혈연 관계인 가족만큼 한솥밥 먹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래서인지 피해자가 주는 것들을 사양 않고 다 먹다 보면, 그것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는 듯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5층짜리 아파트 복도는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안쪽에 자리한 그의 집까지는 벽을 더듬으며 들어섰다. 20㎡ 넓이의 거실 겸 침실로 쓰는 방안에는 침대, 소파, TV 등이 2년 전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의 머리카락은 더 허예졌고, 등은 더 구부정해져 오랜 시간 바로 앉아 있기 힘들어 보였다. 1985년도부터 앓아온 백내장은 더 방치하면 실명까지 갈 수 있다 하여 수술 날짜를 잡았으나, 내가 온다는 소식에 며칠 늦추었다고 하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중국의 의료비가 얼마나 드는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그가 젊었을 때 일하던 박스를 만드는 공작소에서 수술비 상당 부분을 부담해주기로 해 천만다행이었다.  “‘아! 이거 속았구나’ 가슴이 철렁했어….” 배삼엽이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하동이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3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이 무렵 계급장이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만주에 가면 여러 일 중 골라서 할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여자들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는 엄마를 잃은 슬픔에 모집책을 따라 나설 결심을 했다. 여기에 오빠의 설득도 한몫했다. 오빠는 모집책에게 4년간 일 하는 조건으로 선금 400원을 받고 그를 중국으로 보냈다.  부산에서 경성까지 기차로, 인천에서 톈진(天津)까지 배로, 톈진에서 내몽고 바오터우(包头)까지 갔다. 역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아사히칸(朝日)’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유곽에서 화려한 화장과 기모노 차림의 여자들을 보자마자 ‘아! 이거 속았구나’ 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2층 5번 방에 배정받은 배삼엽은 그곳에서 게이코(ゲイコ)로 통했고 군인들은 ‘조쎈삐(朝鮮屄)’라 불렀다. 그가 어리고 처녀라는 이유로 위안소 주인과 일본군 장교 사이에는 하룻밤에 군표 100원이라는 거금이 오갔다. 피해자는 ‘일주일 동안 거기서 피가 나고 칼로 베는 듯 아파서 걷지도 못했다’라고 증언했다. 유곽 형태의 위안소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는지 여자 두 명이 아편을 먹고 자살할 정도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3년이 될 즈음 그는 밥 한 술만 먹어도 피를 토하는 병에 걸렸다. 군의관은 여기서는 병명을 알 수 없고, 고칠 수도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위안소 주인 또한 차비를 주며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미련 없는 조선을 등지고 다시 중국으로    배삼엽은 부산에 도착해 이모의 집에서 한약 3첩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고서야 병이 나았다. 이모는 조카 귀남(배삼엽의 아명)이가 돈을 벌러 싱가포르에 갔다고 말하는 순간 그곳에 무엇을 하러 갔는지 눈치챘지만, 배삽엽은 차마 이모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할 수 없었다.[1]  조선에 머무는 동안 친척 집을 오가며 지냈지만, 부모님도 안 계시고 친척에게 신세 지기 싫어 그는 홀로 중국으로 향했다.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소로는 가지 않고 톈진에서 미군을 상대로 춤을 추고 돈을 받는 클럽에서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해방을 맞으면서 베이징으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  타국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고달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을 먹기도 하고 수면제 200알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을 여러 번 기도하기도 했다. 배삼엽은 친자식이 없어 36살 때 조선족 여아를 입양해 키웠다. 딸은 같은 아파트 3층에 살면서 그를 보살피고 있었지만, 사위가 마카오에 일자리를 구해 1년의 대부분을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는 베이징에 살면서도 조선말을 잊지 않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절 유행하던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을 부엌일 할 때마다 혼자 흥얼거리며 눈물 흘린 세월이 반이라 했다.  1999년까지만 해도 그는 북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국적을 중국으로 바꾸고 한 달간 고향 방문을 하며 조카를 만나며 다녔다. 그는 한국에서 ‘위안부’피해자로 등록을 하려 했지만, 이미 호적에 사망신고가 되어 있고, 1년 이상 걸리는 국적 회복과정이 쉽지 않아 그냥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국적 회복의 기회가 있었지만, 더는 조선에 미련이 없다며 포기했다.  2011년에 돌아가셨지만, 2014년 그의 딸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그가 살던 집으로 찾아갔다. 문이 잠겨 있었고 창 사이로 방안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 앞을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한 청년이 아는 체를 했다. 아파트 앞 노상에서 자전거를 수리하는 이였는데, 몇 년이 지났음에도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를 통해 피해자가 베이징 근교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여나 마카오에서 사업을 하는 딸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부를 묻고 연락을 부탁한다는 편지를 문틈으로 남기고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다.  [사진 설명] 중국 위안소에서의 삶, 그리고 남겨진 이후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 배삼엽은 1960년대 중국 혁명가 저우언라이(周恩来)를 본 후 직장을 구하는 등 그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을 방에 걸어 두었고 그에게는 그것이 사진 이상의 의지와 힘이 되었다.   [사진 설명] 그가 유일하게 연락했던 조선인은 차로 30-40분 걸리는 곳에 사는 피해자 이귀녀이다. 서로 몸이 불편해 오가며 만날 수 없어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생전, 그의 전화 번호마저 기억에 없고 눈마저 보이지 않아 그전만큼 연락이 수월하지 않았다.   각주 ^ 가족들은 귀남이 싱가포르로 동원됐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만주와 인도네시아로 동원됐다.    기사 게재일: 2021.09.23.

    안세홍

  • [여행에세이]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천안 독립기념관(제2 전시관-겨레의 시련관) → 국립 망향의 동산(추모비-장미묘역-망향의집-무연고합장묘역) → 천안 평화의 소녀상(신부공원) #천안 독립기념관   천안(天安)은 하늘아래 편안한 곳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3.1만세운동의 함성과 유관순열사의 고향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많은 곳 중 하나이다. 아우내 장터의 뜨거운 함성과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독립기념관으로 향한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역사를 잊지 않고 진실을 지키려는 국민들의 모금과 역사자료 기증 운동의 결과로 1987년 8월 15일 개관됐다. 그 뒤로 해마다 8.15광복절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들어서면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고 날카롭게 솟아있는 겨레의 탑이 우리를 마주한다. 겨레의 탑을 지나면 독립기념관의 대표 건물로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만든 동양 최대의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겨레의 집 뒤편으로는 총 6개의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관의 테마는 ‘우리 민족의 뿌리’로 출발해 ‘민족의 시련’과 ‘겨레의 함성’, ‘독립운동’, ‘일제에 맞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제2전시관 ‘겨레의 시련’관에서는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일본군‘위안부’강제동원의 아픔이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나신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님과 북이 고향인 김화선 님의 증언이 담긴 영상을 볼 수 있다. 일본의 강제동원을 당당하게 밝히는 그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밖에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역사적 자료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파렴치함에 주먹을 쥐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전시관을 나선다.       #국립 망향의 동산      망향(望鄕)…. 고국을 그리워하다. 푸르른 가을 하늘아래 펼쳐진 초록의 잔디와 많은 묘역들은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한다. 저 작은 돌 아래 잠들어 있는 망자들의 수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과 눈물을 푸른 하늘은 알고 있을까.   망향의 동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난 후 망국의 서러움과 갖은 고난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숨진 재일동포들의 안식을 위해 1976년 10월 2일 조성되었다. 이후 해외동포 가운데 조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만 적당한 묘역을 구하기 어려운 분들의 경우 이곳에 모셔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위안부’피해자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해외 여러 곳을 거치며 고통을 당하셨기에 본인과 가족들이 원할 경우 이곳에 모셔지고 있다. 사실 부끄럽게도 천안 토박이인 나도 이곳 망향의 동산에 ‘위안부’피해자들이 잠들어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이 되었음에도 아직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을 기억하고자 천안시민들과 함께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을 하며 망향의 동산에 잠들어 계신 할머니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장미묘역에 잠들어 계신 고(故) 김학순 님의 묘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올해는 김학순 님이 “내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다”라고 첫 공개증언을 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위안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에 ‘희생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그 ‘존재’를 증명하며 세상을 깨운 용기 있는 증언을 하신 김학순 님.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증언을 한 지 30년이나 지났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하셨던 진정한 사과와 명예회복은 여전히 이뤄지고 있지 않음에 가슴이 아파온다. 안타깝게도 연세가 많고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점점 이곳에 오고 계신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꿋꿋하게 일본의 사과를 외치며 전 재산을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나비기금에 기부하고,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장학기금재단을 마련한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님도 2019년 2월 1일 이곳에 잠드셨다.  1000번째 수요시위에서 “이 늙은이들 다 죽기 전에 하루 빨리 사죄하라! 알겠는가. 일본대사여.”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 치셨던 모습이 생생한데, 이제 말없이 이곳에 잠들어 계신다. 안타깝게도 김복동 님 별세 이후 몇 분의 피해자가 영면에 드셨다. 진실을 알리고 진정한 사과를 듣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치열하게 사셨던 그들이 떠나고 남은 빈 자리는 이제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이곳 망향의 동산의 장미묘역과 납골당인 망향의 집에는 56명의 ‘위안부’피해자들이 잠들어 계신다. 누군가의 묘비에는 노란 나비가 붙어있지만, 그렇지 않은 묘비가 더 많다. 고인의 가족들이 ‘위안부’피해자인 것을 밝히기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이,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곳에는 김학순 님과 김복동 님 이외에도 그들의 벗들이 주변에 많이 잠들어 계신다. 망향의 동산에 안장된 ‘위안부’피해자의 특별묘역을 추진하여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고인 가족들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여 묘역을 별도로 만드는 것은 추진되지 않았고 2015년 8월에 ‘위안부’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추모비의 명칭은 ‘안식의 집’이며 ‘영혼의 눈-시간의 벽-연대의 벽-승화의 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쪽 바닥에는 피해자의 글귀가 적힌 돌이 있다. 안식의 집의 의미를 살펴보면 영혼의 눈은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기억하는 우리들의 시선, 그리고 그들이 흘렸던 눈물을 상징한다. 시간의 벽은 피해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오랜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표현했다. 연대의 벽은 피해자로 침묵하던 할머니들이 인권운동가로 연대하며 활동했던 시기를 상징한다. 승화의 벽은 추모비가 연이어 선 형상으로, 피해 할머니들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눠 두려움과 고통, 좌절, 고된 삶, 용기와 활약,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모습 등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모습처럼 고인들은 편안하게 웃으며 하늘을 날고 계실까. 그 답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무연고합장묘역  망향의 동산 가장 위쪽 언덕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연고합장묘역이 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때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희생되었던 분들을 위한 묘역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기에 유골만을 추려서 합장한 묘역이다. 오른쪽에는 뜻 있는 일본인들이 세운, 고보댐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의 죽음에 사죄하는 비가 있다. 고보댐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은 약 4000명에 달한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마저 유린당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공사장에 매장되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그들의 죽음 또한 우리 역사의 비극의 한 장면이며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이들이다.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부정하고 있으며 역사 지우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그들의 역사왜곡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사실을 잘 알려주는 것이 2017년 3월에 있었던 사죄비 무단훼손사건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연행의 책임자였던 요시다 세이지(吉田 清治)가 자신들의 범죄를 참회하고 반성하며 희생자들을 위해 1983년12월 사죄비를 세웠다. 사죄비에는 ‘귀하들께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 시 징용과 강제연행으로 강제노동의 굴욕과 고난에 가족과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나는 징용과 강제연행을 실행 지휘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인도적 그 행위와 정신을 깊이 반성하여 이곳에 사죄하는 바입니다. 늙은 이 몸이 숨진 다음도 귀하들의 영혼 앞에서 두 손 모아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요시다의 장남은 부친의 증언이 위증이라며 일본의 극우인사를 통해 사죄비를 위령비로 교체하도록 시켰다. 다행히 수사기관을 통해 범인이 잡혔고, 사죄비는 복구되었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은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경각심이 필요하다.   #천안 평화의 소녀상    “우리에게는 아직 진정한 해방이 오지 않았습니다.” ‘위안부’피해자들의 가슴 맺힌 절규를 기억하고 함께 행동하고자 2017년 8월 천안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많은 시민들과 학생, 기업들의 모금으로 천안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됐다. 소녀상은 빈 의자와 앉아있는 소녀, 함께 해주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으로 구성돼 있다. 시민들이 언제든 편하게 보며 기억할 수 있도록 소녀상은 천안의 가장 번화한 거리의 작은 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바람처럼 시민들은 계절에 따라 늘 소녀상과 함께 하고 있다. 비가 오면 우비를 씌워 주고, 겨울이 되면 망토와 모자와 덧신을 입혀준다. 어느 날에는 사탕과 초콜릿을, 어느 날에는 곰 인형을 소녀상 옆에 놓아준다. 참 고마운 마음들이다. 그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잠들어 있는 그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날을 기원하며 소녀상은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기사 게재일: 2021. 10. 01.

    김용자

  •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听不东 (팅부동)[1], 왜 같은 말을 자꾸 물어” 백넙데기 1922년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태어남. 1939년 18세에 중국 난징, 우한으로 6년간 동원되었다가 중국에 남겨짐.   중국의 옌볜(延边)에서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만났지만, 내륙 깊숙한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汉)까지 위안소가 설치되고 피해자가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에야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양쯔강(长江)을 따라 난징(南京)을 거쳐 3일 넘게 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군은 중국 내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국민당의 수도이자 교통의 사통팔달인 우한을 점령하려 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과 5개월이 넘도록 ‘우한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서야 우한을 차지했다. 이후 이곳에는 대규모의 일본 해군과 육군 본부가 주둔했고, 군을 위한 위안소도 도시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양쯔강 가까운 지칭리(积庆里)의 한 골목에는 20개의 위안소가 생겨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300여 명의 일본/조선 여자가 있었다. 그 골목은 도시개발 속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어 그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고, 시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보존하고 있다.    이곳을 처음 찾은 2001년에는 3명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13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었다. 우한 시내에서 피해자 하상숙과 김의경을 만나고, 또 다른 피해자 백넙데기를 만나기 위해 하상숙을 따라 택시를 타고 시 외곽으로 갔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시간을 달려 황피(黄陂)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시장통으로 보이는 골목길에는 상가 문이 닫혀 있고, 그 가운데 백넙데기의 집이 있었다. 그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미리 연락을 받은 그의 아들 내외가 먼저 반겨주었다. 언뜻 작은 식당을 하는 듯 보였고, 피해자가 사는 2층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왔어요.”  그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지 마는지 경계하는 눈웃음으로 들어오라는 손짓만 할 뿐이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우한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교류가 없어 간단한 조선말조차 잊은 지 오래인 듯 보였다. 하상숙을 통해 중국어로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 조차도 황피 특유의 사투리가 심해 의사소통이 녹록하지 않았다. “할머니 어디서 태어났어요?”라고 묻는 말에 그는 짧게 “세평리”라고만 답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지도에서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세평마을을 찾을 수 있었고, 호적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남편은 술집으로, 술집은 위안부로 팔아 넘겨 백넙데기는 소작농 집에서 6남매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2]로 갔다. 혼례는 치르지 않았지만 남편과는 부부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를 술집에 팔았고, 거기에서 또다시 중국으로 팔려 왔다. 어려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인지 엄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120원에 팔려 갔다. 그 돈은 누가 어떻게 가져 갔는지 그는 몰랐다.   처음 도착한 베이징에서는 반점에서 두 달 동안 밥과 빨래를 했다. 그리고 20여 명의 여자들과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있다가 군부대를 따라 우한으로 왔다. 위안소 주인은 장교로 퇴역한 일본인 2명이었다. 우한에서 좀 더 시골로 들어가 군부대가 있는 곳을 옮겨 다니며 군인을 상대했다. 하루는 일본군을 받지 않으려 하자 주인이 들어와 왼쪽 검지를 칼로 잘라버렸다. 잘린 손가락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자 그는 본능적으로 다른 손으로 재빠르게 가렸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위안소에서의 생활에 관해 묻자 “팅부동, 왜 자꾸 같은 말을 물어”라며 화를 냈다.  피해자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도망가는 일본군이 알려줘서 알았다. 백넙데기와 다른 여자들은 남아 있는 돈을 모아 배를 타고 양쯔강을 따라 한커우(汉口)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에는 그곳에 남아 살 수밖에 없었고, 피붙이 하나 없이 여자 혼자 사는 것이 어려워 지금 있는 곳에서 남편을 만나 살았다.    중국도 북한도 아닌 무국적으로 살아남기   나이, 생년 등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옆에 있던 며느리는 신분증이 따로 없다며, 낡고 작은 수첩을 들고 왔다. 겉면에는 외국인 거류증이라고 쓰여 있었고, 안쪽에는 그의 사진과 5년마다 공안의 확인 도장이 찍힌 내용만이 있었다. 이름도 백넙데기가 아닌 이잉란(易英兰)이라는 중국식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50여 년의 세월 동안 시골 마을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요원했다. 일본, 한국, 북한, 중국 등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얘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백넙데기는 한국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하상숙을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머물 곳도 없고 가족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을 벗어나려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동안 “쌰오 이쌰오(笑一笑)” 웃어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쓴 웃음만이 파인더에 들어오는 것이 그동안 그가 겪은 역경을 보는 듯했다.  2018년 경남지역 역사 동아리 고등학생들과 역사 투어를 위해 난징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컸던 위안소를 전시관으로 개조한 난징리지샹구위안소전시관(南京利济巷慰安所旧址陈列馆昨开馆)을 찾았다. 그곳에는 위안소 제도의 역사와 함께 피해자 개개인의 방이 마련돼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잉란의 이름으로 된 백넙데기의 방[3]이었다. 다른 피해자에 비해 사진이나 유품은 적었지만, 이렇게나마 그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웠다.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으로나마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에 그 방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사진설명] 점심시간이 되자 그는 만두를 담은 작은 그릇과 나무젓가락을 내밀며 얼른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은 여느 시골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이 친근해 보였다.  [사진설명] 작은 서랍장에 담긴 그의 옷가지와 물건이 그가 가진 전부이다. 무엇 하나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남루해보이지만, 그는 하나하나 다 소중히 여겼다.   각주 ^ “못 알아듣겠다”는 뜻의 중국어 ^ 훗날 며느리로 삼기 위해 데려다 기르는 여자아이 ^ 피해자의 이름으로 된 방에는 위안소를 묘사한 방도 있고, 피해자의 유품을 모아놓은 방도 있다.   기사 게재일: 2021.10.5.  

    안세홍

  • “평화는 집단의 노력이다”!?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를 열며
    2021년 논평 “평화는 집단의 노력이다”!?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를 열며

    “Peace is a group effort”. 20여 년 전, 헤이그 NGO 국제평화회의장 한구석에 걸려있던 현수막에서 이 말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분단이라는 군사적 긴장 관계 속에서, 협정이 체결되면 평화가 ‘정착’된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을까. 평화란 법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던 나에게 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평화가 어떤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의 노력”이라니! 말문이 트이는 것 같은 쾌감과 함께 새로운 난제에 맞닥뜨린 듯한 마음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집단적 노력이라는 사회적 과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는 여성가족부의 후원하에 오는 10월 13-14일 양일간 일정으로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이하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컨퍼런스는 집단의 노력으로서의 평화는 결국 여성을 비롯한 타자들의 인권과 맞닿아있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사법 정의의 문제, 전쟁의 성별성(gender)과 평화교육, 기억이라는 정치의 문제를 심도 있게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과거를 아는 것과 과거에 대해 해석하는 현재라는 맥락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현재의 지표라는 점에 주목하는 논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이슈가 논의될 때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의 한 가지가 배상과 사죄, 그리고 명예 회복이라는 말이다. 여성학자 김정란은 성폭력 상황에서 “명예롭지 않은 유일한 당사자는 가해자”라는 점을 상기하며, 성폭력을 “여성의 명예 실추와 연관시키는 사고방식”의 “후진성”을 역설한다. “성차별적 사고는 상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수치심을 피해자에게 떠넘김으로써 가해자 처벌의 기회를 축소할 위험”마저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명예 ‘상실’을 전제함으로써 이미 그들이 담보하고 있는 존엄과 명예를 오히려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한다. 일상에서 숨을 쉬듯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게 간주 되어 온 인식이 얼마나 반여성적인 폭력일 수 있는지 제기하는 그의 시선은 시사적이다(김정란, 경향신문 2020년 6월 24일, 기고,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 사전에는 명예(名譽)란, “자기의 도덕적, 인격적 존엄에 대한 자각 및 타인의 그것에 대한 승인과 존경”이라고 나와있다. 이름 명(名), 기릴 예(譽)라는 한자의 조합, 누군가의 이름을 기린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누가 누구의 이름을,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리는가. 강물이 흐르면 강기슭의 형상이 변화하는 것처럼 사람의 이름을 기리는 명예라는 가치 또한 시대 인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명예는 고정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명예의 회복과 미회복의 경계를 결정짓는 것은 타인과 ‘나’와의 관계, 즉 사회의 의식이다.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는 칼럼의 제목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논의의 틀 자체, 즉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당위로서 여겨지는 성차별적 전제를 문제 삼고 있다. 컨퍼런스 기조 발제를 맡은 크리스틴 친킨은 “젠더 정의는 성인지적 차원에 대한 관심을 요구할 뿐 아니라 성과 인종, 식민주의와 계급 문제에 기반한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를 시정하려고 노력한다”고 논한다.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와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차별과 억압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화 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가시화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겨우 그 실상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중심으로, 피해자가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문제, 혹은 상처라는 흔적을 ‘어떻게’ 다룰 것 인가라는 질문은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접근법을 집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컨퍼런스 3부에서 토론을 맡은 도미야마 이치로는, 경험이란 공유해야 할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의 시작”이라 역설한다. 이러한 관계성, 사회성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을 통해서 억압이라는 기존의 상황은 다른 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명예는 선험적으로 회복 혹은 미회복이라는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하여 비로소 그 윤곽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1990년 한겨레신문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연재를 통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윤정옥은 “종전이 되고 나서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우리들이 잊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 죽은 셈”이 되었다고 언급하며, 그들을 “잊었”던 우리 사회의 유기(遺棄)의 시간에 대한 내성적 논의를 촉발시켰다(오키나와타임스, 1992년 3월 4일). 2011년 한국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방치한 것은 피해자의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하는 “위헌 행위”라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늦게나마 우리가 “잊었”던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을 법의 언어로 명시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정의와 평화의 물결을 잇다>라는 컨퍼런스 주제는 이러한 겹겹의 쟁점을 다각적인 고찰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보호의 대상으로서 ‘꽃’과 ‘할머니’라는 표상, 혹은 강제냐 자발이냐를 다투는 이분법적 논의는 고통의 체험을 딛고, 혹은 그 고통과 더불어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온 이들을 존중하는 논의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문제가 다루어지는 형식과 위상을 재고한다면, 평시와 전시가 연동하는 의례로서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배상’과 ‘사죄’로만 환원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인 ‘위안부’ 이슈는 외교 관계를 통해 ‘해결’되어야할 사안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숙의(熟議) 과정을 통해 “집단의 노력”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진행형의 과제이다. 여성문제다, 민족문제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라는 점을 어떤 방식으로 논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직하자.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정유진

페이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