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
    2024년 인터뷰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 제주4·3사건 여성 생존자 담은 다큐 <목소리들> 제작자 김옥영     7년 7개월 동안 공식적으로만 3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국가폭력 사건인 제주4.3사건. 부족하나마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이뤄지고 해마다 희생자를 기리는 추념식이 열리지만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거대한 피해가 있다. 삼중 사중의 참혹한 고통과 피해를 겪고도 침묵해야 했던 제주 여성들의 삶이다. 다큐 <목소리들>은 처음으로 가려져있던 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결국 세상 속으로 불러내 위로한다. 이 여정의 전 과정을 함께 한 제작자 김옥영 피디를 만났다.     영화 <목소리들>  감독 지혜원 제작 김옥영 | 다큐멘터리 | 89분 | 개봉 2025. 4. 2. 1948년부터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는 죽음의 섬이었다.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이 공산 빨치산 소탕을 명목으로 섬 주민 3만여 명을 학살하고 집을 불 질렀다. 제주4.3사건 피해자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이 입은 피해는 오래 알려지지 못했다. <목소리들>은 한 헌신적인 제주 4.3 연구자의 길을 따라가며,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제주 여성들의 경험, 침묵 속에 잠겨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Q : 반갑습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생소할 때부터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해 오셨는데, 오늘은 영화 제작자로 뵙습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로 말씀 시작하겠습니다. 🧶 김옥영 : 이번에 제주4·3사건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을 제작하고 각본을 맡은 김옥영입니다. 30년 정도 여러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는데, 주로 KBS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문적으로 다뤄왔습니다. 2010년부터는 ‘스토리온’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해 직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4·3사건을 다루게 되면 제주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Q : 그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이하 다큐)를 통해 반민특위, 5·16군사쿠데타, 10월유신, 5·18민주화운동, 12.12군사반란 등 한국 현대사를 가르는 굵직한 사건들을 대면해 오셨습니다. 이번에 제주4·3사건(이하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목소리들>을 기획하고 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 김옥영 : 2005년 4부작 <8.15의 기억>을 제작할 때였어요. 현대사 주요 사건의 쟁점을 실존 인물 인터뷰를 통해 조명해보는 작품으로, 처음으로 구술사를 다큐에 도입해 주목받았었죠. 마지막 4편 주제가 ‘해방공간의 이념 대립’이었어요. 그때 서북청년단 일원으로 부산철도노조 파괴에 참여한 분과 철도 노조원이었던 분을 찾아냈어요. 나레이션 등 제작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두 분의 인터뷰만으로 당시 상황을 드러내기엔 무언가 미진해 당시 이념 대립의 희생양으로 4·3사건에서 남편을 잃은 한 할머니를 출연시켰어요. 근데 할머니는 4.3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지는 않고 그저 모른다는 말만 하셨어요.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라는 말만 하며, 4·3평화공원 위령제단 희생자 명패로 가득 찬 벽 아래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강력해서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Q : 시작은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 김옥영 : 아니 세월이 지나면서 흐려졌죠.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0년 1월 공포, 2021년 2월 전면 개정안 국회 통과. 이하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이상하게 연결되는 작품이 없었어요. 그러다 몇 년 전에 제주 어느 마을에서 지내는 4·3위령제 르포 기사를 접했는데, 위령비에 적힌 여자들의 이름이 모두 누구의 처, 누구누구의 여...라는 식으로 쓰여 있다는 대목에서 딱 멈춰지더라고요. 왜 저 여자들은 이름조차 남길 수 없었나 생각이 들면서 자동적으로 그 할머니가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만일 4·3 다큐를 하게 되면 제주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한 것이 그때였어요. 그 뒤로 4·3사건에 대해 조금씩 공부했죠. 2021년 여름 휴가 때는 제주를 찾아 숙소와 도서관만 오가며 자료에 빠져 지냈어요. 사례사례마다 기가 막혀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22년 제주4·3평화재단의 제작 지원 공고를 보고 기회구나 싶어 지혜원 감독을 설득해 참여를 했습니다.       뒷모습으로, 침묵으로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Q : 김은순, 김용열, 고정자, 홍순공 네 분의 할머니와 중간중간 연구자이자 안내자로 제주4·3연구소의 조정희 연구원이 등장하는 영화 <목소리들>은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는 고발 같고, 절규 같고, 아우성 같은 조은 선생님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살기 위해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에 다가가겠다는 영화의 의지와 선언 같았습니다. 🧶 김옥영 : 2022년 가을에 김경만 감독의 다큐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가 나왔어요. 4.3 당시 형무소로 끌려갔던 수형인 할머니들이 70여 년이 지나 청구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인정받은 내용을 담은 영화인데요. 재판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들이 겪은 삶을 인터뷰로 담아내고 그 사이사이 제주의 풍광을 심리적이고 은유적 이미지로 활용하는 형식이 저희 기획과 똑같았습니다. 심지어는 할머니 다섯 분이라는 숫자까지 같았죠.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런 형식적 유사성은 후발주자에게 극히 불리합니다. 그렇다고 여성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좀더 ‘젠더’적으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Q : 그동안 4·3사건 피해에 대한 조사가 있었지만 젠더적인, 그러니까 성폭력 등의 피해에 대한 증언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 김옥영 : 제주에 소문은 무성했습니다. ‘그랬다더라’는 이야기는 실로 많아요. 문제는 직접 증언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다큐라는 장르가 ‘사실’을 다루는 장르인데 직접 증언이 없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래서 접어야 하나 이러고 있을 때 김은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지혜원 감독은 당시 출연자를 확정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들을 만나보고 있었는데 토산리에서 마을 사람들과 젊은 여자들이 모두 끌려가 죽었을 때 오직 혼자 살아돌아온 할머니가 있다고 해서 찾아간 거죠. 그런데 이 할머니가 칠십 평생 당시의 일을 말씀을 안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4.3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많은 분들이 찾아와 그날의 일도 증언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고 해요.  Q :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김 할머니가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는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는데, 보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긴장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 김옥영 : 할머니가 그러니 아드님이 촬영팀의 접근을 무척 경계하셔서 그때도 그저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으로 간 거지 무슨 본격 촬영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간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당시 할머니들을 만날 때 테스트 촬영 겸 촬영감독을 동반하고 다닌 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어요.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키며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떠는 그 모습을 찍어왔는데 영상을 프리뷰하는 순간, 강한 확신이 왔습니다. 이 할머니만 계시면 직접 증언이 없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 말하지 못하는 /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이 직접 증언보다 더 강력한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은순 할머니를 발견한 후에 이 할머니를 중심으로 초기 기획안을 전면 재구성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 할머니의 휴먼 다큐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특정한 스토리가 아니라 4·3 당시 제주 여자들이 보편적으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김은순 할머니 외에 각각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할머니들을 복수의 주인공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가장이 잡혀간 뒤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눈물 흘릴 겨를도 없이 ‘짐승처럼 산 어머니’의 기억을 간직한 김용열 할머니, 철창에 온몸이 찔린 채 살아남은 후유장애인으로 원치않은 결혼을 하고도 평생 물질을 하며 양가를 부양해야 했던 홍순공 할머니, 도피자 가족이 겪어야 했던 설움을 안고 소녀가장으로 안 해본 일 없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온 고정자 할머니가 그렇게 선택된 분들이었어요.       생존 이후가 더 고달팠던 여자들은 왜 피해자가 될 수 없었는가 Q : 겉으로는 편안해 보이셨던 홍 할머니가 시부모님 제사상을 차리면서 건너방에 함께 준비한 친부모님 제사 이야기를 할 때 애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던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울컥하게 되는데요, 영화 <목소리들>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자 성취는 할머니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 그 피해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부분인 것 같습니다. 🧶 김옥영 : 조정희 연구자가 강조한 말이기도 한데, <목소리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재단해왔는지를 드러냅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4.3희생자 범주는 사망자, 행방불명자, 수형인, 후유장애자 이 네 가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성희롱을 당했든, 성폭력을 당했든,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든, 그 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해도 다 해당이 안 됩니다. 더욱이 여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겪어온 고통을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관습적으로 의당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수치심 때문이기도 했고, 한 동네에서도 누가 ‘나쁜놈’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4.3사건 당시 사라진 수많은 남성 사망자의 빈 자리를 여성들이 메꿔 왔습니다. 산의 무장대로부터 주민들을 격리하기 위해 마을을 둘러 성담을 쌓았는데, 남자들이 없으니 여자들의 몫이었어요. 보초도 서고 군사훈련도 받았어요. 남자들이 없는 공간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마을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모두 여자들의 일이었어요. 즉 제주 역사의 한 축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딛고 여자들의 의지와 노동으로 일구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제주 여성들이 죽을 힘을 다해 힘겹게 밀고 끌고 온 시간을 헤아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치유라도 가능할 겁니다. Q : 그 과정에서 조정희 연구자의 안내 덕분에 전체적인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김옥영 : 이 다큐는 증언을 하지 않는 김은순 할머니를 중심에 놓다보니 일반적인 방식과는 좀 다르게 스토리텔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김 할머니가 그날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 놓고 그 의문을 다른 사례들을 통해 추론해가는 구조를 택했습니다. 이른바 논증구조라고 하는 틀을 가져온 겁니다. 사건의 진행을 주욱 따라가는 방식이 아닌,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구축해가는 이런 구조는 논리의 단락과 단락 사이를 잘 연결해주지 않으면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저 이야기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워지거든요. 그래서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안내자로 조정희 선생을 모셔왔어요. 오랫동안 4·3사건 속 여성들의 경험을 추적해 왔던 연구자였기에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셨어요. 특히 후반부에 조 선생님이 말하는 "제주의 할머니들은 4·3의 피해를 어머니, 아버지, 오빠 등 가족의 죽음으로만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기억들은 혼자서 감내해야 할 공포와 수치심이 돼 버렸다. 공허한 눈빛, 긴 한숨, 말라버린 눈물과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여성의 피해를 4·3이라는 국가폭력의 피해 범주에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볼 때"라는 의미의 내레이션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였습니다.     항상 부차적인 존재였던 여자들을 드러내는 ‘1mm’의 힘 Q : 4·3사건에서 묻혀져 있던, 더 정확히는 지워져 있던 여성의 역사를 드러내는 작업에 남다른 사명감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 김옥영 : 이 작업을 준비하면서 기획안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언급했는데요. 전쟁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에서도 여자들의 이야기는 후일담이 나오지 않아요. 4·3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건에서 여자들은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 당해 왔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시대의 움직임이 제게 좀더 직접적으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요구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래 전 통곡하던 할머니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고, 여성의 이름이 지워진 위령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허용하지 않았다면 제가 용기낼 수 있었을까 싶어요. 소수라도 처음에 한 사람이, 그 다음에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내어온 덕분에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진전돼 왔잖아요. 제게 영화를 만드는 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거예요. 누가 봐주든 그렇지 않든 목소리를 내고 누군가 들어주기를, 더 많은 목소리가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관행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 정한 원칙이 있어요. 대신 제게 중요한 건 ‘1mm’예요. 역사를 1mm씩이라도 전진시킬 가능성에 제가 하는 일의 의미가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별다른 흔적이나 파장을 남기지 못할 수도, 때로 1cm를 후퇴할 수도 있지만 1mm의 힘으로 전력투구를 해요. 그것이 영화나 다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변화를 일으키는 시작이기도 하고요. 놀랍게도 요즘 그 믿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며 반짝반짝 빛나는 2030 여성들을 보면서요.  Q : 영화로 다시 돌아오면, 안개와 거친 파도 등 제주의 풍경을 다룬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부감으로 보여주는 제주의 밭담은 특히 놀라웠는데요, 그동안 변덕이 심한 기후에 적응해온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빚은 장관으로 알았다가 사실 여성들의 땀과 눈물로 쌓아 올려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 김옥영 : 제주의 풍광 하나하나에도 기억이 녹아 있는 거죠. 제주의 밭담이 성담으로 변하고 성담이 밭담으로 변한 그 과정은 사실 스터디 과정에서 새롭게 발굴한 사실이었습니다. 제주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사연이 바로 이 밭담이 제주 여성의 표상으로 여겨지게 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풍경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타이틀백에 나오는 안개 자욱한 ‘잃어버린 마을’도 그런 곳이에요. 제주에서는 4·3 때 폐허가 된 후에 복구되지 못하고 버려진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하는데 중산간 지역에 꽤 있어요. 4·3의 슬픈 운명을 이곳만큼 오롯이 전하는 곳도 없을 겁니다. Q : 포스터에도 이미지가 있는데, 할머니들이 겪은 당시의 기억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부분도 눈에 띄었어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악 할머니와 ‘미투’ 여성들을 담은 박문칠 감독의 영화 <보드랍게>가 연상되기도 했고요.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 김옥영 : 다큐는 현장을 다루는 것이 기본인데 역사 다큐는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라서 현장이 없다보니 늘 그림이 부족해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이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약화 형식의 그림체를 쓰기가 싫었어요. 4.3이라는 비극적인 사건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러다가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의 목탄 드로잉을 보게 되었는데 딱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드로잉 화법으로 애니메이션을 하는 분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러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미술 작가 한 분을 찾게 되었습니다. 황선숙 작가신데요. 저는 그분에게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상황 설명용으로 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의 말 속에 담긴 정서를 확장해주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구체적 상황 묘사보다 ‘반추상적 표현’을 요청했습니다. 황작가님은 다큐 삽화가 처음이라 어려워하는 지점도 있었지만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면서 작업한 결과,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4월 3일, 동시에 전국 132개 극장에서 수천 명 관객과 만나다 Q : 이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연결된 작업을 한 적은 없으셨어요? 🧶 김옥영 : 2008년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있을 때 김동원 감독의 <끝나지 않은 전쟁>에 작가로 참여했어요. 한국을 비롯해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에 생존해 계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인터뷰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일본이 점령하면서 ‘위안부’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를 발굴해 소개했어요. 당시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이셨죠. Q : 할머니, 가족들도 영화를 보셨을 텐데, 반응은 어떠셨을까요? 🧶 김옥영 : 전주국제영화제 월드프리미어 상영 때 김용열 할머니를 따님이 모시고 왔어요. 이분은 어릴 때 야학이라도 다녀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건 ‘판사라도 되어서 4.3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던, 결기있는 할머니셨어요. 그런데 이분이 GV를 하면서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우시는 겁니다. "어머니가 아무한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해서 평생 4.3 이야기를 못하고 살았는데 영화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그렇게 속이 시원하다"면서 말이죠. 관객 모두가 함께 울었습니다.  11월에 있었던 제주4.3영화제 때는 외지와는 달리 4.3 당사자 분들이라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독과 저는 좀 긴장했어요. 그런데 상영이 끝나고 장내 불이 켜졌을 때 그렇게 까칠했던 김은순 할머니의 아드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우리에게 씩 웃어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김은순 할머니와 홍순공 할머니는 너무 편찮으셔서 못 오셨고 가족분들이 오셨는데, 다들 ‘고맙다’고 해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영화 중 ‘4·3 토산실상기’를 쓰셨던 김양학 할아버지는 영화가 나오기 전에 언제 볼 수 있냐고 계속 전화로 물어보셔서 난감했는데 이때 오셔서 마침내 영화를 보셨죠. 그런데 바로 며칠 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영화를 보여드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지...    Q : <목소리들>은 지난 4월 3일 전국 132개 극장, 165개 스크린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기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김옥영 : ‘100개의 극장’ 프로젝트라는 좀 특별한 방식으로 개봉했습니다. 극장에 의존하는 기존 배급 방식이 아니라 관객들이 직접 티켓을 공동구매해서 극장을 여는 방식인데요. <수라>(감독 황윤), <괜찮아, 앨리스>(감독 양지혜) 같은 영화들이 이미 같은 방식으로 개봉해 성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사실 이 영화들은 몇 달 전부터 천천히 상영회를 누적해오다가 관객수가 4,000~5,000명이 되었을 때 개봉한 것이라 저희들과 조건이 달랐어요. <목소리들> 영화의 의미를 살리자면 4월 3일 개봉을 해야 하는데 그걸 결정할 당시가 겨우 두 달 전이었어요. 그럼에도 관객추진단을 모집해 4월 3일 전국에서 한꺼번에 100개의 극장을 열겠다고 선언했는데, 마음 속으로는 안 되면 어떡하나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개봉 지원을 받지 못해 포스터, 웹자보, 보도자료 등도 배급사와 제가 직접 만들어야 했고, 관객추진단 모집하고 홍보하고 지원도 해야 하고, 정말 정신없던 두 달이었어요. 그런데 3월 14일 103개 극장이 확보돼 목표를 돌파했고, 4월 3일 당일은 자체 개봉 극장까지 합쳐 132개 극장 165스크린을 달성하게 된 거죠. 하루 사이 8,084명이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은 짜릿했습니다. 정말 관객이 이룬 ‘기적’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재가 다가올 미래를 도울 수 있도록  Q :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다큐 <목소리들>은 피디님께 어떤 의미인지, 마지막 질문으로 여쭙습니다. 🧶 김옥영 : 지난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에서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우리 사회에 거대한 공명을 일으켰잖아요.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가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만’ 비로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싶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목소리들>을 보고 비로소 4.3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젊은 관객들이 많아 이 영화를 만들기 참 잘했다 싶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개봉이라는 걸 처음 경험하게 해준 작품이고, 내용적으로는 여성을 통해 4·3사건을 조명한 첫 번째 영화를 저희가 만들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 번 밖으로 드러난 목소리는 어떤 외압이 있지 않는 한 쉬이 지워지지 않아요. 저희 영화가 뒤를 잇는 작품들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극장 개봉은 마무리됐지만 공동체 상영은 계속 열려 있으니까 더 많이 봐주세요. 우리의 현재가 미래에는 과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현재도 미래를 도울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 손정미 인터뷰이 : 김옥영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4월 23일 수요일 

    김옥영, 웹진 <결> 편집팀

  • 일상화된 위기와 폭력, 그럼에도 일어서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만나다
    2024년 논평 일상화된 위기와 폭력, 그럼에도 일어서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만나다

    일상화된 위기와 폭력, 그럼에도 일어서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만나다    팔레스타인에서 연일 참혹한 뉴스가 들려오고 있다. 통합 식량 안보 단계 분류 기준인 IPC 지표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만 약 34만 명이 기근에 해당하는 굶주림을 겪고 있고, 약 87만 명이 '비상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거지의 92%가 파괴되었고, 정신 건강 회복 및 심리 상담 지원이 필요한 아동이 100만 명이 넘는다는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의 보고도 있다. 이렇게 위기가 일상화된 팔레스타인에서 여성은 젠더 기반 폭력에 더해 문화적 특성으로 그 피해가 드러나기도 어려운, 위험이 겹겹이 중첩된 상황에 있다. 2024년부터 현지에서 여성 언론인 육성과 여성 주도 온라인 언론 플랫폼 설립을 위한 'Speak-up'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사단법인 아디가 관련 소식을 전한다.   #1. 사유는 필요 없다, 일상적인 체포와 구금 여성농민 활동가 메이사르 이야기 2024년 9월 25일,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새벽 6시. 요르단강 서안 도시 나블루스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농민조직 활동가 메이사르(Maysar)의 집으로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 15명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자고 있던 가족들을 모두 깨워 거실로 모이게 했고, 잠시 후 예순의 나이에 시각장애까지 있는 메이사르만 다른 방으로 불러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렸다. 가족들이 강력히 항의하자 이스라엘 군인들은 안대를 풀어줬지만, 체포 사유에 대한 아무런 고지 없이 그대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집 밖에는 이스라엘 군용 차량 4대가 있었고, 수십 명의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렇게 이스라엘 군에 체포된 메이사르는 구금됐고, 가족들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중에 변호사를 통해 전해 들은 그녀의 체포 사유는 '이스라엘 안보 위협'이었다.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인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메이사르를 포함해 같은 이유로 체포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의 석방을 위해 계속 활동을 이어갔다. 4개월 뒤인 2025년 1월 20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휴전 1단계가 시행되면서 메이사르는 석방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일방적 휴전 파기와 재공격이 가해진 3월 18일 이후 그녀는 다시 불안에 떨고 있다. 언제 다시 끌려갈 지 모르기 때문이다. 2025년 5월 현재 193개 유엔 회원국 중 147국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국경과 공항, 항만이 없다. 자체 화폐도 없고 비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역 방문이나 현지인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으로는 택배를 보낼 수 없으며, 자체적으로 물품을 수입하거나 수출할 수도 없다. 모두 이스라엘 세관을 거쳐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한다.  팔레스타인에는 교통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은 있지만 군대는 없다. 대신 이스라엘 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영장 없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금한다. 메이사르 사례는 여기에 해당한다. 심지어 이스라엘 군인은 팔레스타인 아동과 여성, 청년을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유엔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점령된 팔레스타인의 영토들(OPT,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ies)'라고 명명한다. 국제적으로 분명 존재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처럼 식민지와 같다.     #2. 문화적 특성상 드러나기 어려운 젠더 폭력 청년 여성 라나 이야기 팔레스타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4남매 중 첫째 라나(Rana). 교육을 중시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했고, 나블루스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악몽은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던 라나가 24세가 되던 해에 시작됐다. 직장생활을 하며 추가 학업을 하고 싶었던 라나에게 부모의 결혼 압박이 심해진 것이다. 버티지 못한 라나는 한 친척이 주선한 맞선자리에 나갔다. 라나보다 17살이 많았고, 아이도 있었던 남자는 첫 만남에서 그녀의 옷차림을 지적하며 여성의 도리를 훈계했다. 게다가 라나의 허락 없이 신체를 접촉하며 명백한 성추행을 했다. 그만하라고 소리치자 도리어 라나가 자처했다며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라나는 부모에게 성추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가족 간 대화는 단절됐고, 남자는 라나의 SNS를 찾아내 충격적인 사진과 영상을 계속 보냈다. 불안과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시도한 라나는 현재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2018~2019년 팔레스타인에서 인권 조사를 했던 (사)아디는 당시 현지 여성 활동가는 "팔레스타인에는 이스라엘 점령 문제 못지 않게 젠더 폭력 문제도 심각하다. 하지만 문화적 특성 때문에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활발할 때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조용했는데, 젠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하고, 외부에 알리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2023년 UN WOMEN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여성의 59.3%가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했으며, 이 중 심리적 폭력(57%)이 가장 많았고, 경제적 폭력(20.5%), 신체적 폭력(18.5%), 성폭력(9%)이 뒤를 이었다. 또 2022년 팔레스타인 중앙통계청(PCBS)에 따르면 고등교육 이수율은 여성이 더 높지만,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남성의 3분의 1 수준, 고용률은 5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내 젠더 기반 폭력이 심각하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구조적으로 만연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생필품 트럭을 눈앞에 두고도 굶주리는 아이들 '인도주의 재앙' 속 엄마 니빈 이야기 수년째 가자지구에서 (사)아디와 함께 여성·아동 구호활동을 하고 있는 니빈(Nirveen)은 요즘 아침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지난 2025년 3월 2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들어가는 모든 구호물품의 진입을 막은 지 두 달이 지난 지금 식량은 거의 바닥났다. 그날 5월 13일도 동료와 함께 한 시간 넘게 가자지구 시내를 헤맸지만, 문을 연 가게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 니빈은 점점 야위어 가는 여섯 살 셋째 아들 아흐메드 앞에서 또 다시 아들을 떠나보낼까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니빈에게는 먼저 떠나보낸 막내아들 아담이 있었다. 아담이 생후 4개월이던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이스라엘은 곧바로 수백, 수천 톤의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어 가자지구를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가자지구에 필요한 전기와 기름은 물론 물과 식량, 의약품까지 차단했다. 아담은 태어났을 때 소화기 문제가 있어 페디아슈어(PediaSure)라는 특수 환아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물품 반입 차단으로 환아식은 이내 소진됐다. 생후 7개월부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동이 났고, 한 달간 힘겹게 버틴 아담은 9개월이 되던 2024년 2월, 영양실조와 탈수로 세상을 떠났다. 1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아흐메드를 보는 니빈과 가족들의 마음은 찢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 이후 오늘(2025년 5월 28일)로 600일이 지났다. 여전히 많은 언론은 이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또는 '가자 전쟁'이라 명명하지만 사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가자지구 보건부의 발표에 따르면 5월 28일 기준, 230만 명에 달하는 가자지구 주민 중, 공식 집계된 사망자 수는 5만 4,056명이고 부상자 수는 12만 3,129명이다.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6만 1,700명을 넘어선다. 매일매일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과 봉쇄가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이 비극의 피해자 중 70%는 여성과 아동이다. 유엔의 인권기구, 국제사법재판소(ICJ), 국제형사재판소(ICC) 모두 한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은 가자지구 민간인을 향한 '집단 학살'이자 '전쟁 범죄'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국제기구와 국가도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을 막지 못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230만 명 가자지구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군사 무기만이 아니라 굶주림과 질병, 전염병, 가뭄, 폭염 등과 함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하는 생존 필수품의 부재이다. 놀랍게도 생필품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가자지구 입구에 생필품을 실은 수천 대의 트럭이 줄지어 있지만 이스라엘이 막고 있어 보급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니빈의 경우처럼 부모는 아이들의 아사(餓死)를 걱정하고, 부모와 가족을 잃은 아이들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 삶의 마지막 자락에 매달려 있다. '인도주의 재앙'이라는 표현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참혹한 현실이 가자지구를 뒤덮고 있다.     #4. 젠더 폭력 가속화시키는 '나크바대재앙'를 고발한다 '아디'가 펼치는 연대와 기록 이야기 2016년 설립된 사단법인 아디는 아시아 분쟁 피해 지역의 인권 회복을 목표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이다. '아디'는 Asian Dignity Initiative의 줄임말(ADI)이자 배의 돛을 고정시키는 순우리말 아딧줄에서 따온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존엄성을 증진하기 위해 인권, 평화, 개발이라는 돛의 방향을 잡고 제대로 나아가겠다는 단체의 지향을 담고 있다. 아디는 창립 직후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사 점령에 따른 인권 침해 문제를 인지하고 현지 방문과 기록을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다. 또 팔레스타인 내 점령 관련 폭력(ORV: Occupation Related Violence) 뿐만 아니라 젠더 기반 폭력 역시 심각함을 파악하고 2020년부터 매년 '팔레스타인 여성인권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특히 2020년부터는 폭력 피해 여성들의 인권 보호와 역량 강화를 위해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여성 언론인 육성과 여성이 주도하는 온라인 언론 플랫폼 설립을 목표로 한 독립 미디어 실험 'Speak-up'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현지 여성단체와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 사회에 전달해 왔다.   많은 이들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하마스의 군사 공격과 인질 납치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말은 다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국가를 건국했던 1948년부터 비극이 출발했다고 입을 모으는 그들은 그 시기를 '나크바', 즉 '대재앙'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점령 폭력은 팔레스타인 사회 내 다양한 폭력을 야기했고, 젠더 폭력을 더욱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건국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주민 수천 명이 살해됐고, 72만 명이 난민이 됐다. 건국 이후 4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치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이 거주했던 영토의 대부분을 식민지화 했고 입법, 사법, 행정 전 영역에서 차별했다.  이에 대응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인티파다(민중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했고 무장투쟁을 감행했다. 그 결과 1993년, 전 세계의 관심 속에서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오슬로협정'이 체결됐고, 팔레스타인 지역 일부에 자치권이 부여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슬로협정을 끝내 이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로 분할해 식민지배 하였다.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는 영토 병합과 주민 추방 정책이, 가자지구에서는 봉쇄와 고립 정책이 이어졌다. 그리고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수백 개의 정착촌을 건설한 이스라엘은 자국민 수십 만 명을 이주시키고, 가자지구에는 4번의 대규모 군사 공격을 했다. 이 모든 과정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대원들이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약 1,200명이 사망하고 251명이 인질이 되는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삶은 점령 폭력을 제외한다면 가부장제 질서가 견고한 사회의 여성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생필품 반입 차단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는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내몰고, 가족 전체가 폭탄에 희생당하는 믿기 힘든 현실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국제사회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맥락 속에서 팔레스타인 여성을 억압받는 불쌍한 피해자로 인식했고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디가 경험한 그녀들의 모습과 이야기는 달랐고, 단일한 이미지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위에서 전한 세 이야기처럼 이중, 삼중의 어려움 속에서도 기록 과정에서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꿋꿋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메이사르는 오늘도 자신이 몸담은 여성농민 조직에 출근하고, 라나는 고통의 경험을 나누며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니빈은 남아 있는 자녀의 생존을 위해 매일 음식을 찾아 거리를 나서고 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여성 역량 강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점령 구조와 가부장적 질서를 바꾸려는 여성들도 있다. 아디가 2024년 1월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여성 언론인 양성 프로그램 'Speak-up' 프로젝트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 활동가 시린 제이단(Shirin Zeidan)도 그중 하나다. 오랜 기간 이스라엘 점령 폭력과 젠더 기반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전문성을 갖춘 현지 여성들이 직접 사회 문제 이슈들을 발굴하고 기사화해 인권 향상을 주도할 수 있도록 추진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 25명은 4월부터 10월까지 저널리즘과 뉴스, 미디어의 이해에 관한 기초부터 정치와 경제, 여성, 문화 등 특정 분야 이슈, 그리고 기사 작성법과 촬영 장비 사용법 등 전반적인 미디어 교육을 이수했다. 교육을 마친 여성들은 '올리브의 계절: 이스라엘 정착민의 폭력과 농부들의 회복력'을 주제로 한 기사, '체크포인트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 팔레스타인의 치의대생'을 주제로 한 영상 뉴스를 포함해 총 6편의 기사와 6편의 영상을 제작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린의 참여 후기 중 한 대목이다. "올해 가장 큰 변화는 나블루스에서 직면한 모든 장애물과 어려운 보안 조건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 저는 인생 내내 일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증명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여성지원센터에서 저는 첫 번째 기회를 얻었고, 맡겨진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죠. 저는 모든 도전에 힘과 결단력으로 임했고, 저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는 제 역할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회에 감사드립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이야기는 단지 피해자로서의 외침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점령과 억압, 그리고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도 살아남고 저항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생존과 연대의 이야기다. 그들이 존재로서 저항하는 한 아디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하고, 함께 싸워 나갈 것이다.      

    이동화

  •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2024년 인터뷰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의 윤경회 간사 인터뷰 1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 통념, 법적 권한의 한계와 함께 조사 의지를 가진 주체가 형성되지 못한 탓에 결실을 맺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2018년 9월 14일부터 시행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이듬해 12월 27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조사를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회복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 첫 발걸음이었다. 2024년 6월 종합보고서를 제출하며 활동을 종료한 '5·18조사위'는 한계가 있었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를 토대로 피해 실태를 확인하고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 과정에 조사팀장으로 참여했고, 이어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결성의 주축이 된 윤경회 간사와 '5·18조사위' 및 '열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1)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2) “우리는 서로의 용기, 서로의 증언자”     Q : 안녕하세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사회적 참사와 과거사 조사 활동에 참여한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띕니다. 자기소개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 윤경회 : 개인적으로 오늘 웹진 <결>과의 인터뷰는 저에게 특별해요. 제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닿아 있거든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대학 1학년 새내기 때 공익광고 제작에 관심이 많아 다큐멘터리를 꽤 봤어요. 그때 <낮은 목소리2>를 만난 계기로 역사다큐 감독을 꿈꿨는데, 이것이 사회문제에 대한 천착으로, 학생운동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러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업무를 수행했고, 고양성폭력상담소에서 상근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는 전임 팀장께서 건강문제로 공석이 되어 지원하게 되었구요. 2023년 3월 13일부터 출근했으니 조사 활동 종료일인 12월 26일까지 9개월을 남긴 상태에서 제가 합류하게 된 거죠. 이듬해 6월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5·18조사위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 뒤에는 피해자 분들과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이하 '열매')'를 만들고 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활동 종료 9개월 남기고 합류하고 보니… Q :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성폭력 피해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종합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가지는 못했었죠? 🧶 윤경회 : 맞습니다. 과거에도 성적 피해 사례가 언급된 적 있고, 연구자들이 진행한 구술 채록이 언론이나 다큐에 소개되기도 했어요.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공식화된 것은 2018년 말입니다. 피해자 김선옥 님의 5월 8일 인터뷰를 계기로 발족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요. 하지만 공동조사단 활동 기간(2018.6.8.~10.31.)이 채 다섯 달도 안 됐고, 법적 권한에도 한계가 있어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웠어요. 이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2019년 12월 27일 출범한 '5·18조사위'가 2020년 4월 공동조사단의 조사 자료를 인계 받아 검토하고, 5월 11일 직권으로 성폭력 사건에 관한 조사를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5일 '성폭력'을 조사 범위에 포함하는 법 조항이 신설되면서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들어가게 되고요.   Q : 활동 종료 9개월 전이면 조사가 상당히 진전된 상황에서 합류하신 거네요.  🧶 윤경회 : 시기상으로 그래요. 처음에는 인계 받은 조사 자료를 검토, 취합해 심의 안건까지 담은 보고서를 정리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 일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자료를 검토해보니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피해자의 동의부터 구체적인 피해와 관련한 질문과 답변, 간인까지 마친 진술 조서 형식이어야 하는데, 피해 입증 자료로 인정받기 어려운 단순 녹취록에 불과했어요. 이유를 봤더니 조사관이 피해자를 만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드러나지 않은 분들까지 찾아내기 위해 이전 자료나 연구까지 뒤져 전수조사해 연락했지만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냐', '피해를 밝힌 적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는 분들이 많았던 거예요. 상황이 그러니 만나만 주십사 겨우 설득해 확보한 자료가 녹취록이었던 건데, 내용도 빈약했어요. 이분들에게는 온몸에 새겨진 40년 전의 피해를 처음으로 언어에 실어 말하는 경험이다보니 내용 여기저기가 거시기, 거시기예요. 또 울음으로 끊긴 부분도 많아요. 피해자가 우시니 조사관도 울고… 이야기가 중단되는 거죠.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Q : 피해 입증 자료 전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는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 윤경회 : '큰일났구나!'  겁이 덜컥 났죠. 힘들게 진술하고 곧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고 계신 분들께, 새 팀장이 와서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이잖아요. 실제로 '전임은 어디 갔냐', '우사스럽게 또 하란 말이냐', '이리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안 했다'… 두어 달 동안 엄청 원성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연락을 드리고, 계속 다니다가 한 피해자의 가게에서 5시간 동안 기다린 적이 있어요. 그때가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결정적인 기회였던 것 같아요. 끝내 조사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간 쌓여온 피해자들의 경험을 대변해주셨거든요. 그동안 관심이 고마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피해 경험과 아픔을 성심을 다해 얘기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넘고 헤쳐온 삶의 애환은 빠진 채 여고생, 군용 트럭, 집단 강간 같은 자극적인 용어들로 그 이야기가 소비되더라는 거죠. 그러고 난 뒤에는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국가의 성의 있는 조치도 없었고요.  한편으로 피해자의 '말하지 않을 권리'도 저희에게 굉장히 어려운 딜레마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욕구이자 권리잖아요. '증언'의 의미도 있고요. 반면 말하고 싶지 않은 피해 경험도 있었어요. 한 예로, 5·18 당시 전남합동수사본부 조사 과정에서 성고문을 당했거나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다가 조사받으러 상무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인 성적 침해 피해가 있었어요. 문제는 그 피해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용기 있는 여성의 증언이 다른 여성에게는 엄청난 공포였어요. 1980년대 정조 관념 속에서 함께 연행돼 구금, 조사받은 여성들은 '너도 그랬어?'라는 시선을 받을까봐 너무너무 무서웠던 겁니다. 누군가 밝힌 사실이 아무런 윤리의식 없이 인용, 재인용되거나 험하게 다뤄지는 걸 끔찍한 공포 속에서 봐야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Q :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질문을 다시 받으셨던 거네요. 🧶 윤경회 : 정말 난감했어요. 동시에 고마웠고요. 피해자들이 왜 진술을 거부하는지, 왜 적지 않은 분이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 살고 계신지, 그 고충과 저희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작전을, 조사 설계를 다시 짰어요. 조사의 목적과 방향은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첫째,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조사 방법과 40년 전 사건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 진상조사를 추진할 것, 둘째, 사건 후 피해자와 가족이 겪은 신체적, 정신적 피해 실상은 물론 사회관계적 피해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 이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연계·도출할 것, 셋째, 국민들이 피해자의 오랜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상규명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함으로써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 등을 설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조사팀을 새로 꾸렸어요. 5급 팀장과 6급과 7급 조사관 각 1명, 총 3명이 전부였지만요. 설득이 안돼서 결국 소수의 피해자만 조사에 동의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 조사를 통해 피해자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국가의 통지서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유한, 기어코 이 일을 해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한 인력이라는 점이 달랐달까요. 조사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국가폭력 피해' 전문가 없어 조사와 '치유적' 상담 병행 Q : 상담 전문가가 동행한 조사 활동이 인상적입니다. 🧶 윤경회 : 네. 다행히 전문위원을 위촉할 수 있어 성폭력, 국가폭력에 대해 이해가 있는 상담 전문가를 포함시켰어요. 피해자와 만남은 단 한 번의 조사, 그럼에도 의미 있는 조사여야 해요. 하지만 그 조사가 피해자에게는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는 시간이에요. 언어에 실어 누군가에게 피해 경험을 말하려면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재현해야 하는데, 몸으로 경험한 폭력이라 벌벌 떨고, 구토를 하고, 심지어 손발이 이렇게 퉁퉁 부어요. 인지적 과정이 아니라 몸으로 재현이 되는 거예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이하 성폭력특례법)」도 없던 때, 성폭력이 부녀자에 대한 정조의 죄였던 때, 여성으로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 저수지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의 피해 경험은 요즘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어요. 성폭력 피해자 상담을 해온 저도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이 때문에 조사 과정의 말하기가 치유적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된 상담자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국가폭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제대로 이해하는 상담 전문가가 없어요. 그간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조사팀이 전문위원과 같이 감당해 가면서 조사와 상담을 겸하기로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지한 또 하나의 자각이 있어요. 저희가 공권력, 그러니까 군인이나 합수단 수사관에게 피해를 당해 국가와 사회에 불신이 높은 분들을 만난다는 사실이었어요. 이번에는 저희가 국가기관이고 공무원이에요. 이들이 피해를 인정받고 배·보상을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저희인 거예요. 1980년대와 완전히 다르게, 조사 과정 전체가 공권력이 신뢰를 회복하는 '치유적 경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조사 활동 시작부터 함께 한 2명의 국방부지원단도 다르지 않았어요. 피해자들께 과거에는 가해자였지만 지금은 은폐된 진실을 물 위로 올리는데 조력하는 군인이라는 점, 이들의 도움으로 피해를 입증할 수 있도록 해 새로운 군인을 경험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에 주목하다 Q : 그때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재개된 셈이네요. 🧶 윤경회 : 그렇죠. 그런데 피해자 진술은 또 다른 난관의 연속이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도 사건이 구성되지 않았거든요. 이들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강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있었어요. 특별한 인상 착의는 없고 군복 아니면 그냥 '메리야스' 입은 남자예요. 과거의 자료나 증언을 놓고 보면 진술이 일관되지도 않고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취합되는 사전 정보가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부터 40년이 지난 일, 피해를 언어로 말해 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충격적인 트라우마는 '블랙아웃', 즉 기억을 상실시킨다는 사실 등이요. 미국 9·11테러 10년 후 피해자를 추적해보니 사건 발생이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기억하는 비율이 50%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어요.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을 입증 자료로 쓸 수 있을까 검토하다 보니 반복되는 얘기가 보였습니다. 감각과 장면이었어요. 강간을 당할 때 느꼈던 감각, 그때 씩 웃던 군인의 표정, 장갑 낀 손, 하혈로 젖은 옷을 입고 숙소로 돌아갈 때의 축축함, 군용 트럭에서 우루루 내리는 군복 입은 사람들이 겁이 나 막 뛰었던 순간, 무서워서 셔터를 내릴 때 눈앞에서 누군가 대검에 찔려 피가 솟구치는 장면…. 이를 저희는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이라고 명명하기로 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피해를 입증할 만한 진술을 서사적으로 듣기로 했습니다.    Q : 서사적으로 듣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이었을까요? 🧶 윤경회 : 녹음기를 켜놓고 피해 장소를 어떻게 가게 됐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오늘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을 피해자가 기억하고 말하는 대로 쭉 듣는 거예요. 그러면 조사관이 피해자의 삶을 '서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동시에 의미 있는 진술을 위해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감지하는, 어찌보면 피해자의 기억과 언어에 대해 학습하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그런 뒤 조사관이 피해자의 핵심 진술이 시간 순으로 드러나게 진술내용을 정리해요. 물론 자의적인 해석 등 부수적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진술 조서를 정리한 다음에는 소리내 읽어드리고, 마지막으로 그 내용에 피해자가 합의하면 정식 진술 양식인 '간인(間印. 함께 묶인 서류의 종잇장 사이에 걸쳐서 도장을 찍음)'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어요.  그런데 소리내 읽을 때 피해자와 저희 모두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피해자의 말을 조사관이 '이런 뜻이냐'고 확인하고 문장으로 표현할 때 자주 일어났는데, 에코랄까, 공명이랄까, 동시에 시공간이 울리는 느낌이에요.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통해 피해가 적절한 언어로 구성되고 제3자가 이해할 만한 새로운 글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하나의 매듭이 풀린 것처럼 '치유'의 경험을 하는 게 보였습니다.      '시공간 울리는 경험' 바탕으로 19명 설득... 유형 분석 가능해져 Q : 피해자와 조사관이 어떻게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본 같습니다.  🧶 윤경회 : 그런 시간을 거쳐 진술에 동의하고 대인조사와 기록조사, 실지조사를 추진한 피해자는 총 19명입니다. 전수조사 때 파악한 52건의 피해 의혹 사례를 놓고 보면 적은 수치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피해자와 조사관이 듣고 말하며 공명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이 결과도 어려웠을 거예요. 왜냐면 그 울림의 경험 속에서 차츰 조사를 거부하는 분들을 설득하는 '요령'이 생겨났거든요. 피해자의 신뢰를 얻는 것은 결국 지지하고, 최선을 다해 듣고, 의미 있는 질문과 정보를 찾으면서 진실에 다가가려는 저희 조사관의 태도와 의지라는 걸 여러 번 느꼈어요. 나중에 19건이 유형 분석을 하기에 충분한 숫자라는 연구자와 전문가의 평가까지 들어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Q : 이렇게 방향부터 태도까지 재설계해 진행한 '5·18조사위' 진상 규명 활동을 취합해 정리한 것이 결과보고서군요. 그 주요 내용을 소개해 주세요. 🧶 윤경회 : 조사위에서는 확인해야 할 것을 세 가지로 봤어요. 첫째는 5·18 당시 성폭력 피해 사실이 있었는가 진위 여부 파악,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 피해가 발생했고,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였어요. 이건 출범 전부터 쟁점이었는데, 국가폭력이 아니라 군인 개인의 일탈일 수 있다는 시각이 있었거든요. 여기에 마지막으로 조사 재설계 과정에서 추가한 것이 사건 발생 후 현재까지 43년 동안의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피해였습니다.  그리고 40년만의 조사에서는 피해자들의 특성과 상황에 맞춰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조사 방법과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확인 과정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어요. 피해자를 아픈 사람, 고통받는 사람, 약자, 배·보상을 바라는 수혜자로 보는 우리 안의 시각을 교정하고, 본인의 피해를 포함해 당시 5·18을 겪은 목격자이자 진상 규명을 위해 참여하는 권리 주체이자 국가에 증언을 각오한 증언자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을 바탕으로요. 이를 위해 피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드리는 것은 물론 치유와 회복에 필요한 정책적 제안을 권리로 보장하고 분석해 보고서에 담기로 했습니다. 피해 진술의 일관성, 구체성, 합리성 등을 따지는 2020년의 형법 기준을 들이대면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피해를 가리기 어려우니까요. 이렇게 해서 집계된 피해 사례가 19건이었고, 최종 보고서에는 16건에 대해 '진상규명'으로 의결했습니다.          전직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덕분에 확인된 성폭력 진상 Q : 3건은 왜 포함되지 못했을까요? 🧶 윤경회 : '진상규명불능'으로 판단된 3건 중 1건은 '진상규명불능' 원안이 가결된 것이고, 2건은 '진상규명' 원안이 부결된 건이예요. 2건 모두 시내버스에서 이루어진 성폭력인데, '대낮 도심의 시위진압작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는 통념이 강하게 작용했어요. 한 분이 이의신청을 했지만 조사활동기간 만료로 재조사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최종적으로 19건 사례를 종합 분석한 결과 먼저 성폭력 피해가 계엄군의 조직적인 작전으로부터 야기된 폭력이라는 사실, 즉 '국가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 발생 상황은 크게 세 덩어리였어요. 하나는 광주를 고립시키려 주변 지역을 에워싸면서 진행된 외곽봉쇄작전에서 계속 발생해요. 매복을 위한 정찰 요원을 서너 명씩 보내는데, 이들이 찾고 이동하는 작전 구역 내 야산, 산골짜기 등에서 피해가 일어난 겁니다.  또 다른 피해는 도심의 시위 진압 작전이 이뤄진 터미널과 초등학교, 금남로 등지에서 나타나요. 당시 도심 집회에 대응하는 계엄군의 작전은 해산이 아니라 연행하고 체포하는 방식이었어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진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연행 후에는 속옷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겨요. 대개 남성들이 탈의한 모습이지만 여성도 다르지 않았어요. 1979년 부마항쟁 때 시위에 참여하는 여대생들이 늘어나자 이를 새로운 현상으로 본 군 당국이 5·18 때는 창피를 당하면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초기부터 시위 진압 대책으로 강제 탈의를 지시하고 실행했습니다. 공용 터미널에서, 초등학교 앞에서 속옷만 빼고 다 벗겨진 여성들은 군용 트럭에 실려 전남대나 조선대 운동장으로 이동해요. 그렇게 이동하는 도중에 트럭 안에서 군인들의 추행이 자행됐어요. 계엄군에게 여성을 강간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제 탈의 지시는 이동 트럭, 후미진 골목, 수색하는 집 등의 사각지대에서 폭력과 야만성을 부추기는 기제가 됐던 거예요.  Q : 당시 계엄군의 강제 탈의 지시를 뒷받침하는 문서 기록이나 군인들의 진술도 있나요? 🧶 윤경회 : 지시 내용이 담긴 문서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계엄군 지도부 중에 협조적인 이도 없었고요. 다만 꼭 강조하고 싶은 부분 중 하나는  5·18 성폭력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에서 피해 당사자의 용기 있는 증언이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투입된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5·18조사위'의 주요 활동에는 당연히 계엄군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국가의 책임을 판단하려면 군의 작전과 지시 상황, 피해와 연관성을 알아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당시 광주 금남로에 최초 투입된 제7공수여단 33대원을 전수조사하기 위해 총원 298명 중 주소지가 파악된 199명에게 서한문을 보내고 전화와 문자로 진술조사 참여를 요청했어요. 제가 입사하기 전 그만둔 6급 조사관의 조사 활동이었어요. 이중 약 10%인 29명이 응해 대인 조사가 이뤄졌고요. 이들을 통해 옷을 벗기라는 대대장의 지시가 있었고, 현장에서는 자기가 봐도 '미쳐 있었다'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여성들에 대한 추행이 벌어졌다는 증언을 확보했어요. 심지어 대검을 옷을 벗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대원 중 1명은 대검을 날카롭게 갈아서 출동했다는 진술도 있었어요. 실제로 등에서 날카로운 것이 느껴진 뒤 옷이 벗겨지고 피를 흘렸다는 사례가 4건이고, 군용트럭에 오르다 대검에 찔려 결국 자궁을 잃은 피해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증언을 통해 전직 계엄군도 피해자들처럼 평생 수치심과 공포감을 지고 살아왔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군인이 폭력의 주체였다는 부끄러움, 혹시 알아볼까 겁이 나서 제대 후에는 광주 쪽으로 아예 발길을 못한 분도 있었어요. 또 부마항쟁 때처럼 사나흘이면 광주도 진압될 거라던 예상이 어긋나니까 엄청나게 공포스러웠다는 거예요. 강도 높게 훈련받은 군인인데도 점점 인파가 늘고 차량 시위까지 격렬해지는 와중에 옆에 있던 동료가 맞고 다치고 쓰러지는 걸 보니까 눈이 돌았다고, 무서우니까 더 폭력적이 되더라는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Credit 인터뷰어 : 소현숙, 손정미 인터뷰이 : 윤경회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5월 9일 금요일 

    윤경회, 웹진 <결> 편집팀

페이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