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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박옥선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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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1980년대, 재일한국인들의 지문 날인 거부 운동과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 등으로 인해 한일관계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일본은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점차 우경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를 부정하려는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를 노골화 하였다. 이에 국내에서는 일본에 대항하는 민족정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는 가요 '독도는 우리 땅'의 대유행과 함께 독립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과거사 논의도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90년 1월 4일~24일, 한겨레 신문에 윤정옥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가 4회에 걸쳐 연재되면서 한국 사회는 점차 '위안부'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故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많은 피해자가 증언과 피해 신고에 나서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민간은 물론이고 정부 차원의 여러 지원책이 시행되었고, 대부분 힘겨웠던 피해자들의 삶은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국내에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들의 상황은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해외 거주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알았다 하더라도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자 등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국내에서 고조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에 비해 해외 거주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94년부터 해외 거주 피해자들에 대한 실태 조사가 시작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수십 명의 피해자가 밝혀지게 되었고, 이 중에는 박옥선 할머니도 있었다. 박옥선 할머니는 192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큰오빠가 보증을 잘못 서 집이 빚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버지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어지게 되었다. 1941년 할머니가 18살이었던 해 할머니는 중국에 있는 방직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따라나섰다가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해방 직후 '위안소'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지만 '위안부' 피해를 당했다는 자괴감에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후 피난 도중 흑룡강성 목릉 근방에 있는 마을에 들렀다가 홀아비를 만나 혼인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2001년도에 할머니와 같은 마을에 살던 조선족 동포가 한국에 시집을 오게 됐다. 이때 이 동포가 자신이 살던 마을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제보를 하게 되면서 박옥선 할머니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할머니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할머니는 얼마 후 한 방송국의 도움으로 한국에 있는 남동생과 조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가족을 찾은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6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할머니는 서울의 동생 집과 조카 집을 오가며 생활하다 2002년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박옥선 할머니는 온화하고 배려심이 많다. 평소에는 아주 점잖은 편이지만 노래를 너무 좋아하셔서 음악만 나오면 빼는 법 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시곤 한다. 한번은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자기소개 대신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박옥선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박옥선이는 노래도 못하면서, 아무 데서나 노래를 해! 밥 먹는 데서도 하고…."라면서 가끔 박옥선 할머니에게 쏠리는 관심을 못마땅해하신다. 이에 반해 속리산 할머니는 "옛날에 이 형님(박옥선)이 노래를 잘한다고 사람들이 찾아와 노래를 해달라고 아주 사정을 했어. 참 잘했어!"라면서 박옥선 할머니의 노래 실력을 인정해주신다. 두 분의 말이 상반되지만 속리산 할머니의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 왜냐하면 박옥선 할머니는 2014년 KBS 특집방송에 출연해 아리랑을 무반주로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든 이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박옥선의 방 박옥선 할머니의 방 전경 한편 박옥선 할머니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 사이에서 아주 깔끔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이는 할머니의 청결한 성격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할머니의 성격은 할머니의 방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복도를 기준으로 오른쪽 두 번째 방이다. 할머니의 방을 기준으로 오른쪽 방은 일전에 소개한 속리산 할머니 방이고 건너편 방은 2017년 돌아가신 故 김군자 할머니의 방이다. 할머니의 방은 한마디로 깔끔 그 자체이다.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셨지만, 워낙 깔끔한 성격 탓에 불필요한 물건이나 중복되는 물건이 거의 없다. 4평 남짓한 할머니의 방에는 오른편부터 장롱 2개와 4단으로 된 플라스틱 수납장이 있었고 방 끝에는 역시 후원받은 돌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번은 할머니의 옷을 챙기기 위해 이 장롱을 열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안의 옷들과 소품들이 계절별로 오와 열을 정확히 맞추고 있어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정리정돈이 훌륭해서 놀란 것도 있지만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가 이렇게 정리정돈을 잘 할 수 있으셨다는 게 더 놀라웠다. 또 돌침대 위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창틀에는 할머니의 손주들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의 왼편에는 직사각형의 큰 액자가 세로로 걸려있었고 그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모자이크처럼 붙여져 있었다. 사실 이렇게 큰 액자 안에 여러 사진을 붙여놓는 이 방식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공통된 양식이다. 근래에 나눔의 집에 오신 할머니들을 제외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했던 할머니들은 모두 이와 같은 양식의 액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이유가 궁금해 나름대로 알아보았지만 아직 그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액자 왼편에는 전신거울이 벽에 걸려있었고 또 그 왼쪽으로 나무로 된 3단 수납장이 있었다. 수납장 위에는 전화기와 TV 그리고 TV 리모컨이 있긴 했지만, 방에서 TV를 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다. 박옥선의 전신거울과 보행기 박옥선의 방 02 거울과 보행기 (1).jpg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보통 방보다는 거실에 많이 앉아 계셨다. 내 생각에 할머니가 사람들을 워낙 좋아하시다 보니 혼자 있는 것보다 여럿이 있는 걸 선호해서 그러시는 거 같았다. 가끔 강일출 할머니가 소란을 피우시거나 화를 내시면 할머니는 조용히 보행기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이럴 경우 보통 침대 앞까지 보행기를 끌고 가 앉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할머니는 좀 다르셨다. 할머니의 물건은 항상 지정된 자리가 정해져 있다. 이 중 보행기의 자리는 전신거울이 있는 벽이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방에 들어갈 때는 전신거울 앞에 보행기를 두고 침대까지는 보행기 없이 걸어가신다. 가끔 할머니를 따라 들어가 "할머니 여기서 TV 볼까?"하고 리모컨을 가져와 TV를 틀었던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이내 다시 리모컨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으셨다. 또 방 이곳저곳을 주시하다가 지정된 자리를 이탈한 물건이나 각도가 틀어진 물건들이 보이면 기어이 다시 제 위치로 정돈하시고 돌아오신다. 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위안소'에서의 피해가 할머니의 이런 성격을 만들었다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피해가 없어도 깔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많기 때문에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속리산 할머니는 박옥선 할머니의 방을 보면 "참 이 형님은 방 청소도 깨끗하게 잘하고, 살림도 잘하고 다 잘 해!"라며 박옥선 할머니를 자주 치켜세워 주셨다. 박옥선의 파손된 장롱과 파란 보관상자 박옥선의 방 03 파손된 장롱과 보관상자 (1).jpg 하지만 이 같이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던 방도 2019년 초 건강 악화로 인해 할머니가 침상 생활을 하시게 되자 주인 없는 방처럼 되었다. 여기에 증축공사 사태까지 더해지면서 할머니의 방에 남아있던 물건조차 모두 망가지게 되었다. 「이옥선 할머니의 방」편에서 언급하였지만, 당시 나눔의 집 운영진들은 생활관을 증축한다는 명분으로 할머니의 방을 무단으로 치우고 장마철에 할머니의 물건들을 야외 주차장에 쌓아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린 장맛비에 이 물건들은 모두 훼손되었는데,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박옥선 할머니의 물건들이다. 특히 나무 수납장은 아예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다. 이옥선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의 경우 아직 인지가 또렷하신 편이고 또 방에 대한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 훼손된 방을 복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박옥선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어 방에 대한 기억을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또 이상하게 다른 할머니에 비해 할머니의 방에 대한 자료는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여기에 물건들마저 훼손되어 아직 박옥선 할머니의 방만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2020년 할머니의 방 훼손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공익제보와 코로나 19로 인해 몇 달간 나눔의 집에서는 더 이상 증언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나눔의 집이 생겨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이로 인해 할머니들에게도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할머니들에게서 '위안부', '위안소', '사죄와 배상' 등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에 "바람 쐬러 가자",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속리산에 가야 한다.", "왜 저 할머니 말은 다 들어주고 내 말은 안 들어 주냐?"는 등의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변화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주 큰 충격이었다. 이 같은 변화를 보면서 왜 할머니들이 피해자화 되었는지 그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점은 할머니는 어제(과거)와 내일(미래)보다 오늘(지금)을 위해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아마 과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옥선 할머니를 포함한 나눔의 집 할머니들 또한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이 과거를 붙잡고 계신 이유도 현재를 위해서다. 만약 할머니들이 과거를 붙잡지 않고도 현재와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걸 아셨다면, 또 그래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있었다면 과연 할머니들은 인생의 마지막 한 꼭지를 나눔의 집에서 보내셨을까? 박옥선 할머니의 방을 제외한 이옥선 할머니, 속리산 할머니, 故 김군자 할머니,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모두 복원되었다. 그리고 멀지 않아 박옥선 할머니의 방도 복원될 것이다. 할머니들의 방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평범한 방이다. 하지만 그 방 주인들의 삶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평범한 방. 나는 이 방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할머니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 그 시각이 할머니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할머니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하고자 한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 아래 사진은 2018년 10월 중 촬영한 박옥선 할머니의 방이다. 방 복원에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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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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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2015년 11월 12~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인도에 반한 범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이 열렸다. 2015년은 적게는 5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희생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인도네시아 집단학살 범죄의 가해자는 인도네시아 군대, 그리고 군대에서 지도하고 훈련시킨 여러 민병대였고, 피해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하 PKI) 당원이나 관련 민중 단체였다. 이들 민중 단체는 농부, 노동자, 여성, 예술가,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의 열성적 지지자, 대부분이 중국인 진보단체인 시민협의회(Baperki)[1] 회원이었던 화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65년부터 PKI 당원(으로 간주된 자)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벌어지면서 수십만 명이 수감되거나 인도네시아 부루(Buru) 섬을 비롯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수감자 대부분은 고문을 당했고, 특히 여성(과 일부 남성)은 성폭력에도 노출되었다. 집, 사무실, 학교, 개인 재산은 모두 수탈되었다. 집단 학살이라는 반인도적 범죄가 시작되고 채 2년이 되지 않아 수하르토 장군은 수카르노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1968년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사건은 1965년 9월 30일, 중간 계급 군인들이 고위급 장군 6명(과 실수로 중위 한 명)을 납치해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9‧30운동', 혹은 '9‧30쿠데타'라 불리는 사건이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들 6명의 장군을 납치해 수카르노 대통령 앞에 데려가자는 것이 '9‧30 쿠데타'의 초기 계획이었다. 당시 PKI 의장도 장군들을 납치하는 작전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을 살해할 생각은 아니었다.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산당 간부와 일반 당원들은 이 작전을 알지 못했다. 의장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살해되어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곧 습격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듣고도 상관에게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수하르토 장군의 역할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이러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의 가해자 중 어느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축출되고 1998년까지 이어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 정권 하에서는 PKI가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며 비난하며 집단 학살의 피해자를 국가의 배신자로 묘사하는 공격적인 선전이 벌어졌다. 당시 활동했던 공산당원들과 후손들은 여전히 그러한 낙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가족은 직업을 잃었고, 아이들은 대학 입학을 거부당했다. 수천 명의 공무원과 군인이 수카르노를 지지했다는 의혹을 받고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연금을 받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1998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가 끝나자 집단학살 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Komnas HAM)'는 2012년 보고서에서 당시 자행된 잔혹한 행위를 반인도적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요약문과 함께 공개된 이 획기적인 보고서는 학살 목격자와 생존자 349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제출받은 법무장관실에서는 절차상의 이유를 근거로 보고서를 돌려보냈고, 지금까지 법무장관은 집단학살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 역시도 2012년에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감독의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이 개봉되고 나서야 이 비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개봉 뒤인 2013년 3월, 인권 활동가, 언론인, 연구자 등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헤이그에 있는 우리 집에 모였다. 오펜하이머 감독, Komnas HAM 위원 한 명, 저명한 여성이자 인권 변호사인 누르샤바니 까챠숭까나(Nursyahbani Katjasungkana)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이하 2000년 여성법정)에서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검사장을 맡기도 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2000년 여성법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참석자들은 국제민중법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대량학살 사건에 관한 국가적·국제적 수준의 침묵을 끝내고,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을 돕고 재발도 방지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과 활동가들이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을 조직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가 1965년 10월부터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를 국가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피해자와 그 가족의 목소리가 억압당하거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는 누르샤바니 총괄 조정관, 그리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네덜란드 헤이그 각각에 사무국을 둔 수평적 조직을 운영했다. 헤이그의 사무국은 재판 심리를 준비했다. 법정 준비를 위해 조직위원회(OC) 위원들이 이끄는 여러 팀도 만들어졌다. 누르샤바니도 자카르타 팀을 이끌며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힘썼다. 인권 운동가나 피해자 단체와 함께 세미나와 워크숍을 열었고 인도네시아 검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며 판사들에게 참여를 부탁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정기적으로 헤이그에서 우리 업무를 감독하기도 했다. 2014년 3월, ‘국제민중법정재단’(Foundation International People's Tribunal)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법정 주최 비용을 충당할 기금을 간신히 모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많은 기금 지원 기관에서는 이 문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국제 사법 재판의 도시로 알려진 헤이그에서 민중법정을 여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50년의 침묵을 깨다 우리는 ‘50년의 침묵을 깨다’(breaking 50 years of silence)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법정을 개최한 2015년은 집단학살과 PKI의 붕괴뿐 아니라 수카르노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진 '1965년 사태'가 있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판사단 최종 보고서(Final Report of the Panel of Judges)는 2016년 7월에 발표되었고, 2017년에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로 공개되었다. 세계의 연구자와 활동가 40명이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최종 보고서의 결론은 여전히 내용 열람이 금지된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의 분석과 일치한다. 특히 최종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다음의 4가지이다. 첫째, 판사단은 망명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고 판단했다. 망명자들 중에는 1965년 9월 당시 해외에 있다가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지 못한 공산당원들과 학생, 외교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판사단은 보고서에서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반인도적 행위와 별개로 상당한 규모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국가적 공격의 한 부분에 해당하며, 박해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반인도적 범죄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명시되어 있지 않고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판결로 논의가 시작된다면 좋을 것이다. 둘째, 살인 조장 선동에 관해 다루었다. 특히 “공산주의자 여성들이 '루방 부아야(Lubang Buaya)'라는 들판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면서 장군들을 거세하고 죽였다”는 허위 선전을 군대가 만들고 퍼뜨렸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판사단은 “루방 부아야에서 포로들에게 벌어졌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완전한 거짓이다. 수하르토 장군 휘하의 군 간부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고 …(중략)… PKI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 선전전은 이들에 대한 박해와 억류, 살해를 정당화했다. 또한 앞서 기술한 성폭력과 일체의 반인도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30년 이상 계속된 이 선전은 생존자의 시민권을 부정하고 박해가 지속되는 데 기여했다. 폭력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허위 선전을 퍼뜨리는 것은 폭력을 행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범죄를 준비하는 행위는 범죄 자체와 별개로 논할 수 없다. 선전은 학살을 포함한 반인도적 행위를 조장했으며, 광범위한 폭력의 시작이자 일부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셋째, 검사는 다른 국가, 특히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도 공모 혐의를 제기했다.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이들 세 국가에도 법정에 출석해 변론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에 응한 국가는 없었다. 판사단은 공모의 정도는 다르지만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가 모두 반인도적 범죄에 연루되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기소장에 따르면 특히 미국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대량 학살과 기타 범죄 행위를 자행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도네시아 군대의 반인도적 범죄 공모 혐의를 정당화할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민중법정은 집단학살의 발생 여부를 다루었다. 검사가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연구 보고서에서는 학살 혐의를 뒷받침하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집단학살 혐의가 기소장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집단학살 범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h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집단, 즉 “국가적, 민족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 집단”에 속하지 않는 집단에게 ‘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데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가 포함된다면, 극도로 민감한 문제를 다룸에 따라 이미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검사들의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민중법정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법정은 진실을 담는 아카이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정치계에서 지배적이었던 '가해자들의 아카이브'는 '피해자들의 아카이브'로 대체되거나 보완될 수 있었다. 세상은 생존자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비록 가해자에게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고 어떠한 보상이나 배상도 뒤따르지 않았지만, 법정을 통해 피해자와 그 가족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집단학살과 여타 반인도적 범죄를 둘러싼 침묵을 깨고 그러한 범죄는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 법정은 무엇보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각주 ^ 인도네시아 시민협의회(Badan Permusyawaratan Kewarganegaraan Indones, Baperki). 영어 명칭은 Consultative Body of Indonesian Citizenship으로 1954년 설립되었고, 이후 1965년 수카르노가 수하르토에게 실권을 이양한 후 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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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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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2018년 4월 21~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이는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을 롤모델로 하여 가해국의 수도에서 가해국의 책임을 물은 민간법정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최소한 80여 개가 넘는 마을에서 9,0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평화법정은 그중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퐁니·퐁넛 마을 및 하미 마을 사건을 대상으로 각 마을의 생존자 2명을 ‘원고’로,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여 민간인학살 사실과 책임을 다루었다. 두 사건 모두 1968년에 일어났기에, 시민평화법정이 열린 2018년은 학살 50주기가 되는 해였다. 시민평화법정 개최를 위해 수십 개의 시민단체와 995명의 개인이 준비위원으로 모였으며, 행사 양일 동안 시민들은 300여 석의 방청석을 연이어 가득 채웠고, 국내외 취재진들이 몰려들어 행사 내용이 보도, 중계되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된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는 이틀에 걸친 심리 끝에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에게 공식적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주문.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배상 기준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공식 사과하라.” ‘시민법정’의 문제제기 시민평화법정은 실제가 아닌 민간법정이기에 이 법정의 판결에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시민평화법정과 법정의 판결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한국 사회에 다시금 공론화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여성법정을 모델로 삼았다.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라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판결을 내렸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국제적 연대 확대에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의 노력은 매우 컸다. 2018년 시민평화법정은 일본의 시민사회가 18년 전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수행했던 역할을 모델로 삼고, 나아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이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어떤 문제의식으로 이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라면, 더더욱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있어서 가해국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 ‘책임’을 환기하는 과정으로 ‘시민법정’이 기획된 것이다. 시민법정은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라는 전제에 기반한다. 국가가 정의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시민사회가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침묵을 고수해 왔다.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32만 5000여 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미국의 파병 요구에 따른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 파병은 한국군의 ‘첫 해외파병’으로, 전쟁기념관과 같은 박물관에서 대대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학살 문제는 수십 년간 잊혀져 있었다. 한국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1999년에 와서였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며 한국 시민사회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현지 생존자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소수 참전군인들의 양심적 증언까지 더해졌지만, 국방부를 비롯한 한국 정부 기구는 ‘민간인학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불행한 전쟁’, 노무현 대통령은 ‘마음의 빚’ 정도로 언급했을 뿐이다. 이처럼 정부가 그 책임을 부인하는 가운데 2018년, 시민사회에 기반한 법정이 열린 것이다. 한편 베트남전쟁에 대한 문제 제기는 2000년 여성법정의 모델이었던 ‘러셀 법정’[1]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러셀 법정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제안으로 베트남전쟁의 침략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1966년 열렸다. 러셀 법정은 베트남전쟁 중 발생한 미국의 범죄를 폭로하고, 한국을 미국의 공범국가라고 판결했다.[2]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국가의 법정에서 다뤄지지 않는 문제를 민간의 영역으로 가져와 판결하는 시민법정의 문제의식이 국경과 시대를 넘어 서로를 참조하며 이어졌다고 하겠다. 생존자의 증언, 말하기와 듣기 2000년 여성법정의 증언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필리핀의 토마사 살리노그(Tomasa Salinog)는 “정의를 요구한 지금까지 10년 간의 어려운 싸움 끝에 여성국제전범재판이 (우리가) 계속 바라왔던 정의를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에게 귀 기울이고, 진실을 추구해온 우리에게 존엄을 회복시켜준 재판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3] 이처럼 시민법정은 피해 이후 오랜 세월을 살아낸 생존의 역사를 듣는 자리였으며, 침묵을 깨고 명예와 인권 회복을 요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의미를 지닌다.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사회가 여기에 답한다는 점에서 2018년 시민평화법정 역시 2000년 여성법정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시민평화법정의 토대가 된 것은 퐁니·퐁넛마을의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과 하미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의 말하기, 즉 학살생존자의 증언이었다. 우연히도 두 명 모두 이름이 응우옌티탄이었다. 두 명의 응우옌티탄은 이틀간 총 13시간에 달했던 변론 시간 중 휴정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재판이 한국어로 진행돼 통역을 통해서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원고들은 한국 변호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굳게 자리를 지켰다.[4]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그 당당함을 ‘살아남은 자의 소임’이라고 표현했다. 법정 전날, 그녀는 한국 국회를 방문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로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43년이 되었고 우리 두 사람이 학살을 겪은 지도 5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내일 우리는 법정에 섭니다. 한국의 친구들이 준비한 시민평화법정에 증인으로 나섭니다. 무섭고 떨리고 두렵습니다. 법정에 선다는 두려움에 한국에 오기 전부터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사실 이 자리도 많이 떨립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용기를 내는 이유는 50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의 가족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지난날 있었던 어둡고 고통스럽고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을 세상에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5]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밝혔듯 시민평화법정에 서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의 경우 시민평화법정을 향한 여정은 생애 첫 해외방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겪은 가족의 죽음,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가해국의 수도에 가서 수백 명 앞에서 증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에 무력한 ‘피해자다운’ 피해자가 아니라, 반세기를 살아낸 강인한 생존자들이었다. 두 생존자는 서로를 용기로 북돋았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희생된 가족들의 영혼을 대신해서, 가족을 잃은 이웃들을 대표해서 증언한다고 했다. 원고들이 증언을 마칠 때마다 법정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마침내 재판부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 퐁니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의 승소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몸이 떨릴 만큼 좋습니다. 진실을 말하러 왔고, 최선을 다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는 판결까지 받았습니다. 마을에 돌아가 제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겠습니다.” 응우옌티탄의 빛나는 미소에서 나타났듯이, 시민평화법정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듣지 않으려 했던 증언을 의미있게 듣고 응답하며 그 책임을 인정한 자리였다. 재판부가 선고한 약식 판결문에는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제3조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고,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공식선언을 할 것,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발생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 발생 여부에 관해 진상조사를 실시할 것, 전쟁기념관을 포함해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전쟁 참전을 홍보하고 있는 모든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에 진상조사 결과를 전시할 것’이 권고되었다.[6] 또한 재판부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왔음에도 용기를 내어 멀리 한국까지 와서 진실을 증언해준 두 원고들에게 존경과 연대의 인사를 전했다. 피고 대한민국과 ‘우리’의 책임 2018년 시민평화법정의 또 다른 의미는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는 점이다. 학살의 책임을 질 주체는 누구이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피고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서 ‘나’,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시민평화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장소’임과 동시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이고자 했다. 시민평화법정이 형사재판이 아닌 국가책임을 묻는 민사재판의 형식을 차용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방아쇠를 당긴 군인들과 그 명령을 내린 지휘권자를 처벌하는 형사법정은 국가범죄의 책임을 일부 군인에게만 한정시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형사법상 ‘유죄’를 선고하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닫히게 된다. 시민평화법정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피고로 상정함으로써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책임 역시 이야기될 수 있기를 바랐다.[7] 원고들의 대리인 역시 최후 진술에서 ‘원고들의 청구는 피고 대한민국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라고 함으로써 그 같은 바람을 드러냈다. 시민평화법정은 실제 재판과 동일한 수준으로 입증 수준을 맞추려 했기에 증거 확보가 중요했고, 그 과정에서 퐁니·퐁넛 사건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사병의 영상 증언을 확보했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참전군인과 접촉하고,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 속에서 참전군인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또한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 재판 전날 법정의 일부이면서도 법정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학술행사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 베트남전쟁에 연루된 ‘우리’>가 열리기도 했다. 여기서는 법정의 언어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어떤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어떻게 역사에 책임을 지고 기억할 것인가, 어떤 공동체를 현실에서 만들어나갈 것인가와 같은 고민을 나누었다. 법정, 그 이후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문제가 잊혀져 가는 상황을 문제 삼고 이를 다시 공론화시키려 한 시민평화법정 이후, 학살 생존자들의 진상조사 요구와 실제 법정 투쟁이 현재 진행중이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한국의 공무원들도 우리 생존자들에게 찾아와 ‘사과를 원하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들은 사과를 원한다’라는 것을 이 청원서를 통해서 분명히 알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60세가 넘은 고령으로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는 청원처럼,[8] 이들의 요구는 한국과 베트남 양 국가 간의 문제, 외교의 문제를 넘어, 당사자들의 인권에 대한 존엄의 선언이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의 연대로도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초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처음 알려졌을 당시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은 앞장서 학살에 대해 사과하고 한베 평화 활동에 기금을 후원했다. 2015년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나눔의 집’이었다. 당시 이옥선은 “먼 데서 찾아와줘서 고맙다. 다른 나라에도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있는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굳게 마음먹고 살자. 우린 아직도 전쟁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9] 2018년 시민평화법정 당시 김복동은 “내 아픔이 깊은 만큼 베트남 피해자분들의 아픔이 하루속히 회복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 저도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이지만, 한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제 사죄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10] 이렇게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들은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투쟁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대자로서 서로를 지지해 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국적을 넘어 어떤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있다. 각주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564쪽 ^ ‘Russell Tribunal’,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Russell_Tribunal (확인일 2020. 11. 3.)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위의 책. 568쪽. ^ 임재성, 「눈부셨던 응우옌티탄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시민법정이 남긴 것들」, 『문학3 2, 2018. http://munhak3.com/detail.php?number=1273 ^ ‘퐁니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국회 기자회견 성명서’, 2018년 4월 19일. 출처 : 한베평화재단 홈페이지 http://www.kovietpeace.org/?m=bbs&bid=board01&p=18&uid=5369 베트남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응우옌티탄의 말을 베트남어에서 한국어로의 통역을 거쳐 비로소 들을 수 있다. ^ ‘2018. 4. 22. 선고된 약식 판결문’.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블로그.https://blog.naver.com/tribunal4peace/221262364287 ^ 「피고 대한민국에 '망각금지'를 선고하다」, 『프레시안』, 2018년 5월 10일.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96157?no=196157#0DKU ^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학살 피해자들의 청원서’(2019.4.4.),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블로그. https://blog.naver.com/tribunal4peace/221505240819 ^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전쟁 사라질 때까지 함께 싸워요」, 『한겨레』 2015년 4월 5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5543.html ^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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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 강일출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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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해방, 또 다른 피해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항일인사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이 종로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의 기쁨과 환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만세’ 소리로 가득 찼으며, 해외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도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아시아 각지로 끌려갔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이 같은 해방의 기쁨과 환희가 전달되지 못했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 이후, 일본군은 본국으로의 회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이들의 안중에 없었다. 일본군은 피해자들에게 해방이 된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고 자신들만 귀국길에 올랐다. 이에 낯선 타국에 방치된 피해자들은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앞날을 대비해야 했다. 피해자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도보나 기차 등을 통해 스스로 귀국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연합군에게 발견되어 귀국선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만, 필리핀 등 상대적으로 멀리 끌려간 피해자들은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을 위해 중국관내로 모여드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도 해방 이후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에 남아있는 피해자가 상당하였다. 귀국을 포기한 피해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귀국을 포기하였는지 그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이옥선 할머니(부산)는 “내가 이마에 ‘위안부’ 간판 써 붙이고 어떻게 부모형제 얼굴을 보느냐?”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피해자와 돌아가지 않으려는 피해자들이 중국 관내에 많아지기 시작하자 중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무녀’, ‘기녀’, ‘풍기문란’ 등의 이유를 들어 강제송환을 추진하였다. 이에 강제송환을 피하려는 피해자들은 중국 국적의 남성과 결혼해 거류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강일출 할머니는 강일출 할머니도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체류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할머니는 192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열 두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로 생활을 이어나가셨는데, 땅과 논·밭 등이 많아 사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어린 여성들을 차출한다는 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어느 날 마을 이장이었던 할머니의 전(前) 형부가 할머니의 언니가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한 일에 앙심을 품고 할머니를 밀고하였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1944년, 17살이 되던 해 중국 흑룡강성의 한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할머니는 얼마 뒤 장티푸스에 걸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우 물만 마시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군은 할머니가 군인들에게 장티푸스를 옮길까봐 할머니를 산으로 끌고 가 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할머니는 당시 일본군이었던 조선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죽음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게 죽음을 피한 할머니는 해방 직후 조선족 남자를 만나 혼인하고 길림성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남편마저 6.25전쟁에서 사망하자, 할머니는 시댁을 떠났다. 시댁에서 나온 할머니는 중국군의 간호사로 입대하였으며, 전역 후에는 길림시의 한 병원에서 30여 년간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1991년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국내의 시민단체들은 해외거주 피해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 시민단체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낸 적이 있었는데, 강일출 할머니는 그 광고를 보고 직접 시민단체에 연락을 하셨다 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5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국내로 돌아온 할머니는 잠시 친척집에서 생활하시다 2000년 3월에 나눔의 집에 입소하셨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 강일출 할머니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신다. 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역사문제와 나눔의 집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 2016년에는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이 모티브가 되어 ‘귀향’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인해 강일출 할머니는 유명한 할머니가 되었지만, 정작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이 유명해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끔 영화 얘기를 하면서 ‘귀향’의 주인공이 할머니라고 설명하면 금방 잊어버리긴 하시지만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또 새로운 사람을 보면 증언을 해야 한다는 기억이 남아있어서인지 낯선 사람들에게 항상 “역사문제를 똑바로 알아야 해!”, “일본놈들이 우리나라 불바다로 만들었잖아!”, “다신 그런 나라가 오면 안 돼!” 등의 이야기를 반복하신다. 또한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질투와 샘이 대단하신데, 직원이나 방문객이 다른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거나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척 화를 내신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강일출 할머니가 계신 것을 모르고 이옥선 할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강일출 할머니가 아는 모든 욕을 들어야 했다. 오래전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던 할머니들은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내성이 생기셨는지 할머니의 어떠한 시비에도 반응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이 모습이 참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그러나 최근에 나눔의 집에 오신 속리산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텃세를 견디다 못해 몇 번 크게 싸우기도 하셨다. 다툼 이후 강일출 할머니는 계속해서 속리산 할머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속리산 할머니가 갑자기 강일출 할머니에 대한 칭찬을 하셨다. “강일출이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아, 자식들도 다 있으니 얼마나 좋아. 부러워” 이 말을 들은 강일출 할머니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시고 “아이고~ 언니야~ 고마워~” 라고 말해 주위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박장대소 한 일이 있었다. 이날 이후 지금까지 직원들은 두 할머니가 다투시면 강일출 할머니에게 “할머니, 속리산 할머니가 할머니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대”라며 귓속말을 한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서로 친하지 않으시다. 오히려 서로에게 무관심하시거나 다투는 일이 더 많다. 심지어 강일출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처럼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할머니들도 계신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사이도 좋지 않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시는데 왜 할머니들은 굳이 이렇게 함께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 강일출 할머니 방의 각양각색의 장롱들 강일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방에서 거의 생활을 하지 않으신다. 할머니는 주무실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잘 계시지 않는다. 항상 거실에 나와 TV를 보시거나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신다. 따라서 할머니의 활동무대는 주로 나눔의 집 거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소품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복도 끝 제일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방들도 많은데 굳이 왜 가장 안쪽 방을 쓰시는지는 잘 알지 못하였는데, 얼마 전에 2009년 지금의 생활관이 완공될 때 고(故) 김군자 할머니와 고(故) 배춘희 할머니 그리고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먼저 방을 ‘찜’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일출 할머니가 가장 안쪽 방을 고르신 이유는 그 방이 다른 방에 비해 조금 더 넓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앞서 소개했던 다른 할머니들의 방보다 조금 더 큰 편이다.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사각형 구조로, 다른 할머니들의 방과 마찬가지로 방 맨 끝 창문 아래 돌침대가 놓여져 있다. 침대 다리 방향 왼편으로 장롱 2개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장롱 맞은편에는 화장대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랍장, TV, 냉장고, 또 다른 장롱이 차례대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 할머니의 방을 보았을 때 색깔과 모양이 전부 다른 장롱 3개가 한 방에 있는 것이 좀 의아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이옥선 할머니가 “강일출이는 죽은 할머니 사진도 못 걸게 해! 무섭다고, 근데 자기 방에는 먼저 간 할머니 물건들을 다 갖다 놨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제서야 그 각양각색의 장롱들이 돌아가신 할머니들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못마땅해하고 질투하시지만 직원들에게는 참 친절하신 편이다. 또 사람들을 좋아해 직원들이나 방문객들을 보시면 본인 옆에 앉으라며, 옆자리를 툭툭 치신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으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떠날까 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붙잡아 놓으신다. 가끔 할머니가 거실에 없으면 방으로 찾아가곤 했는데,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내가 금방이라도 방에서 나갈까 봐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그 이야기는 보통 어릴 적 할머니 고향집에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것과 할머니가 막내라 부모님이 많이 아껴주었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의 집이 부자라 손님들에게 항상 식사를 대접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시려나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대신 머리 뒤에 흉터를 자주 보여주시는데 어떨 때는 일본군에게 맞았다고 하시고, 어떨 때는 포탄에 맞아 생긴 흉터라고 하시고 또 어떨 때는 어릴 적 감나무에서 떨어져 난 상처라고 하신다. 할머니 증언집에 일본군에게 맞은 상처라고 쓰여 있지만 굳이 할머니의 기억을 바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2019년 나눔의 집은 더이상 신규 입소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할머니를 더 모시겠다며 증축공사를 강행해 정원을 20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할머니의 물건들은 외부에 방치돼 장맛비를 맞았다. 이 중에는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강일출 할머니의 물건들은 다른 할머니들의 물건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덕분에 강일출 할머니의 방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빨리 복원되었지만 그 사이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신의 방을 완전히 잊어버리셨다. 장맛비를 맞고 훼손된 가구들 일본군‘위안부’운동과 할머니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공론화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고 해외 거주 피해자들이 국내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시민단체와 정부 그리고 할머니들의 노력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아직까지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부인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일제가 저지른 중대한 전쟁범죄이자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들은 노구를 이끌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피해 사실을 알렸으며, 일본과의 소송도 불사했다. 또한 매주 수요일에는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일본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할머니들의 희생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일제의 반인륜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라는 굴레를 넘어 우리사회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서 가져야 할 역할에 대해서만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을 뿐, 피해자가 아닌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삶을 살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피해자의 삶보다 누군가의 어머니와 할머니, 또 누군가의 친구 그리고 누군가의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로 살아왔다. 지난 30년간 피해자로서 최선을 다한 할머니에 대한 우리사회의 보답은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겪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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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할머니들의 첫 ‘미술 선생’을 만나다 - 『못다 핀 꽃』 이경신 화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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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때로 예술로 피어오른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응어리를 그림으로 쏟아낸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다. 미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분노와 슬픔, 고통과 회한은 흰 도화지 위에 선과 색으로써 표출됐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은 이경신 화가의 책 『못다 핀 꽃』(휴머니스트, 2018)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생존자들의 첫 ‘미술 선생’으로, 1993년부터 5년간 진행한 그림 수업의 뒷이야기를 20여 년이 지난 후 세상에 풀어놓았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나온 그는 졸업 후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다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한글 선생님을 구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곳으로 향한다. 강한 이끌림으로 할머니들을 찾았지만 막상 대면하니 말을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웠던 이경신 작가는 결국 가장 자신 있는 도구를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림으로 소통하기. ‘미술 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은 역시 쉽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그림 수업에 할머니들은 힘들어했고, 하얀 스케치북을 마음대로 ‘망치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래도 수업은 계속됐다. 그리고 변화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타났다. 할머니들은 그림을 통해 상처를 마주하고 스스로를 치유했으며 성장해나갔다. “대학시절, 그림을 그리며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할머니들을 만났죠.” 할머니들과의 시간은 20대 시절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던 작가에게 짙은 무늬를 남겼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인간의 존엄과 용기의 아름다움은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못다 핀 꽃』으로 늦게나마 수업의 마침표를 찍은 저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끌리듯, 만남 Q. 할머니들과의 만남 말고도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많았을 텐데 특히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나요? 김학순 할머니 때문이죠. 대학 4학년인 1991년 8월 15일에 국내에서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기사가 신문에 났어요. 김 할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50년 동안 가둬둔 비밀이 있을 줄이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었죠. 하지만 이후 할머니들 이야기는 잊은 채 졸업을 했고, 20대 청춘이 다들 그렇듯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실존적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들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김학순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매우 강하게 끌렸죠. 그 시절 제가 여성으로 살아가며 사회에서 겪은 자잘한 부당함들과 연결되면서 할머니들을 만나 뵙고 싶었어요. Q. 어떤 끌림이 있었군요. 네. 그리고 할머니들이 계신 곳이 저희 학교와 같은 동네였어요. 아마 지역이 달랐으면 조금은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Q. 할머니들과의 미술 수업이 20년 전이에요. 그때 당시를 회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기록을 더 많이 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도 그림 덕분에 수업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어요. 그림 안에는 이야기가 들어있거든요. 그때 오간 대화,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들이 그림을 보고 다 떠올랐어요. Q. 그림의 힘이네요. 네. 사진과 자료를 찾아보면서 좀 더 정교하게 정리를 하긴 했지만, 그림이 없었으면 기억을 못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Q. 수업을 하며 참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 있어요. <빼앗긴 순정>에 대한 이야기예요. 할머니는 (성폭력 피해) 당시 너무 어렸고 생리도 하지 않을 때라 남녀 관계를 아예 몰랐어요. 가족도 할머니와 본인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줄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처음에 성폭력을 당했을 때 ‘내가 죽는구나’ 싶었다고 해요. 성폭행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죠. 할머니는 원래 근로정신대로 공장에 있다 도망치던 중 붙잡혀서 위안소로 끌려갔기 때문에 소속이 불분명했어요. 그러다 보니 위안소 여성들로부터도 소외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철저히 혼자였던 거죠. 피해 이후 충격으로 실어증 상태가 이어졌고, 그게 굳어져 50년 동안 평생 말이 없으셨어요. 저를 처음 만났을 때도 할머니는 어둡고 눈빛이 날카롭고 예민하셨어요. 꼭 필요한 말만 하셨죠. Q. 이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처음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위로는 엄두도 못 냈죠.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저에겐 너무 힘들고 무겁게 다가왔어요. 상처를 가진 분들의 수업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도 몰랐죠. 그림을 그리면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겠다 싶어 미술 수업을 시작했고, 그게 미술 치료가 된 거예요. 초기에는 미술 치료에 관심도 없었고 할 줄도 몰랐어요. 아마도 할머니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들 때문에 미술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상처를 가진 할머니들에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는데, 우연히 미술잡지에서 미술 치료 기사를 발견했죠. 눈이 번쩍 뜨였어요. 내가 찾고 있던 게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림을 통한 치유, 그리고 감동의 순간 Q. 『못다 핀 꽃』에는 통한의 역사를 겪어낸 당사자들의 구술과 치유 과정이 기록돼 있어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이유죠. 할머니들 그림은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그림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는 저만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게 된 과정을 세상에 알리고 마침표를 찍는 게 미술 수업의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졌고, 여전히 잘못을 덮으려고만 하는 일본정부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나서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미술 수업의 마무리를 결심하며 책을 내게 됐죠. 피해자들이 평생 어떤 고통에 시달렸는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내야 했는지 기록해놓은 이 책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가장 아픈 역사적 증거가 되기를 바라요. Q. 책 작업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어떠한 삶이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 중 하나인 할머니들이 그림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어요.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변화한 과정들을 보며 제가 느꼈던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죠. 할머니들이 자신의 상처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싸워냈던 용기와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되찾으려 했던 노력들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그 아름다운 분투기를 보고 독자분들도 인간의 자생적인 힘을 믿으면 좋겠어요. Q. 20년 전이면 미술 치료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던 때잖아요. 어떤 점이 힘들고 또 보람됐나요. 할머니들의 상처를 그림으로 이끌어야 할 때가 가장 어려웠어요. 미술 치료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너무 어리기도 했고요. 할머니들의 마음이 다칠까봐 쉽게 도전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죠. 미술 치료라고는 했지만 이게 결국 공동 작업이에요. 저는 살짝 던지기만 했거든요. 근데 할머니들이 그걸 받아서 미술 치료 첫 날부터 너무 잘 해주셨어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셨죠. 그걸 보고 정말 기뻤어요. 길을 헤매다가 지름길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Q.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작가님과 할머니들 간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선생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셨어요. 그림에 한해서는 어미 오리와 아기 오리 같은 관계였죠(웃음). Q. 할머니들과의 수업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수업이 있다면요? 결정적인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요. 미술 수업의 기초인 데생 단계를 지나 자신의 마음을 끄집어내는 심상 표현 수업을 할 때였어요. 이용수 할머니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셨죠. <복잡한 세상살이>를 시작으로 의미 있는 그림들이 나왔어요. 소녀가 붉은 악귀에 잡혀 있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을 봤을 때도 충격이었고, 본격적으로 상처를 드러낸 <빼앗긴 순정>을 보여주실 땐 소름이 돋았어요. 그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은 김순덕 할머니가 쏟아낸 <못다 핀 꽃>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대표적인 그림이 됐어요. 그리고 이용녀 할머니의 <끌려가는 조선처녀>까지…. 할머니들이 저에게 그림들을 보여주실 때마다 감동과 보람을 느꼈어요. Q. 할머니들이 그런 그림을 그리실 거라곤 예상하지 못하셨겠죠. 전혀 못 했어요. 운이 좋게도 할머니들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 점점 발전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심상 표현 수업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상처를 표현할 때는 붓을 스케치북에 쿡쿡쿡 찍으셨어요. 가 닿을 수 없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청춘은 무지개로 표현하셨죠. 그다음부터 할머니들은 ‘상처’하면 무조건 붓을 스케치북에 쿡쿡 찍는 거예요. 유행이 된 거죠. 무지개도 그렇고요. Q. 『못다 핀 꽃』에는 할머니들의 그림뿐만 아니라 수업에 참여하던 할머니들의 모습을 재현해낸 작가님의 삽화가 함께 실렸어요. 삽화는 제가 할머니들께 받은 믿음과 사랑을 그림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작업이었어요. 미술 수업을 책으로 엮으면서 할머니들과 저의 우정을 공동 작업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제가 할머니들께 드리는 ‘헌화’라고 할까요?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과 <책임자를 처벌하라>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가 나오는데 두 그림을 합해서 나무들 사이에 소녀와 할머니를 세우고 상처로 고통 받았던 강덕경 할머니의 일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끌려감>에는 수많은 여성들과 군인들을 함께 넣음으로써 이것이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인권 유린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때 그 곳에서>는 김순덕 할머니가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 ‘나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고 그린 첫 번째 그림이에요. 처음으로 당하던 날 줄 서 있던 일본군을 그리셨는데 꼭 어린애 같아 보이거든요. 아이러니죠. 끔찍한 상황을 할머니의 선으로 나타내면 우화처럼 변해요. 그 간극이 문제를 객관화시켜서 보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Q. 할머니들에게는 미술 수업이 낯설었던 만큼 작가님 의도대로 수업을 진행하지 못한 적도 많았을 텐데,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미술 수업이 전시를 위한 것이었다거나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시작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조급함이나 목표가 없었어요. 그래서 즐길 수 있었죠.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들이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이용한 건, 제가 그림 그리는 재주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웃음). 그런데 할머니들이 떠나신 후에도 그림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그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Q. 할머니들과의 수업이 작가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겠죠. 할머니들을 통해 배우게 된 점이 있다면요? 제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들은 주로 누워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셨어요. 농담이긴 하지만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셨는데, 그러던 분들이 그림을 배우면서 당신들도 모르는 사이 달라지셨어요. 서서히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셨던 것 같아요. 창작의 기쁨과 자아실현의 순간을 경험하면서 생명력을 회복하게 되셨다고 생각해요. 폐암으로 쓰러지셨던 강덕경 할머니가 마지막 병상에서 저에게 남긴 말씀이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어요. “이제 막 재미있게 살려는데… 미술 선생, 내가 2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나이 어린 선생인 저에게 할머니 제자가 생을 마감하며 남긴 가장 큰 선물이에요. 기억해야 할 이름과 이야기들 Q. 『못다 핀 꽃』이 올해 5월 일본에서 출간됐어요. 일본에 처음 할머니들을 모시고 갔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일본에도 참 좋은 분들이 많다는 걸 알았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분들을 만나고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봤어요. 일본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사실, 일본 내에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도 알게 됐죠. 그리고 이 일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일본 독자들이 할머니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요. 전쟁의 폭력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삶이었지만, 다시 한 번 가슴을 뛰게 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요. Q.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14명밖에 남지 않은 현재, 지금의 독자들에게 『못다 핀 꽃』이 어떻게 읽히길 바라나요. 할머니들을 상처 있는 분들로만 생각하거나 ‘위안부’ 문제를 지나간 옛이야기로 여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근데 그러지 말고, 한 개인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분들에게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인생을 걸고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그 순간부터 현재까지 당차게 삶을 살아낸 할머니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해요. 할머니들은 상처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셨어요. 할머니들의 마음에 항상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못다 핀 꽃』 일본어판 출판을 계기로 일본 독자들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만남이 두 나라의 얽힌 매듭을 푸는 단초로 발전해 나가길 바랍니다. 만약 제게도 역할이 주어진다면 기쁘게 동참하려 해요.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이경신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6월 9일 수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로컬스티치 서교2호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