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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 -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서평
    2020년 에세이 이름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 -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서평

    '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행간을 읽어내고 엮은 책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직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문서의 상당수를 파기하였다. 일본군에게 불리한 문서들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활용되거나, 일본군의 전시 잔학행위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자료를 파기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동원하거나 관리하면서 작성된 문서들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은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여성을 위안소로 강제동원했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명부나 명단을 만들었다. 명부는 일본군이 만든 제도 속에서 여성들이 이름과 숫자로 적혀 통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분명하게 보여줄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명부 중 아주 일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은 현존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분석한 연구를 모아서 정리한 책이다.  7명의 저자가 이 책의 집필에 참여했으며 책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의 발굴 현황과 이것이 작성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본론은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명부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명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을 덧붙이는 형태로 되어있다. 부록에는 책에서 다룬 중요 자료의 일부가 원문 형태로 제공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2010년대의 연구 성과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명부나 명단들이 발견된 것은 이 문제가 알려진 1990년대부터이지만, 비교적 최근에야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연구 성과가 점점 축적되면서 명부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성과들을 편집하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명부 문제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고, 거기에서 무엇을 읽어 낼 수 있을까? 강정숙 선생님의 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도 이 문제를 다루지만,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명부는 작성한 주체와 목적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동원하고 위안소를 운영하기 위해 생산한 명부들이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한혜인 선생님의 글 2편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명부의 네 가지 분류 일본군이 만든 '위안부' 관련 명부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여성들을 모집하여 위안소로 이동시킬 때에 필요한 명부, 위안소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명부, 군인‧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한 명부,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 등이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군은 중국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 여러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을 동원했다. 전시에 민간인 여성을 전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문서들이 작성되었다. 도항(渡航) 허가서나 신분증명서, 승선명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명부들은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실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지만, 대부분이 파기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예외적으로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특요원('위안부') 명부가 남아있는데, 이는 여성들을 대만의 지룽(基隆) 항에서 중국 남부의 하이난으로 도항시킬 때 작성한 것이다. 최종길 선생님의 글이 이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두 번째로 위안소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가 있다. 지역에 따라 위안소를 관리하는 주체가 달랐는데, 일본군이 이를 직접 관리하기도 했고, 현지의 행정기관이나 경찰이 관련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위안소 관리를 위해서는 위안소 내의 인원을 정리한 명부의 작성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정기적으로 작성, 보고되었다. 관련 문서들 대부분이 사라졌으나,  연합군이 전후에 작성한 「ATIS 조사보고서 120호, 일본군의 편의위락시설」에는 필리핀에서 연합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위안소 관리 문건의 예시와 서식들이 남아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식에 따르면 위안소 관리를 위해 '위안부'의 영업허가증, 업자가 작성하는 위안소 영업 허가 신청서 및 영업 보고서, 성병 검진 보고서, 교체 허가 신청서, 위안소의 종업원 명단 등이 작성되어야 했다. 위 명부들은 모두 일본군'위안부'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명부들이다. 특히 종업원 명단은 성명, 출생일시, 직업, 거주지, 본적 등 상세한 내용을 모두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 번째로는 일본군이 군인‧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명부와, 현지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조선인들의 인원을 관리한 명부가 있다. 전자로는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 후자로는 「진화계림회명부」 가 있다. 이 명부들은 본래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명부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볼 수 있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에서는 전쟁 말기 일본군이 '위안부'를 간호부로 편입했던 정황이 확인되고, 「진화계림회명부」에서는 위안소 업주로 직업을 등록한 조선인들의 기록을 통해 중국 진화에 위안소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한혜인 선생님의 글에서, 「진화계림회명부」는 쑤즈량·천리페이 선생님의 글과 윤명숙 선생님의 글에서 각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들이 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각지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었거나, 연합군이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귀환시키는 과정에서 만든 명부들이다. 이 명부들은 조선인의 강제동원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로 활용되지만, 그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강정숙 선생님은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팔렘방의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피해자의 동원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책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연합군은 전후 포로로 잡힌 조선인 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발견하고 이들에 대한 보고서와 명단을 작성하기도 했다. 버마 미치나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힌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보고서인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와 중국 쿤밍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포로들을 조사하고 작성한 「쿤밍의 조선인과 일본인 전쟁포로」가 그것이다. 이 두 보고서에 첨부된 명단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 나이, 동원 시기가 남아 있다.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에서 버마 마니차로 동원된 여성들 20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한국 정부에 피해자로 신고하지는 않았다.    명부를 통한 연구의 어려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의 글들은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명부를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보통 명부가 제공하는 정보들이 매우 단편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명부가 작성된 역사적 맥락이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명부 속 이름만으로는 의미를 찾아내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는 아직 분석되지 않은 조선인의 승선명부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승선명부에는 전쟁이 끝난 후 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귀환한 조선인들의 이름, 귀환일시, 직업, 주소 등이 남아있다. 대부분이 남성이지만 때로 여성의 이름도 발견된다. 이들이 '위안부'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이를 설명해줄 또 다른 자료가 없다면 추가적인 연구와 분석을 진척시키기 어렵다. 피해자의 증언, 동원 지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 문서 기록이 교차하지 않는다면 명부 그 자체로는 연구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명부에 기록된 내용들이 개인정보라는 점은 연구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다. 지금은 논문이나 연구 결과물에서 피해자의 이름이나 주소, 인적 사항을 공개하고 있지만,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던 1990년대에는 이런 정보를 학계나 일반에 공개하기 쉽지 않았다. 피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의 정보까지도 자료 공개로 인해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우려하여 자료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이 처음부터 이름이나 여타 정보를 가린 문서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자료 활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세한 증언을 바탕으로 피해 지역의 명부에서 다른 피해자의 이름을 찾아낸 사례들이 몇몇 있다. 증언이 자료와 만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발굴된 명부의 수많은 이름 중에서 이렇게 피해자로 밝혀진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여전히 많은 이름들이 베일에 싸인 상태로 남아있다. 연구자 개인 혹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명부에 남아있는 이름과 주소를 바탕으로 더 많은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이, 피해자 본인이나 가족이 바라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점이 또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할 가능성 역시 갖고 있다.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가운데, 가족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와 피해사실을 더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귀환자의 승선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가 태평양의 트럭 제도로 동원되었음을 확인한 사례도 있다. 다만 이것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덧칠된 이름들에서 역사 발견하기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다른 자료와 달리 명부는 특정 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수, 출신지, 연령과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정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로 명부를 활용해 특정 지역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 중국 진화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팔렘방과 같이 명부가 발견된 지역에 관한 연구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위안부'가 동원되었고,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증언과의 비교검토, 현지 조사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명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지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일본군'위안부' 제도 전체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설명할 때 곤란한 부분 중 하나는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일본군'위안부'가 존재했는지, 그 중 조선인의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추정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략적인 비율을 가늠하게 해주는 몇몇 자료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특정 지역의 연구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어떤 지역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동원되었는지, 그들의 동원 시기는 어떠했는지, 그곳에 얼마나 많은 일본군이 주둔했는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실증적으로 규모를 추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의 위안소가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러 지역의 사례를 종합한다면 더욱 정확한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는 아직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는 분야이다.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명부도 많고, 새롭게 해외 자료보관소들에서 발견되는 명부들도 있다. 이 명부들에 관한 연구는  모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태를 밝혀내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연합군, 점령지의 조선인 조직들에 관한 연구와 함께 명부를 작성한 이들이 가졌던 시각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 본론에 수록된 서민교 선생님의 일본군에 대한 연구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를 설치한 주체인 일본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놓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의 분야와 시야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명부에 대한 연구는 일본제국의 식민지와 점령지에 대한 문제, 인종주의적 시각의 문제,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 등 여러 주제와 결합할 수 있고 결합해야 한다. 앞으로도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목차  1부. 은폐의 기술, 제도 속에 숨겨지는 이름  발견되는 이름, 이른바 '위안부' 명부 - 한혜인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운영과 기록되지 않는 이름 - 한혜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의 위안소 운영 실태와 가려진 명칭 - 최종길 2부. 숨겨진 '위안부' 이름 발견하기 중국 저장성 「진화계림회명부」 속 '위안부' - 쑤즈량・천리페이 인도네시아 「팔렘방조선인회명부」 속 '위안부' - 강정숙  보론  기록과 기억의 사이에서,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 - 강정숙 중국 당안관 자료 현황과 자료 해제(「진화성구 근황표」와 「진화계림회명부」) - 윤명숙 중일전쟁기 일본군 상황과 일본군위안소 설치 - 서민교  부록  자료 1. 인원 및 물자수송의 건 자료 2. 지나사변 이후 중남 중국에서 군에 대한 협력사항 자료 3. 타이완척식 관계 하이난도 도항자 인명표 자료 4. 하이난도 조사대용 및 군용자재 공급의 건 자료 5. 독립기념관 소장 수용인원명부 자료 6. 1946년 종전 당시 일본군 육군 주요 부대 편람

    공준환

  • 새로운 연대를 발명하는 ‘팀(Team) 『풀』’ 이야기
    2020년 에세이 새로운 연대를 발명하는 ‘팀(Team) 『풀』’ 이야기

    ​김금숙 작가의 『풀』 김금숙 작가의 『풀』(『Grass』 by Keum Suk Gendry-Kim)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입니다. 한국에서는 2017년 8월 14일에 출간되었고 2018년에 프랑스어로, 다음 해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올해 2월 14일 출간 이후 약 5개월간 2,300부 이상 팔렸습니다. 한국처럼 일본도 2월 초부터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4월 7일부터는 주요 지역에 긴급사태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지금은 긴급사태가 해제되었지만, 일상이 급격하게 바뀐 가운데 2월 21일 교도통신의 보도를 시작으로 6월 1일까지 11개의 언론사가 『풀』을 소개했으며 8개의 서평이 여러 매체에 실렸습니다. 3월에 예정되었던 『풀』 원화 전시나 나눔의 집 방문 기획 등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팬데믹의 일상 속에서도 『풀』이 일본 독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풀』이 엮어준 네 사람의 인연 코로나19의 위협에도 『풀』의 높은 작품성과 '풀 한 포기를 전하려는' 진심은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미에 씨는 일본 히로시마현의 체육 교사였습니다.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선생님의 공개 증언이 세상에 나오자 그는 관련 신문 기사를 교재로 만들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994년 2월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스미에 씨는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만났고 자신이 만난 그들의 삶과 '위안부' 범죄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는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지금 그는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평화 운동과 인권 교육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풀』을 처음 읽은 스미에 씨는 ''위안부' 문제는 어렵다', '나와는 관계없는 과거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젊은이들도 만화 『풀』이라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번역과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이런 스미에 씨의 결심과 김금숙 작가를 이어준 사람은 강제숙 씨입니다. 강제숙 씨는 1990년대 초반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1995년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지원과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해 왔으며 지금은 동남아시아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미에 씨와 강제숙 씨는 1990년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현장에서 만난 오랜 동지입니다. 강제숙 씨는 『풀』에도 등장하는데, 김금숙 작가와 함께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이옥선의 삶을 찾아 중국으로 떠나는 모습이 책에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대구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활동에서 강제숙 씨를 만났습니다. 시민모임 관련 행사에서 강제숙 씨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을 이어주는 든든한 통역자이자 길잡이였습니다.  제가 스미에 씨를 만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90년대 후반 관부재판 지원을 위해 대구 시민모임을 방문한 스미에 씨와 함께 김분선, 이용수 선생님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방문한 일본인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던 두 분이 나중에는 마음을 열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위안소에서 배운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노래와 춤을 즐기셨지만 그렇게 오래 일본어를 말하고 군가를 부르는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피해자들에게 일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번역 불가능한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듣기 위해 우리가 더 많은 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시에 가해국의 시민과 함께 하는 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 시간을 함께한 스미에 씨가 저에게 『풀』을 함께 번역하자고 했습니다. 90년대 후반 대구에서 시작된 인연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풀』이 만든 새로운 연대의 장 2019년 8월 23일, 쓰즈키 스미에, 강제숙 씨와 함께 김금숙 작가를 만났습니다. 번역자로서 작가와 상의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끝낸 뒤 도란도란 밥을 먹는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20년 전 '위안부' 피해자들이 맺어준 인연으로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귀한 선물 같은 작품을 만나 번역이라는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연대를 이어가게 되었으니까요. 이 연대는 세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풀』의 일본어 출판은 처음부터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일본어 출판위원회 공동대표가 되어 준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명예 관장과 오카하라 미치코(岡原美知子) 씨도 스미에 씨의 오랜 동지입니다. 미치코 씨는 히로시마현의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스미에 씨와는 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미치코 씨는 1993년에 열린 심포지엄 '제4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 진정한 화해를 바라며'에서 처음으로 피해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당시 본명을 숨긴 채 증언한 한국의 피해자가 김복동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2016년이 되어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미치코 씨는 한국, 중국, 필리핀의 피해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여전히 안전하게만 사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을 계속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년퇴직 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2012년 4월 결성, 이하 히로시마 네트워크)의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히로시마 네트워크는 매달 첫 번째 수요일에 일본 히로시마 시내에서 시위를 엽니다. 지난 6월 27일에는 유엔이 정한 '분쟁 하 성폭력 철폐의 날(6월 19일)'을 맞아 인도네시아 피해자 관련 행사를 열었습니다.  스미에 씨, 에리코 씨, 미치코 씨 세 명과 함께 출판사 고로카라(こらから)가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습니다. 2019년 9월 7일 시작된 모금은 4일 만에 목표액 145만 엔을 달성했습니다. 예상 밖의 호응이었습니다. 2차 모금도 순식간에 목표액을 달성했고 이후에도 응원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총 432명의 시민이 펀딩에 동참해준 덕분에 일본어판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2020년 2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야마에서 일본어판 『풀』 출판 기념 <김금숙 작가와의 만남>도 열 수 있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위안부' 피해자들과 인연을 맺고 활동해 온 4개 지역의 시민들을 포함해,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문제 운동, 후쿠야마에서는 부락민 차별 문제 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주축으로 행사가 열렸습니다. 21일 도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건물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는 자료관의 스태프들과 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한 시바 요코(柴洋子)같은 활동가들 덕에 가능했습니다. 시바 씨는 『풀』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같고, 이옥선은 대만의 피해자와 다를 게 없다고 했습니다. 시바 씨 외에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오랜 시간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은 이옥선과 함께 각지의 피해자들을 떠올렸습니다. 히로시마에서는 히로시마조선중고급학교 학생이 사회를 봤고, 후쿠야마에서도 고등학생이 사회를 봤습니다. 이 학생들에게 30년 '위안부' 운동의 바통이 넘겨질 것입니다.  이 만남은 '위안부' 피해 역사를 뉴스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역사와 제대로 대면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22일 오사카 행사의 공동 주최는 '다민족 공생 인권 교육센터'였습니다. 오사카에서의 행사장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쓰루하시에서 재일조선인 고령자 복지 시설 '바다'를 운영하면서 인권 운동을 하는 송정지 씨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그의 남편 김동휘 씨는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하던 1975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북한의 간첩으로 조작된 국가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제가 재일한국인 조작 간첩 사건의 재심 재판을 지원, 연구하면서 만난 인연입니다. 당일 손님들을 맞이하고 열심히 책을 판 사람은 김오자 선생님을 비롯한 조작 간첩 피해자와 가족분들이셨습니다. 고문 수사관, 조작에 관여한 검찰, 사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조작 간첩 피해자들은 『풀』의 이옥선이 “일본놈들이 나빠, 아베가 사죄해야지, 배상해야지”라고 하는 원통함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오사카 행사의 뒤풀이 자리에는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조작 간첩 사건 당사자들과 관계자, 지역에서 '위안부' 운동을 해온 분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풀』을 통해 국가 폭력과 인권을 다시 생각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에 전하는 30년 운동의 역사 『풀』의 그림은 단순함이 극대화된 흑과 백의 수묵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묘사된 등장인물은 내가 되기도 하고, 붓 터치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바람, 비, 산, 나무, 나뭇잎, 풀, 새는 이옥선의 마음을 상상하게 합니다. 김금숙 작가가 그려낸 위안소에서의 직접적인 폭력은 누군가가 배당받았을 군화, 검은 묵으로 채운 3쪽 18칸의 어둠, 그리고 뼈마디 굵고 거친 이옥선의 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검은 여백 속에 배인 짐승 같은 울부짖음, 평생 이옥선이 안고 온 고통의 깊이는 독자가 상상해 내야 합니다. 이 책을 읽는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남영동, 서빙고의 몇 호실을 떠올리고, 지원자들은 피를 토하듯 생존자들이 남긴 증언을 떠올립니다. 『풀』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딸로 태어나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옥선이, 전쟁이 끝나고도 여성이자 성폭력 피해자로서 겪어야 했던 구조적 폭력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풀』의 특별한 점은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작품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풀』 속의 '나'는 이옥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거듭합니다. 작가는 엄마 배에서 나와 여태껏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이옥선을, 형제끼리 의지하며 살려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는데 뭣 하러 왔나 싶다는 이옥선을, 폭 안아드릴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대신에 작가는 15살 옥선이 걸었을 중국 연길의 거리를 걸으며 공기를 느끼고, 연길 동 비행장에서 서시장을 지나 위안소였던 건물의 복도에 섭니다. 『풀』 속의 작가를 따라 이옥선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자는 이옥선의 삶으로 대변되는 역사와 내가 사는 오늘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잔혹한 폭력의 실상, 70여 년 전의 과거사, 일본에 대한 증오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옥선은 어떻게 살고 싶었던 존재였을까?', '나는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우리 사회는 괜찮은가?' 자문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부재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풀』은 소중한 작품입니다. 해외에서도 『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9 미국 뉴욕타임스 최고의 만화', '2019 영국 가디언 최고의 그래픽 노블'에 선정되었고,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만화계 시상식 중 가장 영예로운 '아이스너 어워드' 3개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지금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당당히 맞서왔고 지금도 맞서고 있는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와 지원 운동을 해 온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옥선들'의 삶으로 대변되는 참담한 역사로 '모험'을 떠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팔린 2,300여 권의 『풀』은 역사를 지우려는 힘에 맞서고자 하는 누군가의 손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국경을 넘은 '위안부' 운동 30년 역사가 계속됩니다.

    이령경

  • 할머니의 방 -이옥선 할머니 편-
    2020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이옥선 할머니 편-

    웹진 <결>은 2019년 10월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를 실은 바 있다.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적 활동이 아닌 퇴근 후의 사적 일상을 드러낸 이 인터뷰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표현해주었다. 누구에게든 피해로만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결이 존재하며, 그 같은 결들을 받아들이고 각 존재의 고유성을 이해할 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 높아질 것이라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에 웹진 <결>은 2020년 4월부터 누군가의 생애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방'이라는 공간의 가구, 물건, 사진을 통해 <나눔의 집>에 사는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살펴보는 연재를 기획했다. 그 사이 <나눔의 집> 운영을 둘러싼 문제가 공론화되었고, 할머니들의 방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아직까지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이 연재를 통해 그 자체로 보존해야 할 역사적 공간인 할머니들의 '방'을 기록으로 남기고 웹진 <결>의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나눔의 집과 할머니의 방들 1991년 우리 사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여러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복지와 생활 터전을 제공하기 위해 1992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문을 연 <나눔의 집>도 있었다. 이후 종로구 혜화동을 거쳐 1995년 경기도 광주시에 정착한 <나눔의 집>은 지금까지 정부에 신고된 240명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30여 명의 할머니에게 생활 터전을 제공하였으며, 2020년 8월 현재에도 5명의 할머니가 생활하고 있다. 그동안 <나눔의 집>에서 생활한 할머니들은 수많은 활동을 통해 일제의 비인륜성을 고발하였으며 증언, 그림 등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나눔의 집>은 할머니들이 남긴 수많은 흔적과 유품 그리고 그에 관한 기억들로 채워졌다. 또한 이 같은 할머니들의 활동들로 인해 <나눔의 집>은 단순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생활 터전을 넘어 일본 패전 후 전쟁 피해자의 생활과 심리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사회의 인식과 시선, 우리의 역할 등에 다양한 시사점을 주는 공간이 되었다. <나눔의 집> 어디든지 할머니들의 흔적과 역사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바로 할머니들의 방이다. 할머니들의 방에는 피해자로서의 삶과 개인의 삶, 그리고 할머니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등이 할머니들의 물건과 소품, 사진 등을 통해 잘 나타나있다. 지금까지 <나눔의 집>에서 많은 할머니가 생활하셨지만, 현재 남아있는 방은 총 다섯 할머니의 방이다. 이중 고(故) 김군자 할머니의 방을 제외하면 모두 현재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니들의 방이다. 하지만 2019년 여름, 할머니의 방 자체가 '위안부' 문제의 중요한 역사적 일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나눔의 집> 이사진과 운영진의 관리 소홀로 인해 할머니들의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이 기본적인 포장도 되지 않은 채 비오는 날 외부에 방치되어 장맛비를 맞았다. 이로 인해 일부 물품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고, 방을 치우기 전 사진조차 남지 않아 할머니들의 방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나눔의 집> 직원들 사이에서 할머니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공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공분은 할머니들의 방을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귀결되었다. 직원들은 먼저 할머니들의 물건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나눔의 집>이 소장한 사진을 포함하여 신문, 방송, SNS 등에 나온 할머니들의 방 이미지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치워진 물건들을 할머니 별로 정리하고 훼손된 물건 중 복구가 가능한 것들을 먼저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 나갔다. 이로 인해 할머니들의 방은 점차 예전 모습을 찾아갔다. 이 글은 복원된 할머니들의 방과 그 방에 깃들어 있는 할머니 한 분 한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옥선의 방 가장 먼저 복원된 방은 이옥선 할머니의 방이었다. 이옥선 할머니는 해방 후 중국 연변에서 생활하시다 2000년이 돼서야 귀국하여 <나눔의 집>에 오시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에선 이미 사망신고가 되어있어 할머니는 1년이 넘는 시간을 국적회복과 피해자등록을 위해 보내야 했다. 뛰어난 총기와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할머니는 2004년 고(故) 김순덕 할머니가 별세한 이후, <나눔의 집>을 대표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참석 및 증언 활동을 도맡아 해오고 있다.  20년 넘게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계신 할머니는 거실에서 TV를 보실 때에도 자기 방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누가 들어가는지를 확인하실 정도로 자기 방에 대한 애착이 강하시다. 할머니의 방은 <나눔의 집> 생활관에서 가장 앞쪽에 위치한, 직사각형 구조의 4평 남짓한 방이다. 방 끝에는 창문이 있고 그 아래 침대가 놓여있다.  침대 위 다리 방면으로 서랍장이 하나 올려져 있는데, 돌침대라 가능한 일이지만 침대 위에 서랍장이 올려져 있는 것이 좀 특이하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낡은 책장이 하나 있는데, 책장에는 천주교 관련 서적과 역사책이 대부분이다. 이옥선의 낡은 책장 부산이 고향이신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학교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10살 때부터 학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쓰기도 하고 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부러워 오빠가 다니는 학교 담장 밖에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2019년 할머니와 함께 부산에 있는 할머니의 고향 마을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다른 것들은 잘 기억을 못하셨지만, 오빠가 다녔던 학교와 그 학교로 가는 길 그리고 어릴 적 학교에 대한 설움은 선명히 기억하셨다. 가끔 직원이나 방문객이 할머니 방에 있는 책장을 보고 “할머니, 책이 많네요?”라고 물으면 할머니는 항상 “저 책장에 있는 책을 내가 다 읽었다고 하면 믿겠어?”라는 말과 함께 공부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해방 후에도 할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연변에서 생활하셨다. 어느 날 마을의 한 청년이 재미있는 책이 있다며 할머니에게 읽어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할머니가 책을 볼 수 없다고 하자, 그 청년은 할머니에게 야학을 소개해 줬다. 그렇게 야학과 인연을 맺은 할머니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 나가 한글을 배웠다. 할머니는 이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함박웃음과 함께 “내 거기서 받침(한글)을 뗐어!”라고 말씀하신다. 야학에 다닌 이후 책 읽는 재미에 빠져 밤마다 책을 빌려 읽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으신다. 한 번은 할머니가 너무 똑똑해 동네 사람들이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때 “호미 대학 농업학과를 나왔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할머니에게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어보면 똑같이 대답하신다. 그리고 가끔씩 책장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위안소에 끌려간 이야기를 꺼내실 때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공부 욕심이 많아 무엇이든 배우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으로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매일 우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역 앞 우동집에 양딸로 가면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그 집의 양딸로 가게 되었는데, 현실은 온갖 허드렛일과 술 시중이었다. 이에 할머니는 그 집에서 여러 번 도망치고 잡히기를 반복하였고, 결국 우동집 주인에 의해 울산에 있는 한 여관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울산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여관집 주인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웅장한' 남자 2명에게 잡혀 중국 연길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책장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자신은 위안소가 아니라 학교에 가고 싶었다는 말이라는 것을.    이옥선의 작은 TV와 서랍장  책장 오른편에는 3단으로 된 수납장이 있는데, 그 위에는 조그만 TV와 젊은 시절 할머니의 사진이 놓여있다. 할머니는 요즘 이 TV로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 <에움길>을 보는 재미에 푹 빠지셨다. 할머니는 매일 가장 먼저 마주친 직원에게 영화를 틀어 달라 하시고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큰 미동도 없이 집중해서 관람하신다. 가끔 할머니에게 “할머니 지겹지 않아? 다른 거 볼까?”라고 물으면 “저기에 내 역사가 있어!”라고 대답하시며 다시 영화에 집중하신다. 최근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도 즐겨 보시는데, 극 중 싸움을 잘하는 스님이 나오면 항상 “저 스님이 깡패보다 더 쎄”라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또 그 스님이 싸우는 장면이 나오면 식사시간이라도 그 장면은 다 보셔야 식사를 하신다. 침대와 책장, 그리고 수납장을 지나면 2단으로 된 낮은 서랍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손자의 초상화와 아주 오래된 매실주가 올려져 있다. 직원들이 가끔 할머니에게 그 매실주를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면 언제든지 마시라고 하시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아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은 양으로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침대, 책장, 수납장의 맞은편에는 5단 서랍장과 옷장 두 개가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냉장고가 있다. 냉장고 안에는 캔으로 된 초코우유와 아이스크림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 이 중 초코우유는 매달 한 번씩 오는 방송인 김구라 씨가 사 오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이스초코, 아이스크림, 탄산음료를 무척 좋아하시는데, 처음 아이스초코를 드셨을 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냐며 놀라셨다고 한다. 직원들은 할머니가 기분이 조금 안 좋아 보이거나 답답해하는 것 같으면 아이스크림, 아이스초코, 탄산음료 중 하나를 먹으러 나가자고 제안한다. 십중팔구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신다. 그리고는 주문한 음료를 다 드시고 나면 “다 먹었다.”라고 하시거나 “이거 먹으면 속이 뻥 뚫려” 또는 “내가 이거 때문에 나오는 거야.”라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이옥선의 사진들 할머니의 방에는 벽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진과 액자들이 걸려있다. 20년 넘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활동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할머니의 방에 있는 사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천주교와 관련된 사진, 두 번째는 가족과 관련된 사진, 마지막은 일상사진이다. 인권활동가로서의 사진도 없지는 않으나 몇 장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관련된 사진들이다.  할머니는 가끔 방에 걸려있는 사진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시는데, 키가 닿지 않는 곳은 효자손을 이용해서 설명해주시곤 한다. 그중 할머니와 가장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사진들은 모두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사진들이다. 먼저 머리맡 침대 위에는 오래된 묵주 2개가 걸려있고 그 아래 작은 선반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성모 마리아, 김대건 신부 등 천주교와 관련된 사진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또 침대 위 벽면에는 할머니와 신부님이 찍은 사진과 예수님의 초상화 등이 걸려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할머니가 중국에서 생활하실 때 성당에 가고 싶어 하셨는데, 자신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수녀님들이 할머니를 찾아와 누구든 성당에 올 수 있다며 할머니를 설득하였고, 그때부터 할머니는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마다 성당에 다니고 계신다.  천주교와 성당에 관련된 사진 맞은편에는 손자들 사진이 자리 잡고 있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각별하여 방 곳곳에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나 손자들의 사진이 있다. 사실 할머니는 어렸을 적 '위안부' 피해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셨다. 할머니 말로는 '위안소'에 있을 때 606주사를 맞고 수은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몸이 망가졌다고 한다. 해방 후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중국에서 애 딸린 홀아비를 만나 가족을 꾸리셨다. 딱 한번 할머니에게 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는 "내가 '위안부' 간판을 이마에 써 붙이고 부모 형제 얼굴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대답하셨다. 어쨌든 이때 키운 아들의 자식들이 할머니의 손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과 며느리 모두 장애가 있어 손자들은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자랐다. 현재 가끔 큰 손자가 사고치는 것만 빼면, 다들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방에 대해 “내 방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 다 내가 고르고 내가 산 거야. 내 방에는 없는 게 없어. 그래서 다른 방에 뭐 빌리러 갈 필요가 없어, 다들 내 방에 빌리러 오지.”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자기 방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떠난 뒤 본인의 방이 없어질까 걱정을 많이 하신다. 특히 요즘에는 “내가 죽어도 내 방은 군자 방(고 김군자 할머니 방)처럼 그대로 둬라.”라고 자주 말씀하신다.  이옥선 할머니의 방은 여느 할머니의 방과 다름없는 평범한 방이다. 동시에 특별한 방이기도 하다. 이 방에는 그동안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 사회는 할머니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기억했는지도 잘 나타나 있다. 누군가에게 할머니의 방은 그냥 평범한 방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할머니를 이옥선이 아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만 보았기 때문에 이 방의 가치는 아직 평가 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방이 그대로 남아 일본군'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피해자 개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기록물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김대월

  •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2020년 에세이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가 기억하는 김복동은 인권활동가이자 투쟁가였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담담하게 증언을 하고 일본을 향해 거침없이 반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는 당당한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내려오면 그에게도 여느 사람처럼 일상이 찾아온다. 김복동은 담배를 즐겨 피우고, 종종 유쾌한 농담을 즐겼다. 실명된 왼쪽 눈을 선글라스로 가리면서도, 사진에 찍힐 땐 밝게 웃는 사람이었다.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를 준비하면서 ‘위안부’ 문제 활동가, 연구자에 국한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김복동에 관한 글을 받았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저마다의 시각으로 바라본 김복동의 이야기를 모으고 싶었다.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모은 글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전시 성범죄를 이 땅에서 뿌리 뽑기 위해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김복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복동은 많은 사람에게 인권활동가, 평화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단상에서 내려온 일상 속의 김복동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때마침 나눔의 집 내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연구원 마리오 씨(본명 야지마 츠카사, 失嶋 宰)로부터 김복동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던 당시 찍은 일상 사진들을 받았다. 사진이 찍힌 정확한 일시와 당시의 상황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김복동이 <나눔의 집>에 기거하던 시절에 찍힌 이 사진들을 통해 단상 아래로 내려온 김복동의 일상을 웹진 결의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이번 포토스토리를 기획했다.                                 Credit 사진 제공 : 나눔의 집

    웹진 <결> 편집팀

  • 교실에서 만난 일본군'위안부'
    2020년 에세이 교실에서 만난 일본군'위안부'

    교실에서 만난 일본군 '위안부' - '위안부' 수업의 성찰적 진화  일본군'위안부' 문제(이하 '위안부' 문제)는 역사 교사들이 남달리 생각하는 수업 주제 중 하나다. 전쟁 범죄를 통해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사례라는 점은 '이 역사적 진실을 아이들과 꼭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역사 교사들이 가지는 일종의 책무감이다. '위안부' 문제가 단지 참혹하고 비극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아이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피해자들이 용기 있게 증언에 나섰고 보편적 인권을 위해 싸우는 감동적인 과정이 있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재,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위안부' 문제는 국가교육과정에 공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특별 수업의 형태로 교육이 이뤄진 과거와 달리 지금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만 해도 필수 과목인 『한국사』와 선택 과목인 『동아시아사』를 통해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를 배운다. 교과 활동을 넘어 동아리 활동이나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다양하게 교육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국가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자체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교육이 충실하게 이행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 교육을 둘러싼 성찰과, 그를 통한 교육의 진화에 있다. 역사 교사들과 교육 연구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과 함께 나눌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해왔다. 이는 오늘날 다양한 방식으로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도 '역사화'의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종의 당사자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그 '역사화'에 나름의 실천을 담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현장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위안부' 교육을 둘러싼 고민 지점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교육 현장에서 성찰한 지점을 '감수성', '삶과 만난 실천', '보편과 인권의 이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소개하려고 한다.        감수성 :수업에서 고통을 전시하기만 할 수는 없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상을 도저히 끝까지 보기 힘들었어요. 속이 울렁거리고 힘드네요. 이전에 봤던 '위안부' 영화도 다 못 보고 나오고 말았어요”  -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공개 수업을 다 보지 못하고 뛰쳐나간 필자의 동료 교사   진실은 그 자체로 실천의 도구가 되고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는 공론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에서 역사적 진실이 확인되었고 '할머니'들의 실천을 통해 진실이 역사화 되었다.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같은 시민단체의 활동가와 학계에서 성실하게 채록해온 당사자들의 구술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역사 텍스트다. 이를 기반으로 한 영화 등의 영상 텍스트도 최근에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애써, 일본 정부가 힘써 외면하던 진실을 가르치고 나누는 것 자체는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많은 역사 교사들은 자칫하면 '위안부' 문제 수업이 그들의 고통을 전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한다. “'위안부' 문제와 같이 끔찍한 사안은 초등학생이나 저학년을 대상으로 다룰만한 주제가 아니”라며 방어적으로 수업하는 경우도 많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제작된 6학년 사회 교과서(국정)에서는 피해자들에 대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고 서술하여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1]. 논란에 대해 당시 교육부는 '어린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서술을 할 순 없다'고 응수했다. 역사적 사건 서술에 대한 최소한의 구체성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최근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많이 제작되어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거나 수업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한' 폭력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심지어 그 묘사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 이는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성찰적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수업 자료로도 부적절하다. 앞서 제시한 나의 동료 교사의 거부감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단순한 피해 전시에서 더 나아간 수업은 어떻게 가능할까? 일제강점기 이후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실천과 행위를 충실히 역사화하고 수업에 반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 이후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이어졌고,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정의기억연대)'과 같은 시민단체와 학계가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연대했다. 이 문제가 한국 사회를 넘어 세계적인 보편의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역사 교사들은 1990년대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싸워온 역사를 수업에서 다루려고 노력한다. 역사 교과서에 짤막하고 피상적으로 서술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마냥 전시하지 않았다. 이를 직면하고 나아가 용기를 내어 실천하는 삶을 택했다. 놀라운 실천이었던 수요시위, 베트남 전쟁 피해자와의 연대, '나비기금' 등도 충분히 역사 수업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할머니들을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부정적 경험만을 수업에서 다룰 필요는 없다. 이는 할머니들이 거대한 역사적 폭력에 수동적으로 당한 존재로 여겨지게 할뿐더러 그들의 비극을 단지 자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든다.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루기 위해 오늘도 많은 역사 교사들이 자신의 수업을 개편해나가고 있다.   삶과 만난 실천 : '위안부'를 주제로 '역사하기' 민주시민교육[2]은 최근 교육 현장에서 주목받는 화두 중 하나다. 민주시민교육의 강조와 더불어 학교 현장에서는 비교과 활동을 통해 사회 문제를 실천적인 교육으로 다뤄보고자 하는 교사와 학생들의 시도가 이어졌다. 초기 단계부터 지금까지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 '인권동아리'나 '역사실천동아리' 등이다. 시민사회, 사회 이슈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동아리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동아리들은 수요시위에 함께 참여하고 학내에 소녀상을 세우거나 관련 기념품을 판매하여 단체에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초창기만 해도 학생들을 데리고 '시위'에 나가거나 민감한(?) 이슈와 관련해 직접 실천하는 동아리 활동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활동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수요시위나 문화 공연도 많다. 역사 교사와 학생들의 의지와 실천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매우 실천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학생들을 아픈 역사와 직접 만나게 하고 나아가 스스로 역사적 주체로 서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프로젝트 수업, 학생자치 프로그램, 동아리 등으로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의 원형으로는 최종순(전 누원초 교사, 퇴직)의 수업[3]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해당 교사는 90년대 후반부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교실로 초대하고 그들의 증언을 학생들이 직접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업을 해왔다. 사회 이슈 자체를 모두 '민감한 것'으로 치부했던 당시 분위기에서 이러한 시도는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러한 수업 방식은 학생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 개개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교실에서의 강렬한 경험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나아가 다양한 교과와 융합하여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마중물이 되어 오늘날 실천적인 '위안부' 문제 수업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초임 시절 첫 제자들과 함께 방학 때 서울로 올라와 수요시위에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 한 학생의 대표 연대 발언 장면은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퍽 인상 깊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고등학교에서 스스로 역사 동아리를 조직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했다. 나아가 지금은 대학에 진학해 역사 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통해 '역사하기'를 체험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 흐뭇한 일이다.  '경기도교육청 꿈의 학교'인 의정부 평화나비학교의 사례[4]는 이러한 실천형 '위안부' 문제 교육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 대학생, 학부모, 중·고등학생 100여 명으로 구성된 '평화나비학교'는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을 2년여간 이어왔다. 피해자 할머니를 모시고 증언을 듣는 자리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관련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였으며,  의정부 시내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진행해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2015.11.07. 건립). 이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함께 공부하고, 실천 방안을 고민하며, 활동을 조직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각 학교의 학생자치회와 연계하여 작은 소녀상을 세우는 사업도 전국적으로 성행했다[5]. 학생자치회 학생들이 직접 캠페인을 벌여 기금을 모금하고 학교 내 공간에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여 공공역사를 체험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역사를 삶의 문제로 가져오는 실천적 배움이 어떤 교육적 효용이 있는지 몸소 보여준 사례다.   보편과 인권의 이름 -보편지향의 '위안부' 문제 수업을 향하여 학생 K : 와, 일본놈들. 우리도 나중에 일본 여자들한테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학생 B : (피식 웃으며)'야동' 보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일동 웃음) - '위안부' 문제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의 대화(2018) 특성화고에 근무하던 시절, '위안부' 문제 수업을 마치고 나가면서 들은 대화다. 스치는 대화였지만 찰나의 순간에 느낀 충격을 잊지 못한다. 대화를 들으면서 '내 수업은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 경력이 많지 않던 시절, 진실을 알린다는 명목하에 할머니들의 고통을 전시하기만 한 수업의 처참한 결과였다. 학생들이 소속된 '남초 집단'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던 걸까? 당시 나의 수업 내용과 디자인에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선, '위안부'라는 소재가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젠더 이슈라는 점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증오라는 감정이 곧잘 남에게 전이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교실에서 교사의 분노는 학생들에게 쉽게 전파된다. 그 분노의 진원지는 어떤 것이었나. 민족과 국가라는 시각에서만 수치심과 분노를 드러냈던 것이 잘못이었다. '위안부 교육'은 보편적 인권에 입각해 젠더적 접근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다층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교육적 효과와 함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2017년 1월, 일본 삿포로를 방문하여 일교조(일본 교직원노동조합)의 교사들과 만났다. 동아시아 평화교육과 관련된 수업 사례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에서 '히라이 아스코' 선생님의 수업 사례를 들었다. 히라이 선생님의 발표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가슴 깊이 남았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상품화 문제일 뿐 아니라 남성의 인권도 침해하는 문제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해요.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국가에서) 남자라는 존재는 국가가 보낸 빨간 봉투(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무조건 전쟁터로 가야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여성과 동침시켜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 아닌가요? 그것 자체가 남성이란 존재에 대한 비하이며 인권침해에요. '위안부' 문제는 여성만이 분노할 문제가 아닌 거죠. - 히라이 아스코(삿포로 마코마니아 중학교 교사) 히라이 아스코 선생님은 '위안부' 문제가 단지 여성 인권에만 국한된 주제가 아니라 남성들 역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라는 점을 짚었다. 아이들과도 그 점에 관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편인권의 문제로 확장해서 접근하여 큰 교육적 영감을 남긴 사례였다. 아무리 좋은 수업과 교육적 실천이라도 계속 고민의 수준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을 잃고 낡은 것이 되고 만다. '위안부' 문제 수업의 생명력도 마찬가지다. 그 생명력은 성찰에서 나온다. '위안부' 문제 수업의 정신을 살려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성찰적으로 수업한 사례들도 있다. 맹수용(경기 의정부고) 선생님의 수업 사례[6]가 대표적인 경우다. 냉전과 전쟁에 대한 세계사 수업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당시 지역 사회의 이슈였던 기지촌 여성 문제를 연계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관리와 통제 하에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기지촌 여성에 대한 고민은 강제동원의 고통에 시달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연계하여 인권 감수성을 벼를 수 있는 사안이다. '기지촌 여성'을 국가폭력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여성의 존엄과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했다는 것에서 맹 선생님의 수업은 또 다른 '위안부' 문제 수업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이 원해서 했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요?'라고 무심하게 말을 던졌던 일부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이 일본 극우의 논리를 대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성찰하고 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국가폭력과 여성 인권 그리고 개인의 삶이 역사 수업을 통해 교차한 순간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는 전시 여성 성폭력의 문제,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입니다.” 2018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은 대통령의 발언이다. 역사 교사들의 '위안부' 문제 수업이 한일 갈등과 반일주의의 좁은 폭에 갇힌다면 할머니들의 실천을 제대로 학생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 교사들은 스스로의 수업에 물음을 던지며 '위안부' 문제 수업을 고민하고 있다. 보편적 인권을 아이들과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 수업을 위해서.   '용감한 할머니들'의 삶을 이어가기 위하여 '용감한 할머니 이야기'. 전국역사교사모임이 3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한 역사 수업 책에서 김선옥(현 호치민한국국제학교 교감, 역사교사)이 '위안부' 문제 수업 관련 원고[7]를 쓰며 붙인 제목이다. 여기에서 어떤 의지 같은 것을 느꼈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민족 서사에 가두거나 여성의 순결주의와 같은 헛된 관념의 포로로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용감한 할머니'라는 호명은 그들 자신과 연대자들의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하겠다는 생각일 테다. '윤회'라는 것이 물리적 신체의 재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업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이어지는 개념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는 많은 사람의 삶에 '윤회' 되기에 충분하다. 그 길에 역사 수업이 공헌할 바는 없을까.  '정의연' 논란으로 많은 이들이 참담함을 느낀다. 해당 논란 자체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 논란이 확대되고 오인되는 과정에 고통을 느꼈던 사람, '위안부' 문제가 역사화되는 치열한 과정을 알기에 더욱 상처받은 사람 등…. 많은 역사 교사들은 “아이들을 수요시위에 마음 편히 데려갈 수 없게 될까?”, “할머니들과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오욕과 상처를 받게 될까” 우려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역사 교사들은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한 당사자로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역할을 자임할 것이다. 주체적 의식 속에 만들어가는 '위안부' 문제 수업을 기대해보자. 더불어 이러한 수업을 통해 동료 시민으로 성장할 아이들을 함께 떠올려보자.          각주 ^ 2015년 당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져 격론이 일어났던 때다. 공교롭게도 2016년 초등 6학년 사회교과서(사회 6-1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 자체가 제외되어 크게 논란이 되었다. 교육부는 '초등 학생의 발달수준을 고려해 위안부라는 표현을 뺐다'고 해명했다. 2018년 초등 6학년 사회교과서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진과 설명이 다시 추가되었다. (남지원 기자, 「초등 사회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설명 되살아났다」, 경향신문, 2018) ^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다. 민주주의, 인권, 평등, 평화, 환경, 미디어 리터러시 등 다양한 주제가 민주시민교육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별 교육의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가치와 태도, 역량을 높이고 참여와 실천으로 확장하는 포괄적인 교육을 뜻한다.  ^ 최종순, 「나는 아이들과 무엇을 했는가?」, <역사와 교육 18호>, 2019. ^  우현주 외, 「평화나비학교: '평화나비학교'가 꿈꾸는 마을 학교」, <역사교육> 110호, 전국역사 교사모임. ^ 이화여고 학생 동아리 '주먹도끼'와 지도교사 성환철 교사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다. '작은 소녀상 건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2015년 졸속적으로 진행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학내에 가로30cm 세로 30cm 크기의 '평화의 소녀상'의 축소판 구조물을 건립하는 운동이다. 2017년 기준 전국 100곳 이상의 학교에 건립되어 화제를 모았다.  ^ 맹수용, 「지역사를 활용한 세계사 수업-냉전과 미군기지, 그리고 기지촌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126호, 2019. ^ 김선옥, 「용감한 내 이웃 할머니의 이야기」, <역사교실:역사에서 배우고 삶으로 가르치는>, 비아북, 2018.

    문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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