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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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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2024년 9월 26일 <다큐를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트라우마의 재현과 세대를 넘는 기억의 전승>을 주제로 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의 현존과 목소리를 영상으로 전달함으로써 역사부정세력에 대항하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후세대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콜로키움에서는 <22>의 궈 커 감독,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의 세실리아 강 감독, <보드랍게>의 박문칠 감독을 초청해 작품에 담아낸 문제의식과 제작 과정을 듣고,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들과 각 작품이 이룬 성취와 향후 과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웹진 <결>은 주요 토론 내용을 2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22> 감독 궈 커 | 98분 | 2018 (▶보러가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많은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동원되었다. 촬영 당시인 2014년 피해 생존자 수를 의미하는 제목처럼, 중국의 궈 커 감독은 다큐멘터리 <22>에서 피해생존자 22명의 일상을 과장 없이 따라가며 ‘위안부’로 동원되어 받았던 고통과 그 이후의 지난한 삶이 새겨진 주름 가득한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 영화는 2017년 중국 개봉 이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내게서 출발한 배> 감독 세실리아 강 | 120분 | 2023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세실리아 강 감독은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위안부’피해자 고 김복동의 강연을 듣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깊은 공감과 디아스포라로서 이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감독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역시 한인 2세인 주인공 멜라니 정은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 고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과정을 몸으로 보여준다. 실제 배우이자 연기 학교에 다니는 멜라니가 가정폭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액자식 구조인 이 영화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담아낸다. 2023년 11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특별상과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보드랍게> 감독 박문칠 | 73분 | 2022 어떻게 하면 ‘위안부’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박문칠 감독의 고민이 담긴 영화 <보드랍게>에는 피해자 고 김순악의 증언과 그 주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 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등 김순악을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위안부’ 피해가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진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그녀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여성이었음을 조명한다.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모여 ‘n개의 김순악’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현재의 젠더 폭력과 ‘위안부’ 역사 사이의 연결성과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생존자의 증언을 담은 카메라 렌즈의 안과 밖 🧶 김한상 : 다큐멘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폭력과 피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입니다. 과거를 어떻게 잘 재현해서 현재의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인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이 갖는 근본적인 질문일 겁니다. 궈 커 감독님의 <22>는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피해 생존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그분들의 마지막 순간의 어떤 모습들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와 같은 접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이 영상들은 다시 후대에 기록될 자료나 전문가의 발언과 함께 새롭게 재구성될 가능성을 남겼다는 점에서 소중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인 피사체로서 피해 생존자들 혹은 증언자들을 다루는 접근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증언자와 상호작용을 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피해자 혹은 증언자의 증언은 대상화가 되고 혹은 감상의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황미요조 : <22>는 중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근접해 클로즈업으로 얼굴을 담아내거나 반대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분들의 일상을 지켜봅니다. 간간히 인터뷰가 나오기는 하지만 어떤 큰 역사의 내러티브를 구축하거나 개인의 삶을 일관되게 구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중요하게 담고 있는 것은 피해자들의 현재 시간, 그 일상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 얼굴의 주름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유예된 시간, 동결된 시간 자체를 보여줍니다. 스물 두 분의 생존자 중 이제 일곱 분만이 남아 있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해왔고 이 역사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내러티브 구축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이 영화가 무엇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가지는 예의와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은경 : <22>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생존자들의 증언을 낱낱이 기록해 후대에 전승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히는 한편으로 ‘부재’를 환기시키는데요, 특히 ‘사라짐’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메모리 시대에 ‘위안부’ 기억은 이제 피해 당사자의 어떤 회상이나 증언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기억의 전승이라고 하는 것, 그들의 부재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내가 그것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창조적인 재해석을 통해 그 기억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았습니다. 🧶 소영현 : 기록과 기억의 대상이 피해 생존자로 한정된 경향에 대해서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시각화하는 순간 언제나 피해 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는데, 사실은 피해 생존자 말고 돌아오지 못한, 기록에도 남지 않은 수많은 피해 생존자와 피해자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죽었기에 기록도 안 되고,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많은 부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록할 것인가, 함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살아 돌아온 피해자,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 기록에도 남겨지지 못한 피해자와 피해 생존자를 위문하는 가족과 친척들, 돌아왔으나 트라우마적 과거에 갇히게 하는 사회를 폭넓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피해가 선명해 보인다고 해도 사실 피해와 가해는 구분되기 힘들거나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피해 생존자임을 밝히기 원하지 않는 가족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제 질문은 그 죽음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기록해야 하는가로 요약된다고 하겠습니다. 익숙한 재현 방식을 넘어 🧶 황미요조 : <보드랍게>는 기존 ‘위안부’ 재현 방식과는 다르게 김순악이라는 피해자의 삶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대구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 인권 활동가 인터뷰라든지, 드라마적인 애니메이션, 김순악의 생전 인터뷰와 일상생활 푸티지 들, 또 성폭력 생존자인 동시대 여성들에 의한 김순악의 증언 낭독, 그리고 화면 바깥에 화자가 전제된 연대기적 설명 자막과 사진이나 신문 기사처럼 정보 제공을 위해 화면 사이에 끼워 넣은 인서트용 아카이브 푸티지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김순악의 생애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층위의 재현 양식은 그동안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사용된 인터뷰나 보이스오버 위주의 ‘위안부’ 피해자 재현양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 김은경 :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김순악의 다양한 이름은 그녀를 어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고 또 단일한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복수의 김순악‘들’은 편하고 매끄럽게 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미투 운동 당사자들의 음성이 서로 중첩돼 울리는 가운데 열거된 그 이름들은 정말 듣는 청자가 천 개의 귀를 열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고, 이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름의 나열은 단지 김순악이라는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효과, 그러니까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인 상징, 어떤 ‘숭고한 피해자’라는 상징을 완전히 깨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영화는 ‘강제 동원된 일본군’위안부’ 대 매춘부 혹은 기지촌 미군 ‘위안부’’ 혹은 ‘인신매매된 순진한 기지촌 여성’ 대 ‘기지촌 여성을 착취하는 포주 마마상’ 등과 같은 이분법적 통념이나 피해자의 전형성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일부러 김순악이라는 굉장히 난해한 텍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정형화된 기억과 담론을 뒤흔들며, 여러 이름으로 살았던, 여러 목소리로 중첩되어 설명되는 그 김순악‘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재현 방식들, 그러니까 기존 다큐멘터리에서 해온 관습을 뒤로 하고 애니메이션과 미투 운동 당사자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관객이 김순악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미학적 선택은 ‘위안부’ 역사의 박제화에 저항하면서 관객이 함께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굉장히 훌륭한 미학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또 낭독자들은 김순악의 삶을 읽어내려 가면서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어루만지고 ‘아이고, 참 애묵었다’며 다독입니다. 김순악의 삶과 낭독의 얽힘은 낭독자들의 상처까지 보듬으며 ‘애먹었다’라는 말을 그들에게 돌려줍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연대하는 큰 울림을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 황미요조 : <내게서 출발한 배>는 아르헨티나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영화가 이루어지는데 특히 주인공인 멜라니는 ‘위안부’ 피해자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하며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 가정폭력을 당한 엄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립니다. 영화는 한국에 와서 ‘위안부’ 문제에 더욱더 심층적으로 다가가는 멜라니의 여정을 함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이렇게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과 동시대의 20대 젊은 여성의 삶 사이의 공명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보드랍게>와 공통 지점을 갖습니다. 하지만 <보드랍게>와 달리 우리는 <내게서 출발한 배>를 통해 피해자 황금주의 구체적인 삶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주의 삶을 구성하거나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 증언의 일부만이 목소리나 표정, 몸짓 같은 멜라니의 ‘몸’을 통해 파편적으로 제시됩니다. 한국에서 멜라니가 방문한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나 기록, 자료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황금주’의 삶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는 관객들이 멜라니를 비롯해 여성들이 서로 주고받는 감응적인 반응들을 바라봄으로써, 그 감응의 공동체에 참여해 일부가 됨으로써 ‘황금주’의 삶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어떤 억압에 대한 디아스포라의 삶일 수도 있고, 불안정한 20대나 가정폭력 피해자의 위치일 수도 있습니다. 황금주의 생애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제시되듯이, 그에 감응하는 주체들의 삶도 완결적이지 않습니다. 영화는 ‘황금주’부터 현재 디아스포라 20대 여성까지 연결하면서도 계속 어떤 빗금을 긋고 영화 안에 액자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자연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 있다는 것을 계속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누구의 삶도 일관되게 구성하지 않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감응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격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 소영현 : 기본적으로 ‘위안부’문제에서는 역사에서 지워졌던 피해와 피해자를 가시권으로 이끄는 일, ‘드러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피해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떻게 현재의 문제로 다룰 수 있는가도 고민해야 할 것이고요. 이런 점에서 오늘의 영화 3편은 다양한 재현 양식을 구현하고 있어 흥미롭게 봤습니다. 우선 일본군‘위안부’를 부인해 왔던 오랜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직접 증언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운동의 성격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 구축하게 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분하자면 <22>의 경우 피해 생존자 가시화 작업이 온전하게 요청되고, 거기에 긴급하게 반응해야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업이었습니다. <보드랍게>는 감독님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사건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개인의 삶이 삭제되어 버리고 역사적 증인으로 환원되어버리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한 점들이 굉장히 의미 있었습니다. 나아가 세실리아 강 감독님의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에서는 ‘위안부’문제 논의의 확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세 재현의 방식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진전된 작업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에 대한 기록 작업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용자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문제는 수용자가 계속 바뀐다는 겁니다. 또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꽤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수용자의 가변성을 고려할 때 그것에 맞춘 재현의 방식이 반복적으로 지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공적 기억의 지형 변화에 대한 고려가 좀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억 투쟁 과정에서 피해와 피해 경험이 ‘있었음’을 부정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과거에 이미 다 보여줬으니까, 드러냈으니까 지나간 거고 이후에는 다른 방식의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의로 나아가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의 재현 방식에 대한 대안적이고 보완적인 작업으로 볼 수 있을 <22>와 <보드랍게>의 작업이 말해주듯, 그런 의미로 피해-증언의 복원과 피해 경험자의 복원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그 자체로 보족(補足)적 작업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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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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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2024년 9월 26일 <다큐를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트라우마의 재현과 세대를 넘는 기억의 전승>을 주제로 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의 현존과 목소리를 영상으로 전달함으로써 역사부정세력에 대항하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후세대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콜로키움에서는 <22>의 궈 커 감독,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의 세실리아 강 감독, <보드랍게>의 박문칠 감독을 초청해 작품에 담아낸 문제의식과 제작 과정을 듣고,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들과 각 작품이 이룬 성취와 향후 과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웹진 <결>은 주요 토론 내용을 2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22> 감독 궈 커 | 98분 | 2018 (▶보러가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많은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동원되었다. 촬영 당시인 2014년 피해 생존자 수를 의미하는 제목처럼, 중국의 궈 커 감독은 다큐멘터리 <22>에서 피해생존자 22명의 일상을 과장 없이 따라가며 ‘위안부’로 동원되어 받았던 고통과 그 이후의 지난한 삶이 새겨진 주름 가득한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 영화는 2017년 중국 개봉 이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내게서 출발한 배> 감독 세실리아 강 | 120분 | 2023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세실리아 강 감독은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위안부’피해자 고 김복동의 강연을 듣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깊은 공감과 디아스포라로서 이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감독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역시 한인 2세인 주인공 멜라니 정은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 고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과정을 몸으로 보여준다. 실제 배우이자 연기 학교에 다니는 멜라니가 가정폭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액자식 구조인 이 영화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담아낸다. 2023년 11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특별상과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보드랍게> 감독 박문칠 | 73분 | 2022 어떻게 하면 ‘위안부’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박문칠 감독의 고민이 담긴 영화 <보드랍게>에는 피해자 고 김순악의 증언과 그 주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 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등 김순악을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위안부’ 피해가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진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그녀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여성이었음을 조명한다.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모여 ‘n개의 김순악’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현재의 젠더 폭력과 ‘위안부’ 역사 사이의 연결성과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세대와 지역을 넘어선 기억의 확장 🧶 김은경 : 저는 세 편의 다큐멘터리가 결국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보았습니다. 이른바 ‘포스트 피해자 시대’에 우리가 ‘위안부’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확장할 것인가, 어떤 기억과 연결해 나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세 영화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 조서연 : 미체험 세대가 과거의 폭력과 기억을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데요. 오늘 콜로키움에서 다루는 세 편의 영화들은 ‘타자의 기억을 나눠 갖는 자들’을 다룬다는 점,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 감정·감응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점에서는 오카 마리가 제안한 동일화하지 않는 공감으로서의 ‘분유(分有)’가 떠오릅니다. 즉 과거의 폭력을 겪은 사람의 경험을 타자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경험한 자의 기억은 이야기되어야 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또 트라우마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이후 세대가 공감이라는 가치를 매개로 새로이 자신의 기억을 만든다는 점에서 마리안느 허쉬의 ‘포스트메모리’도 연상하게 합니다. 저는 지금 일본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데, 대부분 일본인 학생입니다. 그래서인지 <22>에서 젊은 일본인 유학생 코메다 마이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특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이후 세대의 관계, 즉 자신의 삶과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얼른 연결하기 힘든 이들이 코메다의 고백 혹은 모습을 경유해 감정을 투사하고, 또 피해자들이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실제 인간임을 상상할 수 있게 돕습니다. 이처럼 <22>가 피해자들의 과거를 보는 동시에 현재를 담는 데 주력하는 것은 영화 속 장면들의 내용과도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22>에 등장하신 분들은 대개 고향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고, 종전 후에도 중국 사회의 가부장성과 민족주의적·성적 낙인으로 2차 피해를 계속 당해 오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영화는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문제로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피해자가 살아가는 공동체와 사회가 지속시키고 재생산하는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 🧶 김은경 : 피해자가 직면했던 냉혹한 현실은 <보드랍게>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저는 <보드랍게>가 누구도 자신을 ‘보드랍게’ 대해주지 않았다는 김순악의 하소연을 제목으로 삼고, 그걸 ‘컴포트(comfort)’로 번역함으로써 위안소의 위안(comfort)과 귀국 후에 ‘보드랍지(comfort)’ 않았던 냉정한 현실의 간극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냈다고 봤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폭력적인 ‘comfort’를 피해자의 맥락에 재배치해 전복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겁니다. 그동안 ‘comfort’의 가해성, 즉 내가 그 가해에 가담하고 연루되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감독님께서 이 영화의 제목을 ‘comfort’로 설명하고 김순악의 삶에 재배치함으로써 할머니의 신산했던 삶, 누구도 정말 애먹었다고 얘기해 주지 않는 그 삶에, 그 고통에 나도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감독님께서 똑똑한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 조서연 : 영화들에서 제가 눈여겨본 것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둘러싼 새로운 기억이 지속적으로 생성될 가능성입니다. 포스트메모리가 바로 ‘역사’가 아닌 ‘기억’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과거와의 정서적인 연결, 즉 구체화된 살아 있는 연결을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연관지어 생각함으로써 비극적 사건이 현재와 미래의 상상력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면서도 과거를 대면하기 위한 연결적인 접근과 관계를 형성”해 포스트 피해자 시대에도 계속해서 기억해 나갈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김은경 : 조금 더 욕심이 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도 그렇지만 <보드랍게>의 서사, 기획은 훌륭하고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화라는 사회적 텍스트를 통해서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차원에서 사실 미투 운동 당사자와의 연대를 전면에 내세우는 건 굉장히 훌륭한 기억하기 방식이 틀림없지만 좀 더 ‘comfort’의 맥락에 좀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군사화된 대한민국의 기지촌 이주 여성의 ‘dis/comfort’의 현실을 한국의 ‘위안부’ 기억 공간에 등장시켰더라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안전지대에서 이탈시켜서 다시 ‘위험한’ 대항 기억을 형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사정 또한 너무 잘 이해합니다. 또 <내게서 출발한 배>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방식, 그리고 주인공 멜라니의 입을 통해 겹쳐지는 구조를 선택한 부분은 큰 미덕으로 보였고, 아르헨티나의 관객으로서는 굉장히 좋은 결말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주 2세대 젊은 여성이 ‘위안부’ 증언을 낭독하면서 자신의 엄마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이 다시 한국 방문과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서사로 이어지는 게 다소 관습적인 전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포스트 메모리 시대에 기억하기는 어떤 기억의 발원지에 대한 강박에서 좀 벗어나서 그 기억 행위자가 처한 문화와 경험 그리고 지역적 배경 속에서 상상적 재해석을 통해서 재탄생할 때 그 의미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아르헨티나 이주 2세대 여성이 기억하는 ‘위안부’ 역사가 초국적 이주민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만나는 그런 결말이었으면 어땠을까, ‘위안부’ 기억이 지구 반대편의 로컬 기억과 만났다면 좀 더 두꺼운 기억으로 재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카메라-출연자-관람자 사이의 상호작용 🧶 조서연 : 맨 앞과 맨 뒤 장례식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22>가 당사자성을 더 넓히는 텍스트라는 점, 그러니까 활동가들의 말하기로 시작하고 끝났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피해 생존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활동가들이 자신의 삶 속에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새겨 넣게 된 사연을 술회하는 장면들과 병렬됩니다. 🧶 소영현 : 저도 그런 점을 흥미롭게 보았는데요. 세 영화 모두 카메라가 활동가와 멜라니처럼 피해 생존자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카메라의 눈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돌보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목소리로, 질문으로 변경 가능하지만 그 옆에 찍으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같이 있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이 포착되고 함께 잡히는 것이 시각 매체로서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강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조서연 : 낭독이라는 장치 또한 흥미로운데요. <내게서 출발한 배>에서 출연자로 하여금 고 황금주 님의 구술 기록을 읽게 하는 방식은 자료의 낭독이라기보다 연기자의 재연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 역시 일본군‘위안부’ 당사자가 살아온 ‘피해 이후의 삶’을 다루지만 이 영화의 주안점은 여러 정체성, 여러 경험을 가진 멜라니라는 사람이 자신과 시공간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군‘위안부’라는 문제에, 더 정확히는 황금주라는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식으로 빠져드는지, 그에 대해 무엇을 투사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새로운 시야를 구성해 가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군‘위안부’ 재현의 장에서 이후 세대의 자리를 과정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접근으로서 의미있게 보입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수요집회 장면에서 멜라니의 발언은 자신의 삶도, 어머니의 삶도, 황금주의 삶도 모두 여성이 스스로의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젠더 폭력의 구조 속에 있었다는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았는데요, 귀여운데 잘 싸우는 여자아이를 팔뚝에 새기는 멜라니의 타투 장면입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당사자라는 타인의 삶을 자기화하는 이후 세대의 당사자 되기 과정에 대한 영화로 보입니다. 🧶 김한상 : 보이는 위치에 있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상호작용 역시 중요합니다. <보드랍게>와 <내게서 출발한 배>는 모두 이미 세상을 뜬 피해 생존자의 증언을 후세대 인물들에게 ‘공연’하도록 조건을 던져주고 촬영하는 접근법을 취했는데요.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 결합된 다큐멘터리의 양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실험들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는 ‘재현’이라는 기존의 목표를 넘어섭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순악과 황금주라는 인물을 각각 ‘공연’하게 되는 두 작품에서 출연자들은 한쪽은 경북 지역의 미투 생존자이고, 다른 한쪽은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면서 가정폭력을 목격해 온 여성 연기 지망생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과는 물리적이고 시공간적인 거리가 있는 상황 속에 놓였던 피해자들의 증언이지만 그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걸쳐봄으로써 특정 방식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모습을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 앞을 무대라고 했을 때 그 앞에 놓인 피사체로서의 출연자들 역시도 자신들의 상황과 공연해야 될 특정한 역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놓인 사회적 맥락을 성찰해보게 되면서 급진적인 각성에 이릅니다. 이렇게 무대와 배우의 관계가 급진화되는 과정, 이것을 브레히트는 일종의 교육적 과정으로서의 교육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런 측면이 많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재현’이라는 접근만으로 머물 수는 없는 공공 기억의 측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모멘텀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시사하는 두 작품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출연자와 카메라 사이의 급진화, 즉 상호작용을 넘어서 어떻게 출연자와 관람자의 상호작용, 다큐멘터리와 관람자의 상호작용을 끌어낼 것인가, 피해 기억의 공공화를 위해 어떻게 이 ‘재현하는 자와 관람하는 자’의 구도에 변화를 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앞으로 탐구해 나갈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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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에세이 My Mother Is More Than A Comfort Woman: A Storybook of the Lolas from Their Daughters’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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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영문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오른쪽 상단의 [EN]을 클릭 후 영문 웹진 <KYEOL>을 통해 확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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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1) 윤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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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옥(1925년~ / 영문학자, 인권운동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찍부터 ‘위안부’피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1980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 ‘국제 관광문화와 여성(일명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정신대 답사 보고를 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이 문제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 공동 대표를 역임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세상에 알리고 그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선구자. 저서로 『平和を希求して : 「慰安婦」被害者の尊嚴回復へのあゆみ』 『朝鮮人女性がみに 「慰安婦問題」 : 明日をともに創るために』 등이 있다. “지금도 내가 느끼는 거는.. 남의 일같이 생각하는 사람, 위안부 이렇게 떠들어도 관심 없는 사람들 아직도 많아. 내가 안 당했고, 내 딸이 아니니까. 근데, 혼자 공부 잘 해가지고 PhD 되고 월급 많이 받고 이게 아니라, 나 혼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있는 거야.” 지난 2월 14일, 웹진 <결> 편집팀은 서울 등촌동의 한 실버타운을 찾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웹진의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찾아뵙고 소식을 알리고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떠올릴 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선구자,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기대감과 떨림을 안고 찾아간 노학자의 집은 조용하고 정갈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아흔을 넘긴 연세로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보다는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에서 치열했던 평생의 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뷰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후학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심으로 짧게 진행되었다. 같은 시대, 같은 여성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영문학자로, 대학교수로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그를 평생 뜨겁게 움직이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소설 전공이었거든. 19세기 전공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많았기 때문에 단체 일이나 사회사업 같은 건 관심도 없었어. 그런데 개인 개인을 만나게 되잖아. 만나고 보면 그렇게 기가 막히고, 생각도 못 할 이야기들이…... 이건 내가 아는 소설,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 해방 직후, 윤정옥은 정신대로 떠났다던 여성들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던 1970년대, 『분노의 계절』이라는 책이 도화선이 되어 스스로 이 문제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길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찾아다니던 중, 1980년 오키나와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수년간 답사를 하고, 증언과 자료를 모으며 개인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1988년 4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에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실태를 발표했고,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조사를 위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에 정신대연구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에서 삶의 속살과 진실을 발견하는 데에 매료되었던 영문학자였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소설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며 윤정옥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지만, 이 문제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 복잡하고 끈끈하게 얽힌 전쟁, 계급, 빈곤, 사회 구조와 여성 차별의 고리들을 생생히 발견하면서 은퇴 이후에 인간사에 대해 다시 눈을 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솔직한, 학자로서의 고백이었다. “내가 미안하잖아……” 1925년에 태어난 윤정옥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정신대 소집장이 어김없이 날아왔지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아버지의 판단으로 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온 가족이 피난을 떠나 겨우 고난을 면했다. 전쟁이 끝나고, 끌려간 남자들은 돌아왔지만 끌려간 여자들은 소식조차 알 수 없이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피해간 어떤 문제를 나와 같은 이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무게감, 학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알아내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심과 책임감,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공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서 알아보고 말이지. 그 얘기 들으면 어떡할 수가 없어. 안 찾아다닐 수가 있어? 찾아다니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그에게 “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교수 재임 동안에는 틈틈이 방학 기간에 사비를 털어 답사와 연구를 이어 갔고, 은퇴 후에도 멈추지 않고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되었다. 윤정옥은 김신실, 김혜원과 함께 현장답사 조사위원을 꾸려 일본, 타이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답사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를 수집했다. 생생하고 절절한 조사 내용은 1990년 1월, 한겨레에 <정신대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한 달 동안 연재되었고, 우리 사회에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7월 윤정옥은 그의 서재에 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던 학생(여순주, 야마시다 영애, 이상화, 조최혜란)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는 공감대 위에서 거침없이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정신대연구회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면담을 통해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구술집(증언집)을 간행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피해자 증언 녹취와 피해 실태 조사를 주도하는 한편 국외 거주 피해자 발굴과 국적회복 사업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정신대연구소 활동과 함께 1990년 11월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공동대표로서 운동을 활발히 주도했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것 아무도 거론하지 않고 수십 년간 묻어왔던 문제를 처음으로 드러내고, 국제 사회에서 이슈화하고,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되찾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온 길이 절대 쉽지 않았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어려운 게 어딨느냐’며 그는 오히려 “내가 창피하고 미안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글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런 얘기 들으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 같아. 누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 말이지. 본능적, 거의 본능적으로 뛰어드는 거야. 의지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문제, 증오와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 공감의 문제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윤정옥은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문제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한국이 도리어 가해국이 되었다는 점이 더욱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대협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2006년, 개인 자격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 2세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사죄의 말을 전했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향했던 십수 년간의 외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고 연대하게 된 일본의 연구자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새로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990년 책상 하나에 전화기 한 대로 정대협의 막연한 여정을 시작했듯이, 이번에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시민연대 출범을 제안한 것이다. 그 목소리에 호응한 국내와 베트남 현지의 많은 단체는 2000년대 이후 지속해서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의 2, 3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전쟁으로 침해된 여성 인권 회복을 위해 달리고 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 인권과 평화가 회복되기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는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2세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해 “당분간 내 집에서 머물더라도” 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도록 돕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들의 아픔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의 입장과 외교적 관계, 정치의 논리가 아니라 여성 인권과 평화의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베트남전 피해자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것을 외쳐온 윤정옥의 노력은 최근 들어 느리나마 결실을 보고 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과 단체들이 십수 년간 활동을 이어온 결과, 지난 2018년 4월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 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과 성폭행 문제도 아직은 풀어야 할 단단한 매듭이 많이 남아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연구자들과 현장에서 포기하지 않는 활동가들, 그리고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보내는 시민들이 계속 뒤를 이어나가기를 기원하고 기대해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발견과 공감 “내가 아무리 공부 잘 해가지고 에이플러스 받아서 하버드 나오고 런던대 나오더라도, 나 혼자 살 수 없는 거야. 꼭 내 주위에는 같은 사람이 있어. 나 혼자만 잘된다는 생각, 그건 버려야 할 거 같아. 내가 있으면 누가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 같이, 동서남북이 있는 것 같이. 동이라는 것은 서가 있어야 동이야. 남이라는 건 북이 있어야 남이야. 혼자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우리가 그거 알아야 할 거 같아.”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윤정옥.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열고, 공감하고, 서로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뜨거운 여운을 남겼다. Intervie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윤정옥 정리 : 슬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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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3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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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한’ 정책에 따른 ‘결정’ 중국에서 일본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강간에 대한 조사와 논의로 1997년 북경출판사의 『일본군 중국침략 폭행실록』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일본군‘위안부’나 성폭력은 거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정부는 1,000명이 넘는 전범 용의자를 구류하였으며, 피해자 측과 아울러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1945년 러시아 군대에게 체포되어 러시아로 압송되었던 일본전쟁범죄자들은 1950년 7월 중국에 인도되어 푸순(抚顺) 전쟁 범죄자 관리소(사진1)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6년 4월 2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침략 전쟁 중 일본전쟁범죄자 처리에 관한 결정」(이하 ‘결정’으로 약칭)이 통과되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령으로 공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은 이 결정에 따라서 특별군사법정을 조직하여 1956년 6월과 7월, 랴오닝성(辽宁省) 선양(沈阳)시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시에서 공개재판을 했다. 재판의 공소서와 변론은 모두 ‘결정’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판결되었다. ‘결정’은 일본의 전범들이 국제법과 인도에 반하는 죄로 중국의 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이 투항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상황과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가 발전하였다. 게다가 구속 기간 중 전범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 다수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정’은 ‘관대한’ 정책에 따라 전쟁 범죄자들을 분별 처리한다고 선언한다. 이 ‘결정’은 두 차례에 걸쳐 ‘관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전범에 대한 사면을 암시한다. 실제로 법정 변호인단의 변론 역시도 상투적이다시피 ‘결정’이 제시하고 있는 관대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세 가지는 현재 상황 변화, 피고인의 사죄와 반성, 중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 회복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 전범자들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요구하는 변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피의자가 제국주의 국가와 군부, 그리고 각각의 국가기관에 속해있는 구조 속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군국주의 교육과 환경 속에서 군국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정부의 교화 노력을 통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1950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도받은 포로들에게 ‘세심하고도 꾸준한 배려’에 입각한 ‘교화’사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포로들의 “인식과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교화사업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재판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정부의 교화사업은 판단 여하에 따라 제네바 협약 총칙 제3조 ‘신앙에 따른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위반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사회주의 교화에 대한 낙관적 정치철학이 주요한 전범자들을 옹호하는 변호 논리로 작용하였다. 다케베 류조(武部六藏) 등 28명의 전쟁범죄안건에 대한 공소인은 리푸산이었다. 그는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공소자인 자신이 국제법과 인도를 위반한 전쟁범죄자들에게 응분의 책임에 따른 징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외 스즈키 히라쿠(鈴木啓久) 등의 공소 내용을 보면 상당수의 양민학살과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 그리고 “중국부녀를 일본군대 ‘위안소’로 보내어 강간한 일” 등을 중요한 공소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재판은 시종일관 ‘결정’의 원칙에 따라 변호와 공소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변론의 주요한 논거에 대한 검찰의 이의제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스즈키 히라쿠 등 8명의 전쟁범죄를 기소한 것은 왕즈핑이었다. 그는 개인이 사회의 영향과 역사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지만, 결코 개인의 능동적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일본에는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진보적인 힘도 있었다. 그런데 피고인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고 ‘목적의식적으로 다양한 죄악을 저질렀다.’ 따라서 그들이 저지른 엄혹한 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피고인의 범죄행위가 명령의 집행이었다고 하지만 일정한 직책을 지닌 자들은 국제법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무장 양민학살과 마을 파괴, 부녀강간, 독가스 살포 등이 모두 엄중한 범죄행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상급의 명령을 변경하거나 저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국침략이 일본 군인의 직무”라고 저항하였다면서 그 죄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후 어떤 변호사도 이 점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소인도 충분한 이해를 표하면서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 결국, 타이위안에서 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20명이 유죄를 인정했지만 불기소되었다. 9명 전범의 죄상 중에는 강간 범죄가 3명이었다. 120명 중 자료가 남아있는 118명이 강간, 윤간을 자행하였으며,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죄가 있는 자가 43명이다. 그중 70명은 수십 명을 강간, 윤간하였으며 유아 강간을 인정한 자도 있다. 여기서 불기소된 120명의 범죄의 중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강간, 윤간이라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불기소 처분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재판을 통해서 전쟁범죄를 따지고자 했다기보다 중국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일본과의 국교 수립이라는 실리를 꾀했던 것 같다. 당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6월 2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처리는… 양국이 빠른 시일에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재판에 임하고 재판과정을 지켜봤을까?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죄를 묻는 일이” 공소인들에게 부여된 권능일까?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용서의 주체는 누구일까?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신들이 겪은 피해를 진술한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정부를 향하여 자신들을 대신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였다.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전범자들 중에는 앞서 논한 산시성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입혔던 스미오카 요시카즈(住岡義一), 사가라 게이조(相樂圭二) 등도 있었다. 이들이 산시성 일대에서 자행한 부녀에 대한 폭력(강간, 윤간, ‘위안소’)으로 심신이 망가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판 과정의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자마자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 이들을 제외하고 기소를 면한 이들과 질병으로 석방을 허락받은 이들은 3차에 걸쳐 일본의 적십자에서 보내온 일본 윤선 고안호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복역을 선고받은 이들도 대부분 형기를 앞당겨 1960년대 중반까지는 모두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귀국하는 고별사의 보도 내용이다. 1차로 불기소 처분되어 귀국하는 도미나가 준타로(富永順太郞)는 ‘잘못을 하면 바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過則勿憚改)’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확실히 잘못했다. 오늘 나는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 인민에게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귀국자들은 “일본과 중국은 빨리 국교를 회복하여 정상화하여야 하며 재차 형제와 같은 우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돌아갔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중국의 보도자료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 정부가 이 보도를 통하여 전범자들을 불기소 처리하고 귀국시킨 이유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피해자의 절규와 중국 정부의 ‘관대’하고 ‘정의로운’ 재판, 그리고 스스로 용서받아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전범자의 자부를 보면서 용서와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무엇이 전제되었을 때 용서와 화해란 가능한 것일까? 라는 사유가 과제로 제기된다. 법학자 이재승은 용서와 화해에도 도덕적 문법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국가권력이 범죄자의 처벌과정을 독점하고, 정의의 유일한 실현자로 나선다면 피해자의 소외, 배제, 파멸이 예정된다고 말하였다. 이재승의 지적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허우둥어(侯冬娥)의 고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국의 전범관리소에서 ‘교화’되어, 관대한 전범 재판을 거친 일본 군인들은 귀국하여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조직하여 중·일의 친선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런데 피해자 허우둥어는 자신의 피해를 말하겠다는 고통스러운 결심을 한 날에도 한나절 동안 비통한 눈물만 흘렸을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중일수교가 맺어진 지금(1992년)은 책임을 묻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52년 장제스 국민당 정권(타이완)은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인 「일화조약·부속의정서(日華條約·附屬議定書)」 1항에서 “일본 인민에 대하여 관대하고 우호적인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중화민국은 스스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4조 갑항 제1항의 일본국이 제공해야 하는 용역의 이익을 포기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 양국 대표는 인민대회당에서 중일 수교 정상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서 제7조는 전쟁배상 문제에 대해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선언한다.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엄청난 피해는 발생했지만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개인’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일본군에 의해서 자신의 존엄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피해가 ‘창부’라는 오욕으로 뒤바뀌어 일상생활에서도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다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들의 자존도 깊게 상처 입어 ‘대국’ 중국의 과시에 편승하여 피해의 실태를 알면서도 봉인함으로써 피해 여성들은 존엄을 회복할 길을 오랫동안 잃어버리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편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고 있었으며, 글자도 모르고 마을에서 발생한 엄청난 폭력적 상황이 왜 생겨났는지 채 알지 못하였다.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입을 열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들의 증언은 피해를 ‘목격’했던 딩링(丁玲)이 1941년 작품 속 주인공 전전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으나 채 만들 수 없었던 피해 여성 시점의 바로 그 언어일 것이다. 그 언어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언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