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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간과 젠더 폭력은 TRC의 미완수 과업: 젠더 정의를 향해 계속되는 남아공의 여정 (1)
    2023년 논평 강간과 젠더 폭력은 TRC의 미완수 과업: 젠더 정의를 향해 계속되는 남아공의 여정 (1)

    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와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헌법재판소 입구 바깥에 위치한 ‘민주주의의 불꽃(Flame of Democracy)’은 시민들에게 “억압과 불의로부터 자유로운 삶”에 대한 권리를 상기시키며 영원한 빛을 밝히고 있다. 2011년 남아공 전 대통령이자 전 세계적 아이콘인 넬슨 만델라에 의해 점화된 불꽃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에 맞선 남아공의 오랜 투쟁을 상징한다. 또한 남아공 내 성평등 증진을 위한 포괄적 기틀을 제공하는 1996년 진보 헌법을 기념하는 의미 역시 지닌다. 하지만 2023년, 쿨루마니 갈렐라(Khulumani Galela) 캠페인에 참여한 여성들은 이 불꽃 바로 옆에서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TRC)의 ‘미완수 과업’에 관심을 촉구하며 법원 앞 야외 취침을 강행했다. 이들이 관심을 끌고자 하는 ‘미완수 과업’에는 남아공에 만연한 성폭력과 젠더 기반 폭력이 포함된다.   남아공에서 “여성과 아동의 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끊임없는 전쟁”은 수많은 충격적 통계 수치들로 드러난다. 남아공 경찰청(SAPS)에 따르면 2023년 1월부터 3월까지 총 10,512명이 강간 피해를 신고했다. 이 수치는 성폭력 경험을 경찰에 신고한 사람들의 수로, 남아공 의학연구위원회(Medical Research Council)는 실제 성폭력 피해자 수는 9배가량 더 높을 것으로 본다. 남아공은 남편, 연인, 전 남편, 전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여성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그 수는 여느 국가의 5배에 달한다. ‘변화를 위한 여성(Women for Change)’의 2022년 통계에서는 남아공에서 총 3,843명의 여성이 살해당했으며, 8시간에 한 명 꼴로 발생하는 여성 사망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파트너에게 살해당한다. 현지 학자인 품라 쿠올라(Pumla Quola)는 자유를 향한 헌신으로 충만한 남아공이 “모든 안전 가능성을 위협하는” 젠더 기반 폭력의 “악몽”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심각한 수준의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수치스러운 일”로 규정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대통령은 남아공에 만연한 “여성과의 전쟁”을 코로나 바이러스에 비교하기도 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강간, 가정 폭력, 아동 살인이 증가했다는 통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남아공이 맞서야 할 두 번째 팬데믹”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남아공의 높은 성폭력 범죄 비율과 ‘강간 문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분석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남아공의 오랜 폭력의 역사, 지속적인 사회적·경제적 배제, 여성의 권리 획득에 대한 반발 등과 연관 지었다. 그러나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지적했듯, 남아공 사회에 자리 잡은 이러한 환경이 “성폭력을 정상화하거나 간과하는 지배적 사회 규범을 기반으로 번성하는”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남아공이 이러한 폭력을 다루는 데 실패해 왔음은 아파르트헤이트 붕괴 후 과거사 해결의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던 그 선구자적 지위에 비추어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1997년 7월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TRC 청문회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성평등위원회(Commission of Gender Equality) 초대 위원장인 덴지웨 음틴소(Thenjiwe Mtinso)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과제는 정의와 인권, 특히 젠더 정의와 젠더 인권 보호를 위한 지속적이고 일관된 투쟁입니다. 이미 대량학살 수준에 도달한 이 무섭도록 심각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을 해결해야 합니다.” 2023년인 현재에도 이러한 폭력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적 접근이 필요하다.    남아공에서의 젠더와 변화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두 인종, 젠더, 계급, 성적 지향, 문화 측면에서의 소외와 예속을 기반으로 한다. 이에 대응해, 1994년 수립된 새로운 민주정부는 남아공의 학대적인 과거를 뒷받침해 온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남아공의 새로운 사회 기틀을 이루는 1996년 헌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국가는 인종, 젠더, 성별, 임신, 혼인 여부, 민족 또는 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 지향, 나이, 장애, 종교, 양심, 신념, 문화, 언어, 출생 중 어느 하나 이상의 이유로 특정 개인을 직간접적으로 부당하게 차별해서는 아니 된다.” 헌법 외에도 1998년 제정되어 2022년 개정된 가정폭력, 성범죄 및 관련 문제법 등 젠더 기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법과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남아공의 성과 중 하나는 집권당인 아프리카국민회의(ANC)의 자체 할당제를 통한 공직에서의 여성 대표성 달성이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부 시절에는 국회의원 중 (백인) 여성 비율이 3%에 불과했지만, 1994년 첫 민주 선거 이후 여성 의원 수가 10배로 증가했다. 2009년에는 여성이 전체 의석 수의 44%를 차지하여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여성 의원 비율을 기록했다. 한편, 2000년 이후 높은 성폭력 발생률에 대응해 성폭력 생존자 지원 개선을 위한 ‘투투젤라 케어센터(Thuthuzela Care Centres)’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센터 중 일부는 의료 및 법률 서비스뿐 아니라 심리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원스톱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렇듯 젠더 권리 보장을 위한 새로운 기틀이 구축되는 가운데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폭력과 불평등이 급증하는 상황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젠더 감수성을 반영한 법률과 헌법적 기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은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다. 2022년 기준으로 남아공 여성의 41% 이상이 실직 상태이며, 아프리카 여성의 71%가 빈곤선 아래의 생활환경에 놓여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30%에 달하는 임금 격차를 경험하고 있다. 아만다 가우스(Amanda Gouws)가 지적했듯 경찰과 법원이 일관되게 법을 시행하고 집행하지 않는다면 법은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재원 부족, 부실 교육, 불충분한 감수성 교육도 현재 구축된 인프라의 가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품라 쿠올라는 “강간 생존자들은 1994년 이후의 사법 체계가 정의를 실현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꿈과 희망은 1994년 이후 몇 번이고 배신당해야 했다”라고 말한다. 헌법 질서가 위배되고 있다는 인식과 함께 분노가 확산되자, 2020년에 〈젠더 기반 폭력 및 여성 살해에 대한 국가 전략 계획(National Strategic Plan for Gender Based Violence and Femicide; NSP-GBVF)〉이 마련된다. ‘#완전한 중단(#TotalShutDown)’ 운동을 통한 이행 압박 아래, NSP는 젠더 기반 폭력의 방지와 가해자 처벌을 포함해 여러 영역에 대한 정부 개입을 약속한다. NSP는 용납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한 폭력에 대한 항의가 고조된 가운데 출범했다. 그러나 피나 코디상(Phinah Kodisang)이 지적했듯, 이 계획은 남아공의 권력자들이 “젠더 기반 폭력에 양분을 공급하는 가부장적 규범에 맞서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준비”를 갖추는 것을 포함, 여러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 강간과 젠더 폭력은 TRC의 미완수 과업: 젠더 정의를 향해 계속되는 남아공의 여정 (2)
    2023년 논평 강간과 젠더 폭력은 TRC의 미완수 과업: 젠더 정의를 향해 계속되는 남아공의 여정 (2)

    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와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일시적 행동주의   2019년 8월, 19세의 케이프타운대학교 학생 우이네네 므뤠티아나(Uyinene Mrwetyana)가 케이프타운에서 우체국 직원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영화미디어학과 1학년 학생이었던 우이네네(신, 진리를 의미)는 우체국에 소포를 찾으러 갔다가 잔혹하게 공격당하고 살해당했다. 코파노 라텔레(Kopano Ratele)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끔찍한 공격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 나라에서 우이네네의 살해 사건은 소수의 사건들만 가능했던 방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라고 언급했다. 수천 명의 여성이 거리로 나섰고 ‘#다음은 내 차례인가(#Am I Next)’ 캠페인이 시작됐다. 그러나 〈뉴요커(New Yorker)〉에서 지적했듯, 우이네네의 사건은 다음과 같은 주지의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켰을 뿐이다. “특히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신문 1면을 장식하고 나라 전체에 또 다른 (피해) 여성의 이름이 알려진다. 때로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때로는 누구의 이름을 왜 기리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략) 집회가 열리고 국가 애도의 날이 선포된다.” 그런 뒤에는 또 다른 여성이 강간과 살해를 당했다는 또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가 헤드라인에 오른다. 우이네네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는 2018년 ‘#완전한 중단(#TotalShutDown)’ 운동이 일어난 지 거의 1년 만의 일이었다. 2018년 당시 수천 명의 여성과 성소수자, 젠더다이내믹스(Gender DynamiX), 사르트지에바트만여성아동센터(Saartjie Baartman Centre for Women and Children)와 같은 단체가 대규모 행동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2017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후 불에 태워진 카라보 모코에나(Karabo Mokoena)와 2018년 5월 살해된 21세의 대학생 졸릴레 쿠말로(Zolile Khumalo)를 비롯한 여성 살해 피해자들을 추모하며 행진했다. 운동은 “폭력은 그만, 캠페인도 그만, 립서비스도 그만!(Enough Violence, Enough Campaigning, Enough Lip-service!)”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고, 시위대는 정부에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강도 높은 조치를 요구했다.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행진은 24가지 요구 사항을 의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성료됐다. #완전한중단국가위원회(#TotalShutDown National Committee)의 가오팔렐웨 팔라에칠레(Gaopalelwe Phalaetsile)는 “양해각서에 명시된 24가지 요구 사항은 여성과 성소수자가 홀대되었던 지난 24년간의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라고 밝혔다. 시위를 8월에 시작한 것은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남아공에서 8월은 1956년 약 2만 명의 여성이 아프리카 여성 통행권 도입에 반대하는 역사적인 행진을 개최한 ‘여성의 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여성들은 “여자에 대항하는 건 바위에 대항하는 것, 바위에 대항하면 깨지고 말리라!(When you strike the women, you strike a rock, you will be crushed!)”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후 해당 구호는 남아공에서 억압에 맞서는 여성의 용기와 힘을 상징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남아공에서는 다수의 여성 권리 옹호 운동이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운동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여성전국연합(Women's National Coalition)은 1991년 70개 이상 단체의 연합을 통해 평화 협정 협상에 여성의 입장이 포용되고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단체들의 목표는 계급, 인종, 이념의 측면에서 확연히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효과적인 평등을 위한 여성 헌장(Women’s Charter for Effective Equality)’을 마련함으로써 궁극적으로 1996년 제정된 성 감수성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 남아공의 체제 전환 이후에도 행동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왔으며, 손케젠더정의(Sonke Gender Justice) 및 여성학대에반대하는사람들(People Opposing Women Abuse; POWA)과 같은 다양한 비정부기구가 설립되었다. 최근에는 #남자는쓰레기다(#MenAreTrash), #완전한중단, #우먼포체인지(WomenForChange), #강간문화종식(#EndRapeCulture) 등 수많은 소셜 미디어 캠페인이 젠더 기반 폭력 관련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발적인 이슈 중심 행동’은 정부가 조치를 취하도록 지속적인 압력을 가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더 문제적인 사실은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과 비슷한 맥락에서, 폭력의 가해자나 조력자가 아닌 폭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서 행동주의와 변화를 위한 노력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남아공의 이행기 정의 운동 이행기 정의의 실천과 이론의 발전은 여러 면에서 남아공의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 폭력의 역사를 직시하고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대안적 조치에 남아공이 기울인 노력은 당시 세계에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승자의 정의’를 지양한 남아공의 국가 건설 과정을 이끈 것은 1995년 〈민주적 남아프리카를 위한 협약(Convention for a Democratic South Africa; CODESA)〉 합의를 기반으로 수립된 TRC였다. TRC 설립의 근거가 된 법은 동 위원회의 목표를 “과거의 갈등과 분열을 초월하는 이해의 정신으로 국민 통합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원회의 쉴라 마인체스(Sheila Meintjes)와 베스 골드블랫(Beth Goldblatt)은 위원회가 젠더 기반 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남아공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이해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떤 면에서는 남아공 TRC가 여성을 성공적으로 포용한 듯했다. 위원회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했고, 여성 문제만을 다루는 별도의 청문회가 세 차례나 열렸다. 그러나 많은 젠더 활동가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보다는 타인의 경험에 대해 진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21,000건의 진술 중 446건은 성적 학대로 분류되었고 강간은 140건에서만 명시적으로 언급됨)과 특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여성의 삶에 미친 구조적 영향이 간과되었다는 점을 들어 TRC를 비판했다. 또한 TRC는 강간을 현재 국제법에서 인정되는 고문과 박해의 한 형태로 인정하지 않고 중대한 가혹 행위(severe ill-treatment)로 분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최종 TRC 보고서에서 여성 문제가 한 장(chapter)에 걸쳐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남아공의 젠더적 특성은 피상적으로만 기록되었다. 당시 응용법률연구센터(Centre for Applied Legal Studies)가 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조사를 요하는 성폭행과 고문의 광범위한 증거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폭력 역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안드레아 두르바흐(Andrea Durbach)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향후 이행을 위한 지도를 그려나가는 주요 과정에 여성 성폭력 같은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를 다루는 중요한 지점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개발, 변화, 배상이 피해를 입은 개인의 존엄성 회복에 영향을 미치거나 폭력 경감과 예방에 기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물론 남아공 TRC는 심각한 인권 침해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의 구조적 영향을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이후 남아공에서 계속되고 있는 폭력, 특히 젠더 기반 폭력을 어떤 식으로든 용인하게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쉴라 마인체스를 비롯한 이들이 강조하듯, 남아공은 “과거에 여성에 대해 자행된 정치적 폭력이 현재의 폭력 수준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사회이다. 두르바흐는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고질적인 폭력과 그에 수반된 불처벌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도 여전히 높은 여성 성폭력을 설명하는 반복적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쿨루마니 갈렐라 캠페인(Khulumani Galela Campaign)에 따르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과 젠더 폭력은 아직 완수되지 않은 과업의 일부이고 우리는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결론 그렇다면 남아공은 과연 언제까지 세계에서 여성이 살기에 가장 위험한 나라 중 하나에 머무를까? 구조적 불평등과 젠더 기반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적 규범에 맞서지 않는 한 여성 권리 신장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이니셔티브는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하다. 아만다 가우스(Amanda Gouws)를 비롯한 옵저버들은 보다 적극적인 여성 운동과 헌신적인 “국가 조직 내 페미니스트 여성”이 필요함을 촉구한다. 1990년대 민주주의 이행기에 여성 평등에 앞장섰던 여성전국연합의 사례는 흔히 모범 사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행기에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여성들을 결집시켰던 단체의 강점이 결국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1994년 4월 선거 직후 일반인 여성 모임은 와해되었다. 피나 코디상(Phinah Kodisang)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향후 동원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코디상은 〈젠더 기반 폭력 및 여성 살해에 대한 국가 전략 계획(NSP-GBVF)〉과 관련해 “모든 남아공 국민에게는 현 상황과 같은 폭력과 강간을 없애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간과 여성 살해를 종식시키려는 집단적 의지는 물론 구조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1997년 당시 남아공 TRC를 향한 덴지웨 음틴소(Thenjiwe Mtintso)의 메시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젠더 불평등과 젠더 불공정은 인권 침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아공 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여 결집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결집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1부〉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1부〉

    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모두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와 언제 어떻게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하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세요. 강대현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했어요. ‘위안부’ 할머니가 몇 분 생존해 계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이 문제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혜주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비즈니스커뮤니케이션, 디지털미디어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상식으로 통용되는 시대에 태어나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김희연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역사학, 문화인류학을 전공 중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역사 선생님이셨어요. 나눔의 집에 수요일마다 가서 활동하시는 걸 듣기도 했고요. 어렸을 때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등을 다룬 영화에 관심이 많아 그것들을 통해서도 접하게 됐습니다.  김도경 서강대 사회과학부에 재학 중입니다. 초등학생 때 『수요일의 눈물』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수요일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요일이잖아요. 책 제목을 기억할 정도로 내용이 인상적이었고, 그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게 됐습니다. 그 후로는 역사 수업이나 영화를 통해 우리가 기억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역사이자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심현희 덕성여대 사학과 학생으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수업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그 후 대학에 와서 학술적인 관점에서의 논의를 접하고 관련된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김민정 서울여대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어 어릴 때부터 나눔의 집에 관한 정보를 자주 접할 수 있었고, 학우들과 함께 전시관에 가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교육 자료를 통해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할 수 있었고요. 친숙하고도 늘 생각하게 되는 주제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관련 영화나 책을 보았거나, 강의를 들었다거나, 활동에 참가한 이력이 있다면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강대현 중일전쟁이나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 찾아보거나 여성 참정권, 미국 소수자 문제 등을 공부할 때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혜주 원래 ‘위안부’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고, 같은 여성이다 보니 민감하게 반응하며 늘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의 일로 느끼게 된 계기는 2016~17년도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은 후부터예요. 당시 고1이었는데 그 책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쟁과 여성’ 하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던 터라 친구들에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가보자고 제안했어요. 전시를 통해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것이 책의 내용과 결부되면서 더욱 깊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김민정 대학 입학 후 여성학 강의 시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이 문제를 보다 깊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여러 학계 논문들을 찾아보고, 다양한 의견을 가진 학우들과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됐어요.  김희연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여성은 역사 안에서 배제돼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접하고 난 뒤 여성 인권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마침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았죠. 남성의 이야기는 많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없다는 것을요.  심현희 개인적인 관심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억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생겼습니다. 관련 영화와 책을 통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맥락을 배우면서 이 문제의 심각성과 인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 역사 동아리 부장으로 활동하며 담당 선생님의 추천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교내 행사를 진행한 기억이 납니다. 교내 신문에 기사를 작성하고 뱃지, 스티커 등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활동을 했어요. 대학에 와서는 수요집회에 참석해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볼 수 있었고, 수많은 기관과 사학 전공 학생들이 피해자와 연대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김도경 역사 시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중 하나로만 간단하게 다루잖아요. 그런 부분이 아쉬웠고 더 조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접한 것이 저에겐 관심을 유지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Q. 전국 곳곳의 소녀상이나 남산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 마포의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대구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등에 직접 가본 적이 있나요?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요? 강대현 단순히 ‘소녀상’이라고 인지하는 데서 끝난 것 같아요. 일본군이 자행했던 잔인한 폭력에 대한 참담함을 느끼기는 했지만요. 김희연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내주신 수행평가로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 전시장 내에 있던 소녀상을 보고 울컥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혜주 앞에서도 말했듯, 고1 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갔어요. 피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전시장에서 보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제 나이보다 더 어렸을 때 피해를 입은 분도 계셨고요. 울컥해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1층에는 기획 전시로,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베트남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 또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참혹한 일이 많아서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관련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깊은 감동과 존경심을 느꼈어요. 희생자를 기리고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김민정 어릴 때부터 나눔의 집 앞에 설치된 소녀상을 자주 접할 수 있었어요.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독일 카셀대학교의 소녀상 철거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는데요,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소녀상이 사라졌고, 이후 학생들이 소녀상이 납치됐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소녀상을 되찾기 위한 활동을 하는 걸 보면서, 같은 전범국임에도 독일과 일본에서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또한 우리는 피해국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러한 정서적 공감을 일본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김도경 소녀상 설치 반대나 철거 운동에 관한 뉴스를 많이 접하다 보니, 소녀상이 설치돼있는 모습을 보면 ‘그곳에 잘 있어줘’라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Q. 이번 청년좌담의 참가자 여러분은 피해자의 증언을 직접 접하거나 배보상을 위한 법정 투쟁이 뉴스에 오르내리던 때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사회적 기념이 중요해지던 국면에 이슈를 접했을 것 같습니다.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 주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해시태그를 거는 일, 나비 팔찌 등 모금 굿즈를 사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혜주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아직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선 윤리적 욕망을 채워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강대현 코로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SNS나 해시태그 등을 통해 정보를 나누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것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본인이 직접 행동하는 것과 SNS를 통해 접하는 것에는 괴리가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희연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중요한 이슈를 놓치게 될 수도 있는데, SNS상에서 누군가의 글이 그것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글도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요. 저도 지인들에게 ‘위안부’ 관련 책이나 영화, 전시를 함께 보자고 제안하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들도 점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김민정 일반 시민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마련이나 소송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굿즈를 사거나 소녀상과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문제 해결에 동참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은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김도경 SNS를 활용하면 보다 쉽게 사회적 연대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론이 SNS 내의 움직임에 주목할 경우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경험을 인터넷상에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거나 간접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니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심현희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홍보나 참여 방법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출 수도 있고요. 따라서 말씀해주신 행위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고,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Q.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관련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피해 상황을 선정적으로 묘사한다거나 피해자들을 성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경우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비나 소녀상처럼 순결한 이미지로만 ‘위안부’를 소비하는 경향도 있는데요. 이렇게 이분법적인 관점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희연 피해자분들을 ‘피해자화’한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틀에 가둬놓고, 어린 나이에 순결을 빼앗겼으니 불쌍한 인생이라고 묘사하는 식의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요.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순결이 강조되다 보니, 피해를 당한 것이 그 사람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혜주 그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대한민국이 성범죄 피해자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피해자분들이 순결을 빼앗기는 불쌍한 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성녀 프레임’ 안에 놓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져요. 피해자는 늘 피해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식, 즉 피해자는 일상을 살아가서는 안 되고, 피해 안에서 계속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탄생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김민정 선정적인 장면을 통해 피해자분들을 그려내는 영화를 많이 접했어요. 제작자들은 그분들의 이야기에 오롯이 공감하지 못하고 제3자의 시선에서 평면적인 이미지만 취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존하는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소녀가 중년이 되고 노년 여성이 되었다는 사실도 쉽게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녀상에서도 볼 수 있듯 피해자를 소녀의 이미지, 무구한 피해자성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김도경 그런 이분법적인 시선은 영화나 소설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캐릭터화하기 위해 제작자로서 쉽게 취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에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면서 가해국의 권력이나 시대적 상황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분법적인 관점은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므로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듣고 성차별과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웹진 <결> 편집팀

  •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2023년 에세이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2023년 웹진 〈결〉 2차 독자만족도 조사에 참여해주세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상반기에 이어 웹진 〈결〉에 대한 독자분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2023년 하반기 독자만족도 조사를 진행합니다.  더 나은 웹진 운영을 위해 많은 분들의 말씀을 듣고자 하오니,  따뜻한 관심과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참여하신 분 중 개인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tall 1잔 기프티콘’을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설문조사 기간: 2023.10.18.(수) ~ 2023.11.1.(수)   ▶ 독자만족도 조사 참여하러 가기 

    웹진 <결> 편집팀

  •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2부〉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2부〉

    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학술 콜로키움, 북토크, 전문가포럼을 견학한 소감이 어떠셨는지요. 심현희 학술 콜로키움과 전문가포럼에 참석했는데, 전문가분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보다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고 다양한 관점을 접하며 지식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혜주 〈벌새〉 북토크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학 입학 후 첫 전공 과제가 영화 〈벌새〉를 보고 리포트를 쓰는 것이었어요.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 북토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김보라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영화를 보던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를 현대 여성과 결부시켜 말씀해주신 것도 좋았고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가져야 할 자생력은 무엇인가, 무너지지 않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 감독님이 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김도경 학술 콜로키움을 온라인으로 들었는데 ‘위안부’ 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랐어요. 사회적 인식 자체가 연구의 주제가 되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역사의 일부 또는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콜로키움에 참여하면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김민정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막연히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술 콜로키움에 참석한 후,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면 피해 당사자들을 정치적으로 대상화하여 문제 해결 과정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정말 유익하고 큰 도움이 됐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50년도 더 된 오래된 일일 뿐이며 이제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성과 인권이라는 좀 더 넓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어떤 연관성(접점)이 있을까요?  이혜주 피해자분들이 인정할 만한 사과와 보상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를 용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건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성착취 문제를 보면 N번방 등의 디지털 성폭력을 예로 들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범죄의 핵심은 여성의 힘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성들을 노예화하는 방식인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피해자에게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이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대현 결국 하나의 통일된 의제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만큼은 초당적인 논의가 이뤄져야죠.  김희연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지금의 여성혐오 범죄와 개별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여성에 대한 범죄, 성착취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통용되는 확고한 상식이 필요합니다. 김민정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한 국가의 전쟁범죄를 잊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전쟁에서 자행됐던 여성에 대한 심각한 성적 학대와 집단 폭력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로 미래를 위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합의를 계속해서 도출해 나가야 하고, 제2의 ‘위안부’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국제법규와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과 인식 전환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김도경 현재도 수많은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고 여성혐오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성숙한 시각을 갖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합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과 성평등을 논하는 중요한 주제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거를 묻는다는 것은 인권과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공정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해결해야 합니다.   Q. 현재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 범죄 이야기가 뉴스에 종종 나오기도 하는데요. 1960~7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 또한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국내에서도 주한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기지촌이 만들어졌고 여성들이 강제 성병 검사를 받거나 구타, 살해 등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이러한 이슈들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가진 특이성이나 차별성이 있을까요? 혹은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혜주 정부가 개입한 구조적 성범죄라는 것이 ‘위안부’ 문제가 지닌 특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피해자들의 삶과 인권이 파괴됐다는 점에 분노하기보다는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는 점에 분노하는 것 같아요. 그러한 점에서도 차별성을 갖는 것 같고요.  김민정 국가 자체가 가부장제 프레임과 남성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을 자산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일본에 민족의 자산을 빼앗기고 유린당했다는 점에서 분노하는 거죠.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관점 또한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자산을 이용해 이익을 창출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거죠.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일들은, 우리의 치부를 들춰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 공론장에 오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김도경 일본군‘위안부’는 일제강점기의 지배구조하에서 이뤄진 폭력이고, 공장 취업이나 국가,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속아서 간 분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도 특이성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를 처음 알았을 땐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위안부’ 피해의 경우와 달리 한국이 가해국이 된 거잖아요. 우리가 가해를 저지른 역사적 과거도 동등한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현희 ‘위안부’ 문제와 다른 전쟁에서의 성폭력 문제는 각각의 맥락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고통과 인권 침해는 공통적으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쟁점이죠. 따라서 정확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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