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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2023년 논평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 위치한 사회정의교육재단은 역사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의 소외된 역사를 알리는 데 목적을 둔 비영리 교육단체다. 역사교육을 통한 인간의 존엄성과 비판적 사고력 증진 교육을 기본 가치로 여기는 우리 재단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에는 1)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sexual and gender-based violence) 방지 2)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와 이슈 3) 시민들의 저항과 단합 등이 있다. 교사의 자율성이 높은 미국에서 이 주제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이를 통한 역사교육을 적극 권장하기 위해 우리는 현직 역사 교사들과 함께 재단의 가치를 반영한 커리큘럼과 학습안을 만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 재단의 설립 배경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재단의 교육활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알리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회정의교육재단 설립 배경 사회정의교육재단을 애초 계획보다 앞당겨 2017년 여름에 설립하고, 재단의 첫 주제 또한 ‘미국 내 아시아 디아스포라 역사와 이슈’에서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 방지’로 바꾼 데에는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와 이와 관련해 조선학교에 가해진 부당함에 맞서고자 한 배경이 있다. 필자는 사춘기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와 인종차별을 겪으며, 후세들이 차별받지 않게 하려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샌프란시스코 공립통합학교구(San Francisco Unified School District)에서 한글 이중언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더 공고해져, 재직 중이던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립통합학교구에 최초로 한글 이중언어 프로그램인 한‧영 이멀젼(Two-Way Immersion)[1] 프로그램을 도입시켰다. 그 후 미국 내 초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에서도 교사들이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미국 내 아시안 디아스포라 역사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본인들의 역사와 뿌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비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미국 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이해와 존중의 폭을 넓힌다. 이를 통해 모두가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며 동등한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이 분야의 발판을 다지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싶었다.  2015년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두 개의 결의안이 통과됐다. 9월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건립 결의안 342-15호가 시의회에서 통과됐고, 한 달 뒤 10월 샌프란시스코교육위원회에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역사를 10학년(고등학교 1학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는 결의안 158-25A1호가 통과됐다. 이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인신매매 범죄임을 가르치고,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성매매와 성착취 방지 교육을 위해 발의됐다. 교사에게 결의안 158-25A1호는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이지만, 시 결의안은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인신매매를 반대‧방지하고, 약자의 인권과 존엄성을 기억하는 일의 필요성과 연결하여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두 달 뒤, 피해생존자의 의사와는 상반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힘이 없어 피해를 당한 자들의 존엄성과 인권을 또 한 번 무시한 처사였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합의 문구 때문에 10월에 통과된 샌프란시스코 결의안 158-25A1호가 자칫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1994년에 한‧영 Two-Way 이멀젼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시한 경험을 되살려 2016년 1월 첫째 주부터 주변 학부모들과 함께 편지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캠페인 시작 2주 후에 샌프란시스코 통합학교구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Curriculum and Instruction’s Humanities Department) 담당자를 만났고, 담당자로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자료수집을 요청받았다. 이에 2016년 말 상당한 양의 자료를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에 제공했으나, 이곳에서는 2018년 1월까지도 여러 이유로 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커리큘럼이나 학습안을 준비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공립고등학교에서는 주로 3월이나 4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된 필자는 하루빨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한 교육이 시작될 수 있도록 『‘위안부’ 역사와 이슈: 교사자료집』(“Comfort Women” History and Issues: Teacher Resource Guide)을 그해 3월 말에 서둘러 발간했고, 인문학 커리큘럼 및 수업 부서는 이 책을 18개 고등학교에 배부했다. 2020년에는 교사자료집 3판과 학생자료집 『‘위안부’ 역사와 이슈: 학생자료집』(“Comfort Women” History and Issues: Student Resource Guide) 2판을 내기도 했다.   2017년 4월 한겨레신문에서 두 명의 조선학교 고등학생과 지바조선초중급학교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2016년 12월 지바조선초중급학교에서 열린 제45차 학생미술전시회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학생 작품 두 점이 전시됐는데, 그 두 작품은 ‘2015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는 마음을 담은 조연수 학생의 작품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을 표현한 강애향 학생의 작품이었다. 원래 지바현 지바시는 매년 시 보조금 50만엔(약 한화 500만원)을 이 학교에 지원해왔으나 구마가이 토시히토 지바시장은 이 작품들을 문제 삼아 이듬해인 2017년부터 보조금을 삭감했다. 이 소식을 듣고 필자와 두 명의 활동가는 인권과 정의를 존중하는 두 명의 여고생들과 지바조선초중급학교를 지지하기 위해 5000달러를 모으기로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우리 재단이 설립되었다. 우리 재단은 2017년 봄부터 모금을 시작했고 8월에는 5000달러를 이 학교에 전달했다. 이로부터 재단과 학교의 인연이 시작되어 매년 후원을 지속해, 2021년부터는 우리 재단이 지바조선초중급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술대회를 개최했다. 지바조선초중급학교 외에 우리 재단이 정기 지원하는 또 다른 단체는 ‘Days for Girls International’이다. 이 단체는 전 세계 빈곤 지역에서 생리대가 없어 학교를 못 나오는 소녀들에게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 가능한 생리대 키트와 보건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7년에 설립한 사회정의교육재단의 구성원에는 필자를 비롯한 공동설립자, 현직 교사들, 샌프란시스코시에 일본군’위안부’ 기림비를 세우자는 결의안 324-15호를 상정하고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에릭 마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인턴, 이번 가을이면 대학생이 되는 자원봉사자 그리고 학부모들이 있다. 학부모 중에는 한인 커뮤니티와의 연대를 두텁게 하고 우리 재단 관련 홍보 디자인에 힘 써주시는 분도 있다. 이분들 외에도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만들어 주시는 인쇄소 사장님과 무료와 다름없는 수고비로 재능을 기부해주고 계신 그래픽디자이너 등 우리 재단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재단의 교육활동  재단이 2017년에 설립된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역사는 우리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성폭력 및 젠더 기반 폭력의 심각성을 비롯해 모든 이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알리고자 할 때 대표적으로 접목시키는 역사이다.   이를 위해 우리 재단은 교사 워크숍, 강의, 다양한 커뮤니티 행사 등을 갖는데, 세부 내용에는 일본군‘위안부’ 역사가 현재 사회에서 교차되어 나타나는 부분을 적극 포함시킨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면 첫째,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알리기 위해 범아시아계 시민들이 단합해 ‘강인한 여성의 기둥’ 기림비를 건립하고 일본군‘위안부’ 역사 교육활동을 펼친 지역사(local history)를 가르치고, 둘째,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토대로 여성혐오 범죄 및 성폭력을 방지하는 교육을 실시한다. 필자가 2018년 봄에 발간한 『‘위안부’ 역사와 이슈: 교사지침서』에는 위의 내용이 강조되어 있다. 이 교사지침서는 발간된 다음 달인 4월 샌프란시코 공립고등학교에 배부되었고, 같은 해 가을에 발간된 『‘위안부’ 역사와 이슈: 학생지침서』는 2021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세인트 메리 컬리지(St. Mary’s College)에서 ‘전쟁과 여성-환태평양 분쟁들의 기억’(Women in Wartime: Memorializing Conflicts in the Pacific Rim)이라는 가을 학기 수업 필수 교재에 포함되었다. 우리 재단은 이 수업의 커뮤니티 파트너였는데, 필자는 연구 책임자로 학생들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삶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미국에 현존하는 성‧젠더 폭력에 대해 논의했다. 그해 10월에는 이 두 책이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시에서 열린 〈‘위안부’ 프로젝트 전시〉(“Comfort Women” Project Exhibition)에서 전시되었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에서 특별 협의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공식 승인받은 우리는 여러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고 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우리 재단과 연대하는 모든 단체에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연대 단체 중 작년과 올해 우리 재단과 활발한 교육 활동을 한 NGO 단체는 한국의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독일의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 e.V.) 그리고 미국의 유엔 미국여성간부위원회(US Women’s Caucus at the UN)이다.   작년 6월 경상남도교육청이 후원하고 마창진시민모임이 주최 및 주관한 교사포럼 〈일본군’위안부’역사교육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에 필자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고등학교 교사, 그리고 에릭 마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이 초대되어 경상남도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과 의미 있는 논의를 하며 교류를 넓혔다. 올해 7월엔 두 명의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고등학교 역사 교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일주일간의 독일 탈식민주의(decolonization) 학술 답사를 통해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와 시민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활동가와 교육자들의 연대의 힘을 목격했다. 이들은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 역사와 연결짓는 것은 물론,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같은 역사는 모든 식민주의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로 접근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이들이 식민지 성폭력의 참상을 알릴 때 아시아와 네덜란드 등지에서 일본군'위안부' 제도 생존자들이 앞장서서 일궈낸 초국가적 여성인권 운동으로부터 큰 감동과 힘을 얻는다는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탈식민주의 운동에서 여성의 신체 주권(body sovereignty)은 식민지배나 전쟁과 같은 무력으로 인해 국가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 “당연히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임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학술 답사 마지막 행사인 필자의 강의 ‘제국 일본의 성노예제 역사 보존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Collective Activism in SF Preserves the History of the Sexual Slavery System by Imperial Japan)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나 러시아군에 의해 무수히 강간당한 유럽 여성들, 특히 독일 여성들의 신체 주권과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 그리고 미국 내 소수 여성들의 침해된 주권에 대해 짧게나마 논의했다. 올해 7월 학술 답사를 위해 여러 독일 탈식민주의 운동 시민단체를 섭외해준 코리아협의회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우리 재단이 최근 활발한 연대 활동을 하는 마지막 단체인 유엔 미국여성간부위원회(US Women’s Caucus at the UN)는 여성과 소녀의 인권과 성형평(gender equity) 증진을 목표로 하며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를 지지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와 NGO 연합단체다. 필자는 이 단체에서 페미니스트 외교정책 국장(feminist foreign policy director)으로 활동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이슈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이슈가 가지는 여러 중요한 의미 중 세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는 오늘날 성·젠더 기반 폭력[2]이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5세에서 49세 여성 약 3명 중 1명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둘째는 성·젠더 폭력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 주권, 인권 유린, 폭력, 차별, 역사 왜곡 및 부정 등인데, 이러한 요인들은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채 현 사회로 이어져 뿌리내렸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 내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진화하는지 짚어보고 더 나아가 교육과 시민참여를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한다면 미국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젠더 기반 폭력 관련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의 인권이나 존엄성이 훼손되었을 때,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권리가 있고, 다른 누군가가 이러한 피해를 당했을 때 그들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도울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에 맞서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여러 나라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실천한 삶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다진 초국가적 연대와 여성인권 운동의 역사는 뿌리 깊은 차별과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미국 내 이민자 커뮤니티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미국 이민자 커뮤니티의 역사와 이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범아시아계 시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증폭되어 여성인권과 존엄성, 정의 그리고 평화와 같은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잘 나타내는 일본군‘위안부’ 기림비와 피해자들의 역사를 지키는 지역사의 현장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인권과 존엄성이 상식이 되는 공동체 만들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교육을 펼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우리 재단에게, 초국가적 여성인권 운동으로 자리매김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인권운동은 큰 힘이자 계승해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각주 ^ 한‧영 이멀젼(Two-Way Immersion) 프로그램은 저학년 때에는 모든 과목을 한글로 가르치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영어를 병행해 가르쳐 학생들이 과목의 내용을 한글과 영어 두 언어로 능숙하게 이해하고 구사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성·젠더 기반 폭력에는 강간, 성적 수치심, 가정폭력, 데이트 및 디지털 성폭력, 소수인종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를 비롯하여, 전쟁 지역에서 발생하는 전시 성폭력이 포함된다. 

    손성숙

  •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2023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Q. 안녕하세요, 선생님들.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신현경  여성학을 전공하고 현재 서울여대 교양대학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성학 관련 교양 강의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김성운 일본 현대사를 전공했고, 덕성여대 사학과에서 동양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사 논문을 쓸 땐 일본 대중문화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고, 냉전 체제의 시각에서 일본의 TV 방송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폈습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어요. 일본의 대중문화를 들여다보면서 <일본 TV의 ‘위안부’ 문제 재현>을 주제로 연구 계획서를 쓴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일본 현대사 영역을 가르치면서 한국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해줘야 할까라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작년부터 한일 관계사를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기의 절반 이상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할애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심도 있는 문제이니까요. 장휘 연세대 통일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있고, 동아시아 민족주의를 전공했습니다. 박사 논문은 <'위안부’ 운동이 한국 민족주의 담론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썼습니다. 지난해에는 덕성여대에서, 지금은 전북대와 연세대에서 강의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수업들이 주로 동아시아 민족주의와 관련된 강의라 ‘위안부’ 문제를 일부분 다루고 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역사라고 해도 역사학, 문화연구, 국제관계학, 비판적 동아시아 연구, 여성학 등 각자 전공과 학문 분야에 따라 주목하는 측면이 다를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강의에서 어떤 커리큘럼으로 이 문제를 다루거나 가르치고 계신지요.   김신현경 저는 여성학 세부 전공 중에서 섹슈얼리티를 전공했습니다. 성적인 것이 어떻게 사회문화적, 젠더적으로 구성되는가를 공부했고, ‘한국의 연예산업에서 젠더화된 섹슈얼리티 이미지가 어떻게 상품이 되어가는가’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한국의 연예산업을 통해 여성의 성과 몸이 동원되어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현재 대학에서 ‘여성과 역사’, ‘젠더와 문화’라는 제목의 교양 강의를 하고 있는데, ‘여성과 역사’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여성사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중요한 이슈로 다루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를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해당 이슈를 여성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 하지 못해요. ‘젠더와 문화’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기억과 문화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장휘 2007~8년 즈음 박사과정을 밟을 때 한국의 ‘위안부’ 문제 관련 운동과 민족주의 담론이 어떻게 진행되고 구축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논문을 쓰면서 ‘위안부’ 운동을 하는 분들을 인터뷰했고, 덕분에 이 문제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 수업에는 외국인 학생이 많아요. 전북대 수강생의 3분의 2에서 절반은 한국 학생이고, 나머지 중 70%가 우즈베키스탄, 20% 정도가 방글라데시 학생입니다. 인도네시아, 독일 교환 학생을 비롯해 몰도바, 러시아, 베트남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이 있고요. 연세대에서는 국제학대학원과 언더우드 국제대학(UIC)에서 수업을 했는데 3년 전까지는 UIC 입학생들이 많았어요. 80%가 한국 학생이었고, 교포 혹은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나머지 20%가 외국인인데 유럽, 미국 학생이 많았죠. 가끔 중국이나 몽골 학생들이 있고요. 그런데 지금은 교환 학생으로 많이들 오고 있어요. 그중 미국 학생이 90%, 유럽, 남미 학생이 10%, 아시아 학생이 5~10% 정도 됩니다. 한국 학생만을 가르치는 것과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죠. 미국,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온 친구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의 모르니까요.  신기한 건 UIC의 한국 학생 중 ‘위안부’ 관련 운동을 하거나 단체에 있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는 거예요. 보통 2개 국어가 되니까 관련 행사에서 통역을 하기도 하고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보다 ‘위안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몇몇 친구들은 심도 있는 논의를 하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아주 일부지만 한국 학생들보다 ‘위안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외국 학생도 옛날보다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수업을 하면서 놀랐던 것이, 미국 학교 중 아시아 관련 수업으로 ‘위안부’ 주제가 특화돼있는 수업도 있다는 점이었어요. 강의 제목 자체가 ‘위안부’인 경우도 있고요.    Q. 일본군‘위안부’ 운동도 대중화되었고, 30년 세월 속에서 이슈 자체가 국제화되다 보니 관심 있는 학생들은 굉장히 잘 알고, 관심 없는 학생들은 아예 모르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든 없든, 일종의 시대적 흐름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들께서는 1991년 국내 생존자로 처음 공개 증언을 하신 김학순 님을 잘 아실 테지요. 반면 요즘 학부생들은 김학순 님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실감하시나요?   김성운 수업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제 수업이 전공수업이라 주로 사학과 전공생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죠. 다만 동양사 전공 교수로서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반일, 반중 감정입니다. 대체로 일본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러한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역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양국의 외교 문제는 냉전이라는 지정학적인 상황에서 불거졌음을 이야기해주고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라든지, 최근 강제동원 해법과 관련해선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이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그러한 것들을 가르치면서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신현경 여학생들은 대체로 중고등학생 때 ‘위안부’ 관련 굿즈를 사본 경험이 있어요. ‘젠더와 문화’ 수업에서 기억과 재현 문제를 다루며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굿즈를 사본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선생님들이 ‘위안부’ 교육을 하면서 소개해주셨던 것 같고, 그래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위안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조금만 파고들어도 아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아주 사소하게는 피해자가 조선인뿐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아시아 위안소 지도를 보여주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든요. 제 수업에서는 한일 시민연대, 아시아 시민연대를 강조하면서 2000년 여성법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학생들은 이것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한국에서조차 강조하지 않으니 반일 감정을 갖고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그게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겪게 되죠.  서울여대에는 일본, 베트남, 중국인 교환 학생도 있지만 유학생도 많아요. 일본 학생들의 경우 ‘위안부’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관심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베트남 학생들은 대부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고, 중국 학생들은 들어는 봤다고 해요. 베트남 친구들의 경우에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위안부’를 비롯한 전시 성폭력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이 알고 기억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사실로서 아는 것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가 어떻게 기억하고, 또 교육적으로 접근해야 할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장휘 선생님이 여러 국적의 학생들 사이의 편차를 말씀해주셨는데, 서울여대 오기 전 독일에서 4년 정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한국학에 관심을 갖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한국 학생들보다 ‘위안부’에 대해 훨씬 많이 아는 경우도 있고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또는 나치에 의한 성노예 상황 등과 ‘위안부’를 연결 짓는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진 외국인 학생들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이슈는 한국 사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민 사회에서 중요한 역사적 토픽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식이 양극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적 정서에 혐오가 결합되는 양상도 보이고, 어떤 학생들은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과 연계해서 이 문제에 대한 균형감 있는 성찰적 지식을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학생들은 관련 지식이 거의 없는 느낌인데요, 국적이 다양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계시는지요.    장휘 대부분의 학생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모르니 강의 수준을 높게 맞출 수 없어요. 전북대에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 여러 파트 중 하나로 ‘위안부’ 문제를 소화하고 있습니다. 지역학 수업에서는 한국학을 가르치는데, 일단 교재의 선정 자체가 어려워요. 동아시아 민족주의가 어떻게 변화·발전하고 그 속에서 ‘위안부’ 문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길 바라면서 다양한 책을 읽힙니다. 가능하면 한국의 민족주의적 시각이 드러나지 않거나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자료를 읽히는데도, 외국 학생들조차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면 대부분 반일 감정을 갖게 되는 현상은 놀랍습니다. ‘위안부’ 문제 안에 존재하는 복합성을 이해시키고 국가와 시민, 피해자와 가해자 등 다양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논해보고 싶지만 어려움이 있어요. ‘위안부’ 운동/연구를 하는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 사이의 지식 격차가 상당히 크거든요. 그래서 강의의 난이도를 가장 쉬운 수준에 맞추고, 관심 있는 학생들에겐 추가로 관련 자료나 도서를 추천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 대중화 시대에 학생들이 노출되면서 고정된 선입견을 장착하거나 성찰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마땅한 텍스트북이 없다는 것도 문제고요. 전쟁 일반, 군사주의, 성 정치경제 등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인종주의적인 혐오로 귀결되는 상황도 있는 것 같은데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역사에 대한 반응에서 학생들 사이의 대결적인 양상이 보이기도 하나요?    김신현경 제 강의실의 경우에는 지식의 편차가 있을 순 있지만 갈등적인 요소가 등장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 않습니까.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문제로 다루면서 민족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바라보는 흐름이 있었다가 최근에는 그것과는 다른(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잖아요. 소녀상 앞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인 극우와 같은 행태를 보인다거나, 엄마부대 대표가 베를린 소녀상 앞에서 항의한다든지요. 학생들 말에 따르면, 온라인상에서도 이와 유사한 갈등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고 해요. 예컨대 ‘한국 여성들이 그때 강제로 끌려갔다지만 사실이 아니고 돈 벌려고 간 거다’라는 식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의 흐름으로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집단 또는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거죠. ‘위안부’ 문제를 여성 문제가 아니라 한일 관계의 문제, 민족주의적 정서로 바라볼 땐 ‘여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남성으로서의 고뇌’를 이야기하거나 민족의 수치로서 여성들을 비난했는데 현재 그런 이야기들은 아예 사라진 것 같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보기에 지금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사실은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즉 여성들의 ‘미투’에 무고가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 문제에까지 투사하고 있는 거예요.  김성운 저희 교실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가르쳐요.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가면 부정론자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울 것이냐. 그런 상황에 맞닥뜨릴 학생들을 위해 학문적인 무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 수업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얼마나 현재적인 문제인지 강조하죠. 피해자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해서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고, 1년에 한 번 혹은 분기에 한 번씩은 불거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이상한 의견에 휩쓸리기 쉽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 역사적인 요소와 사실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Q. 일본군‘위안부’ 이슈가 90년대와 2000년대, 그리고 지금 쟁점이 달라졌습니다. 90년대에는 전시 강간이 여성의 수치가 아니라 일본 군대의 전쟁범죄라는 여성인권 규범이 새로 등장했고, 2000년대에는 법적 배상과 외교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지금은 램지어 교수 논문 파동이 드러낸 역사부정론, 또한 시민운동단체와 피해자 간의 괴리 등이 한창 문제가 되었지요. 이것은 사실 확정의 차원을 넘어 옳고 그름의 윤리적 가치 논쟁과 결합된 ‘현대사’, 그중에서도 ‘과거청산’ 이슈의 공통된 특징인데요, 강의실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소화하고 계신지요. 이것이 강의실에서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논쟁이나 난처함으로 연결될까요?   장휘 이번 학기에서 인상적인 외국인 학생이 한 명 있었어요. 에티오피아계 이탈리아인으로, 캐나다인가 영국에서 태어나고 이탈리아에서 자라다 미국에 가서 일하던 중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연세대로 유학을 온 학생이었죠. 그런데 그 친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피해자들은 나이가 들었고 보상을 받고 다 끝났는데 왜 자꾸 얘기하냐.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 아니냐”고요. 새로운 형태의 극우가 등장했구나 싶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단순히 그런 것 같진 않더라고요. 그 친구처럼 다양한 배경과 맥락에 놓이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다르게 이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화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고, 또 여성에 대한 폭력 및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외에 새롭게 건드릴 수 있는 공간은 무엇이 있을까, 현재 우리는 나올 이야기가 다 나온 상태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김성운, 김신현경, 장휘, 웹진 <결> 편집팀

  •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Ⅱ
    2023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Ⅱ

    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때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휘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학생의 생애사로부터 온 코스모폴리탄적인 생각이 강의실에서 더 많이 공유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식민지 피해자 의식과 결합되어 민족주의가 강고한 나라인 건 사실이죠. 분단도 한몫을 하는 것 같고요. 하지만 아직 강의실에서 이런 얘기를 열어놓고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학생들이 대중화된 역사 이슈에 대해서는 정밀한 지식을 가지지 않으려 하는 특징이 있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해 가르쳐줘야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요.    김신현경 독일에서 한국학 공부하는 친구들을 가르칠 때가 생각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전부터 있었지만,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 싶었던 건 그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예요. 그들은 굉장히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간호사인 어머니가 한국에서 오셔서 독일 남성과 결혼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위안부’ 이슈에 대해 굉장히 집요하게 실증적 태도를 요구하더라고요. 가령 위안소가 구체적으로 몇 개였냐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저는 입장적 지식을 갖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돌아오니 당황스러웠어요.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숙제였습니다. 나중에 그 맥락을 이해했는데, 그 친구는 한국과 독일의 관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어요. 독일에서 한국학은 상대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학, 중국학과 비교해 볼 때 역사가 짧습니다. 이제야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추세죠. 그래서 한국학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갖고 있는, 즉 ‘우리가 이 문제를 잘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저도 아시아 여성의 입장에서 ‘위안부’가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으로 펼쳐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특히 서구가 어떻게 개입돼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식민주의와 냉전체제의 착종이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복잡하게 꼬이게 했는가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습니다.  장휘 학생들에게 민족주의적으로 쓰이지 않은 글만 읽히는데도 아이들이 쓴 글을 보면 아직도 ‘한 떨기 소녀’, ‘꺾인 소녀들’이라는 표현을 써요. 온라인상에서는 그런 이미지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현재 ‘위안부’에 관한 논의는 굉장히 확장되어 있고 다른 상황들도 펼쳐지고 있지만, 여전히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관성이 강해 그것을 벗어난 논의를 강의실에서 전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고, 이것을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점점 더 어려운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신현경 ‘위안부’ 문제가 한일 관계와 정치외교 이전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라는 말은 물론 맞지만, 그렇다고 그 프레임 하나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식민주의와 냉전체제, 여성에 대한 폭력과 동원 등이 복잡하게 펼쳐진 장이라는 논의로 끌고 가려고 할 때 다른 맥락의 저항이 있어요. ‘한일 민족주의가 아니고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봐야 한다’는 수준에서 멈추고 싶거나, 그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도 학생들로서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거죠. ‘이것이 과거에 일어난 여성 폭력인데 피해는 아직도 제대로 된 인정을 못 받고 있고, 그럼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은 언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교실에선 이런 식의 역동을 관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이 이슈가 가진 특수성과 주목성 때문에 종종 다른 반인권적 전쟁범죄 피해(강제동원, 원폭 피해자 등)와는 고립되어 다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불어 한일 양자관계에서의 민족주의적 대결로 반복해서 이슈화됐고요. 그러다 보니, 전쟁과 군사주의가 양산해 내는 성 정치경제에 대한 제도 비판이 비교사적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문 것 같은데요, 이러한 여성 인권 이슈로서의 특수성, 민족주의 이슈로서의 대중적 호소력, 전쟁의 피해에 대한 구조적 성찰보다는 개개 여성 피해자들을 반복해서 호명하는 문제 등등에 대한 선생님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성운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되겠죠. 역사 교수로서 그것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데, 결국 기억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정부가 여성을 강제 동원했다는 문서적 증거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저는 강의실에서 문서의 가치와 구술 증언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쟁 당시의 문서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전후에 일본군이 다 태웠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의 범죄가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란 걸 알았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서자료라는 것도 결국 처음에는 사람의 말에서 시작된 것이에요. 조선왕조실록도 ‘왕이 이런 말을 했다’라고 받아 적은 거잖아요. 따라서 문서화된 피해자분들의 구술 증언도 하나의 사료로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죠.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될 겁니다.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문서화, 역사화 될 수밖에 없고, 이것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죠.  일본군‘위안부’ 피해가 과거의 일이라고 하지만, 피해자분들은 현재 살아 계시고, 또 전시 성폭력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1990년대의 세르비아 전쟁도 그랬고,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의 여학생 집단 납치 사건, 그리고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조직적인 강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성폭력 문제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어요. 따라서 이건 보편적인 문제이고, 그런 측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Q. 정책 환경적으로는 올해나 내년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들은 앞으로 강단에서 ‘위안부’ 이슈를 어떻게 가르치고자 하시는지요.   장휘 큰 맥락 안에서 민족주의와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려 해도 여전히 ‘힘없이 꺾인 꽃들’이라는 식의 이미지를 가지고 와서 받아들여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위안부’가 어떻게 재현됐는지를 보면, 요즘에는 운동가로서의 면모도 부각되고 있지만 이전에는 그들이 겪은 피해와 고통이 주로 극화되어 재현됐죠. 그 기억들이 주변 환경이나 상황이 변화한다고 해서 한 번에 바뀔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국민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억이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없었던 일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좀 더 수용 가능한 기억,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억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신현경 여성학적 관점에서 ‘위안부’ 이슈에 대한 해석을 더욱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몸과 성에 가해진 폭력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여성주의적인 분석과 연구가 많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점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아요. 로라 현이 강 선생님의 책 『Traffic in Asian Women』(2020)을 보면, 1970년대 미국에서 강력한 페미니즘 제2물결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전반적으로 제기됐을 때,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온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와 기생 관광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해요. 그런데 그 당시 미국의 상황 안에서 그 글들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죠. 백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비해 아시아 여성의 피해는 문제 되지 않았던 겁니다. 아시아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말할 때 ‘위안부’ 문제가 대표격이 된 것에 미국 중심의 아카데미 담론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어떤 면에선 아시아 여성을 본질화하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따라서 성폭력이 피해자의 정체성으로 환원되는 힘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가되, ‘위안부’ 문제를 훨씬 더 보편적 지식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이 이것을 자신의 기억 또는 이야기와 연결시킬 수 있는 언어의 발명이 필요해요. 그런 점에서 연구하고 교육해야 할 지점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런 시도를 하고, 또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의 경험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는 장이 많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김성운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들의 말을 부정하는 수사가 있잖아요. ‘그들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 매춘하러 갔는데 변명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매도하는데, 역사 자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기억이 어떻게 역사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각자의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수정주의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그것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외교 담론으로 재생산되고 있죠. 일본 정치가들은 끊임없이 망언을 하고, 일본의 사회/역사 교과서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여전히 교실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실존했고, 심각했고, 피해자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연구자들은 민족주의를 넘어 그다음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대학 강단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Q. 장휘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문제가 한국 민족주의의 중핵이기도 하지만, 일본 민족주의의 중핵이기도 하다는 게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관점을 갖고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정서적인 측면, 즉 대중화된 민족주의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따라서 그에 대한 교육적 대안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김현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위안부’ 이슈 자체가 이미 국제화되었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안과 밖이라는, 혹은 한일 관계나 아시아라는 지리적 경계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장휘 ‘위안부’ 문제는 외국 학생들도 쉽게 이해하고 빨리 받아들여요. 다만 그들이 의아해하는 지점은 ‘이 문제에 반대할 것이 뭐가 있지?’라는 겁니다. 영화 〈주전장〉(미키 데자키, 2019)에 나오는 일본 극우들은 ‘국익을 위해 ‘위안부’ 문제에 반대하겠다’라는 어떤 전략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몸을 던진단 말이죠. 그들을 단순히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보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그들의 서사의 핵심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극우 민족주의 담론 안에서 ‘위안부’ 문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왜 중요해졌는지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김성운, 김신현경, 장휘, 웹진 <결> 편집팀

  •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1)
    2023년 에세이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1)

    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김성운 X 사진: 김효연 *이 에세이는 김성운 교수의 논문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논총』 56집, 2022, 91-116를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I. 후쿠시마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로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태평양 연해상에서 일어난 규모 9.0의 대지진에서 비롯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여러모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을 상기시키는 사건이었다. 수소 폭발에 이은 다량의 방사능 물질이 인근 지역을 뒤덮으면서 원폭이 가져온 방사능 재해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으로부터 시작된 전후 일본의 원자력 정책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다방면에 걸쳐 일어났다.  유일한 피폭국이었던 일본은 전후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의 기억은 일본이 원자력 발전소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다수의 일본인들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전환이 피폭국 일본의 책무라고 여겼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을 ‘신의 섭리’라 강조하여 ‘나가사키의 성인’이라 존경을 받았던 나가사키 의과대학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방사능 의학 교수 역시 원폭의 원리를 이용하여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면 인류의 행복이 증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들의 영혼도 위로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이러한 논리는 일본 정부의 원전 정책 추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일본에서 원전 도입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郎)가 사주로 있었던 요미우리 신문사는 원전 관련 박람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1954년 도쿄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에서 개최된 ‘누구나 알 수 있는 원자력전’에서는 원자력 발전을 포함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사례를 히로시마 피폭의 처참한 이미지와 함께 전시함으로써, 원자력의 동력원으로서의 이용이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의 경험을 극복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원폭 피해의 악몽을 인류의 행복으로 전환한다는 논리에서 출발한 전후 일본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은 일본을 ‘원전대국’으로 만들었으며, 고도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1956년 6월 일본 원자력 연구소가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東海村)에 설치된 이래 원전 건설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일본 전역에 총 54기의 원자로가 건설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 프랑스에 이은 세계 제3위 원전대국이 되었다.[2]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렇게 원폭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일본의 전후 원자력 개발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원자로 건설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동일한 멸시를 드러내며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기억에 대한 최악의 배반이다. (중략)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을 다시금 기억하고, 원자력의 위험성을 인지하며, 그것이 효과적인 전쟁 억지력을 제공한다는 환상을 끝낼 수 있게 하기를 희망한다.[3]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역시 같은 맥락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원폭 체험과 연결시켰다. 2011년 6월 카탈루냐 국제상 시상식 연설에서 그는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언급하며, 그로부터 66년이 흐른 시점에 다시금 일본이 방사능 피해를 입은 이유는 극도의 효율만을 추구했던 정부의 원자력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  이렇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일본 원자력 정책의 파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출발점이었던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소환했다. 원폭을 그린 영화들 역시 이러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에 참여하면서 3.11 이전의 원폭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개봉된 두 편의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야마다 요지, 2015)과 〈태양의 아이〉(구로사키 히로시, 2021)를 차례로 살피면서 이러한 재고찰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Ⅱ. 〈어머니와 산다면〉: 원폭의 ‘재역사화’   3.11 이전의 원폭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보여주는 내러티브 경향은 원폭 체험의 탈역사화이다. 즉 전쟁과 침략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생략되고 원폭 피해가 마치 자연재해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이 내러티브 전략은 일본인이 ‘유일한 피폭국’의 국민임을 강조하는 ‘피폭 내셔널리즘’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전후 발표된 최초의 원폭 영화인〈나가사키의 종(長崎の鐘)〉(오바 히데오, 1950)에서 시작되어, 히로시마 피폭의 참상을 끔찍한 비주얼적 요소로 표현한 대표적인 원폭 애니메이션〈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마사키 모리, 1983)에서 절정에 달했다.[5] 이러한 원폭의 탈역사화가 〈어머니와 산다면〉에서 어떻게 수정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지 3년이 되던 1948년 8월 9일, 조산부 노부코는 3년 전에 피폭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둘째 아들 고지의 묘 앞에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데, 바로 그날 고지의 혼령이 홀연히 노부코 앞에 나타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정한 아들로 돌아온 고지는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실의에 잠긴 어머니 노부코를 위로한다. 한편 고지의 약혼녀 마치코는 고지가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노부코의 집에 드나들며 인연을 이어 나가고, 고지는 이런 마치코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은 고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치코를 안타깝게 여긴 노부코는 마치코에게 고지를 그만 잊고 다른 남자와 새 출발 할 것을 제안한다. 마치코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시간이 흘러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복원병 출신의 구로다와 약혼하고 함께 노부코를 찾아간다. 노부코는 마치코의 새 출발을 축복하고, 고지도 미련을 거두고 떠난다. 한편 피폭의 영향으로 건강이 악화된 노부코는 그날 밤 숨을 거둔다.  이 영화는 오프닝 신부터 원폭 투하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1945년 8월 9일 플루토늄탄을 탑재하고 출격한 B29기의 조종석과 미 조종사들의 대화를 보여주며 자막과 내레이션을 통해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경위를 설명한다. 우선 제1 목표인 고쿠라에 도착하였으나 시야가 확보되지 못하여 제2 목표인 나가사키로 방향을 돌렸고, 나가사키 역시 70% 이상 구름에 가려 시가지가 보이지 않았으나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시야가 확보되어 원폭을 투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폭격기의 조준망원경에 잡힌 나가사키 시가지의 모습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둘러 등교하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생 고지의 일상적인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곧이어 발생할 비극을 예고한다.    미국이라는 존재는 이후에도 계속 등장한다. 암시장 사업을 하고 있는 ‘상하이 아저씨’는 노부코에게 연정을 품고 암시장의 물건들을 조달해준다. 미 점령군에게서 빼돌린 비누를 노부코가 마음에 들어 하자 그는 “이런 고급스러운 물건을 만든 나라와 전쟁을 했다니, 멍청한 일이지!”라고 일갈한다. 이후 그는 미군이 포로에게 제공한 외투를 입고 와서 노부코의 이웃 도미에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상하이 아저씨: 미국은 대단해. 포로에게 이런 따뜻한 것을 입혔다니. 도미에: 일본은 질 수밖에 없었네. 상하이 아저씨: 예스! 이렇게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적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엄청난 국력을 보유한 미국에 일본이 도전한 일은 어리석었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상기된다.  이전의 원폭 영화에서 마치 자연재해처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그려졌던 원폭 피해도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잘못’으로 묘사된다. 노부코와 고지는 고지가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노부코: 의과대학이라면 징집을 연기할 수도 있고, 졸업 후 징집되더라도 군의관이 되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했었는데... 고지: 결국 똑같았지 뭐.  노부코: 그랬지. 고지: 별수 없지. 그게 나의 운명이었으니까. 노부코: 운명? 지진이나 쓰나미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운명이라 해도 이것은 막을 수 있었어. 인간이 계획해서 행한 엄청난 비극이야. 운명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이렇게 이 영화는 원폭이 운명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초래한 비극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즉, 원폭은 미국과의 전쟁의 일부였으며, 따라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비극, 즉 ‘인재(人災)’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전 원폭 영화의 탈역사화 경향을 수정한다. 이러한 원폭 영화의 ‘재역사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인식론적 변화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후쿠시마의 사고는 쓰나미가 원전의 비상 발전 시설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일어났지만 결국 이러한 재해를 예측하지 못하고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한 원전 운영자 측의 ‘인재’로 평가되고 있다.[6] 이렇게 ‘인간의 잘못’으로 원전의 노심이 녹아 폭발에 이르고, 수개월간 방사능 물질이 공기 중에 배출된 참사는 66년 전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지진이나 쓰나미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운명이라 해도 이것은 막을 수 있었어”라는 노부코의 대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7] 이렇게 〈어머니와 산다면〉은 ‘인재’라는 고리로 후쿠시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한다.   각주 ^ 서동주,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2014, 441-443. 전후 일본의 원전 정책과 원전 건설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함. ^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2012, 321. ^ Kenzaburo, Oe,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201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 川口隆行,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2021.3. ^ 강태웅,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2009, 55-64. 〈맨발의 겐〉은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경험한 만화가 나카자와 게이지(中沢啓治)의 동명 만화(1976)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원작 만화의 인기와 사회적 파급력으로 실사 영화와 드라마도 제작되었다. 또한 이 만화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번역되어 히로시마 원폭 피해의 처참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佐藤忠男, 2016, 57.  ^ 전문가들은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의 원인이 안전성보다는 경제성에만 치중한 설비 건설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밀폐성이 높은 원자로 건물이 아니라 지하에 설치한 탓에 침수 피해를 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 5.7m 높이의 쓰나미를 상정하고 건설된 방호벽은 14~15m로 밀어닥친 쓰나미에 무력했다. 반면 추가적으로 방호벽을 강화한 후쿠시마 제2원전은 비상용 디젤 발전기 3대 중 2대가 정상 작동하면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오나가와(女川) 원전을 소유한 도호쿠전력(東北電力) 역시 869년에 발생한 대지진까지 연구하여 예상 쓰나미 높이를 9.1m로 높인 결과 부분적인 피해에 그쳤다. 장정욱,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2011.08.18.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 木村朗子,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2016, 215-216.   참고문헌  ·川口隆行, 2021,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강태웅, 2009,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서동주, 2014,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장정욱, 2011,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Kenzaburo, Oe, 2011,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2012,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木村朗子, 2016,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佐藤忠男, 2016, 「知らせることが、大切なこと」, 『キネマ旬報』 1718. ·杉田弘毅, 2005,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김성운, 김효연

  •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2)
    2023년 에세이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2)

    우리는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원한 고통에 관해 얼마나 아는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잔류자의 인권 문제 또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원폭 피해는 전시 성폭력과 유사하게 몸에 직접 작용하여 성적 재생산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웹진 〈결〉은 연구자 2인의 글에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을 담은 김효연의 사진 작업 ‘감각이상’을 병치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글: 김성운 X 사진: 김효연 *이 에세이는 김성운 교수의 논문 「3.11 이후 일본의 원폭 영화: 「어머니와 산다면(母と暮せば)」, 「태양의 아이(太陽の子)」를 중심으로」, 『일본연구논총』 56집, 2022, 91-116를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Ⅲ. 〈태양의 아이〉: 피해자성의 거부 〈어머니와 산다면〉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과정, 등장인물들의 부상과 상실을 통해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에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인이 입은 피해만을 강조하는 ‘피폭 내셔널리즘’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태양의 아이〉(2021)는 일본인들이 원폭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교토대학의 아라카쓰 분사쿠(荒勝文策) 연구실에서 원폭 연구를 진행했던 젊은 과학자들의 고뇌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 핵분열을 뜻하는 ‘fission’에서 따온 ‘F호 연구’로 알려진 이 비밀 프로젝트는 당시 해군 함정 본부가 1943년 5월 아라카와 연구실에 의뢰한 연구로, 전황이 급박해진 상황에서 일본 역시 미국처럼 원폭의 개발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1] 1938년 독일 핵물리학자들이 핵분열을 발견한 후 미국을 포함하여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국가는 미국과 일본을 포함, 모두 6개국이었다.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 역사학적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이것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일본이 전쟁 중 핵무기를 실제로 개발했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언론 매체가 기꺼이 다룰 만한 소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교토대학 아라카와 연구실의 ‘F호 연구’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이 도쿄대학 이화학 연구실의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의 이름을 딴 ‘니고(ニ号) 연구’이다. 1941년 6월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의 야스다 다케오(安田武雄) 중장은 당시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니시나에게 핵무기 연구를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니시나는 1943년 초에 정식 연구보고서를 육군 측에 제출했고, 육군은 이를 근거로 같은 해 5월 니시나 연구소에 핵무기 개발을 명한다. 전쟁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던 당시 총리 도죠 히데키(東条英機) 역시 이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걸었다. 1944년 봄 이후에는 이 계획이 정부의 연구 동원 회의에서 관민 공동의 국가 프로젝트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라늄이었다. 야스다에 의하면 원폭 1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우라늄을 확보하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을 다 뒤져도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한편 미국은 하루에도 수십 기의 원폭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의 우라늄을 확보했고 이러한 소식이 일본에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관계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전세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신형 무기’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44년 2월, 물리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이었던 다나카다테 아이키쓰(田中舘愛橘)는 “라듐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영국 함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폭탄”을 개발할 것을 군부에 촉구했다. 1940년 마이니치 신문이 우라늄-235를 ‘꿈의 동력원’으로 소개한 이후 원폭에 대한 지식은 대중들에게도 확산되었다. 1944년 7월 2일 아사히 신문은 ‘결전의 신병기’ 특집에서 “10~15그램만 있으면 대도시 1~2개 주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에 대해 소개했다. 같은 시기 대중잡지 『신청년(新青年)』에 실린 다테카와 겐(立川賢)의 소설 「샌프란시스코를 날려버리다」는 일본군이 ‘원자력 항공기’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원폭을 투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전시 핵무기 연구는 결국 미국의 그것을 따라잡지 못했고, 일본의 전쟁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에 의해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의 원폭조사단에 따르면 일본의 ‘니고 연구’는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의 1942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언론인 스기타 히로키(杉田弘毅)는 ‘니고 연구’에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라 최초의 핵 사용국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교토대학 아라카쓰 연구실의 젊은 과학자 이시무라 슈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라카쓰 연구실은 해군의 의뢰를 받아 핵분열을 이용한 ‘신형무기’ 제작 실험에 돌입한다. 우라늄-235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실험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지만 실험광 슈는 원자가 붕괴할 때 발생되는 청록색 빛깔에 이끌려 동료들과 실험을 지속해 나간다. 그러던 중 해군 파일럿에 지원했던 동생 히로유키가 일시 귀환한다. 동료들이 모두 가미카제 작전에 출격하는 상황에 자신만 빠질 수 없다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바다에 빠져 자살하려는 동생을 슈는 구해낸다. 이렇게 전쟁이 젊은이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슈를 비롯한 아라카쓰 연구팀은 히로시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원폭의 위력을 목도한 슈는 그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해온 과학적 진리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태양의 아이〉는 일본에서 원폭을 개발하는 과정을 미국과의 경쟁으로 묘사한다. 아라카쓰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하나오카: 원자핵 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살상 능력 면에서도 차원을 달리할 거예요. 오카노: 샌프란시스코라면 어림잡아 20만 명은 죽을 거야. 기도: 30만입니다. 제 계산으로는. 하나오카: 우리들이 여기에 가담해도 되는 것일까요? 기도: 지금 그런 걸 생각해도 의미는 없어. (중략) 기도: 우리가 하지 않으면 미국이 할 거야. 미국이 만들지 않으면 소련이 만들겠지. 먼저 원자핵 폭탄을 만드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해. 이렇게 일본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이나 소련과의 경쟁을 의미했다. 결국 미국에 의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시찰하고 오는 기차 안에서 연구실의 과학자들은 “일본은 원자핵 폭탄에 당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폭의) 개발 경쟁에서 졌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에요. 일본의 과학자는 패배했습니다!”라며 분개한다. 이렇게 히로시마를 폐허로 만든 원폭은 미국과 일본의 개발 경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단지 과학기술이 우수한 미국이 일본보다 먼저 개발에 성공했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태양의 아이〉는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원폭의 ‘재역사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원폭 개발 경쟁에서 일본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태양의 아이〉에서 나타나는 원폭의 ‘재역사화’ 역시 3.11 이후의 일본 사회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일본 사회는 핵에너지의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강화해왔고, 그것이 앞서 언급한 ‘피폭 내셔널리즘’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일본 정부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으로 일본 사회는 원자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점차 탈바꿈했고 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원전 시설 폭발 이후 수개월간 방사능 물질이 대기와 토양을 오염시켰고, 방사능 오염수는 바다를 타고 주변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인 일본이 결국 자국민은 물론 타 국민에게까지 방사능 오염의 피해를 입히는 가해국이 되었고,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이 〈태양의 아이〉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영화는 기존 원폭 영화의 ‘피폭 내셔널리즘’ 문법을 수정하고 있다. 원폭 투하의 역사적 맥락, 즉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는 맥락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과오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두 영화 모두 원폭의 경험을 일본으로 한정하며, 전시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의 원폭 투하를 초래한 태평양 전쟁이 사실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일부였다는 사실, 더 나아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으로 시작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아시아 이웃들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의 대략 10%가 재일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각주 ^ 杉田弘毅,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2005, 15-16.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에 관해서는 이 책을 참조함.    참고문헌 ·川口隆行, 2021, 「대재난의 망각과 상기―포스트 3.11의 역사적 지층―」, 『일본학보』 129집. ·강태웅, 2009, 「원폭영화와 ‘피해자’로서의 일본」, 『東北亞歷史論叢』 24집. ·서동주, 2014, 「일본 고도성장기 ‘핵=원자력’의 표상과 ‘피폭’의 기억」, 『日本學報』 99집. ·장정욱, 2011,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자력의 미래: 아직도 계속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거짓말」, 『프레시안』,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36817. ·Kenzaburo, Oe, 2011, “History Repeats”, New Yorker (28 March)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1/03/28/history-repeats. ·Yoshimi, Shun’ya, Trans. Shi-Lin Loh, 2012, “Radioactive Rain and the American Umbrella”,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71, No. 2. ·木村朗子, 2016, 「五年後の震災後文学論」, 『新潮』 113(4). ·佐藤忠男, 2016, 「知らせることが、大切なこと」, 『キネマ旬報』 1718. ·杉田弘毅, 2005, 『検証非核の選択: 核の現場を追う』, 岩波書店.

    김성운, 김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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