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약하고 낮고 투박하지만 - 박숙이 생애사 연구
    2023년 에세이 약하고 낮고 투박하지만 - 박숙이 생애사 연구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자 고(故) 박숙이 할머니(1922.3.4. ~ 2016.12.6.)는 2012년 9월, 만 90세에 정부 피해등록자 240명 중 236번째로 등록하셨다.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당리에서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1명씩 있는 집에서 태어나셨다. 16살이 되던 1939년, 이웃마을인 갈화에 살던 이종사촌인 17살 장쌍가매 언니와 조개 캐러 가는 길에 일본 군인에게 납치되어 부산, 나고야, 만주, 상해를 거쳐 상해 위안소에서 해방되던 1945년까지 6년간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해방된 줄도 몰랐는데 위안소에 왔던 군인들도, 위안소 관리인도 일본이 전쟁에 지니 조선인들이 좋아한다며 화를 냈고, 군인들도 사나워졌고, 부대와 위안소 안팎이 이상할 만큼 어수선했다고 한다. 아무도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사촌 언니가 밖을 내다보려고 나갔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혼잡한 틈을 타서 뒷문으로 도망쳐 중국 홀아비의 헛간에 숨어들었다. 신고를 막으려고 그 집에서 살다가 조금씩 돈을 모아 1948년 고향이 남해라는 것을 몰라, 무조건 한국에 오기 위해 부산행 배를 탔다. 부산 영도에서 식모살이하다가 ‘화방사’라는 절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내고 1949년 고향 남해로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다.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빠도 어딘가로 살러 가서 소식이 닿지 않아 혼자 살았다. 정상적인 결혼은 하지 못했고, 양아들 1명과 양딸 2명을 키웠다. 손자들이 장성하여 남해를 떠나고 난 뒤 만 90세에 피해 등록을 마쳤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 세상에 나와 4년의 삶을 살고, 2016년 12월 6일 만 94세로 고단한 삶을 마쳐 경남 남해군 서면 연죽리 남해 추모누리 공동묘지에 묻히셨다.   2013년 1월 19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 전화를 받고 함께 찾아간 박숙이 할머니의 지붕 낮은 방 안.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91세 박숙이,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살피며 사회운동과 지역 운동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 운동가 65세 이경희, 지역 여성회를 만들고 일궈가는 44세 김정화, 세 여성이 무릎을 마주하고 앉은 것이 출발점이었다. 어쩌면 박숙이 할머니와 남해여성회원들의 만남은 몇 겹의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시대와 공간의 접점이 딱히 없는 듯한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서로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남해여성회는 긴급운영위를 열어 일본군‘위안부’ 사업을 중심사업으로 결정했다. 할머니가 가장 하고 싶어 하시는 강연 사업을 추진했고, 피해자 심리정서 안정 사업, 청소년 교육 및 증언 영상 기록사업 등을 숨 가쁘게 진행했다. 지금 생각해도 퇴근 후 밤에 모여 의논하고 주말에는 나들이, 생일잔치, 교육사업 등 그 고단하고 버거운 일을 어찌 해냈나 싶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할머니 건강 상태를 살피는 일까지 어느 하나 조심스럽지 않고 힘겹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남해여성회 회원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우리들, 즉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일본군의 성노예로서 아픈 생을 살아 낸 한 여성의 삶을 마주하며 연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남해여성회가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고 연대하여 일궈낸 빛나는 자매애는 지금도 잊지 못할 자랑거리다. 비록 약하고 낮고 투박하지만, 이토록 애절하고 슬픈 만남과 헤어짐을 그저 개인의 특별한 경험으로 남겨둘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박숙이 할머니께서 생전에 “내가 살아서는 기어서라도 학상들한테 역사 강연할낑께, 내가 죽고 나면 내 얘기를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니가 책으로 맹글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겁 없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도 3년이 흘렀고, 일생의 강렬한 만남이었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깊은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매우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나는 경남의 중고등학교 교사 8명과 2019년 8월 6~9일 마창진시민모임 주최로 청소년의 인권 평화 교육 자료 수집을 위한 교사 역사탐방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국 난징과 상해의 위안소 흔적들을 찾기 위해 낯선 골목을 다니며 자료수집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중국 난징의 리지상 위안소와 그 흔적, 난징대학살 박물관과 상해의 최초 일본군 위안소인 대일 살롱과 상해 사범대학 내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임시정부청사 등을 탐방했다. 도심의 초라하고 낡고 빛바랜 옛 위안소 건물들이 고층 건물 사이에서 버려진 듯 남아 있어 이질적이었다. 마치 고향도 찾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평생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아픔을 겪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숱한 ‘박숙이’와 닮았다는 생각에 깊고도 깊은 심연에 닿았다.  할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할 수 없었고 말해서도 안 되는 세상을 살아낸 수많은 ‘박숙이’들의 시간을 세상에 단 한 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 딱 그 마음으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 박숙이 할머니의 삶은 그저 한 개인의 삶이 아니었다. 누군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면, 할머니와 가장 자주 만나고, 가장 가까운 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논문을 쓰기 위해 선행연구를 분석해보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주제로 한 논문 자료 중 생애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여성가족부의 일본군‘위안부’ e-역사관 자료실에도 두 분 이상의 피해자 사례를 묶어 나온 생애사 논문은 있었지만, 피해자 한 명을, 그것도 실명으로 밝힌 단일사례 생애사 연구 논문은 없어 놀랍기도 했다.  나의 논문은 비록 글짓기 수준의 논문이지만, 심층 면접과 참여 관찰을 통해 한 분의 삶을 담아내고, 피해자의 감정을 따라가며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적은 세상에 없던 기록물이며, 피해자가 사망한 시점에 쓰인 논문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      또 연구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의식적으로 박숙이 할머니를 만난 게 아니라, 할머니를 만나며 쌓아 온 구체적인 경험이 그대로 연구 결과물이 되었다는 것이 다른 생애사 연구 논문과의 차이점이다. 논문에 쓰인 자료들은 수집한 것도 있지만 남해여성회가 직접 제작하거나 제작에 참여하고 주도한 것들이 더 많다. 자료 제작 과정이 곧 논문 내용이 되었고, 주 2~3회 찾아뵐 수 있는 거리에서 이웃으로 살면서 할머니를 만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할머니의 주거, 의료, 생활 욕구를 세세히 살핀 활동 결과가 그대로 논문이 되었다.   특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 등록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숙이 할머니와 남해여성회가 함께한 사회활동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할머니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사회적 활동을 통해 달라진 할머니의 감정과 관점의 변화는 논문에서 처음 이야기한 것이다. 유년 시절 겪어야 했던 가부장적인 양육 방식과 그로 인해 규정된 할머니의 삶, 그리고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이 깨진 것에 대한 깊은 회한을 할머니가 표현한 그대로 기록했다. 할머니의 생애에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들은 객관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들을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살아내신 마지막 4년의 생활에 대한 기록은 논문 말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에 박숙이 할머니에 대한 유일한 기록물인 셈이다.    박숙이 할머니께서 피해자임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저 우리 이웃에 흔히 있을 법한 평범한 할머니였을 것이다.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 분이 아니기에 잘 알려지지도 않으셨다. 박숙이 할머니처럼 지방에서, 단독 주거 형태로, 90을 넘긴 늦은 나이에 피해자임을 밝힌 할머니들의 삶은 우리에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언론이나 방송에 자주 등장한 피해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증언으로 남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나의 논문은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며 그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일본의 공식사죄와 피해자의 명예 회복은 여전히 멀고, 세계 곳곳에서 심지어 국내에서도 일본군 성노예 제도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역사부정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생존자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내 주변의 지인들조차도 ‘그동안 할머니 모시고 그만큼 고생했는데, 이젠 그만하면 되었다’며 걱정과 위로의 말을 한다. 이러다가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지 않을 때가 곧 올 텐데, 관심에서 멀어지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절박함은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웠고, 책은 나중에 내더라도 논문이라도 먼저 남겨야 했다.  ‘포스트 할머니 시대’에 더 강력한 문제 해결의 주체인 시민들이 ‘위안부’ 운동의 주변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기록과 기억의 사회적 재현 작업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다. 생존해 계신 피해자가 10명뿐이라는 위기감과 절박감에 대한 역설로, 기록과 기억은 힘이 세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개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사회적인 기억으로 만들고 재현할 것인가? 이는 곧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만들어 온 역사적 교훈을 어떻게 이어가고 확장할 것인가라는 행동 실천의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행동 실천 과제로 남해여성회는 매년 8월 인권 평화문화제 ‘숙이나래 문화제’를 열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가장 많은 경남지역에서는 98개의 시민사회 단체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당사자와 시민사회가 일궈온 공공 역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기록과 기억 행동을 위한 사회적 연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다. 기록과 기억 행동, 사회적 재현으로 지속 가능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이어갈 때, 일본군 성노예제도와 같은 반인도적 전쟁 성범죄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에 맞서 여성 인권과 평화, 역사 정의의 연결고리로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더 널리 퍼지고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나의 논문은 박숙이 할머니께 약속 드렸던 책을 쓰기 위한 전제이고,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아주 작은 기록이지만, 기억을 확장하고 운동을 지속시키는 데 쓰일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김정화

  • 일본군의 중국 여성에 대한 잔혹행위 기록하기
    2023년 논평 일본군의 중국 여성에 대한 잔혹행위 기록하기

      필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의 일로, 당시 나는 한일 ‘위안부’ 피해구제(redress) 운동을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쓴 바사대 학생과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일본군이 설치한 강간소인 일본군 ‘위안소(ianjo)’로 수많은 중국 여성들이 납치되었지만,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련이 중국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공백은 ‘위안부’ 제도의 전체 범위와 범죄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위안부’ 제도의 큰 피해자 집단 중 하나가 중국 여성들이었고, 이들의 고통은 일본군 성폭력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나는 중국인 ‘위안부’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여성들의 전시 트라우마를 글로 써나가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당시 필자가 만성질환을 앓고 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위안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 역시 고된 과제였다. 일어일문학 강의, 여타 행정 업무와 연구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야간과 주말을 이용해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며 연구에 매진해야 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다층적인 논의를 제공하고자 전쟁 중에 발표된 중국 민간인과 군인의 목격담, 전 일본군 장병이 작성한 문서, 중국에서 전시 잔혹행위를 목격한 외국인의 보고서와 일기 등의 자료를 활용했다. 생존자와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중국 학계의 쑤즈량(Su Zhiliang), 천리페이(Chen Lifei), 캉지안(Kang Jian), 천쥔잉(Chen Junying)과 협력했고, 그 외에도 다수의 중국 및 일본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번역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잔혹행위를 겪은 후에도 정의를 위해 싸워 온 여성들의 용기가 중국 ‘위안부’에 대한 책을 완성하는 데 힘이 되어 주었다. 『중국인 위안부: 제국 일본 성노예의 증언(Chinese Comfort Women: Testimonies of Imperial Japan’s Sex Slaves)』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총 세 군데의 대학 출판부, 즉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출판부(2013년), 옥스퍼드대 출판부(2014년), 홍콩대 출판부(2014년)에서 출간되었다. 중국계미국인사서협회(Chinese American Librarians Association)에서 논픽션 분야 올해의 최우수 도서(Best Nonfiction Book of the Year)로 선정하기도 한 이 책은 일본 제국군의 성노예 제도로 삶을 파괴당한 수십만 중국 여성들의 고통을 온전히 폭로한 최초의 영문 단행본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일본의 만주 및 상하이 침략 초기(1932년)부터 난징 대학살(1937년) 이후 급속한 전쟁 확장과 1945년 패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 본토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확립된 과정을 추적하여 위안소 확산과 일본의 침략전 전개 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부에서는 또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일본 점령군이 피해자 가족에게 강요한 몸값, 소규모 부대가 교전지와 점령지에 설치했던 수많은 임시 위안소,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큰 피해자 규모 등 ‘위안부’ 제도의 숨겨진 측면 역시 조명한다. 2부에서는 위안소 생존자 12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공동 연구자인 쑤즈량과 천리페이가 생존자들의 모국어로 녹음한 내용을 필자가 영어로 번역했다. 지리적 구분과 전쟁의 연대기적 전개에 따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분류함으로써, 전쟁의 전체적 맥락을 배경으로 이들의 증언을 제시했다. 각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전쟁 전의 삶에서 시작하여 성노예 기간과 전후에 겪은 고난으로 이어지며 위안소 생존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겪어온 고통을 드러낸다. 3부는 위안소 생존자들의 전후 삶과 중국 내 ‘위안부’ 피해구제 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생존자들이 전후에 사회적 편견과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오랜 세월 차별과 배척, 빈곤에 시달려야 했던 현실을 짚어본다. 또한 중국인 피해자들의 소송을 둘러싼 주요 법적 논쟁과 사건, 그리고 중국인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초국적 활동(activism), 특히 일본인들의 활동에 관해서도 논의한다. 끝으로, ‘위안부’들의 고통과 삶의 이야기가 그 국적과 상관없이 전 세계인에게서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출간 후에도 필자의 ‘위안부’ 문제 연구는 계속되었다. 방대한 증거 앞에서도 일본의 정부 관료들과 극우주의 작가, 활동가들은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 군 성노예제였음을 끈질기게 부인하고 있고, 이런 사실이 심히 우려스럽다. 일본 부정론자들의 흔한 수사(修辭)는 ‘위안부’들이 민간 업자가 전장에서 운영한 매춘소의 전문 매춘부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정부나 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 ‘위안부’들이 일본 점령국 국민으로서 겪은 극악한 잔혹행위는 ‘위안부’ 제도의 범죄적 성격은 물론 일본군이 이 전쟁 범죄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중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적인 납치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문화역사자료위원회 주도로 1995년 발간된 전국 조사 보고서인 ‘일본군이 중국 침략 당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한 조사 기록집(Qin Hua Rijun baoxing zonglu)’에는 이러한 성노예화 사례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그중 한 사건은 1932년 겨울 일본 관동군 8사단 16여단 부대가 베이퍄오현 차오양시 지역을 점령했을 당시에 벌어졌다. 군대는 점령 즉시 지역 여성들을 군 막사로 납치해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고, 동시에 인근 마을의 여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임산부, 어린 소녀, 노인을 포함하여 1천 명이 넘는 현지 여성이 자신들의 집에서 강간당했다.1   베이퍄오현에서 일어난 일은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특히 1937년 난징 대학살을 기점으로는 현지 여성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삼는 일이 일본군에게는 정규 군사 행동이 되었다. 중국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강제로 납치되었다. 후난성 웨양 마을의 생존자 중 한 명인 펑주잉(Peng Zhuying, 1929년생)은 2020년 우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본군이 1938년 자신의 고향을 폭격했다고 밝혔다. 가스 폭격으로 인해 펑은 시력을 잃었고 어머니와 남동생은 사망했다. 1939년 그의 언니는 일본군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다. 1944년, 열다섯 살에 불과했던 펑도 일본군에 납치되어 한 달간 구금 상태에서 ‘위안부’ 역할을 강요당했다. 납치 당시 펑은 일본군에 의해 발에 부상을 입었다. 언니는 감금 중에 배를 찔렸다.2 펑주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한 책에 증언이 실린 12명의 생존자들은 모두 일본군에 납치되어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병사들이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납치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직접 납치에 가담하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위안소가 군 막사나 진지 안에 세워졌다. 소규모 일본군 부대가 전장 곳곳에 설치한 수많은 임시 위안소에서는 주로 현지 중국인 여성들이 노예가 되었다. 야전 부대는 계속해서 이동했으므로, 이렇듯 급조된 위안소들에서는 노예로 잡힌 여성들이 자주 교체되었고 따라서 피해자 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허베이성 사회과학원 연구원 허톈이(He Tianyi)의 조사에 따르면 1943년 말까지 일본군은 허베이성 남부에 1,103군데의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로 미뤄볼 때 중국 북부에 구축된 일본군 진지는 총 1만 군데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점령기간 동안 각 진지에서 보통 10~20명의 현지 여성을 노예로 삼았으므로, 일본군 진지 내 노예로 동원된 현지 여성의 수는 중국 북부에서만 10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였을 것이다.3 분명한 사실은 ‘위안부’는 매춘부가 아니었으며, 펑주잉과 언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위안부’ 거의 대부분이 금전적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본 점령 지역에서 납치된 많은 ‘위안부’의 가족들은 구금된 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에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산시성 우샹현 출신의 하오웨롄(Hao Yuelian)은 1943년 초여름 집에서 일본군에게 집단강간을 당했을 때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이후 하오는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난구의 일본군 진지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은 하오를 비롯한 여성과 소녀들에게 현지 남성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강제로 지켜보도록 한 후 방에 가두고 강간했다. 군인들은 전투가 없을 때마다 여성과 소녀들을 지속적으로 강간했다. 하오는 곧 심한 병에 걸렸고 하혈을 했다. 군인들이 납치해 온 다른 마을의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까지 고통은 한 달 가량이나 지속되었다. 가족들은 하오를 고문에서 풀어주기 위해 점령군에게 몸값을 지불했다. 하오는 병세가 깊어 군인들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군은 돈을 챙기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하오는 또다시 일본군에 납치되어 진지로 끌려갔다. 매일 저녁 군인들이 무리지어 와서 그를 집단 강간했다. 한 달 만에 하오의 몸은 심하게 상해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연히 마을 주민이 하오를 본 덕분에, 아버지와 오빠가 그가 갇혀 있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둘은 군인들이 없는 틈을 타 하오를 피신시켜 집으로 데려왔고, 그는 이후 몇 달간 병석에 누워 있었다.4 일본군이 점령지 주민들의 삶을 완전히 통제함에 따라 이러한 공개적 납치와 착취는 만연했다. 1930년대 초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까지 일본 제국군은 아시아에 위안소를 광범위하게 설치했고, 위안소의 대부분이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의 침략이 지속된 중국 본토에 세워졌다. 잔혹한 범죄 행위가 이러한 임시 ‘위안 시설’에서는 흔하게 일어났다. 2017년 하이난섬 바오팅현에서 필자가 만난 생존자 천롄춘(Chen Liancun)은 열여섯 살에 붙잡혀 지아마오 진지에 구금되었다. 천은 낮에는 빨래 등의 강제 노동을 했고, 밤에는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고, 기절할 때까지 구타를 당했다. 천이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일본군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천은 다시 군 막사로 납치됐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했다. ‘위안부’들의 트라우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치유되지 못했다. 일본군의 성폭력은 이들 여성들의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들 중 다수가 불임이 되었다. 2018년 여름 필자가 하오웨롄 할머니를 방문했을 당시, 할머니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할머니는 매일 밤 일본군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렸다. 할머니의 양녀는 할머니가 침대 옆에 놓아둔 칼을 보여주었다. 폭행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여전해 칼을 곁에 둔다고 했다. 그 칼을 보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필자가 방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8년 9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21세기가 2분기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하에서 자행된 잔혹행위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려는 일본의 역사 부정론자들의 집요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끊이지 않고, 여성 강간이 여전히 무력 분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세계에서 ‘위안부’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리는 일은 중요하다. 필자는 현재 ‘위안부’정의연대(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쇼아재단(Southern California Shoah Foundation), 중국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박물관(Nanjing Museum of the Site of the Lijixiang Comfort Stations in China)과 함께 중국인 ‘위안부’의 영원한 증언(Eternal Testimony)을 인터랙티브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USC쇼아재단에서 개발한 ‘증언의 차원 시스템(Dimensions in Testimony System)’을 사용하여 생존자 펑주잉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하고 표출하여, 시청자가 할머니와의 생생한 실시간 대화를 통해 그 삶의 경험에 대해 묻고 답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현재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이 프로젝트가 ‘위안부’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미래 세대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교훈을 얻고 더 이상의 반인도적 범죄를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중국인 위안부: 제국 일본 성노예의 증언』 저서는 자료센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archive814.or.kr/center/data/detail.do?controlNo=2302   각주 1. Guan Wenhua, “Rijun dui Beipiao funü de lingru” (Japanese troops’ sexual violence against women in Beipiao), in Qin Hua Rijun baoxing zonglu, ed. Li Bingxin, Xu Junyuan, and Shi Yuxin (Shijiazhuang: Hebei renmin chubanshe, 1995), 69. 2. ‘위안부’정의연대(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진행한 2020년 10월 19일자 인터뷰. 3. Peipei Qiu with Su Zhiliang and Chen Lifei, Chinese Comfort Women: Testimonies of Imperial Japan’s Sex Slaves, (London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40-41. 4. 이 이야기는 2018년 8월 5일 필자가 하오웨롄과 그 양녀와 나눈 대화 및 다음에 수록된 하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Zhang Shuangbing, Paolou li de nüren—Shanxi Rijun xingnuli diaocha shilu [Women detained in the strongholds— Investigation records on the Japanese military sex slaves in Shanxi Province](Nanjing: Jiangsu Renmin Chubanshe, 2011), 167–68.

    페이페이 치우(Peipei Qiu)

  •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1부〉
    2023년 좌담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1부〉

    지난 2월 15일,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여성인권운동가 김문숙(1927-2021)의 생애와 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가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이 설립한 부산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2004-2023)이 폐관하면서, 경상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민간기록물 조사정리 연구사업과 함께 이루어졌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소장 자료가 뜻깊은 전시로 탄생하기까지는 이 연구팀에 참여한 세 명의 대학원생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존재했다. ‘연구보조원’이나 ‘조교’라는 이름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삶과 연구자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원생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씨를 청년좌담에서 만나 보았다.  -좌담 일시: 2023년 5월 4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사진: 오늘의 나     그 시작에 대하여 Q. 안녕하세요. 각자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민경택 창원대 사학과 석사수료생이고, 연구 주제는 가야사입니다. 가야 중 비화가야로 발전하는 삼한시대의 불사국이라는 국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구 주제가 지역사다 보니 위치가 특정되는데 비화가야와 불사국은 창녕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경남학, 경남 지역사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작업과 전시 작업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김효영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석사수료생입니다. 학사 때도 국제관계학을 공부했고, 석사도 같은 전공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졸업논문을 쓰는 중인데, 동아시아 트랜스내셔널 인식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어요. 제가 참여했었던 ‘walk9’ 한국 순례를 중심으로 주체들의 만남, 접속을 통해 형성된 ‘동아시아인’ 의식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창원에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도 계셔서 어렸을 때부터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대학원에 들어온 후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문경희 교수님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장찬영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석사수료생입니다. 지금은 민족적 기억, 집단 기억의 형성, 기억의 과정에서 생기는 망각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도 문경희 교수님 덕분에 일본군‘위안부’ 청년 포럼에 참여했고, 이후 시민단체와 같이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교수님께서 구술사 작업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Q.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회를 비롯하여, 경상도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 연구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장찬영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분들이 겪은 트라우마나 기억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와중에 교수님께서 포럼 참석을 권유해주셨어요. 2018년 마창진시민모임에서 개최한 포럼(일본군 ‘위안부’ 주제의 청년·대학생 국제포럼: 여성인권과 평화의 씨앗 뿌리기)이었죠. 포럼에 참여하고 다른 나라(대만, 일본, 필리핀, 미국)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안부’ 문제의 공유 방식과 관련 기억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 후로는 수업을 통해 배우다가 대학원에 들어와 기억을 중심으로 공부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기억의 확산과 민족적 기억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억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주류 역사가 아닌 개인이 갖고 있는 기억들,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교수님께서 ‘위안부’ 프로젝트를 진행하실 때 구술사 작업에 따라갈 기회를 주셔서 일반 시민들에겐 ‘위안부’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고, 또 ‘위안부’에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들에겐 어떤 기억이 형성되고 재현되는지 알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김효영 석사 생활을 하면서 찬영 씨와 거의 늘 함께했기 때문에 비슷한 과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홈스쿨링을 해서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여러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당시 써냈던 신청서를 보면 ‘저는 학교를 안 다녀서 시간이 많은데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습니다’라고 했더라고요. 생각해보면 활동에 참가할 때마다 뚜렷한 의식 없이, 단순히 좋은 활동이라 참여했던 거예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뵙는 거나 수요집회에 갔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찬영 씨와 유사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배우게 되면서 구술사 작업에 따라갈 기회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제가 이 문제를 안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많이 배우고 싶었고, 그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민경택 학부 때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인터뷰를 기록하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경남의 노동자나 청년 인터뷰를 진행해오면서 이야기를 듣는 일에 익숙해졌고, 자연스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의 이야기도 듣게 됐어요. 피해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경남 지역이다 보니 그분들의 인식과 고충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Q. 선생님들의 세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던 때는 아니지요?  김효영 피해자의 증언보다는 ‘위안부’에 관한 영화나 소설이 많이 나오던 시기라 친구들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장찬영 소설이나 영화처럼 뉴스 보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의 존재가 이야기되던 때였던 것 같은데, 자극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보니 충격을 받으며 이 문제를 알게 됐던 것 같아요.    Q. 세 분은 고(故) 김문숙 이사장님이 부산에 설립하신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던 방대한 자료의 목록화 작업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시작은 어떠했고 어떤 기준에서 진행됐는지 그 과정과 애로사항을 말씀해주시죠.    장찬영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에, 문경희 교수님이 진행하시던 인터뷰를 따라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역사관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이런 프로젝트로 이어지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프로젝트의 시작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3일에 불과했습니다. 그토록 방대한 양의 자료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새벽 4시 반에 연구 책임자이신 창원대 사학과 신동규 교수님의 차를 타고 역사관이 있는 부산 수영구로 갔어요. 첫째 날엔 자료 파악을 하며 번호를 붙였고, 둘째 날엔 짐을 쌀 준비를 하고, 셋째 날엔 이삿짐을 싸서 창원으로 보냈어요. 모든 것이 3일 안에 이뤄졌습니다. 역사관 건물을 허물어야 해서 빨리 나가야 했거든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어떤 자료가 있는지 더 꼼꼼하게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작업이 끝나면 저녁 10~11시가 됐고, 신동규 교수님이 저희를 데리러 오셔서 다시 창원으로 넘어갔어요. 리스트 작업도 모두 수기로 했는데, 자료에 번호를 붙이고, 그 자료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었는지 일일이 손으로 적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자료를 5톤 트럭 2대에 실어 창원대 박물관으로 갖고 왔어요. 그게 4월이었고, 이후에는 수장고에서의 작업이 시작됐죠.      김효영 신동규 연구책임자님이 첫날 저희에게 “몸으로 굴러야 하는 일이니 각오해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괜찮습니다. 저 힘셉니다!” 했는데 그렇게 답한 게 후회될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웃음)   장찬영 이상할 정도로 뭐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문을 열면 온갖 박스와 서류와 종이 뭉치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래서 ‘이게 끝이 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민경택 이런 종류의 작업을 사학과에서는 많이 하긴 합니다. 자료가 방대하면 그만큼 좋은 자료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되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따라주지 않았죠. 이 서류가 역사관의 어느 곳에서 발견됐는지 그 배치 맥락까지 기록해두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Q. 김문숙 이사장님이 2021년에 돌아가신 후 2023년에 건물이 철거되면서 그 자료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리되어야 하는 운명이었고, 또 그것들이 창원으로 넘어오게 됐다는 점이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장찬영 다들 열심히 해주셨어요. 힘들어도 짜증 내는 분들이 아무도 없었죠. 어떻게 해서든 이 일을 잘 끝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도 “거기 얼마나 됐어요? 빨리 끝내고 그쪽으로 갈게요.” 이런 종류의 대화가 오갔어요. 그래서 ‘이분들은 정말 헌신적이구나,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이분들’은 누구인가요?    장찬영 연구보조원들입니다. 그분들은 그날 처음 뵈어 서로를 소개하거나 깊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거든요.    김효영 계명대의 손선희(박사수료생), 성수진(석사생) 님과 경상대의 고명진(석사생) 님, 그리고 저희 3명까지 총 6명이 함께했습니다. 교수님들도 강의를 마치고 오셔서 세밀하게 검토해주셨고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체계적인 매뉴얼이 없었다는 거예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현장에서 매뉴얼을 만들다 보니 아쉬운 점이 있었죠.   장찬영 매뉴얼이 부족하다 보니 ‘일단 다 가져오자’라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김주용 창원대박물관 학예실장님께서 “버려도 창원에서 버리자”라고 말씀하셔서 작은 것 하나까지 다 가져왔어요. 심지어 벽에 붙어있던 그림까지 떼서 가져왔습니다.        Q. 그 자료들은 모두 어디에 저장해두었나요?    김효영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있어요. 시간이 있었다면 상세하게 읽어보면서 중요한 자료를 더 많이 도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Q. 구술조사와 전시 작업을 병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장찬영 대구, 경남 지역에서 피해자분들을 도와드리고 ‘위안부’ 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이었어요.   김효영 연구보조원 중에서 그 작업은 대부분 경택 씨가 하셨습니다.    Q. 구술은 이 전시 작업과 별개였나요?    장찬영 이 사업 하나에 전시, 아카이빙, 구술조사 3가지가 모두 결합돼 있었어요.    민경택 현장에 나가 직접 구술 작업에 참여하진 않았고, 대체로 영상을 보며 녹취록을 푸는 일을 했습니다.      Q. 구술채록은 자료를 새로 수집하는 작업이라면, 전시는 기존의 자료를 아카이빙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같은 주제 아래서 진행됐지만 두 개가 다른 결의 작업 방식인 만큼 차이점을 느끼신 게 있을까요?    민경택 구술채록 작업은 정해진 시간 안에 진행되다 보니 일정을 잘 맞춰야 하고, 짧은 시간 안에 높은 퀄리티의 답변을 얻어내야 해서 매 순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목록화 작업은 그 반대인 것 같고요. 이건 다른 얘기이지만, 이번에 구술채록 작업을 하며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구술 면담자들이 대체로 부채 의식을 갖고 계셨다는 것인데요, 이분들은 자신을 피해자들의 자식 혹은 조카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죄송하다는 마음을 갖고 계신 것 같았어요. 반면 김문숙 선생님은 자신을 피해자들의 친구라 생각하고 ‘나는 너희들과 함께 간다’라는 마음으로 운동에 힘 쏟으셨던 것 같습니다.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웹진 <결> 편집팀

  •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2부〉
    2023년 좌담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2부〉

    지난 2월 15일,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여성인권운동가 김문숙(1927-2021)의 생애와 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가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이 설립한 부산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2004-2023)이 폐관하면서, 경상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민간기록물 조사정리 연구사업과 함께 이루어졌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소장 자료가 뜻깊은 전시로 탄생하기까지는 이 연구팀에 참여한 세 명의 대학원생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존재했다. ‘연구보조원’이나 ‘조교’라는 이름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삶과 연구자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원생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씨를 청년좌담에서 만나 보았다.  -좌담 일시: 2023년 5월 4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사진: 오늘의 나   고(故) 김문숙을 만나다 Q. 여러분이 참여한 작업이 전시로 구현됐을 때의 소감은 어떠했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남겨진 고민이 있으신가요? 장찬영 김문숙 이사장님의 책상을 재현하기 위해 효영 씨와 노력했던 게 떠올라요. 역사관에 ‘작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사장님께서 학생들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두신 곳이었어요. 그 공간과 사무실에 있던 책까지 모두 박물관으로 가지고 왔는데도 전시 공간이 다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상자를 계속 가져와 그 안의 책들로 공간을 꾸몄죠. 그러다 보니 전시관 한가운데에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신동규 교수님이 그걸 보고 “이 많은 걸 너희 둘이서 다 한 거야?”라고 물어보셨는데 교수님도 책이 그만큼이나 필요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준비 과정에서는 그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웃음) 이사장님의 신문 스크랩을 모아둔 상자를 보면서 개인으로서 정말 대단한 업적을 남기셨다는 걸 깨달았고요.   김효영 전시에 쓰인 영상도 저희가 대부분 작업했는데 전시 당일까지 “이 장면은 빼는 게 좋겠다, 넣는 게 좋겠다”라는 식으로 의견이 달랐어요. 그래서 오픈 10분 전에 급하게 장면을 빼고 틀었던 게 기억납니다. ‘나 때문에 망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떨리기도 했고,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면서는 절대 해볼 수 없는 경험을 했어요. (웃음) 민경택 자료 정리하면서 봉투가 하나 있기에 보니까 이사장님이 친구분에게 쓰신 편지였어요. ‘아, 애국하기 너무 힘들다. 지친다. 쉬고 싶다. 근데 결국은 해야 한다.’ 이러한 글을 친구분들과 주고받은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애국이란 단어가 신기하기도 했고, 이사장님의 약한 모습을 보니 인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찬영 자료를 옮기고 전시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매 순간이 에피소드였어요.   Q. 창원에서 부산의 역사관까지 오가며 쉴 새 없이 일하면서도 모두 싫은 내색 없이 열심히 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나요?  김효영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자료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작업을 시작하면 집중해서 잘 정리하고 싶다는 욕심이 났습니다. 경택 씨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모든 일에 참여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 생각 없이 하면 됩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민경택 역사관에서 자료들을 정리하며 옮기는 과정에서 ‘이분은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하셨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 또한 그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세가 아흔이 넘으신 후에도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건가, 이렇게까지 집중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던 분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지역사회는 그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는지 묻게 되었죠. 장찬영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 알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역사관에 처음 갔을 땐 관부재판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몰랐죠.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김문숙 이사장님이 이 공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묻고, 사진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김효영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이사장님의 운동사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사장님은 호주제부터 시작해 모든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실제로 일본에서 성폭력 예방 수업을 듣고 강사 수료증을 받고, 국제연대대회에도 참여하셨죠. 여성 운동사를 직접 겪고 만들어나가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Q. 이 연구 사업에 여러 이유로 참여하게 되셨는데, 참여 전과 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 것을 느끼시나요?  김효영 이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나와는 관련 없는 문제로 여겼는데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정돈할 수 있게 됐어요. 이 문제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내가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번 작업 이후 이 운동이 수많은 분들의 활동과 노력, 연대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 피해자분들이 계속해서 증명하는 과정을 통해 인정과 관심을 받게 된 걸 보며 이 문제가 나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진정으로 ‘위안부’ 문제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민경택 이전에는 ‘위안부’ 운동이라 하면 수요집회, 나눔의 집 행사 등을 중심으로 생각했는데,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구술사를 들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1세대 활동가분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남들과 다름없이 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노력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 변화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성폭력 문제와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 변화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찬영 첫 번째로는, 이야기되지 않은 기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다란 주류담론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 정말 많아요. 저 역시 관부재판을 알지 못했고 교육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예요. 일본군‘위안부’라는 문제 안에는 수백 가지의 이야기가 있고,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기억이기에 문제의 핵심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할머니라는 호칭이 국제적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고유 명사(Granma 또는 Halmoni)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역사관에서 가져온 자료에는 피해자분들의 사진도 있었는데, 그 사진들을 보면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많았어요. 웃고 계시거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피해자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깨졌습니다. 힘든 경험을 하셨지만 이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냥 ‘할머니’로 보이는 것이었겠구나, 그렇기에 우리가 이분들을 할머니로 부르는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걸 가장 잘 이해해주신 게 김문숙 이사장님과 한일 시민단체였고요. ‘위안부’ 문제의 해결방안이 무엇이냐 물으면 거창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국가 차원에서의 중재와 일본의 사죄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시민들끼리 연대하고, 할머니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피해를 이해하는 것 또한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Q. 세 분은 논문을 준비 중인 대학원생이시죠. 지난 1년 동안 이 사업의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하면서 굉장히 바쁘셨을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 벼려지는 건 좋지만 시간이 부족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이 일이 현재 공부하고 계신 것과는 어떤 접점이 있나요?  장찬영 기억과 기억의 재현,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를 주제로 삼아 졸업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폭력, 트라우마가 왜 우리 민족의 기억 안에 존재하고, 이것이 한일관계나 ‘위안부’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위안부’ 문제 안에서 우리가 가진 기억의 재현이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는지 쓰고 있습니다. 김효영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며 거대 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목격할 수 있었고, 실천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주체들의 실천 의지가 나중에 더 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것을 제 졸업논문에도 적용시켜 실천들의 연결고리, 접점, 접속의 지점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민경택 고대사를 전공으로 삼고 있어 이 프로젝트와 제 학위논문 간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다만, 삼한 시대에 있었던 변진한에 24개 정도 되는 나라가 영남지역에 분포돼있었고, 지금의 시군 분포와 유사할 거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가장 많은 곳이 경상도이고, 제 학문적 관심사가 지역이다 보니 피해자분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역, 공간에 대한 궁금증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삶 전체가 궁금하고,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에는 어떤 유소년기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요. 그것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분들이 살았던 지역의 산과 강, 농산물, 풍속, 민속, 축제 등도 유효한 정보가 됩니다. 그것들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그분들의 삶이 어떤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뤄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웹진 <결> 편집팀

  •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3부〉
    2023년 좌담 피, 땀, 눈물: 일본군‘위안부’ 풀뿌리 운동사의 흔적을 매만지며 〈3부〉

    지난 2월 15일,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여성인권운동가 김문숙(1927-2021)의 생애와 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가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이 설립한 부산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2004-2023)이 폐관하면서, 경상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민간기록물 조사정리 연구사업과 함께 이루어졌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소장 자료가 뜻깊은 전시로 탄생하기까지는 이 연구팀에 참여한 세 명의 대학원생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존재했다. ‘연구보조원’이나 ‘조교’라는 이름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삶과 연구자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원생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씨를 청년좌담에서 만나 보았다.  -좌담 일시: 2023년 5월 4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사진: 오늘의 나   ‘앞으로’를 바라보며  Q. 민경택 씨는 노동/청년/인권 관련 연구사업에 다수 참여해 오셨는데요, 이러한 문제의식을 원래 가지고 계셨는지요. 그리고 2월 전시 개관기념 학술대회에서 “대한해협을 중심으로 본 고대 한일관계의 태동”을 발표 주제로 잡은 데에는, 대한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창원의 비평지리적 위치성도 한몫했을까요?  민경택 제 고향이 창원이기에 노동/청년/인권에 더 강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창원이 제조업 중심의 도시이다 보니 많은 사고 소식을 지역 뉴스로 접하게 됩니다. 지역 청년으로 살다 보면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데 성인이 되고 나면 친구들이 없어요. 모두 서울로 가버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수도권으로 가서 잘 지내는 게 아니라 대부분 힘들어해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내려오라고 하면 거길 왜 다시 가냐고 합니다. 이를 통해 지역에 대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됐고, 이 부분에 대해 공부해보면 재미있겠다 싶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대한해협을 중심으로 본 고대 한일관계의 태동”이란 주제를 잡은 것은, 고대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더 다양한 해석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과는 신석기 시대부터 교류의 흔적이 확인되고 지리적으로도 가깝죠. 관부재판이 전시의 주제였던 터라 고대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가 어떻게 연결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일본 관련 글이 등장하는 연대를 정리해보니 여름을 중심으로 교류했더라고요. 여름에는 쿠로시오 해류가 강해져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해양 루트가 열렸거든요. 그래서 더 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일본의 토기도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대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관부재판을 바라볼 땐 민족적인 관점보다는 연대가 부각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적인 감정을 빼고 바라보기 위해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개념보다는 그 사이에 놓여있는 대한해협을 봤습니다. Q. 김효영 씨는 관심분야가 정체성/젠더/네트워크/지역이라고 하셨는데요. 지난 2월의 전시 개관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신 논문(“김문숙과 부산 <여성의 전화>: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부산 여성의 전화 상담”) 내용을 지역 여성 운동사 연구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나눠 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효영 논문을 쓰기 위해 김문숙 이사장님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제대로 된 자료가 많지 않았어요.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건 영화 〈허스토리〉 말고는 거의 전무했고, 이사장님과 관련된 연혁도 제각기였습니다. 논문에는 제대로 나와 있겠지 싶어 찾아봤지만 관련 논문이 없을뿐더러 지역 여성사에 관한 논문 자체가 굉장히 적었습니다. 이게 왜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까 싶은 활동이 정말 많아요. 서울에서의 반성폭력 의제 관련 운동이 지역에서는 다른 형태로 일어났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지역 여성 운동사에 관한 연구를 보면서 지역마다 분절된 여성 운동사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Q. 장찬영 씨는 정체성/기억 및 트라우마, 재현의 정치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발표논문 “영화 ‘허스토리’의 재현: 역사적 사실과 비역사적 내러티브의 경합”의 문제의식을 나눠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논문을 준비하시면서 〈전후책임을 묻는다‧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사무국장 하나후사 도시오 님과 〈위안부 문제에 대처하는 후쿠오카 네트워크〉 총무 하나후사 에미코 님 인터뷰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는지 후일담을 듣고 싶습니다. 장찬영 영화를 보고 논문을 쓰면서 관부재판에 대해 알게 됐고, 그러면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당사자에게 물어보자는 생각으로 하나후사 부부의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두 분께서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셔서 많은 부분이 해결됐던 것 같습니다. 논문의 주된 내용은 영화가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사실이 아닌 내용을 담고 있는가에 대해 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논문을 쓰고 발표까지 끝내고 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재현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성폭력 피해의 상징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피해자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인가.’ 소녀상은 할머니들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한데, 할머니들은 이 소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우리는 이 재현을 통해 무엇을 기억하고 또 어떤 담론을 만들어내고 싶은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보면서 ‘왜 영화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 것일까’를 고민했습니다.    Q. 이번 좌담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전시에 참여하셨다는 이력도 중요했지만, 대학원생이라는 위치도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각자 대학원 진학의 계기와 하루 일과를 귀띔해주실 수 있을지요. 또 대학원생으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장찬영 뭐든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한 성격이라 오늘도 좌담 끝난 후에 밥 먹고 운동하러 갈 것 같아요. 평균적인 일상을 말씀드리면, 최근에는 하루 종일 책 보고 논문을 쓰고 있어요.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그랬고 그것 이외에도 ‘왜’를 던지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죠. 알아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공부를 통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그것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김효영 저는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홈스쿨링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시위에도 많이 참여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시위하러 나가면 어른들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또래 친구를 만나보고 싶다. 대학에 가면 친구를 만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대학 진학을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일본군‘위안부’ 청년 교류 국제 프로그램에서 찬영 씨를 만나게 됐고,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찬영 씨가 자신이 다니던 창원대 국제관계학과를 추천해줬어요. 그렇게 창원대에 오게 됐는데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왔던 경험을 국제관계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구나, 내가 갔던 나라가 이렇게 생겼구나’ 싶어서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재미있다 보니 더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까지 오게 됐어요. 요즘에는 졸업논문을 쓰고 있고, 논문을 위한 인터뷰를 준비 중입니다.    민경택 경남학이라는 큰 틀에서 내 고향을 한번 공부해보자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하루 일과는, 보통 일어나면 씻고 학교 와서 도서관에 갑니다. 요즘에는 논문을 쓰다가 막히면 나가서 걷곤 하는데 하루에 3~4시간씩 산책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갑니다.  Q.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1세대 활동가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계십니다. 학문 후속 세대, 신진 연구자로서 앞으로 지역에서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연구와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김효영 지금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아직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문숙 이사장님이 주도했던 지역 운동사에 직접 참여했던 활동가분들과 교류하며 운동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찬영 저희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기억을 전달받은 사람들이고, 그 경험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달받은 기억만으로 그분들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기에, 기억을 토대로 하되 이분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다양한 방식과 분야, 학제들 속에서 문제를 너무 거시적으로 또는 1차원적으로만 보지 말고 다양한 방법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관부재판처럼 시민연대를 통해 문제 해결이 이뤄질 수도 있는 만큼 다양한 방법과 시도를 통해 문제에 접근하는 연구와 활동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민경택 구술채록 작업을 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게 할머니들께서 좋아하셨던 노래, 음식, 혹은 그분들의 일상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접했던 건 지역 활동가들이죠. 그래서 그분들의 구술채록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분들이 돌아가시는 상황에서 활동가분들의 기억이나 활동이 그려낼 수 있는 할머니들의 삶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궁금해요.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시민들 간의 소통, 이해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부재판이란 좋은 사례가 있듯이 그런 식의 활동이나 연구가 이뤄지면 해결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향후 연구하고 싶은 주제와 졸업 이후 진로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김효영 옛날에는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신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계속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있고, 제가 계속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지역, 정체성, 젠더, 네트워크인데 그게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싶습니다.    장찬영 기억, 재현, 트라우마에 대해 더 깊게 연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 쓸수록 제가 많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상태로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게 맞나 고민됩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부분도 걱정되고요.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여러 가지로 고민이 돼서 추후 계획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민경택 연구를 하게 된다면 주제는 비화가야로 확정할 것 같습니다. 졸업 이후 진로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학위논문을 쓰다 보니 졸업 이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졸업 이후에 뭘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지금은 논문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민경택, 장찬영, 웹진 <결> 편집팀

페이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