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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전 세계적인 성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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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이하 코협)는 2020년 2월 베를린 미테구 ‘도시공간 예술 위원회’에 소녀상 설치를 신청하여 2020년 7월에 공식 허가를 받았다. 소녀상 설치의 주목적인 김학순 님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2020년 8월 14일에 제막을 하려고 했으나, 도로공사로 인해 6주 후인 2020년 9월 28일,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에서 공식적으로 제막식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제막 하루 뒤인 9월 29일,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현 후생노동상)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번 결정은 정부의 입장과 지금까지의 조치와 맞지 않아 대단히 유감스러운 결정이며 (일본) 정부로서는 계속 (독일의) 여러 관계자에게 접근해 일본 정부 입장을 설명하고 동상(소녀상)의 신속한 철거를 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독일 외에도 세계 각국에 소녀상이 설치될 경우 “지금까지 일본의 움직임에 따라 실제로 (소녀상 설치가) 수습된 사례도 있다”며 “계속 국제사회로부터 정당한 평가와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향후에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0월 1일 산케이 신문은 일본의 모테기 외무상이 파리에서 독일 하이코 마스 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되면, 베를린 소녀상 철거를 요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고위급 관리까지 동원하여 소녀상 철거를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전에는 일본 대사가 현지에서 관계자들과 암암리에 만나 철거를 요청해왔었다.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당황한 독일 외교부, 베를린시 정부는 미테구청장에게 압력을 가해 10월 7일 시급히 철거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공문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리아협의회는 미해결된 한일 갈등 문제에 독일을 끌어들여 한국의 편을 들도록 하는 난감한 상황을 일으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도 일본군과 같은 죄를 범했는데 일본만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 비문에 문제가 있고, 그 외에도 100개 국가 출신의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켜 평화로운 공존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7일 안에 소녀상을 철거하지 않으면 250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 함께 담겼다. 처음 철거 명령을 받았을 때는 부당함에 눈앞이 깜깜해지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소녀상을 세우기 위해 2년간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순식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소녀상을 설치한 지 꼭 10일 만이었다. 도시 공간에 조형물을 세우려면 건물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코협은 2018년도에 2층 사무실에서 1층으로 이사를 하고, 일본군‘위안부’ 박물관 설립을 계획했다. 박물관 설립을 위한 준비 과정의 일환으로 2019년 1월 사진전과 예술 작품 전시회를 열어 정치가들을 초청했다. 미테구 도시공간 예술위 실무자가 전시장을 방문하고 소녀상 설치를 위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우리는 1년간 정성 들여 신청서를 준비했다. 더하여, 지역 주민들과 연대해 소녀상 설치에 대한 공식 허가를 받게 되었다. 코협과 같은 작은 단체에게는 1.5톤에 달하는 동상을 한국에서 독일로 가져오는 과정도 큰 부담이었기에 철거 명령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철거 명령이 떨어진 순간 지인을 통해 행정 전문 변호사를 추천받아 철거 하루 전인 10월 13일 베를린 행정 재판소에 가처분 신청서를 아슬아슬하게 제출해 놓았다. 일단 재판에서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소녀상이 철거되지 못한다고 했다. 동시에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렸다. 수십 년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한일 관계에 눈이 밝은 타츠 신문사의 스벤 한센 동아시아 편집장에게 늦은 밤 직접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상황을 알렸다. 한센 편집장이 첫 번째로 한 말은, 독일은 지방자치가 강해 중앙에서 지시를 내려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몇 주간 수차례 통화하며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진보 일간지인 타츠에 소녀상 관련 기사가 첫 번째로 보도되었고, 덕분에 명확한 상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는 구의회 의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보도에 이어 베를리너 차이퉁, 타게스 슈피겔 등 다수의 베를린 지역 신문사뿐만 아니라, 쥐트 도이췌 차이퉁과 같은 독일 전역 언론사 및 방송사, 차후 파이낸셜 타임스 및 더 네이션과 같은 영어권 신문에서까지 독일 미테구 사태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줄지어 보도되었다. 철거 명령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 역시 막강했다. 베를린 미테 지역구의 녹색당, 사민당 그리고 좌파당에서 즉시 반발했다. 베를린 예술인 협회에서도 표현의 자유 침범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외에 저명인사, 교수, 학자, 일반인들 모두 미테구청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한 한인 유학생이 소녀상 철거 반대 온라인 캠페인을 올리자 삽시간에 9000개 이상의 서명이 모였으며, 코협도 공개 편지 서명을 시작해 3700개의 성명을 모았다. 10월 13일, 기자회견과 시위를 이틀 만에 준비했다. 한국, 독일, 일본 언론사가 몰려오고 낮 1시임에도 불구하고 300명 이상의 베를린 시민이 소녀상 앞에서 미테구청까지 가두 시위를 하였다. 집회 하루 전날 스테판 폰 다셀 미테구청장의 비서에게 성명서를 전달했다. 미테구청장은 시위 현장에 나타나 어차피 가처분 신청으로 소녀상 철거 명령이 보류되었으니,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일본 대사관과 코협의 관련자와 타협을 하겠다고 하여 철거 위기는 모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초 미테구청장은 철거 명령을 철회했고, 코협도 가처분 신청을 취하하여 재판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단체 ‘극우를 반대하는 할머니(오마스 게겐 레히츠)’가 구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 추운 겨울, 구의회 앞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촛불 집회를 열었다. 한인 교민들과 한인 음악가들은 자발적으로 소녀상 앞에서 연주하며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녀상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담긴, 전 세계에서 전달된 이메일은 마치 큰 파도와 같이 베를린 모아빗으로 몰려와 정치가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소녀상이 공공장소에 세워지는 만큼, 법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미테 지역구 의원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녹색당, 사민당, 좌파당, 진보당이 합심하여 지난 2년간 5회 이상 소녀상 영구 존치안을 과반수로 통과시켰다. 사실 도시공간 예술위에서는 1년 허가를 낸 후 주변 반응을 보고 1년, 2년 계속 연장하니 별 걱정 말라고 했다. 일본 정부의 압력과 미테구청장의 부당한 철거 명령이 소녀상 영구 존치에 오히려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역사는 우연일까 아니면 이미 정해진 곳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지난 2년 동안 소녀상 영구 존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미테구청장이었다. 그가 소녀상 건으로 일본 대사관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어 그쪽의 눈치를 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소녀상 영구 존치를 적극 반대했다. 그런데 다셀 구청장이 지난 9월 인사 비리로 갑자기 물러나게 됐다. 뒤이어 새롭게 선출된 여성 구청장인 레믈링어는 지난 11월 초 평화의 소녀상 존치 2년 연장을 발표했고, 이 기간 동안 소녀상이 공식 기념비가 되는 것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베를린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려는 야비함을 알렸고, 이어 영구 존치까지 이끌어냈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차세대 교육이 저절로 이뤄지게 된 것이다. 지난 2년간, 초기에는 거의 매일, 최근에는 2주일에 한 번꼴로 독일 고등학생부터 학사, 석사, 박사 과정 학생, 기자, 학자, 여성단체, 인권단체들까지 우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오고 있다. 베를린 소녀상에 행해진 부당한 사실이 알려진 뒤, 올 1월에는 독일 카셀 대학 총학생회장에게서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에 김서경, 김운성 작가 부부가 소녀상을 기증해주었다. 더하여, 독일 시민과 TBS 라디오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힘으로 운송비까지 모금되어 영구 존치에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은 “다시는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전 세계를 다니며 증언하시던 할머님들의 뜻 덕분이기에 더욱 큰 만족감과 기쁨을 느낀다. 한국 시민들의 모금으로 일본군‘위안부’ 박물관을 설립하고 현재 밤낮으로 청소년과 시민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뒤돌아보면,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단순히 반일, 또는 민족주의적인 산물이 아니라, 식민 지배와 가부장제하에서 가장 하위 주체인 소녀들과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탈식민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인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불타는 정의감으로 베를린까지 소녀상이 오게 되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자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한 사례로서 베를린의 많은 여성단체에 힘이 되고 있다. 베를린에서 30년 넘게 운동을 펼쳐온 독일, 한국, 일본 여성 단체들의 꾸준한 연대의 성과이기도 하다. 소녀상 영구 존치 과정에 큰 힘이 된 것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시작된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의 가치)’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독일 사회의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이 이뤄졌다. 동시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어, 베를린에서는 지난 3년간 반식민주의, 반인종차별, 반성차별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이처럼 거대한 역사적 변화의 물결 덕분에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의식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제 평화의 소녀상은 독일 사회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독일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독일의 필요에 의해 독일로 오게 된 파독 간호사, 광부와 같은 ‘인력’의 1세, 2세, 3세들이 독일 영토에서 펼치는 활동은 독일의 역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가? 독일로 이주해온 해외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식민 지배, 분단, 독재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독일까지 오게 되었고, 이때 그들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기억 또한 함께 가지고 왔다. 평화의 소녀상은 이제 여성 인권의 상징으로, 베를린 미테구 모아빗에서 수많은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평화를 전파하게 되었다. 아픈 자에 공감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평화이다. 베를린 주민들은 이제 평화의 소녀상을 향해 외친다. “평화의 소녀상은 우리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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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2022년 제2차 웹진 〈결〉 및 뉴스레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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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웹진 <결>은 그동안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 더욱 의미있고 알찬 웹진으로 거듭나기 위해 지난 8~9월 1차 독자만족도 조사에 이어, 11월 2주간 제2차 독자만족도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참여해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소중한 의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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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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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와 동시대인의 죽음 앞에서 외할머니의 100살 생신에 다녀왔다. “내가 100살이래”라며 환하게 웃으시는데, 한 세기를 살아낸 그 작고 늙은 몸이 부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1922년생이면 일본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로 끌려갈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최근 2~3년간 ‘위안부’ 생존자만이 아니라,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도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세기의 저물어감이란, 당사자뿐 아니라 당사자와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려 했던 동시대인들의 죽음과 함께이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직전 도망쳤던 경험을 지니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활동을 펼쳐 온 윤정옥은 1925년생이고[1], 윤정옥과 함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었던 여성학자 이효재는 1925년생으로 20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위안부’의 모습을 기록해 온 재일조선인 박수남은 1935년생이다. 평생을 식민주의·전쟁·가부장제·자본주의와 대결하며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착취와 (성)폭력을 알리는 예술-운동을 펼쳐온 도미야마 다에코는 1921년생으로, 100세를 맞이한 2021년에 세상을 떴다. 그의 작업 전체상이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2021년 3월 12일~6월 30일, 이후 8월 30일까지 연장)에서 소개되던 중이었다. 올해 5월, 1924년생인 김양주 님이 별세하면서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는 11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적 경험은 세어질 수 없는 일생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녀들 주변에는 간발의 차이로 끌려가지 않았던 여성들, 위안소를 주변에서 목격했던 오키나와 주민들[2], 구조적 가해성을 깨닫고 ‘위안부’의 피해를 알리기 위한 예술 운동을 펼쳤던 도미야마 다에코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세어질 수 없는 경험들도 있다.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이 ‘위안부’ 경험을 증언할 당사자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한명 한명의 자리에서 어떠한 미래의 기억/기록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현재적 물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동시대인들과의 연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일본군‘위안부’의 증언과 경험에 대해서 여러 형태의 재현이 시도되고 있는 것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당사자성’에 시간, 공간, 존재의 이행을 삽입하는 것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피해를 직접 경험하지도, 당사자와 친밀하지도 않은 위치에서 ‘위안부’의 경험에 대한 포스트 메모리[3]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도미야마 다에코가 ‘위안부’의 삶에 공감하며 벌였던 예술-운동은, 당사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는 비체험자의 위치에서, 뒤늦게 당사자와 마주한 가해자의 위치에서 그 간극을 극복하고 연결되고자 형식과 내용을 혁신했던 과정이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당사자가 사라질 시대의 재현을 향해,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석판화와 슬라이드: 어둠을 표현하고 장르를 파격하고 운동을 촉발하다 첫 번째 물음. 새로운 기술과 형식의 도입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도미야마의 표현법은 당대의 문제와 첨예하게 싸운 결과물이다. 40년대에는 전쟁에 대한 거부를, 50년대에는 탄광 노동자의 투쟁을, 60년대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탈식민을 향한 몸짓을, 70년대에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80년대에는 광주의 들끓는 저항적 힘에 대한 공감을, 80~90년대에는 일본군‘위안부’의 고통을, 2000년대에는 911테러 속 지워진 팔레스타인 난민과 팔려 간 아시아 여성들을, 2010년대에는 3.11의 재난 속 ‘자연’의 모습을 그렸다. 메타포를 거부하는 이 예술-운동을 관통하는 것은, 1937년 하얼빈의 여학생 시절 마주했던 식민주의와 전쟁의 참혹함이다.[4] 거리에 굴러다니던 시체, 버려지고 팔리는 아이들, 매독으로 얼굴이 망가진 채 쓰레기 더미에서 자는 여성을 마주하며 등교했던 도미야마는, “이건 얼마나 어두운, 얼마나 깊은 어둠인가…”라고 전율했다.[5] 이 원체험은 1937년이란 시간, 하얼빈이란 공간, 개인화된 공포에 갇히지 않고, 식민주의·자본주의·전쟁·가부장제로 인한 폭력과 고통에 저항하는 사건과 마주할 때마다 떠올라 매 순간 변형되며, “포스트임페리얼/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을 “마치 자기 일처럼 인식”할 수 있는 힘이 된다.[6] 석판화와 슬라이드는 바로 이러한 식민주의·자본주의·전쟁·가부장제로 인한 어둠과 슬픔을 담아내기 위해 고심한 기술이자 형식으로, 주류 미술계의 문법에 파격을 가했다. 먼저 석판화(Lithograph)를 보자. 도미야마는 일본인이라는 가해자의 위치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어둠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석판화를 선택한다. 츠치모토 노리아키가 도미야마 다에코를 찍은 영화 〈튀어라 봉선화: 나의 지쿠호 나의 조선〉[7]은 “이 영화를 지쿠호 탄전과 그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에게 바친다”는 문구로 시작한다.(봉선화/00:10) 첫 장면에서 츠치모토는 도미야마에게 왜 그렇게 어둠에 천착하는가를 질문한다. 그러자 도미야마는 자신은 일본인이지만 식민지 전쟁 당시 만주와 조선에서 봤던 일본인들을 정말 증오했다고 말한다.(봉선화/01:10) 그리고 “어떤 조선인(某鮮人)”이라고 적힌, 탄광에서 사망한 무명의 조선인 유골과 만났을 때의 전율을 고백한다.[8] 그 유골 앞에서 화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제동원되어 지쿠호 탄광에 묻힌 조선인 광부들의 “깊은 고독과 한의 소리를 듣”고, “조선인의 뼈를 기리고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9] 그러나 유화로는 이 짙은 어둠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도미야마는 당시 미술계의 주류였던 유화를 버리고, 1971년 여름 석판화 기계를 주문한다.[10] 처음 탄광을 그리고자 했을 때는 말이죠, 유화로 그렸기 때문에 10년간 계속 실패했어요. 역시 그것을요 처음부터 흑백 리토그래프로 그렸더라면 더 많이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러한 검은색은 안 나오죠. 다른 것으로는요.(봉선화/7:00) 〈튀어라 봉선화〉에서 클로즈업되는 작품 〈땅 깊은 데서의 원한〉, 〈신세타령〉 연작, 〈지쿠호 탄전〉 연작, 〈남태평양 해저에서〉에는, 깊은 어둠 속에 묻힌 하얀 뼈나 해골이 두드러진다. 일본 내부에 불발탄처럼 숨어 있는 조선인의 뼈-가해의 증거-와 대면하면서 전후 일본의 번영이 어떤 고통 위에 세워진 것인지 드러낸다. 다음으로 슬라이드 작품을 보자. 슬라이드 형식은 김지하의 민주화 운동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중지당하자 모색된 것으로, 검열에 대한 저항을 계기로 품고 있다. 도미야마는 1975년 중반, 나카지마 마사아키 목사와 함께 ‘니혼 텔레비전’의 방송 프로그램 〈종교의 시간〉에서 “암흑 속 그리스교도 김지하[11]”를 기획하지만 “국제친선을 해친다”는 이유로 중지된다.[12] 그러자 방송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이드를 만들고 영어판을 제작한다. 도미야마는 슬라이드가 “절절히 마음에 호소해 오는 독특한 미디어”였다고 말한다.[13] 이후 도미야마는 슬라이드 제작을 본격화하고, 1976년 이후 9개의 슬라이드 작품을 만든다. 음악, 미술, 영상이 어울어진 종합 예술인 슬라이드는 “미술관의 권위나 화랑 비즈니스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던 도미야마가 작품을 보여줄 장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생각해낸 기법”이었다.[14] 많은 작품을 30분 정도의 영상에 담아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슬라이드는 예술-운동에 적합한 미디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기와라는 운동성뿐 아니라 표현적 급진성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슬라이드를 제작할 때, 하나의 작품은 분절되고 콜라주 형태로 재구축된다. 이 과정에서 유화, 석판화, 실크 스크린, 콜라주, 설치미술 등 각 장르가 지닌 질감과 표현법이 뒤섞인다. 이는 미술의 장르적 권위에 저항하고, 예술 문법에 길들여진 시각에 파격을 선사한다. 특히 〈바다의 기억〉[16]은 슬라이드 제작과 상영과정 자체가 정치적 운동이자 예술적 파격이었고, 나아가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위한 아카이브의 구축이었다.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은 도미야마의 일본군‘위안부’ 경험을 다룬 〈바다의 기억〉 유화 연작(〈먼 남쪽 나라 자바〉, 〈가룽간 제삿날 밤〉, 〈남태평양 해저에서〉)을 기반으로 한다. 이들 연작은 1987년 5월 말 극단 ‘68/71 쿠로이로 텐트’에 의해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로 상연되고, 7월에는 다큐멘터리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 - 쇼와 일본 여름〉으로 제작된다.[17] 다시 1988년 영국 런던의 개인전에 맞춰,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이 제작된다.[18] 그런데 도미야마가 ‘위안부’의 존재를 알고 <바다의 기억>을 제작하게 된 계기에는 〈튀어라 봉선화〉의 상영 운동이 있었다. 상영회에 온 많은 조선인 한국인들이 남방에 ‘위안부’로 끌려가 소식이 끊어진 친구의 이야기 등 강제동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19] 1987년 ‘쿠로이로 텐트’의 〈바다 울고 꽃 밀려든다〉 상연도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아카이빙하는 예술-운동의 성격이 명확하다. 1987년 당시, 거기에 온 젊은 여성 관객들은 위안부에 대해서 대부분 몰랐다. 조선인 강제연행으로 일본에 온 나이 든 재일조선인들은, 너무 고통으로 가득 찬 과거를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한다. 하물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은 더욱 과거를 봉인해 버렸다. 거기에 역사의 거대한 어둠이 있었다.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208쪽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은 1989년 5월에는 베를린에서, 8월에는 리버티 오사카에서 연속하여 상영된다.[20] 예술과 정치의 접점에서 나타난 파격의 형식인 슬라이드, 그것은 상영되는 장소마다 풍부한 이야기, 급진적 표현, 정치적 운동성을 담고 변화한다. 이어지는 글>>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2) 각주 ^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에서 이지은 선생님의 발언을 통해 이 사실을 처음 접했고, 나아가 윤정옥의 위치성을 사유하게 되었다. ^ 洪玧伸, 『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インパクト出版会, 2016. ^ 배주연, 「포스트메모리와 5.18-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0.4, 12-15쪽; Marianne Hirsch, The Generation of Postmemory: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2, p.5. ^ 富山妙子, 『アジアを抱く―画家人生 記憶と夢』, 岩波書店, 2009, ⅴ쪽. ^ 영상 <「금지된 이미지(禁じられたイメージ)」展>, 2015년 중 3분 37초. 이하 ‘금지/시간’으로 표기. ^ 마나베 유코, “도미야마 다에코란 누구인가”, 「경계를 넘는 화가-도미야마 다에코의 삶과 예술」,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학술행사 자료집, 2020년 11월, 18~19쪽 ^ 츠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 작, 〈튀어라 봉선화: 나의 지쿠호 나의 조선(はじけ鳳仙花 わが筑豊わが朝鮮)〉, 제작:幻燈社, 1984년작. 이하 이 영상에서의 인용은 ‘봉선화/시간’으로 표시.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02쪽. ^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203쪽. ^ 富山妙子, わたしの解放, 筑摩書房, 1972, 334쪽. ^ 김지하는 민주화 운동의 대표에서 보수정권의 지지자로 급격하게 태도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민주화 운동의 동력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게 하는 아이콘이다. 그러나 도미야마가 1970년대의 김지하의 민주화 운동에 촉발되어 벌였던 예술-운동의 의미는 현재의 김지하와 별도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172쪽. ^ 富山妙子, 위의 책, 2009, 172-173쪽. ^ 富山妙子, 「アジアの視座からー画家として女として」, 富山妙子、浜田和子、萩原弘子, 『美術史を解き放つ』, 時事通信社, 1994, 77쪽. ^ 하기와라 히로코, 「도미야마 다에코- 논의와 혁신을 만들어내는 예술가」, 연세대학교 박물관 편저,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 (2021.3.12.~2021.6.30./8.31까지 연장),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148쪽. 이 단락의 설명은 이 페이지의 요약임. ^ 「바다의 기억(海の記憶)」(1988): 원화와 텍스트-도미야마 다에코, 음악- 다카하시 유지, 촬영-모토하시 세이이치, 조명-가토 스미히로, 영번역-더글라스 라미스, 제작-히다네 공방. 이하 이 영상에서의 인용은 ‘바다/시간’으로 기입. ^ 이미숙, 「경계를 넘는 연대와 재귀적 민주주의」, 『5.18과 이후: 발생, 감응, 확장』, 전남대학교 출판문화원, 2020, 196~197쪽. ^ 위의 글.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07쪽 ^ 小林宏道編、「年報」、연세대학교 박물관 편저, 앞의 책, 210-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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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 비/인간 존재의 ‘포스트 메모리’를 기다리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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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의 도입: 가해성을 인식하고, 문답적 증언과 전형적 표상을 벗어나다 두 번째 물음. 비체험자이자 구조적 가해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피해 당사자에게 공감하고 자신의 문제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도미야마의 예술-운동의 핵심에는 가해성에 대한 성찰이 있다. 영상 〈금지된 이미지〉에서 도미야마는 전쟁에 대한 일본의 가해성과 책임이 애매하게 이야기된다고 비판한다. 일본의 패전이란 말은 항상 애매한 말이죠. 그래서 ‘종전’이라고도 하고 전쟁을 마치 흘러간 추억처럼 이야기하기는 해도 가해적 측면에서 일본인이 아시아에 대해 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미디어든 뭐든 깊이 다루지 않죠. 그래서 전쟁의 기억이 점차 애매해졌죠.-중략-그래서 80년 광주를 그린 뒤에는 제 일생 동안 전쟁 책임의 문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반드시 해내야겠다고요.(금지/5:26) 샤먼은 피식민자의 고통을 가해자의 위치에서 대변할 수 없다는 윤리의식에서 도입되지만, 바로 그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도미야마는 “가해자인 일본인이 피해자를 주체적으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해 샤먼을 끌어들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샤먼이 되어 지쿠호 탄광에서 일해야 했던 죽은 조선인 탄광부를 불러들”인다.[1] 샤먼이 등장하는 슬라이드 작품에서는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변화를 일컬어 도미야마가 대위법적으로 ‘복수의 타자’의 시점을 확보한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2] 이처럼 샤먼은 기록될 수 없었던 ‘위안부’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녀들과 연결되어 있던 동시대인의 이야기, 더 나아가 흐느낌·탄식·바람소리·바다울림 등 비/인간의 소리를 담아낸다. 〈튀어라 봉선화〉에는 네 층위의 소리가 겹쳐진다. 질문하는 츠치모토 감독, 대답하는 도미야마, 증언·구술의 내레이션, 시·소문·의성어·의태어이다. 내레이션 낭독은 재일조선인 연극인 이려선이 담당하는데 “신세타령”, “어머니” 등은 한국어 음독(밑줄로 표시) 그대로 발음된다. ‘신세타령: 죽은 조선인 광부가 말한다’라는 첫 부분은 샤먼을 부르며 시작한다. 이후 영상이 진행됨에 따라 탄광에서 죽은 조선인의 흐느낌·울음이 뒤섞인 증언이 나온다. 제 마음에는 지금 조선 무당, 샤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일본이라는 이국 땅에 ‘어떤 조선인’으로 묻힌 사람들의 한의 목소리, 그 애끓는 신세타령을 말하게 해주세요. (봉선화/14:00) ‘배가 고파요, 어머니. 석탄을 캐야 하는데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자 목각으로 맞았다. -중략- 감독관 놈이 무서워 작은 목소리로 불렀어. 어머니...어머니...(봉선화/27:30) 이러한 안용한의 사정은 1981년에 출판된 『강제연행 강제동원-지쿠호 조선인 광부의 기록』에 실린 ‘안용한(49세)’의 구술과 거의 일치한다.[3] 더욱 흥미로운 것은 ‘봉선화 밤의 깊이로’ 부분에서 배경음으로 펼쳐지는 탈춤소리, 〈황토의 길〉 연작을 배경으로 들리는 노랫말과 소문 등이다. ♪쌀이 나는 논은 신작로가 되고 /말 좀 하는 이는 감옥으로 가네. /일 좀 하는 이는 공동묘지에 가고 /어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계집은 유곽으로 보내졌네. /미쳐버린 이는 꿈에서 깨고 /멀리서 날이 밝아오고 있네.♪ 바닷길 조선해협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면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일본에 가면 “3년 일해 돈을 모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한 번 데려가면 돌아올 수 없는 지옥의 연락선”이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봉선화/17:10, 이탤릭 표시는 소리의 톤이 바뀌는 부분-인용자) 마당놀이, 탈춤소리, 노랫말, 소문…. 이 소리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세상에 대한 비판, 가난 속의 들뜬 희망 등을 담고 있는 ‘증언 속 증언’이다. 〈튀어라 봉선화〉에는 윤동주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를 둘러싼 도미야마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연계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윤동주의 시 「십자가」가 〈벽 안의 원한〉을 배경으로, 「서시」가 〈유라시아 성좌에〉를 배경으로 들린다. 도미야마는 재일조선인 김소운이 번역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참고했거나[4] 민주화 운동에서 낭독되던 「서시」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구전되는 노래와 소문,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시 등은 강제동원된 당사자와 주변의 동시대인을 연결하는 ‘확장된 증언’이다. 특히, 샤먼의 도입이 그 여성주의적 의미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다의 기억〉연작 및 슬라이드 작업에서다. 도미야마는 “남성들이 그린 것은 전장의 슬픔이었어요. 그렇지만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것은 남겨진 사람들이었죠”(봉선화/4:15)라며 남성 화가들의 피해 의식에 젖은 전쟁 표현을 비판한다. 그리고 〈바다의 기억〉에서 저항과 해방을 외칠 수조차 없는 ‘위안부’의 경험을 그릴 방법을 모색한다. 그때 다시 등장하는 것이 ‘샤먼’이다. 〈바다의 기억〉 은 ‘바다의 기억’, ‘머나먼 남쪽 자바’, ‘태평양 해저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 ‘가룽간 축제의 밤’, ‘말하자! 목소리를 높이자!’라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인 ‘바다의 기억’은 “제2차대전 때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여성들에게 바칩니다”(바다/00:28)라는 말로 시작하고 이어 무당의 소리-무당에게 부탁하는 소리가 서로 응답한다. 즉 샤먼의 도입은 ‘위안부’의 증언을 문답 구조가 아닌 응답 구조로 바꾸어 놓는다. 나는 무당이다. 바닷새와 물고기의 이야기를, 반세기 전에 태평양 밑으로 가라앉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전쟁의 이야기. 나는 무당이다. 나는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바다/01:25) 무당이여, 무당이여, 들어 주소서. -중략- 우리 언니 김순덕은 대체 어디에 있나요. 살아는 있나요? 죽어버렸나요?(바다/03:00) 언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무당은, 남태평양 바닷속을 안내해 줄 자바의 정령 와양(Wayang)을 불러낸다. 와양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인형극이다. 조선의 무당이 인도네시아의 인형극 와양을 만나 바닷속에 가라앉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고 끌어낸다. 사실 증언을 포함한 모든 인터뷰 형식은 고해성사, 법정 심문 등을 기원으로 한다는 점에서 경험자/해석자 사이의 위계를 심화시킬 수 있다.[5] 그러나 〈바다의 기억〉에서는 증언하는 피해 당사자와 그것을 듣는 비체험자 사이에 샤먼이 개입함으로써 이 위계적 문답 구조를 해체하고 당사자의 호소를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존재들에게 연결시킨다. ‘위안부의 이야기’에서도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 당사자들의 말이 직접적으로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무명의 집단적 발화이며, 의성어·의태어·말줄임표로 점철되어 인간/비인간 표현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이고! 뼈가 쑤신다! 우리나라를 빼앗고, 내 청춘을 짓밟고, 내 목숨을 빼앗은 일본군! 아이유..., 그로부터 사십여 년 이 머나먼 남쪽 바다에 가라앉은 나. 외롭고 외로워....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속에 묻혀버린 뼈인 나(바다/16:00). 결국, 동생은 언니 순덕을 찾지 못한다. 바다의 광활함 때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안부’였던 순덕을 ‘수치’로 치부해 버려 진심으로 찾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화자인 ‘나’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기생과 놀아나도 비난받지 않는데, 전장에서 돌아온 여자들은 죄인처럼 숨어 살아야 한다고 울분을 토한다. “얼마 안 남은 인생, 고향을 꿈에 그리면서도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이여, 말해라, 목소리를 높여라!!”(바다/24:00) 이 말은 그/녀들을 맞이해야 할 공동체의 응답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무당이 순덕이를 찾아다니며 만나는 다층적 존재들이다. 무당은 “거기 있는 당신은 누구?”라고 물으며 남태평양 해저를 종횡한다. 이 질문에 일본 배에서 새우잡이를 했던 자바인, 서핑하다 파도에 휩쓸려온 도쿄의 대학원생, 해군 병장, 육군 보병, 노무자였던 수라바야의 행상인 등이 답한다. 바닷속에는 ‘위안부’, 가족을 두고 죽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이등병,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해군항공대원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동생은 언니 대신, 대구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이혜경, 광주에서 끌려간 양지순과 만난다. 이처럼 “거기 있는 당신은 누구?”라는 질문이 닿은 곳은, 남태평양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결코 손쉬운 ‘화해’를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죽은 존재들의 관계이다. 도미야마가 ‘위안부’를 소재로 하여 그린 바다에는 생선, 하얗게 도드라진 해골, 쇠사슬, 꽃, 인어, 소라, 일본 국기 등이 뒤섞여 서로 저항한다. ‘위안부’ 표상의 전형성을 깨뜨리는 이런 이미지에 대해서 레베카 제니슨은 표상의 지배적 시스템을 근원에서 교란하는 힘이 있다고 분석한다.[6] 이처럼 가해성의 구조적 인식에서 도입된 샤먼이라는 매개는, 증언이 지닌 문답 구조의 폭력성, ‘위안부’의 고통만을 초점화한 표상의 전형성을 벗어나, ‘위안부’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은 가해/피해가 뒤섞인 존재들 사이의 불화/연결을 상상하게 한다. #도래할 예술-운동: ‘위안부’에서 ‘자파유키’로, 그리고 비/인간 존재로 세 번째 물음. ‘위안부’ 재현이 고통의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되고 당사자와 비체험자 모두를 해방시키는 순간을 낳을 수 있을까? 한 달 전쯤 ‘위안부’ 증언을 초점화한 전시 〈증언을 만나다(Encountering Testimonies)〉[7]를 보러 갔다. 여기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AI로 구현한 콘텐츠 〈영원한 증언〉을 보게 되었다. 팸플릿에는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의 녹화된 증언과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여 관람자들이 증언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사실 이 콘텐츠는 이전에도 전시된 적이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논점도 제기된 바 있다. 이지은은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8]에서 이 콘텐츠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던 학술 워크숍 〈다차원의 증언을 만난다는 것〉(2022년 7월 29일)에 참여한 토론자들의 발언을 정리해 주었다. 그 논의를 요약하면, 이 콘텐츠가 역사 부정론과 역사 왜곡의 공격이 거세어지고 고령인 피해 증언자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는 등 “오늘날 증언이 당면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기획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칫‘위안부’의 피해자적 면모만 부각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는 견해들이었다. 또한 발언자들은 콘텐츠의 질의응답이 사전에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점을 들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로써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도 제기한다. 이지은은 이 글 끝에서 “‘영원한 증언’은 증언자를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 그야말로 ‘오지 않은(未來)’ 증인을 초대함으로써도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처럼 여러 각도에서 진심 어린 비판적 논점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번 새로운 전시에서는 콘텐츠의 변화가 있으리란 기대를 안고 갔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해도, 현재의 이 변화 없음은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전형화를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닐까 싶어 우려된다. 이러한 고민은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운동이 제기한 물음들─기술과 형식의 도입, 가해성을 포함한 위치성의 인식, 비체험자로 확대된 공감 가능성이 어떻게 가능할까─과도 만난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경험을 기억/기록하는 힘은, 당사자의 증언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도 비가시화된 젠더기반 폭력의 문제와 싸우는 힘들과 연결될 때 비로소 펼쳐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도미야마가 일본군‘위안부’에 천착해서 만든 슬라이드 〈바다의 기억〉의 상영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면서 만들어낸 예술-운동의 궤적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위안부’와 ‘팔려 온’ 태국 이주 여성 (성)노동자의 연결이다. 도미야마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및 여성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으며[9], 일본 ‘아시아여성의모임’과 기관지 『아시아와 여성해방』[10]에 참여하는 등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일본의 신식민주의적 (성)착취에 대한 비판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1989년 방콕에서 <바다의 기억>을 상영한 날 도미야마는, 다음에는 “태국을 테마로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 약속은 〈돌아오지 않는 소녀(帰らぬ少女)〉로 구체화된다.[11] 1990년대 일본은 버블 경기였고, 태국, 미얀마, 중국, 라오스 등 아시아 여기저기서 소녀들이 일본으로 ‘팔려’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동남아시아에서 ‘팔려 온’ 많은 여성들은 ‘자파유키’라고 불렸다.[12] 〈돌아오지 않는 소녀〉를 제작하는 동안에도, 일본의 버블 경기를 떠받치고 있는 그/녀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태국 출신 여성 노동자가 우쓰노미야 호텔에서 피살(91년 3월)되었고, 태국 출신 미등록 이주여성이 오사카에서 투신 자살했으며(91년 3월), 이바라키현에서는 태국 여성의 구출을 요청하는(91년 5월) 일들이 연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미야마는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하는 여성들과 ‘팔려 온’ 태국 이주여성 노동자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간파한다. 도미야마가 연결한 이 실타래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여성, 난민여성, 그리고 성노동자에게로 향하게 한다. 동시에 현재 강렬한 파동을 품고 펼쳐지고 있는 한국의 이주여성, 난민여성, 성노동자 운동들은[13], 전형화된 피해자 형상에 타격을 가한다. 다른 하나는, ‘위안부’에서 비/인간 존재로의 연결이다. 식민주의와 전쟁에 대한 원체험을 안고, 소수자의 곁에 선 기록작가가 되겠다는 도미야마의 결심은, 3.11 재해 이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함께 비/인간 존재에게로 확장된다. 〈바다로부터의 묵시〉(2012)에 삽입된 바람소리, 흐느낌, 침묵, 비명 등은 〈바다의 기억〉 속 목소리 없는 자들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비/인간 존재들의 경험을 담은 또 하나의 기억의 ‘바다’를 개방한다. 도미야마의 예술-운동은, 시공간적 거리와 인/종적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폭력과 차별에 노출된 채 삶을 버텨온 존재들을 알리고 연결시키려는 끊임없는 시도였다. 도미야마가 드러낸 ‘위안부’와 근로정신대의 고통은 2020년 12월 농촌 비닐하우스에서 동사한 이주노동자 여성에게로, 2022년 8월 16일 부산출입국·외국인청에 구금된 지 8시간 만에 사망한 A씨에게로, 팬데믹의 원인이 된 공장식 축산 속 비/인간 동물의 죽음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리고 이 모든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전쟁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속에서, 저항조차 불가능한 위치에서도 끊임없이 해수면 위로 떠오르는 비/인간 존재들의 어둠 속 몸부림을 하얗게 비춘다. 각주 ^ 富山妙子・真鍋祐子, 「対談:なぜ光州を語り, 描き続けるのかー光州事件30周年の年に」, 『月刊百科』, 12월호, 平凡社, 2010, 9쪽. ^ 마나베 유코 저, 「도미야마 다에코 화백의 작품세계 속 '무당' 모티프」, 김석화 외 지음, 『환동해지역의 오래된 현재』, 해토, 2017, 39쪽, 46쪽. ^ 林 えいだい, 『強制連行・強制労働―筑豊朝鮮人坑夫の記録』, 現代史出版会, 1981, 139~141쪽. ^ 윤동주의 시구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이라고 쓰여진 것을 볼 때, 김소운의 번역본(金素雲 訳, 現代韓国文学選集(第五巻詩集), 冬樹社, 1976년 4월)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진실의 색』, 워크룸 프레스, 2019, 34쪽, 37쪽. ^ 마나베 유코, 앞의 글, 2017, 48쪽. ^ 2022.10.27.-11.7. 주관: 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 접경인문학연구단, 주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후원: 대한민국 여성가족부.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 <<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웹진>>, 최종입력:2022.9.26, 최종수정: 2022.11.28, 링크:https://kyeol.kr/ko/node/479 ^ 이미숙, 앞의 글, 2020, 199쪽. 파리의 민주인사 정성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초대 대표였던 윤정옥 및 이효재와의 연대가 있었다. ^ アジアの女たちの会, 『アジアと女性解放』 창간호, 1977년 6월. 이 잡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졸저, 「트랜스내셔널 여성문학의 공백」, 『여성문학연구』 48호, 2019.12를 참조. ^ 富山妙子, 앞의 책, 2009, 236-237쪽. 〈돌아오지 않는 여자〉에 대한 한 단락의 설명은 이 페이지의 인용임. ^ 이미숙, 앞의 글, 199쪽. ^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에서는 2022년 12월 16일에 〈2022년 성노동자 추모행동〉으로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 …, …, …, …,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을 했다. 이 드물고 귀한 자리에 모인 발언자들은 취약성이란 어떤 존재에 내재된 특성이 아니라 어떤 구조적 조건 속에서 심화되는 상태임을 명확히 하고, 취약한 상태에 놓인 존재들 사이의 연결과 힘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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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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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영화 <허스토리>의 모티브가 된 여성운동가 고(故) 김문숙의 삶을 통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이었던 ‘관부재판’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전시를 마련했다. 전시 기간은 2023년 2월 15일부터 5월 19일까지다. 관부재판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인과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이 부산(釜山)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오가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재판이다.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은 원고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재판을 이끈 주역이다. 창원대는 2021년 김문숙 이사장의 별세 후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조사·전시사업의 일환으로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관부재판 관련 기록물을 조사했으며, 이번 전시회는 그 결과를 선보이는 자리이다. 자료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김문숙 이사장의 개인 소장 자료와 관부재판 관련 기록은 당시 치열했던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군‘위안부’를 바라보던 관점과 달리,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공동노력으로 이뤄냈던 관부재판을 재조명하면서 앞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고민해 보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담당한 학예연구사로서 이번 전시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여기에 있는 휴지 한 조각까지 다 가지고 가겠습니다 2022년 4월 신동규(창원대 사학과), 문경희(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가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안타까운 상황을 알리며,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공모하는 자료조사와 전시 사업에 함께 하자고 하였다. 고고학을 공부하는 필자는 생소한 일본군‘위안부’ 전시에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당시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는 하와이 한인 이민자 묘비 조사와 전시 준비로 인해 추가적인 전시를 진행하기에는 벅찼고, 자료를 이전하여 수장・정리할 공간도 마땅치 않아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직접 가서 확인하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은 ‘정말 많은 것이 전시되어 있구나!’였다. 전시실이 자료로 가득했다. 많이 보여 주고 싶어 한 김문숙 이사장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많은 자료를 어떻게 모았을까 싶었다. 방문한 학생들이 남긴 방명록, 응원의 글과 창고에 쌓인 자료를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중요한 자료는 창고에 넣어 두고 사진과 그림만 전시하고 있었다니 노출되지 않은 자료가 오히려 노다지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있는 관부재판 자료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듣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전시회를 개최한다면 관부재판 자료만으로는 전시가 불가능하며 김문숙의 생애 속에서 관부재판을 조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 사명감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따님인 김주현 관장님께 “김문숙 이사장이 없는 관부재판은 상상할 수도 없고 관부재판 자료는 그가 남긴 자료 중에 아주 작은 일부분입니다. 관부재판 자료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니, 휴지 한 조각까지 우리가 다 가지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다소 긴장한 듯 보였던 김주현 관장이 그제야 화색이 돌고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문숙 이사장의 삶이자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서 관부재판 자료만 중시하고 나머지 그가 모은 자료와 스크랩 등은 모조품이나, 휴지조각으로 치부되었던 그간의 설움을 우리가 해소해 드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5톤 트럭 2대 분량에서 보물을 찾다 나와 이심전심으로 신동규, 문경희 두 분 교수님은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외부 간판까지 다 가져가자고 했다. 모두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이 엄청난 양의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운반할지 걱정이 앞섰다.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3개의 대형 간판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창원대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얼마 후 <민족과 여성 역사관> 건물은 철거되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지금 창원대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 간판이 설치된 모습을 보면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5톤 트럭 2대 분량의 방대한 양을 정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함께한 연구자들과 대학원생이 고생하여 1,500페이지가 넘는 ‘민간기록물 조사·수집 사업 결과보고서’를 제출했다. 김문숙 이사장 개인이 수집하고 남긴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한 한일관계사의 중요한 자료였던 것이다. 자료를 살펴보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재판 과정의 긴박한 상황과 한일 시민 연대의 사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자료는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김문숙 이사장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교육사 및 생활사 연구에, 1950년대와 1960년대 부산지역 문화예술인과 교류한 자료는 문학사 연구에, 그리고 서울이 아닌 지방의 여성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가질 수 있다. 한마디로 김문숙 이사장이 남긴 관부재판의 여정과 그가 성공한 여성경제인에서 여성운동가로 변화하는 모습은 모든 이에게 본보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다보니, 김문숙 이사장과 그가 이룩한 관부재판에 대한 논문이나 글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날 때마다 전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부담감과 걱정이 배가되었다. 일본군‘위안부’ 전시지만 밝고 예쁘게 표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수많은 전시가 있었다. 이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던 필자는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전시에 표현해야 할지 상당한 고민이 있었다. 관부재판으로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은 할머니들의 일본체류기 자료에서 할머니들이 약주를 드시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분들도 웃을 수 있구나. 이분들도 흥겹게 노래를 부를 수 있네. 할머니들도 즐거워할 수 있구나. 지금까지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억울하고 상처받은 모습만 보았고,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분들도 당연히 즐겁게 노래하며 밝게 웃는 사람인데 지금까지 언론과 전시에서 보았던 모습은 어둡고 슬픈 모습뿐이었다. 이분들은 밝고 일상이 즐거웠을 수도 있는데, 전시를 하는 사람, 즉 우리 학예사들이, 우리 모두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결국 일본체류기 자료에서 보았던 할머니들의 즐거운 모습은 전시에 표현되지 못했다. 하나의 치유과정이고 마땅히 그렇게 하여도 문제가 없는데 전시를 준비한 나 스스로가 검열을 한 것이다. 전시를 여러 번 준비하고 개최하였지만 이번 ‘위안부’ 전시만큼 문구 하나하나 사진, 색감 등 모든 것에 조심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잘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자기반성도 있었다. 이번 전시를 밝고 예쁘게 하고 싶었다. 아들이 전시회에 와서 알록달록하다고 했을 정도로 색을 많이 넣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전시와는 또 다른 관점에 서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의 전시가 할머니들의 아픔을 나누는 전시였다면 한일 시민들이 연대하여 일본사법부에서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였던 관부재판 과정을 희망적으로 소상히 알리고 싶었다. 이분들을 돕고 재판을 준비하고 아픔을 함께한 시민들의 당당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들이 어떻게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도우며 함께 하였는지 말이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이 역사를 지울 수 없다> 긴 제목이 완성되다! 먼저 전시 제목이나 주제부터 결정하기 힘들었다. 김문숙 이사장과 관부재판과 관련된 연구가 전혀 없었고, 후손이 살아 있는 가운데 진행하는 전시라 더욱 고민이 많았다. 수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줄기 전시 방향을 찾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고 의견이 분분했다. 다행스럽게도 김문숙 이사장의 ‘50년 만의 피눈물’이라는 친필원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시대 할머니들의 아픔을 전혀 모르고 살았지만, 이를 각성하며 관부재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전시하기로 하였다. 먼저 포스터 제작은 시모노세키 재판소에 소장을 제출하고 나오는 김문숙과 그녀들, 그리고 변호사들의 비장하고 당당한 걸음을 마치 영화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를 연상하듯 표현하였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로 전시제목을 정하고 <민족과 여성역사관> 설립 취지에 있던 ‘이 역사를 지울 수 없다’를 추가하여 부제를 붙였다. 그리고 명함 같다고 넣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관부재판 판결문을 배경으로 넣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제목을 정하고 포스터가 완성되었다. 김문숙의 일대기를 15m 길이의 연표로 길게 만들고 어린 시절 김문숙과 동시대에 살았던 일본군‘위안부’ 및 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모습을 비교하는 공간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50년 만에 피눈물을 흘리며 각성하여 할머니들과 함께 손잡고 관부재판으로 가는 길을 여러 섹션으로 분리하여 긴 여정을 펼쳐 보였다. 김문숙은 초중고 및 대학까지 진학하는 유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동시대에 태어난 할머니들은 학교에 한 번도 가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끌려가는 상반된 삶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할머니들의 직접적인 모습보다 김순덕, 김복동, 이용녀, 강덕경 등 할머니들이 그린 원색의 색감이 아주 강한 그림을 넣어, 가슴 아프지만, 오히려 더욱 예쁘게 전시하고 싶었다. 김문숙과 할머니들은 노란 나비를 배경으로 50년 만에 손을 잡고 당당하게 관부재판으로 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공간이 가장 맘에 들었고 관람자들의 만족도도 아주 높았다. 김문숙의 방을 만들다! 엄청난 자료를 모두 전시할 수 없었기에 김문숙 그 자체를 표현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는 광적으로 수집하고 글쓰기에 몰두한 분이었다. 언제나 가위를 들고 신문스크랩을 했고 스크랩한 자료를 활용하여 교육하고 영감을 얻어 그대로 실천한 삶을 살아왔다. 누군가가 신문 스크랩이 주를 이루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자료가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혹평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 자료가 김문숙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흔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사진 속 김문숙 이사장의 책상과 책꽂이를 그대로 묘사하여 김문숙의 방을 만들었고 그가 스크랩한 자료를 쌓았다. 전시 후 김문숙을 기억하는 분들이 관람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안도가 되었다. 관부재판을 숫자로 관부재판 과정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만들어 내야 했다. 공간 전체를 붉은색으로 당당함과 마땅함을 표현했다. 관람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육하원칙과 숫자로 간단하게 관부재판을 정리했고 어려운 법률용어가 가득한 판결문도 5개의 짧은 문장으로 요약했다. 여기에 더해 김문숙 이사장이 재판 날짜에 맞춰 준비한 여권과 비행기 표, 그리고 많은 도움을 준 일본 시민들의 모습을 전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부재판은 한마디로 서울과 도쿄가 아닌 지방에서, 정부가 아닌 한일 시민들이,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일어난 전설이었던 것이다. 영화 <허스토리>, 고민에 들다 2018년 개봉 영화 <허스토리>를 통해 대중적으로 소개된 주제이기 때문에 전시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는 영화가 반드시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전시팀원들 간 찬반이 있었다. 영화 <허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상당한 극적 요소의 가미로 많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사료에 기반한 사실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전시에 허구가 가미된 영화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실화보다 영화의 허구적 내용이 부각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활용을 통해 팩트 체크 형식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관부재판과 김문숙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쌍가락지와 역사관 잘 부탁한데이! 마지막은 바로 김문숙 이사장이 만든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전시한 공간이다. 처음 역사관을 방문했을 때의 전시물로 가득 찬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전시하지 않고 간판만 부착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중앙에 작은 진열장에는 김문숙 이사장이 마지막까지 소지했던 반지와 안경, 그리고 '위안부'할머니를 조사하던 녹음기, 카메라를 전시하였다. 수십억 자산가가 여성인권운동을 하며 마지막으로 딸에게 남긴 것은 쌍가락지와 “역사관 잘 부탁한데이”라는 말이었다. 전시 소개를 마치며 전시를 준비하면서 비록 사진이었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제까지 ‘위안부’ 전시는 마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처럼 눈물, 어둠, 아픔이 묻어나는 전시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전시는 김문숙과 그녀들이 일본사법부에서 일본정부의 잘못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이었던 관부재판으로 가는 당당한 여정을 전시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아픔을 함께 하였던 시민운동가의 모습을 담았다. 그들을 밝고 예쁘게 표현한 전시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할머니들이 웃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당연한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