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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김순악의 ‘이름’들을 부르다 - 영화 〈보드랍게〉 박문칠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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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2022)를 연출한 박문칠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을 겹겹이 들여다본다. 그의 삶은 후대의 여성들에 의해 목소리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되살아난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대루코, 요시코, 마츠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 씨. 살아생전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려왔던 김순악의 삶에는 우리가 몰랐던, 혹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여러 굴곡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보드랍게〉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를 기억하고 되새긴다. 더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지금의 문제로 이야기하기 위해 감독이 시도한 방법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앞으로의 더 나은 시도를 기대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늘 ‘나’를, 사회 문제를 이야기해오고 있는 박문칠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Q. 〈보드랍게〉 개봉 후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현재 차기작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대구의 이슬람 사원 건축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Q.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으로부터 영화 제작을 제안받았을 때 부담을 느끼셨다고요. 얼핏 상상해도 쉽지 않은 작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그럼에도 ‘해야겠다’고 결심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 부담을 느꼈던 건, 훌륭한 작품들이 이미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또 일본군‘위안부’는 많이 다뤄온 소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르게 접근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분의 삶에 깊이 있게 들어가 보는 작업을 하면 다른 이야기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죠. Q. 작업에 돌입하기 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증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살펴보셨겠지요. 그 과정 자체가 일종의 ‘배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 이후로 새롭게 배우거나 알게 된 점이 있으신지요.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를 하나의 이슈로만 바라보거나 피해자분들을 ‘위안부’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놓고 비슷하게만 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마다 살아오신 모습과 개성, 성격, 배경이 완전히 달랐어요. 각자의 고유한 성격과 삶이 있는데 ‘위안부’로만 바라봤던 게 죄송스러웠습니다. Q. 수많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접하셨을 텐데, 그중에서도 김순악 님의 삶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남아있는 자료나 사진, 영상을 보면 굉장히 시원시원하고 당찬 분이세요. 쭈그려 앉아 담배 태우시는 모습도 멋있고요.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김순악 님의 구술을 모아놓은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라는 평전이 있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이분을 주인공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위안소의 생활은 많이 들어왔는데,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5~60년의 삶이 참 가슴 아프고 미처 몰랐던 부분도 많았어요. 성매매, 기지촌도 그분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위안부’ 이후의 삶은 또 다른 전쟁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 등 총알이 오가던 여러 사건을 겪으셨고요. 기지촌이라는 공간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대가 있는 곳이었잖아요. 전쟁의 그림자에서 한 번도 제대로 벗어난 적이 없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피해자분들 또한 삶이 파란만장하지만 김순악 님은 항상 역사와 사회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으신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 지점을 조망해보고 싶었습니다. Q. 영화는 김순악 님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위안부’ 피해 이전과 이후의 삶을 모두 보여주는데, 피해자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 감독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해방 이후 피해자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만큼, 그 시기를 잘 드러내야겠다는 게 가장 큰 포인트였어요. ‘위안부’ 피해 경험이 과거의 일로 끝난 게 아니라 피해자의 삶의 행로를 결정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Q. 영화에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김순악 님과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활동가부터 일반 청년 여성까지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로 영화가 채워지지요. 이처럼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김순악 님의 삶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현재화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세대를 넘은 여성들의 이야기, 서사가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김순악 님의 책 제목이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인 것처럼 누구도 그 속을 100% 이해하거나 안다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공감하려는 시도, 노력, 연결점들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게 됐습니다. 영화 앞뒤에 김순악 님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이 있어요. 영화에 출연하신 모든 분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졌죠. 현재의 여성들이 과거의 여성, 돌아가신 김순악을 불러드리면서 그분이 살았던 여러 면들을 곱씹어보고, 되새기고, 기억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Q. 경상도 지역의 2-30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증언집을 낭독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들을 섭외하시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직접 접촉하기에는 조심스러웠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미투 운동을 하신 분들이라, 여러 단체를 통해 소개를 부탁드렸어요.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 얼굴도 드러내야 해서 섭외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세 분 모두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습니다. Q. 낭독 장면에 대해서는 관객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나뉜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여성이 만나고 연대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의견도 있고, 피해의 고유성이나 사회적 맥락을 생략하고 성폭력 피해자 정체성을 일원화하거나 트라우마를 가중시킨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고요. 감독님께서는 이 의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어떠한 의도로 이 장면을 연출하게 되셨는지 함께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현재와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아직도 ‘위안부’ 문제를 과거지사로 혹은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원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로 생각하는 거죠. 이 문제를 잊지 않고 계속 곱씹어볼 수 있으려면 현재적인 의미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다른 문제와 접목시키고, 대화를 시도해본 거죠. 물론 저도 성폭력 피해나 ‘위안부’ 피해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본군‘위안부’는 전시 성폭력 문제이고,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이기 때문에 특수한 성격이 있어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말씀에 동의해요. 연구를 하는 입장에선 피해의 고유성을 정확히 밝혀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이 문제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부 공통점이 있는 사안들 혹은 피해자들 간의 마주침을 기획한다면 새로운 대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새롭게 생각해볼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새롭게 시도해본 방식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낭독 과정에서 피해 여성분들도 위로받는 경험을 하셨다고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눠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분들이 영화에 단순히 내레이터나 낭독자로만 등장하지 않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분들에게도 책을 드리고, 김순악이라는 사람을 느껴보고 알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본인이 생각한 김순악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요. 간접적이지만 그분들이 만난 김순악, 자신이 해석한 김순악을 기반으로 낭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성폭력 피해생존자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만날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지요. 만남을 주선하긴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두렵고 떨렸는데 다행히 참여해주신 분들이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분들이 그전까지는 정신없이 지내셨거든요. 미투 운동 당시에는 기자회견 하고, 재판 참석하고, 시위하면서 바쁘게 지냈는데,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심신이 지쳐 번아웃을 겪으신 거예요. 그래서 미투 당시를 차분히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셨죠. 근데 마침 바로 다음 해에 영화에 출연하면서 본인들이 했던 활동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셨어요. 김순악이 하나의 거울이 된 셈이죠. 영화에 참여하길 잘했고, 위로를 얻었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활동가분들의 소감은 어땠나요? 많이들 고마워하셨어요. 김순악 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넘었거든요. 이 영화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신 것 같아요. 그것들을 저희에게 많이 들려주셨고요. 출연진 중에는 활동을 계속하시는 분도 있고 다른 일을 하시는 분도 있는데, 젊은 활동가였을 때 열정을 쏟아부었던 이 운동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에 대한 고마움을 많이 표하셨어요. Q. 김순악 님의 ‘몸’은 한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모두 통과해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그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 자칫 잘못하면 타자화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민하신 지점이 있다면요. 일반인이 한평생에 겪기 힘든 일들을 한꺼번에 압축적으로 경험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호기심 거리나 선정적인 요소로 소비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존중하며 다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부분이나 성매매 관련 상황을 다룰 때도 너무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려 했고요. 저희 영화가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러한 톤을 잡게 된 이유도 있습니다. Q. 애니메이션 또한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영화의 한 축으로 삼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애니메이터와의 작업 과정은 어떠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는 일부러 여러 가지의 레이어를 두려고 신경 썼어요. 증언집 낭독, 활동가 인터뷰, 압화 작품 등 여러 방식으로 김순악이라는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애니메이션을 추가하게 된 것이죠. 애니메이터인 이재임 작가님에게도 책을 먼저 드리고 김순악 님을 느껴보게 했어요. 이 영화에는 김순악에 대한 후대 여성들의 다양한 해석이 곳곳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죠. 누구는 목소리로, 누구는 그림으로, 누구는 음악으로 표현한 거예요. 한 영화 안에 n개의 김순악이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 톤은 너무 자극적이거나 사실적인 것은 피하려고 했어요. 김순악을 복제하기보다는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죠. 지금의 추상적이고 동글동글한 그림체가 좋아요. 왜냐하면 김순악이 겪었던 삶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 누구나 겪을 수 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이죠. 워낙 힘든 게 많았던 삶이니까 그림체만이라도 따뜻하고 보드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Q. 애니메이터 작가님은 처음에 작업 제안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애니메이터에게도 책을 보내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분도 김순악 님의 매력에 공감하고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함께 작업한 모든 분들이 제가 섭외했다기보다는 할머니가 본인의 삶을 통해 자석처럼 끌어들인 것 아닌가 싶어요. 김순악이라는 사람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지점이 있으니 다들 부담을 느끼면서도 수락해주신 것 아닐까요. Q. 영화 개봉 후 접하신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영화에 공감해주신 이야기들이 다 좋았어요. 그중에서도 인상 깊게 남은 게 있어요. 저희가 GV(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관객 질문을 오픈 채팅방에서 받았거든요. 보통 GV가 끝나면 대부분은 그 방을 나가세요. 그런데 관객 중 한 분이 GV 당일 심야에 메시지 하나를 올리신 거예요. 그날 GV에 영화 출연자 중 미투 당사자 한 분이 함께하셨는데, 그분이 해주신 이야기를 듣고 또 영화를 보며 느꼈던 소감을 말씀해주셨죠. 관객분이 겪은 성폭력 피해 사실과 영화 및 출연자를 통해 위로받은 지점, 감사한 마음을 함께 전해주셨어요. 그것을 보고 저도, 출연자분도 깜짝 놀랐죠. 영화가 하나의 씨앗이 되어 퍼져나가 누군가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과 계기를 마련해주었구나 싶었어요. 제가 생각지 못했던 영화의 기능과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됐죠. GV에 참석하셨던 출연자분도 그 메시지를 보고 함께하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한 명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꺼내놓는 데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거나 이를 소재로 창작하는 분들은 ‘늘 반성을 거듭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위안부’ 문제를 알고, 공부하고, 기록해나갈 의무가 있겠지요. 앞으로 ‘위안부’ 문제를 기반으로 계속해서 이야기해나갈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분의 삶을 제 방식대로 작업해보았는데, 앞으로는 더 많은 작업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를 정치·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힘을 쏟다 보니 당사자들의 삶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삶이 다르고, 또 이야기할 가치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분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업들을 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Q. 또 다른 제안을 받게 되면 작업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제가 갖고 있는 것을 최대한 풀어냈기에 더 이상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다만, 좋은 기회가 되거나 제게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작품을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순악 님과 좋은 만남을 했고, 또 다른 만남이 가능하다면 해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당장은 힘들 것 같아요. (웃음) Q. 작업하시면서 김순악 님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던 적은 없나요? ‘너무 애쓰셨다, 멋지게 사셨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Q. 그간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를, 사회 문제를 이야기해오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보드랍게〉가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김순악이라는 굉장히 매력적인 분을 아주 진하게 만난 것 같아요. 〈보드랍게〉는 그 진한 만남에 대한 나름의 선물,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Credit 인터뷰어/정리: 강푸름 인터뷰이: 박문칠 감독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2년 8월 26일 금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에무시네마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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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1): 증거로서의 증언과 행위로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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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의 증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시민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학계는 사료 발굴 등 학술적 실천으로 응답하였다. 피해생존자의 증언은 대중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로서 사회적 호소력과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증언은 듣는 이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자의적으로 편집‧해석되기도 했으며, 역사를 왜곡하고 피해생존자를 공격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특히 증언의 수집과 연구는 시민운동진영과 학계가 긴밀하게 협조하여 진전시킨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역사부정론의 공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양쪽의 인식의 간극은 크게 벌어졌다. 요컨대, 증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대중이 가장 잘 아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증언에 대한 학계의 고민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증언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초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증언을 수집하고 채록하는 것이었다. 이는 증언자가 고령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위안소 제도에 대한 사료와 연구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 기인했다. 실제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가 1993년에 처음 발간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의 해설은 “군위안부 문제의 주안점은 우선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하고 우선적인 과제는 피해자들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1] 이러한 기획 의도에 따라 1집에 수록된 증언은 징모 과정, 위안소 시스템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연대기 순으로 재구성되어 있으며, 문어체 형식으로 가필되어 있다. 더욱이 초기 운동은 법적 투쟁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증언은 ‘증거’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위안소의 실체를 밝히는 학계의 연구가 축적되고, 1990년대에 이르러 여성구술사에 대한 인식이 진전되면서 증언 연구는 증언의 ‘증거’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구술 행위’ 그 자체에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증언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독백이 아니다. 증언은 말하는 이가 듣는 이와의 관계 속에서 과거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재현하는 행위이며, 증언집은 조사자와 피해자의 상호 대화와 소통의 산물이다.[2] 한편, 증언의 구술성에 주목할 때, 증언자 특유의 말투뿐 아니라 표정, 손짓, 휴지(休止), 침묵 등 비언어적 요소 또한 증언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이를 문자 텍스트로 옮기기 위한 방법론 또한 중요한 증언 연구의 한 부분이 된다.[3] 2000년 이후 발간된 증언집은 증언자의 입말을 살리면서, 비언어적 요소의 의미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호들을 도입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집 4권의 “무수히 열리되 닫히지 않는 따옴표들의 행진”[4]이라든가 증언자 구술의 장단이나 강약까지 표현하려 한 증언집 6권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의 ‘일러두기’가 이러한 고민의 결과이다.[5] 증언을 ‘행위’로 인식하게 되면서, 증언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심리적‧인식적 변화에도 학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6] 증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발화 장소의 성격에 따라, 혹은 청중의 국적이나 성별, 나이에 따라 증언 행위가 달라지는 것은 증언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증언자의 주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공격에 의해 쉽게 가려지거나 왜곡되었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대중조차도 증언이 달라지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증거로서의 증언’이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증언자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탓이다. 흔히들 증언자를 ‘살아있는 증거’라고 하면서도, ‘살아있는’이라는 의미를 삭제한 채 ‘증거’로서만 인식하려 드는 것이다. 증언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주체적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증언 연구는 역사부정론자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또 증언 청취와 해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부단히 갱신되었다. 예컨대 전형적인 피해자상에 부합되는 증언만이 청취되고 과잉 대표되었다는 비판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 중 일부는 식민지적 차이를 삭제하고 일본 정부를 면책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7]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의 피해자성이 정조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입각하여 강조된 측면이 있음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증언을 통해 ‘할머니’라는 호명에 담을 수 없는 피해생존자의 다양한 주체성을 밝히거나, 피해가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읽어내는 연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8] 한편, 증언의 사실적 진실성은 증언의 불변성이나 일관성이 아니라, 역사학과의 상호보완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역사학계는 피해자의 증언을 실마리로 역사적 단서를 찾아내거나, 역사적 맥락과 실증 자료를 통해 증언의 공백을 보완하고 피해의 전체상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축적해 왔다.[9] 이러한 연구에서 증언은 피해생존자 당사자의 경험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증언으로 확장된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는 증언을 ‘사실 검증’이라는 편협한 잣대를 넘어 깊이 있게 청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최근에는 증언 연구의 범위를 확장하는 연구들이 제출되고 있다. 구술 증언 외에 ‘회고’, ‘수기’ 등의 양식으로 발표된 증언이나, 참전 군인의 회고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1991년 이전에 출판 상업주의에 의해 외설적으로 소비되었던 인터뷰 기사나, 새로 발굴된 피해생존자의 수기를 분석하여 당시 ‘위안부’ 증언이 재현되던 방식을 살핀 연구들을 예로 들 수 있다.[10] 참전 병사들의 전쟁회고록 속에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위안부’ 목격담을 선별하여, 자료적 가치를 밝히고 군인들의 ‘위안부’ 인식을 밝히는 연구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11]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30년 이상 지속되고, 증언이 축적됨에 따라 운동 초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면서 증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살피거나, 증언 수집과 채록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 수행되고 있다.[12] 더불어 지금까지 ‘위안부’ 운동과 이에 관한 연구가 정대협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 지역의 자생적 운동에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감지된다. 지역의 ‘위안부’ 운동 연구는 증언 자료를 더욱 풍부하게 확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주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한울, 1993, 15쪽. ^ 2000년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이 증언집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풀빛, 2001, 35~36쪽 참조. (이하 서명과 페이지만 표기) ^ 이선형,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방법론적 고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증언집 4권은 “이 따옴표는 증언 내용이 편집자의 말과 단어로 가필되지 않았고 증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구성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자 “증언자가 말하고 있음을, 지금 현재 독자에게 말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증언참여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기호”라고 밝히고 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35쪽.)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여성과 인권, 2004. <http://contents.nahf.or.kr/iswjViewer/item.do> ^ 황은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의식 변화 과정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심영희, 「침묵에서 증언으로: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귀국 이후의 삶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2000; 사카모토 치즈코, 「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정치학」,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이에 대한 비판은 김부자, 「피해증언과 역사수정주의적 페미니즘」, 『한국구술사학회 학술대회』, 2019 참조. ^ 대표적으로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한국인 “군 위안부”의 주체성 재현」, 『사회와역사』, 2001; 양현아, 「증언을 통해 본 한국인 ‘군위안부’ 들의 포스트식민 상흔(Trauma)」, 『한국여성학』, 2006. ^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2019. 2.25~3.20)은 서울시와 정진성 연구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전시로,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역사적 맥락 위에서 재구성하고, 발굴한 기록물을 통해 증언의 여백을 보완하여 대중에게 전달하였다. 그외 피해자 증언에 기반한 역사학계의 성과로 강영심, 「종전 후 중국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행적과 미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2007; 박정애, 「만주 지역의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조선인 ‘위안부」, 『아시아여성연구』, 2016 등 참조. ^ 이지은, 「민족국가 바깥에서 등장한 조선인 ‘위안부’와 귀향의 거부/실패」, 『사이(SAI)』, 2020; 배지연, 「비극적 모빌리티 서사와 증언의 문제」, 『한국비평문학회』, 2022. ^ 후루하시 아야, 『비판적으로 읽는 일본 군인 회고록 속 '위안부'』, 동북아역사재단, 2021.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 『역사학연구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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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2022년 제1차 웹진 〈결〉 및 뉴스레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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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웹진 <결>은 그동안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 더욱 의미있고 알찬 웹진으로 거듭나기 위해 8~9월에 걸쳐 제1차 독자만족도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참여해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소중한 의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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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증언의 과거와 미래(2): 영원(永遠)한 증언과 ‘오지 않은(未來)’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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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제작한 <黎明之眼(여명의 눈동자)>(呂小龍, 2014)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일본군에 연행되어 ‘위안부’가 된 여성 기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영화이지만,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에 접근하는 방법에 주목해보자. 영화는 할머니가 된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역사관 전시를 둘러보다 쓰러지는 데서 시작한다. 그녀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비춘다. 그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객은 그녀가 왜 전시관에서 충격을 받았는지 납득하게 된다. 이때 영화가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그녀의 회고도 아니고, 역사관에 전시된 기록물도 아니다. 영화는 피해생존자의 ‘뇌’를 스캔함으로써 과거를 보여준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생존자는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게 되는데, 가족들은 그녀가 회고록을 쓰는 걸 꺼려 한다. 그녀는 역사의 증인이 되고자 가족을 떠나지만, 정신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에서는 과거를 드러내는 두 가지의 방법이 제시된다. 하나가 뇌를 스캔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언어로 과거를 진술한 회고록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회고록은 출간되지 못한다. 대신 영화는 플래시백 지점에서 뇌 스캔 데이터 영상과 과거의 장면을 직접 연결한다. 요컨대 관객들은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뇌를 ‘본’ 셈이다. 이러한 설정 탓에 영화 속 피해생존자는 다소 괴기스럽기까지 한 복잡한 기구를 머리에 쓰고 뇌 검사를 받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피해자의 뇌를 열어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의도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실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역사 왜곡의 문제가 제기된다. 결국 영화의 의도는 줄곧 공격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의 진술이 아니라, 피해자가 실제 경험한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 더 문제는 ‘사실 입증’의 강박이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차단해버린다는 점이다. ‘원본성’에 대한 강조는 당사자성을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실제로는 피해자의 주체성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나아가 증언자와 청취자의 상호 소통과 대화의 여지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증언을 상상하는 방식은 이것과 얼마나 거리가 있을까. 현재 일본군‘위안부’ 증언 문제는 곤경에 처해 있는 듯하다. 역사 왜곡과 증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령인 증언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위기감까지 겹친 것이다.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요원한데, ‘증언(자) 부재’의 시대는 임박하게 다가와 있다. 이는 피해생존자가 한 분이라도 더 계실 때 증언을 아카이빙 해야 한다는 다급함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피해생존자를 AI로 구현한 <영원한 증언>이라는 콘텐츠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노골적인 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생존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령화”[1]가 콘텐츠 개발을 촉발했다는 데서 오늘날 증언이 당면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이 연구가 기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한 증언>은 미리 추출된 질문지를 통해 시나리오를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청취자가 증언자의 형상을 한 AI에게 질문하여 ‘대화형 증언(Interactive Testimony)’을 청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콘텐츠 개발에서 특히 공들인 부분은 증언자의 ‘현존감(presence)’인 듯하다. 기획 의도에서 청취자가 지금 여기에서 피해생존자 당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실감이 전달될 때, ‘사실 효과’를 배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강하게 묻어난다. 물론 당사자의 증언은 존중되어 마땅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원본성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증언을 편협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원한 증언>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증언자의 현존감을 구현하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재현된 증언자에게서는 오직 ‘피해자’의 면모만이 부각되기 쉽다. 증언 연구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위안부’ 피해가 과거의 경험에 한정되지 않으며, 동시에 전 생애가 피해자성으로만 점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지털 증언에 관한 학술대회에서 한 토론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와의 ‘만남’이 피해사실에 대한 청취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2] 피해사실을 거듭 말하는 AI를 구현하겠다는 발상은 증언을 세련되게 ‘화석화’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로 왜소하게 구현된 증언자를 증언자의 전체적 면모라고 착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대화’라는 착시효과다. <영원한 증언>은 사전에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AI가 청취자와 대화를 하는 형태다. 따라서 “증언자의 데이터가 질문자의 질문 데이터와 매칭이 되지 않는, 이른바 비유효 질문들(Fallback-questions)이 발생”하는 경우가 문제가 되는데, 이때에는 “자연스럽게 이미 데이터베이스화해둔 일반적인 증언자의 발화내용으로 자동 매칭되는 방법을 구사”[3]하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물론 AI 기술은 발전 중에 있는 것이므로, 기술 진보에 따라 새로운 방법이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대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대화는 서로가 한 번씩 돌아가며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2000년 이후 학계는 증언이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간의 공동 작업이며, 생존자의 기억이란 그를 둘러싼 사회의 사고방식과 규범 속에서 다각도로 영향을 받는 와중에 생산되는 것[4]이라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곧, 증언이 증언자와 청취자 사이의 ‘대화’라고 할 때, 이때 대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로써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매체로 구현하고자 하는 증언이 청취자를 대화참여자, 다시 말해 ‘증언참여자’로 이끄는 ‘대화’로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증언(자) 부재’의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다른 한편 새로운 매체 기술에 힘입어 증언 아카이빙을 서두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증언자를 디지털 매체로 구현하여 영속하게 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그런데 ‘영원한 증언’은 이렇게밖에 달성될 수 없는 것일까. 증언집 4권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에 참여한 조사자들은 증언자의 ‘침묵’까지 들으려고 노력하면서 “점차 ‘증인’이 되어갔다”고 한다. 침묵을 듣는다는 것은 “왜 그때 증인이 침묵했었을까에 대한 면접자의 ‘이해’가 요청되는 차원의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이미 증인과 면접자의 상호 주관성이 만들어지고 표출”된다는 것이다. 증언이 조사자와 증언자의 공동 생산물이라면, 조사자가 “점차 ‘증인’이 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5] 이러한 사례를 참조하자면, ‘영원한 증언’은 증언자를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 그야말로 ‘오지 않은(未來)’ 증인을 초대함으로써도 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위안부’ 증언 연구는 사실성의 잣대로 증언을 검증하려는 실증주의와 모든 진실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상대주의적 진실관 양쪽 모두를 지양하면서, 법적 진실을 초과하는 증언의 진실을 탐구해 왔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증언에 접근한다고 해서 이러한 고민의 결과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간의 연구 성과를 되돌려 다시 시작하기엔, 우리에겐 정말 시간이 없다. 각주 ^ 김상용, 「AI기반 실감형 인터랙티브 콘텐츠, <영원한 증언>-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의 인터랙티브 콘텐츠 제작을 통해 본 ‘증언의 현재성(The present of testimony)’ 고찰」, 『디지털콘텐츠학회논문지』, 2021, 1816쪽. 이하 <영원한 증언> 콘텐츠에 관한 설명은 위의 논문을 참조한 것이다. ^ 이는 2022년 7월 29일 열렸던 <다차원의 증언을 만난다는 것> 학술워크숍의 토론자 후루하시 아야의 발언이다. 이외에도 학술워크숍에서는 중요한 논점이 제기되었기에 간략하게 밝혀 둔다. 임경화는 <영원한 증언>이 모델로 삼은 쇼아 재단의 ‘증언의 다차원성(Dimensions in Testimony)’ 프로젝트를 참조하면서, 증언 수집에 있어 ‘피해자’들 사이의 국경을 넘고 ‘피해자’와 ‘해방 주체’의 경계선을 넘으려는 다차원적 시도가 필요함을 지적하였고, 박소현은 증언을 전시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발표하면서 ‘위안부’ 할머니와의 대화가 무엇을 공론화하기 위한 것인지, 어떻게 ‘다른 목소리들’과 연대하며 증언을 ‘현재화’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더불어 역사의 책임을 밝히기 위해 희생자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할 뿐 아니라, 퇴역군인들의 증언 등을 통해 폭력 시스템을 밝힐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 장수희는 윤리적 목적을 내세우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외설적으로 소비했던 대중소설들을 제시하면서, 정의감만으로 증언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길 주문했다. 나아가 손쉽게 청취할 수 있는 증언이 ‘증언 서비스’로 가볍게 소비됨으로써 본래의 의도를 배반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학술워크숍에서 제출된 논점들은 앞으로 증언 아카이빙 방법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김상용, 앞의 글, 1819쪽. ^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 「증언과 역사쓰기-한국인 “군 위안부”의 주체성 재현」, 『사회와역사』, 2001.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신대연구회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한울, 200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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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다큐멘터리 〈코코순이〉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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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코코순이〉(2022)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미얀마(옛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가운데 한 명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를 심문해 기록으로 남긴 한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코코순이〉는 또 끝내 찾지 못한 나머지 19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기리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들 ‘위안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사실이 왜곡되고 조작됐는지, 또 그런 보고서가 어떻게 악용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당시 연합군 측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일본계 미군 병사들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들을 심문했고, 심문과 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던 미국 전쟁정보국(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OWI) 심리전팀은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코코순이〉는 그 보고서에 작성된 20명의 ‘위안부’ 명단 가운데 KOKO SUNYI로 기재돼있는 한 여성이 실제로 누구인지 찾아내고, 그 보고서가 무슨 이유로 엉터리로 작성되게 됐는지, 또 그 보고서 내용이 어떻게 일본 극우세력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됐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그해 4월 국사편찬위원회 내 한시적인 조직이었던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으로부터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8호와 49호, 그리고 관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저는 KBS 보도본부의 시사다큐 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에서 취재와 제작을 담당하는 기자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안부-전쟁범죄 조사팀〉의 황병주 편사연구관, 김득중 편사연구관과 함께 3개월에 걸친 취재에 나섰고, 그해 8·15 광복절 특집 ‘위안부’ 2부작 ‘전쟁범죄’와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두 편을 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만도 ‘위안부’와 관련한 각종 증거 자료와 사료 등을 확인하기 위해 6개 나라를 방문하는 등 광범위한 취재를 진행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았고 편집 등 후반작업 과정에서도 많은 아쉬움이 남아있었습니다. 제작자들이 흔히 표현하는 ‘아이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특히 아쉬웠던 점은 그 당시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제적부를 통해 찾은 ‘박순이’라는 할머니가 일본군 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기록돼있는 코코순이(KOKO SUNYI)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정도까지만 확인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극우단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텍사스 대디’라는 미국인을 직접 인터뷰하지 못했다는 점도 끝내 아쉬웠습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매춘부로 비하하는 일본 극우단체들과 텍사스 대디의 연관성을 정황 정도로만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8년 8월 15일과 21일 KBS 1TV를 통해 2부작 방송이 나간 뒤 제 나름대로 세웠던 계획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내용들을 확인하고 또 당시 진행했던 각종 인터뷰와 자료 등을 묶어 책으로 내는 것이었습니다. 현업에 치이면서 2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2020년 5월 우연히 지인을 통해 KBS미디어의 독립영화 제작 담당인 김형진 PD님을 소개받으면서 갑자기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으로 계획이 급선회했습니다. 〈시사기획 창〉을 통해 2부작으로 방송했던 내용을 다큐 영화로 재제작하기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제가 나름대로 마련한 전제 조건이 몇 개 있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와 코코순이의 연결고리가 직접 관련이 있는 당사자를 통해 확인돼야 하며, 텍사스 대디를 직접 인터뷰함으로써 일본 극우단체들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확인해야 재제작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코코순이를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 심문 관련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아쿠네 겐지로에 대한 추가 인터뷰가 꼭 성사되어야 했습니다. 90대 중반의 아쿠네 겐지로는 전쟁 당시 심문관으로 참전해 미얀마 미치나에서 코코순이를 비롯한 ‘위안부’ 20명을 목격하고 실제로 그들과 대화를 나눴던, 그리고 그 ‘위안부’들이 생포됐을 당시 함께 붙잡힌 평양 출신의 간호사 김 씨를 직접 심문하기도 했던, 이 다큐 영화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2020년 10월 본격적인 영화 제작이 시작됐지만, 곧바로 벽에 부딪혔습니다. 박순이 할머니의 주변 인물을 찾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박순이 할머니 주변 인물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으로 기록된 1946년생의 한 남성이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영면에 드실 때 그 곁을 지켰고,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도 직접 했던 것으로 확인된 70대 남성으로, 이름은 박원학 씨였습니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저는 박원학이라는 인물은 박 할머니의 비동거 친족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시사기획 창〉 특별취재팀은 스위스 적십자사의 문서보관소에서 20명의 조선인 여성들과 어린 아이 등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파키스탄의 카라치항에 대기하고 있다는 문서를 발굴한 바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이듬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남아시아에는 조선인이 매우 드물었고,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됐던 코코순이 등 20명의 ‘위안부’들이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의 비카너 수용소에 수용됐다는 연합군 측 보고서 내용까지 확인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라치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20명의 젊은 여성들이 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붙잡혔던 바로 그 조선인 ‘위안부’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습니다. 저는 당시까지 확인된 모든 정황과 기록을 토대로 박원학 씨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던 어린이 가운데 한 명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박순이 할머니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은 경상북도 영천시 동부동사무소였습니다. 2008년 박순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사망신고서가 접수됐던 곳입니다. 박원학 씨에 대한 각종 정보가 있는 곳이었지만, 동사무소 관계자들은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사실관계 확인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또 2018년 취재 당시 제적부에서 박순이라는 존재를 함께 찾았던 함양읍 행정복지센터 민원과 관계자 역시 현업에서 떠난 상황이어서 협조가 불가능했습니다. 박순이 할머니가 노년에 살았던 함양 인근 노인정과 노인복지센터까지 일일이 뒤지면서 박원학 씨의 흔적을 찾는 지난한 작업이 계속되던 중 결정적인 단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 취재 당시 함양읍 행정복지센터에서 촬영했던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살피던 중 센터 측 컴퓨터 화면이 찍힌 영상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취재진은 박원학 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박원학 씨의 친척과 지인 등을 통해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를 만나게 되면서 박원학 씨가 박 할머니의 사위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손자를 통해 박 할머니의 둘째 딸을 만나면서 코코순이와 박 할머니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모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의혹의 인물 텍사스 대디를 만나는 것은 박 할머니 가족들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인터뷰 섭외 과정부터 난항이었습니다. 텍사스 대디라는 인물은 매우 조심스럽게 선별적으로 외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는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겁니다. 이에 제작진은 미국 현지의 한 영상 제작업체 이름을 빌려 그 업체 이름으로 다시 인터뷰 요청을 시도했습니다. 인터뷰 내용도 미국 내 보수주의 유튜버들의 활동이라고 밝히는 이른바 ‘언더커버’ 전략을 썼습니다. 결국 텍사스 대디와의 인터뷰 도중에 ‘위안부’ 이슈에 대한 질문이 본래 목적이었음을 밝혔고, 잠깐 동안의 반발은 있었지만 텍사스 대디 역시 예정된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면서 큰 문제 없이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 사이에서 텍사스 대디라는 애칭으로 통했던 토니 모라노 씨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모두 틀린 내용을 왜 그렇게 집요하게 주장해왔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이 다큐 영화를 제작하면서 세 가지가 가장 아쉬웠습니다. 첫 번째로, 아쿠네 겐지로와의 추가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쿠네 겐지로는 2018년 첫 인터뷰 당시에도 여러 차례 인터뷰 장소를 바꾸고 시간도 변경하는 등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공영방송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을 하자 인터뷰 내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이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둘째 날 인터뷰 일정은 본인이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당시 아쿠네 겐지로는 ‘위안부’가 찍혀있는 사진에서 한 여성을 가리키면서 그 여성이 특히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제작진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쿠네는 ‘위안부’ 20명을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한 한 여성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심문 과정에서의 언어 문제, 의사소통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인터뷰가 잡혀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봤을 때 그 판단은 실수였습니다. 2021년 제주도와 미국 뉴저지에서 각각 박순이 할머니의 외손자와 둘째 딸을 만났을 때 비로소 아쿠네가 가리킨 여성이 코코순이 즉 박순이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아쿠네 겐지로를 다시 만나고 싶었고, 다시 만나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코코순이를 지목해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쿠네는 끝내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아쿠네와 코코순이의 스토리는 다시 어둠 속에 갇혔습니다. 두 번째는 중국 내몽골의 한 마을을 직접 취재하지 못한 점입니다. 해당 마을은 박순이 할머니가 60년 동안 살았던 조선인 집단 거주마을입니다. 박 할머니의 둘째 딸에 따르면 그 마을에는 또래 할머니들이 한평생 자매처럼 지냈다고 했는데 이름도 없이 모두 대구댁, 진주댁 등으로만 불렸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모두 어디에선가로부터 그 집단 거주마을로 이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도 제작진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직접 방문해 그 또래 친구 할머니들에 대한 취재도 같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본군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에 적혀있는 ‘위안부’ 20명의 주소를 보면 대구와 진주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진주 출신은 4명으로 기억합니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적부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으로 타겟을 정한 곳도 진주였습니다. 하지만 진주시청이 6·25 당시 폭격으로 화재가 발생하면서 제적부가 대부분 소실됐다는 얘기를 듣고 함양으로 선회한 바 있습니다. 중국 내몽골 현지 취재를 추진하던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대유행이던 때였고,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중국 입국 과정에서 무려 3주일의 격리,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2주일의 격리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여러 촬영 장비를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는 것도 당시로서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이 외국인들의 국내 취재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중국 현지 취재는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미얀마 미치나에 대한 재촬영 불발이었습니다. 제작진은 이미 2018년 ‘위안부’ 2부작 취재·제작 당시 미얀마 미치나에 있는 조선인 위안소를 최초로 발굴한 바 있었습니다만 〈코코순이〉 재제작을 위해서는 당시 취재의 허점을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부족한 영상에 대한 보충 촬영과 조선인 ‘위안부’를 목격한 현지 주민의 추가 인터뷰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돼 미얀마 대사관을 통해 정식 입국 절차를 밟았고, 그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미얀마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승인 소식을 기다리던 2021년 2월 1일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였습니다. 결국 미얀마 미치나의 위안소 관련 분량은 대폭 조정됐고, 애니메이션과 각종 하이라이트 효과, 문서 CG 등으로 모자라는 영상과 부족했던 설명을 대체하게 됐습니다. 〈코코순이〉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간단명료합니다. 70여 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역사 왜곡을 조금이라도 더 논리적으로 반박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대사의 비극을 아프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코순이〉 제작진은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모든 행적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중에 단 한 분, 코코순이로 기록돼있는, 경남 함양 출신의 박순이라는 분이 일제 강점기 경성지역에서 유흥업을 하던 일본인 위안소 업주의 농간에 속아 미얀마로 끌려갔다가 일본군과 함께 포로로 붙잡히고, 미군이 주도하는 심문을 거친 뒤 다시 미치나를 떠나 인도와 싱가포르를 거쳐서 중국 내몽골 지역의 한 외딴 마을에서 살다가 결국 2004년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고 4년 뒤 영면에 드셨다는 것만이 확인됐을 뿐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500개가 넘는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습니다. 일본 정부나 군부가 직접 운영한 위안소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한 위안소를 모두 합친 숫자입니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와 인도에까지 설치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그곳으로 끌려간 ‘위안부’ 숫자만도 많게는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곳을 거쳐 갔던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영화 제일 마지막에 국사편찬위원회 황병주 편사연구관의 인터뷰 내용을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당시에 동남아시아나 중국, 남태평양 등에 수백 개소의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게 확인이 되고 있죠. 거기에 끌려가신 ‘위안부’ 숫자도 많게는 20만 명까지 보는 분들도 있을 정도로 대단히 많은 분들이 끌려가서 고생하셨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이분들의 삶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 우리는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건지 귀국은 하신 건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인 거죠. 이분들의 삶을 한 분이라도 더 확인해서 널리 알려서 같이 공유하는 게 현재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중요한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