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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김숨-소영현 대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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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되지 못한 말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숨 작가의 중편소설 『듣기 시간』에 나타난 ‘침묵들이 말이 되는 자리’는 그간 우리가 놓친 증언자의 목소리를 되찾게 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님의 증언 구술 채록을 통해 정서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고, 기록하며 침묵을 듣는 곳까지 도달한 작가는 마침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은 ‘듣기’”라는 선언을 이루어낸다. ‘위안부’ 소설 『한 명』을 시작으로 『흐르는 편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증언집), 그리고 『듣기 시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발전했을까. 구술 채록은 증언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적는 것이 아니라 채록자와 증언자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계속해서 바뀌는 작업이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증언을 하는 자와 듣는 자 간의 관계는 때로는 조화를, 때로는 불화를 낳기도 한다. 구술 채록 과정에서 작가가 갖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김숨 작가와 문학박사 소영현(한국문학번역원 교수)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듣기 시간』을 중심으로 ‘증언’과 ‘듣기’, ‘들을 수 있음’의 사이사이를 경유하며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소영현 증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성숙해졌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하신 바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김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 살아 돌아오시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시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한 분들이세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하루 또 하루 살아내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뵙는 것 자체가 경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소영현 김복동, 길원옥 두 분에 대한 증언소설을 다시 읽다보니 두 소설의 사뭇 다른 분위기가 새롭게 눈에 띄더라고요.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가 지닌 각각의 면모가 작품에도 녹아들었을 텐데, 두 분을 만나 뵈었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달랐는지, 직접 구술 채록자의 입장이 되어 작업해본 경험은 어떠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숨 두 분이 정말 다르세요. 한 공간에 살고 계셨지만 다른 기질과 개성을 갖고 계셨고 다른 언어로 말씀하셨어요. 김복동 할머니는 선이 굵으셨어요. 꼭 해야 할 말씀만 아껴 하시는, 대쪽 같은 선비 이미지가 저절로 겹쳐 떠오르는 분이셨지요. 뵙자마자 권위가 느껴졌는데 할머니께서 갖고 계신 ‘강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드러났어요. 굉장한 인내심의 소유자이시기도 했고요. 반면에 길원옥 할머니는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셨어요. 하지만 그분 역시 만만찮은 인내심의 소유자이시지요. 김복동 할머니를 뵈었을 때는 항암치료를 하고 계셔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씀도 들려주시지 않는 그 시간에도 할머니께서 끊임없이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어요. 침묵이 단지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길원옥 할머니는 손발이 딱딱 맞아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저 좋은 친구 같은 느낌을 선물해주셨어요. 할머니와의 대화가 무척 문학적으로 느껴져서 흥분이 되곤 했어요. 대화가 뜬금없고 엇갈리고 엉뚱한 곳에 도달하지만 그럼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어요. 할머니와 대화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사정상 중단되어 무척 아쉽습니다. 소영현 할머님들의 성격이 증언소설에 드러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뵈었을 때의 느낌이 반영된 것이었군요. 길원옥 할머님을 두고 쓰여진 증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는 특히 문학적 성격이 짙어서 시적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김숨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 기분으로 할머니와 대화했어요. 뵙는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드리고, 할머니께서 뭔가 (질문과 어긋나는 대답이어도) 어떤 대답이든 해주시면, 그 대답을 듣고 떠오르는 질문을 즉흥적으로 드리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날은 오전부터 저녁때까지 길게 대화가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짧게 끝났어요. 그리고 할머님을 뵙고 돌아오면 마치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천상 세계에, 선(善)한 세계에 다가갔다 지상으로 내려온 기분이 들었어요. 한없이 더러운 저라는 인간이 감화를 받고 조금 선해져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요. 소영현 두 분을 만나 뵙고 증언소설 집필 후 『듣기 시간』을 쓰셨죠. 이 작품은 어떻게 작업하게 되셨는지요. 김숨 『듣기 시간』은 과거에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던 단편소설 「녹음기와 두 여자」를 퇴고한 것이에요. 할머니들을 뵙기 전에 쓴 소설이죠. ‘위안부’ 증언집에 증언을 채록하고 기록하신 면담자들이 남긴 후기가 실려 있는데, 그 글들이 굉장히 흥미로워 증언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해 써보고 싶었죠. 그런데 「녹음기와 두 여자」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소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소영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21세기문학』에 실렸을 때 저는 좋아했는걸요. 그 작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고요. 김숨 너무 허술해요. 그 소설을 잊고 있다가 다른 ‘위안부’ 소설인 『흐르는 편지』를 쓰고,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뵌 뒤 두 권의 소설을 내고 나서 자연스레 그 작품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할머니들을 짧게나마 뵙는 동안 저절로 퇴고가 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듣기 시간』은 시기상으론 가장 먼저 썼지만, 사실상 두 권의 소설(『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뒤돌아보는 거야』) 뒤에 놓여야 하는 작품인 것이지요. 소영현 「녹음기와 두 여자」, 『듣기 시간』 사이에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구술 채록된 증언을 소설 안으로 들여오는 방식도 달라졌고, 채록자를 중심에 둔 성격이 좀 더 뚜렷해지기도 했고요. 피해자의 침묵 사이를 채록자의 이야기가 채우고 있는 점에도 주목하게 됩니다만, 무엇보다 단편소설에서는 두 할머니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듣기 시간』에서는 다르죠. 주로 황 할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문 할머니와의 일화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요. 퇴고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숨 3~40년 긴 시간을 두고 할머니들과 소통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분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분들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예리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저희는 언론을 통해 영웅화된 분들만 주로 뵈었던 것 같은데, 트라우마를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들도 계시고, 비관 속에 숨어 살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그분들이 들려주시는 말씀도 담아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반성을 시작하며 『듣기 시간』을 퇴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되도록 배제하려고 했어요. 증언 채록자분들을 만나 뵈면서, 제가 읽었던 자료들에는 나와 있지 않은 진솔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요. 할머니들이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인식하고 선언하실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분들을 만나 뵙고 새롭게 깨달은 것들을 『듣기 시간』에 담으려 나름 애를 쓴 것 같아요. 그래서 「녹음기와 두 여자」와 『듣기 시간』은 저에겐 다른 소설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영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을 보면 1권에서 3권으로 넘어가면서 성격이 달라집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대두된 초기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 있는 증거’로서의 피해자 증언 자체가 중요했다면, (침묵이나 표정까지 포함한) 말을 문자로만 이루어진 글로 옮기는 구술 작업을 하면서 채록자들이 직접 대면해야 하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고 구술이나 증언에 대한 고민도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설을 쓸 때도 하게 되는 고민일 것 같은데요, 그런 차원에서 『한 명』과 『듣기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증언 인용 방식의 차이는 어떤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숨 『한 명』에서는 증언을 소설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 증언이 허구가 아니라는 걸 저 자신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독자분들에게는 피해자가 겪었던 일을 과장 없이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인생을 살아내고 계신 분들의 ‘하루’를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할머니 한 분의 몸 안에 복수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소설이 시작되었는데요, 증언들을 읽고 체화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들께서 하신 말씀들을 제 안으로 갖고 오면서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할머니들을 직접 뵙고 침묵을 몸소 경험하며 『듣기 시간』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소영현 『듣기 시간』을 통해 “최초의, 최선의, 최후의 질문이 ‘듣기’”라고 하셨습니다. “녹음기 400개의 구멍으로도 부족하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듣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랫동안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학자인 오카 마리(현대 아랍 문학,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연구자)가 강조했던 것처럼, 모든 피해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어 말해왔고,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들을 귀가 없는 우리가 진짜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문제이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들을 수 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김숨 내가 듣기를 잘하는 사람인가 자문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아무 말씀도 들려주실 수 없는 상태로 누워 계실 때 저 또한 어떤 질문도 던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침묵이라도 적어보자 했지요. 침묵을 듣고 기록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듣기가 어려운 행위라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한 채 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말하기도 하니까요. 가령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표정, 몸짓, 탄식, 한숨 등으로요. 그래서 특히 피해자의 말은 온 감각을 열어놓고 들어야 해요. 침묵을 연달아 들려줄 때 침묵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예리한 감각으로 들어야 합니다. 돌아보자면,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께서 들려주신 말들 중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들었던 게 아닌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기 위해 특정 질문을 반복해서 드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증언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어떻게 끌려갔고, 어떤 고초를 겪었고, 어떻게 살아 돌아왔고, 이후 어떤 왜곡된 삶을 살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한 분의 증언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듣기’를 잘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저 자신부터 먼저 반성하게 됩니다. 소영현 폭력적인 고통이나 기억을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듣지 않으려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거죠. 불편하다는 이유로 회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고통의 말과 몸짓을 듣거나 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피해자분들이 말씀을 하셔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해도 어차피 수용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말씀을 안 하게 되시는 것 같습니다. 김숨 우리가 듣기를 잘했다면 더 다양한 질문들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그 과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넘어 인간에 대한 통찰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할머니와의 첫 만남에서 “뭐가 가장 보고 싶고 그리우시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그런데 여태 들어보신 적 없는 질문이었는지 당황해하셨죠. 저는 할머니가 누구를 가장 그리워하는지, 어디에 가장 가고 싶으신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지 궁금했거든요. 그 질문에 할머니께서는 사적인 이야기를 차차 들려주셨고, 이전에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지기도 했어요. 소영현 구술 채록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건넬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네요. 기본적으로 기억은 왜곡, 변형, 취사선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증언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활용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피해자의 삶이 진상규명을 위한 증거로 축소되어버려서는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모두가 증언자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기도 한데요. 작가님의 말을 듣고 보니, 증언하지 않는 방식으로 증언하거나 증언을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그 자체로서 한 분 한 분의 기록을 남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증언인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다양한 방식의 ‘증언’에 대한 기록이 축적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증언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고민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을 갖고 있었던 듯하여 반성하게 됩니다. 김숨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쓰게 된 뒤로 늘 반성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소영현 구술 채록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증언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증언이라는 것은 구술 채록자의 질문과 피해자의 답변(목소리가 아니더라도 행위, 침묵 등 모든 것)이 모두 합쳐진 작업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구술 채록자의 면모 또한 증언이라는 전체 논의 속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김숨 맞아요. 구술 채록 작업을 해오신 분들의 글들도 굉장히 흥미로워요.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해놓으신 작업 덕분에 소설도 쓸 수 있었고요. 그분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소영현 『듣기 시간』의 화자 성윤주가 구술 채록 작업을 회상하며 할머니와 친밀해지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역겹다 못해 환멸스럽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 대목을 쓰면서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김숨 면담 후기를 읽으면서 채록자분들께서 이런 감정을 느낀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할머니들께서 피해 경험을 말씀하시도록 하는 게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쭤보게 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럴 때 저 자신에게 어떤 환멸 같은 걸 느꼈는데, 구술 채록자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저보다 더 진하게 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구술채록을 하는) 내 앞의 살아남은 피해자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존경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없이 비참하게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비참함까지 담아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 아닐까 싶습니다. 소영현 증언이 기록물로 남지 못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피해자 본인 또는 가족이 증언을 기록물로 남기는 걸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듣기 시간』에 등장하는 황 할머니의 여동생 캐릭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피해자 신고를 반대하고 구술 작업에도 거부감을 드러내는 인물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 할머니가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여동생은 언니의 피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말을 전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여동생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를 말할 수 없게 하는 ‘우리’를 대표하기도 할 텐데요. 그 인물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김숨 증언집을 읽을 때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었어요. 자신의 피해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될까 봐 할머니가 불안해하시는 부분이었는데요,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어렵죠. 본인이 피해자라는 것을 세상에 말하면 가족과 절연하게 될 상황에 계셨던 분들의 증언을 읽으면서 여동생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그려졌어요. 『듣기 시간』의 여동생이 어쩌면 저 자신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소영현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만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의 의미와 위험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고요. 이제 ‘위안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학에서도 새로운 시선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작가님께서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숨 ‘위안부’ 소설은 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부여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엄연히 문학이기 때문에 의미뿐만 아니라 문학적 성취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처음에 펴낸 『한 명』은 부족함이 곳곳에서 보이는 아쉬움이 많고 부끄러운 소설이에요. 마지막으로 펴낸 『듣기 시간』은 오히려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소설이고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위안부’ 소설을 다시 쓰게 된다면, 혹은 다시 퇴고를 하게 된다면, 인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인 ‘나’ 자신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소영현 인터뷰이: 김숨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달로14가길 5 1층 흑석커피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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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그래픽 노블 『풀』 일본어 출판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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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 만화 『풀』(김금숙, 보리, 2017)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님의 삶을 바탕으로 세계 공통의 소망인 인간의 존엄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히로시마현의 중학교 교사 시절 평화교육과 성교육의 관점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또 한 시민으로서 피해자 지원 운동과 한일시민연대 활동을 해왔다.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에서는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전쟁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자민당 정권은 가해 사실을 왜곡·은폐하고 배상도 거부하고 있다. 일본 헌법이 보장한 삼권분립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정부의 이런 태도를 추종하는 듯한 판결을 계속 내놓고 있다. 학교 교육이 수험교육 위주로 편중되면서 근현대사는 경시되고, 뜻있는 교사와 만날 기회가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비롯해 과거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배울 기회가 적다. 이런 상황은 전쟁이 단순히 가해와 피해의 이항 대립이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게 한다. 나는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리고 평화를 희구하는 태도를 배양하기 위해 『풀』의 일본어 출판에 나섰다. 2. 그래픽 노블 『풀』과의 만남 퇴직 후 2013년 한국으로 어학유학을 온 나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나 시민들과 교류를 거듭하면서 2014년에 김금숙 작가를 만났다. 취약계층에 빛을 비추는 작품을 그려온 김 작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교류를 하며 함께 베트남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운반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14일 김금숙 작가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 『풀』이 한국에서 발간됐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중단하려는 일본 정부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일본 사회를 생각할 때 『풀』은 빛나 보였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어렵거나 자신과 상관없는 과거의 문제라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움직인 힘은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해 작품과 관련된 사람들이 운동적으로 나와 연결돼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풀』이 프랑스어로 출판되고 영어판도 준비된다는 얘기를 들으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책임져야 할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읽혀야 할 책이 일본 이외의 국가들에서 먼저 출간되는 것에 조바심을 느꼈다. 서울 만화박물관에서 열린 『풀』 원화전에서 만난 한 여중생의 어머니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쉽게 가르치기 어렵지만 이런 식으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라는 다르더라도 누구나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일본에 이런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은 어떻게든 일본어로 출판되어야 할 책이라고 확신했다. 독서를 기피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만화라는 매체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 자원봉사자는 만화 『맨발의 겐』(작가 나카자와 게이지가 자신의 피폭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만화)을 읽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만화로 인류 보편의 주제를 국경을 넘어 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3. 일본어 출판 경과 일본에서 번역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룬 한국 그림책으로는 『꽃할머니』(『花に水をやってくれないかい?』, 권윤덕, 쿠와하라 유카 번역, ころから, 2018)와 『끝나지 않은 겨울』(『終わらない冬』, 강제숙(글), 이담(그림), 양유하/쓰즈키 스미에 번역, 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일본 번역서 제목), 2015)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이 일본에서 출판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본 우익세력의 공격과 그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출판 업체, 도서관의 태도가 장벽이었다. 그럼에도 기획자들의 열의와 시민들의 협조가 큰 힘이 되어 출판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선례를 참고로 『풀』의 일본어 출판은 많은 시민과 협력하는 것을 중요시해 진행하기로 했다. 우선 『풀』 일본어 출판위원회를 구성했다. 공동대표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명예관장인 이케다 에리코 씨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 사무국장 오카하라 미치코 씨, 그리고 나, 셋이 됐다. wam은 두 차례나 우익의 폭파 협박을 받은 적이 있고, 이케다 씨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풀』 일본어 출판의 의의를 중요시하며 함께 일어섰다. 우리는 학습회와 강연회,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활동을 진행했다. 강연회장에서 일본어 출판을 열심히 해달라고 즉석에서 후원해 주는 지원자도 있었다. 『풀』 일본어 출판 자금 모금과 그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서 읽히고 있는 ‘위안부’ 만화 풀을 번역 간행하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크라우드 펀딩(이하 CF)을 시작했다. 2019년 9월 7일 출범한 CF는 호조를 보였고, 『풀』이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프랑스 일간지 휴머니티가 선정하는 ‘휴머니티 만화상’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것도 훈풍이 됐다.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펀딩 금액과 뜨거운 지원의 목소리 덕분에 책 판매가격을 예정보다 낮출 수 있었고, 김금숙 작가를 일본으로 초청해 4곳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개최할 수 있었다. 접수된 응원 메시지 중에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멋진 발상을 알고 응원하고 싶다”, “표현의 자유를 방해하는 움직임에 의구심을 느낀다(CF 시작 전 평화의 소녀상 등 전시를 우익이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풀』을 빨리 읽고 싶다” 등의 뜨거운 생각이 담겨 있었다. 당초 일본 우익의 방해를 우려했던 김금숙 작가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코로나 유행이 우려되는 시기였지만 과감히 일본을 찾아줬다. 4. 일본어 번역 작업의 과정 『풀』의 일본어 번역에는 몇 가지 넘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우선 번역 수준의 문제다. 이것은 우리가 시작한 샘플 번역이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해외번역 조성사업으로 선정되고 강력한 협력자를 얻으면서 불식되었다. 공동번역자 리령경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으로 대구 경북지역 피해자들을 지원하면서 그 만남과 인연으로 평화학에 매진하는 데에 방향을 잡았다. 『풀』의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의 통역을 맡기도 한 그는 일본어 출판 운동에 관여하고 싶다고 주체적으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사투리 번역뿐 아니라 사실 검증 작업에도 힘을 발휘했다. 그가 오랜 세월 피해자들의 지원 활동을 해온 것과 대구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옥선 님의 부산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김금숙 작가를 크게 안심시켰다.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글자 수로 원작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해야 하는 만화의 독특한 번역 작업은 주인공인 이옥선 님과 작가의 심정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지 늘 묻는 작업이기도 했다. 한 가지 예를 소개한다. 작중에 작자가 이옥선 님을 찾는 장면이 있다. 나눔의 집 마당에 있는 피해자들을 모티브로 한 여성 반라상 그림에는 작가의 심정이 담겨 있다. 이옥선 할머니의 끔찍한 체험을 어떻게 들려줄까 라는 작가의 갈등이 그 장면에 투영돼 있다. 직역에 가까운 번역에 출판사로부터 ‘더 시적인 표현’을 요구받았다. 피해 체험 증언은 당사자에게 피해 사실을 재현시켜 강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부터 “증언을 한 날에는 당시 일이 떠올라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증언을 듣는 사람은 피해자의 입에서 나오는 생생한 사실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설 위치를 생각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자로 하여금 피해 기억이 재연되게 하고,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증언자가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증언하는 만큼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고민 끝에 이 부분의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벌써 도착했어! 입구에 있는 늙은 여자의 나신상이 묻는다. “당신도 자기 작품 때문에 우리에게 그 악몽을 말하게 하느냐고” 라고’.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는 ‘가시나’로 불리며 수양녀가 되어 기생이 있는 기루에서 일했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그의 삶에 유교·도덕적 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인권 침해와 일제강점 식민지 지배로 인한 빈곤-계급 문제가 크게 관련됨을 새삼 절감했다. 번역 작업을 하며 『풀』의 작품성을 살리면서도 일본의 우익 대책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숫자 하나까지 트집을 잡아 작품 전체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우익에게 공격의 틈을 주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일본 상황을 잘 아는 김금숙 작가는 일본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내용을 변경해도 괜찮다고 승낙해 줬다. 작중 등장인물의 나이는 일본식으로 만 연령으로 환산하고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와 가사하라 도쿠지 쓰루 문과대 명예교수에게 지도와 조언을 받으면서 외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난징대학살 장면 등에 일본어판의 독자적인 번역을 넣었다. 이 역시 원작 그림에 맞게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5. 작가와 만나는 모임 도쿄·오사카·히로시마·후쿠야마의 네 개 장소에서 개최한 ‘작가와 만나는 모임’에는 합계 282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활동가, 재일 코리안(한국인과 조선인) 인권 문제 활동가, 조선학교 학생, 장애인 문제와 환경 문제 활동가, 단체, 교사들이 열심히 김금숙 작가와 교류했다. 한 교사는 “일년에 한번 ‘위안부’ 문제 수업을 한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이 조선말을 쓰면 교사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현재의 일본 정부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우리 일본인이 이웃에게 어떻게 해왔는지를 따지는 의미에서도 『풀』은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며 평화와 성교육 부교재로 『풀』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또 한 시민은 “한국에서는 젠더 문제와 함께 계급문제라는 시각이 시민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국가 사이에 거리를 두고 여러 문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총중류(總中流: 일본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의식하는 현상)로 불려온 일본에서는 중산층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거기서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급급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국가와 일체화하려는 것 아닌가. 국가가 일으킨 죄로 학대받은 사람으로서 한국과 일본 민중이 공감하고 권력에 맞서기 위해 어떤 시각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풀』은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는 것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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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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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기림의 날 특별 대담 (이 대담은 영문웹진 KYEOL에 게재된 “Beyond Nationalism: The Ongoing History of the “Comfort Women” and Gender Politics“를 국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역사학자 캐롤 글럭 교수와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김은실 교수의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이번 대담에서는 시민사회, 국가, 국제사회를 포함해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위안부’ 운동을 통해 형성된 초국적 연대의 의미를 조명해본다. 캐롤 글럭 컬럼비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 근대사, 20세기 국제사, 제2차 세계대전, 역사 서술, 아시아 및 글로벌 공공기억 등을 연구해왔다. 최근 연구로는 “세계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빚진 것(What the World Owes the Comfort Women)”(2021)과 “정치적 현재로서의 국민적 과거: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2022) 등이 있다. 김은실 교수는 1995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여성의 신체, 섹슈얼리티, 생명권력(biopower),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 민족주의, 젠더 정치, 글로벌화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에 발생한 여성에 대한 젠더 기반 성폭력을 연구하고 있다.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역사학자, 페미니스트 학자로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김은실 1993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한국 여성학의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여성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연사로 초청받았습니다. 컨퍼런스에서 한국 여성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성학을 정의하는 데 있어 민족주의 담론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죠. 구체적인 사례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첫 증언집[1]을 고찰함으로써 민족주의 담론이 ‘위안부’들의 증언을 재구성하는 데 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엄청난 반발을 불러 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나에게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는 학계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한국 페미니스트 학자로 알려지게 되었고요.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대립에 관한 담론이 일어날 때 나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종종 언급되고 있지요. 당시 사람들은 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성을 옹호하기 위해 어떻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가? 국가가 없다면 여성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위안부’도 여성이지 않은가. 동시에 그들은 한국 사람이기도 하다. 여성을 어떻게 국가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 여성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했어요. 나는 이에 대해 “여성이 곧 국가이다. 여성은 한국 국민이다. 국가를 대표로 간주하고, 여성을 국가의 종속된 부분으로 간주해 여성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에 종속되는 경우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 국가는 여성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여성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침묵해야 한다는 식으로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답했어요. 그때가 처음으로 ‘위안부’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1993년의 일이었죠. 1994년 발간한 내 논문 ‘민족 담론과 여성: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2]는 젊은 여성 대학원생들과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다수의 젊은 여성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이 이 논문을 읽고 ‘위안부’를 페미니즘의 틀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캐롤 글럭 나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그리고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전쟁 기억, 기억의 정치라는 좀 더 큰 맥락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내 관심사는 기억이 역사와 관련되는 방식이었어요. 내가 역사라고 알고 있던 것과 공공 기억 속에 자리잡은 것 사이에 괴리가 있었고, 이 때문에 기억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올바른 기억’과 연결시키려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나는 세계대전이라는 전지구적 충돌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은 국경과 국가라는 틀 안에서 말해지고, 쓰여지고,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점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두는 것’을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다양한 지역에서 공공 기억이 형성, 유지,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했지요. 내 첫 번째 목표는 현재 사회에서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개인의 기억과 집단기억은 모두 특정한 때에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지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해요. 기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연구하면서 두 번째 목표를 규정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공공 기억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강고하게 민족주의적인 내러티브들에 맞서 ‘세계’를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역사와 기억을,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더 바람직하게 연결지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기억형성 과정에 개입할 것인가?’라는, 점점 더 시급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자 했어요. 이런 상황이 내가 1991년 ‘위안부’문제를 접했을 때의 맥락이었고이후에도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위안부’는 오랜 과정을 통해 공공 기억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유럽인들의 기억 속에서 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어요. 대부분 지역에서 이러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였습니다. ‘위안부’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공 기억에 눈에 띄게 자리 잡게 되었죠. 사실 감춰진 것은 없었어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위안부’를 알고 있었어요. 이들은 이미 소설이나, 연극, 시각예술에 등장하고 있었거든요. ‘위안부’의 경우 일본 의회에서 논의까지 되었어요. 문제는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공공 기억 속에 이들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위안부’는 대학살하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나는 처음에 ‘위안부’ 문제를 국가와 집단을 넘어서, 그리고 국가와 집단 안에서 기억이 어떻게 변하는지의 사례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주제에 접근해온 방식이 서로 다를지언정 김은실 교수님과 나는 젠더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김은실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로서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신체에 가해진 성폭력과 고통이 어떻게 표현되고 재현되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말해지고어떤 권력이 ‘위안부’ 내러티브를 통제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죠. 또 이들의 경험이 증언집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떻게 대변되는지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19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현재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과, 청자/청중이 이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변해왔습니다. ‘위안부’가 처한 상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계를 여행하는 소녀상: 맥락과 위치성 일본군‘위안부’문제가 국가적 차원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세계 곳곳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초국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데요. 이런 점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세계 여러 지역에 건립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의 ‘위안부’들이 겪었던 강압적 성폭력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소녀상은 두 가지 측면을 대변하고 있어요. 하나는 전쟁 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성폭력과 강간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었다는 측면을 상징합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한국의 순진무구한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는 한국의 특수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소녀상이 만들어졌을 때 순진한 소녀들이 취직을 시켜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고 강제 연행되어 위안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면서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강제 연행과 피해를 대변하는 데 강하게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이미지이자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로 끌려간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침묵시켜버리는 상징이라는 비판이 일었어요. 소녀상의 이미지가 특정 여성들만이 ‘위안부’ 피해자에 해당한다고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소녀상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국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상이 일본군‘위안부’들이 겪은 다양한 경험을 모두 대변할 필요는 없고 전쟁에 동원되어 성폭력을 겪었던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녀상이 전시 여성폭력과 그들의 고통을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재현이 처음에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해서 항상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 의미는 소녀상이 대변하는 표상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조우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설치되면서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소녀상을 보내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려는 측면이 강합니다. 여기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강하게 시사돼요.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글렌데일, 샌프란시스코, 베를린의 경우 현지 사람들에게 소녀상이 전달하는 의미는 한국인들에게 전달되는 의미와 같지 않습니다. 소녀상이 주는 메시지는 그 지역의 사람들, 역사와 만날 때 만들어지는 것이죠. 캐롤 글럭 하나의 동상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소녀상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위안부’를 순진한 소녀에 국한시키는 것은 확실히 환원적인 관점입니다. 한편, 베를린의 경우 소녀상이 일반적인 성폭력을 대변하기 때문에 소녀상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아마도 소녀상의 의미가 축소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소녀상이 지속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녀상이 상징하는 순수성에 대한 비판은 가부장제와 순결을 강조하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비슷한 동상이 베를린 미테(Mitte)에 설치되면 그 맥락은 달라집니다. 방문객은 한국에서 그 동상이 갖는 의미를 모를뿐더러 같은 관점으로 그 동상을 바라보지도 않을 거예요. 상징성 자체가 캘리포니아나 베를린에서 같을 수가 없어요. 이 점은 의미가 환원되고 쉽게 변하는 경향이 있는 기념물이나 기념비 일반에 적용됩니다. 하지만 동상이 여러 곳에 설치되는 경우 환원되거나 의미를 띠는 방식은 다를 수 있어요. 베를린 미테의 경우 소녀상은 한국의 순진한 소녀라기보다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여성 성노예, 전시 강간, 성폭력의 상징으로 인식돼요. 미테의 소녀상은 최근 들어 아시아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강화하기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이는 평화의 소녀상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김은실 평화의 소녀상이 상징성을 띠는 것은 확실합니다. 소녀상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를 대변해요. 인종적으로 소녀상은은 백인 주도 사회에서의 아시아 여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점에서 서구사회의 경우 소녀상이 설치된 장소는 디아스포라, 이민자, 소수인종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로서 비서구권과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위안부’의 역사를 꼭 알지는 못하지만 현재 어려운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글럭 교수님께서 기억과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공공 기억이 변하는 과정을 직접 보면서 해외에 동상을 건립하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이나믹스가 초국적 차원에서 흥미롭게 생각되었습니다. 동시에 소녀상의 역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위치되고, 수정되며, 변형되고 있지요. 캐롤 글럭 ‘위안부’ 문제를 논할 때 다민족 정치에 방점이 찍히는 미국과는 달리, 독일의 경우 소녀상은 이민자들과 더 연계되는 것 같습니다. 또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지지했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잊혀졌던 과거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각각의 사례마다 맥락은 다르고 그것은 중요하죠. 일본 정부가 한 몫을 한 것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세계 곳곳에 소녀상이 건립될 때마다 매번 요란스럽게 항의하지 않았다면 ‘위안부’는 지금보다 덜 알려졌을 것이고 조직적인 성 노예제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전 세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운동에 도움을 주었어요. 일본 정부가 어느 한 지역에 설치될 소녀상에 반대할 때마다 또 다른 소녀상이 다른 곳에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완벽한 기념비 ‘건립’ 정치예요. 소녀상이 설치되는 위치 또한 중요합니다. 베를린의 도심이든 글렌데일의 교외든 애틀랜타 외곽의 공원이든 그 지역성을 반영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다양한 기념물에 결부된 의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한 세대에게 의미 있었던 기념비나 동상이 50년이 지난 후에는 후손들이 빨래를 널어놓는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이 시간과 장소를 넘어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전달하는 주요 매개체가 아니라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좋은 일인지도 몰라요. 베를린에 설치된 소녀상과 관련한 비판도 있습니다. 독일 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발생한 전시 성폭력, 특히 소련군이 자행한 독일 시민 강간 사실에 대해 오랜 시간 침묵해왔다는 비판이 그것이죠. 김은실 어느 전쟁에서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쟁 관련 역사와 연구에서조차도 지금까지 성폭력은 다뤄지지 않았어요. ‘위안부’문제는 독일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일어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하게 만든 중요한 촉매제였습니다. 베를린 소녀상을 둘러싼 논쟁과 논란이 있었지만, 논란 당시 독일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함께 논의되지 않았어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문제, 특히 약자로서 식민지 한국의 여성이 처했던 문제였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아시아 여성의 문제가 서구권이나 일본에서 다뤄지는 경우 여성의 문제가 ‘비서구권’ 또는 ‘아시아’의 문제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느껴지는데, 특히 젠더를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외주화(아웃소싱)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성폭력 문제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함께 다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독일인들이 자국보다 덜 ‘발전한’ 나라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와 함께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젠더 관련 문제들을 독일인들 자신의 문제와 동일하게 보지 않는 게 아닐까 반문하게 됩니다. 캐롤 글럭 동의합니다. 국제적인 또는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미국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자기 사회의 인종차별을 대면하는 것보다 편합니다. 이렇게 국가중심적인 근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이런 시각은 다른 나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또한 고정관념에도 영향을 받죠. 그런 점에서 “유리로 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편집자 주: 비난받을 여지가 많은 사람은 남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독일 학자들과 기억 운동가들이 독일이 겪은 붉은 군대(Red Army)에 의한 전시 강간을 외주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소련군이 자행한 강간 사건의 대부분이 발생했던 구 동독에서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금기시된 것은 사실이에요.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및 다른 국가의 여성들처럼 많은 독일 여성들이 오랜 세월 이에 대해 침묵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 주제는 이제 독일의 공공 기억의 일부분이 됨과 동시에, 학계의 연구(다른 연합군들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을 다룬 미리암 게브하르트 저 <무언의 범죄(Crimes Unspoken)> 참조) 뿐만 아니라 뒤늦게나마 피해자들을 인정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국의 일부 운동가들은 ‘위안부’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내주화(인소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맥락은 달랐어요. 1945년의 베를린은 1944년의 이탈리아 남부나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 1990년대 보스니아나 르완다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전시 성폭력이 어디에서 발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참담하게도 똑같아요. 일본의 ‘위안부 제도’만큼 광범위하고 잔혹하지는 않았더라도 군 매춘소 또한 드물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본이 점령한 여러 아시아 국가 출신의 ‘위안부’는 수십만 명이었죠. 이는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나 기억이 아니에요. 김은실 ‘외주화’가 여기서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젠더 문제가 항상 어떻게 전치되는지에 대해 조금은 비판적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주화’라는 말을 썼어요. 글럭 교수님께서 한국의 일부 활동가들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성폭력 경험을 ‘위안부’에 초점을 맞춰 ‘내주화’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흥미롭고 통찰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 학자들이 전 세계 다른 사례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전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전시 또는 분쟁 시 성폭력 문제 해결에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합니다. 분쟁 중 발생한 성폭력 문제를 제기했던 많은 사회가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전 세계의 다른 사례들과 접점을 만들고 연구한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캐롤 글럭 서로 다른 맥락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할 때, 마법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죠. ‘위안부’라는 말이 어떻게 ‘성노예’가 되었는지를 그 예로 들 수 있어요. ‘성노예’는 1990년대 국제변호사들과 페미니스트들이 보고서에서 강조의 뜻으로 썼던 용어입니다. 지금은 물론 그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일본 정부가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 단어의 사용이 더욱 확고해지기도 했어요. 미래의 ‘위안부’ 기억과 행위자로서의 여성 캐롤 글럭 나는 이 글을 읽으실 많은 분처럼 활동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위안부’ 제도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고 다시는 반복되어서도 안 되는 성노예 제도였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어요. 내 요점은 이러합니다. 나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미래의 여성들에게 변화를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일을 기억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제도와 성착취 및 성폭력이 덜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것들을 더욱 범죄적인 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공공 기억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억이 일을 해주었으면 해요. 피해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 많은 일을 해주고, 미래 여성들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점에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되고, 협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고, 공공 기억에 그것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증언 자체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들의 경험을 공공 기억으로 가져오고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다른 행위자들이 필요합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서 바로 그런 양상이 보였습니다. 행위자로서의 여성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성은 근대 세계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 억눌려왔고 억압받아왔어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성은 또한 행위자이고 항상 행동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이들이 취하는 행동 중 하나이자,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 것들 중 하나이죠. 하지만 (남성을 포함한) 다수의 다른 행위자들의 목소리와 시각도 도움이 되었어요. ‘위안부’ 문제가 이러한 예입니다. 기꺼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피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위해 일하는 기억 활동가들과 지원자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지요. 김은실 글럭 교수님께 멋진 생각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자들’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본인이 피해 당사자는 아니지만 피해자를 위해 일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많습니다. 현재 그 행위자들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와 갈등이 있는데요. 이러한 경우, 우리는 모두 ‘피해자의 목소리’에 대해 말합니다. ‘위안부’문제를 둘러싸고 행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합과 긴장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캐롤 글럭 이용수 님의 사례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그가 최근에 개입한 배경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원 단체와 관련된 사태(‘정의연 사태’)가 있고, 부분적으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포함한 여러 변화로부터 기인한 것이죠. 비록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전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년에 걸쳐 행동한 것을 보면, 이용수 님 혼자만 거침없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가 최근에 취한 행동은 그 자신의 완강함, 지원 단체 관련 사태, 변화하는 시대와 맞물려 촉발된 것이에요. 활동가들끼리 서로 싸우는 양상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싸움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더 역동성을 갖게 된다면 더 낫다는 입장입니다. 캐롤린 딘(Carolyn Dean)은 홀로코스트 기억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가 ‘지구적 피해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발화하는 사람들을 ‘도덕적 증인(moral witnesses)’이라고 정의했고, 때로는 사람들이 활동가들의 목소리만 듣는다고 했어요(『The Moral Witness』, Cornell University Press, 2019). 캐롤린 딘은 활동가들이 증인을 대신해 증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모든 활동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 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득은 무엇이며 개인적으로 그 일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하는 질문들 말이에요. 운동, 즉, 액티비즘이 항상 열린 마음으로 좋은 의도를 갖고 특정한 입장 없이 취하는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맥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용수 님은 아직 살아계시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계세요. 하지만 10년 뒤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시겠죠.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위안부’ 기억에 대해, 대신 목소리를 높이는 지원가와 활동가를 둘러싼 문제를 안고 있어요. 우리의 동기가 무엇인지 자문해야 해요. 이것은 정직성, 지성적이고 정치적인 정직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차별과 전시 성폭력을 논할 때, 분단으로 인해 심하게 군사화된 한국만의 고유한 상황을 고려하게 됩니다. 군사와 안보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한국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는데요. 글럭 교수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면서 일본군 성노예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되셨고 또 전후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이시기도 하시죠. 군사화된 상황,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성차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캐롤 글럭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종식되지 않았어요. 영토분할과 상실, 강제 인민 교환, 반식민주의 투쟁 등은 모두 수년간, 수십 년간 몇몇 지역에서 계속되었어요.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와 동유럽은 유사해요. 두 지역 모두 냉전이 종식된 후 전쟁 기억으로 돌아가 과거를 새롭게 대면했고, 이는 대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이뤄졌죠. 한국이 고도로 군사화되고 남성중심적인 유일한 지역은 아니라는 점 또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쟁 기억의 정치는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만큼이나 동유럽에서도 활발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두 지역 모두 국가 내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국가 간에 이러한 정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정치적 무기처럼 휘두르고 있는 부정론자, 남성주의자, 지도자들 모두 이 두 지역에 존재하고 있고 이 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어요. 눈에 띄게 대조적인 사실 하나는 ‘위안부’ 운동 때문에 소위 ‘여성 문제’라는 것이 다른 지역보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더 크게 부각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누군가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특수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특정 민족의 역사로 인한 결과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초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김은실 국가 차원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둘러싼 개념과 사회적 제도가 한국 사회에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시 성폭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 성 규범과 관행을 바꿔야 합니다. 평화시와 전시의 성폭력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해 다시 깊게 생각해보고 멈출 수 있는 중요한 실천이에요.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나 욕망의 구조로 도배된 관행이 평화시에 바뀌지 않는다면 전시에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을 멈추기는 어려워요.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스스로를 연루시킨 한국의 미투 운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폭력을 문제화한 미투 운동과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위드유 운동은 평화시의 성폭력과 전시의 ‘위안부’ 문제를 함께 연결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운동이죠. 저는 이것이 긍정의 윤리학을 실천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초국가적인 차원을 말하자면, 글럭 교수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어디에서나 똑같은 기억을 소환해내는 것은 아니에요. 서로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죠. 또한 초국가적인 ‘위안부’ 운동을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평화시의 성폭력 문제가 더 크게 논의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변화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시켜 더욱 의미 있는 대의를 성취할 수 있을 겁니다. 캐롤 글럭 김은실 교수님의 말에 모두 동의하며, 두 가지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먼저 전시 성폭력은 만연한 가정폭력과 일상 속의 모든 형태의 여성 폭력을 포함해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라는 연속성의 한 극단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여성 권리의 침해를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사고하고, 분쟁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 침해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인신매매, 가정폭력, 그리고 김은실 교수님이 말씀하신 미투 운동 등이 그 예이죠. 직장에서의 성희롱은 여성이 아주 젊었을 때부터 겪을 수 있는 일례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성적 괴롭힘은 극도로 폭력적이거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초국적으로 연결되기 위해 더 노력하고 공통 기반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통 기반이라고 해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노력해 개선하고자 하는 공통기반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국가적, 지역적으로 특수한 맥락을 고려하여 행동해야 하지만 단결된 초국적인 협업은 상당한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위안부’ 문제가 매우 강력한 대의이기 때문인 연유도 크죠. 아시아에서 ‘위안부’ 연대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이 기억으로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공동의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1세기의 두 번째 분기점이 곧 시작됩니다. 이제 함께 노력해야 할 때예요. 효과적인 초국적 운동, 즉 액티비즘은 미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위안부’에 대한 기억과 과거 이들의 고통을 기릴 수도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각주 ^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 ^ 김은실, "민족 담론과 여성 - 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 『한국여성학』 제10집, 1994, pp.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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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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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영문웹진 KYEOL에 게재된 “Women’s Solidarity in Our Troubled Times of Gendered Violence and War“를 국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철학자 라다 이베코비치(Rada Iveković) 교수와 인류학자 백영경 교수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대담에서는 남성화된 전쟁과 여성화된 피해라는 기존 틀을 벗어난 토론이 이루어지리라 기대된다. 두 연구자들의 역사적 통찰과 연대를 향한 비전이 더해진다면, 전쟁의 젠더화와 특정 기억의 형성 과정 뒤에 있는 국가 통제, 민족주의, 가부장제의 삼위일체를 서서히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사회주의의 붕괴와 여성에 대한 역풍 백영경 역사적 맥락에서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가장 잘 알고 계실 유고슬라비아의 분할과 해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요.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사회주의가 해체되는 동안 일어났던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분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전쟁의 젠더화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도요. 라다 이베코비치 1989년 이후에 공공연히든 아니든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경험했던 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사회 재산과 공유 재산이 하룻밤 사이에 팔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대대적이고 급격하게 이루어진 이런 매각 사태를 주도한 세력은 지역의 조직폭력배, 정치인, 마피아들로, 이들은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새로이 자본주의를 이끌어갈 과두 지도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산업, 토지, 인력이 헐값에 이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들은 외국인 투자자와 협력자들과 함께 착취한 자원을 팔아넘겨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죠. 사회주의 몰락 직후에 구 사회주의 국가 주민들, 특히 구 소련 주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 기대 수명의 감소에 시달렸습니다. 약탈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주민들은 필요한 물건이나 시설을 확보할 수 없게 됩니다. 무법 상황이 펼쳐졌고, 유럽 내 탈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대규모로 갱스터리즘이 확산되었습니다. 인권은 설 자리를 잃었고, 여성 인권의 상황은 더 심각했죠. 1989년 직후 유고슬라비아에서처럼 전쟁이 발발하자 모두에게 최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특히 여성에게는 더 그러했습니다. 이 가운데 약탈과 법치주의의 전면적 파괴가 지속되었고, 이런 과정이 전쟁과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여성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항상 합의, 협상, 동맹,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양한 유형의 현 지배 체제, 남성 지배 체제 하에서 타협이 가능한 대상인 것이죠. 여성은 사회주의 시절에 보장받았던 인권을 오히려 탈사회주의 시대에 상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인권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파기된 상황이었어요. 더는 과거처럼 권리 보장을 근거로 국가에 지원을 요청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 시기에 재가부장제화(repatriarchalization) 흐름과 무관한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백영경 분단과 통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제 보편적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보편주의(universalism) 혹은 보편적 민주주의가 현재 맥락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다 이베코비치 제가 생각하는 보편주의는 인간 전체, 즉 우리 모두를 평등한 기반에서 포용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 자체가 전체를 의미하죠. 이 보편적인 전체는 수많은 특수성과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특수성들 가운데 지배적인 것이 보편주의가 되는 일이 정치적으로 자주 일어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원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특수성, 모든 차이, 모든 소수자, 모든 감수성이 가시성과 권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보편적 민주주의의 추상적 얼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보편적 전체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보편성을 옹호한다고도 표현하겠습니다. 그동안 사회 과학과 좌파 운동의 내러티브에서는 보편성이 기각되어 왔죠. 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보편주의자이기도 하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여성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러길 원하죠.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는 보편적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물론, 이상적인 설명이 그렇고 실제로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가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거나 해 왔던 예들을 통해 우리가 그 이상에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여성의 경우는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지만, 종속되는 쪽입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원하는 건 그 이상입니다. 또한 보편적 민주주의는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라서 실제로 적용 시에 민주주의를 담보할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기에 개념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우리는 의회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죠. 이상보다 현실은 항상 부족한 법입니다. 하지만 이상향과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추상적인 경향을 띠게 됩니다. 백영경 현대적 형태의 젠더 갈등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또한 현재 상태에서 민족주의를 규정하는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라다 이베코비치 민족주의가 항상 갈등의 원인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다른 이유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조차도 민족주의의 형태를 취하는데, 세계화에서의 전반적인 파편화(fragmentation) 현상 때문입니다. 세계화에는 두 층위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세계성(globality)의 층위, 즉 우리가 상호 연결된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파편화된 세계화라는 상황에서 폭력,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 더 현저화되고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성은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여성들이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의 반발과 마주했죠. 많은 나라에서 여성 살해와 여성 대량 살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성의 생명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이 말이죠. 이런 특징은 비교적 최근부터 생겨났지만, 예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죠. 그렇기는 해도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한편, 전쟁 중에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바로 대규모 강간입니다. 이 역시 예전부터 있어 온 일이죠. 한국의 '위안부'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위안부'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여성은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합니다. 이런 문제는 항상 존재해 왔지만, 최근에는 #MeToo 운동과 다른 페미니스트 운동, 학술 운동을 통해 더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죠. 이 모든 것이 미완의 이야기로, 세대를 거쳐 계속될 그런 일입니다. 요약하자면, 여성에 대한 반발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재건에 기본적으로 뒤따른 현상들이 재가부장제화, 군사화, 원시화, 그리고 폭력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들은 '여성 파업(women's strike)'의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개념은 노동 계급의 역사와 여성의 역사 모두에서 설득력을 얻습니다. 폭력의 규모가 커지면 동시에 여성의 저항이 일어납니다. 한 현상이 다른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폭력이 더 심각한 양상을 띨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생각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여성뿐 아니라 여성화된 개인과 신체, 또는 여성과 동일시되는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꼭 여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색인종, 장애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 이민자, 외국인, 사회 계급이나 신분 계급의 하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도 구성될 수 있죠. 모두가 미래를 위한 공동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여성만을 위해 싸울 수 없어요. 우리에게는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여성 평화 운동과 2015년 구 유고슬라비아 여성 법정 백영경 2015년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 여성 법정에 직접 참여했던 당신의 경험에 한국 청중들과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질 듯합니다. 앞서 언급하신 폭력과 저항의 동시적 진행이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에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페미니스트 세대입니다. 당시 저는 젊은 나이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고, 페미니스트 문학 연구를 위한 워킹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연구하고, 읽고, 쓰고, 출판하는 일을 했죠.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사회주의가 붕괴된 상황에서 경제적 이유로 발발했습니다. 연방 정부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도움을 청할 만한 최고 기관이 부재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지역 정체성(그리고 민족주의)에 몰입하는 결과가 빚어졌는데, 더는 연방 국가에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유고슬라비아는 연방 국가로 6개 공화국 중 5개 공화국의 국민들이 각기 다른 국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 국가들에서도 지역 정체성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민족성 중심주의(ethnicism)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민족성은 보통의 경우 국적보다는 하위의 구분이지만, 원리 면에서는 국적과 동일한 구분입니다. 이 모든 이데올로기(정체성주의, 민족성 중심주의, 민족주의)는 여성 혐오와 닿아 있습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와 관련해서 볼 수 있는데요. 그들은 가부장제 질서를 재도입하려 하고, 그럴 때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여성의 권리를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죠. 곧 여성들은 평화 유지를 위해 그룹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 운동으로서 시작된 움직임이었죠. 여성들은 새로운 국경을 넘나들며 그룹을 형성하고, 소통하고, 탈영병들과 협력 그룹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는 희생자였던 여성들, 즉 '위안부'와 같은 대량 강간의 희생자들, 혹은 전쟁 남자들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었다는 의미에서 '희생자'들이었던 여성들도 참여했습니다. 이 페미니스트 운동은 구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다양한 여성 그룹과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평화 캠페인으로 시작했고, 종전 후 오랜 뒤인 2015년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5년은 우리가 '구 유고슬라비아 및 승계국을 위한 여성 국제 법정(Women’s International Court for the Former Yugoslavia and Successor Countries; 이하 '여성 법정')을 열었던 해였습니다. 이는 전쟁 기간과 그 이후의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 페미니스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활동은 처음부터 여성의 사회적 재건을 위해 시작된 하나의 긴 과정으로서 중요성을 지녔죠. 그 의의는 여성은 물론 전반적인 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주체성의 재건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반적인 페미니스트 혁명을 의미했죠. 우리는 여성이 전시 및 전후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희생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 법정을 이보다 더 앞당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 간에 연대를 구축하려면 이 모든 선행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서로 다른 국적 하에서 남성들은 서로를 죽였지만, 여성들은 기꺼이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구조적 불평등으로서의 여성 문제 백영경 한국의 경우 과거 가부장적인 국가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표현들은 '위안부' 관련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전시 성폭력을 범죄로서 규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의 상황도 달라졌고, 이제는 여성의 고통을 수치와 불명예의 문제보다는 민권 침해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국가가 여성의 구원자이자 여성 인권의 궁극적인 보증자로 인식되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지하고 계시듯, 여성 시민의 몸은 아직도 국가나 민족의 영토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내러티브와 상상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조언이나 견해를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한국과 유고슬라비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유고슬라비아의 여성들은 전쟁 동안 국가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국적 공동체, 민족 공동체에 의해 '국가화(nationalized)'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역의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에 의해 국가화된 것입니다. 또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있었던 지역들의 가부장주의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여성 문제를 놓고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협력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여성을 서로 사고 팔거나 인신매매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들 공동체는 각각 가장 강력한 가부장제의 회복이라는 목표에서는 뜻을 같이 했습니다. 어떤 국가 당국도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혹은 '위안부' 문제의 제도화를 통해서 보여줬듯, 전시 강간을 타 국가와의 외교 관계나 대화의 대의나 무기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문제 자체가 국가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문제는 탈국가화되어야 하죠. 그렇게 될 때 여성은 국가의 문제를 넘어 여성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여성 문제와 젠더 질서는 사회와 국가 모두의 구조를 반영합니다. 사회와 경제 체제, 정치의 측면에서 이 문제들은 구조적이며 또한 근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우리는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고,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치렀던 대가는 2015년 여성 법정 당시 언론의 철저한 무시였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미 알고 있죠. 집권자들은 끈질길 정도로 이런 문제들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기를 거절합니다. 우리는 정론(政論)이나 여론, 혹은 정치적 여론의 측면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카이빙(기록 보관)의 측면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성 법정에 참여한 여성들은 생존해 있었고, 우리는 그 여성들과 또 다른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자료가 유엔에 제출되었고, 유엔은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잘 알고 계시듯, 1990년대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성폭력 및 강간과 관련한 두 주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바로 결의안 1820호와 1888호입니다. 결의안과 법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 대한 사회적 해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교육과 사회 사업이 필요하죠.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는 것은 국가만이 아닙니다. 사회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사회 모두 수직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서로에게 일조합니다. 여성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 협력자를 사회 내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정(認定)으로서의 정의 백영경 이러한 '위안부' 문제, 젠더화된 전시 폭력, 또 다른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정의의 문제로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의의 의미를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지요? 이 문제들에 대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또한 정의는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어떤 초국가적인 형태가 되어야 할까요, 혹은 보다 지역적인 형태를 취해야 할까요? 당신의 의견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정의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법이 존재합니다. 국제 재판소에서는 국제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아직도 삶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보스니아에서는 상당수의 여성이 민족주의 전쟁 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습니다. 죽은 남성들의 미망인과 어머니들은 그곳에 남았거나 다른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더는 그곳에서 살 수 없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정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돌려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NGO와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유족과 함께 인정(認定)을 위한 작업을 해나갈 수 있죠. 여기서 인정은 희생자로서의 지위와 상실에 대한 인정,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정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정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법정이나 재판소에서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들에게서 인정의 여론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여성 단체 중 '우먼인블랙(Women in Black)'이라는 이름으로 베오그라드에서 활동 중인 단체가 있습니다. 동료들과 놀라운 업적을 이뤄 온 스타샤 자요비치(Staša Zajović)가 설립했죠. 이 단체는 전쟁 기간 내내 활동했고, 현재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전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터뷰, 연구 자료, 거리 행동에서 빼놓지 않는 것은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리 행동에서 정기적인 행사는 단체 회원들이 검은 옷을 입고 베오그라드의 주요 광장에 서서 지역 민족주의자들을 고발하는 증언에 나서는 일입니다. 활동가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국내의 다른 지역과 타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일들을 증언합니다. 매우 용감한 행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민족주의자들의 공격과 폄하에 자주 노출되어 왔고, 주류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야말로 정의의 필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정이 무엇을 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활동을 통해 전범인 가해자들에게 그들이 응당 짊어져야 하지만 알고 싶어하지 않은 책임을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영경 이런 유형의 폭력 문제들이 법정으로 가면, 초점이 지나치게 '보상'에, 즉 한국적 맥락에서는 '금전적 보상'에 맞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정의 여론 형성을 가장 중요한 첫 단계로 강조해주신 점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매우 중요하지만 완료되지 않은 단계죠. 아직은 그렇다고 보여요. 그것이 이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는 이유이고, 여성 법정이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여성 단체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사안에 대해 활동하면서, 다른 새로운 사안들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 세대로 이 과업을 이어가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세대 교체가 진행 중이고 이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민자 문제도 다루어야 합니다.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은 유럽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로인 '발칸 루트(Balkans Route)'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가는 나라마다 좌절을 경험합니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결국 어떤 해결책도 없이 이들 나라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유럽 전역과 국경 지역에서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끔찍한 상황입니다. 이민자 여성들이 겪는 문제도 있습니다. 자녀를 둔 많은 수의 여성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강간, 인권 침해, 믿기 힘든 수준의 폭력과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합니다. 그렇기에 이 여성들에 대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고, 여성 단체들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를 돕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일은 돌봄 노동의 일부로 간주되죠. 우리는 전통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이 경우에는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전통도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은 현재 이민자로서 예외에 가깝습니다. 다른 지역 출신의 이민자에 비해 우크라이나인은 유럽연합에서 상대적으로 환대받는 대상입니다.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유럽 전역을 이동하고, 유럽연합 내에 발을 들이고, 숙박 시설은 물론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는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들은 또한 백인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민자들은 이와 같은 관심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우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럽 우월주의자들이 곧 우크라이나인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월주의자들은 곧 그들을 침입자로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아직까지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 전역의 여성 단체가 이들 이민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민족주의 백영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어떤 동기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계를 대상으로 착취의 기회를 확대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강력한 욕구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무엇이 러시아를 지금과 같은 국수주의(ultra-nationalist) 전쟁 범죄 기계로 변질시키고 있는지, 그 동기에 대한 관점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확실히 전쟁 기계라고 말할 수 있죠. 제 견해로는, 러시아의 경우 민족주의가 전 국민을 균질화하는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계화의 산물인 일반화된 민족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푸틴을 비롯해 유사한 전쟁을 치렀던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지를 얻으려 민족주의를 옹호합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우리는 이런 전략이 얼마나 빠르게 성공을 거두는지 목도했고, 충격을 받았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항상 TV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에는 탱크 한 대와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전 국민을 선동하고 국가적 문제라는 프레임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탱크 사진 한 장과 동영상 한 편, 그리고 지역 민족주의의 개념이 무엇이든간에, 이 모두에 한마디만 덧붙이면 충분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그들이 우리 국민에게,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한 짓입니다." 이런 식이었죠. 유고슬라비아 전쟁 초기에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푸틴은 손쉬운 전략인 민족주의를 통해 지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가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고 소련이나 그 영토를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재건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푸틴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에서 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무기한으로 지속될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런 일련의 계획은 민족주의의 측면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는 직접적으로 국제적이거나 초국가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영향은 전 세계적일 것입니다. 한편, 푸틴 개인의 문제도 확실히 부분적으로는 이런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고슬라비아에도 지나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혔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푸틴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 해결책은 없습니다. 푸틴에게는 뛰어난 수완이 있고, 현재로서는 러시아 국민 다수의 지지도 있으니 아마 오랫동안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유럽연합이 공약을 내놓고는 있지만, 이들 국가들이 개입을 원치 않는 까닭에 우크라이나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적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관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태에 개입할 것이고, 어느 정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역시 개입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전쟁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여성이 치르는 대가는 더 큽니다. 백영경 무척 복잡한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자주 가부장제를 독버섯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하룻밤 사이에 생겨나 그 자리에 있나 하면 갑자기 커버리죠.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이런 비슷한 점을 지적해 주신 것 같습니다. 라다 이베코비치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만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형태의 민족주의는 다른 반대되는 형태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죠. 민족주의가 한 가지 형태만을 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적어도 둘 이상이거나 그보다 더 늘어나야 만족하죠. 전 세계적으로 이 민족주의야말로 우리 시대의 전쟁 기계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성에게는 이를 가능케 할 에너지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성은 민족주의적 편협함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국경을 넘어 협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에도, 이 전쟁에 개입된 국가의 여성들조차 국경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남성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지금 우크라이나인의 상황처럼, 남성은 전쟁에서 싸워야 하는 존재이기에 국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은 공격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죠. 이것이 여성이 부정적이고 불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누리는 이점입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오가면서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연대를 형성하며, 함께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운동(activism)을 통한 학습: 세대 간 여성의 연대 백영경 이베코비치 교수님께서는 오늘 다양한 생각과 지성뿐 아니라 인내와 용기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이 위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동료 여성 시민,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나 제안이 있으실까요? 라다 이베코비치 우선 백영경 교수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고, 그래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내가 해줄 만한 이야기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기꺼이 나누고 싶지만요. 그래도 꼽아 보자면, 내가 보기에 페미니즘이 한 가지 특별한 난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운동을 이어나가는 일입니다. 어떤 페미니스트 단체가 특정한 일을 해온 경우, 자신들을 대신할 사람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단체에 젊은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젊은 세대에서는 기꺼이 도전에 응하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젊은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표현할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이러한 어려움은 세대 교체, 아마도 세대 차이에서 연유하는 듯합니다. 또한 각 세대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의 차이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우리는 오늘날 젊은 여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거나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한국의 '4비(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이런 접근은 매우 독창적이기도 하고, 결혼을 비롯하여 그들이 원치 않는 이 구체적인 네 가지가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놀랍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세대에서 성취해야 하지만 성취할 수 없을 모든 일들에 대한 약속으로도 느껴집니다. 저는 인류 공통의 입장에서 나이 든 활동가와 젊은 활동가가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에게 배울 뿐 아니라, 기성 세대도 젊은 세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운동을 통한 학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운동을 통해 정치에 대해 배웁니다. 이는 우리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특징입니다. 우리는 운동을 통해 개인적인 정치적 경험을 얻어 정치에 대해 학습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두드러진 새로운 특징으로,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을 두고 함께 일할 협력자를 얻게 되면, 서로가 중시하는 사안과 관점을 경시하는 대신 존중하고, 힘을 합쳐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아니요, 당신들은 여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이것이 여성 운동과 액티비즘이 오늘날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결코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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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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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들어가며 1990년대 초기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이하 ‘’생략)재판이 일본에서 총 8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인 2건, 재일한국인 1건, 중국인 2건, 대만인 1건, 필리핀인 1건, 네덜란드 1건입니다. 관부재판의 특징은 피고 일본국의 수도 도쿄가 아니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재판소에 제소되었다는 점과 원고 10명 중 위안부 원고는 3명, 그 외는 여자근로정신대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1심 재판에서 위안부 원고가 승소하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재판이라는 점입니다. 부산 정대협(고 김문숙 회장)에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피해자 각각 두 분이 1992년 12월에 야마구치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회와 유엔에서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제소하였습니다. 후쿠오카에 피해자분들을 모시고 재판지원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회원 10여명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나누면서 환영회를 열었습니다. 원고의 한 분이셨던 박두리 님은 “일본인은 모두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는 거냐”고 말씀하시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지원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진행된 추가 제소에서는 위안부 원고 3명, 여자근로정신대 원고 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원고들이 관부(関釜) 페리 연락선을 타고 와서 재판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통칭 ‘관부재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원모임의 연회비 3,000엔과 후원금은, 원고들의 재판을 위한 연 4회 도항비, 체류비, 관부재판 뉴스레터 발행비용 등으로 썼습니다. 원고 분들은 우리 집과 교회에서 숙박하고 지원모임 회원들과의 식사 모임과 교류회를 통하여 점차 친분과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지원자들이 경애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원고들은 재판에서 일본국 대리인에게 피해를 호소하고 규탄하였습니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회복하시며, 재판을 이유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게 되었습니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판결이 나왔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가혹한 피해가 받아들여져 승소하였습니다. 일본정부에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명하는 획기적인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자근로정신대 원고는 “위안부 원고에 비해 피해가 가볍다”는 이유로 패소하였습니다. 그 후, 원고와 피고 모두 상급 법원에 항소하였습니다. 히로시마고등재판소의 재판관은 국가에 ‘위안부’ 이슈와 관련하여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줏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심은 2001년 3월에 패소하였으며, 2003년 3월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되었습니다. 여자근로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2021년 1월과 4월에 서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문의 “위안부 모집”항목에 “학교 등을 통해서 모집하는 방식”, “근로정신대 *** 동원 방식”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재판소에 제출한 역사 인식과 관련한 내용은 정대협(정의연)이 작성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수 님은 2020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정대협의 윤미향 님을 향한 기자회견을 열어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는 다르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용수 님은 관부재판,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재판 지원 모임에 여러 차례 참가하셨습니다. 당시 교류회에 참석한 근로정신대 원고 한 분이 “해방 후, 정신대인데 위안부라고 잘못 알려져서 부끄러웠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용수님은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 제도를 만든 일본정부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노하셔서 발언자가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용수 님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가운데 위안부라고 여겨져 가정폭력이나 이혼을 당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고생하며 산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셨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2020년 회견에서 이용수 님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정대협을 비판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초등학교 6학년 혹은 졸업 후 1~2년 정도가 되는 소녀들이 1944~45년에 걸쳐 담임 선생님에게 “너는 애국을 위해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해라, 일하면서 여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라고 권유받아 지원하였습니다. 도야마현 후지고시 공장에 1,060명, 나고야 미쯔비시 비행기 공장에 300명, 시즈오카현 도쿄아사이토 공장에 30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남성 노동자가 군대에 간 사이 빈 자리로 남아있던 선반공 등의 중노동을 감당하였습니다. 식사량도 적고,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밤에는 미군 공습에 위협당하는 가혹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속아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결국 야윈 얼굴로 부모 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사기와 강제 노동에 대해 사죄하라, 급료를 돌려달라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 재판에 임했습니다. <관부재판> 한국어판 출판 계기와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문제의식 2018년 한국에서 관부재판을 주제로 그린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2018)가 제작되었습니다. 지인이 보내준 DVD를 보고, 그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박OO님(익명)이 일터에서 위안부로 여겨졌고, 원고들이 재판 때 일본에 방문하면 돌멩이가 날아들었으며, 재판에 우익이 몰려들어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숙박했던 여관에서 차별받는 등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 일색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일본사회가 위안부 차별로 만연해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당시 일본사회는 외국인 전쟁피해자에게 호의적이었고, 60건 이상의 전후 보상재판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모임을 만들고, 변호사들은 무보수로 자원하여 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며 일본 사회를 향한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을 방치할 수 없어서 감독에게 항의문을 보냈더니 감독과 프로듀서가 후쿠오카를 방문하였습니다. 감독은 “여자근로 정신대에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증언집이 한국에서 출판되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여자근로정신대 세 분의 증언이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후지코시 공장실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상과 다른 내용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증언집에는 “공장이 공습으로 불에 타고 일이 없어지고, 회사로부터 아오모리현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30명 가량 보내졌다”는 내용도 있는데, 후지코시 공장에 공습피해는 없었고 패전을 맞을 때까지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다른 부분도 저희가 아는 내용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국한하여 생활 지원을 하는 점,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고통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자 감독은 당황하며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라는 자막을 영화의 첫 장면에 넣겠다고 답하고 돌아갔습니다.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일 감정을 그리는 영화가 잇달아 제작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관부재판 내용과 일본사회의 실상을 전달하고 싶어 『관부재판』 한국어판(2021, 도토리숲 출판)을 냈습니다. 저는 소녀상이 근로정신대의 소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의연한 모습의 소녀상은 13세부터 15세 때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의 분위기와 닮아있습니다. 위안부로 동원된 농촌의 가난한 소녀, 세 갈래로 머리를 땋은 그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역사인식의 공동연구를!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이 외에도 동원 과정, 피해자 수, 패전 당시의 처우 등에 관해서 일본과 한국 두 사회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국의 대립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악순환에 빠져 있습니다. 문제의 극복을 위하여 위안부 이슈 관련 역사 인식을 한일 시민들이 함께 다각적으로, 냉철하게 연구 검토하면서 공동의 인식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을 글]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지음, 고향옥 옮김, <관부재판: 소송과 한국의 원고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한 28년의 기록>(서울: 도토리숲, 2021) (책소개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1223391) ·<민족의 희생자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관부 재판의 기록(시모노세키)>,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07. ·김문숙 펴냄, <소녀와 할머니: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해 온 시간의 기억>, (사)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민족과 여성역사관, 2018. ·허윤, “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35권 (2021). ·박정애, “총동원체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의 착종 연구: 정신대의 역사적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아시아여성연구> 59(2) (2020). 번역: 퍼플레이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