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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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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1.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제작하기까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 인터뷰를 통해 안태근 전 법무부 국장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이후 한국 사회는 거대한 미투 운동의 시간으로 돌입했다.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2019) 제작을 위해 한창 촬영하던 과정에서 만난 출연자들도 이 미투 운동의 흐름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 역시 제주도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직장 내 성폭력 1심 무죄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를 촬영할 때 함께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미투 운동을 의심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집회에도 참여해 같이 소리를 질렀다. 2심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아침 일찍 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떨렸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재판정에 모여들었던 여성들의 목소리와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여러 현장의 열기를 다큐멘터리를 통해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렇게 생겨났다. <애프터 미투>(2021)는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와 여성들의 일상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다큐멘터리다. 세대가 다른 여성 감독들의 시선을 모으고 연대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됐다. 우선 박혜미, 남순아 PD와 함께 기획팀을 구성했다. 기획팀은 ‘미투 운동’이라고 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상징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서 도출된 사회적 과제들을 정리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목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 기획안은 언론에 주로 노출됐던 현장들과 이슈를 골자로 했다. 이후 박소현, 이솜이, 소람 감독이 연출로 합류하면서 기획안은 변경됐다. 당시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 성차별적 강간문화가 드러나면서 새로운 기술이 여성들을 더 착취하고 있는 구조를 목도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여성들이 어떤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지, 미투 운동에서 놓친 질문은 무엇인지가 우리 안에서 중요해졌다. 제작진으로 합류한 감독들도 각자가 접속하고 있는 현장, 혹은 접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장이 존재했다. 이에 제작진은 치열한 논의 끝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과 미투 운동에서 ‘잊혀진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수정된 기획안에서는 미투 운동 과정에서 비교적 덜 주목받고, 혹은 주변화되었으며, 논의 선상에조차 서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목소리들을 전면화했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는 <여고괴담>,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이후의 시간>, <그레이 섹스> 등 네 가지 에피소드로 완성됐다. 형식 자체로 목소리에 오롯이 집중하는 작품, 퍼포먼스와도 같은 증언에 집중하는 작품, 몸짓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그림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작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는 연출됐다. 각각의 이야기 속 인물과 공간은 구체적이고 미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현장을 그대로 담게 되었다. 2. <애프터 미투> 개별 작품의 문제의식 네 편의 작품은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됐지만 ‘출연자의 증언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가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여고괴담>은 스쿨 미투를 다루고 있다. 학교 공간 내에서 사라지지 않는 괴담과도 같은 가해자들의 재현, 동시에 이 괴담을 부숴버리기 위해 움직인 목소리들이 전면화되어 있다. 이 목소리는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흑백의 사진 속 학교 공간의 권위와 폭력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어린 시절과 결혼 생활에서의 폭력 경험을 40대에 이르러서야 말할 수 있었던 인물인 ‘행복’을 다루고 있다. 행복은 구체적인 피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폭력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했는지 성토한다. 그리고 피해로 인해 피폐해진 자신의 삶을 용서하기로 선포한다. <이후의 시간>은 문화예술계 내 피해자이면서 연대자였던 출연자가 커뮤니티의 자정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왔는지 그려낸다. 공동체 내엔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 연대자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을 듣고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보여준다. <그레이 섹스>는 동의와 비동의의 간극, 친밀한 관계 내 여성들의 의사소통과 협상 방식에 대한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보인다. ‘틴더’(데이팅 앱)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며 친밀함을 갈구하는 여성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연애 관계에서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게 만들어버리는 상황 등 가부장적 사회의 고착화된 관계 안에서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그레이 섹스>의 경우는 여전히 강고한 차별적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증언자를 보호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진 내부에서 가장 많이 토론했던 에피소드다. 이처럼 <애프터 미투>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투 운동 시기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례들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제작진은 일반 관객이 이 이야기들과 미투 운동을 연결 지을 수 있도록 ‘맥락’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은 전형적일수록 파급력이 있고, 지지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에 전형적이지 않은 증언일수록 피해를 의심받으며, 왜곡된 시선과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상황 때문에 전형적인 방식으로만 증언이 유통되고 기록된다면 다양한 피해자들이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증언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자들이 종종 갖게 되는 문제의식도 여기서 발생한다. 출연자의 증언을 전형적이지 않게 재현함과 동시에 출연자의 피해를 더 적극적으로 담론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제작진은 이러한 난관 앞에서 증언을 어떻게 맥락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민들에 대한 답과 결론을 내렸다기보다는 그 고민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 속에 이 다큐멘터리를 위치시키는 도전을 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여성들의 역사를 다시 되짚기로 한 것이다. 3. 증언을 들을 준비 미투 운동은 2017년 미국 할리우드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시초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생존자의 말하기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우리는 그 말하기의 시작을 어디로 잡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 논의의 결과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님의 증언이다. 여성들은 이전부터 성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피해를 증언해왔으며 그 길을 개척해왔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생존자말하기대회’도 그 연장선에 있다.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2000여 명이 넘는 여성들이 생존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왔다. 2017년부터는 ‘#OO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다양한 문화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피해자들이 존재했다. <애프터 미투>는 2018년의 폭발적이었던 미투 운동의 흐름 역시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던 토대 위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던지기로 했다. 사실 생존자들의 외침이 계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회가 듣지 않으려 했던 탓에 2018년 미투 운동의 폭발력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미투 운동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피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 피해가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피해가 위계화되고,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는 증언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회의 왜곡된 인식 때문에,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거나 사회적인 틀 자체를 깨야 하는 이중 굴레에 놓여 있다. 언론이 주목했던 여러 미투 사건 중에서도 피해자가 소위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난 사건은 ‘대중’에게 지지는커녕 공격을 받았다. 또한 ‘대중’은 가해자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전도유망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가해자라고 하면 피해자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입맛’에 맞는 피해에 주로 공감하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악마 같은 가해자만을 가해자로 인정한다. 사실 가해자의 전형도 존재한다. 가해자의 전형이 아닌 사람에 대해 말하지 않을수록, 가해자가 권력관계를 이용해 사람을 가려가면서 폭력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감춰진다. 증언을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장이 한국 사회에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익숙한 담론은 반일 감정을 자극하여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더 널리 퍼지게 했지만, 전형성의 외곽에 놓인 이야기들은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박문칠, 2022)에서 조명한 김순악 님의 사례처럼 전 생애에 걸친 여성의 피해가 사회적으로 이해되려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까. 4. 더 많은 증언이 펼쳐지기 위해 <애프터 미투> 속 출연자들도 그렇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단일하지 않다. 삶의 배경, 일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단일하지 않은 삶 위에 폭력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무지하다. 이미 있었던 목소리들도 사회의 무지로 인해 가려지고 만다. 증언은 공론장이 존재할 때 그 정치력을 펼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위계와 폭력의 경계를 흐리고, 우리의 몸을 뒤흔들고, 생각을 깨는 목소리가 펼쳐질 장이 더 절실해진다. 동시에 제작자는 증언을 기록하여 대중에게 공유할 때, 어떤 서사가 친숙하게 다가가는지 끊임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친숙함에 기대어 익숙한 방식으로 기록하면 자칫 피해자다움을 재생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증언 기록은 여전히 도전을 필요로 하는 일이며, 도전이 있어야 더 많은 목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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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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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림의 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 생존자 최초로 김학순 님이 공개 증언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의 통념적 주기가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역사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초국적 참조점이 된 동시에,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웹진 결은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11주년인 2022년을 맞아, 경계를 넘어 ‘위안부’ 역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조명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로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선 젊은 여성들,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비판적 담론을 생산하고 후속세대를 교육하는 연구자들, 전쟁과 제노사이드, 이민자와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해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위안부’ 역사의 교훈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시죠. [2022년 기림의날 특집] 현재진행형 ‘위안부’ 역사와 공존을 향한 연대 1. 한일양국의 시민들과 함께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동연구를! 2.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를 통해 본 증언을 기록하는 일 3.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경상도 지역 역사관과 ‘지역성’에 대하여 4. [캐롤 글럭-김은실 대담] 민족주의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젠더 정치 5. [라다 이베코비치-백영경 대담] 젠더화된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여성 연대 지난 30여 년간 부산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김문숙 회장이 2021년 10월 별세했다. 고(故) 김문숙 회장은 1991년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부산정대협)의 회장을 맡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해 매진한 운동가이자 활동가이다. 일본이 ‘위안부’ 책임을 일부 인정한 관부재판을 이끌었던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2004년에 사재 1억 원을 들여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과 관부재판 과정, 이외에 그가 피해자들과 함께 진행한 운동 과정 등이 담긴 기록 1000여 점이 전시된 역사관은 후속 세대를 위한 여성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김문숙 회장의 부재 이후 그가 실천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계승과 역사관의 지속적인 운영 방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특히 역사관에 소장된 기록물의 목록과 DB가 없다는 점에서 소장 기록물 목록화 작업의 시급성이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1] 이에 김문숙 회장의 뜻을 계승해 2021년부터 역사관을 운영한 김주현 관장은 2022년 4월에 역사관 소장 기록물의 목록화 사업을 위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소장자료를 재평가하고, 김문숙 회장이 수집한 자료를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한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추진”한다는 것이 사업의 주요 취지이다.[2] 이로 인해 오랜 기간 부산에서 민간차원에서 독자적으로 전개한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개인이 수집한 자료가 정부 지원하에 공공역사의 기록물로 보존 및 활용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뿐 아니라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을 주도한 김문숙의 삶과 생각, 또한 그를 통해 관찰된 피해생존자의 이야기도 공공 기록물로 공유될 예정이어서 향후 일본군‘위안부’ 운동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상황은 지난 30여 년간 진행되어온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틀과 방향성은 물론이고 운동의 담론 지형과 방법론에 대한 변화를 요구받는 실정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라는 뚜렷한 목표”에 운동의 역량이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틀과 방향성이 불가피하게 축소된 측면이 있다.[3] 이는 가해자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운동의 틀이 강화되면서 피해자들을 침묵시킨 한국 사회의 여성 억압적 구조를 바꿔나가는 데 운동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4] 다른 한편,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의 역할이 컸던 만큼 정대협의 경계 안팎을 오가며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이어진 시민운동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5]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동성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복수의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로 귀결된다.[6] 게다가 생존자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 전시 성폭력에서 비롯된 여성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이어가고, 더 많은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미래 세대에게 널리 알리는 작업의 방향성과 방법론에 대한 성찰과 고민도 요구되고 있다. 김문숙 회장의 별세로 인해 야기된 부산정대협과 역사관의 변화 노력은 최근 새로운 전환의 시점에 직면해 있는 국내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몇 가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운동의 틀과 방향성,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김문숙 회장이 이끈 부산정대협은 정대협과 이름은 유사하지만, “정체성이나 이념적, 조직적 이력이나 지향”에 있어서 정대협과 동질적이지 않은 단체였다.[7] 부산정대협 연구를 진행한 문소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은 부산정대협의 정체성을 세 가지 특성으로 요약한다. 첫째, 부산의 지역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과제로 삼는다는 점, 둘째,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정대협과 공동대처를 지향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정대협과 이념적·조직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정대협은 1991년 정신대 신고 전화 설치, 1992년부터 약 10년간 관부재판 추진, 2004년 ‘민족과 여성 역사관’ 개관, 2016년 평화의 소녀상 건립 등 일본군‘위안부’ 관련 주요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사업들은 정대협이 제시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7가지 요구사항에 포함된 활동들이다. 즉, 정대협의 ‘위안부문제 공동대처’라는 명분에는 부합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겹치지만 분리되어 차이성 내지 혼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소정의 설명이다.[8] 부산정대협의 활동이 정대협의 활동과 유사하지만, 다르거나 혼종적이었다는 점은 국내 ‘위안부’ 운동의 동질성을 드러내면서도 중앙과 지방, 정대협과 지방 시민사회 조직 간의 균열과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사하지만, 무엇이 또는 누가, 왜 부산정대협과 정대협 사이의 균열과 차이를 만들어냈는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균열과 차이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전국 또는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부산정대협과 김문숙 회장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 진행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실천 방법을 찾아내는 데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는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생존자 없는 일본군‘위안부’ 시대에 이어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1990년 전후 시점부터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에게도 고령화는 진행되고 있다. 제1세대 운동가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증언을 채록하거나 일상에서 그들과 친밀한 소통을 해왔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과 삶의 궤적, 더불어 피해자의 내면과 가족·사회적 관계 등에 대해 특별한 이해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가이자 또한 피해자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라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들의 삶을 관통한 피해 고통과 생애 경험을 대신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피해자들과 함께 경험한 사적 시간과 생활 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적 고통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이 지속되는 조건을 살펴보며 역사적으로 맥락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9] 제1세대 운동가들은 “가부장적 차별 사회 속의 젠더 문제를 비롯해 계급, 민족,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냉전질서 등이 교차하는 현실”을 살아낸 주체들로서 포스트 식민시대에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피해자들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10] 따라서 피해자가 일생 동안 겪은 고통을 ‘역사’로 서술하는 작업에 초기 또는 제1세대 운동가들의 증언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김문숙 회장의 소장자료에는 본인이 직접 운영한 부산정대협과 여러 여성단체 관련 자료를 비롯해 피해자들의 삶과 관부재판 과정이 담긴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관점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살펴봤을 때, 관부재판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와 전문가들과의 연대 활동이 두드러진다. 실질적으로, 운동 초기 단계부터 김문숙 회장은 수차례 일본 방문과 일본 피해자 및 피해자 지원단체,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출판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그가 설립한 여성단체의 여성 성폭력 피해자 구제 및 보호 지원체계 구축 과정에 일본 여성단체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부산에서 진행된 초기 일본군‘위안부’ 지원 운동과 관부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 활동 및 그 이후의 이야기가 전시자료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전시자료를 지역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전시물이나 자료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기존 전시자료에는 재판을 위해 시모노세키에 배편으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부산이 위치한다는 점이나 일본군‘위안부’들의 삶의 공간이자 운동의 공간적 배경으로 부산이 등장한다. 하지만 부산 거주 피해자들의 생활 공간이나 개인적인 소장품, 유품 등의 전시를 통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조건이나 현실을 보여주는 전시자료는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들과의 상호교류를 보여줌으로써 부산의 피해자들이 누구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운동가로 변모했는지, 또는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때 부산 ‘아지매’이자 ‘할매’로서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부재하다. 앞서 기술했듯이, 지역민으로서 그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공동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일상사와 생활사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진행 중인 김문숙 회장의 수집자료 정리 과정에서 부산 출신 피해자들의 일상사와 생활사를 보여주는 유용한 자료가 발견되기를 희망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의 공간과 생활 조건, 사회적 관계 등에 초점을 맞춘 자료나 연구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지역에 일본군‘위안부’로 등록된 피해자 수가 가장 많다고는 하지만, 실제 지역에 초점을 맞춰서 일본군‘위안부’ 동원 체제나 동원 과정과 귀환, 귀환 후 생활에서 드러난 특성 등을 고찰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도 지적된 바 있다.[11] 지역과 지역성에 초점을 맞춘 자료와 연구 부족 문제는 현재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인 경상남도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김문숙 회장의 별세와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목록화 및 기획 전시 사업을 계기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의 일본군‘위안부’ 운동, 부산과 일본 시민사회 간의 연대 활동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와 연구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이는 획일화되고 전형적인 이야기 뒤에 숨겨진 지역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숨겨진 역동성을 찾아내는 일이자,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각주 ^ 남영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기관의 기억재현과 기억의 확장: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사회 21』, 2017, pp.129-148. p.139.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부산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여성인권을 위한 공공역사 기록물로 재탄생: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민족과 여성 역사관 소장자료 관리·보존을 위한 업무협약(MOU) 체결”, 보도자료, 2022.4.29. ^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 『조선인 군대 위안부(朝鮮人軍隊慰安婦)』(1992)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2(1993, 1997)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 42호, 2021, pp.61-96. p.65. ^ 이유미, “시론-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사회진보연대』 172호, 2020, p.-126. p.65. ^ 이지은, 2021, p.65. ^ 앞 저자, p.65. ^ 문소정, “부산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사이성에 관한 연구: 부산정대협을 중심으로”, 『항도부산』, 2021, 제 41호, pp.471~499. p.483. ^ 앞 저자, p.481. ^ 신동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연구의 새로운 방향 모색: 식민지 시대의 피해자에서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 여성으로의 전환”, 2022, pp.5-9. p.7 ^ 앞 저자, p.9. ^ 강정숙,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 <경상남도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 추진방안 도민 소통 포럼> 자료집, 2021, pp.16-22.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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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법과 사법(司法)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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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2년 8월 29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전문가포럼 라운드테이블의 기조발제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손해배상청구소송(이하 ‘위안부’ 소송으로 약칭함)의 현황 및 제기되는 법적 쟁점(특히 국내 법원이 담당한 ‘위안부’ 소송)을 개관하고 몇 개의 토론거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토론거리는 ① ‘위안부’ 소송의 효과는 무엇인가, ② ‘위안부’ 소송의 배경과 원인,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가로 집약할 수 있다. 토론거리는 글 속에 흡수하여 서술한다. 사회운동 전략으로서의 법동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지원 단체가 소송을 중요한 전술적 수단으로 삼은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세계적인 공감을 얻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였다. 그 시기는 법적 규칙들을 자원으로 삼고 소송을 통해 법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른바 법동원(legal mobilization)이 사회운동의 유력한 수단으로 대두한 시기이기도 했다. 탈냉전시대에 거대담론과 이념에 기초한 정당정치가 쇠퇴하고 법치의 중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법을 무기로, 법정을 싸움터로 삼아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들이 활성화되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위안부’ 소송은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소송을 통한 법동원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경성법(hard law)을 원용하는 전술이지만 ‘위안부’ 소송은 국내외 시민사회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의해 추동되었고, 점차 국제기구와 글로벌 시민사회의 발화를 통한 연성법(soft law)의 생산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소송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이어서 국가면제(state immunity)의 법리 때문에 국내 법원을 활용할 수 없음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소송의 실패와 국제적 관심 ‘위안부’ 소송이 시작된 것은 일본에서였다. 1945년부터 2019년 7월까지 일본 법원에 제기된 과거청산소송은 98건으로서, 그 중 한국인이 제기한 소송은 53건으로 절반을 넘고 있다.[1] 그 가운데 20건이 1990년대 전반기 5년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위안부’ 동원에 대한 사실인정, 사죄, 추모, 배상,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일본 정부의 책무를 제시, 요구하고 1990년 정대협을 발족한 이후 활발하게 규탄 활동을 전개한 때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증언으로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일본을 방문해 증언을 계속했다. 김학순 증언에 따른 일본 국회의 질의에 대해 1991년 8월 말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 야나이 슌지는 청구권협정이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이며 개인 청구권 그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발언했다.[2] 같은 해 12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첫 제소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한국인에 의해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위안부’ 소송은 1991년 12월부터 1993년 4월까지 제소된 3건에 불과하다.[3] 그러나 소송 건수는 ‘위안부’ 피해자의 숫자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한국인 피해자의 제소 후 1990년대에 걸쳐 필리핀, 중국, 대만인 ‘위안부’ 소송이 잇따랐다. 같은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해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유엔에서는 1996년 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 특별보고관 쿠마라스와미(Radihka Coomaraswamy)의 보고서와 1998년 맥두걸(Gay J. McDougal)의 보고서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에 대해 국제법 위반 사실과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개인들에게 배상하며,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역사적 사실을 교육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처벌할 것으로 요구했다.[4] 맥두걸 보고서는 일본이 피해자 개인에 대해 배상해야 하고, 일본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일본의 법정이나 관할권을 가지는 국가의 법정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조사하고 기소해야 하며, 일본은 배상과 범죄자 처벌의 진전에 대한 보고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격년 보고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 두 보고서는 공히 1965년 청구권협정이 위안부 피해자의 중대한 인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으로부터 일본을 면책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위안부’ 소송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 사건에서만 1심 법원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가능하게 하는 입법을 하지 않은 위법한 부작위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그것도 항소심에서 번복되었다. 모든 소송에서 법원은 전전(戰前) 일본 국가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국가무책임의 법리, 어차피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점, 또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문제라는 점을 들어 원고패소의 판결을 내렸다.[6] 이 모든 법리가 위의 두 보고서에서 제시한 판단 기준에 반하는 것이었다. 미국 법원에의 제소와 관할권 공방: 주권면제와 사법자제 맥두걸 보고서에서는 일본에서의 사법적 구제가 시원치 않을 경우 관할권을 인정하는 다른 나라의 법원에 제소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국제법이나 미국의 조약법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에 관할권을 부여하는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Alien Tort Claims Act)을 예로 들었다.[7] 바로 그런 견지에서 시도된 소송이 2000년 미합중국 DC관할 연방지방법원(US District Court for the District of Columbia)에 제소된 황금주 사건이었다. 이 소송은 황금주를 비롯한 6인의 한국인과 중국인, 필리핀인, 대만인을 포함하는 15인을 원고로 하지만 동종 사건의 피해자에게 승소 판결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는 집단소송(class action)이었다. 원고들은 배상과 사과, 문서 공개를 청구하는 한편 일본 정부의 행위가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과 강요된 성매매 및 강간 금지 규범에 반한다는 확인판결을 구했다.[8]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미합중국 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관할권을 가지느냐였고 그 골자는 국가면제(미국법에서는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의 법리에 따라 주권국가인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이 관할권을 가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면제가 배제되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였다. 원고들은 이 사건이 외국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이 규정하는 주권면제 예외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주권면제의 배제 근거로 ① 포츠담선언을 통해 주권면제를 포기했고, ② 국제적 강행규범(jus cogens)을 위반함으로써 주권면제를 묵시적으로 포기했으며, ③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미합중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지는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지방법원은 포츠담선언이 주권면제의 포기를 담고 있지 않고, 주권면제의 묵시적 포기는 포기의 의사가 드러나는 경우에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 국제적 강행규범의 위반으로부터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원고들의 주장으로부터 보아도 국가의 관여가 분명하여 상업적 행위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예비적 판단으로서 설사 주권면제를 배제한다고 해도 이 사안은 행정부가 판단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로서 법원의 관할권이 배제된다고 보아 소를 각하했다. 원고들의 항소를 수리한 DC관할 연방항소법원(US Court of Appeals for the DC Circuit)은 제1심 판결을 승인하면서도 다소 다른 근거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모든 종류의 사건에서 주권면제를 인정했다가 1952년에야 상업적 행위 등을 배제하는 제한적(restrictive) 주권면제로 이행하였는바, 그 이전 사건에 외국주권면제법을 적용하는 것은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면제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일본의 확립된 기대에 반하는 소급효를 가지게 되어 불공정하다는 것이었다. 1952년 이전에는 행위의 성격을 따지지 않았으므로 상업적 행위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제1심 법원의 판단과 차이가 있다. 아울러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연합국은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했는데 제3국 국민이 미합중국 법원에서 일본을 상대로 제소한 사건을 미합중국 법원이 수리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이유를 추가했다. 그런데 원고들의 상고허가(미국법상으로는 연방대법원에의 이송명령certiorari) 신청을 수리한 연방대법원은 항소법원 판결 중 외국주권면제법의 소급적용을 부정한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항소법원으로 환송했다. 이에 따라 항소법원은 주권면제 쟁점을 제쳐두고, 이 사건이 법원의 판결로 다루기 힘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임을 이유로 소를 각하했다. 샌프란시스코조약에 후속하는 한국, 중국, 대만과의 조약에 대한 해석을 수반하는 것이고, 한·일간의 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간의 해석이 다른 상황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법원이 다룰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쟁점이라는 것이다.[9] 국제규범에의 호소와 세계시민법정 황금주 소송이 시작된 같은 해에 전시성노예를 규탄하는 여러 나라의 시민단체가 준비한 「일본군 전시 성노예 국제여성법정」(Women’s International Tribunal on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이 열렸다.[10] 1998년 제정된 국제형사재판소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이 무력분쟁 하의 성폭력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보여준 국제규범의 동향에 힘입은 것이었고, 이 법정의 판결 녹취문 중 “법은 정부에 배타적으로 귀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라는 대목에서 보듯이 법다원성(legal pluralism)을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1994년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피해자와 시민단체 대표들의 일본 검찰에의 고소·고발도 당연히 무위로 돌아간 후 그러한 공식 법제와 대조되는 비공식적 시민사회의 법을 내세운 것이다. 한국 사법부를 통한 논의의 확대: 한일회담 문서 공개와 청구권협정상 분쟁해결 부작위 위헌 확인 일본과 미국에서 소송이 실패로 귀결된 후 결국 ‘위안부’ 운동을 위한 법동원의 장은 국내 사법부가 되었다. 이는 국제적·국내적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국가가 매개하여 권리 주장의 바탕을 이루는 조약 해석을 제시한 것에 힘입었다. 즉 2005년 노무현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공개에 따른 후속대책을 논의하는 민관공동위원회를 가동했고, 동 위원회는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여전히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민관공동위원회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해석이 갈리지만, 민관공동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커버되지 않았음은 분명히 했다.[11] 민관공동위원회라는 장을 열게 만든 수단 역시 소송이었다. 즉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1952-1965년 기간의 한일회담 회의록을 공개하라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외교통상부가 거부처분을 한 것에 대한 행정소송이 이끌어낸 결과였다.[12] 이듬해 64명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정부가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 절차에 나서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두 해 뒤 원폭피해자 역시 같은 취지의 청구를 했다. 2011년 헌재는 두 사건에 대해 국가의 부작위가 위헌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13] 1998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국가가 청구권협정에 관한 일본과의 의견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중재회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헌심판을 청구한 것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린 것과 비교해보면, 다소의 법리상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입장을 바꾼 것에 다름 아니었다.[14] 2015년 한일외교장관 합의와 2021년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 이러한 압박 속에 나온 것이 박근혜 정부의 2015년 12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외교장관 합의이다. 치유를 위한 재단의 설립과 일본 정부 예산으로부터 10억엔 정도의 출연,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인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 확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합의는 정치적 논란과 법적 성격에 대한 이견 속에 현재 그 운명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 합의가 조약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 비구속적 합의로서 법적 권리·의무를 창설하지 않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가 처분되지 않았다고 판정했다.[15]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압박받아 서두른 한일‘위안부’합의가 오히려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인한 정치·외교적 난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정치적·외교적 노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사법 - 헌법소원심판과 헌재 결정 - 에 의존하여 문제해결을 재촉한 결과 발생한 정치적 혼란이 다시 역으로 사법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동인을 생산해냈다. 이미 2012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고 그 판결에 대한 반론보다는 지지하는 여론이 더 강한 상태에 고무된 바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 지원단체는 그간 국가면제라는 제약을 의식하여 시도하지 않았던 국내 소송에 나서게 되었다. 2016년 일본국을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두 개의 소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된 것이다. 이 사건들에 대한 판결은 2021년 1월과 4월에 각각 선고되었다. 2018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상고심 판결이 내려지고 2019년 판결의 집행이 준비되자 일본과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국내 여론도 극심한 분열 상태에 빠져들면서 문재인 정부의 국정난맥과 함께 소송을 통한 법동원을 지지해온 민족주의적 대중정서가 약화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인이 청구한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재판부는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주권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반인도적 범죄행위라는 점에서 국가면제에 대한 예외에 해당한다고 보아 국내 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하면서 원고들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는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는 2차대전 말기 독일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노동에 혹사된 이탈리아인들이 독일을 상대로 이탈리아 법원에 제소한 소위 페리니(Ferrini) 사건에서 이탈리아 대법원이 주권적 행위라 해도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면제 배제를 결정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국제법 위반을 인정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및 그것을 반영하는 국내 입법이 위헌임을 선언했다는 점에 주목했다.[16] 반면 곽예남·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20인을 원고로 하는 사건에 대해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가 3개월 후에 내린 판결에서는 페리니 사건으로 촉발된 독일과 이탈리아의 분쟁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 행위를 국가면제로부터 배제하는 국제관습법이 형성되었다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했다. 아울러 국가면제가 인정되더라도 피해자들이 소송 외에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 행사로 볼 수 있는 2015.12.28. 한·일 합의에 의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대체적인 권리구제수단’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로 침해가 과도하다는 주장도 배척했다. 이 재판부가 한일‘위안부’합의의 실효성과 이를 통한 권리구제의 가능성을 상당히 인정하고 있음이 주목된다.[17] 위의 두 판결은 일본국이 항소하지 않음으로써 확정되었다. 이처럼 동일한 배경과 성격의 사건에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이 내려진 가운데 승소한 원고들의 집행을 개시하는 재산명시를 명하는 결정이 내려진 상태이다.[18]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의 집행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정부에 의한 채무인수 등 여러 대안이 논의되고 있으나 정부와 피해자들 사이에 협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고 일본의 태도 변화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충돌하는 ‘위안부’ 판결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율할지, 열린 마음의 토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법동원의 양가적 결과: 사회적 인정, 정치의 사법화, 의제의 축소 지금까지 ‘위안부’ 소송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일본에서의 소송은 모두 패소했다는 점에서는 실패라 할 수 있지만 “반세기 가까이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피해를, 일본의 재판소가 판결문이라고 하는 공적인 문서에서 그 피해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피해의 사실을 인정한 것도, 피해에 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 자체가 피해의 구제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19] 미국 법원에서의 소송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소송전이 본격화되자 1990년대 초반 다소나마 우호적인 면모를 보인 일본의 여론이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송이라는 수단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소송을 비롯한 여러 문제제기의 수단들이 동원되어 일본을 압박한 것이 방어심리를 자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아가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은 한일관계를 경색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원고승소의 ‘위안부’ 판결은 직접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부정하고 배상을 명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다. 정치적으로 비중이 있거나 민감한 사안을 정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법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경향이 탈냉전시대 세계 곳곳에서 목도된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과 ‘위안부’ 소송은 정치의 사법화의 좋은 예들을 제공했다. 정치의 사법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뜨거운 감자를 회피하려는 정치권의 소극적 자세도 그 중 하나이다. 정부는 피해자 및 시민사회와의 대화를 소홀히 하다가 소송과 판결에 따른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것이 미흡하다고 생각한 피해자와 지원단체들이 다시 소송전을 전개하고, 법원은 후속 조치를 정치권이 해결해줄 것으로 보고 권리 존중의 이상적인 판결을 한다. 즉 뜨거운 감자를 다시 정치권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법학자로서 한일간 과거청산을 위한 법적 투쟁을 지원해온 김창록은 ‘위안부’ 문제가 서 있는 지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법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곧 현재의 세계질서와 그 속에서의 동북아질서 및 한일관계의 법적 틀을 근원적으로 재점검하는 작업, 즉 ‘전후 국제질서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다.”[20] 소송이 이처럼 큰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임은 그만큼 소송이 정치와 외교에 큰 숙제를 안겨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송이 가진 그러한 정치적 무게는 개인의 피해 구제와 국가의 역사적·정치적 명분의 보호 사이에 긴장을 초래한다. 그러한 긴장은 일본군‘위안부’ 소송에서 아이러니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국에서 벌어진 황금주 소송과 국내 두 건의 소송 모두에서 위안소의 설치·운영 및 위안부 동원이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이 원고측에서 나왔다. 위안소가 “국가가 감독하는 유곽(brothel)”이며 병사들은 고정된 가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았다는 점을 강조할 정도였다. 사건이 대법원으로부터 항소법원에 환송되자 원고들은 상업적 행위임을 재삼 주장하면서 그 행위가 미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진다는 점을 판단하기 위해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환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하는 세계의 단체 - 한국 단체도 포함 - 를 대표해 아미커스(amicus curiae) 의견서를 제출한 전문가들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국가의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은 카라유키상을 모집하고 동원한 매춘업자들의 행동을 모방했기 때문에 성격에 있어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매춘업자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본의 주장 자체가 그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피력했다.[21] 2000년 국제여성법정에서 판사로 역할했고 국내에서 2016년 제기된 12인 원고 소송을 지원한 영국의 국제법학자 친킨(Christine Chinkin) 등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을 폈고, 그러한 의견은 원고측 주장의 일부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22] 두 판결 모두에서 그러한 주장을 배척했다. 위안부 동원을 상업적 행위로 취급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위험한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인신매매(trafficking)를 수반하는 매춘을 모두 동일하게 취급해 규탄하는 국제적 페미니즘의 논리와 외세에 유린된 과거사를 다루는 입장이 충돌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초기 소송에서 나타난 다양한 청구들 - 사실인정, 사죄, 배상, 교육 - 은 소송전이 여론을 환기하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2016년 소송에서는 청구가 금전적 배상으로 축소되어 있다. 이는 여론 동원 수단으로서 소송이 가지는 역할이 줄어드는 한편 민사소송제도가 허용하는 청구의 형태에 규정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배상 판결은 금전적 배상을 둘러싼 논란을 일으킴으로써 피해자 주장에 대한 여론의 공감을 약화시킨다. 각주 ^ 「한-일 ‘강대강’ 대결의 진원... 대법원 판결 핵심 정리」, 『오마이뉴스』, 2019.7.30. ^ 김창록, 「일본에서의 대일과거청산소송 - 한국인들에 의한 소송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제35호 (2007), 343-345면. ^ 같은 글의 부록에서 김창록은 2007년 2월까지의 한국인 제소 40건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 E/CN.4/1996/53/Add.1, 4 January 1996. ^ An Analysis of the Legal Liability of the Government of Japan for ‘Comfort Women Stations’ Establishe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E/CN.4/Sub.2/1998/13, 22 June 1998. ^ 김창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법적 검토 재고」, 『법제연구』 제39호 (2010), 79-108면; 오승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에 관한 연구 - 해외 법원의 판결을 중심으로」, 『법학논총』 제42권 제1호 (2018), 130-141면; 髙良沙哉, 「‘慰安婦’訴訟の意義と課題」, 『地域研究』 제13호 (2014), 133-152면. ^ 위의 맥두걸 보고서, para. 52. ^ 이 소송이 일본에서의 더딘 소송 진행과 비관적 전망에 따른 것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이 소송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제기된 3건의 위안부 소송 중 시간적으로 뒤에 제기된 1992년과 93년 소송의 제1심 판결이 각각 1998년과 99년에 선고되었을 뿐이었다. ^ Hwang Geum Joo et al. v. Japan, 172 F. Supp. 2d 52 (D.D.C. 2001); 332 F.3d 679 (D.C. Cir. 2003); 542 US. 901 (2004); 413 F.3d 45 (D.C. Cir. 2005). 환송심 판결은 한·일간 청구권협정의 해석 차이를 언급하면서 김창록의 의견서를 인용했다. 황금주 사건에 대한 해설로는 김창록, 앞의 글(2010), 91-93면; 오승진, 앞의 글, 141-145면. ^ 그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김창록,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맥락」, 『법과 사회』, 제66호 (2021), 205-244면. ^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개최 보도자료」, 2005.8.26. ^ 서울행정법원 2004.2.13. 선고 2002구합33943 판결. ^ 헌재 2011.8.30. 2006헌마788; 2011.8.30. 2008헌마648. ^ 헌재 2000.3.30. 98헌마206. ^ 헌재 2019.12.27. 2016헌마253.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1.8. 선고 2016가합505092 판결.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4.21. 선고 2016가합580239 판결.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6.9. 선고 2021카명391 결정. ^ 김창록, 앞의 글(2010), 100면. 중국인 ‘위안부’ 소송에서 최고재판소가 샌프란시스코조약의 틀 속에서 청구권이 포기되었다는 취지는 청구권이 실체적으로 소멸했다는 뜻이 아니고 재판상 소구할 권능만이 상실된 것이라는 해석도, 비록 청구를 배척하기 위한 또 하나의 논리이지만, 일본 사법부가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압력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 같은 글, 103면. ^ Brief of Amici Curiae Askin et al. in Support of Plaintiff-Appellants Hwang Geum Joo et al. and Reversal of the District Court’s Decision,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Circuit, No. 01-7169, August 28, 2002. ^ Christine Chinkin and Keina Yoshida, Opinion in the Case of Kwak Ye-Nam et al. v. Japan in the Seoul Central District Court, 7 Octo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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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AI에 기반한 현전의 증언은 어떤 감각을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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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와 육성의 상이한 정동 ‘위안부’ 증언집 1권은 일본의 역사 은폐와 왜곡에 반발하여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증명하고 고발하기 위한 진상규명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2년간의 채록 작업 후 1993년도에 발간된 증언집 서두에는 ‘위안부’ 제도에 대한 해설이 약 15쪽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후에 ‘위안부’의 증언이 소개되는 배치는 실증적 증거로 ‘위안부’ 증언을 위치시켰음을 알 수 있다. 증언집 1권에서 첫 번째로 수록된 증언은 최초 ‘위안부’ 증언자인 고(故) 김학순의 증언이다. “컴컴하고 정신도 없어 그날은 대체 거기가 어딘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언니하고 나는 방에 들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더니 낮에 양아버지를 끌고 갔던 장교가 방에 들어와 나를 포장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떨어지는 것만도 무서워서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끌려 옆방에 가니 그 장교는 나를 끌어안으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안 벗으려고 하다가 옷이 다 찢겨져 버렸다. 결국 그 장교에게 내 처녀를 뺏겼다. (...) 날이 밝고 군인이 간 뒤 언니가 포장을 밀치며 내게 왔다. 둘은 한심하고 기막혀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1] 증언은 ‘위안부’ 사건의 잔혹한 경험과 증언자가 느낀 심정이 1인칭의 문어체로 기록되어 있다. 증언집은 ‘위안부’ 증언을 연대기적 순서로 재구성하고 사건의 사실적 차원을 명백히 드러낼 수 있도록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수록된 증언의 서사 속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위안부’ 사건이고 이들의 언어는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완결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1991년 공개 증언 당시 김학순의 육성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영상 속 그는 괴로운 기억을 회상하며 감정이 격양되고 말을 중단하며 온전한 설명에 실패한다. 이는 뒤죽박죽된 시간성과 행간의 감정을 제거하고 가필된 문자의 증언과는 대조된다. 무엇보다 강력한 정동으로 증언하는 고통에 청자를 연루시킨다. “그 울면서 안 당하려고 쫓아 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요 (몸을 기울여 달아나가는 그때의 자신과 붙잡는 일본군의 동작을 취한다) 붙잡고 안 놔줘요 이노무 새끼가, 일본노무 새끼가, 군인노무 새끼가(말이 빨라지고 어조가 격양됨).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그, 말도 못해요. 그 당한 얘기는 말도 못 해요. 가슴이 아파서 (목이 멘다) 말도 못한다고요.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한동안 흐느낀다.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당하고 있는 사람을 몰라요. 한국에서 이것을 몰라줘요. 일본에서는 더군다나 없대요, 모르니까! (거의 내지르는 목소리)”[2] 2. 현전의 증언이 자아내는 정동 오늘날 대부분의 증언은 ‘매개’되어 전달된다. 실제로 증언하는 현장에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뉴스의 토막 난 클립으로, 전문을 생략하고 특정 구절만 뽑아낸 기사에서, 운 좋게 기록 영상을 보는 기회가 아니면 우리는 쓰여진 기록으로 증언과 만난다. 따라서 증언 연구의 윤리적 성찰은 기술(Technology)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증언의 청취와 기록, 편집과 보관이라는 전 과정에서 증언의 의미가 굴절되거나 탈락되는 변형을 막기 위해 도구를 고민하고 기술을 검토해왔다. 녹음, 촬영 기술과 더불어 자료를 아카이빙하여 온/오프라인으로 일반인의 접근권을 향상시킬 수 있던 까닭도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오픈 소스가 증가하며 증언 아카이브의 저작권 문제나 2차 창작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활발한 논의가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청자와 증언을 어떻게 매개할 것이냐는 전략에 따라 기술은 실험적으로 활용된다. AI 기술은 ‘현전’의 정동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기술이다. 5.5만명에 달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을 인터뷰한 쇼아 재단(The USC Shoah Foundation)은 생존자의 증언을 촬영하고 데이터화하여 일반인과 상호 대화가 가능한 AI-증언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3] 프로젝트 책임자인 헤더 마이우(Heather Maio)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죽은 이후에도 후세대들이 그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증인인 생존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는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고 전제한다. 즉, 증언자가 자신의 앞에 ‘현전’해 있다고 느끼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다. ‘현전’의 중요성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지적한 바 있는 ‘음성 중심주의’에서 기원한다. 로고스 중심의 서양 철학에서는 ‘목소리’가 영혼과 본질적이고 즉각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로 쓰여진 ‘문자’보다 우월하게 여겨졌다. 음성 중심주의는 “존재 일반의 의미를 현전으로 간주”하며 결과적으로 무매개적 현전에 대한 관념적 우위를 고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4] 실제로 고해상도의 AI-증언자와 마주하는 느낌은 기이하고 놀랍다. 얼굴의 주름과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보여주며, 까다로운 질문에도 여유롭게 대답을 해낸다. 재생되는 영상과 들려오는 육성은 스크린 너머 마치 증언자와 실제 대화 중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로 인해 증언은 몇 겹의 매개를 거치고도 현전하는 감각으로 인식된다. 이는 지금-여기의 ‘나’가 시공의 간극을 초월해 당사자와 직접 만나게 되는, 생생하고 ‘진실’되게 역사의 기억을 나누어 가지는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만남이 자아내는 강력한 정동을 알기 때문에 쇼아 재단은 재단 내부에서 제기된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5] 여기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적극적인 동참 의지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재단은 각 증언자당 1주일을 할당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2,000개에 달하는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해 묻고 답변을 기록한다. AI가 발전함에 따라 질문과 답변 사이의 연결 관계는 더욱 정교화될 것이다. 재단이 데이터화할 수 있는 정보량 자체는 앞으로 변하지 않겠지만(더 추가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고령인 생존자 일부가 작고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화하는 AI의 본질상 기술이 구현해내는 상호작용은 더욱 매끄러워질 것이다. 예측하건대 향후 AI 기술은 역사적 증언에 국한되지 않고 한 개인의 삶을 기록하여 영구하게 보관하는 보편적 툴로 상용화될 것이다. 3. 현전의 기술은 무엇에 가담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진보가 역사 인식의 감각을 형성하는 데 있어 긍정적이기만 할까? 기술 그 자체의 윤리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통해 나와 타자,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분석하는 일일 테다. 나아가 기술이 새롭게 형성하거나 강화하는 감각의 특정 양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감각의 세대차는 급변하는 매체 환경에 의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가령 ‘터치 제스처와 햅틱 기술’은 기기-정보를 지각하는 감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웹상의 화면을 새로 고침 하기 위해 화면을 잡아당기는 터치 제스처는 카지노의 슬롯 머신에서 착안한 결과다. 손가락으로 화면/정보 양식을 확대하거나 축소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거나 페이지를 프레임 밖으로 휙 날리는 신체적 감각이 축적되면서 “데이터를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양식”이 형성된다.[6] 이처럼 특정 기술이 상용화되고 경험이 누적되면서 주조되는 감각과 그러한 감각에 연관되어 강화되는 인식틀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AI 기술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전시가 이루어졌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서강대학교의 영원한 증언팀이 주관하여 2018년부터 진행해 온 〈영원한 증언(Eternal Testimony)〉이 그것이다.[7]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AI는 사전 촬영된 증언을 기반으로 관람객과의 대화 기능을 탑재했다. 그러나 실상 대화라기보단 단편적인 문답에 가깝다. 관람객에게 제공되는 추천 질문지를 훑어보더라도 사전에 증언자와 이루어진 인터뷰 자체가 ‘위안부’ 경험에 편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정된 답변의 데이터로 기본 질문과 어긋나는 물음에는 엉뚱한 답이 나온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냐는 질문에 ‘위안부’ 때 종일 굶던 설움을 말하고, 편찮으신 곳은 없냐는 염려에는 위안소가 마을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회상을 한다. 아흔 세가 넘은 생존자의 말을 청하고 듣는 증언의 장에 그들의 ‘현재’는 없고 오로지 ‘위안부’였던 ‘과거’만 존재한다. 여기서 기술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 재현과 보다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고해상도의 스크린은 주름의 깊은 골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노환으로 떨리는 손끝의 움직임을 잡아낸다. 생생하고 정교한 피해 생존자의 형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붙잡아 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음성인식이 잘못 되거나 질문에 적절하지 못한 답이 제시될 때, 큐레이터는 ‘할머니의 귀가 어두워서’라는 수사를 쓴다. 여기서 ‘나이가 듦’은 기술에 유리한 형태로 전유되고 있다. 그간 페미니즘 운동의 투쟁은 피해자를 ‘피해자’ 정체성에 가두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증언에서 실체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전략은 본질론적 논의로 미끄러질 위험이 높다. 대중이 만나는 증언이 ‘위안부’ 과거를 입증하는 실증적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한 개인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보다 풍부한 언어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은 ‘피해 당사자’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가담해서는 안 된다. 후세대가 ‘증언’을 계승한다는 것은 ‘증언’의 내용을 그대로 암기하는 복제가 아니라 그 ‘증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고통에 감응하며 증언이 함의하는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이어받아 재구성하는 데 있을 것이다. 〈영원한 증언〉에서 증언이 “영원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영원함’이 불변하는 증언자의 정체성과 증언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당사자에게 과도하게 부여되는 증언의 책임을 나누어 가지는, 수많은 타자들의 실천이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4. 계속될 증언의 시도를 위해 가상을 동원한 현전만이 청자를 증언에 연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2022년 개봉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는 현전의 환상이 걷어진 곳에서 다른 방식의 정동을 만들어낸다.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미투 운동가인 젊은 여성 세 명이 김순악의 증언을 낭독한다. 이들은 텍스트로 남아 있는 할머니의 증언을 읽으며 자신이 겪은 폭력과 고통의 경험을 ‘위안부’ 생존자의 과거와 연결 짓는다. 이 장면은 “각자의 ‘상상력과 창조적 몰두’를 통해 과거와의 연루를 상상하는 후속 세대의 포스트메모리 구축작업을 시각화”하며, ‘당사자성’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8]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제주 4·3에 대한 후세대의 기억과 애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9] 작품 속 피해 생존자 딸인 ‘인선’은 어머니가 죽은 후 어머니가 옷장 깊숙이 숨겨놓았던 사진과 편지, 스크랩한 기사와 전단지들을 발견한다. 남몰래 모아온 4·3 자료들 위로 힘주어 그은 밑줄이나 메모로 패인 흔적, 변색된 신문의 바스라지는 귀퉁이는 어머니 ‘양정심’의 침묵과 집념의 물화이기도 하다. ‘인선’은 엄마가 모은 자료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역사의 공백, 증언이 실패했던 지점 위로 새로운 진실을 드러내는 수행을 한다. 즉, ‘현존’이 아닌 ‘부재’에서 증언을 잇는 적극적인 실천을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증언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쓰여진 문자 속 공백이 육성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과거와 이어줄 수 있다. 분명 기술은 이 관계 맺음의 양상을 다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선행 질문은 ‘증언-궁극적으로 역사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이다. 실증의 언어, 현전의 언어, 피해 당사자의 언어로 증언을 묶어 둔다면 기술은 이 담론을 강화하는 데 그치게 될 것이다. 각주 ^ 한국정신대연구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강제로 끌려간 군 위안부들』, 한울, 1993, 37-44쪽. ^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김학순의 첫 공개 증언 중 일부. 김학순의 행동과 어조 변화, 울음 등 이 증언을 듣는 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소를 필자가 괄호 안에 옮겼다. KBS시사직격 유튜브, [85회full] ‘위안부’ 공개 증언 30주년 - 김학순, 다시 우리 앞에 서다 (재업로드) | #시사직격 KBS 210813 방송분 14:45~15:15 참고.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SjO4v7Ig8k) ^ ‘Artificial intelligence preserving our ability to converse with Holocaust survivors even after they die’, CBS NEWS, 2022.3.27 (마지막 접속일: 2022.7.21) (https://www.cbsnews.com/news/holocaust-stories-artificial-intelligence-60-minutes-2022-03-27/) ^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역, 동문선, 2004, 31쪽. ^ 재단 내부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죽음 이후에도 AI로 영원히 ’살아있게’ 만드는 시도에 윤리적 문제는 없는지 숙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또한 AI 제작이 홀로코스트 사건을 ’디즈니화(Disney-fy)’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존재했다. 위 기사 본문 참조. ^ 김성익 외 9인, 『연구자의 탄생』, 돌베개, 2022 중 윤보라, 「몸 없는 공간의 젠더를 연구하기 위해」, 148-154 참고. ^ 〈영원한 증언〉은 2021년 6개월간의 베타 전시를 마친 뒤 재정비하여 국내외에서 공식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필자는 2021년 10월 22일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베타 전시를 관람했다. ^ 김지언,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포스트메모리적 양상 분석 -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6, no.1 (2022): 271-304쪽 참고.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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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에세이 창원 사람들이 만든 2022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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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1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은 2022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일 기념행사를 추모제와 청소년 문화제로 진행했다. 기림일 추모제에 지역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8월 14일 경상남도에서 치르는 기념식이나 주말로 예정된 8.15통일행사와 일정이 겹치지 않는 날을 선택했다. 해마다 ‘위안부’ 기림일 행사는 창원 시민과 지역단체가 함께 기획하고 준비해 왔다. 지난 7월 기획회의에는 윤소영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님, 이병하 경남진보연합 상임대표님, 경남여성연대 실무자 등 여러 단체의 관계자들이 참석해주었다. 특히 5월에 김양주 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 처음 맞는 기림일이라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회의를 시작했다. 마창진시민모임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년보다 더 많은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기획회의 이후에도 온라인과 SNS 공간에서 세부적인 논의를 이어갔다. 회의 결과 올해는 청소년 문화제와 추모제를 병행한 기림일을 만들어 보자고 결정하였다. ‘위안부’ 기림일을 청소년과 함께하는 행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설득이 필요했다. 평소 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은 오늘날 ‘위안부’운동은 청소년 교육을 중심에 두고 진행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셨다. 기획회의 직전에 이에 대한 설명을 먼저 피력했다. 이미 이경희 대표님께서는 ‘위안부’운동과 청소년 교육이 왜 중요한지를 지난 6월 3~4일 <일본군‘위안부’역사교육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이하 국제포럼)을 개최하여 보여준 바 있다. 국제포럼은 일본군‘위안부’ 역사 왜곡과 부정이 심각해짐에 따라 학교 안의 역사교육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경남지역 교사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교사 및 ‘위안부’ 활동가들이 양국의 일본군‘위안부’ 교육의 수업사례를 교류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처럼 ‘위안부’운동을 청소년 교육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바람이 올해의 기림일 행사에서도 계속되었으면 했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문화제가 되려면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참여가 활발해야 하는데 이 또한 지역단체의 협조가 빛을 발했다. 경남지역역사교사모임에서‘청소년 문화제’ 참가자 모집 공문을 학교들로 발송하고 청소년 동아리를 대상으로 하는 홍보를 맡아 주었다. 그리고 각 시민단체는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기림일 청소년 문화제 참가자 모집 포스터를 공유해 주었다.최종적으로 진주여자고등학교의 밴드 동아리 2팀, 창녕 남지고등학교의 합창단, 창원지역 고등학교 연합팀으로 구성된 ‘유월청소년창작가요제’ 우수상 수상팀, 창원의 중학생 두 명이 만든 댄스팀, 거창연극고 학생의 1인극 공연 등의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그밖에 경희대학교 음대 학생의 기타 연주와 오스트리아 빈 음대 유학생의 바로크 리코더 연주가 초청공연으로 더해져 풍성한 청소년 문화제를 만들 수가 있었다. 8월 11일 기림일 추모제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걱정스러웠다. 제발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길 빌었다. 추모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비는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야외 행사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한정된 예산 때문에 의자와 천막을 넉넉하게 준비 못 한 것이 두고두고 안타깝다. 당일 아침, ‘위안부’피해자 할머니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이젤을 받으려고 일찍부터 행사장에 나와 있는데 전화가 왔다. 참석하기로 했던 창원시장의 불참 통보였다. 이어 경상남도교육감도 올 수 없고 국장이 대신 참석한다고 했다. 추모제를 준비하면서 지자체 단체장이 참석해주면 행사가 더 빛날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점을 반성한다. 이젤을 받아 두고 다시 사무실에 들러 최종 시나리오를 챙겨서 행사가 열릴 오동동문화광장으로 갔다. 음향과 조명 팀이 부산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추모제가 열릴 광장 옆에는 ‘인권자주평화다짐비’가 있다. 오동동문화광장을 기림일 행사장으로 선택한 이유다. 다짐비 옆에 문화광장이 조성돼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기림일 행사를 기해 시민들이 다짐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1부 추모제 사회를 맡았고 2부 청소년 문화제는 경남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강만호 단장님이 맡아주셨다. 그래도 진행 부담 때문에 행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칠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 자원봉사 부대를 이끌고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오민혜 선생님이 와주었다. 기림일 행사 준비를 위한 세부적인 논의는 지난 2020년에 결성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지역 수요행동> 텔레그램 방에서 주로 논의했다. 오민혜 선생님은 ‘수요행동’ 텔레그램 방에 올린 행사 당일 현장 진행요원 자원봉사자 요청에 응해주었다. 또 6월항쟁정신계승경남사업회 조수현 사무국장, 그리고 마창진시민모임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임진희씨 등이 일찍부터 와서 무대 아래에서 벌어지는 온갖 잡무를 맡아 주어 한결 든든했다. 청소년 문화제 공연을 위한 리허설이 시작됐다. 강만호 단장님께서 참가자 한 팀, 한 팀의 요구를 점검하면서 공연에 필요한 준비를 해 주셨다. 밴드 공연을 신청한 진주여고 팀은 행사 몇 시간 전에 보면대 5개를 요청했고, 노래를 준비한 팀은 인원수만큼의 스탠딩 마이크를 요구했다. 기타 연주자는 팔걸이가 없는 의자를 주문했다. 행사장에는 관객용 플라스틱 팔걸이의자뿐인데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하고 있으니 강만호 선생님께서 드럼 연주자의 의자를 빌리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음향 업체 사장님과 강만호 단장님이 청소년 출연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심지어 미리 MR을 준비하지 않은 팀도 있어 근처 PC방으로 뛰어가 다운로드하는 상황도 속출했다. 다음 리허설에서는 공동대표단이 ‘위안부’피해자의 영정을 모시고 들어오는 동선을 연습했다. 추모제에서 진혼의식은 대부분 ‘진혼무’로 시작했는데 올해는 영정을 엄숙하게 모시는 순서로 시작해 보았다. 경남여성단체연합, (사)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창원진보연합, 민주노총경남지역본부, 민주노총서비스연맹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경남지부, (사)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우리민족끼리통일의문을여는통일촌, 경남겨레하나, 마산겨레하나, 6월항쟁정신계승경남사업회 등 창원지역 각 단체의 대표님들이 한 분씩 영정을 모시고 식장으로 입장하는 형태의 진혼의식을 준비했다. 단체 대표들은 워낙 바쁜 분들이어서 섭외부터 난항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약속을 받고 추모제 1시간 전에 모여 동선을 맞추어 보기로 했다. 특히 영정 12위를 모시는 남녀 성비를 동등하게 하려고 신경 써서 조율하였다. 앞서 기획회의에서는 ‘위안부’ 운동과 수요시위를 향한 공격의 심각성을 알리고 여러 단체의 응원과 구호를 담은 현수막을 내걸어 기림일 분위기를 돋우자는 의견이 나왔다.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마창진시민모임과 함께 각 단체의 주장과 구호 50개를 담은 조각보 형태의 대형 펼침막이 만들어졌다. 펼침막을 무대배경으로 걸었더니 의도했던 장엄한 기림일 분위기가 연출됐다. 좌충우돌했던 리허설을 뒤로 하고 추모제와 청소년 문화제 본 행사가 이어졌다. ‘청소년이 기억하고 만드는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2022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일 행사는 가장 먼저 피해자 영정을 모셨다. 공동협력단체 대표들이 광장 끝에서 대형 위패를 앞세우고 무대를 향해 둥글게 광장을 감싸면서 입장하여 이젤 위에 영정을 올려두었다. 다음 순서로 시민들이 차례로 분향을 한 뒤 주최 단체 대표와 지역 인사의 추모사가 있었다. 추모사는 생존피해자가 없는 시대를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향한 다짐이 주를 이루었다. 평화를 향한 다짐은 청소년이 꾸민 문화제를 통해 분출됐다. 밴드 공연,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는 1인극, 리코더 연주, 합창, 창작곡 공연, 댄스 등을 선보인 문화제에서 청소년들의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이어가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기림일 행사 현장에서는 비옷, 간식 구입 등 발품 드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은 지역의 시민들이 내 일처럼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행사를 치를 때 날씨 등의 돌발 상황이 생기면 의견이 분분해져 주최 측의 혼을 쏙 빼놓는데, 이날은 궂은 날씨에도 지역 시민단체 일꾼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도와줘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창원 시민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뜻에서 기림일 행사에 참석하고 진행을 돕는 것으로 마음을 다해주었다. 일본군‘위안부’ 단체로서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기림일 행사를 지속하여 운영하는 이유이다. 청소년이 꾸민 기림일 공연은 함께 하신 분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몇몇 분은 ‘추모제’도 이렇게 멋진 문화행사로 꾸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며 감동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셨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눈부신 끼와 재능이 일본군‘위안부’ 기림의 다짐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