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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전쟁은 분명,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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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관통당한 몸: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한겨레출판, 2022) 서평 솔직히 힘이 들었다.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라, 나는 이 책을 하루에 한 챕터 이상 읽지 못하였다. 도저히 사실이라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잔인함과 너무나도 압도적인 숫자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말 그대로 ‘글로벌’한 르포였기 때문이었다. 겨우 한 챕터를 읽어낸 뒤 용기를 내어 다시 책장을 넘기면, 거대한 참혹이 장소를 옮겨 또다시 재생되었다(이 지면에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자세한 내용 언급은 생략할까 한다). ‘전시(戰時) 성폭력’이라는 이다지도 거대한 부정의(不正義)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프리모 레비의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인가?”[1] 나는 조선 중기 광해군대에 발간된 행실도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다루어 석사 학위논문을 완성했다. 본래 행실도는 효, 충, 열이라는 유가의 세 가지 중대한 가치를 지키거나 충실히 이행한 이들을 모범으로 기록한 책이다. 일종의 미담 사례집인 셈인데, 조선시대 내내 수차례 발간된 다른 행실도들과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매우 특이하다.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행실도이기에 대부분이 국내의 사례일 뿐 아니라, 인물 수도 압도적으로 많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확고한 가부장제 속에서 그 형체조차 찾기 어려웠던 여성들이 대규모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1,587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행실도에는 821명, 그러니까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2]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걸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수록된 다음의 사례가 그 이유를 잘 말해준다. 처녀 류씨(柳氏)는 서울 사람으로 …(중략)… 나이 열넷일 때 임진왜란을 만나 외조모 김씨를 좆아 강에 빠졌다. [지나가던] 뱃사람이 손으로 건지고자 하니 류씨가 하늘을 우러러 이르되 “구차히 삶을 구함이 몸을 지켜 죽음만 못하니라”하고 드디어 빠져 죽었다. 소경대왕[선조] 대에 정문(旌門)하셨다.[3] 그러니까 저 이상한 이야기에서(목숨이 위태로운 판에 외간 남자의 손을 잡지 않겠다는 결의를 외치고 죽는 소녀의 이야기면 충분히 이상하고도 남는다) 외할머니와 열네 살 소녀가 강에 빠진 것은 다름 아닌 자살 시도였던 것이다. 나는 저 이야기가 조선 남성 권력자들의 상상일 것이라고 의심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다. 행실도를 출간했던 남성 권력자들도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시 성폭력이 만연했고 그 때문에 여성들이 차라리 자살을 택할 만큼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 그림 속에 슬쩍 보이는 무장한 ‘왜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남성들은 목숨을 바쳐 ‘정절’을 지킨 여성을 칭송함으로써 생존자들에게 낙인을 찍었고, ‘여성의 실절’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무마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소개할 책, 『관통당한 몸』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례는 태곳적부터 어디에나 있었던 현상이란 말인가?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전시 강간을 ‘전쟁의 흔한 부산물’로 여길 만한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강간의 목적은 적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기를 꺾는 것만이 아니었다. 야디지족과 보코하람에 납치된 나이지리아 소녀들, 로힝야족에게서 내가 목격한 것처럼 파키스탄군에게는 강간도 체계적인 전쟁 무기였다. “개별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정책이고 이념에 근거한 정책입니다.”[4] 즉, 전시 성폭력은 명령 체계 안에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사용되는 ‘전쟁 무기’라는 것이다. 심지어 하버드대학교 공공정책학 교수 다라 케이 코언(Dara Kay Cohen)은 ‘전투원 사회화(combatant socialization)’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무장 집단들이 전시 성폭력을 그들 내부 집단의 ‘사회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342쪽). 그러므로 집속탄이나 생화학무기, 핵무기가 국제적으로 금지되는 것처럼, 성폭력이라는 전쟁 무기 또한 공식적이자 국제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르포답게 실증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 ‘실증’은 때론 위험하다.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반복되는 자극은 감각, 심지어 도덕적인 감각마저 무디게 만든다. 성폭력과 학살, 고문이 생생하게 재생될수록 그 참극은 탈맥락화한다.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끔찍하기 그지없는 사례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독자의 도덕적 미성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로힝야족이 겪은 고통에 아웅산 수치가 눈을 감는 이유는 정치 때문이지만, 이 책은 각 사례의 맥락을 깊이 있게 살피지는 못한다. 전시 성폭력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으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군대의 규율이 잘 잡힌 곳에서는 성폭력이 불가피한 현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456-457쪽)는 순진한 서술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강점은 비극을 생생히 재생하는 점에 있지 않다. 책을 펴자마자 쏟아지는 비참의 평원에서 독자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지만, 조금 정신을 차리면 이 책의 서술 대부분이 ‘증언’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저자가 취재한 것은 문서 더미나 증거 사진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생존자 혹은 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들은 악몽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고통은 물론이고 사회적 비난과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147쪽) 새로운 정의를 위하여 고통의 순간을 증언하는 이들의 기억, 눈빛, 말, 그리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서서히 자리 잡는 공감과 연대. 이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괴로움 따위를 감히 말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에도 여전히 전시 성폭력은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전쟁 범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결국 전쟁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1980년대 학교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배울 때 교과서에는 집단 강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남자들의 전쟁처럼 보였다.(240쪽) 이브 엔슬러[5]는 나와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성폭력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남자들은 다 어디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우리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남성들의 문제입니다.”(343쪽)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인 강간이 어떻게 전시에는 문제시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241쪽)라는 저자의 질문은 정확하지 않다. 전시이든 평시이든, 성폭력은 애초에 보편적으로 비난받지 않고 있다. 이 책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남성들의 발언처럼, 그리고 성폭력 희생자가 오히려 저주를 받은 메두사의 사례처럼, 많은 남성이 성폭력을 여전히 “정상인 것처럼”(382쪽) 여긴다. 이 책은 분명 전시 성폭력을 다루고 있으나, 저자는 긴 후기에서 전쟁터 외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을 덮는 독자는 ‘전시’를 떼고 현실을 바라봐야만 한다. 이 책 속의 비극이 비단 전쟁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나 역시 책을 덮고 현실을 바라본다. 명백히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은 범죄를 두고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성폭력 과정에서 여성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그 여성이 피해를 ‘당할 만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닌다. 아동에게 성폭력을 가한 남성에게 ‘심신미약’이라는 방어막이 마련된다. “이건 남성들의 문제”임에도, 그건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피해자보다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기분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발언과 주장이 가볍디 가볍기에,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역자가 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무거운 책인 만큼 매우 세심하게 번역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제목의 번역은 좀 의아한 부분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Our Bodies, Their Battlefield’이다. 물론 ‘관통당한 몸’이라는 제목도 깊이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번역으로, 전시 성폭력을 다루는 책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근거 없는 의심(?)을 하게 된다. ‘젠더 이슈’라는 말조차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2022년 한국 사회에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이 어떤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이 책의 목소리를 전시의 상황일 뿐이라고 제한적으로 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콩고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오랜 시간 치료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니스 무퀘게 박사는 “한 여성이 자기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정할 때 그건 자신이 회복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내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게 놔둘 수 없다고 말하는 것”(492쪽)이라고 했다. 그러니 앞서 소개했던 ‘류씨’의 상상된 목소리가 아니라, 이 책 속 실제 여성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를 소중히 담아 듣고 그들의 귀환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쉽게, 그리고 아프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읽어야 할 책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당연한 말에도 무엇인가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더욱.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마녀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황무지로부터 여성은 돌아온다.[6] 각주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할 것. 정일영,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 시대적 배경과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국어사연구』 17, 2013. ^ 『동국신속삼강행실도』(영인본), 559쪽, 《柳氏投江》. ^ 크리스티나 램, 『관통당한 몸』, 강경이 옮김, 한겨레출판, 2022, 121쪽. 이후부터 이 책을 인용할 때에는 본문에 쪽 수만 표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 편집자 주: 극작가이자 사회운동가. 주요 저서 『버자이너 모놀로그』, 『아버지의 사과 편지』 등 ^ 앨런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박혜영 옮김, 동문선, 200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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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인터뷰 [최은영-양경언 대담] 여성의 글쓰기, 위로와 치유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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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문학동네, 2021)은 ‘증조모-할머니-어머니-나’에 이르는 여성 4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현재를 배경으로 장대한 서사를 엮어낸 이 작품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시간을 불러내 기억하고 공유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물들은 다치고 깨지기도 하지만, 끝내 일어나 서로의 손을 잡고, 일상을 살고, 삶을 일궈나간다. 소설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은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그것과도 맞닿아 있어 여러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처럼 여성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읽기를 넘어 공감, 위로, 치유의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가 지난 9월 <문학은 기억한다: 여성의 시간과 (불)가능한 치유>를 주제로 개최한 『밝은 밤』 북토크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최은영 작가와 양경언 문학평론가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밝은 밤』을 중심으로 나눈 둘의 깊은 사유를 전한다. 양경언 『밝은 밤』은 여성 4대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성씨가 다르지만 누구보다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여성들이 주인공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최은영 처음부터 여성 4대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첫 시작은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말하는 형식으로 썼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삼천과 연결돼있는 사람일 테고, 그렇다면 가족일 것이고, 딸이겠다는 결론을 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손녀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되면서 여성 4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양경언 『밝은 밤』을 읽은 독자들은 대체로 이런 감상을 먼저 꺼내는 것 같아요. 새비와 삼천, 영옥과 희자와 명숙, 미선과 명희, 정연과 지연, 그리고 지우와 같은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같다고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나의 할머니, 어머니, 이모, 고모, 언니, 여자친구들이 떠오른다는 얘기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쓸 때 작가님에게 특히 영감을 주었던 여성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그리고 작가님에게 영감을 준 인물을 소설로 형상화할 때 고민했던 점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최은영 저는 소설을 쓸 때 저의 캐릭터를 쪼개 넣어 쓰는 편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물 안에 제가 들어가 있어요. 이번 작품에는 저를 키워주신 할머니의 성격도 많이 반영됐고요.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을 갔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으면서 자랐거든요. 지연의 엄마인 미선은 저희 엄마와 정말 다른 캐릭터의 인물이지만 엄마와 갈등을 겪었을 때 엄마가 저에게 바랐던 것들, 엄마의 가치관 등이 미선의 캐릭터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그런 부분에서 고민이 있었고, 엄마에게 제 고민을 이야기하니 무엇이든 제가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양경언 결국 나의 삶을 바탕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힘든 지점이 있겠고요. 나의 삶을 떼어다가 새로운 것을 만들다 보니 생채기가 날 수도 있고, 그것을 보기 싫어도 봐야만 하잖아요. 인물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모습들이 반영되는 것이 괴롭진 않았나요? 최은영 저는 오히려 글을 쓸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머릿속의 어지러운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화하면 덜 고통스러워지더라고요. 특히 소설을 쓰면서 제 일부를 떼어 인물을 만들 때는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아요. 양경언 『밝은 밤』에는 역사적 사건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가령 증조모가 어머니와 헤어지고 증조부와 개성으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배경으로 일본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힘없는 집 여자애들”이 “끌려”갔던 일이 등장한다거나, 피폭된 이들의 사연이 히로시마에서 돌아온 새비 아저씨를 돌보던 새비 아주머니를 통해 전해지기도 하고요. 피난길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한국전쟁 이후 남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가부장제를 이어가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려지는데요. 이런 장면들을 그릴 때 작가님이 특별히 유념했던 바가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들을 토대로 공부하셨는지, 그 과정 중에 이전에는 몰랐다가 새삼 알게 된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작가로서 이때 들었던 고민과 생각들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최은영 제가 겪어보지 못한 시대를 써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어요. 가짜를 쓰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죠. 어렸을 때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남성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요. 그 작품들에서 남성 인물은 철학적이고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여성 인물은 항상 현실에 희생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졌어요. 우리 역사가 여성의 몸을 통해 은유적으로 묘사되는 방식이었죠. 굉장히 거북하고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서 한국전쟁을 그릴 때 그런 식으로는 그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소설 안에서 인물들이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그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들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기능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작품이 교조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사람을 폭력적으로 다루게 되는 것 같아요. 한국전쟁은 제가 겪어보지 않은 일이기에 할머니에게 피난 당시의 상황을 물어봤어요.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분 없이 여자는 강간하려 했고, 할머니 자신도 두려웠다고 말씀해주셨죠. 박경리, 박완서 선생님이 쓰신 작품들, 전쟁 이후 민간인들의 삶에 관한 연구 자료들, 피폭 관련 도서들도 읽어봤고요. 사실이 아닌 것을 임의로 추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공부를 하며 썼습니다. 양경언 소설은 결국 사실적인 기율을 존중하며 형성되는 허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관념적으로 다루고자 하지 않았다’, ‘가짜로 쓰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남습니다. ‘위안부’, ‘피폭’, ‘피난길 풍경’ 등 고통을 서사로 재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재현의 방법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고민하셨을 텐데, 그 과정에서 작가님이 세운 원칙 같은 게 있을까요? 최은영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인물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인물들을 도구적으로 전시하듯 써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어요. 인물의 고통이나 슬픔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실현하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며 글을 썼습니다. 인물은 작가의 마리오네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물 위에서 내려다보며 쓰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몸 안으로 들어가서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인물의 마음에 최대한 집중해서 그 마음을 함께 느끼고자 노력했습니다. 양경언 작가의 덕목은 삶에 대한 존중을 갖추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한편, 이런 얘기도 이어서 해보면 어떨까요? 소설을 통해 고통을 직면하는 일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요. 증조모가 자신의 출신 조건 때문에 마을 공동체에서 차별당하고, 새비 아저씨가 통증을 겪으며 인간이 벌이는 전쟁의 끔찍함을 전할 때, 이러한 이야기가 고통스럽더라도 독자들이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최은영 읽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공감해요. 그런데 인간 자체가 가만히 있으면, 그러니까 노력하거나 성찰하지 않으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는 속성을 갖고 있잖아요. 인류 공동체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모르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반복하고, 그로 인해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개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저항하는 시민들이 절대다수라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픽션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었어요.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생각도 하지만 인물 안에서 실제로 그들의 고통을 감각해요. 이야기가 다 사라지고 나서도, 감정은 남아 있어요. 타인의 고통을 순간이나마 내 것으로 느낀 경험이 개개인의 인간을 공감하는 주체로 깨워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순간적인 자극이나 즐거움만 좇는 사회일수록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무뎌지고,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감 능력은 말 그대로 능력이기에, 그런 능력을 잃을 때 자기 자신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읽을 때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러운 독서의 경험은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경언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 고통스럽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이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 그런 반응 자체가 능동적인 독자가 되는 출발점일 수도 있겠고요. 최은영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걸 죄악시하고 낭비라고 교육받으며 살아왔잖아요. 그것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인 것 같아요. 문학작품을 읽으면 감정적으로 동요되고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내가 느끼지 못했던, 느끼지 않으려고 억압했던 감정이 올라오며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줘요. 소설을 읽는 것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양경언 증조모인 삼천은 천성이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을 줄 아는 사람(35쪽)으로 그려집니다. 할머니 영옥은 “할머니도 케이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없어 못 먹죠”라고 장난스레 답하는(28쪽) 장면 등에서 사랑스럽게 그려지고요. 증조모와 할머니를 그릴 때 이런 성품의 사람들로 그리고 싶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최은영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쓴 것 같아요. 이 작품을 쓸 때 제 삶의 주도권을 갖고 싶었거든요. 저는 그때 제게 고통을 준 인간들에 대한 분노로 하루하루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정작 그들은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데, 왜 잘못하지도 않은 내가 고통받아야 하지,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삶을 온전히 살지 못했어요. 그로부터 1년 정도 흐르니 그들을 탓했던 시간 동안 제 삶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줘버리는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에게 미안해지더라고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저 자신에게 집중해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런 지향 안에서 저를 돌아보는 과정이 있었고요. 큰 고통을 겪고도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관찰했어요. 그런 분들은 유머감각이 있어요. 실제로 저희 할머니가 게임도 좋아하시고 농담도 좋아하세요. 험한 일들을 겪으셨지만 정말 즐겁게 살고 계셔서 할머니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소설 쓸 때 녹아든 것 같아요. 양경언 새비와 삼천이 나누는 감정적 교류나 편지를 보면, 이들은 웬만해선 시대를 탓하거나 서로를 원망하지 않아요. 이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힘을 북돋고, 그 힘으로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최은영 삼천과 새비는 자기 인생에 책임감을 갖고 있는 강한 사람들이에요.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나는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에도 나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던 게 떠오르는데, 그건 제가 이야기한 것과도 연결돼요. 자기 삶에서 일어난 어떠한 일에도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말은 ‘다 내 잘못이야’라는 식으로 자기를 내모는 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과정에서 나는 주체였어, 어떤 일이 있든지 나는 내 삶에 책임을 지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라는 결의가 담긴 강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양경언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말 자체가 ‘응답하다(respond)’와도 연결되는데, 자기가 겪은 삶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최근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단절’하고 보자는 얘기들도 나오는데,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관계를 단절적으로만 다루지 않는 것 같아요. 지연과 미선, 미선과 영옥, 이들 모녀 관계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방향으로 소설이 나아가는데요. 상처를 주고받은 관계를 그릴 때 작가님은 인물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최은영 모든 관계에는 인연에 따라 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근데 저희 할머니를 보면 오래 가는 관계도 드물지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아무것도 못 드셨을 때 옆집에 사시던 분이 음식을 만들어다 주시면서 먹고 살아나라고 해주신 적이 있었대요. 그런 돌봄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할머니가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시고, 80대까지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그 분을 만나러 다니셨어요. 삼천에게는 새비가 그런 존재였을 것 같아요. 양경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작가님이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일도 중요했을 것 같아요. 혹시 이 작품을 쓰면서 포기할까 싶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집필 중에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 어떤 장면을 그릴 때였나요. 그때 작가님이 갖고 있었던 ‘질문’은 무엇이고, 그에 대한 답을 어떻게 마련하셨는지요. 최은영 2화가 끝난 뒤 인물들이 대구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그 후의 그림이 구체적으로 안 그려져서 정말 막막했어요. 결국 명숙 할머니가 어느 정도 알아서 해주셨지만, 전쟁이 끝난 뒤 희령으로 가게 되면서 또 막혔어요. 그래서 3화는 초고를 버리고 완전히 다시 썼어요. 최대한 그 세계 안에 있으면서 인물들과 함께 살아보려고 노력했어요. 처음에 3화를 쓸 때는 인물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거의 다 살려뒀었는데요. 친구가 보더니 ‘언제까지 이들을 다 살려둘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3화를 다시 쓰면서 하나씩 보내기 시작했어요. 새비 아주머니가 가실 때는 정말 이별하는 느낌이 들어 많이 울었어요. 그게 소설 쓰기인가 봐요. 3화를 쓰면서 ‘내가 과연 끝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인물들이 알아서 해주더라고요. 고비를 넘겼더니 4화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됐어요. 양경언 『밝은 밤』을 읽다 보면, 공적인 역사에서 제대로 쓰이지 않고 떠돌았던 여성의 시간을 ‘문학’으로 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치유에 이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것은 태양과의 연결 속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달이 어둠 한가운데서 길을 내는 듯한 ‘밝은 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요. 작가님 역시 문학작품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를 접하고 치유에 이른 경험을 갖고 계신지요. 최은영 치유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책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험을 했어요. 최근에 샬롯 브론테가 쓴 『빌레트』라는 책을 읽었는데 19세기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가 학교 교사를 하며 혼자 사는 여성의 이야기예요. 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책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느낌이 들었고 인물에 공감이 됐어요. 그래서 슬프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면서 혼자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작가는 몇백 년 전에 죽었고, 책 속의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도 관계가 없지만 위로를 받은 거예요.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어요. 양경언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이 독자를 읽어주는 것이란 말은 마지막 질문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은영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가장 깊이 있게 묘사할 수 있는 예술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오랜 시간 동안 살아볼 수 있는 경험도 할 수 있고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과, 세상과 단절되고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럴 때 소외감을 느끼고, 그런 소외감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하곤 해요. 저는 살면서 계속해서 무언가와 끊어지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좋은 소설을 읽으면 ‘이토록 다른데도 본질적인 것은 닮아있구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비슷하구나’라는 점에서 인간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곤 해요. 양경언 『밝은 밤』을 통해 작품과 독자들이 공동체의 기억을 새로이 형성해나가는 과정과도 연결되는 말인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 여쭈면서 오늘의 대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은영 내년 여름에 세 번째 단편집을 낼 것 같아요. 단편집은 5년 만이에요. 올해 겨울에 마지막 한 편을 쓸 예정인데, 그간 써온 단편들을 잘 묶어서 내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양경언 인터뷰이: 최은영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사진: 오늘의 나 일시: 2022년 10월 26일 수요일 장소: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42-22 카페스페이스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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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일본군 전범 진술서를 읽으며 드는 단상(斷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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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중국 피해자와의 만남 자주 뜨거운 감자가 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중국인 피해자를 처음 접했던 것은 딩링이라는 중국 작가가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 소설은 중국문학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휴양을 위해 마을에 온 ‘나’가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중국공산당 스파이로 활동하다 병이 들어 돌아온 주인공 ‘전전’과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형태로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피해 여성 전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조차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전전의 고통을 이해는 못 하지만 공감한다. 때때로 피해자의 피해를 전유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듯이. 이 소설이 쓰인 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의 언어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다면 당시 전전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자리에서 사유하는 것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딩링이 전전을 그린 후 50여 년이 지나 현실 속 중국의 전전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강하게 울린 이에 허우둥어라는 피해자가 있다. 그는 마을 촌장이 일본군에게 제공한 여성이었다. 폭력이 행사되는 장에서조차 자신보다 약한 이를 위한 희생을 감내했다고 다른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의 폭력 희생자였다는 이유로 2차, 3차 피해를 겪어내야만 했던 여성이다. 허우둥어의 피해가 과연 ‘위안부’ 피해인가라는 논의가 전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연속선에서 본다면 그 차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전장이 된 중국으로 군대와 함께 조선과 일본의 일본군‘위안부’들이 끌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은 중국의 여성들을 강간하고, 강간센터(위안소)에서 지속적으로 폭력을 자행했다. 강간과 강간센터, 위안소 사이에는 실질적인 간극이 놓여있지만, 일본군이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을 ‘전투의 보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폭력의 연쇄 사슬 끝 실행자 일본군 전범 피해자 구술 자료가 말하는 폭력의 참상을 읽어 가다 보면 그 끔찍함으로 인해 가해자인 일본군에 생각이 미친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떻게 전쟁터로 왔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토록 잔인한 일이 가능했을까?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여 『악한 사람들(Evil Men)』(제임스 도즈 지음,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20)을 저술한 제임스 도즈는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인 동시에 평범하고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며 우리는 “자유롭고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역설은 전장에서 행해진 일본군의 폭력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 같다.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무엇으로 나와 우리의 외부에 둘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이 특정한 ‘환경’과 만나면 (남성) 누구나 일본군 전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이 불편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가해자 일본군을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에서 ‘난징의 강간’을 필두로 일본군의 강간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중국의 푸순과 타이위안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190명 중 842명의 자필진술서를 묶어 2015년과 2017년에 출간된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의 자필진술서 선편(中國欓案館藏 日本侵華戰犯筆供選編)』(이하 『선편』)이 있다. 이 자료집의 중문 요지를 분석한 이코 도시야에 따르면 위안소 관련 진술을 한 전범은 23명이다. 그 외 강간 관련 진술을 한 사람은 모두 591명이며, 강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자는 251명에 그친다. 전체 수록 전범 842명 중 65%가 강간 관련 진술을 한 것이다. 일본군의 압도적 다수가 범했거나 목격한 강간보다 ‘위안부’에 대한 폭력이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맥락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봄, 2018)에서 “전시에 강간 이야기는 이용 가치가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이상 여성의 말을 믿어주거나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을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주제로 간주할 정치적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강간은 적을 악마화하여 ‘전쟁에 뛰어들 감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것이 여성에 대한 강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피해자 여성의 자리에서 전장의 강간을 문제 삼는 일은 그다지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때로 그런 시도는 위험시되기도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자주 뜨거워진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되어 앞으로 나가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개조’와 ‘세뇌’ 사이에서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 『선편』에 실린 전범 자필 진술서는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000여 명의 전범들에게 행한 ‘학습’과 ‘인죄탄백(認罪坦白,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다)’ 운동 과정에서 작성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자필 진술서를 토대로 특별군사법정을 마련하여 1956년 전범재판을 진행했다. 랴오닝성 선양과 타이위안에서 열린 특별군사법정의 기소자는 45명이었다. 나머지는 즉각 석방되어 귀국했다. 운동 과정에서 나온 진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진술서 작성 과정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전후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의 전범들은 버젓이 살아남아 전후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 인물들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쇼와 일왕을 들 수 있고 지금도 일본의 천황제는 사회 구성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근저에서 묻지 않는 것이 일본 사회의 주요 흐름인데,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의 군사 법정에서 불기소된 자들은 곧바로, 기소된 자들도 형기를 다 마치지 않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전원 귀국했다. 귀국한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중귀련 멤버들은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일을 통하여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왔다.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이들과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그들이 중국에서 세뇌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중국 정부는 학습을 통한 사상 개조라고 말한다. ‘세뇌’와 ‘개조’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중귀련 증언자들은 전범관리소 수감 이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를 떠올리게 하여 인상적이다. 전범 관리소에서 레닌의 『제국주의론』,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 노로 에이타로의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등을 읽었다고 한다. 문맹의 전범에게 동료 수감자가 글자를 가르쳐주고, 어려운 책은 대학 출신 동료가 가르쳐주었다. 이에 대해 중귀련의 멤버 다카하시 데쓰로는 “우리는 전범이 되어서 처음 인간다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책을 읽고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나바 이사오는 중귀련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귀국 후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그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죽였는지 점점 더 알게 되었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했어요. 진짜 악마였다는 걸”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배우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번역, 한길사, 2006)에서 아이히만이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군 전범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군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상당히 컸고 그럴수록 잔인해졌다. 다케우치 유타카는 군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성병으로 인한 전력 상실을 막기 위해서 부임지마다 위안소 설치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단지 군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전범관리소에 들어온 이후에야 생각이 미쳤다고 말한다. 나카이 큐지는 1897년 생으로 메이지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쿄지방재판소 등에서 민·형사 사건 판사로 있다가 만주국의 진저우 등지 지방법원에서 재판관으로 있었다. 그는 만주국의 사법관료였기 때문에 죄목이 살인, 약탈, 학살, 강간 같은 ‘전쟁범죄’가 아니라 법관으로서의 직무 수행이었다. 그는 법관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법부 업무를 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전쟁과 식민지배(=괴뢰국)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데 그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카이는 만주국 법관으로서 했던 일들에 대해 자필 진술서에서 범죄행위로 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범죄라고 여겼을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의 행위는 타인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의 순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파급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우리가 행위를 선택하면서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안의 악화에 어느 정도의 브레이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위태롭다고 한 공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 세계의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중국의 사상개조가 ‘강력한 심리적 강압체계’였던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중압감으로 자살에 이른 전범도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 행위를 보다 확장된 관계 속에서 생각하도록 해 자신의 일들이 누군가에 대한 ‘범죄’였음을 인정시킨 운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이선이 필자가 편역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세창출판사)를 2022년 12월 중 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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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여성 해방이 곧 사회의 해방이다: 2022 이란 시위와 글로벌 연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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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in, Jiyan, Azadi(여성, 생명, 자유) “여성, 생명, 자유”. 2022년 9월 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란과 유럽, 캐나다, 미국 그리고 튀르키예(터키)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연대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이게 한 구호이다. 히잡 단속에 걸려 한 젊은 쿠르드(편집자 주: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서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계 여성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사건에 대해 수천, 수만 명의 이란인들이 분노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쿠르드어로 생명이라는 뜻의 지나(Jina)라는 이름을 가진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의 죽음은 이란뿐 아니라 튀르키예와 이라크의 쿠르드족,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튀르키예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2022년 이란 시위는 근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여성 인권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글로벌 연대 시위는 여성의 신체 자율권에 대한 저항을 넘어, 이란 인권과 자유를 위한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로벌 시위의 대표 슬로건이 된 “여성, 생명, 자유”라는 혁명적 구호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 보자. “진, 지얀, 아자디”라는 세 단어의 쿠르드어로 이뤄진 이 구호는 2006년 3월 8일 튀르키예의 세계 여성의 날 행진에서 처음으로 쓰여 대중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슬로건은 1980년대 튀르키예에 저항하는 무장 단체인 쿠르드 노동자당(PKK)이 이끄는 쿠르드 자유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 구호는 “여성이 자유롭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쿠르드 노동자당 공동창립자인 압둘라 오칼란(Abdullah Ocalan)의 글에서 따왔다.[1] 쿠르드 독립운동을 이끈 오칼란은 쿠르드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곧 자율적인 여성 투쟁과 연결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여성, 생명, 자유”라는 이 세 단어를 통해 식민주의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맞선 여성들의 공동 투쟁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번 시위 때마다 울려 퍼지는 “여성, 삶, 자유!”라는 이 마법의 구호는 ISIS(이슬람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이슬람 공화국이 설립된 직후, 히잡의 강제화와 여성들에 대한 샤리아법 적용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바 있다. 1981년 법제화된 이후 지난 40년 넘게 히잡 문제는 언제나 개혁적인 여성들과 이슬람 정권 사이의 ‘문화적 전쟁터’였다. 하지만 한 번도 히잡을 불에 태우거나,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연대하여 거리에서 히잡을 벗고 여성의 인권을 외친 적은 없었다. 물론 이번 시위는 단순히 히잡 강제 착용이나 단속에 대한 저항은 아니다. 그동안 억눌려온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총체적 문제가 이번 시위를 계기로 그야말로 폭발한 것이다. 2018년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이란 핵 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이란 경제는 심각한 침체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 물가는 40% 이상 올랐고, 청년 실업률은 2020년 최고 28%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폭력적인 유혈 진압 앞에서도 계속되는 이번 시위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를 묻는 나에게 이란의 40대 지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의식주가 달린 문제이다. 우리의 아들, 딸들을 더 이상 이 정권의 노예로 살게 할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오늘날 이란 시위의 원동력은 이미 1997년 하타미 정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란의 젊은 세대들은 늘 이란의 변혁과 개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특히 젊은 이란 여성들은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목소리를 잃지 않아 왔다. 2006년 시작된 이란 여성들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 2009년 녹색운동, 2014년부터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시작된 강제 히잡 착용법에 대한 해시태그 운동(#MyStealthyFreedom, #WhiteWednesday, #LetWomenGoToStadium 등)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여성들은 언제나 ‘용감한 사자들’이었다. 이란의 여성들과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을 향한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저항해 왔고,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그토록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2. 경계 없는 연대의 목소리: 튀르키예,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세계 2022년 9월 이란에서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가 가장 격렬히 끓어 올랐을 때, 인스타그램에는 “standwithwomenofiran_turkey”라는 페이지가 개설되었다. 이 페이지 소개 글에는 이란 여성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계정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해당 페이지를 통해 튀르키예의 여성들은 “나는_마흐사 아미니이다”라는 연대의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영상을 올렸다. 또한 “우리, 튀르키예의 영화를 만드는 여성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이란의 여성 및 사람들과의 연대를 선언하며 이란 여성들을 지지합니다”라는 영상물을 연속적으로 올리기도 하고, 성소수자 여성들 역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연대했다. 튀르키예, 레바논, 그리고 중동 각 지역의 쿠르드인들부터 미국 할리우드와 프랑스 배우들의 연대를 통해, 이 시위가 단순히 이란 무슬림 여성에 국한된 국내적 이슈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글로벌 연대의 흐름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보여준 연대 시위의 모습이었다. 2022년 9월 30일에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는, 총부리를 들이대는 남성들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이란 대사관 앞에서 이란 여성들에 대한 연대 구호를 외치는 용감한 아프간 여성들의 영상이 올라왔다. 이 장면은 2021년 8월 탈레반 정권의 등장으로 여권신장의 퇴보를 우려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지지하기 위해 이란의 온오프라인에서 일어났던 연대 운동을 떠올리게 했다. 2021년에는 이란의 여성들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위해 연대 시위를 벌였던 것처럼, 이슬람을 내세워 신체 자율권이 박탈당할 위험을 겪었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 역시 용감한 동조 시위에 나선 것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여성들에 대한 페미니즘 담론이 이슬람 여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반영하고, 무슬림 여성들에 관한 연구 속에 내재한 이슬람으로의 환원주의”를 문제 삼았던 모한티(2005: 51)[2]의 논의는 2022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각 이슬람권의 사안들과 무슬림 여성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이슬람 틀 안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있지 않은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을 비롯해 차별적인 상황에 놓인 이슬람권 여성에 대한 경계 없는 페미니즘적인 연대와 지지가 필요한 때다. 3. 이것은 시위가 아니다. 이미 혁명이다: 이란 여성 혁명 43년 만에 역사상 가장 큰 시민불복종 시위에 나선 이란 국민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것은 시위가 아니다, 이미 혁명이다.” 현대 이란 여성들을 비롯한 이란 민중의 자유와 변화에 대한 열망은 지금까지처럼 은밀하게 자유를 즐기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란 여성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아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거나, 자신의 색을 희석하는 전략을 사용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반격에 나서고 있으며 연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해시태그를 통한 온라인 운동은 이란 내 여성 인권과 강제 히잡 문제, 미투 운동뿐 아니라 남성들을 포함한 국내 인권 문제와 나아가 탈레반 정권의 등장으로 극명해진 여권과 인권의 퇴보를 우려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 운동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을 향한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저항하고 있으며, 사회적 혁명을 꿈꾸며 그토록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소셜 미디어는 이란 여성 운동의 새로운 장을 펼쳐낼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이란의 시민들과 다른 문화권의 무슬림 여성들이 보다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2022년 이란의 시위는 3달 가까이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2022년 10월 1일에는 151개국에서 이란인 디아스포라들을 비롯한 글로벌 연대 시위가 열렸으며, 2020년 이란에 의한 우크라이나항공 737여객기 격추 사고로 82명의 이란인들과 63명의 이란계 캐나다인들을 잃었던 토론토에서만 5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이란 내에서도 10월 8일을 기준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전국적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연일 발송되는 이란 내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면 처참할 정도이다. 11월 17일 기준 10~18세 이하의 청소년 43명을 비롯해 326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에 대한 가혹한 폭행과 발포는 계속되고 있다. 2022년 이란은 위태롭고, 시민들의 삶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40년 넘게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최대로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이란은 2017년 말부터 지금까지 이란 리알화 가치 하락과 경제난으로 인해 전통적인 이슬람 정부의 지지 세력인 시장 상인들과 노동자 계층, 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연이은 파업에 돌입하고 있다. 특히 ‘젊은 이란’을 이루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심각한 실업률과 인권 문제 등은 이란의 평화와 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고 있다. “시리아는 잊어라! ‘우리’부터 생각해!”,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우릴 위해 희생하리라!”는 새로운 정치구호들에서 알 수 있듯,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이스라엘에 맞서 무슬림 형제들을 구하겠다’는 포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2019년 11월에 유가 인상과 경제난 때문에 일어나 최악의 유혈사태를 부른 대규모 시위와 ‘여성의 죽음’으로 촉발된 현재의 시위까지 앞으로 이란의 정세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토록 원하고 기대하던 이란 핵 협상 역시 교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번 시위로 이란 신정 체제가 쉽게 무너지리라 예측하는 이는 없다. 시위가 지속될수록 소수민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발루치스탄이나 쿠르디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경 진압이 예상되며, 정부의 강도 높은 공포 정치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무력으로 시민들을 제압한다고 해서 결코 이슬람 정권이 원하는 ‘정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19년 11월과 2022년 시위에서 보여준 이슬람 정권의 잔혹한 탄압에 대한 반발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갑작스러운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미 이란의 역사는 혁명으로 그 과정을 증명한 바 있다. 현재 중고등학생, 대학생, 바자르 상인, 석유화학 노동자 등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시민들은 두려움 앞에서도 ‘자유’를 외친다. 보안군의 총부리와 강력 진압 앞에서도 “이란을 다시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싸울 것이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마음은 결코 이 시위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각주 ^ ‘Jin, Jîyan, Azadî’ in the words of their creators: Öcalan and Kurdish women – Medya News 2022년 7월 10일, Medya News. ^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저, 문현아 역, 『경계 없는 페미니즘: 이론의 탈식민화와 연대를 위한 실천』 도서출판 여이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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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국가 없는 애국자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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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 9월 29일 10시, 대법원 1호 법정에서 대법관이 판결문을 낭독했다. “원고 이○○ 외 95명, 피고 대한민국, 사건 2018다224408 손해배상(국), 상고와 부대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상고비용과 부대상고비용은 각자 부담한다.” 짧은 판결이 끝나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송 원고인 기지촌 여성들, 소송을 지원한 활동가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판결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너무나 순식간에 끝난 판결에 처음엔 나도 당황했지만, 곧 상고 기각이 2심을 확정한다는 의미임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재판 참여자들은 법정을 나서자마자 원고대리인 중 한 사람인 하주희 변호사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하주희 변호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큰 목소리로 승리를 자축했다. 그때야 비로소 안도와 환희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2014년 6월 25일 122명의 원고를 대리하여 변호인단이 소장을 접수한 지 8년 3개월 만에 결국 원고가 승소한 것이다. 2. 변호인단이 국가 배상 소송을 청구한 원인은 네 가지다. ①한국 정부는 성매매가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지촌을 조성하고 체계적으로 관리, 유지했다. ②정부는 기지촌을 ‘특정지역’으로 지정하고, 그 종사 여성을 ‘위안부’라고 부르면서 성매매에 대한 단속은 물론 관련 불법행위를 방치했다. ③정부는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성병을 관리했다. ④정부는 ‘애국교육’을 수시로 실시하고 ‘자치조직’을 관리하면서 미군 상대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했다. 2017년 1월 20일 내려진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유일하게 인정한 것은 ③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였다. 1963년 개정된 「전염병예방법」은 성병을 포함한 “제3종 전염병 환자 중 주무부령으로 정하는 자는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규정했지만(제29조 제2항), 격리수용 대상자를 명시한 보건사회부령, 곧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은 1977년 8월 19일에야 비로소 제정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격리수용은 법적 근거를 결여했다는 점에서 위법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 이전에 격리 수용된 경험이 있는 원고 57명에게만 손해배상액 500만원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이러한 판결에 불복하여 원고와 피고 모두 항소했고, 2018년 2월 8일 항소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2심 판결은 국가의 책임을 더욱 폭넓게 인정했다. 첫째, 2심 판결은 1심 판결이 일부 인정한 ③조직적‧폭력적 성병 관리의 범위를 확장했다. 재판부는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이 제정된 이후에도 “성병의심자에 불과한 위안부들을 곧바로 낙검자수용소 등에 격리수용한 경우”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의료 진단 없는 ‘성병의심자’의 강제 격리수용은 신체의 자유에 관한 헌법적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또한 ‘성병의심자’의 강제 격리수용 조치가 공무원의 인권 존중 의무에 위반되고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점에서도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둘째, 2심 판결은 1심에서 부정되었던 ①기지촌의 조성‧관리‧운영과 ④성매매 정당화‧조장에 대한 국가 책임 역시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원고들에게 외국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이를 통해 외국군의 사기 진작이나 외화 획득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기지촌의 운영, 관리 전반에 걸쳐 성매매의 조장‧정당화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인정했다. 또한 담당 공무원들이 애국 교육을 실시하고, 아파트 건립이나 노후 보장 등 거짓 약속을 통해 원고들을 기만함으로써,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②국가의 불법행위 단속 면제 및 방치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했고,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피고 측 주장 역시 배척했다. 이상의 판단에 근거하여 재판부는 ①, ③, ④가 모두 인정되는 원고 74인에게는 700만원을, ①, ④에 해당되는 나머지 원고 43인에게는 300만원을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그 후 약 4년 8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 8년 3개월 동안 최초 원고 중 24명이 타계했고, 연락이 닿지 않는 3명 역시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3.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 관리,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조장한 책임이 있음을 사법부가 최초로 인정하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용기와 헌신이 필요했다. 기지촌 여성 인권 운동 단체들이 소송을 주도했다. 두레방, 햇살사회복지회,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한소리회, 여성인권센터 쉬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그리고 경기여성연대가 결성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2014년 3월부터 원고들을 모집하고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현장단체인 새움터는 2014년 3월 기지촌 관련 정부 문서와 언론 보도를 수집한 『미군 위안부 역사』를 출간했고, 원고들의 증언을 수합했다. 또한 원고를 대리하여 법정에서 싸운 변호사들이 있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은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새움터의 요청으로 2012년부터 소송 법리를 구성하기 위해 관련 연구와 문헌을 검토했다. 변호인들은 2013년 3월 최초로 법리검토의견서를 작성하고, 20명이 넘는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들은 활동가들과 함께 원고 진술서를 작성하고, 547개에 이르는 광범위한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변호사들이 법리 구성에 활용한 연구와 법정에서 증언한 전문가들이 있었다.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이정주 옮김, 삼인, 2002/원본출판 1997)를 필두로 기지촌의 형성과 관리,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침해에 한국 정부가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들이 생산되었다. 그중 캐서린 문, 이나영, 박정미의 연구가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이나영과 박정미가 각각 1심과 2심에서 전문가로서 증언했다. 또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의정부 보건소의 의무사무관으로 일한 의사 문정주, 파주 기지촌을 촬영하고 성병 관리 공무원을 면접한 사진작가 조영애가 1심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송의 가장 큰 의의는 원고들, 곧 미군 ‘위안부’ 당사자들이 투쟁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만 명에 이르렀을 미군 ‘위안부’들을 대표하여 122명이 원고로 나섰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소송 역시 피해자들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직접 증언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원고의 진술서와 면접보고서는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되었고, 법원은 사실관계 인정에 이 증거들을 인용했다. 또한 미군 ‘위안부’ 당사자 4명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렇듯 재판부는 여성들의 증언을 경청했고, 증언의 신빙성을 인정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고 중 한 사람은 2심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했다. 우리에게 국가는 없었습니다. 도망가고 싶어서 도움을 요청한 파출소는 다시 우리를 포주에게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보건소에서는 고통스럽고 치욕스럽던 성병검진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해야 했고 성병이 없음에도 토벌, 컨텍으로 보건소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며 감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파도 보건소에서는 주사 한 번 약 한 번 처방해 주지 않았습니다. (…) 안에서는 달러벌이 애국자로 밖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그런 삶을 살아 온 우리의 삶이 너무나 억울합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은 여성들이자 “국가 없는 애국자”라는 역설적 존재들이 마침내 국가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300~700만 원에 불과한 배상액은 원고들이 겪은 고통에 견주어 터무니없이 적다. 여성들이 국가에 의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여성들의 피해를 온전히 배상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또한 2020년 제정되었으나 유명무실한 「경기도 기지촌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판결은 국가가 미군 ‘위안부’들에게 자행한 불의 중 일부만 인정했을 뿐이다. 일례로 미군 ‘위안부’를 수용한 또 다른 시설인 부녀보호지도소나 직업보도시설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은 소송 청구 원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더 많은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국 사회가 그들의 경험에 공감하고 과거의 폭력과 불의를 성찰하여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