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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본군‘위안부’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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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여 년간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논의는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논제가 되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버마, 태국, 베트남 여성들 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국적의 여성들1도 포함한다. 전쟁 후 네덜란드는 전범재판을 위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ad in Batavia)을 실시하였는데, 이 재판은 전쟁 중 행해진 성폭력과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건을 다루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먼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8일 공표된 주요 전쟁범죄인의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협정, 소위 런던협정은 주요 전범재판을 위한 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2 이렇게 준비된 재판 협정은 아시아에서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일본의 주요 전범들은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에서 재판을 받기로 결정되며, 극동지역에서 기소된 수많은 사건은 싱가포르, 홍콩, 바타비아 등 국가별 법정에서 재판이 이루어졌다. 이 판결은 주권을 인정하는 배경에서 국내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대부분 국제법의 큰 틀을 따르고 있다.3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대행 후베르투스 판 무크(Hubertus van Mook)는 1945년 9월 11일 전쟁범죄 조사국의 설립을 명령하였고4, 1946년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국제법 규범에 따라 전쟁범죄를 판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절차적인 법적 틀을 임시군사재판이 갖출 수 있도록 4개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본의 BC급 범죄는 임시군사재판(Temporary Courts Martial)에서 재판받아야 했으며, 1946년 8월 5일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1949년 12월까지 총 448건의 재판이 이루어졌고, 피고인의 수는 1038명에 이른다.5 그중에서도 바타비아 군사재판은 일본군이 네덜란드 여성들을 ‘위안부’로 활용한 사건을 판결하였으며6, 이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법에 근거한 전쟁범죄재판 중에서 강제 성매매를 목적으로 여성을 납치한 전범을 다룬 유일한 재판이었다고 평가된다.7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네덜란드 외교부(Ministerie van Buitenlandse Zaken)와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al Archief)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중요 자료에 대한 접근을 판결 이후 75년간 제한했기 때문이다. 1946년에 개최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기록은 2022년 1월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해지게 되었으며, 1949년의 마지막 판결 자료는 2025년에야 공식적으로 접근 가능하다. 이러한 접근 제한은 관련 사건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사생활 또한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2022년부터 단계적으로 모든 접근 제한을 해제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8 이와 같은 자료 접근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국제적 담론에 자극을 받은 네덜란드 연방의회 하원의 요청으로 1993년 바르트 판 풀헤이스트(Bart van Poelgeest)가 바타비아 임시재판기록의 공문서를 검토 및 조사하였다. 복지의료문화부 장관은 “네덜란드 정부의 공문서 보관소에 있는 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강제 성매매]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언급하였다.9 그 연구 결과는 ‘일본 점령 시기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의 네덜란드 여성들의 강제 성매매에 관한 네덜란드 정부조사 보고서’(Verslag van de resultaten van een onderzoek in Nederlandse overheidsarchieven naar gedwongen prostitutie van Nederlandse vrouwen in Nederlands-Indie tijdens de Japanse bezetting, 1993/1994)로 출판되었으며, 여전히 조사범위와 정보의 규모면에서 현재 ‘위안부’ 관련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자바 섬에서의 ‘위안부’ 동원의 형태를 시기별로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2년 일본의 동인도 점령 후 ‘위안부’를 조달하기 위해 제3자를 이용하였는데, 이 경우 수용소 바깥에 있던 유럽인 남녀,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중국 출신의 민간인들이 주로 원주민 여성의 모집을 담당했다. 1943년 중반까지 여성들은 주로 일본인 장교나 민간인의 가정부로 조달됐으며, 이 시기 일본인들은 민간 매춘부를 찾거나 사설 매춘 시설을 이용했다. 동시에 일본인들은 호텔 주인이나 개인이 소유한 건물을 일본인을 위한 매춘 시설로 전환할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유럽인과 원주민 매춘부는 매춘 시설의 주인이나 기타 알선업자에 의해 모집되었다.10 1943년 중반 이후, 군대와 군당국이 포주와 알선업자들의 지원을 받아 위안소를 직접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11 이 정책은 바타비아, 반둥, 페칼롱간, 마젤랑, 세마랑, 본도오소 지역에 적용되었다. 위안소에 보내질 유럽 여성들은 집단수용소와 수용소 외부에서 모집(동원)되었으며, 군과 헌병대가 이들을 동원하고자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12 하지만 1944년 4월 2일 제16군 사령부는 세마랑 위안소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이용한 강제 매춘이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싱가포르와 도쿄에 전보했다. 4월 말 도쿄에서 네덜란드 여성과 인도-네덜란드(유라시아인) 여성이 고용된 모든 위안소를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5월 초 그 위안소들은 폐쇄되었다.13 이때부터 유럽 여성의 위안소 동원은 금지된다. 1944년 중반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까지 자바섬의 일본인들은 기존의 사설 매춘 시설이나 중계업자를 통해 유럽 여성을 알선하였으나,14 군에 의해 직접적으로 운용되지는 않았다. 정부 보고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200명~300명의 유럽 여성15(주로 네덜란드인)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으며, 이 중 65명은 명확히 강제 성매매의 피해자임을 밝히고 있다.16 즉, 자바섬 중앙에 위치한 문틸란(Muntilan) 수용소와 세마랑(Semarang)지역 근처의 여러 수용소에서 30명~35명의 유럽 여성이 강제 동원됐으며, 세마랑에서 플로레스(Flores)로 이송된 여성이 7명, 페카롱간(Pekalongan)에서 최소 3명, 본도오소(Bondowoso)에서 최소 6명, 자바(Java)에서 티모르(Timor)로 이송된 수가 5~10명, 자바섬에서 암본(Ambon)으로 알 수 없는 수의 유럽 여성이 이송되었다.17 이 통계는 강제 동원된 유럽여성들의 수이며, 자발적 매춘의 경우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 보고서는 “1943년 중반부터 1944년 중반까지 다수의 유럽 여성을 성매매를 위해 동원하고 위안소로 이송할 때 강제적으로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18고 기록한다. 또한 ‘강제’성이 증명되지 않은 자발적 지원이라 할지라도, 기근과 질병 등으로 인해 많은 수용자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열악한 집단 수용소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 ‘자발성’이란 개념은 상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도 명시한다. 이는 수용소 바깥에 거주하던 유럽인에게도 해당되는 상황이다.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일본당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19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거나, 일본당국의 강요에 의해 동의서를 작성한 경우에 자발적 지원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정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여성들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은 경우가 수없이 많았지만, 일본당국이 물리적인 힘을 가하면 거부할 수 없었다. 바티비아 임시군사재판소는 ‘강제 성매매(forced prostitution)’라는 용어의 범위를 이렇게 폭넓게 해석”20했으며, 일본군이 유럽 여성을 동원하기 위해 강제와 무력을 사용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네덜란드 사료를 집대성한 더 용(De Jong)의 조사에 따르면, 1943년 말 자바에 있는 일본 제16군 사령부는 마겔랑과 세마랑에 있는 집단 수용소에서 12명의 여성을 모집하여 새로 설립된 매춘업소로 데려갔다. 당국은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된다고 말했으나 이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용소에서 약 18세~30세 사이의 여성을 모집하여 12명을 선발했다. 이 중 (질병을 앓던 2명을 제외하고) 10명을 보내야 했던 암바라와 수용소의 리더는 이에 항의했으나, 만약 저항한다면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는 40명의 사람들이 대신 목숨을 잃게 될 거라는 협박을 들었다고 했다(1945년 12월 오헤른의 인터뷰. IC,238).21 지명된 소녀들에게는 15분 동안 여행 가방을 꾸릴 시간이 주어졌다. 헤어질 때 여러 소녀들이 어머니를 놓지 않으려는 가슴 아픈 장면이 벌어졌다.22 이들은 세마랑의 위안소로 보내졌고, 구타당하고, 고집을 피우면 부모가 고통받을 것이라는 협박을 들었고, 저녁이 되면 리볼버나 총으로 위협당하며 침실로 끌려가 일본 장교에게 강간당했다. 이후 한 명은 자살을 시도했다.23 2022년 1월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는 네덜란드군사정보국(NEFIS)이 1945년 이후 조사한 세마랑의 게단간(Gedangan) 수용소 사건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1944년 3월 초 한 그룹의 여성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탄 버스가 위안소로 이송되었다. 정보국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3일 뒤 일본인들은 이들이 남자들을 ‘받아야(ontvangen)’ 한다고 말했다. “반응은 격렬했다. 우리는 자살을 하자는 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대에 대한 공포가 가장 컸었다”고 증언 기록에 적혀 있다. 그녀의 손님은 군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있었다. 그들은 시간당 3길더(네덜란드 화폐 단위)를, 하룻밤에 7길더를 지불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폭행하기도 했다.24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과 강제 성매매관련 전쟁범죄의 판결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 ‘위안부’ 동원은 주로 1943년 중반부터 1944년 중반까지 행해졌으며, 바타비아 재판에서 강제 성매매로 기소된 4건의 사건은 다음 사건번호들을 포함한다.25 i. Case No. 40/1946. 피고인 와시오 아오치 (Washio Awochi). ii. Case No. 72/1947. 12명의 피고인. 이들의 신원은 열람가능한 판결문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더 흐로트(De Groot)에 의해 공개됨.26 iii. Case No. 72A/1947. 1명의 피고인 (이케다 쇼이치 (Ikeda Shoichi) 대령으로 추측)27 iv. Case No. 34/1948. 노사키 세이지 (Nozaki Seiji) 장군. i. 유엔전쟁범죄위원회(UNWCC)는 전쟁범죄재판 보고서(Law Reports of Trials of War Criminals)에 이른바 ‘사쿠라 클럽’을 운영한 민간 호텔 관리인 아오치 와시오(Washio Awochi)의 사건(Case No. 40/1946)28을 게재했다. 아오치는 ‘일본 헌병(Kempeitai)과의 직접적 그리고 간접적 협력을 통해 여성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일본 민간인 남성을 위한 성매매 행위를 하게 한’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ii. 강제 성매매 등을 목적으로 일본군 관계자가 네덜란드인 부녀자를 연행한 ‘자바섬 세마랑 소재의 위안소 관련 사건’(Case No. 72/1947)으로 기소된 일본인 12명 가운데 1명이 사형, 8명이 징역형, 2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29 iii & iv. 이케다 쇼이치 사건(Case No.47A/1947)과 노자키 세이지 사건(Case No.34/1948)은 여성과 소녀들을 속임수를 이용해 수용소에서 유인한 비자발성이 입증된 사건이다. 또한 이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위협과 강압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이들은 ‘강제 성매매’와 ‘강간’의 전쟁범죄로 각각 15년 유기형, 12년 유기형을 선고받았다.30 판결문은 일부 여성과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징집되었더라도 당시 그들이 직면한 비인간적인 상황은 ‘도덕과 인간성에 어긋나며(contrary to morality and humanity)’ 범죄적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어, 그러한 강제적 상황이 동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일본군이 수용소의 ‘무력한 상황과 의존적이며 종속적 관계’를 조직적으로 이용하여 여성과 소녀들에게 성매매 행위를 시켰다는 설명도 분명히 했다.31 상기 사건들은 일본군이 민간인의 협력과 대행을 통해 조직화된 시스템으로 성매매를 강요했음을 증명해 준다. 유엔전쟁범죄위원회(UNWCC)는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이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법의 기존 지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활용하여 법에 따른 합리적인 판결’을 내렸다고 평가하였다.32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결과는 분명히 네덜란드의 여성인권에 접근하는 동시대 타 국가들과의 차이를 증명해 보였으며, 세계대전 중 강제 성매매를 목적으로 부녀자를 동원한 전쟁범죄를 국제법에 의거해 처벌한 최초의 재판이다.33 또한 민간인 매춘업소 소유주뿐만 아니라 군인 개인이 강제 성매매에 가담함으로써 전쟁법규와 관례를 위반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기도 하다.34 다시 말해, 네덜란드가 시행한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은 역사상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였고, 오늘날까지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일본군의 개입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각주 1. 네덜란드 국적의 여성들은 순수 유럽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네덜란드인과 현지인의 혼혈인 유라시아인(Eurasian)을 포함한 개념이다. 2. Jørgenson & Friedmann, 2014, p. 335. 3. Piccigallo, 1979, p. 175. 4. Loe de Jong, 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1939-1945, Part 12, Staatsuitgeverij, ’s-Gravenhage, 1988, p. 892. 5. 동일인이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던 경우도 있었으므로, 실제 피고인의 수는 이보다 적다. 6. (1) 1946년 제44호(전쟁범죄의 개념 규정에 관한 총독령). 네덜란드가 제정한 조례 1946년 제44호는 39개 항목의 전쟁범죄를 정의하고 있다. 특히, 제1조 7항은 ‘강제 성매매를 목적으로 소녀 또는 여성의 납치’(Abduction of girls or women for the purpose of enforced prostitution)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같은 해 (1946년) 제45호(전쟁범죄 형법에 관한 총독령) 제4조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 또는 저질렀던 자는 사형 또는 무기나 1일 이상 2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제5조는 ‘전쟁범죄의 미수, 종범(從犯) 및 공모는 그 범죄와 똑같이 처벌한다’고 밝히며, 제9조는 ‘부하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경우, 상관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실 또는 저지를 것이라고 알거나 적어도 그것을 당연히 추측했음에도 부하의 전쟁범죄 수행을 용인했을 때는 그 사람도 전쟁범죄와 동일하게 처벌할 수 있다(equally punishable)’고 명시한다. 즉, 명령권자와 지휘관의 책임을 범법자와 동일하게 처벌가능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Ordonnantie begripsomschrijving oorlogsmisdrijven No.44. 1946, Ordonnantie strafrechtsomschrijving No.45, See also Jørgenson & Friedmann, 2014, p.338, Piccigallo, 1979, p.177). 7. Soh, 2001; Jørgenson & Friedmann, 2014, p. 331; Friedman, 2015. 8. 1995년 네덜란드 문서보관법 15조 4항에 근거함. Archiefwet 1995. aritkel 15 lid 4. https://vng.nl/sites/default/files/2019-11/beperkt-waar-het-moet_20190726.pdf. 9. Dutch Government, 1994, p.2 10. Dutch Government, 1994, p.5. 11. Dutch Government, 1994, p.8. 12. Dutch Government, 1994, p.8. 13. De Jong, 1988, 11b. p.799. 14. Dutch Government, 1994, p. 14. 15. 여기서 ‘유럽’여성의 개념은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러시아, 벨기에, 영국 등 순수혈통 백인(totoks)을 의미할 뿐 아니라, 혼혈인 유라시아인(indos)을 포함한다. 당시 인도네시아 인구는 약 7천만명이었으며, 동인도의 유럽인은 대략 36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16. Dutch Government, 1994, p. 2. 17. Dutch Government, 1994, p.18. 18. Dutch Government, 1994, p.18. 19. Dutch Government, 1994, p. 18. 20. Dutch Government, 1994, p.2. 21. De Jong, 1988, 11b, p. 798. 22. De Jong, 1988, pp. 798-799. Algemene recherche. p.v. M.R, 8 jan. 1946, p. 4 (IC, 3) 23. De Jong, 1988, p.799. General Criminal Investigation Service. p.v. E.I., 1946년 1월 7일, p.6 (a.v., 12) 24. Nationaal Archief. Openbaar2022. Nr. 2278. “Bundel 5A, Semarang en Midden-Java”: Bangkong, Gedangan, Halmaheira, Karangpanas, Lampersarie”. 25.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은 총 171건의 사건을 다루었고, 총 419명을 기소하였다. 이 171건 중 4건이 일본의 강제 성매매와 관련된 것이다. 총 15명의 일본인이 기소되었고, 그중 1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De groot, 1990, p.23). 26. De Groot, 1990. pp.32-33, 66, see supra note 19. 27. No.72A/1947 판결문 참고 (https://www.law.cuhk.edu.hk/en/research/crj/document/Batavia-Judgment-No-72A-1947.pdf) 28. No.40/1946 판결문 참고 (https://www.law.cuhk.edu.hk/en/research/crj/document/Batavia-Judgment-No-40-1946.pdf) 29. 1) 동북아역사재단(2020) 2) De Groot(1990) 3) ICC Legal Tools Database(https://www.legal-tools.org/) 4) Jørgenson & Friedmann(2014). 30. De Groot, 1990, p. 406. Supra note 19. 31. Jørgenson & Friedmann, 2014, pp.339-340. 32. Piccigallo, 1979, p.177. 33. 바타비아 임시재판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국제법에 의거하여 유죄로 판결한 최초의 사례이다. ‘위안부’ 강제동원이 법정에서 유죄로 다루어진 사례는 일본 나가시키 항소법원 형사 제1부가 1936년 9월 항소심 판결에서 인정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판결문에는 나가사키 현에 사는 여성 15명을 ‘식당 종업원이라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꾀어 중국 상하이의 해군 지정 위안소에 보낸 뒤 성매매 시킨 민간인 10명이 받은 유죄판결이 기술되어 있다. (KBS News, 2021.06.27). 이는 전쟁 당시 일본 사법이 ‘위안부’ 모집과정에서의 문제를 범죄로 재판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34. 바타비아 임시재판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Yoon, B.S. 2010, p.16; Askin, 1997, p.302; Jørgenson & Friedmann, 2014, p.331. <참고문헌> 동북아역사재단(2020).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료집 2: 위안소 운영 실태와 범죄 처벌. 일제 침탈사 자료총서 92. 동북아역사재단. KBS News. (2021). “강제연행 공문서 없다”더니…日“3월31일 판결문 제출받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19323 Askin, Kelly D. (1997). War crimes against women: prostitution in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s. Den Haag: Martinus Nijhoff Publishers. De Groot, L.F. (1990). Berechting Japanse oorlogsmisdadigers in Nederlands-Indië: Temporaire Krijgsraad Batavia. 's-Hertogenbosch: Art & Research. De Jong, Loe. (1988). 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Deel 1 t/m 13. ’s Gravenhage: Staatsuitgeverij. Dutch Government. (1994). Report of a Study of Dutch Government Documents on the Forced Prostitution of Dutch Women in the Dutch East Ind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Unofficial Translation. The Hauge. Friedman, Sylvia Yu. (2015). Silenced No More: Voices of 'Comfort Women'. Freedom Campaign Publishers. Jørgenson, Nina.H.B. & Friedmann, Danny (2014). Enforced prostitution in international law through the prism of the Dutch Temporary Courts Martial at Batavia, FICHL Publication Series, 21, 331-354. Piccigallo, Philip R. (1979). The Japanese on Trial: Allied War Crimes Operations in the East, 1945-1951.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Soh, C. Sarah. (2008).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Tweede Kamer. (1993/1994). Verslag van de resultaten van een onderzoek in Nederlandse overheidsarchieven naar gedwongen prostitutie van Nederlandse vrouwen in Nederlands-Indie tijdens de Japanse bezetting. 23 607 nr. 1. Yoon, Bang-Soon. (2010). Imperial Japan's Comfort Women from Korea: History & Politics of Silence Breaking, Journal of Northeast Asian History,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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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일본군‘위안부’와 여성인권에 접근하는 네덜란드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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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네덜란드가 열었던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den)의 판결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증명할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이 재판에서 다룬 총 171건의 사건 중 4건이 일본의 강제 성매매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와 관련해 총 15명의 일본인이 기소되었고, 그중 1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다.1 무엇보다 네덜란드 법원은 BC급 전쟁범죄로 기소된 강제 성매매 피고인들에게 국제법에 의거해 역사상 처음으로 형을 선고했을 뿐만 아니라, 동인도에서의 위안소 운영의 실태와 일본군의 조직적인 개입 및 유럽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의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중요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은 그 한계성과 모순 또한 지니고 있다. ‘침묵된 타자’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한계 무엇보다 이 재판은 모두 유럽 여성에 대한 범죄행위만을 다루고 있을 뿐, 네덜란드는 자신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사실과 인권유린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식민주의적 인종차별과 유럽 여성의 도덕성과 명예를 인도네시아 여성의 것보다 우월한 것으로 해석하는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사고와 오리엔탈리즘이 기저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임시군사재판에서 강제 성매매를 다루는 이중잣대를 양산했다. 네덜란드인은 식민지 성(性)담론에서 우월한 계급에 속했으며, 이들은 열등한 타자인 인도네시아인보다 우월한 주체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등한 동양’, 그 타자화의 대상은 인도네시아인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인에게도 적용된다. 즉, 네덜란드는 “일본인이 저지른 범죄 자체에 대해 처벌했을 뿐만 아니라, 인종적 침해, 즉, 부르주아 ‘백인’ 여성에 대한 ‘황인종’ 남성의 성적학대에 대해 일본인을 처벌”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문에 드러난 담론은 네덜란드 정부의 식민주의적 인종차별주의를 반영한다. 임시군사재판장인 더 흐로트는 무방비 상태로 억류되어 있던 여성들의 강제 성매매 동원을 ‘잔인함의 궁극적인 예(ultime voorbeeld van wreedheid)’로 규정하고, 일본 용의자를 일컬으며 ‘짐승 같은(beesachtig)’과 ‘비인간적(onmselijk)’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2 당시 유럽 여성들에게 부여된 ‘아무 힘없는 희생양(willoze prooi)’3이라는 순수함의 이미지로 인해 그 순수함을 훼손하는 일본인은 최악의 전범으로 규정되었다. 반면, 동양인 ‘타자’인 동인도 여성들이 또 다른 동양인 ‘타자’인 일본인들에게 겪은 시련은 간과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드러내는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는 세마랑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일본군은 수용소에서 35명의 유럽 여성을 이 지역 4개의 위안소에 배치했다. 나중에 세마랑의 헌병대에 의해 100명 이상의 유라시아인, 인도네시아인, 중국인 여성이 모집됐다. 하지만 세마랑 사건의 재판은 수용소 외부에서 동원된 100여 명의 유색인종 여성이 아닌 수용소 내에서 징집된 유럽인 피해자에게만 해당됐다. 그 과정에서 모든 유럽인 피해자는 위안소에 오기 전까지 처녀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법원은 유럽 처녀의 강제 성매매를 재판하는 것이었으며, 피해자가 순결을 잃고, 굴욕을 당하고,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유럽 여성의 순수함이 침해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4 임시군사재판은 포괄적 개념의 ‘강제성’을 근거로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었는데, 이러한 해석은 부분적으로 ‘유럽 여성의 자발적인 성매매는 불가능하다’고 간주한 데 기인한다. 서구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외설적인 행위이며 ‘서구의 도덕적 기준에 반하는’ 매춘행위를 유럽 여성이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volgens Westersche maatstaven niet eerzaam is en indruischt tegen de eerbaareheid”).5 동인도의 성매매에 관한 연구에서 헤서링크(Hesselink)는 성매매를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각을 흥미롭게 비교한다. 유럽에서 성매매는 더럽고 타락한 것이었으며, 매춘부는 사회 최하층을 형성했다. 유럽 여성은 유럽의 우월한 규범과 가치를 유지하는 데 모범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신의 성을 표현하고 판매하는 여성은 서구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고 지적한다.6 반면 유럽인들의 사고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위안부’는 성매매를 혐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유럽의 성관념과는 다른 느슨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성매매 행위가 이들의 명예를 빼앗거나 심각한 타격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7 이러한 사고방식은 네덜란드 남성들이 역사적으로 동인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거나, 첩(Njai)을 두는 문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8 이는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사고를 드러내는 동시에 임시군사재판에서 유럽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고,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피해는 외면당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즉, 성매매 담론을 둘러싼 네덜란드의 이율배반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인도네시아의 첩(Njai)제도와 ‘위안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제도의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을 조사하는 것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9 인도네시아 여성을 바라보는 이러한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백인 유럽 여성의 품위와 명예를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중요하게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식민주의적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은 오랫동안 동양을 타자화해 왔으며,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편견은 서양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담론 속의 주체는 ‘유연한 우월적 위치(flexible superior positionality)’를 설정하기 위해 상대를 열등한 타자로 만든다. 사이드가 말한 이 ‘유연한 우월적 위치’는 서양인 자신에게 본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으로 부르는 담론 속의 주체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담론 속에서 서양과 동양은 합리/비합리, 도덕/열등, 성숙/유치, 정상/이상이라는 위계적이고 대립적인 층위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양이 자신에게 우월한 위치를 부여하고자 동양인을 열등한 타자로 가치 하락시킨다고 할 수 있다.10 이는 네덜란드가 오랫동안 인도네시아를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시선을 대변하기도 한다. ‘게으른’, ‘성적으로 느슨한’, 그리고 ‘지도가 필요한’, ‘신뢰할 수 없는’, ‘육체적인’ 존재로서 동인도의 원주민들은 네덜란드의 담론 속에서 재현되어 왔다.11 1900년대 초 동인도 원주민들을 위한 교육, 교통, 의료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시행된 네덜란드의 ‘윤리정치(Ethische Politiek)’는 원주민들의 정치적∙경제적 발전을 돕는 의도였으나, 근본적으로 문명화된 네덜란드가 미개의 인도네시아를 돕는다는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유럽 여성은 동인도에 유럽의 미덕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표상화됐다. 따라서 동인도를 방문하는 유럽 여성들을 위한 지침서에서는 비위생적이고, 부도덕하며, 게으른 원주민 여성들과 너무 잦은 접촉은 피하도록 조언하고 있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2 이처럼 서양과 동양,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차이는 인종에 따른 불평등을 법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법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유럽인과 원주민이 서로 다른 법적 요구사항을 가진다고 믿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많은 영역에서 ‘법이 인종에 근거해 이원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 예로 유럽인은 공정한 재판을 보장받았지만, 원주민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13 더욱이 네덜란드가 보이는 태도의 이러한 양면성은 임시군사재판에서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 기간 동안에 행해진 네덜란드 동인도군(KNIL)의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인 ‘현지군사재판’의 성폭력 재판에서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바타비아 현지군사재판(Krijgsraad te Velde in Batavia)의 성폭력 재판과 한계 1942년 일본의 동인도 점령으로 인해 실질적인 통치권을 상실한 네덜란드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다시 동인도에서의 식민정책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1945년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 수카르노가 독립을 공표했고, 1945년부터 1949년까지 4년간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립군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경찰행정(Politionele acties)’이라는 미명 하에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병했고, 이들이 저지른 과도한 무력 사용과 전쟁범죄는 민간인을 포함해 10만 명이 넘는 인도네시아 희생자를 낳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규모 군대가 형성되면서 군사적 정의와 행동규범의 수립 필요성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45~1950년 사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기간 동안 일반군사법원 대신 현지군사재판소(Krijgsraden te Velde)가 주요 법적 기관이 되었다.14 왕립 네덜란드 동인도군(KNIL)의 재판을 위한 바타비아 현지군사재판은 총 1781개 사건을 다루었다. 이 중 21개 사건이 성폭력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피해자는 대부분 인도네시아 원주민이었다. 그리고 가해자 또한 종종 원주민이었다. 이들 중에서 단 3명의 유럽 군인이 성폭력 혐의로 기소되었다.15 현지군사재판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군 형법에 근거하여 판결됐는데, 검사가 종종 형량을 줄이려 한 정황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미성년 의붓딸을 학대한 유럽 군인에 관한 사건에서 검사는 참작할 수 있는 여러 정황을 제시했다. 심리보고서는 피고인이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이유를 들어 책임의 경감을 제안했고, 결국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법원은 피고인의 낮은 도덕성을 인정했지만,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인 피고인이 ‘유럽인으로서 사실상 거주하기 힘든 환경’에서 살았다고도 지적했다.16 즉, 유럽인으로서 살기 힘든 인도네시아의 환경이 유약한 피고인이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근거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유럽인 상병이 미성년자 유럽인 소녀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경우, 심리 검사에서 상병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상급자에게 불리한 평가를 받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일시적인 일탈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변론에서 피고인이 사회의 도덕 기준을 위반했다고 인정했지만, 이는 슬럼프 기간에 일어난 일이며 흥분이나 충동을 범죄행위로 간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17 현지군사재판은 피고인의 사기 저하의 결과가 성폭력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법원은 이처럼 유럽인 가해자의 부도덕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예외적인 상황을 찾는 것 같았고, 이들의 범죄행위는 종종 일시적인 충동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동은 범죄성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탈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행동이었으며, 따라서 형은 경감될 수 있었다. 기소된 세 명 중 두 명은 유기형에서 면제되었다. 군사재판에 인도네시아 원주민이 기소된 경우에서도 재판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로레스에서 태어난 원주민 군인이 11세 소녀를 학대한 사건으로 기소됐었으나, 재판부는 강압적인 측면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피고인은 미성년자를 추행한 혐의로 징역 10개월만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서도 식민주의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피고인의 행동의 질이 나쁨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피고인 같은 원시적인 남성들(primitieve mannen zoals de beklaagde)’은 성적인 문제가 있기 마련이며, 성적 욕망을 조절할 수 없는 원주민이라는 사실이 참작의 사유로 활용되었다.18 이 외의 사건에서도 사건의 유일한 증거가 인도네시아 피해자의 증언인 경우, 강간은 유죄판결을 받을 수 없었다. 성폭력 재판에 관한 검사들의 논의에서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종종 저항을 거의 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의 증거를 제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19 이에 대한 예가, 세마랑의 한 군인이 강간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그는 자바 여성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그녀를 강간했다. 피고인은 온전히 자백했으나 형량 결정에 있어 검사는 그 여성이 성년의 나이를 훨씬 넘었고, ‘어떤 의미에서 사건 발생에 대한 그녀의 협조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20 또한 미성년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의 판결에서도 피고인인 54세의 인도네시아인 군인은 그가 행한 폭력과 강제성을 부인하며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돌려보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반면에 소녀는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옷을 벗어야 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군 검사는 피해자가 기소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이며,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조숙하므로’ 군인의 행위가 악의적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즉, 인도네시아 소녀는 성숙했고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간주되므로 강제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이다.21 이처럼 인도네시아 여성은 성적으로 조숙하고 성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식의 일반화는 기소인이 강제적인 폭행을 행했다는 근거를 무력화하고, 현지군사재판이 기소인을 무죄로 판결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처럼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den)에서 판결의 기준이 된 유럽 여성 피해자의 명예와 품위 개념은, 현지군사재판(Krijgsraden te Velde)에서 판결 기준이 된 인도네시아 여성 피해자의 도덕성의 개념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볼 때, 매춘 또는 성매매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충분히 수용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위안부’에 대한 혐오나 거리낌도 많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임시군사재판에서 유럽 여성에 대한 태도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임시군사재판에서 네덜란드인 ‘위안부’에게 행해진 강제성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적용하고, 일본이 네덜란드인 포로수용소에서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를 전범 조례에 추가하는 등22 일본 피고인의 처벌에 엄격했던 네덜란드였지만, 그 피고인이 네덜란드인이 되고, 피해자가 인도네시아 여성일 경우 유무죄를 판결하는 잣대는 이율배반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두 법원의 재판결과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성차별의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은 비단 네덜란드 군사재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네덜란드를 포함한 승전국들의 도쿄전범재판23 판결은 여전히 피식민국의 아시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연합군이 직접 위안소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했는데,24 이는 전쟁의 승자뿐만 아니라 패자에게도 면죄부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며, 이 제국들의 위선과 승자의 정의는 도쿄재판이 ‘위안부’에 대해 대체로 침묵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25 연합군이 직접 위안소를 사용한 사실은 연합군 또한 ‘적군’에 대항하는 전쟁행위로써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에 가담했으며, 전범재판에 성범죄를 전쟁범죄로 포함하여 재판에 회부하게 된다면 연합군은 처벌을 받고, 자국의 군인을 재판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26 즉 “도쿄전범재판에서 일제강점기 동안의 한국인과 연합국 식민통치하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범죄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기소되지 않았으며”27, 이와 같이 기소 대상을 결정하고 전쟁범죄의 범위를 정한 이러한 주관적 판단은 “위헌적이고, 오만하며, 인종 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28 태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바타비아 임시재판과 극동군사재판(IMTFE) 판결의 한계 및 불처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개최되었다. 이 민간법정에는 한국,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피해생존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으며, 일본군 고위관계자와 일본정부에 책임을 물으며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위안부’ 문제의 범죄성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법정의 한계는 ‘위안부’ 문제를 전쟁 중 여성인권 문제로 보는 데 그쳤으며, 식민주의 비판과의 연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식민의 역사와 여성인권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할지에 대한 반성과 고민을 숙제로 안겨준다.29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강제 성매매 이슈는 일본이 점령했던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에 해결되지 않은 법적 문제이자 화해의 걸림돌로 남아있다. 일본이 ‘위안부’ 제도를 통해 수많은 여성들에게(그 대상이 네덜란드 여성이든, 인도네시아 여성이든, 한국인이든, 다른 아시아 국가 여성이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성적 학대와 폭력, 인종차별을 자행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인권유린과 성폭력을 경험한 수많은 아시아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침묵 당해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전쟁 중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는 전쟁의 부산물로 간주되곤 했으며, 식민체제 하의 여성인권은 ‘피식민’과 ‘여성’이라는 이중적 ‘타자’의 위치에서 무시되고 침묵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침묵 속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인종차별, 성차별, 식민주의 역사와 관련하여 앞으로 우리가 풀어가야 할 많은 과제들을 시사한다. 정의는 다면성을 지니며, 그중 하나는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30 그러므로 식민지 피해자와 여성들에게 주어질 평등한 정의는 보편적 인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반성과 국제윤리체계의 구축이 선행될 때 가능해지리라 기대해 본다. 각주 1. De Groot, 1990, p.23 2. De Groot, 1990, p.29, p.80 3. De Groot, 1990, p.104. 4. NIOD. inventarisatienummer 400, zaak 72/1947 5. 네덜란드 전쟁문서보관소(NIOD), 목록번호 400, No.72/1947, Judgment, p.13; Jørgenson & Friedmann, 2014, p.344; Koevoets, 2016, p.54. 6. Hesselink, 1987, p.213. 7. Tanaka, 2003, p.66. 8. 네덜란드 남자와 동인도 여성 간에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첩(Njai)제도는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 역사와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헤서링크(Hesselink, 1987, pp. 208-209)에 따르면 동인도에서의 매춘은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필요악(necessary evil)’으로 간주되었으며, 정부가 마련했던 성병 방지 교육과 적극적인 성병 치료는 고객인 유럽인의 건강을 우선시한 조치였다. 더불어 매춘을 하거나 성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었던 첩(njai)제도는 유럽 남성들에게 ‘축복(blessing)’으로 간주되었다. 9. Horton, 2009, p.195. 10. 사이드, 1991, p.24, pp.75-76 11. Pols, 2007. ‘Psychological knowledge in a colonial context: theories on the nature of the “native mind’ in the former Dutch East Indies’, History of Psychology, 10. p.2. 12. Stoler, 1989, p.640, p.650. 13. Wertheim, 1991. “Koloniaal racisme in Indonesie”, De Gids, 154, p.369. 14. Van den Bos, 2015. p.32. 15. Koevoets, 2016, p55. 16.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9, zaak386/1948. Koevoets, 2016, p.56참고. 17.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64, zaak362/1949. Koevoets, 2016, p.56-57참고. 18.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8, zaak358/1948; Koevoets, 2016, p.56. 19. NL-HaNA, Hoog Militair Gerechtshof, 2.09.79, inv.nr. 1747; Van den Bos, 2015, p.56; Koevoets, 2016, p.57. 20.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8, zaak355/1948; Koevoets, 2016, p.57. 21.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5, zaak105/1948; Koevoets, 2016, p.59. 22. Borch, 2015, p.103; Koevoets, 2016, p.48. 23. 극동국제군사재판(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은 도쿄재판(Tokyo Trial) 또는 도쿄전범재판(Tokyo War Crimes Tribunal)이라고도 불리며, 일본제국의 A급 전쟁범죄를 재판하기 위해 1946년 4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열린 재판이다. 24. Tanaka, 2003, pp.133-166. 연합군 수장인 맥아더 장군은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이러한 위안소의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즉각적인 폐쇄를 명령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 정부는 1937년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미국과 다른 연합군이 일본에서 잔학 행위를 저지를까 두려워했고, 일본은 일본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1945년 8월 18일 연합군이 사용할 위안소를 열었다. 이후 위안소가 문을 닫게 된 것은 성병의 확산을 막고자 함이었지, 여성 인권의 착취에 관한 반성 때문은 아니었다(Friedman, 2015, 주68). 25. Henry, 2013, p.369. 26. Friedman, 2015, 주 68. 27. Dolgopol, 1995. p.30. 28. Friedman, 2015, 주 86. 네덜란드, 미국, 호주,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사령부(SEAC)에 각자 자국의 전쟁범죄과(War Crime Section)를 만들었고, 네덜란드 역시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전범을 조사하기 위한 팀을 구성했다(Piccigallo, 1979, 178). 하지만 도쿄전범재판을 위해 한국인이나 일본 지배하의 다른 피식민국가들을 위한 이같은 팀은 구성되지 않았다. (Friedman, 2015, 주 80) 29. 네덜란드인들의 이러한 고민의 예로, 얀 바닝과 힐더 얀슨이 2007년과 2009년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이들의 사진과 인터뷰 내용을 『위안부(Comfort Women=Troostmeisjes)』와 『치욕과 무죄(Schaamte en Onschuld)』라는 책으로 출간하고 전시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전시회는 네덜란드, 프랑스, 인도네시아와 일본에서도 개최되었다. 또한 이 인터뷰는 ‘우리가 예뻤기 때문이었다(Omdat Wij Mooi Waren)’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어 인도네시아인 ‘위안부’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기여했다. 30. Dolgopol, 2011, p.260. <참고문헌> 사이드, 에드워드. (1991).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Borch, F.L. (2015). “In the name of the Queen”; military trials of Japanese war criminals in the Netherlands East Indies (1946-1949),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79, 93-125. De Groot, L.F. (1990). Berechting Japanse oorlogsmisdadigers in Nederlands-Indië: Temporaire Krijgsraad Batavia. 's-Hertogenbosch: Art & Research. Dolgopol, Ustinia. (1995). Womens' Voices, Women's Pain. Human Rights Quarterly, 17(1), 127-154. Dolgopol, Ustinia. (2011). Knowledge and Responsibility: The ongoing consequences of failing to give sufficient attention to the crimes against the Comfort Women in the Tokyo Trial. in: Tanaka et al. Beyond Victor’s Justice? The Tokyo War Crimes Trial Revisited.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44-261. Friedman, Sylvia Yu. (2015). Silenced No More: Voices of 'Comfort Women'. Freedom Campaign Publishers. Hesselink, Liesbeth. (1987). ‘Prostitution: a necessary evil, especially in the colonies’, In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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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냉전 시기 대만의 슬픈 낙원, 軍中樂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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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자 아시아 각지의 일본군‘위안소’들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군인 전용 성매매업소로서의 군 ‘위안소’(이하 따옴표 생략)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뿐 오히려 새로운 군대를 위한 위안소들이 전후 각국 정부에 의해 잇달아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말기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후 구 일본군위안소가 슬그머니 미군위안소로 전용된 것은 차치하고, 1945년 8월 일본 정부는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포함한 점령군위안소를 설치했고, 한국전쟁 때 한국정부는 한국군특수위안대와 연합군위안소를 각각 설치했으며, 비슷한 시기 대만 국민당 정부도 대만군위안소라 할 수 있는 특약다실(特約茶室)을 설치했다. 전후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특수함’을 내세운 각국 군 위안소들의 연쇄적 등장은 식민과 탈식민, 열전과 냉전의 착종 속에 구축된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특별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대만 특약다실은 그 특별함이 가장 명징할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까지 최장기간 지속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관련 연구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는 특약다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1 1. 특약다실의 설치와 명칭 특약다실의 원래 이름은 군중낙원(軍中樂園)이었다. 지금까지 기록으로 확인된 첫 대만군 전용 성매매업소는 1951년 금문도에서 개업한 ‘군낙원(軍樂園)’이다. 하지만 국방부 지시에 따라 군중낙원이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954년이었다. 국방부는 장제스 총통의 승인 하에 1953년 「군중낙원 설치 임시 시행법」을 만들고 일부 군부대에 군중낙원 시범운영을 허가했다. 1년여의 여론 수렴과 일선의 긍정적 평가를 바탕으로 국방부는 정식으로 「군중낙원 설치 실시법」(1954, 이하 군중낙원법)을 제정하고, 금문도를 비롯한 대만 전역의 육해공군 부대에 군중낙원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군중낙원이라는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는지 국방부는 1957년 군중낙원을 특약다실로 개명하고 관련법도 「특약다실 설치 실시법」(이하 특약다실법)으로 개정했다. 1958년에는 「주화 미군클럽 설치법」을 제정하고 미군특약다실도 설치했다. 하지만 개명 후에도 특약다실은 여전히 군중낙원으로 더 많이 불렸다. 특약다실에 비해 군중낙원이라는 이름이 그것의 본질적 성격을 훨씬 즉자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군중낙원을 최초의 군낙원부터 특약다실까지를 가리키는 범칭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2. 일반 공창과의 공존과 구별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46년, 대만 정부는 폐창을 선언했다. 그에 따라 1947년 제정된 「대북시 특수업종 주가 및 시응생 관리 임시 조례」는 과거 성매매업소였던 ‘창관(娼館)’을 ‘주가(酒家)’로 변경하고 그 종사 여성은 ‘창기’나 ‘기녀’ 대신 ‘시응생(侍應生)’으로 명명하여 성병관리를 의무화했다. 그러나 이 조례는 불과 몇 년 후 「대만성 창기 관리법」(1956)과 「대만성 각 현 창기 관리법」(1960, 이하 창기관리법)으로 대체되었다. 말이 폐창이지 실은 묵인하면서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했다가 10여 년 만에 다시 명실상부한 공창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 결과 군중낙원은 공창의 일부로서 더 안전하게 자리 잡았고, 일반 공창업소들과 긴밀한 연계 속에 수 십 년간 공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낙원은 특수한 공창, 이른바 군창(軍娼, 軍妓나 營妓라고도 함)으로서 원칙적으로 일반 공창과는 확연히 다른 시스템 속에 놓여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공창과 군창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민용이고 후자는 군용, 즉 설치의 주체, 목표, 대상, 규정 등이 모두 철저히 군을 주체로 한다는 데 있다. 우선 군중낙원은 군인의 정신건강과 사기진작 그리고 성병관리라는 분명한 군사적 목표를 표방하는 군인 복지시설이었다. 공창과 달리 국방부와 각급 군부대 정치작전부가 관리했으며, 법적 근거도 「창기관리법」이 아니라 국방부가 제정한 「군중낙원법(특약다실법)」이었다. 자연히 운영은 민간이 위탁하더라도 그 관리감독의 최종 권한과 책임은 국방부와 각급 군에 있었다. 국방부는 군중낙원 민간업소의 세금이나 전기세를 면제해 주고, 군중낙원의 이용료를 일반 공창보다 낮게 책정하도록 규정했으며, 시설 내부의 치안과 질서유지를 위해 헌병을 파견하는 등 그 재정과 경영에도 직접 개입했다. 시응생의 신분도 일반 공창과는 확연히 달랐다. 시응생은 군무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시응생에게 필요한 주식과 부식 및 군 의약품을 제공하고 부대 규모에 따라 군중낙원의 수나 규모, 시응생의 인원수까지 적절히 유지하도록 관리했다. 1961년을 기준으로 외도에 20여개, 본도에 50여개의 군중낙원이 운영되었고, 한 곳의 시응생은 보통 10~40명, 많은 곳은 60여명, 적은 곳은 3~4명 정도였다. 1961년 본도의 전체 시응생 수는 1182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기본적으로는 그와 비슷한 규모로 유지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병력이 집중 배치되었던 금문도의 경우 1960년대 이래 군중낙원 10개에 160여명 수준의 시응생 수가 유지되었다. 「창기관리법」이 완비된 1960년 이후에도 국방부는 시응생이라는 명칭을 고수했는데, 이 역시 시응생의 특별한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시응생은 군중낙원 종사 여성만을 가리키는 명칭처럼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응생을 일반 공창의 창기와 구별하고자 애썼던 군의 노력은 그만큼 멀면서 또 가까웠던 군중낙원과 공창 간의 거리를 시사한다. 3. 군중낙원의 운영과 폐지 군중낙원은 민간이 경영하고 군이 관리 감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실제 운영상황은 시기나 지역, 군의 의지 등에 따라 다양했다. 가장 큰 차이는 크게 본도와 외도(外島)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도는 금문도, 마조도, 팽호 열도 등 본도에서 멀리 떨어진 섬들을 말한다. 본도와 외도 군중낙원의 차이는 무엇보다 정치적·군사적으로 상이한 환경에서 비롯됐다. 대만 본도보다 중국대륙에 더 가까운 외도들은 1948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44년이나 계엄상태가 지속되었고 군대가 지역행정까지 책임지는 군사통제지역이었다. 특히 금문도는 1958년부터 1979년까지 실제로 이틀에 한 번씩 중국대륙으로부터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였다. 자연히 군대 기율의 삼엄함은 물론이고, 민간인의 외도 출입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민간사회활동 역시 군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 관리되었다. 이 같은 환경은 외도의 군중낙원이 본도에 비해 더 규범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수십만 대군까지 잠재 고객으로 두었던 외도 군중낙원은 한때 그 수익금으로 군부대의 각종 복지비용과 위문공연비 등을 충당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 이런 특수한 조건 덕분에 외도의 시응생들은 본도보다 안전한 환경과 훨씬 많은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도 군중낙원은 1960년대 이래 계속된 군 감축으로 장기적으로는 하향세에 있었다. 특히 1979년 중미수교로 대규모 군 감축이 단행되면서 급격히 쇠락했고, 1980년대부터는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게다가 1987년 대만 본도의 계엄해제와 함께 민주화가 시작되고 1990년 한일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면서 군중낙원에 대한 대만사회의 비판이 고조되자, 결국 국방부는 1990년 11월 군중낙원의 정식 폐지를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본도의 환경은 외도와 상당히 달랐다. 본도 역시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장기간 계엄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외도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웠고 무엇보다 다양한 성 산업이 존재했다. 이는 군중낙원 외 다른 공창이 존재하지 않았던 외도와는 확연히 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즉 본도의 군중낙원은 다양한 층차의 공창 및 사창과도 경쟁하면서 점차 그 경계가 모호해졌고, 자연히 군중낙원에 대한 군의 관리감독도 외도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 실제로 군과 업주 간의 불법유착, 횡령, 권력남용 등은 물론이고 시응생을 둘러싼 납치나 협박, 인신매매, 미성년자 고용, 불법감금과 갈취, 상습적 폭력, 치정살인 등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이는 외도에 비해 본도는 민간업주의 재량이 더 큰 반면 국방부의 관리감독은 더 부실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본도 군중낙원은 외도보다 십수 년이 빠른 1970년대 후반 사라졌다고 한다. 1974년 폐지됐다는 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또 한편 아주 특별한 예외로서 본도 육군제2군봉산특약다실을 빼놓을 수 없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해당 다실에서 군복무를 했던 예샹시(葉祥曦)에 따르면, 당시 봉산특약다실은 육군총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고 실무책임자는 위병중대의 중대장이었다. 다실과 시응생 관리 실무도 군무원이 아니라 예샹시와 같은 210여명의 위병들이 담당했다. 여느 군중낙원처럼 민간이 운영하고 군이 관리 감독하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군이 직영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시응생 수도 900~1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보통 10~40명 정도인 여타 군중낙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도적인 규모였다. 3층짜리 回자 구조로 된 다실 건물도 1층에는 위병과 헌병들의 숙소, 식당, 강당, 마당, 축사, 어장 등이 있고 2, 3층에는 각각 500여 개의 시응생 방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대규모 군중낙원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비밀은 그곳 시응생이 모두 기결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형기의 절반을 감면받을 뿐 아니라 시응생으로 복역하는 동안 돈도 벌 수 있었다. 죄수들에게는 특별감옥이었고 군인들에게는 거대한 군중낙원이었으니, 봉산특약다실의 운영방식이 군 직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당 다실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 예샹시의 회고록이 유일하기 때문에 그의 체험을 넘어선 다실의 전체 면모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며, 심지어 그의 진술 내용이 사실인지도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태다. 다만 군중낙원에 여성 죄수들이 있다는 소문이 수십 년 전부터 파다했다는 사실, 그리고 예샹시의 회고가 매우 핍진하고 세부적이라는 점에서 특별감옥 봉산특약다실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커 보인다. 만약 예샹시의 회고 내용이 사실이라면 봉산특약다실은 비밀리에 군이 주도하고 행정부와 사법부까지 가세하여 창안해 낸 전대미문의 성매매업소였으며 육군총부를 내세운 대만정부가 그 포주였던 셈이다. 이는 군 성매매업소의 정당성을 넘어 국가 존재의 정당성까지 질문하게 하는 문제로서, 우선 예샹시 체험수기의 진위가 시급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4. 동아시아 탈식민 분단체제와 군중낙원 그렇다면 대만군과 정부는 이렇게 탈도 많고 비밀도 많은 군중낙원을 굳이 왜 만들었으며 그토록 오랜 기간 유지했을까? 우선 일선 장교들의 요청이 있었다. 1949년 국민당 정부가 중국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패퇴할 때 60여만 명의 군대가 함께 이동했는데, 대규모 젊은 병사집단의 갑작스런 등장은 대만이라는 작은 섬 사회에 위협적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미군의 진주 당시 일본이 ‘성(性)의 방파제’ 논리를 내세웠던 것처럼, 대만에서도 대륙 출신 병사들을 겨냥한 ‘성의 방파제’로서 군 위안소 설립의 필요성이 일선 장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한편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1952년 현역군인의 결혼 금지령을 내리고 그 보완책으로 군중낙원 설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이용해 5년 안에 중국대륙을 수복한다는 정부계획에 전투경험이 많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대륙 출신 병사들을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륙수복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양안의 분단은 그대로 고착되고 말았다. 정부에 의해 실향민으로 전락해 버린 대륙 출신 군인들은 상당수가 혼기를 놓친 채 독신으로 늙어갔다. 이들 대륙 출신 병사들은 군중낙원이 국민당 정부의 ‘덕정(德政)’으로 선전되며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표면적 이유이자 명분이었다. 사실 대륙 출신 병사들의 비극을 초래하고, 군중낙원을 출현하게 만든 근본적인 배경이자 원인은 바로 국공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국공내전 역시 서로 다른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탈식민 기획과 그 주체들이 전후 국민국가 건립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었고, 이것이 미소냉전이라는 국제정치와 맞물리면서 동아시아 고유의 탈식민 분단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전후 공산혁명을 우려한 일본정부는 맥아더와 미군정에 점령군위안소라는 ‘선물’을 하며 그 세력을 등에 업었고, 전승국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백단(白團)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극우 군국주의자들과 기꺼이 손을 잡았으며, 한국의 극우 반공주의 이승만 정부는 그런 국민당 정부와 아시아 반공연맹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처럼 전후 동아시아의 자유진영은 반공이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빠르게 헤쳐 모였고, 그 이념을 위한 열전(熱戰)의 도구로서 ‘특수’라는 기만적 이름을 단 군 위안소들이 잇달아 등장한 것이다. 반공적 탈식민 기획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일본군위안소라는 식민의 유산을 의도적으로 부활시킨 것은 퍽이나 의미심장하다. 분명한 것은 대만의 군중낙원이, 종적으로는 식민제국주의 전쟁 시대의 일본군위안소가 어떻게 전후 탈식민 분단체제로 얽혀 들어가는지, 횡적으로는 동아시아 냉전과 군사문화의 연동 속에서 어떻게 위안소 및 ‘위안부’ 문제가 전유되고 담론화되며 새로운 파동들을 낳는지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고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탈/식민, 반/민주(여성), 탈/냉전이라는 세 가지 담론축이 모두 교직하며 경합하는 지극히 복합적인 역사적 장소이자 지금도 중국대륙/대만, 통일파/독립파, 친중파/반중파 등의 시각이 서로 각축하는 대만 현실정치의 장이다. 나아가 그것은 미중갈등과 함께 양안과 남북간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현 동아시아에서 탈/민족주의적 문화정치의 장으로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군위안소 및 그 ‘위안부’ 연구가 대만의 군중낙원에도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처럼 차고도 넘친다. 각주 1. 이 글은 필자의 논문들을 바탕으로 했으며,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논문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풍문과 역사 사이: 대만군 위안소 특약다실 연구의 현황과 과제>(중어중문학 제76집, 2019), <일본군 위안소에서 대만군 특약다실로>(중국어문학논집 제118호, 2019), <‘위안부’가 된 여죄수들: 대만군 특약다실의 ‘충군’ 논란 일고>(중국학연구 제90집, 2019), <동아시아 냉전과 군 ‘위안소’의 연쇄>(일본문화연구 제81집, 2021), WooKyung, IM, “Resurrection of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stations’ in East Asia: focusing on the Taiwanese military brothels, special assignation teahouses(teyuechashi)”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21, NO. 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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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원폭 피해자들은 왜 ‘유령’이 되었나 – 사진작가 김효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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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이로 인해 총 3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한국인은 7만여 명에 달한다. 원폭 피해는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내려오기에, 현재 피해자들은 4세대에 걸쳐 후유증을 앓고 있다. 1996년 경남 합천에는 이들을 위한 지원시설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마련되었고, 합천 곳곳에는 지금도 피해자들이 퍼져 살고 있다. 합천의 또 다른 이름이 ‘제2의 히로시마’인 이유다. 이처럼 이 문제는 현재 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2017년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핵무기에 대한 보도가 쏟아질 때도 그 무기로 인해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실제로 원폭 피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사진작가 김효연은 원폭 피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의문을 갖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전한 말(“전쟁이 나면 비행기는 타지 말고 무조건 기차를 타고 와라. 서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몸만 와야 해.”) 때문이었고, 어머니가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갖게 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이자 작가의 할머니가 겪은 역사가 있었다. “할머니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자라셨어요. 한의원 집 딸이었던 할머니는 일본으로 징용 간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죠. 18살에 임신해 부산으로 피난 오기 전까지 한국말을 거의 못 하셨어요. 전쟁 막바지에 치달을 때쯤 히로시마 외곽지역이 계속 피격당하니 불안해진 두 분은 밀선을 타고 할아버지의 고향인 부산으로 넘어오셨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아이는 사산됐다고 해요. 그리고 부산에서 갖게 된 두 번째 아이는 유산되었죠. 그러니 한국에 와서 얼마나 많이 아프셨겠어요. 할머니의 부모님 두 분 모두 원폭으로 돌아가시고, 작은오빠만 유일하게 살아남으셨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이동이 자유로워졌을 때 할머니에게 히로시마행을 권유했지만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셨대요. 그곳에 가면 상실을 마주해야 했으니까요. 행복했던 때를 기억에 남겨두겠다고 하셨죠.” 개인의 역사는 곧 가족의 역사이자 한 국가의 역사다. 김효연 작가는 자신의 가족으로 인해 갖게 된 ‘의문’에서 그치지 않고 작업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물론 그 길로 가기까지 쉽지 않았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때때로 엄습하는 두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된 작업은 〈감각이상〉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Q. 〈감각이상〉은 외할머님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작업이지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은 나중에 형성된 맥락이에요. 실제로 작업을 결심하게 된 건 합천에 내려간 후이고, 이 문제에 의문 갖기 시작한 건 2017년 가을입니다. 북한에서 실시한 6차 핵실험 때문에 관련 기사가 끊임없이 나올 때였죠. 뉴스만 보면 3차 전쟁이 발발할 분위기였어요. 저희 부모님은 부산에 계시는데 그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어요. 전쟁이 나면 비행기는 절대 타면 안 되고, 무조건 기차를 타고 모든 걸 버린 채 몸만 와야 한다며 강경하게 말씀하셨죠. 저희 어머니가 평소에 밝은 성격이시라 그 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어요.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느껴졌죠. 북한 핵실험 뉴스와 어머니의 말이 교차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의문을 갖게 됐어요.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이 그렇게 많았다는데 왜 뉴스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을까. 그래서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해 책을 뒤져가며 한두 달 정도 원폭 피해를 조사했어요. 그러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발견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생각의 가지를 넓혀갔습니다. 그리고 2017년 말, 복지회관에 직접 가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때서야 할머니가 강하게 작용했죠.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저기에도 많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경험의 부재 때문에 무섭기도 했습니다. 내가 운동가도 아닌데 그곳에 가서 무얼 할까,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지만 결국엔 갔어요. 2018년에 카메라 하나 메고 내려갔는데 그게 작업의 시작이 됐습니다. 실제로 가보니 서울에서의 자료조사는 평면적인 것에 불과했고, 제가 다룰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복지회관 내에 일반인 출입 금지인 수장고가 있는데 사무장님께서 그곳을 보여주셨어요. 원폭 피해자들의 신상 자료와 그들이 원폭 당시 겪었던 것을 일부 서술한 기록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자료가 5001개에 달했어요. 그것을 마주했을 때 엄청난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지인들과 상의를 했지만, 이런 작업을 하게 되면 소위 말해 ‘인이 박힌다’며 걱정했어요. 앞으로 피해자에 대해서만 다뤄야 하고, 원치 않더라도 앞에 나서야 할 수도 있는데 감당할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는 영웅적인 역할을 바라지도, 할 능력도 안 됐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 달 정도 고민하다 합천에 다시 내려갔고, 그때 작업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Q. 할머님의 개인사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민족으로서 갖는 의미가 다를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기에 그 의미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시는지요. 2018년 여름, 배를 타고 히로시마에 가면서 ‘이 길을 할머니가 봤고, 70년이 지난 뒤 내가 보고 있구나. 언젠가 내 자식도 보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대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몸소 배웠죠. 개인적으로 봤을 때 할머니의 역사는 참 슬퍼요. 시대의 거대한 흐름 때문에 원치 않는 긴 여정을 거쳐야 했고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오셨죠. 그것이 개인으로서 갖는 의미라면, 한 민족으로 봤을 땐 역사적으로 희생당한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죽음과 가난, 고생을 견뎌야 했고 본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채 돌아가셔야 했으니까요. Q. 작업하는 과정에서 할머님이 많이 떠오르셨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나요. 할머니는 작고 인자하셨어요. 저를 따로 불러 사탕을 쥐여 주거나 일본 노래를 부르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집안을 다니셨죠. 저희 엄마가 고등학생 때 할머니가 계단에서 떨어지셨다고 해요. 그때의 충격으로 실명되셨는데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으셨어요. 제 도록에 실려 있는 짧은 소설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찍이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은 눈이 멀고 만다. 할머니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종종 눈을 떴다.” 장혜령 작가님에게 제 이야기와 그동안 수집한 원폭 피해 자료를 종합해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드렸거든요. Q. 할머님과 함께한 추억이 많으신가요? 초등학교~중학교 때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이들 사진에서, 특히 비행기를 들고 있는 여자아이의 사진에서 애틋함이 묻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그 나이 때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기 때문이에요. 할머니 집에 가면 늘 손을 잡고 놀았어요. 밥을 먹을 때도 할머니가 항상 제 손을 잡고 계셨고요. 10살쯤의 기억이 많아서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어릴 때의 저를 만난 것 같아요.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때 당시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작업할 때 자신을 투영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저에게는 그런 존재였던 것 같아요. Q. 작가님이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하고 도록에도 실어주신 말(“그럼 우리는 유령이야? 우리가 있는데 아무도 모르잖아.”)을 한 아이가 그 여자아이인가요? 맞아요. 그때 그 순간은 저에게도 영화 스틸컷처럼 남아있는 순간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순간적으로 모든 게 멈춘 느낌이었죠. 아이는 그 말을 하고 뛰어갔는데 저는 멍하니 생각했어요. ‘맞아, 내가 이 작업을 해오면서 하지 못했던 말이 그거였어. 이 사람들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유령이구나.’ Q.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나요? 아니요. 저는 아이들과 촬영할 때마다 이유를 설명해줘요. 그때도 촬영하면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합천에서 나고 자랐고, 어머니도 원폭 피해자 2세대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원폭 피해자인 줄 알고 있었어요. 본인들이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서울의 언니 오빠들은 이 문제를 잘 몰라. 그래서 이모가 알리려고 사진 찍는 거야”라고 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럼 우린 유령이야? 왜 우리가 있는데 다 몰라?” 그 말을 듣고 얻어맞은 느낌이었죠. ‘그렇네. 유령 같은 사람들이었네. 여전히 문제가 많은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구나.’ 그래서 그때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악몽도 꿨고요. 할머니들과 사진 찍을 때도 전쟁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러다 보니 전쟁 한복판에 있는 꿈을 꿨어요.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죠. 그래서 내가 과연 이 작업을 끝낼 수 있을까,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버팀목이 됐습니다. Q. 작업 제목이 ‘감각이상’입니다. 말 그대로 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뜻할 텐데, 제목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목을 정하는 게 어려워서 이런저런 단어를 찾아보다가 어느 날 ‘감각이상’을 검색해보게 됐어요. 의료대백과사전에 나오는 단어인데 그 뜻을 들여다보면 경험이 베이스가 돼요. 어떤 사람의 경험에 과도하게 자극이나 결핍이 생기면 정상적이지 않은 걸 정상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있는 걸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죠. 말 그대로 감각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그게 지금의 상황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경험이 베이스가 된다는 것도 좋았고요. 제가 합천에서 본 모든 이들이 겪었던 그 일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흘러온 것과 70여 년이 흐른 뒤 가족의 기억만을 품고 그곳에 던져진 제가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했던 변화가 감각이상이라는 단어와 딱 맞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들과 제가 서로를 만나 변했고, 제 작품을 만난 누군가도 변화를 경험하겠죠. 그래서 ‘경험’과 ‘변화’라는 두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고 감각이상을 제목으로 선택하게 됐습니다. Q. 작업하며 거리감을 조정하는 게 어렵다고도 하셨습니다. 작업 초기에는 사진에 분노가 담겼지만 뒤로 갈수록 피해자분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변화했다고요. 제가 원폭 피해자의 후손은 아니지만 완전히 외부자가 아니었던 건 원폭으로 가족을 잃은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에요. 처음엔 너무 가까이 들어가다 보니 사진에 아픔이 짙게 묻어났고, 거기서 달아나기 위해 멀리서 찍으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죠. 멀리 떨어진 채 관찰만 해서는 이 문제의 복잡함과 피해자들의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담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거리감을 조정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100% 체감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관람자들이 이 문제에 다가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숨 쉴 수 있는 틈이 필요했던 거죠. 너무 아프게만 다루면 들여다보지도 않고 도망가버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강력한 자극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궁금증을 갖고, 생각하게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제 작업이 관람자와 피해자 사이의 부드러운 통로가 되는 거죠. 그 통로로 걸어 들어와 스스로 공부하다 보면 1초라도 더 기억하고, 한마디라도 더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이 문제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분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보냈던 시간이 작가님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나요. 그분들과 가까워지는 데 6개월 정도 걸렸어요. 제가 히로시마에 갔다 온 후에야 마음을 열어주셨죠. 그러고 나서 다운증후군인 피해자 2세대분을 찍게 됐습니다. 처음으로 1세대 분들의 가족을 소개받고, 복지회관 2층(피해자 생활 공간)에도 올라가고, 시설에 입소하지 못해 합천에 퍼져 사는 분들의 주소를 받아 복지회관 외부로도 나가게 됐어요. 촬영을 하지 않더라도 같이 밥 먹는 사이가 되고, 2019년 이후에는 3~4세대 아이들까지 찍게 됐죠. 이 작업을 하면서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집 앞 개울가에 누군가가 종이배를 띄워서 가봤더니 종이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시커멓고 커다란 바다 앞에 혼자 서있는 기분이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 바다를 편하게 걸어 다니는 느낌이에요. 작업을 시작할 때의 감정과 작업에 완전히 흡수됐을 때의 감정, 그리고 어느 정도 마무리한 후 드는 감정이 다 달라요. 미래에 어떻게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장하다고 생각할 것 같기는 해요. 고무적인 것이 있다면, 장혜령 작가님이 원폭 피해를 주제로 다음 장편소설을 쓴다고 하셨어요. 이 문제가 이렇게 다른 분들에 의해 전해지다 보면 제가 닿지 못했던 곳으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피해자분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Q. 피해자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나누셨을 텐데, 그중에서 작가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성분들의 말이 참 아프고 마음에 남아요. 피폭 증상 중 여성분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게 유산이에요. 할머니 중 한 분이 연달아 세 번 유산과 사산을 경험하셨는데, 사산한 채로 나온 마지막 아이가 파란색이었다는 거예요. 푸른색이었던 건 배 안에서 호흡이 부족해서 그랬겠죠. 그런데 원자폭탄이 플루토늄이라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은 폭발하기 직전에 푸른빛을 내요. 할머니는 모르고 하신 말씀이었지만 플루토늄의 ‘푸른색’과 할머니의 “애를 낳았는데 애가 퍼렇더라”라는 말이 참 아프게 와닿았어요. 이외에도 차마 풀어낼 수 없는 잔인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 많아요. Q. 사진을 다루기 전에는 영화 현장에서 일하셨다고요. 영상 작업을 하다가 사진으로 활용 매체를 바꾸게 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영화를 그만두고 개인 작업을 시작했어요. 상업영화판에 있을 때 미술팀장으로 있었는데, 그때 제 취미가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200컷으로 쪼개는 것이었죠. 화면을 캡처해 각 프레임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주인공의 표정, 조명과 소품 등을 분석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것을 떠올리다 보니 정지된 프레임 안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사진으로 넘어왔죠. 그런데 공부하면 할수록 사진과 영화는 다른 매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시간성이 완전히 다르거든요. 영화는 앞뒤로 서로 연결되는 반면, 사진은 시간이 멈춰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앞뒤 상황을 상상하게 만들어야 했어요. Q. 영화와 비교해 사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 재미는 무엇이었나요? 한 장면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제 작업이 사진과 잘 맞는 것 같아요. 관람자가 제 사진을 보고 모든 걸 알지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원폭 피해라는 문제가 워낙 거대하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얽혀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정리되기 힘들어요. 그래서 사진을 보고 각자의 안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문제를 정립해보길 바랐습니다. Q. 원폭 피해는 현재 진행 중이지만, 대부분 이 문제를 모른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정부가, 또 개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개인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노력하겠어요. 우선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교육과 조사, 연구가 동시에 진행돼야 해요. 기본적인 것이 이뤄져야 시민들이 정보를 접하고, 그러면서 궁금증과 관심을 가질 수 있겠죠. Q. 원폭 피해자분들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와 지원이 있어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또한 한국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합천과 히로시마를 오가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을까요. 피해자들이 일본 내에서 치료를 받거나 무료 변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제가 히로시마에서 피해자분들을 만날 때도 평화단체를 통해 도움을 받았고요. 흥미로웠던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평화단체라고 하면 통일 단체를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원폭과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히로시마 내 원폭 피해자 집단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조선인협회와 남한협회로 갈라져 전혀 소통하지 않고 있었어요. 이건 원폭 피해와는 다른 문제지만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이었습니다. 참 많은 것이 얽혀있는 문제라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Q.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삶’, ‘피해자의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작가님께서도 작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셨겠죠. 이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품을 통해 다 했습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 작품이 저 없이도 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에 의해, 혹은 다른 형태를 빌리더라도 이 이야기가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는 절대로 반복되어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해요. Q. 4세대 아이들을 앞으로도 추적 촬영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이외에 품고 계신 다른 계획도 궁금합니다. 아이들의 어머니들과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추적 촬영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꾸준히 안부를 묻고 내려가서 사진을 찍는 거죠. 시간이 쌓이면 결과로 나타날 겁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전쟁과 기후위기로 인한 멸종에 맞서는 인간의 행위와 의지에 대해 작업하고 있어요. 노르웨이, 미국, 한국 등 3개국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며 영상, 사진 작업을 하고 있고, 올해 9월에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신작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Credit 인터뷰어/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인터뷰이: 김효연 사진: 오늘의 나 일시: 2023년 4월 6일 목요일 장소: 카페 무대륙(서울 마포구 토정로5길 12)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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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기억의 바다를 넘어서 - 관부재판이 1990년대 일본 사회에 물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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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이 시사하는 것 작년(2022년)에 진행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민간기록물 조사·전시: 경상도 지역〉 프로젝트에서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의 고 김문숙(1927~2021) 전 관장의 이력을 정리하고, 그가 1990년대에 주도했던 관부재판1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했다. 그 성과로, 이번에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및 개막 기념 학술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역, 국가, 제국〉(2023년 2월 16~17일, 창원대학교)이 성공적으로 개최됐으며, 이로 인해 관부재판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도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이 제시됐다. 첫째로, 관부재판은 일본 사법기관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단 한 번의 순간이었다는 점이다. 1998년 2월 27일에 내려진 관부재판 1심 판결은 원고 증언의 사실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여 반인도적 ‘위안부’ 제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2 둘째는 서울이나 도쿄를 중심으로 한 정부 간의 정치 구도와는 별도의 경로를 통해서, 한국과 일본의 주변부에서 시민들이 힘을 모아 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 재판의 시발점은 부산과 광주의 시민단체 활동에 있었고, 또한 최종판결까지 10년 동안 일본 현지에서 원고들을 지탱해준 힘은 후쿠오카에서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구성한 일본의 지방 시민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즉 관부재판의 ‘관부(시모노세키-부산)’는 피해자들 삶의 중요한 기억의 터이며 동시에 국가권력에 맞서는 시민들의 근거지의 이름이었다.3 관부재판이 제시하는 이 시사점은 민족 간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휩쓸리기 쉬운 오늘날 상황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생각해볼 점을 담고 있다. 일본 사회와 일본군‘위안부’의 ‘만남’ 여기에 또 한 가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본인 연구자로서 내가 중요하게 느낀 점은 재판을 통해 이루어진 일본 사회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만남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집단기억과 타자의 기억은 어떤 자리에서 만나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가? 또는 자신의 역사성을 타자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재정의하는가? 법정에 나타난 살아있는 피해자의 존재가 1990년대 일본 사회에 들이댄 칼날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이었다. 군 ‘위안부’의 존재는 1970년대 이전에도 복원병(復員兵) 사이에서는 상식이었으며 ‘전기물(戰記物)’이라고 불린 오락소설류에서도 다수 언급되었다. 그중 상당수가 한반도 출신 여성이며 비극적인 존재로 등장했으나 그 ‘위안부’는 현재 우리가 아는 ‘위안부’와 거리가 있었다. 즉 전쟁의 억압은 장교(=국가) 쪽의 책임이었고 병사는 피억압자로서 ‘위안부’ 편에 속하는 존재였다. 거기서는 군인 대 ‘위안부’, 일본인 대 조선인이라는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 대 병사의 구도 속에서 ‘위안부’는 병사와 같은 피해자로 자리매김되었다.4 “병사들 자신도 일본인으로서 그들을 ‘위안부’로 몰아넣은 ‘가해자’ 입장일지도 모른다는 시점은 결정적으로 결여”되었다.5 이와 같은 병사와 ‘위안부’ 사이에 대한 인식은 1970년대 센다 가코(千田夏光) 등의 저술을 통해6 가해자로서의 병사 이미지로 전환되어 갔다. 한편, 1970년대에 번성했던 ‘우먼 리브(women's lib)’라고 불리는 여성 해방 운동에서도, 꽤 많은 ‘위안부’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이들은 “과거에 국가가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에게 가한 성 억압의 상징”이 된 것이다.7 그러나 키노시타 나오코가 지적했듯이, 이들 담론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존재였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의 생존자를 전제한 것은 아니었다.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되었던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8 원고단에 김학순 씨 등 군 ‘위안부’ 피해 여성 8명이 포함되었다. 이때 비로소 일본 사회는 군인들 기억 속에만 있던 ‘위안부’와 직접 만나게 되었다.9 원고 중 한 명인 문옥주 씨와 심미자 씨는 1992년 봄에 후쿠오카에서 열린 증언 모임에 참석하였고, 이때 청중 중에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게 되는 시민들이 있었다. ‘할머니’들은 상징도 비유도 아닌, 지금도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관부재판의 구두변론은 고노 담화(1993), 아시아여성기금(1995), 쿠마라스와미 보고서(Coomaraswamy Report, 1996),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등장(1997), 도쿄 여성국제전범법정(2000)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정부, 언론, 학계, 시민사회, 국제사회가 주체로 참여한 사건의 동향 가운데에서 진행되었다. 원고들이 서게 된 시골 재판소 증언대는 그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 사회는 ‘할머니’를 보고 어떤 이는 당혹하고 두려워했으며, 어떤 이는 함께 분노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다양한 반응은 이 만남 이후 일본인이 믿고 살던 ‘안정’적인 전후 세계가 흔들리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1972년생인 나 또한 20대 일본인으로서 이 과정을 현장에서 그리고 매체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긴장과 친근함 사이에서 관부재판의 원고 피해자들이 일본 시민을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12월 25일 관부재판 제소를 위해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제소 다음 날 후쿠오카에 있는 교회(규슈 기독교회관)에서 환영회가 열려 요리사인 하나후사 도시오(‘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가 직접 요리해 피해자들에게 대접했다(이후 재판 기간 동안 비용 절약을 위해 교류회 등의 식사는 대부분 하나후사 도시오가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위안부’ 원고인 박두리 씨는 “일본인은 모두 귀신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다니”라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10 사실 이때 피해자들의 일본 첫 방문은 김문숙 씨의 간절한 설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피해자들은 일본 땅을 밟고 일본인을 만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1992~1993년 사이 피해자들의 변화를 하나후사 에미코(현재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후쿠오카 네트워크’ 총무)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년 연말에 억지로 일본에 온 원고 할머니들이 이번에는 밝은 표정으로 일본에 오셨고, 특히 계속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박두리 씨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이렇게 키가 큰 사람이었구나 하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당당한 풍격으로 등장한 것에 놀랐습니다. 이 재판은 그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는 투쟁이라고 몸소 가르쳐 주었습니다.11 긴장하고 있던 것은 피해자만이 아니었다. ‘가해 당사자인 일본 국민’이라는 사실은 일본인 지원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지원자들 또한 “가해라는 멍이 든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원고”에게 감동하고 격려를 받았던 것이다.12 1993년 9월 6일에 열린 제1회 구두변론에서 방청석에 있던 지원자들은 박두리 씨의 격한 분노를 목격하게 되었다. 원고 의견 진술이 끝나고 원고대리인 이박성 변호사의 의견 진술이 막 시작될 때, 원고석에서 박두리 씨가 갑자기 큰 소리로 발언한 것이다. 지원자들은 그의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이 의견 진술했던 변호사 옆자리에 앉았다. 보좌인 겸 통역인 김문숙 씨는 황급히 따라가서 그 곁에 앉았다. 박두리 씨는 피고석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이야기했고 그 말을 김문숙 씨가 열심히 통역했다. 재판장이 “본인 신문에서 시간을 확보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고 김문숙 씨도 그 말을 전했으나, 박두리 씨는 그 말을 무시하고 엄청난 기세로 말했다. “일본 정부가 1억의 몇 십 배를 낸다고 해도 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일본인들이 나를 이런 꼴을 당하게 한 것 같다. 여기 있는 일본인들을 보면 또 모진 꼴을 당할 것 같다”. 피고 대리인들은 모두 그 말을 무시하듯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13 이때 방청석에 있던 한 지원자는 박두리 할머니가 말하는 “여기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느꼈다. 방청석에 긴장이 돌았다. 박두리 할머니는 계속 피고석을 노려보았지만 한 번은 방청석을 힐끗 보았다. 박두리 씨가 격하게 문책했던 일본인이 피고석뿐만 아니라 어쩌면 나를 향한 것임을 방청자들은 순간적으로 이해했다.14 이런 점에서도 관부재판의 피해자와 일본인 지원자의 관계에서 친밀감과 감사, 적의와 공포, 자책과 사죄 등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면서 서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원자들은 부모·조부모 세대의 전쟁에서 일본인이 저지른 일이 다른 나라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하게 했는지, 그리고 직시하기 어려운 현실의 피해자와 전후에 태어난 일본인인 자신 사이에 어떤 관계성을 만들 수 있는지 꾸준히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피해자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받는 의외의 경애에 당황하고 과거에 겪은 일본인들의 잔혹함과 현재 일본인들의 친절함,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와 일본인 개개인에 대한 친밀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었음을 이 재판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른 역사성과 공감의 길 나의 부친 마치다 시게히사(丁田重久, 1920~2005)는 1920년생 일본인이다. 1941년 비상소집으로 육군 보병이 되었고, 1942년 대만을 거쳐 필리핀에 주둔했으며 뉴기니 라바울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부친과 같은 젊은 남자들의 대거 귀환은 패전 직후 일본 사회에 ‘베이비 붐’을 초래하였고, 그때 태어난 ‘베이비 부머’들이 현재까지 일본에서 최대 인구를 차지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이다. 즉, 하나후사 에미코(1948년생)를 비롯한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 모인 시민들의 주축이 된 세대이다. 시게히사의 4년 병역에 일본 정부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군인 은급(軍人恩給)’을 지급하였으며 나 또한 그 은혜를 받고 자랐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의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 아닐 수가 없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역사성은 없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으로서 김문숙 씨와 함께 관부재판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금주 씨, 그리고 관부재판의 원고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하순녀(1920~2000) 씨는 시게히사와 동갑이며, 같은 ‘위안부’ 피해자인 이순덕(1918~2017) 씨는 두 살 위이며, 박두리(1924~2006) 씨는 네 살 아래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의 윤정옥(1925~) 전 대표는 다섯 살, 김문숙 씨는 일곱 살 아래다. 이들은 모두 1940년대 초반을 일본 말단 군인, 군 ‘위안부’, 식민지 조선의 명문학교 여학생 등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입장에서 경험했다. 그 경험된 시간 사이에는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경제적 계층 등 다양한 벽이 존재했고 그들의 기억은 전후의 긴 시간과 국민국가가 요구하는 공식화된 기억 속에서 가시화되지 않은 채 서로 단절되어 왔다. 1990년대에 거론된 많은 ‘전후 책임론’과 전후 보상 재판은 냉전 기간의 은폐와 침묵의 벽을 깨고 단절된 기억과 기억이 다시 법정에서 만나는 것을 의미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군인과 ‘위안부’, 일본인 교사와 식민지 학생이 40여 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만났다. 서로 다른 역사성 사이에서 공감의 길을 찾던 과정, 관부재판의 법정은 바로 그 현장이었다. 각주 1. 관부재판은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 사건’의 통칭이며 김문숙 씨가 마련한 ‘정신대 신고 전화’를 시작점으로, 1992년 12월 25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2명,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2명 등 총 4명이 일본 정부에 공식 사죄와 법적 보상을 요구하며 야마구치(山口)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下關)지부에 제소한 재판이다. 이후 2, 3차 제소를 통해 6명의 피해자가 원고단에 합류했고 결국 총 10명의 원고(일본군‘위안부’ 피해자 3명,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가 참여했다. 2. 재판 과정은 시모노세키에서 진행되었던 1심에서 20번의 구두변론, 히로시마에서 진행되었던 항소심에서 9번의 구두변론을 거쳤으며, 결국 관부재판은 제소로부터 10년 4개월이 지난 2003년 3월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으로 막을 내렸다. 3. 구두변론이 열리기 전에 피고인 일본 정부는 이송 신청서를 제출하여 재판을 시모노세키에서 수도에 있는 도쿄지방재판소로 옮기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지원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처럼 ‘지방에서 싸우는 것’은 관부재판 소송 초기부터 원고 측에게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4. 木村幹, 「日本における慰安婦認識: 1970年代以前の状況を中心に」, 『國際協力論集』 25-1, 2017, 37쪽. 5. 앞의 논문, 38쪽. 6. 千田夏光, 『従軍慰安婦: “声なき女”八万人の告発』, 双葉社, 1973 등. 7. 木下直子, 「「慰安婦」言説再考: 日本人「慰安婦」の被害者性をめぐって」, 九州大學 박사학위논문, 2013, 91쪽. 8. 2004년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9. 이미 1970년대 후반에 오키나와에 거주했던 피해자 배봉기 씨의 사연이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다. 10. 하나후사 도시오, 〈‘위안부’ 피해문제, 한일 양국의 연구자와 시민이 공동연구를!〉,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자료집』, 한국여성인권진흥원, 2022.10.26~27, 95쪽. 11. 花房恵美子, 〈国の東京地裁への移送申し立てに強い憤り〉, 《關釜裁判ニュース》1, 1993.4.30. 12. 花房恵美子, 〈福岡交流会アレコレ〉, 《關釜裁判ニュース》4, 1994.1.20. 13. 《關釜裁判ニュース》3, 1993.9.30. 14. 앞의 기사. 〈자료1〉 관부재판의 원고 〈자료2〉 관부재판 1심 구두변론(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 〈자료3〉 관부재판 항소심 구두변론(히로시마 고등재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