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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삶에 대한 축복의 이야기 - 일인극 〈캐러멜〉 제작기
    2022년 에세이 그 삶에 대한 축복의 이야기 - 일인극 〈캐러멜〉 제작기

      일인극 〈캐러멜〉은 2018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간 작품이다. 처음에는 2인극으로 시작해 그해 4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시민집회 ‘지금 일본군성노예문제를 마주한다 - 피해자의 목소리X아트(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성차별철폐부회 주최)’에서 첫 공연을 올렸다. 그 후 우리 극단은 이 작품을 일인극으로 재편하여 2019년부터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본격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했고, 일본 각 지방을 비롯해 한국에서는 서울·부산·광주·청주·제주도에서 공연해왔다. 현재 진행중인 일인극 〈캐러멜〉은 벌써 25번째를 맞는다. 이 작품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에서 살아남아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 동포 1세의 존엄을 그린 일인극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조한 픽션이지만, 할머니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관객들과 함께하는 ‘귀향’ 이야기로 삼고자 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는 가운데, 이 억울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짓밟힌 존엄에 어떻게 빛을 비출 수 있을지, 무엇에 희망을 갖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시 강제로 ‘위안부’가 된 조선 소녀들은 10만~2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그 가운데 정부에 등록하신 분은 고작 240명이라 한다. 피해자는 그 수를 여전히 헤아릴 수 없으며, 그중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숨죽여 살아온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남몰래 울고 계시던 분이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아프고 외롭고 억울하셨을까. 얼마나 고향으로 가고 싶으셨을까. 그분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을까. 그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질문들을 기반으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를 숨긴 채 세상 한 귀퉁이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갈등을 비롯해 할머니와 더불어 살아온 재일 동포들의 유머와 인정을 그려내고자 했다. 동네 사람들은 삶의 힘이 넘쳐났고, 할머니와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특히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조선학교 고등학생과 할머니의 만남에는 편견과 차별에 굴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다짐과 희망을 담았다. 그리고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의 구석 그늘에서 살아가시던 할머니를 세상 가운데에 두고 빛을 비춰드리고자 했다. 연극이라는 행위로 웃음과 눈물이 넘치는 무대에서 할머니들의 통한을 관객들과 함께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러한 고민 끝에 작품을 감히 희극으로 만들게 되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3학년인 강령미의 등굣길에는 김숙기 할머니와 홍옥순 할머니의 집이 있다. 두 할머니는 전쟁 때 캐러멜 하나에 속아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그 과거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옥순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령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자 옥순은 숨을 거둬버린다. 남은 숙기는 옥순이 타던 자전거를 상여 삼아 장례식을 치른다. 그 곁에서 령미가 할머니들을 도와준다. 숙기는 옥순의 마지막 길인 만큼 원하는 대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죽은 옥순이 어린 시절에 입었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선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 우리 그때처럼 웃으면서 선물을 갖고 돌아가자.” 살아서 가지 못했던 고향을 죽어서야 가게 되는 것이다. 배울 기회 한번 없이 애오라지 과거를 숨기며 악착같이 살아온 옥순은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 애써 외면해왔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잔혹한 고통에 시달리며 고독함을 견뎌온 할머니에게 삶의 존엄이란 무엇이었는지 곱씹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큰 테마다. 령미는 학교 선배에게 얻은 교복을 할머니들에게 드린다. 령미가 다니는 조선학교 교복이 마침 옥순과 숙기가 어린 시절에 입었던 치마저고리 옷차림과 비슷하게 보여서 그걸 입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령미가 옥순에게는 아주 눈부시게 비쳤던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옛날 조선에서는 여자가 자전거를 타면 상스럽다고 해서 남자들만 자전거를 탈 수 있었고, 할머니들도 그런 줄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가 묻은 오랜 관념을 깨고 싶었다. 매일같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는 맑은 령미의 모습을 보면서 힘겨운 삶을 버텨낸 두 할머니의 마음이 소녀처럼 신나게 뛰었다. 옥순이 비로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날 얼마나 시원했을까. 숙기가 상여로 삼은 옥순의 자전거에는 수많은 흰 꽃과 함께 ‘실버 드림’이라고 쓰인 깃발이 휘날렸다. 둘은 함께 큰 소리로 “우리는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친다. 령미는 그것이 할머니의 레볼루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도 따라가겠다고 외친다. 그 외침이 바로 무대에서 전하고자 하는 할머니의 삶에 대한 축복이다.   한국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관한 연극이 여러 작품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내 작품은 장례식을 치르며 인간의 존엄과 삶에 대한 축복을 곱씹게 한다. 피해자의 아픈 혼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들과 함께 위로하고 한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담았다. 매번 공연장에 모여주시는 많은 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나비를 날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면서 다음 세대에 바통을 이어 가고자 했다. 앞으로 언젠가, 어딘가에서 봐주실 분들이 함께 웃고 울면서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롭게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같이 풀어주셨으면 한다. 나는 그저 영혼들의 아픔과 기쁨을 안고 춤을 춘다. 극단 돌은 2004년에 창립해 일본 시가현을 거점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전국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은 거의 일인극이고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재일 동포의 100년 역사를 그린 〈자이니치 바이탈 체크〉가 있다. 이번에 〈캐러멜〉을 만들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연극 활동을 한 지 이제 거의 30년 가까이 되지만, 연극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는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제작 제안을 받았을 때 적당한 시기에 나에게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은 너무 어려도, 너무 늙어도 못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작품은 아주 어려운 작품이다. 그러나 그만큼 깨닫는 것도 많고 공부가 되는 것도 많았다. 순회공연을 진행하면서 문제가 생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작품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하기 전부터 언젠가 사람들은 나를 희극 배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희극 배우인 것이 참 좋았다. 아픔이나 슬픔을 무대에 올릴 때 그만큼 웃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극단 활동이 앞으로 계속 새로운 만남을 만들고, 서로를 편하게 만드는 맛있는 밥이 되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맛있게 밥 먹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위로가 된다며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웃으시는 듯하다. 나에게 들리는 말 “밥 먹었나.”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들이 자주 하시던 인사말이었다. 조국에서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김기강

  • 누가 이미지를 두려워하는가
    2022년 에세이 누가 이미지를 두려워하는가

    2000년 8월, 도쿄에서 12월 8일에 열릴 ‘여성국제법정’을 앞두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병원 진료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한 적이 있었다. 수십여 명의 할머니들이 인천의 한 병원에서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산부인과, 내과, 외과, 정신과를 돌며 종합 진찰을 받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었는데, 영상이 모의법정에서 ‘증거물’로 채택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는데,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직접 듣게 될 증언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지 고민하며 영화패 후배들과 병원에 도착했다. 그전까지 피해자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증언이라는 것이 인스턴트 음식처럼 질문과 동시에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쯤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카오스가 펼쳐졌고 나는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병원에서 할머니들은 차례로 산부인과 진료 의자에 누워 의사들에게 몸을 맡긴 채 하복부나 생식기와 관련한 상처들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상처가 생긴 시기와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할머니들은 엉뚱한 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테면 “할머니 이건 ‘위안부’ 시절에 생긴 상처예요?”라고 의사가 물으면 갑자기 ‘나이 많은 영감에게 시집간 스토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식이었다. 남편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얼마나 자상했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도, 결국 할머니의 남편은 몸에 남겨진 상처와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 나중에 정신과로 옮겨 생애구술사를 받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몸속 상처들은 ‘위안부’ 시절 얻게 된 것이었지만, 해방 후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감(남편)이 자신을 받아주고 죽을 때까지 잘해줬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산부인과 의사가 몸속 상처에 대해 질문했을 때, 할머니는 그 상처가 생겼던 ‘위안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 상처와 관련해 가장 고마웠던 죽은 남편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날 현장은 이와 같은 구술자와 면담자 사이의 말과 말들이 날아다니는 경연장과 같았고, 나는 카메라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며 피해자의 몸을 열심히 촬영했지만 번번이 어떤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그날 유독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서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 계기나 하루에 몇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는지와 같은 중요한 질문에 긴 침묵을 유지하거나 단어 몇 개로 된 짧은 문장을 내뱉을 뿐이었다. 힘겹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중, 면담자가 해방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했을 때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만주의 한 유곽에 있었는데 어떤 일본 장교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자 그녀도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돈 대신 가지고 있던 비단 치마저고리 아홉 벌을 껴입고 출발했다. 부지런히 귀향 행렬을 따라 걸어갔고, 압록강을 만나자 ‘헤엄쳐’ 건넜으며, 다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걸어 내려오며 아홉 벌의 비단 저고리를 하나씩 팔아 노잣돈으로 썼다고 했다. 그때 나는 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별이 안 되는 이상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고,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이 반짝이며 열정적이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하지만 곧 해방 후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초반에 보여줬던 극히 침울하고 말수가 적은 상태로 돌아갔다. 모든 진료가 끝나고 할머니는 진료대기실로 돌아갔는데, 내 눈에는 유독 그 할머니만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다른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곳과는 떨어진 구석의 의자에 혼자 누워있었다. 혹시 불편한 곳이 없는지 이것저것 살펴드리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다른 할머니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귓속말로 “저 여자는 가짜예요. 우리랑 완전 다른 여자예요. 걸레라고 걸레”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면서 ‘저 할머니는 정부의 지원금을 타 먹으려는 가짜’라는 말을 반복했다. 순간 그분이 사용한 ‘걸레’라는 표현과 ‘가짜’라는 말에 깜짝 놀라 나의 몸도 경직되었다. 그제서야 ‘위안부’라는 경험은, 단지 어느 시공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재에 반복되고 있으며, 피해자 그룹 안에서조차 누가 ‘진짜’ 피해자인지를 두고 ‘구별 짓기’ 한다는 것 자체가 ‘위안부’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아홉 겹의 비단 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들을 기지촌 현장에서도 계속 만나게 되었고, 우리가 ‘증언’으로 부르는 말들이 어떠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이 선택되는지, 도대체 증언과 이미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대체로 그것이 생성된 장소를 떠나 외부로 퍼져나갈 때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수록 이야기는 계속해서 점점 더 좁은 문을 통과하며, 애초의 복잡성을 포함하던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특정한 부분만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버려지며, 또 남아있는 요소들이 재구성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체로 그 이야기를 최초로 ’만들거나’ ‘전달한’ 사람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어떤 원형을 남기고 끊임없이 변형, 대체되면서 ‘현재’적 시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 간다. 만약 어떤 이야기가 ‘현재’로 계속 소환되어 유통되지 못하면 그 이야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즉 ‘이야기할 거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거나, 기록이라는 형태로 아카이브 센터라는 ‘무덤’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진적 이미지와 영상들은 애초에 그것들이 생성된 장소(scene)와 관계를 갖지만, 결정적으로 ‘찍혀지는 순간에’ 의미가 생성된다. 그리고 애초에 그것을 촬영한 사람(대체로 찍혀진 이미지 속에는 보이지 않는다)의 어떤 ‘의도’가 부여되기는 하지만, 이미지의 도상적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는 원래의 의도와 별개로 계속해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수용, 선택, 변형의 과정을 거친다.    92년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살해당한 ‘윤금이’의 사진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에 의하면, ‘윤금이’가 살해당한 현장 사진의 공개는 공대위[1]에서 결정되었다. 공개 여부를 두고 찬반이 갈렸지만 “이 사건은 말로 설명해서는 공감할 수 없으며” 결국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데 사진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공개하자는 입장 안에서도 고인이 여자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어떤 성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킬까 봐” 우려했는데, 남성 운동가들에게 “여성의 벗은 몸, 살해당한 몸은 민족의 상처, 수치였기 때문”이라고 정희진은 적고 있다. ‘윤금이’ 사건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기지촌에서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윤금이’ 사건만큼 사회적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시에 윤금이 시신은 ‘사진’으로 우리가 본 것이지, 그 사진이 만들어진 장소(scene)에서 본 것은 아니라는 점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사진이 도상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벌거벗은 채 바닥에 누워 죽어있는 여성이며, 신체에 가해진 여러 흔적들은 그가 잔인한 폭력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높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미지가 가리키는 현실의 지표-이 여성은 누구인지, 왜 살해당했는지-에 대해 사진이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으므로 우리는 프레임 밖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진 속 여성은 ‘윤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시신 사진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의미’를 획득해 나갔다. 그녀는 불합리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때문에 미국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 태어난 불행한 여성이 되었고, 따라서 이 살인사건은 ‘우리 민족’의 문제가 되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히빠리’(편집자 주: 일본어로 ‘잡아당기다’라는 말. 호객행위를 뜻하기도 하며, 업소에 소속되지 않은 기지촌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꽃과 성판매를 하던 행위를 뜻하기도 함)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비천한 성매매 여성은 별안간 ‘순결한 우리 민족의 누이’가 되었다. 하지만 사진의 공개와 함께 만들어진 대중 캐치프레이즈들은 당시 ‘윤금이’를 민족의 일원으로 확장할지언정 ‘기지촌’이라는 장소를 제거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시민운동가와 여성 운동가들이 사건이 발생한 장소인 동두천에서 시위를 이어갔으며, 언론에서는 끊임없이 사진이 생산된 ‘장소’인 기지촌에 대한 심층 취재와 담론이 생산되었다. 비록 더 많은 시민들의 호응[2]을 받게 하기 위해 ‘순결한’ ‘누이’라는 상징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윤금이의 사진은 기지촌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금이’를 살해한 케네스 마클의 구속과 재판이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그녀의 시신 사진은 점차 그 사회적 역할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10여 년 만에 미선이·효순이 사건(2002)으로 다시 불특정 대중 앞으로 불려 나오게 된다. 이번에는 ‘미군 범죄’라는 키워드로 또다시 대중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992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사진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 즉 지시하는 대상과 그 의미의 관계가 좀 더 단순해지고 도구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진이 ‘기지촌’과 맺고 있던 장소적 지표 관계가 희미해졌다는 점이다. ‘윤금이’는 오직 끔찍한 감정을 유발하고, 따라서 미군에게 분노할 용도로 쓰였는데, 이 과정에서 ‘윤금이’는 ‘벗은 여성의 몸’이라는 도상적 기호, 즉 보편적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상징이 강화되었고 많은 여성들에게 성적 수치심과 불쾌감, 모욕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반미운동의 목적으로 ‘윤금이’ 사진을 시위에 사용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당시 우리가 알고 있던, 당사자들인 기지촌 여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이 이미지를 ‘폭력적’이라며 보기를 괴로워하는 기지촌의 젊은 활동가들에게 ‘이런 것도 못 보고 우리를 어떻게 이해해, 더한 것도 얼마나 많은데’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대신 기지촌 여성들은 ‘창녀’들이 미군에 의해 죽어 나갈 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시민들이 순결한 중학생들이 죽자 자신의 일처럼 마음 아파하며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고 ‘윤금이’ 사진은 당사자들의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반미운동을 위해 선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었다가 폭력적이라는 강한 비판을 받고 점차 시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윤금이’의 사진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윤금이’ 사진을 어떤 경우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목소리로 확장되었고, 점차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을 겪으며 ‘보지 않을 권리’까지 말해지고 있다. ‘윤금이’ 사진은 기지촌의 지표성을 점점 상실해 가는 방향으로 잔혹한 도상의 이미지, 즉 정치적 맥락이 지워진 포르노그라피적 이미지로 우리 앞에 다시 재의미화된 것이다. 기지촌에서 여전히 생존해 있는 여성들과 계속 영화를 만들어 가는 입장에서, 나는 ‘윤금이’ 사진의 도상적 재현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시하는 측과, 이에 대한 비판으로 ‘이미지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계속 누락되고 삭제되는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윤금이’ 이미지를 금지함으로써 사진에서 훼손된 시신이 가리키는 것, 시신을 촬영한 구도가 말해주고 있는 것, 시신이 누워 있던 방이 말해주는 것 등, 프레임 내부가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프레임 밖의 장소, 즉 도상이 지시하는 의미를 둘러싼 첨예한 정치적 문제들을 더이상 섬세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범죄의 도구이자 목적이 되었던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과 ‘윤금이’ 사진이 만들어진 역사성은 같지 않다. ‘윤금이’ 사진은 범죄의 도구나 목적이 아니라 범죄의 결과로 생겨난 이미지였으며, 그녀의 사진이 불쾌감과 수치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윤금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정들은 오직 우리가 무엇을 선정적이고 선정적이지 않다고 느끼는지 결정하는 사회적 담론의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윤리적이다’라는 말을 하기에는 무언가 덜컹거린다. ‘윤리적’인 이미지, 윤리적 재현이라는 말 또한 ‘선정적이다’라는 말과 유사하게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는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더 ‘윤리적’이 된다고 믿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미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1985)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사진기록을 단 한 컷도 사용하지 않고 증언만으로도 학살이라는 문제와 생존자에 대한 매우 성찰적인 미학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장 뤽 고다르가 벌인 유명한 ‘재현의 정치’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이미지에 대한 금지의 욕망 뒤에는 ‘재현 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학살의 고통을 유대인의 것으로 독점하고, 다른 문화권이나 민족의 학살과 비교하지 못하도록 위계를 두려는 욕망, 즉 고통의 독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은 9.11테러사건이나 이라크 전쟁 중 사망한 민간인과 미군의 시체가 미디어에 유통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시체 사진이나 가난한 국가의 재난으로 발생한 시체 사진은 미디어에서 자율적으로 유통시키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공의 기억에서 무엇을 누락시키고 건져 올릴지 결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락하는 행위야말로 권력의지이며, 우리에게 한정된 서사를 강요하는 폭력은 아닐까? 우리에게는 누락할 권리가 아니라 오직 해석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각주 ^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이후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된다. 공대위에는 약 50여 개의 시민단체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윤금이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는 데에는 1989년 조선대생 납치고문치사 사건인 이철규 사건 때 사진을 공개해 대중에게 큰 공분을 불러일으킨 경험이 작용했다. 정희진, <한국여성인권운동사>(한울, 2013), 342-343쪽 참조. ^ 정희진, 위의 책, 340쪽.

    김동령

  • 모순을 증언하기: 이름 없는 증인 카체트닉의 사례
    2022년 논평 모순을 증언하기: 이름 없는 증인 카체트닉의 사례

    루스 프랭클린(Ruth Franklin)은 홀로코스트 문학을 다룬 저서 『천 개의 어둠 A Thousand Darknesses』에서 과거의 재난을 반복해서 다루고, 게다가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일의 윤리적 위험을 지적한다. 망자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적지 않은 독자, 관객, 청중,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홀로코스트의 직설적인 이미지를 읽고, 듣고, 보고 싶어 할까? 루스 프랭클린은 여기에는 어떤 열망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홀로코스트에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채널’에 대한 갈구 말이다.  폭력을 겪은 이들, 몸이 겪은 폭력을 고발하고 증언하는 이들의 외침은 같은 이유로 강력한 힘을 갖는다. 피해자, 희생자, 증인은 살아있다는 용기, 모습을 드러낸다는 용기, 입을 연다는 용기를 통해 존재의 존엄함을 증명한다. 이들이 “내 몸이 증거”, “내가 바로 증거”라고 외칠 때, 이 외침은 법정에서 사실을 입증하는 효과 이상의 효과를 생산한다. 증인이 여기, 우리 눈앞에 얼굴과 육신,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 재난을 몸으로 증언하는 증인을 통해 재난과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가령 홀로코스트의 ‘위대한 증인의 시대’를 열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이다. 하지만 수전 손택(Susan Sontag) 같은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타인의 경험’에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을 회의했다. 그의 관점 속에서 홀로코스트,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 내전, 제국주의 침략 등 재난의 희생자를 기록한 사진은 재난 그 자체에서 분리된 채 지구촌을 순회하며 의미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재현물이다. 그러니 그는 질문한다. 희생자를 찍은 사진을 보며 희생자에게 연민을 갖고, 재난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일은 재난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인가? 그는 이런 사진들을 통해 재난과 피해자에게 ‘직접 연결’된다는 믿음을 곧장 갖는 이들을 틀림없이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는 재난 사진에 기만당하지 않는 일이다. 역사적 재난은 우리를 이처럼 딜레마 속에 빠트린다. 직설적 묘사, 극적인 이야기, 사진 이미지 또는 증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역사적 재난은 자신을 둘러싼 윤리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딜레마를 생산한다.   어느 날 나는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전쟁 범죄를 기리는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 아이히만 법정 증언대에서 흰색 양복을 입은 한 증인이 실신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증언대에서 웅얼거리며 증언을 이어나가다, 안절부절못하더니 갑자기 증언대 옆 바닥으로 쓰러졌다. 1961년 6월 7일 예루살렘 민중의 전당 법정에서 속개된 68차 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영상링크 이동: https://www.youtube.com/watch?v=m3-tXyYhd5U) 정신을 잃고 쓰러져 증언이 중단된 이는 수용소 생존자 예히엘 디누어(Yehiel Dinur, 1909-2001)였다. 아이히만 재판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국가폭력, 인종학살, 전쟁 범죄 같은 역사적 재난의 기록, 기억, 기념에서 “증인의 출현”을 개시하고, “위대한 증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기록된다. 1961년 겨울까지 이어진 아이히만 재판에서 수용소 생존자, 유대인 레지스탕스를 포함한 백여 명에 가까운 증인들이 4월부터 6월까지 증언대에 섰고 예히엘 디누어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예히엘 디누어라는 인물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필명은 이스라엘 국내외에 제법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46년부터 카체트닉(Ka-Tzetnik)이라는 이름으로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몇 권의 책을 펴낸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졌던 나치 유대인 절멸 계획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처음 불러일으킨 사건,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비로소 공적으로 발화된 사건, 생존자의 법정 증언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세계 37개국에 최초로 중계된 사건, “증인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사건, 존재로서 역사를 증언하는 생존자-피해자-증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 재판에서 증인 예히엘 디누어는 증언대에 선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신경 발작 치료를 받았고 다시는 증언대에 서지 않았다. 아이히만 재판은 이제 막 문을 연 대형 회관의 강당을 개조한 법정에서 열렸다. 생존자, 피해자, 가족, 시민, 언론인, 학자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다. 4월부터 두 달 가까이 증인들의 증언이 진행되는 동안 텔레비전은 법정 방탄유리 뒤 피고석에 앉아 있던 아이히만의 표정과 동작을 내내 클로즈업 화면 속에 담아냈다. 아이히만은 6월 20일, 75번째 공판에서야 변호사의 심문을 받게 되고 7월 20일부터 검사와 판사에게 수십 차례의 심문을 받게 된다. 재판에서 아이히만 못지않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검사 기드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아이히만 재판을 기록했던 한나 아렌트(H. Arendt)는 기드온 하우스너에게 방청객을 힐끗거리며 연극적 허세를 지닌 채 법정을 미디어 쇼 무대로 만들었다며 날 선 비난을 가했다-는 이날도 증인의 신분을 확인하며 증언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히엘 디누어입니다.” 검사는 디누어에게 가명으로 카체트닉을 선택한 까닭을 물었다. 카체트닉은 강제수용소를 뜻하는 독일어 Konzentrationslager를 줄여 부르던 KZ(카-체트)에서 비롯된 말로 수용소 수감자를 일컫는 은어다. 따라서 왜 수감자를 가명으로 선택했냐는 검사의 질문은 증인이 아우슈비츠 생존자 당사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자, 참혹한 수용소 경험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건네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증언대에 선 예히엘 디누어는 검사에게 자신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가 아니며, 카체트닉 역시 필명이 아니라고 답한다. 자신은 지구의 규칙이 작동하지 않았던 “아우슈비츠 행성의 연대기”를 적는 인물일 뿐이라고 밝힌다. 아우슈비츠 행성에 사는 이들은 모두 카체트닉과 숫자로 이루어진 이름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민족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후에도 세계가 깨어나지 않는 한” 카체트닉, 수감자를 이름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2년 동안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예히엘 디누어는 실제로 이후 평생 카체트닉, 또는 나치가 자신의 팔뚝에 새긴 수감자 번호 135633을 더한 카체트닉 135633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는 심지어 강제 수용소 경험 이전 이디시어(편집자 주: 중부 및 동부유럽 출신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썼던 자신의 시집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시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는 일에 수용소 이후의 여생을 바쳤지만 이름, 얼굴, 목소리를 드러내는 미디어 인터뷰는 한결같이 거절했다. 그는 평생 이름 없는 이름, 수감 번호 135633의 낙인과 수감자 아무개라는 이름으로만 아우슈비츠에 관해 썼다. 아이히만 재판의 증언대에서 이름과 얼굴을 드러냈던 일이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아이히만 재판 증언대에 서기를 희망했던 이들이 수만 명이었지만-신청자 중 백여 명이 실제로 증언하게 된다-, 이들 중 나치 치하 수용소 생존자는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수용소 생존 당사자 대부분은 당시 증언대에 서서 신분을 드러내거나 경험을 복기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예히엘 디누어도 증언대에 서기를 자처했던 인물은 아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수기와 소설을 펴낸 카체트닉이 증언대에 서기를 희망했던 이는 기드온 하우스너 검사다. 그런데 카체트닉의 저작들은 진정한 목격의 기록이라는 최근의 재평가에 이르기 전 오랫동안 수용소 포르노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카체트닉의 저작은 쇼아를 관음증적 소재로 다루는 비윤리적 저작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키취(편집자 주: 진품이 아닌 천박한 복제품, 모조품)와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수용소라는 한계 상황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어나갔던 엘리 비젤(Elie Wiesel), 프리모 레비(Primo Levi) 등의 걸작 수용소 증언 문학들과 달리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카체트닉의 자전적 수기 혹은 소설에는 나치의 고문, 수감자 사이의 폭력, 수용소 내 윤락 시설(Joy Division), ‘수용소 매춘부(Feld-Hure)’, 수감자 사이에서 벌어진 카니발리즘 등에 대한 묘사가 거칠고, 직설적이고 잔혹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쇼아 문학 연구에 따르면 전쟁 직후 이스라엘에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폭력, 섹스, 살인 등을 소재로 삼아 선정적 흥미를 자극하는 대중 소설이 적지 않게 유행했기에, 카체트닉의 소설도 그러한 대중 소설의 하나로 치부되곤 했다. 아이히만의 심문 기록을 소상히 기록했던 한나 아렌트도 증거와 증언을 다룬 장에서 카체트닉의 실신 사례를 잠깐 언급하는데, 카체트닉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아렌트는 “아우슈비츠의 매음굴, 동성애, ‘인간적 흥밋거리’에 대한 글”[1]을 써서 유명해진 인물로 카체트닉을 소개한다.  수용소 포르노로 비난받는 카체트닉의 글과 삶의 간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증인의 이름 없는 이름과 얼굴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증언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평가받는 아이히만 재판정에서 일어난 예히엘 디누어-카체트닉의 실신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까? 당시 언론은 지옥을 경험한 피해자의 현재의 고통을 입증하는 사례로 예히엘 디누어의 실신을 다루었다. 이를테면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예히엘 디누어의 실신 후 68차 공판을 보도(1961년 6월 9일)하면서 “재판정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고 적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카체트닉의 본명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카체트닉의 본명은 바로 예히엘 디누어다. 증인은 눈을 감은 채 저음의 목소리로 강제수용 기간 동안 경험한 공포를 되짚어 나갔다. 증언이 한껏 고조된 탓에 증인은 이내 증언대에서 비틀거렸고, 이어서 실신에 이르렀다. 들것으로 그를 옮기는 동안 두 번째 증인인 조셉 클라인만(예루살렘 거주, 목수)이 이야기를 이어받았다.”[2] 그러나 카체트닉-예히엘 디누어가 증언대에서 수용소의 참상을 복기하다 실신했다는 보도문 속 묘사는 사실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 정신을 잃기 전 예히엘 디누어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의 독백은 수용소 공포에 관한 생생한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증언대에서 독백처럼 “아우슈비츠 행성”에 관해 읊조렸다. 예히엘 디누어의 읊조리는 증언은 사실 기술을 중시하는 법정 진술에도, 극적 증언의 효과를 보여주고자 했던 아이히만 법정에도 어울리지 않는 진술이었다. 그는 독백을 이어갔다. “저는 점성술에서 별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듯, 잿더미의 행성인 아우슈비츠가 우리 행성의 맞은편에서 우리 행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온전히 믿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히엘 디누어 독백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재판을 벗어난 독백을 제지하려는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상처를 받은 기색을 보이더니 정신을 잃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아렌트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몇 분 동안 독백을 이어나가던 예히엘 디누어는 실신 직전 수용소 가스실로 향하던 수감자들을 언급했다. “저는 그곳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뒤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봅니다. (증언대에서 일어서 증언대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앉는다) 저는 그들을 봤어요. [가스실로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선 그들을 보고 있어요.” 검사는 이 순간 “괜찮다면 다른 질문 몇 가지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판사는 디누어에게 검사의 질문을 들어달라며 플리즈(Please)를 연발한다. 디누어는 이 순간 쓰러진다. 그의 언어와 독백은 법정이 요청하고, 인정하고, 경청하는 해석, 낱말, 표현, 인과성, 증명의 방식에 어울리지 않았다. 크리스티앙 두메(Christian Doumet)는 『증인의 실신』이라는 저작에서 침묵에 대한 거부, 증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부닥친 “말하기의 불가능성” 속에서 예히엘 디누어가 “낱말들의 밤” 속으로 실신했다고 적었다.[3] 자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일 때, 아우슈비츠라는 사건, 극단적인 부조리와 복잡성을 가진 비극적 사건을 자명하게 설명하고, 증언하는 것이 가능할까? 희생자의 표정, 목소리, 시선을 증언할 수 있을까? 겹겹의 의미와 감정의 고유성을 전달할 수 있을까? 예누엘 디누어는 재판정을 지배하는 일반 규칙에 맞추어 가스실로 걸어 들어가던 이들의 시선과 얼굴을 표현할 방도를 알지 못했던 증인이다. 그리고 많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처럼 그 역시 아우슈비츠의 기억 속에서 고통받았다. 우울증이 심화되었던 1970년대에 그는 마약 복용을 통한 환각 치료를 시도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대면할 수 있었던 과거의 이미지, 죽음을 앞두고 있던 수용소 희생자를 포함한 수용소의 이미지를 저서 『지옥의 일출 Sunrise Over Hell』에 글로 다시 기록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카체트닉의 사례를 생존자가 과거의 ‘사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일 때 ‘이미지’를 대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는다.  말하자면 예히엘 디누어는 증인의 모순된 존재 방식을 증언하는 인물이다. 그는 한편으로 재난을 겪은 얼굴, 목소리, 눈빛의 현존성을 지닌 증인이다. 그의 신체, 존재, 고통의 경험은 우리를 역사적 재난에 접속하게 한다. 다른 한편 그는 몸, 존재, 고통의 경험을 통해 절박한 증언 불가능성을 증언한다. 그는 증언대에서 정신을 잃으며 몸의 감각을 중단시킨다. 그의 실신과 침묵은 우리 눈앞에서 우리, 그를 목격하는 증인이 된 우리에게 말하는 다른 언어가 된다. 그의 사례는 한편으로 공감을 장담하는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스스로 고통의 이미지와 그치지 않고 대면하려는 자이기도 했다. 증인이 우리에게 “내 몸이 증거”라고 외친다. 증인을 마주한 채 우리는 어떤 청자, 관객, 목격자가 되어야 할까? 증언의 사실성, 증언의 활력을 기대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연루되어야 할 것이다. 증인의 모순 속에 우리는 먼저 연루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파주: 한길사, 2006), 제14장 증거와 증언 참조. ^ 『르몽드』, 1961년 6월 9일. https://www.lemonde.fr/archives/article/1961/06/09/un-temoin-s-evanouit-en-rappelant-les-horreurs-du-camp-d-auschwitz_2281887_1819218.html  ^ Christian Doumet, L'évanouissement du témoin (Paris: Arléa, 2019) 참조.

    이나라

  •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1부〉 - 부딪치는 차이들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1부〉 - 부딪치는 차이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선생님들의 전공이 다양하고, 일본군‘위안부’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본인 소개를 비롯해 각자의 관심 분야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리며, 동시에 다양한 맥락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만나고 글로 풀어내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저는 현재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기획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셰어는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라는 개념을 주요하게 가져가고 있는데요, 현재의 불평등이나 부정의를 페미니스트로서 바라볼 때 성과 재생산을 둘러싼 힘의 작동 방식을 주의 깊게 살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위안부’ 이슈가 성과 재생산에 관한 한국 사회의 지형을 살피는 데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요.  인권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2017년에 법대 석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2014년에 미군 기지촌 여성분들이 국가 대상으로 진행한 손해배상 소송을 접하게 됐죠. 소송 과정에서 승소를 위해 피해자의 증언이나 구호가 정형화되는 면이 있잖아요. 그런 것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차에 친구에게 미군 기지촌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구술집을 펴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와 인류학 전공자, 영상 전공자 셋이서 팀을 이뤄 평택의 ‘이모들’을 만나는 구술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기획, 채록, 편집, 출간 전 과정이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인류학의 민족지 이론, 미학의 재현 이론, 페미니즘의 피해자 중심주의 등 여러 갈래의 흐름들이 작업의 기반이 되었는데요, 일본군‘위안부’ 증언 연구도 중요한 참고 지점이었습니다. 그때 제 지도교수님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 4권의 저자인 양현아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때로는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20년이 된 증언집의 의미를 어떤 부분에서 계승하고 어떻게 더욱 새롭게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미군 기지촌 여성 구술집을 출간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일본군‘위안부’ 이슈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1년 정도 일본군‘위안부’연구회의 간사로 지냈고, 석사 졸업 후 셰어에서 일하게 되고 나서도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에 참여하는 등 ‘위안부’ 이슈와의 느슨한 연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성용 저는 활동가와 연구자의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고, 비평이나 칼럼을 쓰는 일도 하고 있어요. 관심 분야는 청년, 노동, 젠더 등입니다. 박사논문의 문제의식은 ‘위안부’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동떨어져 있기도 한데요, ‘폭력은 어떻게 사회를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국가(폭력)이란 무엇이고 그게 이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 혹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심성들을 만들어냈는지 질문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제주 4‧3 사건 등 전쟁과 학살의 경험, 국가폭력에 대한 역사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 같아요. 지난번 오키나와로 필드워크를 갔다가 배봉기 할머니를 도왔던 김현옥, 김수섭 부부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위안부’ 문제를 조우하게 됐습니다. 일본에 계시는 이영채 선생님, 우쓰미 아이코 선생님 등 B·C급 조선인 전범을 연구하신 선생님들을 만나며 영향을 받았고요. 그러면서 식민주의 문제, ‘위안부’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위안부’ 관련해서는 정의연 사태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지난 정부의 일종의 ‘3대 사태’라고 하면 조국 사태, 정의연 사태, 박원순 사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정의연 사태는 당시 지형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있었죠. 조국 사태 이후 이른바 친조국과 반조국이 갈라진 상태에서 정의연 사태가 터진 후 진영 논리의 자장 안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미향 의원이 총선에 출마했을 때 좌파라는 사람들조차도 여성혐오적 뉘앙스로 ‘위안부 팔아서 국회의원 해먹는다’는 말을 했는데,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윤미향 의원, 정의연, ‘위안부’ 운동 등이 여전히 대상화된 ‘여성’으로서 재현되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요. 너무 많은 지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세세하게 뜯어서 얘기하지 않고 친/반으로만 이야기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컸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이재임 석사와 박사 모두 여성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박사과정 중이에요. 현재는 법과 사회가 폭력이나 범죄를 다루는 방식을 연구 관심사로 삼고 있습니다. 2017년에 학부 논문을 썼는데 당시 『제국의 위안부』가 학부 내내 이슈였어요. 역사를 전공하고 있었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시기였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를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는 결정을 자연스럽게 했어요. 『제국의 위안부』를 어떻게 비판할까 고민하면서 정영환 선생님의 책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논문을 읽고, 소녀상에 대한 글도 읽으면서 역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운동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막연한 책임감과 정의감을 갖게 됐고, ‘위안부’를 석사 연구 주제로 삼고 싶어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Q.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2020년의 ‘정의연 사태’ 등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일본군‘위안부’운동 관련 다양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또한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을 통해 여성운동과 일본군‘위안부’운동이 만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여러 이슈가 신진 연구자에게 시사하는 쟁점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이슈들을 결합하고 혹은 해체할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페미니즘 리부트, 미투 운동을 계기로 ‘위안부’ 운동이 여성운동과 만났다는 서술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에요. ‘위안부’ 운동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에도 여성운동이었어요. 2000년 법정의 이름도 여성국제법정이었고, 피해자들 또한 다른 나라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과 계속 연대해왔는데 이것을 페미니즘, 여성운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마치 민족주의 운동이기만 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위안부’ 운동은 나름대로 페미니즘 운동을 했다는 식으로 방어적인 대응을 하는 게 능사는 아니고, 지금은 내부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이 페미니즘 운동이었냐 아니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위안부’ 운동이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었고 앞으로는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고자 하는가를 돌아봐야 할 때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노선이 다변화됐고, 내부에 갈등도 많은 상황이잖아요. ‘생물학적 여성’의 안녕만을 도모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주장하면서 트랜스젠더 등 다른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흐름도 존재하고요. 이제 90년대의 프레이즈인 ‘민족에서 여성으로’ 이후 한 단계 더 나갈 필요가 있어요. ‘여성으로’가 무슨 뜻인지, 어떤 페미니즘이어야 하는지, 젠더를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 다른 억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거기서 ‘위안부’ 운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셰어에서 활동하면서 구체화되고 날카로워진 문제의식이기도 해요. 셰어는 이전부터 장애계와도 소통하면서 낙태죄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들이 구성원으로 있고, 낙태죄 폐지 운동을 거치면서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어요. 상호 교차성을 활동의 중심에 두고 있고, 낙태죄 폐지 운동을 여성 신체에 대한 자율성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던 인구 통제, 이를 위해 계속해서 이뤄졌던 재생산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만들려고 했던 단체입니다. 그때 주요했던 구호가 ‘낙태가 범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는 비정상인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이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 억압을 포괄적으로 함께 보고 있어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지금의 페미니즘 지형과 연결되고, 젠더화된 힘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진전시킬 수 있기를 바라요.  지금의 페미니즘 지형에선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소수자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서 담보될 때의 한계가 있거든요. 경찰, 군대, 감옥 역시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일조하고 있는데, 페미니즘 운동의 목표가 오로지 국가의 더 많은 개입을 촉구하는 것이어선 안 됩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 역사가 30년이나 된 만큼 물론 어느 정도는 제도화되어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운동과 국가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급진적인 운동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성용 셰어에서 재생산과 관련하여 개념을 확장시켜 나간 게 놀랍습니다. ‘위안부’ 운동도 그러한 잠재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민족에서 여성으로’라는 구호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퍼져나갔고, 저도 그 자장 속에 있는 사람인데요. 이제는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 다른 이야기들을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성공회대 조경희 선생님이 쓴 글[1]을 보면 90년대 재일조선 여성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해갔는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어요. ‘여기’에서의 교차성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 전후 일본 사회에서 지속되는 식민주의 문제를 온몸으로 겪어온 집단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성이기도 하고, 한쪽만 이야기하는 운동이나 논의에 대해선 스스로 온전히 대변할 수 없었던 불편함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김학순 증언 이후 ‘위안부’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서게 됐는지 자각해갔다는 이야기였어요. 교차성이라는 게 ‘여기’의 맥락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한국 사회에서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의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겐 (페미니즘) 계보가 없다’고 했다가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바뀌어간 것을 기억하는데요. 지난 8월 한 달 정도 출장 목적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흑인운동 관련 전시와 서점을 방문하고 공연도 봤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폭동(riot)’의 역사를 계속해서 상기하더라고요. 역사와 계보를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과오를 되짚어가며 토론하고 있었어요. 운동에 참여했거나 관심 있게 지켜봤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집합 기억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었죠. 그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운동들은 그러한 노력을 얼마나 해왔나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제게 ‘우리에겐 계보가 없다’라는 말로부터 이어지는 고민인 것 같아요.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년 세대 여성들이 ‘위안부’ 운동을 조우했을 때 ‘최초의 미투 운동’이라는 수사를 사용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 맥락 속에서 계보를 찾고 역사를 구성해나가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투 운동이든 ‘위안부’ 운동이든 최초로 증언을 하게 될 때의 용기와, 증언이 부정되는 경험들,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해나가는 경험들이 다르면서도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과정들 속에서 과거를 통해 용기와 교훈, 위로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위안부’ 운동도 현재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만나면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며 상호 참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재임 요즘 ‘위안부’에 대한 석사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하기 위해 고민 중인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얼마나 여성운동으로 여기고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석사 논문을 쓸 때도 ‘위안부’ 운동이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역으로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제가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피해와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 페미니스트 운동이 놓여있는 지형이기도 하죠. ‘위안부’ 피해자를 둘러싼 담론들이 그 지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피해를 개인의 고통이자 불운한 사건으로 보고, 피해자에게 보호나 지원 등 인도주의적 조치를 해주면 끝이라는 문제적인 인식 말이에요. 이러한 지적이 페미니스트 연구자들,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에게 ‘위안부’ 운동을 내 문제라고 여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각주 ^ 조경희, 2020, 「포스트 식민 페미니즘의 (재)소환: 1990년대 재일여성들의 ‘위안부’ 운동과 정체성 정치」, 『문화과학』, 2020년 겨울호 (통권 제104호), 문화과학사.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웹진 <결> 편집팀

  •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2부〉 - 부딪치는 기억들: 채록·발굴·선택·배치
    2022년 좌담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2부〉 - 부딪치는 기억들: 채록·발굴·선택·배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인민 사이의 차별적 권력 구조에 맞서 소수자와 인간, 여성의 몫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와 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청년좌담에서는 젊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이은진, 이재임, 최성용과 만나 이들의 삶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의미와 동인이 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동세대 신진 연구자들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원들과의 문답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 구술 채록, ‘피해’와 ‘피해자’를 둘러싼 법적 담론 분석, 한국 사회의 ‘위안부’운동과 담론에 대한 탈식민적 비판 작업 등을 만나 보시죠. -좌담 일시: 2022년 9월 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장소정, 이안 -대담: 이은진(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재임(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최성용(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증언을 비롯한 사료들이 현재도 (재)해석/발굴되고 있는데요. 수집과 해석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무엇을 고민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은진 평택 기지촌 여성 구술집 작업을 할 때 의식적으로 ‘증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어요. 일부러 ‘구술사’라는 말도 쓰지 않고, ‘구술집’이라는 말로 책을 소개했어요. 여기에 실린 말들을 증거처럼 뭔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지 말고, 역사적 의미가 있어서 들을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였죠.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집 4권(2000)의 전환이라고 한다면, 피해자들의 말을 어떤 정보값으로 다루기를 거부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인식체계 자체를 전복하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힘을 가짐으로써 그들의 말을 재위치시키고 전달하고자 한 작업물이었던 거죠. 기지촌 여성 구술집은 한 발 더 나아가, 사실과도 완전히 결별한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영미 지니 윤선: 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 폭력 피해자를 넘어서』(이경빈·이은진·전민주, 서해문집, 2020)에는 피해자들이 완전히 상반된 사실을 진술하는 것도 그대로 실었어요. 사실을 밝히는 건 피해자가 아니라 연구자의 몫이자 공통의 과제라고 생각했거든요. 피해자에게 부정확한 말도, 틀린 말도 할 수 있는 발화 공간을 허락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상황들과 당시의 대화 분위기 등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그리고 연구자의 위치와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듣고 말하는 행위의 정치적 의미를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했죠. 연구 윤리와 관련해서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는데요. 가령, 피해자가 중요한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된다고 가정해보죠. 사회가 승인해줄 법한 피해 서사와 맞지 않을 경우 그것을 공개했을 때 피해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겪을 수도 있겠죠.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그 발언에서 어디까지 가릴 것인가 고민하게 돼요. 듣는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는데 ‘듣는 태도는 결국 바꾸지 못할 거야. 그렇다면 피해자의 말을 어디까지 편집해야 하지?’라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거죠. 이 작업은 그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텨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언을 편집해서 없애버리는 대신, 독자가 스스로의 듣는 태도를 거듭 질문하게 하는 데에 집중했어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상황적인 요인도 있었어요. 이미 기지촌 여성들의 사법운동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에서 저희가 구술작업을 시작했거든요. 법정 싸움은 당시의 법령들, 여러 공문서가 오간 정황 등 문서 자료들을 활용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피해자는 직접 법정에서 증언할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저희의 구술집은 사법운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당사자 말하기를 둘러싼 고민을 전진시킬 수 있었어요.   이재임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 있을 때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이라는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총 4개 섹션으로 구성됐고, 그중 하나가 태평양 트럭섬에 다녀오신 이복순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할머니가 93년도에 정부에 신고할 때부터 “나는 도라쿠도에 다녀왔다”고 말씀하셨대요. ‘위안부’로 도라쿠도에 끌려갔었다고요. 그런데 그때는 도라쿠도를 지명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따뜻하고 바나나를 먹는 곳이었다니까 인도네시아였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연합군이 트럭섬을 점령했을 때 귀환을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 이들을 찍은 사진에서 이복순 할머니와 닮은 얼굴을 연구팀이 발견했죠. 그때는 이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 대구에 있는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이인순 관장님께 확인을 부탁드렸고, 이복순 할머니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있던 트럭섬 귀환선 승선 명부에서 히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죠. 할머니의 아버지 호적을 통해 이복순이라는 이름을 히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다는 것까지 알게 됐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도라쿠’가 트럭의 일본식 발음이었구나, 할머니는 트럭섬에 다녀왔다는 말을 계속하셨던 거구나 알게 됐어요. 그걸 알아내기까지는 아주 많은 자료의 교차가 필요했습니다.  전시 포스터를 보면 ‘기록’과 ‘기억’ 사이에 글자들이 부서지고 있어요. 기억과 기록이 교차되면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우리가 아직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는 시도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자료의 위계를 없애고 모든 자료를 함께 볼 때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증언이든 연합군 자료든 ‘생산 맥락’을 보는 것이 연구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최성용 증언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위치성에 대한 얘기예요. 예컨대 나이 든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가 훈련된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죠. 저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라 연구팀과 함께 어르신들을 인터뷰할 때면 뒤에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는데, 그 경험을 하며 위치성이란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이것은 생산 맥락에 대한 강조와도 연결되는 것이에요. 최근에 어떤 활동가분들을 인터뷰하면서 죄송했던 기억이 있어요. 더 좋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들의 이야기들을 더 두껍게 들어야 했는데 그분들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어 괴로웠습니다. 정동이나 침묵, 감각, 미묘한 기류 등으로 증언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일종의 맥락을 두텁게 읽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증언도 그렇지만 사료도 굉장히 구성적이잖아요. 예를 들어 포로심문보고서의 경우, 누가 포로심문을 하고 자료를 작성했느냐, 일본계 2세냐 혹은 조선인 광복군이냐 등 여러 상황에 따라 내용도 완전히 달라지고, 그렇게 생산된 자료가 어떻게 쓰이고 유통됐는지 등 맥락도 굉장히 다양하잖아요. 아주 구조적인 차원의 힘부터 개별 행위자들 수준의 목적과 욕망이 뒤얽히면서 사료라는 것이 만들어지죠. 공부하면서 이처럼 두터운 맥락들을 읽어낼 역량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시대적인 성격 전환과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안부’문제에 대한 세대교체는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지, 또 연구하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은진 ‘미래 세대’는 어느 분야에서든 비판하고 있는 용어예요. 문제를 현재의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청소년 등의 주체를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내포돼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신진 연구자들을 호명할 때도 사용되는데, 미래 세대를 초청하는 동시에 타자화한다고 생각해요.    최성용 연구보다는 운동 차원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한국의 진보적인 시민사회 운동의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거치면서 제도 속으로 포섭되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라는 게 제도화될 수밖에 없는데, 제도화된다는 건 일정한 기득권을 갖게 되는 것이죠. 마이너리티에서 특권을 가진 집단으로 위치가 변해가면서 ‘위안부’ 운동도 진영 담론의 논리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된 것 같아요. ‘위안부’ 운동과 문제를 어떻게 진영 담론으로부터 구출해낼 것이냐, 혹은 재맥락화와 재의미화를 할 것이냐, 이것은 연구 차원뿐만 아니라 운동 차원과도 겹쳐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세대교체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청년 세대 등과 관련하여 민주노총 내에서 작년부터 연구를 하고 있어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받아들여 노조 집행부 자리의 일정 부분을 청년에게 내줬는데, 정작 의사결정 권한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세대 갈등이 작동하는 맥락들이 있었죠. 기성세대는 ‘요즘 청년 노동자 조합원들은 집회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온다. 이기적이다’라고 말하고, 청년세대는 ‘우리가 얘기를 하면 안 듣는다. 그러니까 안 나가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구도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보이고, ‘위안부’ 연구에서도 어느 정도 유사한 결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후속 세대가 등장해야 하는데 잘 나타나지 않고, 그렇게 되니 오기만 해도 고마워하며 소위 말해 ‘우쭈쭈’하게 되는 것이죠. 기존의 ‘위안부’ 연구 혹은 운동에 대해 비판했을 때 기성세대들이 어떤 태도를 보여줄까 싶고, 노동조합의 예시처럼 청년들이 튕겨 나가거나 없는 사람처럼 무시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는데요. 그러한 권력관계 지형 속에 이 문제도 놓여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은진 저는 엄밀히 말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에요. 논문도 낙태죄 관련으로 썼고, 스스로를 재생산정의 활동가로 정체화하기도 하고요. 이런 입장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의제와 다른 의제의 연결성 차원으로 세대 전환이나 교체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운동이나 의제도 일종의 생애 주기가 있으니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건 한계가 있겠죠. 하지만 여성, 인권 운동의 계보 속에서 다른 의제들과 연결되며 현재화되는 방식으로 현재성을 얻게 된다고 생각해요, 다만 일본군‘위안부’ 운동이나 문제가 게토화되면서 그런 방식의 현재성을 얻는 일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현재화하기 위한 몇 안 되는 시도들이 있지만, 그마저도 단선적인 상상에서 그치는 것 같아요. 가령 일본군‘위안부’에서 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성매매 여성으로 이어진다는 식으로요. 저는 좀 더 복잡한 연결망 속에 일본군‘위안부’ 이슈를 놓아보고 싶어요. 셰어에서 ‘몸이 선언이 될 때’라는 전시에 참여해 저도 함께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때 연표를 만들었어요. 임신중지 관련 사건이나 개념들을 비롯해 몸과 재생산에 대한 수많은 억압들을 연표로 정리하면서 장애인 등 시설화된 삶과 이것이 어떻게 교차되고 얽혀있는지 드러내고, 존재가 곧 범죄였던 트랜스젠더 등의 삶과도 연결했습니다. 그러면서 ‘위안부’ 이슈도 이런 연결망 위에 놓을 수 있지 않을까, 꼭 성매매와 연결되는 의제로만 상상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최성용 민주화 운동 서사를 볼 때 느끼는 불편함이 있어요. 정형화된 서사들을 보면 교과서나 박물관에 박제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내가 들어갈 틈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봐도 현재와 연결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고, 기존의 정형화된 서사는 담아낼 수 없는 개인 및 집단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있는데, 그런 것들은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과거사 운동이 제도화되고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이 사장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의 역사적 자원으로 삼고 새로운 질문이 나오게끔 하는 촉매제로 삼으려면 국가의 공식 기억과는 별개로 사회적 기억이 두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은진 발언 참고 https://www.ildaro.com/8525    https://view.pong.p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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