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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만 1085통의 엽서와 1만 589명의 시민, 그리고 감동의 오사카 활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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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589명과 2만 1085통. 두 달간 엽서쓰기 운동에 참여한 경남도민과 그들이 모아준 엽서의 숫자이다. 한일강제병합 100년, 광복 65주년이 되던 2010년 9월부터 11월까지 경남도민 엽서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국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의 엽서 쓰기 운동이었다. 이렇게 모은 엽서를 ‘위안부’ 피해자 세 분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직접 전달할 계획이었다. 두 달 동안 운동을 진행하며 엽서를 한 통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홍보하고 부탁하러 다녔다. 그런데 그때 겪었던 어려움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또 닥치기 시작했다. 바로 엽서의 수신인란에 일본 중의원 200~300여 명의 이름을 써넣는 일이었다. 2만여 통의 엽서를 일일이 가려내고,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골고루 배달되도록 수신인란에 각각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문제는 2만 1000여 통이라는 양이었다. 내용상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엽서들을 걸러내야 했는데, 지나친 분노와 혐오의 표현이 담겨 있거나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된 내용, 심지어 욕을 써놓은 엽서 등을 빼내고도 2만 1000여 장이나 되었다. 이 운동을 추진해 온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두 단체는 형편도 거의 똑같았다. 유급 실무자 한 명 없이 무급 대표 혼자서 회계를 비롯한 모든 실무를 해야 하고, 전화도 받고, 기자회견문도 쓰면서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93세, 89세, 81세의 고령의 피해자 할머니들을 일본에 모시고 갈 준비를 하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많은 양의 엽서를 일본까지 가지고 갈 인력도 필요하던 터라 고민 끝에 젊은 힘을 빌리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창원대학교 학생동아리연합회가 다행히 도움을 주겠다고 하여, 대학생 10여 명이 일주일 정도 수업이 끝난 뒤 모였다. 덕분에 엽서 분류와 일본 의원들의 이름을 써넣는(실은 그려 넣는) 작업을 출국 이틀 전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피해자 세 분을 모시고 출국 기자회견을 했다. 2만 1000여 통의 엽서와 경상남도 내 14개 지역의회의 일본군‘위안부’ 결의문, 이 결의를 촉구한 9000여 명의 서명부와 함께였다. 엽서를 보내 온 시민들의 대부분은 경상남도 내 청소년들이었고, 그 청소년들의 80%는 여학생이었다. 이 엽서를 쓴 청소년들은 이제 20대 후반에서 30대가 되었을 터이고, 13년이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문제 상황이 더 후퇴해버린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11월 25일,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을 모시고 청년 활동가 두 명, 피해자 지원활동가 한 명과 함께 두 단체의 대표는 도쿄의 중의원회관을 찾았다. 이날은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이기도 해서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2010’이 그 전해인 2009년부터 진행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1억 명 서명운동의 결과를 공유·보고하는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바로 그 대회장에 일본의 ‘위안부’ 운동 사회가 잘 모르는(실은 한국 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경남의 낯선 단체가 ‘위안부’피해자와 함께 참석한 것이다. 이 대회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과 경남의 두 단체까지 모두 4개 단체가 한국에서 참여했고, 일본 측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입법해결을 요구하는 120만인서명실행위원회,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2010, 전시성폭력문제연락협의회가 행사를 주최, 주관했다. 피해생존자는 경남의 세 분과 대구의 한 분(이수산), 서울의 한 분(길원옥), 일본의 한 분(송신도)까지 모두 6명이 참석했는데, 행사의 1부 순서에서 길원옥, 송신도, 이수산 세 분이 피해자 발언을 하셨다. 2부 행사는 일본 국회에 대한 서명 제출과 각 단체들의 활동 보고가 진행됐다. 정대협이 한국의 서명 활동을,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대구의 서명 활동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 경남의 활동을 보고했다. 이 활동 보고와 한일 각 단체의 서명부, 그리고 경남도민들의 탄원 엽서를 일본 관방장관에게 전달했다. 이는 통영의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복득 할머니와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의 송도자 대표가 맡았다. 이 행사 후에는 일본 중의원회관 정문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참여했는데, 맞은편의 일본 측 반대 집회의 큰 확성기 소리가 혹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피해자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 경남에서 모시고 간 세 분도 모두 일본어를 알아들으셨고, 그중 한 분은 청력을 거의 상실하셨지만 플래카드에 쓰인 글은 읽으셨을 텐데 차마 여쭈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인 11월 26일 오전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을 방문했는데, 할머니들께서 그곳 활동가들의 친절한 응대와 편안한 분위기에 말문이 열리기 시작하셨다. 한국 출발 이후 가장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아쉽게도 이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피해자를 모시고 가면서 어떻게 기록이나 촬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반성과 함께 후회막급이다. 이날 오후에는 오사카로 갔다. 간사이네트워크 소속 단체 활동가분들의 따뜻한 환대 덕분에 그동안 겪은 어려움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24일 송신도 할머니 생신 잔치에서도, 25일 도쿄 중의원회관에서의 국제서명제출행동 행사 및 집회에서도, 한국이나 일본의 행사 참가자들(국회의원, 단체 활동가 등)에게도 제대로 된 인사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할머니들을 향한 환대와 정성은 긴장하고 위축되어 계시던 할머니들의 기분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간사이네트워크 조직 차원에서는 논의 끝에 할머니들을 공식적으로 모시진 못했지만, 네트워크 소속의 몇 단체와 활동가들이 할머니들의 증언 행사를 정성껏 준비하고 맞이해 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하고 고마운 일이다. 마음을 다해 환영해주고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신경 써주는 모습들이 눈빛에서, 말씨에서, 움직임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되신 임정자 할머니와 김복득 할머니께서 증언하실 때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오사카 지역 활동가들의 표정은, 할머니의 아픔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음을 알게 했다. “(…) 일본 장교가 지 말 잘 안 듣는다고 이층에서 나를 집어던졌어요. 그때 가슴뼈를 다쳐서 아직도 이렇게 아파요”라는 임정자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흐느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들은 타성에 젖은 내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할머니들과 몇 년 동안 함께 다니며 서로 부대끼느라 피해자들의 그 깊은 고통과 아픔에 무던해진 내가 부끄러웠다. 짐작건대 오사카 증언회는 그동안 절대로 입을 열지 않던, 한 번씩 슬쩍 여쭈어볼라치면 얼굴을 돌려 버리던, “그런 말 묻지 마라” 하시던, 어떤 자리에서도 발표나 증언을 하시 않으시던 할머니의 마음을 열어놓은 게 분명했다. “나도 저래 할 수 있다고. 나도 써 논 것도 있고, 저래 할 수 있다고.” 이 말씀은 할머니를 오사카로 모시고 간 뒤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상처의 치유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고, 마땅히 사죄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속 깊이 박힌 상처와 수치, 낮은 자존감의 단단한 자물쇠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것이리라. 오사카에서의 일정은 우리 할머니들의 표정을 밝고 당당하게 해주었고, 이동하는 버스에서, 숙소에서 흥겨운 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게 했다. 성의를 다해 할머니들을 모셔주신 오사카의 방청자 선생님을 비롯한 활동가분들의 그 따뜻함은 아직도 가슴 깊숙이 생생히 남아 있다. 이 고마움을 다시 한번 전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2010년 두 달 동안 2만 1000여 통의 탄원 엽서를 보내주신 1만 589명의 경남 청소년들을 떠올린다.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청소년 시민들이 주인공들이고 희망이다. 13년이 지난 지금, 마치 일제강점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암울한 이 시대에, 아직도 유급 실무자 한 명도 둘 수 없는 지역 단체가 기댈 언덕은 바로 이런 청소년들이자 시민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앞으로 필요하면 2만 통이 아닌 20만 통도, 200만 통도 청소년들과 시민들은 만들어 낼 것이다. 덧. 사실 피해자들을 모시고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비용의 80%를 경남도에서 지원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경상남도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행사를 공식적으로 지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전해에 치른 지방선거에서 지역 시민단체들이 야권후보 단일화 운동을 전개하여 그동안 보수 일색이던 경남도정 역사상 처음으로 야권 후보가 경남도지사로 당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권 단일화 운동에 앞장섰던 시민단체에서 김두관 도지사에게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정책이 없어 소외되었던 경남도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과 위로의 자리를 요청하여 마련했고, 이 자리에서 경남도일본군위안부역사관건립도 제안하고, 피해자들의 일본 내 증언 활동 지원을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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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에세이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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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 콘텐츠가 업무나 연구 활동에 얼마나 유익한가요?” “웹진 〈결〉에 전하고 싶은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로 만들어진 2023년 제2차 웹진 〈결〉 독자만족도 조사 결과를 소개합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자리를 마련한 지 어느덧 4년이 지났습니다. 웹진 〈결〉에 늘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보내주신 의견을 참고하여 2024년에도 더 좋은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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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잊혀진 죽음과 기억의 젠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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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는 전쟁에 대한 여성의 피해 경험 자체와 더불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젠더 규범 속에서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랜 세월 묻혀있어야 했던 사실에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웹진 〈결〉은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노근리 사건을 통해 전쟁으로 희생되었으나 가시화되지 못한 여성들의 죽음을 살펴보며 기억의 젠더정치 문제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이었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한·미 정부에 의해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며 한국 사회에 알려졌고, 2004년 ‘노근리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되는 등 노근리 사건의 기억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0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감독 이상우)이 개봉하며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대중적으로도 조명받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비롯한 진상규명 등 노근리 사건에 관한 역사화는 젠더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 중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달한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기록과 역사화가 대부분 남성 피해생존자와 유족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와 같은 피해의 불균형과 그 맥락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위험 상황에 취약한 아이나 노인은 그렇다 치지만 왜 여성들의 희생이 많았던 것일까.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은 한 여성 피해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굴 안에 있으믄 다 죽는다. 남자들이라도 뒷산으로 (가서) 피하자고. 그래 가지고 아버지, 오빠들. 뒷산이 있잖아요? 옛날에는 흰옷을 입으면 밤에도 허옇게 보이잖아. 그러니까 옷을 벗고 뒷산으로 피해가지고.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오빠들은 거기서(노근리 다리) 그렇게 피해가지고 살았잖아.” 폭격으로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 남자들이 먼저 탈출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미군의 소개령에 의해 피난을 떠난 4일 동안 노근리 쌍굴다리 안에 갇혀 있던 남성들은 미군의 총격을 피해 이웃 마을인 도동리로 탈출했다. 부계 중심의 가족 질서 안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남성의 목숨과 안전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피난을 떠난 남성들도 적지 않다. 반면, 여성들은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어린 자녀와 늙은 시부모를 보살펴야 했다. 이것이 학살 현장에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사망한 여성들이 많았던 이유이다. 또 여성들은 쌍굴다리에서 도망을 치더라도 낯선 남성들에 의한 강간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홀로 피난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처럼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성별분업, 그리고 젠더 규범은 한국전쟁기 피난의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노근리 사건에서 여성, 특히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노인의 사망이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측면이 가시화되거나 논의되지 않은 것일까? 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노근리 사건 피해생존자들이 어머니의 사망으로 초래된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과 연관된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남은 가족을 위해 생계는 물론 가사노동과 돌봄 역할을 떠맡기도 했지만, 자녀들을 방치하거나 자녀, 특히 딸로부터 돌봄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혼의 딸들은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 오빠, 남동생 등 남성 가족구성원들의 식사와 빨래를 도맡아 하고 농사일을 도왔다. 반면 아들들은 학업을 지속하거나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얻었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가족의 위기를 재혼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재혼으로 다시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은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남성의 가장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행위였다. 이들과 결혼한 여성은 가사 및 돌봄 노동, 나아가 생계노동을 담당하며 사망한 여성의 성역할을 대체했고, 특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는 동안 노근리 사건으로 사망한 여성의 죽음은 잊혀갔다. 노근리 사건으로 재혼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안민혁(가명) 씨는 제삿날마다 집안이 시끄러웠다고 기억한다. 재혼한 어머니는 조부모와 삼촌 그리고 ‘큰어머니’의 제사를 함께 준비했는데, 아버지가 ‘왜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냐’며 큰어머니의 제삿밥을 내동댕이치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또 전영희(가명) 씨는 재혼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혼가정에서 태어난 배다른 동생들이 아버지의 무덤 옆에 노근리 사건에서 죽은 ‘전처’가 아닌 자신들의 친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망한 아내/어머니의 성역할이 딸에 의해, 혹은 남편/아버지와 재혼한 다른 여성에 의해 대리·대체되면서 그 존재는 점차 망각되었다. 그 결과 노근리 사건에서 사망한 여성,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애도될 수 없는 전쟁 피해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에 의한 어머니의 죽음은 피해생존자의 자녀들, 특히 딸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딸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긴다. 전쟁이 끝난 후 사망한 어머니의 성역할을 대신하며 자란 데다 결혼 후 자신이 어머니가 되면서 어릴 적 어머니의 부재를 더욱 큰 상실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이오사변 때문에 내 인생이 망친 거지, 한마디로. 내가 엄마하고 살았으면 공부도 하고 그랬을 텐데. 그게 한이 되지. 딴 게 한이 된 거 아니여. (…) 누가 엄마라고 부르면 그렇게 부럽더라고, 엄마. 엄마가 최고여. 아버지는 아무 소용도 없어. 어쨌든 남자는 헛일이야.”(정영희(가명)) 이런 모습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거나,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들의 삶을 별개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은 아들들의 경우와 대비된다. 성역할과 젠더 규범으로 인해 전쟁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성별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전쟁의 피해이자 가족 수난의 상징으로 여겨진 남성의 죽음과 달리, 가족의 돌봄을 책임져 온 여성의 죽음은 애도조차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서 여성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전후 어떻게 잊혀 갔는지 살펴보는 것은 전쟁 기억의 젠더정치를 밝히는 중요한 작업이다. 한국전쟁기 노근리 사건에 의한 여성의 죽음의 맥락과 망각의 과정이 문제시될 때, 남성-아들을 넘어 여성-딸 역시 노근리 사건의 역사화 과정에서 공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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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2차 ‘위안부 소송’ 판결, 국제인권법 ‘마그나카르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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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 이상희 변호사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는 2023년 11월 23일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유족 포함 원고 16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국의 불법성과 책임을 인정하면서 원고의 청구를 그대로 인용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소송단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을 맡았던 이상희 변호사를 만나 세기의 재판이 일군 성취와 고군분투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주문. 1심판결을 취소한다. 피고(일본국)는 원고에게 '청구금액(항소금액)'란 기재 각 돈 및 이에 대한 2023년 9월 21일부터 2023년 11월 23일까지는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023년 11월 23일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부장판사 구회근)가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유족 포함 원고 16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2016년 12월 28일 김복동, 이용수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11명과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의 승계 유족 10명, 총 21명이 1인당 2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한 1차 소송 이후 8년 만에, 1차 소송이 각하된 2021년 4월 21일로부터는 약 2년 7개월 뒤 대한민국 법원이 원고 측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기념비적' 선고였다. 이 소식은 항소심 소송 원고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기뻐하는 모습과 함께 주요 뉴스로 보도됐고,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등 소송 경과를 예의주시해 온 시민사회는 일제히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에 성심껏 귀 기울여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다한 판결'이라며 서울고등법원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민변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 TF 단장을 맡아 1, 2차 소송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를 만나 이번 판결의 국내외적 의미와 함께 역사적인 판결이 있기까지 소송인단이 '수명이 닳는 듯한' 느낌으로 헤쳐 온 크고작은 고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 그리고 온전한 시민권자로 인정받은 피해자들 서울고법 판결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고 온전한 시민권자라는 확인을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희 변호사의 일성은 판결문 초반부에 명시된 내용과 또렷하게 조응한다. 서울고법이 일본 육군의 물품판매 규정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 1937.9.29. 육달陸達)」과 「영외시설규정(1943.7.18.)」, 「전시복무제요(1938.5.)」 등의 기록을 채택, '일본국이 중일전쟁 내지 태평양 전쟁을 하면서 군인들의 사기 진작 및 민원 발생 저감 등을 목적으로 위안소를 설치·운영'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불법성과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은 또 개인별 '위안부' 동원 과정과 '위안부' 생활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면서 피해자들이 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이는 당시 일본국이 비준한 국제조약이나 국내 형법에도 위배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다음으로 1차 소송의 한계를 극복한 2차 소송의 가장 빛나는 성취, 곧 '국가면제'에 대한 판단이다. 생소한 법률 용어로 '주권면제'라는 용어로도 혼용되는 국가면제는 국제관습법으로, '국가 평등 원칙에 입각해 국제법상 국가에 인정되는 법적인 면책'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주권 국가의 국가기관이나 그의 행위는 타국의 재판관할권 적용에서 면제될 수 있다. 쉽게 풀어서 주권 국가는 타국의 국내 재판에서 강제로 피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인데, 이는 대소나 강약 같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개별 주권국을 중심으로 '대등하게' 국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는 법리이기도 하다. 인권 침해, 불법 행위는 '국가면제' 불가 쟁점은 그동안 국가면제가 보편적 인권 침해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명분으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제적으로 '무력 분쟁 중에 법정지국 영토 내에서 이뤄진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를 인정하고 있으며, 강행규범 위반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 침해 여부가 재판권 존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 1차 소송 재판부의 소극적이고 사대주의적인 판단이 닿아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2차 소송에서 서울고법은 전향적인 판단을 내렸다. '법정지국 영토에서 그 국민에게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그 행위가 주권적 행위인지 여부를 묻지 않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관습법이 현재 존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한 것이다. 서울고법은,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태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다수 국가가 국내법의 입법을 통해 영토 내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점, 이탈리아를 비롯해 최근 브라질 최고재판소, 우크라이나 대법원 등에서 가해국에 대해 국가면제의 적용을 부정하는 판결을 하는 점, 국가면제와 관련된 국제법 체계가 이미 개인의 재판청구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되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관련해 이 변호사의 설명은 변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도 국가면제를 극복한 몇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만큼 국가 중심의 국제법 질서, 국제관습법이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개인의 재판청구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을 드러낸 세기적 선언이고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개개인에게 부수적인 피해라는 건 있을 수 없잖아요. 국가는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하며 실현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피해를 입었는데 국가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법률상 구제절차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판결이 인권의 관점을 넓고 깊게 확장시키는 측면에서 조금 과장하면 국제관습법의 '마그나카르타'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입니다. 번역 또 번역, 거액의 자문료… 고비고비 과정은 험난했더라 당연히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한순간도 순조롭지 않았다. 불법행위를 객관적으로 밝히고 책임을 묻는 주장, 그에 따른 손해 규모를 입증하는 것 하나하나가 원고 측 일이었다. 재판을 위해 '피고' 일본정부에 소장을 전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공시 송달을 하면서 반복적인 기피와 거부 사실을 법원에 설득한 끝에 재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재판 때마다 보도자료도 발표했다. 기사를 통해서라도 일본 정부에 재판 소식이 전해질 수 있도록, 동시에 절차적으로도 발뺌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대응이었다. '국가면제'를 둘러싼 법리 공방은 더욱 지난하고 복잡했다. 영어 외 여러 언어로 된 해외 자료와 국제 판례를 발굴하고 번역하는 일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어요. 국제적인 인권법 전문가, 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수도 없이 보냈고요. 인권 보호의 폭을 넓히고 국가면제 예외를 지지하는 국제적인 변화를 재판부에 확인시키기 위해 국내 198명을 포함, 전 세계 법률가 410명이 참여한 '세계 법률가 선언'을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피해 할머니 살아계실 때 결론 나와야 한다! 당황스러운 기억도 있다. 거액의 자문료를 요구받았을 때였다. 국제적인 법률 전문성과 경륜을 가진 변호사였기에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했다가 거액의 자문료를 원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소심 법정에서 영상으로 지지 의견을 전해준 영국 버밍엄대 법학대학원 알렉산더 오라케라쉬빌리 교수를 비롯해 연대의 목소리를 내준 세계 법률가들이 그래서 더욱 고맙다. 가장 힘든 시기는 재판이 막바지로 향할 때였다.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며 준비 서면을 마련하는데 에너지도, 시간도 역부족이었다. 재판은 공전됐다. 그렇다고 변론 기일을 늦출 수도 없었다. 밤을 새고 다들 엄청 고생을 하는데도 재판 일정까지 서면이 나오기 힘들 것 같아 연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깊었어요. 그런데 고비 때마다 다른 걱정이 훨씬 앞서는 거예요. 원고 중에 살아계신 분이 이용수 할머니 한 분이잖아요. 행여 연기했다가 슬픈 소식이 들려오면 그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하나, 안 계신 상태에서 선고가 나면 어쩌나, 다들 부담이 어마어마했어요. 온몸이 떨릴 정도로 에너지를 쏟았던 터라 서면을 접수할 때마다 수명이 닳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를 넘어 '기승전-전쟁은 안된다'는 지구적 메시지를 호소해 온 인권활동가 할머니들 생전에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브라질 판결이 우리 항소심에 영향, 이는 다시 중국에 참고 한편으로 이 변호사는 세계 각국의 법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권의 역사를 진전시켜 가는 현장을 현재진행형으로 경험 중이기도 하다. 2013년 8월에 고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 12명이 일본정부에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는 소송에 대해 2021년 1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일본측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어요. 당시 전 세계에 이슈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판례가 이듬해인 2022년 브라질 최고재판소에 영향을 미쳐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으로 침몰한 선박에 탔던 피해자의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1, 2심에서 각하됐는데, 최고재판소에서 우리 판결을 근거로 뒤집는 결정을 내린 거예요. 우리 재판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라 자부심을 느꼈죠. 그런데 다시 브라질 최고재판소 판결이 저희 항소심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난 4월 21일에는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18명의 후손이 한국의 최근 판결을 참고해 산시성 고급인민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 인권 수준을 도약시키고 진일보한 국제관습법 관행을 만드는 사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일 정부에 가시적 이행 촉구하며 '강제집행'도 검토 다만 역사적인 판결에도 한·일 두 나라 정부의 반응은 냉랭하다. 우리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실 차원에서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를 양국 간 공식 합의로서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이고, 일본 정부 또한 항소하지 않고 기존 '무대응 원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29일 민변, 정의기억연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본군'위안부'연구회, 시민모임 독립 등 시민사회는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일본국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 승소 판결 의미와 과제'를 공유했다. 승소 판결 이후 호흡을 고르고 있는 이 변호사는 향후 계획에 대해 일본군'위안부'문제 대응을 통해 일본 정부에 가시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한편 '강제집행' 절차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 전했다. 이번 소송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 또는 사기를 당해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피해 사건인 동시에 전시를 포함해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 폭력이나 인권 침해는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는 강력한 제도적 유산을 이끌어냈어요. 이는 결국 일본 사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 압력으로 연결되고 우리나라의 인권감수성 확장에도 기여하리라 믿습니다. ※ 일본국을 상대로 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 확인 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링크 :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문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인터뷰이: 이상희 글/정리: 손정미 인터뷰 일시: 2024년 4월 11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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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우익적이거나 양심적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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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 참여한 마치다 타카시 창원대 교수의 제언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연구 활동에도 참여한 일본인 마치다 타카시 교수는 자신에게 '양심적'이라는 한국인들의 감사에 때로 '공포'를 느낀다. 그 호의를 의심하거나 부정해서가 아니라 가해와 피해, '혐한 우익'과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경직된 한국사회의 이분법이 자신이 놓인 현실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활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이자 전쟁에 참여한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을 대면하는 성찰의 문제, 가해의 책임에 관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라고 토로하는 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해후의 장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기를 소망한다. 웹진 <결>은 다양한 개인 정체성 위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 역사적 경험과 기억, 그 공유에 대해 숙고를 이어가고 있는 마치다 타카시 교수의 울림 있는 목소리를 전한다. 민속학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일본어를 강의하는 원어민 교수인 나는 1972년 일본 규슈(九州) 지방에서 태어났다.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한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일본 사회가 뜨거웠던 1991년, 당시 나는 도쿄의 한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이듬해 3학년 때 관부재판이 시작됐고, 1993년 4학년 때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이(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발표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봤다. 잘 알려진 '고노담화'이다. 그리고 며칠 뒤인 1993년 8월 15일,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집권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가 전몰자 추도식전(戰歿者追悼式典)에서 최초로 아시아 국가들의 희생에 대한 일본의 가해 책임을 인정했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마침내 일본이 전후 책임을 다할 때가 되었다고 흥분했었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인 1996년 '자국의 과거사를 미화하려는 단체' 혹은 '보수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로 평가받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출범하고 그 명단에 유명한 작가와 학자, 정치인들의 이름이 오른 것을 보고 꽤 큰 충격을 받았던 사실도 떠오른다. 아버지가 겪은 전쟁, 전후 아들이 받은 반전평화수업 짐작해 보건대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 였던 것 같다. 사실 과거 일본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속에 자리한 최초의 발화자는 2005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다. 1920년생인 아버지는 1941년 육군 보병으로 비상소집돼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 자바 등지에 주둔했고 현재 파푸아뉴기니인 뉴브리튼섬 라바울(Rabaul)에서 패전을 맞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라바울로 향하는 수송선이 격침됐을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다양한 동식물을 먹는 등 급박했던 생존과 사투의 모험담이 주를 이루었고, 그 끝은 대개 "옛날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싸운 강력한 나라였는데 지금의 일본은 한심하다.", "천황의 나라는 지지 않는다고 믿고 싸웠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국가에게 사기 당했다." 같은 향수와 피해자 의식이 혼재된 회고였다. 아버지와 학교, 두 전쟁의 기억 사이에 끼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가장 먼저 여름방학 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날인 8월 9일 등교해 받았던 평화교육이 떠오른다. 복도에는 원폭 피해를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공습 등 전쟁 피해를 다룬 영화를 보는 '반전수업'이 진행됐다. 수업은 피해와 가해의 문제를 파고들지 않고,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기에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모험담과 거리가 멀었기에 하루는 학교에서 배운 반전적인 내용을 직접 묻기도 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 아들에게 '비판'받은 아버지는 귀찮아 하셨다. 짐작해 보건대 그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였던 것 같다. 가해 사실과 대면한 단카이 세대 젊은 교사들의 태도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중학교에서는 교원조합에 소속된 '단카이 세대' 교사들에게, 특히 사회과 수업에서 사상적 경향이 반영된 수업을 받았다. 이들은 교과서 내용을 넘어 제국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잔학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일본에서 '자학사관'으로 비판받게 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다만 이 젊은 교사들은 교장, 교감 등 관리직과 불화해 자주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거나 사라졌다. 사춘기에 들어선 내게 이 교사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나는 전교집회에서 당시 교칙이었던 남학생 두발 규제(반삭발)에 반발하며 "군국주의 유물이니 철폐하라"라고 연설해 전교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교장이 언론자유 남용이라며 호되게 꾸짖었지만 지금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막연하게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단카이 세대 교사도, 그들에게 충실한 중학생이었던 나도 과거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는 글로 적힌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국이나 한국 등 인접 국가와 일본 사이 국가 간 피해·가해 사실은 언론 속의 문제일 뿐 일상생활과는 별개였다.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근현대사 지식이 늘었고, 한국인 유학생 친구도 생겼다. 자연스럽게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는 뉴아카 붐 영향으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등을 읽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 사상가들은 대체로 진보적(liberal)인 성향이었기에 '과거의 가해 사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1990년대 일본에서 책을 좀 읽는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한 정치적 자세였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매년 지도교수를 따라 한국 농촌조사를 나갔다. 이때 종종 마을 노인들께 식민지 시기와 전쟁에 대한 책망 어린 말을 들었다. 당시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그래야 조사를 계속할 수 있기도 했지만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피해 할머니 앞에 정직한 인간으로 서는 일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2000년 9월 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갔다. 일본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는 내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박두리(1924~2006) 씨는 "일본 사람은 반갑지 않다"며 고개를 돌렸다. 박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 많이 오는데 아무 것도 좋아진 게 없잖아"라고도 했다. 아직 초보적인 한국어 수준이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눔의 집〉 직원은 기분 상해하지 말라며 달랬는데 기분이 나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과자 선물을 든 채 어떻게 서 있어야 하나,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그 어느 것도 나의 정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몇 시간 뒤 〈나눔의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식탁에 앉자 주방 쪽에서 박 할머니가 밥그릇을 들고 와서 내게 던지듯 건네며 "먹어"라고 했다. "할머니, 저 밥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더 먹어"라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반갑지 않은 일본인이지만 동시에 잘 먹게 생긴 청년이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이분 앞에서 표면적인 속죄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왔다고 내게 도움이 될 것도 없고 일본인을 용서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밥은 먹고 가라'는 단호한 몸의 언어, 이 작은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이분 앞에서 일본인에 남성이고,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정직한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의 나는 밥그릇을 손에 들고 어떤 표정,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정답인지를 모르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러하다. 딱 한 번 아버지에게 물었던 위안소 이야기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았지.(...)"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초청한 대학축제 '증언을 듣는 모임'에서 사회를 맡게 되었다. 입장료를 받는 행사였음에도 행사장이 꽉 찰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 행사를 통해 'VAWW-NET JAPAN(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JAPAN. 전시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과 이어졌고, 그 인연으로 같은 해 12월 도쿄 구단회관(九段會館)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됐다. 이런 활동에 관여하다가 귀향했을 때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위안소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 불쌍하게. 더러운 곳이었어. 군인들이 잔뜩 줄을 섰어. 지금 들어있는 놈이 나오기도 전에 다음 놈이 팬티를 벗을 정도로. 그런 곳이었어. 저런 데 나는 가지 않았어. 조선 남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군대에서 막노동을 했지.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면서 그놈들은 미군의 하수인 노릇을 했는데, 나도 많이 얻어맞았어. 어쩔 수 없지. 전쟁 중에는 그놈들도 내게 맞았으니까."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는 그런 것이었고, 나는 몸이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이유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부담을 느꼈다. 2001년 여름, 한국으로 유학을 온 나는 20년 이상 이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에 와서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를 자주 접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 있을 때보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 더 부담을 느끼게 됐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 그 운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에 대한 성찰의 문제였고, 피해자·생존자와 관계성 때문에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람이 전부였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에서 생활하는 나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 주변에서 이뤄지는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늘 한국 사회에서 기대하는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이 없었던 내게 2022년 창원대학교 동료가 관부재판에 관한 전시 기획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며 참여를 제안했다. 일본어 자료가 많은데 읽을 사람이 마땅히 없어 도와달라는 그의 제안에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이 문제에 관계되는 한 정치성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그 속에서 스스로 얼마나 정직할 수 있을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프로젝트 참여였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문제를 외면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진행된 지원 활동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인 이유와 다르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얼마나 정직한지, 내가 쓰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트럭 앞에 내게 보이지 않는 휠체어가 없는지 불안과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혐한 우익'과 '양심적 일본인' 사이에서 공포를 느끼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는 '역사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한국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이 있으니 역사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장면은 수없이 재연되었다. 내가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세대나 인생 내력과 관계없이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 문제 앞에서는 '가해자' 자리에 앉게 된다. '양심적 일본인'은 그 구조의 거울과도 같다. 2022년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 프로젝트와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취재 기자는 내게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고, 나는 순수하게 손사래를 쳤다. 부정하는 나의 태도를 기자는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분명 '호의적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자신이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기자가 설정한 '선악'과 '민족' 내러티브에 배치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양심적'이라고 표현하는 한국인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일본인 개개인의 '양심'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때로 공포심까지 느끼는 것은 마치 일본에는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혐한 우익'과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양심적 일본인' 두 종류밖에 없는 듯한 몰이해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을 비판할 시 곧바로 '우익'으로 라벨링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 종류는 모두 나의 속성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 사는 한국인이 그런 것처럼 일본인도 흑과 백 두 종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농담(濃淡)을 가진 회색의 삶을 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가해자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애초 정치적 보수·진보나 역사의 피해·가해로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나도 일본군 병사였던 사람의 아들이자 한국 사회에 사는 소수자이며, 지도교수를 신경 쓰는 제자이면서 학생들을 신경 쓰이게 하는 교사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그러한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전후 책임 성찰 그리고 가족사와 마주하는 일본인의 기대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길 바라는 이유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어떤 사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는 각자 고유한 문제의식과 배경이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 아닐 수가 없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90년대 전후 보상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았을 때 그들은 우선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과 마주 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가족사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전쟁 실상에 접근하고 싶은 마음, 그 죄를 씻는데 가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1990년대 전후 책임 문제에 관여해 나갔다.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새로운 해후의 장, 소통의 기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심적이거나 우익이거나 하는 이분법적 인식, 그리고 그것을 선/악으로 단순화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서로의 역사를 바라볼 시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