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적이거나 양심적이거나?

마치다 타카시

  • 게시일2024.04.29
  • 최종수정일2024.05.03

우익적이거나 양심적이거나?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 참여한
마치다 타카시 창원대 교수의 제언

[사진 1] 2000년 나눔의집을 방문할 당시 마치다 타카시(제일 왼쪽) 교수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연구 활동에도 참여한 일본인 마치다 타카시 교수는 자신에게 '양심적'이라는 한국인들의 감사에 때로 '공포'를 느낀다. 그 호의를 의심하거나 부정해서가 아니라 가해와 피해, '혐한 우익'과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경직된 한국사회의 이분법이 자신이 놓인 현실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활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이자 전쟁에 참여한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을 대면하는 성찰의 문제, 가해의 책임에 관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라고 토로하는 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해후의 장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기를 소망한다. 웹진 <결>은 다양한 개인 정체성 위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 역사적 경험과 기억, 그 공유에 대해 숙고를 이어가고 있는 마치다 타카시 교수의 울림 있는 목소리를 전한다. 

 

민속학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일본어를 강의하는 원어민 교수인 나는 1972년 일본 규슈(九州) 지방에서 태어났다.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한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일본 사회가 뜨거웠던 1991년, 당시 나는 도쿄의 한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이듬해 3학년 때 관부재판이 시작됐고, 1993년 4학년 때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이(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발표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봤다. 잘 알려진 ' 고노담화'이다. 

그리고 며칠 뒤인 1993년 8월 15일,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집권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가 전몰자 추도식전(戰歿者追悼式典)에서 최초로 아시아 국가들의 희생에 대한 일본의 가해 책임을 인정했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마침내 일본이 전후 책임을 다할 때가 되었다고 흥분했었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인 1996년 '자국의 과거사를 미화하려는 단체' 혹은 '보수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로 평가받는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출범하고 그 명단에 유명한 작가와 학자, 정치인들의 이름이 오른 것을 보고 꽤 큰 충격을 받았던 사실도 떠오른다.

[사진 2] 마치다 타카시 교수

 

아버지가 겪은 전쟁, 전후 아들이 받은 반전평화수업 

짐작해 보건대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
였던 것 같다.

사실 과거 일본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속에 자리한 최초의 발화자는 2005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다. 1920년생인 아버지는 1941년 육군 보병으로 비상소집돼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 자바 등지에 주둔했고 현재 파푸아뉴기니인 뉴브리튼섬 라바울(Rabaul)에서 패전을 맞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라바울로 향하는 수송선이 격침됐을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다양한 동식물을 먹는 등 급박했던 생존과 사투의 모험담이 주를 이루었고, 그 끝은 대개 "옛날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싸운 강력한 나라였는데 지금의 일본은 한심하다.", "천황의 나라는 지지 않는다고 믿고 싸웠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국가에게 사기 당했다." 같은 향수와 피해자 의식이 혼재된 회고였다.

아버지와 학교, 두 전쟁의 기억 사이에 끼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가장 먼저 여름방학 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날인 8월 9일 등교해 받았던 평화교육이 떠오른다. 복도에는 원폭 피해를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공습 등 전쟁 피해를 다룬 영화를 보는 '반전수업'이 진행됐다. 수업은 피해와 가해의 문제를 파고들지 않고,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기에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모험담과 거리가 멀었기에 하루는 학교에서 배운 반전적인 내용을 직접 묻기도 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 아들에게 '비판'받은 아버지는 귀찮아 하셨다. 짐작해 보건대 그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였던 것 같다.


가해 사실과 대면한 단카이 세대 젊은 교사들의 태도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중학교에서는 교원조합에 소속된 ' 단카이 세대' 교사들에게, 특히 사회과 수업에서 사상적 경향이 반영된 수업을 받았다. 이들은 교과서 내용을 넘어 제국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잔학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일본에서 ' 자학사관'으로 비판받게 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다만 이 젊은 교사들은 교장, 교감 등 관리직과 불화해 자주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거나 사라졌다. 사춘기에 들어선 내게 이 교사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나는 전교집회에서 당시 교칙이었던 남학생 두발 규제(반삭발)에 반발하며 "군국주의 유물이니 철폐하라"라고 연설해 전교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교장이 언론자유 남용이라며 호되게 꾸짖었지만 지금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막연하게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단카이 세대 교사도, 그들에게 충실한 중학생이었던 나도 과거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는 글로 적힌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국이나 한국 등 인접 국가와 일본 사이 국가 간 피해·가해 사실은 언론 속의 문제일 뿐 일상생활과는 별개였다.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근현대사 지식이 늘었고, 한국인 유학생 친구도 생겼다. 자연스럽게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는 뉴아카 붐 영향으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등을 읽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 사상가들은 대체로 진보적(liberal)인 성향이었기에 '과거의 가해 사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1990년대 일본에서 책을 좀 읽는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한 정치적 자세였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매년 지도교수를 따라 한국 농촌조사를 나갔다. 이때 종종 마을 노인들께 식민지 시기와 전쟁에 대한 책망 어린 말을 들었다. 당시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그래야 조사를 계속할 수 있기도 했지만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피해 할머니 앞에 정직한 인간으로 서는 일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2000년 9월 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갔다. 일본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는 내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박두리(1924~2006) 씨는 "일본 사람은 반갑지 않다"며 고개를 돌렸다. 박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 많이 오는데 아무 것도 좋아진 게 없잖아"라고도 했다. 아직 초보적인 한국어 수준이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눔의 집〉 직원은 기분 상해하지 말라며 달랬는데 기분이 나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과자 선물을 든 채 어떻게 서 있어야 하나,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그 어느 것도 나의 정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몇 시간 뒤 〈나눔의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식탁에 앉자 주방 쪽에서 박 할머니가 밥그릇을 들고 와서 내게 던지듯 건네며 "먹어"라고 했다. "할머니, 저 밥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더 먹어"라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반갑지 않은 일본인이지만 동시에 잘 먹게 생긴 청년이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이분 앞에서 표면적인 속죄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왔다고 내게 도움이 될 것도 없고 일본인을 용서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밥은 먹고 가라'는 단호한 몸의 언어, 이 작은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이분 앞에서 일본인에 남성이고,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정직한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의 나는 밥그릇을 손에 들고 어떤 표정,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정답인지를 모르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러하다.
 

[사진 3] 2000년 나눔의집을 방문할 당시 마치다 타카시(제일 왼쪽) 교수

 

딱 한 번 아버지에게 물었던 위안소 이야기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았지.(...)"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초청한 대학축제 '증언을 듣는 모임'에서 사회를 맡게 되었다. 입장료를 받는 행사였음에도 행사장이 꽉 찰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 행사를 통해 'VAWW-NET JAPAN(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JAPAN. 전시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과 이어졌고, 그 인연으로 같은 해 12월 도쿄 구단회관(九段會館)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됐다. 

이런 활동에 관여하다가 귀향했을 때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위안소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 불쌍하게. 더러운 곳이었어. 군인들이 잔뜩 줄을 섰어. 지금 들어있는 놈이 나오기도 전에 다음 놈이 팬티를 벗을 정도로. 그런 곳이었어. 저런 데 나는 가지 않았어. 조선 남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군대에서 막노동을 했지.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면서 그놈들은 미군의 하수인 노릇을 했는데, 나도 많이 얻어맞았어. 어쩔 수 없지. 전쟁 중에는 그놈들도 내게 맞았으니까."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는 그런 것이었고, 나는 몸이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이유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부담을 느꼈다.

2001년 여름, 한국으로 유학을 온 나는 20년 이상 이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에 와서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를 자주 접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 있을 때보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 더 부담을 느끼게 됐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 그 운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에 대한 성찰의 문제였고, 피해자·생존자와 관계성 때문에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람이 전부였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에서 생활하는 나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 주변에서 이뤄지는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늘 한국 사회에서 기대하는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이 없었던 내게 2022년 창원대학교 동료가 관부재판에 관한 전시 기획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며 참여를 제안했다. 일본어 자료가 많은데 읽을 사람이 마땅히 없어 도와달라는 그의 제안에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이 문제에 관계되는 한 정치성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그 속에서 스스로 얼마나 정직할 수 있을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프로젝트 참여였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문제를 외면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진행된 지원 활동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인 이유와 다르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얼마나 정직한지, 내가 쓰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트럭 앞에 내게 보이지 않는 휠체어가 없는지 불안과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혐한 우익'과 '양심적 일본인' 사이에서 공포를 느끼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는 '역사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한국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이 있으니 역사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장면은 수없이 재연되었다. 내가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세대나 인생 내력과 관계없이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 문제 앞에서는 '가해자' 자리에 앉게 된다. '양심적 일본인'은 그 구조의 거울과도 같다. 

2022년 '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 프로젝트와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취재 기자는 내게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고, 나는 순수하게 손사래를 쳤다. 부정하는 나의 태도를 기자는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분명 '호의적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자신이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기자가 설정한 '선악'과 '민족' 내러티브에 배치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양심적'이라고 표현하는 한국인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일본인 개개인의 '양심'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때로 공포심까지 느끼는 것은 마치 일본에는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혐한 우익'과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양심적 일본인' 두 종류밖에 없는 듯한 몰이해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을 비판할 시 곧바로 '우익'으로 라벨링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 종류는 모두 나의 속성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 사는 한국인이 그런 것처럼 일본인도 흑과 백 두 종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농담(濃淡)을 가진 회색의 삶을 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가해자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애초 정치적 보수·진보나 역사의 피해·가해로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나도 일본군 병사였던 사람의 아들이자 한국 사회에 사는 소수자이며, 지도교수를 신경 쓰는 제자이면서 학생들을 신경 쓰이게 하는 교사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그러한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4] 회의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는 마치다 타카시(가운데) 교수

 

전후 책임 성찰 그리고 가족사와 마주하는 일본인의 기대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길 바라는 이유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어떤 사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는 각자 고유한 문제의식과 배경이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 아닐 수가 없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90년대 전후 보상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았을 때 그들은 우선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과 마주 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가족사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전쟁 실상에 접근하고 싶은 마음, 그 죄를 씻는데 가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1990년대 전후 책임 문제에 관여해 나갔다.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새로운 해후의 장, 소통의 기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심적이거나 우익이거나 하는 이분법적 인식, 그리고 그것을 선/악으로 단순화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서로의 역사를 바라볼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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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마치다 타카시

창원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원어민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며 민속학 연구자이기도 하다. 197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학생 시절인 1997년 일본 우익 단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담론을 비판하는 논집을 대학원생들과 출판하고, 2000년에는 대학교 축제 행사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 모임을 개최하기도 한 필자는 2017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22년에는 창원대를 거점으로 진행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민간기록물 조사·전시: 경상도 지역〉 프로젝트에 공동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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