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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싱가포르 일본군'위안부'들의 침묵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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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일본군'위안부'들의 침묵에 대한 기록 그동안 싱가포르에는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대만인, 인도네시아 등 타지역에서 끌려온 '위안부'는 존재했지만,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는 없다고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에서는 전후 다른 아시아 국가의 피해 생존자들처럼 증언을 하고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필리핀이나 이웃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자국 출신의 성노예 피해 여성이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그 배경에는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 피해 여성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해 온 정치가 리콴유의 역할이 있었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1965~1990)에 이어 내각 선임장관(1990~2004)까지 지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리콴유의 견해는 싱가포르 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한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최근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The Comfort Women of Singapore in History and Memory)』을 집필하여 주목받은 싱가포르 난양기술대학교 케빈 블랙번 교수의 기고를 통해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형성된 역사적 맥락과 싱가포르 내 '위안부' 문제의 현황에 대해 짚어본다. 내가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을 집필한 이유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으면 그들의 침묵이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침묵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점령기를 겪은 싱가포르 여성들의 기억에는 일본군이 '위안소'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불렀던 공간에 끌려가 성노예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새겨져 있다. 침묵의 벽 2000년대 초, 나는 난양기술대 산하의 국립교육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역 사회를 대상으로 대규모 구술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나 증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가까운 동성 친구, 자매, 사촌, 이웃들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그들이 아는 피해 여성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어떻게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납치된 후 위안소로 보내져 성적인 노예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다시 20년이 지나 그 여성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그들의 존재와 삶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과거 인터뷰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자신의 과거를 나서서 밝힌 여성이 있었더라도 정의 구현과 배상을 받았으리라 확언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 여성들 역시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배상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설득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딜레마였다. 1990년대 싱가포르 정부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 듯 보였으며, 그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 정부의 입장은 싱가포르 내 '위안부'는 한국인과 일본인이었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위안부' 논란을 싱가포르와 관련이 없는 논쟁적인 역사 문제로 보았고, 이를 싱가포르 내부에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 이런 태도는 2013년 한국의 피해 생존자들이 싱가포르 내 예전 위안소 자리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하려 했을 때 불허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싱가포르 국립아카이브 구술사센터가 1981년부터 수집한 방대한 일본군 점령기 구술 기록 중에는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의 증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술사 연구자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이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014년 세인트 앤드루스 중등학교의 학생 200명이 수행한 대규모 구술사 프로젝트에서도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이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을 거부했다. 1990년대에 영자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스(Straits Times)>의 팬밍옌, 말레이어 신문 <베리타 하리안(Berita Harian)>의 하니 무스타파, 중문 신문 <연합조보(Lianhe Zaobao)>의 훠유에웨이 등 기자들도 이 여성들을 찾았지만 침묵의 벽에 부딪혔다. 여성들은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고자 했고, 성적 과거를 공공의 판단에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남겨진 증언들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들이 죽을 때까지 지킨 이 침묵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이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볼 방법은 있다. 싱가포르 국립기록원(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에 이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남긴 증언을 통해서다. 젊은 여성들이 성폭행 당하고 집에서 끌려간 뒤에 위안소에서 성 노예로 전락했다는 놀라운 구술 증언도 있다. 국립교육원의 구술사 컬렉션에는 일본군에 점령된 상태였던 1942년 당시 25세였던 주부 웡와이콴의 증언이 있다. 그녀는 세랑군 지역의 테라스 하우스에 두 자녀와 살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놈들 말이야, '일본 귀신들(日鬼. 일본군)' 말이야, 진짜 사람도 아니었어. 젊은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남의 집에 함부로 막 들어오고, 길 가는 애들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잡아갔다니까. 글쎄, 중국에서처럼 애들을 겁탈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어. 운 좋은 애들은 며칠 만에 풀려나긴 했는데, 얼굴이 넋 나간 것처럼 변해 있더라고. 어떤 애들은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군대 기지로 끌려가서 '위안부'가 됐다는 얘기도 들었어. 그래도 다행인 건, 결혼한 여자들은 거의 안 잡아갔다는 거야. 우리 시누이가 그때 18살이었거든. 아직 어리고 예쁘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왜놈들 손아귀에 넘어갈까 봐 옆집 총각이랑 급하게 결혼시켰잖아. 불쌍한 우리 시누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억지로 결혼해서, 결혼식도 제대로 못 올리고…. " (국립교육원 구술사 컬렉션의 웡와이콴 증언) 한편, 강제로 끌려가지 않고 저항한 여성의 증언도 있다. 광둥 출신의 '고급' 창부였던 호콰이민의 구술에 따르면, 일본군은 중국인 협력자와 함께 차이나타운에 있는 그녀의 성매매 업소에 찾아와 자신과 또 다른 '고급' 창부에게 '위안부'가 될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호콰이민은 자신이 속해 있던 성매매 업소 주인 '마담'의 도움을 받아 두 명의 '하급' 창부들에게 자신을 대신해 가도록 설득했다. 대신 끌려간 두 여성은 나중에 말라야의 위안소가 있던 군기지에서 폭발 사건이 발생하자 혼란한 틈을 타 도망쳐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차이나타운에서는 50명의 '고급' 광둥계 창부들이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으며, 그 중 20명은 말레이의 타이핑으로, 30명은 태국으로 보내졌다. 지역 주민 구술사 인터뷰는 '위안부'들이 있었던 위안소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역 증언들은 일본 군인들이 회고록에 남긴 증언과도 일치한다. 싱가포르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위안부'들의 존재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 여성들이 침묵한 배경은 전후 초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싱가포르에 있던 일본인과 조선인 출신 '위안부'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들은 과거를 숨기고 본국의 가부장적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구술을 보면 '위안부' 이력을 끝까지 숨기는 데 성공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역 출신 싱가포르 여성들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쉽게 과거를 숨길 수 없었다. N.I. 로우와 H.M. 청이 1947년에 출간한 일본 점령기 관련 초기 저서 『이 싱가포르 [우리 도시의 끔찍한 밤] (This Singapore [Our City of Dreadful Night])』에는 인도네시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가 싱가포르로 돌아온 지역 '위안부'들이 느낀 두려움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1946년 3월 6일, 일본의 패망 6개월 후 15명의 소녀들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이들은 자바에서 4년 가까이 '위안부'로 지냈다. 이들 중 한 명은 부두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에게 '아버지가 저를 받아줄까요?' 라고 물었다."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들은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성매매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전쟁 전보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어났다. 일부는 거리에서 성매매를 했고, 이들의 존재는 시민들의 눈에 쉽게 띄었다. 영국 식민 정부는 이들을 체포해 소녀직업훈련학교로 보내 가정부나 재봉사, 또는 가정주부가 될 수 있도록 교육했다. 영국군 군정과 초기 사회복지부의 기록에는 이 과정이 문서화되어 있다. '재활'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은 과거에 대해 침묵을 지켰고, 만약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면 곧바로 배척당했을 가부장적 사회에 재통합되었다. 1950년에 이르러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는 공적 논의와 식민지 정부 및 사회복지부의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1991년 12월,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논란이 되면서 이들은 다시 공론의 장에 등장했다. 기자들이 '위안부'의 존재 여부를 묻기 시작했으나 누구도 피해 생존자를 찾아내어 증언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1992년 2월, 싱가포르 전 총리이자 내각의 일원이었던 리콴유는 일본의 청중들에게 한국인 '위안부'들 덕분에 '싱가포르 소녀들이 정조를 지켰다'며, 싱가포르 여성은 '위안부'로 동원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처럼 싱가포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며 나섰던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랐다. 한국에는 강력한 페미니즘 운동과 비정부조직들이 있어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정의 구현과 배상 요구를 지원하고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정부나 사회 모두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공감이 거의 없었다. 강력한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취약한 시민 사회로 특징되는 싱가포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운동 조직이나 비정부기구들에 의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은 사실을 밝힐 경우 가부장적인 싱가포르 사회에서 성매매와 관련된 낙인이 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싱가포르 정부의 태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 첫 번째 소녀상을 세우고 난 뒤, 싱가포르의 과거 위안소 자리에 두 번째 소녀상을 세우고자 했을 때도 잘 드러났다. '위안부' 문제가 엄격하게 통제된 싱가포르 시민 사회에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워 소녀상 설치를 전면 불허한 것이다. 2013년 1월 30일의 이 불허 결정은 싱가포르의 국가 문화 유산 기관을 감독하는 정부 부처인 문화·지역사회·청년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싱가포르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자국의 시민 사회에 들여오지 않으려는 의도만은 분명했다. 과거 위안소로 쓰인 상가 건물, 최초로 보존 대상으로 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와 역사 유산 관련 영역에서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국가 통제 하에 있던 싱가포르 방송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전쟁 일기 (War Diary)>에 처음으로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가 등장했다. '위안부' 역할은 떠오르던 배우 피오나 시에가 맡았다. 2002년, 청팍옌 박사는 자란 주롱 케칠에 위치한 자신의 진료소이자 과거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이 예전에 위안소로 사용됐다는 이유로 보존 대상으로 지정받는 데 성공했다. 청 박사는 유산 관리 기관에 제출한 신청서에 1930년대에 그의 가족이 지은 연립 상가 건물이 위안소로 쓰였던 점을 강조했다. 건물 일부가 과거 위안소였다는 이유로 보존 대상으로 선정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같은 해, 말라야 지역의 '위안부'의 삶을 묘사해 크게 호평받은 말레이어 연극 <내 인생 이야기(Hayat Hayatie)>는 현지 '위안부'를 다룬 첫 번째 연극이었다. 2010년대와 2020년대에 접어들며 거의 모든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대중의 관심은 지속되었고 이는 문학 작품에도 반영됐다. 2019년 리징징은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를 주제로 한 소설 『우리는 어떻게 사라졌는가(How We Disappeared)』를 출간해 큰 찬사를 받았다. 또 2023년에는 나의 책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이 싱가포르 도서상 비소설 부문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싱가포르인들은 특히 청팍옌 박사의 과거 가족 소유 상가가 있는 자란 주롱 케칠과 같은 싱가포르 내 위안소 유적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유명 유산 해설사 크리스 응은 이런 위안소 유적지를 포함한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성산업 역사와 홍등가를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 전문가인 그는 해외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인들은 또 서울 외곽에 위치한 '나눔의 집'과 같은 '위안부' 관련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앞으로 싱가포르에도 (공공 장소에는 불가하겠지만) 소녀상이 세워질 것이다. 아마 매주 시위가 열리는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는 달리 조용히 기념할 수 있는 구석진 곳에 설치될 것이다. 청 박사의 상가 건물과 같은 사유지에 세워질 가능성이 높으며, '위안부' 박물관이 설립되거나 기존 박물관에서 '위안부' 관련 전시를 확대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자 하는 싱가포르인들은 실제로 해외로 나가고 있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 점차 확산되는 '위안부' 유산 활동 결론적으로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풀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싱가포르 '위안부'와 관련된 많은 역사적 자료와 존재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있고,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싱가포르의 '문화와 유산' 활동에서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에 점령당한 아시아 국가들처럼 증언에 나서는 이는 없다. 이는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들의 침묵은 그들이 살아온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와 엄격하게 통제된 시민 사회를 유지하려는 싱가포르 정부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제사회에 나타난 '위안부' 논란이 싱가포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아 왔다. 만약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가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며 나섰다면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성매매와 관련된 낙인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당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피해 여성들은 침묵을 선택한 것이고, 이러한 결정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소설, 드라마, 유산 투어, 박물관 전시와 같은 대중문화와 유산 활동을 통해 기릴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점차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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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자료해제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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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인 회고록 읽기]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 이용'이 의미하는 것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 군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세세하게 상기하며 자유롭게 집필한 많은 회고록을 남겼다.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 '목숨의 세탁소', '공동변소', 안정제, 권리, 남자가 되는 과정…. 회고록에 남긴 이들의 서술을 통해 그들에게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나 '위안소'에 관해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특히 전 군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유롭게 집필한 회고록에는 그들의 적나라한 생각이 드러난다. 일본에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는 1990년대부터 군인들이 펴낸 회고록을 꾸준히 조사해 '위안소'나 '위안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사례를 1,000권 가량 발견한 바 있다. 필자는 오래 전 '위안소' 앞에서 웃음을 지으며 줄을 선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을 보고 궁금했다. 힘없는 여성들이 거듭되는 성적 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성욕을 참을 수 없는 건가? 전쟁터에서 계속된 싸움이 인간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가? 그런데 회고록에서 관련 서술들을 연구하다가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것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군인 회고록 중 위안소 이용에 관한 서술에 주목해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다. 위안소에 갈 수 있는 권리 우선 위안소에는 어떤 군인들이 갈 수 있었을까. 회고록에는 초년병은 가기 어려웠다는 서술이 많다.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고, 선배 병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이년병이 되고 후배가 생기면서 할 일이 줄고, 눈치 볼 선배도 적어지면서 위안소에 가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이년병 이상의 군인 대부분은 당연한 듯 위안소에 다니게 된다.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에서 종군했던 일반 병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남자만 있는 매몰차고 흥취가 없는 군대 생활에서, 게다가 내일도 모르는 목숨이기 때문에 외출하는 날 찾는 위안소는 모두에게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따뜻한 정서가 있는 장소였으며, 목숨의 세탁소이기도 하여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捜三十二会, 1978: 175-176)." 1937년 중국 중부지역 허베이성(河北省) 부근에 주둔했던 나가이 미치야스(長井通泰)는 다른 표현으로 '위안소'를 말한다. "우리들은 이 작은 집을 '공동변소'라고 부르고, '공동변소에 갔다온다'고 말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필수 불가결한 배설 행위로 본 것이다. 내일 전투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에게는 안정제와 같은 의미에서 필요했을지도 모르고, 오히려 일본군은 울적함을 발산하는 장소로 이곳을 장려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고향에 약혼자가 있는 사람조차 당연하게 가는 분위기가 되었다(央巧友の会, 1973: 108)." 공동변소, 배설 행위, 안정제라는 표현은 모두 위안소가 군인들의 불안한 마음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장소로 기능했다는 것을 거침없이 고백하고 있다. 이는 위안소 여성들을 마냥 '변기'로 취급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군에서 콘돔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위안소로 향하는 모습을 기록한 군인들도 많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에 중국 상하이 부근 하이먼(海門)이라는 지역에 있었던 오사다 가즈오미(長田一臣)는 위안소에 간 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위안소 사용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휴일에 한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할당된 병사들은 위병소에서 점호를 받아 이름을 확인하고 '사크(콘돔-인용자)'를 받는다. 'ㅇㅇ상등병 이하 ㅇ명, 지금부터 위안소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보고하면 '응, 잘하고 와라!'라고 사령이 격려해주고 대열을 짜서 영내를 나가는데, 이럴 때는 칼을 휴대할 필요없이 무방비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겨우 나에게도 그날이 왔다. 위안소에 갈지 말지는 자유 의지이다. 여기에 있다는 것은 오사다 이등병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長田,2001: 167)." 대열을 짜서 위안소로 향하는 군인 행렬의 일원이었던 오사다 병사는 본인의 행위에 대해 '위안소 행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썼다. 주저 없이 위안소에 다닌 병사들이 많았고, 대부분 의심없이 즐겼다. 즉 '내일도 모르는' 나날 속에 있었던 병사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나 혜택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그런데 모든 군인이 처음부터 '위안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군인들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입대한 경우가 많았고, 성 경험이 없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하여 스스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럴 때 동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신해 위안소에 갈 채비를 해준 것이다. 예컨대 중국 중부지역 산둥성(山東省) 짜오좡(棗荘)에 주둔한 어떤 병사(이름 미상)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당시 상황을 남겼다. "짜오좡에는 위안소도 있고 (동료들이 나에게–인용자) 동정을 버리도록 억지로 집어넣어 밖에서 문을 잠궈버린 곤란한 일이 있었다(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269)." 경리부 간부 후보생이던 니시카와 히로시(西川浩)는 교관에게 위안소에 가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교관이 명령했다.-인용자) '너희 중에 아직 여자를 모르는 놈 손 들어봐!' 간부 후보생 20명 중 손을 드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국군(일본군-인용자)의 간부가 되려는 놈은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전우들이 도와줘라. 다음 외출 때에는 남자가 되게 하라." 그래서 난리가 났다. (전우들은–인용자)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 식사 동안 소란스러웠다. 이치리키(一力)의 모모코(桃子)가 좋다던지, 아사히로(朝日楼)의 하루고마(春駒)가 좋다던지, 시노노메의 폰타를 추천한다는 등 소란스러웠다. 이제 다음 일요일에는 산 외에 있는 병료(兵寮)에 모두 다 같이 가서 마실 줄 모르는 술을 억지로 먹이고 지닝(鶏寧) 거리에 나가 모두 삐야(위안소 -인용자)에 직행한다. 나에게는 순한 애가 좋다며 아케보노의 기요코(清子)로 결정됐고, '돌격일번(일본군이 사용했던 콘돔 이름 -인용자)'이 손에 쥐어져 방으로 들여보내졌다. 쓸데없이 참견하는 놈이 있어 합판으로 만들어진 문틈으로 엿보면서 '야, 빨리 바지 내려', '맞다, 좀더 힘을 줘'라고 시끄럽게 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21년 동안 지켜온 동정을 버렸다. 그래서 무링강(穆稜河)에 가까운 찻집 에투알(エトワール)에서 축배를 들었다. 월요일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정렬할 때 나와 다른 2명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교관에게 보고했다. '교관님! 니시카와 히로시 외 2명은 어젯밤 훌륭히 남자가 되었습니다. 삼가 보고하겠습니다. 경례!' '훌륭히? 축하한다.'(西川, 1985: 50-51)" 상관이나 동료들, 그리고 본인들도 위안소에 '억지로 갇혀 불편한' 척을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위안소에 가서 여성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은 '훌륭한 남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성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명분'까지 제공하며 위안소에 보냈을까. 미국의 젠더학 및 비판 이론 분야 학자인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이 제시한 '동성사회적(homosoci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남성들은 함께 모여 있는 동안 동성애적 욕망을 억압하고 동성사회적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여성을 거래한다. 이를 통해 남성들은 서로가 사회성이 있음을 확인하는데, 이때 여성들은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대상화된 여성을 거래하는 것을 매개로 남성 간 연대는 강해진다. 연대감이 필요했던 군대에서 위안소라는 공간과 대상화된 여성들의 존재가 필요했던 이유이다.. 죽음의 공포 달래기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서도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군인도 존재했다. 이들은 군대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대부분 군인들이 배워 익힌 동성사회성 규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하게 다짐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통렬하게 느꼈을 때 그 마음이 무너졌다고 토로하는 병사도 있다. "나는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시야(西椏) 위안소의 앞을 지나가도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 부상병을 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 몸', 나도 인간인 이상 죽기 전에 한번 여자의 몸을 보고 싶다! 작전을 나와서 수개월 동안 받은 급여도 그대로 있다. 한번 보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위안소 입구에 들어갔다(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141)." "초년병이나 이년병들이 '니시무라(西村) 상등병은 고집이 세네. 남자가 맞냐'라고 놀리고, 고참병은 이전부터 빈번하게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선배 전우가 하나의 탄알로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왔는데, 한 번에 죽지 않고 부상을 당해 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경우 후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나는 위안소 여성들이 돈을 벌러 오는 줄 알고 있었고, 역시 다른 사람만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小川, 2005: 101)." 이들이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를 주목해 보자. 그들은 '결혼할 때까지는 동정으로 살기' 원했다거나 '순결을 지킨다는 이유로 위안소에 가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남자 청소년들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유곽에 가는 것을 금기시하는 교육을 받았다. 교육 관계자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출세하고 싶다면 결혼하기 전까지 성병에 걸리면 안 된다고 지도했고, 입대 때는 성병 검사를 엄격하게 실시했다. 즉 성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남성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교육받았으며, 그 교육을 잘 따른 군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규범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행복한 가정이나 출세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위안소에 가지 않겠다는 다짐도 무너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회고록을 들여다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이용한 행위의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는 일을 '내일도 모르는' 생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대체하는 선택이자 권리로 받아들였다. 또 많은 군인들은 위안소에 가지 않는 동료가 있는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 동료들을 설득하고 회유해 위안소 이용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때 위안소에서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은 군인들의 질서 유지와 관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출세를 위해 성병 예방을 실천하던 병사들도 죽음을 앞두고는 위안소로 향했다. 여기서도 위안소 여성들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한 도구로만 간주되었다. 결국 '위안소'에 간다는 것은 군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동성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군대를 보다 강고한 조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위안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잘 싸우도록 만들었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군인들을 잘 관리해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인용 문헌 - 央巧友の会, 1973, 『白い星』, 私家版. - 小川健次郎ほか, 2005, 『語り継ごう元戦士たちの証言』, リープル出版. - 長田一臣, 2001, 『一陣の風』, 新潮社. - 近衛歩兵第五連隊史編集委員会, 1990, 『近衛歩兵第五連隊史:上巻』, 私家版. - 捜三十二会, 1978, 『黄塵:捜索第三十二連隊第二中隊史』, 私家版. - 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の集い事務局, 1980, 『山と湖と黄塵を征く:谷四二〇五部隊第一中隊史』私家版. - 西川浩, 1985, 『私の大東亜戦記』, 私家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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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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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본 일제말기 청년들의 해방 이후 삶의 향방 1970년대 중반 신문에 연재된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이후 TV드라마와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의 바탕에는 '위안부'를 성애화하여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는 당대의 잘못된 인식이 작용하였음은 그간 많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한계에 더하여 국문학자 이지은은 이 소설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이 해방 이후 젠더에 따라 어떻게 다른 경험을 하였는지를 추적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전장(戰場)의 식민지 청년들 한국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윤정옥은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의 소식을 '학도병(학병)'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1] 여기서 '학병'이란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제'(1943.10 공포)로 인해 사실상 '강제' 입대한 학생들로, 이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전장의 병사이자, 그녀들의 소식을 고국에 전해준 동포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병과 '위안부'는 서로 다른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많은 학병들이 전장에서 희생되었으나, 귀환한 학병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그룹으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귀환 학병들에겐 '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따라서 공동의 과업에 참여한 이들은 실제 학병 징집자든, 기피자든, 면제자든 할 것 없이 모두 '학병 세대'로 포괄될 수 있었다.[2] 반면, 귀환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생활고를 면치 못하였으며, 심지어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위안소 생활을 전시 성폭력의 '피해'로 말할 수 있는 공론장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할 사회적 계기도,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다.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일간스포츠』, 1975.10.1~1981.3.2.)[3]는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 즉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과 6·25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다른 역사적‧사회적 위치를 부여받는지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텍스트다. TV드라마,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한국 사회에 '윤여옥'이라는 대표적인 '위안부' 상(像)을 남긴 「여명의 눈동자」는 연재 중에 단행본이 출간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소설의 인기가 상당 부분 여성 섹슈얼리티를 외설적으로 소비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글은 소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한 다음, 소설이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위안부'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부터 탈각되었는지 그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본다. 제국의 폭력이 만든 '학병-위안부'의 연대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로 차출된 여옥과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징집된 대치, 하림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장구한 서사의 첫머리를 시작한다. 이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부대를 따라 전선을 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소설에서 '여옥-대치', '여옥-하림'은 모두 제국의 권력 장치 아래에서 성적 관계를 맺게 된다. 먼저, 대치의 경우 고참의 강요로 위안소를 찾았다가 '위안부'가 된 여옥을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연민을 품은 두 사람은 위안소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 한편, 여옥이 하림과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일제의 감옥소 안이다. 사이판에서 포로로 붙잡힌 여옥과 하림은 미군 OSS 요원이 되고, 이후 미군의 지시 하에 조선 독립을 위한 공작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경찰은 고문의 강도를 높이다 급기야 여옥과 하림에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명의 눈동자」의 관음증적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학병과 '위안부'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동류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다. 소설은 학병과 '위안부'가 위안소나 감옥과 같은 제국의 폭력장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연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 건설의 사명과 대결 구도의 재배치 그렇다면 제국이라는 적대항이 없어진 뒤에도 학병과 '위안부'는 연대할 수 있을까. 해방공간으로 접어들면서 「여명의 눈동자」는 독립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국민국가 건설을 주도해 나갈 만한 엘리트 집단이기도 했거니와,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군에서 탈영한 학병들은 중국군이나 광복군 등에 합류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도덕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여명의 눈동자」 또한 학병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하림과 대치의 항일 무장 투쟁 행적을 강조한다. 대치가 중국 국민당, 공산당 군대를 두루 거쳐 팔로군 내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한다면, 하림은 미군 OSS 요원으로서 해방 직전 경성으로 침투한다. 이후 이들은 해방 공간의 주요 사건들, 이를 테면 각종 암살 사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9월총파업(1946), 4.3항쟁(1948), 여순사건(1948), 지리산 빨치산 투쟁(1951) 등에서 매번 대결하게 된다. 남한에서 벌어진 좌우 갈등에서 대치는 빨치산 수장으로, 하림은 진압군 대장으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은 해방 공간의 갈등과 대립을 '학병 vs 학병'의 구도로 재배치함으로써 달성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제주 4.3항쟁에서 대치와 하림의 대결이다. 소설은 무장대 총사령관과 진압 사령관의 협상, 토벌대 사령관의 피살사건 등 당대 알려진 4.3사건의 전개를 유사하게 따라가면서도, 일본군 출신의 토벌대 사령관들을 탈영 학병 출신의 하림으로 대체한다.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대유격전의 경험을 쌓은 일본군 출신 방공(防共) 전사들을 제주도와 지리산으로 파견했다.[4]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제주 4.3사건을 둘러싼 해방공간의 갈등 구도를 대치와 하림, 즉 '학병 vs. 학병'으로 재배치한다. 미소 군정과 남북 단독 정부의 수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신제국의 점령지가 된 약소민족의 설움으로, 혹은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갈등으로 서사화될 수는 있지만, '해방' 공간에서조차 '일본군 출신의 군·경 vs 학병이 지휘하는 무장대'의 대결로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하림과 함께 남쪽의 편에 서 있는 「여명의 눈동자」의 입장에서 '학병이 이끄는 무장대'와 대결하는 남쪽 세력이 일본군 출신의 군부여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제국-식민지/점령지'의 대결 구도가 재배치되고 국민국가 건설이 역사적 사명으로 주어지면서, 해방 공간에서는 '학병-위안부'의 연대 대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학병 간의 갈등이 전면화된다. 이와 같은 서사 전략은 식민지 역사 및 친일 잔재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하지만, 남한 통치체제 내부에 존속한 식민의 잔재는 은폐하는 우를 범한다. 여자의 운명과 역사로부터의 배제 혹은 초월 해방 공간이 학병 사이의 대결로 재편되었다면, 여기에서 누락된 '위안부'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일까. 학병과 '위안부'가 제국의 폭력 속에서 연대를 형성하였다면, 해방 공간에서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하였을까. 해방 직후 대치는 여옥을 식민지 역사가 빚은 "대표적인 비운의 여성"이자 "치욕스런 역사의 잔영"이라 여기며, 안타깝지만 새 시대의 그늘에 "숨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5] 반면, 하림이 보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전선에 끌려갔다가 아이까지 낳아 살아 돌아온 여옥은 그야말로 "하나의 신화"이다.[6]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생명력의 상징인 것이다. 얼핏 대치와 하림은 정반대의 시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군 '위안부'를 수치로 여기는 쪽이나, 민족의 신화로 여기며 보호하려는 쪽이나, '위안부' 피해자를 새 시대의 역사적 주체로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위안부'를 역사적 사명을 둘러싼 대결구도로부터 배제하든, 혹은 신화화하여 역사로부터 초월하게 하든,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여기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서 탈각된다. 이와 같은 타자화의 시선은 대치와 하림이 여옥과 맺는 섹슈얼한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설 내내 모든 면에서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대치와 하림이지만, 섹슈얼한 장면에서 이들의 태도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대치와 하림은 여옥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를 점한다. 제국의 폭력 아래에서 연대관계였던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에서는 시선의 주체와 보이는 대상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는 주체-벌거벗겨진 몸'이라는 권력 구도는 식민지 시기 대치와 하림이 경험한 '일본군-조선인 학병(대치)', '미군-조선인 포로(하림)' 관계와 유사하다. 조선인 학병들을 괴롭히던 일본군의 오오에 오장은 대치에게 자신이 보는 데서 점령지 여성을 강간할 것을 명령하였다. 오오에는 대치를 벗게 만듦으로써 대치가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키고, 대치는 점령지 여성을 강간함으로써 오오에와 같은 '점령군'이 되었다. 하림의 경우 또한 이와 유사하다. 하림이 OSS 요원이 되기 위해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 미군 심판관은 하림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미군 심판관은 '벌거벗겨진 몸'이 바라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가시화하고, 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용한다. 제국의 군대는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식민지 청년들을 길들이기 위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을 활용했다. 그렇다면 대치와 여옥, 하림과 여옥이 '보는 주체- 보이는 대상'의 관계를 맺는 장면은 단지 '학병-위안부'의 연대적 관계가 위계적 관계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러한 권력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제국의 폭력과 상당히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학병-위안부'는 식민지 민족으로서 연대관계를 맺었지만, 해방 공간에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명은 학병의 몫이 되었다. 학병들이 새로운 국가(건설) 세력이 되었다면, '위안부'는 또 다른 국가(건설) 세력에 의해 식민화된 셈이다. 해방 직후 하림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고, 대치가 공산국가 건설을 꿈꿀 때, 여옥 또한 "앞으로 나의 육체를 탐내는 남성들은 모두 나의 적"[7]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여옥의 '여자의 길'은 '아내의 길'로 회수되고 만다. 문제는 '아내의 길'이 여옥의 정치적 주체성만을 박탈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 대한 대치의 착취 또한 은폐한다는 점이다. 대치는 여옥에게 미군의 정보를 빼내 올 것을 요구했고, 여옥은 내키지 않음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 가부장제 규범은 대치가 여옥을 끊임없이 이용하게 하는 구실이 되어주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착취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은폐 기제였다. 이러한 까닭에 여옥은 두 아들을 잃은 후에야 마침내 대치를 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치가 6·25 전쟁 중에 빨치산이 되어 찾아오자, 여옥은 또 다시 그를 거절할 수 없게 된다. 여옥은 대치를 도와주기 위해 빨치산 무리를 토벌군 대장인 하림에게 알리지만, 이는 배신행위로 간주되어 결국 여옥은 대치 손에 죽게 된다. 이후 대치는 빨치산 동료들에게 버려지고, 곧이어 미쳐버린다. 하림은 대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한다. 이로써 「여명의 눈동자」는 남쪽 체제를 택한 하림만 남기고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킨다.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1975년 10월 1일부터 1981년 3월 2일까지 장장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연재된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여옥의 묘비문을 마지막 문장으로 하여 끝을 맺는다. 여옥의 무덤은 눈 속에 들어 있었다. 얼마 전에 세워준 조그만 돌비도 눈 속에 서있었다. 그[하림-인용자]는 거기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여옥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자꾸만 그 돌비를 어루만졌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윤여옥, 1928년3월5일~1951년8월9일」 - 「여명의 눈동자」(1661), 1981.3.2. "신화"라는 것이 본래 초월적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하림이 지키려고 했던 "신화"는 역설적으로 여옥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치가 말했던 "역사의 잔영으로 그늘에 숨어"들어야 하는 '위안부'의 운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림과 대치의 상반된 태도는 결국 여옥의 존재가 하나의 비석으로,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물화(物化)됨으로써 합치된 셈이다. 물론 이는 여옥을 대상화·타자화했던 두 사람의 시선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안부'는 하림과 대치의 은밀한 바람처럼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실제 역사에선 여옥이 사망한 바로 그 즈음 연합군/한국군 위안소가 세워졌다. "정부가 연합군 전용 위안소 설치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는 보건부가 1951년 10월 10일에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保防 제1726호)이다."[8]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는 남한 정부에 의해 계승‧변형되었다. 소설은 조국이 지키지 못한 '단 한 명의 여자'의 죽음에 애달파 하였으나, 조국이 지키지 못한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결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하나는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의 변형과 계승이 애초 소설 속에 예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존속된 것은 한국 군대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일본군, 일본 육사 출신의 병사와 간부를 다수로 하여 창설되었기 때문이다.[9] 실제로 6·25전쟁 당시 한 장교는 "군 '위안부'를 이용하도록 지시를 내렸던 연대장이 관동군 출신자였으므로 군 '위안부' 발상을 했다고 기억했다."[10]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새로운 국가 건설기의 '적자'로서 학병을 호명하기 위해 남한 군대에 이어져 내려온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삭제해 버렸다. 국가 건설 시기 남한 군·경의 지휘부에 자리 잡았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 대신 탈영 학병 하림을 내세웠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잔재를 삭제하고자 했던 욕망은 그 의도와 별개로 오히려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만 셈이다. 이때 은폐된 존재란 바로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화도 역사도 되지 못했던 연합군/한국군 '위안부'들이다. 다른 하나는 「여명의 눈동자」에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만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남한에 계속해서 존재했던 군 '위안부'만 은폐하는 게 아니라, 여옥 이외에 어떠한 일본군 '위안부'도 그리지 않는다. 위안소에서 다른 '위안부'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녀들 가운데 여옥 외에 귀환한 여자는 없다. 하림이 학병 기피자들과 함께 친일파를 처단하고, 대치가 귀환 학병들과 함께 제주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지만, 여옥은 해방된 나라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지닌 여자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오직 여옥 한 명만이 존재한다. 학병들에겐 그들을 모이게 하는 역사적 과업이 주어지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하는 역사적·사회적 계기는 없다. 대신 여옥에게 주어진 것은 '아내의 길'이었다. 학병이 역사적 '사명'을 통해 세대로 구성된다면, '위안부' 피해자는 탈역사적인 여자의 '운명'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위안부'에겐 이러한 운명조차도 가부장제 규범과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대신 이 비극적 운명을 통해 '위안부'는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하나의 신화로 완성되고 만다. 각주 ^ 윤미향, 『25년간의 수요일』, 사이행성, 2016, pp. 121~122. ^ 김건우, 「운명과 원한」, 『서강인문논총』 5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참조. ^ 이 글은 『일간스포츠』 연재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하 작품명, 연재 횟수, 날짜만 표기함. ^ 허은, 『냉전과 새마을』, 창비, 2022, p. 85. ^ 「여명의 눈동자」(727), 1978.2.16.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 '묵인-관리 체제'의 변동과 성판매여성의 역사적 구성, 1945∼2005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99.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p. 167~168.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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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자료해제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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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네 명의 일본군’위안부’ 모습을 담고 있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44년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 속 임산부는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생존자 박영심이었다. 구조돼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박영심은 일본의 항복 후 고국으로 송환됐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해온 중국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은 10여년 간의 노력 끝에 박영심을 포함해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과 관련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기사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의 류광지안 부연구관원이 소개한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이병 햇필드(Charles H. Hatfield)는 중국 윈난성 쑹산 전선에서 ‘유명한’ 전쟁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만삭의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사진에는 중국군 병사와 여성 네 명이 등장하는데, 옷차림과 외모로 미루어 보아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됐다. 초췌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한 표정의 네 여성은 웃고 있는 중국계 미군 정보장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사진 속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성인데, 한 눈에 보아도 임신 상태였다.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만삭의 여성은 흙더미에 기대어 두 손을 짚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가 ‘박영심’이라는 이름의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합군 촬영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피해자’ 당시 박영심은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한 직후였다. 과도한 피로와 극도의 긴장 상태였던 박영심은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 구조된 박영심은 즉시 중국 원정군 제8군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사산된 태아를 꺼내는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중국 윈난성 바오산에서 한동안 요양한 박영심은 이후 다른 조선인 ‘위안부’ 30여명과 함께 쿤밍으로 보내져 앞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박영심과 동료 여성들은 이듬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들의 비극적인 경험은 역사 속에서 묻히는 듯했다. 그러다가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침묵을 깨고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혹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피해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하는 대열에 박영심도 동참했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는 전쟁 중 일본군이 자행한 ‘위안부’ 제도가 여성의 권리를 심각하게 유린한 반인륜적 전쟁 범죄임을 입증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2000년 12월, 국제사회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범죄를 심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방문한 박영심은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떠올라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에 빠져 결국 그녀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영상으로나마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그 범죄들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2003년 11월, 박영심은 중국 난징과 윈난 쑹산을 방문해 예전 일본군 위안소 현장을 직접 지목하는 역사적인 활동을 펼쳤다. 2015년 12월 1일, 박영심이 지목한 난징 리지샹위안소 옛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위안부’ 주제 기념관인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이 정식으로 개관했다. 그 후 리지샹 전시관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데 힘써왔으며, 여기에는 박영심과 동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도 포함되었다. 10년 간의 노력 끝에 찾아낸 새로운 단서 약 10년 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리지샹 전시관은 박영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윈난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의 여성들, 그녀들이 속은 경위를 털어놓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한반도의 젊은 여성들이 중국 윈난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과정과 쑹산 진지에서 겪었던 비참한 경험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1942년 봄, 일본인들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을 돕는 일을 하는 ‘여성 보조 부대(妇女辅助队)’를 모집한다고 속였다. 안전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가난한 농가 출신 소녀들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쉽게 현혹되었다. 그들은 일본인의 말을 믿고 지원하여 배에 올랐고, 남양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가 아닌 미얀마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 일본군의 폭력이었다. 마지막에 그들은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로 보내져 유린당했다. 중국군이 쑹산을 점령했을 당시 원래 24명이던 ‘위안부’ 가운데 살아남은 여성은 열 명이었다. 이런 내용과 함께 기사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 실려 있었다. 사진 속 열 명의 여성은 1944년 9월 쑹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의해 구조된 ‘위안부’피해자들이었다. 열 명 중 한 명은 일본인,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약 1년간 요양을 한 사진 속 인물들은 구출 당시와 비교해 외모와 체격이 조금 달라졌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는 박영심의 모습도 확인됐다. 사진 속 박영심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어 사진 촬영 당시 기분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양 1년 후,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사진부대는 쑹산 전투 현장에서 많은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과 영상 자료는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 『대전화집』에 실린 이 사진 속 여성 열 명을 미군이 촬영한 영상과 비교해 보니, 이들 모두가 다른 영상에도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구출된 후 건강하게 지냈고, 수술을 받았던 박영심을 포함해 누구도 낙오하지 않았다. 구출 당시 ‘위안부’피해자들의 모습은 몹시 초라했다.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사람도 있었고, 피투성이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구출 뒤 사진에서는 미군이 촬영할 당시의 불안하고 초라하며 당황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마음이 편해 보였다. 구출 당시에는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또 다른 지옥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다행히 고난을 겪은 이들 여성들은 구조 후 중국 군인과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에서는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인 ‘위안부’든 조선인 ‘위안부’든 그들은 오직 하나의 바람만을 간절히 품고 있었을 것이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 말이다. <『大战画集』 기사와 번역문> 중국 뎬시(滇西)에서 포로로 붙잡힌 위안부들 - 자신들이 속은 과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국 군부대는 누장(怒江)강 전방(前线)의 쑹장(松江)강 전투에서 독특한 ‘전리품’을 얻었다. 바로 10명의 일본군 위안부이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고 조선인도 있다. 지난 3개월간 그녀들은 쑹산(松山) 전투(중국의 항일전쟁 중 송산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적군들과 함께 생활했다. 누장강 전선 각 거점의 일본군 부대에는 일본 위안부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한번은 텅충(騰沖) 지역에서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행위가 포착되기도 했다. 일본군 화약고가 폭발될 때 한 조선인 위안부가 그대로 생매장되는 것을 당시 현장에 있는 일본군들은 모두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중국 군부대에 의해 포로가 된 일본 위안부들 중 네 명이 조선인이었다. 나이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로 서양 여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꽤 화사해 보였다. 이 여성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서양식 옷들은 모두 싱가포르에서 사 온 것이다. 그녀들은 낮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 미국 담배를 피고 있었다. 지난 수 월간 겪었던 전쟁의 충격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북조선의 평양 사람으로 전부 농촌 여성이었다. 1942년 봄, 일본의 정치 관계자가 이들이 있는 마을에 찾아와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얼마나 천하무적이고, 어떻게 "부녀자 지원팀"을 모집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서, 전혀 위험하지 않은 비전투 업무를 맡기고, 또 싱가포르가 얼마나 안전한 후방 지대인지, 이들이 가면 병원에서 병간호 일만 하면 된다는 등의 감언이설을 내뱉고 갔다. 비록 이런 감언이설들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이들은 당장의 돈이 너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들 중 한 여성의 아버지는 농부인데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병원비를 부담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집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청 후 받을 수 있는 1,500위안의 정착비로 아버지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생계를 위해 속아 이곳에 왔는데… 끌려온 24명 중 14명이 숨을 거두었다. 대부분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 열여덟 명의 여성이 1942년 6월에 북조선을 떠나 남양지역에 보내졌다. 남양으로 가는 길에서 이들은 일본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과 동아시아제국이 구축될 것이라는 등의 온갖 허황한 선전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싱가포르를 지나치고 멈추지 않는 것을 알아챘을 때, 마음속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기차는 미얀마 양곤에서 계속 북쪽으로 향할 때, 그녀들은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게 되었다. 쑹산지역에 도착하자 네 명의 조선 여성은 서른다섯 살의 일본군 정식 위안부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본인 위안부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사진 속 왼쪽 아래 여성) 쑹산 지역 일본 군부대에는 그녀들을 포함해서 총 스물네 명의 여성이 있었다. 다른 업무 외에도, 그녀들은 일본 병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산속 야영지의 동굴을 청소하고 했다. 중국 군부대가 쑹산을 공격할 때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스물네 명 중 열네 명의 위안부가 폭격으로 사망했다. 평소에 일본군 당국은 그녀들에게 만약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된다면 반드시 각종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 줄곧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처음에는 이 말들을 정말로 믿었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그녀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년간의 생활로 인해 일본 군부대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박영심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구출되는 모습이 담긴 영상. 1944년 미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사진병이었던 에드워드 페이 병장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KBS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