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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에게 묻는다. 2019년 웹진 〈결〉 어땠나요?
    2019년 좌담 독자에게 묻는다. 2019년 웹진 〈결〉 어땠나요?

    [독자토크] 독자에게 묻는다  2019년 웹진 <결> 어땠나요?   2019년 10월 18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는 2019년 한 해 동안 진행된 웹진 <결> 사업을 독자로부터 평가받고 의견을 듣는 독자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일본군’위안부’ 이슈의 전문가뿐 아니라 미디어 종사자, 연구자, 자원활동가, 주부 등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웹진 <결>이 목표했던 메시지가 어느 정도 전달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웹진 <결> 편집팀은 보다 심층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0월에 진행했던 독자 간담회에서 주요한 의견을 피력한 세 분을 모시고 별도의 독자토크를 진행했다. 독자들은 어떤 글을 가장 좋아했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웹진을 이용하면서 어떤 부분을 불편해했을까.   독자토크 일자 : 2019년 10월 31일  사회 : 현승인, 최지은 (슬로워크)  패널 : 김연정 (요크대학교 여성학 박사수료) / 이상미 (웹진’아이돌로지’ 에디터) / 김보경 (슬로워크 콘텐츠 팀)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처음 만난 웹진 <결> 어땠나요? 현승인 안녕하세요. 독자 토크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와 웹진 <결>을 보고 느꼈던 첫인상을 말해주세요. 먼저 제 소개를 하자면 웹진 <결>의 편집을 맡은 현승인입니다.  최지은 저는 슬로워크에서 웹진 <결> 사업의 PM을 맡고 있는 최지은입니다.  김연정  안녕하세요. 저는 여성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연정입니다. 요크대학에서 박사수료를 했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늘 관심이 있었고요. 웹진 <결>을 처음 보고 ‘어..?’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실 정부에서 하는 사업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생각보다 굉장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루고 있어서 깜짝 놀란 거죠.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주로 한일관계에 치우쳐서 이야기하거나, 피해자 중심으로 많이 다루잖아요. 그런데 웹진 <결>은 그런 부분에서 균형을 잘 잡으려고 하는 노력이 보였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신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걸 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했을까 싶고요.  이상미  저는 웹진 ‘아이돌로지’의 에디터 이상미라고 합니다. 저는 웹진 <결>을 처음 모바일로 접속을 했었는데, 흥미를 끌 만한 글이 몇 가지 있었어요.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글처럼 대중매체를 다루는 글이 흥미로웠어요. 관심이 가는 글에 ‘연결되는 글’들을 타고 가다가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던 것 같아요. ‘자료해설’과 같이 어려운 콘텐츠를 보면서 굉장히 깊이 있게 다루시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피해자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건조하게 문제를 다루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보통 ‘위안부' 문제는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것이 많았잖아요. 김보경 저는 지금 슬로워크 콘텐츠 팀에서 기획 업무를 하고 있는 김보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첫인상으로 좀 어려울 것 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웹진 <결>을 처음 들어갔을 때 보이는 썸네일 이미지들이 딱딱해서 그런지, 읽기도 전에 내용이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랄까, 사이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잘 차려입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그래도 카테고리 정리가 잘 되어있고, 타이틀을 짧고 굵게 잘 써서 눈길을 끄는 좋은 요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웹진 <결>을 주변인에게 추천한다면? 김연정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웹진 <결>에서 처음 본 글이었어요. ‘위안부' 할머니를 피해자화하는 문제에는 논쟁 지점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문제를 활동가의 관점에서 평이한 언어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해요.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이 글도 추천하고 싶어요. 대한민국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위안부' 문제를 탈분단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화두를 잘 던졌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점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다루다 보니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어요. 나중에 각각의 논쟁 지점을 따로 떼어서 기획 기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위안부'를 다루는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글도 좋았어요. 누군가에게 추천할 때 약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어려운 전문용어와 학술 이론이 많아서 해당 학문의 전공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이상미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 김학순을 추억하다  -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썸네일이 <허스토리> 포스터 이미지여서 제일 먼저 살펴봤어요. 제가 <허스토리> 단체관람을 뛰었을 정도로 이 영화를 좋아했거든요. 이 글은 기존 <허스토리>를 다루던 기사들과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관점에서 영화의 의의와 한계를 깊이 있게 짚어 주잖아요. 그만큼 호흡이 긴 편이라서 버거운 감이 있긴 하지만요. 그래도 많이 알려진 영화이기 때문에 웹진 <결>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좋을 것 같아요.  -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일본의 페미니즘과 백래시 문제가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되어 있어요. 제가 일본 거주 경험이 있는데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 페미니즘이 가시화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늘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저도 그렇고, 제 주변에도 페미니스트들이 많기 때문에 이 글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 같아요.  - <김학순을 추억하다>  이건 정말 쉽게 다가왔어요. 담백하고요. 저는 김학순 할머니를 뵌 적도 없지만, 할머니에 관한 증언들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이건 굳이 대중문화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보경 ● 김학순을 추억하다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 <김학순을 추억하다>  할머니들에 관한 에세이들이 좋았어요. 학창 시절 때에는 ‘위안부'라고 하면 늘 피해자, 상처받은 사람으로 배웠던 것 같아요. 사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긴 하지만, 깊게 알지는 못하잖아요. 큰 관심도 없고요. 이런 사람들에게 <김학순을 추억하다> 같은 에세이를 추천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잖아요. 한 명의 삶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안부' 문제도 고민해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비슷한 맥락에서 이 인터뷰가 좋았어요. 사실 다른 글들은 많이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 인터뷰는 쉽게 읽혔어요. 할머니들의 활동을 출근과 퇴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공감이 갔고요. 역사 교과서를 통해 배운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피하고 싶은 어두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글을 통해 할머니들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할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할머니들을 너무 피해자화했다는 사실도 깨달았고요.  -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예전에는 수요집회를 자주 나갔었는데, 잘 안 나가게 됐던 때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시점부터였어요. 합의 반대 시위가 격해지면서 관여하는 것이 점점 무서워졌거든요. 처음에는 가볍게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어느 순간 부담스럽고 무섭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웹진 <결>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자세하게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웹진에서 이런 부분들을 계속 잘 정리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웹진 <결> 메인 화면   웹진 <결>, 너무 어려워요!? 현승인  <결>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어렵다는 의견들이 있네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글의 길이, 가독성, 호흡 등을 모두 포함해서 웹진 <결>의 어떤 점이 어려웠나요?  김보경 전반적으로 내용이 어려워요. 특히,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 다른 나라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글들이 힘들었어요. 저는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최근에 친구가 제게 “일본의 식민지는 한국인데, 왜 할머니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거야?” 묻더라고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안부' 문제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해요. 이런 상황에서 웹진 <결>의 글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전쟁의 맥락을 다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어려워서 더 안 보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오히려 전쟁의 배경보다,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초점을 맞춰서 공감대를 높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김연정 애당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소화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글의 호흡이 길 수밖에 없고요. 비교적 쉽게 접근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용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독자분들의 문해력이 상이하다 보니 어디까지 배려해야 할지도 고민이겠고요. 저는 웹진 <결>이 어쩔 수 없이 학술지적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보통의 학술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학술지는 전공 중심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내용은 자책하면서 더 공부하면 되는 문제인데, 웹진 <결>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공이 모였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사방으로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결국엔 타깃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글은 전문성을 갖춰 깊이 있게 접근하는 반면, 어떤 글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대중성을 고려하는 식으로요. 글마다 타깃을 달리 하는 거죠.  현승인 어려움을 알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 편집자 입장에서는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할지 정말 헷갈려요. 아까 이상미 님께서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글도 쉬운 글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가 높고 전문적인 콘텐츠가 대중들에게 많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글에 비해 비교적 언어의 친숙함이 높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카테고리'와 ‘엮어보기' 최지은 웹진 <결> 내용상의 어려운 점을 이야기했으니, 다른 것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웹진은 두 가지 리터러시에 관한 고민이 있어요. 첫 번째는 텍스트 리터러시, 두 번째는 디지털 리터러시에요. 텍스트 리터러시만큼 디지털 리터러시 역시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웹진 <결>은 상대적으로 웹에서 많이 쓰이는 기호 표현 등으로 리터러시를 낮췄다고 생각했는데, 어렵다는 의견도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웹진 <결>을 사용하실 때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김연정  저는 좀 어려웠어요. 디지털 문맹이라 그런지 다른 분이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햄버거' 기호를 누르면 카테고리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렇다고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이 ‘전체기사보기'가 있어서 그중에서 보고 싶은 것들을 골라보는 게 편했거든요.  김보경 저도 ‘옛날 사람’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디지털 활용을 잘 못 하는데요, 저한테는 오히려 쉬웠어요. ‘카테고리’ 정리가 잘 되어있었고, ‘엮어보기' 기능이 좋았어요. 특히, ‘인물'에서 김학순 할머니 관련 글들을 한눈에 모아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상미  저는 ‘엮어보기' 기능을 알고 있긴 했는데, 사용해보지는 않았어요. 뭘 아는 게 있어야 그 안에서 엮어보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요. (웃음) 그래도 좋은 기능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특정 영화와 관련한 글들을 찾아보는 등 관심 주제가 생기면 많이 이용할 것 같아요. 나중에는 오히려 ‘카테고리'보다는 ‘엮어보기'를 많이 이용하지 않을까 싶어요.  최지은 제가 요새 느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시대에 같이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아요.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으로 캡처 후 스마트 펜으로 밑줄을 그어서 자기 글을 SNS에 올리지만, 누군가는 기본적인 웹 사이트 접근도 어려워하시죠. 이 격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요. 이 중에 우리의 독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거의 다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요.  누군가는 인쇄해서 봐야 하고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캡처해서 보고 있겠죠. (웃음) 중심을 어디에 잡아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웹진 결 카테고리 설명   엮어보기.jpeg 2020 웹진 <결>에 바란다  현승인 혹시 앞으로 웹진 <결>에서 보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콘텐츠의 형식에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김연정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와 같은 글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보다 많은 대중에게 쉽게 읽히면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위안부'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소녀 아니면 할머니,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재현하는 문제에 대해서 짚어주는 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보경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단순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위안부'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대상화되지 않은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텍스트도 좋지만, 영상으로 담으면 그 자연스러움이 더 고스란히 표현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전문가분들이 글로 풀어서 설명한다고 한들, 하나의 영상만큼 그분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잘 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이상미  독자들이 흥미를 쉽게 가질만한 소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대중문화를 다루는 글이 흥미를 끌기 쉽다고 생각해요. 영화와 같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쉽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라든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와 같은 글들이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건 제 개인적인 바람이고요. 솔직하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처럼 계속하시면 될 것 같아요. 몸집이 커지고 콘텐츠가 늘어가다 보면 모두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최지은 하다 보면 해결될 문제라니. 엄청나게 큰 응원인데요.  김연정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 정말 찬사를 보내요.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전쟁과도 같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하는 사업인 경우 내셔널리즘에 빠지기도 쉽고요. 이런 부분에서 웹진 <결>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정치를 잘해가시면서 진행하시는 게 눈에 보여요. 앞으로 더 용기 내서 전선에서 싸워주셨으면 좋겠어요. 계속 용기를 잃지 말아 주세요. 김보경  이건 꼭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친구들이랑 얘기할 때 ‘위안부' 문제가 궁금하면 어디를 보라고 자신 있게 얘기를 못 했거든요.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웹진 <결>을 보라고.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더라고요.  현승인 좋은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웹진 <결> 편집팀을 대표해서 2020년에는 보다 나은 웹진 <결>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으로 2019년 독자토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년 독자토크 때는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다시 한 번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웹진 <결> 편집팀

  • 분노로 그치지 말고, 현재의 내 문제로 바라봐 주세요 -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활동가 백선행 인터뷰
    2019년 인터뷰 분노로 그치지 말고, 현재의 내 문제로 바라봐 주세요 -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활동가 백선행 인터뷰

    대구 경상감영길,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거리에 하얀색 2층 건물이 있다. 1920년대 일본식 목조건물의 형태의 외관, 문 옆에는 “NO 아베” 네 글자가 작지만 선명하게 걸려있다. “내가 죽어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고(故) 김순악 할머니의 유언과 유산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시민의 힘으로 완성된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하 ‘희움역사관’)이다. 대구·경북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피해자들의 복지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단법인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부설 역사관으로 2015년 개관해 지금까지 쉼 없이 다양한 전시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전시’라는 형태가 되면 고민은 더 깊고 섬세해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도 문옥주와 심달연과 김순악의 제각기 달랐던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와 전 세계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현실인 이 문제를 계속해서 ‘전시’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서늘한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희움역사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백선행 팀장을 만났다. 희움역사관이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의 삶과 고민까지 이야기가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대학생 자원활동가에서 ‘위안부’ 역사관을 책임지는 상근활동가가 되기까지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결> 독자 여러분께 짧은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는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백선행입니다.  Q. 대학생 때부터 시민모임에서 자원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계기는 정말 사소한데요, 한·중·일 청년이 모여 템플스테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어요. 중국어 전공이거든요. 근데 가서 보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와 함께 하는 평화 인권 캠프였어요. 2007년에 시민모임이 주최한 행사였는데, 중국 청년은 한 명도 없는 게 반전이었죠. (웃음)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관심은 있었던 것 같아요. 17살 때 도서관에 갔다가 『천황의 군대와 성노예』(미네기시 겐타로, 박옥순 옮김, 당대, 2001)라는 책을 봤어요. 제목이 자극적이잖아요. 그걸 읽고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또렷이 나요. 학교에서‘위안부’ 문제를 배우긴 했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이것이 제도적,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전쟁범죄라는 생각을 처음 했죠. 그러고 나서 잊고 살다가 캠프로 시민모임을 만나면서 그때부터 자원 활동을 쭉 하고, 아르바이트 시작하면서 후원도 시작하고, 졸업하고 다른 일 조금 하다가 다시 일을 찾을 때 여기서 활동 제안을 해주셔서 상근을 시작했어요.  Q. 자원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또래 자원활동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사람들과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게 좋았어요. 할머니들 재가방문도 함께 하고, 행사나 집회도 같이하면서 친밀해지는 게 즐거웠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의 존재가 처음부터 와닿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재가방문도 열심히 즐겁게 다녔지만, 생존자를 아주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요, 시민모임에서 하는 조직사업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Q. 상근활동가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고민은 많았어요. 이쪽을 커리어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인연이 닿아서 시작하게 됐는데, 조직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제 몸에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2015년 7월 말부터 일하기 시작했는데, 역사관 개관 직전이라 닥치는 대로 업무를 하게 됐죠. 전시를 만들고 홍보하고 교육하면서 역사관의 모든 활동이 내 일이구나,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쭉 역사관 업무를 맡고 있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Q. 지금 기획전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하셨나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저희는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생존자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왔고, 이 부분이 차별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났던 생존자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2년에 한 번씩 진행할 계획으로 2016년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1 옥주씨,>전을 했는데, 2019년이 되어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열게 됐어요.  왜 김순악인가, 많이들 물어보세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 근현대를 조망하는 계기가 됐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알아 온 대구 경북 할매들 중에서 김순악이라는 사람의 삶이 일본군‘위안부’, 여순 항쟁, 기지촌, 한국전쟁, 베트남전까지 역사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적이 없더라고요. 전체 기획은 올해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서 했던 <기록 기억 :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 총괄하신 문호경 님이 맡아 주셨는데, 저희는 김순악의 그 파란만장하고 울퉁불퉁하고 매끈하지 않은 일생을 전하고 싶었어요. 할머니는 일대기 『일본군 ‘위안부’ 김순악 :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김선님, 일일사, 2008)도 발간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글자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김순악이 돌아와도 이해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자, 울퉁불퉁한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자고 기획했어요. 설령 그게 관람객에게는 가닥이 안 잡히고 난해하게 느껴지더라도요.  Q. 전시장의 모습이 조금 독특합니다. 벽에 꽃무늬도 있고요.  시민모임이 찾아갔던 김순악의 방이에요.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 알코올 중독 같은 상태로 쓰러져 있다가 이웃 주민에게 발견돼 영구임대 아파트로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처음 입주했을 때 그곳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누우셨대요. 이런 네모반듯하고 따뜻한 방을 생전 처음 가져봤다면서. 그 방 그대로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 재현하려고 했어요. 그때 그 벽지와 김순악이 남긴 물건들, 남긴 말이 있고 멀리서 김순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죠.  Q. 전시는 어떻게 구성하셨나요?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번째 <우째 살았는가 싶으고> 파트는 김순악이 그의 방에서 저희 활동가들을 처음 만난 순간이에요. 그래서 피해 당시부터 순서대로 이야기가 가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했던 당신의 심정,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들부터 시작돼요. 두 번째 섹션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해방 이후 복잡하고 험난했던 귀향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사람과 만나서 말씀하시는 걸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위안부’ 피해에 대한 부분은 굳이 또 재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 전시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순악할매 어떻게 지내세요> 섹션은 김순악이 시민모임을 만난 이후, 시민모임의 활동가, 회원들이 할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들과 김순악의 공적 활동들을 엮었어요.  Q. 전시 해설을 직접 하고 계시죠.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청소년 단체 관람객이 가장 많고, 최근에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르신 팀들도 오고 계세요. 10인 이상 단체는 누구나 해설을 신청하실 수 있는데요, 해설을 듣고 관람하는 분들이랑 그냥 보시는 분들이랑 확실히 반응은 조금 달라요. 아무래도 저희가 전문 학예 팀이 갖춰지지 않아서 객관성이나 전문성 같은 것들은 신경 쓰여요. 그래도 이곳의 전시는 해결 운동의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할머니를 직접 만나 왔고 문제를 늘 고민하는 활동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 관람하는 분들이 남다른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그저 속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그나마 속이 조금 시원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전해야 하는 책임감도 함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展> 전시 소개 문구 중    부족하더라도, 활동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Q. 기획전시는 계속 새롭게 준비하실 계획인가요? 지금 두 가지 시리즈를 가져가고 있어요. 하나는 대구 경북 생존자 중에서 한 명을 선정해서 그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 또 하나는 2017년 동티모르로 시작한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들>이에요. 교대로 하고 있는데요, 둘 다 이야기하고픈 것은 인식의 확장이에요.  이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로 많이 인식되고 있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시아 각국에 피해자가 있고, 양상은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해결 운동은 연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아시아> 시리즈에서 하고 싶어요. <당신> 시리즈에서는 생존자 한 분 한 분이 모두 다 다른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저희가 만나왔던 ‘당신들’을 추모하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삶은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서 겪었던 문제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 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Q. 1층에서 상설 전시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함께 소개해 주시겠어요. 역시 외부에서 아트 디렉터와 큐레이터 팀을 모셔서 기획했고, 개관을 세 번이나 연기할 정도로 고민 많이 하면서 준비했어요. 시민모임의 소장자료를 통해 전시가 만들어지는데, 객관적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시민모임’이라는 단체가 가진 역사, 생존자를 만나면서 남긴 고유한 기록도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저희 소장자료 중 “돌격 1번[1]” 을 전시할지 말지, 정말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결국 전시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것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선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고, 그 하나로 인해 나머지 전시품이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거예요. 물품 자체로 분명히 의미가 있더라도 충분히 잘 해석해서 기획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전시하지 않는 것도 맞다고 생각해요.  이런 전시 방향에 대한 평가는 나뉠 수 있을 거예요.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피해 사실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달라는 피드백도 계속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그게 가장 진정성 있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라는 걸 전시를 준비하고 관람객을 만나면서 저희도 깨닫게 됐거든요.  준비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되게 아쉬울 때도 있어요. 자료가 부족할 때도 많고 디자인이 아쉬울 때도 있고요. 그래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꾸준히 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가고 있습니다. 준비할 때 고민은 많지만, 막상 펼쳐 놓으면 전시를 채워주시는 건 관람객이더라고요. 예상 못 한 반응도 많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없는 경우도 있고요. 몇 번의 전시 후에 ‘결국 모든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건 관람객 여러분이구나, 자신감을 좀 가지고 이야기를 해 봐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관람객 Q. 이곳에서 전시를 관람한 어느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다시 찾아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나요? 대부분은 일회성으로 관람하시지만, 적극적으로 해결 운동에 참여하시는 팀들도 꽤 있어요. 준비를 많이 하는 팀들은 사전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귀향>(조정래, 2016), <허스토리>(민규동, 2018)나 책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 등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여기 오셔서 관람하면서 해설 듣고, 외부 강연까지 요청하셔서 듣고, 그리고 희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해 가셔서 다시 판매하거나, 아예 직접 물품을 제작해서 판매 수익을 모아 여기에 기부금 전달식까지 하러 오세요. 청소년들이 해결 운동에 스스로 참여하는 과정에 저희는 교육 공간으로 끼워져 있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예전에는 문제 해결 운동이 단체 주도였다면, 최근에는 양상이 많이 바뀌고 있잖아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도 시민이 주체가 되었고, 지금은 더 나아가서 청소년이 스스로 계획해서 실천해요. 그 가운데서 이제 저희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Q. 유독 마음에 남았던 사례가 있나요?  사실 여러 팀이 기억나서, 한 팀만 언급하기 어렵네요. 전교생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온 적이 있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플리마켓을 열어서 스스로 기부금을 모으고 저희한테 와서 그동안의 활동을 다 설명해 주더라고요. 동전으로 한가득이었는데 다 세어서 기부금 영수증을 드렸었죠. 고등학생들이 기금을 모아오는 경우는 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어서 놀랐어요. 한 번은 어느 학교에서 6학년이 다섯 개 반인데 다 같이 오겠다고 신청해서 놀라기도 했어요. 어느 반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하고 『꽃할머니』 책을 같이 읽었는데, 한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희움역사관 견학을 하러 가고 싶다고 제안을 해서 허락을 받았대요. 그 소식을 다른 반 학생이 듣고 서로서로 ‘우리도 가자’ 해서 결국 학년 전체가 오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럴 땐 현장에서는 좀 힘들긴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새삼 깨달아요.  Q. 시민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시겠어요.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죠. 여기서 전시해설 할 때 항상 ‘희망‘을 얘기해요. 아직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공감과 분노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해결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느껴온 것은 희망이라고요. 성폭력 문제에서 희망을 얘기하면 되게 낭만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것처럼 묘사된 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각해보면 전쟁과 성폭력을 뚫고 살아남은 생존자잖아요.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증언자고, 인권 운동가고, 어떤 분들은 예술가가 되셨고요. 해결 운동도 당사자가 힘있게 앞서서 견인해왔기 때문에 시민들도 함께 해 온 거고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게 굉장히 큰 희망이죠.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동참해 달라고 이야기해요. 여기 이름도 ‘희움‘, ‘희망을 모아 피움‘이잖아요. 제발 분노로 그치지 말아 달라고요. 연민이나 동정, 분노도 타자화잖아요. 같이 주체로 행동해 달라는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이미 주체가 된 분들도 많은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아요.  저는 이 문제가 여전히 ‘민족의 딸들이 당한 고난과 수치‘로 묘사되는 것에 매우 큰 의문을 품고 있어요. 이걸 현재화하려면 결국 여성 인권, 여성 폭력에 대한 문제로 확장해야 해요. 그러려면 역사관이 관람객에게 이 문제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자기화할 기회를 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그래서 이곳의 재현 방식도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분노에 갇히지 말고, 너무 비관에 젖지 않게, 들어왔을 때부터 나갈 때까지 밝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이런 합의를 가지고 있어요. 그걸 관람객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계셔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Q. 외국인 관람객도 계신가요?  몇 달 전부터 통계를 내 보고 있는데 7~8% 정도로 계속 오고 계세요. 절반 정도는 영어를 사용하시고, 절반은 일본어를 사용해요. 일본어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해결 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해 오던 분들이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지금 외국어 서비스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 그걸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적극적인 분들은 검색해 가면서 보고 질문하실 때도 있지만, 저희는 아주 아쉬운 부분이죠. Q. 외국인 관람객의 반응은 어떤가요?  문화권, 언어권별로 인식의 토대가 다르다는 게 느껴져요. 사실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오신 분들은 한국 분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영어를 쓰시는 분들은 문제 인식의 기반이 분명히 달라요. 일본 분들은 스스로 가해 역사라고 인정하거나, 긴가민가하지만 보면서 물어보시는 편이고 다른 언어권 분들은 인식이 명백하게 인권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손성숙 선생님도 인터뷰에서 미국 교육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인권 문제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딱 그게 느껴져요. 또 중국 내륙에서 온 관람객과 대만에서 온 관람객의 결이 달라요. 중국에서 온 분들은 확실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 국가 관계에서 바라보시다가 중일 관계로 연결하면서 화를 내시기도 해요.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바로가기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 단체관람 신청하기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 이후를 고민하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사실 어떤 시민사회 이슈보다도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이슈라는 걸 많이 느껴요. 그게 정말 대단한 것 같고, 무엇보다 생존자들이 스스로 운동을 견인해 오셨기 때문에 이 운동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점에서 생존자들과 함께 온 것이 너무나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제 저희가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후에 ‘포스트 당사자’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은 활동가이고 연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시시콜콜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고, 기록의 역할이 뭔지, 사람들이 뭘 기대하는지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Q. 활동가로 일하는 게 몸에 맞는 느낌이라고 하셨지만 고민도 많으시네요.  생존자가 없을 때에도 이 운동이 이전만큼 주목받을 수 있을까, 지금만큼의 물적인 토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죠.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할지, 그 재현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지금만큼 많을지… 지금이 ‘위안부’ 운동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도 많고 두려움도 커요. 또 현실적으로 활동가들은 항상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데, 역량 강화의 기회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도 있고요.  Q. 앞으로 어떤 활동가로 살고 싶으세요? 저는 사실 긴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이 현장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매일 느껴요.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실 수도 있고… 다만 기념 사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성노예 문제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깊이 이해할까, 하루하루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달리다가 소진될 때 같이 공감하고 고민하는 활동가들, 연구소처럼 이 분야에 매진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면 보람을 느끼면서 또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힘을 내게 돼요.  지금 나의 문제로, 순악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Q. 저희 웹진 <결>에 기대하시는 점이 있나요? 우리 사회에 바라는 점도 궁금합니다.  처음 <결>을 봤을 때 “너무 읽을 맛 난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기존 매체나 미디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분야를 깊이 있게, 심지어 세련되게 써주셔서. 쭉 계속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더 넓은 분야에서 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결>이 있다는 게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든 없으신 분이든, 이것을 자신의 문제로 바라봐 주시면 좋겠어요. 100년 전에 나랑 상관없었던 여성들, 할머니가 겪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문제에서 바라보면 우리 책임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는 기념 사업과 할머님들에 대한 지원 사업 정말 너무 감사하지만, 법적인 해결을 위해서도 더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세요.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 두번째 이야기 김순악> 전시는 2020년까지 이어져요. 오셔서 순악 씨를 만나주세요.  제가 활동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우습지만 순악 씨를 생각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처음 갔던 평화 인권 캠프에서 처음 만난 ‘위안부’ 생존자가 김순악이었어요. 그때 템플스테이 했던 곳도 지금 김순악 할머니를 모신 영천 은해사고요. 저희처럼 순악 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순악 씨 좀 만나러 와주세요.   각주 ^ 도쓰게키이치반(突擊一番). 당시 ‘삿쿠’라고 불렸다. 일본제국 군인에게 군수품으로 지급된 군용 콘돔으로 위안소에서 사용되었다. 

    백선행

  •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2부 -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2019년 논평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2부 -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이 글은 『여성문학연구』 47호(2019)에 실린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의 내용을 요약‧수정한 것이다.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2부.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매개로서의 ‘위안부’ 문제 1부에서는 일본에서 미투운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배경으로서 1990년대 이후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가 결합하여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일본의 우파들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도덕적 신념을 키워왔고, 최근에는 유엔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는 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자신들의 자원으로 삼는 것은 물론 우파들만이 아니다.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 역시 성적 존엄성의 회복을 요구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미투 운동의 시조로 되새기고자 하였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지원운동이 '전시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창출하고, 국제적으로도 '성노예제'라는 말을 공유하게 한 성과를 말하면서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역사를 현재의 일본 사회와 적극적으로 접속시킨다. 그리고 미투운동이 확산되지 않는 원인을 여전히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와 사회의 체질에서 찾고 있다.  미투운동과 ‘위안부’ 문제를 연결하려는 구도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강조되었으며, 한국 시민사회를 본보기로 삼는 움직임 또한 나타났다. 젠더 연구자인 무타 카즈에(牟田和恵)는 ‘위안부’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위안부문제는 #MeToo다!〉라는 짧은 동영상을 제작하여 수요집회의 모습과 함께 ‘위안부’ 운동을 이끌어온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영 페미니스트 예술가집단인 내일소녀대(明日少女隊)도 "‘위안부’문제는 #MeToo다"를 내세워 각지에서 '망각에 대한 저항' 퍼포먼스를 펼쳤다.[1]  그 동안 지속해온 ‘위안부’ 연구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지원운동,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추진,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호응, 그 속에서 한국‧일본‧재일조선인들 사이의 참조와 연대의 축적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인식의 지평이 가능했다. ‘위안부’ 피해의 역사와 연결할 뿐 아니라, 한국의 현장을 참조대상으로 삼고 일본의 미투운동을 임파워하고자 하는 시간적, 공간적 접속은 미투운동과 ‘위안부’ 운동 양쪽에서 네이션의 스케일을 벗어나는 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이토 시오리와 서지현이라는 두 상징적 인물을 비교하는 방식보다도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복잡한 시선의 교차를 낳고 있다.    2018년 8월 12일의 집회 포스터 〈일본군 ‘위안부’ 메모리얼데이 in 도쿄 김학순씨부터 시작된 #MeToo〉   내일소녀대 ‘망각에 대한 저항’ 퍼포먼스, 2018년, 로스앤젤레스   미투 지원운동의 조용한 확산 2019년 4월 10일 '이토 시오리의 민사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Open the Black Box'가 결성된 것은 특기할만하다. 원래 'Fight Together With Shiori(FTWS)'라는 이름으로 준비모임을 가졌던 몇몇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모임은"성폭력 피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에 있는 블랙박스를 하나하나 열어가는 시작"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정식 발족했다.[2]  이토의 기자회견 후 지원 서명운동을 시작한 #WeTooJAPAN 발기인인 후쿠하라 모니카(福原桃似花)를 비롯하여 변호인단과 기존 여성운동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50명이 모인 이 자리의 중심에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지원운동을 이끌어온 재일조선인 2세 양징자(梁澄子)가 있었던 점도 상징적이다.  다른 하나의 움직임은 성폭행에 대한 사법 판단에 항의하는 플라워시위다.[3] 2019년 4월 이후 매월 11일 전국 대도시에서 200~400명의 여성들이 모여 자신들의 성폭력 경험을 공유하는 시위를 진행 중이다. 항의 행동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3, 4월에 성폭행과 관련해서 전국의 지방법원에서 나온 연이은 무죄판결이었다.  2019년 3월 12일 후쿠오카 법원은 준강간죄로 고발된 남자에게 "남자는 여성이 합의했다고 착각했다"면서 무죄판결을 내렸고, 4월 4일 나고야 법원은 친딸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적으로 학대한 아버지에게 딸이 "저항하려면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여성들은 이 시대착오적 판결에 항의하면서 피해자들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담아 꽃을 들거나 꽃무늬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시위를 '플라워 시위'로 명명했다.  모임을 기획한 중심인물인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는 작가이자, 사업가로서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는 한류에 열광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지지하는 사람이자, ‘위안부’ 운동에 개입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일 양국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축적되어 온 ‘위안부’ 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한국과의 소통을 어떻게 일본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로 만들 것인가, 앞을 가로막아 서는 벽에 어떻게 균열을 일으킬 것인가,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들의 문제를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녀를 포함한 일본의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고민이다.  이 글을 끝맺으려는 참인 2019년 12월 18일 오전, 이토 시오리가 일으킨 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야마구치에 대한 330만 엔의 배상 판결과 함께 재판은 그의 행위의 불법성을 명시하였고, 증언의 진정성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피고에게 한없이 관대했던 그동안의 일본의 성폭력 판결내용을 생각했을 때, 이날의 판결은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토가 시작한 미투 운동은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이 판결이 그가 버텨낸 고통의 시간을 상쇄할 수 없고, 재판 투쟁이 끝이 난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 고발의 정당성을 인정한 이 판결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 이토의 투쟁과 지원 운동이 지금도 자기책임을 따지는 분위기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피해자에게 큰 용기를 안겨줄 것이며, 이를 계기로 일본의 미투운동은 서서히 확장될 것이다.  플라워 시위   문화번역의 실천과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 2019년은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을 비롯한 한국의 페미니즘 문학이 일본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82년생 김지영』 일본판은 2018년 12월 출간 후 나흘 만에 3쇄를 찍고, 4달 만에 13만 부를 찍는 돌풍을 일으켰다. 2020년 1월 20일 현재도 아마존 재팬 '아시아문학 작품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아시아문학 작품' 베스트 10 중 7개가 한국의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고, 최근 "한국‧페미니즘‧일본"이라는 특집을 꾸민 『文藝』 2019년 가을호는 1933년 창간 이래 86년 만에 이례적인 3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고 결국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친 한국의 여성주의 서사는 지금 일본에서 일부의 매니아층을 넘어 대중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다.  아마존 재팬에 달린 200개 이상의 리뷰에는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 "나도 김지영", "여성의 일상에 있는 무한한 절망", "비통한 감각", "절망 끝의 희망",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는 등 작품에 대한 공감을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부러움과 동경 또한 리뷰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의 수준은 한국보다 낫다"고 안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침묵을 강요하는 일본 사회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확실히 존재한다. 이들에게 한국의 사회문화적 동력은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 직접적 정치참여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는 한국을 선망하는 모습은 그동안 촛불시위를 비롯한 사회운동 과정에서 종종 볼 수 있었는데, 폭발적인 미투운동을 거쳐 ‘김지영’ 신드롬 속에서 더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다.  사이토 미나코(斎藤美奈子)는 '일본에서 균등법, 기본법 제정 등 페미니즘의 제도화가 비교적 빨리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2년생 김지영』에 해당되는 페미니즘 입문서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다나카 미츠(田中美津)나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등 1970-80년대 저작들이 너무 빛 바래버린 현실 속에서,"K페미는 J페미의 '30년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토로하였다.[4]   다만, 한일 간 문화적 참조 관계의 역전을 강조하는 서사는 식민주의와 근대화론의 위계질서를 거꾸로 설정하는 민족주의적 욕망으로 회수될 위험성이 있다. 한국이 압축적 근대를 거쳐 신자유주의 사회의 길을 가면서도 개개인의 욕망이 집합적인 사회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탈식민 분단국가로서의 폭력의 경험과 상실감, 트라우마에 노출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문화적 소비와 위계화의 욕망을 넘어, 서로 다른 역사성을 교차시키는 문화번역의 실천이 요구된다. 또한 이 과정을 곧바로 한일 여성연대 등으로 정리하는 안일함도 피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스젠더 이성애 국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둘러싼 공감은 늘 주류 여성들 간의 지적 교류에 머물고 마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재일조선인 여성 연구자, 활동가들에 의해 촉발되어 온 경험을 마지막으로 다시 상기시키고 싶다. 미투와 ‘위안부’ 문제의 접속,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문화번역의 과정은 지식인들의 담론을 넘어 대중들의 동시대적인 정동과 맞물리면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연대의 형태조차 없는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키워가는 일이다. 역사를 해결하거나 관계의 균열을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갈등의 역사를 직시하고 더 말하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文藝』 2019년 한국‧페미니즘‧일본” 특집호 표지   각주 ^ https://tomorrowgirlstroop.com/ianfu ^ https://www.facebook.com/opentheblackbox ^ https://www.flowerdemo.org ^ 斎藤美奈子, 「世の中ラボ 【第106回】いま韓国フェミニズム文学が熱い」, webちくま 2019.2.21.     http://www.webchikuma.jp/articles/-/1629

    조경희(趙慶喜)

  •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인터뷰
    2020년 인터뷰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인터뷰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함께 과거 일본의 침략를 경험했던 나라다. 그렇기에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위안부’라는 슬픈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조사와 지원은 한국만큼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연구자다.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게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와 조사의 진행 상황, 그리고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위해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를 물어보았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Q.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독자를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입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독립적으로 조사하는 사람이에요. 1992년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대외적으로 처음 밝힌 일본의 고이치 기무라(Koichi Kimura) 박사와 협력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Q. 선생님과 고이치 기무라 박사님께서 함께 쓴 책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는 일전에 웹진<결>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활동 혹은 연구를 하게 되신 계기가 따로 있었을까요?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계기는 1999년 자카르타의 <Internews> 라디오 기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요,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욕야카르타(Yogyakarta) 법률구조단의 부디 산토소(Budi Santoso) 씨를 만났어요. 그때 처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저는 ‘위안부’ 피해자인 마르디엠(Mardiyem)에 대한 취재 기사를 작성했는데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상징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녀가 바로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의 주인공입니다. 당시에 썼던 취재 기사는 인도네시아 전역 50개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지요.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한국의 웹진 <결> 독자를 위해 당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가 어떠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인도네시아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위안소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는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아체(Aceh)에서부터 동쪽 끝인 파푸아(Papua)까지 널리 분포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국토 중 동부 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위안소에는 특히 한국과 타이완에서 온 여성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요.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는 등급별로 구분되어 배치되었는데, 흰 피부를 가진 인도네시아 북부 술라웨시(Sulawesi) 머나도(Manado)출신의 인도네시아 여성과 중국계 여성, 그리고 네덜란드계 여성들은 일본군 장교들 몫이었습니다. 반면에 갈색 피부를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Java) 출신 여성들은 계급이 낮은 일본군들에게 할당되었지요. ‘위안부’들 나이는 16세에서 25세 정도였고, 그중에는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지기까지 Q.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였나요?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졌습니다. 신문기자인 조코 산토소(Joko Santoso)가 일본군‘위안부’로 감금되었던 숙모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언급했어요. 그의 숙모였던 투미나(Tuminah)는 중부 자바, 솔로(Solo) 지역에 후지 여관(Fuji Ryokan)이라고 이름 붙여진 위안소에서 3년 6개월 동안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해요.  조코 산토소는 본인이 속한 수아라 머르데카(Suara Merdeka) 신문에서 1992년 7월 16일, 7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숙모의 ‘위안부’ 사연을 기사화했죠.  기사를 본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그의 부인인 평화 운동가 옥초 기무라(Okcho Kimura) 씨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직접 만나면서 처음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사 결과는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소개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되었죠.  1993년 일본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Nichibenren) 소속 5명의 변호사가 자카르타 법률구조단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착취당한 희생자들을 위한 손해배상 문제가 제기되었죠. 일본 변호사들의 방문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생존해 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끝까지 파악하겠다는 당시 인도네시아 사회부 장관인 인텐 수웨노(Inten Suweno)의 성명으로 이어졌습니다.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밝혀졌을 때 사회적 반응은 어떠했나요? 당시 사회부 장관이었던 인텐 수웨노의 성명은 1993년 4월 20일, 머르데카(Merdeka) 일간지에 게재되었고, 성명에 따라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어요. 1945년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래로 반인륜적인 ‘위안부’ 문제가 한 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가져다주었죠. 사회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비정부기구인 자카르타 법률자문단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노무동원 피해자들의 등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본 등록 업무는 욕야카르타 법률구조단으로 이관되었고요. Q. 등록을 받은 결과는 어땠습니까?  1993년 4월 29일부터 1993년 9월 14일까지 등록을 받은 결과, ‘위안부’ 피해자 1,156명과 노무동원 피해자 17,245명의 인적 사항이 확인되었어요. 그리고 1995년 아시아 지역 보상을 위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희생자연합 국제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 of Asia Pasific War Victims Organizations Claiming for Asia Compensation)에 인도네시아가 가입한 후, 1996년 일본군 보조병인 헤이호(Heiho‧兵補) 출신 연합이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받았는데 그 목적은 일본군 침공에 따른 아시아-태평양 지역 희생자 개인별 보상 약정(Agreement Individual Compensation for Asia Pacific Victims of Japanese Aggression)에 따른 인도네시아 희생자들의 보상 추진이었습니다. 1996년 3월 30일에 마감을 통해 ‘위안부’ 피해 여성 19,573명이 등록하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개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도 공식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한 사실에 대해 경악과 충격, 부끄러움을 표했지만, 일본 정부와의 조화로운 협력 관계를 우선시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노력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학교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Q.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의 상황은 어떤가요?  앞서 말씀드린 일본 변호사연합회(Nichibenren) 인권위원회의 자카르타 법률구조단 방문 이후, 법률구조단은 ‘위안부’ 현황 조사와 등록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시기에 법률구조단은 인도네시아부인회(회장: 누르샤바니 캇자숭카나(Nursyahbani Katjasungkana)와 반 여성적 무력 반대 포럼(Forum Resistance Military Against Women. 의장: 고이치 기무라 박사)과 연계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대신한 제소를 준비했고 많은 변호사가 재판에 참석했습니다. 본 연계 활동은 결속력 있게 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국민 여론에 영향을 주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006년에 법률구조단의 몇몇 분과 저,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카르타에서 ‘위안부’ 연대(JAJI)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부 자바 지역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활동을 하다가 본 연대는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가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를 결성하게 됩니다. 본 연대의 조직은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과 지원을 원하는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어요.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Q.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관장하는 특별기구나 단체가 없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이하 JSII)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하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 출간, 사진전, 회화 전시회,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여론 형성을 위한 기자 초청 간담회 등을 개최하고 있어요.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JSII는 지금도 계속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께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의 유품을 다수 보유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유품들을 갖고 계시는지요?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에 찾아가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점령기 때 만들어진 유물이나 만행의 장소들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생각하지 못한 인도네시아 ‘위안부’ 관련 물품들을 접할 기회도 있었고요. 예를 들면 일본군 술병, 도자기 잔, 탄피, ‘위안부’들이 입었던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 치마, 신발 가방, 모자, 의료 기구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물품은 ‘위안부’용 의료기구예요. 이 의료기구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2년도예요. 중부 자바, 암바라와(Ambarawa)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헤이호 출신인 사르무지(Sarmudji) 씨가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에게 보여준 사진에서 처음 보았죠. 그 사진에는 1992년에 찍은 손잡이가 달린 철제 의료기구, 유리로 만들어진 주사액 3병, 2개의 낡은 붕대가 찍혀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위안부’용 의료기구는 수라바야(Surabaya)에 있었던 위안소에서 헤이호 출신 친구가 가져온 것을 사르무지 씨가 인수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사르무지 씨가 당시 집을 수리하느라 이 의료기구가 집 안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찾지를 못했어요. 사르무지 씨가 밝히기를 어떤 일본인이 찾아와 본 의료기구들의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어요. 2004년에 저는 사르무지 씨를 다시 만났고 그제야 일부 파손된 ‘위안부’용 의료기구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르무지 씨는 기꺼이 이 역사적인 유물들을 저에게 넘겨주었죠.     Q. 비록 서면을 통한 인터뷰지만, 성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앞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다양한 활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국제적인 호응과 협력을 얻기 위한 ‘소녀상’ 설치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캠페인 전개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낍니다. 저도 이에 힘을 받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 대만, 미국, 독일, 일본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위안부’라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간의 협력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했던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상호 지원과 협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대한 압박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치적으로 촉구하는 국제 운동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가 함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동 세미나 개최, 책자 발간, 영화 상영,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협력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현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한국의 다양하고 활발한 사회 운동은 큰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끝으로 인도네시아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참상을 한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알릴 기회를 마련해 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에카 힌드라티 (Eka Hindrati)

  •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해주세요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해주세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주제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 대면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2019년 12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이 뮤지션 30여 명의 참여로 발매됐다.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던 송은지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2012년에 황보령을 포함한 여성 인디 뮤지션들의 참여로 첫 앨범을 발매했고, 2013년에 <이야기해주세요 – 두 번째 노래들>이 나왔다. 작년 발매된 3집에서는 송은지뿐 아니라 황보령도 앨범 전체의 콘셉트를 잡는 기획팀으로 활동했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논의할 때면 기획팀 서상혁이 자리를 마련했고, 이후 실제 앨범 발매를 앞두고는 저작권 업무를 비롯한 앨범 발매 관련 실무를 이윤혁이 맡아 진행했다.  이들은 이번 앨범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직시하지 못했던 과거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시도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지보다는 좋은 음악으로’ 이야기를 건네길 원한다. 2012년에 시작한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었는지, 세 번째 앨범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떤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었는지를 직접 듣기 위해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에서 기획팀을 만났다.   음악으로 ‘위안부’ 문제와 여성을 이야기하다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 <결> 독자분들께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말씀해주세요. 송은지 : 저희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할머니가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회가 여성의 신체에 부여하는 기능이 시효를 다했을 때 여성이 소외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언젠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위안부’ 할머니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할머니에서 출발한 씨앗이 ‘위안부’ 할머님들에 대한 작업으로 이어진 거죠.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2006년 무렵에는 시각을 확장하고 싶어 뮤지션들끼리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을 하기도 했어요. ‘릴리스의 시선’이라는 모임이었는데, 함께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 모임에 있던 멤버들이 1집에 많이 참여했죠. 모임 멤버들에게 여성 뮤지션들의 시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노래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이후에 2집까지 발매하자 수익금이 조금 발생했는데요, 이번 3집은 수익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결정이기도 했어요. 물론 ‘돈을 기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몇 년 동안 했죠. 1, 2집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에너지의 측면에서 부작용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작업은 결국엔 다시 음악으로 돌아와 그 여정을 마무리 짓는 과정이었어요. 혼자가 아니라 되도록 함께 이 마음을 나누는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기획팀을 꾸리게 됐어요.  Q.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무렵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 인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금은 ‘홍대 여신’이라는 말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종의 혐오 표현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지요. 그런데 1집 때 관련 기사를 찾아보면 참여한 뮤지션들을 ‘홍대 여신들’이라고 표현한 기사들이 많더라고요.  송은지 : 당시의 ‘홍대 여신’ 트렌드가 너무 화가 나고 싫었어요. 활동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야기해주세요> 1집을 발매했을 때 ‘홍대 여신이 모였다’ 이런 식으로 보도가 되는 거예요. 여성의 아픔을 이야기하는데 칭찬이랍시고 ‘홍대 여신’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니 화가 났죠. 그런데 앨범 홍보를 해주는 기사에 대고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황보령 : “좋은 뜻인데 왜 싫어하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별걸 가지고 다 기분 나빠한다’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송은지 : 사실 앨범을 기획한 의도와도 중요하게 닿아있는 부분이잖아요. ‘여신’이라고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홍대 인디신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여성 뮤지션들의 이미지가 뭉뚱그려 포장되고 소비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멋진 작업을 하는 여성 뮤지션들이 함께 마음을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황보령 : 저는 정말 억울했어요. 전 언제나 장군, 칼잡이 같은 이미지였는데 여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 화를 내고 다녔죠. (웃음)    경계를 넘어, 음악인으로서 ‘위안부’ 문제 사유하기 Q. 송은지 님이 다른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라고 하면 떠오르는 관습적이거나 구태의연한 요소들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습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송은지 : 제가 처음 수요시위에 참여했을 때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거의 30년 동안 한결같은 방식으로 시위가 계속되고 있잖아요. 현장에는 매번 ‘바위처럼’ 같은 민중가요가 나오고요.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시위에서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들이 마이크를 들고 “사과하라! 배상하라!” 외치는 모습으로만 기억된다면, 사람들이 점점 더 거리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죠.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같은 에너지로 공감하고 분노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누군가는 지겨워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회피하고 싶어질 수도 있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할머님들에게 힘을 실어드릴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시위가 아닌 다른 경로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일본군‘위안부’ 이슈가 역사 속에 박제된, 피해 당사자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1집 때는 <이야기해주세요>가 뮤지션 각자의 경험을 담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작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참여 뮤지션들에게 ‘결과물 자체가 하나의 몸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이제서야 말하지만 이런 모호한 제안을 다들 승낙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이윤혁 : 예전에 송은지 씨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사람들이 피로해하는 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관습적인 요소를 환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Q. 3집에는 남성 뮤지션들도 프로젝트에 참여하셨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젠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남성의 관점에서 이 사안을 바라보는 지점이 여성과는 다를 것 같거든요. 남성으로 태어나 자의든 타의든 젠더 권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남성 멤버들의 참여가 조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서상혁 : 전 사실 역사를 바라볼 때 존재 대 존재의 관점에서 더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인들도 가해자로서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정된 입장에서 벗어나 상황과 맥락을 알게 되면 다른 방식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보령 : 저도 전쟁에 관해서는 모두가 피해자라고 주장해요. 국가와 성별의 경계에서 벗어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송은지 : 사실 1집 때도 남성분들이 참여를 안 하신 게 아니에요. 당시 모금 공연에도 남성 뮤지션들이 참여를 해주셨어요. 다만, 제가 앨범이라는 형태에 집착하는 옛날 사람이다 보니, 앨범을 여성 뮤지션의 가시적인 결과물로 구성하고 싶다는 고집이 있었던 거죠. 이번 3집에서는 1집 모금 공연에 참여해주셨던 남성 뮤지션분들에게 먼저 연락을 드렸어요. 이윤혁 : <이야기해주세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본 결과물이에요. 저희는 어쨌든 음악이라는 예술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고 기록해서 후대에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이라는 매개체 덕분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남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위안부’에 대해서 논해봐!’라고 하면 딱딱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있기 쉬운데, 우리가 이 문제를 음악으로 다뤘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잘 모르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사유해본 경험이 적기 때문이죠. 이런 측면에서 <이야기해주세요>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뮤지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각자의 언어로 만드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보거든요. 특히 음악이라는 장르 특성상 3~4분 이내의 시간에 그 사유의 과정과 감정을 압축해 전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창작의 고통이 있었을 것 같아요. 황보령 : 맞아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원래 작업하던 록, 트랜스, 테크노 장르로 전형적인 ‘슬픔’의 분위기를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앨범 전체의 맥락을 생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어요.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개인 앨범에 수록했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을 편곡해서 실었어요. 울지 않고 공연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감정적인 곡인데, 가사나 메시지가 할머님들의 역사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좀 더 희망찬 느낌으로 편곡했죠. 송은지 : ‘포기한다고 몇 번 전화하려고 했었다’고 말씀하신 뮤지션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곡을 써야 할지 다들 굉장히 어려워하시더라고요. 그래도 결국에는 완성을 해주셨고, 그럴 때마다 정말 감동이었어요. 이윤혁 : 저희 앨범이 ‘위안부’라는 주제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죠. 그런데도 기획자로서 뿌듯한 것은 곡들의 스펙트럼이 정말 다양하고 뮤지션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표현한 방식이 너무 다르다는 점이에요.  Q. 말씀하신 대로 다른 장르와 성격을 가진 뮤지션들이 참여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 것이 이번 앨범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칫하면 다양한 메시지들이 섞여 어수선해 보일 수도 있잖아요. 기획팀의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서상혁 : 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참여하는 뮤지션들에게 이 문제를 시작으로 평화와 연대에 관한 상상을 염두에 두고 작업해주시길 요청했죠. (이번 앨범은 CD1, CD2 두 장의 CD로 나눠서 발매됐다. 직접적으로 일본군‘위안부’를 소재로 한 노래는 CD1에, ‘평화와 공존’이라는 확장된 주제의 노래는 CD2에 담았다. -편집자) 송은지 : 3집 기획에서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수록곡들의 주제가 소수자 이슈와 같은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참여 뮤지션들에게 이렇게 요청을 드렸지만, 많은 분이 이슈를 확장하기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에 대해 고민하기를 선택하셨더라고요. 그게 각자에게 당면한 어떤 과제처럼 느껴진 것 같아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행해주신 결과물이 앨범에 담긴 거고요. 이윤혁 : 저는 개인적으로 결과물이 오히려 더 모호하고 흐릿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거꾸로 표현하면 구호보다 음악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음악을 우연히 듣고 나서 ‘이 음악이 어떻게 생긴 거지?’ 하며 궁금해지는 게 음악 팬의 마음이고, 음악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잖아요. 노래가 좋으면 이 앨범이 만들어진 계기와 과정을 찾게 되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까지 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상혁 :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을 환기하고 감정을 느끼는데, 그 감정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잖아요. 음악 자체가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빛이 통과하는 대상에 따라 산란하는 방식이 달라지듯, 이 음악들을 듣고 청자들은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할 수 있겠죠.    단지 좋은 음악으로 기억되길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뮤지션들의 사유가 담긴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시나요?  송은지 : 간단해요. 좋은 음악, 아름다운 음악으로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다음에 메시지가 전달된다면 감사한 일이죠. 1집에서 가장 많이 신경을 썼고 개인적인 욕망과 닿아 있던 부분은 ‘여성 음악인들의 결과물을 담고 싶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음악을) 만들어보자’라는 거였어요. 그것이 3집에서는 ‘할머니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로 발전한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서상혁 :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일상을 멈추게 한 지금 상황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만 잘한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 주체가 협력하고 연대해야 하는 상황이죠. 마찬가지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 것으로 가져와 당면하는 것, 실제로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황보령 : 음악이 먼저고, 구호는 나중이에요. 그게 저희가 말하고 싶은 것과 딱 맞는 것 같아요.  이윤혁 : 음악을 잘 들어주세요. 앨범에 16곡이나 실려있으니 이 중에 자기 취향에 맞는 곡이 한 곡 정도는 있을 거예요. (웃음)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와 관련해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서상혁 : 이걸 계기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야외에서 공연하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 뮤지션들과 기획 공연을 가볍게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송은지 :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무엇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인지 대화를 나누는 공연이나 모임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이 앨범에 담긴 음악들도 할머님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잖아요.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정말 음악은 사랑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Credit 기획/진행 : 현승인   인터뷰/글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4월 21일 화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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