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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아니,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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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의 축사를 이용수 선생님께 부탁드리고자 대구로 향했다. 가능하다면 선생님의 근황을 듣고 컨퍼런스에 기대하시는 바를 간략히 들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짧은 지면에 풀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 마디로 뵙고 난 소감을 전해야 한다면 나는 이 방문기의 제목을 '기뻤어요'나 ‘아니, 기뻤어요’라고 정하고 싶다. 선생님께 들은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기도 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기처럼 투명하고 선선히 하시던 말씀 “아니, 기뻤어요.” 9월 15일, 대구 서문로 대구 중앙로역에 내려 몇 걸음만 떼면 바로 저만치에 야트막한 2층 건물이 보인다. 한창 솟아오르고 있는 콘크리트 빌딩 숲 속에 소롯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목조 건물. ‘희움’ 희움. 나도 모르게 ‘기쁨이 움트는 곳’이라고 읽는다. 한 번 시작된 오독(誤讀)은 반복된다. 본래 뜻은 ‘희망을 꽃피움’이라는 희움을 나는 자꾸 ‘기쁠 희’에 ‘움틀 움’ 혹은 ‘움막 움’이라고 멋대로 기억하곤 한다. 희움에 들어서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궁글리고 있을 때 간사님께서 초록 라벨이 붙은 디카페인 음료를 내어주신다. 안녕 라일락 아직 선생님은 오지 않으셨다. 기다리는 틈을 타 전시관 안뜰로 향한다. 초록 잎을 무성히 내민 라일락 나무가 그늘 한 켠을 내어 준다. 안녕. 라일락님. 3.1 운동 직후인 1920년대부터 100여 년을 이 곳에 있었다는 이 나무 하나만을 보려고 여기 오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움 주변은 온통 역사의 현장이어서 거리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희움 정문 앞 마당엔 3.1운동 당시 행진 경로 표식이 박혀 있다. 열 걸음 안되는 대각선 맞은편에는 1930년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투입된 식산은행 건물이 그대로 남아 대구 근대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키 큰 라일락이 지켜본 그간의 이야기만으로도 이 곳에 온 보람은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을 즈음 택시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연보라 하얀 갖신과 연보라색 한복으로 단장하신 이용수 선생님이 지팡이에 의지해 들어오셨다. 라일락 빛깔이 곱게 잘 어울리신다.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시작을 축하합니다.” 카메라가 켜지고, 쨍한 조명 앞에서 원고 없이 긴 문장을 한 호흡에 말해내기란 방송인들도 어려운 법이다. “먼 데 있는 저희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국제(사회) 여러분들께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또박 또박, 틀림없이 이어지는 말들에 감탄할 때쯤, ‘흐-읍’ 선생님은 얕게 숨을 고르시고는 돌연 “조선 때, 식민지 때, 무법 때...”로 돌아가신다. 당신이 끌려간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국제 사회 여러분들께’, ‘피해자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나니 그 이야기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아마도 지난 30년 가까이 카메라가 켜지고 나면 어김없이 돌아온 질문들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이명 “양손을 묶고 (그들이) 전기를 한 번 돌린 때 제가 크-게 엄마라고 한 번 불런 거이 기억이 납니다. 그랬는데 지금 머리에서 귀에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소리가 납니다. 머리에서 나는지 귀에서 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머리와 귀를 울리는 이명은 당신 스스로의 비명. 울부짖음. 매일 그렇게 엄마, 엄마 부르짖고 계시는구나. 내가 어떻게 하마 “추우나 더우나 아이들이 줄로 서가 있어요. 안아 돌라고. 내가 안아줍니다. 쪼맨한 사람들이 와서 울어요. 너거가 무슨 죄가 있노. 너거를 와 울리노.” “이 생각을 하면은 내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 문제를 해결할게 차라리 내가 죽으라카믄 죽겠어요.” “내가 어떻게 하마 이걸 해결을 할까 생각할 적에 무식한 내가, 배우지도 못한 내가 돌지도 않고 열심히 해보자 해서 지금까지 왔어요.” 한 번 말을 시작하시면 2시간 가까이 끊김이 없으시다. 간간히 ‘허-억’ 하고 가쁘고 벅찬 숨을 몰아쉬고는 이내 이야기를 이어 가신다.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끊지 못하는 나는 선생님의 기분이 나아지게 할 질문이 무엇일지 궁리할 뿐이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정연하게 말을 이어가고 계셨다. 이런 피해는 외국에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선생님,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였나요?“ 100여 년의 시공간을 오가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시다. 질문이 적절치 않았던 걸까? 잠시 머뭇거리시는 선생님께 함께 간 동료가 고쳐 질문을 드린다. “가장 기분 좋으셨을 때요. 선생님.” 원투원 “원투원.” 이내 흐트러졌던 페이스를 바로 잡으신 선생님의 첫마디는 ‘121’이었다. “제일 좋아서 많이 울었을 때가 마이클 혼다 의원(등이) 워싱턴에서 121 결의안 통과했을 때요.” “의장님이 잘 걷지도 못하시는데, 자기 사무실에 저를 앉혀 놓고 여자 비서가 (돕고).. 근 한 달로 미국 국회에서 살았습니다. 이 분들이 땀을 뻑뻑 흘리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의장님이 이 결의안 통과시키면 뭘 사줄라캅니까 물어요. 김치하고 불고기 사 달라 합디다.” “의사봉을 딱딱딱 세 번 치고 이용수 할 때(결의안이 통과될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너무 놀라고 좋아서요. 춤도 췄어요.” 툭툭 탁! 선생님의 발은 저절로 리듬을 타고 어깨가 들썩였다. 미 하원 121호 결의안 통과 순간의 기쁨이 춤사위 속에 일렁인다. 보조개가 어여쁘시구나. “모두 감사한 분들 덕분이지요.” “처음에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잖습니까?” “형님 아우님들(한테) 가마(=가면) 내가 해결하고 왔다 해야지요.”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북한… 고맙고 그리운 사람들이 오가는 인터뷰 속에서 선생님의 기분이 한결 나아지신 듯했다. 이제 카메라를 꺼도 될 것 같다. 더 하실 말씀은 없는지 묻고, 이 여정들 속에서 혹시 힘들지는 않으셨는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껏 울고 난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답하셨다. “아니, 기뻤어요.” 여성과 교육 카메라와 조명이 철수하자 선생님은 마알간 얼굴로, 얼른 희움보다 큰 장소에 교육관을 짓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 희움은 지붕에 비가 샌다고 일러주신다. “비 오마 여기 물이 차가지고 (이 사람이) 밤새도록 퍼냅니다.” 곁에 서 있던 서혁수 희움 대표가 머쓱해하며 부러 아무일 아닌 듯 “뭘 밤새도록 퍼내요” 라고 얼버무린다. 그런 티키타카의 경쾌함과 애달픔이 공존하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지 몰라 나도 일단은 짐짓 웃어 본다. “여가 확장이 돼야지. 빨리 교육관을 지어야지. 역사를 아르켜야지.” 모든 피해생존자 선생님들이 배움과 교육에 대한 열망이 남다르셨지만 이용수 선생님은 자신과 미래세대 교육에 대한 염원이 그 천 배는 넘을 것이라고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당신 스스로가 70세에 경북대 대학원에서 2년간 철학을 공부하셨고 대구 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제가 법학을 할라켔어요. 변호사가 되어가지고 당당하니 변론하고 싶다 했을 적에 그 소리를 어디 가서 했냐 하면 2007년 도 7월... 워싱턴에서 원투원 결의안 하러 6월 28일날 갔어요. 제가 증언을 이래 하고 나니까 의장이 말을 잘한다꼬 변호사하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그래라도(=그렇지 않아도) 내가 법할 공부를 할라켔는데 어려워서 못했습니다 카이 뒤에서 우리 동포들이 막 박수를 치며 웃었어요.” “이 역사관 저는 이거보다 넓혀가지고 교육관을 짓겠습니다. 지어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올바른 ‘위안부’ 역사, 세계가 다 알고 또한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이 ‘위안부’ 역사를 해결해서 저 할머니들한테 가서 제가 해결하고 왔다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말 속에서 나는 ‘여성과 교육’, ‘여성과 정치’, ‘여성과 경제’ 등 무수한 버전의 ‘여성과 OO’을 본다. 그래서. 당신의 ‘기뻤어요’라는 한 마디를 바톤 삼아 내 손에 담아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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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묻기에서 듣기로 /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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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 이 글은 2019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소영현 선생님의 글에 대한 토론문 [피해자-되기 주체-서사의 곤경과 재현의 문제]를 바탕으로 수정 및 개고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학이 증언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은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문학이 증언이 되어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할까. 문학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말해질 수 없는가이다. 나는 몇 년 동안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의 여성인권 문제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취재하고 있는데, 당사자들은 모두 인터뷰를 연구목적으로 이용하는 걸 거부했다. 인터뷰 내용은 드라마나 소설과 같은 픽션으로 만드는 것만 가능했고 그것 역시 사전에 충분히 익명처리가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각서를 썼다. 성과 관련된 폭력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가 좀처럼 되기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가 이렇게 나서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성폭력 범죄의 별칭은 한때 ‘피해자 없는 범죄’였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다르다. 당사자의 증언은 증언집과 인터뷰, 국제법정에서의 발언 등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말해지지 않은 게 아니라 들려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두 번째 전제는 이미 말해진 이야기를 다시 문학을 통해서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가장 게으른 답변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싶었어요” 같은 대중성을 핑계 대는 것일 것이고, 가장 무책임한 답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폭력의 재현 불/가능성을 고민하며 답을 끊임없이 미루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증언문학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자기만의 답이 있어야 한다.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이 찾은 답은 무엇이었을까. 김숨의 소설 『한 명』과 ‘위안부’ 증언문학의 위치 김숨의 소설 『한 명』은 생존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 남은 날이라는 시점을 가장 중요한 서사 장치로 가져와 구체적 기억과 대화들을 ‘위안부’ 증언집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다. 왜 이런 장치가 필요했을까. 작가는 독자가 이 소설을 단지 허구로 생각할까봐 각주를 넣었고 상상력을 더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허윤은 이런 태도는 실화에 기반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진정성을 내세움으로써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둘러싼 쟁점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 한국문학에서 태평양전쟁에서 귀환한 학병들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소위 ‘학병 서사’를 만들어낸 것과는 달리, ‘위안부’ 문제는 증언 이후 30여 년 동안 서사적 내용과 형식을 모두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고 그 빈자리를 증언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유의 형식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증언문학이라고 해서 실화라는 점에 기대어 폭력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증언문학으로 알려진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레비, 돌베개, 2007)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당사자로서의 자기 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고, 이런 점이 이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문학적 성취일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해방시켰는지는 의문이다. 스스로 목숨을 거둔 프리모 레비나 빅터 프랭클 등을 보면 트라우마화된 경험을 계속 활성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정신건강의 위기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은 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실화 여부에 대한 강박적 증명에 답하지 않으면서도 규범화된 서사의 결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참조할만한 작품은 역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 2015)이다. 이 작품은 증언문학이 아니라 ‘목소리 소설’이라고도 불리는데, 작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의 경험이 어디에도 제대로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해 이 적극적인 망각은 여자의 몸으로 전쟁에 참전한 경험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자장 속에서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를 보면 증언문학의 형식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증언될 수 없는 혹은 증언되어도 기억될 수 없는,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 가능하게 하도록 규범화된 서사에 대해 증언문학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단일한 서사규범과 타자화의 문제 소영현[2]은 실제 증언을 소설 속으로 가져오는 것은 ‘진정성’의 알리바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증언자이자 기록자의 위치를 드러내는 ‘사회적 맥락화 작업’의 일부라고 분석한다. 김숨의 소설은 증언이라는 발화행위가 주는 대체불가능성을 환기하고, 개별 피해서사의 반복이 아니라 증언에 나서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자를 구심으로 삼아 복수의 기억을 소환하며, 일부 생존자들에게 집중된 방식이라는 오해를 넘어 현재의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문제와 연동된다는 것이다. 허윤과 소영현 모두가 공히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서사규범이 지나치게 단일하다는 데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담론이 교착된 이유는 우리 사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가 “식민지에 사는 미성년의 조선 소녀들이 일본 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갔다”는 단일한 서사규범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의 문화적 재현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은 사실상 <귀향>(조정래, 2016)부터였다. 영화 <귀향>은 피해 재현의 윤리에 대한 저간의 진척된 고민들을 뒤로 한 채, “이것이 (증언을 통해 확보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 기대어 위안소를 부감 숏으로 찍고 성폭력 피해 장면을 성애적인 앵글로 찍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IP TV로 출시된 <귀향>이 사용자의 검색에 따라 실시간 자동완성 검색어가 만들어지는 환경에서 (성폭력을 조금 거친 에로물의 성애적 재현 장면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위해 만들어져, 개봉되지 않고 IP TV로 유통되는 19금 영화로 목록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 ‘성폭력 영화’라는 장르로 분류되었던 바를 비추어보면, 이러한 비판은 조금도 과도하지 않다. 다시 강조하자면 문학이 증언이 되려면 그것이 사실에 기반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오히려 당사자의 말하기를 다시 착취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이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껏 말해졌던 이야기가 왜 들리지 않았는지, 한국에서 ‘위안부’에 대한 재현이 어떤 서사규범으로 통용되어 왔는지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피해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증거로서의 증언이 아니라, 증언 서사의 ‘문학적’인 전회일 것이다. 나도 피해자요 ⓒ백정미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과연 김숨의 『한 명』을 통해 몇몇 피해자의 경험에 한정되어있는 기존의 ‘위안부’ 서사규범이 증언집과 공식기록에서 채취한 300여개의 각주를 통해 단수에서 복수로 바뀌는 맥락이 구성되었을까. 316개의 숫자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떤 증언을 왜 선택했느냐에 있다. 이 각주가 피해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피해사실의 진정성을 증명하게 하는 용도에 집중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증언 문학이 생존자의 증언에 기대어 ‘위안부’의 피해서사에만 집중한다면, 그리고 그 몸에서 일어난 흘러내리는 몸의 기억을 묘사하는 데에만 몰두해 있다면, 공감을 위해 순도 높은 피해자성을 요청하는 상상적 동일시에 기반한 (타자 배제적) 재현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 과거가 아니라 보다 현재적인 차원의 사회적 맥락을 구성해내는 점에 재현이 가진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증언 문학은 사회적인 맥락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그에 의존하는 형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위안부’ 증언을 재현할 때는 반드시 말할 수 없었음이라는 사회적 맥락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말해왔음, 반복해서 말했지만 들을 수 없었다는 맥락의 역사가 재현되어야 한다. 김숨의 소설 『한 명』이 가진 문학적인 성취는 당사자의 증언으로 채워진 각주 316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등록되지 못하고 아직 말하지 못한 당사자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상상력으로 시작했다는 데 있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기존 ‘위안부’ 운동은 당사자의 소멸이라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단 한 명이 남았을 때라는 가정 자체가 이 소설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사회적 맥락이다. 한 명이 남은 것이 아니다. “나도 피해자요..”라는 물결에 들어갈 수 없었을지언정, 당사자의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투운동’의 핵심은 나도 피해자라는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도’라는 ‘위드 유’의 응답에 있었다. 이 운동에서 피해자는 ‘당한’ 존재가 아니라, 미투를 ‘하는’ 능동태의 존재로 주체성의 형식이 변했다.[3] 나‘도’라는 조사에 붙여진 스타카토가 이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피해자를 타자화시키거나 문제를 개별화시키지 않으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의 서사규범은 어떠했는가. 원래 처음부터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는 점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었다. 김학순이 “내가 피해자요”라고 말하고, 그 뒤로 이어진 “나도 피해자요”의 연쇄가 있었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각각의 경험들이 따로 또 같이 귀에 ‘들려지는 순간’이 있었다. 미투운동은 서로의 경험에 대해 묻지 않는 대신에 자신의 경험을 종으로 횡으로 이어간다. 그리하여 미투운동이 드러낸 사회적 맥락은,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시간성과 공간성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위안부’ 서사규범은 국가주의적 대결과 국제법적 접근을 통해 부인주의자들의 선동에 맞서기 위해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데 집중되어왔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증언의 반복을 통한 사실의 증명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된 경험을 끌어안고 생존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서사적 상상력 그 자체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위안부’ 서사규범의 사회적 맥락은 재구성될 수 있다. 각주 ^ 허윤,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정성의 곤경– 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 , 『여성과 역사』 29호, 2018. ^ 소영현,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 『구보학보』 22호, 2019. ^ 권김현영, “4장. 미투운동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능동태의 페미니즘이 해낸 윤리적 정치적 전환”,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휴머니스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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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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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침묵을 통과해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요컨대 깊게 내쉬는 한숨 소리, 참다못해 터져 나온 기침 소리, 고통을 억누르는 신음 소리 등, 미처 ‘말’이 되지 못했거나 혹은 말이 되기 전 ‘음성(音聲)’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소리가 그렇다. 그 밖에도 주변을 살피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눈동자라든가,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거나 손톱을 깨무는 등의 사소한 몸짓(행위) 역시 침묵 속에서만 발현되어 ‘소리’로 인식되거나 포착될 수 있다. 이 소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 주위에 ‘말’로서 산재해 있었으나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체계 및 언어생활 내에서 ‘말’의 범주로 승인되지 못했기에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소음’이나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로 치부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리는 소리를 단순히 어떤 소음에 지나지 않은 소리로 여기고 말 것인지, 아니면 말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그러한 존재의 가시화 여부와도 긴밀히 연관된다. 의미를 얻지 못한 말이 없어지고, 축소되어야 하는 소음으로 전락해 그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처럼, 자신의 말을 ‘말’로서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응당 가져야 할 존재 의미와 자신의 자리조차도 쉬이 확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로 긴 시간, 문학은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언어’를 다루는 최전선으로 그 가치를 단단히 다져왔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언어’라고 분류, 사용하고 있는 구조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체계가 가지는 적절성 및 영향에 대해 정밀한 검토나 성찰 없이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해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나마 시의 언어가 기존의 언어체계를 지키지 않거나 무화하는 방식으로 언어의 기능을 의심하고, 언어 바깥의 영역을 탐구/실험하는 등의 시도를 지속해오긴 했으나, 소설은 언제나 기존 언어의 기능을 강화하고 특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90년대 이후, 그리고 근래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기점으로 형성되었던 근대 (언어)체제의 산물이자 재현물로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문제점을 지적, 비판하는 비평적 흐름도 바로 이런 소설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에 사용되는 ‘언어’가 소수 집단을 배제하거나 소외시켰을 뿐 아니라 이들을 특정한 도식을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해 왔다면, 그간 우리가 향유해 왔던 소설과 소설 속 인물들은 얼마큼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구조 아래 우리는 소설에서 과연 도덕과 윤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소설의 가치가 보존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질문과 답변이 교차하는 가운데 재현물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재현 문제 역시 논외는 아니었다. 2015-2016년, 한국에서는 <제국의 위안부> 사태 및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증폭했다. 같은 시기 문화·예술 분야에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위안부’ 문제를 다룬 창작물(재현물)의 수가 급증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힘을 빈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작품 수 증가와 더불어 서사 내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겨났던 때이기도 하다. 과거 1990년대를 전후로 하여 발표된 작품에서 ‘위안부’ 피해자는 대개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한편, 2015년을 기점으로 하여 최근 발표된 작품의 경우, 대부분 실제 피해자의 증언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소녀, 혹은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여성 연대를 강조하는 서사화 방식이 특징적이다. 여성 신체를 성애화하는 과거 경향에 반해 피해자, 그리고 여성 간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현대의 흐름은 분명 얼마간 호전된 지점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소녀나 할머니의 모습으로 전형화된 ‘피해자 상(像)’을 반복적으로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마냥 이상적인 방식이라 낙관할 수 없다. 이는 반드시 ‘언어체계’를 경유하여야만 그 의미가 구성, 유통될 수 있는 ‘재현’이라는 방식 자체가 지닌 한계이자 문제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서 ‘재현’이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배제(누락)하거나 왜곡하고 어떤 ‘전형’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면 ‘더 나은 방식’의 재현만이 있을 뿐 실상 답을 특정할 수 없는 문제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2016년 장편소설 『한 명』(현대문학)을 시작으로 최근작 『듣기 시간』(문학실험실, 2021)에 이르기까지 김숨이 실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펴내는 동안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문제의식은, 그간 근대 언어체계에 의해 비가시화되었던 역사적 존재를 어떻게 서사 양식 안으로 들여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사유할 지점을 만들어준다. 『한 명』은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재현물이 급증하던 시기 발표된 작품 중 하나로, 실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참고, 인용한 것이 특징이다. 역사적 사건과 실화를 참고하거나 실제 증인의 증언 혹은 목소리를 인용한 사례가 『한 명』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김숨의 작품 속에서 각주 기호와 고딕체를 통해 강조된 인용의 흔적은 증언이 실제, 진짜임을 강조함으로써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숨이 실제 증언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이유는 작가의 말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소설적 상상력이 피해자들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까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상을 입힐까봐 조심”스러웠으며 실상 “그 증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 말했다. 즉 그는 애초 『한 명』을 집필할 때부터 증언(구술)을 소설이라는 언어체계 양식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정 정도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재현과 언어의 한계를 직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언어와 재현의 서사가 가지는 한계점 외에도 증언을 소재로 하는 재현물이 극복해야 할 또 다른 곤경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폭력의 경험과 기억을 모두 언어화하여 진술할 수 없다는 증언 불가능성의 문제다. 이는 죽음에 가까운 폭력을 경험한 생존자/피해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김숨은 작가로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말’에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전달할 수 없다는 이중적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 명』 출간 2년 후, 2018년에 동시 발표된 두 편의 증언소설집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는 김숨의 그러한 고민과 극복을 위한 실천이 잘 드러나 있는 텍스트다. 단순한 증언 기록집이 아니라 고(故) 김복동 님과 길원옥 님을 직접 만나 뵙고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여기에서 김숨은 ‘어떻게 쓰느냐’가 아닌 ‘무엇을 들을 것이냐’로 관점을 전환하여 재현의 문제에 접근한다. 두 분과 대화하는 동안 오갔던 말들을 포함해서 ‘침묵’까지도 ‘말’로 간주하여 텍스트로 들여옴으로써 차마 언어로 발화될 수 없었지만 신체에 선명하게 새겨진 상흔과 고통의 기억을 듣고자 한 것이다. 『한 명』을 지나 두 편의 증언소설집을 펴내기까지 고민의 과정과 경로는 최근작 『듣기 시간』(문학실험실, 2021)에서 더 자세히 드러난다. 구술 증언 채록자인 ‘윤주’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 증언을 책으로 엮는 프로젝트의 연구자로 참여하며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을 그린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가장 최근에 발표된 소설이지만 실상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를 작업하는 시기의 자신의 경험을 자전적으로 풀어 쓴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김숨은 스스로를 ‘작가’가 아닌 ‘인터뷰어’ 즉 ‘청자’의 입장에 두고 두 분의 말씀을 옮겨 적는 게 아니라 청해 ‘듣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애초 불가능한 작업이었”(『듣기 시간』, 문학실험실, 2021, 30쪽)을지 모를 받아쓰기를 포기하고 온몸으로 발화하고 있는 그의 말을 신체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는 해독할 수 없었던 그녀의 “눈의 말”(19쪽)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마침내 침묵까지도 대화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써 “받아쓰는 이의 문자 언어”(30쪽)가 아닌 “말하는 이의 문자 언어”(30쪽)가 증언으로 기록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23분이 넘게 이어지는 긴 침묵 속에서 비록 말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표정, 몸짓, 한숨, 눈빛, 얼굴빛, 시선, 눈동자의 떨림, 망설임, 눈물”(9쪽, 10쪽)이 내는 소리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아픔을 얼마간 전해 받을 수 있다.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님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김학순 님을 시작으로 이어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그대로 은폐되었을지 모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 폭력과 전시 성폭력 문제를 의제화함으로써 국경과 인종의 경계를 허무는 초국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년 성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괄시할 뿐 아니라, 이들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2021년 올해에만 국가에 정식으로 등록된 ‘위안부’ 생존자 중 세 분이 세상을 떠나, 이제 남은 생존자의 수가 열세 명이 되었다. 소설, 『한 명』의 가상적 배경으로 제시되었던, 생존자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더 이상 ‘가정’이 아니게 되었으며, 이제는 한 명 ‘이후’를 각오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즉 이들의 ‘말’을 잊지 않고 기록하는 일과 더불어 이 말들을 앞으로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를 모색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물론 많은 논의가 필요한 일일 테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너’와 ‘나’라는 구획된 경계를 넘어 여럿이자 하나로 연결된 사례를 경험/목격한 바가 있다.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용기를 얻고 ‘나도 피해자’라는 말을 하게 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사례가 그러하고, 근래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일어난 다양한 연대의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의 목소리와 존재를 지지대 삼아 이어질 수 있었던 ‘이어 말하기/쓰기’는 마지막 한 명의 생존자 이후를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이들의 목소리와 말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여럿인 동시에 하나로 연결된 몸과 몸을 넘나드는 공통 감각을 통해 우리의 신체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말해지지 않았거나, 말해질 수 없었던 ‘소리’들 까지 빠짐없이 들을 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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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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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 특집: 역사, 증언, 그리고 문학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30년.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듣는’ 우리는 어디까지 와있을까. 낯선 땅으로 ‘끌려간 소녀’, 고통의 기억을 몸에 새긴 ‘할머니’,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여성인권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저 ‘피해생존자’로 한정하고 손쉬운 프레임 안에 가둬온 것은 아닌지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6년 이후 또렷해진 페미니즘 담론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복수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2016,현대문학)은 발표 이후 꾸준히 이 ‘재현’의 문제를 논하기 위한 재료로 이야기되어 왔으나, 이 의제가 갖는 중요성과 무게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었는지 의문이다. 2021년 9월, 동명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여 무대에 올랐고,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극중 상황과 마찬가지로 정부 등록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가고 있다. 웹진 <결>은 피해 당사자이자 목격자, 증언자이자 기록자로서의 ‘한 명’들의 기억이 현재 한국 문학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어떤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할지 진지한 논의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소설 『한 명』을 포함한 김숨 작가의 글을 중심으로 네 명의 필진이 ‘위안부’ 문제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이 각각의 질문이 앞으로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01. 소설 『한 명』이 연극 <한 명>이 되기까지 | 국민성 02. 묻기에서 듣기로 단수에서 복수로, ‘위안부’ 서사 규범의 변화가능성 - 증언소설로서의 김숨의 『한 명』 | 권김현영 03. ‘한 명’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 강희정 04. 저문 증언의 시대에서 | 박혜진 구술사는 약자로서의 소수자가 권력이 된 주류 역사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보편을 점거한 주체의 관점으로 쓰이는 역사에 균열을 내고 주변화된 잔여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의 이면을 그리는 동시에 불완전한 역사의 빈틈을 메운다. 그러나 몇몇 개인의 이야기에서 역사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의미를 도출해 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표성의 부재와 재현의 불완전성이 장벽처럼 가로막혀 있는 탓이다.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가 개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근거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착각하고 합리화하는 존재인 인간이 기억하는 불완전한 이야기가 어떻게 사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까.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 이론』(정세경 옮김, 두번째테제, 2021)은 개인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생활사 이론이 가지는 보편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질적 조사에서 그려지는 디테일이란 ‘리얼리티의 복수성’을 부르짖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들의 기억이나 경험, 이야기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무엇이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구술자로서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존재하며 천천히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이러한 몇 겹으로 포개어진 ‘사실’을 최후의 독자에게 건네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디테일이라는 것은 실재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하다.” -기시 마사히코, 『망고와 수류탄』, 29~30쪽. 실재에 도달하게 만드는 생활사 이론은 ‘선택’이 아니라 ‘증식’의 세계관을 지향한다. 모순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구술은 모순을 정돈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설을 최대한 늘려 나감으로써 인간이 구술하는 상황에 대한 상상력의 경계, 혹은 진실의 경계를 넓혀 나가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인간과 시대에 대한 전면적 이해는 “그 상황의 가혹함을 축소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이해’” 위에서 가까스로 가능해진다. 우리는 구술사 혹은 생활사가 전해 주는 “인생 이야기”의 무게를 통해 그들이 살았던 역사의 실재에 도달한다. 전쟁이 끝나고 76년이 지났다. 전후를 기준으로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전쟁의 상처가 몸에 새겨진 이들과 함께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전쟁을 체험했고, 무엇보다 전쟁의 피해를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 있으며, 이들의 증언은 전쟁의 성격에 대한 진실을 한층 실재적으로 구성한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표현처럼 우리는 ‘증언의 시대’를 살아 온 것이다. 서경식의 증언은 이야기를 통한 증언이며, 무엇보다 증언하는 주체와 전달자, 그리고 증언이 도달하는 사람을 ‘연결’하는 증언이다. 일본군‘위안부’ 송신도 님의 증언을 이야기로 전달하기 위해 서경식은 자신의 어머니를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이 탄생했다.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이때 서경식이 대상화와 소비의 문제를 깊게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와의 대담을 묶은 책 『책임에 대하여』(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한승동 옮김, 돌베개, 2019)에서 그는 다시 한번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방식이 야기할 수 있는 한계 지점에 대한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위안부 출신 송신도 씨와 같은 해에 태어난 어머니를 ‘자료’로 제공한다는 것은, 내가 어머니를 소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식과 늘 대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인데,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내 어머니가 송신도 씨의 운명을 좇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일이 ‘위안부’가 이른바 추상적 언설의 대상이 아니라 살이 붙고 피가 통하는 존재임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시 마사히코와 서경식의 말에서 공통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류 역사에 균열을 내는 증언의 말하기에서 중요한 것이 ‘추상적’인 것과 구분되는 ‘실재’적 감각이라는 점이다. 추상적 언설의 역사에서 구체적 감각의 역사로 전환되는 사이, ‘증언의 시대’가 있다. 2016년에 출간된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현대문학)은 증언의 시대가 맞은 새로운 전환점을 ‘호명’한 소설이다. 『한 명』은 그때까지 자신도 ‘위안부’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채 살아온 어느 화자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증언자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상상된 마지막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증언의 시대가 도달한 어느 지점을 상상한다. 증언의 시대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이 소설은 ‘저문 증언의 시대’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일몰의 시간을 빌려 증언의 시대가 서 있는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증식의 세계관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시간을 목전에 두고 그리는 증식의 세계관이 어떤 의미를 형성하고, 또 문학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실재적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마흔일곱 명에 아홉 명을 더하면…… 가게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계산할 때에는 그럭저럭 돌아가는 덧셈과 뺄셈이 그녀는 잘 안 된다.” -김숨, 『한 명』 부분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계산할 때에는 문제없이 돌아가는 연산이 ‘위안부’의 수를 헤아릴 때에는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정량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산의 법칙으로 바라보면 이들의 세계에는 마이너스만 존재하는 필패의 세계에 가깝다. 증언하는 자들의 존재가 소멸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증언의 시대는 저물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줄어들기만 하는 세계에서 증언의 힘이란 한계가 분명한 일시적 진실에 불과한 것이다. 사라지고 말 진실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한계 시간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상상력이 무엇일까. 김숨에게 증언이 증식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때의 증식은 한 세대에서만 일어나는 옆으로의 증식이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아래로의 증식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마지막 증언자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은 경험자이지만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그를 만나러 올 사람은 체험자가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증인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까. 눈물이 나고 기가 막히고 감감해서…….” 김학순 여사는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중략)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가 238명이라고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한 명밖에 안 남았을까 싶어,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귀에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벽에 덩그러니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테두리가 둥글고 검은 바늘시계다. 시간이 없다…….” -김숨, 『한 명』 부분 부재의 증거가 증거의 부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이 순간에도 적용된다. 증언의 시대가 ‘실재적 감각’을 통해 기존의 역사에 균열을 냈다면 실재하는 증언자가 사라지고 없을 저문 증언의 시대는 실재를 대체하는 다른 감각의 출현이 필요하다. 증언자가 없다고 해서 증언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김숨의 소설이야말로 그 자체로 포스트 증언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생존자의 목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 명』에 등장한 ‘위안부’의 증언은 ‘증언록’이 아니다. 그렇다고 ‘구성’된 이야기 속에 증언록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기록을 배치한 이 소설을 ‘픽션’이라고만 부를 수도 없다. 증언록과 픽션 사이에 위치한 『한 명』을 편의상 ‘증언소설’이라 부른다면, 이때 이 증언소설은 증언할 수 있는 피해자이자 생존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다. 문학은 한 사람의 기억을 한 시대의 기억으로, 한 시대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추상화할 수 있다. 이때의 추상화는 증언의 시대 이전의 추상화와 전혀 다르다. 전자의 욕망이 하나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라면 후자의 욕망은 복수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한 명』을 다 읽었을 때 기분이 생각난다. 경기 종료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에 아직 체력이 바닥나지 않은 교체 선수가 가벼운 몸짓으로 그라운드를 향해 뛰어오는 걸 보는 것 같았다. 벤치에는 더 많은 선수들이 앉아 있고, 따라서 연장전으로 가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상황. 선수에서 다른 선수로 이어지는 사이 증언의 현장성과 일관성은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증언이 생존자들의 증언이 지닌 가치를 반감시킨다고는 볼 수 없다. 가혹함을 축소하는 역사에 반해 가혹함의 가능성을 증식함으로써 그들이 거기 있었다는 존재감을 부여하는 ‘이야기’들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은유와 상징의 힘으로 거듭 태어나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살아 있는 현재적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소설이 고전이 된다. 『한 명』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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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발전주의와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 -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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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여성은 생명을 낳고(give), 남성은 생명을 파괴한다(take)… 이제까지 백인 남성은 유색인 남성을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으로 대상화해왔다. 이것이 문명의 원동력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이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의 요지는 간단하다. 지구(자연)와 당대 자본주의(인간 활동)는 공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인 저자 사이토 고헤이는 그간 환경운동의 대표적 구호였던, 지구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SDGs(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아편”이라고 말한다. 텀블러 쓰기 같은 일상의 운동 역시, “멸종에 이르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95쪽)고 비판한다. 나는 “sustainable”이 “지속 가능한”이란 표현으로 번역된 것 자체가 그간 한국 사회의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유지 가능한”. 이 표현이 적절하다. 실상은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유지 가능한 발전”이었다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일찍 제기되었을지도 모른다. 지속은 없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자본주의와 지구는 동반자가 아니다. 현재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지구 파괴를 막을 수 없다. 저자는 경제 성장 신화를 버리고 규모 축소(scale down)와 속도 둔화(slow down), 감속주의(減速主義)를 주장한다. 이 책의 주장이 처음은 아니다. 서두에 인용한 보부아르의 말대로, 성차별과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공생 관계에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반자본주의 투쟁부터 영성 페미니즘까지 다양하지만 1970년대부터 에코 페미니스트들과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대상화 없이는 작동할 수 없음을 이론화해왔다. 이에 반해 저자의 방법론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양극화에 저항한 페미니스트들도 동참했던- “Read Marx, again(마르크스를 다시 읽자)” 운동의 생태주의적 버전이다(그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두번째테제, 2020)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본론』으로 ‘돌아가’ 대안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성장(脫成長) 개념을 도출해내고, 이른바 3.5% 이론을 제시한다. “전체 인구 중 3.5%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심으로 저항하면 반드시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회운동론이다. 독일의 녹색당도 인구의 5%가 녹색당에 가입하면 완전히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해왔고, 그들은 지금 ‘현실 정치’에 진출했다. 그간 탈식민 여성주의나 오리엔탈리즘에 저항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약점을 역사주의로 보았다. 즉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직선상의 단일한 시간 개념에 따른 시기 순서의 ‘하나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원과 선두를 상정한 이러한 시간 개념은 발전주의의 원동력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진보(progress)라고 여겨졌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이 진보 개념은 절차적 민주화와 발전주의를 동시에 의미했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는 구호는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한국의 진보 세력이 발전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다. 한편 발터 베냐민, 요하네스 파비앙,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 역사철학자들이나 캐롤 길리건, 사라 러딕 같은 보살핌 이론가들은 ‘수레바퀴’의 지속 불가능성과 그 방향의 반(反)민중성을 제기해왔다. 하지만 자본가들과 그들에게 주체적으로 종속된 우리의 일상은 결국 지구 파괴 및 팬데믹(pandemic·세계보건기구(WHO)가 선포하는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으로,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과 직면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플랫폼 자본주의는 기존의 노동, 생산, 소비 등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면서 우리의 현실을 두 가지 문제로 압축했다. 실업과 기후위기가 그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지금 우리의 생존 조건을 압도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념에 따르면, ‘한계 없는 자본주의, 절대적(absolute) 자본주의’다. 이 글에서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 꼼꼼히 보고된 지구 멸망의 리포트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불편한 진실’을 운운할 때가 아니라 ‘진실’을 공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류가 이제껏(1800년대~) 사용한 화석 연료 중 절반은 1989년 냉전 체제 이후에 소모되었다(38쪽). 겨우 30여 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최상위 부자 26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과 같다(231쪽). 코로나로 인한 재난 편승형 자본주의로 2020년 봄 미국의 초부유층의 자산은 687조원 늘었다(252쪽). 전문가들은 지구 멸망 시기를 30년 내외로 보고 있다. 문제는 지구 멸망 자체가 아니다. 동시 멸망이 아니라 선차적 멸망이 문제다. 이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발전한(우주여행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난 2년간 경험했듯이, 인구의 99%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의미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는 『人新世の「資本論」』. 인신세(人新世)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에 해당한다. 인류세는 인간의 경제 활동이 지구의 지질 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책의 주장과 의미는 분명하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책이고 내용도 어렵지 않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의 의미를 묻고 싶다. 기후 위기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에 더 관심이 있다. 마침 이 책을 읽을 무렵 1991년부터 발행해왔던 『녹색평론』이 1년간 휴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사이토 고헤이의 작업은 한국과 일본의 지식 생태계의 상징적 차이는 아닐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사회화하기 어려운 이슈, 그렇기 때문에 왜곡되고 부차적으로 다루어지기 쉬운 의제는 생태주의라고 생각한다. 생태주의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환경(環境)이라는 글자 자체가 인간을 둘러싼 ‘배경’인가, 아니면 인간도 그 ‘배경의 일부’인가를 생각케 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태주의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인간의 이중적 조건에 대한 근본적 사유이다. 생태주의 ‘우산 아래’ 평화, 반전, 군사주의 비판, 여성주의가 논의되어야 한다. 오늘 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K 컨텐츠’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 현대사 전반을 지배한 식민주의 콤플렉스 ‘덕분이다’. 피식민 지배 경험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선진국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추격 발전주의는 해방 이후 후기 식민주의, 한국식 근대화의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앞서간’ 서구의 역사의 대기실로 상정했다. 경제 성장 외의 과제는 “나중에 해결할, 혹은 잘 살게 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라고 여겨졌다. ‘여성 문제’를 비롯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까지도 여성은 시민이 아니라 출산력 등 국가 자원의 일부로서 동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대중화로 이러한 남성 문화가 설득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역시 기후 위기의 당사자가 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당장 대통령 선거 이슈에서 환경과 노동 정책은 없고 일부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마치 미래를 좌우할 듯한 이 사회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주의적 발전주의, 개인의 능력과 출세가 공동체의 목적이 되어 기후 위기는 논의조차 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건설 자본은 폭력주식회사, 부동산 문제, 재벌의 금융업이 연결되어 있고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는 추종 불허의 자살 1위국이다. 발전주의와 젠더는 오래된 논의 주제다. 발전주의는 앞서 말한 대로, 성 중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성의 산물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근대의 남성성이 서구처럼 국내/가정(domestic)에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외세에 대한 공포/대항/억압/의존/우월 등 자기 타자화의 산물일 때, 이를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의 비유인 강자와 약자의 젠더화를 적용하여, 강자인 외세는 ‘남성’이고 약자 혹은 피해자인 우리(남성)는 ‘여성’이라는 피해의식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로컬에서의 실천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적을 누구로 상정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미래 지향의 추격 발전주의로는 탈성장을 상상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좌파, 진보 남성’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남성 문화가 환경 이슈를 기준으로 ‘이념적으로’ 분열되어야 한다. 남성들 간의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차이가 드러날 때, 즉 기후를 주제로 남성들 간의 계급투쟁이 일어나야 한다. 이때 당대 성차별이 ‘젊은 세대의 젠더 갈등’으로 위장된 현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