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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나치 독일 여성 수용소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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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청산 '모범국'마저 외면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 수용소이자 최대 여성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 강제노동을 비롯해 인체 실험 등 잔혹한 범죄가 자행되었고,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한 이곳에서 나치는 다른 수용소들의 남성 수인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수용소 매춘소'에 동원할 여성 수인들을 차출하였다. 아이러니는 정부와 재계가 협력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 보상을 추진해 '과거 청산 모범국'으로 칭송받는 독일이 성 강제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은 애초부터 피해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고, 지금도 법적 피해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 연구 작업 일환으로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기념관'을 다녀온 정용숙 교수의 방문 후기를 싣는다. 지난 2월, 독일 연구 출장 계획을 이야기하던 자리에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방문 후기를 의뢰받고 선뜻 승낙했다. 라벤스브뤼크는 개인적 목적으로 이전에도 두어 번 방문했기에 비교적 잘 알고, 체류 예정지인 베를린에서 그리 멀지도 않아 아무 때고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다만, 내가 쓸 방문 후기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를 수 있는 점이 걸렸다. 한국에서는 주로 독일의 '위안부'와 관련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라벤스브뤼크'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압박 때 자주 소환되는 독일의 한계 동아시아 사회가 넘어서지 못한 과거를 대표하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서 한국인들은 곧잘 독일을 소환한다. '과거 청산 모범국' 독일의 사례를 들어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독일이 이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를 획득한 것은 2000~2007년 정부와 기업이 공동 설립한 <기억 책임 미래 재단 >을 통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일이 계기였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독일의 대책이 많이 늦었던 데다 내용적으로도 역사 정의의 실현보다는 정치적 해법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피해 인정 절차가 엄격해 거부당하거나 배제된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고, 지급액도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상황은 더 심했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가 운영한 '매춘소'에 동원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법적 피해자 지위 인정과 배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일본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위안부' 시스템을 운영한 국가였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는 자국 영토에 있는 강제 노동자를 비롯해 점령지 내 자국 군대, 나아가 강제 수용소의 남성 수감자를 위해서도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위안소'라는 명칭은 일본군의 독자적인 명명으로, 독일에서는 성매매 업소에 대한 일반 용어인 '보르델(Bordell)'이라 불렀다. 이 가운데 강제수용소 위안소는 비교적 자세히 연구된 분야인데, 친위대는 수용소 내 남성 수인들의 노동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친위대가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여기에 필요한 여성들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여성 수인들 중에서 차출했다. [사진 1] 라벤스브뤼크에는 나치의 성 강제노동에 희생된 여성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2] 다만 이것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역사의 일부다. 수용소 수감자 80% 이상이 여성 정치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39년 4월, 베를린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진 휴양지 퓌르스텐베르크 인근의 작은 마을 라벤스브뤼크에 새로운 수용소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적 수용소이자 최대의 여성 수용소로 성장했다. 전체 수감자의 80% 이상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반나치 레지스탕스 등 정치범이었다. 히틀러 암살 작전인 '발키리'의 주역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부인이 게슈타포에 체포 돼 이송된 곳이 라벤스브뤼크였다. 체포 당시 임신 중이던 그는 수감 상태에서 막내를 출산했다. 전후 프랑스 초대 대통령을 지낸 드골의 조카 제네비에브 드골-안토니오즈도 레지스탕스로 체포 돼 라벤스브뤼크로 이송되었고, 그 경험을 반세기 후에 회고록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라벤스브뤼크에 여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41년 소규모의 남성 수용소가 추가됐고, 1942년에는 인접한 우커마크에 청소년 수용소가 들어섰다. [사진 3]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30개국 출신의 여성과 어린이 12만 명, 남성 2만 명, 청소년 1,200명이 이곳을 거쳐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수감자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은 폴란드인으로 약 4만8,500명이었고, 이어 소련(2만8,000명), 독일과 오스트리아(2만4,000명), 프랑스(8,000명) 순이었다. 유대인은 약 2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진 4] 강제노동부터 의학 실험,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애초 정치범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는 규모가 커지면서 독일 군수산업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강제노동 수용소로 기능했다. 대표적인 군수업체가 인근에 공장을 둔 지멘스였다. 1854년 베를린에서 설립된 전기회사 지멘스는 베를린 인근 수용소들이 공급하는 강제노동의 주요 수요자였다. 그러다 1942년부터 라벤스브뤼크에도 군수품 공장을 짓고 전화기, 라디오, 계측기를 생산했다. [사진 5] 이때문에 지멘스에는 전범기업이라는 오명이 뒤따르고, 1941년부터 1956년까지 지멘스 대표를 지낸 헤르만 폰 지멘스는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 수용소에 일시 수용돼 증인으로 심문도 받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는 더욱 가혹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반인도적인 인체 실험이 이뤄졌고, 가스실을 가동해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했다. 1941년부터는 처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진 6] 전쟁 막바지인 1945년 초에는 화장장 옆 오두막에 임시 가스실이 설치되었다. [사진 7] 그 해 1월 말부터 4월까지 석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약 5~6천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라벤스브뤼크에서 가스실, 교수형, 굶주림, 질병, 의학 실험, 중노동 등 다양한 이유로 사망한 여성 수감자 수가 최소 3만 명, 많게는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성도 소수 있었다. 수인들이 행군한 길을 따라 걷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기차로 약 1시간을 가서 퓌르스텐베르크-하펠역에 내려 라벤스브뤼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노선 버스를 이용하는 것. 그러나 나는 기차역에서 라벤스브뤼크까지 약 2km를 직접 걷는 쪽을 택한다. 버스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열차로 이송된 수인들이 역에 도착해 수용소까지 행군한 그 길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나치 범죄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마을의 가장자리를 지난다. [사진 8] 그 길을 걷다 보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 창문과 발코니가 달린 이층집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잿빛 수용소 분위기와 뚜렷이 대비되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이곳은 여성 수인들을 감시하는 여성 경비원들의 숙소로, 일부는 자녀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원형이 잘 보존된 8개의 건물은 내부 개조를 거쳐 2002년부터 국제청소년교육센터와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다. 90여 개의 침대를 갖춘 기숙사 3개 동과 세미나 동, 식당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에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이 매년 주최하는 여름대학에 참가했을 때 며칠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발코니에서 푸른 숲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이어도 몸의 각도를 틀면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경비원 구역과 구분되는 건너편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감자들의 막사와 가스실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진 9] 고문과 살해 등 악명 높았던 여성 감시관 직업의 출발지 수용소 여성 경비원들은 '여성 감시관', 독일어로 '아우프제어린(Aufseherin)'이라고 불렸다. 20세에서 40세 사이 젊은 여성 중에서 모집된 그들은 잔인하고 가학적인 구타, 고문과 살해로 악명이 높았다. 라벤스브뤼크는 특히 여성 감시관 훈련소라는, '특이한' 직업의 출발지 역할을 한 수용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베르겐벨젠 등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간 여성 감시관 규모는 약 3,500명. 그러나 이들 가운데 전범 재판에 회부된 여성 감시관은 77명에 불과했고,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여성 감시관들은 대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변변한 직업 교육도 받지 못한 하층계급 여성들이었다. 좋은 임금과 무료 숙식 그리고 멋진 제복이 보장되는 감시관은 분명 괜찮은 직업이었을 것이다. 10대 시절 나치 청소년단체에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었다면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적과 싸우고 조국에 봉사하는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1995년 독일에서 출판된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바로 이 나치 여성 감시관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동명의 영화에서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인물 '한나'는 공장 노동자였다가 여성 감시관이 된 인물이다. 한나는 '문맹'이라는 남모르는 장애와 그 결과인 무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여성 감시관이 되었고 평생 속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을 나는 나치 범죄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전후 세대 독일인들이 앞 세대의 죄와 씨름하는 이야기로 읽었고, 죄와 사랑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궁여지책으로 감시관이 되었다는 설정은 논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후 서독에서 나치의 전직 여성 감시관들은 '무력한 조력자'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죄를 회피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당시 수용소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결코 아니었다. '그 일'의 끔찍한 실체를 깨닫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는 여성 감시관 숙소 외에도 수용소장과 친위대 장교 관사, 본부 건물도 잘 보존되어 있다. 수인 막사와 사령부 건물, 경비원 숙소 등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했던 소장 관사는[사진 10] 전쟁이 끝나고 1977년까지 소련군의 장교용 관사와 사무실로 사용됐다. 이곳을 비롯해 호수 주변의 기념관 시설 등 일부를 제외한 수용소 전체 부지는 1994년까지도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진 11] 이중 삼중으로 배제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수용소 본부 공간을 개조해 2013년 개관한 건물 2층에는 친위대의 수용소 성 강제노동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는 <라벤스브뤼크 여성 수용소. 역사와 기념>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12] 지금까지 파악된 수용소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모두 210명, 그 중 이름이 확인된 이는 174명이다. 절반 이상이 독일인 여성이고 나머지는 폴란드인, 러시아인, 동유럽인, 네덜란드인 등이었다. 절대 다수인 85%가 '사회부적응'을 이유로 끌려온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여기에는 부랑자, 극빈자, 성매매 여성, 레즈비언 등이 속했고 검은 역삼각형 표지를 착용하도록 했다. [사진 13] 반면 남성 동성애자는 검은색이 아닌 분홍 역삼각형 표지로 구분했고 '사회부적응'에도 속하지 않았다. 상설 전시는 수용소의 역사와 함께 기념관을 설립하는 과정의 역사도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라벤스브뤼크는 소련군 관할을 거쳐 구동독 지역에 속했다. 소련군은 수용소 부지와 건물들을 자신들의 군사적 목적에 사용했는데, 생존 희생자들은 수용소 일부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8년 9월에 첫 추모식이 열렸고, 화장장 주변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수습, 매장한 묘지가 조성되었다. 1959년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는 구동독 정부에 의해 국립 기념관이 되었다. 이때 건축가들은 화장장과 감옥 등 옛 수용소 건물 일부와 4m 높이의 수용소 담장 일부를 기념관에 포함시켰다. 훗날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수용소 담장의 서쪽 구역 밖에는 다시금 묘지가 조성되었다. 빌 라메르트(Will Lammert)의 청동 조각 '짐을 진 여인들(Die Tragende)'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곡의 벽'과 그 앞에 자리한 '짐을 진 여인들'은 기념관 디자인의 핵심으로 1950~1960년대 동독 기억 문화의 시각적 측면을 보여준다. [사진 14] 구동독 초기에 설립된 라벤스브뤼크 국립 기념관은 독일 재통일 후인 1993년 라벤스브뤼크 기념관(Ravensbrück Memorial)으로 재단장해 오늘에 이른다. 독일 연방 정부와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의 지원을 받는 브란덴부르크 기념재단(Stiftung Brandenburgische Gedenkstätten)이 관리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출신국명이 부착된 '통곡의 벽'과 '짐을 진 여인들'은 구동독 시기 기억문화의 유물로 지금도 여전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소녀상과 라벤스브뤼크의 기억 문화 2019년 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 철거 소동이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코리아페어반트'에서 2017년 기념관에 선물한 작은 소녀상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일본대사관 측에서 항의와 함께 집요하게 철거를 요구했다. 작은 소녀상은 기념관 상설 전시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념관 측은 해당 소녀상을 치우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당시 인자 에셰바흐(Insa Eschebach) 관장은 "이 조그만 모형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2월 초 기념관을 찾은 날은 우연히도 새로운 특별전 개관일이었다. 전시 주제는 <나치 시대의 동성애>였다. 소규모인 전시 패널에는 라벤스브뤼크 수감자였던 중국인 여성 나딘 황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15] 중국 외교관의 딸이었던 나딘은 1944년 레지스탕스 혐의로 라벤스브뤼크에 끌려왔다가 벨기에 레지스탕스인 오페라 가수 넬리 무셋-보스를 알게 된다. 수용소에서 만나 평생의 반려자가 된 두 여성은 한동안 헤어지기도 했지만 끝내 생존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부부가 아닌 사촌이나 친구로 가장해 여생을 함께했다. 이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넬리와 나딘>은 2022년 EBS국제다큐영화제에 선보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여성 수감자들의 국적이 다양했던 만큼 생존자들은 이후 각국에서 라벤스브뤼크 생존자 단체를 꾸려 활동하였다. 일반적으로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저마다의 기억 문화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유럽과 서유럽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 라벤스브뤼크 희생자 국제 연대는 구동독 시기부터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기억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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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NHK의 프로그램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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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ETV2001시리즈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2001년 1월에 방송된 NHK 방송 ETV2001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는 21세기를 맞이해 20세기에 일어난 전쟁과 무력 분쟁을 '인도(人道)에 반한 죄'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하고 전쟁이 없는 미래를 구축하는 방법을 고찰하는 내용의 4회 시리즈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이 시리즈의 데스크를 담당했다. 당시 NHK의 자회사인 NHK 엔터프라이즈(이하 NEP)에서 아시아 각국의 활동가와 시민단체들이 주최하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하여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2개의 제안이 나왔다. 한편 NHK 유럽 총 지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Vichy) 정부 하에서 발생한 전쟁 범죄와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 포로 학살 실태,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생한 아파르트헤이트 범죄를 취재하자는 2개의 방송 제안을 보내왔다. NEP와 NHK 유럽 총 지국으로부터 받은 제안을 결합해 4편짜리 시리즈를 만들 수 있겠다는 나가타 총괄 프로듀서(이하 CP)의 아이디어로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가 기획되었다. 그 중 개찬(改竄,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일부러 고침)이 이루어진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제2회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다. 이 편은 정치인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NHK 임원들에 의해 무참하게 내용이 조작되고 말았다. 이에 우리의 취재에 협력했던 2000년 여성법정 주최 단체 중 하나인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일본 여성 네트워크)이 NHK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재판으로 이어졌다. 1회차와 4회차 방송은 NHK 유럽 총 지국이 취재하고 NHK 본사의 스태프가 제작하였으며 2회차와 3회차는 NEP를 통해 방송 제작 회사 '다큐멘터리 재팬(이하 DJ)'에 제작을 재위탁했다. 따라서 실제로 개찬된 제2회를 취재 및 촬영하고 편집한 것은 DJ였다. 제2회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jpeg NHK 본사가 작업을 맡게 되다 2000년 12월에 도쿄 구단(九段)회관에서 열린 여성법정에서는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을 했다. 이는 법정이라는 형태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을 명백히 밝히는 것으로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방송은 이러한 현장을 DJ가 취재 및 촬영하고, 편집한 VTR 영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면서 게스트들이 여성법정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으로 기획되었다. 여성법정이 열리자 NHK와 일본의 민영 방송들이 뉴스로 법정 소식을 보도하였고, 해외의 미디어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때 일본의 우익 단체가 NHK 뉴스에 "NHK가 왜 저런 편향된 시도를 뉴스로 내보내느냐"면서 항의했다. 그 때문인지 NHK의 요시오카 교양 프로그램 부장은 이 방송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일반적으로 NEP를 통해 재위탁하여 제작한 방송을 NHK 본사의 부장이 도중에 검토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 방송에서는 요시오카 부장이 2001년 1월 19일 DJ에 직접 가서 시사회를 열었다. 요시오카 부장은 "방송과 법정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며 편집 수정을 요구했다. 요시오카 부장은 방송 후 우익 단체로부터 비판받을 것을 우려해 'NHK는 여성법정과 거리를 유지하며 객관적으로 방송했다'고 반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 '여성법정과의 거리두기'를 위해 스튜디오 촬영을 일부 추가하거나 역사적인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 영상을 사용하여 러셀 법정을 소개하는 VTR을 제작하는 등 여러 가지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요시오카 부장은 24일의 2회차 시사회에서도 "법정과의 거리감이 지난 번과 다를 바 없이 너무 가깝다"며 OK 사인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NHK 본사가 DJ로부터 촬영물을 받아, 직접 편집 작업을 하게 되었다. 난리가 난 정치인들 NHK의 예산안이 가타야마 총무 대신에게 제출된 2001년 1월 25일,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라는 자민당 의원 연맹의 나카가와 쇼이치 회장이 해외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다. NHK 국회 담당 직원들이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예산안 설명회를 시작하자 일부러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우익 단체 관계자가 의원 연맹 소속의 국회의원을 찾아가 "NHK가 이런 프로그램을 방송하려고 하고 있다"며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방송을 언급했다. 그 결과, 의원 연맹인들 사이에서 "NHK가 편향된 프로그램을 방송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난리가 났다. 당시 NHK에서 국회를 담당했던 노지마 국장이 말하길, 담당 직원이 당시 의원 연맹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후루야 케이지 의원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 소속 의원들이 작년 12월에 열린 '2000년 여성법정'을 화제로 삼고 있다", "NHK가 이 법정을 방송에서 특집으로 구상 중에 있다는 말도 들리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예산 설명 때 반드시 화제가 될 것이니 제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이후 재판에 제출한 '진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국회의원의 말에 따라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를 담당하는 국장이 방송 시사회에 참여하다 1월 26일에 NHK 방송 총 국장, 방송 제작 국장 등이 모여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특집 방송의 편집 방침을 확인하는 시사회를 진행했다. 국회 담당인 노지마 국장도 여기에 참석하였다. 참고로 국회를 담당하는 종합 기획실과 방송을 담당하는 방송 총국(보도국 및 방송 제작국)은 완전히 다른 조직이다. 노지마 국장은 보도국의 정치부 기자 출신이긴 하지만, 국회 담당 부서 소속이므로 원래는 방송 현장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노지마 국장은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이가》가) 정치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어 어떠한 프로그램인지 파악하고 싶다"며 시사회에 참여했다. 또한 "방송 도중에 우쓰미 아이코라는 연구자가 법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으니 법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연구자의 인터뷰를 삽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방송 편집에 관여했다. 이때 요시오카 부장은 "이러한 방송의 설정이 불공평하고 부당한 것은 아니다. 빨간 색을 쓰니까 검은 색도 쓰자는 식의 밸런스를 맞추는 방법은 아마추어 같은 설정이라서 싫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노지마 국장은 "이런 미묘한 문제는 반대 측 입장도 나와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협의 끝에 법정에 비판적인 주장을 펼치던 니혼(日本)대학 소속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인터뷰를 추가로 촬영하게 되었다. 이 시사회를 통해 협의한 편집 방침에 방송 총 국장, 방송 제작 국장, 그리고 노지마 담당 국장이 모두 합의했다. 교양 담당 부장이 OK 사인을 하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와의 인터뷰 촬영, 스튜디오 장면 추가 수록 등의 작업을 하고 있던 1월 27일, 우익 단체인 유신 정당 심뿌(維新政党・新風) 회원들이 항의하기 위해 NHK에 찾아왔다. 그들은 "어째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방송하느냐!"면서 방송 중지를 요구했다. 도쿄 시부야에 있는 NHK 방송 센터 정문 현관(동쪽 입구)에서 시청자 센터 담당자가 "객관적인 프로그램을 방송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대응에 나섰다. 이때 6대의 선전차에 올라탄 우익 단체 회원들이 서쪽 현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안내데스크에서 나가타 CP에게 전화를 걸어 "나가타는 지금 당장 내려오라"고 요구했다. 나가타 CP가 이를 거부하자 전투복을 입은 30명 정도의 우익단체 관계자가 방송 센터 내부에 난입했다. 하지만 NHK 방송 센터는 요새처럼 거대한 건물이어서 외부 출입자들은 교양 프로그램부로 가는 길을 알 수 없다. 우익 단체 관계자들은 1층 식당 근처까지 들어왔지만,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에 NHK 경비원들이 달려와 그들을 진압했다. 그들은 "지금부터 나가타의 집에 갈 것이다"라며 협박조의 막말을 내뱉고는 돌아갔다. 나가타 CP는 자택 근처의 경찰에 전화를 걸어 가족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1월 27일과 28일 이틀동안 작업을 계속해, 28일 밤에 44분 분량의 프로그램 편집본이 완성되었고 요시오카 부장의 OK 사인을 받았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베타캠이라는 카메라로 촬영해온 테이프를 직접 편집기로 편집한 후 그대로 방송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국이 제작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은 우선 타임 코드가 들어간 베타 테이프로 가편집하고, 그 데이터를 읽은 후 ECS(에디트 컨트롤 시스템)으로 영상 기술 스태프가 방송용 D3 테이프를 만든다. 이러한 작업이 29일 아침부터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ECS가 끝나면 기본적으로 편집 내용은 수정이 불가능하며, 테이프를 이용해서 더빙 작업(내레이션, 더빙, 음악, 효과음 등을 삽입하는 작업)이나 영상 자막을 삽입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이때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ECS 작업을 1월 29일에 하고 방송 당일인 1월 30일에 더빙과 자막 삽입 작업을 동시 병행하는 매우 타이트한 스케줄로 작업이 진행됐다. 아베 관방부장관과의 면회 1월 29일 저녁, 후반 편집 작업을 하던 중 이토 프로그램 제작 국장에게 호출되어 국장실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국장실에 들어가자 이토 국장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쓰오 방송 총 국장과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이 외근에서 돌아오니 그 때 시사회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시사회를 시작했다. 내가 내레이션을 읽고 나가타 CP가 자막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던 중 마쓰오 국장과 노지마 국장이 돌아와 "다시 처음부터 보자."며 시사회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 시사회는 요시오카 부장의 OK 사인을 받은 44분 분량의 완성본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시사회가 단순히 프로그램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초췌한 얼굴로 방에 들어오는 마쓰오 국장의 모습을 보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시사회가 끝나자 노지마 국장이 돌연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내용이야!"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 노지마 국장과 마쓰오 국장은 시사회 직전에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副)장관과 면담을 했다. 아베 관방부장관은 관방장관에 취임할 때까지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NHK가 공표한 자료에는 이때 마쓰오 국장이 아베 관방부장관에게 '일부에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 본 프로그램이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해 매일 밤 4연속 시리즈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이에 대해 아베 관방부장관은 '위안부' 문제의 어려움이나 역사 인식 문제와 외교 간의 관련성 등에 대한 지론을 말한 다음 이러한 문제를 공영방송인 NHK에서 다룬다면 공평하고 공정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마쓰오 국장은 아베 관방부장관의 지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의견을 말하지 않은 채 다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으니 실제 프로그램을 봐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베 관방부장관은 이때의 면담에 대해 추후 본인의 홈페이지에 "이 모의재판의 방청을 희망하는 자는 '법정의 취지에 찬성한다'라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관계자들로부터 NHK가 주최자 측의 의도대로 (2000년 여성법정을) 보도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들어와 사실관계를 듣게 되었다. 그 결과, (2000년 여성법정에는) 재판관 역할과 검사 역할은 있어도 변호사 역할은 마련되지 않는 등 명백히 편향된 내용임을 알게 되어 나는 NHK가 특히 지켜야 하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도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2001년 1월 29일 시사회 때 요시오카 부장의 대본에 써있던 후루야 아베 아라이라는 메모.jpeg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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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독일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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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독일 함부르크, 도로테 죌레 하우스 함부르크에서 시작한 게릴라 소녀상 전시 본 시의 '여성박물관'에 세우기로 한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 국외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미국 글렌데일시의 소녀상에 이어 미국의 두 번째 소녀상 건립을 위해 '위안부'행동이 한국 국외에서 최초로 미국 글렌데일시에 소녀상을 건립한 후 두 번째 소녀상 건립을 위해 수입한 것을 다시 독일로 보내온 것이었다. 하지만 소녀상이 미국에서 독일로 향하던 중 '여성박물관' 소녀상 건립이 무산되어 '평화의 소녀상'은 본으로 가지 못하고 잠시 함부르크에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이를 활용해 함부르크에서 소녀상의 게릴라 전시를 진행했다. 첫 게릴라 전시는 2018년 8월 14일부터 9월 30일까지 함부르크 '도로테 죌레 하우스'에서 열렸다. 6주간의 전시 동안 함부르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두 번이나 전시 중단을 요구했지만, 이레네 팝스트 전시 책임자는 소신에 따라 전시를 중단하지 않았다. 함부르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피해가 염려된다며 전시 중단을 요청하였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 한 달 반 동안 독일 개신교 북독일 노회 회관인 '도로테 죌레 하우스'에 오가는 직원과 방문객들이 게릴라 전시 중인 소녀상을 만났다. 관람객들은 그냥 보기에는 아시아의 귀여운 어린 여성처럼 보이는 소녀상의 배경을 알고 난 후 충격을 받았고, '강제매춘'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소녀상 옆의 의자에 앉기가 두렵다고 했다. 어떤 관람자는 유년 시절 겪은 성추행에 대한 기억을 평생 품고 사는 여성들이 연상된다고 했다. 독일에서도 미성년자 추행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이다. 일본 공관 측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 전시회, 심포지엄은 개최할 수 있어도 '평화의 소녀상' 건립만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예술은 역사 공간과 관람자 개인의 경험이 만나는 자리다. 이런 교육 효과 때문에 소녀상의 건립과 전시를 그렇게 막는 걸까? 독일 함부르크 전시로 시작한 게릴라 전시는 한 장소에 소녀상을 영구히 건립한 것 못지않은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독일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진 지 30년이 되었고 2007년에 유럽연합에서 결의문이 통과되었지만, 좀 더 널리 알려지기 위해선 이런 방법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상만사 새옹지마의 경험이 이렇게 쌓이기 시작하였다. 2019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 '하우스 암 돔'의 평화 함부르크에서 이어질 뻔한 2차 전시가 무산된 듯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프랑크푸르트로 가져올 계획을 세웠다. 2019년 2월에는 프랑크푸르트 본회퍼 교회 목사를 만나 50주년 기념 예배를 기해 6개월 정도 전시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교회를 함께 쓰는 한인교회 어른들 덕분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라인마인한인교회 이한나씨가 라인마인한인교회도 9월에 50주년을 맞이한다며 전시 의사를 밝혀 3월 22일 자 교회 운영위원회에 기획서를 제출하였다. 이로 인해 6개월 허가가 났다는 본회퍼 교회 전시 일정은 3개월만 하기로 합의를 보고 라인마인한인교회 운영위원회 결정을 기다렸다. 그런데 5월이 되자 이 두 교회 모두에서 전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본회퍼 교회의 경우 교회를 소개해 준 파트너 한인교회 목사님이 일부 교인들의 반대로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되어 취소가 되었고, 라인마인한인교회 관계자는 풍경세계문화협회는 완전히 뒤로 빠지고 소녀상만 제공하라는 요구가 있어 운영위원회에서 협의했으나,결론적으로 전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라인마인한인교회에서는 시간이 흐른 뒤인 2020년 3월 8일, 정의기억연대가 보낸 소녀상을 교회 정원에 영구 건립했다. 이 당시는 아직 일본의 방해 가능성이 긴장감을 자아내던 시절인지라 3개월씩 전시를 나누어서 하려던 임시전시가 모두 무산되었지만 교회 전시에서 일본의 방해가 있으면 지원해 주시기로 한 분이라든가, 한인교회 전시 다음에 전시를 추진하기로 한 곳에서 직접 전시 주체가 되어갔다. 우선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의 설립자이자 관장인 요하임 발렌틴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거기 '하우스 암 돔' 로비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할 수 있을까요?" 발렌틴 관장으로부터 바로 답장이 왔다. "기간은 언제?" 혹시나 하고 드린 메일에 이렇게 신속하게 회신이 올 줄은 몰랐던 터라 숨이 멎는 듯 반가웠다. '하우스 암 돔'은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들리는 바르톨로메오 대성당 바로 맞은 편에 있다. 교구 관계자들을 포함하여 5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코로나19 로 휴관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매일 수백 명이 오가는 장소였다. 프랑크푸르트의 문화 1번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는 다문화 소통 문제, 독일 과거사 문제, 이민자 문화를 주제로 토론, 워크숍, 낭송회와 같은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곳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대림절 기간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소녀상만사 새옹지마였다. 2_프랑크푸르트 첫 전시 오프닝 개회사를 하는 요아힘 발렌틴 관장.jpg 2019년 10월 28일, 전시가 시작되었다. '평화의 소녀상'이 대림절 기간과 성탄절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게다가 '하우스 암 돔'은 독일인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는 구 시가(Altstadt)에 붙어 있었다. 오프닝 행사에서 요아힘 발렌틴 관장은 인류 역사 이래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약한 이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피해받은 점을 환기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피해 입은 이들에 대해 "전시를 통해 연대를 선언"한다고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 극우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키 데자키 감독의 영화 <주전장>(2019) 반대 캠페인 후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 전시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나데시코 액션'이란 곳에서 전시를 공격한다는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2017)을 제작한 박수남 감독의 딸인 박마의 선생이 알려 주어서 알게 되었다. <침묵>도 일본에서 상영할 때 격렬한 반대 시위의 대상이 되는 영화였다. 이런 구조를 몰랐다면 더 불안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하우스 암 돔'에서의 소녀상 전시는 절대 막아야 한다는 소녀상 반대자들의 게시글들이 '나데시코 액션' 웹사이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눔의 집'을 방문한 슈뢰더 전 총리와 2016년 프라이부르크 시장에게 보낸 편지, '하우스 암 돔' 관장에게 보낸 편지 내용도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었다. 이 같은 공격에도 '하우스 암 돔' 측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우스 암 돔'에서의 소녀상 전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2019년 2월 19일부터는 괴테대학교에서의 전시도 연이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런 방해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느라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응원과 연대를 담은 편지들도 있었다. 일본의 국제미술제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 예술전에서 '표현의 부자유전'이 금지되었을 때 재개촉구 운동을 한 나고야 시민단체에서 우리의 활동에 연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3_2019년 8월에서 10월까지 진행된 나고야의 뜨거운 여름은 오마이뉴스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다.jpeg 후일담에 따르면, '하우스 암 돔'이 겪은 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던 것 같다. '하우스 암 돔'은 라칭거 교황(편집자 주: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를 상영할 때에도 상당한 공격을 받았지만 '평화의 소녀상' 전시로 인한 반발은 지금까지 '하우스 암 돔'이 겪은 공격 중 가장 심한 경우였다고 한다. "오, 그 소녀상 반대 사이트('나데시코 액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까 '하우스 암 돔'이 얼마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중요한 곳인지 광고가 많이 됐던데요? 일본에서도 유명해졌어요." 내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유명해졌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관장의 소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아힘 발렌틴 관장도 웃으며 "당케"(편집자 주: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독일어)라고 말했다. 발렌틴 관장은 이후 괴테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전시 오프닝을 진행할 때도 연대 발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결국 연대의 문제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프랑크푸르트 '평화의 소녀상'의 첫 '숙소 주인'이라고 표현한 발렌틴 관장은 괴테대학교 전시 오프닝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제 맘에 와 닿았습니다.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여기에 와서 (소녀상의 소녀 옆에) 앉아 볼 수 있습니다. 의자에 앉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공감해보고 또 동일시해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여기 있는 비문을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발렌틴 관장의 소신 있으면서도 조용한 대응은 '평화의 소녀상'이 프랑크푸르트에 잘 도착했다는 믿음을 주었다. 2020년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 괴테대학교에서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소녀상 전시가 진행 중인 괴테대학교는 과거 '이게파르벤(IG Faren)'이라는 화학회사의 본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착취한 회사로 나치 독일의 1호 정경유착 사례이다. 괴테대학교가 이곳으로 캠퍼스를 이동한다고 할 때 특히 사회학과 학생들이 대거 반발했다. 수치스러운 장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오늘날 이 새로운 캠퍼스 곳곳에는 나치 독일 당시 이게파르벤 회사의 나치 부역에 관한 기록과 역사 성찰에 관한 동판, 희생자의 초상, 희생자들의 이력이 시청각으로 설치된 추모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소녀상 전시가 진행 중인 사회학관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화두를 제시한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기리는 아도르노 플라츠라는 기념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사회학관 내 도서관 맞은편 큰 벽에는 '평화의 소녀상' 외에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에서 제작한 위안소 분포 지도와 필리핀 레이테 지역 피해자 르메디오스 펠리아스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일기 등을 전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천천히 가는 세상인지라 전시 일정도 2021년 1월 26일까지로 연장되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일반인들에게는 전시가 개방되지 않지만, 괴테대학교 베스트앤드 캠퍼스를 산책하면서 PEG(심리학, 교육학, 사회학) 건물 정면 유리를 통해 소녀상을 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거주자라면 대학 도서관 열람증을 발급받아 해당 전시물들을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다. 괴테대학교 총학생회장 키라 베닝아는 전시 오프닝 개회사에서 2차 세계대전 75주년을 맞아 동맹국 일본의 전범행위도 비판철학에 바탕하여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괴테대학교 총학생회는 학내에서 나치 부역자 이름이 붙은 공간의 이름을 바꾸거나 아우슈비츠 의사 요제프 멩겔레[1]의 박사학위를 취소하는 등 역사 성찰 활동에 활발하게 기여하고 있다. 4_아도르노 기림관.jpeg 5_괴테대학교 전시 오프닝 장면.jpeg 6_괴테대학교 사회학관 내 소녀상 외 전시물들.jpeg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국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독일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소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동맹국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일본 전쟁 범죄 문제를 생산성 있게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프리츠 바우어 연구소[2] 부소장인 토비아스 프라이 뮐러 박사는 괴테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전시 오프닝 연대 연설에서 80년대에 있었던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소개했다. '타자의 범죄'를 논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에 관한 논쟁이었는데, 이는 "비교는 동일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또, 프라이뮐러 박사는 '평화의 소녀상'처럼 예술 작품을 매개로 역사를 알리는 활동의 효과도 언급하였다. 나치교육학연구소의 공동창립자인 벤야민 오트마이어 교수는 유럽의 안경을 벗고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볼 것을 촉구하며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사람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기미가요' 제창 거부 등 국가주의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불이익을 당하는 교사들을 언급하며 국제연대의 의미를 제시했다. 침략자로서의 근현대사를 지닌 독일의 지성이 소신을 갖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글에 소개된 활동은 소녀상 건립을 방해하는 일본 공관의 무례함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부침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둘러싼 활동은 소신 있는 학자들의 연대로까지 발전했다. 소녀상만사 새옹지마라 하겠다. 각주 ^ 나치 친위대(SS) 장교이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의사. ^ 연구소 이름 프리츠 바우어는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 나치전범 재판을 이끌어낸 프랑크푸르트 검사장 이름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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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위민 인 블랙 런던’ 수 핀치 인터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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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 - 에이드리언 리치 여성연대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해외 전시 성폭력 및 여성인권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글로벌 여성평화운동 단체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25주년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군의 여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1988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처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 군사주의와 폭력이 여성들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위민 인 블랙은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 소통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서울의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이 ‘위민 인 블랙 런던’의 수 핀치(Sue Finch)를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 지금 만나 보시죠.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Woman in Black-A Women's Peace Movement”에서 코린 쿠마르의 글을 인용해 여성들의 법정을 가리켜 ‘상상의 공간’이라고 명명하셨는데요,[1] 더불어 같은 서술에서 1992년 이후 열린 40개 이상의 여성법정에 관해 인상적으로 언급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희도 이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여러 여성법정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법정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핀치 님께서 직접 참여한 법정이 있다면 현장에 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청해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핀치 님께서 글에서 제시한 여성법정 중 ‘아시아 법정’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언어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이상의 연장선상에서 위민 인 블랙이 아시아 여성과 연대한 경험이 있다면 관련 이야기를 청해 듣고 싶습니다. 수 핀치 저는 2015년 11월 방갈로르에서 열린 세계여성법정(World Court of Women: Against War, for Peace)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와 함께 참석했던 레베카 존슨(Rebecca Johnson)은 인도, 중동, 유럽에서 선발된 8명의 배심원 중 한 명으로, ‘오픈 데모크라시(openDemocracy) 50.50’(2016.1.25)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이 법정은 가정폭력, 성폭력, 지참금 폭력부터 지역 사회와 인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 비모차나의 위민 인 블랙이 주최했으며, 제16회 위민 인 블랙 국제 모임과 함께 개최되었다. 1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임에 참석해 대량학살, 국경 없는 전쟁, 문명과의 전쟁, 여성에 대한 전쟁으로서의 전쟁을 다룬 증언들을 들었다… 세계여성법정은 1992년부터 30회 이상 개최되며 전 세계 폭력, 분쟁, 전쟁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 왔다. 주류 정치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된 여성들의 목소리와 경험, 저항에 주목함으로써 다양한 유형의 평화 구축 노력과 해법을 도출하고 있다. 여성법정의 창시자인 위민 인 블랙 비모차나의 코린 쿠마르(Corinne Kumar)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듣고”, 마지막에 우리가 들은 내용에 대해 성찰하며 미래를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에만 캄마스(Eman Khammas)는 먼저 사담 후세인의 잔혹한 독재 기간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이어서 2003년 미국과 영국의 파괴적 침공으로 인해 이라크에서의 삶이 얼마나 더 황폐화되었는지 이야기했다. 캄마스(Khammas) 박사는 전쟁이 미친 영향에 대해 증언하며 이라크의 마을과 지역사회가 “처음에는 미국 주도의 점령에 의해, 이제는 각 종파의 민병대에 의해” 전멸되었다고 밝혔다. 아프가니스탄 여성혁명협회(RAWA)와 연계된 아프가니스탄 활동가들은 여성의 권리와 보호를 위해 활동하면서 매일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멘토와 동료들이 암살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여성혐오적인 가부장적 전통과 러시아, 미국, 영국, 탈레반, 그 외의 무장 남성 세력들이 일으켜 온 연쇄적인 전쟁을 통해 여성들에게 가해지고 유지되어 온 다층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가고 있다… 남아시아 여성들은 스리랑카, 카슈미르, 나갈랜드 및 지역 사회에서 폭력과 피해자 지우기에 맞서 싸워 온 경험을 이야기했다. 한 예로, 루스 마노라마(Ruth Manorama)는 권리와 교육을 위해 투쟁 중인 인도 카스트 내 소위 ‘불가촉천민’인 달리트 여성들에게 가해져 온 다층적이고 중첩된 억압에 대해 증언했다… 네팔에서 여성의 권리와 빈곤층의 상황이 어느 정도로 악화되었는지 들어본 이들은 일찍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라다 파우델(Radha Paudel)은 네팔의 현재 상황을 “무혈 대량학살”에 비유하면서도, 여성들이 ’그들의‘ 남성들의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도와 아프리카 여성들은 증언을 통해 다수를 몰아내고 환경을 훼손하며 여성과 농촌 공동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식민주의적 ‘서구식’ 개발 모델을 바람직한 것으로 가정하는 통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성법정은 “수많은 피해에 대해 증언한 모든 이들을 위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함께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평화, 정의, 평등, 환경 및 인간 안보를 구축하고, 지구의 소중한 자원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육성하고, 그 결실을 나누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강력한 글로벌 여성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국제법×위안부 세미나 팀 위민 인 블랙 런던이 최근 열중하고 있는 활동 및 운동 현황에 관해 이야기해 주세요.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하여 위민 인 블랙 런던이 전개하는 직접행동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수 핀치 위민 인 블랙 런던은 2000년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6시에 런던 중심부 트라팔가 광장 인근의 에디스 카벨(Edith Cavell) 동상 주변에서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매월 첫 번째 집회는 팔레스타인 점령 종식과 포용적인 해법 도출, 여성과 아동의 인권과 안전 수호를 통한 평화와 정의의 정립이라는 위민 인 블랙 예루살렘의 창립 취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집회입니다. 집회는 침묵 속에서 진행되며, 여성들은 항상 ‘군사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 against militarism and war)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습니다. 각 주의 주제는 플래카드에도 적혀 있고, 인쇄물에도 안내되어 있습니다. 한두 명의 여성들이 집회와는 별도로 이러한 인쇄물을 나눠주며 시민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합니다. 행인들에게는 영국 정부에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짧은 서한들에 서명을 요청하고, 이 서한들은 위민 인 블랙의 우체통을 통해 수거되어 총리에게 전달됩니다. 서명자들은 종종 답장을 받게 되고, 많은 이들이 이 답장들을 위민 인 블랙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위민 인 블랙 런던의 집회는 매주 팔레스타인 점령 종식, 핵군축, 민족주의와 전쟁에 대한 저항, 우크라이나 침공, 여성 폭력 방지, 영국 무기 판매 반대, 군사주의 탈피, 평화 구축과 환경 지속 가능성을 포함한 건강 및 인간 안보의 최우선 추구라는 주제를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 위민 인 블랙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러한 집회를 통해 반군사주의 시위를 이어 왔고, 국제 연대 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에도 동참하여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일부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850채의 팔레스타인 민가가 파괴된 베이트잘라에서 팔레스타인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 방패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노상 장애물 제거를 돕고,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인권 옵저버로 활동하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시위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영국 위민 인 블랙은 또한 런던에서 정부 후원으로 열린 국제 방위 및 보안 장비 박람회(DSEI)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영국의 무기 판매에 반대하는 활동을 통해 군사주의에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2019년 영국 무기 제조업체들은 영국의 최대 고객이자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정권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에 110억 파운드 상당의 무기를 수출했습니다. 위민 인 블랙 런던은 우크라이나 문제와 관련해서도 집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긴급 조치를 촉구하는 인쇄물을 배포했습니다. ➔ 휴먼라이츠워치(https://hrw.org/europe/central-asia/ukraine)와 페미니스트워크샵우크라이나(https://femwork.org/warinukraine)와 같은 인권 단체들이 우크라이나와 그 밖의 지역 사회에 접근하여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지원 ➔ 영국 정부에 여성과 아동에 대한 전쟁 범죄가 자행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ICC에 성폭력 보고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것을 촉구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평화 활동가들을 지원, 확대 및 보호 ➔ 우크라이나 및 전 세계 무력 분쟁 지역 출신의 난민 모두에 대한 환영과 지원 위민 인 블랙은 다른 직접 행동 단체들과 함께 원자무기연구소(AWE, Atomic Weapons Establishments)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영국의 핵잠수함 본거지 등 군사 핵 시설에서 수많은 비폭력 시위와 행동에 동참해 왔습니다. 특히 AWE에서 우리는 중금속 파이프들을 꽉 ‘끌어안은’ 채 도로 위에 누워 입구들을 봉쇄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본거지를 둔 핵무장 잠수함 4척 중 최소 1척은 영국 주변 해역의 상시 순찰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각 잠수함에는 최대 8개의 미국산 트라이던트 미사일이 탑재되어 있는데 각각 40개의 탄두가 장착되어 있고 대부분 1945년 히로시마를 파괴한 폭탄보다 8배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2017년부터 줄곧 위민 인 블랙은 영국 정부에 2017년 유엔 총회에서 찬성 122표, 반대 1표, 기권 1표(싱가포르)로 채택된 ‘UN 핵무기 금지 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할 것을 촉구해 왔습니다. 이 조약은 2021년 1월 22일에 발효되었으며, 위민 인 블랙이 영국의 핵군축을 촉구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조약의 목적은 핵무기가 또다시 사용되는 사태를 막기 위함입니다. 제1조는 핵무기의 사용, 개발, 시험, 생산, 배치, 비축, 획득, 보유뿐 아니라 핵무기의 주둔과 이전을 명백히 금지함으로써 NATO가 행하는 핵 공유를 불법으로 규정합니다. 위민 인 블랙의 일원으로서 2000년부터 핵확산 금지 조약(NPT)과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 전략 개발에 참여해 왔으며 201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ICAN, 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에도 몸담고 있는 레베카 존슨(Rebecca Johnson)이 언급했듯, 여성주의적 분석과 행동은 핵무기 금지 조약의 언어와 의도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 조약은 인도주의적 관점 및 실천과 함께 여성주의적 행동과 분석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조약은 “핵무기의 재앙적 결과”와 “인류의 생존, 환경, 사회경제적 발전, 세계 경제, 식량 안보, 현 세대와 미래 세대의 건강에 대한 심각한 영향”을 인정하며, 무엇보다도 “전리 방사선의 결과 등 핵무기가 특히 여성과 소녀들에게 미치는 심각한 영향”을 인정합니다. 이 조약은 “여성과 남성 모두의 평등하고 완전하며 효과적인 참여는 지속 가능한 평화와 안보의 증진과 달성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인정하고, “핵군축에 대한 여성의 효과적인 참여를 지원하고 강화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각주 ^ John Clammer et al., Dynamics of Dissent, Routledg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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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BTS 팬덤의 기억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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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원폭티셔츠’ 논란과 전개 지난 2018년 11월, 일본 방송국 TV 아사히(テレビ朝日)는 생방송 전날 밤 BTS의 출연을 갑작스레 취소했다. BTS의 멤버 지민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이미지와 해방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란히 실린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이례적인 출연 취소의 배후에는 재특회[1]를 중심으로 한 넷우익이 있었다. 이들은 급기야 BTS와 나치의 동질성까지 주장하며 BTS를 미국의 강성 유대인 단체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BTS 국내 팬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원폭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진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티셔츠 착용에 일본인의 원폭 피해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 방송의 취소 이유가 단지 티셔츠 때문이 아니라, 당시 한국 대법원에서 내려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해외 팬덤을 겨냥한) 설명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다. 일본 넷우익의 고발로 글로벌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개입하기 시작하자 BTS는 자칫 ‘반유대주의’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팬들은 일본 넷우익이 BTS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를 파헤치면서,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 자리에 놓고 침략 전쟁 주체로서의 과거를 외면해 온 일본의 태도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점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에 관한 정보들이 팬덤 내에서 활발하게 공유되고 교육되면서, 티셔츠 문제는 역사에 대한 기억 정치의 문제로 전환되어 갔다. 기억의 복원과 소통: 아시아 팬들의 전쟁 기억과 증언 팬덤 내 담론의 초점이 바뀌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에 의해 점령된 아시아 국가 출신 팬들은 가족으로부터 들어 온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증언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사이판을 비롯한 태평양 섬들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었다... 이곳에서 일본군이 저질렀던 가장 잔악한 짓은 미국이 이겼을 때 항복을 거부하고 사이판 사람들에게 미국인들이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식인할 것이라 거짓말을 했던 일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사이판 여성들 중에도 강제로 위안부에 끌려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X(구 트위터) “나는 필리핀인이고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배웠다. 여성뿐만 아니라 위안부 역할을 하는 게이들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년간 점령했지만 그 기간 동안 약 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X(구 트위터) BTS 팬덤이라는 초국적 공동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피해국이었던 아시아권 국가의 팬들이 집단적으로 증언에 나서게 된 상황은, 개인들이 기억을 언어화함으로써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공식 역사에서 도외시 되어 온 희생자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기억하도록 하는 실천적 효과를 낳았다. 기록으로 연대하는 기억정치의 장: 백서 프로젝트 기획사의 입장문 발표로 티셔츠 논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전 세계 5개 대륙의 20여 명의 BTS 팬들은 온라인 토론을 거쳐 원폭 티셔츠 사건에 대한 105페이지 분량의 백서를 작성했다.[2] 이 백서는 사건이 불거진 배경과 한일 간의 역사·정치적 맥락을 설명하고 그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나아가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논란에 대한 반응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층위의 한국, 일본, 그 밖의 글로벌 팬덤의 내부 반응을 보여주면서, 사건에 대한 국가별 언론 보도를 검증했다. BTS 팬덤에 의해 발간된 이 백서는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팬덤이 백서의 발간을 통해 국가 간 역사 기억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성과였다. 팬덤은 BTS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만 하지 않았으며, 글로벌 스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면서 이와 연루된 모든 주체들의 세계 시민으로서의 문화적 민감성을 되돌아볼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백서를 간행하면서 국가 간 역사 및 문화 교육의 불균형과 그 해소의 필요성이 지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예컨대 아시아인들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 반면, 서구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중에 벌인 잔학행위에 대해 무지했다. 이런 기억의 불균형을 해소할 때 상호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번 티셔츠 논란을 통해 팬들 사이에서 새롭게 인식되었다. 또한 티셔츠 논란에 대한 글로벌 미디어 보도를 분석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소득이었다. 팬덤의 역사 인식과 수행적 실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증언하고 백서를 발간하는 활동은 적극적인 역사 인식을 위한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팬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전쟁 피해에 대한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팬덤이 특히 충격을 받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목록을 서로 공유하고 이에 대한 감상평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국내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 대한 기부로 이어져, 약 300여 명의 해외 팬들이 ‘나눔의 집’에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위안부 이슈는 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등을 찾아보며 알게 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 됐다. 다큐를 보면서 한국 여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도 위안부 동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X(구 트위터) “나는 54세이고 이번 BTS를 향한 공격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충격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의 세계사 시간에도 일본이 전쟁 중 잔학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희생자들의 말은 이 세계에 ‘들려야’ 할 필요가 있다.”(X(구 트위터) 여성 신체에 대한 폭력을 밑거름 삼아 뻗어간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욕망은 젠더화된 폭력의 역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에게 자행된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진 BTS 팬덤에게 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팬들은 모든 여성이 잠재적으로 상품화되는 현대의 젠더 구조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며 해당 문제에 공감하였다. 오늘날, 팬덤 문화는 전지구화와 미디어 발전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팬덤의 참여문화적 성격은 문화산업의 판도를 좌우할 뿐 아니라 팬덤의 관심사를 둘러싸고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풀뿌리 담론의 활발한 생성으로 이어지곤 한다. BTS 원폭 티셔츠 논란은 팬덤 내에서 자칫 한일 양국 사이의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치환될 수 있었으나, 글로벌 여론의 압박으로 인한 위기감과 전쟁 중 여성폭력에 대한 공감대가 초국적 팬덤 내부에 형성됨으로써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팬덤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온라인에서 형성되는 초국적 취향 공동체가 기억 정치를 수행한 실천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저항의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각주 ^ 재특회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으로, 반외국인 정책, 특히 혐한 기조를 강력히 주장하는 단체이다. 초대회장인 사쿠라이 마코토는 대표적 넷우익 인사로 2016년 일본제일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 White Paper Project 혹은 백서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해당 문건은 영어와 한국어로 기술되었으며 다음의 URL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https://whitepaperproject.com/ko.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