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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할머니의 방 -속리산(이옥선) 할머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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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할머니의 방 1. 할머니의 방 1부 - 이옥선 할머니 편 2. 할머니의 방 2부 -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 편 3. 할머니의 방 3부 - 박옥선 할머니 편 이옥선 할머니와 속리산 할머니 <나눔의 집>에는 이름과 나이가 같은 두 명의 이옥선 할머니가 있다. 외부에서는 '부산 출신 이옥선 할머니'와 '대구 출신 이옥선 할머니'로 불리지만 <나눔의 집>에서는 '이옥선 할머니'(부산)와 '속리산 할머니'(대구)로 불린다. 속리산이 보은에 있는 까닭에 가끔 직원들이 보은 할머니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할머니는 바로 "왜 내가 보은 할머니야! 속리산 할머니지!"라며 역정을 내신다. 대구가 고향이신 할머니가 이처럼 속리산에 애착을 보이시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할머니는 16살에 만주로 끌려가 18살에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일본 패전 직후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방치한 채 부대를 떠나자 갈 곳이 없던 할머니는 위안소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던 중국 할머니들이 위안소로 찾아와 "여기 있으면 큰일 난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라면서 당시 위안소에 있던 이옥선 할머니와 다른 피해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거기에서 4일 정도를 머물렀는데 "그때 그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줘서 참 잘 먹었어." "그 할마시(할머니)들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라며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신다. 그렇게 이름 모를 중국 할머니 집에서 4일간 머무르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조선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조선 큰 애기(처녀)들 나오라"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떠나 신의주로 올 수 있었다. 신의주에 도착한 할머니는 거기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내가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귀환 이후에 당연히 기뻐하는 가족들 또는 일가친척의 이야기가 등장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귀환 이후에 관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굉장히 의외였다 대구에 도착한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매일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로 인해 곤욕을 치렀다. 할머니가 고향에 돌아온 후, 매일 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할머니의 아버지에게 "네 딸은 살아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왜 안 오느냐?", "이 집은 조상 묘를 잘 써서 딸이 살아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는다." 등등의 탄식을 쏟아 냈다고 한다. 마을의 또래 여성들이 모두 끌려갔는데 살아 돌아온 건 할머니뿐이니 동네 사람들의 탄식도 이해는 가지만, 결국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할머니는 부모님 몰래 홀로 고향을 떠났다. 그렇게 무작정 집을 나온 할머니는 영동·옥천을 지나 속리산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서 만난 한 스님의 도움으로 법주사 근처에 거처를 얻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릴 적 국악을 배워 장구와 소리를 아주 잘하시는데, 그것을 알게 된 스님이 속리산에 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소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할머니는 그때부터 속리산을 찾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소리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속리산에 정착하신 할머니는 그 뒤로 70여 년을 속리산과 함께하였다. 이러한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속리산에 대한 할머니의 애착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속리산 이옥선의 방 평생 속리산에서 사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2018년 가을, 무릎 수술 이후에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나눔의 집>에 오시게 되었다. 그전에도 <나눔의 집>과 왕래가 있었지만 이렇게 거주를 목적으로 오신 것은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오시기 얼마 전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던 故하점연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운영진은 나에게 그 방을 정리해 할머니께 드리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 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입사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던 내 말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故하점연 할머니가 사용하시던 방은 속리산 할머니의 방이 되었다. 이 방은 <나눔의 집> 거실을 지나 복도 오른쪽 첫 번째에 있는데, 크기와 구조는 맞은편 이옥선 할머니의 방과 같다. 속리산 할머니는 갑자기 입주하게 된 데다 후원금으로 할머니들의 개인물품을 구매하지 않는 <나눔의 집>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세간살이라고 할 것이 거의 없다. 방에는 돌침대와 2단 서랍장, TV, 냉장고가 전부인데, 이마저도 모두 故하점연 할머니가 쓰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국민들이 보내온 응원의 메시지와 그림, 편지, 꽃 등이 늘어나면서 할머니의 방도 점차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속리산 이옥선의 냉장고 할머니의 방은 문을 기준으로 가장 먼 쪽에 창문이 있고 그 아래 돌침대가 놓여있다. 그리고 그 침대 오른편(다리방향)에는 2단 서랍장이 있고, 그 위에 TV가 있다. 또 그 서랍장 맞은편으로 오래된 행거가, 행거 위쪽에는 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냉장고는 할머니의 방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건강에 관심이 많고 누가 좋다고 하는 건 꼭 드셔야 하는 성미이다. 그리고 음식을 저장하는 습관이 있어 냉장고는 항상 갖가지 음식들로 가득 차 있다. 가끔 냉장고 안의 음식이 썩거나 곰팡이가 필 때가 있는데 할머니는 그런 음식들도 잘 버리지 못하게 해 할머니의 냉장고 안은 항상 다채로운 풍경을 간직한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번은 간병인 선생님이 할머니 몰래 냉장고를 정리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 이후 할머니는 만나는 직원마다 붙잡고 멀쩡한 것들을 버렸다며 1주일 넘게 하소연하시기도 했다. 또 할머니는 항상 박카스를 대량으로 구매해 냉장고에 꽉 채워두시고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꺼내주신다. 직원들은 가끔 목이 마르거나 피곤할 때 할머니에게 찾아가 박카스를 한 병씩 얻어 마시곤 한다. 박카스가 떨어지면 퇴촌면까지 나가 몇 박스씩 사와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제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나눔의 집> 공식 사랑방 속리산 할머니의 방에는 이옥선 할머니 방처럼 추억이 깃든 물건도 사진도 없지만, 그래도 이 방은 <나눔의 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방이다. 비단 박카스 때문만은 아니다. 속리산 할머니는 유머가 있거나 남을 재미있게 하는 특기를 가지신 분은 아니지만 의도치 않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재주가 관상 봐주기와 직원들 짝지어주기다. 먼저 할머니는 보는 사람마다 남녀노소 지위 여하에 상관없이 관상을 봐주시는데, 요청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도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학생이든 얼굴을 한번 훑어보시고는 "귀가 큰 게 오래 살겠다." "코가 오똑한 것이 돈을 많이 벌겠다." 등등의 덕담을 아낌없이 해주신다. 가끔 관상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말씀하실 때도 있는데 아직 겉으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또 항상 결혼하지 않은 직원들을 서로 짝을 지어주려고 하시는데 서로 애인이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단 할머니 눈에 들면 <나눔의 집> 안에서는 커플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진짜 커플이 탄생한 예도 있다. 속리산 할머니의 방에는 볼만한 세간살이도, 이옥선 할머니의 방처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나타내거나 인권운동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그 어떠한 물건도 없지만 나는 <나눔의 집>의 방 중에 이 방을 가장 좋아한다. 이 방에는 피해자가 아닌 이옥선으로 살았던 속리산 할머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0년 2월 갑자기 할머니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방을 떠나 집중치료실에서 생활하시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할머니의 방은 주인 없는 빈방이 되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방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방들은 모두 속리산 할머니의 방처럼 정해진 과정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할머니든 <나눔의 집>에 오게 되면 방이 생기고, 그 방은 할머니의 역사와 추억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 방의 생명은 할머니의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만 이어진다. 할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할머니가 병원이나 집중치료실에 가게 되거나 혹 별세라도 하시게 되면 아무리 많은 추억과 그와 관련된 물품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방은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방이 된다. 항상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속리산 할머니의 방도 결국 할머니가 방을 비우게 되면서 지금은 업무 이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방이 되었다. 이전에는 새로운 할머니로 인해 기존 방이 정리되고 새 주인이 생겨 다시 활기를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 <나눔의 집>에 새로 들어올 할머니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이제 이 방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록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항상 주장하지만, 할머니들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예전에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또 그것을 남들이 알고 있다고 해서 평생을 피해자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넘어 그 이면에 있는 할머니들의 일상과 삶에 관해 관심을 가질 날이 올 것이다. 이에 나는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진 평범한 할머니들의 방을 그대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이 방과 방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개성과 의미를 통해 피해 이후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조명해 보고 싶다. Credit 일러스트 : 백정미 * 2020년 8월 11일, 속리산 이옥선의 방이 복원되었다. (아래 사진 참조) * 2020년 8월 20일, 복원된 방에서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나눔의 집 직원들이 겉절이를 만들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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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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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프롤로그 '국제법의 인민화'라는 흐름 민간 주도의 법정은 대부분 소멸시효나 면책규정 등으로 현실의 법정에서는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시도된다. 실정법에서는 권력에 의거하여 법의 효력을 가늠하지만, 실정법으로 해소 불가능한 앙금을 다루는 '인민법정'에서는 그 효력과 권위의 토대를 '인민(people)'의 층위에 두고 있다.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법적 실효성을 갖는 국제법정을 일본 정부의 협조 하에 개최하는 것이 더 이상 곤란해진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강구된 방법으로, 가해국 일본정부와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인민법정[1]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였던 크리스틴 친킨(Christine Chinkin)에 따르면,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이며, 국가가 정의를 보장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시민사회가 '개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민법정은 이러한 전제에 기반한다. 또한 인민법정은 형벌을 내리거나 보상을 명할 수는 없지만, 법적인 판결의 가치와 도덕적인 강제성에 의한 권고는 할 수 있다.[2] 따라서 인민법정의 권위는 인민에 의거하며, 법정의 판결과 그에 부수하는 권고의 집행 여부는 법정의 유래인 인민, 즉 '국경을 넘은 인민'의 힘에 달려 있다. 국제법이 국가 간의 약속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을 고집해 온 일본의 법원은 '국제법을 인민화'[3]하는 당시의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 사법부의 구태의연한 국가주의적 태도에 대항하는 국경을 초월한 인민들의 도전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선주민에 대한 경멸과 인종주의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과테말라 내전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의 내정간섭이었다. 1944년부터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와 아르벤스(Jacobo Arbenz Guzmán)와 같은 과테말라의 혁신적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19세기 이래로 계속되어온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수탈구조를 개선하고자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1951년에 당선된 아르벤스는 유나이티드 푸르트(United Fruits Company) 보유지를 비롯해 착취구조의 근원들을 다수 국유화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54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의 군사적 개입으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4] 결국 1960년에 미국과 결탁한 정부군과 무장 게릴라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특히 반공주의 독재자 리오스 몬트(José Efrain Rios Montt)는 1982년~1983년 사이에 게릴라와 전투를 치르면서 민간인을 강제로 포섭한 자경단(Patrulla de Autodefensa Civil, PAC)과 군대를 동원하여 선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1999년에 발표된 '역사적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CEH)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96년까지의 내전 기간 동안 과테말라에서는 약 5만 명의 실종자를 포함해 2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전쟁고아가 약 25만 명에 이르렀으며, 약 15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5] 과테말라에서 '여성인민법정'을 발의한 요란다 아기라르(Yolanda Aguilar)는 과테말라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자로서 2000년 여성법정 기간 중 넷째 날에 열린 국제 공청회 <현대 분쟁 하의 여성에 대한 범죄>에서 증언대에 섰던 인물이다. 요란다는 1960년대와 70년대 과테말라시티에서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니며 농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에 대해 일찍 눈을 떴고, 러시아 작가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여성 공장 노동자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75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군부 집권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어머니는 무장혁명조직 FAR(las Fuerzas Armadas Rebeldes)의 활동을 시작했고, 요란다도 13세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거나 화염병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5세 때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체포되어 구타와 윤간을 비롯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요란다는 그후 3개월 동안 시력을 잃었는데, 구타로 인한 염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머리와 몸이 아무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1980년에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을 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었고, 곧장 쿠바로 떠나 2년을 살았다. 성폭력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그는 1983년에 과테말라 북쪽의 접경지역 페탱(Petén)으로 가서 반군(反軍)과 함께 사회적 계층이나 계급이 없는 세계를 건설하려던 동료들과의 깊은 연대 속에서 5년을 머물렀다. 5년 뒤 다시 돌아온 과테말라에는 여전히 성폭력이 만연했다. 요란다는 강간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내전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수집을 위해 만든 조직인 레미(REMHI)[6]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 요란다는 무력분쟁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들의 이야기들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요란다는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았다."[7]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의 성폭력 피해와 생존 경험을 나누다 요란다는 REMHI 보고서를 번역하던 일본인 여성에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고,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 내전 시기에 겪었던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증언해 줄 것을 제안받았다. 2000년 여성법정 공청회에서 요란다는 청중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을 잔인함에 대해서 증언하는 대신 자신이 겪은 압도적인 폭력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서 본 힘을 이야기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 가장 끔찍한 혼란, 가장 깊은 위기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2015년의 인터뷰[8]에서 "나는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해 기꺼이 논의하려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했다. 그녀들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50년을 기다려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성폭력 피해자로부터 변혁의 주체로' 프로젝트 요란다는 2000년 여성법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금기시되어왔던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말하고 그러한 아픔을 공유하는 장(場)을 만들 것을 여러 여성 단체에 호소하였고, 2002년에 '전시성폭력 피해자에서 변혁의 주체로'(이하, '피해자에서 주체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각지에서 선주민들의 언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여성 프로모터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강간'과 '성노예'는 마야 선주민들의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는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야요리상 홈페이지[9]) 다음은 주요 증언들 중 하나이다. "'저놈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 군인들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즐길까' 라며 포로들을 데려왔습니다. 거기엔 남자도 여자도 병사도 있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았더니,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여자를 강간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던 거예요. 포로들은 굶주리고 잠도 못 잔 상태여서 휘청거렸는데, 그 상태에서 강간을 강요한 겁니다." (중요증언 027 가해자 1982년)[10] 내전 시기에 여성들은 공포와 폭력으로 가득 찬 일상을 살아야 했다. 살상을 눈 앞에서 목격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이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중에도 그녀들은 군인들에게 밥을 해서 나르고, 춤 추고, 강간당하고 행진을 강요당했다.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 12월 29일에 게릴라 세력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teca,)'과 정부군 사이에서 맺어진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처벌과 보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사법제도에 기반한 재판이 요청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과테말라에서는 평화협정 때 국가권력이 만든 「국민화해법」에 의해 내전 중 발생한 정치범죄에 대해서는 면책이 보장되어 있었고, 성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이유로 형사재판의 실현이 어려워지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에서는 2007년부터 국제사회에 피해의 실태를 호소하여 내전 중에 전투수단의 하나로서 성폭력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2010년에는 드디어 국가에 대해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를 목표로 하는 민간 주최의 법정을 개최하게 된다. 2010년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성폭력에 대한 면책을 해제하다 2010년 3월 4일부터 이틀간 과테말라시티대학에서 500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이하 '여성인민법정')이 개최되었다. 각국이 국제 인도법과 국제 인권법에 따라 무력 분쟁 기간과 그 이후의 불/비처벌을 종식할 것을 권고하고, 특히 여성과 여아가 성폭력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행된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전쟁 종식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에 주목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20'[11]이 통과된 지 2년 만이었다. 방청석에는 110명의 피해 여성들이 원고로서 앉아있었고, '명예판사'로는 과테말라에서 치안부대에 의해 구류된 여성들을 강간한 범죄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판결을 받아낸 마야족 여성 후아나 멘데스, 후지모리 정권하 페루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구라데스 카나레스, 우간다 전시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던 티디 아팀, 2000년 여성법정의 참가자였던 아라카와 시호코(荒川志保子)가 명예판사로 임명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모두 법률가가 아니라 성폭력에 맞서 싸운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12] 여성인민법정이 2000년 여성법정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원고들의 익명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증언자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상의 증언석에는 증언자의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가림막을 설치했다. 원고들 중에는 가족들 모르게 법정에 나온 이들도 있었고, 아직까지 가해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첫 날 증인들의 증언에 이어 둘째 날에는 9명의 전문가 증언이 있었는데, 원고가 익명이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들에 대한 증거 수집을 하지는 않았고, 내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폭력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명예판사들이 읽어 내려간 최종판결문에는 내전 시기 과테말라 형법 및 국제법에 의거할 때 중요한 위반행위가 자행되었음을 인정하고, 공무원 및 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행위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고 선고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최종판결은 면책과 그로 인한 불처벌이 계속됨으로 인해 성폭력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내전 시기 인권침해에 대한 면책 해제,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조약의 비준, 국가 및 관계기관의 정보공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실행, 재발방지를 위한 정책입안 등 정부에 대해 15개 항목을 권고하였다.[13] 2016년 전직 군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 세푸르 자르코 재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는 '침묵을 부수는 여성들' 프로젝트로 발전하였다. 이는 여성 변호사 조직인 세 단체, '과테말라 전국여성연합(UNAMG)', '사회심리행동과 공동체연구 그룹(ECAP)', '세계를 바꾸는 여성들(MTM)'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 과테말라 동부 세푸르 자르코(Sepur Zarco) 지역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여성 15명이 지역 여성 단체와 유엔(UN WOMEN)의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 최고 법원에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2회의 청문회를 거쳐 2016년 3월 2일, 드디어 법원은 강간, 살인, 노예로 인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전직 군인 2명을 기소하고, 여성 생존자들과 지역사회에 18개의 보상조치를 부여했다. 과테말라 국내 법원이 국내법과 국제 형사법을 이용하여 분쟁 중 성노예 혐의를 고려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14] 이들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1982년, 군에 의해 남편들이 '강제 실종'되고 집이 불태워진 후 수 년에 걸쳐 마을에 남아있던 군의 주둔지에서 성노예가 되었다. 주둔지는 1988년에 폐쇄되었고 피고는 당시 군인과 자경단원 등을 비롯한 직접적인 가해자와 명령을 내린 사령관이었다. 재판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군에 의한 반란 진압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싸움의 역사적인 성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하고 전시 성폭력의 정의를 확립한 것이었다. 법원은 국가가 마을과 그 주변 마을에 집단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조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과 농촌 지역 사회가 종종 부정당하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를 확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처음으로 지역에 고등학교와 보건 클리닉을 세우고, 살해당한 여성의 남편들에게 기념비를 만드는 것 또한 이 조치에 포함되었다.[15] 에필로그 다시, 불/비처벌의 문제와 식민지 책임을 묻다 그러나 세푸르 자르코 재판 이후로도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는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과테말라 정부는 법원이 명령한 집단 배상 조치의 대부분을 실행하지 않았다. 세푸르 자르코의 사례는 16세기부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던 과거의 범죄에서부터 최근의 인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몇 세기에 걸쳐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이에 맞서 싸워온 이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 또한 증명했다. 과테말라 내전에서는 20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는데, 피해자의 83%가 마야 족이었고, 기록된 626건의 학살 또한 대부분 마야 공동체에서 발생하였다. 과테말라 내전 시기 전시 성폭력은 억압받는 마야 선주민과 정부군 병사의 가해라는 구도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에 놓여 있다.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과테말라의 상황, 미국과 쿠데타 세력의 공모, 과테말라의 미사용 토지를 보유한 해외 기업의 문제,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 인종주의 등이 착종하는 지점을 살피며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2000년 여성법정과 이를 계승하여 10년 뒤에 열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은 미완의 과제로서 식민지 책임과 (식민)기업에 대한 책임, 그리고 불/비처벌의 문제를 공통으로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9년, 과테말라에서 10~14세 여성들의 임신이 큰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빈곤가정 출신인 동시에 성폭행 피해자였다. 폭력의 가해자가 가족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이 같은 성폭력은 선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오지인 탓에 통신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16] 이러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선주민 소녀들 사이에서 생겨난 호신술 열풍이다. 2015년 이후 태권도 등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호신술이 선주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과테말라 태권도 대회의 우승자 미리암 쿠쿨 샘(17)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학교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힘이 더 세다며 항상 우리를 괴롭혔어요. 이제 남자들의 괴롭힘은 두렵지 않아요. 태권도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알게 해줬어요."[17] 10대 선주민 여성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COVID-19 기간 중에 더욱 악화되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컴퓨터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은 교육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증가하는 가정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학대자와 계속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지만 이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적이다. 그 결과 10대 임신과 모자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부족한 농촌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이에 10대 여성들은 스스로의 문화 활동을 이끄는 Las Niñas Lideran(Girls Lead) 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살율을 줄이고, 교육 접근성을 높이며 의료 서비스를 늘릴 것, 폭력 생존자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18] 우리가 이들의 홈페이지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슬로건은 이렇다.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가 매일 우리의 행동에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과테말라의 여성들은 지금도 일상화된 성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시도들의 한가운데에 함께 서 있다. 재판에서 승소했으나 배상받지 못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했던 노력을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에 비유해서 말한다. "우리는 옥수수 씨를 뿌렸어요. 우리가 먹을 순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 씨를 말이죠." 각주 ^ 한때 금칙어였던 '인민(people)'은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인민' 대신 한국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지배 주체인 국가 없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이 단어는 어쩌면 무시무시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인민' 개념은 다시 사유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을 사실상 선거를 통한 주권의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14년, pp.185~189). 이렇듯 '인민'을 제한적으로 파악하는 '국민' 혹은 '시민' 개념은 필연적으로 비국민, 난민 등의 '배제된 존재들'을 양산하고, '민중'은 한국에서 있었던 특정한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상기시키기에 people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 즉 국가가 셈하는 인민과는 '다른 인민'을 산출하여 그 자체로 또 다른 공동체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people의 번역어로 '인민'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People's Tribunal 또한 '인민법정'이라 부르기로 한다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년, pp.300~301. ^ 한일 양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한일협정을 근거로 줄곧 법적 판단을 미루어 왔는데, 거꾸로 그런 종류의 국제법이나 국가 간 조약 등을 피고 혹은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인민화된 국제법'이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인민화된 국제법에 상응하는 새로운 법정 혹은 새로운 법적 형식의 발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심아정, 「'권력 없는 정의'를 실현하는 장소로서의 '인민법정'-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사례를 중심으로」『일본연구』 제30집, 고려대일본연구소, 2018년, 48쪽 ^ 노용석, 「20만 명 숨진 과테말라 내전, 과거사 청산의 기록들」, 『오마이뉴스』 (기사입력일: 2018년 3월24일, 기사검색일: 2020년 11월14일). ^ 박구병, 「과테말라의 내전 종식 이후: 평화협정 이행의 험로」, 『Asian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vol.31, No4, 2018년, 21쪽. ^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 일명 역사적 기억의 회복 프로젝트. 1998년 4월 26일, REMHI 프로젝트의 최종 보고서를 공개한 지 이틀 만에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후안 제라디 주교는 집 밖에서 암살되었다. REMHI는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 기간 동안 저질러진 잔혹행위를 기록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가 이끌었던 전례 없는 시도로, 대교구는 1995 년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요란다의 생애는 주로 아래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2015년 2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Katia Orantes가 진행한 비디오 인터뷰. Stephen O'Brien이 수집한 구두증언에 대해서는 Stories from Guatemala(Oral testimony illuminating historical and social conditions)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https://www.wfphr.org/yayori/award/y_2009.html(기사검색일 2020/11/02).야요리상은 전쟁과 성차별이 없는 21세기를 위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활동가, 저널리스트, 아티스트를 선정해 수여하는 여성인권활동장려상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개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쓰이 야요리를 기념하여 이름 붙였다. 2004년부터 10년간 '야요리상'과 '야요리저널리스트상'을 수여해왔으며 2014년에 종료되었다. ^ 관련 증언들은 마쓰이 야요리상 홈페이지의 '야요리상' 수상 기념 스피치 투어 자료집(2009년 12월)을 참고할 것. http://www.jca.apc.org/recom/sonrisa/200911yayori-siryo.pdf (기사검색일: 2020/11/02). ^ UN SCR 1820의 원문은 유엔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un.org/ruleoflaw/blog/document/security-council-resolution-1820-2008-on-women-and-peace-and-security/ ^ 柴田修子 「戦時性暴力の被害者から変革の主体へ⎯中米グアテマラにおける民衆法廷の仕組み」 『立命館元号文化研究(23巻)2号』, 2011年, pp.75-76. ^ 최종판결문은 과테말라 인권위원회(GHRC)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ghrc-usa.org/Resources/2010/tribunal_de_conciencia.htm#pronunciamiento ^ 「2012年11月14日 「沈黙を破ってーーグアテマラ戦時下性暴力スピーキングツアー2012」 アナ・アリシア・ラミセス・ポップさん」 , 同志社大学 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研究科, 「女性・戦争・人権」学会 홈페이지 https://www.war-women-rights.com (기사검색일:2020/11/02). ^ Sepur Zarco case: The Guatemalan women who rose for justice in a war-torn nation: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18/10/feature-sepur-zarco-case (기사입력일:2018/10/19, 기사검색일: 2020/11/02). ^ 손영식, 「여기는 남미: 과테말라 10~14살 임신 급증, 대부분 성폭행 피해자」, 『서울신문』(기사입력일: 2019/03/06, 기사검색일: 2020/11/03) ^ 변선구, 「과테말라 원주민 소녀들의 태권도 발차기, “성폭력 두렵지 않아요”」, 『중앙일보』(기사입력일: 2019/11/29, 기사검색일: 2020/11/03) ^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20/11/i-am-generation-equality-ixchel-lu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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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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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2015년 11월 12~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인도에 반한 범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이 열렸다. 2015년은 적게는 5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희생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인도네시아 집단학살 범죄의 가해자는 인도네시아 군대, 그리고 군대에서 지도하고 훈련시킨 여러 민병대였고, 피해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하 PKI) 당원이나 관련 민중 단체였다. 이들 민중 단체는 농부, 노동자, 여성, 예술가,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의 열성적 지지자, 대부분이 중국인 진보단체인 시민협의회(Baperki)[1] 회원이었던 화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65년부터 PKI 당원(으로 간주된 자)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벌어지면서 수십만 명이 수감되거나 인도네시아 부루(Buru) 섬을 비롯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수감자 대부분은 고문을 당했고, 특히 여성(과 일부 남성)은 성폭력에도 노출되었다. 집, 사무실, 학교, 개인 재산은 모두 수탈되었다. 집단 학살이라는 반인도적 범죄가 시작되고 채 2년이 되지 않아 수하르토 장군은 수카르노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1968년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사건은 1965년 9월 30일, 중간 계급 군인들이 고위급 장군 6명(과 실수로 중위 한 명)을 납치해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9‧30운동', 혹은 '9‧30쿠데타'라 불리는 사건이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들 6명의 장군을 납치해 수카르노 대통령 앞에 데려가자는 것이 '9‧30 쿠데타'의 초기 계획이었다. 당시 PKI 의장도 장군들을 납치하는 작전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을 살해할 생각은 아니었다.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산당 간부와 일반 당원들은 이 작전을 알지 못했다. 의장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살해되어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곧 습격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듣고도 상관에게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수하르토 장군의 역할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이러한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의 가해자 중 어느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축출되고 1998년까지 이어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 정권 하에서는 PKI가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며 비난하며 집단 학살의 피해자를 국가의 배신자로 묘사하는 공격적인 선전이 벌어졌다. 당시 활동했던 공산당원들과 후손들은 여전히 그러한 낙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가족은 직업을 잃었고, 아이들은 대학 입학을 거부당했다. 수천 명의 공무원과 군인이 수카르노를 지지했다는 의혹을 받고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연금을 받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1998년, 수하르토 장군의 독재가 끝나자 집단학살 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Komnas HAM)'는 2012년 보고서에서 당시 자행된 잔혹한 행위를 반인도적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요약문과 함께 공개된 이 획기적인 보고서는 학살 목격자와 생존자 349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제출받은 법무장관실에서는 절차상의 이유를 근거로 보고서를 돌려보냈고, 지금까지 법무장관은 집단학살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 역시도 2012년에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감독의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이 개봉되고 나서야 이 비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개봉 뒤인 2013년 3월, 인권 활동가, 언론인, 연구자 등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헤이그에 있는 우리 집에 모였다. 오펜하이머 감독, Komnas HAM 위원 한 명, 저명한 여성이자 인권 변호사인 누르샤바니 까챠숭까나(Nursyahbani Katjasungkana)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이하 2000년 여성법정)에서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검사장을 맡기도 했다.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2000년 여성법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참석자들은 국제민중법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대량학살 사건에 관한 국가적·국제적 수준의 침묵을 끝내고,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을 돕고 재발도 방지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망명한 사람들과 활동가들이 누르샤바니 변호사에게 인도네시아 집단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을 조직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가 1965년 10월부터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를 국가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피해자와 그 가족의 목소리가 억압당하거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는 누르샤바니 총괄 조정관, 그리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네덜란드 헤이그 각각에 사무국을 둔 수평적 조직을 운영했다. 헤이그의 사무국은 재판 심리를 준비했다. 법정 준비를 위해 조직위원회(OC) 위원들이 이끄는 여러 팀도 만들어졌다. 누르샤바니도 자카르타 팀을 이끌며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힘썼다. 인권 운동가나 피해자 단체와 함께 세미나와 워크숍을 열었고 인도네시아 검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며 판사들에게 참여를 부탁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정기적으로 헤이그에서 우리 업무를 감독하기도 했다. 2014년 3월, ‘국제민중법정재단’(Foundation International People's Tribunal)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법정 주최 비용을 충당할 기금을 간신히 모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많은 기금 지원 기관에서는 이 문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국제 사법 재판의 도시로 알려진 헤이그에서 민중법정을 여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50년의 침묵을 깨다 우리는 ‘50년의 침묵을 깨다’(breaking 50 years of silence)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법정을 개최한 2015년은 집단학살과 PKI의 붕괴뿐 아니라 수카르노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진 '1965년 사태'가 있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판사단 최종 보고서(Final Report of the Panel of Judges)는 2016년 7월에 발표되었고, 2017년에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로 공개되었다. 세계의 연구자와 활동가 40명이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최종 보고서의 결론은 여전히 내용 열람이 금지된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의 분석과 일치한다. 특히 최종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다음의 4가지이다. 첫째, 판사단은 망명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고 판단했다. 망명자들 중에는 1965년 9월 당시 해외에 있다가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지 못한 공산당원들과 학생, 외교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판사단은 보고서에서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반인도적 행위와 별개로 상당한 규모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국가적 공격의 한 부분에 해당하며, 박해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반인도적 범죄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 망명은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명시되어 있지 않고 2012년 Komnas HAM 보고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판결로 논의가 시작된다면 좋을 것이다. 둘째, 살인 조장 선동에 관해 다루었다. 특히 “공산주의자 여성들이 '루방 부아야(Lubang Buaya)'라는 들판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면서 장군들을 거세하고 죽였다”는 허위 선전을 군대가 만들고 퍼뜨렸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판사단은 “루방 부아야에서 포로들에게 벌어졌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완전한 거짓이다. 수하르토 장군 휘하의 군 간부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고 …(중략)… PKI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 선전전은 이들에 대한 박해와 억류, 살해를 정당화했다. 또한 앞서 기술한 성폭력과 일체의 반인도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30년 이상 계속된 이 선전은 생존자의 시민권을 부정하고 박해가 지속되는 데 기여했다. 폭력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허위 선전을 퍼뜨리는 것은 폭력을 행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범죄를 준비하는 행위는 범죄 자체와 별개로 논할 수 없다. 선전은 학살을 포함한 반인도적 행위를 조장했으며, 광범위한 폭력의 시작이자 일부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셋째, 검사는 다른 국가, 특히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서도 공모 혐의를 제기했다.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이들 세 국가에도 법정에 출석해 변론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에 응한 국가는 없었다. 판사단은 공모의 정도는 다르지만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가 모두 반인도적 범죄에 연루되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기소장에 따르면 특히 미국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대량 학살과 기타 범죄 행위를 자행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도네시아 군대의 반인도적 범죄 공모 혐의를 정당화할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민중법정은 집단학살의 발생 여부를 다루었다. 검사가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연구 보고서에서는 학살 혐의를 뒷받침하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집단학살 혐의가 기소장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집단학살 범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h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집단, 즉 “국가적, 민족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 집단”에 속하지 않는 집단에게 ‘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데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소장에 집단학살 혐의가 포함된다면, 극도로 민감한 문제를 다룸에 따라 이미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검사들의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민중법정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법정은 진실을 담는 아카이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정치계에서 지배적이었던 '가해자들의 아카이브'는 '피해자들의 아카이브'로 대체되거나 보완될 수 있었다. 세상은 생존자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비록 가해자에게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고 어떠한 보상이나 배상도 뒤따르지 않았지만, 법정을 통해 피해자와 그 가족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집단학살과 여타 반인도적 범죄를 둘러싼 침묵을 깨고 그러한 범죄는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 법정은 무엇보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각주 ^ 인도네시아 시민협의회(Badan Permusyawaratan Kewarganegaraan Indones, Baperki). 영어 명칭은 Consultative Body of Indonesian Citizenship으로 1954년 설립되었고, 이후 1965년 수카르노가 수하르토에게 실권을 이양한 후 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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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가닿지 못한, 그러나 확보해야 할 전쟁 경험의 말‘들’: 베트남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 이후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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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의미를 소환하며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존자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0년 4월 21일이었다. 3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의 지난한 변론을 거쳐,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 7일,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의 ‘불법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재판부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전에 지났다는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2015년부터 현지답사와 공부 모임을 시작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의 몇몇 변호사들은 2017년에 관련 소송을 위한 TF를 꾸렸고, 그 과정에서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모델로 한, 가해국의 수도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민간법정이었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못해도, 가해국의 구성원들이 꾸린 법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이 ‘가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과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에는 퐁니와 하미 두 마을에서 ‘응우엔티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피해 생존자가 각각 증언대에 올랐다. 그 후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이 퐁니 마을 응우엔티탄의 원고 대리인단이 되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여느 운동들처럼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 또한 사법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적 차원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잘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운동을 안온한 자리로, 응원의 자리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민평화법정 활동의 연속체적 성격을 가지고 변호사, 활동가, 연구자, 평화단체가 모여 ‘베트남전쟁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를 꾸렸고, 지금까지도 정보공개 청구, 청원서 제출, 국가배상소송,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진정, 특별법 발의, 판결문 번역 그리고 각종 공론장 기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민네트워크는 대표도, 직인도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나 국가 간 관계와는 다른 층위에서 20여 년간 국경을 넘나들며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며 지속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번 1심 승소라는 판결을 확보하기까지, 대리인단의 변호사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정 ‘바깥’의 말들 법정 증언을 위해 피해 생존자 응우엔티탄과 목격자 응우엔쩌이 두 사람이 한국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진화위 위원장 면담을 비롯하여 여섯 시간 반이나 진행된 국가배상청구소송 증인 심문과 원고 심문, 국회 토론회, 80여 명이 모인 좌담회 등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응우엔티탄은 법정에서 한국 정부에 간곡한 ‘호소’가 아닌 당당한 ‘요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전쟁기념관에서 베트남전쟁 관련 전시 내용에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정이 큰 기쁨이자 숙원을 향해 나아가는 긍정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거리만큼의 ‘곁’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들어야 할 말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피해 생존자의 말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도 구별이 안 될 만큼 비슷하게 들린다. 그것은 던지는 질문과 만나는 방식이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고, 법정을 꾸리면서 사건 그 자체에 주로 집중해 왔기 때문에 들어야 할 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에서의 당사자 발언만큼은 이런 의미에서 새롭다. 피해자 증언과 법정 구성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참전군인 증언까지도 확보된 지금의 상황에서, 피해와 가해의 구도 사이에 고여 있을 수많은 말들은 제대로 길어 올려지지 않고 있다. 2018년 베트남시민법정 이후 2023년 실제의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론장을 기획하며 ‘말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그 ‘말’은 피해 생존자나 목격자의 말,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 변호사의 말, 활동가와 연구자의 말,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의 말,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들의 말, 온 존재를 다해 비명을 지르는 땅과 바다와 강과 숲 그리고 비인간 동물의 말의 자리였다. 피해자의 말을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들리게 하는 활동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한 더 첨예한 논쟁이 필요하고, 이것이 당사자성에 ‘갇히지 않는’ 혹은 당사자성을 ‘확장해 가는’ 운동이 되기 위한 고민 또한 더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운동이 피해 생존자의 경험이나 말만을 ‘앞세운’ 운동이 되지 않을 때, 피해 생존자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운동이 되지 않을 때, 다양한 말과 관계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려고 할 때, 비로소 지금-이곳의 우리가 그때-그곳을 겪어낸 존재들과 이어지는 운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난 ‘위안부’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증언이 되지 못한 말,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혹은 유족을 베트남 현지에서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같은 해 4월에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법률팀 변호사들과 함께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 확보를 위해 퐁니와 하미 두 마을을 방문하고, 사건 발생 장소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방문하기 전날, 다낭의 모처에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 하루 종일 증언을 들었는데, 먼 곳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낯선 이들을 익숙하지 않은 도심의 공간에서 마주하고, 50년도 더 지난 피해 당시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며 법정의 증언으로 ‘채택’될 수 있는 ‘효력’을 가진 말을 해야 하는 화자들의 부담과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피해 생존자들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무엇보다 화자가 위축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이는 청자의 긴장감마저 녹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얘기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라고 말하는 손주들이 떠들며 뛰어다녔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잘 차려진 밥상이 준비된 거실에 둘러앉아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육하원칙에 따라 질문을 하던 변호사 한 사람이 갑자기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법정에서는 쓸모없는 말이겠지만, 피해 생존자들은 비극을 겪고 난 후 비참한 시간만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은 폐허가 된 마을로 하나둘씩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 위에 다시 집을 짓고, 누군가는 남의집살이를 하고, 누군가는 국수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뒷마당에서 닭과 돼지를 키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증언을 할 때와 이후의 시간들을 ‘살아낸’ 이야기를 할 때, 화자들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재판을 위해 청자가 꼭 들어야 할 말들은 화자가 하고 싶은 말들과 겹치기도 하지만 충돌하기도 한다. 말들의 어긋남 속에서 법정 바깥으로 밀려난 경험들을 놓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피해 생존자에게 들은 말을 청자들에게 미처 전하기도 전에 통역사가 울어버린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도 화자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다가 함께 울어버린 순간, 피해 생존자가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노라며 곰방대를 쥔 손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당당하게 학살 이후의 삶을 말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감싸 안는 화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 현지에서 마주했던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청자들에게 ‘듣는다’는 행위를 고민케 했다. 또 하나의 학살지 하미 마을 이야기 – 진실을 회피하는 자는 누구인가 또다시 현지를 찾아가 피해 생존자들을 만난 것은 2023년 2월이었다. 퐁니 마을의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의 1심 승소 판결 소식이 베트남 사회에 전해진 직후였고, 하미 마을의 위령제가 열리는 때였다. 승소에 대한 커다란 기쁨 속에서도 또 다른 학살지 하미 마을의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화위에 제출한 진정은 조사 개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에,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는 피해 생존자들의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며 당사자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퐁니 마을과는 달리 법정에 제출할 증거 확보가 어려웠기에 실제 법정을 꾸리지 못하고 진화위 진정을 냈던 하미 학살. 그러나 하미 마을 사람들은 퐁니 마을의 승소 소식을 전해 듣고, 사법적 해결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평화법정, 청와대에 낸 청원, 실제 소송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피해 생존자들은 그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만’ 있지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겐 커다란 의미를 갖는 시도였고, 베트남 사회 내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게 된 계기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러 지면과 보도를 통해 퐁니의 응우엔티탄과 하미의 응우엔티탄으로 대표성이 각인된 피해 생존자 이외에도, 하미의 응우엔티본 등 새로운 화자들이 등장해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응우옌티본을 포함한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은 진화위에 하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진화위는 2023년 5월 25일, 하미 마을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절차를 시작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2라-12544).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까지 진화위가 조사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조사대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이니 조사조차 하지 않겠다는 진화위의 기괴한 의지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범죄를 방조하겠다는 이른바, ‘정의에 대한 태만’에 다름 아니다. 진정 신청인 중 한 명인 응우엔티탄은 진정을 접수하고도 일 년 넘게 ‘침묵’을 이어온 진화위에 보낸 서신에서 ‘조사할 용기’를 내 달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쟁 때 자행된 학살의 조사 개시는 ‘용기’까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이자 재판과 진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온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과 김남주(법무법인 도담)는 “진화위 관련 법률에는 외국인을 조사범위에서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인권침해가 일어난 지역이 ‘외국’이라거나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제하는 조항도 없다”며 “진화위가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유를 근거로 들어 부당하게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결국 피해 생존자들은 시민네트워크의 조력으로 지난 7월 19일,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서울행정법원 2023구합71872). 1심 승소 판결 이후, 판결문 번역과 ‘민’들의 공론장 1심 승소 판결이 난 이후에도 한동안 피해 당사자들은 한국어로 쓰인 판결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이 어떻게 인정되었는지, 재판부는 한국 정부에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 용기를 낸 증언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네트워크에서 판결문 번역을 위한 모금을 했고, 693명의 응답으로 번역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었다. 판결문은 베트남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피해 당사자들과 유족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 국제기구에 전달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1심 승소에 대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갈렸다. 승소 판결 열흘 후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것은 전혀 없다”며 “국방부는 거기(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언했고, 3월에 한국 정부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은 국가적 차원에서 말 그대로 대대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제출된 항소이유서는 자그마치 126쪽에 달한다.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유감’이나 ‘마음의 빚’과 같은 권력자들의 애매하고 비겁한 표현 이외에 한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다.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열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정부가 항소한 사실이 알려지자,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매우 유감”이라며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정부의 항소에 대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낸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승소 판결 이후, 시민네트워크의 기획으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라는 공론장이 열렸다. 홍보를 위해 처음에 만든 웹자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시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였다. 논의를 거쳐 최종안에서 ‘시민’을 ‘민’으로 수정했는데, 전쟁 자체가 국가주의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고, 국민으로 동원된 피해/가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민’으로 테두리 쳤을 때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을 더 이상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쟁을 경험한 존재들을 국가나 국경에 가두거나 인간으로만 범주화해서 논의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이 생겨났다. 사실, 누군가 겪은 피해 경험을 판결문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가해 경험 또한 그러하다. 법정에서 다뤄지는 ‘증언’만으로는 다 말해지지 못하는 경험들이 있다. ‘판결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판결의 법적 내용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의 언어 너머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공동의 언어를 벼려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떤 동시대적 고민이 필요한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응우엔티탄의 승소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에서의 가해 경험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며 공유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용기를 낸 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만이 아니다. 가해 집단에 속한 참전군인 R의 증언 너머,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병사들의 수많은 말과 마음들이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의 경험들도 있다. 41쪽의 승소 판결문을 함께 읽는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낯선 법의 언어 속으로 뛰어들어 여러 질문을 던지고, 법정 투쟁만이 아닌 방식의 담론과 운동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 가까스로 확보한 가해경험과 가해구조에 대한 논의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 자리나 위치의 효과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가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어, 회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거기에는 연루와 자신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책임을 진답시고 죽어버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지만,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회성의 결여를 뜻한다. ‘가해자’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는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1] 1심 승소 판결이 내려진 직후에, 방청하던 법정을 나오자마자 증인 심문에서 가해 목격담을 증언해 준 참전군인 R에게 소식을 전했다. 시민평화법정 때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만나 온 시간들이 떠올라,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홉 번의 변론기일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날은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했던 2021년 11월 16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최초로, 참전군인이, 가해 관련 증언을 한 것이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했던 바로 그 참전군인 R이다. R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고, 재판에 필요한 말을 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전쟁 경험이 온전히 말해지는 장(場)이 될 수 없었다. R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 때 증언을 하고 나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 그러나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이 전쟁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서 언어화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은 전우회에서 말하는 무용담과도, 법정에서의 증언과도, 보훈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하는 말과도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그것은 어쩌면 청자에게 ‘새로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장(場)을 요청하는 말들이 아닐까. 참전군인의 전쟁 경험을 듣는다는 것은 지금껏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온 ‘남성성’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병역과 군대에 대한 현재적인 문제들과 함께 논의될 수도 있다. 병사들의 증언은 어떤 청자들을 요청하고 있을까.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참전군인의 증언이 있던 날, 함께 재판을 방청했던 성미산학교 은결은 판결을 앞둔 시점에 열린 공론장 〈법정에서 못다한 이야기〉에서 “‘감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전쟁”을 말했다. 은결은 아카이브평화기억과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학생들이 1년간 해온 참전군인 구술작업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는 우선 ‘감정’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의 감정은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에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도 감정은 배제됩니다. 감정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특히 법정에서는 이 감정의 언어들이 삭제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참전군인들은 저에게 감정을 공유해주었습니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밤엔 코코아를 마시며 위안을 얻었다’ 같은 것들. (…) 전쟁과 관련한 감정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것조차도 저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은 원래 흔들리고 엉키며 복합적이니까요. 그렇기에 감정을 통해 재구성하는 전쟁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감정으로 구성하는 전쟁은 이익과 손해, 피해와 가해, 규정되는 것만을 판단의 근거, 기준으로 삼으며 구성하는 전쟁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고 훨씬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안전한 자는 없기에 우리는 전쟁의 영향을 받는 많은 이의 삶을 살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이 전쟁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승소 판결 자체는 너무나 소중한 결실이지만, 전쟁에서 휘둘러진 여러 층위의 폭력을 분석하려면 ‘참전’의 주체들을 전방과 후방의 군대뿐 아니라, 전쟁을 지탱하여 고통과 이윤을 동시에 양산했던 병참 기능을 한 기업이나 강제로 동원된 소수민족과 비인간존재들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더욱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외교’ 문제로만 다뤄져서도 안 된다. 한명 한명의 목숨, 애도받지 못한 죽음, 살아남은 자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법정으로 가져가지 못한 하미마을의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국군대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으로서의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이자,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빨갱이인지 양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4.3의 폭력, “베트공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베트남전쟁의 폭력, “폭도인지 시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5.18의 폭력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국민화’를 거절하는 마음 -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민간인 학살에 국한해서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젠더, 생태, 강제 이주, 공동체 소멸, 자살 병사, 장애의 양산, 재생산권, 참전군인, 남성성, 디아스포라, 소수민족과 비인간동물의 전쟁 동원, 에코사이드(생태학살), 파월노동자, 전범기업 등 조금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모닥불 같은 공론의 장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졌으면 한다. 특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을 언급할 때, ‘민간인’은 베트남 ‘국민’으로 한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놓쳐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미군에 의해 동원되었다가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학살당한 산악지대 소수 민족들의 죽음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에서는 애도 혹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동원한 주체와 학살한 주체 각각에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제껏 ‘비국민’의 학살 피해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었던가. ‘1심 승소’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국민’의 전쟁 경험과 학살피해였다. 전쟁이라는 극대화된 폭력, 가해 경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해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 아무리 피해를 말한들 들리지 않거나 남 얘기로 들린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자에게 화자의 말은 가닿을 길이 없다. 1심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국의 미디어와 여론이 피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만하고 무감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가해 병사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의 자리’와 ‘가해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각주 ^ 후지이 다케시가 2021년 4월 15일, 공론장 〈피해를 품은 가해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을 말하다〉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쓴 추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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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경험과 “상황적 지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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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험에 소유격을 붙여 ‘00의 증언’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폭력성을 느낀다. 생각과 감정을 포함하여 움직임이나 행위에 관한 영역을 경험이라고 한다면, 마치 몸에 옷을 걸치는 것처럼 경험이 어떠한 말을 걸치는가라는 점은 지극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처음부터 ‘00의’라는 주어 아래 두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질문하게 된다. ‘00의 증언’이라는 설정은, 모든 움직임과 행위를 00이라는 주어의 것으로 총괄하라는 일종의 명령이다. 동시에 그것은 위의 질문을 배제하고, 움직임과 행위에 촉발되어 시작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닐까. 금기된 사랑을 둘러싸고 안티고네의 죄를 인정하게 하려는 신문(訊問) 장면에 대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행위자가 그 행위와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행위와 행위자의 연결됨을 언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논했다. 그는 이 주장에서 어떠한 말을 말로서 승인할 것인가, 어떠한 말을 사전에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서가 발동하는 점을 분석한다.[1] 또한 발화를 사전에 배제하는 질서는 법과 이성애주의적인 친족 구조의 공범 결과다. 그러나 증언대에 선 안티고네는 이 주장을 끝까지 거절한다. 거부하며 신문에 노출되는 이 경험은 “지금에라도 누군가에게 달라붙을 것만 같다”.[2] 그리고 경험에 자신의 소유격을 붙이는 것을 거절한 채, 안티고네는 산 채로 매장된다. 증언에 관한 폭력이 여기서는 생매장인 것이다. 버틀러가 지적하는 주장에는, 굳이 자신이 그 행위를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장이 이미 질서를 갖는 이상, 그 비약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사태는 시작과 동시에 먼저 심판에 의해 정지당하게 된다. 생매장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죄인인가 아니면 구제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 아니다. 증언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의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경험으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의 모습에 대한 고찰이다. 주장에 있어서 주어는 사전에 준비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이나 행위에는 사전에 준비된 주어가 달라붙어 주장되고, ‘00의 경험’으로 말해진다. ‘나’는 이 주어에 이미 선취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주장이 ‘나’를 덮치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된다.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흑인의 삶의 체험”을 통해 이러한 주장에 저항하며 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3]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단지 ‘나’라는 주어의 회복만은 아니다.모든 움직임이 “검둥이”라는 주장 속에서 말해진다. 파농은 이 문제를 “삼인칭 인식”이라고 말한다. 행위가 전부 삼인칭의 소유격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이 삼인칭은 변화가 없는 속성으로 자연화되어 있다. 또한 이 자연화하는 인식에는 때때로 과학이 이용된다. 그리고 이 자연은 ‘나’의 신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신체는 자연화에 저항하며 “나 자신을 사물로 삼는다”.[4] 이 점이 바로 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경험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경험으로서 산란하는 것이다. 나만의 일도 아니며 또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초점적 확장은 과정으로서 계속되어야만 한다. 파농은 책 마지막 부분에 “아아 나의 신체여, 언제까지나 나를 질문하는 인간이게 하소서”라는 기원으로 이러한 접속을 도모해나간다. ‘나’는 처음부터 이 지점에서 선언되는 것이며, 경험은 단수형이든 복수형이든 간에 주어의 소유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러붙게 되며,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산란과 복수화를 짊어지면서 새로운 관계를 갱신해 나아가는 힘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검둥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끝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또한 복수로 만들어 주어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서는 주장이 계속된다. 경험에 있어 논점은 소유격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러한 힘이다. 즉, 공통 항목이 만들어내는 우리가 아니라, 공통 항목으로는 총괄할 수 없는 곤란함을 끌어안는 우리가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30여 년 전 다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우리’를 향한 출발점을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통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해러웨이가 분투했던 과학 혹은 객관성이라는 것은 경험을 둘러싼 주장을 짊어진 지식이며, 삼인칭 인식이며, 자연화하는 사고이다. 그리고 자연화로부터 어떻게 몸을 떼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러웨이를 “상황”이라는 장소로 향하게 한다. 이 지점에 해러웨이는 말, 즉 지식을 재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파농과는 전혀 다른 문체지만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 역시, 언어적 주장에 저항하면서 시작의 장을 찾아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해러웨이가 향한 장소는 제한된 세계이며, 그 성격은 “부분적”이다. 이곳에서 “부분적 광경” 혹은 “제한된 목소리”에 기반한 말이 생겨난다. 몸에 옷을 걸치듯 경험에 걸쳐지는 것은 이러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대 일부’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말하는 전체 속의 부분이 아니다. 집합적 범주가 아니라 움직임이자 운동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부분성은, 자기 완결적인 부분성이 아니라, 상황에 놓인 지식이 가능하게 되는 각 각의 결합 혹은 뜻하지 않은 시작을 위한 부분성이다”.[5] 개개의 장소는 시작의 장이며 동적인 모습 안에 있다. 주장에 저항한다는 것은 복수의 범주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태를 확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경험이 말을 걸칠 때, 요점은 말의 일반적 유형이 아니라, 말과 함께 생성하는 어떤 상황과 시작, 그것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관계성에 있다. 이러한 일들이 기존의 상황과 관계성과의 경합 안에서 발생하는 이상, 말은 유형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다. 말은 말로서 승인되지 않은 말을 포함하여 개개의 관계성 안에서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말의 모습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시작의 일단(一端)을 짊어지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경험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며, 해설의 대상도 아니다. 경험이 움직임이자 상황 혹은 관계성의 생성이라는 의미는, 그것을 말로 하려는 ‘나’ 자신이 그 움직임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의 일단을 감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황적 지식”을 함께 확보하려고 하는 태도, 즉 앎이다.[6]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번역 : 정유진(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각주 ^ ジュディス・バトラー『アンティゴネーの主張』竹村和子訳、青土社、2002年、25頁。 ^ 1)과 동일、25頁。 ^ フランツ・ファノン『黒い皮膚・白い仮面』海老坂武・加藤晴久訳、みすず書房、1970年。 ^ 3)과 동일、79頁。 ^ ダナ・ハラウェイ『猿と女とサイボーグ(新装版)』高橋さきの訳、青土社、2017年、377頁。 ^ 역자 주, 도미야마 이치로/심정명 역 <시작의 앎 –프란츠 파농의 임상->,(문학과지성사, 2020) 서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