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
- 2024년 인터뷰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
-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 제주4·3사건 여성 생존자 담은 다큐 <목소리들> 제작자 김옥영 7년 7개월 동안 공식적으로만 3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국가폭력 사건인 제주4.3사건. 부족하나마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이뤄지고 해마다 희생자를 기리는 추념식이 열리지만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거대한 피해가 있다. 삼중 사중의 참혹한 고통과 피해를 겪고도 침묵해야 했던 제주 여성들의 삶이다. 다큐 <목소리들>은 처음으로 가려져있던 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결국 세상 속으로 불러내 위로한다. 이 여정의 전 과정을 함께 한 제작자 김옥영 피디를 만났다. 영화 <목소리들> 감독 지혜원 제작 김옥영 | 다큐멘터리 | 89분 | 개봉 2025. 4. 2. 1948년부터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는 죽음의 섬이었다.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이 공산 빨치산 소탕을 명목으로 섬 주민 3만여 명을 학살하고 집을 불 질렀다. 제주4.3사건 피해자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이 입은 피해는 오래 알려지지 못했다. <목소리들>은 한 헌신적인 제주 4.3 연구자의 길을 따라가며,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제주 여성들의 경험, 침묵 속에 잠겨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Q : 반갑습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생소할 때부터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해 오셨는데, 오늘은 영화 제작자로 뵙습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로 말씀 시작하겠습니다. 🧶 김옥영 : 이번에 제주4·3사건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을 제작하고 각본을 맡은 김옥영입니다. 30년 정도 여러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는데, 주로 KBS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문적으로 다뤄왔습니다. 2010년부터는 ‘스토리온’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해 직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4·3사건을 다루게 되면 제주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Q : 그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이하 다큐)를 통해 반민특위, 5·16군사쿠데타, 10월유신, 5·18민주화운동, 12.12군사반란 등 한국 현대사를 가르는 굵직한 사건들을 대면해 오셨습니다. 이번에 제주4·3사건(이하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목소리들>을 기획하고 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 김옥영 : 2005년 4부작 <8.15의 기억>을 제작할 때였어요. 현대사 주요 사건의 쟁점을 실존 인물 인터뷰를 통해 조명해보는 작품으로, 처음으로 구술사를 다큐에 도입해 주목받았었죠. 마지막 4편 주제가 ‘해방공간의 이념 대립’이었어요. 그때 서북청년단 일원으로 부산철도노조 파괴에 참여한 분과 철도 노조원이었던 분을 찾아냈어요. 나레이션 등 제작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두 분의 인터뷰만으로 당시 상황을 드러내기엔 무언가 미진해 당시 이념 대립의 희생양으로 4·3사건에서 남편을 잃은 한 할머니를 출연시켰어요. 근데 할머니는 4.3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지는 않고 그저 모른다는 말만 하셨어요.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라는 말만 하며, 4·3평화공원 위령제단 희생자 명패로 가득 찬 벽 아래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강력해서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Q : 시작은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 김옥영 : 아니 세월이 지나면서 흐려졌죠.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0년 1월 공포, 2021년 2월 전면 개정안 국회 통과. 이하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이상하게 연결되는 작품이 없었어요. 그러다 몇 년 전에 제주 어느 마을에서 지내는 4·3위령제 르포 기사를 접했는데, 위령비에 적힌 여자들의 이름이 모두 누구의 처, 누구누구의 여...라는 식으로 쓰여 있다는 대목에서 딱 멈춰지더라고요. 왜 저 여자들은 이름조차 남길 수 없었나 생각이 들면서 자동적으로 그 할머니가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만일 4·3 다큐를 하게 되면 제주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한 것이 그때였어요. 그 뒤로 4·3사건에 대해 조금씩 공부했죠. 2021년 여름 휴가 때는 제주를 찾아 숙소와 도서관만 오가며 자료에 빠져 지냈어요. 사례사례마다 기가 막혀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22년 제주4·3평화재단의 제작 지원 공고를 보고 기회구나 싶어 지혜원 감독을 설득해 참여를 했습니다. 뒷모습으로, 침묵으로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Q : 김은순, 김용열, 고정자, 홍순공 네 분의 할머니와 중간중간 연구자이자 안내자로 제주4·3연구소의 조정희 연구원이 등장하는 영화 <목소리들>은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는 고발 같고, 절규 같고, 아우성 같은 조은 선생님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살기 위해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에 다가가겠다는 영화의 의지와 선언 같았습니다. 🧶 김옥영 : 2022년 가을에 김경만 감독의 다큐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가 나왔어요. 4.3 당시 형무소로 끌려갔던 수형인 할머니들이 70여 년이 지나 청구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인정받은 내용을 담은 영화인데요. 재판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들이 겪은 삶을 인터뷰로 담아내고 그 사이사이 제주의 풍광을 심리적이고 은유적 이미지로 활용하는 형식이 저희 기획과 똑같았습니다. 심지어는 할머니 다섯 분이라는 숫자까지 같았죠.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런 형식적 유사성은 후발주자에게 극히 불리합니다. 그렇다고 여성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좀더 ‘젠더’적으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Q : 그동안 4·3사건 피해에 대한 조사가 있었지만 젠더적인, 그러니까 성폭력 등의 피해에 대한 증언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 김옥영 : 제주에 소문은 무성했습니다. ‘그랬다더라’는 이야기는 실로 많아요. 문제는 직접 증언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다큐라는 장르가 ‘사실’을 다루는 장르인데 직접 증언이 없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래서 접어야 하나 이러고 있을 때 김은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지혜원 감독은 당시 출연자를 확정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들을 만나보고 있었는데 토산리에서 마을 사람들과 젊은 여자들이 모두 끌려가 죽었을 때 오직 혼자 살아돌아온 할머니가 있다고 해서 찾아간 거죠. 그런데 이 할머니가 칠십 평생 당시의 일을 말씀을 안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4.3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많은 분들이 찾아와 그날의 일도 증언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고 해요. Q :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김 할머니가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는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는데, 보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긴장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 김옥영 : 할머니가 그러니 아드님이 촬영팀의 접근을 무척 경계하셔서 그때도 그저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으로 간 거지 무슨 본격 촬영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간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당시 할머니들을 만날 때 테스트 촬영 겸 촬영감독을 동반하고 다닌 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어요.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키며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떠는 그 모습을 찍어왔는데 영상을 프리뷰하는 순간, 강한 확신이 왔습니다. 이 할머니만 계시면 직접 증언이 없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 말하지 못하는 /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이 직접 증언보다 더 강력한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은순 할머니를 발견한 후에 이 할머니를 중심으로 초기 기획안을 전면 재구성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 할머니의 휴먼 다큐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특정한 스토리가 아니라 4·3 당시 제주 여자들이 보편적으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김은순 할머니 외에 각각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할머니들을 복수의 주인공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가장이 잡혀간 뒤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눈물 흘릴 겨를도 없이 ‘짐승처럼 산 어머니’의 기억을 간직한 김용열 할머니, 철창에 온몸이 찔린 채 살아남은 후유장애인으로 원치않은 결혼을 하고도 평생 물질을 하며 양가를 부양해야 했던 홍순공 할머니, 도피자 가족이 겪어야 했던 설움을 안고 소녀가장으로 안 해본 일 없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온 고정자 할머니가 그렇게 선택된 분들이었어요. 생존 이후가 더 고달팠던 여자들은 왜 피해자가 될 수 없었는가 Q : 겉으로는 편안해 보이셨던 홍 할머니가 시부모님 제사상을 차리면서 건너방에 함께 준비한 친부모님 제사 이야기를 할 때 애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던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울컥하게 되는데요, 영화 <목소리들>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자 성취는 할머니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 그 피해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부분인 것 같습니다. 🧶 김옥영 : 조정희 연구자가 강조한 말이기도 한데, <목소리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재단해왔는지를 드러냅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4.3희생자 범주는 사망자, 행방불명자, 수형인, 후유장애자 이 네 가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성희롱을 당했든, 성폭력을 당했든,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든, 그 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해도 다 해당이 안 됩니다. 더욱이 여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겪어온 고통을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관습적으로 의당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수치심 때문이기도 했고, 한 동네에서도 누가 ‘나쁜놈’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4.3사건 당시 사라진 수많은 남성 사망자의 빈 자리를 여성들이 메꿔 왔습니다. 산의 무장대로부터 주민들을 격리하기 위해 마을을 둘러 성담을 쌓았는데, 남자들이 없으니 여자들의 몫이었어요. 보초도 서고 군사훈련도 받았어요. 남자들이 없는 공간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마을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모두 여자들의 일이었어요. 즉 제주 역사의 한 축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딛고 여자들의 의지와 노동으로 일구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제주 여성들이 죽을 힘을 다해 힘겹게 밀고 끌고 온 시간을 헤아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치유라도 가능할 겁니다. Q : 그 과정에서 조정희 연구자의 안내 덕분에 전체적인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김옥영 : 이 다큐는 증언을 하지 않는 김은순 할머니를 중심에 놓다보니 일반적인 방식과는 좀 다르게 스토리텔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김 할머니가 그날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 놓고 그 의문을 다른 사례들을 통해 추론해가는 구조를 택했습니다. 이른바 논증구조라고 하는 틀을 가져온 겁니다. 사건의 진행을 주욱 따라가는 방식이 아닌,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구축해가는 이런 구조는 논리의 단락과 단락 사이를 잘 연결해주지 않으면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저 이야기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워지거든요. 그래서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안내자로 조정희 선생을 모셔왔어요. 오랫동안 4·3사건 속 여성들의 경험을 추적해 왔던 연구자였기에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셨어요. 특히 후반부에 조 선생님이 말하는 "제주의 할머니들은 4·3의 피해를 어머니, 아버지, 오빠 등 가족의 죽음으로만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기억들은 혼자서 감내해야 할 공포와 수치심이 돼 버렸다. 공허한 눈빛, 긴 한숨, 말라버린 눈물과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여성의 피해를 4·3이라는 국가폭력의 피해 범주에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볼 때"라는 의미의 내레이션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였습니다. 항상 부차적인 존재였던 여자들을 드러내는 ‘1mm’의 힘 Q : 4·3사건에서 묻혀져 있던, 더 정확히는 지워져 있던 여성의 역사를 드러내는 작업에 남다른 사명감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 김옥영 : 이 작업을 준비하면서 기획안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언급했는데요. 전쟁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에서도 여자들의 이야기는 후일담이 나오지 않아요. 4·3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건에서 여자들은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 당해 왔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시대의 움직임이 제게 좀더 직접적으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요구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래 전 통곡하던 할머니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고, 여성의 이름이 지워진 위령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허용하지 않았다면 제가 용기낼 수 있었을까 싶어요. 소수라도 처음에 한 사람이, 그 다음에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내어온 덕분에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진전돼 왔잖아요. 제게 영화를 만드는 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거예요. 누가 봐주든 그렇지 않든 목소리를 내고 누군가 들어주기를, 더 많은 목소리가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관행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 정한 원칙이 있어요. 대신 제게 중요한 건 ‘1mm’예요. 역사를 1mm씩이라도 전진시킬 가능성에 제가 하는 일의 의미가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별다른 흔적이나 파장을 남기지 못할 수도, 때로 1cm를 후퇴할 수도 있지만 1mm의 힘으로 전력투구를 해요. 그것이 영화나 다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변화를 일으키는 시작이기도 하고요. 놀랍게도 요즘 그 믿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며 반짝반짝 빛나는 2030 여성들을 보면서요. Q : 영화로 다시 돌아오면, 안개와 거친 파도 등 제주의 풍경을 다룬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부감으로 보여주는 제주의 밭담은 특히 놀라웠는데요, 그동안 변덕이 심한 기후에 적응해온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빚은 장관으로 알았다가 사실 여성들의 땀과 눈물로 쌓아 올려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 김옥영 : 제주의 풍광 하나하나에도 기억이 녹아 있는 거죠. 제주의 밭담이 성담으로 변하고 성담이 밭담으로 변한 그 과정은 사실 스터디 과정에서 새롭게 발굴한 사실이었습니다. 제주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사연이 바로 이 밭담이 제주 여성의 표상으로 여겨지게 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풍경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타이틀백에 나오는 안개 자욱한 ‘잃어버린 마을’도 그런 곳이에요. 제주에서는 4·3 때 폐허가 된 후에 복구되지 못하고 버려진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하는데 중산간 지역에 꽤 있어요. 4·3의 슬픈 운명을 이곳만큼 오롯이 전하는 곳도 없을 겁니다. Q : 포스터에도 이미지가 있는데, 할머니들이 겪은 당시의 기억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부분도 눈에 띄었어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악 할머니와 ‘미투’ 여성들을 담은 박문칠 감독의 영화 <보드랍게>가 연상되기도 했고요.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 김옥영 : 다큐는 현장을 다루는 것이 기본인데 역사 다큐는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라서 현장이 없다보니 늘 그림이 부족해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이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약화 형식의 그림체를 쓰기가 싫었어요. 4.3이라는 비극적인 사건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러다가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의 목탄 드로잉을 보게 되었는데 딱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드로잉 화법으로 애니메이션을 하는 분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러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미술 작가 한 분을 찾게 되었습니다. 황선숙 작가신데요. 저는 그분에게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상황 설명용으로 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의 말 속에 담긴 정서를 확장해주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구체적 상황 묘사보다 ‘반추상적 표현’을 요청했습니다. 황작가님은 다큐 삽화가 처음이라 어려워하는 지점도 있었지만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면서 작업한 결과,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4월 3일, 동시에 전국 132개 극장에서 수천 명 관객과 만나다 Q : 이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연결된 작업을 한 적은 없으셨어요? 🧶 김옥영 : 2008년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있을 때 김동원 감독의 <끝나지 않은 전쟁>에 작가로 참여했어요. 한국을 비롯해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에 생존해 계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인터뷰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일본이 점령하면서 ‘위안부’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를 발굴해 소개했어요. 당시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이셨죠. Q : 할머니, 가족들도 영화를 보셨을 텐데, 반응은 어떠셨을까요? 🧶 김옥영 : 전주국제영화제 월드프리미어 상영 때 김용열 할머니를 따님이 모시고 왔어요. 이분은 어릴 때 야학이라도 다녀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건 ‘판사라도 되어서 4.3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던, 결기있는 할머니셨어요. 그런데 이분이 GV를 하면서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우시는 겁니다. "어머니가 아무한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해서 평생 4.3 이야기를 못하고 살았는데 영화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그렇게 속이 시원하다"면서 말이죠. 관객 모두가 함께 울었습니다. 11월에 있었던 제주4.3영화제 때는 외지와는 달리 4.3 당사자 분들이라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독과 저는 좀 긴장했어요. 그런데 상영이 끝나고 장내 불이 켜졌을 때 그렇게 까칠했던 김은순 할머니의 아드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우리에게 씩 웃어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김은순 할머니와 홍순공 할머니는 너무 편찮으셔서 못 오셨고 가족분들이 오셨는데, 다들 ‘고맙다’고 해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영화 중 ‘4·3 토산실상기’를 쓰셨던 김양학 할아버지는 영화가 나오기 전에 언제 볼 수 있냐고 계속 전화로 물어보셔서 난감했는데 이때 오셔서 마침내 영화를 보셨죠. 그런데 바로 며칠 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영화를 보여드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지... Q : <목소리들>은 지난 4월 3일 전국 132개 극장, 165개 스크린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기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김옥영 : ‘100개의 극장’ 프로젝트라는 좀 특별한 방식으로 개봉했습니다. 극장에 의존하는 기존 배급 방식이 아니라 관객들이 직접 티켓을 공동구매해서 극장을 여는 방식인데요. <수라>(감독 황윤), <괜찮아, 앨리스>(감독 양지혜) 같은 영화들이 이미 같은 방식으로 개봉해 성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사실 이 영화들은 몇 달 전부터 천천히 상영회를 누적해오다가 관객수가 4,000~5,000명이 되었을 때 개봉한 것이라 저희들과 조건이 달랐어요. <목소리들> 영화의 의미를 살리자면 4월 3일 개봉을 해야 하는데 그걸 결정할 당시가 겨우 두 달 전이었어요. 그럼에도 관객추진단을 모집해 4월 3일 전국에서 한꺼번에 100개의 극장을 열겠다고 선언했는데, 마음 속으로는 안 되면 어떡하나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개봉 지원을 받지 못해 포스터, 웹자보, 보도자료 등도 배급사와 제가 직접 만들어야 했고, 관객추진단 모집하고 홍보하고 지원도 해야 하고, 정말 정신없던 두 달이었어요. 그런데 3월 14일 103개 극장이 확보돼 목표를 돌파했고, 4월 3일 당일은 자체 개봉 극장까지 합쳐 132개 극장 165스크린을 달성하게 된 거죠. 하루 사이 8,084명이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은 짜릿했습니다. 정말 관객이 이룬 ‘기적’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재가 다가올 미래를 도울 수 있도록 Q :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다큐 <목소리들>은 피디님께 어떤 의미인지, 마지막 질문으로 여쭙습니다. 🧶 김옥영 : 지난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에서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우리 사회에 거대한 공명을 일으켰잖아요.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가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만’ 비로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싶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목소리들>을 보고 비로소 4.3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젊은 관객들이 많아 이 영화를 만들기 참 잘했다 싶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개봉이라는 걸 처음 경험하게 해준 작품이고, 내용적으로는 여성을 통해 4·3사건을 조명한 첫 번째 영화를 저희가 만들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 번 밖으로 드러난 목소리는 어떤 외압이 있지 않는 한 쉬이 지워지지 않아요. 저희 영화가 뒤를 잇는 작품들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극장 개봉은 마무리됐지만 공동체 상영은 계속 열려 있으니까 더 많이 봐주세요. 우리의 현재가 미래에는 과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현재도 미래를 도울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 손정미 인터뷰이 : 김옥영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4월 23일 수요일
-
- 2020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1부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추천도서
-
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시리즈는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2권까지 포함하여 총 7권이 발간되었다. 이외에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저, 김정성 옮김, 아름다운 사람들, 2005)와 같이 한 사람의 생애사를 중심으로 출간된 증언집도 있지만,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중에서도 제1권이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한국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다. 이 중에서 2019년 기준, 증언집에 실라자 않았더라도 공개 증언이 확인되는 피해자는 총 183명이다[1]. 183명의 증언 중에 1993년 2월 초판이 발간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19명의 증언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김학순을 필두로 김순덕, 황금주, 이용수, 문옥주, 강덕경 등의 증언이 실려있는데, 이 이름들은 이제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책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더 많았고, 책에는 이름이 가명으로 실려있던 피해자가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앞장선 경우도 있다. 꽤 오래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증언 내용에 집중하느라 본문과 함께 실린 피해자들의 옆모습 사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새삼스레 옆모습 사진이 주는 쓸쓸함이 가슴에 사무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된 1990년대 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집중된 한국 사회의 관심사는 진상규명이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의 "생생한 체험담은 …(중략)…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밝힘으로써 새로운 문서자료의 발굴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책 해설내용처럼, 당시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이들의 생애사로 접근하기 보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집>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증언집의 단점을 보완하여 피해자 각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편집된 것이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 일본군'위안부'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여성과인권, 2004)이다. 단점이 있음에도 굳이, 지금 증언집 1권을 추천하는 이유는 조국이 해방된 지 50여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한 김학순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서 90년대의 우리 사회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했는지, 또 피해자들이 절박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보았으면 해서이다. 각자 원점에서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30여 년의 세월이 피해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2. 일본군 군대위안부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이규태 옮김, 도서출판 소화, 1998.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일본군 군대위안부』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이규태 옮김, 도서출판 소화, 1998)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우리 사회에 수많은 긍정적 파장을 일으켰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김학순이 1991년 12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고 일본에 오기 직전 NHK와 진행한 인터뷰를 듣고 감동하여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요시미 요시아키는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징모에 직접 관여한 사실을 보여주는 공문서를 발굴한 연구자이다. 요시미 요시아키가 발굴한 자료 6점은 아사히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보도 다음 날인 1992년 1월 12일, 일본 정부(총리 미야자와 키이치(宮澤喜一))는 군이 "관여"했음을 공식 인정하는 가토담화를 발표했다. 1995년 4월에 초판이 발간된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 앞서 1992년에 『종군위안부 자료집(従軍慰安婦資料集)』이 먼저 발간되었다. 자료집에는 해제에 갈음하여 「종군위안부와 일본국가」라는 글이 들어 있다. 내용은 총 10장 구성으로 1장 군위안소의 개설, 2장 종군'위안부'의 징집과 도항, 3장 육군 중앙의 군기 유지‧성병 대책, 4장 중국의 '위안부'‧위안소, 5장 필리핀의 '위안부'‧위안소, 6장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위안부'‧위안소, 7장 인도네시아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8장 버마(현 미얀마)의 '위안부'‧위안소, 9장 남서태평양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10장 일본의 '위안부'‧위안소로 되어 있다. 글은 자료의 구성에 맞추어 이에 대한 해설을 겸하고 있다. 다만 『종군위안부 자료집』의 글이 일반 대중이 읽기에 쉽지 않은 전문서라면, 『종군위안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책 중 처음으로 출간된 대중서라고 할 수 있다. 『종군위안부 자료집』과 『종군위안부』의 집필 사이에는 3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종군위안부』에는 자료집에서 다루지 못한 그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책이지만 1995년 8월에 출간된 『공동연구 일본군위안부(共同研究 日本軍慰安婦)』(오오쓰키 서점(大月書店))는 요시미를 비롯한 7명의 저자가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 '위안부 부회'에서 1년 정도 세미나를 한 결과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이때의 연구 결과가 『종군위안부』에 반영되어 있다. 『종군위안부』는 한국에서는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 이규태 번역)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출판되었다. 일본군 위안소‧'위안부' 문제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지는 입문 단계에서 읽으면 좋은 기초 서적이다. 3. 일본군 성노예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 정진성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추천 편집위원 : 김소라(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일본군 성노예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 (정진성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알려진 시기는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 착취된 지 50여 년이나 흐른 뒤인 1980년대 후반이었다. 여성운동의 성장으로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귀와,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생겨난 가운데 많은 피해자, 활동가, 연구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말해왔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고, 활동가들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이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며, 연구자들이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발굴‧해석하며 일본 정부에 대응하고자 노력했기에 우리 사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운동의 역사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04년 출간 후 12년만인 2016년 개정판으로 출판된 『일본군 성노예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은 이 같은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좋은 입문서다. 이 책은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동원한 과정과 사회 구조적 배경, 피해자 증언, '위안부'를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들의 의미 등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내외 시민사회가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소개한다. 특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UN 인권소위원회 위원과 UN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위안부' 문제의 연구와 해결에 참여해온 저자의 경험 속에서 1980년대부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르는 '위안부' 운동이 폭넓게 다루어진다. 한국에서 시작되어 북한, 재외 동포, 일본, 아시아 피해국의 시민과 사회단체가 함께하며 형성된 국제연대, 이 과정에서 여성 인권과 평화구축의 문제로 확장된 의제는 '위안부' 운동의 역사가 단순하지 않으며, 사회운동이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실상을 파악하는 것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갖는 의미를 질문하고, '위안부' 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4. 성노예와 병사만들기 안연선 지음, 삼인, 2003. 추천 편집위원 : 김선미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교육홍보팀장) 『성노예와 병사만들기』 (안연선 지음, 삼인, 2003) 『성노예와 병사만들기』는 중일전쟁기부터 태평양전쟁 기간까지의 위안소 제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여성학자인 저자 안연선은 이 책을 통해 위안소 제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만난 13명의 '위안부'피해자와 일반 사병, 장교, 군의관 등 옛 일본군 출신 생존자들의 구술을 통해 국가 차원, 젠더와 섹슈얼리티 차원에서 나타난 식민주의 권력의 맥락에서 '위안부' 제도를 명료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식민주의와 가부장제라는 특정한 맥락 아래에서 가해 남성인 일본군 병사와 피해 여성인 '위안부'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강요되었는지, 일본의 식민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가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재생산하였는지, 식민지 국가권력과 전쟁 폭력에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위안부' 제도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재)생산하는데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사유한다면 '위안부' 문제와 위안소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위의 책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이 연기됨에 따라 현재는 자료센터를 이용하실 수 없으며, 향후 자료센터를 개관하는대로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이브814 바로가기 각주 ^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2019년 6월 전시
-
-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두 번째 좌담회의 주제는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이다. 2015년의 ‘불가역적 합의’와 『제국의 위안부』사태를 경유하여, 한국 사회에는 일본군‘위안부’ 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군‘위안부’를 다룬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상영이 증가하고, 소설화되는 빈도도 높아졌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도 커졌다. 이번 좌담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연구자들의 고민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회 :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패널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허윤 안녕하세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두 번째 좌담회입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중심으로 좌담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진 <결> 편집위원이고 부산외대에서 재직 중입니다. 참석해주신 선생님들은 중부대 권은선 선생님, 한양대 김청강 선생님, 한예종 오혜진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면 일단 돌아가면서 인사하고, 선생님들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혹은 재현 문제에 대해서 관심 갖게 되신 계기나 이유 등을 자유롭게 얘기해주시면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혜진 저는 한국 근‧현대문학 연구자고요. 주로 식민지기 소설과 비평, 문화론을 공부했습니다. 식민지 문화론을 공부하다 보니,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유독 너무 많이 재현되거나 혹은 거의 재현되지 않는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가 일본군‘위안부’의 섹슈얼리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 텍스트들을 최대한 찾아 구해 보면서, 그것에 개재한 정치적 쟁점이 뭔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이른바 “불가역적 최종합의”, 그리고 박유하 선생님의 저작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뿌리와이파리, 2013)와 관련된 논쟁이 점화되면서 ‘위안부’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대중 서사들도 눈에 띄게 늘어났죠. 이런 상황에서 ‘위안부’의 역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다툰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닐 테고, 더구나 ‘위안부’ 역사에 접근하는 여러 관점,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등을 서로 대치되는 사조들의 경합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재현과 재현물을 향유하는 행위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서 사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재현의 윤리’, ‘재현의 정치’라는 말이 자명한 테제처럼 이야기되는데요. 어떤 소설이나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어긋났다든지 충실하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과연 그 ‘재현의 윤리’란 무엇이고, ‘재현의 윤리’에 충실하기 위해 소설이나 영화는 어떤 관점과 기술, 전략 등을 시도할 수 있는지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김청강 안녕하세요. 저는 한양대학교에 있는 김청강이라고 합니다. 저는 1950~60년대 한국 대중영화를 가지고 박사 논문을 썼고, 그쪽으로 계속 공부를 해왔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의 수면 위로 나온 건 1990년대 이후인데, 우연히 얼마 전에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그 이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의 처음 알게 되었어요. 과거에는 ‘위안부’ 재현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좀 찾아보고, 우리나라에서 재현된 것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재현된 것들도 찾아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좀 많이 발견하게 되었죠. 그래서 논문을 한 편 쓴 거고요(김청강, 「‘위안부’는 어떻게 잊혀졌나?-1990년대 이전 대중영화 속 ‘위안부’ 재현」, 『동아시아문화연구』 71, 2017, 149~193쪽). 방금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도 재현의 윤리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재현의 윤리에 관해서는 '위안부'만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폭력, 식민지 폭력까지 확장해서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재현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권은선 안녕하세요. 권은선입니다. 중부대 연극영화학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역할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앞의 두 분처럼, 저도 '위안부' 문제 전문 연구가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제가 나와도 되는지 조금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전에 ‘위안부’ 영화의 재현과 관련된 논문 2편을 발표해서 이 자리에 저를 불러주신 것 같습니다(권은선, 「일본군 ‘위안부’ 영화의 자매애와 증언 전수 가능성」, 한국콘텐츠학회 논문지 17(8), 2018, 414~421쪽;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의 의미」, 『여성학논집』, 34(1), 2017, 3~28쪽). 그 논문들은, <귀향>(조정래, 2016)을 보고 즉자적으로 몸으로 느낀 불편함과 분노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느낀 그 ‘문제적 관객성’을 영화 안에서의 시각적인 장치의 검토를 통해서 해명해보고 싶었어요. 아울러 그 영화가 구성해내고 있는 ‘위안부’ 이슈에 대한 공통감각과 정치적 효과가 적실한 것인지 규명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고, 그 연장 선상에서 계속 고민하는 중입니다. 허윤 저는 최근 일본군‘위안부’ 재현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2015년 이후에 조정래 감독의 <귀향>(2015), 이나정 감독의 KBS 특집극 <눈길>(2016)이 영화로 편집이 되어서 2017년에 개봉을 했고,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2017),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2018)에 이르기까지 상업 영화로 극장에 개봉한 영화가 4편 정도 되고요. 그다음에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일본군‘위안부’ 쟁점 섹션으로 다뤘었고, 2017년 DMZ 영화제에서 이대 한국여성연구원과 같이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진행했고, 2018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위안부' 기림일 제정을 맞아서 일주일간 특별전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김숨의 소설 연작이 있죠. 『한 명』(현대문학, 2016),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2018)와 증언소설 『(김복동 증언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 『(길원옥 증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현대문학, 2018) 두 편이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찾다 보니까, 지금 문학과 영화 장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소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선생님들 공통으로 <귀향> 얘기들도 해주셨는데, 최근에 일본군'위안부' 재현물의 특징이나 흐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방금 설명한 것처럼 <귀향>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성공을 거두고 관객 수 300만을 넘어섰다는 것이 큰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중요한 일이고 역사적으로 재현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 2015년 이후에 강화되면서 텍스트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치열하게 비평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약간 '재미는 없지만, 만듦새는 훌륭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텍스트'라는 말이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재현한 작품들의 큰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이버 댓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천만이 봐야 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지,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비평하려고 하는 작업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오혜진 '위안부’ 역사가 서사화되기 시작한 게 대략 해방 직후라고 하면,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에 분명 변화가 있겠죠. 최근만 보더라도 확연한 변화가 느껴집니다. 최근 ‘위안부’ 역사를 다루는 대중서사의 공통적인 전제는 이혜령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듯, 일본군‘위안부’를 국가에 신고‧등록된 ‘위안부’ 피해생존자라고 한정하고, 그 연로한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기 전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입니다. 이때 ‘위안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죠.[1] 그런데 실제로 조선인 ‘위안부’의 수는 2만 명 설부터 20만 명 설까지 있을 만큼 그 규모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게 특징인데요. 그렇다면 ‘위안부’의 역사를 산정 가능한 특정 당사자의 문제로 규정하는 발상에는 문제가 있죠. ‘위안부’의 역사를 ‘위안부’였던 이들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 ‘위안부’ 역사를 역사화하는 오늘날의 한 경향이며, 그것의 정치적 효과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현재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산정 가능한 피해생존자들의 문제로 한정하니, 이 ‘피해생존자’들과의 직접적 연결을 강조하는 것이 곧 ‘위안부’ 역사를 다루는 텍스트들에 매우 중요해집니다. ‘위안부’에 ‘빙의’한다거나,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서사를 갈음하는 재현방식이 선호되죠. 그렇게 할 때 ‘위안부’ 역사를 다룬 서사의 당위성과 윤리성이 담보된다고 믿는 경향이 짙어집니다. 이는 비단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광주항쟁 등과 같은 역사적 폭력을 재현하는 최근 대중 서사에서 널리 확인되는 경향입니다. 광주항쟁을 재현해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의 재현전략도 바로 그것이었죠. 이런 재현전략이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이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정치적‧미학적으로 사유하는 최선의 방식인지 질문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런 재현전략이 선호되는 원인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죠. 허윤 선생님의 논문에서 지적된 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폭력을 재현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덜기 위해 당사자들의 재현(증언, 기록)으로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덜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사자들과 윤리적‧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고, 즉 일종의 ‘진정성의 정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요.[2] 또는 반대로, ‘위안부’ 역사를 후대 시민사회의 문제로 사유하기보다는, 지지 가능한 특정 존재를 ‘당사자’라고 규정함으로써 사실 ‘위안부’를 비롯한 식민의 역사를 자기 문제로부터 분리하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각도로 사유하는 게 ‘재현의 정치’를 사유하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식민지기에 ‘위안부’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서사는 거의 없었고, 해방 직후에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으로서 ‘위안부’의 역사를 다룬 소설들이 조금 등장합니다. ‘동네의 아는 처녀가 일본군에게 끌려가 어디에 다녀왔다더라’라는 식이죠. 이때의 화법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빙의하려는 최근 서사의 전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죠. 김청강 저는 과거에 어떻게 재현이 되어왔는가를 조금 살펴봤기 때문에 그 추이를 좀 본다면, 지금은 피해 생존 할머니들이 계시고 그 할머니들이 운동을 사실 꽤 오랫동안 해오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장 안에서 이야기가 되고, 그랬던 것에 비해서 그 이전에, 그러니까 운동화 되기 이전에 '위안부'를 표상하는 것은 사실 피해자의 입장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게 체화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더라고’ 돼있기 때문에, 재현들이 사실은 굉장히 거리감이 있죠. ‘위안부’들이 계속해서 나오기는 하지만, 굉장히 추상적으로 나오는 거죠. 어떤 생생한 피해자로서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 피해를 얘기하지만, 피해자의 목소리는 없는 그런 재현의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영화로는 1960년대에 나왔던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가 '위안부'를 드러낸 가장 첫 번째 영화인 것 같은데요. 이 영화 자체가 굉장히 독특한 영화예요. 1965년에 만들어졌고, 당시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한일 간의 문제, 혹은 식민지에 대한 기억을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이 영화가 나왔습니다. 남자주인공은 버마전선으로 파견된 장교이고, 거기에서 ‘위안부’를 처음 만나요. 그런데 영화에 '위안부'가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위안부'가 나오는 방식이 유엔 마담 같은 미군 ‘위안부’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다 한복을 입고 있고, 민족의 피해자라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에 비해서, 1960년대 영화에는 당시에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위안부’의 모습, 그러니까 미군 ‘위안부’의 모습이 영화에 재현되고 있었던 거죠. 피해자의 직접적인 진술이라든지 증언이라든지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위안부'가 있었고 피해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표현이 돼있지만, 그게 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의 피해를 증언하는 그런 방식과는 대단히 달랐고, 그래서 거리감이 있는 재현들은 쭉 지속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용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그 맥락들이 달라집니다. 일본인이 재현하는 조선인 '위안부'라든지. 1960년대에 스즈키 세이준의 <춘부전> 같은 경우에는, 원래 <춘부전>이 1947년인가? 그때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에 기반한 건데. 거기에선 주인공이 조선인 여성이었죠. 근데 당시에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오락물로 소비되는 맥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성적으로 대상화된 모습으로 나오는 거죠. 일본군 병사의 애인들, 이런 식으로 일본 사회에서 유통되었던 것이 1960년대에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보면 그 주인공이 일본 여성으로 바뀌어요. '위안부'이긴 한데 일본인. 그리고 거기에 조선인 피해 ‘위안부’ 여성이 등장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독특한, 스위칭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이 <춘부전>이 한국에서 <여자 정신대>(나봉한, 1974)라는 영화로 다시 리메이크될 때는 다시 조선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게 또 스위칭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재현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피해자의 목소리라는 것이 증언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의 코드들이 계속 피상적으로 스위칭되면서 만들어졌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거기에 더 진정성이 있거나, 개인의 목소리나 복잡한 목소리들이 들어가 있지 않고, 코드가 스위칭 되면서 순환되는 그런 형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권은선 저는 주로 최근에 생산된 대중영화를 눈여겨보고 있는데요. <귀향> 이후에 눈에 띄는 어떤 특징들이 있습니다. <귀향> 이전에 군 '위안부' 소재를 다룬 대중 서사들에는 일본 군인이나 조선인 남자와의 이성애 로맨스가 반드시 주요 서사적 요소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향> 이후에는 이성애 로맨스가 탈각되고 여성들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이 강조됩니다. 그것은 ‘유령과 함께함’의 형태를 취합니다. 위안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그래서 <눈길>에서처럼 유령이 되어 계속 함께하거나 <귀향>에서처럼 영매와 빙의를 통해 유령을 데려오기도 하고요. 이는 '위안부' 증언 구조의 한 특성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미 죽은 자, 영혼)을 대리하여 증언한다’는 감각입니다. 또 다른 서사적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세대 간 배치의 문제입니다. '위안부' 할머니와 후속 세대 인물 간의 관계, 우정이 서사 장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세대 간 배치는 ‘증언 전수’ 가능성과 후속 세대의 책임의 문제를 함의합니다. <귀향>의 정민(강하나 분) 같은 후속 세대 인물은 그야말로 몸을 내어주는 (빙의) 매개체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눈길>에서 옆집에 거주하는 ‘헬조선’의 소녀나 <아이 캔 스피크>의 구청 직원 청년은, 텍스트 내에서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책임감을 느끼는 후속 세대의 형상화입니다. 그리고 허윤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서사가 지금 대중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열심히 탐색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이는 <귀향>의 360만 관객 동원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장르적으로 보면 <아이 캔 스피크>는 (로맨틱) 코미디의 요소가 강하게 들어가 있고, <허스토리>는 일종의 ‘법정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영화에서 미 하원과 일본 법정에서 수행하는 일본군‘위안부’의 연설 장면은, 마치 1950~1960년대 한국 영화사에 등장했었던 ‘고백하는 여자들’(근대적 여성 주체의 출현)의 귀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귀향>이나 <눈길>이 일종의 고통 전이, 그러니까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빙의되는 감각’ 같은, 시각적‧서사적 장치에 의존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이혜령 선생님이 말씀하신, ‘커밍아웃 스토리’ 이후, 공적인 장소에서의 운동가로서의 일본군'위안부'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대중적인 장르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고, 기존의 축적된 담론을 대중적인 언어로 녹여내려고 하는 것들이, 최근 ‘위안부’ 영화를 둘러싼 흥미로운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청강 허윤 선생님이 최근에 쓰신 논문 제목이 「할머니와 소녀 그 사이의 여성들」인가요? 그 키워드가 보여주는 부분이 굉장히 명백한 거 같아요. 최근의 재현에서는, 운동가가 된 할머니의 삶과 동일시하는 방식 혹은 폭력이 재현됐던 그 순간 소녀들을 재현하는 방식. 1960년대나 그 이후에 재현됐던 건 다 성인 여성들이거든요. 성인 여성들이 주인공을 바꿔가면서 코드 스위칭이 되는데, 그에 반해서 2015년도 이후 최근에는 성인 여성의 경험으로 되는 것보다는 소녀에게 가해진 폭력, 그리고 현재 운동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 이런 것들이 강조되는 측면이 특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윤 30대 이상 세대에게 가장 강렬한 일본군'위안부' 재현의 서사가 <여명의 눈동자>(김종학, 1991)잖아요. 저도 초등학생 때 봤는데, 권은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이성애 로맨스 코드가 굉장히 강렬해서 북한군을 사랑해서 비극적으로 죽는 여자라는 기억만 단편적으로 남아있습니다. 명절에 온 친척들이 다 모여서 <여명의 눈동자> 재방송을 봤던 거예요. 그런데 드라마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채시라 씨가 하얀 조선옷을 입고 처연하게 등장했던 기억만 있습니다. 그때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 아무도 소녀를 떠올리지 않잖아요. 성인 여성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게 세대 감각이 확실하게 있는 게, 20대 친구들에게 일본군'위안부' 표상에 대해 물으면, 100% 소녀상을 떠올리더라고요. 기억이 세대별로 분절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여명의 눈동자>는 1970년대 일간스포츠 연재작이잖아요. 소설은 1장부터 강간으로 시작해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작품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보는 소위 ‘국민 드라마’였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좀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김청강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여명의 눈동자>가 굉장히 충격적인 드라마였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가, 논문을 쓰면서 1편을 봤는데, 1편이 딱 윤여옥(채시라)이 강간당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공공 드라마로, 이렇게 공중파에서 방송이 됐던가. 1990년대 초반의 젠더 감수성이라는 것은 정말 너무 놀라울 정도라는. 그리고 더 이상했던 건 뭐냐면, 저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던 1991년도 이후, 적어도 그게 운동화 되기 직전이지만 그때는 그래도 조금 낫지 않았을까 기대했었거든요. 예를 들어서 1980년대보다. 1980년대는 영화가 너무 에로화됐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 가장 성적으로 착취하는 구도를 가졌던 건 1991년도 작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지영호)였어요. 그 감독 자체도 에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러니까 소재적으로만 가져다가 정말 센세이셔널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가 너무나 명백한 그런 영화였던 거잖아요. 그래서 공개적인 증언이 있었던 1991년도 당시에 ‘위안부’ 문제를 소재적으로 소비했다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어떤 폭력이 있었는가 궁금해하는 이런 식의, 여성들이 어떻게 당했지 그 모습이 어떨까? <여명의 눈동자>도 그런 맥락에서 소비되었을 것 같아요. 오혜진 ‘위안부’라는 역사적 존재가 해방 직후까지 ‘소문’의 대상으로만 전해져왔다면, 1991년 고 김학순 님의 증언은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혔습니다. 그 증언의 장면이 있었기에, ‘위안부’를 ‘말하는 주체’의 형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최초의 미투’였다고까지 이야기될 정도죠. 이 증언을 계기로 수요집회 등 ‘위안부’ 문제를 ‘운동’의 문제로 볼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싸우는 주체’로서의 ‘위안부’ 형상도 등장했습니다. ‘위안부’의 역사를 ‘민족의 수난’이라는 식으로 보던 관점에서 나아가 여성 인권의 문제로 사유하는 경향도 확고해졌죠. 최근 ‘위안부’ 재현 서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변수는 ‘시민사회’인 듯해요. 두 가지 방향인데요. 하나는 ‘위안부’를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를 함께 사는 ‘시민’으로서 그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와 연대하는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영화 <눈길>에서 ‘위안부’는 단지 ‘소녀’나 ‘할머니’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자 다른 동료 시민을 보살피는 이 사회의 ‘어른’으로 등장합니다. 가족과 사회가 방기한 여성 청소년 ‘은수(조수향 분)’를 돌보는 유일한 시민이 바로 ‘종분(김영옥 분)’이죠. 이건 ‘위안부’였던 이들이 사회의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만 재현되던 그간의 경향과 다릅니다. 게다가 여성 청소년 은수는, ‘종분’이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말하는 첫 번째 커밍아웃 대상이죠. 국가와 사회에 대한 ‘커밍아웃’ 전에, ‘종분’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이자 여성 시민인 ‘은수’였어요.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옥분(나문희 분)’이 그저 사회에 숨어 조용히 움츠리고 사는 ‘피해자’가 아니라, 구청에 8,000건의 민원을 넣을 만큼 이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열망이 강한 ‘시민’으로 묘사됩니다. 민원을 넣는 행위는 이 사회의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요. 지금까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숨겨야 했던 것이 이 사회의 편견과 혐오, 불합리한 법과 제도 때문인데도 ‘옥분’이 사회와 제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존재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 캔 스피크>의 핵심 중 하나는 ‘옥분’이 증언할 수 있도록 돕는 구청 직원 ‘민재(이제훈 분)’의 역할이었죠. <허스토리>는 아예 주인공을 ‘위안부’ 피해생존자라기보다 그들의 증언을 돕는 ‘문정숙(김희애 분)과 여성단체들’로 설정했고요. 연대주체로서의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죠. 이런 최근의 경향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위안부’가 경험한 고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그간의 인식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귀향> 등의 사례를 보면, 여전히 ‘위안부’ 역사 재현의 핵심은 ‘위안부’가 당한 고통을 ‘실감 나게’ 재현해서 독자/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는 듯합니다. 이는 손희정 선생님의 언급대로, ‘위안부’ 경험을 가진 이들의 가장 큰 고통을 ‘강간의 고통’으로 고착[3]시키는 남근주의적 발상의 소산일 수도 있죠. 여기서 한나 아렌트가 소개한 루소의 ‘고통과 연민의 원광경’이라는 이야기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루소는 ‘어머니 눈앞에서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아이와 그 광경을 감옥의 창문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켜보는 죄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요. 이 이야기에서 시모코베 미치코는 세 가지 차원의 고통을 읽어냅니다. “찢기는 아이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 자식을 짐승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보고 있는 어머니의 비탄에 찬 고통,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죄수의 고통. 이 중에서 연민compassion의 원형이 되는 것은 세 번째 죄수의 고통이다.” 아랍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오카 마리는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 ‘위안부’ 문제에 대입해서 이야기해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아이가 ‘위안부’이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성노예가 되었던 자신의 고통을 지금 증언하고 있는 생존 ‘위안부’ 여성들”이며, ‘감옥 속 죄수’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고통을 함께 체험하지는 않았고, 그에 대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목격한 증인이 됨으로써 그 고통을 ‘분유’하는 존재. 그렇다면 과거에 ‘위안부’라는 고통의 역사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무력하지만, 대신 그 고통을 ‘분유’해야 하는 존재로서 후대의 시민들이 바로 그 ‘죄수’의 입장에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이해할 때, 사건의 폭력성은 “타자의 고통에 의해 담보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압도적인 무력함, 그 고유의 고통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오카 마리는 말합니다.[4] 저는 이 말을, ‘후대 시민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바로 그 사실 자체가 고통’이라는 뜻이 아니라, 후대 시민들은 그 ‘무력함’을 고통의 역사를 사유하기 위한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그렇다고 할 때, 현재 ‘위안부’ 관련 대중 서사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존재들의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을 재현하는 데에만 주력할 뿐, 그 고통의 역사를 사유하는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과 책무에 대한 상상은 지체돼 있죠. ‘위안부’의 역사를 피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해결”해야 하는(역으로 말하면,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면 종료되는) 문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서 ‘나’의 역할을 성찰하게 하는 문제로서 ‘위안부’ 역사를 상상하는 재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위안부’ 역사 재현의 초점을 그렇게 이동해보면, 그건 ‘위안부’ 할머니에게 빙의하거나, ‘할머니’의 말을 대변한다는 식의 상상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죠. <아이 캔 스피크>는 흥미로운 영화지만,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가난과 고독, 침묵의 원인을 그녀가 ‘가족과 사회에게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민재’와 그 동생이 옥분에게 ‘유사 가족’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끝나죠. 이런 발상은 권명아 선생님 책에 잘 설명됐듯, ‘근친성’ 혹은 ‘육친적 상상력’을 경유해서만 동정과 공감, 연대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5] ‘저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였다고 생각해봐’라는 발상. 그런데 누군가의 ‘할머니’나 ‘엄마’가 아니더라도, ‘위안부’ 피해생존자는 사회의 일원이자 시민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한국 사회 공통의 역사로 올리기 위한 ‘증언’을 한 것이고, 그는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이 사회에 개입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죠. <허스토리> 역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그것은 ‘문정숙(김희애 분)’이라는 영웅적이고 탁월한 개인이 불굴의 의지와 경제력으로 상황을 주도한 덕분으로 묘사됐죠. ‘위안부’라는 존재가 경험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게 급했던 시대, 그것을 ‘민족의 수난’으로만 의미화하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르죠. 달라야 하고요. ‘위안부’ 재현의 초점이 이동하는 것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에 대한 정치화와 재역사화가 필요합니다. 허윤 역사성이 다 소거된 채 언제나 그 시점으로 계속 돌아가는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점이 큰 문제인 것이죠. 각주 ^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읽기」,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18. ^ 허윤, ^ 손희정, ^ 오카 마리,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216~218쪽. ^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한국사회의 정동을 묻다』, 갈무리, 2012.
-
- 2024년 논평 싱가포르 일본군'위안부'들의 침묵에 대한 기록
-
싱가포르 일본군'위안부'들의 침묵에 대한 기록 그동안 싱가포르에는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대만인, 인도네시아 등 타지역에서 끌려온 '위안부'는 존재했지만,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는 없다고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에서는 전후 다른 아시아 국가의 피해 생존자들처럼 증언을 하고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필리핀이나 이웃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자국 출신의 성노예 피해 여성이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그 배경에는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 피해 여성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해 온 정치가 리콴유의 역할이 있었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1965~1990)에 이어 내각 선임장관(1990~2004)까지 지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리콴유의 견해는 싱가포르 내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한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최근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The Comfort Women of Singapore in History and Memory)』을 집필하여 주목받은 싱가포르 난양기술대학교 케빈 블랙번 교수의 기고를 통해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형성된 역사적 맥락과 싱가포르 내 '위안부' 문제의 현황에 대해 짚어본다. 내가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을 집필한 이유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으면 그들의 침묵이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침묵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점령기를 겪은 싱가포르 여성들의 기억에는 일본군이 '위안소'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불렀던 공간에 끌려가 성노예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새겨져 있다. 침묵의 벽 2000년대 초, 나는 난양기술대 산하의 국립교육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역 사회를 대상으로 대규모 구술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나 증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가까운 동성 친구, 자매, 사촌, 이웃들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그들이 아는 피해 여성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어떻게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납치된 후 위안소로 보내져 성적인 노예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다시 20년이 지나 그 여성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그들의 존재와 삶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과거 인터뷰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자신의 과거를 나서서 밝힌 여성이 있었더라도 정의 구현과 배상을 받았으리라 확언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 여성들 역시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배상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설득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딜레마였다. 1990년대 싱가포르 정부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 듯 보였으며, 그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 정부의 입장은 싱가포르 내 '위안부'는 한국인과 일본인이었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위안부' 논란을 싱가포르와 관련이 없는 논쟁적인 역사 문제로 보았고, 이를 싱가포르 내부에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 이런 태도는 2013년 한국의 피해 생존자들이 싱가포르 내 예전 위안소 자리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하려 했을 때 불허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싱가포르 국립아카이브 구술사센터가 1981년부터 수집한 방대한 일본군 점령기 구술 기록 중에는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의 증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술사 연구자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이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014년 세인트 앤드루스 중등학교의 학생 200명이 수행한 대규모 구술사 프로젝트에서도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이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을 거부했다. 1990년대에 영자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스(Straits Times)>의 팬밍옌, 말레이어 신문 <베리타 하리안(Berita Harian)>의 하니 무스타파, 중문 신문 <연합조보(Lianhe Zaobao)>의 훠유에웨이 등 기자들도 이 여성들을 찾았지만 침묵의 벽에 부딪혔다. 여성들은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고자 했고, 성적 과거를 공공의 판단에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남겨진 증언들 싱가포르 출신의 '위안부'들이 죽을 때까지 지킨 이 침묵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이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볼 방법은 있다. 싱가포르 국립기록원(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에 이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남긴 증언을 통해서다. 젊은 여성들이 성폭행 당하고 집에서 끌려간 뒤에 위안소에서 성 노예로 전락했다는 놀라운 구술 증언도 있다. 국립교육원의 구술사 컬렉션에는 일본군에 점령된 상태였던 1942년 당시 25세였던 주부 웡와이콴의 증언이 있다. 그녀는 세랑군 지역의 테라스 하우스에 두 자녀와 살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놈들 말이야, '일본 귀신들(日鬼. 일본군)' 말이야, 진짜 사람도 아니었어. 젊은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남의 집에 함부로 막 들어오고, 길 가는 애들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잡아갔다니까. 글쎄, 중국에서처럼 애들을 겁탈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어. 운 좋은 애들은 며칠 만에 풀려나긴 했는데, 얼굴이 넋 나간 것처럼 변해 있더라고. 어떤 애들은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군대 기지로 끌려가서 '위안부'가 됐다는 얘기도 들었어. 그래도 다행인 건, 결혼한 여자들은 거의 안 잡아갔다는 거야. 우리 시누이가 그때 18살이었거든. 아직 어리고 예쁘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왜놈들 손아귀에 넘어갈까 봐 옆집 총각이랑 급하게 결혼시켰잖아. 불쌍한 우리 시누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억지로 결혼해서, 결혼식도 제대로 못 올리고…. " (국립교육원 구술사 컬렉션의 웡와이콴 증언) 한편, 강제로 끌려가지 않고 저항한 여성의 증언도 있다. 광둥 출신의 '고급' 창부였던 호콰이민의 구술에 따르면, 일본군은 중국인 협력자와 함께 차이나타운에 있는 그녀의 성매매 업소에 찾아와 자신과 또 다른 '고급' 창부에게 '위안부'가 될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호콰이민은 자신이 속해 있던 성매매 업소 주인 '마담'의 도움을 받아 두 명의 '하급' 창부들에게 자신을 대신해 가도록 설득했다. 대신 끌려간 두 여성은 나중에 말라야의 위안소가 있던 군기지에서 폭발 사건이 발생하자 혼란한 틈을 타 도망쳐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차이나타운에서는 50명의 '고급' 광둥계 창부들이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으며, 그 중 20명은 말레이의 타이핑으로, 30명은 태국으로 보내졌다. 지역 주민 구술사 인터뷰는 '위안부'들이 있었던 위안소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역 증언들은 일본 군인들이 회고록에 남긴 증언과도 일치한다. 싱가포르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위안부'들의 존재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 여성들이 침묵한 배경은 전후 초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싱가포르에 있던 일본인과 조선인 출신 '위안부'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들은 과거를 숨기고 본국의 가부장적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구술을 보면 '위안부' 이력을 끝까지 숨기는 데 성공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역 출신 싱가포르 여성들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쉽게 과거를 숨길 수 없었다. N.I. 로우와 H.M. 청이 1947년에 출간한 일본 점령기 관련 초기 저서 『이 싱가포르 [우리 도시의 끔찍한 밤] (This Singapore [Our City of Dreadful Night])』에는 인도네시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가 싱가포르로 돌아온 지역 '위안부'들이 느낀 두려움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1946년 3월 6일, 일본의 패망 6개월 후 15명의 소녀들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이들은 자바에서 4년 가까이 '위안부'로 지냈다. 이들 중 한 명은 부두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에게 '아버지가 저를 받아줄까요?' 라고 물었다."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들은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성매매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전쟁 전보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어났다. 일부는 거리에서 성매매를 했고, 이들의 존재는 시민들의 눈에 쉽게 띄었다. 영국 식민 정부는 이들을 체포해 소녀직업훈련학교로 보내 가정부나 재봉사, 또는 가정주부가 될 수 있도록 교육했다. 영국군 군정과 초기 사회복지부의 기록에는 이 과정이 문서화되어 있다. '재활'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은 과거에 대해 침묵을 지켰고, 만약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면 곧바로 배척당했을 가부장적 사회에 재통합되었다. 1950년에 이르러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는 공적 논의와 식민지 정부 및 사회복지부의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1991년 12월,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논란이 되면서 이들은 다시 공론의 장에 등장했다. 기자들이 '위안부'의 존재 여부를 묻기 시작했으나 누구도 피해 생존자를 찾아내어 증언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1992년 2월, 싱가포르 전 총리이자 내각의 일원이었던 리콴유는 일본의 청중들에게 한국인 '위안부'들 덕분에 '싱가포르 소녀들이 정조를 지켰다'며, 싱가포르 여성은 '위안부'로 동원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처럼 싱가포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며 나섰던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랐다. 한국에는 강력한 페미니즘 운동과 비정부조직들이 있어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정의 구현과 배상 요구를 지원하고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정부나 사회 모두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공감이 거의 없었다. 강력한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취약한 시민 사회로 특징되는 싱가포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운동 조직이나 비정부기구들에 의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은 사실을 밝힐 경우 가부장적인 싱가포르 사회에서 성매매와 관련된 낙인이 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싱가포르 정부의 태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 첫 번째 소녀상을 세우고 난 뒤, 싱가포르의 과거 위안소 자리에 두 번째 소녀상을 세우고자 했을 때도 잘 드러났다. '위안부' 문제가 엄격하게 통제된 싱가포르 시민 사회에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워 소녀상 설치를 전면 불허한 것이다. 2013년 1월 30일의 이 불허 결정은 싱가포르의 국가 문화 유산 기관을 감독하는 정부 부처인 문화·지역사회·청년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싱가포르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자국의 시민 사회에 들여오지 않으려는 의도만은 분명했다. 과거 위안소로 쓰인 상가 건물, 최초로 보존 대상으로 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와 역사 유산 관련 영역에서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국가 통제 하에 있던 싱가포르 방송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전쟁 일기 (War Diary)>에 처음으로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가 등장했다. '위안부' 역할은 떠오르던 배우 피오나 시에가 맡았다. 2002년, 청팍옌 박사는 자란 주롱 케칠에 위치한 자신의 진료소이자 과거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이 예전에 위안소로 사용됐다는 이유로 보존 대상으로 지정받는 데 성공했다. 청 박사는 유산 관리 기관에 제출한 신청서에 1930년대에 그의 가족이 지은 연립 상가 건물이 위안소로 쓰였던 점을 강조했다. 건물 일부가 과거 위안소였다는 이유로 보존 대상으로 선정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같은 해, 말라야 지역의 '위안부'의 삶을 묘사해 크게 호평받은 말레이어 연극 <내 인생 이야기(Hayat Hayatie)>는 현지 '위안부'를 다룬 첫 번째 연극이었다. 2010년대와 2020년대에 접어들며 거의 모든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대중의 관심은 지속되었고 이는 문학 작품에도 반영됐다. 2019년 리징징은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를 주제로 한 소설 『우리는 어떻게 사라졌는가(How We Disappeared)』를 출간해 큰 찬사를 받았다. 또 2023년에는 나의 책 『역사와 기억 속의 싱가포르 위안부 여성들』이 싱가포르 도서상 비소설 부문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싱가포르인들은 특히 청팍옌 박사의 과거 가족 소유 상가가 있는 자란 주롱 케칠과 같은 싱가포르 내 위안소 유적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유명 유산 해설사 크리스 응은 이런 위안소 유적지를 포함한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성산업 역사와 홍등가를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 전문가인 그는 해외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인들은 또 서울 외곽에 위치한 '나눔의 집'과 같은 '위안부' 관련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앞으로 싱가포르에도 (공공 장소에는 불가하겠지만) 소녀상이 세워질 것이다. 아마 매주 시위가 열리는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는 달리 조용히 기념할 수 있는 구석진 곳에 설치될 것이다. 청 박사의 상가 건물과 같은 사유지에 세워질 가능성이 높으며, '위안부' 박물관이 설립되거나 기존 박물관에서 '위안부' 관련 전시를 확대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자 하는 싱가포르인들은 실제로 해외로 나가고 있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 점차 확산되는 '위안부' 유산 활동 결론적으로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풀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싱가포르 '위안부'와 관련된 많은 역사적 자료와 존재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있고,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싱가포르의 '문화와 유산' 활동에서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에 점령당한 아시아 국가들처럼 증언에 나서는 이는 없다. 이는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들의 침묵은 그들이 살아온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와 엄격하게 통제된 시민 사회를 유지하려는 싱가포르 정부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제사회에 나타난 '위안부' 논란이 싱가포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아 왔다. 만약 싱가포르 출신 '위안부'가 정의 구현과 배상을 요구하며 나섰다면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성매매와 관련된 낙인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당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피해 여성들은 침묵을 선택한 것이고, 이러한 결정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소설, 드라마, 유산 투어, 박물관 전시와 같은 대중문화와 유산 활동을 통해 기릴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점차 확산되고 있다.
-
- 2020년 인터뷰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인터뷰
-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함께 과거 일본의 침략를 경험했던 나라다. 그렇기에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위안부’라는 슬픈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조사와 지원은 한국만큼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연구자다.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게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와 조사의 진행 상황, 그리고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위해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를 물어보았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Q.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독자를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입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독립적으로 조사하는 사람이에요. 1992년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대외적으로 처음 밝힌 일본의 고이치 기무라(Koichi Kimura) 박사와 협력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Q. 선생님과 고이치 기무라 박사님께서 함께 쓴 책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는 일전에 웹진<결>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활동 혹은 연구를 하게 되신 계기가 따로 있었을까요?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계기는 1999년 자카르타의 <Internews> 라디오 기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요,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욕야카르타(Yogyakarta) 법률구조단의 부디 산토소(Budi Santoso) 씨를 만났어요. 그때 처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저는 ‘위안부’ 피해자인 마르디엠(Mardiyem)에 대한 취재 기사를 작성했는데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상징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녀가 바로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의 주인공입니다. 당시에 썼던 취재 기사는 인도네시아 전역 50개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지요.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한국의 웹진 <결> 독자를 위해 당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가 어떠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인도네시아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위안소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는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아체(Aceh)에서부터 동쪽 끝인 파푸아(Papua)까지 널리 분포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국토 중 동부 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위안소에는 특히 한국과 타이완에서 온 여성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요.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는 등급별로 구분되어 배치되었는데, 흰 피부를 가진 인도네시아 북부 술라웨시(Sulawesi) 머나도(Manado)출신의 인도네시아 여성과 중국계 여성, 그리고 네덜란드계 여성들은 일본군 장교들 몫이었습니다. 반면에 갈색 피부를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Java) 출신 여성들은 계급이 낮은 일본군들에게 할당되었지요. ‘위안부’들 나이는 16세에서 25세 정도였고, 그중에는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지기까지 Q.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였나요?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졌습니다. 신문기자인 조코 산토소(Joko Santoso)가 일본군‘위안부’로 감금되었던 숙모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언급했어요. 그의 숙모였던 투미나(Tuminah)는 중부 자바, 솔로(Solo) 지역에 후지 여관(Fuji Ryokan)이라고 이름 붙여진 위안소에서 3년 6개월 동안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해요. 조코 산토소는 본인이 속한 수아라 머르데카(Suara Merdeka) 신문에서 1992년 7월 16일, 7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숙모의 ‘위안부’ 사연을 기사화했죠. 기사를 본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그의 부인인 평화 운동가 옥초 기무라(Okcho Kimura) 씨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직접 만나면서 처음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사 결과는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소개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되었죠. 1993년 일본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Nichibenren) 소속 5명의 변호사가 자카르타 법률구조단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착취당한 희생자들을 위한 손해배상 문제가 제기되었죠. 일본 변호사들의 방문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생존해 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끝까지 파악하겠다는 당시 인도네시아 사회부 장관인 인텐 수웨노(Inten Suweno)의 성명으로 이어졌습니다.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밝혀졌을 때 사회적 반응은 어떠했나요? 당시 사회부 장관이었던 인텐 수웨노의 성명은 1993년 4월 20일, 머르데카(Merdeka) 일간지에 게재되었고, 성명에 따라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어요. 1945년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래로 반인륜적인 ‘위안부’ 문제가 한 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가져다주었죠. 사회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비정부기구인 자카르타 법률자문단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노무동원 피해자들의 등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본 등록 업무는 욕야카르타 법률구조단으로 이관되었고요. Q. 등록을 받은 결과는 어땠습니까? 1993년 4월 29일부터 1993년 9월 14일까지 등록을 받은 결과, ‘위안부’ 피해자 1,156명과 노무동원 피해자 17,245명의 인적 사항이 확인되었어요. 그리고 1995년 아시아 지역 보상을 위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희생자연합 국제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 of Asia Pasific War Victims Organizations Claiming for Asia Compensation)에 인도네시아가 가입한 후, 1996년 일본군 보조병인 헤이호(Heiho‧兵補) 출신 연합이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받았는데 그 목적은 일본군 침공에 따른 아시아-태평양 지역 희생자 개인별 보상 약정(Agreement Individual Compensation for Asia Pacific Victims of Japanese Aggression)에 따른 인도네시아 희생자들의 보상 추진이었습니다. 1996년 3월 30일에 마감을 통해 ‘위안부’ 피해 여성 19,573명이 등록하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개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도 공식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한 사실에 대해 경악과 충격, 부끄러움을 표했지만, 일본 정부와의 조화로운 협력 관계를 우선시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노력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학교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Q.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의 상황은 어떤가요? 앞서 말씀드린 일본 변호사연합회(Nichibenren) 인권위원회의 자카르타 법률구조단 방문 이후, 법률구조단은 ‘위안부’ 현황 조사와 등록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시기에 법률구조단은 인도네시아부인회(회장: 누르샤바니 캇자숭카나(Nursyahbani Katjasungkana)와 반 여성적 무력 반대 포럼(Forum Resistance Military Against Women. 의장: 고이치 기무라 박사)과 연계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대신한 제소를 준비했고 많은 변호사가 재판에 참석했습니다. 본 연계 활동은 결속력 있게 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국민 여론에 영향을 주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006년에 법률구조단의 몇몇 분과 저,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카르타에서 ‘위안부’ 연대(JAJI)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부 자바 지역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활동을 하다가 본 연대는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가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를 결성하게 됩니다. 본 연대의 조직은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과 지원을 원하는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어요.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Q.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관장하는 특별기구나 단체가 없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이하 JSII)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하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 출간, 사진전, 회화 전시회,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여론 형성을 위한 기자 초청 간담회 등을 개최하고 있어요.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JSII는 지금도 계속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께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의 유품을 다수 보유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유품들을 갖고 계시는지요?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에 찾아가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점령기 때 만들어진 유물이나 만행의 장소들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생각하지 못한 인도네시아 ‘위안부’ 관련 물품들을 접할 기회도 있었고요. 예를 들면 일본군 술병, 도자기 잔, 탄피, ‘위안부’들이 입었던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 치마, 신발 가방, 모자, 의료 기구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물품은 ‘위안부’용 의료기구예요. 이 의료기구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2년도예요. 중부 자바, 암바라와(Ambarawa)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헤이호 출신인 사르무지(Sarmudji) 씨가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에게 보여준 사진에서 처음 보았죠. 그 사진에는 1992년에 찍은 손잡이가 달린 철제 의료기구, 유리로 만들어진 주사액 3병, 2개의 낡은 붕대가 찍혀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위안부’용 의료기구는 수라바야(Surabaya)에 있었던 위안소에서 헤이호 출신 친구가 가져온 것을 사르무지 씨가 인수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사르무지 씨가 당시 집을 수리하느라 이 의료기구가 집 안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찾지를 못했어요. 사르무지 씨가 밝히기를 어떤 일본인이 찾아와 본 의료기구들의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어요. 2004년에 저는 사르무지 씨를 다시 만났고 그제야 일부 파손된 ‘위안부’용 의료기구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르무지 씨는 기꺼이 이 역사적인 유물들을 저에게 넘겨주었죠. Q. 비록 서면을 통한 인터뷰지만, 성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앞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다양한 활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국제적인 호응과 협력을 얻기 위한 ‘소녀상’ 설치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캠페인 전개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낍니다. 저도 이에 힘을 받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 대만, 미국, 독일, 일본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위안부’라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간의 협력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했던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상호 지원과 협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대한 압박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치적으로 촉구하는 국제 운동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가 함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동 세미나 개최, 책자 발간, 영화 상영,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협력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현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한국의 다양하고 활발한 사회 운동은 큰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끝으로 인도네시아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참상을 한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알릴 기회를 마련해 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